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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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바위에 울린 빨찌산의 나팔소리
2014년 02월 13일 11시 27분  조회:1901  추천:1  작성자: 김호림
  밤이면 늘 울리는 신호 나팔소리는 일본 군경들에게 진짜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나팔소리는 팔도구에서 북쪽으로 몇리 상거한 까마귀바위에서 띠띠- 따따- 하고 울렸다. 까마귀바위는 바위에 까마귀가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까마귀 대신 수림의 범처럼 무서운 “빨찌산”이 찾아올 줄이야!

  “나팔소리가 울리면 팔도구(八道溝)에서는 다들 불안에 떨었다고 합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현지 토박이 오정묵씨의 말이다.
 
  오정묵씨는 팔도구 북쪽의 오봉촌에서 나서 자랐으며 훗날 팔도구에 이사하였다. 동네 로인들은 삼삼오오 마당에 모여 앉으면 나팔소리의 이야기를 담배연기에 새뽀얗게 피워 올렸다고 한다.

  “일본 경찰과 자위대는 빨찌산이 산에서 내려와 팔도구를 습격하려는 줄로 알았다고 하지요.”

  실제 1933년 9월, 연길현유격대는 자정 12시에 팔도구에 있는 일본경찰분주소와 무장자위대를 습격하여 여러 명을 사살했으며 또 총과 천, 곡물 등을 탈취하고 군용트럭 2대를 소각했던 것이다.

  연길현 팔도구는 국자가(局子街, 현 연길시) 서북쪽에 위치한 산간마을로서 예전에는 시가지 못지않게 번화한 고장이었다. 개간 초기 조선인 간민들이 천주교 교회당을 세우면서 북간도 선교의 중심지로 되고 있었다. 게다가 서쪽의 명월진과 북쪽의 왕청으로 통하는 길목 어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팔도구에는 항일유격대의 근거지가 있었다. 1932년~1936년 기간 연변지역에 설립되었던 11개 항일근거지의 하나였다. 팔도구 북쪽의 마을 부암촌(符岩村)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세운 항일투쟁기념비와 항일유격근거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부암촌은 항일유격대가 자주 리용하던 부호의 바위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1945년 “8.15” 광복 후 항일전쟁승리를 기념하여 장승촌(長勝村)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유격대는 훗날 현지인들에 의해 “김일성부대”라고 불린다. “김일성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 독립사단을 이르던 별칭이다. 제2군단 독립사단은 연변 각 현의 유격대를 통합하여 설립한 부대로서 부암의 항일근거지에 있던 유격대도 여기에 망라된다. 독립사단은 그 구성인원이 거의 전부 조선인이다. 이 부대는 또 “조선유격대”, “조선빨찌산”, “조선혁명군”이라고 불리기기도 했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부암은 항일시기에 또 절세의 녀걸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김정숙녀사가 한때 부암에서 생활하면서 항일투쟁에 투신했던 것이다. 현지에서는 부근 산세가 마치 룡이 여의주를 품은 형국이기 때문에 김정숙녀사라는 여걸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마침 김정숙 녀사가 주거하고 있던 가옥은 둥근 여의주 모양의 북산 기슭에 위치하며, 마을 남쪽에는 또 꿈틀거리는 용 모양의 산줄기가 줄레줄레 뻗어있다.

  연길현 8구(區) 소베트정부는 바로 부암촌 북쪽으로 약 3리 정도 상거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부암촌 어구의 둔덕에 위치한 “개똥바위”에 초병을 두었다고 한다. “개똥바위”는 자그마한 돌들이 흡사 “개똥”처럼 마구 엉켜 큰 벼랑바위를 이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바위에 올라서면 팔도구 방면에서 부암촌 일대로 들어오는 산길을 멀리서도 손금처럼 환하게 살펴볼 수 있다. “개똥바위”는 특이한 지형 우세 때문에 유격대의 천연적인 망루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팔도구에는 부암처럼 항일유격대의 흔적이 지명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팔도구를 흘러 지나는 강은 워낙 양지바른 남쪽을 향해 흐른다고 해서 조양하(朝陽河)라고 불린다. 그러나 오정묵씨가 어릴 때 들었던 강 이름은 또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홍하(紅河)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피로 붉게 물든 강이라는 뜻이지요.”

  팔도 북쪽의 골짜기에서 일본군이 늘 반일지사들을 무더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선혈이 골짜기에서 시냇물처럼 흘러내려 강물을 벌겋 게 물들였다는 것이다. 이 골짜기는 사람이 많이 죽어서 음기가 세다고 “귀신골짜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본군의 피비린 총칼 때문에 무덤처럼 음산한 곳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팔도구 북쪽을 병풍처럼 가로막은 거북이산 정상의 벼랑에는 유격대원들이 “일제를 타도하자”라고 쓴 글발이 씌어져 있었다. 산정의 벼랑에는 또 유격대 부상병이 숨어있던 작은 동굴이 있다.
 
