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앞두고 "중국민족" 잡지사 서정옥주필님이 전화로 한복에 관한 특별기고를 부탁했습니다.
“전 이날 이때까지 한복을 입어본적이 없는데요.” 제가 잘라 말하니 서주필님은 언젠가 잡지에서 저의 딸이 어린이 한복을 입은 사진을 본적이 있고 저의 아버님이 한복을 즐겨 입는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꼭 “숙제”를 해서 바치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사진 말이 나오니 언뜻 떠오르는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이 바로 제가 한돐을 맞으며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사진첩을 들춰보니 아하, 59년전 제가 멋진 어린이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더군요. 그 사진을 부서의 후배들에게 돌려보이니 후배들이 누구 사진인가고 물었습니다. 제가 롱조로 “50여년전 작가 지망생”이라고 했더니 모두 그 때도 이렇게 이쁜 어린이 한복이 있었는가고 놀라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금 어린이들이 입는 고운 한복에 뒤지지 않는 한복이였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어린이 한복을 “꼬까옷”이라고 했습니다. 일요일 어머님이 나한테 “꼬까옷”을 입혀가지고 나들이 나가면 내 또래 애들이 시샘이 났는지 저한테 “꼬까옷”이란 별명을 달아주었습니다. 그 별명을 듣기 싫어 저는 한복 입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들이 가기전 어머님이 저한테 한복을 억지로 입혀주면 저는 밖에 나가 옷에 흙탕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하는수없이 다른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억지다짐으로 저한테 한복을 입히던 어머니는 제가 소선대 중대장이 되면서부터 한복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저의 왼팔에 달린 붉은 줄 두 줄이 그어진 소선대 중대장 표식이 그렇게 대견스러워 보였던지 가족사진을 찍을 때면 동생들은 꼭 한복을 입히면서도 저만은 교복을 입히고 중대장 표식이 달린 왼팔을 앞으로 쑥 내밀게 했습니다. 제가 소선대 대대장이 된후로는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그처럼 대견스러워했고 자랑거리였던 대대장 표식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아버님이 반동학술권위로 투쟁받은 그 이튿날 가차없이 떼이고 말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저의 동년의 꿈은 풍비박산이 나고 15살 어린 나이에 “지식청년”으로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기를 3년반 하던 중 한복이 저의 눈앞에 다시 등장하는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여서 한복을 더군다나 남자가 한복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에 저의 할아버지가 하얀 한복차림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 날은 저보다 10살위인 삼촌이 장가가는 날인데 집 마당에서 기념촬영이 있었습니다. 꼭 한복을 입으셔야 할 할머니는 그냥 밭일을 하고 돌아오는 농촌 할머니 차림새였지만 할아버지는 평소에 입지않던 한복을 꺼내 입으셨습니다. 허연 턱수염을 길게 기룬 할아버지가 한복을 입으시니 한결 늠름해보였습니다.
훗날 아버님이 쓰신 자서전을 읽어보니 할아버지에겐 한복은 자존심의 상징이였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8살 나이에 목에 엿판을 메고 동냥길에 나섰던 할아버지는 우연하게 울산에서 일본 어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 어부로 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몇 년 험한 바다에서 생사를 걸고 일하다가 고향에 점 찍어놓은 색시를 데리려 환고향 했는데 그날 할아버지는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거기에 시골에선 보지도 못한 승용차에 앉아 고향마을에 들어섰습니다. 촌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대부자가 되였다고 부러워했고 딸 가진 부모들은 사위로 삼았으면 세상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몇년 일본, 대만을 전전하다가 손에 돈이 쥐여지니 환고향해 땅 몇 뙈기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하루는 공출을 바치라고 하는 일본 순사한테 대들었다가 피터지게 맞고 며칠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강직한 성격인 할아버지는 며칠후 훌쩍 고향을 떠나 만주땅을 밟았습니다. 할머니 얘기로는 그때로부터 할아버지는 양복을 아예 입지않고 항상 하얀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얀 옷차림이란 한복으로 말하면 서민들이 입는 그런 평상복입니다. “양복쟁이”가 “백의민족”으로 변신한것입니다. 산에 나무하러 갈때나 약초 캐러 갈때도 하얀 옷차림을 하였는데 한번은 할머니가 산에도 왜 그런 옷차림으로 가는가고 하니 과묵한 할아버지는 “이 옷을 입으면 호랑이도 피해 가.”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답니다. 무심히 던진 한마디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한복을 즐겨 입으신 아버님 사진을 일별해보니 문화대혁명전 한복 입으신 사진이 한장도 없었습니다. 영문을 물으니 아버님은 기자 취재 자주 나가고 이런 운동, 저런 운동에 말려들다나니 한복 입을 겨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한복을 입기 시작한건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아버님 명예가 회복된후부터입니다.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옥에 4년이나 갇혀 있으면서 삶의 용기를 버리지 않은 리유에 대해 아버님은 “내 마음속에 시가 있고 가족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수감된 기간 구상한 장편서사시가 바로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를 구현한 “동틀무렵”이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많은 시집이 출간되였는데 시집에 실린 아버님 사진중 가장 잘 된 사진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님의 한복에 대한 애정은 그때로부터 열을 올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한복을 마음껏 입지 못한 한을 푼다고 70을 넘긴 나이에 한국의 춘향의 고향에 가서 리도령과 춘향으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은 지금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 어쩔수없이 노래 “청춘을 돌려다오”가 떠올려집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뇌리를 강하게 치는 느낌이 하나 있습니다. 그 느낌이란 “한복에도 가족사가 깃들어 있을줄 미처 몰랐네”입니다.
저의 경우엔 한복을 입고 싶은 충동을 크게 받는적이 한번 있습니다. 저는2008년 자그마한 수술을 받다가 의외로 의료사고가 나서 하마트면 하늘나라로 갈번했습니다. 세번 수술까지 받고 나니 세상만사가 다 헛것으로 보이고 단지 한 생각만 굳혔습니다. 내 자식이 시집, 장가 갈 때까지 꼭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먹고 운동했습니다.
하루는 친구 아들 잔치에 갔다가 친구가 한복차림을 한 것을 보고 나도 아들, 딸 잔치엔 한복을 입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언젠가 선물로 받은 한복을 꺼내 입고 사진을 찍어 미국에 있는 안해에게 보냈더니 내 나이에 격이 맞지 않는 한복이라고 하면서 한국이나 고향인 연길에 가면 좋은 한복으로 한벌씩 맞추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해는 아들과 딸이 장차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 같은데 그때 양복보다 멋진 한복차림으로 미국인들 앞에 나서자고 했습니다.
미국인들 얘기가 나오니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이나 예전엔 우리 민족의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라고 했답니다. 기모노는 일본 전통의상입니다. 왜 하필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에 기모노를 붙혀야 합니까? 외국인들에게 한복의 진미를 알려주려고 한국의 한 패션 전문가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복 패션쇼를 가졌는데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아주 명언입니다. 그 분은 우리 민족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한복은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하나의 과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만들어낸 하나의 과학이라는 한복을 입고 당당하게 외국인들 앞에 나설 그날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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