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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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구려장성, 삼백리를 이은 천년의 물음표 댓글:  조회:4369  추천:35  2009-12-08
장성하면 십중팔구는 진시황이 쌓았고 명나라때 보수했다는 만리장성을 뇌리에 떠올린다. 발해기슭의 산해관(山海关)으로부터 서북지역의 가욕관(嘉峪关)까지 장장 6000여킬로메터 이어진 만리장성은 우주선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인공축조물로 소문을 놓을만큼 세상에 이름이 자자한 고대유적이다.막상 천리밖의 연변에서 만리장성은 세상 저쪽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장성이 바로 마을뒤산에 있다는건 더구나 황당한 렵기 자체로 비쳐지는것이다. 연길 동북쪽의 광흥촌(广兴)에서 만난 왕씨 성의 촌민은 아예 살다가 별꼴 다 보겠다는 기색이였다.“아니, 그게 어떻게 우리 마을에 있지요?” 진짜 수림에 들어가서 꼬리달린 물고기를 찾고 강물에 들어서서 네발가진 짐승을 찾는 사람을 만나면 그런 표정을 지을가싶다.우리는 잠깐 할말을 잃고 농가 마당에 어정쩡하니 서있었다. 북산 꼭대기에 둔덕처럼 높이 솟은 봉화대가 무덤덤하게 마을을 내려다보고있었다. 봉화대에 철심처럼 박혀있는 송신탑은 말 그대로 천년전 하늘에 뭉게뭉게 피여오르던 연기를 세상 저쪽으로 말끔히 밀어버리고 있는것 같았다. 문물지(文物誌)를 비롯한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연길지역의 옛 장성은 서북쪽 팔도(八道)향의 쌍봉산(双凤山)과 태암(台岩)촌의 평봉산(平峰山), 동북쪽의 청차관(青茶关)을 거쳐 바로 도문시 장안진의 이 광흥촌 북산을 지난다. 이 옛 장성은 만리장성과 천리 너머 상거한건 물론이요, 형태도 전혀 달라 아무런 련관이 없는것으로 알려진다. 또 잔존한 성벽의 상당부분은 자칫 길게 뻗은 흙무지나 돌무지 정도로 오인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봉화대이면 몰라도 장성이 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듣는다는것이다.“혹여나” 하고 무척 우려되였지만 장성 흔적은 의외로 북산에 적지 않았다. 0.5~1메터 높이의 토성은 군데군데 끊어지면서 산등성이를 따라 마을동쪽의 욕지산(浴池山)까지 이르고있었던것이다. 욕지산 산정에는 아직도 옛 초소자리와 건물자리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성벽은 동쪽으로 부르하통하를 건넌후 더는 보이지 않고 나중에 계림(鸡林) 북산의 봉화대에서 맥이 끊어지고있었다.화룡시 서성(西城)의 이도구(二道沟)에서 시작되는것으로 알려진 옛 장성은 이처럼 연길동쪽의 하룡촌 부근에서 끝나며 전 구간을 걸쳐 무려 150킬로메터에 달한다. 현지의 일부 산악인들은 동쪽으로 20킬로메터 정도 떨어진 곡수(曲水) 부근의 산마루에서도 망대 흔적을 발견, 이를 장성의 련속으로 보고있지만 장성이 거기까지 이어져 있다는건 아직까지 고고학적으로 확증된바 없다.뒤이야기이지만 현지에서 장성이 있다는걸 알고있는 사람은 학자나 일부 산악인을 제외하고도 적지 않았다. 룡정시 세린하촌에 살았던 김무석씨가 바로 그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뒤산에 있는 토성이 바로 장성이라고 로인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면서 이 토성은 산등성이를 타고 마을북쪽의 동불사쪽으로 갔으며 초겨울 나무잎이 다 떨어지면 산우에 토성의 륜곽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한다.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동불사의 장성이 관선(官船)과 사수(泗水) 지역을 지나 팔도로 이어진다는것이다. 그가 말한 “토성”이 바로 옛 장성 줄기의 일부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를 안내하여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김무석씨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나중에 탄식을 락엽처럼 련방 떨어뜨렸다. 이전에 땔나무 등 람벌로 벌거숭이로 되였던 산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있었던것이다. 빼곡한 수풀속에 묻힌 장성은 그야말로 강물에 떨어뜨린 바늘을 찾기나 다름없었다.장성은 이곳에서 그때 그 이야기로 남았지만 그렇다고 옛 기억을 죄다 지워버린게 아니였다. 세린하부근의 지명에 사진처럼 그대로 찍혀있었던것이다. 바로 서남쪽의 룡정과 화룡의 접경지에 “장성촌(长城村)”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장성촌서쪽의 산에도 성벽은 없고 돈대만 홀로 남아있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돈대는 수십메터의 둘레에 높이가 3,4메터나 되여 멀리서도 금세 눈에 띄였다. 장성의 일부 구간은 이처럼 성벽이 아닌 돈대와 망대, 봉화대 등으로 이어지고있었다.장성은 장성촌에서 계속 서남쪽으로 화룡의 약수동(药水洞)과 룡문, 장항(獐项)을 차례로 지나며 이도구의 동산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토성의 흔적을 보이고있었다. 사실 이도구남쪽 팔가자의 서산에서도 망대 등의 군사시설이 발견되였으며 이때문에 현지에서는 또 장성의 서쪽 끝머리를 팔가자 부근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나오고있었다.하긴 장성이라면 모두 평지를 최대한 성안에 넣고있는게 특점이다. 적군에게 산을 넘어 대렬을 정돈할 여지를 주지 않고 또 곡물이 산출되는 그 땅을 지키자는게 목적이기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장성이 투도(头道) 벌을 품에 안은 팔가자의 서산까지 련결된다는 설에는 신빙성이 없는게 아니다.이러니저러니 연길, 도문, 룡정, 화룡 등 지역을 아우른 150킬로메터의 옛 장성은 지면조사에 한정되고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문헌적인 고증이 없었기때문에 상당기간 확실한 축성년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발해시기 중경과 동경을 수비하기 위한 군사시설이였으며 그후 동하국시기에 계속 사용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 금나라시기의 장성이라는 설도 있었다. 1986년, 연변박물관 고고학자들이 청차관 부근의 장성 돈대 단면에서 목탄표본을 채집, C14 년대측정을 진행한 결과 1580±75년전(수륜교정)으로 수치를 얻었으며 이로부터 고구려때 축성된 장성이라는 주장이 우세하게 되였다. 연변지역은 고구려가 일찍 BC 28년 북옥저를 멸하고 책성을 설치, 북옥저에 실질적인 지배를 해왔기때문이다. 