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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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엄마의 손
2023년 05월 30일 20시 44분  조회:132  추천:0  작성자: 강매화
엄마의 손
 
                                       
 
엄마를 태운 렬차는 서서히 플랫홈을 빠져나간다. 나는 앞을 가리는 눈물을 훔치며 멀어져가는 렬차를 향해 손을 저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가는 렬차를 바래고 집에 오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확 몰려오면서 한 잠 푹 자고싶어 쏘파에 몸을 던지고 누웠다. 그런데 시끌벅적하던 집이 막상 조용해지니 웬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고 잔소리하던 엄마목소리가 자꾸 귀가에 들려오는 것 같아서 되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느새 우리딸도 흰머리가 생겼나.> 탄식이 섞인 속상함을 보여주며 내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을 뽑아주던 엄마 손이 유난히 눈 앞에 얼른거리며 또다시 눈 앞이 흐려졌다. 섬섬옥수까지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매끄럽고 재빠른 스피드로 주름이 없었던 내 기억 속의 엄마 손이 아닌, 지문이 닳아 지워지고 군데군데 갈라진 피부 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자꾸 덧 걸려 나오던, 나에겐 낯설은 엄마의 손 때문이였다. 
이번 음력설에는 아들애가 방학간 특강수업 때문에, 해마다 우리가 고향 가서 설쇠던 전례를 타파하고 부모님들이 우리가 살고있는 대련에 오셔서 음력설을 보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음력설 이틀전에 나는 기차역에 엄마 아빠를 마중하러 갔었다.
설기간이라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 속에서 등이 좀 휘고 얼핏 보아도 조선족 로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부모님이 어깨에 커다란 려행용 멜가방을 메고 량손에 큰 케리어를 끌고 힘겹게 걸어나오는 모습이 안겨왔다. 한달음에 달려가 어깨에 멘 가방을 받아메는 순간, 나는 갑자기 주체못할 무게에 하마트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번 했다. 려행용 배낭은 돌덩이라도 담은듯이 족히 백근은 될듯 싶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왜소한 체구의 엄마가 메고 왔다는 것이 전혀 믿겨지지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는 커피 한 잔 마실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짐 보따리를 풀어놓는데, 내 눈 앞에는 고향의 장마당이 펼쳐졌다. 고사리, 민들레 등 여러가지 말린 나물들; 영채김치, 갓김치 등 온갖 절인 짠지들; 그리고 소머리, 소발족, 소천엽까지 깨끗이 손질하여 먹기 편하게 동생네거랑 우리거랑 나눠서 하나하나 봉지에 담아오셨고, 손수 끓여서 만든 물엿 , 엿강정, 하여튼 해마다 고향가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지고 왔으니 고향을 통째로 메고 온 그 무게는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었을가 싶다. 
 해마다 설쇠러 고향가면 내가 출근하느라 힘들었을텐데 친정와서 푹 쉬다 가라며 주방에 들어서는 나를 항상 밖으로 내쫓던 엄마였다. 그래서 나는 설이면 편하게 놀부생활하다가 포동포동 살이 쪄서 대련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올해에는 처음으로 우리집에서 설명절을 보내게 되였으니 우리집에 와서까지 주방에 나서는 엄마를 간신히 말리고 아침일찍부터 시작하여 하루세끼를 꼬박꼬박 차려 올리려니 첫 두날은 괜찮았는데 서서히 짜증이 나고 끼니준비가 부담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친정에서 먹었던 진수성찬들이 엄마의 그 거친 손에서 쉽사리 만들어지는 줄로만 여겼었는데 이렇게 지치고 힘들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래서 “어미의 사랑은 장강만큼 길고 자식의 효성은 멜대처럼 짧다”고 했나 보다.
