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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 , 螢雪出版社, 1994
2009년 05월 16일 21시 39분  조회:2103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안수길은 그의 초기소설과 후기소설을 묶어서 평가할 경우, 민족문학의 지평(15쪽)을 확대·심화시킨 작가로서 '대륙문학'이라는 특이한 세계를 통하여 위기시대의 민족문제를 형상화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 이주한인의 억압되고 분열된 '삶의 현장'을 증언하여 문학사의 단절기를 극복하려한 작가다. 그만큼 만주 <間島>는 안수길의 문학세계와 밀착되어 있으며 그의 제2고향으로서의 간도는 생존적인 개념을 넘어 창작적 原形質 plotoplasm로써 가능하는 의미로 파악된다.(16쪽)
지금까지 안수길 문학은 흔히 만주 간도의 초기소설, 즉 대륙문학에 집중되는 경향에 있었으나, 안수길 문학의 중요성은 해방 후의 사회적 혼란기와 정치적 변혁기를 경험하면서 초기의 '간도 의식'이 어�게 변용되어 나타나는가를 보는 것은 중요하리라 믿는다. 안수길에게 있어 '서울'은 '간도'와는 다른 현실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16쪽)
결국 안수길이란 한 개체는 한말로부터 일제식민지를 거켜 6.25 동란과 1970년대까지 한반도와 만주 간도 일원을 공간으로 하는 時·空 속에서 호흡하였던 작가라고 그 범주를 한정하여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문학은 '간도'와 '서울'이라는 두 개의 공간권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간도'는 외세의 국토강점으로 인한 실향과 망국적 恨의 근거지로써 이른바 대륙문학의 발생지를 의미하며, '서울'은 주로 이데올리기의 대립에 의한 민족내부적 갈등으로 빚어진 동족상쟁의 민족비극을 상징하는 공간이다.(16쪽)
어쨌든, 안수길의 경우 그의 문학세계가 민족의 문제에 있었든 개인의 운명에 있었든 그의 관심은 부루통의 이른반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에로 경도되어 있었다. 물론, '人生'이란 존재적 물음은 '藝術'이라는 본질적 물음으로 귀납될 것이나, 안수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상위의 개념에서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하위개념에 관심을 둠으로써 그가 얼마나 만주유이민, 해방귀국인, 월남인 등 실향민의 시대적인 핍박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안수길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그의 작가적 '體質'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안수길의 이른바 체질론은 그의 문학론의 전체적 모습으로 파악될 수 있다.(17쪽)
그의 문학활동 40년에서 일관하는 작풍은 '역사는 변화한다'는 의식에서,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동일한 역사적 현실로 합일시킴으로써 진정한 비극의 의미가 민족에 내재해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18쪽)
안수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근대사에서 격동기 및 혼란기를 체험한 50년대 작가로서 현 시점에서 이들 50년대 작가들은 역사시대의 작가, 과거를 증언할 위치에 놓인 작가군으로 남게 된다. 이들은 그가 살았던 시·공이 작품 현실에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나는가라는 反影의 그림자를 통해 지난날의 역사현장을 인식하게 될 것은 물론이다. 이같은 인식은 이른바 문학의 사회화 또는 사회의 문학화 현상으로써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관계로 파악된다. 그러나 작가의 전기적 성과를 아무리 강조한다 하여도 그것은 작품의 고유한 수준 이상의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작품이라는 문학적 현상을 위하여 그의 전기적 탐구가 요구되는 것이며 전기적 사실이 작품을 어떤 형태로 '간섭'하는냐가 작품해석에서 요구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소설의 인물은 시대정신의 형상화일 것이나 그 인물이 작가로부터 결코 분리되어지는 것은 아니다.(18쪽)
안수길의 소설세계는 '작가'와 '작품'의 두 상관성에 의해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증언되고 잇는 특징을 보임으로써 전형적인 사실주의 작가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시대적인 변화에 상응하는 인간 존재와 인간의 존재양식을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19쪽)
안수길의 문학유산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작품 전체를 삼단계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즉,
가. 초기문학: <<조선문단>> 당선시기부터 해방까지 재만 10년간(1935~1945)
나. 중기문학: 민족해방과 6.25 및 50년대 문학(1946~1959)
다. 후기문학: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의 문학(1960~1977)(20쪽)
안수길의 초기소설 성격은 ① 부정적인 경향에서 ② 긍정적인 경향으로 비판되어 왔으나, 90년대 이후에는 ③ 긍정적으로 보아야할 면과 부정적으로 보아야할 면을 별개로 평가하여야 마땅하다는 타협적인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같이 안수길의 초기소설에 대한 연구가 매우 유동적이었던 것은, 선행되어야 할 과제로써, 일제식민지시기 만주사회와 재만 한국문학과의 관계 정립 및 재만한국문학의 성격이 구명되어야 할 일이었다. 문학은 본질상 사회학과 정치학의 대용물은 아니며 문학자체의 정당성과 목적을 가진다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재만문학의 경우 시대, 사회적 특수성이 문학에 끼친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며 작품의 이중성이 곧 시대증언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안수길의 초기소설 연구사가 상반된 견해를 보였던 것은 물론이다.(20쪽)
이상의 기존연구를 검토한 결과, 안수길의 재만문학은 대립적 양상으로 성격화되거나 또는 절충적 입장에 놓여 있다. 그같은 분화양상은 안수길 소설이 일제의 만주국 정책을 정면으로 반영한 작품이냐의 여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재만문학을 과대평가하거나 또는 평가 절하하려는 태도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져야할 단계에 이르런 것으로 볼 것이다. 양분된 기존연구의 성과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부정적 견해)이재선, 김윤식-채훈, 이정숙-오양호, 민현기(긍정적 견해)
(22쪽)
한국문학사에서 일제하의 문학을 두고 문학사의 단절로 또는 절망의 문학, 암흑기의 문학 등으로 규정한 사람은 백철 장덕순으로 이어진다. 이어 암흑기 문학연구의 일환으로써 이재선, 김윤식, 오양호, 김병걸, 민현기, 김현 등에 의해 안수길의 초기문학이 조명된 바 있고, 최근에 채훈, 오양호, 이정숙에 이어 정리된 셈이다.(23쪽)
안수길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에 민족문학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학계의 인식에 따라서 재만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안수길의 초기소설이 문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안수길 연구의 석사논문이 다수 배출되면서 만주 대륙문학의 양면성이 지적되었다.(23쪽)
안수길 문학연구가 성립될 수 있는 사실상의 조건은 그의 후기작품인 [北間島](1967)가 존재함으로써다.(25쪽)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1973년)에서, 그의 작품의 주제는 대개 인간의 본질적인 것과 현상적인 면으로 이원화 된다고 하고 작가가 어느 것에 경사되어야 할 것인가는 작가의 '체질'에 따라 창작할 때 성공률이 높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체질이란 그의 '창작적 체질'을 가리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작가의 체질이란 크게는 창작세계, 좁게는 창작상의 일관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안수길은 인간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 어떻게 살 것인가.

