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는 시점에 <중국민족>(조문판) 서정옥 주필님으로부터 음력설 관련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음력설 풍속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그 부분은 민속학자들이 쓸 몫이기에 제가 무슨 글을 써야하는가를 잠간 고민했습니다. 해마다 쇠는 음력설, 저는 나름대로 설맞이를 해왔습니다. 우선
고향이야기를 떠올리고
음력설을 계기로 중국 경내에서 인구 대류동이 시작됩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중국의 전통명절인 음력설 연휴에 연인수로 약 20여억명이 귀성길에 올랐습니다.
태여나서 자란 고향, 고향은 어디까지나 파란 동심의 아름다운 추억과 성스런 부모님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하기에 고향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고향이란 말은 사전엔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또는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으로_ 뜻풀이 돼 있습니다. 자기가 태여나 자란 곳이라면 저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일본에서 태여난 아버님 경우엔 고향은 출생지인 일본 시모노세끼이고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으로 치면 할아버지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가 고향이기도 합니다.
어머님의 경우도 출생지로 치면 연길시 봉림동이 고향이고 조상들이 살던 곳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입니다.
이럴 듯 우리 가문의 탯줄은 반도의 나라에서 현해탄 너머 섬나라로, 그 섬나라에서 다시 반도를 거쳐 어마어마한 대륙에 이릅니다.
시인인 아버님의 말을 빈다면 “해_ 솟는 아침의 나라(한국)에서 보따리를 지고 떠난 나그네가 태양이 작렬하는 섬(일본)에서 달덩이 같은 아들을 얻고 숲 바람 서늘한 대륙(중국)에서 손자의 재롱을 보게 된 셈”이니_ 우리 가문으로 말하면 지금 동북 아세아의 주역으로 부상된 세 나라가 다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에겐 눈을 감으면 지척에 다가오는 것이 고향이요, 눈 뜨면 저 하늘 은하수마냥 아득한 것이 고향이라 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는 술 한잔 하고 들어올 때마다 감 몇 개를 사 오셨습니다. 겨울에는 언 감을 사 오고 여름에는 곶감을 사 왔습니다. 언젠가 제가 할아버지는 왜 감만 사 오는가고 물으니 할아버지는 먹고 먹어도 가장 싫증이 안 나는 게 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이 싫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은 감을 너무 먹고 배탈을 만나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배침까지 맞은 뒤로는 감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감만 사 왔습니다.
1989년 한국 방문차 할아버지 고향집을 찾아 뒤 뜰에 있는 세 그루 감나무를 보니 할아버지가 감만 사 온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선 감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겐 감 맛은 그대로 고향의 맛이였을것입니다. 비록 과묵한 할아버지는 고향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감으로 손자들에게 못 잊을 고향을 맛보였던것입니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한스러움만 남는다고 아버님은 "고향이 원수인 줄을 미처 몰랐네"라고 고향에 대한 애수를 읊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설이 오면 어쩔수없이 떠올리게 되는것이 고향이야기입니다.
