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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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
2008년 07월 24일 23시 41분  조회:2118  추천:108  작성자: 조남철

중국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

조남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1. 왜 조선족 문학인가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왜 지금 조선족 문학에 대해 말하려는 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해외에 있는 동포로만 말한다면 이민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미국의 동포도 있을 것이며 해외 이주의 역사가 중국동포의 경우와 비교해 보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2004년 이주 140주년을 맞는 연해주의 러시아 동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시기 중국의 조선족 문학을 다루려는 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동포나 옛 소련의 동포와 비교할 때 중국의 동포들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말과 글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힘입어 민족문화의 유산을 포함하여 우리 글로 이루어진 문학적 유산을 적지 않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중국 동포들의 문학적 유산은 다른 해외 동포들의 경우와 비교하여 우리 민족문학의 지평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귀한 유산으로서의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 민족의 근대적 체험과 관계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근대사를 돌아보면 우리 민족은 전세계 어느 민족과 비교해보더라도 파란만장한 근대를 헤쳐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금년으로 우리 민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지 100년이 넘었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 재외동포의 수는 720만에 이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국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의미로서의 민족을 생각해야만 할 시기에 이르렀고 그럴 경우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대상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일 것이다. 새삼 중국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조선민족의 중국으로의 이주를 다룬 논문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의 경우 다른 나라로 이주한 우리 민족에 비할 경우 우리 근대사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경험들이 지금 중국 연변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우리 조선민족의 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이 논문에서 다루려는 연변 조선족 동포의 문학이 우리 역사 속에서 민족문학이라는 범주를 보다 확대할 수 있게 하며 더 나아가 우리 민족문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든다면 20세기 초, 조선반도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압제아래 놓이게 되자 당시의 간도지방, 지금의 연변조선족 자치주로 들어 와 우리말과 글로 문학활동을 한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문인들로 김택영, 신정, 신채호, 이육사, 윤동주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동시에 이들 문인들은 한반도 내에서도 작가로서 활동하였으며 실제로 한국문학사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 주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중국내 조선동포문인들은 조국의 문단과 간도 등지의 해외에서 동시에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이 점에서 해외 다른 나라의 동포문학과 뚜렷한 차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에서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6년에 이르기까지의 중국동포들의 문학, 이른바 이들이 말하는 당대문학1)의 앞부분을 중심으로 이 시기의 문학적 배경, 민족문학의 건설과 전개과정, 문예이론의 내용 등과 함께 소설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위의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조선족’이라는 명칭에 대해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부르는 공식적인 명칭은 ‘조선족’이다. 그리고 이 낯선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한국의 일반인들에게 약간의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왜 ‘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지에 대한 의문과 혼란, 그리고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조선족’이라는 의미는 중국정부와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들이 중국의 우리 동포들을 중국에 있는 여러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본다는 뜻이다.
  
원래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55년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조선민족’ 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인 용어였다. 이 문제에 대해 이광일은 그의 『해방후 조선족 소설문학연구』(경인문화사, 2003.8)에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새 중국이 건국된 후 중국공산당은 1952년 2월에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 자치강요’를 반포하였고 전국적인 범위에서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제도에 의해 1952년 9월 3일 연변에도 조선족의 구역자치제도가실시되고 자치구가 성립되었는데 그 전칭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였다. 그러다가 1955년에 길림성인민위원회는 헌법 제2장 제제4절의 규정과 연변 조선민족 자치구의 보고서에 근거해 자치구를 자치주로 이름 변경하는 사항을 국무원에 보고했고 국무부 내무부의 동의를 거쳐 8월 30일에 길인편자(吉人編字) 제 2085호 통지를 내려보냈고 12월 20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연변조선민족 자치구 제 1기 인민대표대회 제 2차 회의에서 이 통지를 공포했고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함을 선포하였다.

