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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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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개(1) 댓글:  조회:2879  추천:0  2018-11-12
          개(1)   /윤동주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1936.12(추정).     나는 윤동주의 삶을 다룬 어느 창작물에서, 여주인공이 윤동주에게 한 말을 기억한다. "동주씨의 시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져요." 그럴만하다. 잘 알려진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들은 항상 그 무엇에 대한 결핍을 담고 있었다. 막막했던 시대, 나약한 민족의 시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고뇌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끝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봤고, 끝 없이 참회했다.  하지만 의 초점은 사뭇 다르다. 작고 사소한 것에 마음을 두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드러나는 모습과 일맥상통하지만서도, 는 그의 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이 있고 낙관이 있다. 윤동주는 어쩌면 이 시의 풍경을 보면서, 잠시 고뇌를 잊고 휴식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개 윤동주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 요절夭折의 특권    "시인에게는 '요절夭折의 특권'이라 하는 것이 있어 젊음이나 순결함을 그대로 동결한 것 같은 그 맑음이 후세의 독자까지도 매혹시키지 않을 수 없고, 언제나 수선화 같은 향을 풍긴다"   일본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こ 가 한 말이다.   요절한 윤동주의 세번째 시비가 일본 우지宇治에 이번 10월에 세워졌다.  우지는 교토에서 전차로 한 30분 거리인데 늘어선 산자락에 우지강이 길게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일본 최초의 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가 거기에서 쓰여져 동상이 강가에 있고 일본동전 10엔짜리에 새겨진 세계문화유산 '뵤도잉平等院'이 있으며 커피보다 차문화인 일본에 우지차로 유명한 곳이다.   그 긴 강의 몇개 다리 중 하나인 아마가세 구름다리엔 사연이 있다. 서울의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1942년 3월, 도쿄의 릿쿄立敎 대 문학부에 들어가 다섯달을 다닌 후 같은 해 가을, 교토의 동지사 대학으로 편입을 한다. 재학 시절 교우들과 우지로 소풍을 갔고 우지강 아마가세 다리에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남기게 된다.   십여 년이 걸려 우지 그 다리에서 걸어 십분 거리에 또 하나의 윤동주 시비가 그렇게 세워졌다. 거기엔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碑'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의 시 '새로운 길'이 한일 양국어로 쓰여져 있다.   75년 전 25살의 청년 윤동주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나의 발자욱을 포개고 서서 물과 산과 그가 바라 본 하늘을 보니 진한 감회가 서린다. 어둡고 적막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생각하며 '육첩방을 나가면 남의 나라' 라고 읊었던, 잃어버린 조국에 가슴 아파하며 그 마음을 절제된 시로 묘사한 윤동주. 동결된 그의 한없이 순결하고 순수한 영혼을 떠올려 본다.   뵤도잉平等院, 우지의 대사찰과 뮤지엄에서 고대 백제의 냄새를 물씬 맡고는 5시면 어둑해지는 밤길을 달려 다시 교토 시내의 윤동주가 살던 하숙터에 세워진 시비 앞에 선다. 지난 해까지 동지사에서 하루에도 몇 번을 바라보던 시비에 새겨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이 새겨져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로 잡혀 가기 전, 동지사대에 한학기를 다니며 머물던 하숙집은 교토 조형미술대학의 설립자가 재일교포로 그 하숙집터 일대를 사서 교사로 짓고는 그 앞에 반듯하게 시비를 세웠다. 동지사에서 가까운 거리임에도 나는 귀국 후 재방문을 해서야 처음으로 그걸 보게 된다.   내가 사는 서울 동네 가까이의 윤동주 하숙집을 떠올렸다. 거기에 현판은 있으나 집주인 아들이 그 앞에서 군밤을 구어 팔고 있었다.    올 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백주년으로 나도 이렇게 그의 시비 세개를 하루에 보게 되었다. 교토 윤동주 기념회의 박희균회장이 친절히 안내하고 많은 자료를 보여준 덕분이다. 그의 윤동주 사랑과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한국에서 덕혜옹주의 영화가 있을 무렵 알게 된 일본 작가 '타고 키치로' 선생은 덕혜옹주가 일본에 있을 때에 지은 단가시를 발견하여 그 영화를 만드는데에도 기여했지만 NHK TV, PD로 있을 때 여러 해에 걸친 기획으로 윤동주 다큐를 만든 분이다. 동지사 대학에 그의 시비를 세우려 아무리 시도해도 어려운 것을 타고 선생이 다큐를 만들어 방영된 후 그 캠퍼스에 시비가 세워지고, 우지의 아마가세 다리에서 찍은 시인의 마지막 사진도 그가 발견하여 그 사진 한장의 인연으로 마침내 시인의 세번째 시비가 서게된 것이다. 그는 윤동주 백주년에 맞추어 짧은 생애의 전기집도 일본에서 냈다. 일본에 윤동주의 정신을 사랑하는 그런 분들로 교토지역에 시인의 시비가 세개나 선 것이다.    겨우 27년 1개월의 삶 1917 12 30 - 1945 2 16   "요절의 특권이란 젊음과 순결을 고대로 동결하는 것"이라고 일본 시인이 말했다지만, 윤동주의 그 시대적 요절은 더욱 비참하다. 그러나 깊은 골짜기일수록 바로 곁에 더 높은 산이 우뚝 서있다는 말은 진리여서 75년 후 갈등의 양국 국민에게 그 순수한 영을 빛으로 발하고 있음을 본다.    옥사한 후쿠오카 시는 여러 해 시비 세움을 거절하고 있으나 얼마 후 동경에는 다시 그의 네번째 시비가 선다고 한다.   요절한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이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1938년 5월 10일 지은   중     
1289    윤동주 11편 동시묶음 댓글:  조회:2968  추천:0  2018-10-31
윤동주- 동시 11편  귀뚜라미와 나와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  오줌싸개 지도  빨랫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론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루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 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걸.  .....................................................................................................................................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  산 울 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  굴뚝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웬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 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한 커리:한 켤레,한 가지  .....................................................................................................................................  밤  외양간 당나귀  아앙 앙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아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달아요.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 주고,  어머니는 아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들어요.  ......................................................................................................................................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봇대 있는 데서  돌재기* 다섯 개를 주웠습니다.  전봇대를 겨누고  돌 한 개를 뿌렸습니다.  -딱-  두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세 개째 뿌렸습니다.  -딱-  네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다섯 개째 뿌렸습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 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 하고 선생님한테  흰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맞았을까요?  *돌재기:자갈  **허양:거뜬히  ......................................................................................................................................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눈 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  ......................................................................................................................................  윤동주 - 여러분은 윤동주 시인을 알고 있나요?  민족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  윤동주 시인의 시들을 다 읽고 나니까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는 것 같지 않나요? 그건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우리 마음으로 옮겨 오기 때문일 거예요.  윤동주 시인은 일제 치하의 어둡고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도 맑고 깨끗한 마음을 담은 시들을 많이 남겼어요. 윤동주 시인을 가리켜 '민족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물론, 독립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끝내 우리 나라가 광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스물아홉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일제의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혼을 담은 시들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편의 시들이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시 속에 그토록이나 잘 담아 놓았으니 그렇겠지요.  더욱이 우리 어린이들이 즐거이 읽을 수 있는 동시까지 많이 남겼으니 온 국민이 함께 애송하는 시를 쓴 '국민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  한줄기 해란강이 흐르는 땅  「고향 집」이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지요.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시에 나타난 것처럼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 자란 곳은 두만강 북쪽에 있는 옛 만주 땅입니다. 지금은 흔히 연변이라 부르는데 그 때는 북간도라고 했지요.  1800년대 말부터 농사를 짓기에 더 비옥한 땅을 찾아 만주로 떠난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지요. 원래 함경 북도에 살았던 시인의 증조할아버지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사를 해서 그 곳에 자리를 잡았던 거래요.  이사를 해서 더 잘 먹고 살게 되었지만 조국을 떠난 사람들은 그래도 '남쪽 하늘 저 밑'에 있는 고향이 늘 그리웠을 거예요. 그러니 증조할아버지 때 떠나온 고향인데도 윤동주 시인조차 그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나타냈던 것이지요.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우리 민족은 고유한 전통을 지키며 강인하게 살았대요. 다른 나라 땅에 가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한민족임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슬픈 족속」이라는 시를 읽으면 그 때 그 곳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모습이 지금도 우리 눈에 생생히 보이는 것처럼 느껴져요.  버려진 땅을 기름진 땅으로 일구어 내며 우리 민족은 후손들을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대요. 윤동주 시인이 다닌 명동 소학교도 후손들에게 민족혼을 심어 주기 위해 우리 민족 스스로 세운 학교였지요.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도 그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무장 독립 투쟁을 벌였던 곳이 바로 북간도입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독립군에 아낌없이 몸을 던진 독립 투사들을 길러 낸 곳,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솔'이 서 있고 '한줄기 해란강'이 흐르는 땅, 그 곳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 가슴 속에 민족혼을 키우며 자란 곳이지요.  ......................................................................................................................................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시인 윤동주는 어린 시절에 마음이 아주 여리고 순했대요. 그래서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도는 울보였다네요! 어쩌다 선생님이 무얼 물어 보았는데 대답이 막히면 그 때도 금방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해요. 그렇게 여린 감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처럼 맑고 아름다운 동시를 쓸 수 있었을 거예요.  어린 윤동주가 태어나 소학교 시절까지 자란 명동촌이라는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었습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는 곳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경치가 더욱 아름다웠대요.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동시들 중에서도 겨울과 눈을 노래한 것이 많은가 봐요.  윤동주의 집은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산 기슭에 있는 교회당 옆집이었대요. 집 뒤와 옆에는 작은 과수원이 둘러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수십 길도 더 되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이 「자화상」이라는 시를 쓴 동기가 되었지요. 윤동주는 친구와 같이 과수원 울타리의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 먹고, 물을 길어 입을 닦고, 그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며 우물 속에 울리는 소리를 듣곤 했대요.  윤동주의 가족은 대가족이었습니다. '떡이 쓴데도/자꾸 달다고'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쓰다 버린 습자지'로 '버선본 만드는' 어머니와 한밤에 깨어나 '당나귀에게/짚을 한 키 담아 주'는 아버지, 그리고 '가위로 종이 쏠'다가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볼기짝을' 얻어맞는 동생들까지 가족이 참 많았지요. 그래서 나중에 정겨운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동시들을 많이 썼지요.  「편지」라는 동시를 보면 누나가 나오지요. 하지만 윤동주는 그 누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위로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윤동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 나라로 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흰 봉투에/눈을 한 줌 넣'어 편지로 부치겠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지요.  윤동주는 동생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아주 다정다감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서울에 가 있을 때에도 동생들에게 책을 사 보내기도 하고, 방학에 집에 돌아오면 동생의 손을 잡고 산책길에 나서곤 했지요. 그 때 실제로 동생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 바로 「아우의 인상화」랍니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들에는 시인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은 일과 그 후에 자라면서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삶과 시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는 중학교에 들어가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등사판 교내잡지를 만들기도 했지요. 특히 재봉질 솜씨가 뛰어나 학교 축구부원들의 유니폼에 등번호 다는 것을 모두 집으로 가져와 직접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인 열여덟 살에 윤동주는 최초의 시 작품 3편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지요. 그 중 하나가 「내일은 없다」라는 시랍니다. 그 후 여러 선배 시인들의 시를 열심히 읽으면서 더 많은 시들을 썼습니다. 특히 「정지용 시집」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이듬해부터는 동시도 함께 쓰기 시작했는데, 윤동주 시인의 첫 동시는 바로 「조개껍데기」이지요.  그 후 연희 전문 학교(지금의 연세 대학교)에 입학한 해까지 많은 동시를 써서 북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거짓부리」 등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전혀 동시를 쓰지 않게 됩니다. 맑고 밝은 동시를 계속 쓸 수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일제 치하의 우리 현실이 더욱 힘들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시라는 순수한 그릇에 어려운 현실을 치열하게 담아 내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을 테니까요.  그 대신 동시 이외의 시들을 열심히 써서 연희 전문 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첫 시집을 묶어 내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요. 그러나 거기에 실린 「슬픈 족속」과 같은 시들이 일본 경찰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져 시집을 내는 일을 포기하게 되었지요. 그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져서 우리의 민족 의식이 짙게 담긴 글들을 섣불리 내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윤동주 시인 자신이 직접 베껴 쓴 시집을 3부만 만들어, 스승 한 분과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각각 1부씩 나눠 주고, 나머지 1부는 자신이 갖고 말았지요.  ......................................................................................................................................  눈 감고 가거라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 때문에 세계 정세가 점점 어지러워지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창씨개명령을 선포하고, 우리의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시키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우리의 이름과 말을 빼앗아 민족 의식을 말살하려는 음모였지요.  시인 윤동주는 성을 바꾸지 않고 있다가 일본에 유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식으로 바꾸게 됩니다. 윤동주라는 이름이 어이없게도 '히라누마 도오쥬우'로 바뀐 것이지요. 그 때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라는 구절이 있는 시 「참회록」을 써서 그 아픔과 욕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 윤동주는 끝끝내 민족 의식을 버리지 않고 줄곧 치열하게 시를 쓰고 공부를 했지요. 「눈 감고 간다」라는 시에서 시인은 세상의 현실이 캄캄한 밤과 같으니 차라리 눈 감고 건너가라고 말합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별과 태양을 사랑하는 아이들이니 언젠가 희망과 꿈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들어 있는 시입니다. 그러니 눈 감고 가면서도 씨앗을 꼭 뿌려야 하고,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 눈을 뜨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캄캄한 밤중과도 같은 세상을 살던 그 시절의 어린이들에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윤동주 시인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우리 민족마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합니다. 젊은이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고 학생들마저 학병으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도 일본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그 시절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독립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절이었지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고종 사촌 송몽규와 윤동주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해 모의했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썼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민족 의식이 담긴 시를 우리말로 썼다는 것도 죄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시인 윤동주는 징역 2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면서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강한 의혹을 남긴 채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6개월 앞두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시인은 그처럼 안타깝게 스러져 갔지만 시인이 남긴 맑고 아름다운 시들은 이제 우리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 민족의 마음과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영원히 남아 있겠지요. 우리 어린이 여러분의 마음도 그 마음들 중의 하나 입니다.  그 후, 윤동주 시인의 유골은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시인의 무덤 앞에는 가족들이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한자로 씌어진 비석을 세웠지요. 시인이 남긴 유고들은 친구들과 가족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한데 모아 1948년에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처음 펴내어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 후, 더 많은 유고들이 보태어져 여러 권의 시집이 출간되었고, 마침내 1999년에는 시인 자신이 직접 쓴 원고들을 사진으로 찍어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민음사)이 나와서 시인의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지요.  시인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꼼꼼히 적은 책으로는 송우혜 선생님이 지은 『윤동주 평전』(세계사, 1998, 개정판)이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좀더 나이가 들면 앞에 적은 책들을 꼭 한번 읽어 보세요. 이 동시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모습들을 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당장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손연자 선생님이 지은 동화집 『마사코의 질문』 (푸른책들, 1999)이 있습니다. 그 책에 실린 '잎새에 이는 바람'이라는 동화가 바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지요.  시인의 모교인 연세 대학교 교정에 가면 '서시'가 새겨져 있는 윤동주 시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비가 있는 자리에서 보면 저만치에 윤동주 시인이 머물던 기숙사의 다락방이 보입니다. 꼭 한번 가 보세요.  ......................................................................................................................................  (▶ 이 동시들과 글은 윤동주 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푸른책들, 1999)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288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눈(2) 댓글:  조회:3638  추천:0  2018-10-31
  윤동주 눈 (2) / [동시]   눈이 샛하얗게 와서 눈이 새물새물 하오.   이 시는 눈이 새하얗게 와서 화자의 눈이 자꾸 웃는 모양이 된다는 내용으로 눈[雪 ]과 눈[目]의 동음이어를 이용하였다. 눈이 와서 좋다는 의미를 동음이어를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새물새물’은 ‘입술을 한쪽으로 약간 비틀며 소리 없이 자꾸 웃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이어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상징을 잘 이용한 시이다. /전한성     윤동주 눈 (1)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이 시는 지난밤에 소복히 온 눈은 지붕과 길과 밭이 겨울에 추워하는 것을 보고 덮어주는 이불이라고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쓴 시이다. /전한성       윤동주 닭 (동요)     ---닭은 나래가 커도 왜 날잖나요 ---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봐.     이 시는 큰 날개를 가진 닭이 날지 않는 이유를 먹이를 찾으려다가 잊었다고 추측하는 내용이다. 질문과 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두 문장으로 되어 있고 문장의 글자 수도 의식적으로 맞추었다. 동요로 생각하지 않고 잠언이 담긴 시로 볼 수도 있다. 날개는 자유를 의미하고 ‘두엄 파기’는 ‘먹이’를 구하는 행위이므로 먹이를 위해서 자유를 잊어버린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홀’은 ‘홀라당’으로 ‘모두’의 의미로 보인다. /전한성    
1287    "지금도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를 읊고 있었다"... 댓글:  조회:3173  추천:0  2018-10-31
▲  ⓒ 김종훈      일본 교토 도지샤 대학은 시인 윤동주와 정지용이 수학한 곳이다. 두 사람을 기리며 학교 중앙에 위치한 역사자료관 옆에 시비가 세워졌다. 가나자와에서 교토로 향하는 썬더버드 기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많이 지체됐다. 간사이공항까지 갈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갈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기차를 타고오면서 확인한 자료에서 윤동주와 그의 친척이자 벗이었던 송몽규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했다. 당연히 무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캐리어를 끌고 달렸다. (※윤봉길과 송몽규, 윤동주로 연결된 인연은 차후에 다시 다루겠다)   ▲  ⓒ 김종훈     교토역에서 도지샤대학이 있는 이마데가와역은 환승없이 다섯 정거장, 다행히 교토역은 서울역처럼 기차역을 나오면 바로 지하철이 연결돼 있다. 가라스마선을 타고 이마데가와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도지샤대학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넓은 캠퍼스에서 어떻게 시비를 바로 찾을 수 있을까. 이미 비행 시간은 4시간도 안 남은 상황. 교토에서 간사이공항까지 고속철로 1시간 30분 걸리는 걸 고려하면 시간이 없었다. 결국 지나는 학생들을 붙잡았다. 윤동주의 시비 사진 하나 보여주며 여기를 아냐고 물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학생들 4명이었는데, 다들 너무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심지어 뭘 이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갑자기 샘솟는 뿌듯한 이 감정!   ▲  ⓒ 김종훈     그러면서 일행 중 한 명은 자신을 따라오란다. 5분 정도 걸었을까. 옛 건물 옆쪽에 자리한 두 개의 시비가 보인다. 하나는 윤동주, 다른 하나는 정지용의 것. 동주와 지용이 수없이 걷고 생각했을 그 거리에 두 사람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도지샤대학 코리아클럽 학생들이 뜻을 모아 학교에 건의해 윤동주 사후 50주년인 1995년 세웠다 하던데, 정지용의 시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만히 앉아 시비를 바라보니, 지금도 학생들이 오가며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를 읽고 있다.   ▲  ⓒ 김종훈
128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눈(1) 댓글:  조회:3367  추천:0  2018-10-30
눈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 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바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분명 시의 배경은 한 겨울인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입니다. 너무나 매서웠던 추위도 이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윤동주님의 따뜻한 시 한편 읽으며 봄을 기다려봅니다~ ====================///   눈         -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ㅡ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 윤동주 시인의 글은 무척이나 암울하고 무겁기도하지만 이 '눈'은 마치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시각이 보입니다. 시대의 어두움을 항상 마음의 그림자로 삼고 살다가 간 '윤동주'에게 이런 순진한 어린 꼬마의 모습이 비쳐지는 것이 조금 새삼스럽게 생각됩니다.   ===============/// 만주의 12월 ‘지난 밤’은 누군가 죽지 않았을까 염려스러운 을씨년스러운 밤이다. 그런 밤에 내리는 눈이란 모든 사물을 얼려버리는, 생명을 죽여버리는 적대적 대상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악한으로 상징될 눈을 ‘소복이 왔네’라고 표현한다. 싸늘한 ‘지난 밤’에 ‘지붕이랑 길이랑 밭’을 이불같은 눈이 덮는다.
1285    윤동주와 백석과 릴케 댓글:  조회:3756  추천:0  2018-10-26
릴케(Rainer Maria Rilke)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 Mnmazur/wikipedia | Public Domain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은 무엇일까요? 지난 2012년 한 문학잡지에서 시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위는 백석의 시집 《사슴》이었습니다. 백석은 스물다섯 살이던 1936년 1월에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했습니다. 워낙 적은 부수라 당시에도 희귀본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은 대학시절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백석의 이 시집을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실린 시는 40편이 못되었지만 그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컸다는 느낌이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끝내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수 필사본을 만들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탐독했고 ‘그림 같다’, ‘걸작이다’ 등의 메모를 남긴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입니다. 백석과 윤동주, 이름만으로도 벅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이지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는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82년도 출판본입니다. 그리고 1,800원이었네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될 일이지만 굳이 이 옛날 옛적의 시집을 찾아 꺼내든 까닭은 인터넷에 나오는 앞서의 구절이 어쩐지 원본과 다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달랐습니다. 어느 부분이냐 하면, ‘프랑시스 짬’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입니다. 이 부분을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꾸었더군요. 누군가는 그냥 ‘이름’일 뿐이잖아, 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획 하나도 손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것이 오타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가 불렀던 이름 그대로 불러보고 싶고, 백석과 윤동주가 썼던 대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경우에는 두 시인 모두 ‘라이넬 마리아 릴케’라고 불렀으나 프랑시스 잠에 대해서는 각각 다르게 불렀습니다. 백석은 ‘쨈’으로, 윤동주는 ‘잼’으로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는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와 쨈, 혹은 잼의 시집을 곶감 빼먹듯 두고두고 아껴 읽으며 시를 향한 꿈과 사랑을 키웠을 것입니다. 백석과 윤동주에게 서울은 타향이었습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윤동주는 만주 간도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요. 먼 북쪽에 고향을 둔 둘은 1930년대에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기도 했지만 교류를 나눴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윤동주보다 다섯 살 위인 백석은 이미 유명한 시인이었고, 윤동주는 백석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석이 1940년에 만주로 떠나면서 인연이 이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졌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남북분단의 비극 속에서 어떻게 희생됐는지는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이 시대에 남은 독자로서 두 시인의 시에 프랑시스 잠과 마리아 라이너 릴케가 똑같이 등장하는 구절을 읽으며 이처럼 닮은 취향을 가진 둘이 만났더라면 서로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꽃과 당나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하는 슬픔을 느낄 뿐입니다. 백석이 프랑시스 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북한의 시인’으로 억류됐던 영향이 크겠지요. 대신 윤동주가 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북간도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회고 덕분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가 연희전문대학 시절에 잠의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읽었노라 하면서 시집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냈는데 바로, 《밤의 노래》입니다. 이 시집은 나중에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됐는데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 삼종(三鐘)의 종소리가 웁니다. - 프랑시스 잠,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서문 중에서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그토록 사랑한 ‘흰 당나귀’가 어떤 당나귀인지 투명하게 그려지지요. 프랑시스 잠의 삶이 그런 당나귀와 같았습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진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시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일상은 화려했으며 미술과 음악, 문학이 활짝 피어나 훗날의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공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잠은 이 모든 것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파리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으로부터는 물론, 공허와 불안으로부터도 등을 돌려 평생 피레네 산맥 근처에 은거하며 단순하고 현실적인 삶, 자연과 종교에 뿌리를 둔 시를 썼습니다. 그 덕에 잠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며 다정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서양의 시를 읽을 때면 쉬이 느끼는 난해함 없이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일상으로부터 소재를 끌어온 덕입니다. 특히 〈식당〉이라는 시는 그냥 우리 시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친숙해서 윤동주가 왜 ‘짬’의 시는 구수해서 좋다고 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어느 늦은 오후, 석양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즈넉하게 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월의 태엽을 뒤로 돌려봅니다. 새삼 오랜 세월 내 곁에 말없이 있어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부서져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 어르신네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 잼 냄새, 고기 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한테 아무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영혼들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 안녕하신지요, 잠 씨? - 프랑시스 잠, 〈식당〉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어머니 방에 있는 30여 년 된 장롱처럼 오래된 사물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어느 날 잃어버린,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물건과 기억이었습니다. 가졌을 때는 이렇게 쉽게 잃어버릴 줄, 잊어버릴 줄 몰랐던 것들 말입니다. 그와 같은 사물, 그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을까요. 잠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프랑시스 잠을, 백석과 윤동주가 좋아한 또 다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좋아했습니다.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에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젊은 무명 시인 말테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한 행복한 시인의 생활을 접하고 그 시인처럼 글을 써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행복한 시인이 프랑시스 잠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테의 생활은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불안과 소외로 비참하기만 했지요. 이런 말테를, 아니, 릴케를 일으켜 세운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둘의 인연은 1902년, 릴케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로댕의 평전을 쓰면서 시작됐습니다. 190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로댕의 비서로 일했지요. 로댕은 릴케에게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바라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줬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관찰뿐 아니라 미학적 성찰까지 아우른 것이었습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쓴 구절이 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릴케의 문학론이자 예술가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이런 깨우침은 로댕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보다 전에 로댕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돈의 필요에 쫓겨 하찮은 일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에도 로댕은 자신을 잃은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체험한 일이 언제까지나 계획만으로 머무는 적은 없었으며, 낮에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날 밤 안에 곧장 실행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꿈만 꾸거나 계획과 기분에 젖어 멈추어 있지 말고 항상 모든 것을 무리하게라도 ‘물(物)’로 이입하는 일이다. 로댕이 그렇게 했듯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댕론》 중에서 로댕과 릴케가 천재이기 전에 얼마나 대단한 노력가였는지 깨닫게 해주는 글이지요. 로댕은 릴케가 예술가로서 힘든 순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조언을 구했을 때도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철인 로댕이라 해도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삶이 힘들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로댕이 릴케를 만났을 때가 60대, 릴케에게 매일 해준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힘내라고!”였습니다. ‘힘내라고!’ 밤에 헤어질 때, 아주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에도 아무 관련 없이, 로댕은 곧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젊었을 때, 얼마나 이 말이 매일처럼 필요한 것인가를. 두 사람의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젊은 시절에 로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나 곁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을 젊은 시인 릴케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힘내라고!”는 격려의 말이지요. 그리고 그 기운이 릴케에게로, 또 릴케에서 백석과 윤동주에게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로댕의 묵직하고 따뜻한 두 손이 어깨를 쓰다듬는 것 같은 이 말을 당신에게도 전합니다. “힘내라고!”