따라서 옛 장성은 고구려가 4,5세기 북부 읍루세력의 침입을 방어하고 북옥저에서 고구려세력의 통치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쌓은것으로 보인다.솔직히 고구려 150킬로메터의 장성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거창한 규모에 전혀 비길바가 아니다. 또 장기적인 수비를 위한 견고한 방어선이라기보다 변방의 성곽들을 련결하는 보조시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변에 현존하는 최대의 유적으로서 사상 전대미문의 방대한 군사시설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어마어마한 이런 시설은 약 2백년후 동북땅에 또 하나 나타난다. 고구려 영류왕(荣留王)이 당나라의 진공에 대비하여 16년간 부여성(지금의 농안부근)부터 시작하여 서남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던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남자들은 모두 장성축조공사에 나가고 녀성들이 밭갈이를 하였다. 천리장성은 규모나 형태가 연변 3백리의 옛 장성과 류사한걸로 분석된다. 마찬가지로 천리장성을 축조할 때의 상황은 150킬로메터의 옛 장성 토목공사에도 엇비슷하게 벌어졌으리라고 짐작할수 있다.미상불 이 옛 장성은 나중에 제구실을 하지 못했거나 인력과 물력만 소모한 “치레거리”에 지나지 않았나싶다. 장성에서 량군이 싸웠다는 기록은 사서에 전무하며 또 장성의 바깥쪽 전연요새로 주장되는 오호령(五虎岭)산성이나 송월(松月)산성 등 고대성곽에도 전투기록은 발견되지 않고있기때문이다. 산등성이에 피페한 언덕으로 서있는 장성유적은 어쩌면 력사에 글 한줄 바로 남기지 못한 아쉬움 그 자체가 아닌지 모른다. 그나마 유적지에 가까스로 담겨있던 옛 기억은 후세의 무심한 인간들에게 간간이 토막나고 있었다. 언제인가 계림의 북산을 오르던 산악인 리승희씨는 봉화대를 파는 도굴군을 발견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그게 무덤이 아닙니다. 괜히 헛수고를 하지 마세요.”그러나 도굴군은 도무지 미덥지 않는 눈치였다는것이다. 길가는 나그네가 싱겁게 도굴을 념려해서 거짓말을 하는줄로 알았던 모양이다.장성 성벽 역시 무지한 도굴군의 파괴에 못지 않게 개간의 보습에 찍혀 동강이 난 곳이 한두 곳 아니다. 또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적으로 끊어져 없어진 성벽도 적지 않다. 특히 하천류역의 평지에는 성벽이라곤 거의 꼬물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 잔존한 성벽은 아직도 몇리씩 되는게 여럿 있으며 또 일부 성벽은 높이가 몇메터나 되는 등 그제날의 모습을 더듬을수 있게 한다.장성의 그러한 참모습을 찾기 위한 사학자와 산악인들의 답사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내처 끊어지지 않고있었다. 와중에는 이도구부터 계림까지 장장 몇백리를 주파한 괴력의 인물도 있다. 이처럼 어려운 노력임에도 불구, 기점과 종점마저 어딘지 왈가불가 론쟁이 많은 등 장성의 일부 구간은 여전히 혼선을 빚는다. 일명 변장(边墙)이라고 불리우는 훈춘 경내의 옛 장성과 한데 련결하여 고구려 400킬로메터 장성이라고 하는 설도 등장하고있다.그야말로 150킬로메터의 옛 장성은 한마리의 신비한 룡처럼 머리와 꼬리는 물론 몸통의 일부까지 숨기고있었다. 한쪼각 두쪼각씩 일부나마 세상에 드러나고있는 옛 기억의 편린들… 어쩌면 연변의 산과 들에 그려진 이 미스터리의 거대한 유적은 선인들이 후세에 남겨놓은 천년의 타임캡슐이 아닐지 모른다. 중국국제방송국   김호림 기자
4    어곡미(御谷米), 두만강 기슭의 전설 댓글:  조회:3707  추천:77  2008-12-07
 천평벌은 길림성 용정시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두만강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옛날 개척민들은 물 좋은 고장을 찾아다니다가 맑은 샘물이 솟는 펑퍼짐한 곳에 이르면 샘물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고장 이름도 자연히 샘 “천(泉)”, 버덕 “평(坪)”을 달았던 것. 천평이라는 지명도 이렇게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길림성 연길에서 떠나 용정을 거쳐 천평(泉坪)벌의 하천평(下泉坪) 마을에 도착하는데는 한시간 정도 걸렸다. 하천평은 60여가구, 170여명 인구를 가진 자그마한 동네였다. 승용차는 달구지 길을 간신히 비비고 지나 마을 귀퉁이에 있는 빈터에 멈춰 섰다. “어곡전”이라는 글을 새긴 돌비석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어곡미가 나는 논이 바로 여깁니다.” 안내를 맡은 오정묵(남, 53세)씨가 이렇게 소개했다.    “별로 이상한 데가 없어 보이죠. 그래도 임금에게 천거된 땅이랍니다.”   푸른 논을 애정에 잠겨 응시하는 오정묵씨는 완연 시골 나그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사실 그는 농부가 아니라 용정시 현지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의사이다, 일찍 연변의학원(대학)을 졸업하고 WHO 산하의 세계전통의학과학원 박사학위를 획득한 그를 진짜 시골의 농부와 한데 이어놓기 힘들다. 그러나 농부의 자식이었던 그는 땅에 대한 애착을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생활로 어느 정도 생활이 부유하게 되자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몇년전 하천평의 땅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마지막 부의황제가 먹던 쌀이 여기서 났다고 해요. 그래서 바로 여기다 하고 기어이 살 작정을 했어요.”    그때는 마침 부근 종이공장의 오염으로 농사가 잘 안되고 쌀도 잘 팔리지 않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땅을 사는데 그리 힘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연일가? 계약서를 체결한 바로 이듬해 정부에서는 농업세를 줄이는 정책을 출범했고, 환경보호부문의 간섭으로 오염문제가 해결을 보았다. “어곡전”이 주인을 만나자 하늘도 이를 알아준 모양이라고 동행한 인부가 너스레를 떤다.    빈터의 귀퉁이에는 10여미터 높이의 백양나무가 아스라이 서있었다. 동네의 “당수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인데 수령이 100년 정도 된다고 한다. 어곡미가 난다는 “어곡전”은 바로 “당수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당수나무는 동네보다 어곡전을 지키는 수호신인 듯 했다. 