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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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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훌룬부이르초원이 들려주는 이야기 댓글:  조회:72  추천:0  2024-11-14
훌룬부이르초원이 들려주는 이야기 □ 신기덕       4박 5일 일정으로 차를 타고 시간에 쫓기며 부랴부랴 훌룬부이르초원을 돌아본 것이니 수박 겉핥기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망무제한 초원을 돌아보면서 나름 대로 받은 인상이 깊고 느낀 바가 많다. 그래서인지 초원의 모습이 자주 눈앞에 떠오르면서 초원이 조용히 나에게 들려준 그 이야기를 글로 적어야 되겠다는 강한 촉동을 받아 이렇게 필을 든다. 훌룬부이르초원은 내몽골자치구의 동북쪽, 대흥안령의 서쪽에 위치해있다. 말하자면 몽골고원의 최동단이다. 이 초원은 내몽골의 초원 가운데서 면적이 가장 큰 초원으로서 일대천교(一代天骄) 칭기스칸—테무진이 힘을 기르고 천하를 호령하던 력사가 시작된 곳이다. 그의 어머니와 안해도 훌룬부이르초원의 사람이였다. 중국의 력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의 동북지역은 한시기 금조의 지역이였고 칭기스칸이 정복한 다음에는 원조의 땅이였다. 테무진은 몽골의 부족들을 통일하여 원조를 건립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아시아와 구라파의 땅을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며 그 강토를 넓혔다. 옛날 쏜살같이 말을 타고 내달리면서 서로 칼을 휘두르며 싸우던 그런 살벌한 시대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한때 전장이던 이 초원에 지금은 풀들이 잘 자라나 소와 양들이 따뜻한 해볕을 받으며 시름없이 풀을 뜯고 있다. 이 초원엔 고요한 평화가 깃들어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로 행복한 일이다. 가없이 펼쳐진 살진 초원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냥 자유와 평화의 안온함과 행복을 절감할 수 있었다. 관광뻐스를 타고 달리면서 가없이 넓고 푸른 대초원을 바라보노라니 문뜩 〈초원에 지지 않는 태양이 솟네〉라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며 그 경쾌한 곡조가 마치 귀전에 들려오는 듯했다. “푸르른 하늘엔 흰구름 흐르고 / 흰구름 아래엔 말들이 달리네 / 채찍소리 사방에 울려퍼지고 / 온갖 새들이 일시에 날아가네 / 누가 나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 내 대답하리 이 고장은 우리들의 초원이라고 / 초원에 지지 않는 태양이 솟네 / 지지 않는 태양이 솟네” 우리는 훌룬부이르초원을 유람하면서 〈훌룬부이르대초원〉이란 노래를 들었다. 몽골족노래는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까다메린(嘎达梅林)〉이란 몽골족노래를 특히 즐기는데 그 곡조는 그야말로 인상적이다. 어딘가 경쾌한 느낌이 강하면서도 깊은 정서가 흐르고 특히 길게 운을 뺄 때 마지막의 그 미묘한 떨림은 말 그대로 사람을 ‘전률’시킨다.   몽골족의 민족악기—마두금 우리 조선족에게 가야금이 있듯이 몽골족에게는 마두금이 있다. 마두금은 몽골족의 대표적인 민족찰현악기의 하나이다. 보통 울림통은 4각형인데 줄감개 웃부분은 말대가리모양으로 되여있다. 그래서 ‘마두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두금의 음색은 사람 목소리에 가까운데 부드럽고 둥글며 특히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곡조를 잘 표현한다. 마두금은 악기일 뿐만 아니라 몽골족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의 모양, 재료, 음색 및 연주기교는 몽골족의 생활형태와 민족정신을 반영하고 전형적인 민족예술의 특성을 나타낸다. 마두금은 당송시기로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수백년의 진화를 거쳐 원조시기에 민간에 널리 퍼졌다. 2006년에 몽골족마두금음악은 제1기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종목에 등록되였다.   몽골족문화의 상징—오포 이번에 려행할 때 차창 너머로 오포(敖包)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오포는 그 모양이 동일하지 않고 제각각이다. 몽골어로 ‘오포’라는 말은 사실 ‘무지’나 ‘무더기’를 가리키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돌무지’, ‘흙무지’, ‘나무무지’ 등이다. 오포는 처음에 료원한 초원의 길이나 경계를 나타낼 때 사용하였는데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내용과 역할이 부연되여 지금은 여러가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로 리용되고 있으며 적지 않은 곳에서는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백년가약을 맺는 장소로도 리용된다. 〈오포에서 만나요(敖包相会)〉라는 노래의 가사를 살펴보면 오포의 작용을 알 수 있다. 노래가 정서적이고 부르기가 어렵지 않아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십팔번’이다. 이번에 본 오포에는 많은 사람들의 념원을 담은 하다(哈达)가 가득 매여져 참으로 가관이였다.   소수민족지구에 다녀올 때는 그 민족의 특유한 례절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려행에서 나는 관광팀 팀원들을 대표하여 몽골족 주민이 부어주는 인사술을 받아마시게 되였는데 다행히 이전에 울란호트시에 다녀올 때 몽골족 례절을 배워두었기에 그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몽골족 녀인이 술을 부어주면 두 손으로 정중히 받고 술잔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의 무명지에 술잔의 술을 조금 묻혀서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술을 튕긴 다음 무명지에 술을 묻혀서 자기의 이마 중간에 바른다. 이는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땅에 감사를 드리며 조상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뜻이다. 이런 과정을 끝내고 나서 술을 조금 마신다. 전에 한 친구가 나에게 평원과 초원이 어떻게 다른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때도 설명은 해주었지만 완미하지 못한 것 같아 이 글에서 다시 보충하여 해답하려고 한다. 즉 평원과 초원은 그 계렬부터 완전히 다르다. 평원은 지형계렬에 속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평원외에 산지, 고원, 구릉, 분지 등이 포함되며 초원은 생태계렬에 속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초원외에 삼림, 사막, 빙천 등이 망라된다.                      《예술세계》 2024년 제5호
32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 성급 대표성 전승인―수진재 댓글:  조회:313  추천:0  2024-08-09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 성급 대표성 전승인―수진재 □ 리아   철제품공예는 한조, 당조 시기에도 존재한 것으로 그 력사가 아주 유구하다. 그 력사의 흔적을 오늘날 안도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安图隋氏铁制品制作技艺)는 민간에서 오랜 류전과 전승을 거친, 높은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민간수공업기예이다. 주로 철제 재료와 아크릴 색소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공예품을 제작한다.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여러 민족의 수공업기예의 우점을 받아들이고 철제품과 미술의 결합을 통해 작품의 립체감을 높여준다.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안도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으로서 중화우수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장백산지역 여러 민족의 민속풍정을 생동하게 표현하며 안도현 특색문화예술자원이 지닌 민족문화가치를 선전하는 데 자못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11년,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제3기 성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종목에 등록되였다. 그리고 2018년,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의 성급 대표성 전승인으로 수진재(隋进才)가 선정되였다.      수진재는 대대손손 철제품가공을 가업으로 삼아온 가문의 영향을 받아 어린시절부터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1989년, 길림예술학원 미술학부를 졸업한 후 20년 가까이 미술교육에 종사하면서 본인이 보고 듣고 느꼈던 현시대 예술에 대한 지식과 집안 어른들에게서 전수 받은 전통적인 철제품제작기법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 독특한 기예를 탄생시켰다.  그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연변생선구이〉와 같은 물고기 형상의 작품들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한것은 그가 처음으로 철제품을 제작해보고 싶은 창작욕구가 생긴 까닭이 바로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밥상에 마른 칼치로 만든 료리가 오른 적이 있었는데 바싹 말라붙은 형태와 질감을 보노라니 이게 생선인지 철가공품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한번 철로 물고기 형상을 만들어보려 했던 호기심이 예상 밖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직업으로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술인으로서 자신만의 창작풍격을 모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전공분야인 미술에 점차 자신감을 잃어가면서 막막하기만 하던 미래에 등불을 밝혀준 셈이기도 했다.    그렇게 붓 대신 망치를 들고 화선지 대신 철로 자신의 예술창작을 실천해온 지도 어언 20여년이 흘렀다. 그의 손끝에서 수많은 차거운 쇠덩어리들이 정교한 공예품으로 탈바꿈했고 어느덧 그만의 독특한 예술풍격이 형성되였다. 그동안 수진재는 국내의 크고작은 전시와 콩쿠르에 작품을 출품하여 많은 상을 받아안았다.  2009년, 길림성고등학교시각콩쿠르에서 〈련꽃녀〉가 2등상을 수상.  2014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5주년 길림성미술작품전시에 〈연변생선구이〉가 입선.  2016년, 전국로혁명근거지수공예술전시에 길림성 대표로 참가하여 표현상을 수상.  2017년, 제12회 중국(의우)문화제품무역박람회에 길림성 대표로 참가하여 작품 〈명태의 아름다운 변신〉을 출품해 혁신디자인상(创新设计奖)을 수상.  2018년, 〈불타오르는 나날〉이 중국당대공업예술미술비엔날레에 입선, 이듬해에 열린 절강 · 중국무형문화유산박람회 전시에 입선. 2019년, 〈해마다 풍요롭길 기원하다〉가 제1회 중화무형문화유산 신전상(薪传奖) 전통공예전시회에서 우수상을 수상. 2022년, 중국무형문화유산음력설문예야회에 참가하여 자신의 대표작품들을 전시하였으며 같은해, 〈우빙을 입은 미인송〉이 2022년 북경동계올림픽을 주제로 한 ‘다채로운 신주’무형문화유산전시에 참가하였다.  이외에도 2018년 세계무형문화유산대회에서 특수공헌상을 수상하였고 선후로 길림성공예술미술대가(吉林省工艺美术大师), 가장 아름다운 무형문화유산 전승인(最美非遗传承人) 영예칭호를 수여 받았다.      2017년, 안도현문화관광부문에서는 안도현 석문진에 수씨철예화(铁艺画)예술작업실을 설립하였다. 최근 몇년간, 수진재는 실업로동자, 빈곤호, 장애인 등 군체를 대상으로 전문적인 철제품제작기예 양성반을 조직해 인재를 양성하고 빈곤퇴치여건을 마련함으로써 안도현 특색관광구역이 민족문화전파공간으로 되게 하였다. 또한 생산, 전승, 판매의 일체화 모식을 도입하여 무형문화유산을 상품화함으로써 빈곤호의 경제수입을 늘이고 안도현의 빈곤퇴치사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양성반을 조직해 전문인재 양성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고 무형문화유산 보호사업에 아낌없이 공헌하였다. 이외에도 적극적으로 여러 위챗공식계정과 커뮤니티플랫폼 등 다양한 온라인매체를 통해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의 기초리론지식과 력사문화적 가치 등 내용을 보급하고 문자, 사진, 동영상 등을 활용해 관련 문화지식과 경험을 전파하였다.         다양한 전승보호사업과 전파교류활동을 통해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날로 대중화의 특성을 띠면서 국내외 여러 매체의 관심과 더불어 사회 각계층 군중들 속에서의 문화적 지위가 점차 높아졌다. 수진재는 다년간 무형문화유산 전승, 전파, 혁신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고 기층문화인재대오 건설 등 면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었다. 다년간 지역과 시대에 구애 받지 않는 중화우수전통공예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짙은 지역특색을 띤 새시대 장백산문화 이미지를 수립하는 데에 많은 심혈을 기울여온 수진재는 민간문화예술인과 기층문화예술사업종사자들의 귀감으로 되고 있다.       사진 제공 │ 수진재 《예술세계》 2024년 제4호
연극인으로 승부한 ‘체육객’ ― 연변가무단 연극부 부장 원용란을 만나다 □ 신철국       “체육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예술에도 끼가 있답니다.” 헤이,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 그대로 듣다 첫 소리였다. 하지만 이어서 경쾌한 률동에 화려한 몸놀림을 선 보이는 피겨선수들을 떠올리니 어딘가 일리가 있다 싶었다. 허나 첫밗에 체육인과 예술인을 슬며시 갖다 붙이는 ‘의뭉한(?)’ 연극인의 소리 치고는 어딘가 미심쩍었다. 이거 혹시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딱!” 하고 상 우에 경당목(惊堂木)을 내려놓는 중국의 전통이야기군들처럼 이제 막 꺼내놓을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변죽을 울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랬다. 단막극, 장막극은 물론 TV소품, 뮤지컬 등 다양한 쟝르를 넘나들며 40여년간 연극예술의 한우물을 파온 원용란의 빙긋이 웃는 얼굴을 마주하니 말이다.     ‘체육객’이 ‘예술객’으로 1965년 8월, 원용란은 안도현 명월진에서 아버지 원희수, 어머니 김계숙의 3자녀중 차녀로 고고성을 울렸다. 노래도 잘 부르고 손풍금도 제법 잘 다루는 아버지와 춤, 노래에 장기가 있는 어머니를 두어서인지 원용란은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에 싹수를 보였다. 헌데 예술보다 체육에 더 심취했던 그녀는 소학교시절에는 배구선수로, 중학교시절에는 소프트볼(垒球)선수로 맹활약하며 ‘이단’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그녀가 예술에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은 길림성소프트볼팀 선수모집에서의 탈락이였다. 이럴 수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전도유망한 체육객” 소리를 들으며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더니 ‘체육객’ 꿈이 무너졌다고 적잖이 실망한 그녀한테 새로운 무대가 나타났다. 1984년초였다.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죤을 통해 자기 또래의 녀학생들이 예술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본 원용란은 자기의 실력이면 그녀들한테 절대 짝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부모에게 예술 쪽으로 발전해보겠다고 떼를 썼다. 그 때까지 쭉 운동에만 매달려왔던 딸애가 갑작스레 예술로 ‘핸들’을 돌리겠다는 말에 부모는 도리질을 했지만 한번 먹은 마음을 쉽게 꺾지 않는 그녀의 고집에 결국 응낙하고 말았다. 그렇게 별로 준비도 없이 전공과목시험에 참가한 원용란은 예상 밖으로 연변예술학교(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전공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입학이 전부가 아니였다. 수업에 참가한 그녀한테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다. 무엇보다 다년간 안주해왔던 체육에서부터 예술에로의 환경 전환이였다. 그중에서도 표현과목 수업은 마치 어릴 적 소꿉놀이를 방불케 했다. 자기가 생각했던 ‘고상한 예술’과는 차이가 있었다. 연극예술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달포도 안돼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 앞에서 일방적으로 예술에 대한 포기를 선언했다. 그런 그녀를 부모가 엄숙하게 타일렀다. 스포츠도 기초가 우선인 것처럼 예술도 기초부터 튼튼히 다져야 한다는 것, 너는 예술에도 천부가 있으니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것, 포기란 말은 배추나 셀 때 쓰는 거지 꿈이 있는 사람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귀교해 동학들과 어울리며 배움에 전력했다.    중학교시절 소프트볼선수로 활약한 원용란               연변예술학교 연극반에서 연극기초훈련을 하는 장면(왼쪽 첫번째)   원주삼(표현), 리화(리론), 향개명(발레), 한룡길(조선족무용), 정정문(성악) 등 선생님들의 자상한 가르침 아래 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배우고 1986년, 왕청현문공단에 실습을 내려간 원용란은 소품 〈고추며느리〉 출연팀의 성원으로 연변중청년소품콩쿠르에 참가했다. 그번 콩쿠르에 다른 팀을 대표해 참가한 연극계의 선배 오선옥이 50대 아주머니 역을 맡은 원용란(당시 23세)의 옷매무시를 아주머니처럼 고쳐주면서 이렇게 조언했다. “등수에 연연하지 말자. 자신이 갖고 있는 연기의 장점을 잘 살려서 연기를 하면 등수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렇게 따뜻한 조언을 해준 오선옥과 함께 그번 콩쿠르에서 나란히 3등상을 따낸 그녀는 수상무대에서 격동의 눈물을 쏟았다. 이 소품은 그후 리옥희가 ‘수이러우(水肉)’로 소문을 놓은 소품 〈사촌언니〉와 더불어 연변TV 1987년 음력설문예야회 무대에 올랐다. 이튿날, 그녀가 영예증서를 가지고 금의환향하자 부모님은 너무도 기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체육 대신 예술을 선택한 딸에 대해 늘 아쉬워했던 아버지도 ‘체육객’으로부터 ‘예술객’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그녀를 보면서 “첫발자국을 잘 뗀 것 같구나.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 더 큰 성과를 이룩하기 바란다.”며 격려해주었다.   룡정시예술단 시절의 원용란 20대부터 ‘아줌마’전문호로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원용란은 1987년 3월, 룡정시예술단(당시 연길현문공단)에 입단했다. 그녀가 룡정시예술단에 입단한 데는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1987년 3.8국제부녀절이 갓 지나서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있던 그녀한테 웬 낯선 사내가 찾아왔다. 룡정시예술단에서 배우모집을 나왔다고 신분을 밝힌 사내는 현재 예술단에서 장막극을 준비하고 있는 중인데 원용란을 채용할 생각이라며 같이 갈 의향이 없냐고 넌지시 묻는 것이였다. 예술학교 선생님들의 소개로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시물시물 웃는 표정이며 힐끔거리는 눈길이 사기군처럼 느껴졌고 게다가 다 큰 처녀애를 그냥 외간사내한테 딸려보낼 수가 없는지라 그녀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막아버렸다. 그 날 저녁, 퇴근한 원용란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자신의 앞길은 저절로 선택하라.”고 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원짜리 지페 한장(그 때 안도현에서 룡정시까지 기차표가 1원 50전 가량 됐다고 한다.)을 그녀한테 내밀었다. 그녀더러 직접 룡정시예술단에 찾아가 채용 여부를 확인하고 앞길을 선택하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사업 배치에 관한 모든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서의 일반책임자가 아닌 단위의 제1책임자를 찾아 아퀴를 지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이튿날, 아버지의 말을 명기하고 룡정으로 간 원용란은 예술단 제1책임자로부터 전날에 그녀의 집에 다녀온 분이 룡정시예술단 연극대 대장인 황철이였으며 현재 준비중인 장막극 〈파묻은 사랑〉의 주역으로 그녀를 눈독 들이고 있음을 알게 되였다. 당시 연변주내에서는 연변연극단과 룡정시예술단에서 주로 연극을 취급하고 있던 터라 지명도가 높은 연변연극단이 더 욕심났지만 햇병아리 연극인으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산이였다. 원용란이 주저하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소품 〈사촌언니〉를 열연해 조선족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리옥희였다. 이런 대스타도 몸 담고 있는 곳이니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주저없이 입단서류에 싸인했다.               장막극 〈해구신〉의 한 장면(오른쪽 두번째)          장막극 〈사랑에 지친 녀인〉의 한 장면(오른쪽 첫번째) 입단후 그녀는 데뷔작인 장막극 〈파묻은 사랑〉에서의 주역에 이어 〈사랑은 했는데 젠장〉, 〈사랑과 야심〉 등에서 40~50대 아줌마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 동료와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20세기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는 조선족연극의 전성기였다. 따라서 무대에 올리는 연극의 스케일도 방대했고 배우들 사이의 경쟁도 심했다. 그리고 농촌순회공연도 많았다. 한 마을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른 마을에 당도하면 마을주민들이 강냉이튀김이며 사과배며 지어는 큼직하게 썬 무우까지 갖춰놓고 이제나저제나 공연단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 때면 그녀는 소품, 독창 출연에 이어 사회도 보면서 부지런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녀가 처음 선 보인 1인극 〈퍼렁녀와 고분녀〉는 그녀의 출중한 연기에 힘 입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모자를 비뚤게 쓸 때는 쩍하면 손님들과 걸고들고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수양 없는 복무원인 ‘퍼렁녀’로, 모자를 똑바로 쓸 때는 언제나 손님들을 반겨 맞고 봉사를 잘하는 훌륭한 복무원인 ‘고분녀’로 변신하는 완전히 판이한 두 식당복무원의 모습을 혼자서 그려낸 작품이였다. 특히 그녀는 20대 처녀시절부터 수많은 작품들에서 아주머니, 할머니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 관객은 물론 업계의 인정을 받았는데 이는 연변예술학교시절 담임이였던 원주삼선생의 가르침과 갈라놓을 수가 없다. 젊은 녀인보다 중로년 역을 자주 맡기는 게 야속해 잔뜩 풀이 죽어있는 그녀한테 “젊은이의 배역은 생명력이 짧으니 그 대신 오래오래 써먹을 수 있는 어머니나 할머니의 배역을 잘 배워두는 것이 갑절 더 실용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격려해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늘 명기하고 세밀한 캐릭터 분석으로 안정적인 연기력 향상에 왼심을 썼고 결과 20대 처녀시절부터 ‘아줌마전문호’로 무대를 누비며 조선족연극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였다.             소품 〈파마점에서〉의 한 장면(가운데)                     장막극 〈하얀 꽃〉의 한 장면(왼쪽 두번째) 재간둥이 연극배우로 1994년 3월, 원용란은 더 큰 꿈을 안고 연변연극단으로 향했다. 조선족연극계의 명망 있는 연출이였던 최인호 감독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접시험을 대기하고 있는 그녀한테 최감독은 이왕의 복잡한 시험절차들은 아예 삭제한 채 그냥 몇몇 간단한 동작들만 시켜보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너는 원래 크게 연극을 할 재목이로구나!” 하고 충분히 긍정하면서 그처럼 넘기 힘들다는 연변연극단 문턱을 단숨에 통과시켜주었다. 최감독의 인정을 받고 신심 가득히 연변연극단에 발을 들인 원용란은 초심으로 돌아가 최고보다는 최선이란 마음으로 관객들을 위해 연기하는 전방위 연극인이 되고저 노력을 기울였다. 남들이 힘들어 못하겠다고 나눕는 ‘아짜아짜한’ 배역들도 서슴없이 맡으며 극중 인물을 소화해내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장막극 〈사랑에 지친 녀인〉에서는 술집 접대부로, 〈헤톨부대〉에서는 바보스러운 로처녀로, 〈하얀 꽃〉에서는 순박한 농촌녀성으로 조연들을 맡아가면서 몰입도 높은 ‘깨소금맛’ 연기로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중소학교시절 내내 운동을 하면서 모름지기 키워왔던 ‘체육객’의 용감성이 크게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방미선연출가의 가르침과 영향하에 연변의 첫 뮤지컬인 〈샘〉에서 사기군의 안해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여 연극배우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약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게 되였다. 