위의 글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자치구가 자치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행정기관의 규모와 관련되는 것으로 중국 내 우리 민족의 수와 지역의 규모 등과 관련해 생각해 볼 문제라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명칭의 변화이다. 즉 그 이전의 ‘조선민족’에서 ‘조선족’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길인편자 제 2085통지에서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 명칭은 중앙민족사무위원회와 내무부의 연구를 거쳐, 전국의 기타민족자치 지역과 일치시키기 위해 연변조선민족의 ‘민’자를 생략하고 그 명칭을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라고 할 것을 제의한다.2)

이러한 명칭의 변화에는 물론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한족을 포함한 56개 민족의 통합을 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체 56개 민족을 ‘중화민족’이라는 용어로 묶고 그 ‘중화민족’의 하나로서 ‘조선족’이 존재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중국에서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미만이지만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전국토의 60%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중국당국에서 가장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의 우선 순위는 1949년 중국건국이전부터 중국공산당이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 국적을 갖고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중국내 ‘조선인’ 문학이라는 용어는 중국 건국 즉 1949년 이전의 한글문학을 의미하며 ‘조선족’문학은 1949년 이후의 한글문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윤은진은 「중국조선인 문학연구에 나서는 몇 가지 문제」(『문학과 예술』 1993. 6기)에서 1949년 전의 문학은 중국조선인 문학이라고 지칭해야 하며 그 후의 문학은 조선족 문학이라고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문학은 조선민족 문학의 갈래에서, 그 이후의 문학은 중국소수민족 문학의 갈래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필자는 이 견해에 일부 동의하며 앞으로 ‘중국 조선족 문학’의 위상을 우리 민족문학과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해 매우 주목할 만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동안 중국 내 우리 동포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인문학과 조선족 문학을 혼동하여 쓴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49년 이전의 조선동포에 의한 문학을 ‘중국 조선인 문학’으로, 1949년 이후 조선동포에 의한 문학을 ‘중국 조선족 문학’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2. 시대적 배경과 조선족문학의 전개 과정

2. 1. 해방과 건국, 조선족문학의 등장과 건설
  
1945년 8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중국 역시 오랜 항일전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뜨거운 열정이 대륙 전체를 휩쓸게 되었다. 그러나 항일전쟁의 승리 이후 동북 삼성3)의 정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 괴뢰만주정부는 이미 전복되었으나 이 지역에서 국민당은 지방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에 맞서 중국 공산당 역시 동북 삼성 지방을 그들의 든든한 근거지로 구축하려 하였기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6월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이 다시 일어나자 조선동포들은 제3차 국내 혁명전쟁에 다시 한번 앞장 서 뛰어 들었으며 결국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건설에 다른 어떤 소수민족보다도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 중 조선족이 남다른 사회적 위치를 갖게 하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1949년 10월 1일은 세계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해이다. 오랜 내전을 마감하고 중국대륙에 하나의 국가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는 해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중국역사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 놓았으며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기본적인 결속과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표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변화의 와중에서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 조선동포들의 경우에는 건국의 과정에서 크게 공헌한 만큼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그에 걸 맞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았다. 또한 그것은 중국 건국의 과정에서 다른 어떤 소수민족보다도 더 많은 피와 땀을 통해 건국의 한 축을 담당한 우리 동포들의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선동포들은 민족문화 건설을 위해 다양한 방면의 민족적 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49년 설립된 연변대학교의 경우가 바로 이 운동에 가장 구체적인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 건국 이전인 1949년 4월 1일 종합 민족대학으로 창립된 연변대학은 지금까지 중국내 우리 민족교육의 선구자로서 중국 조선족 역사에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49년의 건국 이후 중국의 역사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 건국 이후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1957년의 반우파 투쟁의 확대화, 1958년의 ‘대약진 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 1959년의 ‘반우경 투쟁’과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정풍운동’, 1963년에서 1965년에 이르는 시기의 계급투쟁화 확대화와 절대화 등의 ‘좌경적 오류’ 등과 같은 이런 저런 정치, 사회적 이유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 속에서 중국내 조선족의 문학 역시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으며 변화,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후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등 동북 삼성에 흩어져 살고 있던 조선동포문인들에게 건국 이후 전개되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의 역할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 일이었으나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1949년 건국 후 중국 전역의 인민들은 감격과 흥분에 들떴으며 이는 조선동포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바 ‘위대한 혁명적 변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현실 속에서 특히 조선 동포문인들은 문학활동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건국한 중국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민족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동북 삼성 여러 곳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작가문인들이 조선동포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 연길로 몰려들었다. 흑룡강성의 목단강과 할빈 등에서 활동하던 김례삼, 김태희, 최수봉, 황봉룡, 리홍규4), 임효원, 최현숙 등과 길림성 통화지역에서 활동하던 백남표, 최정연, 그리고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김학철5)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6) 동시에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신문, 잡지 등의 출간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연변일보』(연길지역), 『인민신보』(목단강지역), 『민주일보』(할빈지역), 『단결일보』(통화지역) 등의 신문과 『불꽃』(연길지역), 『민주』(연길지역), 『대중』(연길지역), 『연변문화』(연길), 『문화』(연길지역), 『건설』(목단강지역), 『효종』(영안지역) 등의 잡지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7)
  
