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식물 트리피드
THE DAY OF THE TRIFFIDS
존 윈담 John Wyndham 지음
이 영재 옮김/최 병선 그림
<차 례>
유성의 밤···················· 3
공포의 아침··················· 6
걸어다니는 식물················ 19
인간 지네··················· 31
노예가 된 여자················· 41
몰살당한 집·················· 47
여류작가···················· 54
대학 문···················· 61
사격 연습··················· 70
비들리의 공동체················ 76
코우커의 공동체················ 82
붉은 머리의 남자················ 91
교외의 적··················· 100
시체 냄새··················· 106
여자 리더··················· 121
요새의 3인조················· 132
마을의 소녀·················· 142
새로운 생명·················· 151
찾아온 아이반 심프슨············· 168
내일을 향한 출발··············· 174
작품 해설··················· 183
유성의 밤
5월 7일 화요일, 지구가 혜성의 꼬리를 통과했다. 그 날 런던에서는 저녁때부터 하늘에 녹색의 섬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디오의 아나운서는 6시 뉴스로 유성우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다.
"이제 곧 밤하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성우로 뒤덮일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장관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 우주 쇼를 놓치지 마십시오. 유성군 때문에 장거리의 단파 수신은 상당히 방해를 받게 될 듯합니다만 이 뉴스가 나가고 있는 중파에는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라디오의 실황 중계로는 유성군의 야릇한 아름다움을 충분히 맛보실 수는 없습니다. 꼭 밖에 나가셔서 밤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지상 최대의 불꽃놀이를 즐겨 주십시오."
이와 같이 권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전 런던 사람이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오피스 가의 세인트 메린 병원에서도 의사와 간호원은 물론이고 환자들까지도 병실의 창문으로 유성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 혼자만은 라디오의 해설로 만족해야만 했다. 왜냐 하면 양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빌 메이슨. 나이는 30세. 직업은 유럽 식용유 회사의 식물 연구원. 일주일 전에 나는 회사의 식용 식물 재배장에서 트리피드의 추출물이 눈에 들어가서 병원에 운반되어 왔다. 트리피드는 식용유의 원료가 되는 식물이지만 잎자루의 끝이 긴 채찍 모양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 독이 있는 가시 털이 잔뜩 붙어 있다. 트리피드의 독은 무섭다. 눈에 들어가면 실명하며 몸에 들어가면 목숨을 잃는 일도 있다. 다행히 나는 어릴 때부터 여러 번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찔려서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치료가 빨랐기 때문에 실명은 면했다.
“8일째에 붕대를 떼면 눈은 본디대로 보이게 되어 있을 것이오." 하고 의사는 말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밤, 내일은 드디어 눈의 붕대를 풀게 되는 전날 밤에 유성우가 나타났다. 나는 하루 차이로 진귀한 우주 현상을 못 보게 되고 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독방 침대에서 라디오의 해설을 듣고 있었다. 그 때 간호원이 저녁 식사를 들고 와서 유성우의 광경을 얘기해 주었다.
"지금 하늘은 온통 유성으로 꽉 차 있어요. 어느 것이나 밝은 녹색이어서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여요. 다들 밖에 나가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눈이 아프도록 환하게 빛나는 큰 것이 있어서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집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다들 말합니다. 정말로 장관이에요. 그걸 못 보시다니 정말로 안됐군요."
"정말 유감이야.“ 하고 나는 동의했다.
"우린 병실의 환자 분들도 유성을 볼 수 있게끔 병실의 커튼을 죄다 열어 젖혔습니다. 당신도 눈의 붕대만 아니면 여기서 멋진 밤하늘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간호원은 흥분해서 말했다.
"밖은 시끌벅적 하겠네요?"
"예, 몇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원이나 벌판에 나와서 구경하고 있어요. 지붕이란 지붕에는 온통 사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요.“
"유성우는 좀더 계속될 것 같소?“
"글쎄요. 하지만 만약 오늘 붕대를 푼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당신한테는 유성을 보게 하지 않았을 거여요. 붕대를 푼 눈은 천천히 빛에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조금 전의 유성 같은 것은 굉장히 밝아서, 온 방 안이 녹색으로 보였을 정도여요. 그것을 못 보시다니 정말로 안됐군요.“
실컷 동정하고 나서 간호원은 나갔다. 나는 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아나운서의 해설은 <기막힌 장관>이니 <놀랍고 희한한 현상>이니 하는 말의 반복이었다. 곧 우주 불꽃놀이도 끝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지구는 앞으로 몇 시간이면 유성군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은 서둘러 보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보지 못한 것을 일생 동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아나운서는 열심히 권했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화가 나서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 말았다. 장님한테는 낮이나 밤이나 마찬가지지만 역시 밤이 되면 잠이 오고 아침이 되면 눈이 뜨인다. 주위의 술렁임을 들으면서 누워 있다가 나는 어느 새 잠이 들고 말았다.
공포의 아침
이튿날 눈이 뜨였을 때 마침 시계가 치기 시작했다. 딩동, 딩동.... 8 시였다. 5월 8일 수요일, 오전 8시이다. 사방은 고요했다. 마치 일요일처럼 조용했다. 어쩐지 수상한 느낌이 든다. 여느 날 같으면 언제나 7시 30분에 간호원이 와서 내게 세수를 시키고 침대 주변을 치우고 아침 식사를 날라 온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8시가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간호원들은 어젯밤의 유성 소동으로 피곤해서 아직도 자고 있는 것일까? 나는 배가 무척 고팠다. 게다가 오늘은 나로서는 중대한 날이다. 눈의 붕대를 풀고 눈이 보이게 되는지 어떤지 알아보는 날이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서 간호원 실로 통하는 초인종을 찾아서 꼬박 5초 동안이나 눌러 댔다. 여느 때 같으면 즉시 인터폰에서 '왜 그러셔요?'라는 대답이 온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언제까지 기다려도 간호원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간호원 실에 아무도 없는가? 나는 한참 동안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밖의 분위기도 어쩐지 이상하다. 전혀 소리가 없다. 이 세인트 메린 병원은 오피스 곁의 교차점에 있으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차 소리가 난다. 특히 아침 8시 전후에는 일 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웅성거림이 병실에까지 들려 온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조용했다. 도시 전체가 죽은 듯이 고요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나는 기분이 으스스해졌다. 눈이 안 보이니까 한층 더 자신이 없고 불안했다.
"어쩌면 도로 공사 때문에 병원 근처가 통행 금지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눈의 붕대를 약간 내리고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싶다. 그러나 붕대는 코 위에서 머리 뒤까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 쉽게 내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붕대를 푸는 것도 겁이 났다. 일 주일 이상이나 장님이 되어 있다 보니 스스로 시력을 시험해보려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잡았다. 아까보다도 더 오래 눌렀으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간호원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책임하잖아!!"
끝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시트를 걷어 젖히고 침대에서 나왔다. 더듬더듬 병실을 가로질러 도어에서 복도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이봐요, 아침 좀 주시오! 48호실이오!“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이 일제히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마치 군중의 미치광이 같은 소란을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 놓은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여기가 세인트 메린 병원이 맞는가? 자고 있는 동안에 어느 정신 병원으로 옮겨진 것은 아닐까?“
나는 얼른 도어를 닫고 다시 더듬거리며 침대로 돌아왔다. 이 때 밑의 한길에서 무서운 비명 소리가 났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듯한 절규였다. 그것은 세 번 계속되더니 공중으로 길게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땀이 붕대 밑으로 배어 나왔다. 분명히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더 이상 혼자서 암흑 속에 남겨져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장에 확인하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붕대는 오늘 풀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결심을 했다. 의사가 하는 일은 대체로 알고 있다. 우선 침대에서 나와서 손으로 더듬어 창문의 블라인드를 끌어 내렸다. 그러고 나서 안전핀을 빼고 긴 붕대를 살살 말아 가며 푼 다음 살그머니 눈을 떴다.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사물의 형태가 희미하게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대낮의 빛에 익숙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병실 안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과 방구석에 수상한 것이 숨어 있지 않은가 확인했다. 도어의 손잡이 밑에 의자 등받이를 대어 놓아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침대 밑의 선반에 검은 색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겠지. 나는 색안경을 쓰고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의 틈새로 아래 한길이 보였다. 남자가 두 명 걸어가고 있다. 둘 다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한 걸음씩 느릿느릿 확인하듯이 걷고 있다. 하늘은 놀랄 만큼 맑게 개어 있고 먼 집들의 지붕까지 분명히 보인다. 그 까닭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옷장을 열어 보았다. 내 옷이 얌전하게 걸려 있다. 그것을 입으니까 마음이 가라앉아 왔다. 우선 병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겠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게다가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도 희미하게 들려 온다. 나는 독방이 줄지어 있는 복도를 걸어서 좀더 넓은 복도로 나왔다. 어두운 그늘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윗도리에 줄무늬 바지를 입고 그 위에 횐 옷을 입고 있었다. 병원의 의무원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벽에 들러붙어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여보시오?“
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횐 옷을 입은 사나이는 멈춰 서서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얼굴은 핏기가 없고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빌 메이슨입니다. 48호실의 환자인데,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병실에서 나와서........"
"당신은 눈이 보이오?"
"예, 전과 다름없이 잘 보입니다. 오늘은 눈의 붕대를 푸는 날인데 아무도 와주지 않아서 내 손으로 풀었어요. 잘 된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러나 상대방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사무실까지 좀 데려다 주시오. 전화를 걸어야 하니까."
그 말이 내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무원이 병원 안을 혼자 걸어다니지 못한단 말인가?
"여보시오, 부탁이오. 내 사무실은 서동의 5층이오. 문에 내 이름이 붙어 있어요. 소움즈 의사라고 말이오."
"하지만 여기가 어디쯤인가요?“
나는 물었다. 병원에 들어 왔을 때부터 나는 죽 눈이 안 보였었다. 병원의 내부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이다. 소움즈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내게 묻는 거요? 당신은 눈이 보이지 않소? 내가 장님이라는 걸 보면 모르겠소?"
그러나 소움즈 의사의 눈은 크게 뜨여서 내 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오늘 아침에 잠을 깨고 부터 알 수 없는 일만 계속되고 있다."잠깐 기다리시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리베이터 곁의 벽에 <5> 라고 크게 씌어 있었다. 여기는 5층인 것이다. 나는 소움즈 의사 곁으로 돌아와서 위치를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내 팔을 잡으시오.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다음 모퉁이를 돌아 세 번째 문이요."
"알겠습니다."
나는 하라는 대로 소움즈 의사의 팔을 잡고 걸어갔다. 사무실에 닿을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나는 소움즈 의사를 책상 곁으로 데리고 가서 수화기를 집어 주었다. 소움즈 의사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버튼을 짤그락 짤그락 눌렀다.
"안 돼, 통화가 안 돼."
그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수화기를 책상 위에 놓고 소움즈 의사는 물었다.
"이봐요, 내가 지금 어느 쪽을 보고 있소? 창문은 어디요?"
"당신의 뒤요." 하고 나는 가르쳐 주었다.
"그래요 ?
소움즈 의사는 홱 돌아서서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살금살금 걸었다.
"여기로군.“
양손으로 창문턱을 어루만지더니 소움즈 의사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창문으로 달려들어 유리를 깨고 공중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선생님!“
나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볼 용기는 없었다. 여기는 빌딩의 5층인 것이다.
장님의 도시
장님 의사의 투신 자살! 그것을 목격한 쇼크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나는 메슥거리는 기분을 참고 사무실을 나왔다. 넓은 복도의 막다른 곳에 병실 문이 보인다.
"저기에는 누가 있을 테지."
문을 여니까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어젯밤 유성 불꽃놀이가 끝난 뒤, 창문에 커튼을 친 그대로이다 문 곁에 남자 환자가 누워 있었다. 나는 물었다.
"간호원은요?"
"없어요. 벌써 몇 시간째 부르고 있는데도 아무도 안 와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창문의 커튼을 좀 열어 주지 않겠소? 이렇게 캄캄해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하고 남자는 말했다.
"그러죠.“
나는 창문으로 가까이 가서 커튼을 홱 열어 젖혔다. 5월의 밝은 햇빛이 병실 가득히 비쳐 들어왔다. 여기는 외과 병실로서 스무 명 가량의 환자가 있었다. 모두가 침대에 누운 채로 기동을 못 했다. 거의가 다리 부상이며 한쪽 다리를 절단한 사람도 있었다.
"이봐요, 그렇게 커튼을 주물럭거리고 있지만 말고 빨리 죄다 열어 주시오."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옆의 침대를 보았다. 얼굴이 거무튀튀한 남자가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 내 쪽 밝은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다른 침대에 있는 환자들도 다들 눈을 크게 뜨고 내 쪽을 가만히 보고 있다. 소움즈 의사와 똑같다! 모두들 장님이 된 것이다!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가엾지만 어쩔 도리도 없다.
"커튼이 걸려서...... 열려지지가 않아요. 고칠 사람을 찾아오겠소."
그렇게 말하고 나는 병실에서 도망쳤다.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서 다음 층으로 나왔다.
"여기에는 괜찮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다른 병실을 들여다보았다. 침대는 모조리 비어 있었다. 그러나 방바닥에는 잠옷 차림의 남자 두 명이 쓰러져 있다. 한 사람은 입에서 피를 토하여 붉은 피바다에 얼굴을 처박고 죽어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뇌출혈 같은 것을 만났는지 얼굴을 괴로운 듯이 일그러뜨리고 죽어 있었다. 다른 환자는 아마도 병실에서 달아난 모양이다. 나는 다시 계단으로 되돌아왔다. 더 이상 다른 병실을 들여다볼 마음이 없었다. 부리나케 내려가는데, 모퉁이에 잠옷 차림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머리가 쫙 갈라져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모양이다. 가까스로 현관 홀로 나왔다. 거기에는 슬리퍼가 마구 흩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핏자국도 보인다.
"그랬구나."
나는 처음에 48호실의 문을 열었을 때 들리던 군중의 웅성거림이 생각났다. 아마도 별안간 장님이 된 환자들이 도움을 청하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여기로 밀어닥친 것이겠지. 그것은 소름끼치는 끔찍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느낌으로 정면 입구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병원의 정원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문 밖 골목에 술집 간판이 보였다. '아라메인'이라는 이름의 술집이었다. 나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손님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안쪽의 카운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또 진이군!“
이어서 쨍그랑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술에 취한 남자가 술병의 술을 따라 냄새를 맡아보고 아무 데나 획 내던지고 있었다.
"한 잔하고 싶은데요........" 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요?"
남자는 경계하듯이 물었다.
"병원에서 왔소."
"병원 사람?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눈이 보이오?"
"보여요."
"거 다행이군. 선생님, 이리로 와서 위스키 병을 좀 찾아 주시오."
"난 의사가 아니오. 환자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선반에서 위스키 병을 집어서 마개를 열고 잔과 함께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소.“
남자는 대뜸 병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 식으로 마시면 죽어요."
내가 주의를 주자 남자는 자포자기적으로 말했다.
"죽을 때까지 마시고 싶어요. 왠지 아오? 난 장님이오. 눈 뜬 장님이란 말이오. 모두가 다 청맹과니란 말이오. 당신 외에는! 어떻게 당신은 장님이 안 되었소?“
"글쎄 모르겠소."
"다 그 별의 짓이야. 제기랄. 그 녹색 유성의 짓이란 말야. 그것 때문에 모두가 다 봉사가 되고 말았어. 당신 어젯밤에 그 유성을 보았소?"
"아뇨."
"그럴 테지. 당신은 어제 그 녹색의 유성을 보지 않아서 장님이 안 된 거요. 다른 사람은 죄다 그것을 보았어. 그래서 장님이 되고 만 것이오. 모든 게 다 그 유성 때문이오."
"죄다 눈 뜬 장님이라고요?"
나는 내 컵에 브랜디를 따르면서 물었다.
"그렇소. 아마도 온 세계의 사람 모두가 다........ 당신만 빼고는."
남자는 또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마셨다. 입가로 흐른 위스키가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나는 물었다.
"당신은 이 가게의 주인이오?“
"그렇소.“
"브랜디 석 잔에 얼마요?“
"그런 거 관두시오. 이제 곧 죽을 인간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오!"
"당신은 몸이 건강해 보이는데...... 이제 곧 죽을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아요."
"아니, 이 위스키를 깨끗이 비우고는 죽을 거요. 봉사가 되서 살아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소?“
남자는 술내 나는 입김을 내게 뿜으며 말을 이었다.
"마누라는 나보다 간이 컸어. 자기도 아이들도 장님이 된
것을 알자 방의 가스 마개를 틀었지. 그런데 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버틸 배짱이 없었소. 혼자 밑의 홀로 도망쳐 왔소. 그러나 위스키 덕분에 나도 배짱이 생겼소. 지금부터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가스가 꽉 차 있는 위의 방으로 돌아갈 작정이오."
곧 남자는 위스키 병을 한 손에 들고 더듬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서 위층으로 사라졌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말려 보았자 남자의 결심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나머지 브랜디를 비우고 나는 술집에서 나왔다. 어디로 갈 목적도 없다. 다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큰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고 기분이 으스스하게 고요했다. 더러운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온 세계의 사람들이 봉사가 되었단 말인가? 런던은 장님의 도시가 되고 만 것일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종말이다. 런던에서 태어나서 런던에서 지내 온 30년간의 생활이 내 마음속에 애절하게 되살아났다.
걸어다니는 식물
나는 어린 시절, 런던 교외에 산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국세청에 다니는 우수한 공인 회계사였다. 그래서 외동아들인 나도 공인 회계사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수학 성적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자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기보다는 집의 정원에서 화초를 돌보는 편이 즐거웠다. 어느 날, 나는 생울타리 구석에서 색다른 식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키가 1.2미터쯤 되었으며 뿌리께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고 목질의 줄기에서 긴 잎자루가 쭉 뻗어 나와 있었다.
"이게 무슨 식물일까?“
나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녹색의 잎을 훑어보았다. 질깃질깃한 가죽질의 짧은 잎이었다. 잎자루의 끝은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저 속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들여다보고 싶어도 키가 작아서 닿지를 않았다. 그 때 아버지가 와서 나를 안아 올려 주셨다. 원추 모양의 깔때기 밑바닥에서 양치 식물의 새순처럼 동그랗게 말린 덩굴이 5센티미터 가량 튀어 나와 있었다. 그것은 끈적끈적해 보였다. 파리 같은 작은 벌레가 여러 마리 깔때기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괴상한, 이름 모를 식물은 이미 온 세계에 분포되어 조용히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에 세상에도 이상야릇한 뉴스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걸어다니는 식물이 발견되었다. 식물이 스스로 뿌리를 들어 올려서 걸어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이 뉴스는 수상쩍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문에서는 지면에 활기를 주기 위해서 해외 뉴스란에 세상에서 신기한 말을 만들어 싣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어다니는 식물>의 뉴스는 수마트라, 보르네오, 벨기에령 콩고, 브라질, 기타 모든 열대 지방에서 계속 들어 왔다. 이렇게 되면 <만들어 낸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뉴스 카메라맨이 열대 지방으로 날아가서 <걸어다니는 식물>의 정체를 필름에 담아 왔다. 그 뉴스 영화를 나는 시내의 영화관에서 보았다. 스크린에는 키가 2미터를 넘는 녹색 식물군이 하나 가득 비쳐졌다.
"아니? 내가 정원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식물이다."
나는 놀랐다. 정원의 것도 곧 2미터 이상으로 자랄 것인가? 해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에콰도르에서 발견한 걸어다니는 식물입니다. 지금 식물들은 모두 같이 놀러 가는 길입니다. 보십시오, 도깨비 식물의 행진을! 이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멋진 착안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감자를 잘 훈련시키면 감자는 밭에서 부엌으로 냄비 속으로 혼자서 걸어 들어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넋을 잃고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식물의 줄기에는 가느다란 수염뿌리와 같은 털이 수북히 나 있었다. 줄기의 하부는 세 갈래로 갈라져서 지상 30 센티미터쯤 되는 곳에서 본체를 받치고 있다. 그 걷는 모양은 마치 목발을 짚은 사람과 같았다. 세 개의 다리 중에서 두 개가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서 남은 한 개를 끌어당긴다. 한 발짝마다 긴 잎자루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려서 당장 에라도 쓰러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서투르게 보이면서도 걷는 속도는 사람과 비슷한 정도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에콰도르의 것이 걷는다면 우리 정원의 것도 걸을는지도 모른다.' 뉴스 영화가 끝나자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정원의 식물을 살펴보았다. 키는 작지만 틀림없이 에콰도르의 것과 같다. 나는 우리 집의 식물이 걸어가기 쉽게 주위의 땅을 파서 부드럽게 해 주었다. 몸을 구부린 채 뿌리가 다치지 않게 흙을 치우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눈앞이 캄캄해져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다. 머리가 빠개지는 것처럼 아프고 온 몸이 쑤셨다. 아버지가 정원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여 안아 일으켰을 때는 내 머리의 한쪽이 붉게 충혈 되어 부르터 있었다.
"누가 그랬니?“
"무엇으로 맞았니?“
아버지와 의사는 번갈아 캐물었으나 나로서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부상자가 그밖에도 또 나와서 마침내 범인이 밝혀졌다. 그 범인은 놀랍게도 <걸어다니는 식물>이었던 것이다. <걸어다니는 식물>은 식육 식물로서 곤충을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가축까지도 습격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무기는 잎자루의 꼭대기에 뭉쳐 있는 양치 식물의 새순 모양의 덩굴이다. 이것이 먹이를 향해 채찍과 같이 날카롭고, 탄력성이 있게 3미터나 뻗는다. 게다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독채찍으로 노출된 피부를 때려서 사람이나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나를 때린 <걸어 다니는 식물>이 아직 다 자라지 않고 독도 약했기 때문이다. 내가 퇴원해서 우리 집에 돌아오니까 정원의 <걸어다니는 식물>은 흔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베어서 불태워 버린 것이다. 한편 식물학자들은 <걸어다니는 식물>의 과학적인 조사 연구에 착수했다. 우선 이상한 식물의 이름을 <트리피드>라고 이름지었다. 이는 <세 갈래 풀>이라는 뜻이다. 트리피드는 남북의 극지권과 사막 지대를 제외한 거의 전지역에 자라고 있었다. 열대 지방에서는 키가 3미터 가까이 까지 자라지만 유럽에서는 2미터에서 2.5미터까지의 것이 많다. 어느 것이나 성장하면 세 개의 뿌리를 땅에서 뽑아 자유로이 걷기 시작한다. 또한 자기가 원하는 곳에 뿌리를 박고 머물 수도 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독채찍이다. 그것은 큰 먹이-이를테면 사람-을 노릴 경우 반드시 머리를 친다. 그 겨냥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확하다. 트리피드는 먹이를 쓰러뜨리면 그 곁으로 이동하여 시체가 썩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독채찍으로 흐물흐물해진 시체의 살을 조금씩 뜯어서 잎자루의 끝에 있는 깔때기로 날라 간다. 깔때기 밑바닥에는 진득진득한 소화액이 있어 죽은 동물의 살점을 소화 흡수하는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독채찍을 크게 무서워하여 트리피드를 발견할 때마다 짓이기거나 뿌리부터 잘라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독채찍만 잘라 내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린 독채찍이 다시 본디대로 자라는 데는 2년이 걸린다. 그래서 독채찍을 잘라 낸 트리피드를 두 세 그루 정원에 심는 일이 유행했다. 해마다 독채찍을 잘라내는 일만 잊지 않으면 트리피드는 아이들의 좋은 놀이 상대였던 것이다.그러나 산지나 삼림 지대의 트리피드는 위험했다. 나무 그늘이나 덤불 속에서 느닷없이 긴 독채찍이 뻗어 와서 여행자를 때려눕히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되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엽총으로 잎자루 끝을 독채찍과 함께 쏘아 날리는 것이었다. 열대 정글의 원주민들은 길고 가벼운 장대 끝에 ㄱ자 형의 칼을 달아서 들고 다녔다. 그러나 총이나 칼이 달린 장대는 이 쪽에서 먼저 트리피드를 발견했을 때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 트리피드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서 독채찍을 뻗어 왔을 때에는 잘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루기 쉬운 용수철 총이 고안되었다. 이 총은 얇은 강철의 회전판, 십자형의 칼날, 작은 부메랑 따위를 발사한다. 어느 것이나 25미터 거리에서 트리피드의 잎자루를 절단할 수는 있으나 12미터 이상 떨어지면 명중률이 떨어진다. 트리피드의 연구는 온갖 각도로 행해졌다. 그리고 트리피드의 이상한 성질, 습성, 조직 구조 등이 잇달아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의 최대의 성과는 트리피드에서 극히 질이 좋은 식용유를 얻을 수 있다는 발견이었다. 동시에 신종의 식물이 어찌하여 단기간 중에 거의 세계에 분포하게 되었는가-하는 문제의 수수께끼도 해명되었다. 내가 태어났을 즈음에는 런던 시의 인구는 2천 5백만 명으로 크게 불어나 있었다. 물론 전세계가 폭발적인 인구 증가 시대를 맞이하여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북부의 툰드라 지대를 개척하여 대규모의 식량 증산에. 착수하는 한편 새로운 식용 식물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트리피드를 발견했다. 트리피드에서는 극히 양질의 식용유가 나온다. 게다가 극지와 사막 외에는 어디서나 재배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즉각 국내의 각지에 트리피드의 실험 재배장을 만들고 트리피드유의 생산 설비를 갖추었다. 트리피드 유를 대량 생산하여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는 세계 각국에 팔자는 것이 소련의 목적이었다. 그 때까지 트리피드 식물에 관한 정보는 최고의 국가 기밀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트리피드 실험 재배장의 어느 과학자가 소련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져서 유럽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망명지인 유럽에서 소련의 국가 기밀을 팔아서 크게 한탕 벌자는 넉살 좋은 것이었다. 그 과학자는 실험 재배장에서 트리피드 씨앗을 한 상자 훔쳐내어 비행기로 소련 탈출을 꾀했다. 그런데 방공 레이더망에 잡혀 소련 공군 전투기의 추격을 받았다. 과학자의 비행기는 태평양 위의 성층권에서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 뒤에 흰 솜구름 같은 것이 남았다. 그것은 몇천만 개나 되는 트리피드의 씨앗이다. 극히 가벼운 씨앗은 기류를 타고 몇 주일, 또는 몇 달 동안이나 공중 여행을 계속하여 전세계의 육지에 낙하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못 믿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거의 동시에 트리피드를 발견하게 된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더 이상 그럴 듯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트리피드에서 식용유가 나온다는 그것이 중요하다. 유럽 식용유 회사에서는 즉시 대규모의 트리피드 재배를 시작하여 트리피드유의 생산에 착수했다. 트리피드는 버릴 것이 없었다. 기름이나 즙을 자고 난 찌꺼기도 영양가가 높아서 가축의 먹이로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유럽 식용유 회사는 유럽의 식량 부족 해결에 큰 역할을 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했다. 나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유럽 식용유 회사의 식물 연구원이 되었다. <걸어다니는 식물>의 뉴스 영화를 본 날부터 나는 트리피드의 포로가 되었다. 독채찍에 머리를 맞고 죽을 뻔했어도 단념하지 않았다. 공인 회계사가 되라고 하는 아버지의 권유를 거스르고 결국 트리피드의 연구를 직업으로서 선택한 것이었다. 5년 후, 부모님은 비행기 사고로 모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후로 트리피드만이 나의 삶의 보람이 되었다. 이번에 병원으로 들려 오는 사고를 일으켰을 때, 나는 동료 식물 연구원 월터 러크너와 함께 트리피드 재배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우리는 철망으로 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독채찍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트리피드는 독채찍을 남겨 두는 편이 채취한 기름의 질이 좋아진다. 그래서 재배장에서는 독채찍을 자르지 않고 재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방비구를 착용하고 재배장에 들어가야만 했다. 세 개의 밭에 다 익어 가는 트리피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어느 것이나 한 그루씩 쇠말뚝에 사슬로 묶어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론가 걸
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탁탁탁........ 밭의 여기저기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트리피드가 잎자루의 뿌리 께에 나와 있는 세 개의 낭창낭창한 봉상돌기로 잎자루를 치는 소리였다.