문득 20여년전 내가 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전날밤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개학하는 날 새벽에 내가 잠결에 눈을 떠보니 엄마가 곁에 누워서 언제부터 그렇게 계셨는지 모르지만 한손으로는 나를 껴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부드럽고 자상했던 기억은 별로 없었고 자식들한테 애정표현도 린색한 랭정한 엄마였다. 그땐 모두가 그랬듯이 아마 엄마도 생활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을테지만 그래도 어린 나의 사춘기에는 엄마에 대한 리해보다 마음 속 한 구석에 나도 알 수 없는 갈망이 웅크리고 있었다. 엄마는 녀강자로 불리울만큼 억척스레 농사일을 했고 생활비에 보태쓰려고 떡장사, 김치장사, 돈이 될 수 있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고, 남의 집 궂은 일,험한 일에 발벗고 나서며 특히 동네 초상집이 생기면 남들이 꺼려하는 수의를 입혀주는 일도 엄마가 도맡아 했었다. 엄마는 매일같이 새벽에 별을 이고 나가서는 저녁에 해가 서산으로 종적을 감출 때 집에 들어서군 했다. 일년내내 그렇게 팽이처럼 바삐 보냈다. 농사일을 할 때면 우리집 일을 일찍 서둘러 끝내고 남의 집 모내기며 탈곡이며 품삯을 다니면서 억세게 일했고 다른 농사군들이 한가히 화토놀이하는 겨울에도 동북의 칼날같은 서북풍 속에서 짠지장사, 떡장사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했다.
눈섭에 하얀 성에를 덮어쓰고 집에 들어서던 엄마의 그 모습, 얼어서 갈라터진 거친 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째지게 가난했던 살림에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내가 중학교 입학하던 해에 손수 덩실하게 기와집을 짓고 남의 창고를 빌려살던 더부살이 생활에 종지부를 지었다며 그토록 기뻐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엄마는 촌 부녀주임으로 활약하면서 시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뽑히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강인하게만 보이던 엄마가 깊은 밤, 언제부터였을지 모르지만 바야흐로 집을 떠나 학교로 가게 될 잠든 내 옆에서 조용히 울고 계셨었다. 
그후 내가 사범을 졸업하고 금방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을 때 아빠 엄마는 고중에 다니는 남동생과 나를 외할머니께 맡기고 한국으로 로무길을 떠나셨다. 7년이란 세월을 이국타향에서 보낸 세월동안, 일반 엄마들은 식당이나 가정도우미로 일을 했지만 엄마는 돈을 더 벌려는 욕심에 남자들도 힘들어 하는 공사현장에서 기술일을 배워 현장에서만 일했다. 그렇게 억척스레 번 돈으로 남동생의 흑룡강의과대학 공부를 시키고 일본유학 뒤바라지까지 했다. 동생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련에 자리잡고 집을 마련할 때 자금이 부족하자 엄마는 또 선뜻 거금을 내주셨다. 내가 청도에서 집을 마련할 때도 엄마는 아깝게 이자를 갚으면서 대출을 왜 쓰냐 면서 주저없이 주머니를 열어 돈을 보태주었다. 그러고는 아직 몸이 따라줄 때 좀 더 벌어 자식들한테 부담 주지 않고 스스로 로후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엄마는 귀국한지 2년만에 또다시 한국로무행을 택하셨다. 후에 내가 해외한국어교사 초청연수로 한국에 가게 되었는데 연수를 마치고 나는 엄마한테 들렸었다. 엄마는 일하러 나가니 마중하러 올 시간이 없다며 주소를 알려주면서 그대로 찾아오라고 했다. 재래시장 뒤골목사이를 이리저리 누벼 겨우 찾아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보니 환풍용창문 하나가 달랑 달려있는 어두컴컴한 방 하나가 나를 맞이 하였다. 작은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주방까지 쭉 붙어있는 단칸방이였다. 해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방에는 퀴퀴한 냄새가 났고 때는 삼복철인지라 에어콘이 없는 방에는 선풍기를 켜도 더운 바람만 나서 찜질방 같았다. 에어콘 바람이 서늘하고 아들애와 조카애가 축구공을 차며 놀던 운동장같은 내집과는 하늘과 땅차이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들어오자마 나와 몇마디 말도 하기전에 덥고 피곤함에 찌든 몸을 랭장고 앞에 세우더니 문을 열어놓고 그대로 그 앞에 물앉는 것이였다. 랭장고의 랭기가 엄마에겐 에어콘과 같은 것이였다. 나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 굳어져 엄마를 부둥켜안고 펑펑 소리내여 울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고향의 덩실한 아파트집에서 편히 마작이나 놀고 향락을 누려야 할 엄마가 나와 동생에게 다 털어주고 고향떠나 홀로 이국타향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줄은 상상을 못했다. 그냥 남들이 다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년세에 젊은이들도 견디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무슨 힘으로 버텨나가셨을지 모를 엄마를 보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워졌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들딸이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아빠 생활비는 충분히 드릴 능력이 되니 당장 짐을 싸서 중국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지만 엄마는 너희들은 제 자식이나 잘 키우면 된다면서 2년만 더 일하고 돌아 가겠다고 웃으면서 되려 우는 나를 달래주셨다. 자식에게 행여 부담이 될가 두 손이 성할 때 로후까지 당신절로 해결한다는 그 고집을 끝내 꺾지 못하고 나는 귀국길에 올랐다. 