당시 중국 조선족연극계의 원로였던 저명한 연극인 리영근선생은 배역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맡아나서는 원용란의 용기를 연극인한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부하면서 그녀야말로 동료들과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전반 작품을 살려주는 아주 대담하고 특이한 배우라며 그녀의 연기력을 충분히 긍정해주었다. 이 무렵 연극인 김동현과 합작출연한 소품 〈갑속에 든 사람〉(리광수 작, 최인호 연출)에서 원용란은 동창모임에 나가기 위해 남편을 사우나통에 가두어놓고 내빼는 40대 아줌마의 형상을 진실하게 창조해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 소품은 길림성 제15차 소품평의와 제4차 연변소품콩쿠르에서 우수작품으로 평의되고 녀주역을 맡은 원용란은 각기 표현 2등상을 탔다. 한석봉과 합작출연한 소품 〈계약서〉(김정권 작, 최인호 연출)에서는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어렵게 돼지고기장사를 하면서도 생활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부지런한 과부 형상을 성공적으로 표현해 관객들의 우렁찬 갈채를 받았다. 성공의 비결이라면 생활에 대한 그녀의 세심한 관찰과 직접적, 간접적인 체험을 통한 경험이였다. 연극 〈림송숙〉에서 주인공 ‘림송숙’ 역을 맡은 그녀는 인물을 보다 형상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15일간 연길시 공원가두 광휘사회구역에 내려가 직접 현장체험을 했다. 이 연극은 2014년 12월에 막을 올렸는데 그녀는 뛰여난 연기력을 펼쳐 맡은 바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재간둥이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연변연극단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녀는 그동안 일반인으로부터 공산당원으로, 일반 연극배우로부터 연극부 부장으로 거듭나면서 〈사랑의 샘〉, 〈사랑의 품〉, 〈심청전〉, 〈둥지〉, 〈고향역〉, 〈주덕해〉, 〈림송숙〉, 〈사회구역 서기〉 등 수많은 극작품들을 열연했다. 그 노력의 성과로 제8회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길림성 제6회 덕예쌍형(德艺双馨)문예사업자 등 수십여차의 묵직한 상과 영예를 받아안았다. 또한 중국연극가협회 회원, 길림성연극가협회 리사, 연변연극가협회 부주석으로 활약하면서 현시대 연극이 봉착한 문제를 분석하고 개혁 및 발전에 대해 모색하면서 그에 맞는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장막극 〈고향역〉의 한 장면(앞줄 왼쪽 첫번째) 연극은 삶의 비타민 2017년 5월, 중국연극 탄생 110돐을 맞으면서 제1회 동북지역 우수극작품전시공연이 료녕성 심양시에서 있었다. 동북3성 15개 극단의 25개 작품중 유일한 조선어작품인 연변가무단의 〈사회구역 서기〉가 심양의 중화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그 연극에서 주인공 림송숙 서기 배역을 맡았던 원용란은 공연 뒤끝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번 공연이 끝나자 심양시 서탑지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아줌마가 애를 셋이나 거느리고 무대 뒤로 그녀를 찾아왔다. 연변의 맛이 살아있는 연극을 정말 보고 싶었다면서 앞으로도 자주 산재지역 조선족들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는 말에 그는 연변의 연극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페부로 느꼈다. 특히 직접성, 동시성, 현장성을 구비하고 있는 연극은 스크린 매체와 달리 관객이 직접 연극 현장에 참여해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을 잘하려면 춤, 노래와 같은 것도 잘해야 하겠지만 언어적인 면의 질도 중시해야 한다. 생활을 떠나 겉치레만 잔뜩 부린 허황한 대사는 관객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며 또 그렇다고 해서 너무 생활적인 언어를 강조하면 평범하기 때문에 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잘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관객을 웃고 울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연극이야말로 이 사회의 비타민이라고 말한다. 힘들 때가 더 많지만 연극에 몰입해서 모든 것을 발산하고 나면 그렇게 후련하고 보람찰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극이 오늘날에는 그전날의 관객이 북적거리던 풍경을 뒤로 하고 저조기를 겪고 있다. 지난날, 그녀와 함께 연변예술학교에서 공부했던 동창들도 지금은 모두 연극무대를 떠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현재 연변가무단과 합병해 연극부로 존재하고 있는 연변연극단에는 전성기에 배우가 200여명 있었지만 현재에는 십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조선족인구의 류실 때문에 관객이 적어진 까닭도 있지만 연극의 매력이 다매체문화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데도 있다고 그녀는 분석한다. 세월이 변했으니 연극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품이 있어야 무대가 생기고 관객도 생길 것이라며 요즘 같이 뉴미디어가 발전한 시대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어느덧 다음해면 퇴직하게 되는 그녀는 그동안 좋은 감독, 씨나리오 작가, 상대배우를 만난 덕에 탄탄대로를 걸어왔다며 이제 퇴직을 해도 불러만 주면, 그리고 암기능력만 따라간다면 한달음에 무대로 달려올 것이라고 한다. “감독은 영화감독이 최고요. 배우는 NG 없이 한방에 끝내는 우리 연극배우가 한수 우랍니다.” 헤이, 나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야기 말미에 다음 회를 예고하며 “딱!” 하고 내려놓는 중국전통이야기군의 은은한 경당목 여운이 살아나 두말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사진 제공 │ 연변가무단 《예술세계》 2024년 제3호
30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댓글:  조회:870  추천:4  2024-04-30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 주금파   인연 나는 1993년 12월 10일에 흑룡강성 목릉현 시골에서 혈혈단신으로 연변에 와서 30여년간 살면서 적잖은 인생고초를 다 겪었다. 그동안 나를 이끌어주고 아껴준 선배들도 많았지만 김문혁과는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절친한 사이였다. 하기에 김문혁의 부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흑룡강성의 시골에 살 때 흑백텔레비죤으로 〈요청무대〉프로를 시청하면서 연변 배우들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였다. 그 때는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소품극본을 써가지고 연변TV 〈주말극장〉제작팀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 다음해에 소품담당 편집으로 출근하게 되였다. 2년 쯤 출근하다가 〈주말극장〉이 〈토요무대〉로 타이틀을 바꾸면서 계약직인 나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때 김문혁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당시 김문혁은 연길시구연단의 소속배우였는데 잠시 적을 남겨둔 채 하해(下海)하여 새별예술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 별로 가깝게 지낸 사이도 아니였는데 이렇게 도와주니 그 고마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나를 극본작가로 초빙하고 싶다고 하면서 월급은 500원씩 주겠다고 했다. 1998년 당시에 500원이면 세집을 맡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였다. 이렇게 7, 8개월 동안 그의 예술단에서 직업작가로 있으면서 나는 그가 수년간 예술단을 운영하면서 수십만원의 빚을 지게 되였다는 걸 알게 되였다. 그러던 차 1999년 봄에 연변TV 청소년부에서 편집을 초빙한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편집부에 찾아갔고 행운스럽게 다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출근하게 되였다. 이 사실을 문혁에게 알리자 그는 당장 청소년부 주임에게 전화하여 청소년부의 직원들을 전부 데리고 나오라더니 어느 근사한 음식점에서 크게 한턱 냈다. 자기가 나를 예술단에 데리고 있으면서 제대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던 차에 청소년부에서 나에게 일자리를 줘서 감사하다면서 말이다. 1년후, 〈스타의 밤〉이란 프로가 새로 창설되여 나는 거기로 자리를 옮겼다. 〈스타의 밤〉은 소품을 위주로 하는 프로이다보니 자연히 김문혁을 비롯한 배우들과 자주 만나게 되였다. 당시 내가 창작한 소품 〈고사리〉를 김문혁이 연출하고 송경철, 김문혁이 출연했는데 지금까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뛰여난 베테랑 배우인지라 애드리브를 치며 아주 훌륭한 명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번은 열흘 넘게 련습한 어느 한 소품에서 갑자기 호칭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다른 사람 같으면 무조건 실수가 생겼으련만 김문혁은 용케도 대사 한마디 비끗하지 않고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베테랑 배우다운 그의 뛰여난 실력에 또 한번 감탄했다. 수십년간 연변TV에서 소품을 책임진 편집과 연출로 있으면서 느꼈던 바를 총화해보면 조선족중에 배우이면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명 안된다. 그중 한사람으로 나는 김문혁을 꼽는다. 김문혁의 작품은 대사가 생활적이고 마디마디 폭소를 자아내는 언어로 엮어졌다. 그의 연기 좌우명이랄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채플린이 아닌 이상 어떤 희한한 육체언어(동작)여야 관객을 웃길 수 있겠소? 그렇기 때문에 대사, 바로 유모아적인 생활언어로 관객을 웃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김문혁이 창작한 〈술장사〉, 〈민들레무역공사〉 등 작품들을 보면 대사들이 맛갈스럽고 재미 있다. 그런데 유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편집하다 보면 어떤 작품은 결말이 뱀에게 발을 붙여놓는 것처럼 그대로 두면 군더더기가 되고 그렇다고 잘라버리면 뭔가 완정하지 못한 감이 들군 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인간 김문혁 김문혁은 개성이 강한 친구였다. 두 사람이 모인 자리든 다섯 사람이 모인 자리든 대화하는 법이라고는 없이 줄창 혼자서만 말을 했다. 그래서 롱담 삼아 “김단장, 당신은 왜 대화할 줄 모르오? 대방이 말할 때는 들어주기도 해야지…”라고 하니까 그의 대답이 가관이다. “형님, 중창, 합창 해두 그중에 ‘쏠로’를 하고 싶지 누가 존재감 없이 군중배우를 하겠소? ” 한번은 한 후배가 진지하게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형님처럼 말주변이 좋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 “책을 많이 읽어보오.” “얼매나 보면 되오?” “한 서너마대 읽어보면 되오.” 확실히 김문혁은 독서광이였다. 고전소설 《삼국연의》를 몇번이나 읽었는지 책 속에 등장하는 수백명의 인물들의 이름, 기호, 사건의 발생년대 등을 줄줄 외웠다. 그가 좋은 작품을 써내고 좋은 연기자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독서를 통해 축적한 풍부한 지식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김문혁의 친구 접대는 지나치다 못해 랑비에 가까웠다. 외지에서 친구들이 오면 돌아갈 때까지 한주든 한달이든 접대하였다. 그러니 만천하에 친구들이 넘쳐났다. 외지 친구들을 접대하다 보면 자신의 월급에다 결혼사회를 해서 번 만원이 넘는 돈도 모자라서 나에게서 돈을 빌릴 때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 접대하는 데 쓰는 게 나쁜 거는 아닌데 자기 형편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는 건 좀 삼가는 게 좋잖니? 접대비에 들어간 돈을 합하면 집 한채 값은 되겠다.”라고 나무라면 “형님, 이것두 다 투자요. 이제 내 결혼만 하게 되면 투자했던 돈이 다 들어오오.”라고 대꾸하군 했다. 나하고 자주 식사자리를 가졌지만 내가 살 때보다 그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김문혁은 연길 우시장거리(牛市街)에 세집을 맡고 몇년간 살았다. 그가 외지로 회의를 가거나 전국소수민족문예종합공연에 참가하러 갈 때면 적게는 삼사일, 많게는 보름씩 집을 비울 때가 있었다. 그 때면 나 보고 자기 집을 봐달라고 부탁하군 했다. 세집인데 그냥 비워두면 되지 뭐 봐줄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새들을 키우는데 먹이와 물을 매일 줘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비좁은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단칸방이였는데 집안 배치가 이상하고 놀라웠다. 방 중간에 2인용 넓은 침대가 놓여져있었고 침대 주변에는 1m 높이가 넘는 푸른 화초화분이 빙 둘려있었다. 망자를 눕힌 주변에 빙 둘러놓은 화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싹하기까지 했다. 새조롱 안에는 앵무새를 포함한 20여마리의 새들이 뛰놀며 재잘거렸다. 새들이 쪼아먹는 좁쌀이 바닥에 가득 널렸고 새똥과 깃털이 날려서 방안의 공기가 혼탁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이러한 안 좋은 느낌을 그한테 곧바로 말하면 자존심이 무척 세고 고집이 강한 그가 받아들일 리 만무해서 빙빙 에둘러서 화분을 침대에 둘러놓지 말고 채광이 좋은 창 곁에 놓고 새조롱도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하나만 두면 좋지 않겠냐고 의논조로 말을 꺼내니 아니나다를가 “내 형님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 만하오. 보토리 혼자 사는 집안에 공기 좋으라고 놓은 화초들인데…”라고 하며 내 말을 잘랐다. 17, 18년전 김문혁은 한달에 월급과 결혼식 사회수입을 합하여 15,000원이 넘는 적잖은 돈을 벌었다. 그중 일부는 빚 갚는 데 쓴다고 하지만 집을 사지 않는 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그 리유를 물으니 아빠트 한채를 사려면 수십만원이 드는데 어떻게 사겠냐고 했다. 그래서 선불금(首付款)으로 집값의 30% 정도만 내고 나머지는 대출받아서 다달이 지불하면 된다고 하니 그제야 그런 방법도 있느냐며 놀라는 것이였다.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데는 신경을 안 쓰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마침 그에게는 부동산 개발을 하는 친구가 있어 그의 도움으로 적합한 가격에 새집을 마련하게 되였다.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한테서 전화가 왔다. 퇴근하면 자기 새집에 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집들이 선물로 휴지와 비누가루를 사가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TV를 걸어놓은 객실 벽 량옆에 예(艺)자를 쓴 서예작품이 한눈에 보였다. 글자크기는 우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커졌고 똑같은 글자들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씌여졌으며 한쪽은 한어로, 다른 한쪽은 조선어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글을 써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분이 상할 가봐 이리저리 빙빙 에둘러서 이 장식이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뜸 “형님 말뜻이 뭔지 알았소! 그런데 형님은 무슨 미신을 그렇게 믿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본인이 틀렸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내 앞에서 곧바로 승인하고 고칠 김문혁이 아니였다. 그래서 한족 연출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며칠후 문혁의 새집에 간 그 친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초상집 분위기 같은 장식품들을 와락와락 뜯어버리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낯색이 굳어진 문혁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내려다보는 체하는 것이였다. 그로부터 일년후인 2011년 3월, 나는 뜻밖에도 김문혁이 풍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병실에 찾아가보니 병문안 왔던 사람들을 배웅하며 병상에서 내려선 그가 왼쪽다리를 절름거렸다. 사실 김문혁은 애주가이고 애연가였다. 한번 앉으면 반근짜리 구기자술 한병을 다 마시고 또 맥주 대여섯병을 마신다. 그리고 담배는 하루에 세갑씩 피운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였다. “사람이 절대 술을 못이기네라. 끊으란 말은 안할게. 제발 량을 줄이고 차수를 줄여라. 담배두 적게 피우고… 술담배를 너무 과하게 하니까 녀자들이 싫어하지.”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군 했다. “형님, 내 장가 가서 아이가 있으면 담배는 끊을 수 있소. 그런데 지금은 아니요.” 김문혁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풍 맞고 얼마후 한쪽 콩팥을 떼내는 수술을 했다. 원인을 물으니 신장결핵이란다. 그 말을 들으니 옛일이 떠올랐다. 2004년 쯤인가 김문혁이 사는 세집에 불리워가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 때 그가 하는 말이 세집에서 3년을 살면서 겨울에 석탄불 한번 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추운 날이면 전기요를 켜고 잤고 겉바람이 셀 때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면서 추위를 견뎠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밖에서 늦게까지 술 마시다 들어왔기에 추운 줄도 몰랐단다. 아무리 젊은 나이지만 자기 몸을 너무 아끼지 않고 구박한 게 아닌가 싶었다. 3년간 겨울에 불 때지 않은 랭방에서 잤으니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문혁은 풍 맞은 후에도 나하고 위챗으로 계속 련락을 했다. 2015년 여름,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영화제작사를 경영하던 나는 2022년에 코로나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어느날 저녁부터 아래턱이 뻣뻣해나며 감각이 이상했다. 그러더니 다음날부터 입과 얼굴이 오른쪽으로 비뚤어져갔다. 나는 ‘나도 풍을 맞는구나.’ 하고 한탄했다. 수십편의 작품을 준비해놨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3년간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한 데다 또 풍까지 맞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틀 밤낮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중풍으로 페인이 되면 금방 대학에 붙은 아들 뒤바라지는 어떻게 하며 또 평생 준비해둔 작품들이 제대로 빛도 보지 못했는데 이대로 인생을 마감해야 하나 하는 서러움과 절망에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김문혁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내 증상을 말해주고 대처방법을 물었다. “형님, 발음이 똑똑한 거 보니 중풍이 아니고 ‘맨탄(面瘫)’인 거 같소. 왼쪽 팔다리는 잘 움직여지오?”  “응, 입만 비뚤었지 팔다리는 괜찮다. 그런데 ‘맨탄’이란 게 뭐야?” “그게 면풍이요.” 그 말에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 질렀다. “면풍도 풍인데 그게 왜 중풍하고 상관 없니?” “놀라지 마오. 면풍은 중풍하구 아무 상관 없소. 잘 때 얼굴에 찬바람 맞아서 그런 게요.” 그제야 알고지내는 의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말해주니 확실히 중풍이 아니라고 했다. 침구치료를 하면 한달내로 정상이 된다는 것이였다. 면풍을 맞은 지 7일째에 연길시 전체의 격리가 풀리면서 병원들이 문을 열었다. 회사와 가까운 병원에 다니며 열흘 정도 침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니 비뚤었던 안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때 나는 김문혁에게 진짜 너무 감사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종영자막 2009년 쯤의 어느 저녁 무렵, 청년호 음료매장의 의자에 앉은 우리 두 사람은 이 말 저 말 하다가 김문혁이 나에게 섭섭한 소리를 했다. “드라마를 찍으면서 내게두 부연출 이름을 달아주면 형님께두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되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내가 아니였다.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어 흑룡강성에서 원고 한주머니를 메고 연길에 온 나는 어렵사리 방송국에 입사하여 10년 넘게 근무하였지만 꿈을 실현하지 못해 광고부에서 촬영사로 근무하는 방호범과 함께 련습용으로 60분짜리 단편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만들 때 찾지 않았다는 섭섭함에서 나온 말이였다. 그래서 그 때 내가 결심 발표하듯 얘기했다. “아직까지 난 작품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내가 련습용 작품에 아무리 친하다 해도 너 같은 명배우를 어찌 부르겠냐? 이제 다음 작품을 준비 잘해서 꼭 너에게 부탁할게.” 그리고 몇년후인 2011년 9월, 내가 처음으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장편영화 《부모》가 제작되였다. 그런데 그 때는 김문혁이 중풍으로 앓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우리는 영상작품으로 합작을 못한 유감을 영원히 남기게 되였다. 영화나 드라마가 끝날 때 올라가는 종영자막에는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와 제작팀의 직종에 따라 이름이 새겨진다. 절대 대부분 사람들은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지워진다. 극히 드문 일부분의 명인들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력사라는 거대한 세월의 종영자막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흔적없이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 허무하다. 술담배를 모르는 나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다. 몇명 되지 않는 절친중에 김문혁이라는 스타가 있었다는 건 그가 내 인생 한 부분에 굵은 흔적으로 남아있는 친구임을 의미한다. 《샘》, 《백설화》에 주역으로 또 수많은 경전적인 소품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족 사회에 널리 알려진 김문혁은 우리 기억의 ‘종영자막’인에 영원한 배우로 이름을 새겨놓고 갔다. 45세에 예술인생을 마감하고 58세에 결국 바람처럼 이 세상을 영영 떠나가버린 친구여,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보내기를 바라면서 그의 유덕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주금파 | 연출가 《예술세계》 2024년 제2호  