어곡전 논배미의 일부는 시멘트로 반듯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구경꾼들을 배려한 주인의 자상한 마음씨가 엿보였다.    우리가 논에 다가서자 논물에 금세 푸드득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논에 있던 물고기들이 놀라서 도망치는 소리였다. 이어 개구리가 풍덩풍덩 물에 뛰어들어 적이 놀랐다. 오염에 찌들어 개구리 소리가 사라진지 오랜 시골에서 진짜 희한한 풍경이었다. 화학비료를 일절 쓰지 않고 유기농법을 하고 있단다. 어곡전의 윗쪽 논에는 잉어, 아래쪽 논에는 게를 넣었다고 한다.    사토질의 이 땅에는 자연재해가 적고 다른 지역보다 날씨가 따뜻하며 무상기가 140일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불과 0.6정보의 이 논은 어딘가 다른 땅이었다. 부근 논들은 검은 색의 흙이었는데 임금의 수라상에 쌀밥을 올렸던 이 논만은 유독 누르께한 색의 땅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쌀은 다른 논에서 나는 쌀보다 맑고 향기가 진하며 점착성이 강하고 영양분이 많이 들어있어 그 맛이 진짜 일품으로 전해진다.    어곡전은 말 그대로 천혜의 땅임이 틀림없었다. 어곡전은 왼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었고 오른 쪽에는 국사령(國師嶺)을 두고 있었으며, 뒤에는 선구(船口)산성을 업고 있었고 앞에는 군산(群山)이 춤추고 있었다. 풍수학적으로 좌청룡, 우백호, 현무, 주작이 골고루 갖춰진 셈이었다. 더구나 어곡전 뒷켠의 국사령은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들고 두만강의 물을 마시려고 하는 형국이었다. 두만강은 또 항간에서 “황제의 강”이라고 불리는 등 역사적인 무게를 어곡전에 실어주고 있었다. 조선 이씨왕조의 시조 이성계, 청나라 왕조의 시조 누르하치의 탄생 전설이 대를 이어 두만강 지역에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임금의 수라상에 어곡미를 올린건 부의황제가 첫 사람이 아니였다.  어곡미는 일찍 발해의 왕이 즐겨먹던 쌀이었다고 한다. 옛날 이곳은 버들이 방천을 이루고 인적기가 드물었다. 늪에서 피어난 연꽃 향기는 먼 하늘의 천궁까지 풍겼다. 천녀는 그 향기에 취해 지상에 내려오며, 이곳에 살던 부지런한 총각과 연분을 맺는다. 옥황상제는 천녀에게 볍씨를 주어 총각과 더불어 벼농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이 들(논)에서 난 백옥미는 천녀가 가져온 쌀이라 천녀의 부드러운 살결처럼 희고 맑았으며 향기 또한 천녀의 체취처럼 그윽하고 감미로웠다. 한입 건너 두입 소문이 자자한 노송의 백옥미는 드디어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게 된다.    임금은 백옥미를 맛본 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쌀을 다 먹어보자면 크게 심어야 할 것이로다.”    사람들은 하늘의 은혜를 입어 벼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이 논을 “하늘의 복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금은 또 이 “하늘의 복판”을 지키기 위해 뒷산에 둘레가 4천미터나 되는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수백년 세월 속에 노송은 상전벽해의 개벽을 맞는다. 천평벌을 지키고 섰던 선구산성은 어느덧 폐허로 사라지고, 산 아래의 동네도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청나라 시기 천평벌은 또 봉금(封禁)정책으로 200년간 더구나 인적이 드물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조선 북부의 이재민들은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기재에 따르면 연변경내의 수전농사는 1868년부터 두만강 기슭의 조선족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천평일대에는 20세기 초에 수전농사가 시작되었다. 천평벌이 “어곡전”으로 소문을 놓게 된 것은 천평벌에 벼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함경도 길주에서 살던 농부 최학출이 1935년 남부여대 하고 두만강을 건너 천평벌의 하천평에 자리를 잡은 후부터였다.    최학출은 모를 일찍 내는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해 냈다. 당시에 소문을 놓은 “유지(油紙) 온상 육모법”, 말하자면 오늘의 비닐박막 온상육모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 유지제품이 없어서 콩기름을 바른 크라프트지를 모상판 위에 덮어주어 모판의 온도를 높이고 이로써 벼모가 빨리 자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학출 농민의 밭에서 자란 벼는 소출이 높았고 또 밥맛이 좋아 점차 소문을 놓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간도총사령부를 통해 만주국(僞滿洲國) 정부에서 알게 되었다. 만주국에서는 최학출에게 황제의 수라상에 올리는 “어곡미” 생산을 위임했다.    어곡전에서 마을 처녀들은 하얀 버선을 신고 모를 냈고, 가을이면 하얀 장갑을 끼고 가을걷이를 했다고 전한다. 달거리가 온 처녀들은 이런 대오에서 단연 제외되었다고 한다. 어곡전 주변에는 마을의 개나 돼지가 아예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어곡전은 탈곡도 맨 먼저 했고, 쌀을 찧은 후에는 판 위에 한줌씩 올려놓고 귀가 떨어졌거나 색이 이상한 것은 알알이 골라냈다. 이어 하얀 옥양목으로 만든 주머니에 포장하여 황제에게 진상하였다.    훗날 최학출은 황제에게 진상한 이 “어곡미”의 덕분으로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에 상경하여 포상금과 시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토록 소문난 어곡미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맛보기에는 판판 부족이다. 재래식 자연농법을 쓰고 또 땅이 한정되다보니  1년 소출이 3t 미만이기 때문이다. 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 지금 어곡미는 1㎏에 100위안(약 1만 3천원)이라는 고가이지만 그래도 금방 동이 난다고 한다. 어곡전 주위의 쌀도 “어곡미”의 명성에 힘을 입어 쌀 가격이 껑충 뛰어 올랐다.    어곡전의 주인인 오정묵씨는 여기에 만족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어곡전 민속마을”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쌀을 생산해서 팔기만 하던 재래의 원시농법을 개변해야 한다는 것. 한두 뙈기의 땅을 떠나 마을 전체인 하천평을 생태관광의 모델 마을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라고 한다.   “시작하고 보니 일이 점점 커지네요.” 오정묵씨는 자조삼아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지금 그가 하천평에 사놓은 농가만 해도 십여 채가 된다. 인제 어곡전 부근에는 바야흐로 민속농가, 박물관, 도서관, 농업과학연구소 실험기지 등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빈 터에 닦은 광장과 무대 등 하천평촌은 동네 귀퉁이에나마 민속마을의 추형을 갖춰가고 있었다. 옛날 임금의 수라상에만 오르던 어곡미의 전설은 인제 민속마을의 브랜드로 되어 두만강 기슭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    천년 고성의 슬픈 이야기 댓글:  조회:3308  추천:110  2008-06-27
