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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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팽이 평전 □ 한영남
2020년 07월 13일 09시 09분  조회:329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프롤로그

 

해빛 기껏 찬란하고

개울물이 조졸거리며 흐르는

어떤 숲속에서 달팽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느리지만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기여다니며

열심히 먹이를 찾고

열심히 사랑을 찾아

열심히 서로의 살속을 파고들며

그렇게 달팽이들은 번창하고 있었다

 

달팽이들은 태여나면 바로

먹이를 위해 분주해야 했고

섹스를 위해 요란해야 했다

식욕과 성욕을 빼면 달팽이들은

살아있을 리유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그 분주함과 요란함은 느릴망정 박수를 받을 만했다

1

 

그러던 어느 하루 이상한 달팽이 한마리가 태여났다

이 이상한 달팽이를 다른 달팽이와 구분해서

탈팽이라고 불러주자

 

탈팽이는 다른 달팽이들이

먹는 소리에 서로 군침을 흘릴 때에도

먹이 찾는 방법을 배우느라 땀 뻘뻘 흘릴 때에도

가만히 앉아 사색하길 즐겼다

친구들이 이성에 눈을 떠서

그 뜨거운 육욕에 헐금씨금할 때에도

골살을 쪼프린 채 자기 생각에만 골똘했다

 

탈팽이는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산다는 게

참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탈팽이는 뭔가 큰일을

위대한 사업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가

무엇을 해야 할가

무엇을 해야 할가

 

탈팽이는 고개를 잔뜩 내밀어 세상을 두리번거렸다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탈팽이의 고개끝에 달린 눈에

나무 한그루가 덮쳐들었다

나무는 하도 아름드리여서

탈팽이한테 처음에는 산처럼 보였다

거대한 산이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고 우로 우로 자꾸 보다가

그것이 한그루 굉장히 거대한 나무라는 것을

탈팽이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래 바로 저것이야

저 정도면 충분히 내 꿈과 맞먹을 수 있지

 

탈팽이는

꿈이 어벌차게 컸던 탈팽이는

그 거대한 나무를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2

 

야 임마 정신 차려

네가 저 산을 정복한다고

그래 네 말 대로 나무라고 하자

근데 저 아득한 나무를 네가 정복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꿈 좀 깨라

너 혹시 요즘 잘 먹지 않더니 정신이 돌았잖아

 

달팽이무리에서는 온갖

비웃음 비아냥 비꼼들이 터져나왔다

강물이 오염되여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였을 때보다

더 심하게 떠들어댔다

바보 천치 백치 병신 등신 정신병 팔부

하여튼 달팽이 동네에서

갖다붙일 수 있는 온갖

너절한 이름들이 전부

탈팽이한테 왕관처럼

씌여졌다

 

그래도 난 할 거야

 

그래 어디 콱 해봐라

하다가 뒈져봐야 정신차리겠구나

아마 시작하기도 전에 나무 밑둥이에 도착하면

벌써 포기할 생각이 날 거다

떨어지면 등에 짊어진 집까지 박살나고 말걸

 

그래도 난 할 거야

 

여보게 자네 그러는게 아닐세

먹거리 풍부하지

언제든지 할짓 다 할 수 있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나

이제 좀 몹쓸 꿈에서 깨여나세

 

그래도 난 할 거야

 

3

 

준비랄 것도 없었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고

행동은 곧 일기로 적혀졌다

 

모년 모월 모일

아침 일찍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떼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날자들은 마른 나무잎처럼 떨어져 나뒹굴었고

나무를 향한 탈팽이의 발걸음은 여전히 힘찼다

 

하루는 이틀로 이어지고

이틀은 사흘로 계속되고

일주일은 한달이 되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그날이

왔다

 

탈팽이는 끝내

아름드리 나무 밑둥이에 도착했다

 

와 정말 해내는구나

신기하네 저런 조그만 녀석이 일을 내다니

어이쿠 아직도 시작도 못했잖아

힘내 넌 될 거야

포기해 네가 정복하기에 너무 아름드리야

 

온갖 소리들이 란무해도

탈팽이는

어떤 소리에도 귀를 빌려주지 않았다

단 소리에도 자만하지 않았고

쓴소리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려문 입술이 부르텄지만

꿈을 향한 미소는 여전히 남실거렸다

 

4

 

아름드리 나무의 주변을 둘러보는데도 한나절이 걸렸다

드디여 안성맞춤한 위치를 정했고

드디여 력대급의 등반이 시작되였다

 

탈팽이, 달팽이들의 자존심을 걸고 아름드리 나무에 도전

 

