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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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유적]십만 무사의 원혼이 서린 법원사(法源寺)
2011년 02월 01일 11시 42분  조회:3942  추천:37  작성자: 김호림

  북경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법원사(法源寺)가 별안간 물망에 떠오른 건 불과 10년전의 일이다. 대만 작가 리오(李敖)의 북경 법원사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되면서 여론이 흡사 도가니처럼 끓어올랐던 것. 책 북경  법원사는 금세 낙양의 종이처럼 귀한 몸이 되었으며 지어 법원사는 한때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은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법원사 앞을 지난 거리에는 길손이 드물었다. 홀연히 길가에 나타나는 운동장 크기의 빈터 그리고 거기에 웅기중기 모여앉아 땡볕을 즐기는 동네노인들이 사뭇 이색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그림의 뒤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불호(佛號)를 일필휘지로 날린 가림 벽이 마치 무대배경처럼 등장한다. 도심에 묻혀있는 고찰은 그렇게 불문(佛門)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미리 선()의 오묘한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찰이지만 입장권을 파는 건 여느 관광지와 다름없었다. 법원사에 어떤 볼거리가 있는가  하고 지폐장과 함께 물음을 창구에 넣자 곧바로 날아오는 대답이 그야말로 우문현답이 아닌가 싶었다. "그거야
들어가 보면 알거 아뇨?"


 
대개 사찰에서 첫손에 꼽히는 건물은 대웅보전이다. 법원사의 대웅보전에는 청나라 건륭(乾隆)황제가 하사한 친필 글의 편액 법해진원(法海眞源)이 걸려있다. 당초 옹정(雍正) 11(1733) 하사한 사찰 이름인 법원사의 함의를 설명하는 편액이다. 카메라를 드는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의공(義工) 아줌마가 이를 저지한다. 사찰 전내의 촬영은 일절 금지라는 것이다. 답사를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고 겨우 한 컷 찍을 수 있었다.


 
그러든 말든 법원사 제일의 명물은 이 대웅보전 보다 절 한가운데의 전각인 민충대(憫忠臺)가 아닌가 한다. 지금은 관음전으로 개명한 이 전각은 사찰을 세우기 전 최초로 제사를 지낸 곳이었기 때문이다.


 
원일통지(元一統志)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정관(貞觀) 19(645) 고구려의 전쟁에서 숨진 장사(將士)들을 추모하기 위해 어령(御令)을 내려 이곳에 사찰을 세우게 했다. 민충대가 바로 그가 이때 제사를 지낸 자리라고 한다. 민충대는 지금은 볼품이 없지만 당나라 때에는 7 3층으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이세민이 이 사찰을 세우려 한데는 항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숨어있다.


 
정관 19년 봄, 이세민은 삼군을 인솔하여 동쪽으로 진군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출정 전에 지금의 북경인 유주(幽州)에 군대와 군량을 집결한다. 전쟁이 발발한 후 반년이 지난 가을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에 패배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유주를 지난다. 구당서(舊唐書) 따르면 이세민은 이때 유주에서 군사들에게 큰 잔치를 베푼다. 마침내 이곳에서 퇴각을 멈추고 전패로 흐트러진 군심을 수습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세민은 배를 타고 오늘의 제2순환도로 북쪽 호성하(護城河)인 패하()를 오르내리면서 원정에서 실패한 울적한 심정을 달랜다. 이때 문득 강기슭에 전원풍경의 마을 하나가 그림처럼 나타났다는 것이다. 푸른 나무 잎사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초가, 미풍에 실려 오는 향긋한 벼 향기 그리고 수면에 무시로 춤추듯 뛰어오르는 물고기는 말 그대로 이색적인 남방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세민은 저도 몰래 배를 멈추고 강기슭에 오른다. 북방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마을풍경이 있다니그는 신하를 불러 마침 부근을 지나는 백발 노옹에게 고장 이름을 묻게 했다. 노옹은 그들이 황제 일행인줄 알고 제꺽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기지(奇智)를 드러낸다. 그는 황제의 수심어린 용안이 활짝 피어나도록 용왕님이 행차한 마을이라는 뜻의 용도촌(龍到村)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 용도촌은 훗날 이를 도()를 같은 중국어 발음의 길 도()로 바꿔 용도촌(龍道村)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강기슭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은 이세민에게 더구나 요동 땅에 버리고 온 전몰자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세민은 유주에 불쌍하게 여길 민()자를 넣은 충렬사를 세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중원의 장사(將士)들을 기리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충렬사가 바로 민충사이며 바로 지금의 법원사이다. 법원사는 이로써 북경 성내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정작 유주에 사찰이 세워진 건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696년이었다. 이세민의 며느리인 측천무후는 집권한 후 시아버지의 못 다 푼 비원을 풀기 위해 이 사찰을 세우도록 했던 것이다. 그때 어명으로 지은 이름이 민충사인 것이다. 민충사와 유사한 이런 사찰은 이세민의 동쪽진군 연선에 여러 개 되는 걸로 알려진다. 고구려전쟁에서 당나라 군대는 손실이 막대했던 것이다