존재적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의해 해명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전자는 후자의 현상학적 규명으로써만 밝혀진다고 할 수 있다. 전자 (가)의 '인간'의 본질은 정신일 것이며 후자 (나)는 정신에 대한 신체적 관계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은 후자 신체성에 의해 비(51쪽)롯된다. 전자를 존재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면 후자는 인가느이 삶을 대상으로 하는 현상론적 물음이다. 그런데 이 둘은 별개의 것일 수 없고 한 인간의 양면과 같아서 마치 정신과 신체 또는 생활과 예술의 의미로 유추된다고 할 수 있다.(52쪽)
안수길의 인간에 관한 두 시각, (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나)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별개의 인간관이 아니라 전자에서는 본질(정신)로써의 '인간구원'의 문제를 후자에서는 현상(시체)으로써 민족의 운명을 식민지 치하의 민족문제로 확대하여 보았다고 할 수 있다.(54쪽)
안수길은 장편소설이 왜 필요한가에 대하여 크게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1. 인생문제의 종합성 2. 역사의 전체성 3. 체험의 포괄성 4. 역사적인 탐구와 역사의식 5. 테마의 민족적 비극성.

그의 소설론은 기본적으로 민족이 처한 역사적 변천과 문학적 대응양식으로써 장편이 요구된 것으로 보며, 그것이 창작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57쪽)

제1기는 1860년에서 1910년까지로 잡는다. 이 시기는 청의 <봉금령>이 해제되고 변강지대에 이민정책을 실시하여 조선 북부지방민의 이주가 활발했던 기간이다. 한국인 만주 유이민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가 된다.
제2기는 1910년에서 1931년으로 잡는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만주에 은밀히 침략을 기도하여 간도협약(1909)을 체결한 이후가 된다. 1919. 3. 13. 룡정에서의 독립운동, 20년 봉오동 전투, 동년 10월에 청산리 전투 등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던 시기로서, 조선족은 반일단체로서 개간민교육회, 경학회, 농무계, 부민회, 사우계를 조직 반일 활동을 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일제의 침략 이후 중국-일본, 한국 간의 대립과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인하여 1925년 이후는 이민의 제한 또는 탄압시기가 된다. 중국관헌의 탄압과 구축이 극심하여 한·중 농민의 충돌사건(1927), 만보산사건(1931)이 연이어 일어나고, 국내에서는 재만동포의 참상에 비관하여 [재만동포옹호동맹](1927)을 조직·구출코자 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제3기는 1932년부터 해방기까지다. 이 시기는 일본의 정책적 이민이 봉천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따라서 원주민의 박해와 경원이 상대적으로 노골화된 시기다. 일제는 적극적인 만주침략정책과 아울러 한국인의 만주이민정책을 강행하였고 제2차 대전의 전비 부담을 만주개발에 상당히 의조하려던 시기다. 제3기는 이주한인들이 만주정책 및 증산정책에 순응한 시기가 된다.(65쪽)
'移民'이란 이민 당사자국 간의 합의에 의해 조약된 이민법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일방의 국민이 다른 국가로 주거지를 옮기기 위해 월경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한국인의 만주이민은 대개 조선 중기 철종대(1860년경)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이 시기의 한인 만주이민은 이민의 개념상으로 볼 때 자의적이며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것은 인접국 간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자의적 이주형태이며 특히 한말기 변경인들이 경제적 궁핍을 이유로 두만강을 넘어가 정착을 꾀함으로써 한국인의 만주 유이민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청에서도 이주한인에 대해 초기의 쇄국시기를 지나서 묵허기, 환영기, 배척기 등으로 대응하였던 사실에서 볼 때 일관된 이주정책을 펴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한국인의 만주 이민은 일제의 침략적 국책이민 전 단계까지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자의적인 이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만주 이민을 流移民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일제의 경제적 및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식민지 한국에서 살 수 없었던 절박한 이유에 의해 떠밀려난 이민이었다. 청인들은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생존적 요구로써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가 간단없이 추진해온 중국동북지방에의 침략적 정책과 동류로 인식했던 것이다. 예컨대, 일제는 1905년에 '만주이민론'을 제기하였고, 1915년 일본인 19호가 '愛川村'에 입촌, 1930년에 대련농사회사에서 日本農業移民 60戶를 모집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그 후 일제는 만주 개척의 필요상 집단이민, 정책이민 또는 자유이민의 이름으로 한국인을 강제이주시켰다.(66쪽)
일반적으로 이주민은 정착을 전제로 한 이주농민을 일컫는 것이나 도시, 탄광, 산판의 노동자와 직업이 없는 유휴노동자들은 돈을 벌면 만주를 떠나려는 浮流層이었다. 어는 경우에나 정착에 실패할 경우 이주민에서 유랑민의 단계로 유랑민에서 다시 노숙걸식의 단계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재만 한국인이 '뱅이' 아니면 '쟁이' 중 어느 하나로 떨어지지 않으면 큰 다행이라고 하는 것은 유랑민 양산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 시기 만주 유이민들은 이주와 유랑의 계선을 넘나들며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따라서, '유이민'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불행하였던 한말로부터 식민지 기간에 이르는 재만한인들의 비극적 삶을 증언하는 역사적 어휘였음을 알 수 있다.(67쪽)
대체로 지금까지 논의된 결과를 종합해 보면 안수길의 문학적 공은 인정하면서 그의 현실의식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일관된 민족의식을 투영하고 있는냐로 집약된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기존연구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1)민족정신을 구현한 망명문학이냐 (2) 만주국 산업개발정책과 맥이 닿는 입식정책의 작품이냐로 양분된 위치에 놓여 있다.(68쪽)
<찬수>는 외세에 대하여 일면은 외세의존적 다른 일면은 무저항주의를 구사하였다. 중편 [벼]는 한국인 만주 이주 제1기인 환영기로부터 제2기 배척기에 해당하는 소위 만주건국 이전의 작품으로, 민국 17년(1928) 배일사상이 강한 소 현장이 매봉둔의 응봉학교 개교를 금지하고 한인들을 축출하려는 사건에서 청국과 첨예한 대립을 일으킨다. 즉 장개석의 북벌정책이 성공한 해의 10월 동삼성에도 청천백일기가 나부(68쪽)낀 지 반년에 청은 부패정치를 쇄신하고 강력한 대외정치를 펴고 있었다.(69쪽)
지금까지, [벼]의 주민들에게는 나까모도를 통로로 하여 한농 부락의 문제를 해결하려던 계선과 수전 개간 초기로부터 정착때까지 통로로 삼아왔던 선주민 홍덕호, 중국인 방치원을 계선으로 하는 두 개의 통로가 있었다. 전자는 만주국 건국 전후 시기인 1929년경을 배경으로 하는 만주 이민 제2기의 후반에 해당하면, 후자는 박 첨지의 입만 시기가 1919년으로 이민 제1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소설의 전개는 제1기와 제2기가 시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소설의 무게는 제2기에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모두가 '만주 건국 2년 전 여름이엿다'고 하여 소설이 증언의 시기를 밝힘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다.(70쪽)