29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 댓글:  조회:672  추천:0  2024-04-30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 □ 방미선     2024년 3월 8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김문혁배우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났다는 애달픈 소식을 접했다. 연기력이 한창 물오른 40대 중반에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던 김문혁이 14년간의 힘든 투병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토록 사랑했던 무대와 관객들의 곁을 떠났다. 이젠 모든 아픔과 힘들었던 세월을 훌훌 털어버렸으니 먼길을 떠나는 걸음이 가벼우리라 생각되면서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고 김문혁배우  1. 김문혁배우와 나 1992년에 김문혁배우를 알게 되였다. 당시 최인호 연출가와 함께 신진배우 모집차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연기전공 졸업생들을 만나러 갔는데 그중 퍽 나이 들어보이는 학생이 바로 김문혁이였다. 선생님을 통해 그가 네번이나 시험을 보고서야 음악학부에 입학했고 후에 전공을 연기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은근히 그한테 관심히 쏠렸다. 그후 연길시조선족구연단 공연에서 그가 펼치는 소품연기를 보면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 과정에 순간순간 보여주는 톡톡 튀는 생동감과 그 생동감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속되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기자에게 있어서 너무나 보귀한 재부이고 쟝르의 구분 없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우수한 ‘종자’임에 틀림없었다. 그 때 나는 그런 보귀한 ‘종자’를 품은 그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꼭 훌륭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출가는 흔히 중요한 드라마나 연극 혹은 소품을 만들 때면 자연히 극중 주인공이거나 주요 배역 적임자로 먼저 생각나는 배우가 있다. 내가 텔레비죤드라마 《백설화》와 《샘》의 연출을 맡았을 때 주인공 역으로 제일 먼저 떠올린 배우가 바로 김문혁이였다. 1994년에 촬영한 드라마 《백설화》에 출연하기 전에 그는 주로 희극소품연기로 관객들의 인정을 받았을 뿐 드라마 연기를 펼친 적 없었지만 나는 고민 없이 정극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그를 선정하였고 1996년에 촬영한 드라마 《샘》의 주인공으로도 역시 그를 택했다. 이 두편의 드라마에서 그는 주인공 형상을 기대 이상으로 출중하게 창조했다. 이렇게 우리는 직장 동료로 지낸 적도 없고 사적으로 막역지우도 아니지만 각자 자신의 예술생애에서 각별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텔레비죤드라마 《백설화》와 《샘》에서 연출가와 주인공 역으로 만난 소중한 인연으로 오랜 시간 특별한 우정을 이어왔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주인공 일가족(오른쪽 두번째 김문혁)   2. 김문혁배우가 들려준 이야기 드라마를 함께 만들면서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는 내가 의도적으로 화두를 던지군 했는데 그것은 연출가로서 효률적인 연출 진행을 위해 배우를 잘 알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였다. 유전 때문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곡가이지만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해서 집에 여러가지 책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든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예술학교 근처에 집이 있다보니 매일 보고 듣는 게 노래와 악기 소리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책 읽기는 물론 음악에도 마음이 쏠려 한때 예술학원의 기량 높은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클라리네트와 색소폰을 배우고 손풍금도 쳤고 또 미술공부도 좀 했는데 크면서 흥취가 점차 독서에만 집중되였다. 책을 읽으면서 그는 책 속의 많고많은 이야기와 각양각색의 주인공들의 형상에 깊이 감동하고 감탄하면서 멋진 글을 써내는 작가에 대해 존경과 숭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나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가? 좋은 책을 써내는 훌륭한 작가로 될 수 있을가?’ 작가의 꿈이 서서히 가슴 속 깊은 곳에 싹이 트면서부터 고중생이였던 그는 리과공부를 뒤전으로 하고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문학서적 읽기에만 전념했다. 청춘의 혈액은 마술사란 말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당찬 꿈이 마술처럼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책 속 인물들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던 데로부터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연극이나 드라마에 관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꿈은 신명나게 연기를 펼치는 배우로 바뀌였다. 배우로 되고픈 욕망은 돌연 쓰나미의 기세로 김문혁을 덮쳤다. 강렬한 욕망의 충동하에 문과에만 열중하고 그외 모든 학업을 포기했다. 자리에 누워도 배우꿈, 수업시간에도 배우꿈에 빠지다보니 리과 성적이 바닥을 쳤고 나중엔 아예 고중을 중퇴해버렸다. 그리고 배우꿈을 향한 첫걸음으로 예술학교 응시를 준비했다. 아버지 혼자 월급으로 온 집식구가 살아가는 형편이라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에 아무 것도 안하면서 공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밥값이라도 벌어보려고 벽돌공장에서 운반공으로도 뛰였고 석탄을 차에 싣고 부리우는 막일도 했고 삼륜차로 작은 식당이나 편리점에 물건을 날라다 주기도 했다. 아무튼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다 했다. 아무리 어지럽고 힘들어도 꿈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었고 아무리 괴롭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넘기 힘든 언덕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고중시기에 놓쳐버린 수리화(数理化)과목이였다. 그는 련속 3년 예술학원에 응시했다. 전공시험에는 쉽게 합격되였는데 수학, 물리, 화학 시험에 통과되지 못해 세번 다 미역국을 먹었다. 세번째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는 시험을 보느라 훌쩍 지나버린 3년이 너무 아깝고 여기저기 고된 막일에 부대낀 3년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여서 아무데라도 화풀이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중 어느 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예술학원 청사를 빙빙 돌다가 음악학부 주임 사무실의 유리창을 묘준해 힘껏 돌팔매를 날렸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박살났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캄캄한 예술학원 마당의 한복판에 두 다리를 떡 뻗치고 서서 “예술학원인데 전공이 합격되면 입학시킬 게지, 수리화는 무슨 수리화!” 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그제야 숨통이 좀 열리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더럭 겁이 났다. 물론 곧 사실이 탄로 나서 예술학원 보위과(保卫科)에 불리워갔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다시 퍼 담지도 못하고 퍼담을 생각도 없는지라 어떤 처분이 떨어질지 운명을 그냥 하늘에 맡겨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한바탕 호된 꾸지람만 듣고 무사히 풀려났다. 알고보니 예술학원 지도부에서 그가 저지른 사건이 중대하고 영향이 안 좋지만 얼마나 예술을 사랑했으면 세번이나 시험을 봤겠는가, 얼마나 예술학교에 붙고 싶었으면 이런 일까지 저질렀겠는가고 하면서 선처했던 것이다. 눈물이 찔끔 났다. 물론 교수 아버지의 덕을 많이 입은 건 두말할 것 없지만. 그런데 그 뒤 예술학원에 김교수가 ‘괴물’아들을 두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그는 ‘뿔난’ 아버지를 꽤 오래동안 슬슬 피해다녀야 하는 곤혹을 치렀다. 이듬해 그는 또다시 시험장에 들어섰다.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지, 얼굴이 두껍다고 해야 할지. 네번째 시험은 그에게 있어서 리상이나 꿈을 떠나서 사활을 건 전투였을지도 모른다. 그번에는 요행 문화과 시험을 통과하여 끝내 음악교육학부에 입학했고 한달후 운 좋게 그 해 마침 새로 설립된 연극학부로 적을 옮겼다. 배우로 가는 길이 마침내 열렸다. 그 길을 걸으면서 그는 속으로 몇십번, 몇백번을 윽벼르며 천번 만번 자기와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시험으로 흘려보낸 4년을 꼭 되찾고 앞으로 맞이하는 세월을 더 의미 있고 알차게 살겠다고… 그는 해냈다. 자기와의 약속을 굳건히 지켰다. 다년간 70여부의 소품을 무대와 텔레비죤 화면에 선보였는데 그중 자체로 창작, 연출, 출연한 소품이 40여부나 되고 3부의 텔레비죤드라마에서 주인공 형상을 멋지게 창조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연기창조로 조선족의 ‘웃음의 별’ 영예와 함께 수많은 팬을 가진 진정한 배우로 성장했다. 사실 ‘아깝고 억울하게’ 흘려보낸 그 4년은 되려 그가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된 시간들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 그의 기억 창고에 빼곡이, 두텁게 축적되여 예술창조의 자양분으로 발효되였고 그가 비지땀을 휘뿌렸던 벽돌공장 운반공일, 석탄 부리우는 막일 그리고 삼륜차로 물건 나르는 일은 그야말로 그를 ‘웃음의 별’로 탄생시킨 기름진 밑거름이였다. 책에 매달려 책과 씨름했던 세월이 있었기에 극본을 마주하면 곧바로 기억 창고에서 생생한 인물형상을 찾아낼 수 있었고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눈물로 적셔진 젊은 시절의 다양한 생활체험은 인물형상창조에 단비로 되여 그로 하여금 소품세계의 ‘웃음의 꽃’으로 활짝 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을 찍을 때 내가 “주인공이 삼륜차를 몰 줄 알아야 하니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삼륜차 모는 걸 잘 배워야겠소.”라고 했더니 그는 대뜸 “삼륜차 말입니까? 삼륜차 몰기라면 내가 선수지요.”라고 하면서 허허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   3. 소품 〈딱꿍〉과 두꺼운 혀 나는 김문혁과 단 한번 소품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2002년에 공연된 〈딱꿍〉이다. 원래는 예술학원 연기전공 학생들의 련습용이였는데 배우를 잘 선택하면 뭔가 좀 될 것 같아서 김문혁을 불렀다. 전화를 받고 곧 달려온 그는 당시 예술학원 학생이였던 애 엄마 역을 맡은 배우와 대사를 맞췄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발음이 좀 이상했다. 소품 제목이 〈딱꿍〉이고 대사 전반에 ‘딱꿍’이란 대사가 쫙 깔려서 처음부터 ‘딱꿍’ 소리를 챙챙하게 내야 되는데 그의 발음에서 ‘딱꿍’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를 강구어 자세히 들어도 잘 들리지 않자 대사맞춤을 중지하고 그더러 ‘딱꿍’ 소리를 크게 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챙챙한 ‘딱꿍’ 소리는커녕 목소리가 점점 더 흐려지더니 나중에는 헛기침 같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안되겠어요. 딱꿍 소리가 전혀 안 들리네. 웬 일이지?” 그가 허구픈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방연출, 내 원래 혀가 이렇게 두껍습니다. 보세요.” 그러면서 나를 향해 혀를 쑥 내밀어보였다. “어이구, 쓸데없이 무슨 혀타령이지?” 내가 덩달아 허구픈 웃음을 짓자 그가 정색해서 말했다. “사실 내 혀가 정말 기뚝차게 두껍습니다. 혀가 두꺼운 바람에 발음이 똑똑하지 않아 여태껏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예술학교 때 연기공부를 하면서 내절로 터득한 건데요, 혀를 구부려야 하는 대사는 내절로 다른 대사로 살짝 수정하군 했습니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오늘 요놈 ‘딱꿍’ 탓에 그만 탄로났네.” 그 말에 그의 혀를 다시 자세히 보니 확실히 좀 두꺼워보였다. 그래서 그더러 혀를 입천장에 대보라고 했더니 혀가 너무 두꺼운 탓에 혀가 입천장에 닿지 않고 겨우 앞이 안쪽에 닿았다. 나는 하도 어이 없어 박장대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품대왕의 혀가 이 모양일 줄은 몰랐네. 비밀은 꼭 지키겠으니 문혁이 이번 소품은 그만둡시다. 다른 배우를 찾겠어요.” 그랬더니 그가 생억지를 부렸다. “안됩니다. 비밀도 지켜야 되고 소품도 내가 해야 됩니다.” 〈딱꿍〉이 별로 대단한 작품이 아닌지라 나는 그런대로 연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수수한 작품일지라도 배우 이름에 걸맞게 성의를 다해야 하고 관객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딱꿍’ 소리가 들리지 않는 〈딱꿍〉을 정성 다해 열심히 련습했다. 요즘 위챗계정에 올라온 〈김문혁선생님이 출연한 재미 있는 소품 10편 모음〉에 있는 〈딱꿍〉을 다시 보았더니 그 때 그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딱꿍’ 소리를 방연출의 요구 대로 챙챙하게 내지 못하지만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해서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라고 정색해서 말하던 그의 모습도 눈앞에 삼삼하다.   4. 택시 료금에 깃든 우정 2019년 겨울의 어느 하루, 식당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려고 길에 나섰는데 그 날 따라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배우들과 련습약속을 한 터라 속이 바질바질 탔다. 문득 택시 한대가 속력을 줄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찬찬히 보니 조수석에 손님이 앉아있기에 나는 또 락심하고 큰길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택시 안에서 “방연출! 방연출!” 하는 어눌한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머리를 돌려 보니 김문혁이였다. 그가 나 보고 빨리 뒤쪽에 앉으라고 손시늉을 하자 나는 오랜만에 만나 반갑기도 하고 또 시간 때문에 안달이 났던 터라 제꺽 뒤자리에 앉으면서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그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침 맞으러 간다고 하면서 나 보고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음력설야회프로 련습하러 텔레비죤방송국에 간다는 말에 그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애처로운 마음에 내가 얼른 “문혁이가 많이 나아져서 참 보기 좋네. 택시를 잡지 못해 애 탔는데 이렇게 만나서 너무 반갑고 고마워.”라고 위로해줬다. 그사이 택시가 연변병원 동문 부근에 다달았다. 택시가 멈춰서자 그는 꼬깃꼬깃 접은 돈 20원을 운전수에게 건넸다. 내가 급히 허리를 굽혀 운전수 손에 놓인 돈을 받아서 그의 손에 쥐여주었더니 돈을 받고 한발 뒤로 물러서면서 운전수에게 빨리 떠나라고 손짓하는 한편 그 돈을 다시 택시 안에 던졌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터져나오려는 흐느낌을 애써 참으면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한껏 내밀어 휘우뚱거리며 저만치 걸어가는 그의 뒤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배우는 인기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하늘나라에서도 김문혁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 또다시 작품도 만들고 무대에도 서고 드라마에도 얼굴을 내비치고… 그리고 그의 곁에 또다시 열정적인 팬들이 모일 것 같다. 이게 바로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이다.     방미선 │ 연출가 《예술세계》 2024년 제2호
28    새시대의 숨결, 문화예술의 물결 댓글:  조회:667  추천:0  2024-04-11
새시대의 숨결, 문화예술의 물결 □ 김호       연변은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밀집하여 생활하는 지역으로서 조선족의 문화예술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따라서 중국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족 문화예술인들은 대거 연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예술단체를 조직하여 문화행사와 예술공연 등 많은 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이와 더불어 연변지역의 예술교육도 발전하였다. 조선족을 비롯한 여러 소수민족들의 문화예술 발전을 독려하는 당중앙의 정책과 연변군중예술관의 제1임 관장으로 지냈던 리두암선생을 비롯한 선인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1960년 7월 12일, 연변의 군중문화예술의 ‘사령부’로 불리우는 연변군중예술관이 고고성을 울렸다. 연변군중예술관은 대중적인 문화예술사업을 주관 및 지도, 보급하는 기관단위로서 문화예술리론 탐구, 우수한 문화예술 인재 양성, 사회적인 문화예술 봉사 제공, 문예작품창작, 대외교류 등 사업을 기본 취지로 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설립 당시부터 조선족 문화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던만큼 민족적, 지방적 색채가 짙은 특색을 유지하면서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 보급하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줄곧 조선족 문화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을 주된 목적으로 하면서 음악, 무용, 기악, 미술 등 문화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취급해왔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비해 과외문예의 토양이 척박하고 문예리론방면의 전문인원도 턱없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연변군중예술관의 출범은 민족과 지역사회 문화예술 발전의 기폭제가 되였으며 더불어 여러 민족 인민군중들의 과외문화예술은 전례없이 생기를 띠게 되였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문화예술을 전방위적으로 보급하면서 여러세대에 걸쳐 인민군중들에게 다채로운 문화생활과 문화교육, 문화혜택을 마련해주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늘 문화혜민, 문화강주(文化强州)의 전략을 앞세우고 다양한 활동과 공연을 활발히 조직하여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추어 새시대 문화예술의 맑은 물결을 이루고 있다. 특히 최근 몇년간, 연변군중예술관은 습근평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을 깊이 있게 학습, 관철하고 인민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방향을 확고히 견지하면서 문화예술 전파의 물결을 이루어왔다.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사로, 새로운 의식으로 광범한 인민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는 데 모를 박고 전반 문예사업을 전개해나갔다. 따라서 새시대 여러 민족 인민들이 석류씨처럼 똘똘 뭉치여 새시대를 구가하는 정신면모와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을 보여주는 작품이나 공연을 끊임없이 선 보이고 있다. 군무 〈왕청농악무〉(왕청현문화관)         군무 〈탈춤〉(룡정시문화관)                   손풍금 표현과 무용 〈즐거운 공연〉(연길시문화관) 특히 2023년 12월 21일, 연변로동자문화예술중심에서 펼쳐진 ‘전 주 정품문예전시공연’은 새시대의 새 기상으로 새 기지개를 켜는 연변인민들의 새 생활을 진실되게 반영해주는 무대였다. 공연은 연변주위 선전부와 주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에서 주최하고 연변군중예술관과 각 현(시) 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에서 주관하였으며 각 현(시) 문화관에서 협조하였다.   군무 〈학의 고향〉(안도현문화관)   공연은 우리 주 공공문화써비스체계 구축의 풍성한 성과를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이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고 화합된 공동체의식으로 새시대의 새로운 길을 함께 개척하며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가는 우수한 정신풍모를 보여주는 데 무게를 두고 기획됐다. 공연은 왕청현문화관의 군무 〈성세화개〉로 막을 올렸으며 이어 전 주 각 현(시) 문화관에서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16편의 우수작품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특히 공연종목에는 조선족 특색이 다분한 군무 〈학의 고향〉, 상모춤 〈휘황〉, 군무 〈장고정〉 그리고 〈왕청농악무〉 등이 있는가 하면 고향특색을 잘 보여주는 민족타악기 표현 〈나래치는 화룡〉, 군무 〈아름다운 훈춘〉, 〈된장고향의 정〉 그리고 사물놀이, 이중창 등 이채로운 종목들도 있었는데 현장을 찾은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민족타악기 표현 〈나래치는 화룡〉(화룡시문화관)                            군무 〈된장고향의 정〉(안도현문화관)          군무 〈장고정〉(도문시문화관)   연변군중예술관은 지역사회와 조선족사회의 문화예술을 주관하는 사업단위로서 각종 행사에서 크거나 작은, 보이거나 안 보이는 역할들도 충실하게 수행해왔다. 지난 2023년, 연변군중예술관에서는 제6회 무형문화유산 민족무용양성반을 조직하여 각 지역 문화골간 사업일군들에게 전문지식과 업무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양성반은 권위성, 전문성, 실용성을 두루 갖추었고 실천과 리론지식을 겸하여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무형문화유산에 대해 가르침으로써 민족문화예술의 전승과 홍보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시종 무형문화유산의 보호사업에 커다란 중시를 돌리고 무형문화유산의 발굴과 정리, 보호, 전승, 전승인 양성 등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왔으며 다 함께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정력을 몰부었다. 특히 연변군중예술관은 인민군중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는 데 있어서의 문화예술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에 모를 박고 농악무 등 다양한 지역적, 민족적, 향토적 특색이 짙은 예술작품을 꾸준히 창작해냈다. 또한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방식과 플랫폼을 구축해나가면서 시대발전에 적합한 전파수단으로 문화예술의 화원을 가꾸어나가는 데 주력했다. 특히 사회구역이나 학교, 기업, 단위 등 사회 각계층 군중들을 대상으로 량질의 공공문화봉사를 함으로써 날로 향상하는 문화수요를 만족시켰다. 무용, 미술, 성악, 악기연주 등 다양한 문화예술분야의 무료양성반, 문화하향 등 사업을 지속적으로 활발히 전개하여 문화혜민전략을 힘차게 추진해왔다. 연변군중예술관은 계절별, 주제별, 대상별로 시민이 참여하는 활동을 정밀하게 기획하여 규모별로 맞춤형 강습반을 개설해 시대의 요구에 부합되는 문화봉사를 제공하면서 문화예술의 물결이 군중들 속으로 흘러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해왔다. 문화예술의 수준은 한 민족이나 한 나라의 력량을 집약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이 수행하는 업무들은 민족사회와 지역사회에 커다란 문화예술의 힘을 부여해주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2023년에 또 청소년 방학간예술 무료양성반을 개최하였고 길림성 애만천하아동기금회와 손 잡고 펼치는 무용전문양성반, 소년아동문예공연지도양성반, 조선족장고춤무형문화유산전승연수반, 가야금예술양성반, 길림성우수작사작곡가연수반, 중국 조선족 무용발전포럼 및 무용전시공연과 학습교류회, 중국 조선족농악무대회, 전 주 군중문예정품전시공연, 전 주 도시사회구역문예공연, 전 주 농민문예전시공연 등 다양한 콘텐츠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들을 추진해왔다. 이외에도 온라인 문화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지난해 위챗공식계정과 틱톡계정을 리용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 음악과 무용을 더욱 폭넓고 립체적으로 대외에 홍보하였다. 이외에도 길림성 문화자원봉사자양성반을 주관하여 개최하였는데 양성반에서는 습근평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과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정신을 깊이 있게 학습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공공문화봉사 보장법〉과 〈문화자원봉사조례〉를 관철, 시달하였다. 동시에 길림성의 문화자원봉사대오 건설을 일층 강화함으로써 공공문화 건설 진척에서 문화자원봉사가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도록 추진하였다. 이번 양성반에서는 또 길림성군중문화학회 제7회 회원대표대회와 전 성 문화관 자원봉사모범종목표창대회를 소집했다. 조선족은 ‘문화민족’이다. 그리고 연변은 자치주 정부차원에서도 ‘문화강주’ 전략을 힘있게 추진하고 있다. 연변은 또 ‘가무의 고향’이다. 그만큼 조선족 인민대중들은 문화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고 문화예술에 대한 요구도 상당히 높다. 연변군중예술관은 매체 전파의 속성이 부단히 변화를 가져오는 현대사회의 신매체, 다매체 환경 속에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적절하게 결합하는 사업모식으로 문화예술의 가치를 극대화해가고 있다. 2023년에 대외교류 문화행사로 ‘봄비프로젝트’ 문화관광지원 변강행 문화교류 시리즈 활동을 가동하였다. 그리고 복건성 복주시와 손 잡고 연변에서 다양한 전시공연활동을 펼쳤고 신강 알타이지역에서 당지 인민들에게 조선족 문화예술의 매력을 선 보이면서 여러 지역, 여러 민족 인민들이 다 함께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수립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연변군중예술관이 조선족 최대 집거지인 연변을 근거지로 하고 조선족인민들이 거주하는 많은 곳에 문화예술의 감로수를 제공하고 또 기타 형제민족과의 문화교류도 진행하면서 전파와 홍보 역할을 확실하게 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정확한 현실의식과 미래에 대한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희망찬 래일의 새로운 번영을 노래하는 문화예술의 물결을 이루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호│ 연변군중예술관 사진 제공 | 연변군중예술관 《예술세계》 2024년 제1호