천년 고성의 슬픈 이야기 김호림   흥안고성은 현지의 동네이름으로 명명된 옛 성곽인데,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시의 북쪽 외곽에 위치한 걸로 알려져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뜻밖에도 흥안고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옛날 고성 성터에 세워졌던 표지판은 개발의 붐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현지인 황종림(49세)씨는 기재가 잘못 된 게 아니냐고 재삼 묻는다. 그는 소꿉시절부터 이곳에서 자랐지만 옛 성곽이 있었다는 얘기는 난생 처음 듣는다고 말한다. 혹여나 해서 흥안향 정부청사 부근의 노인활동센터를 찾았더니 한담을 즐기던 노인들은 도리어 엉뚱한 질문을 던져온다. “이봐, 자네가 말하는 성터란 게 뭔가?”   아닌 게 아니라 흥안향의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성벽 비슷한 둔덕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풀처럼 일떠선 아파트들이 땅 위에 슬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도 흥안고성과의 인연은 쉽사리 끊을 수 없나 보다. P교수가 사그라졌던 불씨를 다시 지펴줬던 것이다. 모 역사연구소 전임 소장이었던 P교수는 연변의 고대 성곽 연구에서 권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흥안고성 말인가? 바로 3호선 버스 종착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네.”    필자가 고령의 노인에게 안내 부탁을 드리기 어려워 머뭇거리는데,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3호선 버스의 종착역은 도시의 북쪽 끝자락이었다. 이쯤부터 건물들이 자리 나게 줄어들고 밭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내에서 빠져나온 연길-도문 도로는 낮은 비탈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내처 뻗어가고 있었다.   요금을 지불하느라 택시에서 잠깐 지체하는 사이, 길옆을 기웃거리던 P교수는 어느 결에 손에 기와조각을 들고 있었다. 잠시 후 보니 그건 네모무늬의 붉은 암키와였다. 흥안고성에서 발견되는 이런 기와와 노끈무늬의 기와는 집안현의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동류의 유물로, 색깔이나 무늬, 두께, 무게가 모두 일치한 걸로 알려진다.   흥안고성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형국으로 남부와 서남부는 주민구역이며 서쪽에는 북남 방향으로 연집강(煙集江)이 흐른다. P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차에서 내린 곳은 바로 흥안고성의 동북쪽 각루자리라고 한다. 연길-도문 도로는 바로 고성의 동쪽 변두리를 뭉텅 잘라내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각루자리에는 높이가 1.5미터 되는 작은 둔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벽돌담이 일어선 이곳에는 기와조각을 제외하고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대로 서쪽에는 연집강 강변으로 이어진 흙길이 있었다. 밭들 사이에 난 이 흙길은 이웃 지경보다 조금 더 높았는데 바로 흥안고성의 북쪽 성벽 자리라고 한다. 기재에 따르면 이 북쪽 성벽은 길이가 374미터에 달한다. 서쪽 성벽은 연집강의 물에 밀려 말끔히 사라졌는데, 500여 미터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흥안고성은 둘레의 길이가 약 1,800미터로 중급 규모의 평지성이었다.   그러고 보면 연길-도문 도로를 달릴 때마다 흥안고성을 지나는 셈이었다. 그러나 누군들 대로 옆의 수수한 흙길이 바로 천년 성벽 자리인줄 상상조차 했을까. P교수에 따르면 흥안고성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현재 한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현지에서 고성을 잘 모르고 있는데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성터인 밭에는 황소 한두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한가롭게 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 밭갈이를 하지 않은 밭두렁에는 기와조각들이 자갈처럼 흔하게 널려 있었다. 잠깐 사이에 우리는 빗살무늬의 기와, 노끈무늬의 기와 조각 여러 개를 찾았다. 다만 온전한 모양의 기와는 하나도 없었고 죄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조각들이었다. 이 성터에서는 기와조각을 비롯하여 토기 조각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연변의 옛 성곽에서 고구려 유물이 이처럼 밀집된 것은 기타 고구려 유적지에서 아주 보기 드물다.   흥안고성을 세운 것은 이곳이 고구려의 동북부 변계에서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길 지역은 바로 도문이나 훈춘에서 용정이나 화룡, 안도를 왕래하는 교통로의 중간 기착지에 위치한다.   “주위의 유적을 보게. 이곳이 중요한 요새였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네.” P교수는 부근의 유적지들을 일일이 가리켜 보인다.   흥안고성 서북쪽에는 고구려 천리 장성의 일부라고 추정되는 평봉산(平峰山) 장성과 봉화대가 있으며, 남쪽에는 모아산(帽兒山) 돈대, 서남쪽에는 연길공원 소돈대, 동북쪽에 역시 대돈대가 있다. 동쪽 20㎞ 되는 곳에는 또 쌍둥이 성곽으로 불리는 성자산산성과 하룡고성이 있다.