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http://www.zoglo.net/blog/zhengrenjia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40 ]

100    품질, 질, 질량 댓글:  조회:6333  추천:3  2011-10-21
횡설수설 20여 년 전, 필자가 한국 탁구선수 안재형(安宰亨)과 중국 탁구선수 초지민(焦志敏) 간의 혼인 중매를 설 때의 일이다. 한 번은 한국의 기자 등 20여명의 인터뷰를 받는 자리에서 초지민을 소개하게 되었다. 먼저 초지민의 가정 형편, 탁구 선수의 생애를 소개하고 다음은 그는 지금 세계 여자 탁구 선수 랭킹 1위를 몇 회 유지하고 있으며 중국 국가 급 내지 세계 급의 금메달을 20개 정도 보유하고 있다는 소개를 상세히 하였다. 나중에 초지민의 인물과 도덕성을 소개하였다. “초지민은 키가 고대 로마 여신 미인 비나스의 키와 같은 168cm이고, 제10회 아시아올림픽(1986년, 서울) 미스아시아 1인자일 정도로 인물이 출중하다. 그렇지만 인물 잘났다고 빼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으며 마음씨가 아주 착하고 품질(品質)이 좋다.”라고. “하!하!하!…호!호!호!…” 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중들은 일대 폭소를 일으켰다. 필자가 어리둥절하여 왜 웃는가라는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내 이야기하지 않고 “정교수님은 품질이 어떠합니까?”라며 저마다 필자의 몸을 만져보자며 접어들었다. 물론 농담 섞인 말과 행동임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또 “정교수는 초지민의 몸을 몇 번 만져봤나?”, “자주 만져보나?”, “정교수의 도덕성에 의문이 간다”라는 농담을 하고는 또 한 번 폭소를 터뜨렸다. 한국 한자어에 ‘품질’은 물체에만 쓴다. 물체의 성질과 바탕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이 나일론 천의 품질은 매끌매끌하다’, ‘저 이태리 피혁제품은 품질이 보들보들하다’ 식으로 말이다. 사람의 도덕성을 운운할 때 한국어로 ‘품행(品行)’ 등으로 표현한다. 중국어에도 ‘품행’이라는 말을 쓰지만 ‘품질’이라는 말을 오히려 더 많이 쓴다. ‘그 사람은 품행이 좋다’를 중국어로 ‘那個人品質好’라고 하면 아무런 어폐도 없다. ‘品質’은 중국어에서 사람과 물체에 다 쓸 수 있다. 한국어의 ‘품질’을 중국어에서는 ‘질량(質量)’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질량’은 중국어의 ‘질량’과 또 다르다. ‘중량’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물리학 개념으로서 ‘힘이 물체를 움직이려고 할 때 물체의 저항의 정도를 나타내는 양’을 일컫는다. 이 개념을 중국어에서도 ‘質量’이라고 한다. 한국어의 품질을 ‘질’이라고도 한며 이 ‘질’을 품행의 듯으로도 쓴다. 그러나 현대 중국어에서 일반적으로 ‘質’이라는 단음절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상 한국 한자어와 같은 한자인 중국어가 복잡하게 엇갈린다는 것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느 남자가 한국인에게 어느 여자의 ‘품질이 좋다’—상기의 필자처럼—고 말했다가는 큰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말한 자의 도덕성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니 말이다.
99    서울 지하철 관리자에게 진언한다 댓글:  조회:7793  추천:5  2011-10-13
서울과 북경의 지하철은 건설 연대나 운행 규모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건설 시스템과 관리 방법에 다른 점이 많으며 각자 장단점이 있다. 서울 지하철은 북경에 비해 차 안이 깨끗하고, 차체가 넓으며, 자전거를 밀고 들어갈 수 있고, 노인석이 있는 등 장점이 있다. 북경 지하철은 대부분 노인석이 없으며 가끔 있지만 젊은 놈들이 뻔뻔스럽게 앉아 있으며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므로 있나마나이다. 아래에 북경 지하철에 비해 서울 지하철의 불편한 점만을 언급해 보련다. 1. 계단(臺階). 북경 지하철의 오르내림 계단에는 미끄럼 계단이 있으나 서울에는 없다. 바퀴가 달린 가방을 끌며 오르내릴 수 없으므로 대단히 불편하다. 물론 엘리베이터가 있기는 하지만 a, 모든 계단에 다 있는 것이 아니고; b, 있는지 모르는 외국인이 많으며; c, 환승할 때의 계단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d, 안다 해도 노인들이 몰려드는 엘리베이터에 새파랗게 젊은 놈이 끼워들기 거북하다. 사실 미끄럼 계단을 만들기는 아주 쉽다. 현유 계단 중간 또는 양 옆의 30cm정도의 계단을 레미콘으로 메우면 된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서울 다른 건축물의 계단에도 미끄럼 계단이 없는데 역시 고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2. 도착역알림(報站).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에 중국어를 넣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말은 다 중국어로 하고 도착역 이름만은 한국어로 하므로 중국 승객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이를테면 '首爾大學入口(shŏuĕrdὰxuerὺkŏu)' 하면 알아듣지만 ‘서울대입구’하면 잘못 알아듣는다. 다른 말은 다 한국어로 하고 도착역만은 중국어로 하느니만 못하다. 모두 중국어로 하여야 좋다고 본다. 북경 지하철의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에 영어가 있지만 역전 이름만은 중국어로 알리되 외국인이 읽는 중국어 어투로 방송한다. 서울 체류 외국인의 절반이 중국인이라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시정은 간과할 일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3. 화장실(衛生間). 북경 지하철은 화장실이 통제구역(요금을 물고 들어간 구역) 안에 있고 서울은 통제구역 밖에 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대소변이 매리우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통제구역 밖에 나와 대소변을 보고 다시 들어가 타면 그만큼 돈을 물어야 하고 시간도 낭비된다. 가령 맥주를 꾀나 많이 마시고 인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당고개까지 가려면 적어도 세 번 정도 소변을 보아야 하는데 세 번 통제구역 밖을 들락날락하여야 하니 시간 낭비, 돈 낭비가 만만치 않다. 통제구역 밖에 나온 후에도 한참 찾아다녀야 화장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자칫하면 바지를 적실 우려가 있다. 통제구역 안에 설치된 화장실도 가끔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였다. 4. 플렛폼(站臺). 북경 지하철은 일률 플렛폼이 가운데 있고 지하철 궤도가 양쪽에 있다. 즉 서로 반대되는 방향의 지하철을 타는 승객이 한 플렛폼에서 기다렸다가 탄다. 서울은 1호선만 이렇게 돼 있고 2호선도 좀 있으며 다른 선은 아주 적다. 후에 건설된 선로일수록 적다. 이런 구조가 지하철을 건설하기는 편리할지 몰라도 승객에게는 불편할 때가 있다. 가령 지하철을 타고 졸다가 내려야 할 역을 넘겼다고 하자. 풀렛폼이 가운데 있으면 내려서 바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통제 구역을 빠져 나가 한 바퀴 삥 돌아야 되돌아갈 수 있다. 상기 4가지 중 1과 2는 이내 고칠 수 있다. 3도 점차 보완이 가능하다. 4는 비교적 어려우며 이미 건설된 선로는 할 수 없지만 앞으로 건설될 지하철에 참고하기 바란다.
98    무상급식과 大鍋飯 댓글:  조회:9891  추천:7  2011-09-21
  지금 한국은 무상급식 문제로 여론이 분분하다. 중국 무상급식을 예를 들며 이 글을 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중국은 1959~61년, 3년간 농촌전역에서 무상급식을 한 적이 있다. 생산대별로(40세대 좌우) 복지식당을 차려놓고 공짜로 밥을 주었다. 속칭 ‘大鍋飯(더불어 먹는 밥)’이다. 연말에는 먹고 나머지를 배분했다. 결과 중국 농촌이 철저히 망했다. 말로는 3년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인화 때문, 무상급식이 주요 화근이었다.   무상급식은 인류발전의 기본 룰에 어긋나는 위험한 발상이다.   1. 문명사회의 기본 룰인 등가교환의 법칙을 어긴다. 1959년 필자는 13살이고 더욱이 부친이 생산대 회계(장부 담당자)였으므로 그때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농민 1인당 1년에 창조하는 재부는 3천 위엔, 인구 1인당 1년 식비가 1천 위엔이라고 가정하자. 식구가 같이 여덟인데 A집은 인력이 여덟, B집은 인력이 하나인 두 가정을 대비해 보자. 연말에 A집은 흑자 16,000위엔, B집은 적자 5,000위엔이다. 무상급식 결과 A집은 흑자 9,778위엔, B집도 흑자 1,222위엔이다. A집에서 창조한 6,222위엔의 재부가 영문 모르게 B집으로 흘러간 셈이다. 일한 만큼 챙기고 먹은 만큼 지불하여야 하는, 말하자면 등가교환의 법칙이 여지없이 망가졌다.   2. 인간의 노동열정을 저하시킨다. 그때 마을에서는 논쟁이 치열하였다. B류의 가정은 좋아하였고, A류의 가정은 불만이었다. 만약 B류의 가정이 ‘좋은 법이 도움 주니 감개무량하다. 더 열심히 일하자’, A류의 가정이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니 보람 있다. 더 열심히 일하자’라고 생각하면 괜찮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약삭바른 존재이고 그 본질은 이기주의이다. 문제는 A류와 B류 두 가정 사람들의 노동 열정이 동시에 저하된 것이다.   A류의 가정은 ‘뼈 빠지게 일해 뭘 해, 남 입에 퍼 넣는 판인데’라며 일 욕심이 없어지고, B류의 가정은 ‘먹고 살 걱정 없구나, 아이 둘 쯤 더 낳을까?’라며 빠득빠득 일하려 하지 않는다. 밭에는 곡식 절반, 풀 절반이고 1960~62년에 1천만 인구가 아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중국 농촌은 이렇게 철저히 파산됐다. 1962년 유소기는 농촌 무상급식을 없애고 삼자일포(三自一包)의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자산계급 당권파로 몰리고 문혁으로 이어졌다.   3. 재정이 고갈된다. 무상급식의 돈이 어디서 생기나? 하늘이 내려주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농민의 피땀에서 떼 낸 것이다. 식구 여덟에 인력 여덟인 유형의 가정은 적으므로 재정이 이내 고갈되었다. 농민들은 평시에 생산대에서 돈을 꾸어 쓰고 연말 배분 때 갚고 나머지만 챙긴다. 그러나 무상급식 후 생산대에 돈이 전혀 없어졌다. 김장 때 몇 푼 안 되는 소금과 마늘을 살 돈도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모친의 모습이 생생하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大鍋飯’을 깨는 개혁이라고도 속칭한다. ‘일한 양과 챙긴 양이 명확치 않은 것’, ‘먹은 양과 지불한 대가가 명확치 않은 것’, ‘무대가로 일하거나 먹는 것’ 등을 통틀어 ‘大鍋飯’이라 일컫는다. ‘무상급식=大鍋飯’으로 보면 대충 맞다. 사회주의는 고도의 복지 사회, 무상급식의 사회였다. 중국이 하다가 ‘이건 아니다’라며 정신 차리고 돌아섰다.   사회주의도 감히 못하는 무상급식을 골수 자본주의 한국이 왜 선호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아마 이것이 우리민족의 기질인 듯하다. 우리 민족은 이상하게 절대적 평균주의를 선호한다. 중국 전역에 점심을 공짜로 주는 기업은 한국기업밖에 없다. 공짜로 주는 한국식당의 밑반찬도 엄격히 말하면 무상급식이다. 밑반찬을 안 먹거나 적게 먹는 사람의 돈이 영문 없이 많이 먹는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가는 셈이므로 중국인들은 이를 꺼린다.   한국인들이 大鍋飯을 선호하다가 언젠가는 큰 코 다칠 각오를 하기 바란다.
97    신토불이 질의 댓글:  조회:7341  추천:10  2011-09-10
한국에는 ‘신토불이(身土不異)’라는 특이한 말이 있다. 인간은 그가 나서 자란 고장의 수토에 맞으며 그 고장에서 살고, 그 고장에서 자란 농축산물을 먹어야 가장 좋다는 뜻이다. 필자는 신토불이가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1. 필자에게는 K라는 친구 한분이 있다. 고향이 흑룡강성 목단강이고 20대 초까지 고향에서 자랐는데 뚜렷한 병은 없지만 자꾸 잔병으로 앓으며 몸이 시들시들 안 좋았다. 그 후 연길, 심양에서 각각 몇 년간 살았지만 역시 매한가지이었다. 그러나 북경에 온 후부터는 몸이 아주 좋아졌다. K에게는 그가 나서 자란 고향보다 북경의 수토가 더 맞다. K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런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2. 중국의 예로 구기자(枸杞子)는 영하(寧夏), 패모(貝母)는 사천(四川), 영지(靈芝)는 귀주(貴州) 산이 가장 좋다. 당지 사람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중국 어느 지역 사람에게도 다 좋다. 아마 한국인에게도 한국산보다 좋을 것이다. 농작물종은 다 원산지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원산지의 농작물종이 가장 좋거나 적어도 대단히 좋다. 배추의 원산지는 중국 산동반도이다. 한국의 농작물종은 거의 다 예로부터 타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 농산물종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아마 세계 어느 곳에 있으리라 추측된다. 축산물은 보통 알칼리성 토질(이를테면 사막-초원)의 풀을 먹고 자란 고기가 더 좋고 맛있다. 사막-초원에서 키운 세계 많은 나라의 축산물이 한국산보다 더 좋고 맛있으리라 본다. 3. 한국의 모 재벌그룹이 지금 유전자식품을 개발하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인종은 알타이산맥 동쪽, 중국대륙, 동남 해양의 섬 등에서 모여들었는데 기원별 유전자가 다르며 같지 않은 농축산물에 대한 적응 여부가 다르다고 한다. 같은 한국산 농축산물도 어떤 한국인에게는 좋거나 아주 좋고 어떤 한국인에게는 나쁘거나 그리 좋지 않다. 후자에게 좋거나 아주 놓은 농축산물은 아마 외국산에서 찾아야 됨 즉 하다. 4. 보통 농작물은 자리를 옮겨야(즉 수토를 바꾸어야) 잘 자란다. 그러므로 몇 년에 한 번 씩 타지방의 종자를 들여온다. 같은 고장에 그냥 심으면 퇴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감자가 가장 전형적이다. 인간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예로 인구 유동이 심한 북부, 동부 사람이 키도 크고 인물도 멀쑥하며 머리도 좋다. 그렇지 않은 서남지역과 홍콩 사람들은 키도 작고, 가무잡잡하며 볼 멋없다. 홍콩은 생활 여건이 가장 좋은 부유한 도시인데도 아마 100년간 갇혀 살았으며 유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5. 중국의 인구는 한초(漢初)부터 명말(明末)까지 5~7천만에서 맴돌았고 한국은 조선시대에 350만 좌우에서 맴돌았다. 인구가 많아지면 기아로 봉기와 전쟁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17세기 전후 아메리카로부터 옥수수, 고구마, 감자가 들어와 먹을거리가 넉넉해져 청초에 억을 넘었고 18세기에는 4억을 초과하였으며 한국도 18세기 이후 800만, 천만을 훌쩍 뛰어넘었다. 만약 신토불이를 고집하며 옥수수, 고구마, 감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생명유지도 문제였을 것이다. 이래도 신토불이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중국에서 자란 필자의 입에 한국산 쇠고기가 미국산, 호주산보다 더 맛있어 보이지 않다. 한국인들의 ‘더 맛있다’는 대개 한국인의 주관적인 입맛이지 객관적인 맛이 아니다. ‘신토불이’는 한국의 농축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좋은 슬로건이었다. 이 면에서 반세기 동안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토불이’ 말 자체가 맞다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오류적인 말을 믿어도 이익을 보는 수가 있는 전형적인 예이겠다. 그러나 ‘신토불이’도 이젠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글로벌시대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이다.  