한편 이 시기에는 대중적인 문예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전문적인 문예공연단체들의 활동이다. 특히 ‘이쓰크라 극단’, ‘길동군구 문공단’, ‘양양극단’, ‘166사선전대’, ‘연변문공단’, ‘송강로신예술극단’, ‘송강군구 제3지대 선전대’, ‘164사선 전대’, ‘리홍광 지대 선전대’ 등의 활동이 주목을 끌었다.
  
한편 중국 동북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각 지역의 동포문인들도 지역에 실정에 맞는 문학단체들을 결성하여 민족문학 수립에 힘썼다. 그 대표적인 단체들로는 연길 지역에 결성된 ‘간도문예협회’, ‘동라문인동맹’, ‘중쏘한 문화협회’와 목단강 지역의 ‘동북신흥예술협회’, ‘도문 지역의 ’로농예술동맹‘들이다. 이들 문화예술단체들은 각 지역별로 문예평론회, 작품감상회, 문예연구회의 밤, 신춘문예 현상모집 등의 활동을 통해 민족문화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활약과 함께 이들 문예단체들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중국의 전국적인 문예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소수민족 문예로서의 독특한 의미와 지위를 지켜 나갔다. 1948년 3월 심양에서 열린 ‘동북문예공작가 회의’와 1949년 7월 2일에서 7월 19일까지 북경에서 열린 ‘중화 전국 제1차 문학예술일꾼 대표대회’에 각각 대표를 파견한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 이후 1950년 1월 15일 최채, 현남극, 김동구, 리홍규, 임효원 등이 발기하여 연길에서 ‘연변문예연구회’를 결성하고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미술 등 5개 분과를 설치하였다. 이 ‘연변문예연구회’는 ‘연변에 있어 모주석의 새 문예방향에 의거한 문예공작자가 되며 인민의 문예를 연구하고 창작함으로써 참다운 인민의 문예공작자가 되며 문예로써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을 목적’8)으로 하는 규약을 통해 그 존재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조선민족의 문단적 기반을 닦기 위한 최초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연변문예연구회’는 1951년 4월 23일 해소되고 연변문학예술계 연합주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연변문예』(이 잡지는 6호까지 발간된 후 폐간되었음)지를 발간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1953년 7월 10일 제 1차 ‘연변 조선족 자치주 문학예술일군 연합회’(약칭 연변 문련)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연변 문련은 기관지 『연변문예』를 복간하여 1956년 12월 35호까지를 발간하여 동포문학예술인들에게 창작의 공간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동포문학예술활동의 활발한 전개에 힘입어 1956년 8월 15일과 16일 이틀 동안 제 1차 연변 조선족 자치주 작가 대표대회를 열어 중국작가 협회의 결정에 따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는 연변분회의 주요한 과제를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는데 이 단체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들로 하여금 우리 문학의 주인공들의 생활실제에 깊이 침투하도록 조직하고 도와주며 작가들을 사상성과 예술성에서 성숙하도록 하는 방면에서 가능한 일체의 방조를 아끼지 않으며 문학방면에서의 일체의 잠재력량을 발견하고 조직하여 작품을 쓰도록 하며 적극적으로 청년작자를 배양하며 창작경쟁과 자유토론을 전개하면서 당의 ‘백화만발 백화쟁명’의 방침을 잘 관철시켜야 한다.9)
  
