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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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하, 북경의 옛말로 흘러간 이야기
2013년 10월 23일 15시 38분  조회:2542  추천:15  작성자: 김호림
  옛날 북경 일대에 고려사(高麗寺)가 있었다. 원나라 때 세운 천년 고찰이라고 한다.

   그때 북경 제일 동쪽의 장가만(张家湾) 지역은 강과 늪이 바둑처럼 널려있었으며 또 인가가 아주 드물었다. 선가(禪家)의 도를 닦을 택지(宅地)였다. 스님들은 늘 서쪽으로 5,6리 상거한 고려장(高麗庄) 마을에 가서 시주를 받았다. 나중에 사찰은 이 마을의 이름을 빌어 서 “고려사(高麗寺)”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가만 현지 태생인 백리생(白利生, 50여세)은 바로 고려사 옛터에서 소학교를 다녔던 사람이었다. 장가만소학교(현재 장가만민족소학교로 개명)는 옛 사찰 위에 서있었던 것이다.

  “사찰에는 철로 만든 부처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리생은 장가만에서 50대 이상의 사람이라면 옛 사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해방(1949) 초기에 부처 조각상을 깨버리고 고철로 팔았다고 하지요.”

   어찌되었든지 옛 사찰은 훼손될때 벌써 “고려사”라고 불리지 않고 있었다. 아득히 오랜 명나라 정통(正統) 4년(1439), 황제의 칙명으로 중수하고 널리 복과 덕을 쌓는다는 의미의 “광복사廣福寺”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기실 “고려사”라는 이름을 만든 마을 고려장도 그 무렵 사찰과 함께 “창씨개명”을 하고 있었다.

  고려장 역시 원나라 때의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원사(元史)》는 대도(大都, 북경을 이르는 옛날 말)의 물길이 “고려장에서 백하에 흘러든다(高麗庄入白河).”라고 적고 있다. 백하(白河)는 북경 북쪽에서 발원한 강으로 장가만의 동쪽에서 운하와 한데 연결된다. 이때 고려장 부근에는 다른 마을이라곤 없었으며, 그래서 이 고장에서 고려장이 유일한 지표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렇다고 고려장이 고려사처럼 원나라 때 생긴 마을은 아니다. 《통현현지(通縣縣志)》는 고려장은 당나라 태종 리세민이 요동에서 끌고 온 고구려 포로들로 세워진 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 등 옛 문헌의 기록을 보면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에서 최종적으로 참패를 당하기전 고구려 군사 1만명과 주민 4만여명이 포로로 되었다. 《중국통사(中國通史)》의 기록에 따르면 리세민 은 나중에 고구려에서 퇴각할 때 1만 4천여명에 달하는 포로를 관내에 끌고 왔다고 한다. 이런 포로를 유주(幽州) 즉 오늘의 북경 일대에 두고 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포상으로 나눠줬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려장은 고구려 포로가 정착한 마을이라는고 하는 현지(縣志)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고려장이 명소처럼 사서에 기록될수 있은건 마을 부근까지 이어진 운하의 유명세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운하는 일찍 춘추시기부터 굴착되었으며 오늘날의 추형을 갖춘건 수나라시기로 전한다. 이때 동도 락양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운하계통을 이룬 것이다. 원나라는 지금의 북경을 대도로 정한 후 대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항주까지 직달하는 대운하를 개통하였다. 원 29년(1292), 대도 서쪽의 여러 물길을 도성으로 끌어들인 후 고려장 동쪽에서 백하에 흘러들게 했던 것이다.

  고려장의 동쪽에 배들이 정박하면서 “장가만”이라는 마을이 생겨난다. 장가만은 훗날 수상운수 종착지와 물자 집산지로 거듭나게 된다. 그때 장가만에는 날마다 우마차가 실북 나들듯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고려장 주변의 물자를 비축하던 곳은 점차 군락을 끼리끼리 이루며, 이어 중국인 마을 역시 땅을 파고 들어온 운하의 물처럼 강기슭에 웅기중기 들어앉기 시작했다. 고려장의 바로 동쪽에 있는 황목장(皇木場), 전장촌(磚場村)은 이때 생긴 마을이다.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격”, 장가만의 유명세는 금세 파도처럼 고려장을 말끔히 묻어버린다. 고려장은 이로부터  약 반세기 후의 명나라 때에는 허울 좋게 중국어 발음만 바뀌지 않은 고력장(高力庄)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고려장의 천년 수난사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였다. 청나라 때 만족들은 고력장 북쪽에 작은 마을을 하나 세우며, 고력장과 구분하여 소고력장(小高力庄)이라고 부른다. 고려장 마을이 고력장이 아니라 또 난데없는 대고력장(大高力庄)으로 변신하게 된건 이때의 일이다. 소고력장은 또 동쪽마을과 서쪽마을로 갈라지는 분신을 한다. 훗날 동소고력장(東小高力庄)과 서소고력장(西小高力庄)은 략칭 동장(東庄)과 서장(西庄)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북경 서쪽 묘봉산(妙峰山) 기슭의 고려촌(高麗村) 역시 고려장과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해정구(海淀區) 서쪽 끝머리의 고리장촌(高里掌村)은 적어도 명나라 때까지 고려촌이라고 불리던 마을이였다. 명나라 시기의 《완서잡기(宛署雜記)》에 명백히 고려촌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훗날 청나라 시기의 《광서창평주지(光緖昌平州志)》는 고려촌을 고립장(高立庄)이라고 기록하며 《광서순천부지(光緖順天府志)》는 고립장(高立掌)이라고 적고 있다. 또 리씨 성의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현지사람들은 고리장(高李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이 이름이 비슷한 음의 글자로 바뀌어 고리장(高里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름이 하도 많이 바뀐 탓인지 마을에는 지명 “고리장”의 유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길에서 만난 최씨 성의 노인은 대답 대신
오히려 이상한 물음을 물었다.
 