96    조선족의 한국입국과 "쇼크치료법"(3) 댓글:  조회:7929  추천:2  2011-08-17
  2차 대전 후 동베를린 인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현상이 줄곧 끊이지 않았고 이를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봤으며 심지어 동서 베를린 간에 장벽을 쌓기까지 하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쇼크는 이 모순을 단번에 해결하였다. 장벽을 그대로 놓아두고 이러저러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보다 얼마나 효과적이고 빠르게 해결했는지 모른다. 1660만 명 동독인구의 서독 행에 비하면 190만 조선족의 한국행 쇼크의 후유증은 상기 정도 이상이 아닐 것임이 뻔하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이내 없어진다. 조선족 인력시장에 만원(滿員)이 생긴 후에는 해마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자가 얼마면 한국을 빠져 나아가는 자도 그만큼이다. 절대 무제한으로 팽창하지 않는다.   개혁개방 전 지방의 중국인은 허가 없이 북경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마음대로 들어가면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터져죽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이 통제를 없애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게끔 하였다. 말하자면 쇼크 법을 썼다. 북경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터져죽었는가? 터져죽은 사람이 없다. 조선족도 북경으로 밀려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장래 북경의 조선족이 10만, 20…만으로 불어날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최근 인구통계에 따르면 북경상주 조선족이 3.7만으로 집계되었다. 그중 1만 명은 북경에 호적이 있는 직장인 인구이고 무작정 상경한 자는 2.7만 명이다. 즉 북경시에서 조선족이 먹고 살 수 있는 시장은 2.7만 명이므로 이 숫자를 초월할 수 없다. 시장경제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20년 간 한국이 적절한 해결방법을 쓰지 못 했기 때문에(필자가 보건대는 쇼크 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부정부패와 비극을 보자. 조선족이 한국에 오기 위해 쓴 돈과 오지 못 하면서도 사기당한 돈을 합치면 2조원이 훨씬 넘을 것이다. 사기 당하여 파산된 가정도 많으며 자살한 사람도 있다. 결혼, 위장결혼 때문에 파괴된 가정도 수없이 많다. 조선족 농촌은 홀아비, 노총각 천지이며 조선족의 씨앗을 말려 죽였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족 사회의 위축과 붕궤를 조장시켰다.   한국에 오려고 애썼지만 오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한국에 와서 돈을 번 조선족 대부분도 심중에 이러저러한 원한의 상처가 맺혀 있으므로 한국에 감사하기커녕 욕하기 일쑤이다. 조선족에게 돈을 벌게 해주고도 욕을 먹어야 하니 한국이 얼마나 억울한가? 비자 장사에 참여하여 부정부패를 저질러 옷 벗었거나 처벌 받은 한국 관료도 적지 않다. 이번 상해 총영사관 사건도 사실은 비자장사 때문에 빚어진 악과이다. 한국의 이미지에 얼마나 큰 손해를 끼쳤는가?   이렇게 빚어진 손해는 쇼크 법을 써서 생기는 손해의 몇 배, 몇 십 배, 심지어 몇 백 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쇼크 법으로 생기는 진통의 정도는 한, 중 두 나라의 인건비 차액, 환률 등 요소와 관계된다. 1997년 12월 IMF가 터진 한동안이 쇼크 법을 쓰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한국 정부는 이를 놓쳤다. 2008년부터 실시한 방문취업제가 조금 만성적인 쇼크 법으로 되는가 했는데 치르지 말아야 할 한국어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유감을 남겼는가 하면 작년 하반 년부터는 아예 방문취업제를 걷어치웠기 때문에 중도무의 되고 말았다. 그를 대체한 직업교육제도는 사실은 변태적인 비자 장사에 불과하다. 오히려 방문취업제보다도 못한 퇴보의 방법이다.   2008년에 방문취업제로 입국한 자들이 명년이면 5년 만기가 되며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 싫은 그들의 반발로 지금 한국 관계부문은 고민하고 있다. 무슨 방법이 없는가? 쇼크 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이번이 한국 정부가 조선족에 대한 실책으로 인하여 초래한 원한을 씻어버릴 마지막 기회이다. 지금 조선족이 중국에서는 한 달에 1,700위안, 한국에서는 8,500위안 정도 번다. 1:5이다. 1992년의 1:10에 비하면 퍽 작은 쇼크밖에 생길 것 없다. 한국의 조선족 인력 시장 규모가 도대체 얼마인가? 한국 노동부문의 전문가는 계산해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제 5~8만 명이 더 입국하면 조선족 인력시장은 포화되어 취직하기 어려워지고 봉급도 7,000위안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그런 연후에는 해마다 들어오는 조선족이 얼마이면 나아가는 자도 얼마, 형평을 이루게 된다. 그때가 되면 조선족의 입국으로 생기는 모든 부정부패가 사라지고 한국 관계부문의 골칫거리도 일소된다. 다만 이미 들어온 자들을 잘 관리하면 된다.   한국정부에서 제발 조선족을 마음대로 들어오게 하는 쇼크치료법을 한번 써보기 바란다.(끝)
95    조선족의 한국 입국과 ‘쇼크치료법’(2) 댓글:  조회:6457  추천:4  2011-08-17
조선족이 한국으로 찾아오는 근본 원인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먹고살 거리를 장만하기 좋은 고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조선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본 원인도 산업공장과 3D 업종의 일꾼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한국에서 돈을 벌 수 있고, 한국은 조선족 인력이 필요하고, 이러한 경제활동, 양자 이익이 일치한 시장성이 바로 한국에 대량의 조선족이 집거하는 근본 원인이다. 이것이 조선족 한국입국 문제의 본질적 속성(屬性), 즉 요해와 핵심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이 요해와 핵심에 입각해야 한다. 이 요해와 핵심을 떠난 요소에 현혹되어 교란을 받거나 문제의 본질파악에 빗나가지 말아야 한다.   ‘조선족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므로 우대하여야 한다.’ 조선족 중의 독립유공자는 본래 많지 않은데다가 광복 후 대부분 한반도로 돌아갔다. 또 독립유공자는 이미 사망한지 오라고, 그들의 자식들도 거의 다 죽었으며 손자도 인생을 하직할 때가 거의 됐다. 중국의 법에 유공자의 당 후손 즉 자식만 우대하고 손자는 우대하지 않는다. 만약 자식까지만 우대한다고 할 때 우대받을 자는 열 손가락을 잠간 굽혔다 폈다 하는 숫자로 끝난다.   ‘조선족은 동포이기 때문에 우대하여야 한다.’ 지구촌에서 시장성을 떠나 공공연하게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외 거주자를 전 민족적으로 우대한 사례가 있는가? 이스라엘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60~70년대에 많은 동구권의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이민 갔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6차례의 중동전쟁의 승리로 확장된 영토차지, 이에 따르는 인력부족 등 원인 때문이지 단순한 동포애라는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장성을 떠난 200만 조선족에 대한 무작정 ‘우대’와 접대는 추호의 현실성과 당위성도 없는 말이다.   필자의 뜻은 유공자 후손 우대와 동포애를 전혀 염두에 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 해결의 주요 위치에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에 얼마만한 숫자의 조선족이 들어가 벌어먹을 수 있고, 또한 한국도 얼마만한 조선족의 인력이 필요한가? 이것이 문제의 요해, 핵심이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약 1992년경부터이다. 그때 그들이 중국의 도시에 진출하면 한 달에 800위안, 한국에서 일하면 8,000위안 정도 벌 수 있었다. 800위안 대 8,000위안, 즉 1:10이 문제의 관건, 시장성이다. 이 시장성에 의해 조선족이 한국으로 밀려드는 열정과 숫자가 결정된다. 시장 법칙은 인간의 주관 욕망으로 좌우할 수 없는 무형의 손이다. 시장성이 존재하는 한 한국으로 밀려드는 조선족을 절대 막을 수 없다. 친척방문으로 못 오면 관광·산업시찰을 빙자해 들어오고, 그것이 안 되면 결혼·위장결혼, 심지어 밀항까지 마다한다. 한국의 조선족 인력시장이 50만 명의 규모라면 언젠가는 이 50만이 꼭 차기 마련이다. 가시철망을 치고, 담장을 쌓고 막아도 꼭 50만이 찬다.   만약 수위(水位)가 다른 두 저수지가 가지런히 접근해 있으며 그 사이가 물이 스며나갈 수 있는 흙벽이면 수위가 높은 저수지의 물이 수위가 낮은 저수지로 스며들어 두 저수지의 수위가 같게 된다. 흙벽이 얇거나 굴을 뚫어 연결하면 이내 같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천천히 같아진다. 조선족이 한국으로 밀려드는 현상도 이 두 저수지와 같다. 50만이라는 숫자가 차 형평을 이루는 것은 철의 법칙이다.    문제는 이 50만을 어떻게 채우는가이다. 필자의 견해는 좋은 방법은 쇼크치료법이다. 사실 한국이 1992년경에 벌써 쇼크 법을 썼어야 맞다. 문을 활짝 열고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조선족을 되도록 다 들여놓는 것이다. 그러면 몇 년 사이에 50만 명 좌우의 조선족이 한국에 몰려들었을 것이다(50만은 필자의 가설 숫자). 물론 혼란이 생기며 진통을 겪어야 한다. 어떤 혼란과 진통이 생길 것인가는 뻔하다. 적지 않은 조선족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빌빌 돌아다니다가 중국으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은 노비가 떨어져 지하철역 같은데서 누워  잔다. 심지어 극히 개별적 사람은 범죄 행위를 저질을 가능성도 있다….     (다음호에 계속)
94    조선족의 한국 입국과 ‘쇼크치료법’(1) 댓글:  조회:7184  추천:17  2011-07-31
'쇼크(shock)치료법'이라는 것이 있다. 상상하기 어려운 어떤 극단의 지경으로 몰아넣는 방법을 써 상상 외의 치료효과를 얻는 방법이겠다.   필자는 문혁 때 도시와 인접한 농촌에 내려가 일하며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논김을 매다가 유리 조각에 발바닥이 베이었다. 같이 일하던 할아버지 한 분이 많은 성냥가치 머리의 유황을 뜯어 상처에 놓고 불을 붙였다. 필자는 너무 뜨거워 한참 논두렁에서 대굴대굴 굴렀지만 이내 일어나 일할 수 있었다. 그 상처는 다시 발작하지 않았다. 만약 이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몇 번은 병원에 다니며 치료하여야 하고 적어도 열흘 정도는 논일을 할 수 없다. 잠깐 고통을 겪고 큰 이득을 챙긴 괜찮은 방법이며 이것이 바로 ‘쇼크치료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KBS ‘아침마당’ 프로에 이런 사람 한 분이 출연하였다. 암 말기 환자이며 병원으로부터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궁지에 빠진 그는 주먹만치 큰 뜸을 떴다. 온도가 40℃이상이면 암세포가 죽는다는 말을 듣고 암 부위 표면 피부에 뜸을 떴다고 한다. 너무 뜨거워 참기 어려우면 ‘젠장, 곧 들어갈 화장(火葬) 통보다는 덜 덥겠지’ 하며 참고 뜬 것이 암이 완치되는 기적적인 효과를 보았다. 역시 쇼크치료법이겠다.   인간 사회의 질환도 쇼크치료법을 쓰면 상상 외의 좋은 효과를 보는 수도 있다.   중국은 건국 후 줄곧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굶어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 1980년대 초에 아예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당시 10억 중국인민은 토지를 집체소유로 해도 굶었는데 개인에게 나누어주면 다 굶어죽지 않나 하며 큰 쇼크를 받았다. 결과 상상외로 10억 인구의 굶주림을 단번에 해결하였다. 농촌의 공산주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중공이 30년간, 북한이 65년간 온갖 방법을 다 썼어도 해결하지 못한 기근 문제를 쇼크치료법으로 3년 안에 해결한 셈이다.   