27    《예술세계》2024년 1호 목록 댓글:  조회:567  추천:0  2024-04-11
인간다운 세상을 그리며 ―드라마 《인간세상》을 중심으로 □ 마춘옥     리로(李路) 감독의 드라마 《인간세상(人世间)》(2022년)은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는 량효성(梁晓声)의 원작소설 《인간세상》(2017년)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원작소설은 중국 최고의 문학상인 모순문학상을 수여 받은 작품이다. 작품은 중국 동북의 한 평범한 근로자인 주씨네 삼대 가족사를 통해 지난 50년간 중국사회의 시대적 변화와 그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러한 긴 가족사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같은 세월을 걸어온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놀랍게도 아이치이(爱奇艺)의 데터에 따르면 관객의 절반 이상이 30세 이하의 젊은 세대라고 한다. 본 문장은 드라마 《인간세상》을 중심으로 이 작품이 이토록 많은 관객, 특히 젊은 관객들의 눈길까지 끌 수 있는 매력코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석하려고 한다.     1. 서사위기 시대의 ‘다른 이야기’ 독일의 문예리론 평론가 왈터 벤야민은 미래에 인간은 서사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 그는 20세기의 새로운 서사형식인 ‘뉴스(news)’의 탄생은 인간력사에 오래 영향을 준 ‘이야기(story)’의 종말을 예고한다고 보았다. 부동한 두 서사형식의 주요한 차이는 뉴스는 명확하고 단일한 메쎄지를 전달하는 반면 이야기는 다중적인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았다. 이야기형식은 인간 력사에서 집단이라는 구조가 형성되는 데 효과적이고 오래된 방식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뉴스라는 새로운 방식의 출현과 함께 이야기의 기능이 약화되고 뉴스의 전달로 이야기가 대치된다고 보면서 이에 대해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벤야민의 추측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긴 소설, 긴 드라마, 긴 영화보다도 짧은 영상, 짧은 이야기, 짧은 소식 혹은 정보에 길들여졌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우리는 이미 뉴스화된 짧은 메쎄지만 읽는 시대에 들어섰으며 더 이상 긴 이야기에 시간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서사위기 시대에 《인간세상》의 성공은 분명 어떠한 매력코드가 작동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난산(暖山)은 “이 드라마에는 중국식 현대화 문화코드를 여는 열쇠가 담겨져있다.”(인민넷)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는 거시적인 면에서 중국력사의 가장 큰 변화인 개혁개방시기를 한 가족의 인생사에 녹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보는 평가이다. 본문의 관점은 난산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젊은 관객들의 립장에서 이 드라마에 끌린 것은 거대서사가 아닐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세상》의 매력코드는 오히려 작은 개인의 서사,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하나 또 하나의 작은 인물들의 모습이 더 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본다. 드라마에는 거대서사에서 늘 그려져왔던 신과 같은 존재의 영웅, 희생만 하는 좋은 사람 혹은 악마 같은 나쁜 인간들은 보기 힘들다. 대부분 인물들은 잘못도 저지르고 감정적인 부분도 있는 우리 주변에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즉 거대서사에 익숙한 로년층에 비하여 젊은 세대는 력사지식을 전파하거나 도덕교육을 위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 보다도 관객 자신이 뭔가를 터득하는 그런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젊은 관객들은 더 이상 이쁘고 선량하기만 한 신데렐라이야기나 신격화된 영웅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기대한다. 이 드라마는 분명 여기서 말하는 ‘다른 이야기’에 속한다.   2.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작은 인물들의 이야기 원작 작가 량효성은 한 인터뷰에서 “현시대의 중국사람들은 성공을 권리를 얻거나 재부를 가지는 두가지 경우에 한한다.”고 하면서 “인간은 꼭 이런 ‘성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현시대 사람들의 이러한 ‘성공관’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상식적인 인생관이다. 리성적으로 생각하면 자본이 거의 모든 것을 정의하는 시대에 확실한 돈 혹은 돈을 가져오는 권리를 내놓고 추상적인 다른 무엇을 믿고 추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론리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한가지 ‘성공’을 향하여 열광적으로 달리며 남보다 조금이라도 뒤떨어질가 봐 불안이라는 마음의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드라마는 가끔 다른 사람보다 뒤져도, 또한 꼭 성공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위의 메쎄지를 던진다. 드라마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부단히 변화한다. 례하면 주인공의 부모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지식인은 농민, 로동자보다 낮은 계급이며 많은 경우에 심사를 받고 타도를 받는 대상이다. 하지만 당시에 농민계급에 속한 주씨네 큰아들 주병의(周秉义)는 지식인 가정에서 태여난 학동매(郝冬梅)와 연인관계를 맺으며 또한 동매와의 인연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승진할 기회마저 포기한다. 이러한 병의의 결정에 리해할 수 없는 젊은이들은 동매가 대체 어떤 녀자인지를 보려고 산을 넘어 찾아오기도 한다. 이후 시대가 변하고 타도 받던 동매의 부모님들이 정부기관에서 중요한 인물로 계급적 상승을 한다. 상황이 뒤집어진 셈이다. 병의와 동매의 가정배경 차이는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야기한다. 동매의 부모는 자꾸 일을 부탁하는 병의의 가족과 거리를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매와 병의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여주면서 그 차이를 미봉해간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해가며 살아가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인간의 삶은 항상 필연과 우연이 겹쳐지며 이어진다. 하기에 인간의 삶은 계획해온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주씨네 작은 아들 주병곤(周秉昆)과 정연(郑娟)의 삶은 많은 우연으로 엇갈려있다. 사랑은 우연과 필연으로 엮여진 운명이기도 하다. 병곤이 정연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병곤의 사형 당한 친구 도자강(涂自强)의 안해이며 임신한 상태였다. 그들의 만남은 수상한 두 남자가 병곤을 찾아와서 정연에게 매달 돈을 가져가는 일을 위탁하면서 시작된다. 자주 만나게 되면서 병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좋아하는 교춘연(乔春燕)의 추구에는 무감각하게 대하지만 이미 임신했고 사형 당한 살인범의 안해로 알려진 정연에게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곤은 정연의 아이는 돈을 부탁한 두 남자중 로사빈(骆士宾)이라는 남자의 아이이고 이는 정연이 그에게 강간을 당하여 가진 아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후 병곤은 매부가 쓴 시가 문제 되면서 련루되여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재난을 겪게 된다. 그동안 정연은 병환에 든 병곤의 어머니 그리고 어린 조카까지 보살펴준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들의 사랑은 끝내 결실을 보게 되고 병곤은 정연의 아이를 친아들처럼 대한다. 세월이 지나 아들은 청화대학에 가게 되고 생물적인 ‘아버지’ 로사빈이 찾아온다. 그 다음해, 아들은 추천으로 미국 류학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사망한다. 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병곤과 로사빈은 다툼이 생긴다. 극도로 격동된 두 사람은 서로 밀치면서 다투다가 우연히 로사빈이 치명상을 입어 죽게 된다. 병곤은 이 사건 때문에 살인죄로 감옥에 가며 아들을 잃은 고통과 함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이 순간 관객들은 아마도 내가 만약 병곤이라면 어떻게 이 현실을 견뎌내겠는지 하는 상상을 잠시나마 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주인공은 좋은 결말을 얻기 바란다. 특히 드라마를 보면서는 더 그러하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주인공의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삶은 이 드라마처럼 좋은 사람에게 좋은 결과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좋은’은 형용사로서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감정이다. 드라마의 결말에 정연의 손을 잡고 걷는, 다음 생이 있으면 또 만나리라는 병곤의 모습도 좋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년을 감옥에서 살인의 죄명을 쓰고 살아야 하는 그의 하루하루를 누가 ‘좋은’ 과정이라고 보겠는가! 그럼에도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버리지 않은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불확실성이 가득찬 인간의 인생을, 성공과 발전을 위하여 타인도 저버리는 삶이 아닌 마음속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3. 욕망의 지배하에서의 인간다운 삶이란 상술한 아름다운 사랑도 이 드라마의 매력적인 부분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물들의 매 하나의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행동들에 대한 인간다운 묘사들이다. 인간은 신이 아닌만큼 여러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약점은 악한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잠적해있음을 드라마에서는 여실히 보여준다. 사랑도 주동적으로 추구하고 주변 사람들을 화끈하게 대하며 열심히 돈도 벌어가는 춘연을 보자. 그녀는 병의의 광자구역(光字片) 파가이주방안이 본격적으로 실행단계에 들어가자 갖은 수단을 다 써가며 집을 두채 분여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병의가 원칙 대로 집 한채만 분여 받을 수 있다고 하자 앙심을 품고 병의에게 부정부패죄를 씌워 고소한다. 결국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병의는 아무런 문제 없이 풀려난다. 수십년간 서로 도와가며 살아왔던 춘연과 병곤 사이의 우정에도 금이 간다. 이처럼 돈과 리익 앞에서 인간의 감정은 유리처럼 취약하다. 그외에도 병곤의 친구 소국경(肖国庆)의 안해 오천(吴倩)도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병곤은 식당영업이 번창하여 돈을 많이 벌게 되자 큰집을 사고 부모가 살던 작은 집을 친구 부부에게 공짜로 제공한다. 그러다 후에 큰집의 소유권에 문제가 생겨 살 곳이 없게 되자 친구 부부에게 집을 내달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오천은 그동안 받은 도움에 감사해하기는커녕 되려 자신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신의 상황만을 고려하며 악을 쓴다. 인간의 가증스러운 면을 너무도 잘 그려냈다. 이러한 욕망은 악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 누구나 상황에 닥치면 생길 수 있는 보편적인 마음 상태이다. 하지만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오천과는 달리 남편 국경은 자신의 기준을 고집하는 인물이다. 국경은 성격이 괴벽한 편이라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임무를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을 더 고집하는 모습이 관객들에게 더 감동을 안겨준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회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관계를 과도하게 중요시하는 사회’는 항상 이러저러한 리유 때문에 공정성을 파괴할 것이며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지 않는 례외적인 방식이 통한다. 사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인간관계를 과도하게 중요시하는 사회’보다 모두가 규칙을 지키는 정상적인 사회를 더 바란다.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인간관계에 할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개인의 시간, 개인의 공간, 개인의 선택, 개인의 행복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국경의 정직함은 ‘인간관계를 과도하게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상식적이지 않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태계 독일 출신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개재판을 지켜보고 유명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을 내놓았다. 이 저서에서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는데 즉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고 악은 명령에만 따르는 사고의 무능성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나치범 아이히만 같은 자들을 악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식적인’ 주장과는 달리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은 사고의 무능에서 기원하였다고 해석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계사람처럼 명령에만 충실하게 따르고 행하는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이루는지를 사고하지 않는 무사유 그 자체가 악의 평범성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실업을 한 국경에게 병곤은 병의가 있는 군용무기공장에서 문지기 림시직을 찾아주었다. 국경과 함께 문지기를 하는 다른 남자는 동료들이 무기회사의 부분품들을 가만히 숨겨서 판매하는 일을 눈을 감아주고 있다. 다같은 동료들인데 서로의 관계를 파괴하면서 인심을 잃을 필요 없고 또한 그 동료들도 일정하게 담배나 돈으로 보상을 준다는 점에 더 큰 가치를 둔다. 회사는 점점 망해갈 것이고 결국 그들 모두 실업할 미래는 자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거의 모든 동료들은 회사가 망해가는 현실에 이는 상식적인 행위라고 묵인한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상식적인 관념에 대하여 사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무사고와 묵인은 필연코 더 나쁜 사회를 만들 것이다. 드라마의 첫시작에서 병곤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도자강이 사형을 당하는 현장에 참석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는다. 대부분 동료들은 사형장에서 사형 당하는 자강에 대해 적대적이다. 억지다짐으로 사형장에 갔던 병곤은 당시 친하게 지냈던 자강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결국 자강이 사형 당하자 병곤도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그는 분명 대부분 사형장에 갔던 사람들과는 다른 눈길로 자강의 마지막 길을 보내준 것이다. 오스트리아 윈에서 출생하고 제2차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았던 유태인 정신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크(Victor Frankl)는 《죽음의 수용소에서》(1984)라는 자서전적 수기에서 “절망의 삶을 지켜온 것은 바로 그 어떠한 악렬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의지가 작동되였을 때 생존률이 더 높아지고 더 인간다운 선택들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하면서 인간이 가진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자유는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식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책임지려는 선택의 자유가 인간세상을 더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는 현실에서 이처럼 인간다운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드라마가 우리에게 이러한 다른 이야기를 선 보이면서, 자본으로 모든 가치를 획일화하는 년대에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위안이 되여주었다. 이는 모든 것을 유용성으로 판단하고 계산적인 도구적 리성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문학예술의 가치를 강조하는 작품이다.     《예술세계》 2023년 제5호
25    청춘의 향연, 류행음악의 유망주 댓글:  조회:675  추천:0  2023-08-25
청춘의 향연, 류행음악의 유망주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표현학과 김성박사 □ 신철국     음악회를 마치고 지난 6월 16일 저녁, 연변대학 예술학원 정률성예술극장에서 신선한 음악회가 펼쳐졌다. 중국조선족류행음악의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는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김성박사가 모교에 돌아와 가진 첫 음악회무대였다. 객석을 메운 관객들의 열기에 부응해 울려퍼진 쟈즈음악을 선두로 청중들의 호감을 자극하는 멜로디 10여곡이 련달아 심금을 울렸다. 여러 나라 언어로 된 부동한 풍격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로 화답했고 황홀한 류행음악의 세계로 초대해 기억 저편에 있는 청춘의 기록들을 소환해준 멋진 미남 보컬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거기에 전국 각지에서 온 음악인들과 함께 펼친 합동공연까지 더해져 공연장의 열기는 그야말로 빅뱅 직전이였다. 호소력 짙은 무대 주인공의 미묘한 음성은 어느새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부지불식간에 ‘김성’이란 이름이 화인(火印)처럼 뇌리에 각인됐다. 그리고 바로 그 공연이 끝나서 며칠 뒤 운 좋게도 단독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무대가 아닌 지척에서 마주한 김성박사는 어린 소년처럼 수줍은 인상에 시종 조용한 음성과 잔잔한 미소로 일관했다. 변호사 아버지와 교육자 어머니를 둔 김성박사는 부모님의 권유로 열살 때부터 피아노레슨을 받았는데 일찍 피아니스트 지망생들의 필수곡으로 알려진 쇼뺑의 련습곡들을 소화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무렵 그의 꿈은 예술가가 아닌 축구선수, 그래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학교가 연길시체육학교(축구전업)였다. 그러다 그의 꿈이 음악으로 방향을 튼 건 고중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예술인은 아니지만 음악에 뛰여난 소질을 갖고 있는 그의 어머니가 자식의 천부를 발견하고 연변예술학교 작곡전공에 추천했다. 약 1년간 다니다가 북경으로 향발하여 중국음악학원 작곡학부 주임을 력임했던 국내 저명한 작곡가 시만춘(施万春) 교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연변대학 예술학원 작곡전공에 진학했는데 이 때 운명적으로 그의 인생목표를 완전히 음악으로 정조준하게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과 조우했다. 중국음악학원 시만춘 교수한테서 작곡수업을 받고 있는 김성 “아마 9월 중순 쯤이였을 겁니다. 학교에서 신입생맞이 축하문예야회를 가졌는데 그 때 학교 축구동아리에 있던 멤버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곡이였던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 날 오른 무대는 그한테 큰 울림과 감동을 선사했다. 축구만 하는 줄 알았는데 노래도 잘 부른다는 교우와 선생님들의 과분한 평가와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아안으며 난생처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희열을 느꼈다. 그 때 환장할 만큼 눈부신 무언가가 뇌리를 휘저으며 바로 이것이 너의 꿈이자 목표라고 귀가에 소곤거렸다. 이름할 수 없는 청춘의 격동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고 2010년 4월, 노래와 춤에 장기가 있는 한호, 오성복, 안문천, 김군 등이 그의 주위에 뭉쳤다. ‘완벽한 음성(voice is perfect)’이란 뜻의 영어문구에서 첫 글자들을 뽑아내 ‘VIP’란 감성그룹을 내오고 하루 8~10시간씩 자체로 련습하면서 밤무대로 진출해 연변의 대표적인 류행음악그룹으로서의 내공을 쌓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능력은 가능성이요, 실력은 현실성, 준비된 자한테는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룹 ‘VIP’는 2010년 7월, 제1회 두만강변가요제에서 일거에 대상을 거머쥔 데 이어 이듬해 6월에는 단독콘서트를 개최하여 관객 2천여명을 불러모으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제2회 두만강변가요제에는 초청게스트로 참여하며 식지 않은 인기를 증명했고 연변TV, 연변위성TV의 〈청춘스타트〉, 〈두만강〉, 〈문화광장〉, 〈파워뮤직〉, 〈뮤직비타민〉 등 프로들에 륙속 얼굴을 알리며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현지의 청춘들한테 젊음을 대표하는 그룹으로서의 최고 적임자임을 선언했다. VIP콘서트의 포스터(2011년 6월 11일 촬영) 이 와중에 김성은 연변 최초로 화려한 대형 무대가 아닌 길거리공연에도 나서며 음악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불태웠다. 또한 그 무렵 연변의 유명한 알앤비(R&B)가수로 활약하고 있던 량국철과 함께 처음 듀엣무대에 오르며 그로부터 화음 처리와 선률, 볼륨 처리를 익히기도 했다. 허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룹 ‘VIP’는 실력이 아닌 모종의 원인으로 일보 지척이였던 한국 K팝계 진출에 좌절을 겪었고 리더였던 김성은 그 때 불쑥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류행음악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자신들의 한계에서 오는 회의였다. 보컬과 댄스 실력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해보려고 해도 국내에선 배울 곳이 없었고 선생도 없었다. 공백이였다. 당시 국내의 많은 음악그룹들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했다. 제1기 두만강변가요제에서 VIP그룹이 1등상을 수여 받는 장면 “고민하던 끝에 일단 저부터 나서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였거든요.” 2012년, 연변대학 예술학원 작곡전공에서 방권일 지도교수의 지도하에 학원 최초로 가진 졸업연주회에 관악자작곡 〈금(禁)〉을 발표해 작곡가로서의 실력도 인정 받은 김성은 류행음악을 확실하게 배워 국내 젊은이들한테 전수할 욕심으로 이듬해 단연히 류학길을 선택했다. 한국 백석대학교 음악대학원 실용음악보컬전공 석사연구생 공부였다. 자기가 그처럼 꿈꾸던 실용음악보컬전공에 학적을 올린 김성은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였다고 한다. 헌데 웬걸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을 떠나 일반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용음악은 7화음을 보유한 전통음악에 비해 13화음까지 거느린 쟈즈음악이 기초로서 국내에선 일명 ‘대중음악’ 또는 ‘통속음악’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정작 실용음악학과의 내부에 들어서보니 전혀 딴판이였다. 문맹이 따로 없었다. 외래어로 도배된 실용음악 명사와 일반 대화에도 꼬리 물고 다니는 생경한 외래어 교학환경이 첫밗에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보컬과 수업은 일 대 일이라 몸으로 때우면 되는데 공동과 수업은 강좌가 위주이기에 교수님의 강의에 귀를 강구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강구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제가 ‘문맹’이란 단어를 그렇게 페부로 절감하기는 아마 그 때가 처음이였을 겁니다. 