 유격대가 근거지를 설립하고 활발하게 움직이자 일본 군경은 송곳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1933년 12월부터 1934년 2월까지 일본 군경은 연길현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대거 벌였다. 항일근거지가 있는 팔도구 일대에는 “토벌작전”이 여러 번이나 진행되었다.

 바로 이 무렵 부암촌과 8리 정도 떨어진 길가의 언덕에는 비석이 하나 문득 나타난다.

  “일본군이 일부러 세운 위령비(慰靈碑)라고 합니다.” 오정묵씨는 약 40년전 중학교를 다닐 때 식목을 하러 왔다가 처음으로 이 비석을 보았고 또 그때 이 비석의 오랜 유래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때 일본군의 한 군관이 ‘김일성부대’의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하지요.”

  비석은 돌들을 키 높이로 쌓아서 만든 기단 위에 세워졌지만, 언제인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로 반죽하여 돌들을 쌓아올린 기단만 홀로 남아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기단에는 풀들이 겨끔내기로 자라고 있다.

  사실상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비석은 기단 부근에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흙에 묻혀 있는 것 같았는데요, 도구가 없어서 파내지 못했습니다.” 현지를 다녀갔던 연변박물관 전 연구원 리송덕옹은 이렇게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때 리송덕옹은 항일근거지를 답사하던 걸음에 이곳에 잠깐 들렸다고 한다. 예전에 팔도구에서 싸웠던 항일투사들과 함께 전적지들을 찾았던 것이다.

  “시초에는 토벌대 대원들의 무덤 일여덟개가 주변에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리송덕옹이 비석 현장을 찾았을 때는 무덤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식목 등 인위적인 파괴와 더불어 세월의 흐름속에 자취를 감췄다. 비석도 누군가에 의해 기단에서 분리되었고 뒤이어 바람처럼 가뭇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아무튼 현지인들과 전문가들의 증언 그리고 비석 기단 등 유물로 미뤄 보면 일본 군경의 무덤과 위령비는 분명히 실존한 한 단락의 력사이다.

  연변의 “현지(縣志)”, “문물지(文物志)” 등 지방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지난 세기 30년대 팔도구 부암 부근에는 확실히 일본군 토벌대와 유격대의 교전이 여러 번 있었다. 김순덕(金順德, ?~1934.여름), 왕덕태(王德泰, 1908~1936.11) 등이 인솔한 유격대가 부암 서북쪽에서 토벌대를 매복, 습격하여 여러 명을 사살했으며 또 부암에서 벌인 전투에서 유격대에 의해 토벌대 대원 50여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유격대에 의해 일본 군경이 상당수 사살되었으며 그 때문에 일본군이 그들의 전몰자들을 위해 현지에 무덤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울 법하다는 얘기가 된다.

  정작 현장에서 사살되었다고 하는 일본군 군관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격대에 의해 사살된 일본경찰 순사부장이라고 주장한다. 지방의 문헌에 기록된 그가 바로 부암 부근의 전투에서 사살된 제일 높은 계급의 일본 군경이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또 비석의 주인을 두고 이목구비를 오목조목 갖춘 전설이 파다히 유전했다. 그때 일본군 군관은 비석 기단이 현존하는 언덕배기에서 지형을 정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언덕배기는 맞은쪽의 벼랑과 수백미터나 상거한 골짜기의 개활지에 위치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 군관은 신변에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말뚝처럼 여유롭게 섰다가 유격대원 명사수의 고정 표적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비문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진 비석은 세간에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다. 현재로서는 벼랑기슭의 수림에 일본군이 세운 비석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실제 비석의 견증인인 오정묵씨도 비석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해서 일행과 함께 수림을 거의 한시간동안이나 헤집고 다녔다. 40년전 어릴 때의 그의 기억은 어느덧 발목을 덮는 썩은 낙엽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벌써 80년전에 발생되었던 옛 사건임에랴!

  일본군의 옛 비석은 빨찌산의 발자취를 간접적으로 확인, 실증할수 있는 기록물이다. 그런데 일본군의 위령비라고 백안시(白眼視)를 한다면 지나간 력사의 일부를 제멋대로 지워버리는 게 아닐지 한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수림의 적막을 휘젓고 있었다. 그러나 비석 저쪽의 멀리에서 울리던 빨찌산의 나팔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중국민족] 2004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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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빛을 비추라
날자:2014-02-13 20:57:11
필독의 '새의 울음소리'에서 '빨지산의 나팔소리'로 들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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