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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연변이 고희(古稀)를 맞는다.
주덕해 초대 주장이 연길 3만명 군중집회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을 선언한 지 어언 70년이 돼간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니 강산이 일곱번 변한 세월이라 하겠다. 그 오랜 세월 연변은 상전벽해의 큰 변화를 거듭하면서 신주대지에 멋진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한 지역사회의 변화는 대체로 도시형태의 륜곽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고희의 연변을 두고 요즘 수부도시 연길의 ‘형태(形态)’와 ‘신태(神态)’의 력학관계를 자주 떠올려본다. ‘형태’는 자연 그대로의 경관과 인간의 사유로 기획된 건축 구조물의 복합체이고 ‘신태’는 도시가 담고 있는 인간의 정신문화적 넋 으로 리해할 수 있겠다. 연길 도시‘형태’와 문화‘신태’의 내외조화, 도시활력과 문화매력의 강유일체(刚柔一体)는 연길 나아가서 연변의 품위를 판단하는 척도로 된다고 생각한다.
빅토르 유고는 “시간은 건축사이고 인간은 건조자(建造者)이다.”라고 말한다. 연길의 도시발전력사는 이 말을 적중하게 안받침해준다. 동북아복지에 위치해있는 연변은 우월한 지정학적 지리우세에 기대여 70년의 년륜을 새기며 초라하던 수부도시를 ‘형태’와 ‘신태’가 조화를 이루는 조선족집거지구 다문화도시로의 발전과정을 소화해나가고 있다.
자치주와 거의 동갑인 필자는 자치주 창립 초창기 연길시에 하나둘 생겨난 ‘빌딩급’ 건물들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르하통하의 북쪽 터전에 들어선 자치주당위, 정부초대소와 연변빈관, 연변병원, 연길백화상점 청사와 연변로동자문화궁, 연변교육출판사, 연변사범학교, 연변1중, 연변의학원과 연변위생학교, 연변대학 본관 청사들이 수부도시 연길에 정착하여 자치주 창립 초창기를 연 제1라인의 ‘터주대감’ 빌딩들이였다.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의 많지 않은 자치주 초창기 경전급 건물들을 일별해보면 우리 조상들이 우선시하여 세운 빌딩 거의 다수가 민족교육과 관련된 것임에 가슴이 찡해온다. 조선족 중소학교 교과서와 도서 출판을 감당한 연변교육출판사 건물, 고등교육과 중등전문교육 및 중학교교육을 전담한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사범학교, 연변위생학교, 연변1중 청사들…
50년대 연길은 가난의 때를 벗지 못한 궁상이였지만 그 대신 이 같은 교육문화 전담 건물들이 수부도시의 존엄을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초창기 경전급 건물중 일부는 철거되고 일부는 성격이 바뀌였지만 그 당시 연변수부도시의 ‘형태’에는 언녕 우리 지역사회의 매력적인 문화교육풍토의 ‘신태’가 꿈틀거렸음을 직감할 수 있다. 초창기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선대들의 올곧고 집요한 교육문화리념에 머리가 숙여진다.
민족교육과 민족문화는 연변 70년을 굳건히 지켜준 버팀목이였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연변의 자존심은 교육과 문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의 넋이 빠져버렸을 때 연변을 더는 연변조선족자치주라고 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소견 이다. 때문에 연변의 지명도는 교육문화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 해서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자치주 초창기를 장식했던 경전급 교육문화빌딩들은 연변 교육문화 초창기의 찬란한 려명의 소산이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교육문화의 귀틀은 자치주 창립과 더불어 형성되면서 그 후의 줄기찬 발전을 예고한 것이다.
지난 80년대 초반 서북의 어느 한 민족자치주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곳 기관의 간부와 담소를 나누다가 화제가 민족교육으로 넘어가면서 필자가 연변은 6개 대학(통합전)과 많은 중등전문학교를 보유하고 있다고 무심히 말했더니 그 간부가 눈을 화등잔처럼 뜨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은 중등사범학교 한개가 있는 것을 그냥 자랑스럽게 여겨왔다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감탄사를 련발하는 것이였다.