그후 아들애가 집과 멀리 떨어진 고중에 입학하면서 태여나서 처음으로 내 곁을 떠나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였다. 떠나기전에 나는 오래만에 아들이랑 똑같은 티를 입고 외식하고 산책을 하던중 길에서 지인을 만났다. 지인은 우리 모습을 보니 영낙없는 오누이 아니면 애인같지 모자일거라 누가 믿냐며 나보고 방부제를 먹고 다니냐며 기분좋게 귀 간지러운 수다를 떨었다. 그만큼 내가 젊고 이뻐보인다는 뜻이였겠지만 나는 키꼴이 장대한 고중생 아들을 둔 엄마라는 존재감보다 한 녀자로서의 천성적인 부풀음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문득, 나의 엄마도 내 엄마이기전에 역시 아름다운 여자였을 것인데 엄마의 그 아름다움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가 내 마음을 파고드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머무르지 못했던 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애써 더듬어보려 그날밤 나는 한참을 뒤척거렸다. 
이튿날 며칠전부터 준비해온 아들의 짐가방을 하나하나 정리하노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계속 앞을 가리웠다. 키만 컸지 아직도 하루에 엄마를 수십번은 불러제끼는 아들애가, 활동적이고 덤벙덤벙하는 성격 때문에 어디 다치지는 않을지, 처음으로 내 품을 떠나 자립생활을 제대로 할련지 모든 것이 걱정스러워 하루종일 물가에 아이를 내보내는 심정으로 손에 일이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그러다가 느꼈다. 이전에 내가 학교로 떠날 때 엄마도 이런 마음이였겠구나라고. 그리고 속을 썩이지 않고 다방면으로 훌륭하게 자라준 아들이, 내가 엄마의 믿음직한 딸로 자란 것처럼 역시 든든하고 우수한 인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누군가 말했다. <엄마가 있으면 집이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또 누군가는 <엄마가 어디에 있으면 어디가 제일 행복한 곳>이라고. 부모란 자신을 태워가며 자식이란 꽃을 피우기 위해 목숨마저 바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내가 엄마가 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그리고 엄마의 아름다움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월 속에 오로지 이 자식들을 위하여 열손톱을 다슬렸고 그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거친 엄마의 사랑이 나와 동생의 피와 살에 닿아 오늘 우리의 행복한 삶으로 되였음을 깊이 깨달았다. 
지금은 거칠어진 엄마의 손, 하지만 항상 전해져오는 엄마의 그 손길은 영원히 따스하고, 나에게 무궁한 힘을 준다. 
요즘은 인터넷쇼핑이 편해서 옷이랑 커피나 과일같은 것을 종종 보내주면 동네에 나가 자식자랑하시느라 바쁘시단다. 그때면 나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별 것도 아닌 것에도 이 자식이 보낸거라면 모든 걸 다 가지신 것처럼 행복해 하시는 엄마, 그런 엄마가 있어서 너무 좋다. 지금은 촌 지부서기로 일하시는 아버지의 내조를 묵묵히 해주시면서 올해 년초에는 코로나바이러스 예방통제사업 때 로당원으로써 엄동추위도 무릅쓰고 꼬박 두달동안 마을어구에서 교대로 보초를 서면서 안전검사를 책임지셨다. 이런 엄마가 있어서 나는 너무 자랑스럽다. 
 내 몸이 천애지각에 있어도 엄마의 사랑은 하늘의 해살같이 항상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보듬어주고 있다. 오늘도 나는 그 따스한 엄마의 손길을 나의 마음에 고이 담아 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전하며 오래오래 행복을 노래하고 싶다.
<연변녀성>2020.11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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