  어찌하든 민충사는 당나라 유주성의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민충사는 절도사 안록산(安綠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시기 순천사(順天寺)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유주는 안록산과 사사명이 절도사로 임직하고 있을 당시 그들의 본거지였다. 안록산과 사사명은 민충사의 동남쪽과 서남쪽에 각기 보탑을 세우는 등 민충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와 이어진 민충사의 기연(奇緣)은 이때까지 끊어지지 않은 듯하다. 훗날 안록산의 반란군은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다가 요충지인 동관(潼關)에서 토적(討賊) 부원수 고선지의 부대에 저격당하는데, 고선지는 바로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 당나라의 유명한 장령이었던 것이다. 바로 동관의 전투가 있은 후 고선지는 무단으로 작전지역을 변경했다고 그를 황제에게 무고(誣告)한 환관의 모함을 받아 처참하게 참수된다. 사찰에 막연하게 잇닿아있던 고구려의 연줄은 이로써 끝내 비운의 막을 내렸다. 사찰 앞에 있던 두 보탑도 그로부터 수백년 후 드디어 유주 대지진 때문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 후 민충사는 요나라 때는 대민충사(大憫忠寺)라고 개명하며 명나라 때는 숭복사(崇福寺)라고 불리다가 청나라 때 법원사로 개명되어 지금까지 쭉 불려왔던 것이다.


 
전각 앞에서 핸드폰으로 어딘가 통화하고 있는 젊은 스님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알고 보니 사찰에서 불교공부에 정진하고 있는 스님이었다. 사찰에는 일찍 1965년 중국불학원이 설립되어 많은 젊은 승려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스님과 사찰 얘기를 나누고 싶어 법원사에서 어느 게 제일 유명한지 알려 주세요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역시 우문현답인가, 젊은 스님의 단마디 대답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물음들을 몽땅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버리게 한다.


  "
모두 당나라 때 만들어진 거죠. 죄다 유명해요."


 
보아하니 젊은 스님은 부처님만 유일한 관심사인 듯 했으며 정작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연원이나 변혁 같은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속세의 인간에게 실상이 아닌 잡다한 허상에 욕념을 갖지 말라고 선()의 화두를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법원사에 있던 많은 보물은 세월의 풍운변화 속에서 전쟁과 인위적인 파괴로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최초의 당나라와 요나라 시기의 건축물은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현존하는 사찰 규모도 썩 훗날인 명나라 때 비로소 형성된 것이며, 당나라나 요나라 때에 비해 훨씬 줄어든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사찰에는 아직도 여러 조대의 불상과 비석, 법기가 적지 않다. 부동한 풍격의 이런 유물은 시공간을 타고 넘어 당시의 정경을 희미하게나마 더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찰 내의 보전마다 향불의 연기가 그물그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상 앞의 누런 방석에 꿇어앉아 절을 올리는 신도들이 연기 속으로 마치 실루엣처럼 보인다. 천년전 전몰자의 원혼을 위해 제를 올리던 당나라 황제도 저 연기 속에 현신하여 그때의 정경을 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법원사는 천여 년 동안 여러 조대를 걸치면서 굵직한 사연들을 적지 않게 기록하고 있었다. 북송의 황제 흠종(欽宗)은 포로로 잡혀 북방으로 끌려갈 때 바로 이 사찰에 한동안 연금되어 있었다. 금나라 대정(大定) 13(1173), 사찰은 책문(策問)하는 여진족 진사(進士)들의 시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산해관을 수비하며 청군(淸軍)과 싸웠던 명나라의 유명한 장령 원숭환(袁崇煥)의 시신은 이곳에 운구 되었으며 사찰의 스님이 그를 위해 법사를 치렀다고 한다.


 
사찰을 감도는 독경소리가 누군가의 애잔한 흐느낌처럼 허공에 잔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쩐지 산해관 너머 원혼으로 사라진 전몰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침울한 심정이다. 그래서 여느 신도처럼 불상 앞에 향불을 피우고 한동안 그린 듯 처연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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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5 ]

5   작성자 : 유감
날자:2011-02-21 19:45:49
고선지는 명망높은 장군이였지만 결국 주인을 잘못 만나서 헛고생한 비운의 장군입니다. 이런 사례는 근대 중국혁명에 공로를 새운 많은 조선지사들의 운명과도 같지요. 민생단조작에서 죽은 열혈지사들은 또 얼마였구요. 토끼를 다 잡으면 개를 가마에 앉힌다던가, 유감의 역사입니다.
4   작성자 : 박초란
날자:2011-02-07 07:10:55
새해에도 건강, 건필, 건승 하이소.
3   작성자 : 박천
날자:2011-02-01 16:24:41
김선생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올해에도 좋은글 많이 쓰십시오.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2   작성자 : 김호림
날자:2011-02-01 12:28:16
현재 연재되고 있는 간행물 코너의 저작권 문제로 일부 내용을 삭제했고, 기사와 관련한 사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적에 감사합니다.
1   작성자 : 탐독
날자:2011-02-01 12:19:21
김호림님,수고하십니다. 글에다 사진을 곁들이면 금상첨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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