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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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칼럼]사랑과 믿음의 기적
2019년 12월 05일 08시 59분  조회:1211  추천:0  작성자: 김호웅

나는 《민중의 벗― 정판룡교수》를 쓴 후 《림민호평전》을 펴내면서 정판룡선생이 림민호 교장을 많이 닮았고 림민호 교장은 쏘련의 저명한 교육가 마카렌코선생과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카렌코(1888-1939)는 쏘련의 불량아 보호시설 원장으로 3천여명의 불량아들을 사회의 유용한 인재로 키워낸 유명한 교육가이다. 그는 교육의 뿌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라고 인정했고 “훌륭한 아이도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 금세 어린 야수가 된다”, 청소년들에 대한 “신임, 그것은 으뜸가는 중요한 법률”이라고 했다. 그의 교육소설 〈탑 우에 휘날리는 기발〉(1938)을 보면 ‘악마’와 같은 부랑아와 비행소년들을 ‘천사’로 키워낸 과정, 특히 이 교육시설에 숨어있는 ‘악마’ 이고리 체르냐빈을 ‘천사’로 전변시키는 과정은 오늘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림민호 교장이 1928년에서 1932년까지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공부했으니 마카렌코의 사상과 철학을 배웠을 것이고 후에는 그의 소설들도 읽었을 것이다. 림민호 교장이 큰 사랑과 믿음으로 북만에서 물 첨벙 불 첨벙 찾아온 열일곱살의 홍안의 소년 정판룡을 큰 인물로 키워낸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정판룡선생을 두고 여러 편의 글을 쓰면서도, 더더구나 좋은 소재 하나를 손에 잡고서도 당사자가 생전이라 쓰지 못했다. 그 이야기인즉 이러하다.

어느 날 아침, 정판룡선생이 댁에서 양치질을 하는데 조용히 출입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하고 문을 따주니 얼굴이 퉁퉁 부은 남녀 두 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니 덮어놓고 넙죽 절을 한다.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일인지 이야기부터 해봐.”

그제야 남학생이 고개를 들고 정판룡선생을 쳐다보다 말고 쿨쩍거린다.

“선생님, 제가 혜자와 좋아하는 사이인 줄 아시지요?”

“그래, 조금은 알고 있지.” 하고 정판룡선생이 허허 웃는데 이 자식이 다시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서

“저의 불찰로 혜자가 아이를 뱄어요. 이 일을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혜자라는 녀학생도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더니 고개를 폭 숙인다.

“어허, 이런 녀석들을 봤나? 이런 녀석들을! 난 1, 2절 강의가 있어. 그러니 저녁에 다시 와.” 하고 정판룡선생은 가방을 들고 나갔다. 남학생의 이름은 진수, 대가집 도련님처럼 이목구비가 수려한데 연변예술계의 거목 박선생의 아들이다. 혜자는 진수가 남몰래 좋아하는 녀학생인데 예쁘장하게 생겼고 공부도 썩 잘했다. 정판룡선생은 혜자가 임신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온종일 강의에 여러가지 사무를 처리하고 저녁에 댁으로 돌아올 때 정판룡선생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잠간 잊고 있었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두 녀석이 또 넙죽 절을 한다. 정판룡선생은 너무 억이 막혀 한참 창 밖을 보다 말고 물었다.

“진수, 이 일을 아버님께서 알고 계셔?”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그럼 혜자는?”

혜자는 진수를 흘깃 건너다보더니 빌빌 울기만 한다. 정판룡선생은

“에끼 못난 녀석들!” 하고 픽 웃더니

“진수는 아버님께도 귀뺨을 맞을 각오를 하고 이실직고하란 말이야. 저 강건너에 진수네 고모님이 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자네 아버님께 말씀을 드릴 터이니 일단 혜자를 고모님네 댁에 맡기는 거야. 거기서 애를 낳고 1년간 있다가 돌아와 복학을 해요. 진수는 그냥 여기 남아 공부를 하란 말이야! 이 일은 나만 알면 됐어.” 라고 했다.

정판룡선생의 하늘같은 음덕으로 무난히 세상에 나온 진수와 혜자의 아들이 연변1중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청화대학을 거쳐 미국에 가서 석, 박사학위를 받더니 유명한 국립연구소에 취직했다고 한다. 진수선생네 내외는 그 아들 덕분에 여러 번 미국나들이를 했고 슬그머니 아들자랑을 하며 다녔다. 언제인가 진수선생이 나를 보고 “호웅씨는 정판룡선생과 같은 훌륭한 어른을 지도교수로 모셨으니 얼마나 좋겠어!” 라고 하면서 정판룡선생 덕분에 아들을 보게 된 일을 이야기한 적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에피소드를 〈정판룡, 우리 모두가 그이를 그리는 까닭〉이라는 글에 쓰고 그 초고를 진수선생에게 보였더니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결코 자랑거리가 아닐세. 호웅씨도 알지만 우리 집사람은 좀 예민한 편이거든. 제발 그 장면만은 빼주게!” 하고 신신당부를 하는지라 하는 수 없이 빼고 말았다…

각설하고 로신선생도 말했지만 “교육의 뿌리는 사랑에 있다.” 젊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이 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경사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는 만나기 쉽지 않다(经师易遇,人士难遇). 즉 경서의 자구(字句)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만 제자에게 공정한 도의를 가르치고 사람이 가야 할 옳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의 인격과 장끼를 인정하고 그 소중한 싹을 키울 줄 모른다.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젊은이들을 요구한다. 젊은이들은 실수하고 사고를 치기 마련인데 오늘의 교육시스템에서는 단 한번의 실수나 사고로 일생을 망치기 십상이다.

문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좀 마카렌코나 림민호, 정판룡 선생과 같이 젊은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고 키워주는 아량과 지혜를 보여줄 수는 없을가? 한번 실수하거나 사달을 쳤다고 해서 단매에 때려눕힐 게 아니라 회과자신할 기회를 주는 게 어른이나 지도자가 할 일이다. 인간은 시련 속에서 자라는 법, 순탄하게 자란 애들보다 오히려 유명한 장난꾸러기나 애군이 그 어떤 계기, 또는 훌륭한 어른을 만나 대성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기 때문이다.

량산박의 영웅들이나 청석골의 영웅들을 보시라. 그들은 생김새와 성미도, 무예와 재능도 각각 달랐다.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면서 제각기 자기 솜씨를 보였다는 말도 있지만, 다 같이 호랑이를 잡았으되 무송과 리규 역시 성격이 판판 달랐다. 소심한 무송은 술 열여덟 사발을 마시고야 산에 올랐다. 하지만 리규는 아예 범의 굴에 들어가 박도를 쥐고 한잠 늘어지게 자면서 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이러한 다양한 개성의 인간들을 존중하고 묶어세우는 게,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가슴을 터놓고 의 좋게 지낼 수 있는 ‘산채’를 만드는 게 멋진 지도자의 재능이요, 리더십이라고 하겠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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