   “우리 마을이 높은 산 아래의 평지에 있다고 해서 높을 고(高)자와 손바닥 장(掌)자를 달지 않았을까요?”

  이러니저러니 천년 세월이 흐르도록 “고려”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은 지명이 있다. 고려 군대의 병사(兵舍)라는 의미의 고려영(高麗營)이다. 고려영은 자금성에서 북쪽으로 약 35㎞ 상거한다.

  지방문헌인 《순의현지(順義縣志)》는 고려영이 “당나라 때 내지에 온 고려인들이 이곳에 정착했으며 훗날 늘어나서 마을로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영의 동북쪽으로 약 10㎞ 상거한 소고려영(小高麗營)도 옛날의 전란 때 고려인이 살고 있었으며 원래는 역시 고려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남쪽에 또 고려영이 섰고 그 규모가 엄청 컸기 때문에 이에 반해 소고려영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소고려영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남쪽의 고려영 마을을 대고려영(大高麗營)이라고 부른다.

  재미있게도 두 고려영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의 마을이 먼저 섰다고 말한다.


  어찌되었거나 당나라 태종 리세민이 고구려에서 퇴각할 때 포로로 잡아온 고구려 병사와 가족을 유주(幽州) 즉 지금의 북경 일대에 거주하게 했며 그 정착촌이 하나가 고려영이라고 하는 주장이 통설로 자리한다. 그러나 병사(兵舍)라는 의미의 영(營) 때문에 고구려 군사가 진을 치고 있던 고장이라고 하는 설도 만만치 않다. 고구려 군사가 645년 당나라 군대를 추격했던데서 비롯된 지명이라는 것이다. 하긴 “래광영(來廣營)”, “화기영(火器營)”, “옥천영(玉泉營)” 등 영(營)자를 달고 있는 북경의 기타 지명들은 모두 옛날 군대의 병사와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려영은 영(營)자가 달린 북경의 제일 오랜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경의 “고려” 지명에 이처럼 혼선이 빚어진데는 예전에 지방 력사와 지리 관련한 전문서적이 적은데 기인된다. 《완서잡기(宛署雜記)》의 머리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읽을수 있다. 저자 심방(沈榜)은 그가 지방에서 현관(縣官)으로 있을때 그래도 일부 문헌자료들을 볼수 있었지만 경성의 완평에 이른후 지방의 지리서 등속을 볼수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순천부(順天府) 완평현(宛平縣) 지사로 부임하던 3년 기간 전고(典故)를 수집하고 문헌자료를 편저하여 이 책을 묶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고려영은 결국 이름만 본연의 모습일 뿐이지 도대체 군영인지 아니면 포로들의 정착지인지 분간키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은 것이다. 단 하나, 이런 옛 지명에 남아있는 “고려”는 거개 “고구려”를 의미한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지명 고려하(高麗河)도 성씨가 분명히 “고구려”이지만 고구려의 멸망후 수백년을 지나 원나라 때 비로소 문헌에 등장한다.

  원나라 때 운하공정에서 치적을 쌓은 수리학자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은 북경 동쪽의 리이사(李二寺) 부근에서 백하(白河)에 흘러들던 물곬을 바꿔 고려하에서 백하에 흘러들게 했다고 전한다. 고려사가 부근의 고려장 마을의 이름을 빌었듯 고려하도 부근의 고려영 마을의 이름을 빈듯 하다. 언제 생성된 지명인지는 몰라도 고려하는 고려영이라는 지명처럼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있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년간의 “흠정일하구문고(钦定日下旧闻考)”는 북경 서쪽의 룡산(龍山)에서 발원하는 강물은 도중에 두갈래로 나뉘는데 남쪽으로 고려영을 흘러 지나는 강을 “고려하”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인만 아니라 신라인들도 북경 일대에 살고 있었다. 18세기 사행단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갔던 박지원은 연행록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당나라 총장(總章) 년간(668~670)신라의 가옥이 있는 곳에는 그곳을 빌려서 관아를 설치했으니, 량향(良鄕)의 광양성(廣陽城)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량향은 현 이름이며 북경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고려 이름의 지명과 달리 광양성에 있던 신라마을은 비슷한 음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명나라 때 이 고장에는 벌써 인적이 드물었으며 오늘날의 촌락은 청나라 때 비로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지에서는 광양성이야말로 최초의 옛 지명인줄로 알고 있으며 지명지(地名志)에도 일절 신라마을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려 이름의 마을이든 아니면 신라 이름의 마을이든 모두 고려하처럼 강바닥에 잦아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름 자체가 북경의 옛말로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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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빛을 비추라
날자:2014-01-30 19:35:29
아름다운 글을 잘 읽었어요 댓글을 쓴 '정동'님의 글도 보면 긍정적인 모습이 보여서 보기 좋네요
1   작성자 : 정동
날자:2013-10-23 19:54:50
잘 보고 감다...선생은 이런 지식성이 강하고 흡인력이 강한 사료성적인 기사를 많이 올리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또 많은걸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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