작품 [벼]에 투영된 외세에 대한 간도 한인의 색채는 반청항일의 논리가 아니라 반청화일의 경향이었다. [벼]는 지금까지 농민문학으로서 주목되어 왔던 작품인 데 이 작품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과 청의 세력간에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고, 한인들은 살아야 한다는 생존문제로 청일의 사이를 필요에 따라 왕래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다. 작품 [벼]는 그러한 이중적인 태도 때문에 민족의 논리로써는 허약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궁핍한 시대의 탈상황의식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간도 한인의 이면의 외세의존과 일면의 무저항주의는 특히 <찬수>를 중심으로 하는 인테리들의 행동 논리였음을 주목(70쪽)할 필요가 있다.(71쪽)
[벼]의 한인들은 간도에서 水田을 개간하고 정착지를 확보한 다음으로 요구되었던 2세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으나 이주민들의 뜻이 좌절되는 경우를 국가의 배경과 연결지어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북간도 이주민의 초기적 과제는 뿌리내리기로 요약될 수 있으나 뿌리내리기란 실상 경제적인 자립으로 시작되고 이세 교육에서 그것이 마무리된다는 의식이다. 작품 [벼]는 이같이 국가없던 시대 간도에서 개척민 한농의 다양한 삶의 의지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인간 문제를 민족의 에토스적인 시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작품다운 작품이 없던 시대 간도사회를 대변하는 귀중한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벼]에서 <찬수>의 반청화일의 논리를 두고 일제의 입식정책에 순응하는 작품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소설 [벼]는 1910년말과 30년대 초기에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던 국제역학 관계속에서 이주한인들이 '수전개관'과 '2세교육'을 2대 과제로 설정하여 어떻(71쪽)게 인내하고 투쟁하여 왔는가를 보여준 작품 정도로 이해할 것이 요구되는 작품이다.(72쪽)
안수길의 중편소설 [벼]는 그의 초기소설 중 가장 주목된 것인 데 [벼]는 사실상 이주민의 교육문제가 중요한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부친 안용호가 북간도에서 민족계통의 학교를 경영한 바 있고 작가자신도 한 때 교직을 경험한(74쪽) 사실과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75쪽)
간도 이주 한농들의 삶의 양상은 만주땅을 개간하여 거기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자하는 의지의 여러 형태였는데, 소작농으로부터 수전개간, 산판과 탄광의 노동자 또는 걸인으로 전락하는 유형이었다.(75쪽)
[새벽]은 간도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이주하여 왔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선주민의 횡포와 돈값에 처녀를 인질잡히는 악습에 의해 파산되는 과정을 통해 만주 이주가 실패로 끝나는 경우를 보여주는 소설롤 이해된다.(78-79쪽)
안수길의 간도소설은 시대와 사회의 환경적 요인이 작품세계로 반영되어 있어 시대의 역사성을 재구하는데 별 무리가 없는 것 같다.(79쪽)
소설 [새마을]은 수전을 개간하는 예의 한농과는 달리 이주 선주민의 학대에 못이겨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여 무기력한 퇴폐적인 생활로 소일하는 인군의 이주민상을 보여주는 소설로써, 지금까지 만주의 간도문학이 이주민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였던 경향과는 달리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새마을]은 간도 이주민 또는 간도 유랑민들의 기층생활을 통하여 이시대 민족의 절실한 과제가 무엇이었나를 제시하고 있다. 간도의 한국 역사란 이같이 일각에서 말하고 있는 민족정신을 전개시킨 역사의 장으로만 인식할 수 없고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표리가 되어 나타난 우리 시대의 역사적 패배의 또 다른 형국임을 제시한다. 간도에서의 민족역사란 지도자 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빛'으로서의 역사일 수는 있어도 상대적인 기민층 중심의 역사에서 볼 때는 망각되어야 할 '오욕'의 역사로 인식되는 것이다. 안수길의 간도소설을 이해하는데는 이같이 시대적인 양면성을 주목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80쪽)
[새마을]은 소설로서 크게 주목받을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새마을]의 주인공들의 중요성은 그들의 무기력한 생할양상이 다음 단계로 어떻게 전개되는냐에 있다. 소설 [새마을]은 이주한인들의 삶의 과정이 소작농에서 도시노동자로, 도시노동자에서 유랑 걸식으로 전락하여가는 과정의 중(80쪽)간단계를 보여 주는 소설이다.(81쪽)
소설 [원각촌]은 산판의 노동자 <이원보>의 삶을 통하여 산판으로만 전전할 수밖에 없는 간도유랑민의 생활을 만나게 된다.(81쪽)
여기서 이주한인의 정착 양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춘삼>의 경우처럼 산판의 노동자에서 다시 농민으로 돌아온 경우이고, <억쇠>처럼 산판을 계속 전전할 수밖에 없는 유랑민형이다. 물론 이주한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자폐적인 성격때문도 있지마는 정착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착취형의 존재로 하여, 간도 이주민의 정착문제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81쪽)
[圓覺村'은 <억쇠>의 폐쇄적 성격과 선주민 <한익상>을 심리적으로 맞세워 억쇠가 다시 유랑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를 부각시키고 있다. [원각촌]은 산판의 노동행위와 구체적인 개척의 현장성을 소홀히 한 반면 선주민 한익상의 횡포와 억쇠의 대결을 부각시킴으로써 대륙문학의 특징적인 분위기를 설정한 소설이다.(82쪽)
<억쇠>의 유랑길은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다. 그는 백원이란 큰 돈으로(82쪽) 아내를 살 여유도 있었다. 그를 만주땅에서의 정착을 불가능케 하는 것은 전혀 선주민의 횡포였다. 힘이 센 억쇠와 억쇠의 아내가 미모라는 설정은 통속적인 인물 설정이나 한익상의 존재와 더불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원각촌]은 이주민 개척 제2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주 유랑민 <억쇠>를 통하여 불안한 시대적 현상을 보여주는 소설로 파악된다.(83쪽)
[원각촌]의 이원보는 사실상 산판의 노동자로서 승부를 내고자 원각촌을 찾았으나 한익상의 갖가지 위협에 의해서 파탄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83쪽)
작가는 간도이주민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하고 유랑민화를 촉진케 하는 원인의 일단이 동족 선주민에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새벽]과 [원각촌]은 유이민 제1기 내지 제2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유이민의 고난스러운 정착과정을 상이한 각도에서 다루었다. 두 소설은 유이민의 뿌리내리기를 주된 호흡으로 하면서 선주민 마름의 중간착취를 허구적 사실로 한다.(85쪽)
재만 농민들은 청인지주 또는 그 마름과 고용, 소작계약을 맺으면서 수전 개간, 황무지 개간 등 비교적 원시적 단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87쪽)
근로봉사대란 조선에서의 빈궁층 사람들을 선발하여 만주가 살기좋다고 감언리설로 꾀어 만주의 불로지 개척에 동원된 사람들을 말한다.(89쪽)