"트리피드들이 얘기를 하고 있다.“
월터가 말했다.
"이봐, 식물이 말을 하나? 하고 나는 웃었다.
그러나 월터는 전혀 농담이 아닌 듯 진지하게 말했다.
"트리피드는 정상적인 식물이 아닐세. 동물처럼 걷는단 말이야. 말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어. 물론 말이라고 하지만 모종의 통신이라는 뜻이지."
월터는 트리피드에게 지능이 있다고 믿고 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트리피드에는 동물과 같은 뇌수가 없다. 따라서 그 지능도 동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야. 빌, 자네는 트리피드가 사람을 급습할 때 독채찍으로 어디를 노리는지 알지. 반드시 드러난 부분을 노린다. 거의가 머리고 그 다음이 손이야. 그리고 피해자는 목숨을 건져도 장님이 되는 사람이 많아. 즉, 트리피드는 사람에게서 활동력을 빼앗는 방법을 참으로 잘 알고 있어. 장님인 사람은 트리피드에겐 대적이 안 돼. 트리피드는 눈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만 사람은 눈이 안 보이면 트리피드의 공격에서 달아날 수 없으니까.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어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그 앞일세. 트리피드는 흔히 집단으로 행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어떠한 방법으로든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어. 아마도 저 탁탁거리는 소리는 통신의 일종이라고 난 생각하네."
그러나 월터도 탁탁 통신의 내용까지는 몰랐다. 나는 앞장서서 트리피드의 행렬 사이를 걸었다. 어느 것이나 나보다 키가 컸다. 줄기의 뿌리 께에는 칼자국이 나 있다. 그것은 트리피드유의 원료가 되는 수액을 채집한 자국이었다. 트리피드는 사슬에 묶여 있어도 뿌리를 쳐들고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줄이 흐트러져 있다.
"8월이 되면 또 골치 아프겠는걸."
나는 잎자루 끝을 보면서 말했다. 8월의 결실기가 되면 깔때기 바로 밑에 있는 깍지가 사과의 두 배 반 가량의 크기로 부풀고 암녹색으로 빛이 난다. 이것이 터질 때는 탕 하고 소리가 난다. 20미터나 떨어져 있어도 들릴 만큼 큰 소리다. 그리고 희고 가벼운 씨가 증기처럼 공중으로 터져 나가 바람에 날려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 무렵, 밭 곁에 서면 '탕, 탕, 탕!‘ 하고 마치 총격전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이 소란스럽다. 그러나 그 밖의 계절은 봉상돌기로 잎자루를 때리는 탁탁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트리피드의 뿌리를 살펴보려고 몸을 구부렸다.
"독채찍이다!“
월터의 고함 소리와 동시에 잎자루의 깔때기에서 긴 독채찍이 쓱 뻗어 나의 철망 마스크를 때렸다.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었으나 이 때는 운이 나빴다. 독채찍에 달려 있는 작은 독주머니가 몇 개 터져서 독액이 튀어 내 눈에 들어간 것이다.
"당했다!“
나는 타는 듯한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땅에 쓰러져 뒹굴었다.
"빌, 정신 차려!“
월터는 나를 연구소로 옮겨 해독제로 응급 처치를 했다. 그리고 자동차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아마도 월터의 응급 처치가 좋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어릴 때 정원에서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질렸고, 유럽 식용유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도 여러 번 독채찍 공격을 받았으므로 그 독에 대해서 웬만큼 저항력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죽었거나 아니면 목숨을 건졌어도 장님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술집 주인의 얘기로는 어젯밤, 녹색의 유성우를 본 사람은 모두 다 장님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일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나는 트리피드의 독이 눈에 들어가서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에 유성우를 보지 못했다. 즉, 나를 장님으로 만들려고 한 트리피드가 오히려 나를 장님이 되지 않게 지켜 준 것이 된 셈이다.
인간 지네
나는 상점가의 한길로 나왔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여느 때는 번화하던 거리도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 사람이 보인다. 다들 가게를 따라 손으로 더듬거리며 느릿느릿 걷고 있다. 한눈에 장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걸음걸이였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밝은 5월의 햇빛이 끝없이 파란 하늘에서 내리쬐고 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상공에는 무수한 인공 위성이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기상 위성, 통신 위성, 지구 물리 관측 위성 같은 것뿐만 아니라 핵탄두를 단 원수폭 위성, 방사성 물질이 담긴 방사능 위성, 비루스와 박테리아 등의 병원체가 담긴 유독 미생물 위성까지 지구를 도는 궤도에 실려 있었다. 이러한 무서운 위성 병기는 도리어 지구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지상에서 단추 한 개만 누르면 전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어서 서로 전쟁을 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위성 병기보다도 무서운 것은 세계적인 인구 증가에 의한 식량 부족이었다. 그 문제도 트리피드의 재배로 전망이 상당히 밝아져왔다.
"그러나 모두가 장님이 되어 버리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나는 시내를 걸어 보아 이 이변이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상당히 넓은 범위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브랜디를 마신 탓인지 배가 더욱 고팠다. 레스토랑과 식료품 가게의 쇼 윈도에는 먹을 것이 즐비하다.
"맛있겠구나.“
나는 일일이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어느 가게에도 사람이 없었다. '쇼 윈도의 유리를 깨부수고 먹고 싶은 것을 가져갈까........' 나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먹을 것을 가진 다음 돈을 놔두면 도둑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30년 동안, 선량한 시민으로서 정직하게 살아 왔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해서 쇼 윈도의 유리를 때려부수는 강도나 폭도와 같은 짓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고픈 배를 안고 맛있어 보이는 먹을 것을 곁눈질로 흘겨보면서 걸었다. 그러던 중에 자동차 때문에 길이 막혔다. 한 대의 택시가 보도 위로 올라와서 식료품 가게 앞에 라디에이터를 처박고 있었다. 차의 운전사도 점원도 보이지 않는다. 라디에이터 주위는 요리가 잔뜩 있었다. 이번에는 내 손으로 유리를 두들겨 깨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편하다. 나는 택시를 타넘고 배가 가득 찰 만큼의 음식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카운터 위에 음식값을 놓았다. 길 반대쪽에 유원지가 있었다. 잔디밭 사이에 자갈길이 만들어져 있고 양쪽 가로수의 신록이 아름답다. 나는 나무 그늘의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조용한 장소였다. 이따금 철책 앞을 사람의 그림자가 다리를 끌면서 지나갈 뿐이었다. 참새가 몇 마리, 자갈길에 내려왔다. 내가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더니 힘차게 쪼아먹었다. 아마도 새들은 장님이 안 된 모양이다. 잠시 쉬고 나서 나는 또 으스스하게 고요한 시내를 걸어서 하이드 파크로 나왔다. 거기에도 인적이 거의 없었다. 버려진 승용차와 트럭이 여기저기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큰 기념비 곁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힘차게 달려오다가 기념비에 머리를 부딪힌 모양이다. 겨우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명의 남녀가 철책을 따라 길을 더듬거리면서 걸어오다가 철책이 없어지자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발로 땅을 스치듯이 걸었다. 잔디밭에 고양이가 두세 마리 있었다. 눈은 다치지 않았는지 사방을 살피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피카딜리로 향했다. 이 때 새로운 소리가 났다. 톡톡톡. 한 남자가 지팡이로 건물의 벽을 두들기면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내 발소리가 들렸는지 남자는 멈춰 서서 경계하듯이 이 쪽의 태도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곧장 걸어가세요."
나는 안심을 시켜 주었다. 상대방 남자는 검은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즉, 진짜 장님인 것이다. 오늘 아침에 벼락 장님이 된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가만히 있어 주실 수 없겠소? 오늘은 멍청한 녀석과 몇 번이나 부딪혔는지 몰라요.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햇빛을 느끼니까 낮이라는 것은 알 수 있는데, 어째서 밤중처럼 조용할까? 모든 게 정상이 아닌 것 같군요."
"바로 그렇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얘기해 주었다.
"흐음, 친구가 잔뜩 생겼군. 그러나 제대로 장님이 되려면 상당히 힘이 들걸.“
장님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또다시 벽을 똑똑 두드리면서 가슴을 펴고 자신에 찬 모습으로 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피카딜리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가게를 따라 더듬거리며 걸어가면서 여기저기서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나는 눈 뜬 장님들을 피하기 위해 길에 버려진 차들 사이로 누비며 걸었다. 어느 가게 앞에서 젊은 남자와 어린 소녀를 안은 여자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소녀가 큰 소리로 울며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것을 듣고 남자가 물었다.
"아기는 눈이 보입니까?“
"예...... 나는 안 보이지만."
여자가 대답하자 남자는 손가락을 하나 내밀어 쇼윈도의 유리를 만졌다.
"도련님, 저기 있는 것은 뭐지?“
"난 도련님이 아니어요." 하고 소녀는 항의했다.
"자, 메리. 아저씨에게 가르쳐 드려라."
어머니는 아이를 재촉했다.
"예쁜 언니들이 잔뜩 있어요." 하고 소녀는 말했다. 쇼 윈도에는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 인형이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손으로 더듬어서 다음 가게의 쇼 윈도로 갔다.
"그럼 아가씨, 여기에는 뭐가 있지?"
"사과하고 무화과여요.“
"됐다."
남자는 한쪽 구두를 벗어서 그 뒤축으로 유리를 때렸다. 처음에는 실패했으나 두 번째는 잘 되었다. 쨍그랑 ! 유리 깨지는 소리가 길에 퍼졌다. 남자는 구두를 도로 신고 깨진 유리 사이로 한 팔을 넣어 더듬거려서 오렌지를 두 개 집었다. 그 하나는 어머니에게, 또 하나는 소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듬어서 자기 몫을 한 개 집더니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오렌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우물쭈물했다.
"왜 그러십니까? 오렌지를 싫어하시나요?" 하고 남자는 물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건 좋지 않아요."
"달리 먹을 것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까? 어서 빨리 들어요."
"그건 그래요."
그제야 여자는 아이를 내려놓고 오렌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에는 백 명 가까운 남녀가 있는 듯했다. 그 대부분이 뒤죽박죽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청맹과니가 되어 있어 손에 집히는 것을 아무렇게나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별안간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와 음정도 맞지 않는 합창이었다.
내가 죽거든
장례식은 집어치워
뼈를 알코올에다
담가 다오
그 노래 소리는 차츰 가까워져서 광장 가득히 퍼졌다.
머리와 발치에
술병을 놓아 다오
그러면 시체도
오래 가겠지
곧 골목에서 남자들 한 떼가 나타났다. 서른 명쯤 될까? 모두 한 줄로 서서 앞사람 어깨에 양손을 얹고 노래 소리에 맞춰 다리를 끌면서 지네처럼 전진해 오는 것이었다. 광장 한가운데까지 오자 선두의 리더가 큰 소리로 외쳤다.
"중대, 멈춰서!"
주위의 장님들은 장승처럼 서서 보이지 않는 눈을 인간 지네에게로 향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하고 있었다. 리더는 관광 여행 안내자처럼 주워 섬기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여기가 유명한 피카딜리 서커스올시다. 런던의 꽃, 세계의 중심 - 상류 사회의 신사 분들이 술과 노래를 즐기는 곳입니다.“
그 남자는 장님이 아니었다. 주위를 슬쩍슬쩍 날카롭게 둘러보는 눈길로 알 수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눈을 다치지 않은 것이겠지. 그러나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유명한 카페 로열에서 쉬도록 합시다. 이 가게에는 전세계의 술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색시는?“
한 남자가 물었다.
"색시야 여기도 있지."
리더는 앞으로 걸어 나와서 가까이 있는 젊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여자는 비명을 길렀다. 그러나 리더는 억지로 그 남자에게로 끌고 갔다.
"당신과 같은 장님이지만 굉장한 미인일세........"
"꺄아악."
주정꾼 남자는 울부짖는 젊은 여자를 손으로 더듬어 껴안았다. 그러자 그 다음 남자가 떠들었다.
"두목, 나도 부탁합니다!“
"좋았어 "
리더는 주위를 둘러보고 가게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젊은 여자 쪽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갔다.
이런 일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게 섰거라!“
나는 정신없이 리더에게로 뛰어가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더 잽쌌다. 나는 턱에 강한 펀치를 맞아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길 한가운데에 쭉 뻗어 있었다. 이미 장님 갱들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안전 지대에서 키가 큰 장님 목사가 외치고 있었다.
"......이 세상의 종말이 왔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불에 타고 유황의 골짜기에서 ........"
이 마당에 하느님께 기도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는 쿡쿡 쑤시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저 장님 갱들을 눈이 보이는 사람들의 도덕으로 견주어 비난하는 것은 잘못인지도 모른다. 억지로 끌려간 여자들도 그 편이 오히려 행복할지도 몰라. 갑작스럽게 장님이 된 여자가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리 없다. 저 갱들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식량을 손에 넣을 수는 있다. 그 패들에게는 눈이 보이는 리더가 붙어 있으니까. 사람에게 있어 눈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나는 장님이 안 된 것을 아무리 감사해도 못 다 할 심정이었다. 목사의 설교와는 관계없지만 확실히 이 세상의 종말이 왔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인간이 하룻밤 사이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눈이 보이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다행히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독신인 내게는 아내도 자식도 아무도 없다. 우선 내 한 몸만 걱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노예가 된 여자
나는 아무도 없는 리젠트 팔레스 호텔의 식당에서 브랜디를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 이젠 카운터에 대금을 놓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다. 돈으로 무엇을 사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 호텔을 나오자 나는 소호로 향했다. 이 지구는 피카딜리 서커스보다도 훨씬 더 혼잡했다. 좁은 거리와 보도에서는 청맹과니들이 서로 부딪히고 욕질을 하고 있었다. 상점의 쇼 윈도는 거의가 깨부숴지고 그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무도 자기 앞에 있는 가게가 무슨 가게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또 가게 안으로 파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모두들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부딪혀서 상대방이 뭔가 안고 있으면 그것을 빼앗아 달아난다. 빼앗긴 쪽은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러 아무나 가릴 것 없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덤벼들어 때린다. 한 남자가 내 눈앞에서 다른 남자가 가지고 있는 큰 깡통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그것은 식료품 통조림이 아니었다. 페인트 깡통이었다. 장님들끼리의 흉하고 가련한 싸움을 보고 있자니까 내 가슴은 죄듯이 아팠다. 이 사람들을 먹을 것이 있는 가게로 데려다 주는 것이 내 의무일까? 그러나 상대는 몇천 명, 몇만 명이나 있다. 잘못하다간 식료품 쟁탈전으로 부상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여자와 어린이까지 소동에 휩쓸려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도 없다.“
나는 넓은 길로 되돌아오려고 했다. 이 때 골목 안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 왔다. 그것은 여러 번 거듭하셔 길게 꼬리를 물고 울렸다. 나는 급히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큰 남자가 가는 놋쇠 막대기로 땅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를 때리고 있었다. 여자의 등은 옷이 찢어져서 빨갛게 부르터 있었다. 여자는 달아나려고 해도 달아날 수가 없었다. 양손이 등뒤로 묶이고 그 끈의 끝이 남자의 왼쪽 손목에 묶여 있는 것이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마침 남자가 오른손을 쳐든 순간이었다. 나는 남자한테서 막대기를 빼앗아 그것으로 어깨를 힘껏 후려쳤다.
"이 새끼!“
남자는 무거운 장화로 내 쪽을 걷어찼다. 물론 나는 잽싸게 몸을 비켰다. 장님인데다 왼쪽 손목이 끈으로 여자와 이어져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다. 두세 번 헛되이 허공을 걷어차자 남자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여자를 때렸다.
"야, 일어서!“ 하며 끈을 당겨서 여자를 일어서게 하려고 했다. 나는 남자와 뺨을 갈겼다. 그리고 상대방이 주춤하는 틈에 호주머니에서 작은칼을 꺼내어 두 사람을 잇고 있는 끈을 잘랐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상대방은 휘청거리며 몸이 반쯤 돌아 자기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자를 이리 내놔라!“
남자는 자유로워진 왼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것은 내게 맞지 않고 벽돌 벽에 부딪혔다. 손가락 관절이 삔 모양이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왼손가락을 누르면서 아픈 듯이 신음했다. 그 틈에 나는 여자를 도와 일으켜서 골목에서 끌고 나와 양손의 끈을 끌러 주었다. 여자는 지저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눈이 보이세요?“
"물론이오.“
"아, 다행이야. 눈이 보이는 것은 나뿐인가 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여자는 때묻은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는 작은 술집으로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서 의자에 앉혔다. 쇼 윈도의 유리는 깨져 있었으나 가게 안은 어지럽혀지지 않았다. 기운을 차리게 하려고 위스키를 컵에 따라서 여자에게 주고 나도 컵을 들고 옆에 앉았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자 여자는 겨우 침착해졌다. 나도 술을 홀짝이면서 여자의 태도를 슬쩍 관찰했다. 여자의 옷은 너덜너덜했으나 상당히 고급품이었다. 금발의 머리와 얼굴은 지저분하나 제법 미인이다. 키는 나보다 10센티미터쯤 작다. 몸은 날씬하나 여윈 편은 아니다. 나이는 스물 넷쯤 될까? 손은 매끈매끈하고, 손톱을 길게 길러 곱게 다듬고 있었다.
"저, 굉장히 사나운 몰골이지요."
여자는 일어서서 거울 곁으로 갔다.
"역시...... 잠깐 실례하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가게 한쪽의 화장실로 사라졌다. 한 10분 지나서 여자는 돌아왔다. 얼굴과 머리를 깨끗이 씻고 말끔해져 있었다.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난 틀림없이 미쳤을 거예요."
여자는 의자에 앉아서 자기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젤라 플레이튼-그것이 여자의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듯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의 집은 딘 로드에 있었다. 그저께 밤에 조젤라는 어느 파티에 참석하여 술을 과음했다. 어제 아침, 눈을 뜨니까 심한 숙취로 머리가 아팠다. 오후가 되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므로 4시경에 침실에 들어가서 강한 수면제를 먹고 푹 자고 말았다. 그래서 어젯밤의 유성 소동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침실로 들어와서 조젤라를 깨웠다.
"얼른 메일 선생님을 불러 다오. 난 장님이 됐다...... 눈이 전혀 안 보이는구나."
"도대체 어찌 된 일이어요?“
조젤라는 깜짝 놀라 뛰어 일어나서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하인들을 찾았으나 다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장님이 되어 버려 쓸모가 없다. 전화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조젤라는 자동차로 의사를 데리러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상하다.“
조젤라는 2킬로미터쯤 차를 달리고 나서야 겨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런던 근처의 대부분이 하루 밤사이에 장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일 선생님은 나처럼 눈을 다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희미한 희망을 안고 조젤라는 차를 운전했다. 그러나 리젠트 가에 접어들었을 때 엔진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결국 서고 말았다. 가솔린이 떨어진 것이다. 너무 급하게 집에서 뛰쳐나오느라 계기 보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 근방에 주유소가 없나?“
조젤라는 차에서 나왔다. 그러자 한 남자가 더듬거리며 다가왔다.
"이봐요, 좀 기다려요.“
"왜 그러세요?"
조젤라의 목소리를 듣고 남자는 우뚝 멈춰 섰다.
"길을 잃었어요.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어요."
"여긴 리젠트 가에요. 당신 뒤가 뉴 갤러리 영화관이고요.“
"고맙소. 이왕이면 보도가 어딘지 좀 가르쳐 주지 않겠소, 아가씨?“
남자는 곁에까지 오더니 한 손을 뻗어 조젤라의 옷소매를 잡았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덤벼들어 조젤라의 양팔을 잡고 말했다.
"당신은 눈이 보이는군. 어째서 당신만 눈이 보이는 거야?"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조젤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별안간 남자는 조젤라를 뒤돌려 세우고는 길에다 밀어 넘어뜨렸다. 무릎으로 조젤라의 등을 누르고 호주머니에서 끈을 꺼내어 조젤라의 양 손목을 잡아 묶었다.
"이제 됐다.“
남자는 조젤라를 끌어 일으켜 세웠다.
"지금부터 너는 내 눈 노릇을 대신 하는 거다. 알겠나? 나는 배가 무척 고프다. 어서 맛있는 것이 있는 데로 데리고 가거라.“
"싫어요. 손을 풀어 줘요......
조젤라는 달아나려고 했다. 그 때 조젤라의 얼굴을 남자가 손바닥으로 때렸다.
"자, 시키는 대로 해. 먹을 것을 찾는 거야!"
항거하면 어떤 끔찍한 변을 당할지 모른다. 조젤라는 남자를 식당과 술집으로 인도하여 음식과 술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벼락 장님인데도 남자는 상당히 감각이 예민했다.
"너, 또 달아나려고 하는구나."
남자는 조젤라에게 튼튼한 끈을 찾아오게 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왼손과 조젤라의 손목을 잡아매고 말았다.
"그런 꼴로 노예처럼 부려 먹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나는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버렸어요. 그랬더니 마구 때려서...... 만약 당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을 거여요."
조젤라는 기분 나쁜 기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그런데 우린 앞으로 어떡하죠?“ 하고 내가 말했다.
"난 지금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장님이 된 아버지가 계셔요.“
조젤라는 더 이상 의사를 찾는 것을 단념하고 있었다. 나도 조젤라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내게는 가족이 없고 또 갈 데도 없었던 것이다.
몰살당한 집
이미 오후 4시가 지나 있었다. 리젠트 가까지 되돌아오다가 우연히 나는 칼 가게를 발견했다.
"무기를 손에 넣읍시다.“
나는 조젤라를 꾀어서 가게로 들어갔다. 우선 두 사람은 가죽 벨트를 허리에 매고 칼집에 든 칼을 찼다.
"해적이 된 듯한 기분이에요."
조젤라가 말했다. 가게 앞에 대형 승용차가 서 있었다.
"가솔린은 충분해요.“
나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옆자리에다 조젤라를 앉혔다. 차는 북쪽으로 향했다. 속도를 내는 것은 무리였다. 눈먼 사람들이 차 소리에 놀라 길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서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해서 우리는 지그재그로 앞으로 전진한다. 도중에 큰 빌딩이 맹렬한 기세로 불타고 있었다. 화재는 한 군데만이 아니었다.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옥스퍼드 가에서 리젠트 공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더듬거리며 방황하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이 없어서 마음이 좀 편했다. 널찍한 잔디밭 위를 트리피드의 작은 무리가 두세 개 남쪽으로 흔들흔들 걸어간다. 어떻게 잡아 뺐는지 트리피드는 무거운 쇠말뚝을 사슬과 함께 끌고 다녔다.
"이 세상의 종말인데도 저것들은 신이 나는가 봐요."
조젤라가 말했다. 얼마 안 가서, 나는 조젤라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상당히 훌륭한 저택이었다. 문에서 현관까지 관목이 줄지어 심어져 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대문을 열어 젖혔다. 조젤라가 앞장서서 정원수 사이를 걸어갔다.
"앗, 퍼어슨 영감님!“
갑자기 조젤라는 고함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자갈길에 남자 한 명이 엎어진 채 고개가 꺾여 얼굴의 한쪽을 보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선명하게 붉은 줄이 나있었다.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당한 것이다.
"위험해!“
나는 큰 소리로 조젤라를 불러 세우고 좌우의 정원수 숲을 재빨리 살폈다. 오른쪽의 관목 사이에 트리피드의 머리가 보인다.
"이리 돌아와요 ! 빨리!“
"왜요?“
조젤라가 돌아보았다. 그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입술이 와들와들 떨리고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빌, 뒤에 ......"