필자는 중국조선족 한국입국문제도 쇼크치료법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 왔었다. 쇼크 법의 실질은 우유부단하지 말고 문제의 요해, 핵심을 단칼에 베는 방법이다. 중국조선족 한국입국의 요해와 핵심은 무엇인가?   약 20년 전에 필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州長)과 사석에서 담화한 적이 있다. 그날 주장은 우선 한국인을 한바탕 욕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투자를 할 것처럼 연변에 와서 빌빌 돌아다녔고, 우리는 공항에 마중 간다, 음식을 대접한다, 선물을 준다, 심지어 호텔비를 대준다 하며 온갖 정성을 퍼부었다. 그들이 투자합의서, 투자계약서 등을 체결한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투자한 자는 거의 없다. 반면 산동반도의 각 지역에는 한국인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어 투자하고 있다. 민족애가 부족한 한국인들에게 실망밖에 안 간다.   필자는 즉시 반대 견해를 내놓았다: 한국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만약 연변에 시장성이 있으면 오지 말라고 하여도, 철조망을 치거나 담장을 쌓고 막아도, 땅굴을 파고서라도 기어코 찾아와 투자할 것이다. 만약 시장성이 없으면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빠져나갈 것이다. 한국인이 투자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근본 원인은 연변의 시장성이지 민족애가 아니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활동은 생존투쟁, 즉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하는 경제활동이지 민족감정을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의 말을 들은 주장은 이내 말문이 박혔다.   조선족이 밀물처럼 한국으로 몰려드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족들은 ‘조국(모국)이 그리워서 간다’, ‘동족애에 못 이겨 간다’, ‘조상의 고향에 찾아 간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한국인들은 왜 그토록 많은 조선족을 받아들이는가? ‘100년 전에 떠나갔던 그리운 우리 동포니까 환영한다’,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찾아왔으니 우대해주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모두 찾아오고 받아들이는 근본 원인이 아니다. 조선족 70%이상의 본관이 북한이다. 거기는 한국보다 더 ‘조국(모국)’, ‘동족애’, ‘조상의 고향’이며 촌수가 가까운 친척도 많다. 그런데 왜 북한에 가 살고자 하는 자는 없는가? 조선족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러시아, 심지어 서유럽에도 많이 진출하고 있는데 그곳도 ‘조국(모국)’, ‘동족애’, ‘조상의 고향’ 등을 운운할 수 있는 고장인가?              (다음호에 계속)
93    한국 TV프로 단상 댓글:  조회:7294  추천:61  2011-05-16
한국 TV프로 단상                                                 정인갑“요즘은 인터넷과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읽기보다는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생각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기에 어느 학자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은 반응만 있기에 모든 가치기준이 ‘재미’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자기 생각은 사라지고 남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복사하는 것에만 익숙하게 된다.” 본문은 오기활 <책 속에 길이 있다>(<조글로․미니홈․오기활> 참조)의 상기 한 단락 말의 계발을 받고 쓴다. 한국의 TV는 오기활의 말보다 더 심각한 ‘바보상자’임을 피력하련다. 필자는 2002년 출판물 경영 노하우를 배우려고 한국에 출장 가서 도서의 출판, 발행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때 한국 사람이 필자에게 들려준 가장 인상 깊은 말은 ‘대중도서는 18~48세 여인들이 즐겨보아야 베스트셀라가 될 수 있으므로 돈을 벌려면 이런 책을 많이 출판하라’이다. 10대, 20대 남자들은 술 먹고 노는데 미쳐 책 안보고 30~50대 남자는 사업이 바쁜데다가 교제, 접대로 ‘2차’, ‘3차’ 다니느라 책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한국의 TV프로그램도 이와 유사하다. 나이 18~58세의 여인들이 즐겨보아야 인기프로가 된다. 중국의 남자들은 대부분 저녁 6시 좌우에 퇴근하여 집 식구들과 같이 식사하고 TV를 본다. 그러므로 중국 TV시청자의 남녀 비례는 약 45%:55%쯤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한국 TV시청자의 남녀 비례는 25%:75%쯤일 것이라고 추측되니 이럴 수밖에 없다. 남녀 이성간의 기호는 서로 다르다. 여자들은 오락형, 재미형, 시간소모형, 즉흥적자극형, 정서형 등을 선호하는 반면 시사형, 지식형, 학술형, 심사숙고형, 철학사고형, 사회․국제 문제형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 TV프로는 재미는 있지만 너무 단순하고 본 후에 여운이 남지 않는다. TV가 ‘바보상자’라고 하면 한국 TV는 ‘바보 재 곱 바보상자’일 것이다. 한국 TV의 남자 시청자들이 불쌍하다. TV를 통해 자기의 수준을 한 차원 올릴 수 있다고 볼 때 사실은 여자 시청자들도 불쌍한 셈이다. 필자는 한국 TV를 뉴스 외에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필자는 약 1년 전 중국 TV드라마 <잠복(潛伏)>을 보았는데 지금도 가끔 그의 일부 정절을 생각하곤 한다. 이 드라마에 ‘배후에서 남의 말을 하면 언젠가는 그 말이 꼭 본인의 귀에 간다’라는 정절이 있다. 이 말에 음미할 데가 너무 많다. 1. 배후에서 남을 헐뜯는 말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하겠구나. 2. 자기의 상사에게 신용을 얻으려면 그의 앞에서 좋은 말을 하지 말고 배후에서 하라. 그의 귀에 가면 감지덕지 할 것이다. 3. 그의 앞에서 아첨하면 좋아는 하지만 마음속에 ‘이놈 좀 비루하구나’,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아첨할 것이 아니냐?’ ‘개처럼 부려먹기는 좋지만 경계해야겠다’라는 후과가 따를 것이다…중국 드라마에 이런 여운을 남기는 것이 많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는 이렇지 못하다. 한국 대하드라마는 저자를 여러 번 바꾸기도 한다. 이런 드라마에 무슨 철학이 있겠는가? 대부분의 드라마, ‘1박2일’, ‘아침마당’, ‘인간극장’…등 프로가 전형적인 예이다. ‘죽었나 한 사람이 살아 있구나’, ‘남남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릴 때 갈라진 형제․부모였구나’,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지다’, ‘관건적 시각에 입원하다’ 등이 드라마에서 상투적으로 쓰이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잔꾀들이다. 남자들이 인간 이하의 저질 마누라나 악질 훗에미에게 호된 욕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뺨 하나 치거나, 주먹한번 휘두르지는 더더욱 못하며 부들부들 떨기만 하여야 한다. 그래야 여성 청취자들에게 먹힐 것이 아닌가? 한국 TV에서 사내대장부 같은 남자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프로 때문에 한국의 남자들이 여성화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우리민족의 전통적 기질과는 달리 음성양쇠(阴盛阳衰)로 변질되고 있다. 개탄할 일이다. 지식형도 화장방법, 야채바구니, 음식 만드는 방법 등이 너무 많다. 심지어 가요무대의 연출도 많은 여자들이 관중석에 앉아서 맞장구를 쳐주는 장면의 스케치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뉴스도 여자들이 선호하는 문제, 이를테면 연예인들의 자살, 연애, 결혼, 이혼, ․위자료 청구 등 문제를 정도 이상으로 다룬다. 그리하여 필자는 한국 TV뉴스를 볼 때면 홍콩 TV(한국 체류 중인 필자는 중국 뉴스를 볼 수 없음)뉴스와 번갈아보아야 성이 찬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 하에 이렇게 또는 저렇게 변한다. 여선생만 있는 소학교 남학생들의 남자기질이 약해진다고 한다. 대학교수도 소학교원을 수 십 년 하면 소학 수준으로 전락된다. ‘삭족적리(削足适履: 발을 깎아서 신발에 맞추다)’란 말이 생각난다. 여자 아기의 발을 천으로 싸서 크지 못하게 하면 종발이 된다. 한국 국민, 특히 남성 국민들이 TV에 의해 18~58세의 여자 스타일로 변해가고 있다면, IQ가 점점 퇴화된다면 종발로 되는 신세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 대부분 중국조선족들 중국 TV는 안보고 한국 TV만 보는데 종발의 신세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92    ‘지리산(智異山)’ 댓글:  조회:6381  추천:62  2011-05-14
‘지리산(智異山)’ 정인갑한국의 지명 ‘智異山’을 한자어 발음대로 읽으면 ‘지이산’이어야 맞는데 왜 ‘지리산’으로 읽는가? 지금까지 정확하게 해석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문제의 정답을 얻으려면 부득불 중국어와 한국어의 언어발달사에 착안하여야 한다. 우리말의 ‘가을(秋)’ ‘마을(里)’ ‘구이(가축에게 여물을 먹이는 그릇)’ 등을 함경도 방언에서 ‘가슬’ ‘마슬’ ‘구시’라고 한다. 중세 우리말에 원래 ‘을’과 ‘이’에 초성 ‘ᅀ[z]’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ᅀ’이 후세에 탈락되었는데 함경도 방언에서는 탈락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발음 ‘ㅅ[s]’로 변하여 남아 있다. 이것이 ‘가슬’ ‘마슬’ ‘구시’의 내원이다. 한국어는 이런 고증이 훈민정음이 제작된 1445년 이후에 언문으로 쓰인 문헌에서는 가능하지만 언문 이전의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중국어는 80%이상을 차지하는 형성자(形聲字)를 통하여 이런 고증을 쉽게 할 수 있다. 형성자는 글자의 반쪽은 형, 즉 뜻을 나타내고 다른 반쪽은 성, 즉 음을 나타내는 글자를 말한다. 이를테면 형성자 ‘물을 문(問)’에서 ‘門’은 이 글자의 음을 표시하고 ‘口’는 뜻을 표시한다(입으로 묻다). 이는 중국 어학자들이 많은 한자의 고대 음을 고증해내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형성자 한자 중 음을 표시하는 성에 초성‘ㄷ’또는 ‘ㅌ’가 있는데 이 ‘ㄷ’ 또는 ‘ㅌ’를 아래에 든 예와 같이 어떤 자는 읽고 어떤 자는 읽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易(yi이)/碭(tang탕), 弋(yi익)/代(dai대), 也(ye야)/地(di지⇤디), 兪(yu유)/偸tou투), 異(yi이)/戴(dai대), 翟(di적⇤뎍)/耀(yao요) 당연‘易’ ‘弋’ ‘也’ ‘兪’ ‘異’ ‘耀’등자의 초성에 원래 ‘ㄷ’ 또는 ‘ㅌ’가 있다가 후세에 탈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부류의 글자를 중국어 음운학에서는 ‘이성모자(以聲母字)’라고 부른다. 필자가 우리말의 ‘되놈’을 한자 ‘夷戎’과 연계시키는 원인도 ‘夷’가 ‘이성모자’이기 때문이다. 왜 탈락되었는가는 그 설명이 복잡하므로 본문에서 할애한다. 상기의 예 중 異(yi이)/戴(dai대)가 바로 본문에서 말하려는 왜 ‘지이산’을 ‘지리산’이라고 하는가의 예에 쓰려는 글자이다. 혀끝이 앞 입천정에 튕기는 음 ‘ㄷ’와 ‘ㅌ’는 연화(軟化)되어 쉽게 다른 음으로 변한다. 지금은 ‘ㅈ’나 ‘ㅊ로 변한다. 예를 들면 맏이⇥마디⇥마지, 미닫이⇥미다디⇥미다지, 같이⇥가티⇥가치, 뎡거댱(停車場)⇥정거장 등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ㄹ’로 변하였다. 예를 들면 도댱(道場)⇥도량, 차뎨(次第)⇥차례, 모단(牡丹)⇥모란 등이다. 또한 고대 중국어의 ‘ㄷ’받침이 몽땅 한국어의 ‘ㄹ’받침으로 됐다. 예를 들면 達(닫⇥달), 發(받⇥발), 葛(갇⇥갈), 末(맏⇥말)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지디산’이 ‘지리산’으로 발음되는 것은 규율에 부합되는 변화이다. 만약 그 어느 외국인이 왜 ‘智異山’을 ‘지이산’이라 하지 않고 ‘지리산’이라 하는가라고 물으면, “이름은 주인을 따른다는 원칙이 있다. 한국인이 ‘지리산’이라고 하니 잔말 말고 그렇게 불러라” 하면 되지만 좀 알만한 사람한데는 필자의 이 문장으로 해석해주기 바란다.