이 작품([함지쟁이 영감]-인용자 주)에서 심각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일제 침탈정책으로 인한 민족 전체의 빈곤 현상과 경제적 압박이 정신적 분열현상을 일으켰고, 일제의 문화적 식민정책이 최하층민의 언어에까지 오염되었음을 보이고 있다.(91쪽)
간도이민 후반기란 일제의 괴뢰 정권이었던 만주국 건국과 일제가 한인의 집단이주를 강요 또는 장려하고 만주에 <안정농촌> 창정을 위해 금융회로 하여금 영농자금과 생활자금까지 지급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작품에서 작품의 현실을 지나치게 일제하라든가 마주가 일제의 괴뢰 정권임을 내세워 작품세계를 정치적 변혁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작품이 시대상의 반영을 넘지 못한다는 인식보다는 주인공의 소극적인 행보에 시선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94쪽)
외연적으로는 [목축기]의 농민도가 [북향보] 정학도의 농민도로 연계·확대되어 간 것은 사실이나 [목축기]가 단순히 [북향보]의 농민도와 같은 개념이거나 정신일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우선 전자의 작품들은 만주국 이전 단계으 개척민족으로서 요구되(95쪽)었던 극히 농민적인 의미의 농민도, 이를테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해당될 터이고, 후자 [북향보]의 농민도는 외관상으로도 국방의 일익을 담당해야 할 국민적 의미의 농민도였다. 그것은 오족협화이든 식민지적 착취의 방식이었든 만주국 정책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한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시대적 의미는 그만큼 식민지화로 발전되어 갔음을 의미하는데, 현실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 외에 이 시대에서 달리 내놓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시대 만주국의 농업정책상 한농들이 개척에만 전념하여 미곡증산운동 등에 협조하도록 '농민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은 되나 오족협화, 王道樂土, 鼓腹擊壤 등의 만주국 포스타 외 "農民道"를 강요했는지 불확실하다.(96쪽)
[목축기]에서 밝히고 있는 만주국에 대한 언급과 찬수가 와우산 목장을 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확대해석할 경우 [목축기]의 서사적 의미와 서사적 구조를 간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96쪽)
소설에서 언급되어 있는 [농촌으로 돌아가라] 또는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 [만주에는 아침이 왔다]는 드러난 몇 개의 구호로써 만주국 정책에 순응한 작품으로 단정하기에 앞서 소설의 감추어진 의미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96쪽)
염상섭이 농민도에 대하여 [원각촌]과 [벼]에도 일관하는 '정신'과 '사상'이라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목축기]에서 주인공이 바친 근면과 성실은 안수길의 여타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정신이며 그것이 현실로 살아갈 수 있는 길(道)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목축기]의 정신과 사상을 확인한다면 성실한 삶과 '근로정신'일 것이다. 따라서, 염상섭이 [목축기]를 두고 말한 농민도는 이주한인들이 만주를 떠나려는 의식에 대해 安定된 생활을 定着해야 한다는 포괄적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다.(98쪽)
찬호가 학교를 물러나온 것은 그 자신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찬호는 만주국 교육령하에서는 그 이상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라든가 '귀농'을 권유하며 있을 필요가 없다는 저항적인 판단에서였으며, 마침 막내 동생이 교두로 부임하는 기회에 물러나온 것이다.(100쪽)
다만,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는 말은 만주사회에서 일반화된 말일 것이며 작가가 '검열'의 과정을 거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토성], [북향보], [벼] 등에서도 발견되는 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찬호>는 농업학교 학생에게 <만주에는 아침이 왔다.> 또는 <백오십만 동포의 팔할을 점령한 농촌은 배운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외침에 허구성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100쪽)
[목축기]의 인물 <찬호>에 대해서 과도하게 만주국 정책에 순응한 인물 쪽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편향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소설의 세계는 실제세계와는 무관할 수밖에 없고 소설 자체로써 논의되어 마땅하다는 관점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시대의 소설은 사회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면 찬호의 행위는 어두운 시대를 초극하려는 인물이란 점에서 그의 준비론적 자세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며 증언적 성격이 강한 소설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준비론적 대응논리란 일제의 정책을 수용하는 쪽이다. 그러나, 비겁한 수용이 아니라면 이 시대에서는 '살아남기'가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101쪽)
소설 [土城](1941)은 만주국 성립과 아울러 재만민족이 청의 지배로부터 일제지배의 관할로 이관되면서 당시의 상황을 '새나라의 탄생' 또는 '새로운 정치'로 인식하는 단계를 중요한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토성]은 안수길의 초기 소설 중 만주국 정책을 여과함이 없이 당시의 사회와 시대상황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102쪽)
[토성]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직접 반영함으로써 현재에서 과거를 재인식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한농들이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가를 조명할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인물의 저항형태가 아닌 만주국이 재만 한농들에게 베풀었던 갖가지 施惠 형태와 순응의 양상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만주국은 間島省 公署(吉林省特派駐延行政辦事處)를 통하여 '匪襲'으로 황폐화된 농촌의 갱생을 위하여 '특전과 편의'를 제공하였는데 이주민들이 그같은 특전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03쪽)
일제지배기에 있어서 한인들의 문제는 자주권의 주장이 아니라 생존 문제에 한정된 의식이었다.(104쪽)
 민족의 이름만 존재하는 외세의 칼날하에서 절대적인 '어떻게 살 것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대 이주한인들에게 생존문제의 해결없이 친일이냐 민족이냐를 따지는 태도는 잔인한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 시대 한농들이 만주국의 정책을 수용하면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자 하였던 존재의 양면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40년대의 재만 한국인 소설 [목축기], [토성], [북향보] 등은 이주한인들이 자기 시대를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왔는냐를 체질함이 없이 노출시킨 작품이란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106쪽)