꼭 벙어리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송폼(歌曲形式), 인트로(前奏), 인털루드(间奏), 브릿지(桥梁音乐或桥段), 프리코러스(合唱前), 벌스(歌曲的段落), 아웃트로(结尾部分)… 공동과 수업 때면 홍수처럼 쏟아지는 외래어로 된 전공용어 앞에 김성은 우울증에 걸렸고 그대로 나가다간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그를 사지에서 구해낸 건 그의 인내와 오기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동안 무대에서 겪어왔던 다양한 경험들이 인내와 오기로 되살아났다. 모르는 외래어로 된 전공용어들을 전부 기록해 숙소에 돌아와 번역기로 돌려 부분적 내용을 소화했고 두툼한 외래어사전을 밤샘으로 뒤져가며 교수님과 학우들의 말을 알아듣기에 고심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기적같이 귀가 열렸다. 마치 득음(得音)의 경지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신생(新生)이 따로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활기로 차넘쳤고 갈수록 학업에 재미가 붙었다. 밴드에도 합류하고 음악제작에도 참여하며 성공적으로 석사연구생공부를 마친 뒤에는 바로 한국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박사연구생 공부에 뛰여들었다. 중년의 아저씨들과 함께 박사공부를 하면서 회식이나 모임 때면 구석을 차지하던 ‘꼬맹이’가 2020년 8월, 학위론문 《한국아이돌의 이미지가 중국청소년의 아이돌 관련 상품 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을 발표하면서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최초 외국인박사 졸업생’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얻게 되였다. 예리한 시각과 넓은 안목으로 시시각각 국내 류행음악교육상황과 취업시장을 진단하며 학과의 전공건설에 은근히 왼심을 쏟고 있던 연변대학 예술학원 지도부에서는 그동안 김성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가 이룩한 학문의 성과에 주목하고 있었다. 최근 국가 1급 본과 학과 건설에서 연변대학의 6개 학과가 전국 A급 학과로 선정됐는데 그중 예술학원의 총 5개 학과중 3개 학과가 국가 일류 본과 학과에 선발돼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2020년 10월, 다년간 해외에서 류행음악의 리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배워온 김성박사는 모교에 돌아와 류행음악보컬 강사로 되여 류행음악분야의 후대양성에 정력을 쏟았다. 2021년 8월, 류행음악교연실(현재 현대음악교연실)이 설립되였고 류행음악보컬 본과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을 아낌없이 펼칠 수 있는 활무대로 되였다. 현재까지 류행음악교연실 강사로는 김성박사가 유일하다. 일주일에 약 24시간, 평균 14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일 대 일 수업을 하고 나면 목에 쥐가 날 지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때 자기가 배우지 못했던 아쉬움을 남한테 배워주는 것으로 치유한다는 것이 그처럼 즐거울 수가 없단다. 따라서 학생들한테 더 많은 가르침의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모교에서의 학창시절 전공이였던 작곡은 잠시 소외할 수밖에 없다는 김성박사, 언젠가는 좋은 곡을 써서 학생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고 싶단다. “연변은 가무의 고향입니다. 그러니 물론 류행음악도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전국에 이름난 류행음악가수, 류행음악교육자로 양성시키는 게 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발라드, 팝송, 쟈즈 등 자기가 좋아하는 곡이 따로 있듯이 시대마다 전국을 들썽케 하는 류행곡(류행가)도 따로 있다며 총 24가지 색갈로 류행음악을 색칠해보고 싶다는 김성박사, 시들지 않는 청춘의 향연 속에 오늘날 우리들 류행음악교육의 전초선을 다져나가는 유망주—김성박사의 꿈은 마냥 눈부시기만 하다.   사진 제공 | 김성, 예카이엔터테인먼트 《예술세계》 2023년 제4호
24    젊은 무용수 강매화의 이야기 댓글:  조회:259  추천:0  2023-06-07
젊은 무용수 강매화의 이야기 □리아   어린시절, 한번 쯤은 자신의 미래모습에 대한 동경과 상상으로 꿈을 키워봤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겠다. 어릴 때의 꿈이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지 않고 마찬가지로 우연한 계기로 장래의 꿈을 결정 짓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서 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는 강매화의 무용인생 첫시작도 이렇게 시작되였다. 어려서부터 꿈을 키운다고 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그녀에겐 딱히 그렇다 할 만한 꿈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답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의 인생에 느닷없이 변화가 찾아온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로 학원생 모집을 온 연길시조선족예술단 직원의 눈에 들게 되면서 그 곳의 학원생으로 발탁된 것이다. 처음 접촉해보는 생소한 분야여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면서 만감이 교차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누군가에게 인정 받은 기쁨이 더 컸다. 그렇게 그녀는 불을 향해 뛰여드는 나방이 된듯 어린시절의 겁 없는 패기로 무용의 세계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무 준비 없이 들어선 무용의 세계는 참혹했다. 고된 훈련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게 만들었다. 생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일주일도 채 안되여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울며불며 고집을 부렸고 그런 딸을 보며 부모님은 한달만 버텨보고 그 때도 힘들면 그만두라고 달랬다. 훈련이 힘든 것은 여전했지만 기한을 정하고 보니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한달후면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그 고된 훈련도 마치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해보는 듯하여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느샌가 육체의 고통을 참아가며 훈련하는 데 익숙해졌다. 발톱이 빠지기도 하고 피부가 찢겨지기도 하였지만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훈련을 이어가다가 선생님의 칭찬을 듣게 되였다. 그건 처음으로 들은 무용을 잘한다는 칭찬이였다. 너무나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니 스스로 자신은 무용을 잘해낼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였고 그 일을 계기로 무용수의 꿈을 키우게 되였다. 늦은 나이에 가진 꿈이였기에 욕망 또한 류달리 강렬했다. 2005년에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입단한 이래 강매화는 무용수로 성장해가는 길을 고된 훈련으로 꾸준히 걸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용에 대한 학구열에 갈증을 느끼고 있을 무렵, 2010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부에 입학하여 좀더 전문적으로 무용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였다. 여러 스승들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가르침하에 무용에 대한 전문리론지식과 더불어 다양한 무용쟝르를 배웠고 무용수로서의 마음가짐도 갖추게 되였다. 여직껏 스스로 좋아서 춤을 췄다면 그 때부터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춤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춤을 추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승들의 사심 없는 가르침을 받으며 무용의 참맛에 취하고 무용의 세계에서 헤여나올 수 없는 경지에 빠지게 되였다. 2014년, 학업을 원만히 마친 강매화는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으로 개칭된 직장에서 무용수로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꾸준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였다.   군무 〈부채춤〉의 한 장면(가운데 강매화)   군무 〈장고춤〉의 한 장면(가운데 강매화)   사실 강매화는 학원생 때에도 연변대학 재학시절에도 훈련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틈틈이 공연무대에 서다보니 무대경험이 여느 선배 무용수 못지 않게 풍부하였다. 학원반에 들어온 이래 각고의 노력을 거쳐 이듬해부터 여러 공연활동과 콩쿠르에 참가하였고 몇년후에는 군무의 리더로 무대에 서면서 많은 성과들을 거두었다. 2010년, 제18회 길림성예술시리즈콩쿠르에서 〈한삼춤〉으로 청년조 1등상을; 2010년, ‘우리는 한가족’ 제2회 전국소수민족대련환활동에서 〈메아리〉로 1등상을; 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경축공연에서 〈연변찬가〉로 공헌상을; 2014년, 제22회 길림성예술시리즈콩쿠르에서 〈농악무〉로 1등상을; 2019년, 제11회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개막식 공연에서 〈봄의 꿈〉으로 2등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7년, 제1회 중국 · 연변 조선족문화관광절 개막식 공연; 2018년, CCTV-15 ‘새시대를 노래하다(唱响新时代)’ 공연; 2019년, 내몽골에서 열린 제14회 홍산문화관광절 민족단결우호교류공연; 202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 경축공연 등 다양한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이러한 묵직한 성과와 경력들은 그녀로 하여금 2013년, 2016년, 2017년에 각각 연길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및관광국 선진사업자로 선정되고 2019년에 연길시인력자원 및 사회보장국 특수공헌상을 수여 받는 등 개인영예도 얻게 하였다.   군무 〈한삼춤〉의 한 장면(선두에 강매화)   현재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강매화는 17년에 달하는 문예사업종사경력을 갖고 있다. 상술한 활동경력들을 제외하더라도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계절의 노래〉 공연활동에도 현재까지 1,600여차 참가했고 하향공연에도 100여차 참가했지만 그녀에게 있어 가장 힘들었고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65주년, 70주년 세차례 경축공연이였다고 한다. 제일 완벽한 무대를 선 보이고저 팀원들과 함께 며칠씩 훈련실에서 버텼고 점적주사를 맞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훈련에 몰입하군 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는 희열에 벅차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개막식 공연에 참가하였을 때엔 우리 민족을 전국에 널리 자랑하였다는 생각에 무용수란 직업을 선택하기 참 잘했다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다양한 무용쟝르를 섭렵해온 강매화는 그중에서도 조선족장고춤에 류달리 애착심도 강하고 그 표현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고 한다. 장고를 메고 참가한 2018년, 장춘과 광주에서 열린 관광절설명회; 2021년, 태원, 성도, 란주에서 열린 연길투자유치설명회 등 다양한 무대경험으로 그녀의 장고춤 실력은 현저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그녀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장고춤 실력은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지도부의 인정을 받아 조선족장고춤 주급 전승인으로 추천되였다.   독무 〈장고춤〉을 표현하고 있는 강매화 우연한 계기로 무용수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고 다소 늦게 시작된 꿈이였지만 이젠 무용을 떠날 수 없는 강매화가 되였다.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훌륭히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부모님과 여러 스승들,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지도부의 관심과 로고가 든든한 뒤받침이 되여준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더 높은 단계의 무용수가 되여 중국이라는 이 커다란 땅에서 우리 민족의 춤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자손만대에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강매화의 또 다른 꿈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예술세계》 2023년 제2호
23    《예술세계》2023년 2호 목록 댓글:  조회:259  추천:0  2023-06-07
22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를 만나다 댓글:  조회:354  추천:0  2023-03-07
민족가무극 〈정률성〉, 국가급 무대에 오르기까지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를 만나다 □ 리은희       정률성은 걸출한 작곡자이자 인민음악가이고 무산계급혁명음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며 ‘군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그는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 3대 음악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1999년에 광주시가무단에서 창작, 공연한 무용극 〈성해 · 황하〉(문정아 총연출), 2005년에 운남성 옥계시에서 창작, 공연한 〈섭이〉(전동범 총연출)에 이어 2022년 12월 18일, 19일에 중앙가극원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손 잡고 다듬은 민족가무극 〈정률성〉이 중앙가극원 극장에서 공연되였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3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창작, 공연한 이 야심작은 연변대학 력사상 국가급 무대에 올린 첫 가무극이다. 가무극이 쾌거를 거두게 된 데는 창작팀과 배우들의 로고와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있다. 특히 연변대학 예술학원 최옥화 원장은 이 가무극의 총기획자로서 가무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혼신의 력투를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가무극으로 창작되기까지     정률성은 조선반도 남부 광주에서 출생하여 1933년 19살의 젊은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중국에 와서 항일구국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혁명예술가로 성장하였다. 그가 창작한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원명 〈팔로군행진곡〉)는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용감히 싸우도록 광범한 군민들을 격려하였다.     2019년 봄, 항일가곡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최옥화 원장은 ‘군가의 아버지’ 정률성을 더 깊이 연구하고 선전할 몇가지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첫째, 정률성의 이야기는 영화, 연극,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되였지만 모두 인물전기에 중점을 두었고 음악창작면에서 정률성이 열혈청년으로부터 혁명예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각종 시련을 딛고 ‘군가의 아버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정리하지 못했다. 정률성은 일생을 음악창작에 바쳤고 음악은 초불마냥 그의 령혼을 비췄기에 음악창작을 주선률로 하면서 그의 혁명예술가의 형상을 그려야만이 정률성의 삶을 진정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둘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작곡가 섭이의 이름을 딴 섭이음악학원, 섭이광장, 섭이대극원, 섭이기념관이 있고 선성해의 이름을 딴 성해음악학원, 성해음악청, 성해극장, 선성해기념관, 선성해문화광장, 선성해문화예술창작중심 등이 있었지만 정률성에 관해서는 할빈의 정률성기념관이 전부였다.     셋째, 정률성은 비록 타국에서 태여났지만 중국공산당이 양성한 우수한 혁명예술가이고 항일전쟁을 통해 저명한 인민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섭이, 선성해에 이은 또 한명의 걸출한 작곡가이며 무산계급혁명음악의 개척자이다. 정률성은 중국에서 혁명의 길을 걷고 점차 중화를 사랑하는 혁명예술가로 거듭난 인물로서 국제적인 문화 전파가치가 있다. 또 중국문화의 포용성을 발양하고 중국공산당의 영명함과 위대함을 더 널리 선전하며 인류 운명공동체의식을 구축하는 데도 심원한 의의가 있다.     넷째, 정률성은 2009년에 중공중앙 선전부, 조직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 100명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였다. 하지만 빛나는 영예에 비해 그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하여 관련 예술작품을 창작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인민음악가를 알려야 했다.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오른쪽 세번째)과 연변대학 예술학원 지도부 성원들     마침 2019년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창작 80주년이 되는 해이자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을 2년 앞두고 있는 해였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자인 정률성 관련 작품 창작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 최옥화 원장은 가무극 〈정률성〉에 대한 초보적인 창작계획을 세우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동료들과 함께 정률성의 친우들을 방문, 취재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가무극의 실행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였다.     2019년 10월 19일, 최옥화 원장은 정률성의 경전작품을 토대로 한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최종 계획안을 연변대학 지도부에 제출하였다. 시대의 주선률을 고양하고 소재가 참신한 이 계획안은 학교 지도부의 주목과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해 10월,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는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창작에 착수하였고 12월에 주요 창작일군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연변대학 예술학원 원장 최옥화가 총기획을, 중국음악학원 작곡학부 교수 우영일이 예술감독을, 무장경찰부대 정치부 문공단 전임 단장 장길의가 씨나리오를,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 향개명이 총감독을 맡기로 결정하였고 극의 주요사상, 창작류형, 창작내용, 예술형식, 실천기획 등을 기본적으로 확정하였다.       처음에는 가극, 음악극 혹은 무극 형식으로 작품을 표현하려고 계획하였으나 토론을 거쳐 최종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음악과 무용 등 방면의 장점을 내세워 가무극 형식으로 시대모범을 노래하고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혁명이야기를 엮어가기로 하였다. 또한 조선족은 가무에 능하기에 정률성의 무대형상을 더욱 풍부하게 부각하는 데 가무극이 가장 적합하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의 인터뷰에서       그후 창작팀은 력사자료 수집, 관련 인물 취재, 현장 탐방 등 준비사업을 착실히 진행하였고 200여차의 창작토론회의와 6차례의 수정을 거쳐 2020년 6월에 최종 씨나리오를 완성하여 국가판권국에 등록하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와 총연출 심량(가운데, 중앙가극원), 향개명(오른쪽, 연변대학 예술학원)     2020년 8월 19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정률성음악연구중심을 설립하여 정률성의 혁명정신을 연구하고 선전하는 데 훌륭한 플랫폼을 갖추게 되였다. 2020년 9월 3일, 민족가무극 〈정률성〉소식공개회를 개최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모았으며 2020년 10월 25일, 정률성작품음악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생방송 형식으로 가무극의 선전활동을 펼쳤다.     2021년 4월 28일, 민족가무극 〈정률성〉이 연길아리랑극장에서 첫막을 열었다. 4막 11장으로 된 이 가무극은 음악창작면에서 일부 대표적인 원작 소재를 채택한 외 기타 음악은 새로운 형식으로 재창작을 거쳤는바 사실주의기법과 전통작곡기법이 결부된, 서로 다른 풍격의 창작가곡 21수를 전반 극에 관통시켰다. 또한 음악으로 인물형상을 부각하고 극의 전개에 알맞는 무용음악으로 작곡가 정률성의 인물성격을 생동하게 보여주어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가무극은 2021년 5월에 중화인민공화국교육부 전국 ‘100부 홍색명작우수극종목’ 전시방영명단에 이름을 올려 온라인으로 전국에 전시되였고 그 해 7월에 국가문화및관광부 제2회 전국우수음악극전시공연 극종목으로 선정되였으며 2022년 1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교육부 대학교사상정치사업 육성건설프로젝트중의 대학교창작문화정품보급행동계획에 입선되였다.       중앙가극원 무대에서 빛을 발하기까지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시연을 마친 후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는 세차례나 되는 좌담회를 조직하여 여러 분야 전문인사들의 수정의견을 수집, 정리하였다. 그후 대본, 줄거리, 대사, 무대설계, 음악, 무용, 무대배치, 조명 등을 새롭게 고치면서 중앙가극원과 손 잡고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 만단의 준비를 갖췄다.       2022년 8월초, 중국음악가협회 한신안 주석의 소개로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과 련락이 닿았다. 8월 16일, 북경에서 중앙가극원 책임자들과 만나 북경에서의 공연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10월 17일, 중앙가극원 창작팀과 연변대학 예술학원 창작팀이 온라인으로 공연협의회를 열어 초보적인 공연시간과 작품의 질적 향상을 위한 연출팀을 결성하였다. 11월 5일, 중앙가극원 감독 심량, 주요 배우인 리상, 곽등등, 무대감독 리신희, 조감독 리환 등 다섯명이 십여일간 연변대학 예술학원 창작팀과 함께 수정방안을 토의하고 최종 방안을 결정했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의 인터뷰에서       모두의 노력으로 민족가무극 〈정률성〉은 꼼꼼한 준비과정을 마치고 2022년 12월 9일과 10일에 북경 중앙가극원 극장에서 공연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부득이한 사정으로 공연시간이 12월 18일과 19일로 미루어졌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공연을 둘러싸고 토론중인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왼쪽)과 총기획자 최옥화     12월 11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92명 배우들이 북경에 도착하였고 12일부터 중앙가극원 제작진, 배우들과 함께 본격적인 훈련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 중앙가극원의 많은 배우들이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았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배우들까지도 련이어 감염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앙가극원 책임자들은 공연을 미루자는 제안도 했지만 100여명 배우들과 창작팀 성원들이 북경에까지 가서 공연도 못하고 되돌아온다는 것은 도저히 안될 일이였다. 나의 확고한 의지를 보아낸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은 함께 곤난을 극복하고 일을 추진시키자면서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우리 두 협력단위의 배우 260명 가운데서 80%가 양성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정 대로 이틀간의 공연이 진행되였다. 그 때의 마음고생은 이루 다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의 인터뷰에서       특수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12월 18일에는 600여명의 관객들이 현장을 찾아 직접 공연을 관람하였고 19일에는 온라인으로 전국에 생방송되였는데 그 시각 동시 접속인수가 210만명에 달했다. 중앙텔레비죤 제3채널, 북경시텔레비죤방송국에서 공연소식을 보도하였다. 중국문예평론가협회 고문인 우평은 “근래 보기 드문 가무극의 가작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창착팀과 배우들     민족가무극 〈정률성〉은 북경의 관객들 앞에서 질 높고 참신한 형식과 효과를 자랑하면서 최고의 무대를 선 보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인 연변대학 예술학원 최옥화 원장은 “이 가무극은 소재가 참신하고 드높은 사상성, 시대성이 충분히 반영되였다는 데서 계획단계부터 학교 지도부 나아가 주당위 선전부, 성당위 선전부와 기업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삶의 려정을 선 보인 이 작품은 정률성을 기념하는 길에서의 첫걸음이다.”라고 표명하였다.     최옥화 원장은 “이번 공연은 사생들의 무대실천능력, 교수연구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시공간을 초월한 예술창작형식으로 전교 사생들을 ‘산업교수 융합’ 실천의 길로 이끌었으며 국가일류본과생 전업인재양성의 새로운 모식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금후 이 작품이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재연레퍼토리로, 학생들에게는 특수한 사상정치수업과목으로 되기 바란다.”고 하였다.       향후의 사업에 대해 최옥화 원장은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성공적인 공연을 기반으로 굵직굵직한 계획들도 세웠다. “금후 정률성문화예술절을 개최하여 정률성음악 연구, 군가주제 회화, 서예 전시, 문화관광 창의상품 설계전람 등 활동을 조직할 것이며 국내외 고등학교, 예술단체, 과학연구기구와 함께 다양한 형식의 학술교류와 예술문화교류를 진행하여 정률성의 혁명정신과 음악사상을 널리 선전하고 전승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사진 제공 | 연변대학 예술학원 《예술세계》 2023년 제1호