또 하나 이 시기 조선 동포문학의 특징을 찾아본다면 모택동의 ‘연안 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에 대한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목단강 지역에서 발행된 『인민신보』를 보면 앞의 ‘동북신흥예술협회’의 추천아래 1946년 9월초부터 10월말까지의 기간 동안 모두 25차례에 걸쳐 ‘연안문예좌담에서 한 연설’을 번역하여 게재하였으며 연변지역에서도 이 연설의 학습을 위하여 그 내용을 『중국문예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모택동의 이 연설에 대한 학습은 조선동포문학의 전개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내 조선동포문학의 위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대중적인 문화예술 활동의 하나로서의 창작노래의 보급과 적극적인 연극활동이다.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른 노래로는 아무래도 항일가요 등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자의 오랜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자축하기 위하여 만들어 부른 노래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토지얻은 기쁨’,  ‘전선지원의 노래’,  ‘방어공사의 노래’,  ‘우리 패장동무’,  ‘꿩탕극의 노래’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노래들과 함께 이 시기 주요한 대중적인 문화예술활동의 하나인 연극활동으로는 당시의 현실투쟁을 반영한 것이 많았다. 당시 공연된 연극활동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해방이후부터 건국전까지의 기간에 공연된 극본들을 초보적으로 조사한 데 근거하여 종합해보면 모두 86편’10)이나 된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실로 엄청난 숫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2. 문예사상 투쟁과 민족문학의 좌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중국문단을 살펴보면 끝없는 문예사상투쟁과 사상운동을 통하여 사회주의 문학건설의 길을 걸어 나갔다. 영화 ‘무훈전’에 대한 토론, 『홍루몽』연구 중의 자산계급 유심론에 대한 비판, 호풍문예사상에 대한 비판운동이 그것인데 우리 조선동포 문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비판운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과 문예관을 확립하려는 것이 이들 사상투쟁과 사상운동의 목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문예운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정치적인 성격을 띄게 되고 이는 결국 이른바 ‘좌경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고 이는 이후 조선동포문단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동포문단에서의 반우파투쟁은 1957년 후반에 시작한다. 반우파투쟁은 다음해 봄에 이르러 마무리되는데 중국 건국 초기에 중국내에서 벌어진 가장 영향력이 크고 범위도 매우 넓은 문예사상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극소수 자산계급들이 중국 공산당이 전당적으로 정풍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기회를 엿보아 이른바 ‘대명 대방’을 고취하고 공산당과 사회주의제도를 공격한 것이 반우파투쟁이 일어난 이유였다. 그러나 이 반우파투쟁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학술문제나 문화예술의 문제를 정치문제로 비화시키면서 민족문화건설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앞의 조성일, 권철 등은 『중국조선족 문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조선족 문단의 반우파투쟁은 자기의 창작성과로 독자들의 광범위한 공명대를 획득한 이름난 작가들 그리고 자기의 사상미학적 주장에 따라 대담하게 탐구의 창문을 열던 문인 이른바 ‘자산계급 우파분자’로 몰아 혹독하게 투쟁였다. (중략)
  
둘째, 조선족 문단의 반우파 투쟁은 현실생활 중의 부정적인 인소와 모순들을 대담하게 건드린 소설작품들과 우리 시대 인간들의 애정륜리와 인간미를 읊조린 서정시들을 이른바  ‘사회주의 정치표준’에 어긋아는 ‘독초’로 몰면서 터무니없는 비판의 모닥불을 사정없이 안기였다. (중략)
  
셋째, 조선족 문단에서의 반우파투쟁은 문예사상분야에서의 교조주의적 이론을 배격하는 탐구적인 평론과 ‘백화만발, 백가쟁명’방침의 고무하에 예술적 민주를 발양하여 발표한 언론들을 죄다 ‘수정주의’거나 반동적인 글과 견해로 간주하면서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11)

결국 '반우파투쟁'의 확대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족 문학건설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제 막 뿌리를 내려 제 모습을 갖추려한 조선족 문단은 이 투쟁을 겪으면서 뿌리채 파괴되었으며 적지 않은 중견작가와 작가들이 ‘우파'로 몰려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그들은 이른바 ‘노동개조'라는 명목의 고된 시련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에 기초한 다양한 문예창작은 자취를 감추고 정치성만이 강조되어 오로지 좌경적 경향만이 강조되었다. 당연히 문학예술의 다양한 창조성과 실험성은 사라지고 정치적 성격만 남게 된 것이다.
  