91    한국이 중국동포에게 준 혜택(요약) 댓글:  조회:6666  추천:40  2011-04-28
중국 조선족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을 찾아오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30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최초의 친척 방문으로부터 단순노동의 취업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아마 기술연수, 무역, 투자 등으로 확대되는 듯합니다. 재한 중국조선족에게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가야 하는가 라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가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떻게 소통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더욱 시급한 듯합니다. 이 20여 년 간의 코리안 드림에 중국 조선족은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어.  용역 불로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였고,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쫓겨나기도 하였으며, 임금체불도 당하였고, 심지어 사고로 로동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자도 적지 않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 하소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족 몇 사람만 모이면 한국 흉을 보고 한국 욕을 퍼붓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이런 인식과 사고방식을 개변해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우선 편협적인 인식을 극복하고 전면적으로 봐야 합니다. 꼼꼼히 양심적으로 생각하면 한국이란 나라가 우리들에게 욕만 먹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준 혜택과 도움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이를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귀납해 보았습니다. 1. 중국조선족의 위상을 올려주었습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 혁명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4마리 용중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GMP, 수출입총액 등 여러 면에서 세계 랭킹 15위 이상이며 작년에는 G20의장국까지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조선족의 어깨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모릅니다. 한족들이 우리를 깔보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2. 중국조선족을 (경제생활)윤택하게 해 주었습니다. 중국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조선족은 80%이상이 농민이며 가난합니다. 그러나 코리안드림 때문에 우리는 많이 윤택해졌습니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도회지에 집 사고 사업 자본 마련하는 돈, 대부분 한국에서 번것입니다. 외국으로부터 매년 연변에 송금돼 오는 돈이 자치주의 1년 행정수입보다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부쳐오는것입니다. 조선족 청년들이 대련, 천진, 북경, 상해, 광주 등 내지 도시에 가서 취직하여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대부분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때문입니다. 3. 재한조선족의 사회지위를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족의 중국이민은 이미 150년이나 됩니다. 우리는 중국의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3만여 명의 열사를 배출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에서 우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에서 아직 사회단체를 뭇지 못합니다. 저는 북경에서 우리민족의 사회활동을 33년 동안 조직해 왔지만 사회단체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애로가 많습니다. 그러나 재한 조선족은 많은 사회단체를 무어 활동하고 있으며 신문도 꾸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포럼도 중국동포사회연구소라는 단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만하면 한국정부가 조선족의 사회 지위를 잘 보장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4. 재한 조선족 관계정책이 끊임없이 개선되고 있습니다. 20여 년 간 한국의 정부와 사회단체는 끊임없이 재한조선족을 우대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불법을 합법화 하고 체류시간도 늘여주고, 한국에 진출할 기회도 넓혀 주고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등입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방문취업제입니다. 이상은 저가 귀납한 한국에 감사드려야 할 몇 가지입니다. 실로 우리의 모국 한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물론 우리를 푸대접하고 서운하게 한 것도 있습니다. 한국이 나라는 작고, 자원도 빈약하며 생존투쟁이 치열하고 경제적으로 취약하여 우리를 포옹하기 힘겨운 나라라는 것도 감안하며 되도록 리해하고 량해합시다. 기왕에 있었던 일을 역사로 밀어붙이고 잘한 것을 더 많이 기억하고 낙관적인 심정으로 앞날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90    북경 조선족대학생의 첫 모임(정인갑) 댓글:  조회:8586  추천:39  2011-04-26
                  북경 조선족대학생의 첫 모임                                                                                      정인갑1979년 5월 20일 일요일, 북경시 조선족대학생의 첫 모임이 있었다. 북경에서 5월 하순이면 날씨가 더운 계절이긴 하지만 그날은 각별히 화창하고 더워 반팔의 티서츠를 입어야 할 정도였다. 장소는 북경대학의 제2체육관(바로 학교 도서관에서 서남쪽으로 약 80m정도 떨어진 곳)이였다. 체육관 문지기는 피부색이 검고 눈이 좀 이상하게 생긴 50대 후반의 분이였는데 선심을 써 우리에게 빌려주었던것이다. 후에 이 체육관에서 우리는 여러 번 활동하였다. 이 모임은 필자가 소집한 것이다. 한달전부터 신경을 썼으며, 전화가 불편한 때라서 각 대학의 조선족에게 초청편지를 십여통 썼었다. 단 민족대학만은 직접 가서 구두로 알렸다. 약 50명 좌우의 대학생이 모였다. 민족대학 조선어전공 78급이 대부분 참가하였고 다른 계의 김성화, 최강, 김**, 우**등도 참가하였다. 우리의 모임에 참석하여 달라는 편지를 북경시민족사무위원회에도 하였다. 그들이 우리 회의에 참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상상밖으로 민족사무위원회 조선족간부 崔雄济(중국 摇滚乐 창시자 崔键의 부친)선생이 그의 친구 徐辅日(중악악단의 클라리넷 연주가)을 데리고 참석하였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사망될 때까지 필자와 최웅제는 근 30년간 친하게 지냈다. 북경대 조선족 녀교직원도 몇몇 참가하였는지 지금 기억이 잘 안 난다. 민족대학의 임국현, 북경대학의 리홍걸, 리응수 등도 이 모임을 위한 수고가 많았다. 학생 1인당 인민폐 1원씩 거둔 것이 이번 모임 경비의 전부였다. 그 돈으로 원추형 나무통에 담긴 맥주 두통(약 100kg정도)과 기름에 튀긴 땅콩, 기름에 튀긴 작은 물고기를 각각 몇근씩 샀고 김순금 선생님을 수반으로 하는 북경대 조선족 녀교직원 몇몇에게 부탁하여 김치를 몇 버치 장만하였다. 맥주 한 사발에 20전하는 때인지라 맥주 100kg라고 하여도 돈이 얼마 들지 않았다. 필자는 이번 모임을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개최하기 위한 여론 조성으로 소집한 것이다. 필자는 중앙민족대학에 자주 드나들며 이런 현상을 발견하였다. 다른 소수민족은 대개 자기 민족의 명절이 있으며 명절날이면 기념활동에도 참가하고 한끼 잘 얻어먹고 배를 쑥 내밀고 어깨를 쭉 벌리고 얼굴이 벌개서 우쭐거리며 걸어 다니지만 조선족은 자기의 명절이 없어 너무나 어설프다. 그리하여 1978년 하반년에 북경시 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북경시에서 조선족 활동, 좋기는 운동회를 조직해달라’,‘당신네가 안 해주면 우리 스스로 할 터이니 명단을 제공해 달라’는 요구의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족 활동 및 운동회를 조직할 필요 없다’ ‘명단을 제공해 줄 의무는 더더욱 없다’의 회답을 받았다. 생각 끝에 필자는 부득불 이번 모임을 조직하였다. 학생들은 맥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겁게 놀았다. 단 나이가 서른이 넘은 몇몇─필자, 김명철, 최강, 김** 등은 최웅제와 서보일을 붙들고 운동회 조직에 힘쓸것을 ‘강요’하였다. 그들의 입에서 ‘그 일은 쉽지 않으므로 참여하지 않겠다’따위의 말이 나오면 다짜고짜로 술을 ‘강제’로 권하곤 하였으며 끝내 ‘이 일을 위해 힘껏 노력해보련다’의 답복을 받아냈다.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위한 노력은 이로부터 시작된셈이다. 후에 최웅제는 위에서, 우리 대학생들은 아래에서 노력한 결과 1980년 9월 14일에 사상 처음인 복경시 조선족운동회가 민족대학 운동장에서 거행되였다. 이번 모임을 처음으로 하여 필자는 대학 졸업까지 북경시 조선족대학생의 모임을 약 6번정도, 북경대 내부 조선족대학생의 모임을 약 6번 정도 조직하였다. ‘북경시조선족대학생 연의회’따위의 이름으로 조직하자고 하니 다른 학생들이 ‘그러다가 정치상 문제될 까봐, 졸업분배에 영향을 받을 까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여 모두 필자 개인의 명의로 조직하였다. 유감스러운것은 조선말을 모르는 조선족대학생들이 거의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는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민족언어는 민족성의 핵심이며 민족언어가 소실되면 그 민족은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북경대학에도 조선어를 모르는 조선족학생이 약 4명가량 있었는데 모두 조선족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중 1978학번 력사계 고고학전공 윤길남(尹吉男)은 조선족 집거구인 단동에서 왔고 그의 부친은 1960년대에 있었던 료녕성조선족문공단의 단장이였다. 필자는 1963년부터 무순시 교향악단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였으므로 해당문공단의 연출을 관람하였을 뿐만아니라 윤길남의 부친을 만나 이야기도 나눈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길남만은 꼭 우리의 활동에 참여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루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부딪혔다. 필자가 “당신 오늘저녁 조선족 모임에 참가할거야 안 할거야?”라고 압박의 어조로 들이대니 그는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참가하겠다”고 대답하였다. 필자는 그의 손목을 잡고 필자의 기숙사까지 끌고 들어가 앉히고 조금 있다가 나와 같이 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필자가 화장실에 갔다 오는 사이에 그는 뺑소니치고 말았다. 이 일로 필자는 윤길남을 꾀나 아니꼽게 보았으며 또한 그로부터 조선말을 모르며 활동에 거부하는 학생을 거의 포기하고 말았다. 졸업후 그는 중앙미술학원의 연구생 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대단히 큰 인물로 되였다. 그에 대한 baidu의 소개는 아래와 같다: 尹吉男(1958——),辽宁丹东市人,朝鲜族。著名艺术史学者,当代艺术评论家,中国古代书画鉴定专家。被誉为“敏感而又冷静的艺评家”。现任中央美术学院人文学院院长,中国美术史教授。中央美术学院学术委员会常务委员,人文学科组主任。中央美术学院美术学研究所美术知识学研究中心主任,中国社会科学院研究生院考古学系特聘教授。故宫博物院古书画研究中心特聘研究员。教育部国家级教学团队(美术学)带头人,国家级特色专业(美术学)带头人。2009年获全国高等院校科学研究优秀成果奖。现为国家重大攻关项目——马克思主义理论工程、国家教材《中国美术史》的第一首席专家。 중국력사상 조선족으로서 인문학 학술분야에서 윤길남은 최고로 출세한 사람이겠다. 조선족이 자기 민족에게 너무나 집념하고 민족활동에 집착하면 그만큼 주체사회에 데뷔할 길이 좁아진다. 윤길남은 이 길을 걷지 않고 학술에 집념하고 주체사회에 적극 뒤여들어 대성공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학창시절 및 그후 조선족 활동을 외면한 것이 잘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늙은 나이가 되면 자연히 민족향수에 빠지며 자기의 민족성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약 1997년경 윤길남은 한국대사관 문화원에서 꾸린 한국어학원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며 필자의 강의를 들은적이 있다. 그날 뺑소니친 일 때문인지 얼굴을 숨기고 있다가 끝내 필자와 서로 알은체를 하였다. 윤길남도 이젠 50이 넘었으니 오라지 않아 ‘나는 조선족이다’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며 이로써 자부감을 가지기 바란다.(본 문장은 북경대 조선족 졸업생 사이트에 실린 필자의 회고록 <나의 북경대 생활.28>이다) 
89    "아차, 아뿔사, 깜빡했구나 댓글:  조회:6229  추천:37  2011-03-24
[횡설수설]  "아차, 아뿔사, 깜빡했구나"  -정인갑    모 A(某A)는 한국 체류중 어느 교수로부터 상품권을 한 장 선물 받았다. “우리반 학생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돈을 모아 나에게 사준 상품권이다. 상점에 가서 마음에 맞는 물건을 골라가져라.”“반에 학생이 몇 명이나 되는데?”“40명.” A는 그 교수와 갈라진 후 상품권을 꺼내 보니 ‘5’자 뒤에 동그라미가 따닥따닥 붙었다. 단, 십, 백, 천…한참 헤아리다가 시끄러워 지갑에 넣었다. ‘40명 학생이 모아준 것이니까, 50만원이겠구나.’ 그는 신나게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50만원 미만의 고급양복을 한벌 고르고 상품권을 내 밀었다. “미안하지만 이거 5만 원짜리입니다.” A는 상품권을 받아 다시 헤아려 보았다. 단, 심, 백, 천, 만, 5만원이었다. 그는 뒤통수를 연속 두드리며 중얼거렸다.“아차, 아뿔사, 깜빡했구나!” A는 겨우 구두 한 켤레를 사들고 나왔다.모 B(某B)는 한국의 중고플라스틱(塑料品)을 중국으로 수입하는 사업자인데 광동 (廣東)의 어느 사장과 함께 자금을 내여 장사하자 약속하고 한국으로 갔다. 구입할 물건을 마련해 놓고 광동의 사장에게 전화 걸었다. “물건이 다 준비되었으니 빨리 돈을 보내라. 총 한화 1억 원이니까 당신이 5천만 원 보내!”“5천만 원?…” 상대방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 B는 다시 전화를 걸어 꾸짖는다.“왜 전화를 끊어?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둘은 이내 말다툼으로 변했다. “당신 같은 사기꾼과 장사 안 할 거야.” “내가 왜 사기꾼이야? 함부로 남을 욕하지 마!” “1억 원이라면서? 한국의 중고플라스틱을 다 긁어 모아도 1억 원이 안 될 거 아니야! 생사람 간 빼먹을 짓 하지 말라!” “한화 1억 원이면 중국폐 54만원이잖아! 당신 27만원 내란 말이다!” “아차, 아뿔사, 깜빡했구나! 알았어. 미안하다. 양해하라. 내일 이내 27만원 부쳐주마!” 광동 사장은 연속 뒤통수를 어루만진다. 한국 드라마는 중국의 한류를 유발했고, ‘한국 화장품을 쓰면 예뻐진다’, ‘프랑스, 일본 화장품에 비해 싸고 좋다’라는 말이 전 중국 젊은 녀인들의 상식으로 되였다. 중국 모 기관의 조선족 모 C(某C)는 며칠에 한번 정도로 한국 화장품을 들고 찾아오는 녀인들에게 시달림을 받는다.“이 화장품은 어떻게 좋으며 쓰는 방법은 어떤가?” C는 한국말 설명서를 보며 하나하나 알려준다. “이 물품은 가격이 얼마인가? 남에게서 선물 받은 거다.”“가만 있자. 단, 십, 백, 천, 만, 5만원이다.”“왜 그렇게 비싼가? 한국 화장품은 싸고 좋다던데.”“한국폐 5만 원이면 중국폐 260원 정도다. 제하기 200하고 조금 얹어주면 된다.”“260원이라면 좋을 텐데 왜 5만원이라 하고 260원을 받나?”“북경에서 30년 전에 꽈배기(麻花) 하나에 20전이었는데 지금은 1원하잖아? 5배 부풀었거던. 한국도 경제가 발전하며 이렇게 부풀은거야.”“중국은 30년에 5배 부풀었는데 한국은 왜 1000배나 부풀었지?”“그건 나도 몰라! 말하자면 통화팽창(인플레이션)의 현상 때문에 빚어진 것이야.” “미국 달러나 유러화는 부풀지 않은 것 같은데. 한국은 금년에 G20 의장국까지 되었으며 듣자니 이미 선진국이 되었다던데 왜 돈은 중국의 국민당이 대륙에서 망하는 해처럼 부풀어 있나?”“나도 모른다고 하지 않아! 경제학자나 금융 전문가에게 물어봐라. 빨리 가! 귀찮아 죽겠다. 나 무척 바빠!” C는 찾아오는 녀인 몇 사람 중 한 사람 꼴로 꼭 이런 곤혹을 치러야 한다. 화장품 설명에 5분이면 되지만 가격문제 운운하다 자칫 20분 이상이 낭비된다.모 Z(某Z)는 중국의 유명한 출판사이고 모 D(某D)는 해당 출판사의 편지주임이다. 