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곽이라면 후세의 발해가 묵과할리 만무하다. 그런데 흥안고성은 여느 성곽처럼 발해시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발해가 흥안고성의 남쪽에 따로 성곽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해성곽은 1937년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가 최초로 조사하고 “간도성 고적조사보고”에 글을 발표하며 연길가(延吉街) 북고성이라고 명명된다. 그때 이곳은 일본군의 요충지였으며, 이 때문에 도리야마 기이치는 성곽을 조촐하게 조사하고 지표면의 일부 유물을 채집한데 불과했다. 1985년, 연변 문물조사팀은 두 번에 걸쳐 조사를 하고 고성의 위치와 규모, 출토된 유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 현지의 북대촌 이름을 따서 북대고성(北大古城)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도 북대고성 자리에는 병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중국군의 한 유명 부대가 숙영하고 있는 이 병영은 흥안고성 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상거한다.   이때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겼다. 우리는 병영을 지척에 두고 부근에서 한겻이나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옛길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터가 있었다는 채소밭은 다문 한 뙈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병영 역시 아파트단지에 빈틈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그래도 병영 북쪽 담의 기슭에는 산등성이로부터 내려오는 옛날의 물도랑이 그대로 뉘어 있었다. 북대고성의 남쪽 성벽은 바로 이 도랑을 지나 병영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재에 따르면 유적지의 남쪽 부분에는 자그마한 둔덕이 있었는데, 건축 유적지로 추정되며 그 주변에는 유물이 많이 밀집되었다. 유물 분포 상태로 미뤄 북대고성은 동서와 남북 길이가 각기 500미터인 고대 중급 규모의 발해성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콘크리트의 아성은 그런 아련한 기억마저 빡빡 지우고 있었다. 와중에도 P교수는 포장도로 옆에 있는 흙속에서 회색기와 한 조각을 줍는다. 기와 뒷면에 있는 천 무늬는 천년의 오랜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뒤이어 필자도 전봇대 아래에서 또 회색기와 조각 하나를 찾았다. 옛날 여기에 유물이 적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날 병영 내에서도 유물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고 전하지만, 그곳은 일반인 금지구역이라 마음을 접어야 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북대고성에서는 또 푸른 유약을 바른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와는 훈춘 팔련성의 발해 동경유적지, 화룡 서고성의 발해 중경유적지 그리고 개별적인 발해 사찰 외에 아주 드물게 보인다고 한다. 그때 북대고성은 일반 성곽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증한 셈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발해인들은 일반 성곽이 아니라면 고구려의 성곽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왕궁이나 주, 현의 치소(治所)는 멸망된 이전 조대의 성곽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발해인들은 동경 용원부인 팔련성의 경우, 부근의 고구려 책성인 온특혁부성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부근에 따로 성곽을 세웠다. 북대고성은 부근 고구려의 성곽인 흥안고성과 엄연히 분리된다. 따라서 북대고성을 발해의 “노, 현, 철, 탕, 영, 흥” 6주의 어느 한 주의 소재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제 날 천년 성곽의 화려한 모습은 편린으로나마 지면의 유물들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북대고성의 폐허는 인제 아파트와 포장도로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다. P교수는 성터를 돌면서 연신 탄식을 했다.   “몇 해 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정말 아쉽구먼.”   천년고성의 슬픈 이야기는 이로써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연길 도시의 외곽은 연집강 강기슭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터를 넓히고 있었다. 흥안고성 역시 바야흐로 북대고성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얘기이다. 천년의 이 고성은 결국 도시의 음영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고 있었다.*
2    “아리랑 고개”의 정암(亭岩)산성 댓글:  조회:3453  추천:107  2008-03-17
    정암산성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연길에서 도문을 지나 양수진까지 약 50㎞, 이어 양수진에서 산성 기슭의 정암촌까지 10㎞ 정도 더 들어가야 했다. 마을 북쪽에 있는 정자 같은 둥그런 바위가 금방 손에 닿을 듯 지척에 보였다. 후문이지만 정암산의 이름은 이 때문에 붙여졌으며, 정암촌 역시 이 정암산의 유래를 따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성을 지척에 두고 잠깐 주춤해야 했다. 양수진에서 살고 있는 동창이 홀로 산행에 나서는 필자를 극구 막아 나섰던 것이다. “혼자서는 어림도 없어. 성벽은커녕 산을 오르는 길도 찾지 못해.” 그의 말에 따르면 정암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서 초행자는 자칫 성곽의 이마빼기도 만지기 어렵단다. 동창은 나중에 현지 토박이인 자신의 자형 이덕호(59세)씨를 안내인으로 찾아줬다.   우리가 탑승한 택시는 마을 동쪽의 대로를 따라 그냥 산속으로 더 들어갔다. 기재에 따르면 이 길은 훈춘에서 왕청 지역으로 통하는 천년의 고도(古道)라고 한다. 