나는 홱 돌아보았다. 2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그루의 트리피드가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순간적으로 나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획! 독채찍이 소리를 내며 나를 습격했다. 그러나 아픔은 느끼지 않았다. 다음 공격이 오기 전에 나는 트리피드에게 덤벼들었다.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나 자신도 함께 쓰러지면서 양손으로 잎자루의 상부를 잡고 깔때기 째 독채찍을 잡아뜯으려고 하였다. 그 잎자루는 낭창낭창해서 잘 꺾어지지 않는다. 나는 손끝에 힘을 주어 상대방을 갈가리 찢어 놓고 일어섰다. 조젤라는 같은 자리에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이리 와요. 당신 뒤에 또 있어요."
나는 숨을 헐떡이며 손짓을 했다.
그제야 겨우 조젤라는 걸어왔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트리피드에게 맞아도 괜찮아요?“
분명히 나는 독채찍에 얻어맞았다. 손등과 목에 빨간 줄이 엷게 생겨서 근질거렸다.
"난 트리피드의 독에 대해 저항력이 생겨 있어요."
그렇긴 해도 근질거리는 정도로 끝날 리는 없다. 문득 나는 허리춤의 칼이 생각났다. 그것으로 독채찍을 뿌리 께에서 잘라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럼 그렇지, 독주머니가 다 비었군. 이놈은 사람을 마구 쏴서 독을 다 쓰고 말았군."
나는 자갈길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맥을 짚어 볼 필요도 없었다. 흙빛이 된 얼굴만 보아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엾어라.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정원사 겸 운전사로 일해 온 사람이어요."
조젤라는 목이 메었다. 퍼어슨 영감님 곁에 또 하나의 트리피드가 버티고 있어 현관으로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옆문으로 들어가요.“
조젤라는 정원수 숲이 끝난 데서부터 화단 사이로 통하는 좁은 통로로 나왔다. 그러나 거기서 또 우뚝 멈춰 섰다.
"아, 저걸 보셔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몸의 절반을 통로에, 나머지 절반은 화단에 걸치고 넘어져 있었다. 젊디젊은 얼굴에 붉은 줄의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애니 에요. 가엾은 애니."
조젤라는 목이 메었다. 눈에 눈물이 배어 나왔다.
"둘 다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을 거요. 얼굴을 직접 맞으면 독이 빨리 도니까.“
그런 말을 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조젤라를 위로하려고 했다. 화단에는 트리피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옆문으로 집안에 들어갔다.
"아버지, 아버지!"
조젤라가 큰 소리로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하인들도 나오지 않는다. 집안은 으스스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상해요."
조젤라는 앞장서서 복도를 지나 홀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휙! 녹색의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조젤라의 머리를 스쳐 문을 때렸다. 조젤라는 허둥지둥 문을 닫고 나를 쳐다보았다.
"홀에도 있어요.“
이래 가지고는 거실이나 침실 쪽으로 갈 수가 없다. 우리는 옆문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거기서 잔디밭을 따라 거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돌았다. 거실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프랑스식 창문이 열려 있었다. 한쪽 유리창은 깨져 있었다. 흙 묻은 것을 질질 끈 자국이 프랑스식 창문 있는 곳에서부터 거실의 양탄자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털이 수북한 트리피드가 하나 서 있었다. 그 줄기의 꼭대기는 하늘에 닿을 만큼 크고 약간 흔들리고 있다. 그것은 이미 식물이 아니다. 녹색의 괴물이었다. 그 발 밑에는 남자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나는 조젤라의 한 팔을 잡고 물었다
"아버진 가요?“
"네."
조젤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먹였다. 너무 슬퍼서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안됐지만...... 만약 내가 갑자기 장님이 되었다면 상점가에서 먹을 것을 서로 빼앗으려고 싸움을 하느니 당신 아버
지와 같이 되기를 바라겠소."
"그 말이 맞아요."
조젤라는 겨우 침착성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저대로 놔 둘 수는 없어요."
이 때 나는 한 트리피드가 정원 숲에서 나와서 잔디밭을 지나 우리 쪽으로 똑바로 전진해 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길게 뻗은 독채찍이 허공을 칠 때마다 잎들이 술렁술렁 소리를 낸다.
"아직 또 몇이나 있는지 몰라요. 우물쭈물하다가는 우리도 아버지와 같은 꼴이 돼요."
나는 조젤라의 한 팔을 잡고는 정원을 가로질러 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끝내 조젤라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지 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조젤라를 위로할 생각은 않고 다음에 해야 할 일들을 궁리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트리피드를 몰아 내고 무덤을 파서 조젤라의 아버지를 묻는다는 것은 무리다. 죽은 사람의 처치보다 우리가 안전하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되는 트리피드가 런던을 휘젓고 다니는 것일까? 가정용의 것은 죄다 독채찍을 잘랐을 것이다. 그러나 공원 같은 데서는 독채찍을 자르지 않고 쇠말뚝에 묶거나 쇠망으로 울타리를 만들거나 해 놓았다. 또한 시내에는 트리피드의 재배장이 몇 군데 있고 교외에는 대규모의 실험장 따위가 많이 있었다. 조금 전에 나는 리젠트 공원에서 쇠말뚝을 질질 끌면서 걸어다니는 트리피드의 무리를 보았다. 트리피드는 쇠말뚝 따위를 잡아 뽑을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다. 쇠망 울타리도 부숴 버릴지 모른다. 문득 나는 월터의 말이 생각났다.
"트리피드에겐 지능이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일단 시력을 잃고 나면 트리피드의 힘과 지능에 대항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살아남기에는 트리피드 쪽이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저벅, 저벅, 저벅.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났다. 한 그루의 트리피드가 정원 숲 사이에서 문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차를 출발시켜요! 차를 출발시켜요!“
조젤라가 겁을 먹고 소리쳤다.
"차안에 있으면 괜찮아요."
나는 독채찍을 가진 트리피드를 늘 다루어 왔으므로 당황하지 않았다. 트리피드는 문설주 곁에서 멈춰 섰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트리피드는 가는 막대로 잎자루를 투닥투닥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 옆집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젤라는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놈이 되돌아오기 전에 빨리 여기서 도망쳐요.“
여류작가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클라켄웰로 갑시다. 거기는 우수한 트리피드 총과 방어 기구 만드는 가게가 있어요. 그리고 본드 가로 나가서 당신이 입을 옷을 구합시다.“
그러나 길모퉁이를 돈 순간 사람의 떼거리가 보였다. 길 가득히 퍼져서 양손을 앞으로 뻗고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여자 하나가 발이 걸려서 넘어졌다. 뒤에서 오던 사람이 거기 부딪혀서 차례차례 뒹굴었다. 여자의 비명! 남자들의 욕지거리! 여기저기서 장님들끼리 치고 받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소란 통에 저편에 녹색의 긴 줄기 셋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서 차를 골목 안으로 급히 몰았다.
"보았어요? 트리피드가 저 사람들을 뒤쫓아 다니고 있어요!"
조젤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골목을 빠져서 차는 다시 큰길로 나왔다.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경적을 계속 울리며 천천히 차를 몰았으나 마침내 앞도 뒤도 사람의 물결 속에 휘말리고 말았다.
"장님들이 우리를 붙잡으려 하고 있소. 더 이상 차에 타고 있다간 위험해요.“
나는 엔진을 건 채로 차에서 빠져 나와 조젤라를 내려 주었다. 이 때 뒤의 장님들이 차에 따라붙었다. 그 중 한 명이 문의 손잡이를 찾아서 비집어 열고 차안을 손으로 더듬었다. 또 한 사람이 반대쪽 문을 열고 운전석을 더듬었다.
"운전사가 없다?"
"어디로 갔지?"
장님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나와 조젤라는 눈먼 폭도들에게 잡혀서 그들의 길 안내역의 노예가 될 뻔했다. 나는 조젤라의 손을 꼭 잡고 청맹과니 행세를 하면서 군중 속으로 휩쓸려들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위치를 바꾸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빠져 나왔다. 1.5킬로미터쯤 걸어갔더니 다른 차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스테이션 왜건이었다.
"이거면 짐을 나를 수 있으니까 다행이군."
나는 조젤라를 차에 태우고 클라켄웰의 공장으로 향했다. 2, 3백 년 전부터 정교한 금속 기구를 만들어 온 유명한 공장이다. 그 전에도 일 관계로 이 곳에 여러 번 온 일이 있다. 공장 안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나는 멋진 트리피드 총을 몇 자루, 그리고 쏘는 강철 부메랑 수십 발, 또 쇠망이 쳐진 헬멧 두 개를 들고 나와 차에 실었다.
"그 다음은 입을 옷이야."
우리는 본드 가의 양품점에 차를 갖다 대고 필요한 옷가지를 걷어들였다. 그리고 옆의 식료품 점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식료품을 꺼내다 잔뜩 차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아파트를 찾는 일만 남았다. 우리는 고급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3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나는 복도에 나란히 있는 문을 하나 하나 노크해 보아 대답이 없는 방을 찾아냈다. 크림 빛 양탄자가 쫙 깔린 훌륭한 방이었다. 소파와 의자도 고급품이었다. 그러나 전기와 가스는 끊겨 있었다. 트랜지스터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켜 보았으나 둘 다 찍찍 하는 잡음이 들릴 뿐이었다. 런던은 죽어 있었다. 아니, 전세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눈이 보인다는 것은 비할 데 없이 멋지고 또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장님 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임금님이라는 속담이 있어요. 분명히 우린 임금님이오.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지고 제멋대로 살수가 있소. 그러나 장님들한테 붙들려서 노예가 될 우려도 있어요. 특히 조젤라, 당신은 여자니까 한층 더 위험해요. 앞으로는 눈이 보인다는 것을 눈 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해야 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이런 비참한 꼴은 딱 질색이야. 잠깐 멋 좀 부리고 올게요.“
조젤라는 조금 전에 구한 옷가지를 안고 욕실로 갔다. 수도만은 아직 그럭저럭 나오고 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 시가의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밑에 빨간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죽은 도시가 불타고 있다! 얼마 안 가서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하여 그 이름조차도 잊혀지고 말 것이다. 나는 어두운 기분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무엇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돌아보니까 조젤라가 서 있었다. 푸르스름한 비단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은빛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은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것처럼 말끔하다. 좌우의 귀에는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창백하게 빛나고 있다.
"아름다워! 멋있어요!"
나는 칭찬해 주었다.
"고마워요. 빌...... 하지만 드레스는 이미 과거의 세계 것이로군요."
조젤라는 쓸쓸하게 웃었다. 정말로 그 말이 맞다. 멋을 내는 것은 눈이 보이는 세계의 일이다.
"빌, 난 아직 당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어요. 그 때 당신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아니, 나도 역시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해요. 만약 그 때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느 술집에서 술에 만취하여 훌쩍훌쩍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우리는 눈이 보이는 사람끼리니까 서로가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위스키를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신상 이야기를 하였다. 조젤라는 상류 가정의 아가씨였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 자랐다고 한다.
"열 아홉 살 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을 못 했어요. 그래서 난 집을 뛰쳐나와서 아는 여자 아이 아파트에 얹혀 있었어요. 그러나 빈둥빈둥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아요? 돈을 벌고 싶어서 책을 썼죠."
"어떤 책인데?“ 하고 나는 물었다.
"소설이어요. 뭐 대단한 작품도 아닌데 다행히 히트가 되어 인세 외에 영화화의 권리금 같은 것도 듬뿍 들어왔어요."
"그 제목은?"
"「여자의 모험」이라는 것이어요."
"그랬구나!"
나는 내 이마를 탁 쳤다. 조젤라 플레이튼 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 듯한 것도 당연했다. 「여자의 모험」은 수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화되어 또 대히트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여류 작가인 줄은 미처 몰랐는걸."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조젤라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보았다.
"여류 작가니 하는 말을 들으면 창피해요."
조젤라는 쿡쿡 웃었다.
"심심풀이로 흉내낸 소설이 우연히 대히트를 했을 뿐이어요. 출판사로부터 제 2작을 부탁 받았지만 중간쯤 쓰다가 싫증이 났어요. 말하자면 소가 뒷걸음질치다 파리 잡은 격이어요.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또 아버지와 함께 태평스럽게 살게 되었어요. 되먹지 않은 여자지요? 난......"
베스트 셀러 소설을 썼으면서도 여류 작가 티를 태지 않는 것이 기뻤다. 이 여자하고 라면 잘 해 나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우리가 살아갈 계획을 세워야해요."
나는 위스키를 홀짝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당장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거요. 그 이유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수도는 아직 나오지만 급수 탱크에 괴어 있는 것뿐이니, 그것 마저 없어지면 끝장이지. 시내에는 여기저기 시체가 뒹굴고 있어요. 날이 갈수록 그 수는 늘어가기만 할거요. 이제 곧 시체가 썩기 시작해서 시내는 고약한 냄새로 가득 차게 돼요. 그리고 티푸스와 콜레라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할 거요. 그렇게 되기 전에 런던에서 시골로 달아나야 해요."
"서섹스의 다운즈는 어떨까요? 오래 된 농장을 알고 있어요. 공기가 깨끗하고 우물이 있는 언덕 위예요."
조젤라가 말했다. 아무튼 내일 아침에 트럭을 구하기로 결정하고 거기에 실을 필요한 물건의 리스트를 둘이서 만들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물건이 필요했다. 긴 리스트가 완성된 것은 한밤중이었다.
"아이 졸려."
조젤라는 하품을 하면서 일어서더니 큰 거울 앞에 서서 아름답게 차려 입은 자기 모습에게 말을 걸었다.
"잘 자요, 과거의 환영 아가씨."
그러고 쓸쓸한 미소를 띄고 나를 돌아보고는 안쪽에 있는 침실로 사라졌다. 나도 내 침대에 몸을 쭉 뻗고 잠이 막 들려고 했다. 그런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빌, 와 보세요. 불빛이 보여요."
조젤라의 목소리다.
"무슨 불빛이?“
나는 급히 침대에서 나와 조젤라의 침실로 들어가서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갔다. 분명히 불빛이 보인다. 북동 방향에 어두운 밤하늘을 꿰뚫는 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 서치라이트와 같은 밝은 빛이었다.
"저기에 누군지 앞이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에요." 하고 조젤라가 말했다.
"그런가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가 캄캄해서 잘 모르겠으나 광선은 높은 건물 위에서 나오고 있는 듯했다.
"날이 새거든 저기에 가 봅시다.“
나는 손톱 가는 줄로 창문턱에다 선을 그어서 광원의l 방향을 알 수 있게 했다.
"오늘밤은 푹 자는 게 좋아요."
다시 나는 침대로 돌아왔으나 눈이 말똥말똥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이따금 밖의 길에서 히스테리를 일으킨 듯한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흐느낌과 미치광이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별안간 권총 소리가 났다. 벼락 장님 가운데 한 사람이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나는 시트를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대학 문
이튿날 아침 눈이 뜨이자 부엌에서 소리가 들렸다. 조젤라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고 옷차림을 매만졌다. 양복은 윗도리도 바지도 온통 후줄근했다. 조젤라는 푸른 스키복의 허리에 가죽 벨트를 두르고 대형의 사냥용 칼을 차고 있었다.
"이런 꼴 어때요?“
튼튼한 가죽 구두로 방안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조젤라는 말했다.
"나무랄 데 없는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런던은 맹수가 쏘다니는 정글보다도 더 위험한 곳이다. 석유 난로 덕에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토스트를 먹을 수 있었다.
"어젯밤의 불빛은 대학의 탑에서 나온 것이에요."
식사 도중에 조젤라의 방으로 가서 창문턱에 낸 흠집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대학의 탑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 하늘에 높이 솟은 탑-거기에는 두 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사 준비를 일단 연기하고 저 탑을 조사해 봅시다."
우리는 왜건에 올라타고 큰길로 나갔더니 사람의 모습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이따금 보이는 장님들은 다들 지팡이나 막대 같은 것을 갖고 보도의 가장자리 돌을 똑똑 두들기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편이 건물의 벽을 따라가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았다. 똑똑 거리는 소리 덕에 장님들끼리 부딪히는 횟수도 줄어들겠지. 곧 맞은편 길에 대학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젤라가 말했다.
"문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봐요."
그 말이 맞았다. 대학 문 앞에 군중이 보였다. 나는 급히 차를 오른쪽으로 꺾어서 50미터쯤 옆길로 들어간 곳에 세웠다. 장님 군중에 대해서는 넌더리가 났으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고 싶다.
"난 이 근방은 잘 알고 있어요."
조젤라는 차에서 내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을 빠져서 고갯길을 올라 높다란 곳으로 나왔다. 거기서 군중의 머리 너머로 대학 문을 내려다보았다. 차양 달린 둥근 모자를 쓴 남자가 군중의 리더인 듯 하다. 문의 창살 너머로 구내에 있는 남자를 향해 뭔가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다. 구내에는 네 명의 남자가 보인다. 문 곁에 한 사람, 그 몇 미터 뒤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네 사람 다 눈빛과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아서 장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담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군중의 리더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상대방의 남자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다. 리더의 목소리는 높고 격해졌다.
"잘 들으시오. 문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는 거요. 장님이 된 것이 이 사람들의 죄는 아니오. 누구의 죄도 아니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 당신네들의 책임이오! 눈이 보이는 주제에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네들의 책임인 것이오!"
리더의 옆얼굴이 슬쩍 보였다. 코가 가늘고 뼈가 두드러진 얼굴이고 머리는 검다. 나이는 한 서른 살쯤 되었을까 ?
"나도 다행히 눈이 보여요.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에게 어디에 가면 먹을 것이 있는지 가르쳐주어 왔소. 그러나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은 몇천 몇만이나 돼요. 나 혼자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소. 꼭 당신네들의 힘이 필요해요. 그런데도 당신네들은 여기에 틀어박혀서 가엾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태평스럽게 구경만 하고 있을 거요? 정말로 기막힌 사람들이군! 그래도 당신네가 사람이오? 런던 시민이라고 할 수 있소?"
거기서 문안의 남자가 뭐라고 말했는데 우리한테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리더는 더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뭐? 식량이 얼마나 계속될 것이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끝까지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그러다 보면 어디서 구원의 손이 나타날지도 몰라요. 변명은 그만두고 바른 말을 해요! 당신네들은 식량이 있는 곳을 이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이 사람들이 식량을 손에 넣으면 그 분량만큼 당신네들의 몫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지. 맞았지? 그게 사실이지?"
창살 저 편에서 남자가 뭐라고 말했다. 그 말도 우리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리더는 한동안 무서운 얼굴로 상대방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좋아, 당신네들이 그런 생각이라면........"
느닷없이 리더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쳐 상대방의 팔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겨서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곁에 있던 장님의 손을 잡아 눈뜬 남자의 팔을 꽉 잡고 있게 했다.
"놓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면서 리더는 대문의 빗장에 덤벼들었다. 문 안쪽의 남자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한 손을 창살 사이로 내밀고 휘둘렀다. 그 일격이 장님의 얼굴에 맞았다.
"이 나쁜 새끼!“
장님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잡고 있던 팔을 더욱 세게 비틀었다. 그 사이에 리더는 문의 빗장을 열려고 기를 썼다. 탕! 한 발의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알은 대문의 쇠창살에 맞아서 튀었다. 리더는 깜짝 놀라 빗장에서 손을 떼었다.
"살인자!"
"비겁자!"
뒤의 군중이 저주의 소리를 지르며 술렁거렸다. 이 때 문 안쪽에 있던 한 남자가 경기관총을 잽싸게 겨냥했다. 다다다다다
"위험해!"
나는 조젤라를 끌어당겨서 땅에 엎드리게 했다. 위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총 소리는 사람들을 떨게 했다. 우리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먼 군중은 완전히 허물어져서 제멋대로 더듬거리며 달아나고 있었다.
"이봐, 기다려! 흩어져서는 안 돼!"
리더는 소리쳤으나 일단 흩어진 군중을 모을 수는 없었다. 그 혼돈을 내려다보면서 조젤라는 말했다.
"저 남자의 말이 옳아요."
"물론 옳지. 그러나 동시에 틀리기도 해. 저 남자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런 것은 절대로 오지 않을걸. 장님들에게 식량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는 일은 우리도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장님의 수는 너무 많아요. 게다가 몇 주일 지나서 식량이 동이 나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어요. 참혹한 상태를 질질 끌 뿐이예요."
"글쎄요. 우리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남을 길을 찾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저 대문 안에 있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그럴 작정인 모양이니까."
조젤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눈먼 군중은 한 사람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와 조젤라는 높다란 곳에서 내려와 대학 문으로 다가갔다. 안쪽의 남자가 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었다.
"당신네 그룹은 몇 명이오?“
"단 두 사람뿐이오. 어젯밤에 당신네들의 빛 신호를 보고 왔소."
"좋아요. 대령을 만나 보시오." 하고 남자는 우리를 데리고 안뜰의 잔디밭을 가로질러갔다.
대령으로 불리는 인물은 수위실에 있었다. 통통 살이 찐 50세쯤 되는 남자로, 반백의 머리와 콧수염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얼굴은 핑크 빛으로 젊은이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있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대령은 책상에서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 안내한 남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날카로운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이름은?"
대령은 우리의 신원에서부터 취미와 정치 사상까지 자세히 물어서 서류에 써넣었다.
"우리에게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오. 골치 아픈 일이 산더미같이 있으니까. 비들리 군이 자네들한테 무슨 일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말해 줄 것이오."
대령은 위엄 있게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눈뜬 사람들 그룹의 입회 테스트에 합격한 모양이다. 일단 홀로 나와서 우리는 다른 방으로 갔다. 거기에는 마이클 비들리가 있었다. 비들리는 대령과 정반대의 남자였다. 여윈 편에 키가 크고 약간 새우등이었다. 나이는 잘 알 수가 없다. 서른 다섯쯤으로도 보였고 쉰 살이라고 한대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밤샘이라도 했는지 검은 눈 주위가 부석부석 하다. 그러나 비들리는 상냥하게 우리를 맞이하고 곁에 있는 젊은 여자를 소개했다.
"샌드라 델몬트입니다. 기억술의 전문가지요. 한번 기억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이나........"
젊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젤라에게 엄격한 눈길을 보냈다.
"당신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여자의 모험」의 광고 사진에서요........"
"그 일은 잊어 주셔요. 나는 여류 작가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사는 데 지쳤습니다." 하고 조젤라는 말했다.
"알았습니다."
비들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우리의 그룹은 35명입니다. 그 가운데 28명은 눈이 보입니다. 나머지는 눈이 보이는 사람의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인데 장님입니다. 우선 우리가 서둘러야 할 일은 런던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만약 준비만 갖춰지면 내일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작정입니다."
비들리도 우리와 같은 염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저 전염병의 예방 접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가 필요하고 의료품도 갖추어야 하는데, 당신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그렇지, 식량이나 잡화는 어떻소?
혹시 당신네들이 우리와 행동을 함께 할 작정이면 스테이션 왜건 대신 트럭을 구해서 이 리스트에 적혀 있는 물자를 모아 주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비들리는 내게 한 장의 종이를 주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식료품과 잡화의 품목이 잔뜩 적혀 있었다.
"식료품은 될 수 있으면 통조림, 병조림, 상자에 든 것으로 해 주시오. 소매점보다도 도매상이나 식품 창고를 노리는 편이 좋을 것이오. 힘든 일이겠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처리해 주시오. 오늘 밤 9시 반부터 전원이 집회를 열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토론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들리는 나와 조젤라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흘끔 보았다.
"권총을 갖고 있습니까?"
"아뇨." 하고 나는 대답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갖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늘로 향해서 쏘기만 해도 됩니다."
비들리는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두 자루 꺼내어 우리 쪽으로 밀어 주었다.
사격 연습
나와 조젤라는 스테이션 왜건에 실은 짐을 내려놓고 출발했다. 시내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이따금 만나는 장님들은 엔진 소리를 듣고는 보도 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우선 트럭을 구해야 한다. 맨 처음에 발견한 트럭은 나무 상자를 잔뜩 싣고 있었다. 그런 것을 내리고 있을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 다음에 발견한 것은 빈 차였다. 그것도 신품이나 다름없는 5 톤 짜리였다.
"안성맞춤이다."
우리는 스테이션 왜건을 버리고 트럭에 올라탔다. 비들리가 준 리스트에는 식료품 창고의 주소가 몇 군데 적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에다 우리는 트럭을 갖다 대었다. 창고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으나 쇠지렛대로 비집어 열고 감아 올릴 수가 있었다. 넓은 창고 안에는 세 대의 트럭이 늘어서 있었다. 그 한 대에는 쇠고기 통조림 상자가 쌓여 있었다.
"당신이 이 차를 운전할 수 있겠소?“
"승용차나 트럭이나 운전 방법은 같겠죠, 뭐."
"그야. 길이 혼잡하지 않으니까 당신 솜씨로도 어떻게 될 거요. 그 전에 잡화를 긁어모아 옵시다.“
우리는 빈 트럭으로 다른 창고에 가서 냄비, 솥, 주전자 등을 실을 수 있는 데까지 실었다.
마침 창고 곁에 작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나서 식료품 창고로 돌아왔다.
"실은 말이어요, 나도 트럭을 한번 운전해 봤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조젤라는 신이 나서 쇠고기 통조림이 가득 실린 트럭에 올라탔다.
두 대의 트럭을 나란히 운전하여 우리는 무사히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리스트의 품목은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 우리는 다시 또 출발했다. 그리고 다른 트럭 두 대에 물자를 가득 싣고 6시 반경에 돌아왔다.
"수고했소.“
비들리가 나와서 물품을 점검했다. 반 다스 가량의 케이스는 리스트에 없는 것이었다.
"저 건 뭔가요?“
"트리피드 총과 부메랑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 예, 트리피드 퇴치 도구로군요."
비들리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므로 나는 역설했다.
