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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이성연 교수를 그리며
김호웅(연변대학교 교수)
청송컵 백일장을 두고 몇 글자 쓰자고 보니 이성연 교수의 인자한 얼굴과 조용한 목소리가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하다. 몇 해 전 병환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메일로 병문안을 했으나 회신이 없는지라 여러 번 전화를 했었다. 역시 통하지 않았다.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지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일절 회신도, 통화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썩 후의 일이다. 철새처럼 해마다 봄이면 연변을 찾아오던 이성연 교수가 영영 하늘나라 사람이 되다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이성연 교수를 처음 뵌 것은 1990년대 초반인데 여럿이 앉은 자리라 별로 대화도 나누지 못했었다. 1996년 여름인가, 그 때 연변대학교 사범학원 원장을 지냈던 김병민 현임 연변대학교 총장께서 조문학부 학부장으로 있던 필자와 고 최용린 교수를 불러놓고 조선대학교의 후원으로 청송컵 백일장을 펼치게 되었으니 잘 해보라고 부탁을 했다.
오후 조문학부를 찾아온 한국 손님을 보니 다름 아닌 이성연 교수였다. 그때로부터 이성연 교수는 백수인 교수 등과 함께 해마다 청송컵 백일장 심사차로 연변을 찾았다. 어느새 우리는 그야말로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다. 이성연 교수는 동안(童顔)에 날씬한 몸매인데 비해 백수인 교수는 중키에 미남이었으나 머리에 흰서리가 내려서 오히려 형벌되는 사람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성연 교수는 오히려 필자보다 서너 살 선배이고 백수인 교수는 필자와 동갑이었다. 약주를 즐기는 대신 말수가 적은 백수인 교수와는 달리 이성연 교수는 약주는 한두 잔 정도밖에 하지 않았지만 조곤조곤 재미있는 유머를 구사해서 좌중을 즐겁게 했다.
한 번은 가을철에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가 지프를 타고 천리림해(千里林海)를 굽이굽이를 자아 내려오는데 단풍이 든 백두산은 그야말로 거대한 칠색치마를 두른 것 같았다. 이성연 교수가 “우리가 지금 백두 여인의 속살을 헤집고 어디로 가는 거지?” 하고 우스개를 했다. 귀국할 때면 우리가 으레 “이삼일 더 놀다 가시지요.” 하고 인사를 하면 “뭘요, 가는 손님은 뒷꼭지가 예쁜 법인데요” 해서 우리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특히 시상식을 할 때면 고금중외 위인의 일화를 가지고 청소년 수상자들에게 영원히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나폴레옹의 일화나 라파엘로의 일화는 너무도 재미가 있어 나는 내 글에 슬쩍 써먹기도 했다.
청송컵 백일장은 10회를 하고 한 단락 마무리를 지었는데 연변지역의 백일장 가운데서 가장 수명이 긴 셈이었다. 조선대학교 쪽 총장님이 바뀔 때마다 이성연 교수와 백수인 교수가 천방백계로 설득을 해서 이어나간 줄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청송컵 백일장을 통해 수많은 신동(神童)들을 발견했고 글짓기 명수들을 키워냈다. 제1회 청송컵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이영실씨는 지금 연변의 명문 연변제1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수로 일하고 있고 우수상을 받은 이해영씨는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청도해양대학교에서 한국어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이성연, 백수인 교수는 연변 현지에 와서 한글의 불씨를 심는 작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교의 우수한 청년 강사들을 조선대학교에 데리고 가서 박사로 키워주었다. 현재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원 부원장으로 일하는 이봉우씨도 이성연 교수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신문학과 학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서옥란씨도 이성연 교수의 문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백수인 교수의 문하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영근씨는 광동외어외모대학교(廣東外語外貿大學校) 한국어학과 학과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중국 경내 한국학 교수와 연구의 중심 멤버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기실은 필자 자신도 이성연 교수의 신세를 많이 졌다. 서울에 갈 때마다 이성연, 백수인 교수를 뵈러 전남 광주 쪽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두 분은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이 동료교수들을 한 구들 불러놓고 진수성찬으로 대접해 주었다. 한 번은 내자와 함께 내려갔더니 이성연 교수는 사모님까지 모시고 나와 전남의 맛스러운 한식을 대접해 주었고 우리 부부를 위해 무등산 산중턱에 있는 호텔을 잡아 주기도 했다. 어느 나라 대통령도 묵어갔다고 하는데 밤에 창가에 서면 불야성을 이룬 광주시가 한눈에 깔려보였다.
필자의 내자는 연변대학교 중앙도서관 연구관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성연 교수는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 관장으로 부임하자 특별히 필자의 내자를 초청해 견학을 시켰고 부부 동반으로 제주도까지 구경시켜 주었다. “연변에서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키는 사람이니 칙사대접을 해야지요.” 하고 이성연 교수는 신바람이 나서 안내를 하고 명승고적에 깃든 일화들을 들려주시더란다.
앞에서 잠간 이야기했지만 이성연 교수는 이봉우씨에 이어 서옥란, 신철호씨를 제자로 받아 키워주었는데 실은 이봉우씨와는 한 단락 오해와 마찰이 있었다. 이성연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요, 교회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 지도자인데 그는 이봉우씨를 보고 교회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권유를 했었다. 허지만 성미가 직방배기인 이봉우씨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중국공산당 당원입니다. 교회에는 나갈 수 없습니다.” 라고 물리쳤다고 한다. 그 뒤로 이성연 교수와 이봉우씨는 알게 모르게 간격이 생기게 되었고 이봉우씨는 이성연 교수가 자기를 너무 쌀쌀맞게 대해준다고 생각하고 학업을 중도이폐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때로부터 한두 해 지났을까? 이성연 교수는 국제전화로 김선생의 제자 한 사람 추천해 주면 책임지고 박사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이봉우씨의 일로 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나는 석사학위를 받고 우리 학과에 갓 취직한 서옥란씨를 추천했고 그녀는 3년간 이성연 교수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무난히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한편 이성연 교수는 연변에 올 때마다 이봉우씨를 찾았고 막내동생처럼 이봉우씨를 아끼고 보듬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봉우씨의 부탁을 받고 흔쾌히 신철호씨를 제자로 받아주기도 했다. 오늘도 이봉우씨는 “날마다 이성연 교수께서 선물한 전기밥솥으로 지은 따뜻한 쌀밥을 먹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당돌했는가를 참회하게 됩니다. 참 훌륭한 인격자였지요.” 라고 말한다.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은 지극한 동포애, 오만과 독선이 아니라 언제나 깊은 자기 참회와 낮은 자세로 남을 섬기면서 다가오는 이성연 교수,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성연 교수가 더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이성연 교수의 정성과 지혜가 깃들어 있는 청송컵 백일장, 이 자그마한 솔씨가 다시 10년을 기약하면서 연변땅에서 낙락장송으로 커가기를 빈다.
2010년 7월 6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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