1284    윤동주 동시 읽기 모음 댓글:  조회:3383  추천:0  2018-10-26
  윤동주 동시 읽기         주: 작시 연도와 발표 연도가 다를 수 있음. 발표연도보다 작시연도를 중시하였음. 연도 추정은 제목에 ✻표를 넣었음. 35편 이 외에도 동시 장르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은 다수 있으며 더 연구해야 할 것임.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詩 등과 함께 발표         조개껍질    아롱다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 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 물소리.    -동시라는 이름으로 발표         기왓장 내외✻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든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병아리    뾰뾰뾰  엄마 젖 좀 주 병아리 소리.    꺽꺽꺽  오냐 좀 기다려 엄마닭 소리.    좀 있다가 병아리들은.  엄마 품속으로 다 들어 갔지요.            고향집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비행기    머리에 프로펠러가 연자간 풍체보다 더---- 빨리 돈다.    따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 숨결이 찬 모앙이야.    비행기는--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봐.     겨울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램이 달랑달랑  얼어요.       개✻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눈     눈이 샛하얗게 와서 눈이 새물새물 하오.     눈2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오줌싸개지도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사과✻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셋이서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 먹었소.     닭✻      ---닭은 나래가 커도 왜 날잖나요 ---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봐.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드링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걸.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어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어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알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천 우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봄    우리 애기는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굴뚝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빗 자 루     요오리 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하나 나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ㅡ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속에 감췄드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할아버지     왜떡이 씁은 데도 자꼬 달라고 하오.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보대 있는 데서 돌짜기 다섯 개를 주웠읍니다.    전보대를 겨누고 돌 첫개를 뿌렸읍니다. ---딱---  두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세 개째 뿌렸읍니다. ---딱---  네 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다섯 개째 뿌렸읍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받았을까요          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주세요 하루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한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한걸.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려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둘 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나무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아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시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지에 시로 발표     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귀뜨라미와 나와    귀뜨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아르켜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햇빛.바람    손가락에 침 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지에 발표          못자는 밤✻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출처 :윤동주선양회
128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봄(1) 댓글:  조회:3075  추천:0  2018-10-26
  봄(1)   /윤동주   우리 애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무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1936.10. =========================/// 윤동주 - 여러분은 윤동주 시인을 알고 있나요?  민족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  윤동주 시인의 시들을 다 읽고 나니까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는 것 같지 않나요? 그건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우리 마음으로 옮겨 오기 때문일 거예요.  윤동주 시인은 일제 치하의 어둡고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도 맑고 깨끗한 마음을 담은 시들을 많이 남겼어요. 윤동주 시인을 가리켜 '민족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물론, 독립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끝내 우리 나라가 광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스물아홉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일제의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혼을 담은 시들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편의 시들이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시 속에 그토록이나 잘 담아 놓았으니 그렇겠지요.  더욱이 우리 어린이들이 즐거이 읽을 수 있는 동시까지 많이 남겼으니 온 국민이 함께 애송하는 시를 쓴 '국민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  한줄기 해란강이 흐르는 땅  「고향 집」이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지요.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시에 나타난 것처럼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 자란 곳은 두만강 북쪽에 있는 옛 만주 땅입니다. 지금은 흔히 연변이라 부르는데 그 때는 북간도라고 했지요.  1800년대 말부터 농사를 짓기에 더 비옥한 땅을 찾아 만주로 떠난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지요. 원래 함경 북도에 살았던 시인의 증조할아버지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사를 해서 그 곳에 자리를 잡았던 거래요.  이사를 해서 더 잘 먹고 살게 되었지만 조국을 떠난 사람들은 그래도 '남쪽 하늘 저 밑'에 있는 고향이 늘 그리웠을 거예요. 그러니 증조할아버지 때 떠나온 고향인데도 윤동주 시인조차 그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나타냈던 것이지요.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우리 민족은 고유한 전통을 지키며 강인하게 살았대요. 다른 나라 땅에 가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한민족임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슬픈 족속」이라는 시를 읽으면 그 때 그 곳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모습이 지금도 우리 눈에 생생히 보이는 것처럼 느껴져요.  버려진 땅을 기름진 땅으로 일구어 내며 우리 민족은 후손들을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대요. 윤동주 시인이 다닌 명동 소학교도 후손들에게 민족혼을 심어 주기 위해 우리 민족 스스로 세운 학교였지요.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도 그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무장 독립 투쟁을 벌였던 곳이 바로 북간도입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독립군에 아낌없이 몸을 던진 독립 투사들을 길러 낸 곳,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솔'이 서 있고 '한줄기 해란강'이 흐르는 땅, 그 곳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 가슴 속에 민족혼을 키우며 자란 곳이지요.  ......................................................................................................................................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시인 윤동주는 어린 시절에 마음이 아주 여리고 순했대요. 그래서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도는 울보였다네요! 어쩌다 선생님이 무얼 물어 보았는데 대답이 막히면 그 때도 금방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해요. 그렇게 여린 감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처럼 맑고 아름다운 동시를 쓸 수 있었을 거예요.  어린 윤동주가 태어나 소학교 시절까지 자란 명동촌이라는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었습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는 곳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경치가 더욱 아름다웠대요.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동시들 중에서도 겨울과 눈을 노래한 것이 많은가 봐요.  윤동주의 집은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산 기슭에 있는 교회당 옆집이었대요. 집 뒤와 옆에는 작은 과수원이 둘러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수십 길도 더 되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이 「자화상」이라는 시를 쓴 동기가 되었지요. 윤동주는 친구와 같이 과수원 울타리의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 먹고, 물을 길어 입을 닦고, 그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며 우물 속에 울리는 소리를 듣곤 했대요.  윤동주의 가족은 대가족이었습니다. '떡이 쓴데도/자꾸 달다고'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쓰다 버린 습자지'로 '버선본 만드는' 어머니와 한밤에 깨어나 '당나귀에게/짚을 한 키 담아 주'는 아버지, 그리고 '가위로 종이 쏠'다가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볼기짝을' 얻어맞는 동생들까지 가족이 참 많았지요. 그래서 나중에 정겨운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동시들을 많이 썼지요.  「편지」라는 동시를 보면 누나가 나오지요. 하지만 윤동주는 그 누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위로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윤동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 나라로 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흰 봉투에/눈을 한 줌 넣'어 편지로 부치겠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지요.  윤동주는 동생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아주 다정다감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서울에 가 있을 때에도 동생들에게 책을 사 보내기도 하고, 방학에 집에 돌아오면 동생의 손을 잡고 산책길에 나서곤 했지요. 그 때 실제로 동생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 바로 「아우의 인상화」랍니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들에는 시인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은 일과 그 후에 자라면서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삶과 시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는 중학교에 들어가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등사판 교내잡지를 만들기도 했지요. 특히 재봉질 솜씨가 뛰어나 학교 축구부원들의 유니폼에 등번호 다는 것을 모두 집으로 가져와 직접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인 열여덟 살에 윤동주는 최초의 시 작품 3편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지요. 그 중 하나가 「내일은 없다」라는 시랍니다. 그 후 여러 선배 시인들의 시를 열심히 읽으면서 더 많은 시들을 썼습니다. 특히 「정지용 시집」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이듬해부터는 동시도 함께 쓰기 시작했는데, 윤동주 시인의 첫 동시는 바로 「조개껍데기」이지요.  그 후 연희 전문 학교(지금의 연세 대학교)에 입학한 해까지 많은 동시를 써서 북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거짓부리」 등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전혀 동시를 쓰지 않게 됩니다. 맑고 밝은 동시를 계속 쓸 수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일제 치하의 우리 현실이 더욱 힘들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시라는 순수한 그릇에 어려운 현실을 치열하게 담아 내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을 테니까요.  그 대신 동시 이외의 시들을 열심히 써서 연희 전문 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첫 시집을 묶어 내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요. 그러나 거기에 실린 「슬픈 족속」과 같은 시들이 일본 경찰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져 시집을 내는 일을 포기하게 되었지요. 그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져서 우리의 민족 의식이 짙게 담긴 글들을 섣불리 내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윤동주 시인 자신이 직접 베껴 쓴 시집을 3부만 만들어, 스승 한 분과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각각 1부씩 나눠 주고, 나머지 1부는 자신이 갖고 말았지요.  ......................................................................................................................................  눈 감고 가거라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 때문에 세계 정세가 점점 어지러워지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창씨개명령을 선포하고, 우리의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시키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우리의 이름과 말을 빼앗아 민족 의식을 말살하려는 음모였지요.  시인 윤동주는 성을 바꾸지 않고 있다가 일본에 유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식으로 바꾸게 됩니다. 윤동주라는 이름이 어이없게도 '히라누마 도오쥬우'로 바뀐 것이지요. 그 때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라는 구절이 있는 시 「참회록」을 써서 그 아픔과 욕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 윤동주는 끝끝내 민족 의식을 버리지 않고 줄곧 치열하게 시를 쓰고 공부를 했지요. 「눈 감고 간다」라는 시에서 시인은 세상의 현실이 캄캄한 밤과 같으니 차라리 눈 감고 건너가라고 말합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별과 태양을 사랑하는 아이들이니 언젠가 희망과 꿈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들어 있는 시입니다. 그러니 눈 감고 가면서도 씨앗을 꼭 뿌려야 하고,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 눈을 뜨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캄캄한 밤중과도 같은 세상을 살던 그 시절의 어린이들에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윤동주 시인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우리 민족마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합니다. 젊은이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고 학생들마저 학병으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도 일본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그 시절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독립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절이었지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고종 사촌 송몽규와 윤동주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해 모의했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썼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민족 의식이 담긴 시를 우리말로 썼다는 것도 죄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시인 윤동주는 징역 2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면서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강한 의혹을 남긴 채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6개월 앞두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시인은 그처럼 안타깝게 스러져 갔지만 시인이 남긴 맑고 아름다운 시들은 이제 우리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 민족의 마음과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영원히 남아 있겠지요. 우리 어린이 여러분의 마음도 그 마음들 중의 하나 입니다.  그 후, 윤동주 시인의 유골은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시인의 무덤 앞에는 가족들이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한자로 씌어진 비석을 세웠지요. 시인이 남긴 유고들은 친구들과 가족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한데 모아 1948년에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처음 펴내어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 후, 더 많은 유고들이 보태어져 여러 권의 시집이 출간되었고, 마침내 1999년에는 시인 자신이 직접 쓴 원고들을 사진으로 찍어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민음사)이 나와서 시인의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지요.  시인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꼼꼼히 적은 책으로는 송우혜 선생님이 지은 『윤동주 평전』(세계사, 1998, 개정판)이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좀더 나이가 들면 앞에 적은 책들을 꼭 한번 읽어 보세요. 이 동시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모습들을 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당장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손연자 선생님이 지은 동화집 『마사코의 질문』 (푸른책들, 1999)이 있습니다. 그 책에 실린 '잎새에 이는 바람'이라는 동화가 바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지요.  시인의 모교인 연세 대학교 교정에 가면 '서시'가 새겨져 있는 윤동주 시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비가 있는 자리에서 보면 저만치에 윤동주 시인이 머물던 기숙사의 다락방이 보입니다. 꼭 한번 가 보세요.  ......................................................................................................................................  (▶ 이 동시들과 글은 윤동주 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푸른책들, 1999)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28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해비(햇비) 댓글:  조회:3470  추천:0  2018-10-25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주자 다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엿자 자라게        해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롤달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같이 춤울 추자       해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해비 / 윤동주 1936.9.9. ///////////////////////////////////////////////   윤동주 시로 / 김석환 1. 머리말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던 때는 일제의 억압이 극악에 달한 1940년 전후다. 이 시기는 많은 문인들이 일제에 무릎을 꿇거나 절필을 하여 민족 문학이암흑기에 접어든 때다. 그러한 때 시로써 꺼져 가는 민족혼을 지키고 노래하다 순국한 윤동주의 시세계에 대한 고찰은 큰 의의를 갖는다. 본고는 기존 논의의 결과를 참고하되 보완하기 위하여 가능한 전 작품을 대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기존의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많은 양의 동시를 연구의 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윤동주 시인은 성인이 되어서도 동시를 발표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당위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리고 기호학적 방법을 원용함으로써 그의 시세계를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기호 중에서 가장 정밀하다는 언어를 일차적 소재로 하는 시는 일상어의약호를 벗어나 새로운 약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는 기호체계의 일종이다. 따라서 기호학적 접근은 시의 문학성을 밝히는 일이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을 찾고,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을 상실에 대한 아픔과 그 극복 의지를 어떻게 공간기호로 체계화하여 보여 주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주로 일제의 억압이 극한에 달한 시기에 시를 쓰다 순국했다는 전기적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리고 공간기호체계를 살피는 이유는 일상어가 문학어로 전환되면서 언어의 선조성을 잃고 공간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시텍스트 전편에 내재된 내용들은 국권 상실이라는 민족사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본 논문의 텍스트는 동시를 비롯하여 그 동안 발굴된 윤동주 시인의시들이 발표 당시의 표기대로 대부분 게재된 『윤동주 시집』(범우사. 1993)으로 하였다.     2. 동심의 상실과 회복   1) 동심과 고향   윤동주 시인은 1917년 이국 땅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1935년 그가 18세 때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입학하면서 조국 땅 한반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1942년 일본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으로 떠나 살다 그곳에서 옥사를 했으니, 그는 모국 땅에서 불과 7년밖에 못 살았다. 짧은 생애를 주로 이국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불운은 조국 상실의 결과이며 민족의 아픔을 직접 체험케 하였다. 그리고 그가지키고자 한 동심을 유린하고 동심이 살아 있는 고향을 늘 그리게 하였다. 우선 그의 동시를 중심으로 동심의 원형과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고찰하기로 한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 전문   위의 시는 1937년 『카톨릭 소년』지에 발표한 동시다. 우선 오줌을 싼 요가 ‘빨래줄’에 걸려 있는 풍경 자체가 해학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해학적 풍경의 이면에는 국권 상실의 아픔이 강하게 배어 있다. 엄마를 잃고 아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가 그 부모를 그리는 꿈을 꾸던 상황은 바로 나라를잃고 그 회복을 꿈꾸던 민족의 현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오줌’은 꿈의 결과이자 꿈의 실체이며, 그것의 흔적은 꿈에 그리던 별나라와 만주 땅 지도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요를 걸어 논 ‘빨래줄’은 그것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수평적 수직적 공간기호체계의 매개적 공간기호가 된다. 즉 ‘방 안/빨래줄/만주땅’으로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와, ‘방 안/빨래줄/별나라’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가 구축되면서 ‘빨래줄’에 걸린 요는 꿈의 세계와 현실을 잇는 매개적 기호로서 사다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공간기호체계가 수직과 수평 양축으로 동시에 구축됨으로써 그 꿈의 간절함을 더욱 강조하며 시인의 지향 의지가 지상과 천상으로 동시에 확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가 지상의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천상의 절대적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그가 그의 부모때에 떠나온 평양에 와서 아버지의 고향이요, 민족의 삶의 현장인 한반도의 현실을 보면서 쓴 시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 자란 “만주 땅”을 아빠가 돈벌러 간 곳, 즉 유랑의 땅이요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 시는 만주 땅을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고향 상실의 아픔과 향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고향집」 전문   화자는 두만강 건너 남쪽의 고향과 대립되는 북쪽의 타향에 위치하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두만강을 경계로 대립하는 두 공간 ‘여기(타향)/고향(집)’은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쓸쓸한/따뜻한, 어머니의 부재/존재’ 등의 대립은 고향 상실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한다. 특히 헌 짚신짝이 암시하는 유랑과 고통, ‘왜 왔노’라는 화자 스스로에 대한 반문은 타향에서의 아픔을 더욱 강화한다. 하늘, 고향, 고향집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하강과 점층적인 축소는 고향의 내밀성을 강화한다.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라는 진술은 고향의 안식성을더해 주며, 귀향 의지는 곧 귀소본능 및 모성회귀 본능과 동일함을 암시한다. 특히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이나 집은 빈번하게 어머니나 누이 등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고향이 생명의 탄생 공간으로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은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곳이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전문   위 시는 산골 외딴집의 정겨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적 공간 ‘산골작이 오막살이’의 폐쇄성과 협소성은 그 공간에 내밀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감자를 굽는 부엌으로 더욱 축소됨으로써 안락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더욱 가중된다. 집은 무한하게 열려 있는 우주 안에 인간이 건설해 놓은 유한하고 폐쇄된 공간이며, 그 폐쇄성이 커질수록 안락성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막살이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는 고체가 기체로 변화된 것이다. 유동적인 물질로 변화된 그 연기는 수직적으로 상승하고 수평적으로 확산되면서 감자를 굽는 총각애들의 꿈을 암시한다. 그리고그 연기는 ‘감자 굽는 내’이며 감자는 ‘옛이야기’와 유계관계를 맺음으로써 ‘총각애들’의 추억을 상징한다. 그리고 추억이 감자를 거쳐 냄새(내)로 변화됨으로써 무한한 하늘로 유동할 가능성을 갖는다. ‘총각애들’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향해 꿈을 피워 올리는 오막살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고향의 원형이자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다.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들은 주로 평화롭고 안락한 고향을 배경으로 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동심을 그리고 있다   (1)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 했다     ―「귀뜨라미와 나와」 5연   (2)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반딧불」 1연   (3)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햇비」 1연   시 (1)에서 밤의 어둠 속에 빛을 내는 천체인 달은 밝고 높은 가치의 상징이며, ‘귀뜨라미’는 자연의 신비함을 들려주는 매개물이다. 그런 달빛이 내리는 밤에 ‘귀뜨라미’와 교신을 나눈다는 건 곧 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고 화합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시 (2)에서 ‘반딧불’은 ‘달조각’과동일시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발광체다. 윤동주 시인은 그 ‘반딧불’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고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곧밝고 신비한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동심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시 (3)에서 ‘햇비’는 햇빛과 함께 내리는 비, 또는 햇빛처럼 내리는 비, 비처럼 내리는햇빛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서로 대조적인 이미지인 해와 비를 합성한 이 시어는 모호성과 다의성을 갖는데 그 물리적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해와 비가 모두 수직 하강성을 공통적으로 갖는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화자는 옥수숫대처럼 자라 ‘햇비’를 맞음으로써 수직적 대립은 해체되고 하나로융합된다. 이는 곧 높고 밝은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동심을 암시한다. 윤동주 시인은 위에서 보듯 그의 동시에서 수직적으로 밝고 높은 가치의 세계와, 수평적으로는 자연 및 인간과 공존하고 소통하며 사는 동심을 노래한다. 그런데 현실보다 더욱 가치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향성은 윤동주의 동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시정신이다. 또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바로지고의 가치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고 공존하며 사는 곳이며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며 그 원형이다.   2) 어두운 고향   윤동주 시인은 동심의 순수성과 그것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인 고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던 시대의 비극 속에서 그것을 지키고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곧 시대의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것이며 우주적 질서 속에서 참다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기원이다. 어둠은 윤동주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지배하는 핵심적 이미지며 상실된 현실의 현실을 암시하는 기호이다. 그리고 동심이 추구하던 밝은 빛이 없는 상태로서 시야를 가리는 장막이며 장애물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고향에 돌아와 어둠 속에서 눈물지으며 ‘또 다른 고향’으로 가려는 꿈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또 다른 고향’은 화자가 있는 현실 공간인 고향과 대립되며, 2연에 나타난 우주 및 하늘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의미상 등가치다. 따라서 두 공간 기호는 수평적(내/외) 또는 수직적(상/하)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한다. 화자가 있는 고향은 ‘눈물, 우는, 어둠, 풍화작용’ 등이 암시하는 것처럼 부정적 공간이며 그와 대립되는 곳은 ‘아름다운’긍정적 공간이다. 화자가 새로운 고향을 그리는 까닭은 고향에 돌아와 방 안의 어둠을 확인하고, 그 어둠 속에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어둠은 시야를 가려 우주로 통하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화자는 바람 소리를 들음으로써 방이 우주로 통하고 있음을 감지한다.바람은 하늘과 방의 대립을 해체하고 이어 주는 매개적 기호이며 백골을 풍화작용 시킨다. 그런데 백골은 그것을 관찰하는 나와 대립되는 현실적 자아의 상징이다.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던 화자는 새로운 방 밖의 세계에 눈뜨고 방 안과 고향의 어둠, 즉 부정적 현실을 감지한다. 화자가 눈물지으며 우는 것은 자신의 기대와 그러한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이다. 울음과 눈물은 바로 자아의 기대가 어긋남으로써 야기되는 감정의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울던 화자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않은 ‘지조 높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다. 개는 어두운 현실을 거부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거나 자신보다 지조 높은 타인을 상징한다. 그러한 개 짖는 소리를 듣던 화자는 이제 더욱 급박한 어조로 새로운 세계로 ‘가자’고 다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아와 상반된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고, 자아를 성찰하며 또 다른 고향을 향하고자 하는 것은 윤동주 시인이 어둠에 매몰당하지 않는 ‘아름다운 혼’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혼은 바로 앞에서 논한 밝고 평화를 사랑하는 동심과 같은 것이다. 그는 동심의 순수성이유린되는 고향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거부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다른 고향’을 지향하는 것이다. 시 「돌아와 보는 방」에서 화자는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는데, 그것은 실내와 실외의 차이를 없게 만들어 그 대립을 해체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또한 그것은 밝은 대낮과 차이를 만들어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화자는 이제 어둔 방에서 창 밖을 내다보지만 그곳 역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오던 길도 비에 젖어 있다. 결국 낮과 밤, 실내와 실외는 모두 부정적이고 절망적일 뿐이다. 어둠은 시야의 모든 것을 가려 절망에 빠지게 하는장애물이며, 비에 의해 그러한 절망적 상황은 더욱 강조된다. 비는 시야를 더욱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 「쉽게 쓰여 진 시」에서 역시 창 밖엔 밤비가 내리는데, 그러한 실외를 지켜보는 화자는 자신의 방을 “남의 나라”로 여긴다. 밤비가 내리는 실외와 대조적으로 안락하고 익숙한 공간인 방을그렇게 느끼는 것은 밤비가 암시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크기 때문이다. 시 「눈 감고 간다」에서 시적 배경은 어두운 밤이며, 그것은 암울한 시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밤은 곧 태양이 뜨지 않아 공간이 어두운 시간이며 그 어둠은 태양과 별의 밝음과 대립된다. 화자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고 가거라”고 명령하는데 그것은 곧 아이들이나 그들이 대신하는 민족에게어둠을 초월하여 태양과 별을 향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윤동주 시인의 궁극적 지향의 대상이 지상적인 것보다 밝고 영원한 천상적인것임을 암시해 준다. 