안수길의 최초 장편소설 [북향보]는 안수길의 여타 소설보다 만주국 정책이 정면에 나와 있고 일제강점기의 강요된 정책과 지시들을 내세워 경제적으로 허약한 한인드이 어떻게 대처하고 순응하였으며 그 순응의 양상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북향보]의 구조는 전자 [토성]과 같이 시대적 구호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작품으로 (1)소설 속의 일제지배의 양상 (2)인물의 행동과 성격 (3)북향도장과 북향정신, 도혼(稻魂)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 규명되어야 할 줄 믿는다.(107쪽)
'와우산목장'은 만주국의 요구도 민족의 생존권도 만족시킬 수 있는 세계의 설정이었다. 소설 [북향보]의 성격은 외세와 민족이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파악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108쪽)
[북향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학도가 주장한 '북향 정신'이다. 소설은 결국 북향정신이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주된 임무(108쪽)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찬구>에 의해 가시적으로 현실화되는가가 중심과제였던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정학도>가 주장하였고 그의 제자에 의해 실천되고 있는 북향정신을 해명함이 없이 논의될 수 없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정학도의 사상은 그의 '북향도장계획서'에 구체화되어 있다. 소설은 이와같이 목장의 사업계획서가 소설의 지문을 차지함으로써 소설이 홍보 목적, 독자위안, 시대증언 등을 포괄하는 기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109쪽)
북향정신이란 간도에 아름다운 고향을 설정하여 살기좋은 고장을 만들자는 것이다. 일종 잘 살기 운동이다. 경제적으로 약한 한인들에게 잘 살기 운동이란 필연적인 것이며 거기에 잘못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 말한 합숙제도, 00 농민도장, 성인교육, 도장건설, 유축농업, 농민도, 농업만주건설 등은 북향 정신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또 성 당국과 일본인 사도미의 적극적인 협조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북향정신은 한민족이 요구하는 정신일 수만은 없으며 만주 신생국정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북향 정신'이 만주를 사랑하고 만주에 아름다운 고향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민족의 생존문제까지를 포괄하는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현실성 없는 농민도장을 설정하면서 북향정신, 도혼, 농민도 등 여러 겹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통일된 만주국정책이 아니라 협화회 등 친일기관의 조선인 작품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109쪽)
안수길 소설은 다면적인 제재로써 현실 증언 또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증언적이며 현실제시적 기법은 人物의 갈등이나 인물의 영웅적 행위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만주국 정책 내용을 '지문' 그대로 인용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일제식민지 말기에 만주에서 창작된 우리말 소설 [북향보]는 어려운 시대 외세와 민족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과 회의를 경험하면서 창작되었고, 그 결과 [북향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로는, 어느 정도의 순응과 인내로 살아갈 수 있다면, 살아남기 그 자체가 곧 간접적인 저항의식 내지 응전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안수길 소설은 핍박한 이주 한민족을 어느 정도 위안할 수 있었다는 공리성을 제외한다면 소설을 쓰지 말았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110쪽)
건국 후 入滿한 韓人을 일러 洋服鮮人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횡령, 사기, 부정, 몰의리한 사람으로 비판한다. 양복선인이란 일반적으로 만주국 건국 후 입만한 조선인을 일컫는데, 당시에는 개척시기에 입만하여 수전을 개간한 한농은 우대하고 그 외의 상인, 노동자 등을 경시하였던 풍조에서, 농업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하한 말이다.(111쪽)
안수길의 [북향보]와 [목축기]는 장편·단편이란 차이가 있을 뿐 인물의 성격이나 소설의 배경, 인물들의 현실인식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115쪽)
[북향보]에서 농민도라는 어휘가 염상섭의 서문에서 이미 지적되어 나왔다는 것은 그것이 만주사회에서 일반화된 용어일 것이며, 따라서 농업만주를 지향하는 당시로서는 농민도가 사회적인 요구로써 위장되었고 다시 한농들을 강제하는 사회적 운동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116쪽)
또는 道는 安定에서 생긴다는 말과 같이 생활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농사든 목축이든 생산노동에 몰두할 수 박에 없는 일이다. 농민도는 만주사회에서 가난한 이주 한인에게 강요할 수 있었던 정신이며 고성회, 북향도장도 같은 맥락에서 볼 것이다. 따라서 [북향보]의 북향정신이나 농민도를 만주국의 성격과 결부하여 확대된 의미로 해석하거나 지나치게 민족문학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일은 없어야 할(116쪽) 것 같다. 다만, 안수길은 당대의 사회적 통념이나 인식, 만주국 시대에 이주한인에게 일반적으로 강요되었던 정책과 일본인 또는 청인들의 대한인관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려는 데 있었던 것 같다.(117쪽)
[북향보]는 이를테면, 만주의 농촌 계몽소설에 해당한다.(119쪽)
안수길은 함흥고보와 경신고 재학 시절에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두 번의 퇴교를 당한 바 있다. 작가는 이 사실을 '아이들의 주목을 끌려는 소영웅심'의 발동이라 회고한 적이 있지만, 그는 학생시절부터 외세에 저항적인 민족정신을 내면의 신념으로 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126쪽)
안수길의 초기소설은 국내에서 살지 못해 만주로 유랑 또는 이주해간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다각도로 포착하여 그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그의 해방 전 작품에는 여러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교사, 수의사 같은 인텔리를 비롯하여 소작인, 노동자, 상인, 걸인, 함지쟁이, 아편밀매자, 광부, 승려, 야바위꾼 등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계층의 인물을 통하여 고난의 실상을 체험하고 민족의 문제를 증언코자 하였다. 그는 종래 식민지하의 민족의 문제가 흔히 민족독립운동 등의 다분히 상층의 귀족적인 취향에 의해 다루어짐으로써, 민족의 현실과 사회적 진실이 호도되어 왔던 사실을 배제하고 있다. 간도로 이주해간 한인들은 대부분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삶의 뿌리를 뽑히운 사람들의 행렬이다. 반도내에서는 '고향'을 설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족차별이 만주보다 극심함으로 미지의 땅 만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26쪽)
안수길의 초기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그것은 일제가 실제로 만주를 지배하던 시기 즉, 만주국 건국을 전후하여 그 전의 작품과 그 후의 작품군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건국 전의 작품들은 대체로 이주 한인(127쪽)들의 정착문제와 밀착되어 있어 이 시기의 작품은 외세와 민족문제가 예각화되어 전개됨을 불 수 있다. 그러나 4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일제의 선만일체정책에 의해 순응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의 작품임을 변명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안수길을 비롯한 몇몇 재만 작가들이 갖은 수모를 겪으며 일본어(國語)가 아닌 우리말로써 소설을 발표했다는 점을 평가해야 할줄 믿는다.(128쪽)
