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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어려웠던 동년시절
2014년 03월 24일 09시 52분  조회:2141  추천:0  작성자: 훈이

 

 산산이 깨져버린 우리 가정, 설상가상으로 내 위의 오빠였던 세살난 애기도 여름에 어른들이 보리타작을 하는데 벌벌 기어 나가 보리끄스럼을 먹고 죽었다. 하여 우리 집은 할머니와 나 단둘이만 남았다.  할머니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생전에 그렇게도 부러워하며 사달라고 하던 야쟁금과 자전거를 못 사주고 끝내 가슴에 묻었다고,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지사라고 일본헌병대에 끌려가 죽게 얻어맞고 이마에 주먹만한 혹을 달고 왔던 일, 아버지가 일본놈들이 깍으라는 머리를 않까고 “하이칼라(긴 머리)”를 했다고 얻어맞던 일… 등등 가슴 아픈 일들을 되새기면서 할머니는 밤마다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어지러운 세상 눈물겨운 사연들이 많고도 많고 또 그 사연들의 깊은 뜻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애처로운 할머니 모습은 내 동년의 슬픈 기억으로 또렷이 남았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돈 한 푼 나올 곳이 없는 할머니와 내 앞에 어려운 시련이 닥쳐왔다. 우선 두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데 누가 돈 한푼 준단 말인가. 그 시절에는 너 나 없이 어렵기란 매일반, 동정은 해도 구원을 손길을 내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별의별 궁리를 하다못해 할머니는 막걸리 장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왜정시대에 개인집에서 막걸리를 해파는 것음 금물이었다. 말하자면 경찰의 눈을 피해 도둑막걸리장사를 해야 했다. 낮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파출소의 순사가 곧장 달려왔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남들이 모두 자는 밤중에 막걸리를 해야 했다. 할머니는 한밤중에 일어나 맷돌질을 했다. 나도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불쌍해사 자다 말고 눈을 부비비며 일어나서 할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열 살도 되나마나한 어린 아이가  밤중에 일어나 맷돌질을 하자니 오죽했으랴. 채 잠이 깨지 않아 눈을 감고 맷돌을 돌리다가 깜박 졸아 맷돌 손잡이에 이마를 찍곤했다.
 한번은 순사가 들이닥쳤다. 할머니는 경찰서에 잡혀갔다. 호되게 꾸지람을 받은 할머니는 살아갈 길이 너무도 막막하여 다시는 안하겠다는 다짐도 못하고 그냥 눈물란 흘렸다. 보기가 너무도 안되었던지 순사는 때리지는 못하고 배급통장만 몰수했다.
 배급통장을 빼앗긴 할머니는 앞이 더 캄캄했다. 배급에 목숨을 걸고 사는 그 시절에 배급통장까지 빼앗겼으니 어떻게 살아가랴. 세상은 왜 이다지도 갈수록 심산일까.
 그러던 어느 날 배급통장을 가지고 가면 “갸라메루(사탕의 일종)”를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것이 못시 먹고 싶었으나 통장을 빼앗긴 우리로서는 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마음을 크게 먹고 경찰서로 찾아갔다.
 “왜 왔냐?”
 순사가 물었다.
 “통장을 주세요.”
 나는 당돌하게 대답했다.
 “뭘 하자고?”
 “가라메루가 먹고 싶어요.”
 “안돼!”
 순사가 소리를 높혔다.
 이때 어린 마음에도 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가며 두 손을 싹싹 부비며 말했다.
 “순사아저씨, 딱 한 번 갸라메루만 타먹고 가져올게요. “
 너무도 쬐고만 계집애가 손을 싹싹 부비며 사정을 하니 순사가 내 귀를 잡아올리며
 “꼭 가져와. 거짓말 하면 안돼! 알았어?”
 그래서 배급통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순사는 그 일을 잊었는지 통장을 가져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우리도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또 막걸리에 손을 댔다. 할머니는 구들장을 번지고 술을 안곳는 것처럼 해놓고 고은 술은 병에 넣어 이웃집 외양간 소여물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몰래 팔았다.
 막걸리를 고으면서 불을 때자니 나무도 없고 석탄은 더욱 없었다. 할머니는 우시장에 나가 소똥을 주어왔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땔거리였다. 할머니는 소똥을 주어다가 마당에 널어 말리웠다. 그래서 우리 집은 소똥집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그러던 중 들은 소문에 일본 관사에 가면 석탄을 주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따라 나섰다. 우리는 그 석탄을 아궁이에 넣을 엄두도 못하고 그걸 주워다가 장마당에 나가 팔면 혹시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나는 열심히 땅에 묻힌 석탄을 쇠고랑이로 파서는 빈 석유통에 담았다. 그 때 석유통 하나에 가득 담아 장마당에 내다 팔면 그 때 돈으로 12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통을 머리에 이고 오기엔 어린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안감힘을 다 써서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다 넘어지면 석탄이 몽땅 강물에 쏟아지고 빈 통만 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하루 종일 헛수고를 한 나는 강변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소문이 들려왔다. 량식창고에 곡식 주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나도 따라나섰다. 가보니 과연 듣던 소문과 같이 겉수수쌀을 실어간 뒤 널린 낟알들이 흙에 범벅이 되어 널려있었다.  나는 땅에 박힌 낟알을 열심이 파서 통에 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창고에 들어가 좋은 곡식을 퍼 담았다.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 창고 지키는 사람이 달려와 소리 질렀다.
 “뭣 하는 짓이야?”
 그 소리에 놀라 모두들 도망쳤다. 나는 다소 겁이 났지만 도둑질 한 것이 없으니 그냥 앉아있었다. 창고지기는 내 통을 들어다보더니
 “너 도둑질은 안했구나. 정직한 애구나.”
 그러곤 “날 따라와.” 하는 것이었다.
 창고지기는 창고에 들어가 좋은 곡식을 한통 퍼담아주며 어서가 먹으라고 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하니 할머니는 무등 기뻐하시며
 “잘 했다. 우린 가난해도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살림은 갈수록 막막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연길바닥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팔도에 있는 둘째 고모네 집으로 갔다. 가보니 아이가 일곱이나 되는 둘째 고모네도 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그 집 아홉 식구에 우리 둘까지 끼우니 열한 식구가 일불 한 채로 발만 가리고 새우잠을 자야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그 집 식구들과 함꼐 금전으로 올라갔다. 남이 캐고난 뒤에 버려진 흙을 담아다가 강물에 헹구면 금싸라기가 조금씩 나타나는데 그걸 재차 수은에 굴리면 아주 작은 금덩어리가 생긴다. 우리는 그걸 또 장에 나가 팔아서는 쌀을 바꿔어다가 입에 풀칠을 했다. 칠흑과도 같은 캄캄한 세상, 어디가나 우리가 살아갈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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