시 「거리에서」에서 화자는 앞의 시에서 방 안에 있던 것과는 달리 밤거리를 걷고 있다. 거리를 수식하는 ‘괴롬, 재색빛, 밤’ 등은거리가 대신하는 시대의 아픔과 암울한 상황을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동주 시에서 공간적 배경엔 주로 어둠이 있으며 그것은 절망적이고 괴로운 현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자연히 밝은 낮보다 빛이 없는 밤이다.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배경 속에서 화자는 어둠에 묻히지 않고 자아를 성찰하고 밝은 세계로 초월을 시도한다. 특히 어두운 방은 바로 어두운 시대 속에 사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상징하는 구체적 공간이다.   3) 자아성찰과 동심의 회복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현실은 늘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둠에 매몰되거나 잠들지 않고 깨어 자아를 성찰한다. 그리고 어둠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고 그곳을 지향한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동심을 회복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일부   위의 시에서 ‘밤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암울한 현실을 암시하며 시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그러한 밤비가 내리는 밤 화자는 남의 나라처럼 느껴지는 ‘육첩방’에서 부정적인 현실을 감지하고 ‘홀로 침전하는 것’이다. 어둠은 현실의 암울함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주위를 모두 가려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2연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각한 화자는 쉽게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은 시는 어둠과 대립하고 거부하는 밝은 정신으로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쓰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자가 방 안에 등불을 밝힘으로써 창을 경계로 내/외공간은 밝음/어둠으로 대립되는데, 그러한 행위는 ‘어둠을 조곰 내몰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시인으로서 천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등불은 방 안밖에 밝힐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 화자는 온 세상이 밝아질 아침을 기다린다. 눈물과 위안이 암시하는 양극적 감정으로 손을 잡는 것은 바로 그 한계성을 인식하고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감당하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끼고,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미래를 기다리는 자세는 윤동주 시인 시에 일관된어둠의 극복 방식이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의 자아성찰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6연   (2)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돌아와 보는 밤」 3연   (3)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참회록」 4연   시에서 화자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우물은 그 물질적 속성 때문에 거울이요, 지상/천상, 현실/비현실, 현재/과거를 잇는 창문 구실을 한다. 화자는 그 우물을 통하여 ‘하늘, 구름, 바람’ 등 천상적 이미지와 추억처럼 어려 있는 사나이를 본다. 특히 우물이 거울과 창문처럼 매개적 기호작용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산모퉁이 돌아 외딴 곳, 즉 현실 공간의 경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바로 현실을벗어난 공간에서 이상적인 공간인 하늘과 현실적 자아와 대립되는 이상적 자아의 구체적 형상인 사나이를 보는 것이다. 화자는 앞 연에서 “돌아가다생각하고 도로 가 들여다보는” 행위를 반복하는데, 그렇게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사나이를 보며 화자가 미움과 가엾음을 느끼는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상반성 때문이다. 시 (2)에서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어둠 속에 홀로 있다. 그리고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눈을’ 감는다. 여기서 창과 어둠은 ‘방/세상’의 경계에 있는 매개적 공간기호로서 두 공간을 차단한다. 그리고 마음의 창인 눈을 감는 행위는 자아/세상을 차단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그리하여 화자는 폐쇄된 방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즉 자아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 속에서 익어가는 사상을 발견한다. 시 (3)에서 밤에 거울을 닦는 행위 역시 잃었던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며 그 어둠은세상으로 향하던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거울은 ‘현실적 자아/이상적 자아’의 매개적 기호며, 거울을 닦는 것은 거울의 내/외의대립을 해체함으로써 자아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분열된 두 자아를 하나로 화합시키려는 심리를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자아를 성찰하는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거나, 밤이다. 또한 공간적 배경은 주로 현실을 벗어나고 차단된 곳으로 이상과 현실의 매개적 공간이다.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현실과 차단되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응시하기에 적당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를 성찰하면서 시인은 슬픔이나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분열을 발견하거나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거나 개선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학에서 비롯된다. 자아성찰을 끝낸 시인은 이제 더 적극적인 자세로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초월을 시도한다. 그것은 시 「새벽이 올 때까지」에서 보듯 “이제 새벽이 오면/나팔소리 들려 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4.5연   위의 시에서 ‘하늘/십자가/(지상)’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인간’과 서로 대응된다. 따라서 십자가와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지상, 하나님/인간의 매개적 기호로서 양극을 이어 주는 사다리와 같은 구실을 한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를 지고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늘과 지상의 관계를 잇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는 곧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처럼 속죄양이 되어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고 밝히겠다는 지사적 결의다. 그것은 또한 밝음과 평화를 지향하는 동심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위와 같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암시하는 주된 약호다. 즉 수직축의 ‘상/하는 이상/현실, 밝음/어둠, 긍정/부정’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하방에서 상방을 향한 기호의 수직 상승은 현실에 반발하여 이상 세계를 향하는 그의 시정신을 암시한다. 다음 시들 역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하며 수직 상승성으로 그러한 시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1)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헤는 밤」 9,10연   (2)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로 을라가고 싶다     ―「산상」 4연 시 (1)에서 화자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의 울음소리는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이 슬퍼 우는 거라고 여긴다. 벌레는 바로 밤이 상징하는 어둔 현실 속에서 시인으로서 역할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걸 자책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부끄러움과 슬픔은 그런 자아성찰 끝에 느끼는 자책감에서비롯된다. 화자는 자신의 이름이 묻힌 언덕을 무덤과 동일시하며 봄이 오면 그 위에 풀이 무성할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런데 그 이면엔 ‘흙 속(이름)/언덕 위(풀)/하늘(별)’이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되며 이름은 풀의 씨앗이 되어 수직 성장해 그 수직적 대립은 해체된다. 즉 시인은 별이상징하는 밝은 세계를 향한 동경과 지향성을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풀이라는 기호로 보여  준다. 따라 이름을 써서 흙으로 묻는 행위는 가입의례이며부활을 위한 죽음과 같다. 시 (2)에서 거리로부터 ‘높은 데’로 올라가려는 수직 상승의 욕구를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이 무너진 후의 부정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높은 가치의 세계로 초월하려는 의지를 암시 한다. 외에도 시 「肝간」에서 바닷가 바위 위에 간을 말리어 독수리에게 “와서 뜯어 먹어라”고 명령하는데, 그 배후엔 ‘바다 속(용궁)/바위 위/하늘’로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된다. 그리고 시인은 날개가 있어 수직으로 상승적 운동을 할 수 있는 독수리로 초월 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수직축의 하방으로부터 상방인 하늘로 상승하는 기호로 초월의지를 암시한다. 이는 하방보다 상방에 더욱 가치 있는 세계가존재한다고 여기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은 직립하는 인간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중력의 방향과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윤동주 시에서는 수직적 상승에 의해서만 아니라 수평적 이동으로도 이상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보여 준다. 그 지향성은 바로 윤동주 시인의 시정신의 원형을 이루는 동심을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시 「산골물」에서 “바다로 가자”, 시 「눈을 감고 간다」에서 “가진바 씨앗을/뿌리면서 가자” 등은 바로 그러한 예다. 그리고 기타의 시에서도 수평적 이동을 지시하는 ‘가다’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시인의 동심의 회복을 위한 초월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윤동주 시인의 동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과 동심의 상징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동심과 고향의 상실을 어떻게 그리고 있으며 어떻게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로 초월하는가를 고찰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일찍 고향을 떠나 만주 땅에서 생활하거나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다. 즉 짧은 생애의 많은 기간을 이국에서 생활하며 고향을 그리는 여러 편의 동시를 썼다. 그의 동시에서 고향은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으면서 평화롭고 안락한 모성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공간이다. 즉 밝고 영원한 이상적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며 사는 동심의 구체적이고 상징적 공간이다. 또한 민족이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던 상실 이전의 모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그러한 동심과 고향을 상실하고 그 아픔을 보여 주고 있다. 상실한 고향의 모습은 늘 어두운 밤이 배경으로 되며 밝은 고향의모습과 대립된다. 그러한 어둠은 곧 암울한 시대와 슬픈 내면을 암시한다. 시인은 그러한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하여 저항하며 새로운 고향을 지향한다. 그것은 곧 동심과 고향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며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 싶은 의지다. 그런데 그 동심과 고향의 회복 과정을 보면, 어둠 속에서자아를 성찰하며 부끄럽고 슬픈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한 시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어둠과 맞서 등불을 밝히며 밝은 미래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자아의 내면에 흐르는 동심의 순수성을 지키고 상실한 고향과 모국을 되찾기 위한 의지다.(『문예운동』 2017년 겨울호에서 전재)      ///김석환:  
1281    "두만강여울소리"는 어제도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지고 댓글:  조회:3242  추천:0  2018-10-24
30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 연길서 (ZOGLO) 2018년10월22일  늦가을의 풍요로움이 한가득 향기풍기는 지난 10월 20일, 제30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가 연길시 몽도미민속리조트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길림시, 할빈시, 목단강시 및 연변 각 현시의 시인, 평론가, 기자 들 50여명이 모여 시와 시단의 발전에 대해 연구, 토의했다. 먼저 시인들은 치렬한 문학정신으로 시단을 이끌어오는데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다가 근년에 우리 곁을 떠난 고 조룡남, 김파, 리상각 시인(초상화)을 그리며 숙연한 마음으로 묵도했다.        다음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시가창작위원회 주임인 김영건 시인이 개막사를 했다. 김영건 주임은 개막사에서 장장 30회나 걸쳐 소집된 “두만강여울소리”탐구회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렬거하면서 우리 시단의 발전사를 회고했다.           다음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상무부주석은 축사에서 시가창작위원회가 다년래 거둔 성과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정진할 것을 부탁했고 잡지사 전경업 사장이 페막사를 올렸다.       회의는 시종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였는데 최룡관, 김룡운님이 기조발언을 하였고 편집진 발언에 김성우, 전경업, 김창희, 한영남이 시창작과 “두만강여울소리”의 가치에 대해 피력하였으며 김동진, 전병칠, 김영능, 박춘월, 심예란, 리순옥, 김영춘, 박장길, 윤청남 등 40여명이 자유발언을 하였다.           시인들은 사회적 여러가지 여건으로 전반 조선족문단이 창작시점으로 볼 때 시집출간이 대폭 늘어나고 창작의 다원화와 모더니즘시, 포스터모더니즘시, 디지텔시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시적 완성도를 보이고 있으며 왕년의 시창작에 비해 크게 제고된 것을 감안하면서 기타 쟝르의 창작보다 그래도 시단이 앞서가고 있다고 표했다.      장장 30회를 주름잡아온 “두만강여울소리”는 그 기간 연변작가협회를 중심으로 해서 연변8개현시의 당정지도자들의 많은 중시와 지지, 성원을 이끌어냈고 문련, 민족사무위원회, 고등학교들과 기업인들의 많은 알찬 도움을 받아 시종 거창한 흐름을 보였음을 시인들은 명기할 것이다. 그리고 혁혁한 문학적 공헌을 하시고 이미 작고한 리욱, 김성휘, 정몽호, 박화, 김문회, 허룡구, 문창남, 김호근, 황장석, 김동호, 허흥식, 리삼월, 한춘, 조룡남, 김파, 리상각 등 시인들의 시혼을 알뜰히 추억하고 기념해야 할줄로 안다.           의심할바없이 “두만강여울소리”는 중국조선족시문학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마멸할 수 없는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는 평이다.       중국조선족문단 뿐만아니라 전국문단, 지어 해외에서까지도 굉장이 인기가 있는 “두만강여울소리”는 10주년때 두만강변에 “여울소리시비”를 세웠고 20주년때는 그간 “여울소리”에서 상을 탄 시편들로 시집 “두만강은 흐른다”를 출판했고 이번 30주년을 맞으면서는 “중국조선족시화선집”, “우수시선집” 2000-2009사이의 10년간의 시선집 등 많은 시집을 출판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참가시인들의 탐구시작품 50편을 두고 투표와 심사위원들 공평한 심사를 거쳐 최종 6명 시인이 수상, 박춘월의 “들국화”, 심예란 “눈물의 온도”, 김선희 “석빙화”, 심명주 “새벽을 날다”가 우수상을, 김미란의 “봄안에 봄”, 신향란 “겨울나무”가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날 시인들은 자기들의 대축제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서로서로 숨결을 교류했고 시랑송, 노래와 춤까지 곁들면서 새로 다가올 시단의 래일을 맘껏 꿈꿔봤다.  글 금산/사진 창희, 호범
128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곡간 댓글:  조회:4075  추천:0  2018-10-18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시 ‘곡간’ 육필원고.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만주는 서글픈 변두리였다. “돈 벌러 간 아버지 계신 만주땅”(‘오줌싸개 지도’)은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유랑지였다.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명동촌(明東村),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변두리에서 1917년 12월 30일 한 생명이 태어났다.    산들이 두 줄로 줄다름질치고, 여울이 소리처 목이 자젓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작이를 빠르게도 건너련다  ―윤동주 ‘곡간’(1936년 여름)에서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는 골짜기(谷間·곡간)에 있는 명동마을에 꽃이 피면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집 근처 풍경을 동생 윤일주는 생생하게 남겼다.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윤일주 ‘윤동주의 생애’·1976년)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생가.  윤동주는 마을에서 돋보이는 큰 기와집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개척하여 소지주였고, 아버지는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셨다고 윤일주는 회고했다. 명동마을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자 소리 듣는 소지주의 후손이었던 윤동주는 맘껏 공부할 수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뽕나무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집 동쪽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며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윤동주 아버지가 선생으로 있던 명동학교에서는 변질되지 않은 갓 태어난 한글을 가르쳤다.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 때 국어 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당시의 교과서는 ‘솟는 샘’이란 등사본이었다. ‘가’자에 ‘ㄱ’(기역)하면 ‘각’하고, ‘가’자에 ‘ㄴ’(니은)하면 ‘간’하여 천자문을 외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1976년)   명동학교는 졸업식 때 파인(巴人)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나누어주는 학교였다. 윤동주는 한글로만 작품을 남겼다. 중국어 성적이 높았던 윤동주지만 중국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로 구별했고, 일본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구별했다. 그에게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는 이국어였다. 변두리에서 배운 때 묻지 않은 한글과 투박한 사투리를 버무려 그는 고소한 시를 썼다.   변두리에 있는 ‘언덕 중턱의 교회당’은 북간도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명동마을 모든 집의 막새기와에는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이 새겨 있었다. 천둥 비가 내려 무서워하는 동생들을 윤동주는 “예배당 십자가를 봐”라며 달랬다. 성탄절에 친구들은 교회당에서 가까운 동주네 집에서 새벽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변두리에 살던 저들은 ‘히브리인’(경계를 넘어선 방랑인)들이었다. 외삼촌 규암 김약연은 환갑에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된다.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자였다. 김재준은 1937년 3월부터 1년 반 동안 룽징(龍井) 은진중학 교목으로 지냈다. 김약연,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송창근, 김재준, 윤동주, 송몽규, 안병무, 강원용 등 이들은 예언자와 예수를 혀가 아니라, 몸으로 살려고 했다. 윤동주 시를 해석할 때 성경은 종요로운 텍스트다. 이 변두리 명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이 살아났다.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만주로 가서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시킨 의인들이 있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맹자와 독립사상을 몸으로 가르쳤다. 1901년에 세운 규암재 이름을 명동서숙으로 바꾼 그는 1909년 다시 이름을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예배당과 학교 건물을 서양식 벽돌집으로 짓고, 서울 기독교 청년학교를 갓 졸업한 실력자 정재면을 모셔 신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명동소학교는 일경이 볼 때 불손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우글거리는 소굴이었지만, 윤동주에게는 한없는 자유를 가르쳐 준 꿈터였다. 윤동주는 4학년 때 잡지 ‘아이생활’을 서울에서 구독해 읽었고, 당찬 송몽규는 ‘어린이’에 독자편지를 투고해 실리기도 했다. 두 아이가 읽은 잡지를 동네 꼬마들이 돌아가며 읽었다. 5학년생 몽규와 동주가 찍어낸 등사판 월간지 ‘새 명동’은 두 아이의 운명을 엿보인 여린 새싹이었다.  지금 명동마을 윤동주 생가 입구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애국’의 대상은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란 뜻이다. 중국 국적으로 산 적이 없고, 중국어로 작품을 남기지 않았던 윤동주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변두리 만주에 소설가 염상섭 강경애 현경준 김창걸 안수길 박영준 황건, 시인 박팔양 유치환 백석 김조규 서정주 함형수 등이 거쳐 갔다. 그들은 잠시 머물렀지만, 윤동주는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다시 만주에 묻혔다. “아아, 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부텀이었고나!”(정지용 ‘서문’)라는 평가처럼, 저들보다 늦게 태어난 윤동주는 변두리가 낳은 작은 별이다.  윤동주는 만주의 시인일까.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라며 만주를 그리워했지만, 윤동주의 시는 만주에 갇혀 있지 않다. 후기로 갈수록 지리적 고향을 넘어, 인간의 원형적인 본향의식으로 향한다.  모든 변두리에서 진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많은 진리는 변두리에서 태어난다. 싯다르타의 고향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는 인도 북부의 변두리 성읍 공동체였다. 시장과 공동묘지라는 변두리에서 지냈기에 맹자는 여민동락 사상을 축조할 수 있었다. 큰 인물이 나올 리 없다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지리멸렬한 갈릴리에서 진리를 말했다. 윤동주, 그는 막막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희미하게 밝혀주는 변두리의 작은 별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   곡간 /윤동주 /1938년 여름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고 여울이 소리쳐 목이 잦았다. 한 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짜기를 빠르게도 건너려 한다. 산등아래에 송아지 뿔처럼 울뚝불뚝히 어린 바위가 솟고, 얼룩소의 보드라운 털이 산등서리에 퍼-렇게 자랐다. 삼 년 만에 고향에 찾아드는 산골 나그네의 발걸음이 타박타박 땅을 고눈다. 벌거숭이 두루미 다리같이...... 헌신짝이 지팡이 끝에 모가지를 매달아 늘어지고, 까치가 새끼의 날발을 태우며 날 뿐, 골짝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고요하다. ==================================///     일본의 한국문학 전문가 오무라 교수 주장 “육필원고와 현재 시집 사이에 차이 있어” 펜클럽 주최 세계한글작가대회 특별강연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에 참가하는 한국문학 전문가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 자료사진   올해로 탄생 100주년(2017년도)을 맞은 윤동주의 시집 정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이사장 손해일) 주최로 12~15일(2017년 9월),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에 참가하는 일본의 한국문학 전문가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사진)는 13일 오전에 행할 특별강연 ‘원고로 읽는 윤동주 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오무라 교수는 1985년 중국 용정에서 윤동주의 묘를 처음 발견했으며 등의 연구서를 낸 한국문학 전문가다. 1999년 왕신영·심원섭 등 한국인 연구자들과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교수와 함께 을 펴낸 바 있는 그는 미리 배포한 강연 원고에서 ‘병원’ ‘곡간’ ‘아침’ ‘별 헤는 밤’ 등 윤동주의 시 네 편을 예로 들며 정본 확정이 불가능한 까닭을 설명한다.   자필 시집 의 원래 표제로 삼으려 했을 만큼 윤동주가 소중하게 여긴 시 ‘병원’의 2연 4행 중 “이 지나친”에 이어지는 “放○”의 “○”이 무슨 글자인지 해독하기 어렵다고 오무라 교수는 밝혔다. ‘방일’(放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맥으로 보아 맞지 않는다는 것. 시 ‘곡간’(谷間)은 처음에는 6연으로 썼는데 최종본에는 이 가운데 두 연이 삭제되었다. 삭제된 두 연에는 “말탄섬나라 사람이,/ 길을뭇고지남이 이상한일이다.”와 같은 대목이 들어 있는데, 윤동주가 자기검열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오무라 교수의 추측이다.   ‘아침’은 10행짜리로 나오는 윤동주의 원고에서 여섯 행에 ×표를 치고 여백에 “고칠 것”이라 써넣었는데, 그의 사후 시집 편찬자가 그의 다른 습작 원고의 시구를 뽑아내어 남은 4행과 합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윤동주 자신이 의도한 최종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음사판 와 (2004, 연세대출판부)의 ‘아침’은 각각 다르다.   ‘별 헤는 밤’에 나오는 이국 소녀들 이름 ‘패, 경, 옥’은 윤동주의 원고에는 한자로 되어 있다.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는 이 시를 쓰면서 화룡현립 제일소학교 고등과에서 1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던 시절을 떠올렸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며 “윤동주가 이 시를 썼을 때는 틀림없이 중국어 발음이 귀에 맴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패, 경, 옥’이 아니라 ‘페이, 징, 위’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시에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등장하는데,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가 릴케 시를 일본어 번역으로 읽었을 것이라며 당시 일본에서 릴케의 이름은 ‘라이너’가 아니라 ‘라이넬’로 읽었고 역시 1955년 재판까지는 ‘라이넬’로 표기했다가 그 뒤부터 ‘라이너-’로 표기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별 헤는 밤’의 마지막 4행은 초고에는 없었으나 후배 정병욱이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라고 소감을 말하자 나중에 써서 덧붙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때문에 홍장학 편 (문학과지성사, 2004)에서는 이 4행을 아예 삭제해 버렸는데, “이 부분도 윤동주가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점에서 삭제해 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오무라 교수는 지적했다.   ‘세계화시대 한글문학, 평화를 꿈꾸다’를 주제로 열리는 세계한글작가대회에는 고은·신경림·유안진·김종회·방민호 등 17개 나라 문인과 연구자 63명이 발표와 토론자로 참여하고 국내 문인과 동포 문인, 경주 시민 등 수백명이 참가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 릴케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청년 말테가 반한 시인은 누구였을까. 당대 최고 명성의 베를렌이 아니었다. 문학의 마천루 파리에 사는 시인도 아니었다. 그는 ‘맑은 공기 속에 울려퍼지는 종소리 같은 시인’이자 ‘자기 집 창문이나 아련히 먼 곳을 비추는 책장의 유리문 이야기를 해 주는 행복한 시인’ 프랑시스 잠이었다.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에서 평생 사랑과 생명을 노래한 전원시인.   그를 좋아한 건 릴케만이 아니었다. 식민치하 조선의 백석과 윤동주도 그를 사랑했다. 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시스 잠과 릴케의 이름을 시에 녹여냈다. 백석은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라고 썼다.       프랑시스 잠 시어에 릴케도 반해 동주도 ‘별 헤는 밤’에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고 썼다. 이들이 그토록 그리워한 프랑시스 잠은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인 요소를 씻어낸 자연주의의 대가다. 프랑스 대혁명 후 ‘온갖 것에 대한 불만족’으로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며 어디로든 도피하려던 세태와는 달랐다. 그는 달아나기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포용과 모성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당나귀 이미지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박함의 상징인 당나귀를 좋아해서 자주 타고 다녔다. ‘나는 당나귀가 좋아’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한 기도’ 같은 시를 썼고 별명도 ‘당나귀 시인’이었다.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미명계’ ‘연자간’ ‘귀농’에 당나귀가 나오고, 동주 시 ‘밤’ ‘곡간’에도 당나귀가 등장한다. 이들과 프랑시스 잠을 잇는 당나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백석이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고 할 때 당나귀는 연인과 함께 산골마을로 가는 꿈의 매개다. 동주가 ‘밤’에서 한밤중 당나귀에 여물짚을 주는 아버지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모습을 겹친 것도 사랑과 생명과 희망의 메타포다.   증오사회 치유하는 '삼종의 기도' 한편으로는 생의 무게를 말없이 견디는 존재가 당나귀다. 프랑시스 잠은 시집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에서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다’며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들이 살던 시대는 냉엄했다. 프랑시스 잠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기에 태어났다. 백석은 105년 전 청나라가 망한 해에 나서 평생을 변방인으로 살았다. 동주는 100년 전 러시아 혁명기에 나 2차대전이 끝나기 6개월 전 옥사했다. 제국주의와 국수주의가 충돌하던 역사의 격변기에 인간과 삶의 근본을 되새기던 시인들….   지금도 다를 게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급변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앞세운 열강의 패권 다툼은 치열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집안싸움에 정신이 없다. 분노와 증오, 경멸과 힐난의 ‘팔매질 사회’를 껴안을 희망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비관보다 낙관, 슬픔보다 사랑을 노래한 그 시절 시인들처럼 지금 우리 삶은 얼마나 깊이 있고 성찰적이며 엄숙한가.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1279    평화의 상징 = 베토벤 최후의 최고의 걸작 교향곡 9번 댓글:  조회:7709  추천:0  2018-10-16