"도시에서 떨어져 사는 데는 절대로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예, 좋겠지요. 별로 넓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니까."
마지못해 비들리는 인정했다. 나와 조젤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식당에서 차를 마셨다.
"저 사람들은 트리피드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이 근방에는 없는가 보죠?"
조젤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트리피드의 전문가로서 설명했다.
"이 근방은 시내 중심부니까 트리피드가 오지 않는 거요. 트리피드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나 돌로 포장이 된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뚝을 뽑았거나 쇠망을 부수고 자유로워진 트리피드는 흙을 찾아서 교외 쪽으로 이동할거요. 내일 우리는 런던을 떠나서 지방으로 갈 모양이오. 그러면 싫어도 트리피드를 만나게 되지. 한데 당신은 트리피드 총을 사용해 본 적이 있소?"
"아뇨."
"시간이 있을 때 좀 연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요."
한 시간 후에 나는 스키복에 하이킹 슈즈 차림이 되었다. 조젤라도 녹색의 스키복으로 갈아입었다.
"트리피드의 경우는 잎자루 끝의 깔때기 째 독채찍을 쏘아 떨어뜨려야 돼요."
우리는 독채찍 대신 관목의 새순을 쏘아 떨어뜨리는 연습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대학 쪽에서 젊은 여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빨간 재킷에 녹색 바지를 입고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그 카메라를 우리에게 향하더니 두세 번 셔터를 눌렀다.
"당신은 신문반인가요?“
조젤라가 물었다.
"예, 그런가 봐요. 대령의 명령으로 멤버의 기록을 찍고 있는 것이어요."
기록을 맡은 여자는 엘스페스 캐리라고 자기 이름을 대었다. 별안간 폭음이 들려 왔다. 한 대의 헬리콥터가 대영 박물관의 지붕 너머로 나타나서 대학 정원 쪽으로 천천히 날아갔다.
"아이반이어요. 그인 눈이 보이는 사람을 찾으러 갔었어요. 착륙하는 장면을 찍어야지."
캐리는 얼른 대학 쪽으로 되돌아갔다. 곧 헬리콥터의 엔진 소리가 멈추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인류는 이것으로 끝장이 아닐까? 옛날 옛적에 지상에 번영했던 공룡처럼 갑자기 멸망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한 종류의 생물이 영원히 지구를 지배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거든요.“
조젤라가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명히 인간은 이제 끝장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살아남을 기회도 아직 있다고 생각해요. 인류의 거의 대부분이 장님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처럼 눈이 보이는 작은 패거리가 여기저기에 있을 거요. 그리고 각각 공동체를 만들어 이 세계를 다시 지배하기 위해 싸우려 하고 있어요. 우리 조상에 비해서 지금의 우리는 뛰어난 지혜와 도구를 갖고 있어. 눈이 보이는 건강한 인간이 남아 있는 한 기회는 있을 거요."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요. 희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지요. 그러나 그처럼 안전하고 확고해 보이던 세계가 겨우 하루 밤사이에 이처럼 쉽게 허물어지다니 정말로 쇼크예요.“
조젤라의 말이 맞다. 인간은 지금까지 구축해 온 문명이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믿어 왔다. 세계를 지배해 온 두뇌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인간의 두뇌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 빨강에서 보랏빛까지의 가시 광선을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을 가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눈이 안 보이면 이미 끝장인 것이다. 이런 연약한 능력으로 인간은 잘도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세계가 별로 좋아질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군요.“
조젤라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러나 좋고 싫고를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규명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일이다.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곧 8시가 된다.
"집회 전에 뭘 먹어 둬야 해요.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모르니까.“
트리피드 총을 껴안으면서 나는 조젤라를 재촉했다.
비들리의 공동체
집회는 작은 강당에서 열렸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조명으로 사용하여 강당 안은 밝았다. 나와 조젤라가 들어갔을 때 연단 뒤에서 5명의 남자와 두 여자가 뭔가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중석에는 언제 어디서 왔는지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가 전체의 4분의 3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 여자들은 거의가 장님이어요."
조젤라가 말해 줄 때까지 나는 눈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곧 장신인 마이클 비들리가 연단 위에 섰다.
"여러분.“
그 목소리는 온화하나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우리가 살아 온 세계는 일순간에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번의 천재는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만 아직 살아 남을 길은 있습니다. 여러분은 노아의 방주의 신화를 알고 계시겠지요. 그와 같은 대홍수가 저 먼 옛날에 실제로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조상은 절망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재출발한 것입니다. 우리도 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재출발합시다. 다행히 지구는 무사합니다. 우리에게 식량과 원료를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여 살아갈 지혜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 세계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건강한 심신을 가지도록 합시다.“
비들리의 연설은 짤막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준 듯했다. 장내의 공기가 생기를 띄었다.
그 다음에 대령이 연단에 올라서서 실제적인 이야기를 했다.
"인구 밀집 지대에는 전염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런던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이동 날짜는 내일 정오입니다. 여러분의 활동에 의해 어느 정도의 생활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거의 전부를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최저 1년 동안 외부와의 관계를 일체 끊고 자급 자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새 숙사는 지방의 학교 기숙사나 시골의 큰 저택을 선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대령이 의자에 앉자 또 비들리가 일어서서 젊은 여자를 일동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이분은 미스 바아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매우 곤란했는데 미스 바아를 맞이하여 안심입니다. 미스 바아는 의사는 아닙니다만 경험 많은 간호원입니다. 이제부터 미스 바아에게 우리의 건강 관리를 맡기려고 생각합니다.“
간호원인 미스 바아는 얼굴을 붉히면서 연단에 서서 짧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끝으로 덧붙였다.
"현재 가장 두려운 것은 이 곳의 전염병의 발생입니다. 여러분이 이 강당에서 나가시기 전에 예방 주사를 놓겠습니다.“
이어 백발의 남자가 연단으로 걸어갔다. 킹스턴 대학 사회학 교수인 볼레스 박사이다.
"여러분, 나는 이제 곧 일흔 살이 됩니다. 이 그룹 중에서는 최연장자겠지요. 나는 학생 시절부터 거의 50년 동안 인간의 사회 제도에 관해 연구를 해 왔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여러 가지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사회, 각각의 시대의 풍속과 습관에 따라 자연히 달라집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되어 있던 제도가 다른 사회, 다른 시대에는 용서할 수 없는 부도덕한 제도로 간주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오늘 하루 어떤 일을 하였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물건을 마음대로 들고 나온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틀 전 같으면 그와 같은 행동은 가택 침입이나 절도죄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온 사회는 이틀 전에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고 지켜 온 사회 제도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까지 범죄로 여겨지던 행동이 범죄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에 있습니다. 그 사회에 어떠한 생활, 어떠한 사회 제도가 가장 적합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재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대들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열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공동체에 가담할 마음이라면 각오해 주십시오. 남자는 모두 일을 해야 합니다. 여자는 모두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눈이 안 보이는 여성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여성 만입니다. 눈이 보이는 남성까지 먹여 살릴 여유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눈이 보이는 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볼레스 박사가 여기까지 말하자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다음에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한 여성이 일어섰다.
"박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 하십시오.“
"이 공동체는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1대 3입니다. 남자가 다 결혼한다고 해도 여자는 3분의 1밖에 결혼할 수 없습니다. 나머지 3분의 2의 여자는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낳으라는 것인가요? 즉, 올바른 결혼과 규율을 폐지하실 생각이신가요?“
"대답하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1대 1로 결혼을 한다는 규율은 이미 이틀 전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1대 1로 하는 것으로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 회교도들에게는 아내를 세 사람까지 갖는 것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결혼의 규율은 그 시대와 그 사회에 의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는 어떠한 결혼이 적합한지 이제부터 다 함께 잘 생각한 뒤에 결정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것은 당신네들 여성 전원이 아이를 낳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결코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규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은 어디 다른 데로 가서 다른 공동체에 가입해 주십시오. 다른 방법으로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볼레스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른 질문자가 일어서서 토론은 길어졌다. 조젤라와 나는 자리를 떠서 미스 바아가 있는 책상 곁으로 갔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주사 기구가 늘어 놓여 있었다. 우리는 팔에 주사를 몇 대 맞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토론은 한 시간 남짓 계속되다가 결국 중단되었다.
"우리의 계획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내일 아침 10시에 내 사무실로 이름을 적어 내 주십시오. 더 이상 강요는 않겠습니다."
하고 비들리는 결론을 말했다. 거기다가 덧붙였다.
"트럭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원 내일 아침 7시에 내게로 와 주십시오."
이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나는 조젤라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온화한 밤이었다. 탑의 광선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밤하늘을 꿰뚫었다. 느닷없이 조젤라가 말했다.
"빌, 장님 여자들이 그처럼 많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어요?"
"우리가 식량과 잡화를 찾으러 가 있는 동안에 비들리의 동료가 시내에서 긁어모아 온 것이겠지."
"아뇨, 시내를 방황하던 벼락 장님이라면 그처럼 침착하진 못할 거예요. 그 여자들은 어느 맹인 시설에서 한꺼번에 데리고 온 거여요. 본디부터 장님이니까 이번의 '벼락 장님 사건'에도 당황할 필요가 없는 것이어요. 그 여자들은 장님 생활에도 익숙하고 게다가 일도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비들리가 노리는 것이었어요."
과연 여류 작가답게 조젤라의 눈은 날카로웠다. 내일 아침까지 몇 사람이나 비들리의 계획에 참가할까? 조젤라의 예상으로 여자는 거의 전부가 참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장님 여자는 돌봐 줄 조직이 필요해요. 게다가 대부분의 여자는 어쨌든 아기를 갖고 싶어하거든요."
"나도 아기가 있었으면 좋겠는걸. 만약에 그게 당신의 아기라면."
나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조젤라는 침착했다.
"고마와요, 빌. 기뻐요."
그리고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끼리만 멋대로 살수도 없어요. 새로운 결혼의 규율이 생길 거예요. 만약에 내가 리더라면 한 남자에게 부인을 세 명씩 갖게 할 거여요. 한 사람은 눈이 보이는 여자, 나머지 두 사람은 장님 여자예요.“
"당신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물론 진정이쟎구요. 만약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달리 두 명의 장님 여자도 맡아 줘요. 우린 눈이 보여요. 이 행복을 장님 처녀에게도 나눠줘야 해요. 볼레스 박사의 말대로 사회가 변했어요. 결혼의 규율도 변하는 게 당연해요. 우리 공동체에 있어서 한 남자가 세 여자와 결혼하는 규율이 적합하다고 정해지면 거기에 따라야 해요. 염려 마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서 마음씨 착한 장님 처녀를 두 사람 골라 드릴 테니까요."
이와 같은 조젤라의 용기와 친절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건물 안에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였다. 누군가가 레코드를 튼 모양이다. 조젤라는 눈을 빛내면서 내 손을 잡았다. 달빛 속에서 우리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키복의 허리에 칼을 찬 신사 숙녀의 사교 댄스였다. 사라진 과거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우리는 춤을 계속 추었다.
코우커의 공동체
나는 꿈속에서 쓸쓸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종이 울리고 남자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봐, 그 개새끼가 달아났다. 조심해."
그리고 잠을 깼더니 정말로 종이 울리고 있었다. 짤랑짤랑 하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서 눈을 비볐다. 그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불이야!"
나는 침대에서 뛰어 일어나 복도로 뛰쳐나갔다. 어두운 복도에 연기 냄새가 자욱하고 도어를 여닫는 소리, 고함 소리, 뛰어가는 발소리 등이 뒤섞여서 어지러이 들리고 있었다. '조젤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여자들의 방이 있는 오른쪽을 향해 달렸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 높은 창문이 있다. 거기서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복도의 벽을 따라 장님 여자들이 더듬거리며 달아날 길을 찾고 있었다.
"조젤라!"
나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계단에 이르렀다. 짤랑짤랑! 밑의 홀에서 종이 계속 울리고 있다. 연기도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연기 속을 빠져나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한 단만 더 내려가면 되는데 나는 무엇에 걸려서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어 뒤통수에 심한 쇼크를 받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맨 처음에는 두통을 느꼈다. 눈을 뜨니까 눈이 부셨다. 더러운 창문으로 강렬한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어느 새 나는 처음 보는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좌우의 손목이 함께 묶여 있는 것이었다. 제법 솜씨 있게 묶어 놓았다. 전깃줄을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아프지도 않게 여러 번 감아서 매듭을 이빨로 풀 수 없게 해 놓았다.
"제기랄."
나는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은 방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봐요, 누구 없소?"
큰 소리를 질렀더니 방 밖에서 질질 끄는 발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남자의 머리가 나타났다. 작은 머리에 캠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있고 거무스름하고 그 밑에 꾀죄죄한 넥타이가 매달려있다. 눈은 크게 뜨고 있으나 나를 똑바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침대 끝을 향하고 있다. 청맹과니인 것이다.
"정신이 들었소? 그냥 가만히 있어요. 차를 가져다 줄 테니까.“
상냥하게 말하고 남자는 나갔다. 나는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남자는 곧 돌아왔다. 왼손에 찻잔을 들고 있다.
"형씨, 어디에 있소?"
"당신의 바로 앞이오. 침대 위요." 하고 나는 가르쳐 주었다.
"알았어."
남자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침대 다리를 잡고 그것을 따라 내 곁으로 왔다.
"자, 한 잔 하슈. 럼주가 들어 있는 커피요. 기운이 날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컵을 내밀었다.
"고맙소."
나는 묶인 양손 사이에 컵을 끼워서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나는 말했다.
"난 빌이오. 잘 부탁해요."
"난 앨프라고 해."
말은 거칠었으나 나쁜 남자는 아닌 듯했다. 다소 마음을 놓고 나는 물었다.
"어젯밤의 소동은 도대체 무슨 일이오?“
"당신 어제 낮에 대학 정문 앞에서 약간 실랑이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지?“
"음, 구경하고 있었소."
"그 뒤에 월프레드 코우커가-그 때 얘기하던 남자인데-화가 난 모양이야. '의논하러 온 사람을 총으로 쫓아 버리다니 가만있을 수 없다. 어디 톡톡히 한번 인사를 해야지.' 하게 된 거야. 이미 우리는 대학 안에 있는 사람 셋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지. 그들의 협력으로 어젯밤의 소동을 일으킨 거야. 정말이지 코우커란 사람은 대단한 남자야."
"그러니까 코우커가 꾸몄단 말이지? 화재 사건도."
"화재? 크게 말하지 말아. 우린 계단 밑에다 다리가 걸리게 철사를 쳐 놓고 홀에서 종이와 나무토막을 태워서 헌 종을 짤랑거렸을 뿐이야. 그러면 눈이 보이는 놈들이 맨 먼저 튀어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 작전은 대성공이었어. 눈뜬 사람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다가 잇달아 철사에 발이 걸려서 털버덕 나동그라지는 꼴들이라니. 그래서 코우커와 또 한 명, 눈이 보이는 친구가 당신네들을 고이 주무시게 해 놓자 우리가 트럭으로 갖다 실은 거야."
"그 코우커라는 남자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군. 그래, 당신 덫에 걸린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되나?"
"스물 두세 명쯤이나 될까. 그 중의 대여섯 명은 장님이었고."
앨프는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어젯밤의 소동을 스포츠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내게 대해서 적의를 갖고 있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컵의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어 있나?“
"우리 장님들은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그 하나 하나에다 당신네들 눈뜬 사람을 한 사람씩 딸리자는 것이 코우커의 생각이지. 즉, 당신네들 눈뜬 사람을 장님의 눈 역할로 삼아 도둑질의 앞잡이를 하게 할 셈이지. 어디서 누가 와서 이 절망적인 상태를 구해 줄 때까지 당신네들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야."
"흐음. 그래?“
나는 내 기분이 알아 채이지 않게 말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옛날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한숨을 쉬면서 앨프는 자기의 신세 타령을 했다.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고생도 했으나 마음대로 편하게 살아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당신 직업은 뭐였소?“
"트리피드를 돌보는 일이었어. 시시한 일이야.“
나는 트리피드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으나 앨프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곧 앨프는 물러갔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밑은 사방이 건물 벽으로 에워싸인 안뜰이었다.
"정원으로 해서 달아날 길은 없어."
그 다음에 도어를 살펴보았으나 밖으로 잠겨 있었다. 몸으로 부딪치는 정도로는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도로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해 보았다. 나이프는 혁대 째 없어졌다. 방안을 둘러보아도 무기가 될 만한 가구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양손이 묶여 있어도 앨프 하나쯤은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앨프를 혼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녀석들은 장님이고 이 쪽은 눈이 보인다.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조만 간에 달아날 기회가 반드시 오겠지."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한 시간 후에 또 앨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먹을 것 한 접시와 차를 들고 왔다. 접시에는 스푼밖에 없었다.
"나이프도 포크도 없어서........"
"그까짓 식사야 손으로 집어먹어도 괜찮아요."
나는 묶인 손으로 식사를 하면서 함께 붙들린 동료의 일을 물어 보았다.
"당신네들은 눈뜬 여자도 잡았소?"
"음, 여자도 있었지."
그러나 앨프는 그 여자의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앨프가 물러가자 나는 침대에 누워서 한잠 잤다. 얕은 잠이었으나 자고 나니까 두통은 상당히 가라앉았다. 앨프가 식사와 차를 가지고 또다시 나타났을 때는 코우커와 함께였다. 상당히 피곤한 모습이어서 어제 대학 정문 앞에서 연설을 하던 때와 같은 정열은 보이지 않았다. 겨드랑이에 서류 뭉치를 끼고 있다.
"당신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겠지?“
코우커는 살피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앨프한테 들었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우커는 서류를 침대 위에 놓고 맨 위의 한 장을 폈다. 그것은 대런던 시의 지도였는데, 햄스티드의 일부와 스위스 커테이지 구역이 굵고 푸른 선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거기를 가리키면서 코우커는 말했다.
"여기가 당신 담당이오. 당신 반은 이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거요. 당신의 임무는 여기서 식량을 찾아서 반의 사람들에게 주는 일이오. 식량뿐만이 아니오. 반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뭐든지 구해 주어야 해요. 알겠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시험삼아 나는 물어 보았다.
"당신이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반의 사람은 배가 고플 것이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 그 중에는 난폭한 녀석도 있으니까. 게다가 다들 재미 삼아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지. 이 점을 잊지 말아요. 내일 아침, 당신과 당신 반의 사람을 트럭으로 담당 구역에 실어다 주겠소. 그 뒤에는 구원의 손이 올 때까지 반 사람들의 생활을 꾸려 가는 것이 당신의 일이오."
"그러나 구원의 손이 오지 않는다면?“
"어디선가 구원의 손길이 반드시 올 거요. 아무튼.... 당신의 임무를 완수해 주시오."
코우커는 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말리고 나는 물었다.
"당신은 조젤라 플레이턴을 여기에 데리고 왔소?“
"글쎄...... 난 당신네들의 이름을 하나도 몰라요."
"금발에 키는 165센티미터쯤. 눈은 회색이 도는 푸른빛의 여자인데 ........"
"그런 여자가 한 사람 있긴 한데. 미안하지만 장님이었소. 일이 바빠서 그만 실례하겠소."
그렇게 말하고 코우커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지도를 조사해 보았다. 담당 구역은 주택 지구라서 식량 같은 것을 찾기에는 별로 좋은 장소는 아닐 것 같았다. 어쨌든 탈출할 기회가 올 때까지는 코우커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앨프에게 부탁했다.
"조젤라 플레이턴이라는 여자가 있거든 편지를 전해주지 않겠소?"
"미안하지만 안 돼요. 규칙을 깰 수는 없으니까."
앨프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래도 내가 끈덕지게 부탁했더니 나의 담당 지구를 조젤라에게 알려 주고 그리고 조젤라의 담당 지구를 조사해서 내게 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혼자가 되자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두 개의 공동체가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쪽의 방법이 옳은가? 내게는 마이클 비들리가 이끄는 공동체 쪽이 옳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월프레드 코우커가 이끄는 공동체는 어디선가 구원의 손길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그 때까지 가능한 한 많은 장님들을 살려 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혼란을 다스릴 만큼 강력한 구원이 어디서 온단 말인가? 나는, 구원의 손길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힘이 닿는 한의 장님만을 구하려고 하는 비들리들의 목적 쪽이 이치에 맞는다. 나도 조젤라도 비들리의 공동체에 가담하여 새로운 규율 밑에 사회를 재건하는 일에 착수할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코우커의 공동체에서 일해야만 되게 되었다. 조젤라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붉은 머리의 남자
다음 날 아침 일찍 앨프가 들어왔다. 눈길이 날카롭고 몸집이 큰 남자와 함께였다. 그 남자는 장님이 아니었다. 번쩍번쩍하게 간 고기 칼을 보란 듯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을 내요, 형씨." 하고 앨프가 말했다. 나는 양손을 내밀었다.
"움직이지마.“
앨프는 내 손목의 철사를 더듬어서 철사 끊는 가위로 싹둑싹둑 잘랐다. 그리고 수갑을 꺼냈다. 순간 나는 망설였다. 달아나려면 지금이 기회지만...... 앨프를 밀어 쓰러뜨린다 해도 문 곁에 우람한 남자가 서있다. 그 녀석은 칼을 앞으로 꼬나 잡고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체념하고 순순히 양손을 내밀었다. 그 주위를 더듬거려서 앨프는 수갑을 채웠다. 열쇠가 없이는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앨프는 거한과 함께 나갔다가 즉시 또 내 식사를 들고 나타났다. 2시간 후에 거한이 와서 문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따라와.“
나는 등에 칼이 들이 대인 채 복도를 걷고 계단을 내려가서 홀을 가로질러 한길로 나왔다. 거기에는 장님들을 가득 태운 트럭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 뒤에는 코우커가 장님 둘과 함께 서서 나를 손짓해 불렀다. 내가 곁에 가자 코우커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양손사이에 사슬을 꿰었다. 사슬의 양쪽 끝에 가죽끈이 달려 있었다. 그 한쪽이 장님의 왼쪽 손목에 매어지고 또 한쪽이 다른 장님의 오른쪽 손목에 매어졌다. 이리하여 나는 튼튼하게 생긴 두 장님 남자 사이에 끼이는 꼴이 되었다.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이 올바르게 임무를 다하면 이 사람들도 당신을 올바르게 대할 거요." 하고 코우커는 내게 충고했다. 나는 두 장님과 함께 트럭의 짐받이로 기어올라갔다. 트럭은 텅 빈 길을 한동안 달려 스위스 커테이지 가까이 에서 섰다. 우리가 내리자 트럭은 방향을 바꾸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우릴 놔두고 달아나는 거야?“
"개새끼 들!“
장님들은 멀어져 가는 트럭에다 욕을 퍼부었다. 한 여자는 히스테리를 일으켜 머리를 벽에다 퍽퍽 처박았다. 나는 장님들 쪽을 향해 말했다.
"당신네들은 우선 뭘 원하오?“
"숙사다. 잘 곳을 정해야지." 하고 한 사람이 대답했다. 나
로서도 내가 달아나는 일을 생각하기 전에 장님들의 숙사 쯤은 찾아 주고 싶었다. 우선 나는 장님들의 수를 세어 보았다. 총원이 52명. 그 가운데 14명이 여자였다. 이만한 사람을 수용하고 물자를 저장하여 생활하게 하려면 호텔 같은 곳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계단을 별로 오르내리지 않는 곳을 찾아야 한다. 곧 나는 장님들에게 안성맞춤인 장소를 발견했다. 그것은 네 채의 이층집을 이은 하숙집이었다.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휴게실에 6명의 장님들이 있었다. 노인 남자, 중년 남자, 중년 여자, 거기다 소녀가 세 명이다. 그리고 중년 여자가 하숙집의 안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52명의 장님들을 하숙시키고 싶다고 얘기했다.
"거절하겠어요.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남의 시중을 들겠어요! 다른 곳으로 가 봐요!“
안주인은 쇳소리를 지르며 떠들었다. 아마도 하숙집 어디에 저장 물자가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대량의 물자를 긁어모아 올 것이라는 얘기를 해 주었더니 안주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우리와 함께 사는 편이 득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이 반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하루 이틀 버티어 보자. 그리고 도망가서 조젤라를 만나면 된다.' 그 다음 이틀 동안, 나는 장님들을 이끌고 가까운 가게를 하나씩 뒤졌다. 거의가 이미 뒤져가고 난 뒤였다. 쇼 윈도는 부서지고 반쯤 열린 깡통과 찢어진 포장이 바닥에 온통 내던져져 있다. 그러나 가게 안쪽이나 뒤에는 손대지 않은 상자와 꾸러미가 여러 개 있었다. 장님들이 무거운 상자를 가게나 창고에서 들어내어 손수레에 싣고 하숙으로 돌아와서 간수하는 것은 큰일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일이 지시를 하지 않으면 무엇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늘 5, 6명의 작업반을 써서 물자를 긁어모았다. 그 동안 하숙에 남아 있는 장님들은 거의 아무 일도 못 했다. 눈이 보이는 사람이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면 작업이 두 배 세 배나 진척되었을 것이다. 낮 동안의 일은 숨쉴 새도 없을 만큼 바빴다. 밤에는 낮의 피로로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고 만다. 낮이나 밤이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은 전혀 없었다. 물론 도망가는 일을 잊은 것은 아니다. 아침에 잠이 깨면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내일까지는 장님들이 자립할 준비를 갖추어 줄 수 있겠지. 그러고 나서 나는 여기서 도망쳐서 조젤라를 찾아야지.'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나는 달아나기가 힘들어졌다. 일부의 장님들은 작업의 순서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내가 없으면 깡통 하나도 제대로 못 여는 것이다. 내 손이 점점 필요 없게 되기는커녕, 더욱더 필요해지는 것 같았다. 장님들은 모두가 다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의 결심은 허물어졌다. 동시에 이런 일을 계속하다가 마지막에는 어찌 될 것인가 하는 불안으로 겁이 났다. 닷새 째 되는 날 아침, 내가 작업반의 장님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하는데 2층에서 여자가 불렀다.