길림성 모 명문대의 Y교수는 Z에서 많은 저서를 출판했으며 D와 절친한 사이이다. 1984년 Y교수가 사망한 이듬해의 어느 날 길림성의 두 검찰관이 D를 찾아 왔다. Y가 사망한 후 전처의 자식과 후처의 자식 간에 유산 분쟁이 생겨 무엇을 확인하러 찾아왔단다.검찰관 문: “Y교수가 1950년대에 8만 원짜리 골동품을 팔았다고 당신이 말한 적이 있다는데 확실한가?” D 답: “확실하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도 있다.”문: “당신이 이자 한 말 법률적으로 책임질 만한가? 번복하지 않을 건가?”답: “당연 책임진다. 내가 왜 번복하겠는가?”문: “그러면 당신이 이 내용으로 증명재료를 하나 써주면 어떤가?”답: “써 줄게!”…. 이미 점심 때가 되여 두 검찰관은 증명재료를 써 놓고 자기네를 기다리라 약속하고 식사하러 갔다. 식사 후 그들은 얼굴이 벌개져서 왔다. 아마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술을 톡톡히 마신 모양이다. D는 이미 써 놓은 증명재료를 두 검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증명재료를 찬찬히 보고는 서류 가방의 깊숙한 곳에 잘 넣는다. “이놈들, 이젠 목덜미를 잡혔지! 은닉한 재산을 받아낼 거야!”알고 보니 전처의 자식이 후처의 자식에게서 은닉한 유산을 받아내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으며 이 둘은 전처의 자식이 보낸 검찰관이다. 1985년은 중국의 개혁개방 초창기이며 누가 1만원을 벌면 만원호(萬元戶)라고 신문에 대서특필할 정도였으니 8만원이면 많기로 천문학적 숫자였다. 두 검찰관은 큰 보배덩어리를 쥔 듯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이때 D가 말했다.“당신네 나이를 지긋이 먹었으니 그때 8만원의 가치를 알 텐 데. 지금의 8원에 해당한다. 그때 Y교수는 골동품을 판돈으로 술 두 병밖에 사지 못했는데.”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망하는 해에 통화팽창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좀 과장해 말하면 돈 한 자루를 들고 나가면 밀가루 한 자루밖에 살 수 없었다. 신중국이 창립된 후 구중국의 화폐를 한동안 그대로 썼었다. 사탕 한 알에 백 원 한 기억이 두 검찰관의 머리에도 떠올랐다. 그 후, 1957년인가 58년에 화폐 개혁을 하여 액수를 만분의 1로 축소시켰다. 말하자면 1만 원을 1 원으로 하고 100원을 1전으로 하였다. 그때 개혁한 화폐를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그만하면 중국은 인플레이션을 잘 억제한 셈이다. 이 말을 들은 두 검찰관은 이내 된 서리를 맞은 풀처럼 변했다. 뼈가 물러앉은 듯하다. 한 사람은 오리걸음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마 맥주를 배불리 먹고 참던 오줌이 마른 벼락을 맞고 찔 나온 모양이다. 다른 한 검찰은 연속 뒤통수를 치며 “아차, 아뿔사, 깜빡했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라고 외쳐댔다. 골통품 판돈을 긁어내려다가 출장비로 그 골동품 가격의 200배 이상 쓰고, 김빠진 기분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점심을 너무 사치스럽게 먹은 것도 후회된다. 중국인 모 E(某E)는 중국 인민폐 26만원정도 투자해 한국에 회사를 건립하는 건으로 은행에 가서 수속을 하고 있다. E는 서류에 50만원이라고 썼다가 퇴짜 맞았다. 5천 만 원이라는 것이다. “아차, 아뿔사! 깜빡했구나!” 이번에는 다시 아라비아숫자로 5 000 000원이라고 썼다. 또 퇴짜 맞았다. 쓴 것이 5천 만 원이 아니라 5백 만 원이라는 것이다. E는 자기가 쓴 숫자를 찬찬히 헤아려 보았다. 단,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과연 5백 만 원이다. 세 번째 만에야 E는 겨우 맞게 쓴 셈이다.E는 아니꼬운 생각이 들어 은행원과 한담을 늘여보았다.“당신네 한국 돈 동구라미 둬 개 줄이면 안 되나? 만원을 백 원이라 하잔 말이다. 쇄세한 돈인데 천만이요, 억이요 하니 갈피를 못 잡겠다.”은행원 왈: “추호도 불편할 것 없다. 환율만 기억하면 되는 거 아닌가?”“자주 깜빡한단 말이야. 이를테면 한국과 중국은 시차(時差)가 한 시간인데 한국에 온 후 시계바늘을 한 시간 고치지 않고 써 봤는데 번마다 지각하는 실수를 했다. 관건 시각에 깜빡 하거던. 돈도 마찬가지단 말이야. “십 만 원만 넘으면 단, 십, 백, 천, 만, 십만…이렇게 헤아리며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데 이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거다. 한국의 천만 인구가 평균 하루에 한 번 헤아려도, 한번 헤아리는데 6초라 쳐도 6천만초, 1년에 3 6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격이 된다. 한국인은 습관이 돼 헤아리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외국인들은 꼭 이렇게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돈을 쓰는 칸도 상대적으로 넓어야 하니 종이 낭비도 되고. “후진국일수록 화폐의 액수가 큰데, 이를테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우동 한 그릇도 몇 십만 원 한다. 그런 나라에 가면 후진국이라는 개념이 머리에 꽉 차서 실수를 안 하는데 한국에 오면 선진국이라 생각하면서 자주 실수하게 된다. 선진국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다.”“…”은행원은 잠자코 듣기만 하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88    '질', '짓' (정인갑) 댓글:  조회:6957  추천:38  2011-03-16
 '질', '짓'  정인갑 교수의 한자어산책 [7]    고대중국어에서‘疾’은 작은 탈을,‘病’은 큰 탈을 일컫는다. 중국 고대문헌에‘질이 더 중해지면 병이라 한다(疾甚曰病)’는 주석문이 있는가 하면 <說文解字>에도‘病’을 ‘질이 중해진 것(疾加)’이라 해석하였다.   한국한자어에서도‘질(疾)’은 작은 탈,‘병(病)’은 큰 탈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큰 탈‘문둥병’,‘폐병’,‘정신병’등을 절대‘문둥질’,‘폐질’,‘정신질’이라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작은 탈‘치질(痔疾)’,‘간질(癎疾)’,‘구역질(嘔逆疾)’등을 절대‘치병(痔病)’,‘간병(癎病)’,‘구역병(嘔逆病)’이라 하지 않는다. 신체장애자를 ‘병신(病身)’이라 하지 ‘질신(疾身)’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민족은 옛날 신체장애자는 그 장애가 작을지언정 큰 탈로 보았다는 의미겠다.   고대중국어에서‘疾’은‘생리, 육체상의 탈’의 뜻으로부터 ‘행위, 도덕상의 흠’으로 의미를 확장해 썼다. <맹자ㆍ양혜왕하(孟子ㆍ梁惠王下)>:‘寡人有疾, 寡人好勇’,‘寡人有疾, 寡人好貨’,‘寡人有疾, 寡人好色’중의‘疾’은 모두‘행위상, 도덕상의 흠’을 말한다. 한국한자어에서‘질’의 ‘행위, 도덕상의 흠’이라는 용법은 중국어보다 더욱 보편적이다. 이를테면‘도적질’,‘오입질’,‘쌍소리질’,‘욕질’,‘싸움질’등은 큰 흠이다. ‘이간(離間)질’,‘고자질’,‘흉질’,‘삿대질’,‘손가락질’,‘잔소리질’,‘광대질’ ‘주먹질’ 등은 작은 흠이다.     자질구레한 행위도 이에 포함된다:‘태질’,‘트림질’,‘하품질’등이다. 심지어 흠이 아닐지라도 그 행위를 높이 말하지 않을 때‘질’을 쓸 수 있다:‘새김질’,‘빨래질’,‘대패질’,‘선생질’,‘다림질’,‘낚시질’,‘칼질’,‘찜질’ 등이다.  ‘疾’은 고대중국어에서‘짇[dzit]→짓’으로 읽는다. 한국어의‘짓’도 한자‘疾’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논어ㆍ양화(論語ㆍ陽貨)>:‘古者民有三疾, 今也或是之亡也 (옛날 사람에게는 세 가지 짓[질]이 있었으나 자금은 없어진 듯하다).’이 례문의‘짓(疾)’은 한국어의‘나뿐 짓’,‘엉큼한 짓’,‘엉뚱한 짓’,‘손짓’,‘발짓’등의 용법과 유사한 듯하다. 어쨌든 우리말에서‘질’이건‘짓’이건 다 좋은 행위, 높이 말하는 행위에 쓰지 않는다. 고작해야‘노릇’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자‘疾’과 연결시키는 데는 무리가 없겠다.  고대중국어에서‘疾’과‘病’의 이런 차이점은 그리 분명치 않았으며 선진(先秦) 문헌에 이미 헛갈려 썼다.  아마 선진 초기 또는 상나라 때 ‘病’과‘疾’을 엄격히 구분해 쓰다가 선진 중기부터 헛갈린 듯하다.     흥미로운 일은 선진 중국어에서‘病’과‘疾’의 구분이 흐린데도 불구하고 한국어 한자어에서는 이런 구분이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민족이 선진 이전에 이미 한자문화와 깊숙이 관여돼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필자가 주장하는, 상나라를 세운 동이민족이 우리민족이며 우리민족이 한자를 만들어 썼다는 증거의 한 단면이 될지도 모른다. 
87    '다문화' 질의(質疑) (정인갑) 댓글:  조회:5568  추천:41  2011-03-13
'다문화' 질의(質疑) 정인갑1980년대에 있은 일이다. 그린카드(綠佧)를 취득하고 미국에 사는 한 친구가 북경에 왔기에 찾아간 적이 있다. 그가 환경미화 관련 업종에 종사한다기에 필자는 그에게 아파트 단지의 조경에 관한 화첩 한 권을 선물하였다. 꾀나 비싼 책인데도 별로 고마워하지 않으므로 좀 섭섭했었다. 알고 보니 그는 호텔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 업이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 화장실 청소도 환경을 미화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말이 적절하지 않다. 어떻게 적절하지 않는가는 한 두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돈지갑에 넣으면 될 지폐 몇 장을 마대에 넣어서 메고 다닌다는 감을 준다. 사용한 개념이 너무 크다. 최근 20년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주요하게 한국에 시집온 여인)이 110만 명을 돌파하여 한국 인구의 2.2%를 차지하며 2020년에는 5%를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런 변화된 한국 가정과 사회를 ‘다문화가정’, ‘다문화사회’라고 이름 짓고 있다. 필자는 ‘다문화’로 이름 짓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위의 ‘화장실청소 업종’을 ‘환경미화 업종’이라고 말한 것과 성격이 같은 듯하다. ‘문화’는 인류 사회의 발전과정 중에서 창조한 물질 재부와 정신 재부의 총화를 일컫는다. 이 정신 재부는 그 개념의 범위가 크건 작건 모두 ‘문화’라는 한정어를 붙여 표현할 수는 있다: 서양문화, 동방문화, 종교문화, 사회문화, 민족문화, 종친문화, 교육문화, 판소리문화, 명절문화, 음식문화, 젓가락문화, 포크문화, 의상문화, 거주문화, 혼인문화, 교제문화, 음주문화, 화장(化粧)문화, 화장실문화, 쌍소리문화…. 천태만상의 문화현상 중 크고 중요할수록 ‘문화’라는 단어만으로 대체할 수 있고 작고 중요하지 않을수록 ‘문화’라는 단어만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고작해야 ‘문화+**’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쪼그리고 대변을 보다가 앉아서 대변을 보는 변기에 부딪쳤을 때 ‘새 변기에 습관 되지 않다’고 하거나 ‘새 화장실문화에 습관 되지 않다’고 하면 했지 ‘다문화에 부딪쳤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크고 중요할수록 직접 ‘문화’만으로 표현한다. 어느 만치 커야 하는가? 보통 ‘문명’과 ‘종교’정도로 커야 한다. 미국의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충돌 이론>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두 이데올로기 대립의 냉전체제가 해체된 후 세계는 문화적 요인에 의한 결속과 대립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이 ‘문화’적 요인에 ‘문명’과 ‘종교’ 두 단어를 반복 사용하였다. 그 중심에 기독교 서구문명권, 이슬람교 문명권 및 아시아 유교문명권을 거론했다. 즉 ‘문화’, ‘문명’, ‘종교’ 이 3자를 거의 대등한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취급은 헌팅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의 상례로 되고 있다. 작년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에 대한 세계 언론의 표현법을 보자. 프랑스에서 이슬람 여인들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현상을 금지시킨 일, 미국의 모 목사가 9.11에 이슬람 코란경 한 권을 불태워버리겠다는 일을 모두 문화 충돌, 타문화에 대한 기시로 표현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집시 민족을 내쫓기로 결정한 일은 작은 문제이므로 ‘문화’ 충돌로 표현하지 않고 민족 기시, 인권침해로 표현했다. 개념상의 급수를 말할 때 ‘민족’ 위에 ‘이데올로기’이고, 그 위에 ‘종교’이며, 또 그 위에 ‘문명’이다. 그중 ‘종교’와 ‘문명’ 정도라야 한정어 없는 ‘문화’로 표현한다. 한국의 다종교는 이루어진지 오래된다. 몇 천 년 전에 이미 토착종교 사만교가 있었다. 2천 여 년 전에 유교가 들어왔고, 신라 중반에 불교, 고구려 말년에 도교가 들어왔다.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도 생겼다. 약 200년 전부터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와 이슬람교도 생겼다. 즉 한국의 다문화는 몇 천 년 전, 적어도 200년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최근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이 한국 사회의 종교나 문명에 별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만약 어느 이슬람교를 믿는 며느리가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며 단식을 하거나, 또는 그 며느리가 돼지고기 음식을 해주지 않아 시집이 곤혹을 치른다거나, 어느 기독교신자 외국인 며느리가 시집의 제상을 밀어버렸다거나…이런 현상이 사회의 큰 이슈로 되면 ‘다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문화가정’이 아닌 집에서 ‘기독교신자 며느리를 얻었다가 제사를 안 지내주면 어쩐담?’라고 걱정하는 사람은 있다. 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서울본부 및 경기, 강원, 충청 등 6개 지역 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다문화’가정에서 발생된 사건 1,467건의 종류는 이러하다. 외국인 아내에 대한 폭력 등 부당한 대우52%,경제 갈등 26.1%,생활양식 및 가치관 차이 20.5%,배우자의 부정과 악의적 유기 6.8%,가족 갈등 4.9%,성격차이 2.9%알코올 중독 2.2%,결혼 조건 속임 1.7%,도박 1.2%,성격갈등 0.6%,의처증 0.5%. 상기 11가지 불화 중 종교나 문명과 관계되는 건수는 하나도 없다. 풍속 습관상의 차이, 언어 소통상의 불편, 도덕 품행상의 문제, 생활 방식상의 마찰,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며 천대, 인권침해 등이 주된 원인이다. 한국 남편들이 알코올에 중독되고, 마누라를 구박하고 속이고, 도박에 미치고…등이 한국 고유의 ‘문명’이고, 이 ‘문명’이 시집온 외국인과 맹렬한 충돌이 생겼다면 ‘다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를 한국 고유의 ‘문명’이라고 하면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사회에 대한 모독밖에 될 것 없다. ‘다문화’라고 하던 뭐라 하던 이름 자체를 따질 필요 있는가 라며 무관심의 태도를 표시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어떤 신생사물이 생겼으면 그의 본질속성에 맞는 과학적 명칭을 지어주는 것은 십분 중요하다. 그래야 그에 견주어 정확한 대응책을 마련하는데 이롭다. "이름을 바르게 짓지 않으면 말이 바르게 서지 않고, 말이 바르게 서지 않으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名不正則言不順,言不順 事不成). 위에 예로 든 그 미국거주 친구가 만약 ‘미국에서 화장실 청소의 일을 한다’라고 말했더라면 필자는 싸고 좋은 중국산 세척제를 선물하며 ‘이런 것들 미국에 팔아 보아라. 잘 팔리면 우리 같이 세척제 장사나 해보자’라고 하였을 것이다. ‘다문화’가정의 문제점과 애로사항은 무엇인가? 장본인, ‘다문화가정’ 성원 외에는 잘 모른다. 게다가 ‘다문화가정’에 존재하는 문제점과 별 관계가 없는 너무 큰 이름까지 지어 놓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해결하러 접어들지 못할 것이다. 즉 ‘조경관련 화첩을 선물하는’ 식의 실수를 면하지 못한다. 지금 한국은 ‘다문화’의 문제점을 잘 해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할 해결책도 없는 것 같다. 어떤 이름이 적절한가는 본문의 취지가 아니지만 참고로 ‘다민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주 적절한 이름은 아니지만 ‘다문화’보다는 좀 낫다. 중국은 민족문제에서 종교적인 성분이 적지 않아 한국 지금의 상황보다 ‘다문화’라고 부를 근거가 더 충분하다. 그러나 민족차별에 착안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어 ‘다민족’이라고 하였으며 중국의 민족문제는 잘 처리되어 가고 있다. 시집온 외국인 중 중국조선족이 절반을 차지하므로 ‘다민족’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이 자체는 ‘다문화’ 모순 중 중국조선족이 중점이 아님을 시사하고, 중국조선족도 중국이주 150년이므로 동족 한국인과 성격상 차이점이 있으며 이 차이점을 해결한다는 면에서 ‘다민족’에 포함시켜도 큰 모순은 없다.