1958년에는 이른바 '수정주의 문예사조'에 대한 비판운동이 전개된다. '반우파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이 비판운동은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에 따라 일기 시작한 사상해방의 조류를 청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의 내용은 크게 둘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수정주의 문예사조’의 대표적 인물들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수정주의 문예사조’의 대표적인 견해와 작품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비판운동의 결과로 김학철, 최정연, 주선우, 김동구 등과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김학철의 장편 『해란강아 말하라』등이 수정주의 문예노선의 해악의 대표적인 예로 말해지며 이 결과 이들의 모든 문학활동과 문학적 주장, 문학작품이 모두 부정당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조선동포 문단은 말 그대로 뿌리채 뽑히는, 철저하게 붕괴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수정주의 문예사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조선족 문단에는 또 다른 문학적 위해가 가해지는데 그것은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자산계급 조국관’, ‘언어의 순결화’ 등을 대상으로 하여 행해진 것으로 조선족 작가들과 조선족 문학에 대한 또 다른 문학적 압제였다. 1959년부터 진행된 이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은 그 동안 행해진 민족구비문학의 수집이나 조선어 규범화 등에 대하여 냉혹한 비판을 가해 이제 막 그 모습을 갖춰나가는 조선 민족문화 건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민족문학’을 계승, 발전한다고 할 때 이 계승이나 발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지방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족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 조선민족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는 일조차 지방 민족주의적 행위라고 비난하였으니 이 운동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학과 언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민족어가 갖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통’부분만을 강조하고 심지어는 한어와의 융합만을 강조하여 조선어의 규범화를 강력 비난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런 분위기에서 김창걸12)이 1957년 7월호 『아리랑』에 발표한 ‘연변의 창작에서 제기되는 민족어 규범화 문제’13)라는 논문이 집중 비판의 대상이 되게 된다. 당시 조선민족 작가들이 겪는 조선어사용에 있어서의 혼란을 지적한 이 논문에서 김창걸은 ‘민족어 규범화란 우리 민족의 영광스러운 과업을 위해서 우리 작가 시인들은 모두 다 함께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매우 적절한 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김창걸의 지적은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쪽에서 민족어의 순결화를 고취하는 지방민족주의분자로 몰아 비난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반우파투쟁의 어려움을 넘긴 몇몇 문인들마저 이 비판운동을 통해 문단을 떠나게 된다. 이처럼 많은 문인들이 떠나게 된 조선동포문단은 붕괴되고 그 명맥만을 간신히 이어가게 된다.      

2. 3. 신민가 운동과 문학의 정치적 예속
  
1958년에서 1959년은 중국의 이른바 ‘대약진’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국 각지에서는 이러한 대약진 운동에 발맞춰 대중적인 문예창작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민가 운동’이었다. 건국 이후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중국은 이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와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사회주의 건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를 위한 문학운동 역시 열정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1957년 겨울과 1958년 봄에 있었던 조선 동포들의 ‘수리건설 양양 운동’과 이에 따른 신민가 창작의 예로 출간된 『연변민가선집』, 『연변민가집』이 이러한 대중적 문예창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민가를 통해 집단노동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사회주의적 노동열정과 혁명적 이상을 높이 구가하였으며 사회주의 제도와 공산당의 위대함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민가들은 비록 비현실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신민가 운동 역시 후기에 이르면서 좌경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58년 10월호 『아리랑』지에 실린 ‘문학위성을 올리자’라는 사설이나 다음해인 1959년 1월호 『연변문학』에 실린 ‘전당, 전민적 창작운동을 전개하자’는 사설이 이러한 좌경적 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설들은 ‘사람마다 시인이 되고’, ‘사람마다 문학위성을 발사하자’ 는 다소 허황한 주장을 내놓으며 남녀노소와 학력 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다 신민가 창작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연변문학』에 실린 ‘전당 전민적 창작운동을 전개하자’라는 다음의 글을 보면 그러한 한계를 쉽게 알 수 있다.