고인을 추모하고
음력설맞이에서 빼놓을수 없는 절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인을 추모하면서 지내는 차례입니다.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에 따르면 차례는 1년에 네 번, 계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데 보통 음력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 설날 제사, 4월의 한식, 8월 한가위 추석제사, 겨울의 동지 제사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해마다 조촐한 차례상을 차리고 청명, 추석, 양력설, 음력설 이렇게 네 번 차례를 지내왔습니다. 제가 차례를 지낸다고 하니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믿지못하겠다는 눈빛이였습니다. 지금 세월에 무슨 제사? 한국도 아닌 중국에서? 믿거나 말거나 저는 부모님을 본받아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제가 마련한 차례상에는 과일, 사탕, 과자, “육,해,공군 요리”(할머님과 장모님이 즐겨드시던 닭고기는 “공군”, 할아버지가 즐겨드시던 해산물은 “해군”, 장인어른과 큰고모, 작은 삼촌이 즐겨드시던 돼지고기는 “육군”)가 각기 한접시 오르고 할아버지와 장인어른, 삼촌이 즐겨드신 흰 술, 할머니와 장모님, 큰고모에 올릴 포도주나 음료가 준비됩니다. 아주 간소한 차례상입니다. 책에서 본 차례상 규모나 배열순서를 보면 제가 마련한 차례상은 차례상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허지만 저의 어머님은 상차림보다도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차례상을 차리고 제를 지내게 된데는 리유가 있습니다. 리유라면 제를 지낼 산소나 고인의 납골을 보관한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3년제를 연길시 부르하퉁하 강변에서 지냈습니다. 광복이 나서 할아버지는 솔가해 고향으로 가려다가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그냥 환고향하지 못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일본, 대만, 중국땅을 전전하신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다시 못 간 고향에 넋이라도 그냥 가시라고 우리는 강가에서 제를 올린 뒤 할아버지 납골을 강에 띄웠습니다. 부르하통하가 흘러흘러 두만강으로 가고 그 두만강이 흘러흘러 조선의 동해로 가니 동해면 어떻고 서해면 어떠랴. 다 고국의 바다니 물결에 실려 언젠가는 고국산천 그 어느 기슭에라도 대일 테지. 그날 우리는 강물에 담배도 띄웠습니다. 고향 가시는 길에 지치면 담배 쉼이라도 하며 가시라고.
그 뒤로 고인이 된 분은 3년제를 지낸후 할아버지 뒤를 따라 환고향하라고 납골을 강에 뿌렸습니다. 청명, 추석이 오면 남들은 산소나 납골을 모신 곳에 가서 제를 지내지만 우리는 그냥 집에서 차례상 차려놓고 고인들을 추모하게 되었습니다.
제를 지낼 때 첫 잔은 모든 고인들에게 올립니다. 그 담 잔은 어머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 뒤로 저의 할아버지, 할머니, 장인어른, 장모님 순으로 이어집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기원으로 이어지기에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간단한 “대화”를 합니다. 해마다 “대화” 내용이 다릅니다. 간단한 “대화”지만 고인이 생전일때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 내용은 그냥 맘속에 묻어둡니다만 한 례만 든다면 저의 딸이 대학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 장모님과는 “장모님_ 키워주신 저의 딸이 회사원이 됐습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_ 말꼭지를 떼고는 계속 “저의 딸을 예뻐해 주십시오.”로_ “대화”를 마쳤습니다.
제를 지낸 그 날은 고인들과 함께 보내는 기분입니다. 지난해 음력설은 온가족이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고인들에게 제를 지냈습니다. 애들도 고인들에게 술을 붓고 절을 올렸습니다. 애들이 장차 저를 본받아 고인들의 제를 지내달라는 바람이 있긴 하지만 애들이 저의 뜻에 따라줄지는 미지수입니다.
덕담을 나누고
고인들과의 "대화"를 마치고는 현대인들과 덕담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덕담을 나누는 것도 음력설 세시풍속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입니다. 덕담이란 말그대로 새해 축복입니다. 지금은 전화, 연하장, 메시지로 축복을 전합니다. 이전처럼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세배하고 축복을 나눌 때에 비해 조금은 인정이 말라간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어떤 방식이던 나누는 축복은 최고의 덕담입니다. 저는 명절엔 주로 전화와 메시지로 축복을 전합니다.
“새해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새해 선물이 희망의 선물, 사랑의 선물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새롭다는것입니다. 해는 어제와같이 떠올라도 해빛은 어제의 해빛이 아니고 꽃은 한 나무에서 피여나지만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피여납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맞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미래가 좋은것은 그것이 하루하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당신에게는 하루하루가 사랑과 행복으로 채워지길 기원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것은 참 행복한 일인것 같습니다. 새해도 변함없이 함께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이처럼 주고받는 덕담엔 참 좋은 덕담들이 많습니다. 저의 덕담은 아주 간단한데 해마다 변함없이 써오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모든 이들에게 새해 인사로 저의 축복을 드립니다.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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