"빌, 좀 와 주셔요! 병자가 두 사람 있어요, 아주 많이 아파요!“
그러나 내게 붙어 있는 두 장님은 사슬을 당겨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병자 같은 건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네들이 병이 나도 모른 체해도 된단 말이지!"
두 장님도 나를 너무 화나게 해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지못해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병자는 젊은 남자와 중년의 남자였다. 둘 다 심한 고열이 있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호소했다. 무슨 병일까? 나는 의학 지식은 없으나 전염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환자를 빈방으로 옮기고 나를 부른 여자에게 잘 간호해 주라고 일렀다. 나쁜 일은 잇달아 일어나는 법이다. 이 날은 밖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다. 정오 때쯤, 나는 스무 명 가량의 장님을 이끌고 하숙에서 1킬로미터쯤 북쪽에 있는 상점으로 갔다. 그런데 상점가에 들어갔을 때 나는 급히 내 패거리를 멈춰 서게 했다. 식품 잡화점 앞에서 다른 남자들이 짐 상자를 트럭에 싣고 있지 않은가.
"말썽이 생기면 좋지 않다. 다른 곳을 찾자."
나는 내 패거리를 돌아서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가게 안에서 붉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나왔다. 분명히 눈이 보이는 남자였다. 그 녀석은 대뜸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 다음에 바로 총을 쏘는 순간 총알이 내 곁의 벽에 소리를 내면서 박혔다. 내 패거리와 그 쪽 패거리의 장님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서로 보이지 않는 눈을 마주 보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또 발포했다. 나를 노린 모양인데 그 순간 총알은 왼쪽으로 빗나가서 나와 묶인 한 장님에게 맞았다.
"개새끼!"
그 장님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쓰러졌다. 위협이 아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나를 쏴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나는 쓰러진 장님과 또 한 명의 장님을 질질 끌고 으슥한 곳으로 몸을 피했다.
"수갑 열쇠를 이리 내라. 이런 걸 차고 있다간 아무 일도 못 한다.“
"날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어."
살아 남은 장님은 보이지 않는 눈을 내게 향했다. 나의 참을성도 한도에 왔다.
"바보 같은 자식!“
나는 양손을 쳐들어 장님의 머리를 후려쳤다. 상대방은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뒤의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었다. 수갑 열쇠는 장님의 호주머니에 있었다. 나는 수갑을 풀어 사슬을 끄르고는 다른 장님들에게 말했다.
"다들 돌아서서 똑바로 걸어가라. 모여서 걷는 거야. 흩어지면 큰일난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우리 패거리를 뒤쫓아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마주 쏘지 않았으므로 이 쪽에는 무기가 없고 또 장
님 걸음으로는 어차피 빨리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혼자 남자, 주택의 정원에 숨어서 담 사이로 붉은 머리의 남자를 감시했다. 상자를 다 싣고 나자 붉은 머리의 남자는 혼자서 슬슬 우리 패거리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으슥한 곳에 쓰러져 있는 두 장님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사슬로 묶여 있으니까 어느 한 쪽이 우리 패의 리이더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권총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더욱 천천히 다른 장님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나는 금방 알아챘다. '저놈은 장님들의 뒤를 미행해서 우리 본부를 알아내어 이 쪽의 저장 물자를 빼앗을 작정이구나.' 다행히 장님들은 자기네 하숙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나는 적당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가지고 한길로 나와서 보도 가장자리를 톡톡 두들기면서 걷기 시작했다. 장님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내게서 50미터 가량 앞에 있다. 또 그 50미터쯤 앞에 우리 패의 장님들이 있었다. 역시 장님들은 하숙집으로 통하는 모퉁이를 알지 못하고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처져서 길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배를 움켜잡더니 그냥 쓰러져서 괴로운 듯이 몸부림을 쳤다. 아마도 신음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장님들은 멈춰 서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쓰러져 있는 남자 곁에 가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호주머니의 권총을 꺼내어 그 남자의 머리를 쏘았다. 날카로운 총 소리가 길에 울려 퍼졌다. 앞쪽의 장님들은 멈춰 섰다. 나도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붉은 머리의 남자는 우리 패에 흥미를 잃은 듯 했다. 홱 돌아서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지팡이로 길을 두들기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서로 지나칠 때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내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나도 장님인 체하면서 상대방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아직 젊은 남자였다. 차갑고 냉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와의 거리가 웬만큼 멀어지고 난 뒤에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우리 패거리에 따라붙었다. 장님들은 총 소리에 놀라 우뚝 선 채 앞으로 갈 것인지 아닌지 서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나는 이야기했다."잘 들어요. 나는 수갑을 풀었어요. 이제부터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당신네들을 돌볼 작정이오."
곧 나는 트럭을 한 대 찾아내었다. 거기다가 장님들을 태우고 무사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교외의 적
하숙집에는 좋지 못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또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심한 복통을 일으켜 다른 동으로 옮겨졌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병자가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의사가 없으므로 병자가 생겨도 그 병명이나 치료 방법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새로운 걱정거리가 겹쳤다. 그것은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끄는 공동체에 관한 것이었다. 이 공동체도 코우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눈뜬 사람이 많은 장님을 돌보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코우커는 전투적인 남자이긴 하나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자기한테 방해가 되면 눈뜬 사람이든 장님이든 짐승처럼 쏴 죽이는 자다. 만약 내가 없는 사이에 붉은 머리의 남자의 패거리가 하숙집을 습격하면 어찌 되겠는가. 아마도 우왕좌왕하는 장님들을 닥치는 대로 차 죽이고 저장 물자를 빼앗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나는 가능한 한의 방위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남자와 마주친 장소를 피하여 다른 방향으로 출동하기로 했다. 내 담당 구역은 교외 주택지인데 햄스티드 히드 공원의 버스 종점 근처에는 작은 가게와 창고가 많았다. 이 지구는 아직 거의 약탈당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까지 행락객으로 붐비던 곳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길 위에는 시체가 몇 구 뒹굴고 있었다. 어쩌면 상점이나 주택 안에서 죽어 있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벼락 장님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일단 밖으로 나왔으나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지고 또는 병이 나서 도로 집안으로 들어 간 듯하다. 나는 트럭을 식료품점 앞에 세우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지팡이로 두들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다들 내려."
나는 장님들을 트럭에서 내리게 하고 가게의 문을 비집어 열었다. 가게 안에는 버터, 치즈, 베이컨, 설탕 등이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장님들에게 일을 시작하게 했다. 이제는 장님들도 일의 요령을 익혀서 순서만 가르쳐주면 자기네들끼리 물자를 트럭에 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뒤의 저장실과 지하실을 조사했다. 지하실에는 큰 식량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것을 조사하고 있는데 위에서 고함 소리가 났다.
"살려 줘!"
이어 머리 위의 마룻바닥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났다. 한 남자가 널빤지 뚜껑의 구멍으로 거꾸로 떨어졌다.
"붉은 머리의 패거리가 습격해 왔구나....
나는 쓰러져 있는 장님을 타넘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널빤지 뚜껑의 구멍 쪽으로 조금씩 한 발 한 발 뒷걸음질쳐 오는 반장화를 신은 패거리였다. 나는 잽싸게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그 다음 순간 장님들이 겹겹으로 겹쳐서 널빤지 구멍 속으로 빠졌다.
쨍그랑!
밖의 유리창이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그와 함께 세 남자가 밖에서부터 가게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녹색의 긴 채찍이 쓰러지는 한 남자를 철썩 때렸다.
"악!"
남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땅에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머지 두 사람이 유리 조각이 흩어진 마룻바닥 위를 기어서 안쪽으로 왔다. 그래서 동료를 밀었으므로 또 두 남자가 구멍 안으로 빠졌다.
"그래, 여긴 교외였어. 트리피드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나는 상자 위에 서서 장님들의 머리 너머로 밖을 보았다. 트리피드가 셋 있었다. 하나는 차도에, 둘은 보도에 있었다. 그 곁에 네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거리의 가게가 어째서 약탈을 면하고 남아 있었는가? 어째서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는가? 우리가 걸을 때 길 위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라면 트리피드의 독채찍으로 맞은 자국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다들 침착해요, 뒷문으로 달아나요........"
나는 상자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소리쳤다. 장님들은 더듬거리며 뒷문으로 향했다. 널빤지 뚜껑의 구멍에서 두 남자가 기어 나왔다. 이 때 트리피드 하나가 깨진 쇼 윈도 너머로 독채찍을 뻗쳤다.
"악!“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남은 장님들은 공포에 질려 밀치락 달치락하면서 뒷문에 이르렀다.
"깩!"
나는 뒷문간에 서서 밖의 상황을 살폈다. 좁은 골목 저쪽에 관목 정원 숲이 있다. 거기에 트리피드의 머리가 둘 보였다.
"내 뒤를 따라와요!"
나는 벽돌담을 따라 장님들을 옆의 건물로 이끌었다. 그 곳은 택시 영업소였다. 뜰에 대형차 3대가 늘어서 있었다.
"서둘러!"
장님들을 차에다 밀어 넣고나서 나는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트리피드는 소리에 민감하다.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정문 쪽으로 트리피드 둘이 흐느적흐느적 다가왔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정문을 나설 때 녹색의 독채찍이 차창의 유리를 철썩 때렸다.
"제기랄."
나는 차를 급선회시켜 트리피드에 부딪쳐서 하나를 치어 쓰러뜨리고 길로 나왔다. 무사히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한편 집을 비운 사이에 새로운 병자가 넷 더 생겨났다. 어젯밤에 병이 난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죽고 또 한 명은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작은 방을 점령했다. 촛불을 켜고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 때 또 병자가 두 명 생겼다는 전갈이 왔다.
"장티푸스인가? 잠복기간으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
병명을 확실히 알아보았자 나로서는 어쩔 도리도 없는 것이다. 붉은 머리의 남자도 병을 두려워한 것 같았다. 우리 패 가운데 한 사람이 길 위에서 쓰러지자 그를 쏴 죽이고 남은 사람들의 추적을 그만두었다. 내 활동이 이 장님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일까?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끄는 갱들과 트리피드의 습격을 받으면서 나는 내게 맡겨진 장님들의 모임을 열심히 지탱해 왔다. 수갑과 사슬에서 해방되었는데도 당장에 달아나지 않고 장님들이 자립할 전망이 보일 때까지 만이라도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병에 대해서는 속수 무책이다. 어차피 장님들은 모조리 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즉, 나의 활약은 장님들의 생명을 쥐꼬리만큼 연장시킨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 아닌가? 나는 조젤라의 일을 생각했다. 조젤라에게 맡겨진 반에서도 아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겠지. 역시 마이클 비들리들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비들리의 공동체는 자기들의 힘으로 돌볼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장님만을 도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살아 남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헛된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은 도리어 잔인한 짓이다. 내게 남겨진 귀중한 눈을 이대로 그냥 희망 없는 일에 사용해도 좋단 말인가?
"내일이 되면 조젤라를 찾아서 둘이 의논해 보자.“
조젤라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려보면서 나는 침대에 누웠다.
시체 냄새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까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시체가 썩는 냄새다.“
나는 금방 알았다. 시내의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는 무수한 시체가 썩어서 문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것이었다.
"드디어 런던을 탈출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 혼자서 시골로 달아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았다. 지금 이 하숙집의 장님들은 내게만 의지하고 있다.
"건강한 사람만 함께 데리고 갈까?"
트럭으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모아 놓은 물자도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퍼뜩 깨달았다. 건물 안이 이상하게 조용하다. 귀를 기울이니까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 복도에서 또 한 번 귀를 기울였다. 집안에서는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문득 나는 유성우가 있었던 이튿날 아침의 경우가 생각나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봐요, 누구 없소?“
나는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몇 개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제일 가까운 방문을 열었다. 거기에 남자 한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한눈에 병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좀 어떻소 ?
내가 물어도 제대로 입도 열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불렀다.
"빌, 빌........"
나는 그 방의 문을 열었다. 젊은 처녀가 침대에 있었다. 첫 번째 병자가 생겼을 때 나를 부르던 장님 처녀였다. 이번에는 그녀가 병에 걸려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여자는 말했다.
"빌이에요?“
"그렇소."
"내 곁에 가까이 들어오지 말아요. 병이 옮으면 안돼요.“
"다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지?"
"어젯밤에 우리는 잇달아 발병했어요. 그래서 당신을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달아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밖으로 나갔어요."
"난 곤히 자고 있었어요."
"당신이 남아 있어 줘서...... 정말로 고마와요."
"내가 뭐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는 물었다. 이 때 발작이 일어났다.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고 양손으로 자기의 몸을 껴안고 몸부림을 쳤다. 발작이 끝나자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빌, 부탁이 있어요...... 이런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것을 뭐든 찾아다 주셔요."
"알았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정도뿐이지."
나는 밖으로 나와 근처 약국에서 독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걸 먹으면 편해질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물을 따른 컵을 한 손에 쥐어 주고 또 다른 한쪽 손에 독약을 얹어 주었다.
"고마와요, 빌. 당신은 우리의 치닥꺼리를 참 잘 해 주었어요. 결국 헛수고였지만...... 정말 잘 해 주었어요. 안녕 빌...... 이제 가셔요."
여자의 보이지 않는 눈이 크게 뜨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나는 이제부터 자살을 하려고 하는 여자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이 여자의 일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이름도 묻지 않고 말았다. 나는 다이물러를 운전하여 세인트 제임스 스트리트로 향했다. 거기에는 큰 총포점이 몇 집이나 있었다. 총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붉은 머리의 남자 같은 인간이 있는 이상 무기를 가지지 않고는 안심하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총포점은 약탈당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 대형 수렵용 칼을 허리에 차고 호주머니에 권총을 넣었다. 그리고 엽총과 탄약 상자를 차의 조수석에 들여다 놓았다. 엽총은 라이플보다도 쓸모가 있다. 발사음이 굉장해서 장님 갱들을 위협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트리피드의 독채찍을 깨끗이 쏘아 떨어뜨릴 수로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까지 왔다. 길 위에는 타고 가다가버린 자동차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주위에 세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은 화이트 홀의 보도를 지팡이로 톡톡 더듬으면서 걷고 있었다. 세 번째 사람은 의사당 광장에 있었다. 링컨 동상 앞에 앉아 커다란 베이컨을 꽉 잡고 칼로 작게 잘라 내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의사당 건물이 높게 솟아 있고 큰 시계의 바늘은 6시 3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이미 그것은 거대한 돌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조국의 위
기를 구하자고 호소하는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장엄한 건물도 지금은 과거의 역사를 허무하게 말해 줄뿐이다. 나는 외톨이의 공포를 느꼈다. 인간은 군거성 동물이라서 혼자가 되면 항상 무서운 위험에 몸을 노출시키고 있는 듯한 불안을 느끼는 것이리라. 조젤라를 만나고 싶다. 아마 조젤라도 하숙집이나 호텔을 장님들의 숙소로 택했을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 역에 자동차를 갖다 댔다. 이 근방에는 호텔이 많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뒤져보았으나 어느 패거리도 점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누구한테 물어 보자."
나는 인적을 찾아서 여기저기로 헤매고 다녔다. 버킹검 궁전 가의 모퉁이에 노파가 웅크리고 있었다. 부러진 손톱 끝으로 통조림을 열려고 애쓰면서 욕을 퍼붓다가 울다가 하고 있었다. 설사 눈이 보인다고 해도 손톱으로 통조림을 열 수는 없다. 나는 가까운 식품점에 들어가 강낭콩 통조림 대여섯 개와 깡통 따개를 찾아 가지고 노파한테로 돌아왔다. 노파는 아직 깡통 겉을 긁어 대고 있었다.
"그건 버리는 게 좋아요, 커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노파의 손에 깡통 따개를 쥐어 주고 강낭콩 통조림을 한 개 주었다.
"그런데 할머니, 이 근방에서 장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여자를 모릅니까? 그 여자는 눈이 보이는 처녀인데요."
"알고 있지.“
노파는 더듬거려서 깡통을 따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내가 다급하게 묻자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어딜까. 난 그 아가씨의 패에 얼마 동안 있었는데 처지고 말았어."
"그 처녀의 패는 어디에 살고 있었소?"
"호텔이지."
"어느 호텔?“
"모르겠군. 장님한테야 장소의 이름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어야지."
"그 호텔에 대해 뭐 기억나는 것은 없어요 ? 기억해 내주면 통조림을 한 개 더 주겠어요."
"글쎄."
노파는 뚜껑이 열린 통조림을 들고 알맹이 냄새를 맡았다.
"아래층에 큰 홀이 있는 것 같았어. 양탄자는 푹신했고...... 침대와 시트가 고급스러웠으니까...... 아마 고급 호텔이겠지."
"그밖에 생각나는 게 없소?“
"그래...... 밖에 작은 계단이 두 개 있고, 그 하나를 올라가니까 회전 도어가 있어서 항상 거기로 드나들었지."
노파는 허름한 백 속을 뒤져서 더러운 스푼을 꺼내더니 강낭콩을 퍼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음식 같은 음식을 먹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노파와 헤어져서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회전 도어의 호텔은 많았다. 나는 끈덕지게 찾아다녀서 노파의 말과 딱 맞는 듯한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누가 있소?“
나는 홀로 들어가서 불러 보았다.
안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저편 어두컴컴한 구석에 한 남자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내가 말을 걸자 남자는 말했다.
"물 좀, 제발 물 좀 먹여 주시오."
"알았소.“
나는 식당으로 가서 큰 주전자와 컵을 가져다 남자의 손이 닿는 곳에 놓았다.
"고마와요. 그 뒤는 내 스스로 하겠소. 당신은 되도록 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편이 좋아요."
남자는 더듬어서 컵을 집고 주전자 속의 물을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아, 맛있다...... 물이 이처럼 맛있는 것인 줄은 몰랐군. 헌데 당신은 뭘 찾고 있는 거요? 이 근방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어서 위험해요.“
"난 조젤라라는 여자를 찾고 있소. 눈이 보이는 여잔데 여기에 없소?“
"있었지.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소."
"때가 늦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자 남자가 급히 말했다.
"안심해요. 여기서 나갔을 뿐이니까."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글쎄, 그건 모르겠는걸. 아무튼 당신도 나가는 편이 나아요. 이런 곳에 있다간 나처럼 병이 들어서 못 움직이게 될 테니까."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또 뭐 원하는 것은 없소?“
"아니, 됐어요. 난 이제 곧 아무 것도 필요 없는 몸이 될 테니까.“
남자는 잠시 쉬었다가 덧붙였다.
"그 처녀를 찾거든 안부 전해 주시오. 좋은 아가씨였지. 그럼...... 형씨, 잘 가시오."
런던 탈출
조젤라의 패도 우리 패와 같은 운명을 더듬은 것이다. 나는 조젤라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그러나 조젤라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내 소재를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가 볼 곳은 그 대학의 건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이물러에 타고 대학으로 향했다. 길에는 거의 인적이 없으므로 운전하기는 쉬웠다. 곧 대학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아직 신호기가 걸려서 황혼이 깊어 오는 하늘에 펄럭이고 있었다. 철문은 크게 열려 있고 앞뜰에 14, 5대의 트럭이 늘어서 있다. 그 곁에 다이물러를 세우고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요, 누구 없소?“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는 메아리치면서 위층으로 사라져 갔다. 다른 방에도 들어가서 울렸다. 그러나 어디나 다 쥐죽은듯이 고요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지. 코우커의 습격을 피한 사람들도 이미 며칠 전에 런던에서 빠져 나갔을 테니까."
나는 돌아서 나오려고 했다. 그 때 바깥문의 안쪽에 백묵으로 크게 씌어진 글씨가 눈에 띄었다.
월트셔 디바이디스 틴셤
<틴셤 장>
이것이 아마도 비들리들이 옮겨간 곳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동료가 뒤따라 올 수 있게 새 본부의 주소를 써 놓은 것이다. 나는 앞뜰에 늘어서 있는 트럭을 조사해 보았다. 그 중의 한 대는 내가 마지막으로 몰고 온 것으로 식료품, 잡화, 게다가 트리피드 퇴치 장비가 실린 채로 있었다.
"이것을 그대로 쓰도록 하자."
나는 다이물러에서 엽총 탄약 상자를 내려서 트럭의 운전대로 옮겼다. 그러나 앞으로 한 시간이면 어두워진다. 특별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트럭으로 야간 드라이브를 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틴셤장까지는 160킬로미터나 된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편이 현명하겠다. 나는 예전에 내가 자던 방을 들여다보았다. 가짜 화재에 놀라서 뛰쳐나갔을 때 그대로이다.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까지 내가 놓아두었던 그 자리에 있었다. 자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나는 엽총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러셀 스퀘어의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살펴보았다. 트리피드가 하나 보였다. 관목 숲에서 녹색의 얼굴이 우뚝 튀어나와 있다. 나는 엽총을 꼬나 잡고 겨냥을 했다. 타당! 고요한 정원에 무서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트리피드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갔다. 그밖에는 이제 녹색의 괴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굵은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해가 기울어 정원의 절반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되겠지. 어둠을 두려워하던 원시인의 기분을 나도 알 것 같았다.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는 멈칫거림이 없었다. 상당한 빠르기로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총을 겨누었다. 어슴푸레한 빛 속을 한 남자가 똑바로 다가오고 있다.
"쏘지 말아요."
그 남자는 양팔을 벌리고 말했다. 수 미터 앞에까지 다가왔을 때야 겨우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코우커 아니오!"
"아, 당신인가."
코우커도 내가 누군지 안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총을 겨눈 채로 말했다.
"당신은 또 다른 패거리를 이번에도 내게 돌보게 하려는 거요?“
"아니오. 총 소리가 하도 요란하기에 와 보았더니 우연히 당신이었던 거요. 그 일은 이제 손들었어. 나는 런던에서 탈출하려던 참이오."
"나도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총을 내렸다.
"당신 패는 어찌 되었소?" 하고 코우커는 물었다.
"병으로 전멸이오.“
나는 자세하게 얘기했다. 코우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쪽도 마찬가지였소. 다른 패도 아마 마찬가지일거요. 하는 수 없지 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으니까."
"잘못된 방법으로 말이지."
"그렇소. 이제야 나도 당신네 동료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하오. 그러나 일 주일 전에는 옳게 여겨지지 않았어."
"하는 수 없지. 다시 한 번 새 출발합시다.“
"찬성이오! 나는 착각하고 있었어. 장님들을 돌보고 있으면 반드시 구원의 손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마도 유럽이나 아시아도...... 온 세계가 여기와 마찬가지로 당한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미국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해 주었을 텐데. 늘 그렇듯이 말이오........"
코우커는 한숨을 쉬었다. 이어 우리는 병에 대해 얘기했다. 코우커도 병이 전염병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내일 아침 <틴셤장>으로 간다고 털어놓았다.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하고 코우커가 말했다.
"괜찮고 말고. 오늘밤은 일찌감치 잡시다.“
나는 코우커를 방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나는 푹 잤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코우커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트럭에서 식료품 종이 봉지와 통조림을 갖고 돌아왔다. 그제야 코우커도 일어나서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의논했다. 한 대의 트럭에 함께 타기보다 각각 짐을 실은 트럭을 한 대씩 운전해 가는 편이 틴셤장의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운전대의 창문을 닫아 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런던 교외, 그것도 서쪽 편에는 트리피드의 재배장이 많이 있으니까."
나는 트리피드의 위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곧 두 대의 트럭이 전차와 같은 굉음을 내면서 출발했다. 나의 3톤 짜리 트럭이 앞에 서서 서쪽으로 향했다. 운전은 힘이 들었다. 2, 30미터마다 버려진 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때로는 2, 3대의 차가 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트럭에서 내려 방해가 되는 차를 길옆으로 밀어내야만 했다. 부서진 차는 적었다. 아마도 운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별안간 눈이 안 보이게 된 모양이지만 차를 안전하게 세울 정도의 여유는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실명 소동이 새벽에 일어났으므로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 일이 만약에 대낮에 일어났더라면 주요 도로는 자동차의 행렬로 막혀서 트럭으로 지나가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간신히 런던을 벗어난 곳에서 우리는 트럭을 세웠다. 사방은 고요했다. 우리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문득 코우커가 흥얼거렸다.
우리의 앞에 가로놓인 것은
끝없는 사막뿐......
그것은 17세기의 시인 마벨의 시의 한 구절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의 카운터에 앉아 식사했다. 비스킷에 마멀레이드를 바르면서 나는 코우커에게 말했다.
"당신한테는 정말 놀라겠는걸. 항만 노동자처럼 거친 말씨로 지껄이고 있더니, 별안간 대학 출신의 인텔리처럼 마벨의 시를 읊기도 하니......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나도 잘 모르겠어.“
코우커는 씩 웃었다.
'"아무튼 온갖 것이 잡다하게 섞여서 된 인간이지. 우리 집은 가난했어. 어머니는 내가 있기 때문에 생활이 한층 더 곤란하다면서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 때문에 나는 어릴 때부터 사물을 비뚤어지게 보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소. 중학교를 나오자 나는 곧잘 집회에 나가게 되었소. 무엇에 항의하는 집회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어. 그래서 나는 정치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지. 그놈들은 어려운 말을 써서 논쟁을 하더군. 이따금 나도 끼여들어 엉뚱한 소리를 해서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소. 무식한 나는 인텔리의 말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던 것이지. 나는 야학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해서 놈들의 말하는 방법을 연습했소. 그러다가 깨달았지. 인텔리의 말투는 인텔리 사이에서만 쓰면 된다, 노동자에게 얘기할 때는 노동자의 말을 써서 얘기해야 된다고 말이오. 당신은 인텔리니까 내가 마벨의 시를 인용하는 걸 보고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감탄했지. 그러나 항만 노동자를 보고 마벨의 시를 인용해 보았자 칭찬 받을 수는 없어요. 연설이란 것은 상대방에게 적합한, 또 그 자리에 적합한 말을 써야 해요. 때로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상대방을 놀라게 하여 그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서 나는 몇 가지 말투를 쓸 수 있게 되었소. 즉 프로 연설장이가 된 거지. 월프레드 코우커, 집회 연설 청부업, 어떤 연설이라도 맡습니다. 이 장사는 제법 재미가 있었지.“
"어떤 연제로도 지껄일 수 있소?“
"물론이지. 인쇄장이가 어떤 말이라도 활자로 공급하듯이 나는 어떤 말이라도 입으로 공급하오. 그것을 무엇이나 다 옳다고 믿을 필요는 없어."