각급 당위, 문련과 작가협회들에서는 이 헌례운동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모두 창작계획을 세우고 우람찬 구호들을 제출하고 광범한 군중창작운동을 발동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성적들을 거두고 있다. 왕청현(중국 조선족 자치주에 속해 있는 현 중의하나; 필자)에서는 자기들의 창작임무와 구호를 아래와 같이 제출하였다. ‘전당이 동원되고 전민이 꾸리며 로, 농, 상, 학, 병이 일제히 동원되여 보수와 미신을 철저히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강으로 삼아 창작의 대고조를 일으키며 7개월 동안 착실히 노력하여 1백만건의 작품을 창작하여 10만건의 우수작품을 례물삼아 국경 10주년을 영접하자!‘ 왕청현에서는 이러한 구호와 임무를 실천하는 제1차 전투 중에서 각종각양의 형식으로 된 작품을 10만건이나 창작하였으며 장백산 밑 첫 마을인 화룡현 숭선향 (중국 조선족 자치주에 속해 있는 현과 향 중의하나; 필자) 인민군중들은 135만건을 창작할 계획을 제출하였으며 훈춘현에서는 일주일 민가창작운동주간에 7만건의 민가 를 창작하였다.14)

이처럼 신민가 운동은 지나치게 작품의 양적 생산에만 관심을 기울여 조잡한 작품의 창작을 막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반사실주의 경향의 작품 창작에도 영향을 끼쳐 문학작품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부정적인 측면이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평론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문학적 오류는 전혀 지적하지 않은 채 이를 오히려 혁명적 낭만주의의 산물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를 조장하여 그 한계를 막기 어려웠다.
  
한편 이러한 신민가 운동은 다른 분야의 대중문예창작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항일투쟁 회상기이다. 항일투쟁 회상기는 말 그대로 항일운동 시기의 회상을 적은 글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1930년대 연변지역에서 있었던 조선동포들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루고 있다. 즉 당시의 항일 투사들이 실화에 기초하여 직접 집필한 것으로 이 시기 신민가 운동 중에서 제일 바람직한 경우로 평가할 수 있겠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반우파 투쟁으로 시작한 1957년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여러 문학이론투쟁으로 인하여 조선 동포문학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내용을 다시 요약해 보면 1. 이러한 비판운동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중견작가들이 정치적 권리와 함께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동시에 예술창작과 탐구에의 열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2. 문학작품의 사실주의적 특징이 약화되었으며, 3. 작품창작에 있어서 구체적인 정책과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어 도식적이고 개념적인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내 조선동포문학은 민족적 특성을 잃지 않고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광채를 발휘하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는데 그 역량을 모아 나갔다고 할 수 있다.      