  시대 고전 분류 고전주의 음악 > 관현악곡 > 교향곡 제작시기 1822~1824년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초연 1824년 5월 7일, 빈 케른트너토어 극장 출판 1826년 가사 프리드리히 실러 헌정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편성 피콜로, 플루트2, 오보에2, 클라리넷2, 바순2, 콘트라바순, 호른4, 트럼펫2, 트롬본3, 팀파니, 심벌즈, 트라이앵글, 현5부, 독창(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혼성 합창 요약 1824년에 완성된 베토벤 최후의 교향곡으로, 교향곡에 합창을 등장시킨 혁신적인 작품이다. 베토벤이 남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곡은 실러의 시에 곡을 붙인 ‘환희의 송가’ 부분에 담긴 인류애적인 메시지 때문에 송년 음악회에서도 자주 연주된다. 목차 접기 베토벤 최후의 교향곡 교향곡에 합창을 더한 혁신적인 구성 실러의 환희의 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베토벤 최후의 교향곡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교향곡으로 1824년에 완성되었다. 여덟 번째 교향곡을 작곡한 지 12년 만의 일로, 베토벤은 “교향곡은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기악곡”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과감히 벗어나 역사상 최초로 솔리스트와 합창단을 등장시켰다. 4악장에 합창이 나오기 때문에 이 곡은 ‘합창’이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는데, 너무나 친숙한 이 노래는 독일의 시인 실러가 1786년에 발표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것이다. 베토벤과 실러의 인연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토벤은 20대의 청년 시절부터 괴테와 실러의 시에 심취해 있었고, 《환희의 송가》를 읽고 난 뒤에는 언젠가 이 시에 곡을 붙일 결심을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고, 그 결심이 실현되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프리드리히 실러   베토벤은 1824년 2월 경 이 곡을 완성했고 그 해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2년 전, 런던 필하모닉 협회로부터 새로운 교향곡을 부탁받았을 때, 베토벤은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교향곡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몇 년 전부터 작업해 오던 교향곡에, 실러의 시를 바탕으로 한 합창을 넣어서 새로운 형태의 교향곡을 써나갔다. 사실, 실러의 시를 사용한 노래의 선율은 그보다 훨씬 전인 1798년에 스케치 악보가 완성된 상태였는데, 그 때의 스케치가 25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합창 교향곡〉의 4악장에 사용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합창 교향곡〉의 초연이 이루어진 1830년대의 케른트너토어 극장   〈합창 교향곡〉의 지휘자 뒤에 서있는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초연은 베토벤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휘는 움라우프가 했다.   교향곡에 합창을 더한 혁신적인 구성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기존 교향곡의 통념을 깨는 파격적인 음악이었다. 완전한 기악곡으로 생각되어 오던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 합창을 등장시킨 것은 교향곡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보통 4악장 구조의 교향곡에서는 느린 템포의 2악장과 빠른 템포의 3악장이 이어지는데, 베토벤은 이 두 악장의 순서를 바꾸어 놓아서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난 반전의 묘미를 더했다. 또한 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운 포코 마에스토소’에서도 기존에는 볼 수 없는 음악적 아이디어들이 등장하는데, 시작부터 아주 여리고 모호한 음형이 길게 등장하면서 활기찬 주제 선율을 기대했던 청중의 예상을 무너뜨린다. 신비스러운 도입부가 지난 후에야 웅장한 주제가 나오면서 음악을 극적으로 몰고 간다. 〈합창 교향곡〉을 쓸 당시 이미 베토벤의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내면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작곡을 이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작곡이 아니라 지휘였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베토벤을 대신해서 케른트너토어 극장의 카펠마이스터인 미하일 움라우프가 지휘봉을 잡았고 악장인 이그나츠 슈판치히가 단원들과 눈빛을 교환하면서 호흡을 맞춰갔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베토벤은 지휘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악보를 넘겨가면서 연주자와 교감하고 초연 무대를 함께 만들어갔는데, 그가 악보를 넘기는 순간은 실제 연주의 진행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이처럼 완전히 귀가 멀었던 베토벤은 모든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을 때도 이를 알아채지 못했고, 결국 알토 독창자가 알려줘 간신히 청중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합창 교향곡〉 초연에서 알토 파트를 맡았던 카롤리네 웅거 그는 공연이 끝난 후 베토벤의 몸을 돌려 관중들의 큰 환호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는 바로 이 순간을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서 보여주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베토벤이 직접 지휘를 맡고 베토벤이 악보를 필사하는 카피스트로 고용한 여주인공 안나가 그를 도와서 연주를 이어간다. 안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 베토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앉아서 지휘를 하고, 베토벤은 그녀의 손짓을 보면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간다. 마음을 교감하면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인류애를 그린 〈합창 교향곡〉의 메시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악보 표지 ⓒ Ludwig van Beethoven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합창 교향곡〉 4악장 베토벤 자필 악보   실러의 환희의 송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전체 4악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합창이 등장하는 마지막 악장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마지막 악장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교향곡에서는 이례적으로 ‘스케르초’의 빠른 악장을 3악장 대신 2악장에 등장시켰고, 3악장에서는 영롱하고 맑은 분위기의 악장을 배치했다. 강렬하면서도 힘차고 밝은 기운이 느껴지는 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를 지나 빠르고 경쾌한 2악장 ‘몰토 비바체’를 거쳐 3악장 ‘아다지오 몰토 에 칸타빌레’로 향하면, 숭고하면서도 서정성이 느껴지는 주제가 등장하면서 차분히 4악장을 준비한다. 그리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4악장이 시작되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모든 악기들이 웅장하고 화려한 주제 선율을 연주하고, 마침내 베이스 독창자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 벗이여, 이제 이러한 노래 말고 우리를 더욱 즐겁게 하는 환희에 찬 노래를 부릅시다.” 그리고 이어서 중창과 합창이 어우러지는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진다. 이 곡조는 여러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었고, 찬송가에도 등장해서 잘 알려져 있는데 실러가 붙인 1절의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 낙원에서 온 아가씨여, 정열에 넘치는 우리들은 그대의 성전에 들어가리. 그대의 매력은 가혹한 세상에 의해 떨어진 것을 다시 부합시키도다. 그대의 날개 위에 머물 때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 무한한 인류애와 환희의 메시지를 담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지금까지 수많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고 있다. 특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베를린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은 “Freude(환희)”라는 독일어 가사를 “Freiheit(자유)”로 바꾼 ‘자유의 송가’를 선보여 독일인과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   교향곡 9번 (베토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무렵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교향곡 9번 d 단조》 Op. 125 ("합창"으로도 불린다)는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1] 에서 작곡한 교향곡으로, 1824년에 완성되었다. 명성 있는 작곡가의 교향곡으로는 성악을 기악인 교향곡에 최초로 도입한 작품이다[2] (최초의 성악 교향곡). “합창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바로 제4 악장에 나오는 합창과 독창 때문이고 그 가사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작품들은 물론 서양 음악 전체에서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3] 현재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4] 또한, 제4 악장에 나오는 음악은 유럽연합의 공식 상징가(유럽가)로 사용되고(도이칠란트어 가사는 공식 가사로 지정되지 않았다), 자필 원본 악보는 2003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3,300,000 달러에 낙찰되었다.[5] 목차 1작곡 2초연 2.1합창교향곡이 후대에 끼친 영향 3편성 4구성 5제4 악장 가사 6유명한 음반 7각주 8 9 작곡[편집]   교향곡 9번의 초고 1817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현재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에서 교향곡을 의뢰받은[6][7]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 작곡을 1822년에 시작해 1824년 연초에 마쳤다. 그 남자의 교향곡 8번(1812년) 이후 약 12년 만의 일이었다. 베토벤은 일찍부터 "환희의 송가"에 관심했었다고. 1793년에 이미 곡을 붙였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제 2 악장 스케르초의 주제는 1815년에 작곡한 푸가에서 비롯되었다. 교향곡에 성악다운 요소 도입은 베토벤뿐 아니라 그 모두 사람에게 처음이라서 교향곡에 성악과 합창을 도입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베토벤의 전기를 집필한 베토벤의 제자인 안톤 쉰틀러는 후일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제4 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전보다 훨씬 힘들어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적절히 도입하는 것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은 방에 들어와서는 '해냈어, 드디어 해냈다고!'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고서는 '실러를 대상으로 한 불멸하는 송가를 부르세'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보여 줬지요." 그러나 그 착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베토벤이 오늘날과 같은 제4 악장을 완성한 것은 결국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초연[편집] 1824년 5월 7일 빈에서 베토벤과 미햐엘 움라우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베토벤은 로시니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들이 주류를 이루던 빈보다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기를 원했지만[8] 그 남자의 친지들과 후원자들이 빈의 초연을 설득했다. 청각을 완벽히 상실한 베토벤은 최종 악장의 연주 동안에는 청중을 등지고 서서 가수들의 입술 모양으로 실황을 가늠했다. 제2 악장 스케르초가 끝나자 청중의 박수가 (모든 악장이 끝나기 이전인데도 이례로) 울렸을 때, 마지막 악장인 합창 악장의 직후 열광했을 때,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어가 청각을 상실한 베토벤의 등을 돌려 청중의 환호에 답례하게끔 도왔다.[9] 이 초연때 청중은 5번의 '기립박수'를 보냈다 하는데 당시 황제부부 입장 때의 기립박수 3회라는 통례로 보면, 귀족도 아닌 (게다가 궁정에서는 낮은 신분으로 취급되던) 작곡가에 불과한 베토벤에게 5회였다는 사실은 별난 일이었다. 초연 16일 후인 1824년 5월 23일의 두 번째 공연에서의 반응은 초연 때보다 미미했다. 합창교향곡이 후대에 끼친 영향[편집] .... 편성[편집] 목관악기 피콜로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2 대의 플루트 2 대의 오보에 2 대의 클라리넷(B-flat, C, A) 2 대의 바순 콘트라바순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금관악기 2 대의 호른(1, 2) (D, B-flat) 2 대의 호른(3, 4) (B-flat 베이스, B-flat, E-flat) 2 대의 트럼펫 (D, B-flat) 3 대의 트롬본 (알토, 테너, 베이스) (두 번째와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타악기 팀파니 트라이앵글 심벌즈 베이스 드럼 성악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소프라노 독창 알토 독창 테너 베이스 합창단 4 성부 (소프라노, 알토, 테너-I/테너-II, 베이스) 현악기 제1 및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 이런 편성은 베토벤의 교향곡 중 최대 편성이다. 초연 당시에 베토벤은 관악 파트마다 연주자 두 명을 지정해 편성을 확대했었다. 요즘은 이 곡을 3관과 4관 편성으로 연주한다. 말러 편곡판에는 팀파니를 두 대로 증량, 호른을 4대 첨가해서 8대로 하였고 이런 악기를 사용해 양쪽이 주고받는 식으로 편곡한 곳이 많고 목관과 주선율을 배가하는 기법이 쓰였으며, 기존에 없던 튜바도 추가했다. 구성[편집]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다.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Molto vivace, Scherzo Adagio molto e cantabile Presto/recitative - Allegro ma non troppo/recitative - Vivace/recitative - Adagio cantabile/recitative - Allegro assai/recitative - Presto/recitative: "O Freunde" - Allegro assai: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 Alla marcia - Allegro assai vivace: "Froh, wie seine Sonnen" - Andante maestoso: "Seid umschlungen, Millionen!" - Adagio ma non troppo, ma divoto: "Ihr, stürzt nieder" - Allegro energico, sempre ben marcato: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 "Seid umschlungen, Millionen!" - Allegro ma non tanto: "Freude, Tochter aus Elysium!" - Prestissimo: "Seid umschlungen, Millionen!" 연주 소요시간은 통상 70분이다. 제4 악장 가사[편집]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ü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ösen Folgen ihrer Rosenspur. Kü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Laufet, Brüder, eure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Brüder, über'm Sternenzelt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Ihr stürzt nieder, Millionen? Ahnest du den Schöpfer, Welt? Such' ihn über'm Sternenzelt! Über Sternen muß er wohnen.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는 빛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간다, 성스러운 신전으로!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킨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그대의 고요한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그렇다. 하나의 마음일지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이는 모두 다! 그러나 그조차 가지지 못한 자 눈물 흘리면서 조용히 떠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환희를 마시라 자연의 품 속에서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로 나아간다. 환희는 입맞춤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땅을 기는 벌레조차도 환희를 맛보고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태양이 수많은 별 위를 움직이듯이 광활한 하늘의 궤도를 즐겁게 날듯이, 형제여 길을 달려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온 세상 위한 입맞춤을!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으니. 억만 인들이여, 엎드리지 않겠는가? 창조주를 믿겠는가, 온 세상이여? 별들 뒤의 그를 찾으라! 별들이 지는 곳에 그는 있다. 유명한 음반[편집]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 EMI (1951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도이치 그라모폰 (1977년) 카를 뵘,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도이치 그라모폰 (1981년)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 데카 각주[편집] 이동↑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자 1818년 부터는 대화를 대화노트에만 의존했다.   지휘하는 레너드 번스타인    
1278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비둘기" 댓글:  조회:5229  추천:0  2018-10-15
  분류 비둘기과 성격 동물, 조류 유형 동식물 분야 과학/동물 요약 비둘기과에 속하는 새의 총칭.   내용 지구상에는 약 300종에 달하는 비둘기과 조류가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집비둘기의 조상인 낭(양)비둘기·흑비둘기·염주비둘기 및 멧비둘기 등 4종의 텃새가 살고 있다. 낭비둘기는 한탄강 자유의 다리 교각 같은 곳에 정착하기도 하지만 해안의 바위 절벽 또는 내륙의 바위 산, 바위 굴 등 산간지역에서도 산다. 흑비둘기는 천연기념물 제2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울릉도·소흑산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의 사수도 등지에 서식하는 희귀한 도서종이다. 염주비둘기는 희귀종이며, 가장 대표적인 흔한 종은 사냥새인 멧비둘기이다. 이 밖에는 제주도에서 1977년 4월 10일 녹색비둘기가 단 한 번 잡혔을 뿐이다. 멧비둘기는 유라시아 동부대륙의 온대에서 아한대에 걸쳐 번식하며 아한대에서 번식하는 무리는 남하, 이동한다. 평지에서 산지에 이르는 산림과 농촌·도시 할 것 없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이다. 일년에 2회 정도 번식하며 한배에 2란을 낳아 15∼16일간 육추(育雛)하여 둥우리를 떠난다. 새끼는 어미새가 콩 및 기타 식물질을 비둘기젖 형태로 토해 내어 키운다. ‘구굿-구-, 구굿-구-’ 소리내어 운다. ===================///   비둘기 비둘기는 비둘기과에 딸린 새로, 극지방과 사막을 제외한 전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성질이 순하여 길들이기 쉽고 귀소성을 이용하여 통신용으로 쓰기도 한다. 몸길이는 15~84cm이며, 머리는 비교적 작고 목과 다리는 짧다. 부리는 굵고 짧으며 부드럽다. 털 색깔은 여러 가지이나 회색이 많고, 수컷이 암컷보다 화려하다. 과일 · 곡물 · 씨앗 등을 주로 먹는다. 둥지는 주로 나무 위에 잔가지를 쌓아 접시 모양으로 짓는다. 1~2개의 알을 낳으며, 비둘기의 몸 크기에 따라 암수 교대로 14~30일간 알을 품는다. 새끼는 어미의 모이주머니 안쪽 벽에서 분비되는 즙(젖)으로 기른다. 비둘기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부터이다. 인도 · 미얀마 · 하이난 섬 등지에 사는 참비둘기를 길들인 것이 집비둘기이다. 기르는 비둘기는 통신용 · 식용 · 애완용의 품종이다. 비둘기와 비둘기의 구애 행동(원 안). 수컷비둘기의 부리 속에 암컷 비둘기가 부리를 집어 넣는다. ⓒ (주)천재교육  애완용으로 키우는 공작비둘기 ⓒ (주)천재교육  흑비둘기. 천연 기념물 제215호. ⓒ (주)천재교육  비둘기의 알 ⓒ (주)천재교육  알을 품고 있는 비둘기 ⓒ (주)천재교육 새끼비둘기 ⓒ (주)천재교육    비둘기 (Dove)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가 요즘 ‘골칫덩이’ 취급을 받고 있다. 쓰레기를 뒤지며 이것저것 주워 먹어 잘 날지 못할 만큼 살이 쪘다는 의미로 ‘닭둘기’, 배설물과 깃털로 각종 세균을 옮길 수 있다는 뜻에서 ‘쥐둘기’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다. 엽기적인 별명을 넘어 비둘기는 이제 법적으로도 ‘해로운 동물’로 지정될 모양이다. 환경부는 최근 집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규정하는 ‘야생동물보호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내놓았다. 비둘기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지방자치단체장의 허가만 받으면 포획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으로, 법제처 심사를 거쳐 6월경 공포될 예정이다. 환경부의 발표에 네티즌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것 같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입법예고안이 발표된 후 인터넷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101명 중 83%가 환경부의 개정안에 ‘찬성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적어도 사람들이 비둘기를 해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물보호단체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한국동물보호연합, 동물사랑실천협회 등 국내 동물보호단체들이 ‘정부가 과학적인 근거 없이 비둘기의 유해성을 단정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사람들이 비둘기가 사람에게 해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먼저 건강에 나쁘다는 생각 때문이다. 비둘기의 배설물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건조된 뒤 가루가 되고, 공기 중에 날리게 되면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는 각종 병균을 사람에게 전파할 수도 있다. 비둘기의 우리에서 발견되는 빈대, 진드기, 벼룩 등도 사람에게 옮을 수 있다는 주장과 조류인플루엔자(AI) 등 인수공통 전염병의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한 몫하고 있다. 또한 비둘기의 배설물은 도시 미관에도 좋지 않고, 건물이나 유적지 등 기타 시설물 자재를 부식시킨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배설물이 석회암 구조물에 손상을 주는 것은 과학적 실험으로 증명돼 있다. 비둘기의 배설물이 물과 닿으면 다양한 종류의 곰팡이 진균류가 성장하고, 대사과정에서 산성 물질이 나온다. 이 산성물질이 석회석을 녹여 구조물 곳곳의 색이 바랜다. 심할 경우는 미세한 틈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 틈 속으로 물이 스며들어 얼면 구조물에 금이 갈 수도 있다. 도시 비둘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비둘기는 ‘집비둘기’로 분류되는데, 원래는 바닷가 암벽지대에 사는 새라고 해서 영어로는 ‘Rock Dove’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학명은 납빛 비둘기라는 뜻의 ‘콜룸바 라비아(Columba lavia)’이다. 이 비둘기의 특징 중 하나가 강력한 번식력과 빠른 성장 능력이다. 집비둘기는 1년에 1~2회, 매번 두 개의 알을 낳는데 주변 환경이 좋으면 1년에 4번에서 6번까지 알을 낳기도 한다. 성장도 매우 빨라서 갓 태어난 새끼가 34~36시간 만에 몸무게를 두 배로 늘리고, 4~6주가 지나면 거의 다 자라 독립을 한다. 새끼 비둘기는 태어나자마자 ‘피존 밀크’라는 특별식을 공급받는데, 이는 암수 모두로부터 공급받는 젤 형태로,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고 각종 면역성분이 함유된 농축 영양덩어리여서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비둘기가 이렇게 까지 빠르게 번식하고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도시환경에서 주어지는 풍부한 먹이 때문이다. 시민들이 던져주는 모이와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는 비둘기가 하루에 필요한 먹이의 양인 20~50g을 단번에 먹어치울 수 있게 한다. 이런 환경에 있으니 도시 비둘기들은 어렵게 먹이를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어 여유시간이 많아지고, 이 시간의 대부분은 번식을 위해 노력할 수있게 된다. 풍부한 먹이가 안정된 성장과 높은 번식률을 보장해 주는 셈이다. ‘비둘기와 인간의 전쟁’이 그렇게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20세기 초부터 이 ‘납빛 비둘기’ 구제를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이 났다. 독약이나 마취제, 총포, 덫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일시적으로 비둘기의 개체 수가 감소하는 듯 보이다가 이내 예전 수준을 회복하거나 오히려 늘어나는 결과를 보였다. 또 영국에서는 ‘비둘기용 피임약’을 모이에 섞어줘 개체 수를 줄이려는 시도도 해 봤지만 이 역시 허사였다. 약을 먹지 않은 다른 무리의 비둘기가 재빨리 유입돼 별 효과가 없었다. 이처럼 사람이 비둘기의 개체수를 줄이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안정적인 번식의 근원인 먹이 공급은 차단하지 않고 ‘사냥’ 에만 나섰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비둘기 방제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시작한 스위스 바젤대학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총포와 덫, 독약 등으로 비둘기를 살상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으며 개체 수는 먹이의 양과 가장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바젤 시 당국과 동물보호협회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말자는 캠페인을 시작했고, 50개월 뒤 2만 마리로 추정되던 이 지역 비둘기 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비둘기 먹이 주는 모습   하지만 우리나라는 스위스 같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비둘기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20세기 초부터 유럽 각지에서 벌어졌던 비둘기와의 전쟁은 비둘기의 생태 습성을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작정 덤벼들면 결국 실패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과학적인 연구와 논의를 통해 생명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개체수를 자연스럽게 줄일 수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기이다. 인간은 비둘기를 통해 도심에서 동물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글 : 서영표 동아사이언스 과학전문기자 ======================///   특징 • 집비둘기는 원종이 비제비둘기(Columba livia)로서 개량되어 만들어진 품종으로 전 세계에 약 280종이 있다. • 우리나라에서는 도심, 공원, 하천, 강 등 다양한 지역에 서식하며, 사람에게 적응한 종이다. • 먹성이 좋아 하루에 1∼2㎏까지도 거뜬히 먹어 치운다. • 외형상 양비둘기가 가장 비슷하지만 도심지역에 서식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 환경부는 2009년부터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하여 지자체의 허가를 받아 포획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번식정보 • 2∼9월 사이에 번식하지만 주로 5∼6월에 가장 많이 한다. • 도심공원의 인공새집, 주택, 건물, 나무 등 다양한 곳에서 번식한다. • 알은 보통 2개 정도 낳으며, 색깔은 흰색이다. • 알을 품는 기간은 약 17∼18일 정도이며, 암수가 교대로 품는다. 새끼는 부화 후 일명 어미의 ‘비둘기 젖’을 먹고 자라며 약 20일 이후에 둥지를 떠난다. 구별하기(동정 포인트) 집비둘기 ⓒ 국립중앙과학관  • 깃의 색은 기본적으로 짙은 회색 바탕에 날갯깃에 2줄의 검은색 줄무늬가 있다. 개체별로 검은색, 회색, 갈색 등 변이가 심하다. • 양비둘기와 외형적인 특징이 가장 유사하지만 주 서식지의 차이가 크므로 구별에 어려움이 없다. 골칫거리가 된 신세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가 이제는 제 살길을 찾아야 할 신세가 되었다. 원래는 야생에서 생활하였지만 사람에 의해 사육되기 시작했고, 방사되면서 개체수가 크게 늘어나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과 동년 장애인 올림픽 때 많은 수의 비둘기를 방사하면서 개체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먹성이 좋고 번식력이 뛰어나 2009년 환경부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내에만 약 35,000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공원을 비롯한 도심 곳곳에서 강한 산성의 배설물로 건축물과 구조물 등을 부식시키고, 흩날리는 깃털 때문에 비위생적으로 불쾌감을 주어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자, 2009년 6월 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하고 지자체의 포획허가를 받아 잡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도심 속의 한 생태계로 자리 잡은 비둘기의 무차별한 퇴치는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며 모이주기 금지, 행사용 방사 금지, 비둘기 둥지 알 수거 등의 방법으로 개체수를 점차 줄여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오랜 세월을 인간과 함께해온 비둘기가 이제는 인간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게 된 지금, 같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비둘기의 귀소본능 비둘기는 귀소본능이 뛰어나 기원전 이집트에서부터 사람에게 사육되어 통신용으로 이용되었고, 전쟁 때는 편지를 보내는 ‘전서구’로서 활약했다. 우리나라에서도 6 · 25전쟁 때 미군이 이용한 기록이 남아있다. 비둘기가 집을 잘 찾는 이유는 첫 번째로 태양의 빛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는 ‘태양방향 판정설’과 두 번째로 본능적으로 지구의 자기를 느껴 방향을 잡는다는 ‘지자기 감응설‘이 있는데, 태양이 없는 밤에도 이동하는 점으로 미루어 지자기 감응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현재는 통신기기의 발달로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며, 대신에 서유럽과 중화권에서 경주비둘기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 집비둘기 ⓒ 국립중앙과학관  집비둘기 ⓒ 국립중앙과학관  집비둘기 ⓒ 국립중앙과학관  =============================/// @@비노아의 방주에서 유래합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내리고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혀 있을 때 노아가 하느님의 심판이 끝났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냅니다. 방주 밖으로 날아간 비둘기는 어딘가에서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와서 심판의 대홍수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 오고 있음을 노아에게 알려주게 됩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 입니다.  비둘기는 전혀 평화로운 동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의 역할은 잘못 주어진 것이다. "인디언의 고문 말뚝을 제외하고 비둘기처럼 동족을 서서히 끔직하게 죽도록 잔혹한 상처를 입히는 동물은 또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 비투스 드뢰셔는 콘라트 로렌츠의 실험을 그에 대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로렌츠는 일 관계로 며칠간 여행을 떠나면서 수컷 비둘기 윌리와 암컷 비둘기 페트라의 사랑이 진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두 마라의 비둘기들을 한 새장 안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사랑은 커녕 끔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윌리는 새장 귀퉁이의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뒷머리와 목의 윗면 그리고 꼬리 부분가지 등 전체의 깃털이 모조리 뽑혀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부분의 살갗 전체가 완전히 벗겨져 있었고 상처 부위 중앙에는 또 다른 평화의 비둘기 페트라가 마치 먹이 위에 올라앉은 독수리처럼 버티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 비둘기는 쉬지 않고 '패배자'의 상처 부위를 쪼아댔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암컷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컷 비둘기가 벌떡 몸을 일으켰으나 암컷은 어느새 뒤쫓아와 그 부드러운 날개로 수컷을 바닥에 때려눕혔다. 그러고 나서 '여전사' 페트라는 자신도 눈이 감길 정도로 지쳤음에도 가차없이 서서히 죽이는 작업을 계속했다." 비둘기들은 두 마리 이상을 한 새장 안에 가둘 경우 그와 같은 행동을 규칙적으로 나타내는데, 그들은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서로를 쪼았습니다.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된 리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실제 전쟁에서 비둘기가 리용되면서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옛날, 사람들이 저지른 죄에 화가 난 하나님이 대홍수를 일으켜서 지구의 모든 곳이 물에 잠겼을 때, 노아일족과 노아의 방주에 탄 생물들을 생각하여 40일만에 비를 멎게 했답니다,  홍수가 끝나갈 무렵 비둘기가 저지대에서 자라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고 온 것을 보고 노아는 드디어 대 홍수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이때부터 비둘기는 큰 재난이 끝난 상태를 알려주는 반가운 새가 되었답니다.  이후 비둘기는 증오와 분노를 가지지 않은 평화로운 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세계대전 당시에 비둘기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전쟁포로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비둘기를 이용해서 군사정보를 알리는 역할을 했는데 그 것으로 인해서 전쟁이 끝난뒤 비둘기는 훈장 까지 받았답니다.  교도소에 포로로 수감된 사람들이 비둘기를 이용해 군사정보를 자국에 알려주고, 그럼으로 인해서 비둘기의 공을 인정 훈장까지 주고 그 뒤부터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     졸지에 '날아다니는 공해'가 되기는 했지만 비둘기는 오랫동안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사랑받아 왔다. 비둘기 상징의 유래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대홍수로 인간세상을 심판하실때 방주를 타고 살아남았던 노아와 그 식구들은 홍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수가 끝났는지 알 길이 없었던 노아는 고민하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를 이용하기로 한다. 비둘기는 집으로 돌아오는 습성인 귀소 본능이 있었기 때문. 바깥 세상에 나갔던 비둘기는 다시 방주로 돌아왔고 그 입에는 올리브 나뭇가지가 물려 있었다. 물이 빠져 육지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비둘기가 대재앙인 홍수에서 희망의 올리브 나뭇가지를 가져다 주었다는 의미에서 평화의 상징이 됐다. 이후에 성령이 내려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 빛무리에 쌓인 흰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는 등 성스러움, 순결, 안전, 평화 등 긍정적인 의미로 두루 쓰인다. 예전엔 그 상징성 때문에 무엇을 하든 용서받았던 비둘기지만 이제 도농 공통의 골칫덩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모든 인간을 휠쓸려고하자 하나님이 노아한테 배를 만들고 모든 동물 남녀 각각과 노아,노아의 가족다 방주에 태워서 살아남았습니다. 몇십년후에 물이 빠져 육지드러나는지 확인하기위해 맨처음에 까마귀를 내보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지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를 내보냈고 올리브 나뭇가지를 껶어와서 귀소본능인해 돌아왔습니다. 이후에 인간이 휠쓸던 물을 빠져 육지드러나 하나님한테 제사드렸습니다.. 비둘기가 올리브나뭇가지 입물고 돌아올때는 그때 평화의 상징되었다하죠 ===================///   [ 창8:8 ]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 마3:16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성경에서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온 세상에 임하게 평안, 안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노아의 방주에서 유래합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내리고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혀 있을 때 노아가 하느님의 심판이 끝났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냅니다. 방주 밖으로 날아간 비둘기는 어딘가에서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와서 심판의 대홍수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 오고 있음을 노아에게 알려주게 됩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 입니다.  비둘기는 전혀 평화로운 동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의 역할은 잘못 주어진 것이다. "인디언의 고문 말뚝을 제외하고 비둘기처럼 동족을 서서히 끔직하게 죽도록 잔혹한 상처를 입히는 동물은 또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 비투스 드뢰셔는 콘라트 로렌츠의 실험을 그에 대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로렌츠는 일 관계로 며칠간 여행을 떠나면서 수컷 비둘기 윌리와 암컷 비둘기 페트라의 사랑이 진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두 마라의 비둘기들을 한 새장 안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사랑은 커녕 끔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윌리는 새장 귀퉁이의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뒷머리와 목의 윗면 그리고 꼬리 부분가지 등 전체의 깃털이 모조리 뽑혀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부분의 살갗 전체가 완전히 벗겨져 있었고 상처 부위 중앙에는 또 다른 평화의 비둘기 페트라가 마치 먹이 위에 올라앉은 독수리처럼 버티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 비둘기는 쉬지 않고 '패배자'의 상처 부위를 쪼아댔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암컷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컷 비둘기가 벌떡 몸을 일으켰으나 암컷은 어느새 뒤쫓아와 그 부드러운 날개로 수컷을 바닥에 때려눕혔다. 그러고 나서 '여전사' 페트라는 자신도 눈이 감길 정도로 지쳤음에도 가차없이 서서히 죽이는 작업을 계속했다." 비둘기들은 두 마리 이상을 한 새장 안에 가둘 경우 그와 같은 행동을 규칙적으로 나타내는데, 그들은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서로를 쪼았습니다. =====================///   평화를 상징하는 새 : 비둘기 평화를 상징하는 음악 :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평화를 상징하는 식물 : 올리브  
1277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비둘기 댓글:  조회:4329  추천:0  2018-10-15