코우커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장님이 안 되었소? 그 유성의 밤에 병원에 있었던 것은 아닐 테지?"
"나는 그 날 어느 스트라이크 집회에서 경찰의 태도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소. 저녁 6시 반경, 경찰대가 와서 집회를 해산시키려고 했지. 나는 집회장의 지하실에 들어가서 대팻밥더미 속에 숨었소. 경찰관들은 좀처럼 철수하지 않고 대팻밥 속은 아주 편안했으므로 그만 나는 잠이 들고 만 것이오. 이튿날 잠이 깨서 밖으로 기어 나왔더니 세상이 변해있더군. 이렇게 되면 내 장사도 끝장이지. 연설을 부탁하러 올 사람도 없을 테니까."
코우커는 한숨을 쉬었다.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또 트럭에 올라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푸른 하늘 아래, 로틴의 녹색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도시는 죽었으나 전원에는 아직 생명이 넘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행거포드 읍내에서 다시 식량과 연료를 보급했다. 그리고 또 달려서 디바이디스 바로 앞에서 다시 한번 차를 세우고 지도를 살펴보았다. 가도에서 오른쪽의 옆길로 꺾여 있는 곳이 틴셤 마을이었다.
여자 리더
틴셤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저택이었다. 우리는 큰 철문이 앞을 가로막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문간에 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엽총을 어색하게 겨누고 있다. 총 다루는 법을 잘 모르는 듯했다.
"여기가 틴셤장인가요?“
내가 묻자 여자는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네들은 어디서 왔죠? 몇 명이나 돼요?“
나는 단 둘이서 왔다는 것과 트럭에 실려 있는 짐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여자는 우리를 살피듯이 보았다. 그리고 트럭의 뒤로 돌아가서 짐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내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듯, 여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길로 가세요."
우리는 트럭에 올라타고 느릅나무 가로수 길을 전진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부지의 여기저기에 정원이 여러 개 있었다. 곧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건축 양식의 건물이 역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가로수 길에 이끌려서 우리는 가장 큰 건물의 안뜰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여러 대의 자동차가 멈춰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건물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긴 복도를 걸었다. 막다른 곳은 부엌과 식당으로, 음식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넓은 식당에는 긴 테이블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고 그 벤치에 5,60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한눈에 장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옆의 테이블에서 눈이 보이는 세 젊은 여자가 부지런히 닭고기를 썰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걸어갔다.
"우린 지금 막 이 곳에 도착했는데요........ 뭐 도울 일은 없어요?"
"글쎄요, 한 사람은 야채를 나누고 또 한 사람은 접시를 돌려주세요." 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서 부엌과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조젤라는 없었다. 그러나 몇 여자는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들리의 공동체에 있던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패거리는 비들리의 공동체보다도 남자의 비율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도회인 같은 사람이 적고 대부분은 농민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가 장님인데 그 가운데 중년의 목사가 한 사람 섞여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 예닐곱 명 있었다. 그 대부분이 시골 사람이고 도회인 같은 여자는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접시를 나르고 급사 일이 끝나자 나와 코우커는 자기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찬 통조림만 먹고 지냈으므로 제대로 만들어진 식사의 고마움이 절실히 느껴졌다. 우리는 게걸스럽게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장님 목사가 일어섰다.
"여러분, 오늘 하루가 무사히 끝나려 함에 즈음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재난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시다. 주님께서 어둠 속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 시련을 이기고 보다 좋은 세계를 재건할 수 있도록 다 함께 기도 드립시다."
목사는 머리를 숙이고 기도의 말을 외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의 주여........“
"아멘.“
그 뒤에 찬송가가 끝나자 장님들은 각각의 패로 갈라져 눈이 보이는 네 명의 여자들에게 인도되어 식당에서 나갔
다. 코우커가 내게 물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여자는 없소?“
"예, 안 보여요."
내가 고개를 젓자 코우커가 말했다.
"이상하군. 내가 당신과 함께 잡았던 사람들도 없어. 아까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던 여자를 빼고는 말야."
"그래서 그 여자는 아까 무서운 눈으로 당신을 노려본 것 같군.“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왔다.
"뒷설거지를 도와주지 않겠어요 ? 곧 미스 듀런트가 돌아올 거예요.“
"미스 듀런트?“
"예, 이 곳의 리더는 플로렌스 듀런트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당신들은 듀런트와 의논을 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 주위가 어두워진 무렵 듀런트가 돌아왔다. 우리는 여자 리더의 방으로 가 보았다. 책상 위에 촛불이 두 자루 켜져 있었다. 듀런트는 얼굴빛이 거무스름하고 입술이 얄팍한 여성이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생각났다. 전날 대학의 당에서 볼레스 박사가 남자와 여자의 문제에 관해서 연설했을 때 일어서서 질문하던 여자였다. 듀런트는 싸늘한 표정으로 코우커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 대학의 습격을 지휘한 분이라지요?“
"예, 그렇습니다." 하고 코우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공동체에서는 난폭한 수단은 일체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코우커는 약간 미소지었다. 그리고 품위 있는 중류 계급의 말씨로 말했다.
"그 때 어느 편이 난폭했는지 .... 그것은 견해의 문제지요. 당신이 판정할 수 있습니까?“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코우커와 같은 남자를 만난 일이 없어서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고쳐 앉았다.
"당신도 갱과 같은 공동체에 참여 했었나요?“
나는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내 편에서 질문을 했다.
"마이클 비들리와 대령과 그 밖의 동지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 사람들도 일단 여기에 왔지만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만들고 있는 공동체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에 입각한 깨끗하고 올바른 사회의 재건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상야릇한 이론을 들고 나와서 하느님의 율법을 배반하고 부도덕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여기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에 따른 공동체인 것입니다.“
듀런트는 도전하듯이 우리를 노려보았다.
"예. 그래서 당신네들은 비들리의 동지들과 헤어진 거로군요. 비들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사람들은 여기서 나갔습니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율법을 배반하는 일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
듀런트는 싸늘하게 대답하고 더 이상의 질문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우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방면에서 나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지 분명해질 때까지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 대답에 듀런트는 또 어리둥절한 듯했다.
"그렇다면 여기의 상황을 대충 보고 나서 내일 밤 다시 의논하러 오세요."
듀런트는 회견을 끝내려고 하였으나 코우커는 물고 늘어져서 틴셤장 부지의 넓이, 건물의 수, 공동체의 인원, 사람과 장님과의 비율 등을 끈질기게 계속 질문했다. 나는 조젤라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듀런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조젤라 플레이턴...... 아, 예, 그 여류 작가......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여기서 해 나가려고 하는 그런 공동체에 찬성할 여자 분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리더로 있는 이상 이 곳의 공동체는 딱딱한 것이 될 것 같았다. 복도에 나오자 코우커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 여자는 이상한 자만심과 편견으로 뭉쳐 있군. 독재자 타입이야. 우리의 도움을 원하는 주제에 원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거야."
우리는 저녁의 어슴푸레한 빛이 남아 있는 복도를 잠시 걸었다. 열린 도어로 어둑어둑한 방안이 어렴풋이 보였다. 남자들의 침실이었다.
"난 저 사람들과 좀 얘기를 하고 싶소. 또 뒤에 다시 만납시다."
코우커는 남자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혼자 식당으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촛불이 세워져 있고 그 불빛으로 한 젊은 여자가 바느질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촛불이 깜박거려서 눈이 아파 죽겠네."
여자는 짜증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촛불이 있는 동안은 그래도 좋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는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다.
"당신은 오늘 런던에서 온 분이군요."
"그렇소."
"거기는 비참하지요?"
"이 세상의 종말이오."
나는 런던의 상황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도 런던에서 왔습니까?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됩니까?"
다행히 이 여자는 그 때 비들리의 공동체에 있던 여자였다. 코우커의 패거리가 대학을 습격했을 때 눈뜬 사랑 중에서 잡히지 않은 사람은 겨우 대여섯 명뿐이었다. 그 중의 두 사람이 플로렌스 듀런트와 이 여자였다. 그 다음 날, 듀런트가 수습 위원이 되었으나 예정대로 모두를 출발시킬 수
는 없었다. 트럭을 운전해 본 일이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째, 오후부터 밤에 걸쳐 마이클 비들리와 대령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 때쯤에는 트럭을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열 명 가량 모였다. 며칠 기다리면 또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은 알았으나 비들리들은 즉시 출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갈 곳은 우선 틴셤장으로 결정되었다. 마침 대령이 거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틴셤장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지낸 뒤 집회가 열렸다.대학의 강당에서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비들리와 대령들의 일파와 플로렌스 듀런트의 일파이다. 듀런트는 비들리와 대령들의 새로운 사고 방식에 반대하여 크리스트교 적인 사회를 재건하겠다고 주장했다. 듀런트를 지지한 것은 5명의 눈뜬 처녀와 12, 3명의 장님 처녀, 그리고 중년의 장님 남녀 수명이었다. 눈이 보이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좋아요. 각자 자기가 옳다고 믿는 공동체를 만들도록 합시다. 이 틴셤장은 당신네들이 맡으시오."
비들리들은 아직 짐이 그대로 실려 있는 트럭을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했다. 그 뒤에 듀런트들은 틴셤장의 안팎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우선 부지 내의 농원에서 무서운 것이 발견되었다. 어른 남녀 한 쌍과 처녀 한 명이 밭 속에 한데 모여 쓰러져 있고, 그 곁에 두 그루의 트리피드가 뿌리를 내리고 시체가 썩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듀런트는 총기실에서 엽총을 꺼내 와 눈뜬 처녀들의 도움을 얻어 저택 내에 있는 트리피드를 모조리 퇴치했다. 총을 다룬 경험은 없었으나 필사적으로 녹색의 괴물을 쏘아 댔다. 독채찍이 날아간 트리피드는 스물 여섯이나 되었다. 그 다음 날은 마을을 조사하러 갔다. 여기저기 제법 트리피드가 있었다. 마을 사람의 대부분은 독채찍에 희생이 되고 운수 좋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듀런트는 살아 남은 마을 사람들을 틴셤장으로 데리고 왔다. 남자도 여자도 건강하고 씩씩했으나 눈이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플로렌스 듀런트는 여자지만 훌륭한 리더예요. 이곳의 공동체는 반드시 잘 돼 갈 거예요."
여자는 촛불 빛으로 옷을 기우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조젤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조젤라 플레이턴이라는 이름조차 들은 일이 없고 내가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식당의 전등이 켜졌다.
"어머나!"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전등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촛불을 불어 끄고 바느질을 계속했다. 2, 3분 지나자 코우커가 불쑥 들어왔다. 나는 전등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 짓이로군."
"그래요. 이 건물에는 자가 발전 설비가 있었어. 석유가 없어질 때까지는 전등을 쓸 수 있지."
코우커는 여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신네들은 이 건물을 조사했겠지? 불이 필요하면 왜 발전기의 모터를 돌리지 않았소?“
"그런 게 있는 줄을 몰랐어요. 듀런트도 여자인 걸요. 전기나 모터에 대해서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하고 여자는 대답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자 여자가 어디 있소. 어둠 속에서 기도만 올리고 있어서야 살아 남을 수 없지."
코우커의 빈정거림은 따끔했다. 여자는 화가 난 듯, 큰 눈으로 코우커를 노려보았다.
요새의 3인조
이튿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코우커의 침대는 비어있었다. 이미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나도 아침시간을 주로 탐문하는 데에 썼다. 조젤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오기 전날, 눈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몇 명인가 왔다가 또 나갔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조젤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조젤라가 어디에 살아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점심 식사 때 코우커가 모습을 보였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 공동체의 실태를 자세히 조사했어요. 가축의 수, 농원의 설비, 수원, 저장 식료품-이와 같은 것을 잘 쓰면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소. 그래서 나는 목사와 듀런트를 만나서 내 의견을 말했소. 이 공동체는 눈이 보이는 사람의 수가 적어요. 그러니까 장님도 일을 할 수 있게 훈련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 증강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목사란 작자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더욱 많은 장님을 이 공동체에 참가시키고 싶다지 뭐요. 듀런트는 듀런트대로 내 의견이 이 공동체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고 말이오. 그 여자는 이 곳의 보스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요.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깨끗하고 바르게라고? 흥, 해 보라지. 그 여자가 이대로 있다간 조만간 이 공동체는 혼란에 빠져 자멸의 길을 걸을 거야. 한데 당신은 어쩔 작정이오?"
"마이클 비들리들을 쫓아갈 작정이오. 그 외에는 조젤라의 행방을 찾을 방법이 없으니까."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도 함께 가겠소. 한 번은 비들리들의 공동체를 깨부수려고 한 나였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의 견해를 인정하고 있어요. 반드시 쓰일 데가 있을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코우커는 내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 날 오후 늦게 나는 듀런트를 붙잡고 물었다.
"비들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듀런트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듀런트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이 공동체에는 눈이 보이는 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와 코우커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듀런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셋의 비민스터 가까이 가는 것 같았어요. 그 이상의 일은 모르겠어요." 하고 겨우 가르쳐 주었다.
나는 즉시 코우커에게 이야기했다.
"좋아, 내일 아침 이 고약한 장소에서 떠납시다.“
그러면서도 코우커는 틴셤장에 미련이 있는 듯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트럭 두 대로 나란히 출발했다.
날씨가 여전히 좋았다. 마을마다 거리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풍기고 있다. 우리는 트럭의 창문을 닫은 채 전진했다. 한 두어 번, 관목 숲 곁을 지날 때 독채찍이 획 하고 뻗어 왔다. 그것은 운전석의 유리창문을 때려서 유리에 독액의 자국을 남겼다. 트리피드는 소리에 민감하다. 소리에 의해 먹이가 있는 곳을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트럭의 운전석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까지 아는 것일까? 나는 트리피드를 전문으로 연구해 온 전문가로 자처하지만 이 녹색의 괴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오후 4시 반경, 우리는 비민스터 읍내에 트럭을 몰고 들어갔다. 그러나 읍내에는 비들리들이 있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번화가의 상점 거리에 두 대의 트럭이 서 있을 분 사람의 그림자는 없다. 그 길을 우리가 20미터쯤 전진했을 때였다. 한 남자가 트럭 뒤에서 나타나서 라이플을 겨누었다. 탕! 총 소리가 사방을 흔들었다. 탄알은 나의 머리 위 높은 곳을 날아갔다. 서 라는 경고였다. 나는 트럭을 세웠다. 라이플을 손에 든 남자는 키가 크고 튼튼한 체격이었다. 남자는 내게로 총구를 향한 채 내리라고 명했다. 나는 트럭에서 내려서 양손을 벌려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했다. 거기에 또 한 남자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때 코우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라이플은 넣어 두는 게 좋을 거요. 내가 그럴 마음만 있으면 당신네들 셋은 몸에 배꼽이 또 한 개씩 생길 테니까"
"그 사람의 말이 맞다. 우리한테 적의는 전혀 없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몸집이 큰 남자는 라이플을 내렸다. 코우커는 내 트럭 뒤에서 나왔다. 잽싼 남자다. 상대방의 눈을 속여 어느 새 자기 트럭에서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당신네는 두 사람뿐이오?"
여자와 같이 온 남자가 물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코우커가 대답하자 3인조는 안심이 된 모양이다. 몸집이 큰 남자가 설명했다.
"도시 갱이 식량을 빼앗으려고 온 줄 알았지."
"당신네들은 대도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모양이지? 혹시 갱이 있다고 해도 이런 데까지 식량을 모으러 오지는 않아요."
코우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3인조는 겨우 안심한 듯했다. 나는 물었다.
"비들리의 패거리를 모르시오?"
"그게 어떤 사람들인데?"
큰 남자가 반문했으므로 나는 실망했다. 3인조는 비들리라는 이름을 들은 일도 없고 수십 명의 패거리를 만난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큰 남자는 스티븐 브렌렐이라 하며 중권 거래소의 직원이었다. 또 한 남자는 아직 젊은데 라디오 상점의 경영자였다. 그리고 여자는 영화 배우를 지망하는 패션 모델이었다. 이 세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유성우를 보지 않아서 눈이 멀지 않은 것이다. 나는 제안했다.
"비들리의 공동체를 찾으면 당신네들도 참가하지 않겠소? 그 편이 매사 편리할 테니까."
"좋아요. 우선 우리의 요새로 가십시다.“
하고 몸집이 큰 스티븐이 동의했다. 우리는 네 대의 트럭을 나란히 물고 출발했다. 3인조가 살고 있는 저택은 요새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돌로 된 튼튼한 건물이고 주위에 해자가 빙 둘러 있었다. 건물의 창문과 지붕에 모두 다섯 자루의 기관총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병기고를 하나 발견했소. 그래서 이만한 것을 긁어모아 온 것이오."
몸집이 큰 스티븐은 자랑하면서 입구에 가까운 작은 방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라이플과 권총 따위와 함께 화염 방사기까지 있었다.
"이 화염 방사기는 트리피드를 퇴치하는 데 도움이 되겠는걸.“
내가 가리키자 스티븐은 득의 양양하여 웃었다.
"시험해 보았어요. 이것을 퍼부으면 트리피드는 당장에 부풀어올라서 터지고 말아요."
그러나 요새의 주위에는 트리피드가 숨어 있는 기미는 없었다. 나와 코우커는 지붕으로 올라갔다. 달이 뜨기 전이라 주위는 어둠 속에 싸여 있었다.
"비들리는 대학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빛으로 신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지만 어느 쪽에서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우리는 트럭을 타고 읍내로 나가 한 사람씩 작은 차로 갈아타고 비들리의 공동체를 찾아보았다. 전원의 길은 초여름의 싱싱한 신록으로 넘쳐 있었다. 여기저기에 도표가 서 있고 길가에는 여느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들꽃이 피어 있었다. 명랑하게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도 보였다. 새는 눈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가축은 대개 장님이 되어 있었다. 가시덤불 속으로 잘못 들어간 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멍하니 서 있다. 가시 철망에 머리를 처박고 움직일 수 없어 굶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양도 눈에 띄었다. 소도 마찬가지였다. 젖소가 큰 유방을 덜렁거리며 비틀비틀 걷고 있다. 나무 밑동 곁에 뒹굴고 있는 소의 시체도 있었다. 기운이 있는 것은 트리피드뿐이었다. 이따금 녹색의 머리를 흔들거리며 부지런히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언덕이나 높다란 곳으로 나올 때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쌍안경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연기나 깃발 신호를 기대했지만 그럴 듯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번은 언덕의 중턱에서 너울너울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깃발인가?“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쌍안경으로 보았다. 흰 것은 양이었다. 대여섯 마리의 양이 트리피드한테 쫓겨서 도망쳐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긴 독채찍이 잇달아 양들을 후려치고 있었다. 다행히 양의 몸은 털이 많아서 독채찍의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트리피드를 보자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놈들이 썩은 고기를 먹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과 가축들이 어처구니없는 재난을 만난 것을 이용해서 한층 더 날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끔직한 괴물을 어째서 우리는 전세계에서 재배했던가? 인간은 트리피드를 식량으로 해 왔는데, 지금은 트리피드가 인간을 식량으로 하려 하고 있다. 저녁때 나는 트럭을 세운 곳으로 돌아왔다. 이어 코우커와 3인조가 속속 철수해 왔다. 아무도 비들리의 공동체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위스키를 마시고 트럭으로 요새에 돌아왔다.
"내일은 수색 범위를 넓힙시다.“
코우커는 지도를 펴고 새로운 지구에 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티븐이 말했다.
"우리도 꼬박 20킬로미터 사방의 지역을 샅샅이 뒤진 셈이오. 그래도 안 보이니 비들리들은 이 근처에는 없는 거야. 그 사람들이 비민스터에 왔다는 정보가 잘못이거나 만약에 왔다고 해도 여기를 지나쳐서 더 앞으로 갔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더 이상 오늘과 같은 방법으로 수사를 계속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달리 좋은 방법이 있소?" 하고 코우커가 물었다.
"비행기를 쓰면 좋겠어요. 상공에서라면 더 넓은 지역을 빨리 조사할 수 있고 폭음을 들으면 누구든지 뛰쳐나와서 무슨 신호를 보낼 테지."
"과연 좋은 생각이오. 비행기는...... 헬리콥터라야 해. 그러나 어디에 가면 헬리콥터를 구할 수 있지? 게다가 누가 그것을 조종할 거요?“
문제를 현실적으로 파고들어 생각하는 것이 코우커의 훌륭한 점이었다.
"조종쯤이야 내가 어떻게 하겠소."
라디오 가게 주인이 말했다.
"경험이 있소?“
"아뇨...... 그러나 요령만 터득하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을 거요.“
라디오 가게 주인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스티븐의 이야기로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영국 공군 기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공군 기지로 갔다. 스티븐의 예상대로 거기에는 군용 헬리콥터가 있었다. 라디오 가게 주인은 즉시 헬리콥터를 타고 30분쯤 연습했지만 훌륭히 조종술을 배웠다. 그로부터 나흘 동안 헬리콥터는 차츰 수색 범위를 넓히면서 날아다녔다. 나와 코우커가 번갈아 가며 동승하여 정찰을 했다. 우리는 모두 10개쯤 되는 작은 패거리를 발견했다. 가장 인원수가 많은 패거리는 일곱 명이었다. 그러나 비들리들의 일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리고 조젤라의 행방을 아는 사람과도 만나지 못했다. 헬리콥터에 의한 수색은 나흘째로 그만두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일을 의논했다.
"크리스마스까지에는 미국에서 구원대가 올 거야...."
패션 모델 여자는 아직도 태평스러운 말을 한다.
"당신은 행복한 인간이오.“
코우커는 쓴웃음을 짓더니 금방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 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와 같은 작은 패거리는 가능한 한 합류해서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해요. 작은 패거리가 각각 식량과 석유를 아무리 저장해도 그것이 없어지면 자멸을 기다릴 뿐이오. 우리가 오래 살아 남아서 눈이 보이는 아이를 낳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급 자족할 수 있는 공동체를 조직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틴셤장에는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소. 거기에는 넓은 농장과 양질의 수원이 있소. 우리가 합류해서 저 듀런트의 콧대를 꺾고 돌대가리를 깨우쳐 주면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어요. 자급 자족의 태세가 갖추어진 다음 각지에 살아 남은 교사, 간호원, 교사 등을 찾아온다면........"
"이봐요. 당신의 계획은 훌륭하지만 듀런트가 우리를 받아 주리라고 생각하오?"
내가 묻자 코우커는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우리가 다시 동지로 넣어 달라고 부탁하면 아주 기뻐할걸.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라."
"설마 당신은 그 여자가 계획적으로 거짓 길을 가르쳐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
"그 점은 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틴셤장으로 돌아가겠네. 당신들도 함께 가지 않겠소?“
코우커는 모두를 설득했다. 한 시간쯤 의논한 끝에 3인조는 틴셤장으로 가기로 정했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틴셤장에 가면 조젤라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보로 생각해 보아 조젤라는 틴셤장에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비들리들과도 별도로 행동을 취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났다. 런던의 아파트에서 조젤라와 탈출해 갈 곳을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조젤라는 말했었다.
"서섹스의 다운즈는 어떨까...... 난 오래 된 농장을 알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나는 코우커에게 했다.
"좋아요. 당신 마음대로 해 보시오. 그리고 애인을 찾거든 둘이서 틴셤장으로 오시오."
하고 코우커는 나를 격려했다. 절대로 소용없는 짓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이튿날 아침은 비가 억수같이 왔다. 나는 코우커의 전송을 받으며 트럭에 올라탔다. 차는 진창길을 물보라를 튀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의 소녀
오전 중에는 비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카뷰레이터에 물이 스며들어갔고 그 다음에는 점화 장치가 고장을 일으켰다. 오후 1시쯤에 비가 멈추고 태양이 얼굴을 내밀어 그 후에는 트럭이 쾌조로 계속 잘 달렸다. 뉴포레스트에 들어섰을 때 나무 사이 너머로 헬리콥터가 보였다. 운수 나쁘게도 길 양쪽의 수목에 가려서 공중에서는 내 트럭이 안 보였음이 분명하다. 나는 액셀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올려 훤하게 트인 곳으로 나왔으나 그 때는 이미 헬리콥터가 저 먼 하늘에 있는 점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헬리콥터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다시, 또 수 킬로미터를 달려갔더니 작은 마을에 다다랐다. 길가에 빨간 타일을 붙인 작은 주택이 여러 채 늘어서 있다. 정원에는 색색 가지 꽃이 만발해서 마치 그림책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꽃들 사이에 트리피드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몇 그루나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끝에 왔을 때 마지막 정원의 문에서 작은 사람의 그림자가 한길로 뛰어나와 양손을 쳐들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트리피드가 없는지 사방을 살펴보고 나서 엽총을 들고 길로 내려섰다. 작은 사람의 그림자는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된 귀여운 소녀였다. 파란 목면 원피스를 입고 횐 양말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아저씨, 부탁이에요. 토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좀 봐주세요........"
소녀는 내 소매에 매달렸다. 눈이 보이는 아이를 만난 것은 오랜만이다. 나는 눈꺼풀 안에 눈물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디냐?“
"이 쪽이에요.“
우리는 손을 잡고 문 쪽으로 갔다.