86    ‘재한 조선족이 가야할 길’을 축하하여 (정인갑) 댓글:  조회:6481  추천:67  2011-03-06
좋은 한국, 맑은 미래--포럼 '재한 조선족이 가야할 길'을 축하하여  -정인갑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안녕하십니까? 저는 저 개인의 신분으로 본 포럼의 원만한 개최에 열렬한 축하를 드립니다.중국 조선족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을 찾아오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20년이 훨씬 지나 어언 30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최초의 친척 방문으로부터 단순노동의 취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아마 기술연수, 무역, 투자 등으로 확대되는 듯합니다. 재한 중국조선족에게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가야 하는가 라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가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떻게 소통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더욱 시급한 듯합니다. ‘소통’을 주제로 한 오늘의 포럼을 적절한 시기에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하여 기꺼이 축하를 드리고자 합니다.이 20여 년 간의 코리안 드림에 중국 조선족은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용역 불로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였고,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쫓겨나기도 하였으며, 임금체불도 당하였고, 심지어 사고로 로동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자도 적지 않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 하소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족 몇 사람만 모이면 한국 흉을 보고 한국 욕을 퍼붓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이런 인식과 사고방식을 개변해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우선 편협적인 인식을 극복하고 전면적으로 봐야 합니다. 꼼꼼히 양심적으로 생각하면 한국이란 나라가 우리들에게 욕만 먹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준 혜택과 도움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이를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귀납해 보았습니다. 1. 중국조선족의 위상을 올려주었습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 혁명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4마리 용중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GMP, 수출입총액 등 여러 면에서 세계 랭킹 15위 이상이며 작년에는 G20의장국까지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조선족의 어깨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모릅니다. 한족들이 우리를 깔보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2. 중국조선족을 윤택하게 해 주었습니다. 중국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조선족은 80%이상이 농민이며 가난합니다. 그러나 코리안드림 때문에 우리는 많이 윤택해졌습니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도회지에 집 사고 사업 자본 마련하는 돈, 대부분 한국에서 번것입니다. 외국으로부터 매년 연변에 송금돼 오는 돈이 자치주의 1년 행정수입보다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부쳐오는것입니다. 조선족 청년들이 대련, 천진, 북경, 상해, 광주 등 내지 도시에 가서 취직하여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대부분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때문입니다. 3. 재한조선족의 사회지위를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족의 중국이민은 이미 150년이나 됩니다. 우리는 중국의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3만여 명의 열사를 배출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에서 우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에서 아직 사회단체를 뭇지 못합니다. 저는 북경에서 우리민족의 사회활동을 33년 동안 조직해 왔지만 사회단체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애로가 많습니다. 그러나 재한 조선족은 많은 사회단체를 무어 활동하고 있으며 신문도 꾸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포럼도 중국동포사회연구소라는 단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만하면 한국정부가 조선족의 사회 지위를 잘 보장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4. 재한 조선족 관계정책이 끊임없이 개선되고 있습니다. 20여 년 간 한국의 정부와 사회단체는 끊임없이 재한조선족을 우대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불법을 합법화 하고 체류시간도 늘여주고, 한국에 진출할 기회도 넓혀 주고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등입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방문취업제입니다. 이상은 저가 귀납한 한국에 감사드려야 할 몇 가지입니다. 실로 우리의 모국 한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물론 우리를 푸대접하고 서운하게 한 것도 있습니다. 한국이 나라는 작고, 자원도 빈약하며 생존투쟁이 치열하고 경제적으로 취약하여 우리를 포옹하기 힘겨운 나라라는 것도 감안하며 되도록 리해하고 량해합시다. 기왕에 있었던 일을 역사로 밀어붙이고 잘한 것을 더 많이 기억하고 낙관적인 심정으로 앞날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면 사상인식 상 한차례의 비약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소통’이라 생각됩니다. 소통이 왜 중요한가? 어느 정도로 중요한가? 아래에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할빈조선족중학교는 중국 조선족 학교 중 나라로부터 우대를 아주 많이 받는 학교일 듯합니다. 몇 년 전 국가 거액의 예산으로 교사를 새로 지었는데 체육관까지 달렸으며 매우 어마어마하였습니다. 교장 김영석에게 당신은 무슨 재주로 이렇듯 엄청난 국가 예산을 끌어들여 학교를 지을 수 있었나 하고 문의하니 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흑룡강성, 할빈시의 정부의 관리들과 부지런히 소통하는 것이다. 기쁜 일이 생기면 같이 만끽하고, 곤란이 생기면 그들과 의논하고 나라에 반감이 생겨도 차근차근 일깨워주고, 심지어 생일을 쇠도 불러다 같이 술 한 잔 하고, 장학금에게 장학금을 주어도 그들의 손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주게 한다. 하여 할빈조선족중학교와 흑룡강성, 할빈시 정부는 아주 친한 관계다.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나? 김영석 교장의 말을 귀납하면 두 글자—‘소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중국 이주 150년이지만 우리끼리 똘똘 뭉쳐 살며 주체민족 한족과 소통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더 많이 데뷔할 것도 못하였고 더 많이 출세할 것도 못하였으며 더 많이 얻어먹을 것도 못 얻어먹었습니다. 재한조선족사회를 돌아보니 역시 한국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저들끼리 똘똘 뭉쳐, 심지어 한국인을 헐뜯으며 살고 있습니다. 결과 자기가 한 짓은 다 잘한 것 같고 상대방이 한 일은 다 잘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는 누구의 손해입니까? 약자인 우리의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루 속히 이런 상황을 개변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 패턴을 고치고 주류사회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소통을 우리의 슬로건으로 내세웁시다. 이렇게 하여야 그 다음에 할 일, 그 다음 다음에 할 일들이 모두 순조롭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맑은 미래가 바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소통’을 주제로 하는 이번 포럼의 의의가 아주 깊다고 봅니다. 이번 포럼이 큰 성취를 거둘 것을 다시 한 번 축하하고, 또 여러분이 새로운 토끼해에 더 많은 성취가 있으시기를 기대하며 이만 끝이겠습니다.감사합니다. (2011년 2월 20일)  
85    우리에게는 왜 족보문화가 필요한가? (정인갑) 댓글:  조회:7088  추천:65  2010-10-26
 우리에게는 왜 족보문화가 필요한가? 정인갑 1970년대에 출판된 <리백과 두보(李白與杜甫)>라는 책에서 리백의 고향이 당시 쏘련 경내임을 시사한 적이 있다. 장성이북은 자고로 중국 땅이 아니었다는, 당시 ‘러시아(쏘련)사회제국주의’의 난설을 부정, 비판하는데 활용되었다. 또 최근에 출판된 책 <진시황은 몽고말을 하는 여진인이다(秦始皇是說蒙古話的女真人)>라는 책은 동퉁구스족(東通古斯族)에 속하는 여진인의 분포가 흑룡강에서 섬서까지 뻗쳐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우리조선족도 동퉁구스 민족에 속하므로 우리민족사의 연구에도 흥미진진한 화제로 될지 모른다. 그러나 상기의 견해가 추호의 하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리백이나 진시황의 선대로부터 내려온 족보에 이렇게 씌어 있다면 확정할 수 있겠지만. 중국 이족(彛族)은 6개 파워로 구성되었으며 파워마다 2,000여 년 전부터 내려온 족보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이렇듯 유구한 족보는 없을 것이다. 그 족보를 통하여 이족의 2,000년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족보는 인류사회의, 특히 한 개 민족의 역사, 정치, 문화 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재산임은 두말할 것 없다. 이것이 족보문화의 첫째 의의이겠다. 둘째, 족보는 한 개 민족의 긍지를 받쳐주는 물질적 증거물이다. 중국인명사전을 보면 서역의 72개 나라를 겸병한 당나라의 탁월한 장군 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인이다. 명나라 때 천하를 진감한 장군, 요동좌도독 이성량(李成梁)은 조선인이다. 현대중국음악의 거장 정률성과 당대 중국 록음악의 창시자 최건은 모두 우리민족이다.…이외에도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에 기여한, 이름 모를 우리민족이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점 매몰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족보를 만들어 남겨 우리민족의 위상을 보존하여야 한다. 셋째, 최근 필자는 조선 5현중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김굉필(金宏弼, 1454~1504) 두 분의 직계후손의 집을 방문하였으며, 술도 한잔씩 얻어먹고 왔다. 500여 년 전 조상이 살던 집을 지키고 살며 탁월한 조상의 후손으로서 자호감을 가지고, 또한 조상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며 굳세게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필자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정여창은 하동(河東)정씨이니 같은 하동정씨인 필자의 몇 대 위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 벌이 될 것이니 필자의 가슴도 뿌듯한 감이였다. 즉 족보는 한 개 가문의 영예이며 후손들에 고무격려해주는 무형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건 다 옛날 양반들이고 나 같은 '쌍놈'에게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나?"라며 반론을 제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국에 이민 온 조선족은 대부분은 ‘쌍놈’이며 심지어 족보가 없는 자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총칼을 메고 왜놈과 싸우지 않았더라도 독립군에게 공량미를 바쳤으니 역시 독립운동을 한 것임), 범민족적으로 중국혁명에 기여하였고 3만 명의 열사를 배출하였다. 불과 몇 십 년밖에 지나니 않았는데 지금 조선족을 "얼구이즈(二鬼子)"라고 욕하며 심지어 이런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대서특필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앞으로 언젠가는 "중국조선족은 일본놈을 도와 중국을 침략해 들어왔다가 남은 찌꺼기들"이라 몰아붙이고 이것이 정설처럼 될지도 모른다. 3만 명의 열사가족들, 아니, 200만의 우리 동포들이 그래 족보를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단 말인가? 몇 백 년이 지난 뒤에 우리 후손들이 족보를 내어 보이며 "우리 조상은 20세기 초에 중국에 와서 항일하다가 중국에 남았다"라고 하며 살면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이상의 몇 가지를 제쳐놓더라도 필자는 나의 후손이 이력서에 ‘조선족’이라 쓰지 않는 것이 그토록 싫다. 아니, 이렇게 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족보를 만들어놓고 세상을 하직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민족자존심이다. 어느 민족이나, 자기 민족을 사랑한다면 최저한 이런 민족자존심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네 번째이다. 다섯째, 서방문화는 천연(天緣)문화이고, 그러므로 자기 혈통보다 하느님을 섬기고, 중화문화는 혈연(血緣)문화이므로 자기의 가문, 민족을 중시한다. 최근 100~200년간 서학동점(西學東漸)으로 서방문화가 우세였으므로 혈연문화가 응분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다. 2003년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종묘를 인류문화재로 받아들였고, 또한 지금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는 동학서점(東學西漸)으로 혈연문화가 각광을 받게 될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많은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이 혈연문화를 가장 중시하는 우리민족과 족보를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예견한다. 중국조선족은 대부분 기존의 족보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승(家乘)을 만들면 된다. ‘乘’은 ‘역사’란 뜻이니 가사(家史)이겠다. 누구나 자기 조부까지는 알 것이니 조부부터 시작하여 족보를 쓰는 것이다. 필자는 700만 우리 동포는 가족마다 가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84    족보문화와 나의 마지막 인생 (정인갑) 댓글:  조회:6486  추천:61  2010-08-05