70년이 지난 오늘 연변은 탈태환골의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자치주 초창기 선대들에 의해 뿌리를 내린 경전급 건물들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는 퇴색하지 않고 후대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오늘날 연변대학 초창기 본관청사를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진 통합된 대학원 현대화 교수청사 건물단지가 매력을 뽐낸다. 시 안의 곳곳에서 가장 우아한 건축물이 중소학교청사들이다. 신축된 소년궁은 말 그대로 최상의 ‘궁전’이다. 누가 봐도 교육을 숭상하는 고장의 멋진 풍경선이 아닐 수 없다.
한 도시의 특성이 도시‘형태’와 문화‘신태’에 힘입은 자연스러운 신장으로 이뤄진다고 할 때 연변이 기획하여 펼쳐내는 매 하나의 세기적 공정은 연변의 기질과 정신을 함유하고 탑재한 캐리어로 돼야 한다.
자치주 70돐을 맞으며 벌리는 수많은 대형 공사 가운데 아리랑축구공원과 연길공원 축구광장이 들어있다. 정부가 작심하고 손을 댄 세기적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축구고향’의 미칭에 걸맞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축구장이라는 ‘형태’에만 집착하지 말고 축구문화의 ‘신태’에 더 신경을 넣었으면 하고 제언하고 싶다. 뽈차기의 대중적 운동을 보편화시킴과 동시에 연변 100여년 축구력사의 우량한 DNA를 전승하기 위한 담체로 연변축구박물관 같은 공간을 아리랑축구공원과 가지런히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 운동이 아니라 연변 ‘축구고향’의 문화로 자리매김하도록 견인하는 기획물의 창출이 요청된다.
고희의 연변, 이제 수부도시 연길은 70년의 건설을 거쳐 도시‘형태’와 문화‘신태’가 두루 조화를 이루는 현대도시로의 ‘입성’을 서두르고있다. 그런데 하나의 유감이 있다. 수차 지적했지만 자치주 수부도시의 도심을 상징하는 핵(核)이 ‘결장’한 문제점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도심이 부재한 도시, 도심은 있는데 핵이 증발된 도시는 넋이 없는 도시와 다를 바 없다.
연변은 길림성 동부의 중심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도시 체통에 걸맞는 연길도심의 ‘대광장’을 기획 출범시켜야 한다. 필자가 6년 전 발표한 <도심론>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조선족과 타민족이 피와 땀으로 개척한 100여년의 비장한 력사를 하나의 조각예술품으로 전형화하여 연변사람의 넋, 중국조선족의 ‘핵’이 대대손손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광장 복판에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에 연변개척력사전시관, 조선족민속관, 조선족생활관, 민족단결전시관 같은 문화공간이 속속 안주하면서 우리 문화민족의 자존심을 살리고 연변을 만방에 알리는 문화캐리어 공간이 생겨야 한다.”
21세기에 걸맞는 연변원소의 재정립, 연변정신의 재창출, 다문화 지역사회의 개방성, 다양성, 포용성과 창조성을 간직한 연변 ‘신태’의 부각은 우리 모두의 시대적 책임으로 나서고 있다. 한 지역사회와 도시의 ‘형태’와 ‘신태’는 그 지역과 도시를 이끌어가는 시민형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연변은 한권의 경전책으로 돼야 한다. 100여년 력사가 농축된 한권의 력사전적(典籍)이여야 한다. 연변은 한폭의 대형 전경화로 돼야 한다. 조선족이 타민족과 함께 이루어낸 70년 력사의 장엄한 화폭으로 돼야 한다.
고향 70년, 그 격동의 세월 중심에는 나라의 민족정책이라는 신성불가침한 정신적 기둥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정신적 기둥에 기대여 고향변화를 진두에서 이끌어낸 주덕해를 비롯한 자치주 력대 공신들 충혼의 각고가 빛나고 있다. 이들의 업적은 한마디로 나라의 민족정책을 에누리없이 받들어 자치주를 조선족의 구심점으로, 조선족의 교육문화메카로, 국제사회가 중화민족 공동체하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전면적으로 료해할 수 있는 ‘활화석’으로 부각시킨 데 있다고 생각한다.
고희의 연변, ‘무병장수’의 어머니 고향이 강건한 굴기로 더 매력적인 래일을 열어가리라 확신한다.
연변일보 20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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