21    《예술세계》2023년 1호 목록 댓글:  조회:341  추천:0  2023-03-03
20    《예술세계》2023년 주문통지 댓글:  조회:429  추천:0  2023-02-09
국내애니메이션제작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 □ 리은희       애니메이션 즉 그림영화 하면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대두아들과 소두아빠(大头儿子和小头爸爸)》가 떠오를 것이다. 방송시간을 기다려가면서 재밌게 본 그림영화이다. 하지만 CCTV-14채널에서 방송된 이 그림영화 제작에 한 연길기업이 참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 기업이 바로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이다. 우리 나라에서 지명도가 있는 애니메이션제작회사중의 하나로서 창작 기획팀, 애니메이션제작팀, 후기운영팀 등으로 구성된 이 회사는 국내적으로 기술실력이 뛰여난 애니메이션 제작인원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재 과정에 알게 된 더욱 재미 있는 일은 회사 사장 한성호의 전공은 회계학과라는 것이다. ‘하다면 혹시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은 건 아닐가?’ 그런데 사장의 대답은 필자의 추측에서 한참이나 벗어났다. “전혀요. 그림 그릴 줄도 몰랐습니다. 소학교 때 도화성적이 낮아 3호학생이 못된 기억이 있는걸요.” 잇따라 필자의 머리속에 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어찌하여 미술, 애니메이션 분야에 뛰여들게 되였을가?’ 그리고 뒤이어 사장이 풀어헤친 이야기보따리에 곧 그 의문이 풀렸다. 2013년에 설립된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의 전신은 단동시 동명다매체스튜디오이다. 회사 운영방향을 애니메이션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 그 계기로 되였다. “2004년, 나의 친구가 애니메이션사업을 추진하던 중에 합작파트너의 갑작스러운 퇴출로 사업을 접게 되였습니다. 문제는 당시 친구한테 애니메이션기술자들을 알선해준 장본인이 나였는데 그 분들이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할수없이 내가 그 분들의 숙식을 도와주게 되였고 그 와중에 본의 아니게 그 쪽 분야에 개입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지요…” 그들은 중앙텔레비죤애니메이션제작기지의 관리를 받으면서 당시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기획한 2차원 애니메이션제작에 기본상 다 참여했다고 할 만큼 애니메이션업계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신 대두아들과 소두아빠》는 유일한 가족교양극으로서 시청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10여년째 제작, 방송되고 있다. 그외에도 《꼬마병사 장알(小兵张嘎)》(2005년), 《천개의 물음(千千问)》(2005년), 《천검(天剑)》(2006년), 《울란치치그(乌兰其其格)》(2007년) 등 작품들의 제작에 참여해 애니메이션업계에서 든든히 자리매김을 했다. 2011년 5월, 단동시 동명다매체스튜디오의 작품제작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성호멀티미디어제작유한회사(诚浩多媒体制作有限公司)로 승격하였다. 당시 대표작으로는 《아기범의 귀향(小虎还乡)》, 《미후왕(美猴王)》, 《수만금산(水漫金山)》, 《하늘에서 떨어진 저팔계(天上掉下个猪八戒)》 등이 있다. 2012년 7월, 민족문화를 발양하고 고향과 사회에 보답하려는 취지하에 회사를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 옮겼다. 그 때 출품한 대표작들로는 《미래보전(未来宝典)》, 《옥기린(玉麒麟)》, 《철갑상어모험기(中华鲟历险记》 등이 있다. 연변의 애니메이션산업을 적극 추동하고 진일보 발전시키려는 취지하에 2013년 4월, 전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를 설립했다. 뒤이어 2014년에는 3D애니메이션업종을 늘여 기업의 자체 경쟁력과 종합적인 효익을 향상시킴으로써 기업발전의 발걸음을 크게 추진하였다. 주요 업무범위는 2차원, 3차원 애니메이션 제작, 그래픽 제작, 디지털미디어 제작 등이다. 현재 국내 일류의 애니메이션 창작자, 제작자, 시장개발일군들을 보유하고 있다. 주요 창작멤버들로는 왕립인(베테랑감독, 애니메이션산업 종사경력 20년), 곽춘복(베테랑감독, 애니메이션산업 종사경력 30년), 리영(베테랑감독, 애니메이션산업 종사경력 16년, 애니메이션제작자 3급 자격증 획득), 산복건(애니메이션 전문 프로듀서, 애니메이션산업 종사경력 11년) 등이다. 연길에 있는 애니메이션종사자는 70여명이고 외국에 200여명이 있는데 그들과는 온라인으로 원고를 주고 받는다. CCTV-14채널 어린이방송프로 3분의 1 정도가 이들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회사는 장대해졌다. 회사는 다년간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애니메이션그룹과 량호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부 또 한부의 다채로운 국산애니메이션을 출품하여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2018년, CCTV애니메이션유한회사로부터 ‘중기제작기지(中期制作基地)’로 명명되였는데 전국적으로 4개밖에 안된다. 《신 대두아들과 소두아빠》, 《미인어(美人鱼)》, 《천안의 귀환》시리즈, 《솜사탕과 구름엄마》시리즈를 포함한 고차원, 고품질 그리고 관객들의 평판이 높은 애니메이션걸작들을 합작 제작하면서 회사의 지명도가 나날이 상승해갔다. 2019년에 이르러 6,000여분(分) 길이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2,000여만원의 수익을 창출함으로써 전국 애니메이션업종에서 그 제작량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때 출품한 대표작들로는 《치치핑핑(齐齐苹苹)》, 《이야기할머니》, 《동물친구들》 등이 있다. 그중 《치치핑핑》은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의 담당 애니메이션작품이다. 2019년에 ‘국가첨단기술기업’으로 지정되였다. 이는 회사가 국가중점지원을 받고 있는, 성장성이 높고 잠재적인 경제효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업임을 말해준다. 2019년에 회화, 음악, 촬영 분야와 관광상품개발사업을 전개할 목적으로 연변감나무미디어유한회사(延边感之树传媒有限公司)를 설립하고 주로 회화 전시, 영상물, 음악작품 기획, 제작에 정진하고 있다. 그리고 멀티미디어비디오작품을 제작하는 등 작업을 펼쳐나갔으며 이미 국내의 브랜드영상물제작회사들과 합작의향협의서를 체결하였다. 최근년간 회사에서 제작에 참여한 굵직한 애니메이션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18년, 《천안의 귀환(天眼归来)》 시즌 2, 시즌 3, 《솜사탕과 구름엄마》를 출품하였다. 2019년, 《천안의 귀환》 시즌 4—시즌 6, 《신 대두아들과 소두아빠—영웅꿈(新大头儿子小头爸爸—英雄梦)》, 《동물친구들》 시즌 3을 출품하였다. 2020년, 《신 대두아들과 소두아빠—지능꼬마주인(新大头儿子小头爸爸-智能小当家)》, 《솜사탕—핑크베이비(棉花糖-粉红宝贝)》, 《동물친구들》 시즌 4를 출품하였다. 2021년, 《신 대두아들과 소두아빠—즐거운 가족캠프(新大头儿子小头爸爸-欢乐亲子营)》, 《나사못》, 《나타와 트랜스포머(哪吒与变形金刚)》를 출품하였다. 《신 대두아들과 소두아빠―영웅꿈》 포스터   《천안의 귀환》 포스터 장기간의 발전과정을 거쳐 회사는 뛰여난 애니메이션 제작능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 탄탄한 실력을 토대로 향후 지역적 특색과 풍부한 민족적 특색을 지닌 문화정수를 발굴, 정리하여 조선족민간이야기를 다룬 창작애니메이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혁신과 탐색을 이어가고 있다. 다년간 영상매체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둔 회사는 당과 정부로부터 선진단위, 인재유치혁신공헌상(引智创新贡献奖), 외주봉사스타기업, 아웃소싱스타기업상(服务外包明星企业奖), 소비자만족단위, ‘계약신용 중시’ AA급 기업, 성장형 스타기업, 로동보장준법성실단위 등 영예를 획득하였다. 취재를 마무리하며 필자는 한성호 사장과 회사의 미래와 비전을 두고 대담을 나누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업종에 몸 담글 생각인가요?” “그럼요. 재미 있습니다. 낚시질하는 재미라고 할가. 직원들이 밤을 패가며 제작한 작품이 방송에 나가는 것을 볼 때면 그 짜릿한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외에 또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요?” “애니메이션 제작에 종사하는 한편 그와 비슷한 분야로 가지를 뻗어가고 있어요. 회화, 음악, 틱톡 쪽으로 말입니다.” 현재 한성호 사장은 이중 신분이다. 하나는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 사장, 다른 하나는 장백산예술가협회 회장이다. 이중 신분으로서의 그 분의 사명감은 그 누구보다도 투철하다.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 사장으로서의 역할이나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사 사장으로서의 사명은 회사의 발전방향과 관리라고 봅니다. 아무리 전업성, 기술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회사라면 우선 정확한 발전방향을 잡고 그 방향에 따라 잘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관리는 회사내부 관리와 회사 고객에 대한 관리 두가지를 말합니다. 물론 회사의 업무, 특히 기술에 대해서 너무 모르면 방향의 제정과 그에 따르는 관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장백산예술가협회 회장으로서의 역할이나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조선족화가들의 작품 전시플랫폼이 협소합니다. 다른 성, 시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장백산예술가협회를 꾸렸지요. 장백산예술가협회 회장으로서의 사명은 미술, 촬영, 음악 등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서로 교류할 수 있고 나름 대로 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주류협회와 발 맞추어 가면서 ‘무대에 설’ 기회가 없는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또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서 그 분들이 제나름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게끔 하고 또 그런 활동을 통하여 시장을 형성하고 형성된 시장에서 경제적 효익이 나오게끔 하는 겁니다.” 역시 애니메이션이 천직인 걸가. 한성호 사장은 본업과 관련된 이야기로 취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는 애니메이션에 아동영화 혹은 아동만화라는 딱지가 붙어있는데 실제 애니메이션은 어른이건 아이건 할것없이 볼 수 있는 영상물 표현방식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른 관람용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들도 많이 나오고 있고 또 실사영화에서도 특수효과는 실제 애니메이션기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을 맞으면서 애니메이션으로 〈룡룡의 연변탐험〉이라는 홍보영상을 만들었는데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로부터 효과가 아주 좋았다는 평가도 받았고 앞으로 애니메이션방식으로 계속하여 진행해야 한다는 긍정도 받았습니다.”   사진 제공 | 연길 금성문화과학기술유한회사 《예술세계》 2022년 6호
18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3) 댓글:  조회:1708  추천:0  2022-07-25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3) □ 손룡호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는 어쩌다보니 화룡시 룡수평사람들이 주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다. 그들은 아마츄어배우들이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주역이든 조연이든 개의치 않고 연기에 열연한다. 소박하고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연기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꽉 사로잡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협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룡수평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보기로 하자. 미니영화 《량심》에서의 박철룡 다재다능한 박철룡 박철룡은 한때 영화해설원이였다. 어릴 적부터 박철룡은 여러가지 소리를 잘 모방하여 동네에서 재간둥이로 인기가 많았다. 저녁에는 고양이 울음소리로 친구를 불러냈고 이른새벽에는 수탉 울음소리로 동네사람들을 깨운 적도 있었으며 개구리 울음소리로 또래 친구들을 논판으로 불러내기도 하였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는 친구들의 뒤에서 느닷없이 개 짖는 소리를 내여 모두를 놀라게 하는 지꿎은 장난도 쳤다. 박철룡의 소리모방 기교를 따라해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모두 두손을 들었다고 한다. 목소리에 변화를 주는 이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1970년대 중반기에 조선영화 《꽃 파는 처녀》가 중국의 여러 마을에서 상영되였을 때 화룡현영화발행상영공사에서는 박철룡에게 제6방영대 영화해설을 맡기였다. 당시 영화화면을 보면서 남녀로소의 목소리와 억양을 이야기의 발전과 정서에 맞게 변화시키며 표현한 박철룡의 해설에 많은 시청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박철룡은 60대 중반을 넘었지만 지금도 40여년전의 《꽃 파는 처녀》 영화 해설을 대본도 보지 않고 줄줄 외우면서 연기해낸다. 그 때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으면 지금까지도 그 실력이 녹 쓸지 않았을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박철룡은 한때 신문사 통신원이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연변일보사 통신원으로 오래동안 활약하였다. 배움에 게으르지 않고 새로운 문화현상에 남달리 민감했던 그는 처음에 기사만 쓰다가 주인공의 모습을 신문에 사진으로 올릴 필요성을 느끼고 사진기를 사서 촬영기술을 터득하였다. 하지만 인생이란 생각 대로 안되는 법이다. 다재다능했던 박철룡이지만 언제부터인가 고향에 돌아가 조용히 살기 시작했다. 가을이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평강벌이 좋았다. 덩실한 기와집, 쭉 뻗어나간 콩크리트길, 아담한 채소밭, 끼마다 하얀 이밥, 시원하고 얼큰한 배추김치, 보글보글 토장국, 한잔 술… 모든 것이 그에게는 행복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설립 소식을 듣게 되였다. 영화해설원, 신문사 통신원으로 활약했던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한달음에 협회 설립현장으로 달려갔다. 2017년 1월,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서 미니영화 《눈물》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영화 스토리는 간단하다. 《눈물》이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모 영화제작사에서 배우모집을 왔고 배우마다 눈물연기를 하기 위하여 자기 삶을 돌이켜보면서 가장 눈물나는 장면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이다. 나는 박철룡에게 안해가 장기간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외롭고 초라한 남편 역을 맡겼다. 이미 60 고개를 넘어선 박철룡은 대사암송에서는 약간 뒤처졌지만 표정연기와 눈물연기에서는 다른 사람을 뺨칠 정도였다. 2021년, 국경절 경축작품으로 미니영화 《량심》을 촬영하게 되였다. 《량심》은 김령감이 몸이 아플 때 지부서기한테서 꾸었던 돈을 채 갚지 못하고 있다가 병이 도져서 숨지면서 자기 안해와 딸에게 두 손가락을 쳐들어보이며 2만원을 꼭 갚아주라는 내용의 영화이다. 영화 주역을 맡은 박철룡은 안해 역을 맡은 구정희와 딸 역을 맡은 현순자를 불러 련 며칠 연기훈련을 지도하면서 영화의 순리로운 제작에 최선을 다하였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두 손가락을 쳐드는 장면을 찍을 때, 그의 리얼한 연기에 현장에 있던 모든 제작진들이 눈물을 떨구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량심’이 있기 때문이다. 박철룡은 그 량심을 지켜 평강벌을 떠나지 않았고 영화문화에 몸을 담그고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협회의 일이라면 밤이고 낮이고 룡수평에서 연길까지 무작정 달려오는 그다. 폭우도 설한풍도 그의 열정을 막지 못한다. 박철룡이 우리 영화문화의 발전에 헌신한 업적과 그의 재능을 기리여 협회에서는 화룡시 룡수평 룡원촌에 있는 박철룡의 집을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촬영기지로 정하고 박철룡을 지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머지않아 박철룡 극본, 박철룡 주역이 된 새 영화가 출품될 것으로 보여진다.   미니영화 《눈물》에서의 김기운 훌륭한 영화인이자 만능해결사인 김기운 2018년 2월의 어느 날 오후, 미니영화 《눈물》의 배우 선발에 응해나선 후보들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한 남성이 발음이 똑똑치 않아 탈락되자 박철룡이 자기 친구를 추천했다. 일찍 영화해설원으로 일하면서 영화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그의 안목을 믿고 나는 추천을 받아들였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김기운은 준수한 이목구비, 똑똑한 발음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즉시 테스트에 통과되였다. 나는 대본을 주면서 다음날 연기훈련장소로 나오라고 했다. 이튿날 훈련장소에 등장한 김기운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손에 대본을 들고 있지 않았다. 놀라웠다. 어제 늦은저녁에 대본을 받았는데 하루밤 사이에 다 외웠단 말인가? 김기운은 침착하게 대본내용과 정서에 따라 연기를 쭉 이어갔다. 눈가에 고였다가 눈귀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은 연기가 아닌 진실이였다. 대본을 완전히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흡수하여 아무런 꾸밈도 없이 소박하고 진실하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펼쳐냈다. 그의 놀라운 연기는 현장을 감동시켰다. 그후로 나는 여러 영화에서 그에게 부동한 인물 역을 맡기였다. 《눈물》에서 사랑했던 님을 잃고 가슴 터지는 인물 역을, 《생명》에서 의사 역을, 《설날》에서 뒤집 령감 역을, 《아버지의 유산》에서 약삭바르게 리익을 추구하는 둘째사위 역을, 《빚》에서 암으로 앓고 있는 남편 역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니》에서 ‘홀아비’ 역을, 《깊은 인연》에서 아버지 역을, 《량심》에서 촌의사 역을 맡게 하였다. 그는 그 어떤 역할이든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어떻게 다각적 인물연기를 그토록 잘해낼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의 연기를 두고 억지스러움이 없이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이웃처럼 여겨진다는 시청자들의 평도 끊이지 않았다. 보매 원체 출중한 영화배우감이였다. 김기운은 교원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왔었기에 례의범절에 밝고 정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였다. 동창들의 모든 일에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직심으로 자기 일처럼 돕는다. 사회활동무대가 넓고 생활경력이 풍부하며 인간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과 일들에 부딪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대담히 주견을 세워 옳바르게 처사하기도 하며 힘 약한 사람들의 고초를 헤아리고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의 성숙한 연기 자체가 곧 그가 살아온 생활이였고 그가 거쳐온 감정세계였기에 연기를 함에 있어서 그는 막힘이 없었고 꾸밈이 없었다. 자기가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연기였다. 아마츄어배우들로 모인 협회에서 이런 훌륭한 연기실력을 갖춘 사람을 만난 것은 정말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김기운은 그동안 수차 여러 영화에서 주역을 맡으면서 다방면 인물연기는 물론 촬영설비, 복장, 소도구, 차량 등 필수품들의 준비와 사용방법에 대해서까지 머리속에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현장 조직자 역할을 하는 부감독으로 적격이였다. 영화 《엄마》의 부감독을 맡은 김기운은 주제곡 작곡가를 섭외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확신이 없이는 쉽게 나서지 않는 그였다. 과연 그는 국가 1급 작곡가 박송철을 섭외했다. 위해에 있는 박송철은 영화 주제가사를 받은 후 그 날 밤으로 창작에 들어갔다. 미구에 애통함과 후회막급해하는 주인공의 심리와 정서를 아주 잘 반영한 선률이 탄생했다. 이뿐만 아니라 합창을 록음하는 데 드는 비용 역시 김기운이 해결하였고 영화제작인까지 섭외하여 필요한 제작자금을 마련하게 되였다. 부감독이란 이름만 달아주기에는 그의 공로가 너무나도 컸다. 영화제작인이 해낼 일을 그가 거뜬히 해낸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의 제작인 세명중에 그의 이름도 올리게 되였다. 촬영과정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영화 《아버지의 유산》을 촬영할 때였다. 이미 지정한 녀배우가 중도에서 사유로 그만두게 되였다. 촬영 도중에 어데 가서 알맞는 배우감을 물색한단 말인가? 당황해난 나는 인맥이 넓은 김기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내로 적중한 인선을 물색해주세요.” 과분한 요구임에도 김기운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몰고 떠나갔다. 한시간 만에 그는 녀성배우를 모시고 왔다. 이목구비가 유순하고 평온하여 보모 역에 적중하였다. 김민정이라고 부르는 그녀는 대본내용을 읽어가면서 연기를 상상해보더니 그 날 오후에는 직접 촬영에 나서서 만족스러운 연기실력을 과시하였다. 김기운은 그후에도 허승한, 구정희, 정철복 등 여러 배우들을 추천했다. 이들은 아마츄어배우임에도 《설날》, 《아버지의 유산》, 《황혼의 정》 등 작품에서 주역을 맡아 성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화현장기록(场记) 업무는 십분 중요한 일환이다. 대본을 손에 쥐고 극본에 표기된 대화내용과 촬영요구, 촬영순서가 루락되는 것이 없는지 하나하나 체크하는 일이다.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 내내 마땅한 현장기록원이 없어서 속을 태웠었다. 그러던 중 김기운이 연길시 건공소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로미선선생을 추천해왔다. 나는 로미선에게 영화 《엄마》의 현장기록원을 맡기였다. 로미선은 쾌히 접수하고 기록원 업무를 열심히 수행하였다. 