  비둘기     윤동주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 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요(모이)를 주우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요. 비둘기하면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 비둘기를 빗대어 현실적으로 어둡고 답답한 환경과 심정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이 현 숙  =======================/// [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윤동주는 펜으로, 송몽규는 총으로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글자크게글자작게| 페이스북트위터 시(詩)로 시대에 저항했던 청년 윤동주 … 재정·통화정책에도 매파와 비둘기파로 갈려...     1947년 2월13일 경향신문에 한 청년의 시가 실렸다. 그의 이름 앞에는 ‘고(故)’가 붙었다. 신문사 주간이었던 정지용은 작가를 이렇게 소개했다. ‘간도 동촌 출생. 연전문과졸업.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재학중 일본 헌병에 잡히어 무조건하고 2개년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중 음학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로 갔다. 일황 항복하던 해 2월26일에 일제 최후 발악기에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은 시인을 암살하고 저이도 망했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일부 표현은 각색했다)’ 시인 윤동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쉽게 씌여진 시](원문에는 ‘쉽게 씨워진 시’)는 이렇게 세상과 조우했다.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다. 윤동주는 자신이 쓴 시마다 시를 쓴 날짜를 기록했다. [쉽게 씌여진 시]는 1942년 6월 일본 도쿄에서 유학중에 쓴 작품이다. 이미 조선어로는 어떤 글도 쓰지 못하게 하던 험악한 때다. 윤동주는 이 시를 친구인 강처중에게 보냈다. 윤동주는 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조선은 독립했다. 기자가 된 강처중은 이 시를 갖고 있다가 정지용에게 보여줬다. 그의 시는 서거한 지 2년5개월 만에 비로소 대중에게 알려졌다. [쉽게 씌여진 시]는 부끄러움을 표현할 때 곧잘 인용된다. 일제강점기, 자국의 말도 글도 쓰지 못하는 불합리한 시대에 윤동주는 제대로 항거하지 못했다. 윤동주는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6첩방은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방이다. 밤비 내리는 밤, 일본 하숙집에서 자신을 돌아보니 ‘나는 뭐하는가’ 싶었던 게다. 자신은 시인이니까 시만 잘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자위를 해본다. 하지만 양심에 찔렸다. 일제 치하, 동무들은 싸우다 하나 둘 죽임을 당하거나 실종됐는데 자신만 부모님이 보내주신 학비를 받아 편안하게 유학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끝내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윤동주의 모습은 송몽규와 대비된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이면서 친구이자 평생의 동지다. 둘은 석 달 차이로 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한 달 차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송몽규는 중국 군관학교에 들어가 무력 투쟁을 시도하고, 유학생을 규합할 목적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의 문재였지만 글쓰기를 포기한다. 글은 주권을 잃은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윤동주는 ‘비둘기파’, 송몽규는 ‘매파’성향의 청년이다. 비둘기파란 어떤 문제에 대해 과격하지 않고 온건한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대화와 타협, 협상을 중시하고 신중한 결정을 선호한다. 이들에게 비둘기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온순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도모하는 것이 꼭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비둘기파가 본격 알려진 것은 베트남전쟁 때다. 전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 해결할 것을 주장한 주화파(主和派)들을 ‘비둘기파’라 불렀다. 윤동주는 비둘기파, 친구 송몽규는 매파 비둘기파의 반대편에 매파가 있다. 강경론자거나 무력동원을 지지하는 주전파(主戰派)다. 1798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처음 사용했다. 국내 정치와 대외정책에서는 보수 강경파를 의미한다.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이민 반대 등을 내세우는 미국의 트럼프 신행정부는 전형적인 매파 정부다. 중동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정의하고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부시 행정부도 매파정부다. 경제학에서도 매파와 비둘기파가 있다. 재정건전성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재정 매파’로 부른다. 글로벌 분석기관인 스테이트 스트릿은 최근 ‘긴축의 소멸’이라는 자료를 내고 “재정 매파들이 둥지를 떠나버렸다고 봤던 기존의 가정들이 올해는 반복해서 시험을 받을 것”이라며 “트럼프가 공약한 재정 정책이 완전히 실행된다면 미국 연방정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다음 임기에 100%를 넘어설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현 부채비율은 GDP 대비 77%다. 트럼프는 사회간접자본(SOC) 등에 돈을 퍼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공약했다. 감세에 이은 재정 지출로 재정건전성이 급속도로 악화하면 재정 매파들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는 의미다. 통화정책을 놓고도 비둘기와 매가 싸운다. 기준은 물가다. 금리를 인하해 경기를 부양하고 성장을 도모하겠다면 비둘기파다. 반면 금리를 올려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면 매파다. 즉 물가를 잡겠다면 매, 물가를 잡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비둘기,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돈을 잡겠다면 매, 돈을 풀겠다면 비둘기, 이렇게 생각해도 된다. 중앙은행은 매파 성향이다. 본업이 물가안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정책당국은 비둘기파가 많다. 높은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경제당국의 역할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물가안정을 중시해 매파로 종종 분류된다. 앞선 이성태 총재도 역시 매파였다. 반면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저금리를 선호해 ‘비둘기파’로 본다. 물론 이 총재나 옐런 의장은 손사래를 친다. 이들은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상황에서 판단한다”며 자신을 데이터 디펜던트(Data dependent:경제지표를 보고 통화정책 판단을 판단)라고 강조한다. 통화정책 결정권자 입장에서는 어느 한쪽에 편향됐다는 얘기를 듣기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정지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서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라고 말했다. 윤동주는 비둘기였다. 하지만 비둘기는 결코 매보다 약하지 않았다. 윤동주가 남긴 시는 최고의 저항시로 남아 한국인과 영원히 함께하게 됐다. 윤동주의 시는 안중근·윤봉길 의사의 의거만큼 빛난다. 윤동주는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이었다. 쉽게 씌여진 시 - 고 윤동주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6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우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6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1942년 6월3일]   페이스북트위터    
127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조개껍질 댓글:  조회:4248  추천:0  2018-10-14
  윤동주 /조개껍질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 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 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 물소리.     이 시는 언니의 선물로 받은 조개껍데기를 매개로 하여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시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롱아롱한 무늬가 있는 예쁜 조개껍데기는 우리 언니가 바닷가에서 주어 와 화자에게 귀여운 선물로 준 조개껍데기다. 내가 있는 곳은 바닷가와 먼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나는 조개껍데기를 장난감으로 사용하여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렸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가 잃어버린 한 짝을 생각하는 마음이 바다 물소리가 들리는 고향을 생각하는 화자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 울 언니 바닷가에서 / 주어 온 조개껍데기 // 여긴여긴 북쪽 나라요 / 조개는 귀여운 선물 / 장난감 조개껍데기’ 아롱아롱 무늬가 예쁘고 귀여운 조개껍데기는 우리 언니가 바닷가에서 주어 북쪽 나라로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선물로 준 장남감이다는 말이다.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 짝 잃은 조개껍데기 / 한 짝을 그리워하네 //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 나처럼 그리워하네 / 물소리 바다 물소리.’는 내가 조개껍데기를 굴리며 놀다가 한 짝을 잃어 버렸다. 짝을 잃고 남은 조개껍데기는 잃어버린 한 짝을 그리워하는 것이 내가 ‘물소리 바다 물소리’를 그리워하듯이 간절하게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조개껍데기’는 ‘북쪽 나라’에 사는 ‘울 언니’가 바닷가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내가 있는 북쪽 나라에 가지고 와서 내게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나와 ‘울 언니’가 바닷가에서 ‘물소리 바다 물소리’를 들으며 살다가 ‘울 언니 바닷가에서’ 아롱아롱한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해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 화자에게 귀여운 장난감으로 준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화자는 ‘북쪽 나라’로 왔고 가지고 온 조개껍데기를 가지고 굴리며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렸다. 남은 한 짝이 잃어버린 한 짝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화자가 자신의 고향인 ‘물 소리 바다 물소리’가 들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동시는 고향을 떠나 북쪽 나라인 다른 나라에 온 유이민인 화자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인 것이다. ///전한성     =================== 조개껍질   윤동주 시 한정자 작곡 리림정 등 어린이                    
1275    "민족에 눈길을 돌리고 민족을 포옹해라" 댓글:  조회:2640  추천:0  2018-10-13
오늘 중국조선족 시인들은 무엇을 써야 하나?                                                                                     /김관웅         우리 중국조선족의 시문학은 90년대에 들어서서 대단한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우리의 시문학은 그 량이나 질 면에서 모두5, 60년대의 문화혁명 이전시기는 물론이고 70년대말이후로부터 80년대말에 이르기까지의 우리의 시문학에 비해서도 대단한 성취를 이룩하였음은 세인이 공인하는 바이다. 그러나90년대이후의 우리 시문학에는 성과와 함께 문제점들도 적잖은것같다. 요즘 우리 문단에서 평론계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데 그중에서도 우리 평론가들이 둘러리평론, 좋다식평론만 하고 비판적고 건설적이 평론은 하지 않는다는데 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문학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최고도로 개괄한다면, 아마도《무엇을 쓸것인가》와 《어떻게 쓸것인가》라는 두가지 문제라고 할수 있다. 사실 우리 시단의 문제점 역시 이 기본적인 두가지 문제와 여러 모로 련관되여 있다. 그러나 후자는 숙제로 남기고 오늘은 전자만 말하려고 한다.    문학이 주로 현실에 치중하는가 아니면 리상에 치중하는가 하는 척도로 가늠한다면 문학을 현실재현이나 현실에 대한 주관적감수표현의 사실주의문학과 리상재현이나 리상에 대한 주관적감수를 표현하는 랑만주의문학으로 량대변할수있다. 이런 이분법은 그 어느 나라나 민족의 문학에도 죄다 적용된다.    중국 전통문학에도 사실주의와 랑만주의라는2대전통이 있다. 창작의 각도에서 볼때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이 사실주의의 원천이라면 굴원의 《초사》는 랑만주의의 원천이였다. 그리고 문학리론의 각도에서 볼때 유가들의 문예주장이 사실주의적이라면 도가의 문예주장은 랑만주의적이다. 중국전통시문학이 전성기에 이르렀던 당나라에 와서 사실주의시문학의 대표적시인인 시성(詩聖)두보와 랑만주의시문학의 대표적시인인 시선(詩仙)리백이 쌍벽을 이루었던 것은 하나의 좋은 실례라고 할수 있다.  《시경》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은 민본사상에 기초한 사실주의정신이라고 할수 있다. 《시경》의 알맹이인 같은 그 당시 백성들의 노래들은 《배고픈 자는 먹을것을 노래하고, 일하는 자는 먹을것을 노래하고, 일하는 자는 생업을 노래한(飢者歌其食, 勞者歌其事)》 사실주의문학이라고 할수 있다.    확실히 《시경》중의 국풍과 같은 시들은 대부분 그 당시 백성들의 《슬픔과 기쁨에서 감동을 받아 생겨난것이고 그들의 생업이나 시대적사건들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皆感于哀 樂, 緣事爾發)》 이로부터 유가학파의 문론가들은 《시경》의 실례를 들어 문학과 예술은 민생의 질고를 관심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보의 삼리(三吏), 삼사(三吏)같은 시편들도 안사지란(安史之亂) 전후의 그 당시 사회의 혼란하고 암흑한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고 그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 감수를 심각하게 표현한  것으로 하여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두발은 땅을 밟고 서있듯이 리상을 추구하는 랑만주의와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관심을 돌리는 사실주의는 인류문예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요, 성향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사회의 공통된 리상과 가치관이 붕괴된 무명(無名)시기에 있어서 불투명한 사회현실에 대한 인간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고조되며 아울러 현실반영과 현실에 대한 사색에 주안점을 둔 사실주의문학은 필연적으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문학예술의 정면에 나타나게 된다.    중국의 주류문단인 한족문단에서 1996년부터 1997년 두해 사이에 일어났던 문학리론과 평론계에서의 《인문정신대토론》과 소설분야에서의 《사실주의충격파》는 이점을 립증하여준다. 그런데 원래부터 대단한 활약상을 보여왔던 시분야에서 이 몇년래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수없다. 그러나 시인들이나 시평가들도 무풍지대의 상아탑속에만 숨어 살아온 것은 아니며, 1998년부터는 90년대의 시문학에 대한 자아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이 면에서 중국의 저명한 시평가 사면(谢冕)의 견해가 가장 주목을 끈다.    《90년대에 있어서의 최대의 완성은 시의 개인화이다. 이는 중국의 시문학발전력사의 전반을 놓고 볼때 근대이래 초부하적인 시의 사회승낙에 대한 커다란 시정이며, 날따라 엄중해져 가던 비시(非詩)적인 이데올로기화과정에 대한 철저한 시정이였다. 》    이는 중국 시문학의 하나의 커다란 진보이요, 하나의 커다란 얻음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한걸음 진보하면 다른 면에서는 한걸음 후퇴하는 법이고 하나를 얻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를 잃는 법이다. 《시의 개인화는 사회적의의의 시로 허여금 숨막힐듯한 포위속에서 최종적으로 해탈되게는 했지만 아울러 커다란 화근을 내포하고있었다. 이때로부터 시인들은 자기만을 관심하고 자기밖의 모든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멀리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아주 많은 부분의 시들은 자신의 자그마한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에 불과했다. 시인들이 애오라지 자기만 관심하니 대중들도 자연스럽게 시를 멀리하고 심지어는 시를 거절하게 되였던 것이다. 》) 동상서 P. 118 이런 면에서 90년대의 중국의 시문학은 오히려  70년대말~80년대초반의 북도(北島)를 위수로 한 몽롱시보다도 한걸음 후퇴했다고 할수 있다.    개인적인 자아의 각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사회와 시대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표현한 북도류의 몽롱시에 비길때, 90년대이후의 중국의 시는 확실히 현실을 멀리하고 시문학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사회적책임을 도피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생존환경과 처지들에 대해 무관심햇던것만은 분명한것 같다. 90년대 중국시문학은 확실히 시의 사회반영, 사회비판 및 민중들의 고통에 대한 대언(代言)기능을 주동적으로 포기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이란 이 대계통속에서 변두리적위치에 처해있기에 중국 한족문단이라는 이 주류문단의 영향을 받지않을수없다. 우리의 시문학도 례외일수없다.   90년대이후 우리의 시단은 전례없이 번영했고 시창작의 량이나 질적인 면에서 확실이 이왕에 비해 한 차원 높아졌음은 사실이나 우리 민족의 생존상황을 관심하고 우리 민족의 오늘 날의 시대적정서를 대변하기 위해 애쓴 시편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것 역시 사실이다. 사실 시집들은 상당히 많이 나왔지만 현실감이 넘치는것들은 많지 못하다.   사실 많은 시집들에서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정신의 맥박을 듣기어려우며 광범한 민중들의 희노애락의 시대적정서들을 느끼기 어렵다. 이면에서 소설이나 수필같은 분야보다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판단은 아마도 필자만의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닌것 같다. 작년 이른 봄에 발표된 조룡남선생님의 《자탄》같은것은 바로 이 점을 잘 설명해주고있다    《요즘세월/ 시인이 되여 시를 쓰다는것은/ 얼마나 허망하고 어리석은 짓인 가/ 절로도 허구픈 웃음이 난다/ / 어저께 황소에 관한 시를 썼다/ 가슴저린 눈물을 찍어/ 황소울움 같은 시를/ 그런데 어디에 보낸다?/ 간곳마다 천대받는 시시한 시/ / 차라리 황소들에게나 가져다 읽어줄가?/ 그러나 그것도 파악이 없다/ 황소들이 그것을 듣고 과연/ 한줌 풀을 맛본 때보다/ 얼마큼 더 감동할것 인지?…》 (《연변일보)1997. 4. 10)   이 시에서 《황소》는 단순한 황소가 아닌것 같다. 아마도 황소는 백성의 상징적이미지로 해석해도 과분한 견강부회는 아닐것이다. 《황소에 관한 시》는 아마도 백성들에 관한 시로 리해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 같다. 《황소에 관한 시》는 마땅히 황소들에게 가져다 읽어주어야 할것인데 시인은 《그것도 파악》이 없다고 한다. 그 원인은 황소들에게 있어서는 시가 《한줌 풀을 맛본것》보다 못할것이라고 시인은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옳기도 하며 틀리기도 하다. 만약 그 시가 《황소》들의 《배고품》이나 《고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황소》들의 《배고품》이나 채찍아래에서 밭가는《고통》이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억울함을 대언(代言)한 것이라면 아마 《황소》들은 꼭 크게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릴것이다.   90년대 들어서서 우리 중국조선족시단의 많은 시인들은 《황소》들의 《배고품》이나 《고통》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시가 《간곳마다 천대받는 시시한 시》로 전락하게 된 가장 주된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우리 시의 현실탈리의 경향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보여진다.    첫째, 우리의 시인들은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실과는 별로 큰 련관성이 없는 시적주제를 내세우군 한다. 례컨대 요즘 우리의 적지않은 중견 시인들은 이른바 언어의식과 생명의식을 고창하며 이를 발굴하는데 자신들의 모든 정력을 쏟아붓고 있다.    이 역시 시문학의 다원적추구중의 하나의 추구이므로 왈가왈부할수는 없지만, 이런 유미주의적경향과 현실탈리의 경향은 현실을 정시하고 현실의 사회생활에 뛰여들어  현실문제를 다루는 시인들의 자세와 능력의 약화를 초래하고 사회참여의식과 사회비판정신의 상실을 적잖케 초래한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우리 시단의 적잖은 시인들은 우리 민족의 신화나 전설 그리고 지나간 력사에서 많은 시적인 소재를 가져오고 있다. 이런 추구는 개인적인 추구로서 누구도 비난할수는 없지만 현실과는 너무 먼 오랜 옛날의 신화나 전설 또는 력사같은것이 주된 창작의 소재원천으로 되고 아울러 이러한 력사적주제가 우리 시문학에 주류를 이루어서는 안되며 인위적으로 그러한 방향에로 유도해서는 더욱 안될줄로 안다…   지나간 력사에로의 침잠이 현실탈리의 하나의 중요한 경향이라면, 우리 중국조선족의 현실적인 삶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시들도 역시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격으로 우리의 현실적삶의 개선에 별 도움이 없으며 우리 민중들의 환영을 크게 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조선반도의 민족분단과 우리 배달민족의 생존상화에 대한 깊은 사고를 주제로 내세운 작품이다. 이 작품들 중에는 확실히 모국의 분단문화계렬에서도 수작으로 꼴힐수 있는 작품들도 없지 아니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거리가 있는 민족분단같은 문제는 그래도 괜찮케 쓴 시들이 심심찮케 눈에 띄이는데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삶의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를 동반한 시들은 오히려 새벽의 별같이 눈에 별로 띄이지 않는것은 무엇일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 시인들의 현실참여의식과 민족적사명감이 모자라고 현실을 정시하고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을 성찰하는 담력과 용기가 부족한데서 연유된것이 안닐가 오히려 현실감이 넘치고 깊은 현실적인사색이 안받침된 시들이 오히려 함용남 같이 시에 방금 입문한 신인들한테서 나오는것은 기성세대의 시인들이 심사숙고해야 할바라고 생각한다. 례컨대1998년 연변일보의 해란강문학상 수상작품인 함용남의 《콩서리》같은 작품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관심사로 되고 있는 분배불공정의 사회문제를 훌륭한 은유를 통해 표현하였다.    둘째, 우리의 시인들은 적잖게 우리 시대 민중들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는 유리된 순 개인적인 정서의 표출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것같다. 요즘 홍수처럼 터져나오는 시집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수라면 시적인 정서들이 대단히 개인화되여 섬세하게 표현되여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공명을 일으키는 시대적인 보편적정서, 특히는 민중들의 정서를 표출한 시집들이 극히 적다는 감을 준다. 물론 이 몇년동안 개인적정서표출은 이전의 문화혁명시기나,   5, 60년대의 한곬으로만 흐르던 도식적이고 허위적인 군체정서의 표출에서 많이 벗어난 점도 긍정해야 하겠지만, 80년대초반의 몽롱시들이 지녔던 정서의 공명수준만큼도 지니지못했다. 시는 소설과 달라서 독자군이 더 작은것만은 사실이나 최근에 들어서서는 더욱 작아진것만은 자타가 시인하는 사실이다.   시를 쓰는 분들이 들으면 노여워 하겠지만 항간에는 언녕부터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떠돌았다. 시가 날로 대중성을 잃어가고 날로 개인적성질의취미로 전락하게 된 원인은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 아주 중요한 원인은 우리 시들에서 표출된 정서들이 오늘 우리 중국조선족민중들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 유리된것과 무관하지 않을것이다.    최근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원로작가인 김학철선생은 현실분식의 위랑만주의나 글장난이나 하는 형식주의, 유미주의 또는 현실을 도피하는 은둔문학을 매도하면서 우리의 작가나 시인들이 문학창작의 렌즈를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장에 맞출것은 호소한바있다    《……밤낮 웨쳐대던 이 정말로 살기 좋다면 어느 미친년이 을 할것이며 또 어는 미친놈이 을 하려다가 를 당할것인가. 어느 미친년놈이 부모형제를 놓아두고 처자식을 떼여놓고 정든 고향에 등 들을 돌릴것인가. 그리고 무엇때문에 온가족이 몽땅 떠돌뱅이 신세로 돼버릴것인가. ……와 , 과 . 이런것들은 새로 생겨 난그 무슨 때문이 아니다……지금 우리 은 실업, 임금체블 같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이다. 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치는 그 문제. 바로 그 문제다.    우리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맞춰져야한다. 무슨 , , 따위로 떠들썩거려 그 긴박성과 엄중성을 회석시켜서는 아니된다. 》 )김학철《 (《연변문학)1999년 제4기) 지금은 우리가 《시경》의 국풍처럼   《배고픈 자는 먹을것을 노래하고 일하는 자는 생업을 노래하는》 사실주의, 현실참여의 문학을 주로 해야 할시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소설문학은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있다. 례컨대 금년도에 들어서면서 최국철의 《당신과 당신의 후예들》(《연변문학》1999. 3기), 김훈의 《또 하나의 나》(《연변문학》  1999. 4기), 리동렬의 《꿈》(《도라지》 1999. 3) 양룡철의 《황금새》(《도라지》1999. 3기) 등 많은 소설들은 이미 김학철옹의 말처럼 초점을 우리 중국조선족의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치는 그 문제》에 맞추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리농향도(離農向都)의 추세에 따른 조선족농촌사회의 황페화, 농촌교육의 위기, 민족경제의 부진으로 인한 실업문제, 국제결혼과 농촌녀성들의 도시진출로 인한 농촌총각들의 결혼난과 이에따른 조선족인구의 격감추세, 국내의 발달한 지역과 외국에로의 로무송출과 보따리장사 등으로 인한 조선족인구의 대이동 및 그로 인한 민족집거구해체의 위험같은 초미의 사회문제들에 문학이라는 이 카메라의 렌즈를 맞추고 있는것이다 .    필자는 몇년전부터 우리 중국조선족 문학의 주류는 민족적사실주의문학이여야한다고 거듭 강조하여 왔다. 그 개념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적이 있다    《……우리 문학은 중국조선족의 삶의 상황을 박진감있게 반영하고 생존위기를 여실하게 제시하고 중국조선족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건설에서의 병페들을 용감히 비판하고 그 극복책을 탐구하고 앞날의 진로를 모색하는 그러한 문학으로 되여야할것이다. 일언이페지하면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장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민족성, 현실성, 비판성, 건설성과 미래지향성을 그 기본특징으로 하는 사실주의문학을 견지해야 할것이다 . 바로 이러한 민족적 사실주의문학이 우리중국조선족문학의 주선률로 되여야할것이다. 》   재현양식으로서의 소설과 표현양식으로서의 시를 또같이 요구할수 없지만 시도 이 전형기(轉型期)에 처한 오늘날의 중국사회에 있어서 현실을 관심하고 현실을 표현하는 민족적사실주의에로 나아가야함은 의심할바 없다. 이면에서 우리의 시문학은 반드시 궤도조절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시문학은 창작방법에서 사실주의로 일색화되여서는 안되며 다양한 창작방법의 추구를 권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성당시기에 랑만주의와 사실주의가 동시에 개화발전하고 두 경향의 대표적시인인 리백과 두보가 두터운 우정을 맺고 키워갔듯이 우리 시단의 여러 창작경향을 가진 시인들이 서로 보완하고 서로 단결하면서 우리의 시문학을 중흥시켰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실 우리처럼 세계주류문화에서도 변두리적위치에 처해 있는 중국, 중국에서도 변두리적위치에 있는 연변이나 장춘, 심양, 할빈 같은 지방도시나 시골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주 먼 래일의 리상적인 문제는 다른 발전한 나라들이나 지구에서는 바로 오늘날의 현실적문제로 되고 있다. 우리의 관념이나 의식은 흔히는 세계주류문화 및 세계주류의식과 흔히 몇십년 지어는 한세기 가까이 뒤떨어져서 살고있는 실정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 개혁개방이후 이런 형편은 점점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고 일사천리로 발전해나아가는 세계의 현실에도 면밀한 주의를 돌려야한다.   세계의 발달한 나라의 사람들과 동보적으로 사고하고 그와 비슷한 의식수준에는 오르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고 그에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되자면 우리들은 우물안의 개구리가 될것이아니라 세계와 우주를 향한 열린 마음을 지니고 부단한 의식갱신의 노력을 경주해야할것이다.   그래야만이 세계인과 대화하는 개방적인 신심을 지닐수 있으며, 우주를 가슴속에 두는 높은 시상를 가질수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계적인 수준에서의 현대의식, 당대의식을 지녀야만이 우리의 시들도 세계인과 대화할수있는 자격을 지닐수있다.   례컨대 21세기의 생태학적문화를 지향한 소위 《록색문학》과 《록색문화리론》은 세계의 발달한 나라들에서 전위를 달리고있는 포스트문학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로 부상하였다. 《록색문화리론》의 주장에 따르면 차세기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게 될 인간들이 직면하게 될 문제는 인간자체 내부의 문제보다도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일것이라는것이다.   지구가 병들면 지구를 유일한 보금자리로 삼고 살아가는 인류의 존속도 위협을 받는다는것이다. 이들은 지구의 상태환경의 파괴로 인한 인류훼멸의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절제를 모르고 방향감각을 잃은 과학문명의 근시안적 개발과 발달에 있다고 인정했은며, 아울러 이러한 무절제한 자연정복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은 오늘의 지구적위기의 근원인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있음으로 반드시 이를 버리고 탈인간중심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세계관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생태주의자 헨리 데이비드소로우는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인류에 맞게 개조시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를 자연에 맞게 개조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했다.  바로 이러한 생태주의적세계관에 립각하여 미국의 시인스나이더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공작의 인간 중심주의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공자여 , 내등에서 내리거라  이제 그러한 잡소리는 역겹다. )  사실 이러한 생태주의적세계관은 대단히 리상적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현실적으로 마주치고있는 사상이다. 이런 생태주의를 배부른 놈들의 홍타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빨리 우리의 눈앞에 다가와 있다. 작년만 해도 장강의 수위가 130년전 처음 기록을 시작한이래 최고에 이르렀다.   그동안 중국의 젖줄기와 같은 구실을 해온 장강이 이제는 《중국의 눈물》로 바뀌였다. 이 천재지변은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중국대륙의 사막화 현상에서 비롯되 환경재해인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우리는 《배고픈 현실적인 문제》에도 눈길을 돌려야하겠지만 《래일의 근원적인 전인류적인문제》에도 관심을 돌려야 할것이다. 이러한 우주를 가슴속에 두는 드넓은 흉금과 전위적인 의식을 가져야만 세계인과 대화를 나눌 수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성을 획득할수있는것이다 . 오늘의 시접에서 볼때 이러한 현대의식을 지닌 우리 시인들은 많지 못하다. 우리 시단의 이른바 《전위시》, 《선봉시》들은 대부분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겉 핥기로 그 형식 또는 기교의 수용이나 모방에만 급급했지 그 정수의 관념, 사상이나 의식의 수용에는 태만했지 않았나하는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일언이페지하면 우리 시문학은 현실과 민족을 포옹하는 민족적사실주의의 자세와 정신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뿐만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고 세계와 우주를 가슴에 두는 랑만주의적 자세와 정신도 갖추어야 할것이다. 이래야만 우리 시문학이 중국의 변두리적지위에서 중심적위치에로 이동해 갈수있으며 세계적시단에로 진출할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가질수있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으로 될수있고 가장 현실적인것이 가장 영원성을 가질수있다.  우리 시인들이여, 민족에 눈길을 돌리고 민족을 포옹하라!  우리 시인들이여, 현실에 눈길을 돌리고 현실을 포옹하라!    김관웅 략력:  1951년 연길시 출생. 1982년 연변대학 한어학부 졸업.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석사, 박사과정 마침. 전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박사생도사. 주요한 저서로는 《한국고소설사고》 등 10부와 문학창작집 《소설가의 안해》가 있음. 연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등 문학,  문화상 다수 수상. 전 연변대학비교문학연구소 소장 .     
1274    {사료} - 중국 조선족 시인 남영전 댓글:  조회:2824  추천:0  2018-10-13
조선족시인 남영전 중국 당대 10대 걸출민족시인으로    2010-09-28                  (흑룡강신문=하얼빈)저명한 조선족시인 남영전이 “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의 영예를 받았다.     9월 23일, 청해 귀덕국가지질공원에서 진행된 “천지인연・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시상식에서는 국내 조선족, 바이족, 회족, 몽골족, 묘족 시인 10명을 평선해 수상했다.   우리 나라 걸출한 민족시인을 평선하는 활동인 “천지인연・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은 61년간의 우리 나라 소수민족 시가창작의 성과를 회고 및 총화하려는데 뜻을 두고 10명의 대표적인 걸출한 민족시인을 평선하여 부동한 민족의 내재적 문화특점과 민족정신, 생명에 대한 인식과 부동한 지역의 환경 및 모어 근원에서 표현되는 창조력 등을 집중 전시하여 우리 나라 소수민족의 시가창작을 추진, 번영하고 집중적으로 전시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중국 당대 10명 걸출 민족시인”은 중국시가학회 학자,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심위원회의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우리 나라 소수민족시인 지역분포, 시인의 시창작특점, 년령 등 종합요소를 고려하여 평선한 것이다.   남영전시인의 상패에는 “남영전의 시가언어는 순박하고 자연과 생령에 대한 깊은 리해와 사랑으로 충만돼 있다. 이에 대한 동정과 호소는 시인의 내심으로부터 흘러나온 선량함과 섬세한 심경으로 깊은 감명을 준다. 이에 중국 당대 걸출 민족시인시가상을 수여한다”라고 씌여있다.   이번 평선활동을 위해 작가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 당대10명 민족시인시선”의 서언에서 87세의 중국 로시인이며 중국시학회 부회장이며 인민문학출판사 전임 주필인 도안선생은 “남영전의 토템시는 웅장한 기백을 가지고있는 력사와 현실, 자연과 인세, 민족과 인류를 관통했고 인류의 운명, 력사의 흐름을 련계했다. 그의 시는 조선족만을 쓴것이 아니라 중화민족, 전 인류를 쓴것이다. 또한 원시민족의 토템숭배만이 아닌 당대 인류의 자아 실수와 생존위기를 겨냥한것이다. 이는 중국 당대 철학 핵심인 ‘천인합일(天人合一)’로 돌아가는 시인의 호소이다.”라고 평가했다.   남영전시인외 기타 9명의 걸출민족시인에 평선된 이들로는 이족시인 쟈디마쟈(吉狄马加), 바이족시인 효설(晓雪), 사라족시인 알틴부 이런(阿尔丁夫·翼人), 몽고족 시인 수제(舒洁)와 아얼타이(阿尔泰), 회족시인 무푸(木斧), 장족시인 례메이핑춰(列美平措), 만족녀시인 나예(娜夜), 묘족시인 하소죽(何小竹)이다.   시상식에서 우리 나라 저명한 시인, 작가, 문학평론가인 도안(屠岸), 한작영(韩作荣), 오태창(吴泰昌) 등이 수상자들에게 상을 발급했다. 이날 청해성 문예사업일군들이 수상한 시인들의 작품을 랑송했다.   “인민일보”,“중국문화보”,“중국청년보”, “문예보” 등 중국의 큰 매체에서 이날 시상식을 보도했다.   /길림신문     ◆[혜정 류영희 글씨]남영전시인 시-'봇나무'      **한국 대구 한글서예가 혜정 류영희선생님께서 중국 장춘 남영전선생님께 기증한 서예작품임.   [토템연구]남영전토템시집, 수상, 세미나, 전문가의 연구저서   남영전토템시집, 수상, 세미나, 전문가의 연구저서       출판된 남영전 토템시집 1.《神檀樹》(요령민족출판사,1996년) 2.《圓融》(요령민족출판사,2003년) 3.《南永前世紀詩選》(홍콩은하출판사,2003년) 4.《南永前短詩選》(중 ․ 영문 대조본, 홍콩은하출판사,2004년) 5.《白衣魂》(한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0년) 6.《南永前詩選集》(한 ․ 중 ․ 영문 대조본,한국 전예원출판사,1994년) 7.《天地人》(중한 ․ 한중 2종 문자 대조본,한국고려출판사,1997년)  토템시˙논문 국내외 수상작 1. 토템시묶음《山魂》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 우수작품상" 수상(1999년) 2. 토템시《흙(土)》한국 세계인교향시사 "계관시인작품상" 수상(2000년) 3. 토템시집《圓融》중국 길림성정부 최고문예상—제8회 "장백산문예상" 수상(2005 년 1월) 4. 토템시집《圓融》중국 제8회 소수민족 문학창작 “준마상” 수상(2005년 7월) 5. 토템시집《圓融》홍콩국제염황문화연구회 제3회 "龍文化" 금상 수상(2005년 12월 1일) 6. 토템시집《圓融》한국 문예시대사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2005년 12월 8일) 7. 논문《토템문화가 현생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중국 제6차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 우수논문상" 수상(2006년 5월 20일) 8. 논문집《원시토템과 민족문화》 중국 제6차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 우수논문상" 수상 (2006년 5월 20일) 9. 평론집《南永前圖騰詩賞析》 중국 제6차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 우수성과상" 수상(2006년 5월 20일) 10. 토템시집《圓融》한국문학 "21세기2006문학대상" 수상(2006년 8월30일) 11. 토템시집《圓融》길림성작가협회 제2회 "길림문학상" 1등상 수상(2007년 7월) 12. 논문《토템문화가 현생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2008중국관리과학대회 "우수논문" 1등상 수상(2008 년 12월) 13. 1994—1997 년 영국 케임브리지국제명인전기센터로부터 20세기성과상메달 ․ 세계 500인 명인메달 ․ 미국 세계명인전기센터 명예메달을, 미국 세계명인전기센터로부터 명예금메달을 수여받음.     남영전토템시 관련 세미나와 서예전 1. 1995년 6월 25일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토론회》를 개최, 평론가 최삼룡 ․ 시인 박화 등 20여인이 토론회에 참석했다.  2. 2003년 6월 22일 중국 中南民族大學에서 5개 대학의 교수 ․ 박사생 ․ 석사생 등 26인이 참석한《남영전토템시와 토템문화의 재구성문제 연구토론회》를 개최, 10여 편 논문이 발표된 이번 회의의 토론분위기는 뜨거웠고 그 반향이 상당히 컸다.  3. 2005년 중국 서부文藝通鑒위원회 ․ 중국 사천대학 문학과인류학연구소 ․ 중국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 사천사범대학 시대예술학원 ․ 성도시서예가협회에서 "2005 ․ 남영전토템시명인서예초대전"을 공동 개최했다. 초대작품은 《美術界》잡지(2005.6)․《星星》詩刊(2005.8)․《西部旅遊․特刊》(2005.6)과《四川僑報》(2005.4.30)등 간행물에 게재됐다.  2005년 10월 珠江문예출판사에서《詩 ․ 書 ․ 畫의 時代적 共振—2005 ․ 남영전토템시명인서예초대전》詩書畫集을 출판했다. 4. 