고도(古道)는 지난 세기 80년대만 해도 울퉁불퉁한 수레길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왕모래를 깐 국방도로로 되어있었다. 마을을 1㎞ 정도 벗어났을까, 정암산은 수풀이 울창한 분위기로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자 이덕호씨는 정자 바위로 오르는 방향이 아닌 북쪽 산골짜기로 통하는 길에 들어선다. 그에 따르면 정자 바위는 해발고가 400여m에 불과하지만 톺아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한다. 언제인가 그도 정자 바위 쪽을 선택해 산을 오르다가 비지땀을 동이깨나 흘렸다고 한다. 보아하니 안내자가 없었더라면 오후 내내 엉뚱한 곳에서 허둥거릴 뻔 했다.   “노인들이 그러시는데 광복이 나던 해 일본군이 이 산성에 들어와서 진을 쳤다고 하네. 왕청 쪽에서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막을 심산이었나 보네.” 이덕호씨가 말 주머니를 주섬주섬 풀어놓는다.   그때 많은 일본 군용차량이 정암산성으로 진입했다고 한다. 정암산성에 무슨 물건이 얼마 들어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렇든 말든 근대의 일본군까지 이 산성을 이용했다면 천혜의 군사요충지가 틀림없다.   산골짜기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 산세가 갑자기 급하게 뻗어 내리고 높다란 참나무 숲이 빼곡하게 깊어진다. 애들의 머리통만한 돌덩어리들이 수풀사이에서 무더기로 보였다. 골짜기를 따라 도란도란 흘러내리던 물줄기는 이곳에 와서 돌 틈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림짐작에도 성곽에 이용했을 자재는 산에 가득한 듯 했다.   문득 이덕호씨는 걸음을 멈추더니 참나무 밑 부분을 발길로 툭 찼다. “이건 산짐승이 누워있던 자리구먼.”아닌 게 아니라 참나무아래에 깔린 두툼한 낙엽더미에는 우묵한 자리가 패어 있었다. 옛날 정암촌에는 늑대가 동네어구까지 어슬렁거렸다고 한다. 지금도 정암산에는 여전히 멧돼지며 노루가 뛰어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웬 일인지 산을 오르느라고 땀벌창이 된 몸에 싸늘한 기운이 뻗친다.   500m쯤 올라가자 드디어 산중턱에 돌로 쌓은 산성의 모습이 삐죽이 나타났다. 천년의 이끼가 덮인 성곽 위로 나무 사이를 꿰뚫고 햇빛이 가느다랗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풀을 헤집고 어렵사리 산성의 한 모퉁이에 다가섰다.   바람소리에 우수수 흔들리는 나무 가지들이 환영처럼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함성을 지르며 내닫는 무사들의 창과 방패가 번뜩이는 듯 싶다. 솔직히 천년의 산성에는 한그루의 나무, 한조각의 돌에도 고혼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깐 다리쉼을 하고나서 계속 산등성이를 허위허위 올라갔다. 이윽고 높다란 바위가 나타나 숨을 톺으며 기어올랐더니, 금방 현훈증이 일어난다. 10여m 높이의 아스라한 절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 바위의 너비는 고작 서너 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덕호씨는 평지를 걷듯 어느새 저만큼 앞쪽에 멀어진다. 그를 불러 세우기가 뭣해서 네발걸음으로 간신히 바위를 건넜다. 방금 산행에 자신 있노라고 동창에게 오기를 부렸던 게 생각나서 낯이 달아오른다.   서쪽 산성은 이 절벽 바위에 이어서 쌓았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누워 있었다. 성곽의 문터 자리와 부근의 참호 자리가 확연하게 보였다. 이덕호씨에 따르면 산등성이에 있는 이 산성 유적지는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한다.   정암산성은 불규칙적인 삼각형 형태로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었으며 둘레의 길이가 약 2.5㎞ 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중 동북부의 성벽은 700m, 서쪽성벽은 800m, 남쪽성벽은 800m 정도인데, 어림잡아 약 500m 길이가 되는 절벽에는 낮은 곳만 골라가며 돌을 덧쌓고 있었다. 성내에는 동문, 북문, 서문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남쪽성벽의 문터에는 골짜기 사이의 길을 따라 길옆에 돌로 쌓은 군사시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훼손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성곽 아래쪽의 펑퍼짐한 곳에 너비 2,3m의 웅덩이가 보였다. 삼태기 모양이었으며 바깥쪽으로 홈 채기가 패어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런 웅덩이를 온돌에 불을 지피던 구덩이라고 보는 게 통설이다. 온돌이 놓인 이런 곳은 병영 터로 보고 있다. 정암산성에는 병영 터가 30여 곳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성곽에는 많은 병력이 상시적으로 주둔했다는 얘기이다. 산성 동남부의 정자 바위는 산성의 천연적인 전망대로 불린다. 바위 위에서 고도(古道)의 상황을 낱낱이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 서쪽에 있는 병영 터는 이런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정자 바위에는 또 재미나는 일화가 깃들어 있다. 이 바위는 동서 두 봉우리로 이뤄졌는데, 두 봉우리 사이에는 언제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굵은 나무가 뉘어진 다리가 있어서 서로 왕래가 무척 쉬웠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다리가 없어져 두 봉우리를 드나드는 게 마치 견우와 직녀의 상봉처럼 몹시 어려운 모양새라고 한다. 봉우리의 높이가 수십미터 되고, 또 봉우리 사이의 거리가 서너미터 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두 봉우리를 드나든다는 게 전설 같은 이야기로 되었던 것이다.   정암산성 성곽에는 전망대, 병영 터, 문터, 통로와 샘물이 있으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분지가 있다. 정암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정암산성은 아직도 축성연대를 확인할만한 유물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이다. 사학계에서는 정암산성의 축조연대에 대해 아직도 정설이 없다. 