그는 민족이 외세에 짓밟히던 일제치하 간도의 한민족이 고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려한 것이다.(128쪽)
일제 강점기와 같은 민족의 비극적 역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文學은 현실증언의 문학이 아닌 겅우 우리는 그 존재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 안수길이 재만시절 한국문학 정립을 위해 헌신한 공로는 물론, 그가 근대 역사적 전환기시(128쪽)대 동북아의 역학적 대립을 배경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민족의 삶을 '이정도'로 증언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129쪽)
만주 유이민들은 1930년대부터 두 외세, 청과 일의 사이에서 생존적 뿌리를 내려야만 했다. 한말로부터 이어지는 청과 일의 대립된 역학구조는 민족을 포함 이른바 힘의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청·일을 양변으로 하는 그 정점에 민족이 위치한다고 볼 때, 힘의 균형이 무너질 경우 그 경사각만큼 피해의 여진은 국가 없는 한민족의 몫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한민족은 두 세력권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으며, 만주 사회에서의 중도논리란 사실상 두 힘의 균형점을 유지하려는 위치에서 모색되어지는 살기의 한 방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중간자적 성격의 인물, 나아가서 무기력한 인물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만주국에서의 이주한인이란 대개는 '실향'과 '망국'의 상황에서 생존하는 인(132쪽)물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인물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수길이 불행한 시대에서 좌우명으로 택했던 <신음하며 탐구하는 자세>라는 파스칼의 철학을 지고의 이념으로 수용한 것도 외세와 민족의 양극 사이에서 택하여진 논리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의 인물들은 계층의 고하간에 모두 양심적인 인물이다. 격변기를 살 수 있는 인물이란 양심적인인물이기보다는 시대 변화에 적을할 수 있는 형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인물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파스칼의 이른바 신음하는 영혼의 인물들이다. 이같은 유형은 초기소설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양심적 인물의 도덕적 무능성은 초기소설에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133쪽)
이른바 제3의 논리란 민족의 비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북간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밝혀질 터이지만, 힘이 약한 자가 외세와의 직접적인 대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색된 살아남기의 한 방법인 것으로 이해된다. 만주이주민이 외세지배하에서 취하였던 민족의 유랑화는 그같은 비극성을 증언하는 것이다.(134쪽)
재만 한민족은 의식상은 민족의 땅이면서 현실적으로는 남의 땅일 수밖에 없는 만주 간도에서 生存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 당위와 이를 용납치 않는 열강 사이에서 요구되었던 문학적 수용이 다름아닌 안수길의 중도적 인물이다. 물론 어려운 시대를 극복키 위한 중도적 입장은 정치적, 사상적 등 여러 부문에서 모색이 가능할 터이지만 식미지시대 민족이 당면한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키 위한 중도적 인물창조는 안수길의 경우, 외세의 억압과 생존적 당위로써 요구되는 제3의 인식으로써 중도적 자세가 필요했던 것 같다.(140쪽)
[亡命詩人](1976)은 안수길로서는 생애 마지막 실향인 작품에 속한다....이 소설은 안수길의 전기적 사실을 서사적 배경으로 깔고 이국인 간의 애정문제를 형상적 이미지로 연결해 나가는 소설인 데, 망국시인의 비극적인 유랑화를 통해 그가 글을 쓸 수 없다거나 한국의 술집여자를 상식 이상으로 못잊어하는 등 정신적 분열상을 보이는 과정을 통하여 실향의식을 분석하고 있다.(305쪽)
안수길은 한국사회의 전후 실향뿐만 아니라 [타목]의 일본 여자 <스미에>와 [羅子 머자니크]의 백로계 실향소녀 <라자·머자니크, 에스토니아의 망명시인 <바이로이다>를 통하여 국적 없는 사람들의 비극적 삶을 주목하였다. 실향인 문제는 식민지 한국인만의 문제이라기보다 20C 동북아세아의 전체가 제국주의의 야욕에 의해 뿌리가지 파산됨으로하여 고향을 지킬 수 없엇던 상황에서 중국인, 백계로인, 한국인은 물론 일부 일본인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상황이다. 일본은 침략국민으로서 당시의 인구문제와 식량문제 등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주해온 사람과 패전 후에 귀국치 못하고 잔류한 실향인도 다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크게 보면, 안수길의 '어떻게 사느냐'와 맥이 닿고 있다고 할 수 있다. [亡命詩人]을 통해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안수길은 만주 간도에서 체험한 '北間島'의 민족문제를 민족주체성에 의해 형상화함으로써 민족적 리얼리즘의 작가로서 명성을 획득한 것이다.(307쪽)
사실상 문학연구는 문학의 문예미학적 요구에만 한정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따라서 식민지치하에서 창작된 근대한국문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관심속에서도, 일제치하의 민족적 치욕을 역사의 치륜에서 빼어버릴 수 없는 한 시대의 '전체'로써 파악해야할 인식 때문에 식민지문학이 당대의 민족적 질곡을 어느 정도 증언할 수 있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논의되어 왔다.(339쪽)
예술은 시대를 초월하는 시대정신이 있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의 예술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 예술로서의 문학이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은 새삶스런 지적일 수만은 없다. 우리의 문학이 이데올리기의 종속적인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접근은 식민지시대 재만 한국문학으로부터 검토하는 일이다. 민족의 공동과제였던 대일민족항쟁시기의 문제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대립하게 된 主因을 찾되 이데올로기적 접근이 아니라 민족적 유산으로 접근할 경우 사상적인 거부감은 감소될 것이다. 식민지시대 재만 한국문학은, 만주 땅이 역사적으로 조선의 영토였고 만주 현지의 이주민만도 180만의 인구가 살았다는 사실과 만주 간도가 식민지시기 대일 독립항쟁의 본거지였으며 재만문학이 그같은 당대적 현실을 문학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재만 한인문학이 한국문학에 귀속될 문학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340쪽)
재만 한국문학은 암흑기 한국문학을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서 현실적으로 남북 분단의 역사적 근원지가 만주 간도였고 대일 항재기인 1920년대이후부터 공산주의자가 민족 독립운동을 희석시켰던 사실을 중시, 만주의 한인 공산주의 운동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식민지시대의 만주와 오늘의 북한 사회 또는 북한문학을 재조명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식민지시대 국내문학은 친일성 문학으로 비판하면서도 한국문학일 수 있고 망명지 문학은 항일 민족문학(내용상 공산주의 작품일지라도 형식상은 민족문학이다)성격인데도 한국문학일 수 없다는 논리는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행방 전까지의 재만 한국문학을 염두에 둘 경우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341쪽)