2006년 3월 28일 북경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센터와 시대문예출판사에서는 북경 수도사범대학 국제문화빌딩에서 "남영전시가창작연구토론회"를 개최, 謝冕 ․ 吳思敬 ․ 朱先樹 등 詩評家 ․ 학자 ․ 전문가 40여인이 참가하여 논문 15편을 발표했다.  5. 2006년 8월 26일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 연변작가협회 ․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공사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토론회"를 개최, 60여인이 회의에 참석했다. 6. 2008년 6월 20일 한국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와 長春師範學院 文學院의 공동주최로 “남영전토템시국제학술세미나”가 장춘에서 열렸다. 중한 양국 학자 ․ 전문가 40여인이 참석하여 논문 11편을 발표했다. 전문가˙학자들의 전문저서˙논문집 등 1. 《원시토템과 민족문화—조선족시인 남영전과 그의 토템시연구》(鄒建軍 편찬,시대문예출판사,2003년) 2. 《南永前圖騰詩賞析》(栗原小荻 등 저, 시대문예출판사,2004년) 3. 《詩 ․ 書 ․ 畫의 時代적 共振—2005 ․ 남영전토템시명인서예초대전》(西部文藝通鑒委 등 編,洙江文藝出版社,2005년) 4. 《南永前圖騰詩字句印》(신승우 전각,시대문예출판사,2006년) 5. 《南永前圖騰詩研究》(길림성작가협회 문단풍경선 2006년도 專輯) 6. 《南永前圖騰詩探論》(吳思敬 편집,시대문예출판사,2007년 4월) 7. 《南永前圖騰詩論精粹》(馬明奎 편집,시대문예출판사,2007년 6월) 8. 《南永前圖騰詩賞析》(한글,栗原小荻 등 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7년 10월) 9. 《南永前圖騰詩學》(馬明奎 著,시대문예출판사,2007년12월) 10. 《南永前圖騰詩學》(한글,馬明奎 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8년 4월) 11. 《南永前圖騰詩論文集》(2008한중학술세미나,2008년 6월 20일) 절강성 호주사범학원에서 《南永前圖騰詩研究》를 공동 선택 과목으로   2009년 초 浙江省의 湖州師範學院에서는 “남영전토템시연구”를 전교 공동선택 이수과목으로 삼아 정식 개강했다. 師生이 共同으로 강의안, 논문집, 詩書畫集을 編纂하였는데, 이는 전국 여러 대학에서 커다란 영향을 일으켰으며 특이한 풍경을 이루었다.                 [話題]《남영전토템시연구》 절강호주사범학원 선택과목으로            인터넷길림신문 -=> 문화예술  [2009년 3월 10일]   조선족 남영전시인 토템시연구, 중국 대학교과서에 채택   《남영전 토템시연구》 절강호주사범학원 선택과목으로             조선족시인의 시창작과 연구가 대학교 과목에 들어가는 영예     조선족시인의 시 창작과 연구가 고등학교 과목에 들어가는 영예를 안았다. 2009년 3월 5일자 《길림일보》는 일전 절강호주(湖州)사범대학에서 《남영전 토템시연구》를 전교 공동선택과목에 넣고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 대학 문학원은 토템시전문 연구과정을 개설한 최초의 학원이다. 토템시 연구를 대학의 공동 선택과목에 넣은 것은 대학 전공건설과 학과분야를 넓히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바 소수민족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중시로 하여 전국 대학에 영향을 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보도는 남영전시인의 일련의 창작성과와 수상경력을 소개하고 나서 《20여년래 남영전시인이 토템문화를 연구하고 계렬토템시를 창작, 독특한 시가형식을 창립하였으며 아울러 새로운 시학체계인 토템시학을 형성했다》고 썼다. 이어 보도는 한 전문가의 말을 빌어 《남영전토템시와 그의 시학체계를 연구하는 것은 중화시학전통을 풍부히 하고 시가형식과 시학리론의 발전을 추진하는데 대해 전범적이며 실험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호주사범대학 《남영전토템시연구》 공동선택과목의 강연자는 마명규부교수이다. 마명규는 남영전 토템시 및 그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학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2007년에 전문저서 《남영전토템시학》을 펴냈다. 마명규의 연구 저서에 대해 북경대학 교수이며 중국신시연구소 소장인 저명한 시평가 사면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마명규선생의 저서는 남영전 토템시학 연구의 최신성과를 집중적이고도 전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학자의 민감성으로 우리나라 시가창작의 최신동향과 그것이 명시한 계시적 의의를 적시적으로 포착하였다. 그는 남영전 토템시 창작의 사시적성격과 시인의 우주적 시야를 론술하고 제시하였으며 그의 분석은 남영전 토템시 창작리상의 핵심 즉 원융에 직달하고 있다. 이는 중국 여러 민족 나아가 전인류의 동질문화에서의 최고 경지의 선(善)으로서 그는 이 시가의 창작에 철학적 높이를 부여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절강성 호주사범대학의 《남영전 토템시연구》 공동 선택과목은 주로 대학 1학년과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며 수강생 명액은 100명이다. 개강후 수강생 명액이 찼을 뿐 아니라 리공과학생을 포함한 고학년 방청생까지 가세하여 이 학교의 특이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한다.   남영전시인은 중국 저명한 조선족시인으로서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총편   남영전시인은 중국 저명한 조선족시인으로서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총편집이다. 그는 또 미국세계문화예술원 영예문학박사이고 길림성고급전문가이다. 그는 1971년 문단에 데뷔한 뒤 시집 《원융》 등 16부의 시집을 출판했고 아울러 45차례 전국 소수민족문학창작상 등   여러 가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6년이래 그가 창작한 계렬토템시는 갈수록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론문이 이미 130여편 신문간행물에 발표됐고 《남영전 토템시탐구》 등 학자연구론문집 11 권이 출판됐다.   한국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지월시인이 중국 장춘에서 개최된 남영전 토템세미나에서 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1273    {사료} - 중국 조선족 시인 조룡남 댓글:  조회:2872  추천:0  2018-10-13
조룡남, 그의 인생 그의 문학     2014년10월30일           [중국 조선인 60세이상 작가 계열 취재]   조룡남, 그의 인생 그의 문학       “나에게 있어서 산다는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시를 쓴다는 것은 사는 한가지 방식이다. 사랑하는 한가지 방식이다.”-에서   조룡남의 수많은 시를 통하여 끊임없이 되뇌이는 뜨거움과 련민과 그리움과 때로는 체념과 기쁨 등 사랑의 여러가지 무늬를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산전수전 풍상을 다 겪은 분의 가슴속에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바로 그런것들이 그를 이 지상에서 버티게 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삶의 어느 한 단락에 억울하게 모자가 씌워져 오래동안 자유스럽지 못했던 그의 리력들이 안타깝고, 말없이 다소곳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청춘시절 휩쓸고 간 거친 바람의 흔적이 보여서 안타깝고... 그래서 그의 깊고 뜨거운 곳에서 눈물이 되어 그의 시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나는게다.          제1부   그가 태여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먼 중로국경지대인 훈춘시 춘화향 동흥진촌이다. 동흥진촌은 춘화향의 중심지로서 후에는 춘화 즉 서토문자로 중심이 옮겨졌지만 그때만 해도 촌으로 치고는 꽤나 크고 번성하였다. 한개 촌에 소학교가 둘(학교마다 악대도 있음), 교회도 둘이여서 례배당도 둘, 앞거리에는 층집도 여럿 있고 양행(洋行)들이 즐비하였다. “오늘 동흥진시장에 나타난 물건은 래일이면 울라지보스또크시장에 나타났다”고 한걸 보면 교역도 꽤나 번성하였던 것이다...    그는 1935년 6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가족은 서울사람이였는데 한일합병후 인천에서 직접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로씨야 연해주로 건너가서 울라지보스또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세아 강제이주를 피해서 고향에 돌아가던도중 중국을 거쳐가다가 훈춘에 눌러앉아 살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과 누님들은 다 로씨야 태생이지만 그는 중국태생이다. 그때 동흥진촌에는 그의 집처럼 로씨야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 즉 해삼위에서 이사온 가정이 몇집 있었는데 작은 가게 같은걸 챙기고있었다. 마을에서는 이런 집들을 “해삼집”이라고 불렀다. 동흥진촌마을 뒤에는 가마후런산이라고 부르는 큰 산이 솟아있고 마을앞에는 맑디맑은 큰 강이 흐르며 강 건너에는 기름진 전야가 펼쳐진 그야말로 산 좋고 물 맑은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고향에서 그는 다른 어린이들처럼 평범한 나날들을 보냈다. 좀 특이한게 있었다면 고향산천에 대한 각별한 사랑에서였다고나 할가? 아니면 유년시절의 호기심에서였다고 할가? 아침에 눈만 뜨면 산과 들, 강변에 나가 휘젓고 다니며 놀고 고기잡이, 벌레잡이, 산열매 따기에 온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길다란 코물을 쭉쭉 빨아먹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어린시절 그의 별명은 코풀레기였다고 한다. 그는 그때 벌써 어머니나 누나들이 못가본 곳까지 다 가보았다. 대왕구 폭포며 분수령 합수목이며 감시대 웅뎅이 자라늪이며 서토문자와의 경계에 있는 곰골 바위굽팡이며 다 가보고 꿰뚫고있었다. 또 새나 베짱이같은 곤충을 잡아다 둥우리를 만들고 기르기를 좋아하여 밖으로 나다니기만 하였는데 그 시절 날마다 땅거미 질 무렵이면 그의 어머니나 누나들은 마을 안팎을 뒤지며 그를 부르고 찾아다니기가 일쑤였다. 야단도 되게 맞았지만 이튿날이면 또 그 버릇, 그 본새가 반복되군 하였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문학창작에 관한 꿈 같은건 있을수가 없었던 시절, 그러나 그는 옛말이나 이야기 듣기, 어머니가 들려주는 구전동요와 옛노래들에는(“둥근 달님 따다 가”, “세장세장 할아버자 마당 쓸다”, “연잎배 떴다” 등) 큰 흥미를 가지고 심취되어있었다. 한겨울 누구네 집에서 , 이나 같은 전책을 읽는다는 소문을 듣기만 하면 어김없이 찾아가 어른들 틈새에 끼여앉아 밤이 새도록 들었다. 이런것들이 후날의 문학창작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후날 그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구전동요와 옛 노래들을 정리해서 나  등 잡지에 “변봉인 구술, 조룡남 정리” 라고 어머니 이름을 밝혀서 여러수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학교 입학전 누나들 어깨너머로 보고 익혀서 식자를 다 떼고 읽고 쓰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으며 어떤 과목은 누나들보다도 먼저 암송하였다. 학교는 그에게 있어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야말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진취심이 강했던 그는 늘 공부에 열중하였고 성적도 좋아 늘쌍 일등을 차지하였다. 공부자체가 흥미로운 것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주 엄한 분이시라 일등을 못하면 집에 들여놓지를 않았다. 어느 한번 2등을 했다가 며칠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났던 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어린이들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때 그한테는 많은 만화책과 유소년독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교에서 유독 혼자만 내내 잡지와 신문을 주문하여 읽었다는 점이다. 집에서는 어린 그한테 남들보다 지력투자를 좀 한 셈이다. 그 잡지 이름은 월간  이였고 신문 이름은 이였다. 이런 환경, 이런 어머니의 슬하에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마쳤다.   1950년 그는 훈춘중학교에 진학했는데 훈춘중학교가 있는 훈춘현성은 그의 고향 춘화에서 200리나 떨어진 산골마을에 있었다. 큰 종이에 붓글씨로 입학생명단을 써서 벽에 붙이던 그 날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고 그는 되뇌인다. 오늘까지도 기억하고있는 그때 수험번호는 1042번이였다. 입학시험을 잘 쳤는지라 크게 근심은 하지 않았으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큰 것이였다. 어떤 사람은 입학비률이 8대1일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대1이라고도 했다. 중학교는 모든것이 크나큰 충격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교원들의 진영이였다. 모든 과목 교원들이 다 촌소학교의 교원들과는 비교할수 없이 훌륭했다. 중학교 3년간 크게 영향을 주고 인상이 깊었던 교원들을 들자면 김병종, 김해진, 리광해, 황휘, 허룡운, 장한수 등 선생님들이다. 그이들 중 어떤이는 후날 작가로 연변문단에서 활약하였고 어떤이는 이름난 언어학자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어떤이는 우파분자로 되여 로동개조를 하기도 했다. 그때 그의 공부성적은 늘 좋아 앞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어느 한번 시험에서는 평균점수 99점을 맞아 전교적으로 소문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교사 리광해선생님은 그를 훈춘중학교 력사 이래 공부를 제일 잘한 학생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책을 많이 접할수 있었고 독서의 참기쁨을 알게 되였는데 책이 많았던 시절은 아니였지만 서점에 드나들 수 있었고 학교 도서실의 책도 마음껏 빌려볼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고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은 , ,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이였다. 그리고 1951년 중학생 대표로 뽑혀 연변제1차 하령영에 참가하였는데 그것은 난생처음 연길에 와서 즐겁고 유쾌한 생활을 경험하게 된 활동이었다. 야유희, 화토불 시랑송모임, 석현제지공장참관, 새벽농장참관, 비행장로동, 문학써클 활동… 그 어느 활동이나 다 재미나고 흥미로와 평생을 두고 그의 기억에 깊이 남는 활동들이였다. 또 하나 추억할 것이 있다면 이 중학시절부터 그의 문학창작활동이 시작되였다는 점이다. 1951년 그는 이란 시를 써서 에 발표했고 뒤이어 이란 시를 써서 같은 잡지에 발표하였으며 ,  등 동시를 써서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중 는 당선이 되여 첫 창작상을 받기도 하였다.    1952년 여름 학제개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년 앞당겨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니 그 학교에는 당시 동시창작의 대가셨던 김례삼(필명 민우-대표작  ,  등) 선생님, 해방후 중국조선족 소설문학의 개척자의 한분이신 다재다능하셨던 백호연(필명 목일성-작품 ,  등)선생님께서 교단에 계셨다. 이런 스승들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 하에 그의 문학꿈은 큰 성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한 첫날 교정에 신입생들이 모여있는데 김례삼선생님께서 찾아오셔서 “여기 누가 조룡남이냐?” 하고 물으며 찾으시여 “잘 왔다”고 하시며 그를 반갑게 맞아주셨다고 한다. 중학시절 에 발표한 그 몇편의 작품은 원래 당시 편집이셨던 김례삼선생님이 손수 편집한 것이였다. 또 동시 은 원래 2절로 되여 “얼른 쫓아 잡아라/ 불이 깜박 꺼졌네”로 끝났었는데 선생님께서 보시고 “참, 재미있게 썼구나. 그런데 아쉽다. 애들이 반디불을 잡지 못해 얼마나 실망하겠니? 반디불을 잡는 것으로 한절 더 써넣 는것이 어때?” 하고 말씀하시여 “반짝반짝 반디불/ 다시 전등 켰구나/ 살금살금 기여라/ 옳다 하나 잡혔다”라는 3절을 더 만들어 넣은 것이다. 김례삼 선생님께서는 그를 여러번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다. 동란의 세월이 끝난 뒤 어느 한번 회의에서 김례삼선생님을 처음 만났는데 그를 꼭 껴안아 주시고 흐느끼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너무 슬퍼마라, 살아있으면 됐다. 이제 네가 겪은 고통과 네가 흘린 눈물은 너 혼자만의 소중한 재산이 되였다”고 하시며 그에게 격려와 사랑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김례삼 선생이 아득했던 지난 날 자신에게 베푼 사랑과 관심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회억하였다.   그때 연변사범학교에는 교간으로 라는 작은 간행물이 발간되었는데 백호연선생님께서 주필을 맡으시고 그를 부주필로 임명해주셨다. 그는 편집기술을 백선생님한테서 처음 배웠다고 하였다. 그때 문학써클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백선생님께서는 여러번 자신의 원고료를 써클에 기부하여 종이를 사서 문학자료들을 등사하여 나누어 가지도록 하였다. 백선생님은 문학, 음악, 미술, 서예, 육상에 수영까지 여러 분야에 거쳐 재능이 뛰여난 인재였다. 지식도 연박하고 마음씨도 너그러우며 관용으로 남을 포용하는 인격자로서 우리 민족 지식인의 량심이였다고 할수 있었다. 일본 명곡 을 번역해주시던 일이며, “작문이라면 대수로와하지 않던 너에게 이 마지막 작문평을 어떻게 써주어야 하나?” 로 시작된 선생님의 그 마지막 작문평이며 그 눈물겨운 수많은 일들을 어찌 잊을수 있을까! 동란의 세월이 끝난 직후 훈춘에 있었던 그는 인츰 빈손으로라도 술 한병, 과자 한봉지 달랑 들고 화룡으로 쫓겨가계시는 백호연선생님을 찾아가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는데도 백선생님께서는 학교에 나가셔서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계셨다. 백선생님께서는 그를 꼭 껴안아주시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또 보기는 보는구나,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이제 훌훌 다 털어버리고 가배 노력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도루 찾아야지!” 그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나는 너를 믿는다!” 하고 말씀하시며 격려해주셨다. 그는 후에  이란 김례삼스승님께 바치는 시를 써서 에,  라는 백호연스승님께 바치는 시를 써서 에 발표하였다.   연변사범학교시절 바쁜 공부의 여가를 타서 시들을 적지 않게 창작 했지만 아직 습작 단계라 번번히 퇴자를 맞고 신문이나 잡지 지면에 발표된 시들은 많지 못했다. 그중 대표적인 시를 들자면 1954년 11월 7 일 에 발표된 이란 비교적 편폭이 큰 시였다. 이 시는 그때   편집이셨던 김철선생님께서 발표해준 것이였다. 이 시는 당시 교내는 물론 문단과 연변대학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동시 창작에서는 큰 진전을 보여서 을 비롯한  ,  , , ,  등 지금까지도 동시대표작으로 불리는 여러 수의 동시들을 창작했다. 후날 이런 동시들에는 다 곡이 붙어 음악교과서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그중 은 한국 작곡가가 다시 작곡하여 KBS에서 방송되였다.   은 반세기도 넘는 60여년전 일인 그가 1953년 연변사범학교 2학년 학생시절에 쓴 작품이다. 그는 연변사범학교 3년간 방학에 딱 한 번 밖에 집에 가지 않았는데 려비때문도 있었겠지만 더욱 중요한건 학교에 남아 독서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 3년간이 그의 인생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때 연변사범학교는 중사반과 예사반으로 나뉘여있었는데  작곡자 김덕균과 그는 중사반으로서 일반 고중과목에 교육학, 심리학 등 과목을 더 전수받았다. 예사반은 다시 음악반, 미술반, 무용반, 체육반으로 나뉘여 예능교사양성이 목표였기때문에 예능수업이 위주였다. 그 영향으로 중사반 학생들도 예능에 열중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학교 악대출신 김덕균도 음악에 열중하는 사람들 중 한사람으로 그때 벌써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때는 배고픈 세월이였다. 그 겨울방학 집에 가지 않은 김덕균과 함께 배가 고파서 밤에 세수대야를 가지고 기숙사 김치움에 가만히 들어가서 김치를 퍼담아 훔쳐다가 맨김치를 찢어먹으면서 두 사람은 곡만들기에 집중하였는데 그렇게 하여 생겨난 곡이 바로 이였다. 매워서 입을 하-하- 불고 다시고 하면서 말이다.   2002년, 연변대학 사범분원으로 개칭된 분원청사 교정에 반디불비가 세워지게 되였다. 따지고보면 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작품인데 그저 작사자, 작곡자 모두가 당시 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7살 학생들이였다는 점이 조금 재밌고 놀라울 뿐이라면서 모교에 깊이깊이 고맙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 사범분원에는 란 문학동아리가 만들어지고 몇년째 활동도 이어지고있다.   1955년, 그는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훈춘시 제2소학에 안배받았고 반년 후 훈춘중학교에 전근되여 조선어문교원으로 일하였다. 당시 연변사범학교 200여명 동창생 중 중학교 교원으로 승진한건 자신 한사람이라 한다. 훈춘중학교 교단에 서있었던 그 1년 반 남짓한 기간 그는 전현 연구교수(观摩敎学)를 2번이나 맡아서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평판이 매우 높았다. 문학창작에서도 , , , , 동시  등 반향이 큰 작품들을 륙속 발표했다. 그리하여 1956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성립시 제1기 회원으로 입회하게 되였고 이어 길림성 청년창작가회의에 연변대표 일원으로 장춘에 가서 회의에 참가하는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렇게 좋은 날은 얼마 길지 못했다...   1957년 전국적으로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 그는 ,  등 소위 독초작품을 쓰고 반동언론을 산포했다는 죄장으로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 모자를 쓰고 추방되여 농촌에 쫓겨가서 로동개조를 해야 했다. 23년간이나 이어졌던 그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였으며 그의 문학생애에서는 하얀 공백으로 남겨진 시간들이다. 1957년 그는 우파모자를 쓰고 농촌에 쫓겨가 처음에는 훈춘의 여러 곳을 전전하고 후에는 또 왕청의 여러 곳까지 전전하면서 5년간의 로동개조를 해야만 했었다. 농민질도 했고, 석탄캐는 광부질도 했고, 벌목부, 류벌공, 나무군, 운반공, 돼지사양원, 건설공지잡공, 똥푸개까지 못해본 일이 없었다. 그 속에서 일을 잘 하고 개조표현이 좋다는 평판을 받고 또 특별한 공도 세우고 하여 1962년 그는 우파모자를 벗고 다시 공직을 회복하여 교원으로 임직하게 되였다. 하지만 중앙문건에는 “공중 속에서 우파모자를 벗긴다는것을 선포하고 다시는 우파로 보지 않는다”라고 규정하였지만 기실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모자를 벗은 후에는 또 “모자 벗은 우파”로 불리며 처처에서 불리익을 당했고 의연히 문학 창작의 권리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는데 단지 우파분자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시 붙잡혀나가 여러 해를 두고 끌려다니며 온갖 잔혹한 투쟁을 다 받고 로동 개조를 강요당하였다. 고깔모자를 쓰고 소흑판으로 만든 반혁명, 잡귀신 패쪽을 쇠줄끈에 달아 목에 걸고 조리돌림을 당하며 길바닥 살구씨도 주어먹어야 했고 똥묻은 신바닥으로 귀쌈도 얻어맞아야 했으며 책상 걸상을 높이 쌓은 꼭대기에 올라가 락하하는 항공표현도 수없이 반복했어야만 했다...   1979년 4인방이 타도되고 중앙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우파분자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 이는 우파분자가 로동개조표현이 좋아 모자를 벗긴다는 개념이 아니고 원래 우파분자가 아닌 생사람을 우파분자로 잘못 판정하여 모자를 씌웠으니 이를 개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당안에서 모든 우파관련자료는 다 불태워 없애버리고 진정으로 거뜬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창작의 권리도 이때에야 다시 가지게 되었다.  “진실은 아무때고 밝혀지고야 만다”는 진리를 그는 다시 한번 터득하였지만 한가슴 가득한 슬픔과 비애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우파모자를 쓸 때 새파랗던 22살의 청년이 엄혹한 세파에 찌들려 45살의 중늙은이가 되여있었기때문이다. 그동안 동창생이나 같은 년령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젠 사회의 중견이 되고 높은 위치에서 중임을 맡고있었는데 자신은 억울하게 죄수로 몰려 로동개조를 하다나니 이제야 겨우 돌아와 인생을 맨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가련한 모습이였기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인생에는 청춘시절은 없었다고 할수 있다.  20에 40을 졸라붙인 것이 그의 인생 도표인 것이다.    그때 시정회의에 모여온 우파들에게 주최측에서 간촐한 연회를 챙겨주고 술도 부어주며 위로했는데 술 한잔 먹고나면 그동안 억울했던 세월을 생각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해도 리해해줄만한 일이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20여년 세월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고 겁쟁이가 되여서 술을 부어줄 때마다 “이게 꿈 아니냐는듯” 그저 머리를 쪼아리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련발할뿐이였단다. 그가운데는 “매일 찰떡을 쳐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우파가 된 사람도 있었고 중국이 조국이냐? 조선이 조국이냐? 하는 물음에 조선일가? 중국일가? 말설이다가 그만 조선이라고 잘못 대답해서 우파가 된 사람도 있었다...   ……   기다리다 눈이 먼 어머니는 세상뜨고   곱분이도 시집간지 석삼년인데    쪽박새 혼이 되여 이제 울며 온    훈춘강의 이 봄은 더욱 슬픈 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개나 돼지나 늑대로 변하였던 그 암울했던 세월에 그에게는 하나의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그는 이 말을 어느 한번 맞아죽을지도 모르는 투쟁대회에 끌려나가면서 당시 연길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유언처럼 써서 어머님께 드려서 부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된건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니였다. 수많은 절망 속에서도 아들을 하늘처럼 믿고 애타게 기다리고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다시다시 용기를 내여 버티고 일어서군 하였다.    우파분자 모자를 벗고 나서도 문학창작을 맘껏 할수는 없었다. 모자벗은 우파로 불리며 어느 신문, 어느 잡지도 그의 작품을 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9년 시정을 받은 후에는 진정한 창작의 자유를 가질수 있었지만 일정시간 적응기를 거쳐서야 비로소 제대로 글을 쓸수 있었다. 어두운 지하동굴 속에 갇혀있던 사람을 갑자기 밖에 내놓으면 햇살에 눈이 부셔 사물을 잘 보지 못하고 조롱 속에 갇혀있던 새를 갑자기 밖에 내놓아도 날개쭉지가 굳어져서 처음에는 잘 날지 못하는 것과 같은 도리일 것이다. 그도 같은 처지였다.           제2부   1979년 우파개정이 있은 후 그는 훈춘2중에 돌아와 조선어문교원으로 임직하여 일하였는데 3년간 조선어문과를 가르치며 반급담임을 맡았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늘 청년시절 간직하였던 문학창작의 꿈이 그를 괴롭혔다. “문학창작을 하려면 환경을 바꿔야 한다. 어느 잡지사나 출판사같은 단위로 옮겨야 한다.” 이런 생각이 후날 그를 연길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그때 잡지 총편이셨던 김해진선생님은 그의 중학시절 은사이신데 훈춘에서 보내주면  편집부에서 받아주겠노라고 약조했는지라 고심한 끝에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여 교육국 국장을 찾아가 자신을 연길에 보내달라는 요구를 제출하였다. 당시 교육국 김국장은 그의 학생시절 담임교원이였는데 “너는 여기서 열심히 해서 학생들을 대학에나 많이 붙여라”고 하며 요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도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졸라대고 성화부리는 바람에 김국장도 손을 들고 마지막엔 할수 없이 “그럼 연길로 가서 꿈을 한번 펼쳐보거라” 고 하면서 그를 보내주게 되였다.   그의 문학창작은 사실상 연변인민출판사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서적을 읽고 작가를 만나고 창작을 담론하고 작품을 평하고 하는 일들이 그에게는 평생 소망했던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였다. 그리고 작가협회에서 조직하는 작가들의 모임이나 필회, 창작답사 기타 사회활동에도 참여할 수도 있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학창작을 시작한 때는 전국적으로  ‘반주임’이란 작품을 시작으로 소위 “상처문학”이 류행하던 시기였다. 초기 그의 문학도 그 범주에 속하는 문학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때 글로 쓸 수 있는 그의 인생경험이란 지난 23년간의 로개생활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작품을 들자면 , , , ,  등 시들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 물음에 그는 “시는 내 인생의 전부이다”라고 대답하고 싶다고한다. 그는 시를 사랑하였고 시와 함께 웃고 시와 함께 울고 시와 함께 통곡하면서 70여성상을 살아왔다. 기쁘고 즐거웠던 나날에도 슬프고 서러웠던 나날에도 지어 죄수로 추방되여 쫓겨가 고역에 허덕이던 세월에도 시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시를 배반하지 않았고 시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훈춘 이도구의 지하탄굴 속에서 짐승처럼 네발걸음으로 벌벌기면서 석탄구르마를 끌 때도, 그는 저 시비리야에 추방되여가 고역 속에 시달리는 12월 당원들을 위하여 뿌쉬낀의 시를 읊었다. “시비리 지심 속 깊이 / 씩씩한 견인성을 간직하라 / 그대들의 숭고한 지향과 슬픈 로역은 / 헛되지 않으리.” 그리고 대황구 동골치기 원시림 속에서 벌목을 하고 류벌을 할 때도 그는 네그라쏘브의 를 소리높이 읊었다. “발목엔 쇠고랑 차고, 피 흐르는 어깨엔 닷줄을 메고 / 강변으로, 강변으로 배를 끌어도 / 나의 아픈 가슴은 끌어내지 못한다 /…오, 볼가여, / 나는 너를 노예의 강, 암흑의 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훈춘 삼가자 국영농장에서 똥수레를 몰고, 돼지먹이 술찌기를 실어나를 때도 그는 눈물을 삼키며 인도영화 “류랑자”에 나오는 를 목놓아 불렀다. “나는 모른다, 비애가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를 / 나는 비애와 고통을 행복으로 노래부르나니 / 나의 노래를 막을자 그 누구더냐? /…오, 운명이여, 나의 운명이여/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참혹하게 나를 희롱하는것이냐? / 도처에 류랑한다, 도처를 류랑한다 / 아바라므 아바라므 …. 이것이 바로 그에게 있어서의 시의 의미이다. 정녕 시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 엄혹한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란 시에서 “나에게 있어서는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시를 쓴다는 것은 사는 한가지 방식이다, 사랑하는 한가지 방식이다”라고 썼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숭고한 감정, 가장 소중한 품성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오직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인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로동자가 하나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농민이 한포기 곡식을 다루는 것도 모두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시는 곧 사랑이다. 사랑은 시의 구세주이다. 그래서 그는 라는 시에서 “먼 그날이 와도 나의 심장은 오직 사랑을 위해 끓다가 터질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나의 사랑…”이라고 썼다. 이것은 청년시절에 쓴 시인데 지금도 의연히 오직 사랑만이 오염된 이 세상을 구원하고, 타락한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것이라고 믿고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구에 담겨진 그의 사상이라면 사상이요, 철학이라면 철학일 것이다.   최근년간 북경에 있는 여러 학회와 연구회들에서 해마다 달력을 만들었는데 2011년 중국신문부간연구회에서  달력에는 그의 언론 7조가 10월 달력에 올랐다. 2012년에는 또 중국 중외명인 문화연구회에서  달력을 제작했는데 격언 8조가 10월 달력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3년에는 중국문화예술협회와 세계다원문화연구회에서 제작한 달력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막언과 나란히 그의 반디불비 사진과 비암산진달래시비 사진이 실렸다.  2014년에는 북경예도묵향서화원에서 제작한 달력  에는 1월-3월 세개월에 거쳐 그의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최근 중국기실문학연구회, 편위회, 중국당대문학연구회 등에서 대형 문헌들을 륙속 출판했는데 2011년 중국기실문학연구회에서 건당 90주년을 기념하여 라는 대형문집에 그의 략력과 수필 이 수록되고 최우수문예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또 2011년  편위회에서 18 차당대회 헌례 총서로 이란 대형문헌집을 출간했는데 그의 략력과 시  가 수록되고 시사최우수창작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3년 중국당대문학연구회에서 모택동동지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이란 대형문집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 역시 그의 략력과 시 6수, 격언 10조가 수록되고 일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또 지난해 모택동탄신 120주년, 항미원조 승리 60주년, “뢰봉동지를 따라 배우자”는 모택동의 제사 5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기실문학연구회에서 이란 대형문헌집을 출간 했는데 시사집에는 시 ,  , , , , ,  등 7수가 실렸고 풍비송—당대홍색시사 가작상을 수상하였다. 에는 략력과 장편수필 전문이 실리고 금상” 수상하고 영원한 빛발 영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또 최근 중국작가교류협회에서는 중국작가 그밖에 협회, 중화시사학회 등 여러 협회와 조직의 추천을 받아 2014년도 제1호 문건으로 >의 직함 (국가가 인증하는 직함자 격증서 발급)을 수여한다는것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그가 수상한 성급 이상의 상은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길림성 최고상) 3차, 전 국소수민족문학상 2 차, 전국소수민족문학연구 원예사상 1차, 홍콩 세계문화예술연구중 심과 세계화인교류협회의 국제우수작품상 등이다.    허나 그는 지금껏 창작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뿌듯하고 긍지감을 느끼는 때는 어떤 상을 수상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도 더욱 반갑고 기쁜건 길거리를 가다가 문득 생전 모르는 사람이 제앞으로 달려와서 그의 손을 잡고 “조룡남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잡지에 실린 사진으로 선생님을 알고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뵙고싶었는데… 촌에 살다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시와 수필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이면 어느 한편 빼놓지 않고 다 읽고있습니다…”하고 인사할 때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진정으로 글 쓴 보람을 느끼며 자신의 문학은 바로 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저와 같은 인민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라고 되뇌이었다.    그는 최근 3년간 투병중이라 창작은 별로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끔 작은 글들을 써보느라 하지만 그것조차도 잘 안되어 “풍월의 시절도 지나갔구나!”하고 뿌쉬낀이 그랬듯이 혼자서 탄식하기도 한단다. 이 3년간 그는 새 작품을 창작하기보다 이미 발표된 글들을 모아 작품집으로 묶는 작업에 정력을 모았다. 병으로 쓰러지던 2010년, 시집 를 출간하였고 2011년에는 동시집 (중국판)을 출간하였으며 지난해에는 산문집 을 출간하였다.    2010년 그는 병으로 쓰러진 그는 연변병원에 10차례 입원하였고 8차례 도관수술(介入治疗)을 받았다. 그는 처음 연변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선생에게 “나는 북경이나 상해로 치료하러 가지 않는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끝을 보겠다. 화학치료나 방사선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매달 한번씩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결과에 따라 입원도 하고 수술도 받고 집에서 그저 약물치료를 한다고 한다.  “이만큼 살지 못한 사람도 많고 많은데 욕심을 버리고 이만큼 산것에 만족하고 감사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한번 태여나서 한번 죽기 마련이다. 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갈 때는 꽃잎이 스러지듯, 단풍잎이 떨어지듯 그렇게 뒤모습이 곱게 자리내고 가야 한다” 라며 마지막 나날들을 긍정적으로 즐겁게 보내고 있다고 한다...     조룡남시인 략력   -1935년 11월 2일 출생   -1955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 교원생활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력임.   -연변조선족자치주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시집(1989), (1995), (1996, 한국출판), (1999, 한국출판), (2000, 한국출판), (2010), (2011),  (2013)   -10여수 시작품이 중소학교 교과서 과문으로 편입   -연변주정부 우수작가상, 연변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및 공로상, 연변주당위 주정부 민족문화사업특수공헌인물상,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2차), 향항세계문화예술연구중심 세계우수작품상, 한국 미래문학해외동포문학상, 카나다 민초해외문학상대상 수상   -1998년 9월 연변작가협회 한국방문대표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출국 참관교류   -2010년 연변TV방송국에서 “산과 흙의 시인-조룡남”이란 제목으로 55분에 달하는 인물사적영상편 제작, 방송   -시비로는 “반디불비”(연길/2002), “비암산 진달래”시비(룡정/2004)     ///해란강닷컴 /류설화 기자
1272    "막걸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댓글:  조회:3201  추천:0  2018-10-13