"저기, 저기에요."
소녀는 가리켰다. 화단 사이의 좁은 잔디밭에 네 살쯤 된 사내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소녀는 말했다.
"저놈이 토미를 때렸어요. 내가 토미를 도와주려고 하니까 나까지 때리려고 했어요.“
울타리 위로 트리피드의 머리가 튀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혼내 줄 테니까 귀에 손을 대고 있거라.“
나는 엽총을 겨누어 트리피드의 머리를 한 방에 쏘아 떨어뜨렸다.
"저놈은 이제 죽었어요?"
소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트리피드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타닥. 가는 막대로 잎자루의 뿌리께를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한 방 더 쏘아 트리피드를 완전히 아무 소리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죽었다.“
우리 둘은 사내아이 곁으로 갔다. 흙빛 얼굴에 독채찍에 맞은 자국이 발갛게 나 있었다. 소녀는 사내아이 곁에 꿇어
앉아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토미도 죽었나요?"
"그렇단다."
나도 소녀와 나란히 쭈그리고 앉았다.
"가엾은 토미. 강아지처럼 묻는 거지요?“
"그렇게 하자."
나는 작은 구덩이를 팠다. 소녀는 화단의 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무덤 위에 놓았다. 잠시 후 나는 소녀를 트럭에 태우고 출발했다. 소녀의 이름은 수잔이라고 했다. 얼마 동안 훌쩍거리고 있더니 차츰 내 질문에 대답하여 띄엄띄엄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잔은 날짜를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아무튼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 둘 다 눈이 안 보였다. 아버지는 도움을 청하려고 외출하더니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어머니는 수잔과 토미에게 '절대로 집에서 나가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또 나갔으나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잔과 토미는 집안에 있는 것을 먹으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자 먹을 것이 없어져서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수잔은 어머니의 주의를 어기고 월튼 부인의 식료품 가게에 갔다. 가게는 열려 있었으나 월튼 부인은 없었다. 수잔은 나중에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케이크와 비스킷을 들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수잔은 트리피드가 여럿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중의 하나가 느닷없이 독채찍을 뻗어서 수잔을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수잔의 키를 잘못 알았는지 독채찍은 수잔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말았다. 수잔은 깜짝 놀라서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그리고 토미에게도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토미는 아직 어렸다. 그 날 아침 밖으로 놀러나갔을 때 옆집 정원과의 경계인 울타리에 숨어 있는 트리피드를 보지 못했다. 얼마 후에 비명이 들렸다. 수잔이 급히 뛰쳐나가 보니 토미의 작은 몸이 잔디밭에 쓰러져 있었다. 수잔은 토미 곁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마다 트리피드의 머리가 보여서 무서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내가 지나가게 된 것이다. 한 시간 가량 달리고 나서 나는 트럭을 세웠다. 주위는 벌써 어두컴컴하다. 오늘밤의 숙소를 결정해야만 했다.
"여기에 있거라."
나는 수잔을 차에 남겨 두고 근처에 있는 집을 두세 집 조사하여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식사는 있는 것으로 때웠다. 그러나 수잔은 통조림 고기와 치즈 따위를 작은 배가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먹었다.
"매일 비스킷과 케이크만 먹고 있었걸랑요.“
단것은 신물이 난다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헤어브러시로 수잔의 머리를 깨끗이 빗겨 주었다. 수잔은 이야기 상대가 생겼으므로 기운이 나서 끔찍한 사건들을 잊고 있는 듯했다. 나는 수잔을 2층의 침대에 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2층으로 돌아가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수잔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 걱정할 것 없다.“
"난 무서웠어요.“
"토미의 일이?“
"그 뒤에요...... 이 곳에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난 무서워서 ........"
"나도 혼자가 되었을 때는 무서웠단다.“
"하지만 지금은 안 무섭지요?“
수잔은 눈물이 멎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또 무서워지지 않게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요. 그러면 무섭지 않아요."
수잔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물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여요?“
"어떤 여자를 찾으러 가는 길이야."
"그 사람은 어디에 있어요 ?
"서섹스의 다운즈에 있을 것 같은데........"
내 대답은 자신이 없었다.
"그 사람 예뻐요?“
"그래 예쁘다.“
그 점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수잔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 상대를 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다시 트럭에 올라탔다. 이런 시골에서도 어린 소녀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광경을 여러 번 만났다.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축의 시체, 그 곁에 뿌리를 내리고 시체가 썩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트리피드. 수잔은 가끔 질문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얼버무리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설사 어린이라 할지라도 사실을 똑바로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정오 때쯤 하늘이 흐려지더니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저녁 5시쯤 나는 트럭을 세웠다. 앞쪽에 언덕이 보였다. 다운즈의 언덕이 비로 흐려져 있었다. 조젤라의 이야기로는, 목적지인 농가는 언덕 북쪽의 중턱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언덕은 몇 킬로미터에 걸쳐서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다. 다행히 비가 한때 그쳤다.
"누가 살고 있으면 연기가 보일 텐데."
우리는 트럭에서 내려서 나직한 담 위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쌍안경으로, 수잔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언덕의 주위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연기는 한 줄기도 없었다. 차츰 어두워 오는 언덕 기슭에서 이따금 움직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와 양들이었다. 저 아래 들판을 흐느적흐느적 가로질러 가는 트리피드도 보였다. 그뿐이었다.
"이 쪽에서 신호를 보내 볼까?“
나는 수잔을 트럭에 태우고 근처의 마을로 들어갔다. 그 곳에도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몇 채의 집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이, 멋져!“
수잔은 새빨간 비단 레인코트를 발견하여 입었다. 사이즈가 너무 크지만 비를 가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호화로운 롤스로이스를 발견하여 그 헤드라이트를 떼어 가지고 트럭으로 돌아왔다.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빗속에서 강력한 헤드라이트를 트럭의 운전대 옆에 붙였다. 완전히 어두워졌을 무렵 비의 기세도 약해졌다.
"됐다, 빛의 신호를 보내 보자."
나는 라이트의 스위치를 넣었다. 휘황하게 빛나는 광선이 어둠을 꿰뚫었다. 나는 광선을 언덕으로 향해 천천히 좌우로 돌렸다. 한 바퀴 돌리고 나서는 몇 초 동안 스위치를 끊고 어둠 속에서 불빛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찾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수잔이 큰 소리로 외쳤다.
"빌, 저기 불빛이 보여요."
라는 라이트의 스위치를 껐다. 캄캄한 언덕의 중턱에 약한 광선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좋아, 가 보자.“
나는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켰다. 언덕에 도착하려면 수 킬로미터의 낮은 습지대를 지나가야만 했다. 배수로의 수문지기가 없어서 사방이 온통 물구덩이였다. 길이 물밑에 숨어서 알 수 없는 곳도 있다. 나는 조심해서 천천히 차를 전진시켰다. 가까스로 언덕에 도달하자 이번에는 꼬불꼬불한 오르막이었다. 길이 좁아서 양쪽에 무성한 관목과 가시덤불이 트럭의 옆구리를 긁었다. 그러나 모퉁이를 하나 지날 때마다 중턱의 빛이 가까워져서 마침내 불 켜진 네모난 창문에 도착하게 되었다. 길 앞쪽에서 또 하나 작은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칸델라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문을 지나는 모퉁이를 가리키고 땅 위에 놓였다. 나는 칸델라의 1, 2미터 앞에서 트럭을 세웠다. 차문을 열자마자 대뜸 회중 전등의 빛이 내 얼굴을 비추었다.
"어머나, 빌! 오랜만이에요."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눈앞에 레인코트에 싸인 여자가 서 있었다. 조젤라였다.
"아, 빌...... 난 기다리고 있었어요. 줄곧.."
그 목소리는 감정의 폭발을 억제하는 것처럼 끊겼다. 나는 말없이 조젤라를 꼭 껴안았다. 이 때 차 위에서 수잔의 목소리가 났다.
"빌, 바보같이 비에 젖잖아요? 왜 집에 들어가서 그 분한테 키스하지 않아요?“
새로운 생명
내가 조젤라와 재회한 장소는 셔닝 농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붉은 타일을 붙인 큰 건물에는 자가 발전 설비와 우물이 있었다. 여기에는 브렌트 내외가 살고 있었다. 남편인 데니스도 부인인 메리도 조젤라의 친구였다. 그밖에 조이스라는 여자가 메리의 이야기 상대 겸 집안 일을 돌봐 주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젤라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데니스도 메리도 조이스도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메리는 곧 아기를 낳을 몸이었다. 나는 우선 조젤라에게 물었다.
"그 대학에서 화재 소동이 일어난 뒤 당신은 어떻게 되었소?“
"장님들의 노예로 되돌아갔지요."
조젤라는 나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코우커 일당에게 잡혀서 수갑과 사슬로 자유를 빼앗기고 장님들의 한 패거리를 떠맡게 된 것이었다.
"난 첫날에 두 사람을 겁주었어요. '이 수갑과 사슬에서 나를 해방해 주면 가능한 한 당신들을 돌봐 주겠다. 그러나 이대로 끌고 다닐 생각이라면 당신들은 청산가리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이어요. 그들은 영리했어요. 즉시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어요."
그 후의 나날은 내 경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병으로 패거리가 해체되자 조젤라는 차를 주워 가지고 나를 찾으러 햄스티드까지 갔다. 그러나 내 패거리의 생존자들도 만나지 못했고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끄는 패거리도 만나지 못했다. 저녁때가 되자 대학 건물로 향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르므로 길을 두 개쯤 사이에 둔 곳에 차를 세우고 다음엔 걸어서 다가갔다. 그 때 총 소리가 났다. 조젤라는 높직한 곳에 올라가서 대학의 구내를 바라보았다. 러셀 스퀘어의 정원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코우커였다. 조젤라는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 때의 총 소리가 내가 발포한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부터 어디로 갈까?' 자동차로 돌아와서 조젤라는 생각했다. 피난갈 곳이라곤 서섹스의 다운즈에 있는 농장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 장소는 내게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까 혹시 내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여기에 도착했어요. 차 소리에 데니스가 2층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트리피드에 조심하라고 주의해 주더군요. 과연 그 말대로 였어요. 집 주위에는 대여섯 그루쯤 되는 트리피드가 집안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어요. 데니스와 내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더니 트리피드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내 쪽으로 움직여 오지 뭐에요. 나는 급히 되돌아와서 차를 몰아 그놈을 치어 쓰러뜨렸어요.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놈이 많이 있고 나는 나이프 밖에 가진 것이 없었어요. 데니스에게 의논했더니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차의 가솔린을 놈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뿌리고 불이 붙은 막대기를 던지면 쉽게 쫓아버릴 수 있다는 거여요. 그대로였어요. 그 후부터 이따금 불을 사용하고 있죠. 집을 태우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에요."
조젤라는 요리 책을 보며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정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다행히 상당히 많은 식량과 연료가 저장되어 있었다. 음료수에도 곤란을 받지 않았다. 또한 세 명의 주민은 장님이 되었어도 힘껏 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주인인 데니스는 장님이 된 날 아침, 외출했다가 트리피드의 습격을 받아 독채찍에 손을 맞았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에는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철망 헬멧을 만들
어 냈다. 부인인 메리는 어쨌든 아기를 낳으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조이스도 병이 잦은 몸을 채찍질해 가며 가사 일을 계속했다. 거기에 조젤라가 구원의 여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조젤라는 세 장님들의 시중과 출산 일로 눈이 돌만큼 바빴다. 그러나 조젤라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집밖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꼭 눈이 보이는 남자의 손이 필요했다. 조젤라는 밤새도록 불을 켜 놓고 오로지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선 내 일은 <약탈>이었다. 트럭으로 읍내에 가서 필요한 것을 모아 오는 것이다. 식량뿐만 아니다. 발전기를 움직이고 트리피드를 쫓아 버리기 위해 쓸 가솔린, 메리의 해산에 필요한 의료품, 암탉과 소의 사료, 그 밖의 놀랄 만큼 많은 잡화 등을 모아야만 했다. 또 한 가지 일은 트리피드의 퇴치였다. 이 지방은 내가 이제까지 보아 온 어느 지방보다도 트리피드가 많이 번식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눈에 띄는 트리피드는 닥치는 대로 엽총으로 퇴치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반드시 새로운 트리피드 한 두어 그루가 집 주위 어딘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이래서는 정원에도 잘 못 나가겠군."
나는 정원 주위에 철망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트리피드들은 울타리 밖에 와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나 혼자의 힘으로는 당해 낼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어린 수잔에게 트리피드 총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토미의 원수를 갚아 줄 테야!"
수잔은 복수의 귀신이 되었다. 매일 아침, 무거운 트리피드 총을 꽉 잡고 울타리 밖을 향해서 쏘았다. 어느 날 메리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산부인과의 전문 지식은 물론이고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없는 조젤라가 아직 어린 수잔을 조수로 하여 아기를 받아야만 했다. 나는 데니스와 조이스와 함께 불안에 떨면서 하루 밤 내내 깨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조젤라가 기진 맥진한 몰골로 2층에서 내려 왔다.
"태어났어요. 계집아이여요. 둘 다 건강해요."
그렇게 말하고 데니스를 2층으로 데리고 갔다. 몇 분 후에 조젤라는 되돌아왔다.
"대단히 쉬웠어요. 아기는 눈이 보일 거여요. 가엾게도 메리는 아기를 볼 수 없다면서 울고 있지만........"
아무튼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눈이 보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여 다같이 건배했다. 그러나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식량도 연료도 떨어질 때가 온다. 농원은 있지만 나는 농사지을 줄을 몰랐다. 지금부터 배운다고 해도 밭을 일구어 여섯 식구가 먹고 살아갈 만한 작물을 심는다는 것은 우선 무리였다.
"더 큰 공동체에 합류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다."
나는 모두에게 틴셤장의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 합류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는 코우커들과 이전에 대한 의논을 해 보고 오겠소.“
3주일 후 나는 혼자서 틴셤장으로 갔다. 하루만에 왕복할 수 있는 일반 승용차를 썼다. 저녁때 셔닝 농장으로 돌아오니까 조젤라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땠어요?“
"합류 계획은 중지요. 틴셤장은 끝장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전염병으로 당한 모양이오."
나는 보고 온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거기 도착했을 때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넓은 정원의 여기저기에 트리피드가 서성거리고 있었소.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나쁜 예감이 들었어요.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안 보여요. 그리고 차에서 내리니까 고약한 냄새가 났소. 썩은 시체 냄새요.“
이미 조사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행여나 하고 건물 안에 들어갔다. 아마도 2주일이나 그 이전에 살아 남은 사람들이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침실을 두어 개 들여다보았다. 양쪽 다 썩어 들어가는 시체가 있었다. 녹아 내린 살 사이에서 흰 뼈가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정면 도어에 흰 종이가 핀으로 꽂혀 있었다. 그러나 바람에 날아가 버린 듯, 작은 모서리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날아간 부분을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뒤뜰에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다. 저장품도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코우커와 듀런트들은 어디로 갔을까?
"행방을 알아 낼 단서는 전혀 없어요."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조젤라가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쩌지요?"
"여기에 남는 거요. 우리들끼리만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오. 그러다 보면 조직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
"너무 기대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희망은 있어요. 우리와 같은 작은 패거리가 전 유럽에...... 아니, 온 세계에 몇천 개나 흩어져 있을 거요. 몇 개가 함께 합쳐서 재건에 또다시 착수할 것으로 생각돼요."
"그건 언제일까? 우리 시대에는 무리일 거여요. 몇 대나 뒤의 일이 되겠지요. 우리는 스스로 생활을 건설하는 수밖에 없어요. 밖으로부터의 구원을 절대로 기대할 수 없어요........"
잠시 조젤라는 코를 훌쩍이고 손수건으로 눈을 가볍게 눌렀다.
"미안해요, 빌........ 당신과 함께 있게 되어 기뻐요. 당신과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 난 농가의 마누라가 되는 거로군요.“
별안간 조젤라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출판사와 신문사와 영화사를 생각했어요. 여류 작가가 농가의 마누라가 된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재미있어 하겠지요? 당신과 내 사진이 신문에 나왔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요........"
"나는 당신 외에 두 장님 아가씨를 맡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뻐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세상의 종말에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1대 1로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인 것이다.
녹색의 큰 물결
나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것은 작업의 진행표, 계획표, 저장 물자의 리스트 등도 겸하게 되었다. 자급 자족의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물자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식량, 연료 외에 의류, 부엌 살림, 의료품, 총화기, 잡화류, 농작물의 씨앗, 농기구, 말뚝, 철사, 그리고 책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트럭을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뛰어다니며 <약탈>에 힘을 썼다. 데니스가 동행했다. 눈은 안 보이지만 센스가 빠르고 힘도 세어서 짐을 나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트리피드 대책도 등한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집의 건물과 정원 주위의 울타리를 강화했다. 또, 백 에이커 정도의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면서 튼튼한 울타리를 쳤다. 그 안쪽에는 또 한 겹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사람이나 가축이 잘못해서 바깥쪽 울타리에 접근하여 트리피드의 독채찍에 당하지 않도록 했다. 동시에 나는 농사짓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농사는 책에서 간단히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전공한 생물학의 논문 같은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고 말해도 좋았다. 처음에 나는 데니스에게 의지할 작정이었으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데니스는 셔닝 농장의 주인이기는 했으나 농장 일은 주로 소작인들에게만 맡겨 왔던 것이다.
가축의 사육, 도살 방법 등도 내가 혼자서 공부해야만 했다.
"올바른 농사꾼이 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나는 한숨을 쉬었으나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꼬박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물자 모으는 일을 겸해서 런던으로 갔다. 가로는 조용하고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여기저기에 버려진 차가 벌써 녹이 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또 1년이 지나자 놀라울 정도의 변화를 보였다. 집집의 정면에서 회칠과 타일이 벗겨져 떨어져서 보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굴뚝의 연통이 뒹굴고 있는 곳도 있었다. 배수구에는 잡초가 뿌리를 내리고 빗물받이에는 나뭇잎이 막혀서 배수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붕과 벽에도 잡초와 관목이 돋아나서 건물은 녹색의 가발을 쓴 것처럼 되어 있었다. 건물의 내부는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벽지가 벗겨져서 습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공원과 광장의 정원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나무 뿌리와 잡초가 주위의 도로에까지 뻗어 나와 있었다.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으로 싹이 돋아 녹슨 자동차의 좌석에서 잎이 무성한 것도 볼 수 있었다."겨우 2년만에 런던이 폐허가 되다니........"
나는 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셔닝 농장으로 돌아오면서 인류 문명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2년째의 11월에 조젤라가 아들을 낳았다. 나는 데이비드라고 이름지었다. 아기는 튼튼한 아이였고 물론 눈이 보인다. 조젤라는 아기에게 정신을 빼앗겨 장래에 대한 불안도 잊은 듯했다. 나는 아버지가 되어 모두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더 한층 일을 열심히 했다. 어느 날 밤, 조젤라가 말했다.
"요즘, 트리피드의 후닥닥거리는 소리가 심해진 것 같아요."
"그런가 ?
나는 귀를 기울였다. 타닥타닥 타닥타닥타닥. 울타리 밖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트리피드들이 가는 막대로 자신의 잎자루를 두들기고 있었다.
"별로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달라진 게 아니에요. 수가 많아진 것이지."
"그래, 그건 몰랐군."
나는 튼튼한 울타리와 담이 생기고 나서 그 안쪽의 땅에만 주의를 기울여 온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젤라의 말이 맞았다. 울타리 밖에는 트리피드가 많았다. 창문에서 보이는 좁은 범위에만도 백 그루 이상 있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 때 나는 트리피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에만 왜 저렇게 많이 모여들었을까? 저놈들이 이 고장에서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닐 텐데........"
그러자 수잔이 뜻밖의 말을 했다.
"아저씨가 데리고 온 것이에요."
"수전, 이상한 말은 하지 말아."
"이상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온갖 소리를 내잖아요. 그래서 그놈들이 오는 거여요."
"정말이니?"
"예, 증거를 보여 드릴게요."
수잔은 내 엽총과 쌍안경을 갖고 왔다. 우리는 정원으로 나갔다. 울타리의 저 먼 곳에서 트리피드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걸 보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수잔은 내게 쌍안경을 주었다. 나는 쌍안경을 눈에 대었다. 그 트리피드는 1.5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을 동쪽으로 향해서 흐느적흐느적 걸어가고 있었다.
"자, 잘 보고 계셔요."
수잔은 엽총을 하늘로 향해서 쏘았다. 5, 6초 지나자 트리피드는 진로를 바꾸어 이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걸 보셔요, 이 쪽으로 오고 있지요? 소리가 난 때문이에요."
수잔은 발포의 쇼크로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또 한 번 쏘아보렴."
내가 부탁하자 수잔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지금 쏜 총 소리를 들은 트리피드가 모조리 지금 이 쪽으로 오고 있어요. 10분쯤 지나면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요. 그리고 아무 소리도 안 나면 다시 본디의 방향으로 돌아가요. 만약에 또 한 번 총을 쏘면 다들 여기까지 오고 말 거예요. 울타리 곁에 있는 패거리의 타닥타닥 소리가 들리는 데까지 온 것은 되돌아가지 않아요. 저 타닥타닥 소리는 친구를 부르는 신호로 생각되는데......"
수잔의 관찰력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럼, 넌 내가 엽총을 쓰는 것을 그만두고 트리피드 총을 쓰란 말이지?“
"총뿐이 아니에요. 소리는 모조리 안 돼요. 제일 나쁜 것은 트랙터지요. 소리가 크고 오래 계속되니까 그놈들은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금방 찾아 낼 수 있어요. 발전기의 엔진 소리도 무척 멀리까지 울려요.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놈들이 이리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몇 번이나 본 걸요."
"거 참, 잘도 알아냈구나. 그러나 트리피드는 식물인데 소리를 '듣는다.'는 말투는 좀 이상하군."
"하지만 그들은 듣는 걸요.“
"됐다, 아무튼 어떻게 해 보자."
나는 트리피드의 이상한 능력을 거꾸로 이용하여 덫을 놓기로 했다. 첫 번째 덫은 풍차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농장에서 8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다 만들었다. 풍차형의 덫은 바람을 받아서 돌며 큰 소리를 계속 내었다. 끽, 덜컹. 끽, 덜컹. 그 소리에 이끌리어 근처의 것은 물론이고 울타리의 바로 밖에 있던 것까지 몇백 그루나 되는 트리피드가 몰려갔다.
"자, 지금이다!"
나와 수잔은 차를 타고 가서 트리피드의 떼에게 화염 방사기의 불길을 퍼부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싹 태워 죽였다. 이 방법은 두 번은 잘 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가 되자 아무리 풍차를 돌려도 트리피드가 모이지 않았다. 나는 다른 덫을 고안했다. 농장 울타리의 일부에 입구를 터놓고 거기서 안쪽으로 향해서 후미와 같은 형태로 새로운 울타리를 둘러치는 것이었다. 입구를 열어 놓았더니 발전용 모터 소리에 이끌리어 트리피드가 잇달아 들어왔다. 이틀 후에 입구를 막고 화염 방사기로 2백 그루 이상의 트리피드를 일거에 태워 죽였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트리피드들은 거의 모이지 않았다. 장소를 바꿔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며칠에 한 번씩 화염 방사기를 가지고 울타리 주위를 도는 일이었으나, 시간이 걸리고 화염 방사기의 연료를 많이 쓴다는 결점이 있었다. 두세 번, 트리피드의 집단에다 공포를 쏘아보았다. 그 결과는 기대에 어긋났다. 트리피드는 식물이므로 웬만큼 다쳐도 죽지 않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것저것 연구를 하여 새로운 방법을 시험해보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울타리 밖의 트리피드는 늘어가기만 했다. 어느 날 아침, 수잔이 우리 침실로 뛰어들어와서 소리쳤다.
"그놈들이 집 주위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어요!"
수잔은 소젖을 짜려고 일찍 일어난 것이었다. 침실의 창문은 환한데 아래층에 내려가니까 캄캄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수잔은 불을 켰다. 그 순간 창문에 하나 가득 들러붙어 있는 녹색의 잎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큰일났다!“
나는 허둥지둥 침실의 창문을 닫았다. 밑에서 독채찍이 뻗어 와서 유리를 철썩 때렸다. 이미 집의 벽 가에는 무수한 트리피드가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서 있었다.
"헛간에 가서 화염 방사기를 갖고 와야 되겠는데."
나는 급히 준비를 시작했다. 두툼한 옷을 입고 장갑을 끼고 가죽 헬멧을 쓰고 철망 마스크 밑에는 먼지 막이 안경을 끼고 제일 큰 부엌칼을 손에 들었다. 정원에 나가니까 트리피드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부엌칼로 녹색의 벽을 헤치면서 걸어 나갔다. 독채찍이 쉴 새 없이 철망을 때린다. 금방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고 독액이 미세한 안개가 되어 들어와서 안경을 흐리게 했다. 나는 가까스로 헛간에 이르러 안경을 벗고는 얼굴을 씻었다. 돌아갈 때에는 화염 방사기가 있었다. 발 밑의 땅에 한번 쓱 하고 불길을 분사시킬 뿐으로 트리피드들은 길을 터 주었다. 집안으로 돌아오자 나는 2층의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화염 방사기를 휘둘러 괴물에게 불길을 퍼부었다. 수잔도 몸보호를 하고 또 하나의 화염 방사기로 괴물을 퇴치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트리피드들은 불타 죽은 그들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뒷일을 부탁한다.“
나는 집을 수잔에게 맡기고 추격했다.
농장 울타리의 일부가 파괴되어 거기로 새로운 트리피드들이 녹색의 큰 물결이 되어 침입하고 있었다. 나는 정면으로 불길을 퍼부었다. 놈들은 멈춰 서더니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놈들의 머리 위에 불길을 퍼부으며 한 차례 쓸었더니 달아나는 발길이 빨라졌다. 괴물들의 모습이 하나 남김 없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울타리를 살펴보았다. 튼튼한 울타리가 20미터에 걸쳐 말뚝이 부러지고 철사가 잘려서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조젤라와 수잔에게 응원을 부탁하고 하루 종일 걸려서 수리했다.