신채호가 '폭력'을 주장했던 그 시기에는 외세와의 대결이 가능한 시기였으나,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일제 괴뢰정부 수립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식민통치를 강화하여, 1933년 이후 경찰서, 영사관 분관설치, 협조회, 특별공작반, 선무반, 안전농촌, 집단부락을 만들어 식민통치를 강화한 시대로 바뀐 것이다. 만주에서도 일제는 역사를 날조하고, 오족협화 운동을 펴는 한편으로 '황민화 운동', '조선 교육령', '창씨 개명령'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근원적으로 말살하려 하였다.(345쪽)
만선일보는, 식민지치하에서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만선일보 스스로는 <일본국의 완전한 국민이 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에 의해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존재의 명분을 잃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진정한(346쪽) 의미의 민족문학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부정적인 물음에도 만선일보 편집진이 학술란, 문예란을 두어 신인작가 배출에 일조하였고 재만 한국문단 형성의 구시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안수길이 용정분사장으로 있을 때 쓴 기사 "中小 商工業者에 活路를 열어주라"는, 용정의 인구 3만 5천 중 8할이 조선인이었고, 용정의 당면문제가 곧 조선인의 문제였다는 말로써 당시 만선일보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총영사관이 延吉로 옮겨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철도개통, 의대설치, 중소학교 문제, 성화학교 경영난 등을 기사화하여 학교문제의 경우 상당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가능한한 민족적 이익 챙기기에 있어 만선일보 기자들이 일조를 했다는 생각이다.(347쪽)
안수길이 만선일보를 가리켜 "재만조선인의 정신적 훈련 도장이며 민족협화의 一分子로서 조선인의 문화 향상의 지도적 기관"이라고 한 것은 만선일보를 옹호는 발언이다. 그런데 만선일보가 재만조선인의 정신적 훈련도장이라는 안수길의 발언은 그가 망명문단을 운운하였던 사실과 배치되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그 자신이 만선일보 기자로 근무하였고 재만 문학의 운명이 만선일보에 있었음을 공인하는 터이므로 식민지 시대의 일반화된 구호였던 '민족협화'를 내세웠던 것으로 이해한다.(349쪽)
주로 만선일보 등을 통하여 문학활동을 하였던 이들 <적 점령구내의 작가들>은 우회적인 수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현지 연구자들의 지적을 참고할 때 위장된 순응주의 또는 친일발언을 위장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들 만주국 내의 작가들은 이주민의 절대 다수가 간도에 살았으며 그들이 개척의용군으로 동원되어, 경제적·인격적 착취를 당하였던 현장을 여러 형태로 증언하여 재만 한국문학의 큰 맥을 형성해 왔다는 것은 아이러니에 속한다. 만선일보의 역할은 상처투성인 1940년대 재만 한국문학을 기형적 형태로 유인하면서도 민족의식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언론기관이다. 이 단계에서 식민지 시대의 작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면, 절대적 저항에 의한 민족 독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억압적인 반민족적 현상들을 '증언'할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350쪽)
1940년대 초 만선일보 문화부의 기획기사, <조선문학 건설을 위한 新提議>나옴으로써 이 시기에 기성문인 및 신인들의 문단 형성을 위한 새로운 진통을 발견하게 된다. 1940녀대 재만한국문학은 시·소설도 활동적이었으나 평론분야에서 두드러진 면을 보였다. 그것은 두 분야로 요약되는 데, 하나는 재만한국문학 건설을 위한 原論的인 제의였고 다른 하나는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352쪽)
"마주 조선문학 건설을 위한 신제의"의 필자는 10여 명으로써, 이들의(352쪽) 논지는 불모지 만주 한국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내용이지만, 문학을 말하면서 구태여 만주국 협화정신을 강조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만주국을 의식하지 않고 문학만 말한 작가도 있어 이 시기 재만 문인들의 정신적인 갈등을 엿보게 한다. 이들의 평론 중 재만 한국문학의 발전이 만주국 정신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부터 언급하려 한다. 이 시기에 재만 文化人들이 구호처럼 사용했던 오족협화나 만주국 정신은 재만 한인으로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부담없이 사용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이 시기의 재만 文化人들의 의식은 벌써 식민지 文化人으로 떨어졌거나 자기를 마멸시키고 식민지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환상에 젖었음을 알 수 있다.(353쪽)
비평활동이 부진했던 만주 문단에서 金友哲의 활동은 특히 이 시기에 두드러진 바 있어 주목된다.(362쪽)
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사라 할 때 그것이 민족의 비극사에 해당하느냐 또는 국가의 발전사를 가리키느냐를 나누어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 문학사 기술은 국가의 정치적 범주에 속해 왔던 이데올로기의 한계성으로 민족 단위가 아닌 국가 단위의 문학적 층위와 그 한계내에서 질적, 양적 확충을 전형으로 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문학이 분단 문학 아닌 통일 문학을 지향하거나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을 생각할 때 한반도 내 남한 문학이 "한국문학"이어야 한다는 한계 의식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식민지 시기 간도의 대륙문학은 국내 문학과 비교할 때 그 성격과 기본적 골격을 달리한다. 민족적 위기 시대에 할 수 있었던 순수문학은 식민지 시대의 불가피한 문학양식으로 수용될 수 있고 저항과 좌절로 일관하였던 만주 한인 문한은 '만주국 정책 영합'을 전제로 이면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며, 특히 타부문과는 달리 문학 쪽에서 그러한 경향이 우심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식민지치하의 민족문학은 일단 '망명지 문학이나 지하 문학이라야 민족문학으로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5)}(제2판), 지식산업사, 1990.p.24-인용자 재인용)는 쪽으로 의견을 모을 수 있다.(368쪽)
안수길, 김창걸, 현경준, 강경애 등 일제식민지치하의 滿洲 鮮系文學을 논의하기 위하여서는 만주문단에서 선계의 위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만주문학>과 <선계문학>의 관계를 점검함으로써 재만한국문학의 위상이 설명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千葉豊治는 그의 논문 "滿洲 移植民論"을 말하면서 만주 이식민이 일본인과 만주인의 입장에서 중요성이 있는 것이지 만주 정책에 조선을 논할 여지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千葉豊治, "滿洲 移植民論"〔滿蒙〕12월호, 만주 문화협회, 소화 7년-인용자 재인용) 이같은 견해는 문학쪽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가령, 富田 壽의 "滿洲文學槪觀"이나 秋原勝一의 "滿洲文學의 背景"이란 논문에서도 만주문단은 일계작가, 만계작가, 백로계작가로 한정하여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심하게 마랗여, 만주사회에서 선계의 문화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상 또는 언어적 이유로 張赫宙, 今村榮治 등 일부 친일 작가를 제외하고는 만주문단이라는 우선 밑으로 모이길 꺼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만선일보, <<藝文>>, 〔滿蒙〕등에 기고한 일인 문인들은 재만한국문단이 일본어를 체득하여 만주문단 안에서 활동할 것을 촉구하는 태도를 보였다.(369쪽)