3. 이 시기 소설문학의 성과

앞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 건국 이후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17년 동안 우리 조선동포 문학은 험준한 탄압과 외적 환경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특히 소설분야에 있어서는 중국의 건국 이후 바뀌어진 생활양식과 다양한 인물군상의 등장으로 창작의 지평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국 건국 이후 문화혁명까지의 조선동포문단의 소설은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5) 즉 중국 건국에서 반우파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까지를 1단계로, 반우파투쟁에서 문화대혁명시기까지를 제2단계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설문학의 발전단계를 전제로 하여 각 단계에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반우파투쟁 직전까지의 1단계 소설문학은 건국의 흥분과 함께 민족문학을 건설하겠다는 열정에 영향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소설문학은 ‘현실에 급격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다룰 수 있는 단편소설’16)에 창작적 관심이 집중된 시기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학철의 단편집 『뿌리박은 터』(1953), 이근전의 『과일꽃 필 무렵』(1956)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밖에도 ‘김창걸의 ‘새로운 마을’,  렴호렬의 ‘소골령’,  김학철의 ‘새집 드는 날’과 같은 작품을 그 에로 들 수 있겠다. 이들 소설과 산문들은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 새생활에 대한 희열, 근로대중의 전형적 인간형 창조, 묘사의 사실성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의 소설 중에는 이와 달리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의 새로운 애정윤리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최현숙의 단편 ‘나의 사랑’, 리근전의 ‘참된 사랑’ 등이 그 예이다. 특히 최현숙의 단편 ‘나의 사랑’은 서간체 소설로 당시 문단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름대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소설문학은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발표된 작품의 수가 많지 않았으며 그 소재 또한 지나치게 제한적이었다. 덧붙여 적지 않은 작품들이 정치적 선전과 선동에 신경을 쓴 나머지 예술적 감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보다 분명하게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단계의 소설은 반우파 투쟁에서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소설이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거의 이루어지고 사회주의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이다. 당연히 이 시기 조선동포소설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전개되었다. 즉 앞의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반우파 투쟁, 대약진 운동, 계급투쟁 확대화 등의 좌경적 오류의 피해를 입으면서 동시에 또 그를 극복하면서 변화, 발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소설의 특징은 정치사상의 문제, 예술적 아름다움의 문제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사회주의 건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소재의 확대와 다양화,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는 근로대중의 혁명적이고 영웅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찬양, 노동자와 농사군, 그리고 군인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 항일제재의 심도있는 발굴이라는 측면 등에서 그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근로대중의 사회주의 혁명의식아래 영웅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주인공을 그린 작품들이다. 김병기의 ‘쇠돌골의 변천’(1958), 안창욱의 ‘병상 위의 해연’(1958), 박태하의 ‘사막에서의 조난’(1959) 등이 있다. 그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쇠돌골의 변천’은 주인공 김영감을 통해 농촌건설이라는 명제 아래 매진하는 당대 농민들의 감동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사상적 변화의 과정을 잘 그리고 있어 사회주의 혁명건설을 위해 고투하는 전형적인 인간형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적 색채와 농민들의 열정과 지향, 꿈과 이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둘 수도 있다.
  
‘병상 위의 해연’은 농촌제방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인민해방군 병사인 상등병 종인이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일기체의 형식을 지닌 이 작품은 사회주의 조국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욕망과 고통을 모두 벗어 던지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주인공의 뜨거운 열정과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특히 일기체의 형식을 선택함으로써 1인칭 소설이 갖는 뛰어난 심리묘사의 특질을 통헤 등장인물의 내면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 소설의 뛰어난 덕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막에서의 조난’도 앞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인 인물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고비사막을 소설의 무대로 하고 있어 한국소설과는 달리 그 소재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주인공 김태희의 조난과 그에 따른 고난, 그를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 결국 주인공 김태희는 엄청난 고난을 이겨내고 동료에게 구출된다. 그러나 그 죽음과 최후까지 싸워 이겨 동료들에게 구출된 뒤에도 그는 사회주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의미하는 자신의 자동차의 안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주인공 김태희의 영웅주의적인 풍모와 락관주의적 역사의식을 뜨겁게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밖에도 이 시기에는 새로운 사상과 낡은 사상과의 투쟁, 민족단결의 주제를 다룬 소설들도 적지 않게 발표되어 다양한 소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좌경적 오류에 기초하여 겪게 되는 몇 차례의 정치적 풍랑이 조선동포 소설의 경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생활의 긍정적인 묘사라는 측면만이 강조되어 소설의 다른 한 중요한 축인 현실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기능은 매우 빈약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한 계급투쟁이 확대되고 절대화함에 따라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그리거나 민족적인 관심이 모아지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인물의 창조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영웅적이고 이상화된 인물만을 그려 엄밀한 의미에서의 근대적인 인간형을 그리는 데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약한다면 이 시기의 조선동포들의 소설문학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인정할 수 있기는 하지만 문학작품을 둘러 싼 외적 환경의 악화와 특히 문학이론 투쟁, 또는 좌경적 오류에 기초한 반우파투쟁의 영향에 밀려 소설 본래의 성과를 얻는 데에는 다소 미흡했다고 할 수 있겠다.