달팽이 세상에서는

톱기사로 크게 다루었고

스타라면 오금을 못쓰는 몇몇 소녀달팽이들은

눈을 감은 채

열띤 상사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탈팽이는 신들메를 단단히 동여매고

장비들을 꼼꼼하게 점검한 뒤

위대한 등반을 시작했다

 

평지를 갈 때보다 또 달랐다

등반이란

매달리는 힘과

올라가는 힘을

나누어 써야 했다

오로지 앞으로만 가던 것과는 달리

떨어지지 않기 위해 부둥켜안아야 했고

안고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올라가야 했다

 

땀을 닦을 만한 손수건 한장 건네주는

친구도 없었지만

탈팽이는

여전히 입술을 옥물고

자신만만하게 등반을 계속했다

탈팽이의 온몸으로는

땀방울들이 송알송알 맺혔다가는

무겁게 아래로 떨어졌고

그런 땀방울에 얻어맞은 어떤 달팽이는

비가 오는가 해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이제 다른 달팽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올랐고

이제 다른 달팽이들은

다른 새로운 뉴스에 관심을 가졌고

탈팽이의 행보와 생사조차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5

 

한낮의 자글자글 끓는 태양을 피해

탈팽이는 음달진 쪽으로 등반을 했고

한밤의 어둠이 익숙치 않아

서느러운 달빛을 등에 지고

옴지락거리기도 했다

 

목이 마르면 나무에서 흐르는 수액으로

타는 목마름을 달래고

배가 고프면 나무의 진디물들로

허기를 달랬다

새벽에 정말 곤하면

나무의 상처인 옹이속에 들어가

잠시 심신의 피곤을 달래곤 했다

 

이제 풀벌레들도 오르기 저어할 만큼

이제 호랑나비들도 오르지 않을 만큼

이제 일부 산새들도 앉기 싫어할 만큼

 

아래를 굽어보면

모든 것이 고요해보였다

어쩌다 제 방귀에 놀란 토끼가 불쑥

도망치는 바람에 와뜰 놀라기도 했지만

숲속의 그 모든 소리들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바람만이 이따금

먼곳의 소식들을

전해줄 뿐이였다

그런 소식들은

탈팽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였고

그래서 탈팽이는

듣는 순간 흘려버렸고

흘려버리는 순간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탈팽이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가

이 나무를 정복하고는 또 무엇을 한단 말인가

정말 친구들의 말이 맞는 건 아닐가

선배들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나

 

그리고 그보다도

못 견디게 괴로운 건

외로움이였다

 

누구하고도 말할 수 없었고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혼자만의 것

커다란 바위덩이 같은 외로움이

탈팽이의 작은 몸을 후려쳤다

탈팽이는 그만 하마트면 떨어질 번했다

 

갑자기

딱따구리를 통해

자기 탈팽이한테 사랑을 고백해오던

그 예쁘장한 소녀달팽이가

눈물 가랑가랑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안돼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되지

 

탈팽이는

흔들리는 자신이 미워

큰소리로 웨쳤다

 

꿈을 가진

탈팽이란 말이야

누구도 무엇도

내 꿈을 가로막을 순 없어

 

6

 

탈팽이는 정말 오래오래 등반을 계속했다

이제 세상은 탈팽이의 존재를 잊었고

탈팽이 역시

숲속의 이야기가 가물가물해졌다

탈팽이한테 숲속의 그 아름답던 이야기들은

할머니가 들려주던 먼 옛말이였다

 

올려다보면 아직도 아득한데

내려다보면 아래도 아득했다

 

나무 우듬지에 이르면

이 나무를 정복하는 거야

거기에 아무 것도 없어도 좋아

무엇을 바라고 시작한 것이 아니니깐

다만

이 나무를 정복한다는

그것이 내 꿈이란 말이야

그것으로 충분해 충분하고말고

 

 

에필로그

 

계절은 나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세월은 나무의 혼을 빼앗기 시작했다

 

꿈을 가진 탈팽이 하나가 있었다

식욕과 성욕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는데도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 즐겼고

어느 날 문득

아름드리 나무를 정복한다고 도전장을 내민

그런 탈팽이 하나가 있었다

 

독수리 한마리가 그 석쉼한 소리로

왜 저 나무 꼭대기에

달팽이 하나가 말라 죽어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라고 했을 때에도

달팽이들은

탈팽이를

전혀 기억에서 떠올리지 못했다

 

다만

언젠가 사랑을 고백했던 그 소녀달팽이만이

남편이 사준 목걸이를 걸고 거울을 보다가

독수리를 취재하는 뉴스를 들으며

아빠트 창문너머로

멀리

아름드리 나무를

  곁눈질 한번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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