족보문화와 나의 마지막 인생 정인갑최근 본인은 한국 인천 송도 국제도시에 황하문화원(黃河文化院)을 설립하였다. 문화원 업무중 족보의 정리와 번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떤 친구는 이해하지 못하며 말한다.“당신 같은 능자가 족보를 하다니?” “다 찌그러져가는 족보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필자가 족보에 발을 들여놓은 데는 그 연유가 있다. 1982년의 어느날 필자는 본인이 근무하는 기관 옆에 사는 북경인 김계월(金桂月)이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필자가 조선족이라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초청하였던 것이다. 그는 필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비록 만족(滿族)으로 돼 있지만 사실은 조선족이다. 문혁 때 없어진 우리집 족보에 ‘사르호 김씨, 원래는 조선 정주인이다(薩爾湖金氏, 其先朝鮮定州人也)’라고 씌어져 있었다” 사르호는 현 요녕성 무순(撫順)시에서 동쪽으로 약 20킬로, 후금(後金, 청나라의 전신)의 수도 신빈(新賓)에서 서쪽으로 약 20킬로 떨어진 마을인데 원래 조선족이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저수지에 잠겨 없어졌다. 그의 조상이 병자호란 때 무순으로 끌려와 살며 본관을 사르호로 고친 모양이다. 그는 눈물을 머금으며 말하였다. “만약 족보가 남아 있으면 대대손손 우리 가족의 뿌리를 전하련만…” 그때 필자도 같이 서운해 하였다. 또 한번은 성이 박씨인 북경 모 대학의 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본관이 북경이며 조선족이 아니라고 우겼다. 필자가 “필연 조선족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니 물어보아라”라고 하였다. 며칠 후 그는 필자에게 말하였다. “과연 조선족이더라. 우리 가족은 북경에 산지 몇백년 되고 증조부까지 대대손손 향산(香山)의 문직이를 하였다.” “할아버지와 잘 의논하여 간단한 족보라도 하나 만들어 봐라. 한 개 가족이 자기의 뿌리도 몰라서 될소냐”라고 하니 그는 막연해 하였다. 필자도 그를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유사한 일이 필자의 가정에도 들이닥쳤다. 한번은 필자의 처가 아들의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였다. 중국어에 약한 처가 아들과 한국말을 하였고 그 때마다 아들은 이마살을 찌프리고 엄마의 허벅다리를 꼬집으며 한국말을 못하게 하였으며 저녁에 돌아와 엄마와 대판 싸웠다. “아마 내일부터는 반 학생들이 ‘너의 엄마는 주절주절 새소리(鳥語)를 하더라’라며 놀릴 것이다. 절대 조선말을 하지 말 것, 조선말을 하려면 학교에 나타나지 말 것…” 그날 밤 우리 내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저놈들이 우리가 살아 있을 때도 저러니 죽은 후에는 아예 조선족이 아니라며 심지어 이력서에 ‘한족(漢族)’이라 적을 것이 아닌가. 무슨 수를 써야겠다.” 어느 해인가 필자는 서안(西安)에 출장갔다가 베개만한 옥돌 하나를 사왔다. “여기에다 족보를 색여놓고 죽어야지. 이놈들이 이 옥돌은 아까워서 버리지는 않을 터이고, 그러면 우리 가족의 뿌리를 대대손손 알거야.” 몇 년 전 중국과학원의 이춘성(李春成) 교수가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족보를 주며 가승(家乘)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춘성의 형 이봉덕(李奉德)은 미국 LA에 살며 이춘성의 자식들도 모두 미국으로 이민간지 오래되었다. “우리 형제의 손자들은 다 한국말을 모른다. 아마 우리 가문은 손자세대 부터는 미국인 행세를 할 것 같다. 그러나 조상의 뿌리는 알아야지.” 필자는 이춘성 교수의 처사를 대견하게 보았으며 기꺼이 가승을 만들어 100부 정도 인쇄해 드렸다. 그 가승의 맺는 말에 이런 말을 적어넣었다. “우리들이 한일합방의 화에 쫓겨 조국을 떠난지 어언 100년이 되온다. 손자 세대부터는 우리말을 모르는 미국인으로 될 듯하다. 인생을 하직하기 전 이 일을 생각하면 허전한 마음과 슬픈 심정을 금하지 못할 때도 많다.…방랑 자체가 인류의 본성이며 그저 나는 지구촌의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그뿐이 아닌가라며 자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에 살든, 어느 나라의 국민이든 우리 가문의 원 뿌리는 한국이고 이 몸에 흐르는 피의 원천은 한민족이라는 것만은 후손들이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본 가승을 만들어 남기는 바이다. 후손들이 대대로 이 가승을 간직하며 물려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금년은 한일합방 100주년이다. 중국 조선족의 경우 100년이면 4세며, 5세가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가승정도는 만들어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재산이 있겠는가? 구 소련의 경우도 중국과 비슷하다. 일본과 미국의 동포는 조금 늦지만 역시 후손들에게 민족의 뿌리 의식을 심어주어야 할 관건적 시각에 이르렀다고 본다. 2001년 한국의 종묘문화가 유네스코의 인류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종친 문화는 우리민족 문화의 귀중한 자산이다. 그것을 잘 정리하면 우리민족의 문화를 보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에 대한 공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아있는 족보는 모두 한문으로 씌어져 있으며 현재 사람들이 터득하기 어렵다. 필자는 북경대 중문학과 한문학 전공을 졸업하였고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평생 고서정리를 하였으며 청화대학 중문학과 교수로도 있었다. 족보를 정리, 연구, 번역할 능력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의 지식과 능력으로 모국에 기여할 무엇이 없겠는가 고민하던 끝에 족보문화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83    “새집거지역” 조선족교육 비관론 (정인갑) 댓글:  조회:9344  추천:59  2010-04-17
“새집거지역” 조선족교육 비관론정인갑 개혁개방이래 조선족의 진출로 본래 조선족이 적거나 없던 대도시와 관내에 많은 조선족이 모였다. 본문에서 필자는 이런 지역을 조선족의 ‘새집거지역’이라 부르련다. 이를테면 북경, 천진, 산동반도의 각 도시, 상해, 광주, 심천 등이다. 필자는 ‘원집거지역’에서 무너진 조선족학교를 새집거지역에 세우면 된다고 생각하여왔으며 북경에서 조선족 소학교를 9년간(1999~2008)운영하였었다. 그러나 새집거지역에서 조선족학교를 꾸리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기때문에 그만두었다. 1. 새집거지역에 대한 국가정책의 결여 1950~60년대에 동북에 천여개의 조선족학교를 세워 운영할 수 있은 근본원인은 민족우대정책, 즉 국비로 세워주었기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의 새집거지역에는 이런 혜택이 없다. 북경에 약 7만명의 조선족이 거주하여 당국에 학교를 세워달라면 ‘북경은 조선족집거지역이 아니므로 세워줄수 없다’라는 한마디로 면박을 준다. 1950~60년대에는 조선족이 몇백명 사는 고장이여도 ‘집거지역’이므로 학교를 세워 주었는데 지금의 북경은 조선족이7만명이나 되여도 집거지역이 ‘아니’므로(눈감고 ‘아웅’, 熟视无睹) 세워줄수 없다고 한다. 즉 새집거지역 조선족의 个体는 인정하지만 群体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른 새집거지역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나라에서 세워주지 않으면 사립학교를 세울 수 있지 않은가? 북경은 生源부족으로 많은 학교가 비여있다. 거기다 조선족사립학교를 세우면 될것 같지만 집세를 준대도 안 내놓는다. 이런 빈 건물을 회사 등에게 임대줄 지언정 조선족학교로 쓰지는 못하게 한다. 아마 민족정책으로 빼앗길 우려때문인듯 하다. 돈 몇잎 버는것이 한개 민족의 생사존망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비통하도다! 민족사무위원회에 도움을 청구해도 ‘나몰라’ 한마디뿐이다. 학생이 부족한 한족학교의 곁방살이를 할수 있다(필자가 꾸렸던 학교가 바로 곁방살이 학교다). 조선족학교는 반드시 기숙제학교여야 하고 학생 1인당 1년에 12,000원가량 들며 중등수준이상의 학교면 그 외에 借读费, 择校金, 赞助款 등 명목으로 입학시 2만 원가량 내야 한다. 소학교입학생 학부모의 평균년령은 32세좌우이며 그들에게 이 경비는 큰 부담이므로 많이는 자녀를 고향에 두거나 집 근처의 한족학교에 보낸다. 즉 조선족사립학교의 학생래원은 극히 제한되여있다. 2. 조선족교육에 대한 학부모 열정의 부족 자녀를 조선족학교에 보내는 열정은 학부모의 민족의식에 달렸다. 우리민족은 이민 1~3세는 민족의식이 강하고 4세부터는 약하며 그 후는 더 약해진다. 현재 32살 가량의 학부모는 이민 4~5세이며 바야흐로 5~6세로 변해가고있다. 그들에게는 자녀를 조선족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의식이 결여돼 있다. 필자 학교의 적지 않은 학생은 학부모가 아니라 학조부모가 우겨서 보낸것이다. 학생들은 조선어를 배우기 싫어하며 어떤 학생은 조선어시간이면 아예 뺑소니친다. 그 학생을 불러 추궁하면 부모가 조선어는 안 배워도 괜찮다고 시켰다고 한다. 그중 연변대조선어계를 졸업하고 한국기업에서 근무하는 모 학부모 왈: “미안하다. 한국기업에서 일하지만 한어가 약하므로 푸대접받으며 2등공민의 신세다. 쓸모없는 조선어, 안 배워도 괜찮다.” 민족대학부속소학의 곁방살이하던 필자의 학교를 해당학교가 무너지는 바람에 후에 海淀区실험소학교의 곁방살이로 옮겼다. 그러자 학생들이 뿔뿔이 집근처의 한족학교, 고향으로 전학가여 한개 학년에 30명 좌우던 것이 5명좌우밖에 안남았다. 자녀에게 조선어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필자의 학교에 보낸것이 아니라 다른 한족학교의 기숙제 학교보나 받는 요금이 절반이상 싸기 때문이였다. 3. 조선족교원 업무수준의 低下 조선족학교는 당연 조선족교원을 써야 하는데 업무수준이 너무 낮다. 조선어로 대입시험을 치르는 혜택으로 웬만한 조선족이면 4년제 대학에 붙을수 있으므로 조선족사범학교에 붙은 학생의 수준이 아주 낮기때문이다. 필자가 운영하던 학교에 한족(고중졸)과 조선족(전문대졸) 교원을 각각 절반씩 썼다. 업무시험(수학, 어문)을 치르면 한족은 평균 90점, 조선족은 평균 60점이다. 조선족사범학교 졸업생중 머리 또르르하고 인물 반지르르하며 눈알 팽그르르 도는자는 한국기업 등으로 빠지므로 이제는60점짜리도 구할수 없다. 2005년 취직하고자 온 모 조선족사범전문대 졸업생 2명에게 소학교 5학년~ 초중3학년의 수준으로 시험을 치르니 어문 20점좌우, 수학 30점 좌우였다. 후에 한국의 방문취업제 바람으로 20~30점 수준도 구하기 어려워졌으며 폐교되여 남아도는 동북 각 학교의 교원을 대려다 쓰기도 불가능해졌다. 수준이 낮은 교원이 우수한 학생을 배양해 낼수 있을까?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유치원부터 고중까지 좋은 학교에 보내 잘 공부시켜 명문대에 보내려는 학부모가 이런 교원에게 자기의 자녀를 맡기기는 만무하다. 연변조선족이 자녀를 한족학교로 보내는 바람이 불고있다는데 새집거지역은 더 말할것도 없다. 4. 조선어교학 점점 어려워져 학생의 조선말수준이 들쭉날쭉하므로 교학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999 년 금방 학교를 세울때 학생의 약 절반은 조선말을 잘하고 절반은 잘못하며 전혀 모르는자는 한반에 한두명뿐이였다. 그러나 2008년에 와서는 전혀 모르는자, 조금 아는자, 잘 하는자가 각각 1/3이며 앞으로는 조선어를 전혀모르거나 조금 아는자가 대부분일것이다. 어느 수준으로 교학해야 하는가, 어떻게 교학해야 하는가, 여간한 골칫거리가 아니다. 조선어를 외국어처럼 배워주는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새단어를 한어로 해석해 놓아야 편리한데 이런 교과서가 없다. 5. 조선어의 실용성 점점 약해져 조선어공부를 중시하여야 한다는 주요 리유의 하나가 언어 하나를 더 알기때문에 생계개척에 우세라는, 특히 한국기업에 취업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급성장과 한국경제의 부진으로 이런 우세가 거의 없어져가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중국진출 한국기업중 재벌그룹들은 조선족을 적게 쓰고 한족을 더 많이 쓰며 주로 영세업체와 보따리장사꾼들이 조선족을 많이 썼다. 지금 중국내 약 40개 대학에 한족만 배양하는 한국어계가 있다. 한개 학교에서 평균 30명씩 졸업시켜도 1년에 1200명, 10년이면 12,000명이다. 한국대학에 약 65,000명의 중국류학생이 있으며 1년에 평균 16,25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대부분 한족이다. 10년이면 16만이다. 즉 10년안에(이미 몇년 지났씀) 조선어의 우세로 취직하고자 하는 조선족보다 한족이 퍽 더 많아지게 된다. 이들은 한국어를 알뿐만 아니라 한어수준은 조선족보다 퍽 높다. 조선족이 조선어를 안다는것이 앞으로 무슨 우세가 되겠는가? ‘조선족이라면 당연 조선어를 알아야 하고 우리문화를 우리가 지키자’라는 민족의식, 민족자존심으로 타이르는수밖에 없는데, 이런 교육이 조선족 지성인들에게는 모르겠으나 일반 대중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생존투쟁이 1위이다. 6. 새집거지역 조선족교육은 전혀 전도가 없는가? 앞에 비관론을 대서특필하였지만 새집거지역 조선족교육이 전혀 전도가 없는것은 아니다. 북경의 경우에 만약― ①나라에서 국비로 조선족 학교를 세워준다면; ②교직원 편제도 주고 호적도 해결하여 주어 우수한 조선족교직원을 유치할 수 있다면; ③사회의 찬조금을 받아 조선족학교 교원이 한족학교교원이나, 회사원과 못지 않은 수입을 챙길 수 있다면; ④북경호적과 같은 신분으로 고입, 대입시혐을 치르게 한다면; ⑤조선족 학교가 괜찮게 운영되여 북경시 중등 이상의 학교로 성장된다면… 조선족교육이 당연 가능하다. 그러나 상기의 “만약”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그중의 일부만 이루어지기도 대단히 어렵다. 다른 지역은 북경보다 좀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할것이라고 보여진다.