한때는 명나라 시기의 유적지라는 결론이 나와 실제로 정암산 기슭에는 그런 내용의 비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비문은 지금 어찌된 영문인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훈춘문물지”에 따르면 정암산성은 산성의 조형, 축성기법으로 보아 훈춘의 살기성, 통긍산 산성과 유사하며 이 때문에  발해 시기이거나 이보다 더 이른 고구려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늦은 가을의 저녁 해가 서쪽하늘에 떨어지고 있었다. 찬바람에 실려 오는 싸늘한 한기에 몸이 오싹해났다. 우리는 땅거미가 지기 전에 부랴부랴 산을 내렸다. 동창은 그때까지 정암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성곽은 이 마을 안에도 있단다.” 동창이 귀띔하는 말이다.   정암촌에도 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있었다. 성벽은 사람 키 높이로 돌을 쌓았는데 남아있는 부분이 2~30m 정도 되었다. 이 성벽은 정암산성 남쪽의 고도(古道) 부근에 위치한 걸로 미루어 정암산성의 평지성 성터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고구려 성곽은 산성과 평지성이 한조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암촌은 500여명 인구가 살고 있는 비교적 큰 동네로, 1938년 일제강점시기 집단이주한 충청북도 사람들로 이뤄졌다고 한다. 정암촌에는 충청도 사투리와 충청도 웃다리 농악 등이 지금껏 보존되어 있었다. 마을의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모임장소에 삼삼오오 모여 옛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시아버지 죽으면 좋다 했더니 빨랫줄이 끊어지니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시어머니 죽으며 좋다 했더니 보리방아 찔 때마다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청주 아리랑”은 중국에서 동란이 일어났던 “문화대혁명”시기 마을에서 한때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러나 힘든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떨어뜨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덧 정암 바위는 저녁의 어스름 속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차창 밖의 어디선가 “청주 아리랑”의 슬픈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것 같아 공연히 심정이 침울했다.*
1    베이징의 경찰군단, 그 속에 있는 조선족들 댓글:  조회:3541  추천:134  2007-03-29
  베이징의 경찰군단, 그 속에 있는 조선족들                                                                김호림   박성국(36세, 남)씨는 나젊은 형사이지만 마약수사에서는 벌써 10년이라는 오랜 경력을 자랑한다. 개인표창, 개인 3등공, 집체 1등공 등 공로메달만 해도 10여개 된다. 베이징시공안국 마약수사실 정찰대  대장이라는 직위가 바로 그런 화려한 경력을 말해주는 듯 하다.   그는 마약사범들에게는 철면 사나이로 통한다. 추호의 인정사정도 없는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남몰래 애써 숨기는 나약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조선족 마약사범들을 만날 때가 그러했다.   “같은 민족이라 동정심이 생기는걸 어쩔수 없었어요. 참"   박성국씨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때의 착잡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읽을수 있을 것 같았다.   직업 관계로 박성국씨는 자타를 불문하고 조선족 마약사범은 물론이요, 한국 마약사범을 체포하는 현장에 자주 등장한다. 언제인가 중국 언론에 드물게 보도되었던 북한의 마약사범도 그가 직접 체포했다고 한다.   진짜 한순간이나마 마음이 심란해지는 경우였다. 더군다나 여자 마약사범을 만나 그가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애원을 할 때는 지어 괴롭기까지 했다.   “시초에는 느낌이 이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죄는 지은대로 가야 하잖아요."   베테랑급 형사인 그에게 인제 마약사범은 단지 마약사범일 따름이다.   마약범죄는 거개 조직범죄이다. 마약사범들은 일단 잡히면 열에 아홉은 사형인줄 알기 때문에 극단적인 사례를 낳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박성국씨는 늘 죽음의 고비를 제 집처럼 넘나들어야 했다. 언제인가 그는 마약사범으로 가장하고 혈혈단신으로 마약거래 현장에 들어간적도 있다. 그의 말을 빈다면 허리에 머리를 차고 들어간 셈이다. 마약사범을 체포할 때 자칫 총에 맞을번 한적도 있단다.   솔직히 키가 1미터 67센티미터인 박성국씨는 형사치곤 "난쟁이" 모자를 벗기 힘들다. 그래서 그가 형사라고 하면 머리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탓일가? 사복차림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주객이 전도되어 엉뚱한 단속을 받은적 있다. 현지 보안인원은 그가 경찰인지 뭔지 금방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   그러고 보면 억울해도 한창 억울한 셈이었다. 박성국씨는 경찰과 친지관계라고 할수 있는 체육학교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유달리 반응이 빨랐던 그는 복싱을 배운지 1년 7개월만에 54킬로그램급에서 성급 1위를 차지하며 성 대표팀과 국가 대표팀의 평가전에서 단연 상대방을 제압한다. 그리하여 국가 대표팀에 발탁되고 이어 국가대표팀에서 복싱 감독의 추천을 받아 베이징체육대학에 입학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는 대학기간 공안국에서 한국계 미국인 마약사범을 나포한후 중국 경찰측의 통역을 서면서 베이징시공안국의 "포획"대상 명단에 편입된다. 결국 복싱, 언어 등 남다른 특기는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그에게 경찰복을 입게 했다.   박성국씨는 마약수사계 형사로 되는 순간 마약과 일대 선전포고를 했다고 자부한다. 인생의 좌표계를 마약사범과의 전쟁에로 쭉 그었던 것이다.   현 세계에서 금전의 유혹 때문에 다국적 마약사범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주요한 마약 진원지에는 동남아세아의 "금삼각"과 아프카니스탄이 망라된다. 이 두 진원지는 베이징에도 마찬가지로 피해가 막심하다. 