4.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중국 건국 이후 조선족 문학의 전개와 주요 소설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론 삼아 중국 조선족 문단의 현황과 그 대안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국외자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중국 조선족 문학을 언급한다는 일이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나 많은 중국의 조선족 문인들과 연구자들은 중국 조선족 문학이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한다. 적지 않은 시간 조선족 문학을 지켜 본 필자의 입장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문학잡지들의 위기가 눈에 띈다. 오랜 전통의 유명 문학잡지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의 조선족 문인들은 모두 걱정하고 있다. 문학지에서 종합지로 다시 종합지에서 오락지로의 부침을 거듭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에 놓인 것이다. 독자의 감소에 따른 판매부수의 격감, 좋은 필자를 확보하는 일의 어려움 등이 그것이며 사실 이러한 현상은 잡지의 경우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조선족 문단 전체에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들어 뜻있는 이들의 헌신과 봉사로 척박한 문학 풍토 위에서도 <도라지>, <문학과 예술>, <연변문학>, <장백산> 등이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독자와 문인지망생의 감소현상이다. 먼저 독자의 감소현상은 조선족 인구의 분산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한 조선족의 생활반경이 중국의 개혁개방, 그에 따른 한국과의 다양한 접촉의 결과 이들 조선족 동포들은 중국의 연해지구를 비롯하여 한국의 기업이 있는 곳으로 또는 개혁개방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발맞춰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넓혀지게 된 것이다. 이 결과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비율은 빠른 속도로 감소하게 되었으며 예전의 조선족 문학의 독자들도 그들의 생활터전이 옮겨지게 됨에 따라 점점 문학잡지의 구독기회를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문인지망생의 경우도 위 독자의 감소원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혁개방의 시기에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 글쓰는 일은 젊은 세대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다른 중국인들보다 많은 수입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능력있는 젊은 조선족들에게 글을 쓰는 일은 더 이상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 조선족 문학도 상업주의의 냉혹한 현실에 던져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 문학의 오늘을 냉정히 살펴보면 지금 이 시기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다. 오히려 지금 이 시기를 중국 조선족 문학의 새로운 도약의 시기로 삼아야 하며 그러한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 것이다. 위기는 기회를 위한 준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몇 가지 제안을 해 본다.  
  
우선 중국 조선족 문단과 한국문단과의 적극적인 교류가 그 도약의 첫 걸음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문단과의 교류는 많이 이루어졌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동안의 교류와는 다른 교류의 질적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문단과의 교류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적지 않은 조선족 문인들의 입장인데 이는 한국문학의 우수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 문단의 시야가 한국문단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래서 다소 비약적인 의견을 제시한다면 연변 문인의 문인들에게  한국문인협회(특정문인단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한국문단)의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어 한국의 권위있는 문예지에 작품을 게재할 기회를 주거나, 권위있는 문학상에 응모할 자격을 주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즉 한국문단과 중국 조선족 문단과의 교류를 지금까지의 교류보다 한 단계 더 높여 질적 변화를 꾀하자는 제안이다.            
  
다음으로는 중국 조선족 문인들이 그들 작품의 독자층으로 한국의 독자를 염두에 두라는 제안이다. 이 제안은 앞의 제안과 마찬가지로 중국 조선족 문학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관계하여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앞의 윤은진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중국의 조선족 문학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문학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중국 조선족 문학의 이중성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문학의 하나라는 조선족 문학의 기본 성격과 넓은 의미의 한글문학으로서 한국문학과 전혀 무관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이 조선족 문학이 갖는 이중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은 조선족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의 조선족 문단이 한국의 독자를 그들 문학의 독자로 삼는 것은 조선족 문학의 또 다른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 문학은 해외 한글문학 중 그 역사나 작품이 질적 양적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러시아의 고려인 한글문학이 거의 빈사상태에 있고 일본과 미국의 한글문학의 수준이 중국의 그것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중국의 조선족 한글문학이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족 문단과 한국 문단은 다양한 교류를 통해 우리 한글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향후 이 두 문단의 보다 다양하고 빈번한 교류를 통해 우리 한글문단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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