82    표정치의 병폐와 비애 (정인갑) 댓글:  조회:6216  추천:58  2010-02-17
표정치의 병폐와 비애                                             정인갑지금 한국은 세종시문제때문에 온 나라가 들끓는다. 2002년 대선때 나온 화제 이니 사실은 9년째 되는 문제이다. 왜 9년동안 해결을 보지 못하고 들끓어야 하는가? 갑론 을박, 각자 다 도리가 있어 듣는 사람은 갈피를 잡기 어렵다. 필자가 보건데 이 문제의 요해는 ‘票’에 있다고 본다. 유권자가 선거할때 투표하는 選票를 일컫는다. 표정치에도 병폐와 비애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싶다. 2002년 대선때 로무현은 한국의 수도를 충청도로 옮기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너무 肥大한 서울을 다이어트해야 한다는것이 그 리유의 골자이다. 당시 적지않은 사람이 천도를 반대했으며 그 리유도 충분하였다. 충청권의 유권자 대부분은 당연 천도에 대환영이었다. 필자는 천도반대 의견에 동감이지만 본 문장의 취지가 다른데 있으므로 반대리유를 할애한다. 로무현은 왜 천도를 주장했는가? 표때문이었다. 당시 리회창후보와 각축전을 벌이였는데 충천권의 표가 충천출신 리회창에게 쏠릴것이 뻔하므로 수도를 충청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내놓아 충청권의 표를 끌었다. 아니였더라면 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한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은 57만여표로 리회창을 이겼다. 충청권의 인구는 500만, 유권자 (20세 이상)가 65%라고 해도325만명, 그중 9%정도의 유권자가 리회창에서 노무현으로 넘어와도 노무현은 이긴다. 왜 9%밖에 안 넘어왔겠는가! 그후 천도는 위헌의 판결을 받았고 행정부만 충청으로 분할시킨다로 바뀌었다.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17대대선때 리명박은 이를 반대한다는 구호를 당당하게 외치지 못했다. 역시 표때문이다. 만약 많은 충청권의 유권자가 리명박을 외면하면 대통령 당선의 가능성이 적어진다. 리명박도 다시 대통령을 할 가능성이 없자, 이제는 표가 필요없게 되자 행정부이전을 무산시키는 새 방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새 방안이 아무리 훌륭해도 야당은 단호히 반대하여야 한다. 박근혜도 물론 반대하여야 한다. 한나라당 정치인이라 해도 차기대권을 노리는 자라면 너무 눈에 띄우게 새 방안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 역시 표때문이다. 마음 속으로는 새 방안이 괜찮다고 생각되도 눈 감고 ‘아웅!’해야 한다. 나라의 리익에 크게 위배되도 표때문에 주장하고, 표때문에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세종시문제 뿐만아니다. 무릇 많은 인구와 관계되는 사안은 다 표때문에 애매해지며 황당하게 존재한다. 한국의 종교계에서 자주 엄청한 비리가 생기군 하는데 어느 대권, 국회위원 도전자가 감히 정면견책을 했는가? 불교, 기독교, 천주교 신도가 각각 300~500만명이나 되니, 즉 충청권인구와 맞먹으니 그럴수 밖에 없다. 이 표는 확실이 病弊와 悲哀를 낳고있다. 중국 黑龍江省 富錦市의 광활한 땅이 원래 반진펄이어 곡식이 못 자랐다. 군부대 한개 사단을 동원하여 엄청 넓고 깊은 도랑을 우쑤리강까지 내어 수분이 쭉 가라앉고 옥토로 변하여 농민들이 저마다 들어가 밭을 일구었다. 한국인 장덕진이 그 땅에 거금을 투자하여 농장을 꾸리겠다고 하여 정부가 그 많은 농민들을 내쫓았다. 1997년 농장 발발식에 필자도 참가하여 목격한 바로는 이 일로 부금시는 대단히 흥분됐고 한국에 대한 찬송이 자자했으며 장덕진의 조각상을 부금시에 세워줄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하마트면 ‘장덕진 만세!’까지 부를번 하였다. 그후 무슨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꾸린다는 농장이 무산되었다. 11년이 지난 2008년 필자는 그곳에 가서 무산된후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인민들이 ‘한국인 거짓말쟁이다’, ‘덜 되먹은 놈들, 의리가 없다’, ‘장덕진 알고 보니 돈 없는 거지더라’라는 따위의 말로 둬 달간 욕찌걸이를 퍼붓고 끝났다. 그 땅에는 정부가 투자하여 농장을 만들었고. 개별적으로 애를 먹이는 자에게 밭 둬뙈기씩 주니 좋아하며 다시는 애먹이지 않는단다. 그 면적은 한국 경기도의 면적과 거의 맞먹으며 세종시를 만들려는 연기군은 비교도 안된다. 쫓겨난 자도 세종시를 위해 이사한자의 수십배, 수백배는 되리라. 그러나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의원, 도지사, 군수, 면장 등을 해먹으려 표를 노리는 자가 없으므로 몇달내로 끝냈다. 세종시처럼 9년이상 끈 병폐와 비애가 없다. 중국 河南省의 소재지는 원래 開封이었다. 개봉은 7개 왕조의 수도였던 유서깊은 도시이지만 또한 黃河와 惠濟河에 끼어있어 홍수의 피해도 많고 여러모로 장래성이 없으므로 성소재지를 鄭州로 옮겼다. 그때 개봉시민은 ‘우리 성이 잘 되여야 우리 개봉시도 잘될것이 아닌가’하며 기꺼이 성정부를 정주로 환송하였다고 한다. 충청권, 공주시 및 연기군의 정치인들 세종시문제를 자기의 정치리익에 리용하지 말라. 그곳 국민들도 지역리기주의와 개인주의에만 집념하지 말고 ‘나라의 큰 리익을 위하여 수도가 이리로 오지 않아도 괜찮다’ 라는 대범한 정신과 풍격, 희생정신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개봉시민을 좀 따라배워라. 대권을 쥐게끔 정치자금도 주고, 표도 몰아준 자들을 위해 식민지도 침략하고 전쟁도 발동하고 무기도 팔아먹고, 총리, 장차관도 자주 바꾸고 세종시 문제같은 것도 빚어내고…. 물론 표정치를 일괄적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의 의회민주주의 정치에서 국민의 찬성을 나타내는 표, 아주 이상적인 수단의 하나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량면성이 있듯이 이 표정치도 병폐가 있다. 문제는 한국의 정치인이나 국민들이 세종시문제의 본질이 표정치의 병폐에서 유래된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빠른 시일내의 해결을 보기 위해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81    最新北京民謠 댓글:  조회:6392  추천:56  2009-04-22
最新北京民谣 (郑仁甲集锦)01现代企业职位新解总是在裁人,简称总裁; 老是板着脸,简称老板; 总想监视人,简称总监; 经常没道理,简称经理; 让领导秘密舒服,简称秘书。 02四清四不清开啥会不清楚,开会坐哪清楚;谁送礼不清楚,谁没送礼清楚;谁干得好不清楚,该提拔谁清楚;和谁睡不清楚,睡觉干什么清楚。 03当代八乱大棚把季节搞乱了, 关系把程序搞乱了,级别把能力搞乱了, 法官把法律搞乱了,公安把治安搞乱了, 银子把官场搞乱了,事故把交通搞乱了, 小姐把辈份搞乱了。 04五大最最引人注目的哥哥──伟哥;最年轻的奶奶──二奶;最难设防的偷窃──偷情;最热闹的走廊──发廊  ;最畅销的书──女秘书。 05办公室守则苦干实干,做给天看; 东混西混,一帆风顺;任劳任怨,永难如愿; 会捧会献,杰出贡献;尽职尽责,必遭指责; 推托栽赃,邀功领赏! 06绝妙对联 中央机关出上联: 上级压下级,一级压一级,级级加码,马到成功地方政府对下联: 下层蒙上层,一层蒙一层,层层掺水,水到渠成横批: 和谐社会 07官场日志清晨起床,打拳; 上午开会,打盹;中午吃饭,打嗝; 下午上班,打哈;傍晚加班,打牌; 深夜娱乐,打炮;凌晨回家,打架。  08百姓语录狠抓就是开会, 管理就是收费,重视就是标语, 落实就是动嘴,验收就是宴会, 检查就是喝醉,研究就是扯皮, 政绩就是神吹,汇报就是掺水。 09官场之最最难找的地方──有关部门;最难捉摸的官话──研究研究;最神秘的机构──组织上;最大的官──一把手;最难管的东西──一张嘴;最谦虚的时候──在上级面前;最冠冕堂皇的语言──工作需要;最易接受的行贿──您讲得真好;最关心的信息──自己这次能否升迁;最傻的高兴──你的问题组织上也考虑了;最无奈的选择──因为年龄。 10组织对他说在他遇到难事的时候, 组织对他说:我们无能为力!  在他遭遇用人不公的时候, 组织对他说:你要正确对待!  在他合法权益受侵的时候, 组织对他说:你要顾全大局!  在他受到诬陷的时候, 组织对他说:你要相信组织! 11关    心 组织部长:谁关心我  我就关心谁;纪委书记:谁不关心我  我就关心谁;宣传部长:谁关心我,  我就关心他的正面; 谁不关心我,  我就关心他的反面;市委书记:谁关心我  我就让组织部长关心他; 谁不关心我  我就让纪委书记关心他。 12它在哪里? 忙碌的公仆在包厢里, 重要的工作在宴会里, 干部的任免在交易里, 工程的发包在暗箱里,该抓的工作在口号里, 须办的急事在会议里,妥善的计划在抽屉里, 应煞的歪风在通知里,扶贫的干部在奥迪里, 宝贵的人才在悼词里,优质的商品在广告里, 辉煌的数字在总结里。 13公务员素描满腔热血投身社会, 摸爬滚打终日疲惫,低三下四谋取地位, 常年奔波天天喝醉,收入可怜啥都嫌贵, 交往叩头处处破费,有用本事已经作废, 不学无术擅长开会,口是心非阳奉阴违, 溜须拍马寻找机会,青春年华如此狼狈, 苟且偷生窝囊一辈。 14做人的难处有钱吧,说你准变坏; 没钱吧,说你真失败。有成就吧,说你会投机; 没成就吧,说你没出息。有情人吧,说你真坏; 没有情人吧,说你变态。 15中年的烦恼:职务不高,工资不高,血压血脂血糖高;政治不突出,业务不突出,腰椎盘突出;大会不发言,小会不发言,前列腺发炎;炒菜糊,烧饭糊,麻将不胡。 16麻烦透了 批评上级,官位难保; 批评同级,关系难搞;批评下级,选票减少; 批评自己,自寻烦恼;批评老婆,她就乱跑; 批评老公,他就乱搞; 唉,麻烦透了! 17领导与百姓 领导用过的叫文物,百姓用过的叫废物;领导强词夺理叫坚持真理,百姓据理力争叫无理取闹;领导握百姓的手叫关怀,百姓握领导的手叫巴结;领导做蠢事叫轶事,百姓做错事叫傻子;领导的情人叫小蜜,百姓的情人叫破鞋。 18CCTV新闻联播的惊人发现开会没有不隆重的, 闭幕没有不胜利的, 讲话没有不重要的, 决议没有不通过的,鼓掌没有不热烈的, 人心没有不鼓舞的, 领导没有不重视的, 进展没有不顺利的,问题没有不解决的, 完成没有不超额的, 成就没有不巨大的, 竣工没有不提前的,接见没有不亲切的, 中日没有不友好的, 中美没有不合作的, 交涉没有不严正的,会谈没有不圆满的。 19男女有别定律男人爱上女人会做诗,女人爱上男人会做梦;女人对男人朝思暮想,男人对女人朝秦暮楚;女人看家本领是撒娇,男人拿手好戏是撒谎。女人的幸福在于:他真的爱我,女人吻男人算是一种幸福,男人吻女人算是一种口福;当女人走投无路时她会和一个男人结婚,当男人走投无路时一个女人会和他离婚;做情人的时候女人会让男人心疼,做妻子的时候女人会让男人头疼。 20穷人富人论欠个人的钱是穷人,欠国家的钱是富人;喝酒看度数的是穷人,喝酒看牌子的是富人;写书的是穷人,盗版的是富人;吃家禽的是穷人,吃野兽的是富人;耕种土地的是穷人,买卖土地的是富人;女人给别人睡的是穷人,睡别人女人的是富人。 21贫穷与富裕的新解贫穷时养猪,富裕后养狗;贫穷时种稻,富裕后种草;贫穷时想娶老婆,富裕后想找情人;贫穷时老婆兼秘书,富裕后秘书兼老婆。 22错别字妙用植树造零;白收起家;勤捞致富;择油录取;得财兼币;检查宴收;大力支吃;为民储害;提钱释放;攻官小姐。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