고문 후유증으로 치아 상한 천상병, 막걸리가 밥이었다 (ZOGLO) 2018년10월6일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천상병 시인이 1991년 서울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막걸리를 들이키고 있다.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대신하고 했던 그에겐 밥이 따로 없었다. [중앙포토] 막걸리는 술이지 밥은 아니다. 하나 천상병(1930~93) 시인에게는 막걸리가 밥이었다. 그는 밥 대신 막걸리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크게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 술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로 언제고 살짝 취기가 든 듯한 모습이었다.     충치도 심해 뭐든 삼키듯 먹어 부인의 인사동 귀천이 안식처 근처 남원집 국밥은 그에겐 특식 1000원, 2000원 정액제 구걸 유명 그 돈으로 책도 사고 술도 마셔 그의 시처럼 하루 막걸리 한 병 종일 마셔 크게 취하지는 않아 수락산 밑에 살던 천상병은 버스를 타고 서울을 왕래했다. 하루종일 서울의 어딘가를 배회하였는데 말년에는 부인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귀천이 쉼터가 됐다. 귀천을 경영하기 전인 80년대 초반, 목 여사는 대학로 학림다방 가까이에 있었던 찻집 까치방의 일을 도와 주고 있었다.     천상병은 자신의 시집 ‘주막에서’를 판매용으로 까치방 카운터에다 비치해 놓았다. 어느 해 겨울 저녁 낡은 외투 차림의 천상병이 찻집으로 들이닥쳐 자신의 시집을 세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인에게 고함을 쳤다. 어제 두 권이던 시집이 어째 오늘 도로 세 권이 되었냐고. 팔리기는커녕 누군가가 사간 시집을 도로 물렸던 것이다.     마침 찻집을 찾았던 천상병의 마산고 후배인 H가 시인을 알아보고 소동도 잠재울 겸 그를 끌고 근처의 막걸리집으로 모셨다. 당시의 대학로에는 허술한 막걸리집이 많았다. 주모는 천상병을 보자마자 문전박대했다. 돈을 거의 내지 않은 탓이었다. 누항의 주모에게는 초라한 행색만 눈에 들어왔을 뿐, 행색 뒤에 숨은 큰 시인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을 터.        친구가 사준 맥주 20년 지나도 고마움 표시     생전의 천상병 시인. 그는 막걸리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천상병은 자신의 시집이 도로 세 권으로 된 분함을 막걸리 몇 잔으로 풀었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천상병은 미술평론가인 이일(1932~97)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하던 동년배 시인이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이일은 서울대 불문학과 학생이었다. 이일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던 60년대의 어느 날 저녁,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천상병에게 맥주 한 병을 대접했다. 막걸리로 일관하던 젊은 날의 천상병에게 맥주는 황송한 귀물이었던 것. 그 고마움을 천상병은 20년 동안이나 기억하고 있다가 그날 밤 꺼내어놓았다. “H야, 내일 학교에 가거든 이 말을 이일에게 꼭 전해 주라, 그때 이일이가 사준 맥주가 너무 맛있었고 고마웠다고.” 감사함을 아는 다정다감한 천상병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날 천상병이 아니었다. 술집에서 큰길로 나오자 H의 여자친구를 슬쩍 따돌린 다음 H에게 만원을 요구했다. 심상이라는 잡지사에서 받기로 한 원고료로 친구들에게 술을 한잔 사기로 했는데, 원고료는 못 받았고 친구들은 혜화동에서 그의 등장을 마냥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탄다고 했다. “H, 이건 어디까지나 빌리는 거야. 내일 우리 마누라에게 가면 만원을 분명히 돌려줄 거야” 하며 웃었다. 돈을 받은 천상병은 어둠 속으로 신나게 사라졌다. 굳이 부인을 찾아가 돈을 받아 낼 일이 아니라는 건 H도 이미 알 만한 나이였다.     천상병의 구걸은 유명하다. 천원 아니면 이천원 정액제였다. 그것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요구한다. 천상병에게는 현금지급기나 마찬가지인 김인 국수가 어느 날 천원을 못 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대한민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인 만큼 오늘부터 천원이 아니고 이천원으로 올리면 주겠다고 했다. 천상병이 김인을 한참 노려보다가 왈 “어이, 김인이. 까불지 마라. 넌 아직 천원짜리밖에 안돼 !” 둘은 호쾌하게 웃었다. 천상병은 자신이 구차하게 돈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형편을 봐줘서 받아 주는 것이고 그만큼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어떤 술자리에서는 천원짜리를 몇 장 꺼내어 놓고 세기 시작한다. “만원이 되어야 무슨 전집을 사는데 딱 이천원이 모자라네” 하며 센 돈을 또 센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빨리 이천원을 채워 주어야 한다. 천상병의 구걸 퍼포먼스는 언제나 유쾌했다. 모두가 재미있어 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수금한 돈으로 천상병은 책도 사고 막걸리도 마셨다. 인사동에는 막걸리를 마실 데가 많았다. 천상병은 가게 앞에서 마실 때도 있었고 탑골공원 뒤 국밥집, 낙원상가 지하, 남원집을 찾기도 했다.        취기 살짝 오르면 기염 토하며 호언장담     생전의 천상병 시인. 그는 막걸리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귀천은 인사동 큰길의 천일사 부동산 옆 안쪽에 있었다. 골목 비슷한 길인데 들어가자마자 왼편으로 귀천이 있고 그걸로 길은 막힌다. 80년대의 인사동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대신 화가와 문인들이 인사동의 주인이었다. 화가들과 문인들에게 귀천은 사랑방이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귀천에서 소식을 주고받았다. 천상병이 그렇듯 귀천에 오는 단골 중에는 디오게네스풍이 많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문화를 번역한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이 딱 그런 풍모였다. 중광, 이외수 등도 귀천을 찾았다.     80년대 말이 되자 사람들이 먹고 살 만해지면서 비주류 문화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천상병도 방송을 탔다. 팬들이 급증했다. 팬들이 사인을 받으러 천상병 시인이 쉬고 있는 귀천을 찾아왔다. 대여섯 사람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귀천은 좁았다. 귀천의 좁은 공간이 감당치 못할 지경이 되면 천상병 일행은 남원집으로 갔다. 남원집은 인사동 큰길로 나와 한 칸 아래 골목 끄트머리에 있었다. 귀천에서 가까웠다.     천상병은 남원집의 국밥을 좋아했다. 그는 동백림 사건 때의 고문 후유증과 충치로 치아가 부실했다. 뭐든 삼키듯 먹었다. 막걸리가 끼니인 천상병에게 국밥은 특식이었다. 남원집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갔다. 남원집의 소미선 사장은 천상병을 존경했고 천상병도 남원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천상병 혼자서 와도 누군가가 동석이 되어 주어 결국 여러 사람이 상을 함께 하는 형국이 되었다. 계산을 하는 둥 마는 둥해도 좋았다. 몸이 아프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을 겨우 왔다. 국밥은 국물만 건성 먹고 남원집 할머니가 담근 동동주에 열심이었다.     어디에서고 천상병은 취기가 살짝 오르면 기염을 토했다. 천상병의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경상도 사투리에다 치아가 부실하여 발음이 샌다. 입가에는 버캐인지 막걸리 찌꺼기인지가 잔뜩 끼어 있다. 그는 속삭임을 몰랐다. 큰소리의 고함뿐이었다. 의미의 전후가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화법을 구사했다. 감으로 두드려 잡으며 이어가는 기막힌 대화였다. 그는 호언장담과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백만원이나 모았으니 그 돈으로 부인과 여행을 가야겠다거나, 화가를 보면 당신의 그림을 화랑에 소개하여 다 팔아주겠다는 등.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가 즐거울 뿐이었다.        마산중 담임 김춘수 주선으로 문예지 추천     천상병은 소확행의 실천자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싸구려 선글라스를 하나 걸치고 나타나면 인사동이 시끄럽다. 아는 사람들을 붙잡고 선글라스 예찬론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전혀 달라 보인다는 것. 너무나 멋진 세상이 나타난다는 것. 더불어 선글라스를 낀 자신이 엄청 미남이 되었으니 봐 달라고 애교를 피웠다. 선글라스 같은 소품 하나에도 천상병은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경남 창원 진북 출신의 천상병은 소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해방이 되자 마산중학교(마산중고교)로 편입했다. 당시 마산중학교에는 김춘수, 김남조 등 시인이 많았다. 천상병이 마산중 재학시 그와 동향인 창원 진전 출신의 권환이 잠시 이 학교의 독일어 임시강사를 맡았다. 교토제대 독문과를 나온 권환은 카프를 이끈 거물급 문인이었다.     풍부한 감성의 천재소년 천상병은 이런 환경 속에서 조숙한 시인이 되었다. 마산중 5학년 때인 1949년 담임인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됐다. 1952년 정식으로 등단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를 다닌 엘리트였지만 출세코스를 포기하고 거리의 시인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배려심이 깊은 부인을 만나 수락산 밑에서 안정을 얻었다. FM 클래식 음악방송과 브람스 교향곡 4번과 막걸리만 있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없는 자족의 삶을 살다 갔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 막걸리는 /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 생각날 때만 마시니 /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중략) //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 밥이나 마찬가지다 / 밥일 뿐만 아니라 / 즐거움을 더해주는 /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천상병의 시 ’막걸리‘)    
1271    윤동주와 최현배, 박창해 댓글:  조회:2596  추천:0  2018-10-13
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가 기숙사 생활을 했던 연세대 핀슨홀 전경.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언어의 역사는 얼마나 장구한가. 원시인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중세 언어인 라틴어나 한문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근대에 들어 민족어가 탄생하면서 개인은 비로소 단독자로서 자유를 얻는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후, 한글은 조선인에게 존재와 자유를 주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핀슨홀 3층 ‘천장 낮은 다락방’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브나로드 운동을 열심히 했던 강처중과 한방을 쓴다. 사실 그리 기분 좋은 시기만은 아니었다. 1938년 3월 총독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共學)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한다면서 조선어를 수의(隨意)과목, 곧 선택과목으로 만들었다. 조선어를 폐지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국어(일본어)를 쓰는 학생과 안 쓰는 학생을 구별하여 상벌을 주라는 훈시가 내렸다.  연세대 핀슨홀 건물 앞에 세워진 시비.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조선어로 동시 쓰면 누가 읽겠어, 염려하는 친구 윤석중의 말에 “땅에 묻지”라고 박목월이 경주에서 말했던 해였다. 재일(在日)시인 김시종은 제주도에서 아잇적 조선어로 말했다가 선생님께 뺨을 맞았다. 이듬해 국민학교에 조선어 수업이 숫제 없어 시인 고은은 아잇적 머슴 대길이에게 가갸거겨를 배웠다(고은, ‘머슴 대길이’). 이때부터 일본어 친일시가 활발하게 발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가 한글로 글을 쓰면 손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윤동주는 좋아하던 최현배 교수의 두툼한 ‘우리말본’(1937년)을 읽었다. 최현배 교수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을 수강했고, 입학하고 한 달 후 5월 10일 동주는 검박한 언어로 ‘새로운 길’을 썼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새로운 길’   핀슨홀 내부에는 윤동주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광화문에 현판으로도 걸렸고, 서대문구청에서 연북중학교 뒷면으로 이어진 ‘안산 자락길’ 산책로 왼편에 시비도 있어 친숙한 작품이다.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고개를 넘어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일 수 있다. 1연과 5연이 같은 수미상관이다. 2연과 4연은 묘하게 비틀린 대칭을 이룬다. 쉽게 오지 않을 희망을 그는 반복한다.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까닭은 가운데 3연에 나오듯,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보이는 ‘곁’이 있기 때문이다.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종시·終始’)는 기숙사 핀슨홀 생활이 즐겁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현배, 손진태, 이양하 등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 역사며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긍지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달뜬 기대를 표현한 시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한글로 썼다는 사실도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 이전에도 한글로만 쓴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기 시작한 배경을 생각하면, 조금 고집스러운 오기를 느낄 수 있다. 희망 없는 반복이 지겹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겠다는 풍성한 반복 의지가 엿보인다.   윤동주는 힘들 때 성찰할 때 산책을 즐겼다. 기타하라 하쿠슈의 동시 ‘이 길(この道)’을 동생들에게 자주 불러줬던 그는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는 구절도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특정 브랜드로 정하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침소봉대를 범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저항과 민족이라는 요소가 있지만, 그 범주로 윤동주를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저항과 실천은 미묘하게 숨어있다. 수수하게만 보이는 ‘새로운 길’에도 저항의 단초가 숨어 있다.  역사를 지키는 투쟁은 기관총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이야말로 지루한 투쟁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대학교 초년생의 한낱 달뜬 마음을 담은 소박한 소품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죽지 않는 저항의 씨앗이 담겨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시발로 금지된 언어로 계속 시를 쓰며 그는 금지된 시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자는 의지는 ‘아Q정전’(루쉰)의 정신승리법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금지된 언어로 19편의 시를 깁고 다듬어 시집을 내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하는 실천이었고,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이었다. ‘새로운 길’을 꿈꾸며 견디려 했던 그는 4학년에 오르면 급기야 ‘모가지를 드리우고 피를 흘리겠다’는 위험한 다짐까지 써 놓는다.    스승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제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스승 최현배와 제자 윤동주는 1940년대 지역은 다르지만 함께 감옥에 갇혔고 한글을 잊지 않았다. 최현배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에서 함께 배웠던, 윤동주의 2년 선배 박창해는 광복 후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로 유명한 ‘바둑이와 철수’를 만들어 국어교과서 독립선언을 완성한다. 최현배는 제자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신의 큰아들이 대표로 있는 정음사에서 가로쓰기로 낸다. 최현배는 여러 학자와 함께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시킨다.  무한한 성찰과 저항을 거쳐 조선어는 존재해 왔다. 보이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저항들이 모여, 거대한 언어의 역사와 단독자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270    윤동주와 키에르케고르 댓글:  조회:4206  추천:0  2018-10-13
  출생 1813. 5. 5, 코펜하겐 사망 1855. 11. 11, 코펜하겐 국적 덴마크 요약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최고의 진리임을 주장했다. 목차 접기 개요 초기생애 초기의 철학 저술 헤겔주의에 대한 공격 교회와의 대결 영향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덴마크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 Brian0918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초기생애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서부 유틀란트의 황무지에서 한 가난한 소작인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신이 자신의 고통과 가난에 무관심한 데 절망과 격분을 느껴 언덕 위에 올라가 준열하게 신을 저주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펜하겐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던 삼촌에게 갔는데, 그때부터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는 수도 코펜하겐에 5채의 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그 덕분에 금전문제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키에르케고르가 한 사람의 인간이자 작가로서 성장한 데는 재정적 유산보다는 심리적 유산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루터교를 엄격히 고수했고 형식논증의 논리를 좋아했지만, 아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시킨 엄격한 종교적·지적 훈련은 상상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강한 성격과 경건한 모습 이면에 불안하게 놓여 있는 억눌린 우수의 영향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죄의식을 알게 되었으며, 뒷날 그 이유가 아버지가 어릴 적에 신에게 퍼부었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죄를 알고 충격을 받은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어머니의 죽음과 6명의 형제 자매 중 5명의 죽음이 신의 저주를 증거한다는 확신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러 코펜하겐대학교에 갔으나 오히려 철학 쪽에 관심을 가졌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2년 뒤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목표를 바꾼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레기네 올센이라는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 어린 소녀와 설명할 수 없는 죄의식과 복잡한 인간정신에 대한 유별난 의식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파혼했고 베를린으로 가서 6개월을 살았다. 이 사소한 연애사건은 통속소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몇몇 저작에서 반성과 해설의 자료가 되었다. 초기의 철학 저술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삶의 단상〉(1843)의 방대한 원고를 가방에 넣고 베를린에서 돌아왔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은 거의 모두가 익명이나 각 저작에 어울리는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내놓는 사상을 권위자의 견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독자들의 판단, 특히 선택을 위해 제시된 다양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책 제목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의미이다. 즉 이 책은 미적 인생관 또는 윤리적(윤리종교적) 인생관의 대안을 제시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같은 해에 출판된 〈공포와 전율〉·〈반복〉에서는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라고 결론짓는다. 1844년에는 〈철학 단상〉·〈불안의 개념〉을 발표했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색인:헤겔주의). 그는 자유의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고 믿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헤겔 철학에 대한 공격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철학과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 먼저 자유의 철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심리학 분야로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불안). 그 결과가 〈불안의 개념〉이었다. 비상할 정도로 통찰력이 번득이는 이 책은 아마 현존하는 최초의 심층심리학 저술일 것이다. 1845년 키에르케고르는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이라는 새 책을 준비했다. 이 책은 방대하며,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성숙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담긴 사상을 반복하는 면도 있지만 사실상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 단계 혹은 종교적 영역은 미적 단계만이 아니라 윤리적 단계와도 구분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색인:미학). 사실 이러한 발전은 인간 윤리가 삶의 방식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이전의 모든 저술들에 구현되어 있는 생각들의 논리적 결과였다. 따라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는 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 둘만 있었던 데 반해 〈인생행로의 단계〉에는 종교적 영역을 포함해 세 영역이 있다. 인생과 인간성 전체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견해는 점차 음울한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심리적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불쾌한 경험을 많이 한 탓이었다. 레기네 올센은 결혼을 해버렸으며, 그리하여 속세를 벗어나 그녀와 일종의 신성결혼을 맺은 상태에서 오로지 신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때만 기다리던 낭만적 환상은 깨어지고 말았다. 사실상 이 환상은 〈공포와 전율〉·〈반복〉의 2책에 깔려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환상을 버렸다는 것은 〈인생 행로의 단계들〉의 제1부인 〈성찬〉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성찬〉은 플라톤의 〈향연〉을 본떠 사랑·에로스·성·여자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성 일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가차없는 경멸을 담고 있다. 헤겔주의에 대한 공격 키에르케고르는 그밖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에 담긴 취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제대로 보면서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쓴 문학비평가들과 언쟁을 벌였다. 이 언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판명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인간에 대한 심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이 쓰라림은 그 후에 쓴 대부분의 저술들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언쟁 직후에 쓴 조금 색다른 책인 〈철학 단상에 대한 결론적·비학문적 후기, 모방적·감상적·변증법적 구성, 실존적인 기고〉(1846)는 인상적인 제목과 함께 "요한네스 클리마쿠스가 짓고 S.키에르케고르가 출판함"이라는 글귀를 달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중요한 철학 저서가 한 책의 후기 형태이며 그 책의 분량의 1/5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지닌 아니러니의 전형이다. 철학적 단편(Philosophical Fragments)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단편 원고 ⓒ Lhademmor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리고 그 저서를 '실존적인 기고'라고 칭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그의 목표는 당대 유럽을 휩쓴 지배적 철학인 헤겔 철학에 보복을 가하는 일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하는 것 전체를 체계화하려는 헤겔의 시도를 공격하면서, 실존은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발전하기 때문에 체계로 구성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그는 논리에 운동성을 도입하려는 헤겔의 시도에서 논리적인 오류가 발생하는 것에 주목하고, 범주들을 뒤섞는 데서 혼란이 일어났다고 폭로했다. 헤겔은 자신이 객관적 인식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성이 진리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키에르케고르의 정의를 인용하면, "헌신성이라는 가장 정열적인 정신은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며, 이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진리, 그것도 최고의 진리이다." 현대 실존주의의 초석이 된 이 교설은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가리켜 일컬었던 '체계'를 손상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 체계를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체계를 구축하는 자는 실존을 지성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헤겔은 실존과 사유를 동일시함으로써 신앙의 여지를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체계 속의 한 단락에 지나지 않는 것, 즉 일반자의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수모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도가 되도록 설교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키려는 의무감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나아가 그는 신이 자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지정해주었기에 글쓰는 일마저도 완전히 그만두어야 한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교회와의 대결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은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글쓰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으며, 이번에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듬기 시작하는 일이 '소명'이 되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모습을 알리는 임무와 세속사회에서 안락을 추구하는 등 한마디로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종 대신에 시민의 노예가 됨으로써 종교를 배반한 덴마크 국교회의 수치스런 상황을 폭로하는 임무를 신에게 명령받았다고 생각했다(→ 색인:덴마크 복음주의 루터교 민족교회).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사고는 더욱더 엄격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의 저술들, 특히 〈탐구 정신에 관한 교훈적 담론〉(1847)·〈사랑의 작품〉(1847)·〈그리스도교 담론〉(1848)·〈죽음에 이르는 병〉(1849)·〈그리스도교 훈련〉(1850) 등에서 그리스도교를 다른 어떤 저술보다 더 완고하고 비타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훈련〉은 덴마크 교회의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가장한 것이기ㄱ도 했다. 1855년 무렵 그는 신에게서 국교와 성직자들을 가차없이 공격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확신하고는 즉시 많은 양의 소책자·팜플렛과 〈순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 잡지는 그중 10권이 키에르케고르 혼자만의 기고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과도하게 진행된 국교회 비판운동으로 그의 건강은 몹시 쇠약해졌다. 운동을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지날 무렵 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1개월 후 죽었다. 그무렵에는 재산도 탕진한 상태였다. 졸도하기 전 〈순간〉 제10호를 인쇄소로 보내면서 남은 유산을 다 써버렸다. 그는 소유하고 있던 몇 안 되는 귀중품을 그가 사랑한 여자이자 당시 관리와 결혼하여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에서 살고 있던 레기네 올센 앞으로 남겨 두었다. 영향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정점을 이룬 국교회에 대한 치열한 공격은 관리하기가 무척 힘든 유산이었다. 이 책은 국교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많은 성직자들 개개인이 국교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거나 심지어 인연을 끊게 만들었다.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철학적·예술적 진가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인정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1877년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최초의 저서를 출판하여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제공한 덴마크의 문학비평가 게오르 브란데스(1842~1927)의 공이 컸다. 브란데스는 공공연한 무신론자이자 그리스도교 증오자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키에르케고르를 교회에 반항한 인물로 다루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종교에 특별히 헌신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그리스도교적 교설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키에르케고르 저작집 초판의 편집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은 확고한 그리스도교도였고 다른 두 사람은 무신론자, 그것도 한 사람은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자였다. 독일에서는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이 널리 퍼져 제1차 세계대전 전에 그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이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제1·2차세계대전이 진행된 기간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기여했는데, 이들은 대개 '죽음에 이르는 병' 등 키에르케고르가 다룬 것과 똑같은 현상을 취급했다.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신학도 카를 야스퍼스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과 유대인 종교사상가 마르틴 부버와 같이 실존주의 사상을 고양하는 데 공헌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작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는데, 이 과정에서 '불안'·'고통' 등의 상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이루어졌다. 이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은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고독하게 죽은 뒤 약 1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1269    일본시의 해설을 공부하기 댓글:  조회:3270  추천:0  2018-10-13