1940년 당시 만주에서의 문화운동은 만일문화협회가 중심이고 문예단체로 <文話會>가 있었다. 위의 문화회는 재만문학자들의 종합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대련에 있던 본부를 신경으로 옮기고 대련, 봉천 등에 지부를 설치한 것이다. 만주문화협회 회원은 약 450명으로 일본측에서는 각 대학 교수가, 마주측에서는 각계 학자 각부 대신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의 문단에 조선작가들이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서 문단관계만 말한다면, 문화회는 매월 통신을 발행, 활동보고, 연락 등 문예적인 방송을 일본 내지, 지나와도 하고 있었다. 이들 회원은 북경, 동경까지 지부를 두고 있었으나 선계는 만주나 서울에도 없었다. 당시 기관지로서, 일계는 <<滿洲浪漫>>(4집 발행)이, 만계기관지로서는 <<藝文誌>>(1939. 6. 창간 3회 발간)가, 그리고 잡지로서, 일계의 [작문](대련), 만계의 것으로 [신청년](봉천)이 있었는데 경성시보문예란을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370쪽)
그러나, 이 단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주에서는 <국민문학>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작가들은 조선 작가들이 조선어 아닌 일어로 조선생활을 그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彬村(彬村勇造-당시 조선문학과 내지문단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일본작가-인용자 주)의 말처럼 아직은 국민문학의 단계는 아니며 자국어를 사용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滿洲文話會의 선계 참여가 적었던 것은 작가들이 한글로 작품을 발표하고 번역문을 발표하지 않았는 데 있는 것 같다.(372쪽)
간도에서 이무영의 희곡 [黎明前後](1940)를 각색하기도 했던 이갑기는 다시 만주문단에서의 조선작가들의 활동문제에 대하여 재차 촉구를 하였던 바 일인작가 吉野는 작품을 번역하여 만주문화회에 보내면 게재하기로 한다는 것이었고, 만계작가 爵靑도 자기 편에서도 선계작품을 만어로 번역 藝文志에 발표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만계에서는 조선문학을 알고 싶으나 말을 모르는 탓에, 만일, 일어로 역만 한다면 자기들이 만역하여 예문지에 발표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지금까지의 발언들을 종합할 때 만주국은 1940년 4월까지 5족 협화를 도모한다는 방침을 강조하면서도 문화계에 대하여 강제수단을 유보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만주국은 國兵法을 공포하여 이른바 <好人爲國當兵>을 내세우던 시기였다. 일제는 도로를 개설하고 전만 60만 조선 학도들에게 청년학교 제도를 강구 동원령을 내려 근로를 시켰으며 한편으로 개척단법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40년대 초까지 재만작가들이 일제를 비판할 여지는 없었으나 중립적인 작품은 어느 정도 가능한 시기였다. 신경일일신문 주필 大內隆雄은 만주의 조선문학을 말하며서, [각 민족의 각자 민족에 의한 자유스러운 문학발전이란 만주사회의 결정적인 요소이다. 국가가 문학에 부당한 제재를 가하는 때의 표본을 독일에서 보아왔다]고 하고, [조선에서는 조선어에 대하여 어떤 제한을 과하고 문학발전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고있는 듯 한데...나는 의견을 좀 달리하여...보담 더 개성적인 발전에의 계기 부여와 독자적인 개성의 구축이 있어야 할 줄 안다]는 의견이었다. 그는 국민문학 전단계로써 선계문학, 일계문학이 각각의 문단을 형성, 국민문학을 지향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물론 일제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일어를 국어로 작품을 써야 할 것이라는 전망은 가능한 예측임이 분명하지만, 국민문학은 각개 민족의 언어를 통한 문학의 발전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록 포장된 주장이라 하더라도 국민문학 수립을 선도하던 국내 일부인의 태도와는 다소 인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373쪽)
그러나 문학의 [방향상실]이란 점에서는 만계작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만주문단을 가리켜 방향없는 방향이라고 하였을 때 그 방향이란 다름아닌 민족어냐 일본어를 국어로 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374쪽)
이같이 만주 선계문학은 외세와의 역학관계라는 어름의 위치에서 시대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외관상은 마주낙토를 구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민족어에 의한 선계문학 건설을 제창해야 할 당위성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만주 선계에서는 문단형성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1940년대의 간도사회는 <八紘一宇>의 일본정ㅅ니을 강조하는 등 문학에서도 국민문학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문학이란 그 본질상 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하면서 민족적인 정서와 전통을 뿌리로할 때 가능한 예술이다. 기본적으로 이같은 조건마저 결여될 때 문학은 그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함께 비극적인 파행으로 치닫게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일제가 지배하던 시기에 민족협화, 만주낙토를 표방하면서도 이면적으로는 <<싹트는 대지>>와 같은 작품집을 냄으로써 '先住同胞의 血淚點綴한 개척사를 斷片的으로 나마 엮어 後日에 考徵삼음'을 기했던 재만 문인들을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375쪽)
국내에서는 1939년 10(420쪽)월에 벌써 이광수, 김동환 등이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했고 이것이 다시 조선문인보국회로 변질되어 조선문학 30년 역사는 일본정신과 일치해야 한다는 의식과 비교할 때 만주의 간도문학이 비록 문학적인 기교에서는 국내문학에 미흡할 수 있었으나 문학인의 현실의식에는 엄청난 거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해방된 뒤에도 민족주의적인 작품이 변변히 나오지 못하였던 시기에 해방전 만주 간도에서 민족이 받은 역사적인 시련과 고통을 치밀한 시각과 일관된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 형상화하여 내놓았다는 것은 큰 수확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김창걸의 문학적인 특징은 만주 간도의 한민족이 살아온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고통의 역사, 다시 말하면 이주민이 겪어야 했던 통과제의적 성격의 고난과 억압의 현장을 독자에게 증언한 증언의 문학인 점에서 일차로 주목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작품도 1940년 일제의 파쇼정책의 영향을 받은 바 있으나 대체로 간도이주민의 생존권문제를 작품 기본항으로 하면서 그 위에 민족이 지향할 바 시대정신으로서 미족주의를 표방하거나 사회주의적인 행동양식을 현실부정의 한 양식으로써 고양시킨 셈이다.(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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