빠진 대목은 즉시 지적하였기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착착 진행할 수 있었다. 현재 김기운 자신은 물론 그가 추천한 인원들 모두 협회에서 주역배우로, 책임일군으로 활약하고 있다. 김기운은 현재 협회 상무부회장 책임을 맡고서 나와 함께 하나 또 하나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가는 데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미니영화 《아버지의 유산》에서의 고 허승한 생의 마지막 5년을 빛낸 촌민배우 고 허승한 내가 허승한을 알게 된 해,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28세 때 차사고로 취장적출수술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영양섭취가 잘되지 않아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였다. 그래서 제 나이보다 열살 넘게 늙어보였다. 할아버지 역으로 충분히 가능한 얼굴이였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웅글진 중음이였다. 후에 가까이 지내면서 알고보니 그는 아주 소박하고 정직하며 속세에 물젖지 않은 착한 분이였다. 처음 그한테 미니영화 《설날》 출연을 제안했을 때 그는 화뜰 놀라면서 뒤로 물러앉았다. “내 평생 연기를 못해봤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그를 추천한 김기운이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자 그는 특유의 중음으로 조용히 말했다. “잘 지도해주시면 시키는 대로 해보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시름이 놓이였다. 배우선택을 하면서 대개 보면 얼굴에 연기실력이 실려있다. 극본내용에 따라 처음 보는 사람도 그의 얼굴에서 채용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도 한다. 그만큼 허승한은 자각 못한 잠재적 연기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허승한은 설날을 맞으면서 출국한 아들며느리를 애 타게 기다리는 아버지 역을 맡았다. 설날이면 온다는 엄마, 아빠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여섯살짜리 손주 정우가 새벽부터 일어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달고친다. 음식상을 다 차려놓았는데도 기다리는 자식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허승한은 뒤집 령감과 함께 뻐스가 바라보이는 동구 밖 언덕에서 추위에 떨면서 눈뿌리 빠지게 기다린다. 촬영 당일은 정말로 몹시 추웠다. 앞집 령감 허승한과 뒤집 령감 김기운은 바람막이 하나 없는 허허광야에서 추위를 이겨내면서 연기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하였다. 허승한의 연기는 소박하고 진솔하고 자연스러웠다. 말수는 적지만 마음속 깊이에 두고 있는 내면적 흐름은 진중했다. 억지로 연기하는 티가 전혀 없었다. 이것이 허승한의 보귀한 특징이였다. 시청자들은 허승한을 영화배우가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만나보았던 익숙한 이웃집 로인처럼 친숙하게 받아들이였다. 그후 《아버지의 유산》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허승한은 죽음의 연기를 실감 있게 해냈다. 미니영화 《고목은 봄을 그린다》에서 허승한은 치매에 걸린 안해를 살틀히 보살펴주는 남편 역을 맡았는데 어찌나 자연스럽고 감동적이였던지 촬영하는 내내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 《황혼의 정》에서도 자기가 맡은 역할을 뛰여나게 완수했다. 리창균 감독은 총화모임에서 허승한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허승한의 연기는 전혀 어색함이 없습니다. 억지감이 없는 생활모습 그 자체입니다. 웅글진 목소리는 진짜 성우의 목소리입니다. 성우로 될 기회가 있었다면 크게 성공했을 것입니다.” 허승한은 연기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무던하고 정이 많은 사나이였다. 석달 반이란 촬영기간 내내 그는 자가용차에 배우들을 태우고 다녔다. 아마 1,000킬로메터를 달리였을 것이다. 촬영이 한밤중에 끝나든 새벽에 끝나든 싫은 내색 한번 내지 않았다. 그리고 몸이 허약함에도 청가 한번 맡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맡겨진 촬영분량을 끝냈다. 말없이 묵묵히 협회 일에 헌신해온 허승한, 협회에는 그와 같은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그한테 촬영후근을 책임진 부회장직을 맡겼다. 허승한은 자기 직책에 걸맞게 촬영현장이든 협회 행사장이든 어디서나 허실없이 뒤수습을 깐지게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이 다한 걸가. 지난 3월 25일, 허승한은 아쉽게 생을 마감하였다. 허승한에게 생의 마지막 5년은 영화와 인연을 맺은 보람찬 연기자의 삶이였다. 아쉽다. 눈물겹다. 우리는 계속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고인의 령전에 성과작을 올릴 것이다.   영화 《황혼의 정》에서의 구정희 ‘연기를 모르는’ 진솔한 연기자 구정희 리창균 감독은 구정희배우를 이렇게 평가한다. “구정희는 연기지도가 별로 필요 없는 자연연기실력파이다.” 그래서 리창균 감독은 구정희한테는 연기훈련을 별로 시키지 않는다. 처음으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살펴보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구정희는 아니다. 리창균 감독의 평가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연기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어느 생일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구정희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실처럼 가는 눈, 해빛에 타서 까무잡잡한 얼굴, 거의 다 빠진 웃이발이 ‘밉상’이였다. 그런데 그 ‘밉상’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능글거리며 비위를 부릴 줄이야. “나 같은 사람은 영화에 못 나감둥?” 그 때 나는 미니영화 《설날》에서 뒤집 로친 역을 맡을 배우를 물색하던 차였는데 ‘밉상’얼굴이 바로 내가 찾고 있는 우리 농촌할머니의 얼굴이였기에 기뻐서 얼른 맞장구쳤다. “되구말구요. 부를 때 꼭 와주십시오.” 구정희는 그 말을 롱담으로 받아들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 곁사람들도 내가 롱으로 하는 소리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진심이였다. 그녀의 얼굴 생김새나 말투가 농촌주제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그녀는 배우로 발탁되였다. 과연 내 예상 대로 그녀는 훌륭한 연기실력을 보여주었다. 미니영화 《설날》에서 뒤집 로친 역을, 《고목은 봄을 그린다》에서 치매로친 역을, 《황혼의 정》에서 치매로친 역을 맡았는데 연기를 실감나게 하여 시청자들과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배우로 뜨게 되였다. 구정희는 우선 생김새로 보나 자그마한 키에 약간 구부정한 체구로 보나 지숙한 농촌아낙네, 농촌할머니 역으로 적격이였다. 그리고 대본에 대한 리해력이 높았고 연기할 때는 자기만의 표정과 언어, 몸짓으로 극 줄거리에 맞게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대본에 따라 지정된 연기를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를 적중하게 고민할 줄 알았다. 훌륭한 배우기질을 갖춘, 실력파 연기자로 거듭나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미니영화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에서의 정철복 감성이 빠른 연기자 정철복 정철복은 1996년에 중국과학기술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중앙민족대학에서 민족사연구에 종사하다가 북경시정부에서 공무원으로 20년간 근무하였다. 현재는 연길에서 영어학원과 로보트제조양성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협회의 부회장 겸 비서장직을 맡고 있다. 중어 실력이 뛰여나고 언변이 좋은 그는 협회에서 상영식을 할 때면 숙련된 실력으로 사회를 맡아본다. 이뿐만 아니라 정철복은 연기에서도 남다른 특성을 보였다. 극 줄거리를 잘 장악하고 정서에 빨리 녹아들며 깊이 있고 폭넓게 연기한다. 그러므로 그의 연기는 단조롭거나 애매한 느낌이 전혀 없다. 그리고 부정인물연기에 아주 적합한 배우이다. 지금까지 《빚》,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 《황혼의 정》, 《량심》 등 4부의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전부 부정인물 역할을 맡았다. 도박에 미쳐 가정을 몰라라 한다든가 조강지처가 출국한 기회에 첫사랑 녀자에게 끌려 방황한다든가… 부정적인 역할들을 너무 실감나게 소화해냈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를 살짝 곁들이려고 한다. 정철복에게는 여섯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영화 《빚》에서 도박에 빠져 한창 마작을 놀고 있을 때 웬 할아버지가 불시에 뛰여들어 지팽이로 자기 아버지를 때리는 장면을 보고는 진짜인 줄 알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울면서 “아빠, 영화를 찍지 마. 자꾸 맞아대면서…”라고 말하더란다. “나는 지구촌에 사는 모든 선량한 사람들을 위하여 서로 돕고 서로 아끼면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는 데 빛과 소금이 되고 싶습니다…” 연기자로서의 감성이 빠르고 생활에서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정철복의 연기인생이 더욱 빛날 것임을 확신한다.   손룡호 │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 《예술세계》 2022년 3호
17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3) 댓글:  조회:388  추천:0  2022-07-25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3) □ 김광현     아들아, 네가 북경에 간 지도 벌써 반년이 다되여오는구나. 네가 일이 재미 있다고 하니 아버지도 한시름 놓인다. 그러나 네가 다큐멘터리 촬영이 재미 있다고 하는 것은 그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지 텔레비죤프로의 실질을 알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전번에 네가 다큐멘터리 관련 리론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구나. 그런데 지금 촬영팀에서 조감독을 맡고 있으니 다큐멘터리에 대해 따로 체계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국내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선배들의 경험담을 공부하면서 짬짬이 필기해둔 것과 그동안의 실천경험들을 결부하여 정리해 보내주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네가 따로 시간을 내서 전문도서를 읽는 것에 못지 않은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큐멘터리의 정의에 대해서는 한자 그대로 기록(纪录)으로 리해하면 쉬울 것이다. 기록이란 단어를 쓸 때에는 반드시 사실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되여있다. 문학쟝르에 비유한다면 실화문학에 가장 근접할 것이다. 누가 어떤 사실을 기록할 때 그것을 영상화하면 사진이 되고 영화로 기록하면 기록영화가 되며 여기에 이야기를 가미하면 다큐멘터리가 되는 것이다. 즉 다큐멘터리는 사물의 존재나 인간의 행위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꾸밈없이 기록하면서 PD가 말하고저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적 행위인 것이다. 이런 기록은 책, 그림, 사진으로도 할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살아서 숨 쉬듯 움직이는 동영상이라고 본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의 실질이다. 내가 다큐멘터리 PD로 있으면서 사귄 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해주군 했다. “어느 한 시대를 묘사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시사해주는 방향이자 기준인 것이다. 영화는 극작가나 감독의 예술수준에 따라 감동을 가미하거나 놀라움을 표출해낼 수 있지만 다큐멘터리는 고유의 능력만으로 한 시대를 담아낸다.” 여기서 ‘고유’란 말에 주의를 돌리기 바란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의 특성이 될 수도 있다. 얼핏 보면 리해하기 힘든 말 같지만 한마디로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나 실제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다큐멘터리 고유의 특성은 PD가 다루고저 하는 모종의 제재에 그 어떤 허구도 가미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여운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의 매력이면서도 초보자들이 해결하기 힘들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향촌》 촬영중 나는 다큐멘터리 《정률성》을 제작할 때 진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지역을 찾아다니며 촬영했다. 정률성이 태여나고 성장한 고향에 가서 생가의 진실성을 기하기 위해 당지의 로인들과 력사학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고 상해, 서안, 연안, 태항산, 북경 등지를 다니면서 당년에 정률성과 함께 항일전쟁에 투신했던 전우들과 음악가들을 찾아 취재하였다. 참으로 힘든 작업이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며 여러 곳을 찾아다닌 것은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사진에다 해설을 곁들이거나 인터뷰로 대체하면 그 진실성과 다큐멘터리의 매력이 많이 떨어지게 된다. 특히 력사다큐멘터리일 경우 많은 사실들이 불확실하게 제기되기도 하는데 이는 PD의 연박한 지식과 세밀한 분석에 의해 처리되여야 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특정된 상황과 특정방식에 따라 특정된 집단에 의해 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말이 내포한 의미도 아주 중요하다. 지금 너희들이 촬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중국원림》은 PD를 주축으로 한 특정된 전문가 멤버들이 팀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잘 파악해두는 게 좋을 거다. 전번에 너희들이 인터뷰한 사진들을 보니 중국의 이름난 학자들과 원예사들이 대거 등장하더구나. 내가 해방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의 PD를 맡았을 때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해나더구나. 오래동안 외국에서 다큐멘터리 공부를 했기에 잘해내고 싶은 욕망은 컸지만 그에 비해 해방전쟁시기 조선족들의 활동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기를 부리고 맡아나선 것은 내 주변에 그 시기의 력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았고 또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로전사들이 생존해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군체의 물심량면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방대한 력사다큐멘터리에 감히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 한결 쉬울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내용을 취급하면서 공부도 하게 되여 더욱 재미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 갈등도 많았지만 그런 갈등을 해결하고 통일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훌륭한 학습기회였고 다큐멘터리 PD로 성장하는 과정이였다고 생각한다. 근 3년간 연변에서부터 멀리 해남도에 이르는 기나긴 원정취재를 거쳐 제작된 10부작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는 살아 숨 쉬는 력사다큐멘터리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였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사회자 동천과 함께 절강에서 취재중인 김천룡(오른쪽) 그외에도 다큐멘터리는 사실기록과 이야기 형식을 접목하는 데 많은 정력을 할애하게 된다. 이런 접목을 통해 현실의 다양한 모습들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이 텔레비죤프로 특유의 중요한 형식이다. 다큐멘터리는 교양부문이 주요 축을 이루고 있으나 최근에는 그 분야가 차츰 확대되여 보도와 오락 부문에도 활용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그 쟝르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력사사실과 밀접하게 련관된다. 이런 연고로 너의 담당PD K도 력사제재의 다큐멘터리에 많이 치중하는 것 같다. 력사다큐멘터리는 한번 재미를 들이면 자꾸 빠져들게 되는 게 그 매력이다. 제작과정이 힘들어 다시는 력사제재에 대한 다큐에 매달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가도 프로가 완성되여 방송되고 나면 성취감이 생기면서 또다시 달라붙게 되는 게 현실이다. 내가 미국 그린빌영상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의 필기장을 펼쳐보니 이런 구절이 유표하게 눈에 들어오더구나.  “현대생활을 주도하는 매체로서의 텔레비죤다큐멘터리는 시청자들의 서로 다른 취향과 스타일에 맞게 의미 있는 정보와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도 그 의의를 둔다.” 말하자면 다큐멘터리 시청자들은 천차만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감상수준과 취미를 골고루 만족시켜야 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안고 가야 할 힘든 과제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적 재현과 허구적 창조라는 이중작업 사이에 위치해있다. 그러면서 텔레비죤 본연의 역할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데 어울리는 프로형식이라 할 수 있다. 네가 보낸 사진을 보니 너희들도 력사사실을 재현하는 것 같더구나. 력사사실에 기초한 재현은 어떻게 보면 허구인 것 같지만 또 진실한 것이기도 하다. 너도 재현에 참가해 군중역할을 맡아했다니 참 잘했구나 싶더라. 비록 재현이기는 하지만 그 시기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은 앞으로 PD로서의 감각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어쩔 수 없이 시대적인 분위기가 늘 동반되여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일정한 력사사실에 기초한 상상력에 의한 재현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특별히 재현과정을 중시하고 즐겨 조직했다.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 《시인은 동 트는 곳에서 왔다》는 조선족의 이름난 시인 김철의 일대기를 다루었는데 적지 않은 부분에 재현처리를 했고 좋은 효과를 보았다. 공적 매체로서의 텔레비죤다큐멘터리는 교육적 혹은 계몽적 기능과 오락적 역할이라는 다종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둘러싸고 론난이 끊이지 않는 원인 역시 이 두가지 속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있다.  《다큐멘터리와 력사》란 책에서는 “보수적 집단에 의해 교육적 의무가 지나치게 강조되여 대중성을 상실하는 문제와 반대로 대중성의 요청에 따라 지나치게 오락적이 되여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되는 문제, 이는 제작자를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나도 이런 딜레마에 빠져 고민을 많이 했던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러한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는 매우 적합한 프로형식으로서 앞으로 더욱 중시를 받게 될 것이다. 오래동안 텔레비죤방송 제작에 종사해온 선배PD들은 한결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 성향이 가장 강한 텔레비죤프로들은 당분간 세계적 차원의 문화교류를 매개하는 채널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타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는 글로벌시대에 다큐멘터리 제작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전인류적인 문화소통역할을 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무한하게 성장하는 다큐멘터리프로는 대중들의 삶의 거울로 되여 새로운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양식과 륜리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과거와 미래를 위한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력사적 작업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많은 다큐멘터리 PD들이 오랜 실천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또 아래와 같은 정리도 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제날의 력사를 집단적으로 기억해낼 수 있고 또한 오늘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래일의 그림을 창조적으로 그린다. 요컨대 다큐멘터리는 현재 우리 삶의 성찰과 과거의 흔적을 확인하고 미래의 방향탐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 깊은 사회소통적 실천이자 력사적 글쓰기 자체와 같은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복수적인 시간들을 이어주는 련결작업, 타임머신에 의한 시간려행의 의미 있는 작업이다.” 텔레비죤다큐멘터리가 력사 리해의 유용한 수단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양한 다큐멘터리프로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겹쳐지는 력사적 현실을 구체화된 이미지로 인식할 수 있다. 그 이미지영상은 기존의 신문, 잡지들의 문자적, 구술적 정보에 비해 그 력사적 기억보존 효과가 훨씬 크다. 물론 다큐멘터리가 력사 또는 현실 그 자체라는 말은 아니다. 력사와 현실에 대한 특별한 재현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당시의 력사를 보는 시선, 현실을 재현하는 틀 그리고 사태를 느끼는 시대적 감수성 등을 알아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통찰을 통해 궁극적으로 복잡한 시공간적인 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리론들을 당분간은 리해하기 어렵겠지만 네가 앞으로 직접 다큐멘터리 제작에 착수하다 보면 리해될 것이다. 나도 1990년대 중기에 처음 다큐멘터리프로의 PD를 맡았을 때는 지금의 너처럼 리론적인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영화일을 하면서 많은 명작영화들을 본 것이, 한편의 영화를 수십번 반복해보면서 이야기줄거리부터 매 장절의 내용까지 숙지했던 것이 유일한 장점이였다. 그리고 후에 텔레비죤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리론공부도 하고 경험도 모색하였다. 그러니 다큐멘터리 리론지식을 배우는 데 관해서는 급해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처럼 일하면서 배워도 충분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종류가 다양하다. 시사다큐멘터리, 의학다큐멘터리, 환경다큐멘터리, 인물다큐멘터리, 문화다큐멘터리, 력사다큐멘터리, 자연다큐멘터리 등이 있다. 지금 네가 조감독을 맡고 있는 《중국원림》은 력사와 자연이 결합된 다큐멘터리에 속한다.  이만하면 다큐멘터리에 대한 리론적인 정의와 력사, 현실적인 작용에 대해 웬만큼 적었다고 생각한다. 시간 날 때마다 요점을 찾아 자주 보기 바란다. 나는 요즘 우리 집 서재를 시골에 옮기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가끔 시골집에 가서 조용히 있노라면 힘들게 일하고 있을 네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러나 그것이 네가 선택한 길이고 가야 할 길이기에 이 아버지는 가슴 아프지 않고 되려 뿌듯해난다. 내 아들이 바야흐로 중국의 주류문화 속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힘내라, 아들. 연변은 이제 완연한 봄이다. 2012년 5월 21일 《예술세계》 2022년 3호     김광현 프로필 화룡현 농촌이동영화방영대 해설원. 연변영화공사,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연변위성텔레비죤방송국 등에서 40여년간 프로 사회자, 편집, 번역,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 미국 남캐롤라이나주 그린빌영상아카데미에서 5년간 과외로 다큐멘터리를 공부함. 주요작품: 10부작 력사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 12부작 력사다큐멘터리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4부작 휴먼다큐멘터리 《정률성》 등 수십편.