"또 놈들이 밤중에 와서 울타리를 부술지도 몰라요." 하고 수잔이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몇백 몇천이나 되는 트리피드의 대군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울타리에 전류를 통해 볼까?"
나는 과학적인 방법을 생각했다. 동력원으로는 읍내에서 발견한 군용 발전기를 트레일러 채로 끌고 왔다. 나는 수잔과 둘이서 울타리에 전선을 쳤다. 그러나 하루 종일 전류를 통해 놓을 수는 없었다. 발전기를 작동시키려면 귀중한 가솔린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에 2, 3회 정도 몇 분간씩만 전류를 통하기로 했다. 그 극성스러운 트리피드도 전류의 쇼크에는 놀란 듯, 울타리를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또다시 안쪽의 울타리에 비상 경보용 전선을 둘러쳐서 울타리가 파괴된 경우, 즉각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전류 작전도 얼마 안 가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게 되었다. 트리피드들은 전류가 흐르고 있는 동안은 울타리에서 떨어져 있으나 전류를 끊는 순간 울타리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놈들은 발전기의 엔진 소리로 전류가 흐르고 있는지 어떤지 아는 것 같아요." 하고 수잔은 말했다.
트리피드가 발전기의 엔진 소리와 전류의 관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경험을 쌓음으로 해서 트리피드들의 지능이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섞어서 트리피드의 침입을 저지하면서 울타리 안에서 농사일에 힘쓰고 있었다.
찾아온 아이반 심프슨
6년째의 여름이 왔다. 어느 날 나는 조젤라와 함께 바다까지 나갔다. 데이비드는 제법 컸으므로 수잔에게 맡겨 놓아도 괜찮았다. 길이 나빠서 우리는 뒷바퀴가 캐터필러 식으로 된 트럭을 사용했다. 단 둘이서 외출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우리는 영국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사면에 나란히 앉았다. 밝은 태양이 하얀 모래밭에 내리쬐고 있었다. 지난날에는 해수욕으로 성황을 이루던 해변에 지금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모습도 얼었다. 옛날과 다름없는 것은 물결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뿐이다.
"우린 무엇 때문에 살고 있을까? 트리피드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만으로 일생을 마치는 건가요? 빌, 당신은 트리피드의 전문가였지요. 그놈들을 한 번에 퇴치하는 방법은 없어요?" 하고 조젤라가 물었다.
"방법은 있을 거요. 트리피드만 죽이는 약품이라든가 트리피드의 성질을 바꾸어 온순한 식물로 만드는 호르몬제 따위를 만들어 내면 되겠지. 그러나 그러려면 연구소와 설비가 필요해요.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도리도 없지. 지금은 트리피드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그럭저럭 버티면서 다음 세대에 기대할 뿐이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데이비드에게 가르칠 작정이오. 생물학과 생화학의 책도 많이 모아 놓았소."
그와 같은 대답밖에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모래밭 앞의 들판을 네 그루의 트리피드가 흔들거리며 가로질러 갔다.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조젤라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놈들이 내겐 식물이 아니라 동물처럼 여겨져요. 하나 하나는 별것 아니지만 집단이 되면 동물과 같은 정도의 지능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개미나 벌과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해 힘을 합해서 공동으로 일하는 거여요. 게다가 그놈들에게는 학습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장치한 덫에 한번 걸리면 그 다음부터 조심해서 실패를 거듭하지는 않잖아요? 저런 것을 누가 전세계에서 재배하려고 생각해 낸 것일까?"
"아무도 탓할 수는 없어요. 트리피드에서 나는 식용유 덕택에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전세계 사람들이 한숨 돌렸으니까. 6년 전의 실명 소동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트리피드한테 괴롭힘 당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거요.“
"그래요, 하늘의 재앙이었어요. 지구가 그 혜성의 꼬리에 들어가서 모두가 유성우를 본 때문이어요."
"당신은 그 유성우가 하늘의 재앙이라고 생각하오? 혜성의 꼬리에서 내려왔다고 아직도 믿고 있는 거요?“
"빌, 당신은 그것이 혜성의 짓이 아니란 말예요?"
조젤라는 엄숙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소."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게 뭐였어요?"
"사람의 재앙이었어."
"사람의 재앙?"
"그렇지."
나는 바다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 상공에는 무수한 위성 병기가 날아다니고 있소. 지금도 지구의 주위를 계속 돌고 있을 테지. 그 내용은 핵물질, 방사성 물질,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이라고 해요. 어느 것이나 다 지상에서 단추 하나만 누르면 폭파할 수 있대요. 만약에 위성 병기의 하나가 지상으로부터의 지령으로 폭파되어 그것이 인간과 가축들의 눈을-시신경을 태우는 방사선을 지구 전체에 흩뿌렸다고 한다면........"
"설마, 그럴 리 없어요. 그런 악마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난 믿을 수 없어요,"
"물론 증거는 없어요. 사고였을지도 모르지. 그 유성군이 정말로 혜성의 짓이고 그 중의 하나가 우연히 위성 병기에 부딪쳐서 폭발시켰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병에 대해서도 설명이 돼요. 그것은 장티푸스가 아니었어. 역시 위성 병기가 폭발해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흩뿌려 지구 전체에 새로운 전염병을 발생시킨 것이 아닐까? 인간은 위성 병기를 만들어 내어 그것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거기에 잘못이 있었어. 위성 병기를 우연의 사고에서 완전히 지킬 방법 같은 것은 없었던 거야. 우리는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해 왔소. 그러다가 결국 발을 헛디딘 셈이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의 자손이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해 줘야 해요."
조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 희미하게 폭음이 들려 왔다. 우리는 이마에 손을 대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점이 해안과 평행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헬리콥터에요."
조젤라가 숨가쁘게 말했다. 나는 일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어어이, 어어이!"
그러나 헬리콥터는 4, 5킬로미터 앞에서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내륙 쪽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연락은 취하지 못했으나 헬리콥터의 모습을 본 것으로 우리는 힘이 생겼다. 헬리콥터를 날릴 만큼 강력한 그룹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이젠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트럭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셔닝까지의 길을 반쯤 지났을 때였다.
"저 걸 보셔요!“
느닷없이 조젤라가 소리쳤다. 언덕 중턱에서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오르고 있었다. 바로 셔닝 농장 근처였다.
"불이다! 우리 집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속력으로 트럭을 몰았다. 뒷바퀴가 캐터필러여서 나쁜 길에는 좋지만 속도는 별로 나지 않는다. 가까워짐에 따라 불이 난 위치가 분명해졌다. 틀림없는 셔닝 농장이다. 트럭은 창문을 때리는 트리피드의 독채찍을 퉁겨 내면서 들길을 뚫고 지나갔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비로소 화재의 전경이 보였다. 불타고 있는 것은 집 건물이 아니라 정원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였다. 나는 마음을 놓으면서 경적을 울렸다. 수잔이 달려와서 대문 여는 끈을 잡아당겼다. 우리는 정원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다가 깜짝 놀랐다. 잔디밭 한가운데 헬리콥터가 착륙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집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키가 큰 금발의 남자로 가죽 재킷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전에 어디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였더라........' 내가 생각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손을 흔들고 명랑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빌 메이슨 씨죠? 전 아이반 심프슨입니다."
"예, 기억납니다. 그 날 밤 대학에 헬리콥터로 오셨던 분이죠?" 하고 조젤라가 말했다.
"저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젤라 플레이턴, 여류 작가, 작품은 「여자의 모험」........"
"아니어요. 전 조젤라 메이슨, 농사꾼 아낙네, 작품은 아들 「데이비드 메이슨」이에요."
"아 예, 그렇군요. 지금 집안에서 당신의 귀여운 작품을 보고 오는 참입니다.“
아이반은 상냥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한가롭게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불은?"
"수잔이 내 헬리콥터의 폭음을 듣고 신호의 봉화를 올린 것입니다. 재치가 있는 아가씨로군요. 그 불이면 못 볼 리가 없지요."
바람은 집과는 반대쪽으로 불고 있어서 건물에 옮겨 붙을 염려는 없었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이클 비들리가 당신을 만나면 우선 사과부터 해 달라고 하더군요."
아이반이 이상한 말을 꺼냈다. 내게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비들리가 내게 사과를 하는 거죠?“
"트리피드 말입니다. 당신이 트리피드는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았다가 혼이 났답니다.“
"예...... 그건 그렇고 당신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코우커에게 물어서 대충 짐작을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코우커는 살아 있었군요........
"예, 지금은 우리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사람이지요.“
아이반은 식사 뒤에 브랜디를 마시면서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했다.
내일을 향한 출발
마이클 비들리의 그룹은 플로렌스 듀런트들과 헤어져서 틴셤장을 출발한 뒤 북동쪽으로 향해서 옥스퍼드셔로 들어갔다. 비민스터에는 들르지 않았고 그 고장의 이름을 입에 올린 사람도 없었다. 역시 듀런트는 코우커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비들리들은 어느 큰 저택을 찾아내어 들어가 살았으나 트리피드 대군의 습격을 받아 울타리의 보강이 주된 일이 되었다. 2년째의 여름, 비들리들은 와이트 섬으로 옮겼다. 여기에도 트리피드는 많이 있었으나 그것을 퇴치해 버리면 본토에서 새로운 것들이 습격해 올 염려는 없었다. 트리피드를 막는 데는 불보다도 물 쪽이 더 효과적이었다. 물론 매년 가을이 되면 트리피드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바다 위를 건너 섬으로 날아온다. 그 때문에 봄에는 전원이 온 섬 안을 돌아다니며 트리피드의 싹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뽑기로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비들리들은 겨우 공동체의 조직 만들기에 착수할 시간이 생겼다. 우선 섬의 농지를 갈아서 식량의 자급 자족을 꾀하고, 그 다음에는 유능한 동료를 늘리는 기준을 세웠다. 아이반은 헬리콥터를 타고 본토로 날아가 상공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작은 그룹을 발견하여 와이트 섬의 공동체에 합류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어떤 그룹은 합류했고, 어떤 그룹은 합류를 거절했다. 총을 쏘아서 아이반을 쫓아 버리는 그룹도 있었다. 그러나 1년 동안에 와이트 섬 공동체의 인원은 3백 명 가량으로 불어났다. 아이반이 코우커의 그룹을 만난 것은 겨우 한 달쯤 전이었다. 코우커는 나와 헤어져서 틴셤장으로 돌아갔으나 며칠 후에 런던에서 여자 두 명이 오면서 예의 전염병을 들여온 것이었다. 단시일에 병이 퍼져서 틴셤장의 사람들이 잇달아 쓰러 졌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전멸이다. 코우커는 건강한 사람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듀런트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병자를 돌보는 것이 자기 의무니까 그것을 끝내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뒤따라오지 않았다. 코우커들의 이동은 고생스러운 것이었다. 계속 병자가 생기므로 그것을 떨쳐 버리느라고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마지막에 데번셔에 이르렀다. 거기서 울타리를 치고 트리피드와 싸우면서 3년을 버티었다. 트리피드 퇴치에 시간과 노동력을 빼앗겨서 공동체의 조직 정비는 도무지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아이반의 헬리콥터가 나타난 것이었다. 코우커는 망설이지 않고 비들리들과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어선에 짐을 싣고 동지들을 이끌고 2주일 후에는 와이트 섬에 도착했다.
"코우커는, 당신이 아마도 서섹스의 이 근방에 있을 터이니 즉시 찾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날아온 것이오.“
아이반은 내 얼굴을 보았다. 지금 와이트 섬에서는 비들리가 중심이 되어 트리피드를 과학적으로 퇴치하는 방법을 발명하기 위해 연구반을 만들려는 중이었다.
"코우커의 얘기로는, 당신은 트리피드 전문의 생물학자라지요? 와이트 섬에 와서 트리피드 퇴치의 리더가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비들리도 꼭 당신을 당신의 그룹과 함께 맞이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죠."
내 마음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 곧 아이반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갔다. 아이반이 탄 헬리콥터의 그림자가 남서쪽의 놀이 진 하늘로 사라진 뒤 나는 나의 생각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앞으로 이 농장에 남아 있으면 어찌 될 것인가? 조젤라와 메리에게는 또 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수잔에게도 남편과 아이를 낳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룹의 인원은 느는데 농작물의 생산은 뜻대로 오르지 않는다. 언젠가는 식량 때문에 곤란을 겪을 날이 올 것이다. 다른 물자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 맨 처음에는 연료, 그 다음에는 철사가 없어진다. 그 날이 오기를 울타리 밖에서 트리피드들이 기다리고 있다. 와이트 섬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셔닝 농장을 떠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눈물이 날 만큼 괴로운 일이었지만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와이트 섬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즉, 전략적인 후퇴인 셈이지요. 언젠가 또다시 돌아 올 거여요. 저 흉측한 트리피드를 모조리 싹 퇴치하고 우리의 땅을 되찾을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잠시 후퇴할 뿐인 거예요." 하고 조젤라는 말했다. 우리는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새로이 살 곳을 조사하기 위해 나는 와이트 섬으로 건너가서 코우커와 비들리들과 만난다. 이제까지 모아 놓았던 저장품과 살림살이를 몇 번에 나누어 새 집으로 나를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수잔이 말했다.
"장작이 떨어졌어요.“
"좋아, 석탄을 가지러 가자. 와이트 섬으로 이사갈 때까지 땔 것만 있으면 된다.“
나는 수잔과 함께 트럭으로 출발했다. 제일 가까운 철도의 석탄 하치장까지 15, 6킬로미터밖에 안 되지만 길의 일부가 파괴되어 있어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시간이 걸려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정원에는 이상한 모양의 차가 서 있었다.
"뭐야, 이게?"
나는 차로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다. 군용 캐터필러 위에 트럭의 차체를 얹은 것으로서 전체의 느낌은 모터보트와 뚜껑 있는 트럭의 혼합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손님이 와 있군."
나는 수잔을 재촉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쥐색 스키복을 입은 남자가 넷 있었다. 그 중의 두 명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 곁의 방바닥에 경기관총을 놓아두고 있었다.
"빌, 이분은 트랜스 씨여요. 우리에게 할 이야기가 있대요."
조젤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들 중의 하나가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였다. '그
때의 그 남자가 아닌가!' 나는 섬뜩했다. 햄스티드에서 권총을 휘둘러 나의 패거리를 쫓아 낸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다행히 나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영국 남동 지방 임시 평의회의 행정 장관입니다. 이 지방의 인원 배치와 할당을 감독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서........"
붉은 머리의 트랜스는 거만하게 말을 꺼냈다. 평의회는 브라이튼에 지방 본부를 두고 각지에 살아남아 있는 그룹을 재편성하고 있었다.
"1단위는 10명의 장님에다 눈뜬 사람이 하나, 거기에 아이가 있으면 함께 넣습니다. 여기는 상당히 좋은 장소니까 2단위를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명의 장님들을 다른 데서 데려다가 여기에 있는 세 명의 장님과 합쳐서 모두 20명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아이가 있으면 그만큼 인원이 늘게 됩니다.“
트랜스는 나와 조젤라에게 셔닝 농장의 관리를 맡기고 수잔은 본부로 데려가서 다른 일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또한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트리피드를 쓰러뜨려 말려서 가루를 만들어 장님들에게 먹이라고 권했다.
"그것은 가축 사료요."
내가 항의하자 트랜스는 웃었다.
"장님은 가축보다도 못해요.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하오.“
그리고 내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덧붙였다.
"평의회의 방침에 따르면 이 농장의 사유권을 인정합니다. 처음의 6, 7년간은 고생스럽겠지만, 그러는 동안에 아이가 자라서 일을 하게 될 것이오. 즉, 당신은 많은 농노를 거느린 영주인 셈이지요."
이런 말을 눈이 안 보이는 데니스와 메리와 조이스 앞에서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정상이 아니다. 트랜스는 영국에다 새로운 봉건주의 사회를 세워 자기가 그 독재자가 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속이 뒤집히는 심정이었으나 대들지 않기로 했다. 상대에게는 두 자루의 경기관총과 두 자루의 권총이 있다. 게다가 트랜스는 사람을 벌레처럼 죽이는 남자였다.
"자, 식사라도 하면서 그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나는 트랜스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하며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아 조젤라에게 귀띔을 했다.
"제일 좋은 음식을 만들어요. 다같이 배불리 먹는 거요. 트랜스들에게는 제일 좋은 술을 실컷 마시게 하고. 식사가 끝나 갈 때쯤 난 잠깐 자리를 뜨겠소. 그것을 속이기 위해 레코드라도 틀어서 식당 안이 시끌벅적하게 하도록 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도 와이트 섬의 얘기나 들리 들의 일을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돼요."
"알았어요.“
조젤라는 씩 웃었다. 곧 떠들썩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트랜스들은 좋은 술을 마음껏 마시고 아주 기분이 유쾌해져 있었다. 나는 짬을 보아 식당에서 살짝 빠져 나왔다. 이삿짐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담요, 옷가지, 식량 등의 보따리를 차례차례 헛간의 반 캐터필러식 트럭에 실었다. 유조차에서 호스를 꺼내다가 트럭의 탱크에 가솔린을 가득 넣었다. 그러고 나서 트랜스들의 괴상한 차로 다가가 가솔린 탱크 안에 벌꿀을 한 통 들이부었다. 이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나는 시치미 뚝 떼고 파티 자리로 돌아가 모두와 함께 떠들었다. 2시간 후 트랜스와 세 명의 부하는 술에 곤드레가 되어 푹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조젤라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헛간으로 갔다. 달이 떠올라 희끄무레한 빛이 정원에 넘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밝은 정원으로 줄을 이어 나왔다. 브렌트 내외와 조이스가 선두였다. 세 사람 다 눈은 안 보이지만 자기 집 구조에 익숙해져서 손을 끌어 줄 필요가 없었다. 그 뒤에 조젤라와 수잔이 아이를 하나씩 안고 따랐다. 갑자기 데이비드가 잠결에 소리를 내었으므로 조젤라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조젤라와 데이비드를 조수석에 태우고, 다른 사람들은 뒷자리에 태우고 나서 운전석으로 기어올라가 후유 하고 한숨 돌렸다. 울타리 밖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트리피드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트럭의 엔진을 걸었다. 그리고 트랜스의 차를 피해서 한 바퀴 빙 돌아 속도를 내면서 대문을 향해 앞으로 돌진했다. 튼튼한 펜더가 우지직하고 대문을 쓰러뜨렸다. 이어 차체가 철망과 부러진 재목을 퉁겨 날리고 한 다스 이상의 트리피드를 치어 넘어뜨렸다. 들길의 앞쪽에서 다른 트리피드가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그 속을 빠져서 고갯길을 올라 셔닝 농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나는 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집의 창문에 불이 켜지고, 이상한 모양의 차에 불이 켜졌다. 시동 거는 소리가 드르릉거리기 시작했다. 붕붕 엔진 소리를 울리면서 캐터필러의 방향을 대문 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 돌아가기 전에 엔진이 '타앙.' 하고 소리를 내면서 섰다. 가솔린에 벌꿀을 섞은 탓이다. 스타터가 다시 드르릉거리기 시작했으나 엔진은 걸리지 않았다. 쓰러진 대문으로 트리피드의 행렬이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길게 휘청거리는 모습이 달빛과 헤드라이트가 섞인 밝음 속에서 으스스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지켜보았으면 충분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트럭의 앞쪽에 얽혀 붙은 것을 떼어내고 유리창의 독액을 닦아 내었다. 운전석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팔 속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나는 조젤라에게 키스하고 차를 출발시킨다. 언덕의 꼭대기를 몇 개나 넘어서 남서쪽의 해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일을 향한 출발이었다.
- 끝 -
작품 해설
인류의 파멸을 초래하는 과학 병기
A. 병기의 공포
과학 기술은 흔히 양날의 칼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선진국들은 공해 문제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목적으로 발달해 온 과학 기술이 자연 환경을 파괴하여 대기 오염과 해양 오염 등을 일으켜서 사람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선진 각국은 이제 공해의 무서움에 눈떠서 공해 방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공해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A병기와 B, C병기 등의 과학병기입니다. A(아토믹=원자)는 핵병기, B(바이올러지컬 =세균․생물학)는 생물 병기, C(케미컬=화학)는 화학 병기를 말합니다. 현재 핵병기를 가진 나라는 미국, 소련, 중공, 영국, 프랑스 5개국이며 그 양은 미국의 보유량만으로도 전 인류를 몰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나, "평화 유지를 위해서 핵병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자기 쪽에서 먼저 핵병기를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선제 공격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핵병기의 선제 공격을 받으면 언제라도 즉시 핵병기로 보복 공격을 할 수 있게끔 핵전략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미국은 소련의 핵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재빨리 알기 위해 알래스카, 캐나다 북부, 그린란드에 걸쳐서 경보 레이더망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한편, 대기권 밖에는 100개 이상의 스파이 위성이 쏘아 올려져 있습니다. 이들 스파이 위성은 레이더, 카메라, 전파 수신기, 적외선 ․ 자외선 ․ X선 탐지기 등을 갖추고 쉴 새 없이 소련과 중공의 영토를 계속 감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소련과 중공의 영토 내에서 핵미사일이 쏘아 올려지거나 소련의 위성 병기가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거나 하면 그 정보는 즉각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미국 전략 공군 사령부의 지하 전투 사령실로 보내집니다. 지하 전투 사령실에선 정보를 전자 계산기에 넣어 <적의 핵병기>라는 것이 판명되면 즉각 전략 폭격기 부대에 출격 명령을 내립니다. B52를 주력으로 하는 전략 폭격기 부대는 수소 폭탄을 싣고 쉴 새 없이 상공을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전세계의 전략 공군 기지에 긴급 요격 준비 명령을 내리고 핵미사일 기지에는 발사 준비 태세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핵탄두를 단 미사일은 항상 소련과 중공의 군사 기지와 주요 도시 등을 목표로 조준이 되어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 ABM망의 미사일 요격 미사일 시스템이 적의 ICBM(대륙간 탄도탄)을 격파하기 위해서 발사 준비를 갖추고, 태평양, 북극해, 북해 등에 있는 원자력 잠수함이 핵미사일에 의한 보복 공격 준비에 착수합니다. 소련의 ICBM이 미국에 도달하는 데는 30분이 걸립니다. 그 전에 보복 공격을 행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10분간에 마치고 나머지 10분간에 발사 단추를 누르느냐 안 누르느냐, 하는 최종 결정을 대통령이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적의 핵병기가 선제 공격을 해 왔다는 정보가 잘못이었다 해도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없어 자동적으로 핵 전쟁에 돌입해 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몇 번 일어날 뻔했던 것입니다.
사고로 시작되는 핵 전쟁
SF에는 정보의 잘못이나 기계 미스 등의 사고로 원수폭 전쟁이 일어나서 인류가 전멸의 위험에 직면한다는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작가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는 영화화되어 유명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스콜피온 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에 입항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멜버른의 시가는 평화로우나 자세히 보니 자동차 대신 마차가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체념의 표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방사능을 쐬어서 죽을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몇 달 전 중동 분쟁이 일어났을 때 연합국이 아랍기를 소련기로 잘못 알아서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북반구의 모든 나라들이 수천 발의 핵폭탄에 의해 전멸하였습니다. 그래서 단 1척 남은 스콜피온 호가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로 피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기권 상공으로 날아올라간 죽음의 재는 계절풍을 타고 남반구에 운반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도 내리기 시작하여 전원이 죽을 날이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 후 시 당국은 시민들에게 자살용의 정제를 건네줍니다. 그러나 스콜피온 호의 승무원들은 어차피 죽을 것이면 고국인 미국 곁에 가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스콜피온 호는 조용히 멜버른에서 출항해 갑니다. 또한 유진 버틱과 하베이 월러 공저인 「페일 세이프」는 정보를 전하는 기계의 미스로 핵 전쟁이 시작되려고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미국 전략 폭격기 부대의 B47폭격기 여섯 대가 기계의 미스로 전면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미리 정해진 대로 소련 땅으로 향합니다. 전략 공군 사령부에선 이미 이 폭격기 부대를 불러 되돌아오게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워싱턴과 모스크바간의 직통 전화를 통해 소련 수상에게 이 사고를 통고하여 전략 폭격기 부대를 격추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소련 공군은 즉각 요격하여 2대를 격추하였으나 나머지 4대는 모스크바 상공에 이르러 수폭을 투하하였습니다. 이것을 안 미국 대통령은 미국 전략 공군에 명하여 스스로의 손으로 뉴욕에 수폭을 투하하여 미국 측에 적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SF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BC 병기의 공포
BC병기도 A병기와 함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C병기에서 유명한 것은 독가스이며 제 1차 세계 대전 때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이 새로운 강력한 독가스를 개발하여 아우슈비츠와 그 밖의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사용하였습니다. 현재도 각국은 화학전에 대비하여 C병기의 연구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독가스뿐만이 아닙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 공군이 정글에 숨어 있는 베트콩을 몰아 내기 위해 제초제 등의 농약을 뿌려서 수목을 말려 죽이는 작전을 썼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과 가축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B병기 쪽은 상당히 일찍부터 쓰여져 왔던 것 같습니다. 18세기에 프랑스군이 인디아에서 천연두 균이 묻은 손수건을 적진에 보내어 천연두를 유행시켰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균을 배양하여 사용하게 된 것은 제 1차 세계 대전부터입니다. 이 때 독일의 스파이가 병원균을 살포하여 연합군을 괴롭혔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일본, 독일 등의 각국이 세균 병기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대규모의 생물학 병기 연구 센터와 생산 공장이 있으며 그 실험 부대가 해외에 파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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