이밖에 동북방향으로부터 베이징에 밀반입되는 마약도 급격히 성장, 지난 한해에만도 12% 늘어났다는 베이징시공안국 관계자의 소개이다.   중국에서 마약복용자는 100여만명이라는 방대한 군체를 갖고 있다. 지난 해 중국에서 수사해낸 마약범죄안건은 4.5만건, 체포한 마약사범은 5.8만명에 달했다. 마약의 소비시장을 위축하는 일환으로 지난해 중국은 연 29.8만명에게 강제적으로 마약을 끊게 했으며, 연 7만명에게 노동교양을 통해 강제적으로 마약을 끊게 했다.   현재 성급 이상 급별의 공안국에는 모두 강제적으로 마약을 끊게 하는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戒毒所)가 있다. 베이징시공안국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 역시 이런 차원의 강제치료소이다. 이 강제치료소는 지난 6월 새 청사에 이전했다. 깊은 산속에 있던 원래의 청사에 비해 새 강제치료소는 교통이 더 편리하게 되었으며 환경, 관리제도 등 측면에서 국내 선진수준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1천개의 침대가 있는데, 건축물, 장소, 시설에서 모두 국가 1류의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의 기준에 이르렀다.   이성문(35세, 남자)씨는 9년전에 베이징중의약대학을 졸업한후 베이징시공안국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에서 임상의료 의사로 있는 경관이다. 날마다 동네사람처럼 마약복용자를 접촉하는게 바로 그의 일상이다. 그는 마약복용자에 대한 인상을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의기소침하고 또 옷차림이 지저분한게 바로 마약복용자의 자화상입니다."   그들을 보면 저도 몰래 불쌍하고 마음이 아파난다고 한다. 그들이 하필이면 만인이 저주하는 길을 선택했는가 싶다. 그럴수록 직업을 떠나 마음으로부터 마약극복에 대한 책임감이 짙어진다.   “…금단현상을 해제할 수 있는 약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여가를 타서 고대 의학서적을 찾아 마약극복 조제약의 비밀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라고 한다.   마약치료는 생리적인 마약 탈리, 심리적인 금단현상의 해제, 사회로의 귀환 이 3개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강제적인 치료과정은 반년동안 지속된다. 이중 2-3주의 시간을 들여 마약복용자에게 마약 탈리, 생리적인 금단현상 해제를 하는 외 기타 시간은 기본상 법제, 마약의 피해 등 측면의 교육 그리고 "심리적인 금단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미한 노동을 시킨다고 한다. 강제치료소는 또 재배, 양식 내용의 노동 장소를 만들어 일부 마약복용자들에게 강제치료소에서 나간후 생계를 이을 재간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에는 아직 마약투약이 범죄인가에 대해 왈가불가 판정이 나있지 않다. 만일 마약투약 행위를 범죄라고 계선을 확정한다면 관련되는 측면은 아주 넓다. 중국에서 잠성(潛性)의 마약복용자까지 포함하면 마약복용자는 1천만명에 이른다는 설법이 지배적이다.   이성문씨는 마약금지는 사회적인 방대한 공정이라고 역점을 두어 말한다.   “마약밀매를 엄격히 타격해야 하거니와 여러 가지 마약극복 형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약 피해에 대한 홍보를 늘리는 등 해야 할일은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 힘들어요."  “마약”은 이상한 연줄로 되어 이성문씨와 박성국씨를 굴비처럼 한줄에 엮어놓았다. 사실 그들은 "마약"과 관련 없이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군 한다. 같은 경찰복을 입은 한 피줄의 동료라는 의미 때문이다. "마약"처럼 끈끈한 정분은 속일수 없는 모양이다. 이처럼 자주 만나는 조선족 경찰은 그들 둘뿐이 아니다.  “여럿씩 만나는 경우는 많아요. 그러나 한꺼번에 만나기는 진짜 힘들구요."   올해 박성국씨의 주선으로 베이징시 조선족경찰 13명은 어렵사리 만남의 장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은 베이징시공안국 여러 부처에 모래알처럼 널려 있고, 또 주거지도 베이징의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다보니 전부 만나려면 아닌 게 아니라 바위에 구멍을 뚫는 노력을 해야 한다.   베이징에서 조선족경찰은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에 나타났었다. 지금 베이징시공안국에는 정치부, 외사과, 치안처, 파출소 등 여러 부문에 조선족이 약 20명 된다. 박성국씨나 이성문씨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직접 공안국에 배치받은 사람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군인에서 제대한후 직접 공안국에 요원으로 배치된 사람이다. 지금 중국에서 제1류의 경찰을 육성하는 중국공안대학에도 "후보 경찰"인 조선족 학생은 여럿 된다.   와중에서 일부 경찰은 조선족이라는 이름과 관계없이 직업적인 관계로 신분 노출을 무척 꺼린다. 김철(42세, 가명)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제대한후 공안국에서 소임을 맡은 그는 근무 수칙상 그저 공안국 모 부문의 경찰로 통하는 사람이다. 또 일부 사람은 시야비야 하는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 베이징의 조선족무대에 아예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모르는게 오히려 편안하죠. 뒷말도 없구요."   그러다니 워낙 가물에 씨 나들 듯 드문 조선족경찰은 베이징에서 더구나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외계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존재라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둘린 화려한 빛 무늬에 색이 바래지는건 아니다.   그들과 인터뷰를 할때 누군가 화제로 담았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천안문광장에서 관객이 하나 깜짝 놀라 가로되, "베이징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찰이라니? 이게 도대체 웬 일이냐?" 진짜 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2006년 여름(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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