16    예술세계 2022년 제3호 목록 댓글:  조회:380  추천:0  2022-07-25
15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2) 댓글:  조회:515  추천:0  2022-04-29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2) 손룡호   소박하고 꾸밈없는 연기자 천수옥 2017년 12월의 어느 날, 연변시조창단 운영자 리영해의 초청으로 시조창단 년말 총화모임에 참가하였다. 60대를 넘어선 시조창단 할머니들이 무대 우에서 펼치는 공연은 판소리, 민요, 독창, 중창, 합창, 춤 등 종목이 다양하여 볼멋이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생기 넘치는 한 얼굴이 시선에 확 들어왔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무대 아래우를 주름잡으며 날래게 움직이는 활기에 찬 얼굴이였다. 그녀가 바로 천수옥이다. 화룡사람인 그녀는 시조창단 부단장으로서 몸을 사리지 않고 일에 열의를 다하는, 열정이 식을 줄 모르는 불사조 같은 존재였다. 회식자리에서도 술잔을 들었다 하면 단숨에 쭉 마셔버리는 통쾌한 성격이였다. 나는 그녀를 영화배우로 채용하고 싶어 기회를 타 넌지시 제안했다. “우리 영화협회에서 배우로 쓰고 싶은데요. 부르면 호응할 수 있습니까?” “불러주면 고맙죠.” 천수옥은 사람 좋게 내 말을 받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천수옥은 나의 말을 그저 듣기 좋은 롱담으로 받아들였다.   미니영화 《설날》에서 며칠후, 미니영화 《설날》 배우선정 회의에서 천수옥에게 주역인 앞집할머니 역을 맡기기로 하였다. 우리는 정식 영화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확정된 배우들을 모아놓고 먼저 대사련습을 하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 연기련습에 들어간다. 그런데 첫날부터 나는 천수옥의 연기에 실망하고 말았다. 천수옥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집중하지 못하였다. 아마 자꾸 시조창단 활동을 두고 걱정에 잠겨있는 듯하였다. 시조창단 부단장이고 핵심인물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었다. 며칠 더 지켜보았지만 그 상이 장상이였다. 비둘기는 콩밭에만 마음이 가있다고 여전히 우리 협회 일보다는 시조창단 일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내 욕심에 선정하기는 했지만 은근히 서운했다. 아마츄어들이 모여 영화랍시고 찍는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솔직히 우리 협회를 아마츄어들의 모임이라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니 내 립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짐작을 하게 되였다. “어째 집중을 하지 않습니까?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됩니다.” 그러자 천수옥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루만 시간을 더 줄 수 있나요?” 나는 별 기대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였다. 다음 날에도 그 모양이면 단연히 갈아치워야 하였다. 과연 다음 날 천수옥은 제시간에 나왔다. 천수옥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하루밤 새에 대사까지 몽땅 외우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연기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연기에 집중 못하던 할머니가 하루밤 새에 뭔 둔갑술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놀랍고 믿어지지가 않아 나처럼 천수옥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극본작가 허룡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채용하느냐 못하느냐가 아주 명료해졌다. 잘하면 채용, 못하면 탈락이라고 무언의 약속을 했었는데 천수옥의 연기를 보고 나니 채용여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천수옥의 연기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어 자연스럽고 진실하다. 이것은 전문 연기훈련을 거친 전업배우들과 다른 점이자 그녀의 남다른 매력이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우리말 사투리들이 자주, 아주 자연스럽게 쏟아져나왔는데 너무나 친숙하고 생활감이 느껴졌다. 《설날》에서 천수옥은 “야, 추운데 길목에 나와 뭘 함둥… 감기 걸리겠습꾸마.” 등 향토미가 물씬 풍기는 사투리를 맛갈나게 잘 구사하였다. 그리고 감독이 지정한 연기외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소소한 동작들을 스스로 알아서 적절하게 취하여 영화에 생동감과 진실감을 부여했다. 《설날》에서 어린 손자가 새벽에 일어나 불을 때자고 다그칠 때 누워서 손자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일어날 때의 표정, 설날이라고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손자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자상한 표정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영화 《황혼의 정》에서도 그녀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울렸다.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친아들이 확실한지 찬찬히 훑어보고 나서 돌아설 때의 사색에 잠긴 그 눈빛은 지금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천수옥은 자기 분량의 촬영이 끝나면 인츰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니라 한참 동안 그대로 연기상태에 빠져있군 한다. 이 점은 아주 보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마츄어들은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면 하던 연기를 멈춘다. 그러나 성숙된 연기자는 대본 속 인물의 성격과 정서를 그냥 유지하기에 관성에 의해 연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된다. 사실 이 때 촬영기는 계속 돌아간다. 왜냐하면 후기편집할 때 생각외로 건질 만한 좋은 화면들이 꽤나 있기 때문이다. 미니영화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에서 천수옥은 며느리가 출국한 사이에 아들이 첫사랑과 만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다잡기 위하여 남편한테 일러주는 장면이 있다. 천수옥은 컷 사인이 떨어졌음에도 영화 속 인물정서에 깊이 빠져든 채 속 탄 엄마의 마음을 계속 이어갔다. 그 장면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실감나서 대본에는 없었지만 편집해넣었다. 천수옥의 연기관성은 참으로 귀중하고 영화화면편집에 도움을 줄 때가 많았다.   영화 《황혼의 정》에서 천수옥은 매사에 열의를 다 쏟아붓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 《황혼의 정》을 촬영할 때였다. 5월 하순이라 밖은 서서히 여름 기온으로 접어드는데 촬영장소인 지하창고는 아직 한기가 빠지지 않아 여전히 찬기운이 감돌았다. 당시 천수옥은 방광염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였다. 이날, 찬 바닥에 누워 촬영하는 씬이 있었고 촬영이 반복되면서 찬 바닥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천수옥은 촬영 내내 불평 한마디,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결국 방광염이 도져 한주일간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퇴원하자마자 촬영현장으로 달려나왔다. 천수옥은 책임심이 강하고 사업열정이 아주 높아 협회 모든 활동에 팔을 걷고 나선다. 회원들의 모임이 끝나고 그 뒤거두매를 전담하는 사람 역시 천수옥이였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일수록 몇걸음 더 걸어서, 손에 물을 더 묻혀가고 허리를 더 굽혀서 일하는 그녀, 회원들 속에서 항상 솔선수범하고 전반 국면을 돌보면서 협회사업이 무난히 진척되도록 말없이 뒤받침해주는 그녀, 다른 사람들과 낯을 붉힌 적이 없고 더우기 뒤에서 누구를 힐난한 적이 없는 그녀는 참으로 돋보인다. 천수옥은 일찍 화룡에서 경찰, 부녀사업, 정부공무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우수공산당원이였다. 오늘도 그녀는 우리 민족의 전통시조문학을 이어가는 사업에 로심초사하고 중화민족의 영상영화문화공동체의 융합과 발전을 위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부회장이란 직책을 걸머메고 인생황혼기에 자기의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손룡호 |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   《예술세계》 2022년 2호
14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2) 댓글:  조회:488  추천:0  2022-04-29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2) □ 김광현     아들아, 새로운 일에 잘 적응하고 있다니 시름 놓인다. 전번에 너의 메일을 받고 아버지는 몹시 놀랐다. 너의 진보가 그렇게 빠를 줄을 몰랐다. 네가 다큐멘터리 《이화원》의 담당PD K를 곁에서 보필하게 되였다는 것은 아주 빠른 발전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는 것은 이젠 팀에서 네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표징이기도 하다. 이것은 너에 대한 K의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큰 믿음이기도 하다. 절대 사사로운 감정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다. 필시 너의 열정과 인간성이 보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메가폰을 잡는 일도 아니고 팀에서 아무런 결정권도 없지만 이것은 K 가까이에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솔직히 심부름군이나 다름없다. 물론 K가 모든 걸 책임지고 행하여 너의 부담은 많지 않을 것이다. 너는 비단 K만 보필해야 할 게 아니라 팀의 모든 선배들의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해야 하고 지어는 그들의 개인일까지도 부탁 받을 수 있다. 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전문대학이나 일류대학을 나오고 또 취직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둔 사람도 대부분 피치 못할 일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 힘들고 때론 심한 좌절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놀라운 것은 이것이 PD로 발돋움하는 좋은 발판이고 또 이런 무질서한 형태의 작업에서 PD의 진정한 자질이 굳혀진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반년이 걸릴 수도 있고 일년이 걸릴 수도 있다. 때로는 중간에 두 손 들고 떨어져나갈 수도 있다. 때문에 K를 보필하는 일은 네가 PD로 성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허드레일이나 하고 심부름이나 하지만 네가 PD의 모든 작업을 곁에서 보고 체험하고 느끼며 배울 수 있는 첩경이다. 촬영을 위한 작업에서도 네가 K 곁에서 도울 일들이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촬영대본을 챙겨준다든가 작품에 관련된 참고자료를 찾아준다든가 지어는 핸드폰배터리며 커피를 일일이 챙겨야 하는 것도 너의 몫이다. 그리고 시간 나면 촬영시 장면기록도 별도로 해보아라. 보통 이 일은 초보들이 하는 하찮은 일 같지만 특히 영화나 드라마 감독도 이런 일을 기초로 시작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중국원림》프로 촬영에 몰입하고 있는 김천룡   네가 팀에서 촬영한 모든 소재(素材)들을 맡아 관리한다니 좀 걱정스럽구나. 그런 중임을 맡는다는 것이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촬영한 메모리카드를 거두어들이고 외장하드에 옮기는 일은 그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니 매사에 꼭 침착하고 신중해야 한다. 매 촬영기의 메모리카드를 받을 때엔 반드시 기록해두었다가 저녁에 외장하드에 옮기고 번호를 매기는 것과 그외 작업까지 책임지고 마쳐야 한다. 너의 실수로 팀의 촬영결과물이 몇초 사이에 날아날 수도 있고 다시 찍기 힘든 소중한 화면들을 날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는 막중한 경제손실도 따르게 된다. 그렇다 해서 지레 겁을 먹으면 더욱 안된다. 내 말은 그 막중한 책임을 실수 없이 해내려면 네가 일에 모든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핸드폰을 분실하거나 개인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촬영한 소재를 저장한 외장하드를 생명처럼 귀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믿어주는 만큼 정성과 책임을 다하기 바란다. 어떻게 보면 이건 또 너에 대한 K의 고험일 수도 있다. 네가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를 소리 없이 테스트하는 것일 수도 있다. K는 북경미디어대학(北京传媒大学)을 졸업한 유능한 사람이다. 그가 이미 찍은 여러편의 다큐멘터리들이 국제상을 수상했고 중국에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한때 CCTV 명프로인 〈동방시공간〉의 담당PD였고 후에 다큐멘터리 PD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많은 다큐멘터리를 직접 기획, 제작한 K는 명석한 통찰력과 풍부한 현장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고 올인해온 사람이다. 내가 굳이 너를 북경에 보낸 것은 큰 물에서 이런 스케일이 크고 경험이 풍부한 PD를 만나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는 몇년전부터 인맥을 통해 K와 연줄을 달았고 북경에 갈 때마다 찾아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친구처럼 사귀였다. 나는 그 때 K에게 앞으로 혹시 아들을 부탁할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말했고 K는 흔쾌히 맡아주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우리는 부모로서 네가 곁에 있으면 덜 외롭겠지만 너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북경에 보냈던 것이다. 네가 다큐멘터리에 관한 책을 사서 읽는다는 말을 듣고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다큐멘터리는 기획에서부터 여러가지 준비과정을 거쳐 제작, 방송되기까지 카메라, 조명, 조작기술, 컴퓨터그래픽, 음악, 자료조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PD는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판단하고 팀을 이끌어가는 지휘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에 대한 최종책임도 PD가 지게 된다. 따라서 PD는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팀의 모든 성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널리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네가 K를 잘 보필하려면 여러 방면의 지식과 상식을 장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너도 자연스럽게 PD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지방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는 이런 규모 있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력이 부족하여 한개 프로에 많은 사람을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한 팀에 5명, 6명이였기에 새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때면 곁에 너와 같은 보조를 두고 자료수집 등 여러가지 일을 맡길 형편이 못되였다. 그러다보니 내가 제작하려는 내용에 관련되는 부서와 학자, 전문가 등 인물들을 섭외하는 일은 거의 PD인 나의 몫이였다. 그리고 내가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를 위해 전문가팀을 무어 수시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했다. 지금 네가 참여한 대형 다큐멘터리 《이화원》도 력사제재이다보니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짬짬이 시간을 내 너도 《이화원》 관련 력사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나름 대로 지식을 터득하거라. 우선은 네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참고서들을 읽으며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배워둔 력사지식은 머리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런 력사사실이 어떻게 다큐멘터리로 제작되는지를 알게 되면 앞으로 네가 PD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의 이름난 서예가 황영년선생을 취재하고 그리고 너도 따로 PD수첩을 갖추고 매일 촬영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K의 작업을 기록하고 네가 느끼는 감수를 적어두기 바란다. 또 《이화원》에 응한 력사학자들의 인터뷰 원본을 잘 보관해두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들 모두 중국에서 이름난 력사학자나 전문가들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 다시 만나기 어려운 분들이다. 이들의 연박한 지식과 철학적 사유 그리고 높은 인격적 수양은 만민이 우러르는 본보기이다. 짬짬이 이들의 저작이나 작품들을 읽고 터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너도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될 것이다. 너희들이 전번에 인터뷰한 여추우(余秋雨) 같은 분은 《힘든 문화려행기》를 비롯한 좋은 작품집을 수두룩이 펴냈으며 력사,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박식한 분이다. 물론 제작할 때에는 인터뷰 내용들을 필요한 부분만 잘라 쓰겠지만 앞으로는 모두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될 것이고 꼭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다. 요즈음 아버지는 전에 촬영했던 내용물들을 정리하면서 참말로 보귀한 인터뷰내용들을 발견하였다. 내가 취재했던 적지 않은 인터뷰상대들은 이미 작고하여 그 자료적 가치가 더욱 소중해졌다. 나는 이제 그 인터뷰내용들을 정리하여 참고서로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 내가 일하는 데 훌륭한 지침서로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K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수요하는지를 체크하고 네가 옆에서 잘 챙겨주어라. 이것은 전반 팀의 작업에도 유리하며 네가 K의 긍정을 받는 좋은 일이기도 하다. 팀을 조화롭게 이끌고 촬영사와 조명사, 록음사들과 팀워크를 형성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래야만이 네가 K를 보필한 보람이 있게 된다. 금방 촬영팀에 합류한 네가 K의 중시를 받으면 시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친절하게 잘해주고 허리 굽혀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언제나 겸손이 긍정을, 오만이 배타를 낳는 법이다. 나도 일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보았는데 항상 자세를 낮추고 허심하게 배우는 사람이 끝까지 견지하더구나. 뭘 좀 안다고 오만방자하게 굴고 일을 시키면 군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연히 도태되더라. 남보다 일을 더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다른 사람들이 수요하는 것을 제때에 챙겨주면서 일을 배우면 너에게도 성과가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다. 그러하되 모든 것은 진심이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너의 인간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내가 겪어보았기 때문에 꼭 말해주고 싶다. 내가 쓰던 사진기도 보내줄 테니 팀에서 가장 세심한 기록자가 되거라. K가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도 많이 담아두거라. 이 또한 좋은 학습과정이 될 것이다. 모든 기록은 앞으로 좋은 력사자료로 남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거라. 중요한 소재를 어느 만큼 축적하고 있는지는 앞으로 네가 훌륭한 PD로 성장하는 데 관건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은 이만 줄이려 한다. 이젠 너도 다 성장한 어른이 되였으니 나의 이런 조언들이 혹시 잔소리로 들릴가 저어되기도 한다. 자식한테 잔소리를 끊지 못하는 게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다음에는 다큐멘터리의 리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 너의 형편에서 책을 들고 전문지식을 공부할 여유가 없으니 내가 짬짬이 편지를 써서 리론적인 것만이라도 적어 보내야 네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짜증내지 말고 내심하게 잘 읽어보기 바란다. 전번에 보낸 나의 편지가 큰 위안이 되였다니 기쁘다. 아들아, 전번에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하더니 이젠 좀 괜찮아졌니?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땐 항상 조심해서 챙겨먹도록 해라.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수염을 매일매일 깎거라. 안 그러면 게을러보이고 골기 없어보인다. 이젠 너의 형상도 조직을 대표하는 만큼 신경 써야 한다. 오늘도 말이 길어졌구나. 네가 자주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니 우린 한결 시름이 놓인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너의 앞날이 묘망하게 느껴지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희망이 보일 것이다. 힘내라, 아들. 2011년 9월 20일   《예술세계》 2022년 제2호     김광현 프로필 화룡현 농촌이동영화방영대 해설원. 연변영화공사,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연변위성텔레비죤방송국 등에서 40여년간 프로 사회자, 편집, 번역,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 미국 남캐롤라이나주 그린별 영상아카데미에서 5년간 과외로 다큐멘터리를 공부함. 주요작품: 10부작 력사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 12부작 력사다큐멘터리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4부작 휴먼 다큐멘터리 《정률성》 등 수십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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