시의 정수를 품은 다채로운 일본시                                                              /한성례     일본의 현대자유시는 1882년『신체시초新体詩抄』부터 첫 발을 내디딘다. 이는 그 이전의 전통시가인 구체시旧体詩와는 다른 형태를 서구의 포에트리Poetry에서 이식해온 것을 말한다. 신체시 시대에는 주로 서사시나 극시였다. 이후로 낭만시, 구어자유시, 이상주의시, 자연주의시, 상징시, 민중시, 예술파의 시, 프로레타리아시, 전위시, 모더니즘시, 저항시 등의 다양한 실험과 경향을 거쳐 근대시가 완성되었고, 이것이 현대시로 이어진다. 일본 현대자유시의 위치   패전 후 일본시단은 ‘아레치파’와 ‘렛토파’로 나뉜다. 1947년에 창간한 시 잡지 『아레치荒地』를 중심으로 모인 모더니즘 시인들은 문명이나 사회비판을 시에 도입하기로 한다. 주로 영국시인 엘리엇이나 오든, 파운드 등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었다. 일본어 '아레치'는 '황무지'를 뜻하며 엘리엇의 시집명에서 따온 말이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전쟁 중에 행한 전체주의를 외면하고 시 창작을 핑계 삼아 도피했던 점을 처절하게 참회하고 반성하였다. 그런 연유로 개인주의적인 입장을 관철했고, 시의 표현은 암유를 중시했다. 그로 인해 시가 몹시 난해해졌다. 현재의 모더니즘은 훨씬 더 난해해졌다. 이는 현대시가 일반대중에게서 멀어진 한 요인이기도 했다. 『렛토(列島)』는 전후 사회파를 대표하는 시 문학지였다. 사회파 시인들은 전쟁 중에 프롤레타리아 시가 정치에 종속해서 예술적으로 빈곤했음을 반성하였고, 예술과 정치 혁명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저항시 쉬르리얼리즘을 중시했다. 1960년대의 미국안보반대운동까지는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으며 리얼리즘의 시 작품도 많았으나 이 운동이 패배한 후에는 모더니즘 시가 우위를 점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후세대 시인들은 대부분 모더니즘적이거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성향이 강하다. 두 그룹 모두 언어를 중시했다. 인생, 자연, 감정 등이 아니고, 언어 그 자체의 자율성을 중시하여 언어기호로서 새로운 표현방식을 추구했다. 무엇을 표현할까 보다는 ‘어떻게 표현할까’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서구에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일본에도 들어온다. 이는 모더니즘적 완성보다는 해체를 중요시했고,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경계를 허물며 접합시켰다. 하지만 전통적인 문맥이나 통상적인 논리를 부정하고 해체를 목적으로 삼았으므로 한층 난해해졌다. 이처럼 해체시나 반시의 힘이 강해지면서 일반적인 독자가 감소했다. 이러한 현대시의 빈자리를 전통 시 하이쿠(俳句), 단카(短歌), 와카(和歌)가 차지했다. 하이쿠 인구는 천만 명에 달할 정도이며 하이쿠 동인이나 모임은 일본 전국에 수도 없이 많다. 하이쿠는 이미 세계로 뻗어나가 여러 나라에서 하이쿠를 쓰고 읽고 즐긴다. 해외의 하이쿠 인기는 유럽인들에게 가장 높다. 의외로 아시아에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현대시가 강한 한국에서는 유독 인기가 없다. 1987년에 출간한 타와라 마치俵万智(1962~)의 하이쿠집 『사라다 기념일』은 280만부가 팔릴 정도로 대베스트셀러였다.   신서정新敍情의 사회시   난해한 시가 주류를 이루는 일본시단에서 독자적인 시 창작의 길을 걸어온 시인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해 인생, 자연, 감성 등을알기 쉬운 언어로 표현했다. 독자도 많았고 시집이 출간되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90년대 이후 화제에 올랐던 주요 시집은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1926~2006) 『기대지 않고』, 이시가키 린石垣りん(1920~2004) 『표찰 따위』, 타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郎(1931년~)『세상모르는 사람』등이 있다. 이들 중 이바라기 노리코는 50세가 넘어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하여, 다수의 한국시를 번역하여 일본에 알렸다. 주로 신서정의 사회시를 써서 많은 사랑을 받은 여성시인이다. 대표작 한 편을 살펴보자.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황당한 곳에서 푸른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놓쳐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멋진 선물을 해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하는 예절밖에 모르고 아름다운 눈길만을 남겨둔 채 다들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차가워서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졌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왜 했단 말인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흘렀다 금연을 깨고 담배를 다시 피었을 때처럼 어질어질하게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몹시도 행복하지 못했다 나는 몹시도 엉터리였다 나는 몹시도 외로웠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어찌 됐든 오래오래 살기로 늙어서 아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말이지     후쿠이福井의 시인들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1909~1990)는 돗토리鳥取 현에서 태어났으며 패전 전에는 조선에서, 패전 후에는 후쿠이 현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그는 19세가 되던 1928년에 조선에 건너와 약 17년간을 살았다. 조선총독의 촉탁으로서 평안북도 경찰부에 근무하면서 압록강을 배경으로 쓴 시를 많이 남겼다. 패전 후에는 후쿠이 현에 피난 가 있던 스승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1900~1964)를 방문했다가 그의 권유에 의해 이 지방에 자리를 잡고 지방주의를 제창하며 후쿠이 현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오카자키 준岡崎純(1930~), 가와카미 아스오川上明日夫(1940~), 아라카와 요지荒川洋治(1949~) 등 현재 일본시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시인들이다. 노리타케는 살아있을 동안에는 일본시단을 대표할 만한 큰 시인은 아니었으나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후진들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후쿠이 현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문학상인 ‘H씨 상’ 수상 시인을 다수 배출한 지역으로도 유명한데 주로 그의 제자들이다. 노리타케는 조선에 살 때 조선시인 백석과 절친했다. 백석은 당시 노리타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주었다.   나 취했노라 - 노리타케 가즈오에게 -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산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간 노리타케는 1978년 69세에 출간한 『파葱』라는 시집 제목을 백석을 생각하며 지었다. 백석이 파를 든 모습을 본 것은 조선과 만주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였다고 한다. 백석이 만주에서 산 십여 알의 파를 한 손에 들고 다리를 건너 조선으로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노리타케가 조선 시절의 백석을 추억하며 쓴 시이다.       파       파를 들고 있던 백석 백白이라는 성에 석石이라는 이름의 시인. 53세가 되어 나도 파를 한 번 들어본다.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이었던 나. 아득하게 20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친구 백석이여. 살아 있는가? 부디 살아 있기를. 백이라는 성, 석은 이름인 조선의 시인. 노리타케가 길러낸 제자 중에 현재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며, 시단 뿐 아니라 문화평론가, 방송인 등 문화전반에 걸쳐 활동하는 아라카와 요지 시인이 있다. 그는 ‘H씨상’을 와세다早稲田대학 재학 중에 최연소로서 수상하여 크게 관심을 모았다. 시를 한 편 소개하겠다.       달빛 남자가 늘어났다 달빛이 쏟아지고 부랑자 곁에 눕는다 늘어났다 감은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었다 그 사람을 오롯이 원하기만 하면 된다 헤쳐 나가는 중에 점차 혼자가 되어 그녀는 수없이 그 머리카락으로 내 머리를 휘감고 나를 안정시켜 주었으나 머리카락의 틈새로 스스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의 첫 성교는 실패로 끝났다 달빛은 어디를 비추고 있을까 시간의 머리를 눌러 줘 그녀는 눈 안으로 올랐다 가끔 멈춰 서서 나를 응시하면서 남자가 늘어났다 그녀는 도모미라는 사람과 결혼을 전제로 완벽한 성교를 하고 있다 완벽한 성교다 둘은 가구처럼 딱 맞게 제 자리에 들어간다 바람 방향에서 그 기록이 돌아와 내 눈 앞을 통과하고 세상의 한구석으로 흘러간다 결혼을 전제로 한 두 남녀의 슬픈 감상도 없이 몸을 묶어놓은 장면이 너무 무거워서 바람을 타다니 그것은 오늘도 관을 통해 한구석으로 흘러간다 길가에는 달빛을 주워 든 부랑자가 반짝이는 벤치 위에 누워 젊은 그들이 벗어놓은 구두를 응시하고 기록을 응시하지만 다가가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응시하려고만 한다 감기에 걸린 듯한 홀쭉한 몸으로 머리를 누르고 올라가는 그녀를 남자들은 시야를 넓혀 더욱 깊이 응시한다 다시 포착했을까 노리타케의 제자 중 또 한 사람 가와카미 아스오는 아름답고도 깊이 있는 시를 쓰며 많은 노랫말을 쓴 시인으로서도 유명하다 그의 시를 한 편 감상해보자.       토끼풀 어이, 영혼, 하고 불렀다 예, 하고 어둠속에서 귀신이 얼굴을 내밀었다 불러 본 보람이 있었다 좋은 얼굴이었다 이 세상 물가에 오래 살았던 것 같다 뿔도 보였다 호의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돌고 도는 계절의 외로움을 가만히 바람에 풀어헤치고 램프를 켜고 그런 식으로 조용히 마음의 남포등과 마주해본 적이 있었던가 영혼과 아아, 영혼이여,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옷깃을 단정히 하고 돌보지 말기를 나를, 내 몸을 희미한 바람의 흔들림에 슬퍼하지 말기를, 거기에 비친 가슴속 불길의 너울 한가운데쯤 지금 건너편 물가에서 눈물지으며 조용히 손 흔드는 나를 더 이상 망연하게 부르지 말아주기를 나락의 끝, 토끼풀이 베개 맡에 피어 있는 곳이었다       현재 일본시단의 중심에 선 전후세대 젊은 시인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전후세대 여성 시인으로서는 이토 히로미伊藤比呂美(1955년생), 히라타 토시코平田俊子(1955년생), 고이케 마사요小池昌代(1959생), 하치카이 미미蜂飼耳(1974년생), 후즈키 유미文月悠光(1991년생) 등이며, 새로운 시 세계를 탐색해 나가는 시인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소설가로서도 활동하며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리는 시인이기도 한 고이케 마사요의 시를 한 편 감상하겠다. 또 1991년생으로서 고등학생이었던 2008년에 ‘겐다이시데쵸現代詩手帖상’을 수상하였고, 첫 시집 『적절한 세계의 적절하지 못한 나』로 ‘나카하라츄야中原中也상’과 ‘마루야마유타카丸山豊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후즈키 유미의 시도 한 편 감상하겠다.       누─, 아프리카의 소리 고이케 마사요 왜 그때 누─가 화제에 올랐을까 결혼해서 탄자니아로 간다는 가나코 씨가 그때 문득 말을 꺼냈던 것이다 누─라는 야생동물을 아시나요? 누─ 얼굴이 못생기고, 새까맣고, 이름처럼 멋대가리 없는 목소리로 울부짖고, 무리를 지어 사반나를 이동하며, 먼 곳에서 내리는 비 냄새를 맡을 줄 안다는, 소인지 산양인지 분간이 안 가는, 산양처럼 수염이 나 있고, 어깨 부근에 낙타 같은 혹이 있는, 이를 테면 어느 동물 측에도 끼지 못하는, 왜 그때 누─가 화제가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지만 가나코 씨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러니까 누─는 신에게 벌을 받은 거야, 라고 말했다 모두들 잠자코 멀리 아프리카에서 시공을 넘어 다가온 누─의 침묵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자 몸 깊숙이에서 뿔이 달리고 검은 털이 수북한 동물이 태어나 누─ 하고 칠흑 같은 소리를 냈다 누─가 무슨 짓을 했을까 뭔가를 했다 뭘 했을까 그 뭔가를 가나코 씨는 그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하지 않은 듯도 하다 떠오르지 않는다 가나코 씨는 탄자니아로 떠나 버려서 누─가 무슨 짓을 해서 못생긴 동물이 되었는지는 탄자니아에 가서 물어봐야 한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 중앙의 동부에 있다 그래, 여기야 지도 위에 그때 누군가 와인을 떨어뜨려서 빨간 와인은 지도 속 보이지 않는 나라를 얼룩자국으로 뒤덮었다 사람과 헤어진다는 게 요즘에는 내 팔이 잘려 나가는 듯 슬픕니다 제발 가지 마, 그런 곳에 가나코 씨는 내게 오른팔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별나게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나를 이루는 발이기도 하고 손이기도 하고 팔이나 눈이기도 해서 잘려나간 후에야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오른팔은 금방 자라날 리가 없으니 나는 없는 팔을 문지르면서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크게 떼를 지어 이동하는 누─는 한 마리 한 마리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자, 여기 내가 있잖아요 상하로 혹을 흔들면서 걸어가는 나, 누─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짓인가를 했다 비 냄새가 맡아지는 아프리카의 비 그 비는 죄의 냄새가 난다               낙화수落花水 후즈키 유미 투명한 빨대를 통해 미술실에 울리는 “푸우, 푸우” 하는 내 호흡소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면 이렇게 숨으로 불러 보자. 도화지 위의 붉은 색 물은 희미하게 몸을 떨고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내 호흡의 끝을 만져버린 것처럼 슈우, 하고 멈춘다. 새끼손가락 손톱만큼도 안 되는 수채화 물감은 물에 풀어져 옅고 짙은 다채로운 붉은 색으로 황혼을 팔레트에 그려낸다. 그 한 조각을 붓으로 따내어 도화지에 떨어뜨리고 새하얀 살이 붉은색을 다 받아들일 때까지 잠깐 얼굴을 편다. 빨대를 움직여서 제 멋대로 흐르는 수맥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본다. 내 푸른 셔츠에 붉은 색 물감이 튀어 동그랗게 번진다. (물들인다는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몸. “너에게 색 따위는 어울리지 않아” 지적하는 교실 문을 향해 “나도 알아!”라고 소리치며 부수고 불태워버릴 만한 다홍색을 찾았다. 낡은 팔레트를 확인하듯이 몇 번이고 열어 보지만 거기에는 나밖에 없다. 그것은 빗속에서 적막하게 옷을 벗는 소년인 쪽빛) 색깔에 빼앗긴 내 숨결이 도화지 위에서 되살아난다. 물이 되어 뻗어 간다. 이 수맥이 닿는 곳이 누군가의 건조한 왼쪽 가슴이라면 나 또한 찾을 게 있다. 찾기 위한 입구가 눈꺼풀 안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되고 싶어!” 바람에 섞여 구름을 향해 뛰어오르는 나. 흰 구름의 정상에서 손을 짚고 비밀스럽게 주저앉는다. 어느 땐가 붓에 채여 거리를 향해 툭 떨어진다면 바람에 부풀어 오른 스커트처럼 나는 활짝 피워서 보여주리라.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후세대 남성 시인으로서는 노무라 키와오野村喜和夫(1951년생), 키도 슈리城戸朱理(1959년생), 다카가이 히로야高貝弘也(1961년생), 와고 료이치和合亮一(1968년생), 오가사와라 조루이小笠原鳥類(1977년생) 등이며, 모더니즘, 쉬르리얼리즘 계열의 시가 중심을 이룬다. 그들 중에서 다카가이 히로야와 오가사와라 조루이의 시를 한 편씩 감상하겠다.               인연이라는 씨앗의 노래 다카가이 히로야 인연의 기댈 곳 없음이여 부드러운 표적으로 울고 있다 그 무른 귀 울음을──   돌아라 메아리    돌아라 메아리 바람을 자르고 산을 넘어  치고 돌아와 둘러싸라 급류를 타고 내려와 바다를 건너 다시 돌아와서 둘러싸라     한탄은   평온함을 위해   슬픔은     온화함을 위해 검은 열매를  납작해진 그  하늘, 팽이를 돌려라  어려서 더듬거리다  태어날 기회를 놓쳤다 회전하면서       (나는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 배에 원격조정 시한폭탄을 장치했던 게 아니다)   오가사와라 조루이 (해안일까 그곳은, 환한 콘크리트가 새로운 요리콘크리트 우유·생선대구)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 ‘보리새우’처럼 흩어지는 깃털, 깃털폭발과 같은 안녕하세요, 그물고기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당신은 접배주인 인거죠착제인가요? 부드러운 검물고기은고양이 사전에 침입한 것 같군요, (당신이 배 주인인거죠? 내가 다 그릴 때까지 배를 쓰지 못해서 난처한 모양이다) “배가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바다가 뜬다” 새로운 바다의 반향反響거리를, 미안합니다.(나는 나쁜 아이다). 잡생각을 하면서 판자 위에 얹은 푸른 종이를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낮에 물렸다고 생각하지만, 바물고기의 내장다가까이에서 자무엇입니까?라면 기내려 오는본적인 색은 흰색이 아니라 청대롱 같이색이 됩니다. (내려오는 새의 내장과 같은 그 작은 대롱이 뭐죠?) “실은 배 소유자인 최신형 까치 투명透明과 부서진 조개껍데기 위에서 나는 나쁜 말물고기 무리가을한게 아니었다” 바다의 거품은 심안녕히 주무셨나요?각한장소다, 아니 그렇지 않은데도 어떤 물건처럼 보이고(그렇다는 것도 또 하심각한 장소로서의 바다 거품나의거짓말이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고래의 새로운 종류가. 고래의 목소리와 고래의 빛과의 시간차를 천둥이라 불렀고…… 언어는 순간의 축이 아니라서 비·광선총 기타 등등. 아아, 새가 폭발했던 아주 오래 전 기법이군 “이 또한 늦어지는 전화와 같으니 새의 녹아아 물고기는내장은 적당량의 해수를 부어 콘크리트 구멍에 흘려 넣어 버려”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대강 끝내고 먼 곳을 통과하려는 몇 명의 주방장에게(낮의·더구나 계단) 안녕하세요. 더욱 이상하게 만드는 “것에 의해 입체화 한 폭레스트란발계획을 다시 만들고,” 감사합니다. 그것의 중심에서 적당한 거리까지 확물고기들산되는것으로 만들어 가렵니다. 청색종이를 안녕히 가세요. 육지에서 버튼을 누른다       외국인에게도 일본의 문학상 수여 일본은 이전부터 자국의 문학상을 외국인에게도 수여해왔다. 주로 일본 영주권을 가진 문인이었으나 최근에는 일본국적도 아니고 일본어가 모국어이지 않은 문인들에게도 상을 수여한다. 2008년에는 중국 국적의 양이楊逸가 유학생으로서 소설문학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쿠타가와芥川상’(제139회)을 수상했다. 시문학상에서도 2010년에 중국인 티엔위안田原이 ‘H씨상’을 수상했다. 티엔위안의 ‘H씨상’ 수상시집에 실린 시를 한 편 감상하겠다.       무 덤 지저귀던 몇 마리 새가 주위의 적막을 깨고 무덤 위로 내려앉는다 청량한 바람이 한차례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빗처럼 무덤 위 마른풀을 쓸어넘긴다 죽은 자는 실려와 묻히고 슬픔과 기억은 그때부터 여기에 정착한다 산자는 찾아와 묘비 앞에서 손을 모으고 발자국을 남긴 채 떠나간다 사막은 낙타의 무덤 바다는 어부의 무덤 지구는 문명의 무덤 무덤은 죽음의 또 다른 형태 아름다운 유방처럼 대지의 가슴에 봉긋이 솟아오른다 무덤도 성장한다, 그 자리에 솟은 채로 홍수가 밀려들어도 폭풍우에 모래 먼지가 뒤덮어도 무덤은 지평선에 자라난 귀다 누구의 발소리인지를 금방 알아차린다               일본이라는 국경을 뛰어 넘은 시인들 시단이나 문단의 인기나 관심과는 별개로, 대중과 직접 호흡하며 대중 속에 뛰어들어 삶과 시가 하나인 시인도 있다. 일본이라는 국경을 뛰어 넘어 지구를 방랑하여 얻은 혜안으로서 우주적이고 근원적인 세계를 시를 쓴 나나오 사카키(1923~2008)가 있다. 손과 머리로 쓴 시가 아니고 발과 가슴으로 쓴 시이며 지성이나 교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의 궤적으로서 쓴 시를 말한다. 세계적인 시낭송가이자 반핵과 반전을 외치고 평화와 환경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나나오 사카키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드 와 친교했던 시인으로서도 유명하다. 미래로 발신하는 듯한 나나오 사카키의 시를 두 편 맛보겠다.       헤노헤노모헤노* 쓸모없는 말 할 시간 있으면 책을 읽어라 책 읽을 시간 있으면 걸어라 산을 바다를 사막을 걸어 다닐 시간 있으면 노래하고 춤춰라 춤출 시간 있으면 입 다물고 앉아 있어라 경사스러운 헤노헤노모헤노 독자 여러분 * 헤노헤노모헤노 : 일본 문자 히라가나의 헤へ, 노の, 모も로 그린 사람의 얼굴. 여기서는 수많은 일반인을 가리킨다.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중얼거렸다 7분 지나면 너는 잠들었다 7시간 지나면 너는 눈을 뜬다 7일 지나면 너는 일에 질린다 7년 지나면 너는 친구를 잊는다 70년 지나면 너는 아무 데도 없다 700년 지나면 너를 아무도 모른다 7만 년 지나면 인류는 어디에도 없다 7억 년 지나면 은하계가 위험하다 7억 광년 지나면         누군가가             네 침대에서 자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현대시는 다양한 모습으로서 다채롭게 빛난다. 대중적이지 않을지라도 시의 정수를 품은 빼어난 시가 있는가하면 전지구적이며 우주적인 영혼을 노래하는 시도 있다.                       한성례 1986년 『시와 의식』 등단 시집 : 『실험실의 미인』,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빛의 드라마』 외 번역서 :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외 허난설헌 문학상, 일본 시토소조詩と創造상 현 : 세종대 정책과학대학원 국제지역학과 겸임교수
1268    일본 시인 - 미요시 다쓰지 댓글:  조회:2950  추천:0  2018-10-13
  출생 1900. 8. 23, 일본 오사카[大阪] 사망 1964. 4. 5, 도쿄[東京] 국적 일본 요약 일본의 시인.   일본의 시적 전통과 현대시의 통합이라는 과제를 의욕적으로 수행한 쇼와 시대[昭和時代]의 대표적 시인이다. 육군사관학교 중퇴(1921) 후,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8년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아오조라 靑空〉·〈시이노키 椎の木〉·〈아 亞〉 등의 잡지에 시작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고, 1930년 제1시집 〈측량선 測量船〉을 발표하여 획기적인 쇼와[昭和] 신시(新詩)라는 평가를 얻었다.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자크의 4행시의 발상에서 영향받아 〈남총집 南窓集〉(1932)·〈한화집 閒花集〉(1934)·〈산과집 山果集〉(1935) 등을 간행했으며, 호리 다쓰오[堀辰雄] 등과 잡지 〈시키 四季〉를 창간하여 시키파(派)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윽고 시집 〈초천리 艸千里〉(1939)·〈일점종 一點鍾〉(1941) 등에서 영탄적 문어조의 시풍(詩風)을 강하게 보였으며, 〈낙타 등에 올라타고 駱駝の瘤にまたがって〉(1952)에서는 만년의 고전적 풍격과 완성도를 보이는 경지에 올라섰다. 존경하는 스승을 논한 〈하기와라 사쿠타로 萩原朔太郞〉(1963)도 높이 평가받았다. 1953년 일본예술원상을 수상했다. ==================///   미요시 다쓰지 시(詩)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의 의미 고찰 오석윤       목 차 서론 본론 제1장. 존재의 비극 제2장. 존재의 차별 결론           서론 이 논문은 일본의 근․현대시인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1900-1964, 이하 다쓰지라 함)의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에 주목하여, 그 의미의 변주 양상을 살피는 것이 목적이다. 다쓰지는 생애에 75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겼다.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뚜렷한 우열 없이 고른 시적 성숙도를 보여 준다. 이러한 점은 그가 일본의 근․현대시인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 매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가 시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이미지는 주지시인과 함께 일본 고유의 전통미를 노래하는 서정시인으로서의 이미지다. 시인의 이 양자 공유 이미지가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그의 까마귀 관련 시를 둘러싼 의미 변주와는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 지도 관심거리다. 그의 첫 시집인 『측량선(測量船)』(1930)과『남창집(南窗集)』(1932)에 수록된 「까마귀(鴉)」의 이미지를 연구한 사례는 있으나, 초기 시와 후기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를 동시에 살피며 비교 분석한 논문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본고가 그의 시에 나타난 '까마귀'이미지를 시어 중심으로 분석하는데 일조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연구는 다쓰지 시 연구자들에게 까마귀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조류 중심의 이미지를 통해 본 시 연구에도 향후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아가 동물 혹은 조류나 사물에 의탁하여 시를 쓴 일본 근․현대시인들의 시적 특성 연구에도 본고가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그의 시에 나타난 시어를 중심으로 작품을 면밀히 분석할 것이지만, '까마귀' 관련 시들의 이미지에 담긴 이면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 이미지가 상당부분 시인의 삶과도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점을 밝힐 것이다. 이는 그가 생전에 자신의 시작(詩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에 나타난 시어(詩語)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 분석을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시어와 시인의 삶을 소통관계로 놓고 기존 연구자들의 전기적 접근 방식에서 규명했던 성과도 활용하겠다는 의미다. 이러한 연구의 성격과 의의를 바탕으로, 본고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안점을 두고 시를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시의 화자가 까마귀가 되어 있는 시와 피 관찰자로서의 까마귀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둘째, 그러한 까마귀 이미지가 존재의 비극과 존재의 차별화를 어떻게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이 두 가지를 주된 분석의 틀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까마귀 시에 나타난 이미지 연구를 위해 분석 대상이 되는 작품을 초기 시집인 『측량선』의 「까마귀」와 「정원(庭)」 『남창집』의 「까마귀(鴉)」 그리고 후기 시집인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駱駝の瘤にまたがって)』(1952)의 「까마귀(鴉)」 등 모두 4편으로 택하였다. 다쓰지의 시(詩)에서 ‘까마귀’가 등장하는 것은 모두 7편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까마귀’를 제목으로 하는 시는 『측량선』에 1편, 『남창집』에 1편, 『황사(霾)』에 1편,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에 1편으로 모두 4편이다. 그밖에 시어로 까마귀가 등장하는 것은 『측량선』의 「정원」, 『일점종』의 「한아한 오전(閒雅な午前)」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의 「늦여름(晩夏)」이다. 이들 중 앞에서 거론한 4편의 시에 한정해서 본고를 꾸리고, 나머지 3편을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시에서 까마귀가 차지하는 비중의 정도가 시의 중심 이미지에서 파악했을 때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까마귀’라는 조류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또 하나는 본고의 분석의 큰 틀인 ‘존재의 비극’ 과 ‘존재의 차별화’라는 두 가지 관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본론 제1장. 존재의 비극 다쓰지 시의 대표성을 갖는 여러 작품 중에서 『측량선』의 「까마귀」는 극명하게 존재의 비극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바람이 세찬 흐린 하늘에 태양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날의, 인기척 없는 한 줄기 길 위에 나는 끝없는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바람은 사방 지평에서 나를 부르고, 내 소매를 잡고 옷깃을 에워싸며, 그리고 또 그 거친 외침의 소리는 어딘 가로 사라져 버린다. 그 때 나는 문득 마른 풀 위에 버려진 어떤 검은 윗옷 하나를 보았다. 나는 또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멈춰라!//나는 멈춰 서서 주위에 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너의 옷을 벗어라! //공포 속에 나는 수치와 작은 분노를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명령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더욱 싸늘하게,//---발가벗어라! 그 옷을 주워 입어라!//하고, 이제는 저항하기 어려운 위엄을 띠고, 풀 사이에서 나에게 명령했다. 나는 비참한 모습으로 윗옷을 입고서 바람 속에 내버려져 있었다. 내 마음은 패배 준비를 했다.//---날아라!//그러나 왠지 기이한 뜻밖의 말이리라. 나는 자신의 손발을 돌아보았다. 손은 긴 날개가 되어 양 겨드랑이에 접고, 비늘을 나란히 세운 발은 세 발가락으로 돌을 딛고 있었다. 내 마음은 또 복종 준비를 했다.//---날아라!//나는 재촉되어 땅을 박찼다. 내 마음은 갑자기 노여움에 가득 차, 날카로운 비애로 일관된 채, 단지 이 굴욕의 땅을 뒤로, 정처 없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감정이 감정에 채찍질하고 의지가 의지에 채찍질하면서-. 나는 오랜 시간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금, 저 비참한 패배로부터는 멀리 날아가, 날개에는 피로를 느끼고, 내 패배의 축복이 될 희망찬 하늘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아! 또 그 때 내 귀 가까이 들린 것은, 저 집요한 명령의 소리가 아니었던가.//---울어라!//오오, 지금이야말로 나는 울리라. //---울어라!/---좋아 나는 울겠어.//그리고 울면서 나는 날고 있었다. 날면서 나는 울고 있었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 아아, 아아//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가을이 나뭇잎을 뿌리듯이 나는 말(言)을 뿌리고 있었다. 차가운 것이 자꾸만 뺨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까마귀」 전문     인용 작품은 『측량선』에 수록된 「까마귀(鴉)」 전문이다. 시에서는 화자가 가냘픈 희망을 꿈꾸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는 어둡다. 산문시의 양이 말해 주듯이 인생을 압축한 것 같다. 그러한 압축 감은 읽는 이에게 긴장으로 다가오면서 이 시의 우수성에 기여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시 전체에서 존재의 비극이 그려지고 있다. 그 존재의 비극의 바탕에는 살아온 삶에 대한 짙은 회한(悔恨)이 서려 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엇보다도 이미 까마귀가 되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연속적으로 늘어놓는 듯한 화자의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연에서는 까마귀가 살고 있는 공간의 환경이 제시된다. ‘세찬 바람’ ‘흐린 하늘’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태양’ ‘사람의 기운이 없는 외길’은 참담한 환경을 제시하기 위한 화자의 의도다. 이 환상(幻想)에 존재하는 여러 악조건을 끼고 까마귀는 메마른 풀이 있는 들판에 살고 있다. 까마귀의 상징은 까마귀의 외형이 검은 것에 착안한 ‘검은 윗옷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물리적 환경에 덧붙여지고 있는 것은 그런 화자를 부르는 사람의 소리다. 그래서일까.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수치’ ‘작은 분노’ ‘패배 준비’ ‘복종 준비’ ‘노여움’ ‘비애’ ‘비참한 패배‘ ‘피로’ ‘집요한 명령의 소리’ 등은 시의 분위기에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한다. 분명히 슬픈 기억을 드러내는 시어다. “나는 자신의 손발을 뒤돌아보았다. 손은 긴 날개가 되어 양 겨드랑이에 접고, 비늘을 나란히 세운 발은 세 발가락으로 돌을 딛고 있었다.”는 까마귀가 된 화자의 구체적인 몸의 형상이다. “내 마음은 또 복종 준비를 했다”와 “집요한 명령의 소리”는 슬픈 기억을 가진 까마귀가 이미 명령에 익숙해져 있음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파악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느새 지금, 저 비참한 패배로부터는 멀리 날아가, 날개에는 피로를 느끼고, 내 패배의 축복이 될 희망찬 하늘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아! 또 그 때 내 귀 가까이 들린 것은, 저 집요한 명령의 소리가 아니었던가(11연).” 는 고통스러운 환경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강한 의지의 함의가 있으나, 쉽게 굴욕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화자의 안타까움도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리하여 “울면서 나는 날고 있었다. 날면서 나는 울고 있었다.”에 이르러서는 존재의 비극이 증폭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간직하고 있던 슬픔에 대한 생각이 울음으로 구체성을 띠는 것은,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이다. ‘아아‘의 반복이 깊은 울음의 상징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것은 다음 연에서 이어지는 “차가운 것이 자꾸만 뺨을 흘러내리고 있었다.”에서 차가운 것이 눈물을 나타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에 기대어 보면 의문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시의 심리적 모티브다. 분명 화자를 둘러싼 외부적인 환경이 화자를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그러한 압박에 대해서 강한 폐쇄감을 느끼는 화자다. 여기에서 화자를 작자 자신으로 환원해서 본다면, 시에서 표현되는 까마귀는 시인 미요시 다쓰지라고 파악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게 도달된다. 이 시의 심리적 모티브와 관련하여, 과연 이 시에 등장하는 암울한 시어들과 이미지들을 시인 다쓰지가 겪어온 청년 시절의 삶과 연관성을 부여해도 괜찮은가의 문제다. 이 시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이나 동시대 시인들의 평석은 그러한 연관성을 대체적으로 긍정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 그러한 연관성을 제기한다. 첫째는, 일본의 파시즘化에 대한 불안을 예감하는 젊은이의 의식을 그리고 있다는 견해다. 이 시가 발표된 연도가 1929년이라는 시기를 감안하면, 당시 일본의 정치상황에서 파시즘의 압력은 시인 다쓰지에게 좋지 못한 예감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시인 개인의 문제를 떠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일본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고가 담겨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진학한 오사카육군유년학교(大阪陸軍幼年學校)와 육군사관학교 입학 등 군국주의적인 군대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했던 약 7년 간에 걸친 군인 교육으로 인한 다쓰지의 젊은 날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는 의견이다. 이것은 온전히 시인 개인의 삶과 연관시켜 파악한 견해다. 셋째는, 시 「까마귀」를 통해서 젊은 시절 이모의 지배 하에 놓였던 그의 굴욕의 슬픔을 엿볼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것도 극단적인 생활을 연상시키는 시인의 회고에 바탕을 둔 해석이다.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의견을 취하더라도, 공통된 것은 암울한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대해 낙관적인 추측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의견에 접근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어두운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로서의 우수성은 상황설정에 대해 펼쳐지는 치밀한 구성 능력과 시의 마지막 부분까지 이어지는 시적 긴장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시 또한 이 작품과 관련한 시인의 심리적 모티브를 찾는데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태양은 아직 창고에 가려져, 서리(霜)가 놓은 정원은 보랏빛으로 널찍하고도 차가운 그림자의 바닥에 있었다. 그 날 아침 내가 주운 것은 얼어죽은 한 마리 까마귀였다. 딱딱한 날개를 방추형(紡錘形)으로 접고서, 회색 빛 눈꺼풀을 감고 있었다. 그것을 던져 보니, 말라 버린 잔디에 떨어져 어이없는 소리를 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조용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날이 맑아지는 하늘 어딘가 에서, 또 까마귀 우는소리가 들렸다.   「정원」 전문     역시 『측량선』에 수록된 「정원」이다. 이 시에서의 까마귀 이미지는 앞의 시 「까마귀」이미지와 유사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의 비극이 그려지며 차가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것은 얼어죽은 까마귀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도 앞의 시 까마귀처럼 전반부에서 까마귀가 놓여진 환경의 설정으로 시작된다. 도입부는 차가운 이미지를 전해 주고는 있으나 기교가 돋보인다. 태양이 뜨지 않았다는 사실을 ‘창고에 가려져’라는 기교로 풀어낸다. 그와 함께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 ‘서리(霜)’를 정원에 내려앉은 주체로 묘사함으로써 시적 자질을 발휘한다. 태양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의 서리는 차가운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거기에 화자의 행위로 묘사되고 있는 이미 죽어버린 까마귀를 줍는 행위와 까마귀를 내던지는 행위에 주목해 보자. 화자가 주운 까마귀는 날개를 방추형으로 접은 채 죽어 있다. 방추형은 물렛가락처럼 생긴 모양으로 원기둥꼴의 양끝이 뾰족한 모양을 연상케 한다. 그런 까마귀를 집어 던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는 화자는 앞의 시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비극이 그 극한에 달해 있는 느낌이다. 날이 맑아지는 하늘에서 또 까마귀 소리를 듣는 화자가 까마귀 울음소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지를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는 유추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앞의 시와 공통적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앞의 시 「까마귀」와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화자와 까마귀를 분리해서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화자나 까마귀는 그 이미지 면에서 상호 분리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비극이 그 중심 축에 있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의 이미지와 피관찰자로서의 이미지를 다쓰지 자신의 모습이 중첩된 것으로 파악한다면, 이 시의 심리적 모티브도 시인 자신의 암울하고 고통스런 청춘의 기억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이 시를 앞의 시 「까마귀」와 유사한 이미지로 파악하게 될 때, 앞에서 제기했던 시의 심리적 모티브는 군국주의적인 군대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했던 짧지 않은 기간의 군인 교육과 그로 인해 받게 된 엄청난 심리적 고충과 슬픔이며, 또한 그러한 시절의 다쓰지의 방황이다. 시인의 자전적인 모습이 까마귀에 투영된 것은 두 작품이 갖는 공통점이다. 「까마귀」와 「정원」에는 까마귀를 통해 존재의 비애감이 자전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한 편의 「까마귀」를 제목으로 하는 시에는 시인의 자전적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조용한 마을길에 대나무 홈통이 가로로 걸쳐 있다/거기에 한 마리 까마귀가 앉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 속에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바라보고 내가 그 아래를 지나갈 때/어떤 미묘한 균형 위에 날개를 움츠리고 천평칭(天平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까마귀」 전문     인용 시는 잡지 『문과(文科)』(1932년 3월호)에 「주전자(湯沸かし)」 「조용한 밤(靜夜)」과 함께 발표된 작품 「까마귀(鴉)」의 전문이다. 다쓰지의 개인 시집으로 보면 『남창집』에 실려 있다.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는 한가로운 마을 풍경을 바탕으로 한 평화로움과 불안함이 혼재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나 후반부로 갈수록 불안한 심리 상태가 지배적이다. 시에 그려진 심상을 풀어헤쳐 보면, 화자는 시골길을 가다가 보게 된 풍경에서 까마귀의 존재를 포착했을 것이다. 그 까마귀는 전체 4행에서 마지막 행을 제외한 1행과 2행, 3행에서는 특별한 불안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한 마을의 평화로움에 일조하는 구체적인 조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시의 공간적 배경은 조용한 마을길이다. 까마귀란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장소에는 가로로 걸쳐져 있는 대나무 홈통이 있다. 물론 시에 제공된 환경에는 대나무 홈통을 중심으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도 있다. 당연히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바라보는” 주체는 ‘까마귀’다. 이 3행까지의 까마귀를 둘러싼 환경은 그렇게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평화로운 경치가 제공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첫 행의 “대나무 홈통”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없다 하더라도 까마귀의 착지 장소 혹은 휴식 공간으로서는 그리 불안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만일, 대나무 홈통에 물이나 까마귀의 먹이가 될 만한 것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면 그것은 까마귀에게는 목을 축일 수 있고, 약간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따뜻한 공간으로 설정하고 싶어했을 거라는 배려의 흔적도 느껴진다. 그러나 마지막 행에서는 까마귀가 대나무 홈통에서 천평칭처럼 흔들리는 존재로 묘사된다. 천평칭(天平秤)은 가운데에 세운 줏대의 가로장 양끝에 저울판이 달려있는 저울의 한 종류다. 이 저울이 미묘한 균형을 보이며 흔들린다는 것은 3행까지의 조용한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조금씩 무너지는 듯한 느낌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역시 까마귀에 대한 불안한 시각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볼 때, 읽는 이에게 까마귀가 언제 한 쪽으로 치우칠지 모르는 불안한 긴장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역시 이 작품도 화자와 까마귀를 동시에 등장시키고 있으나, 피 관찰자인 까마귀는 관찰자인 화자에 의해서 보다 근거리에서 관찰된다. 불안한 긴장이란 화자가 원거리 혹은 조금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의 까마귀보다 좀 더 자세히 봤을 때의 이미지라고 보아도 그리 틀리지 않는다. 이 시를 “시인의 지성과 감성의 훌륭한 평형 감각의 구상화(具象化)”라는 관점에서의 시각은 나름대로 좋은 해석이다. 그러나 첫 행의 인기척이 없는 조용한 마을길은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안정된 균형을 무너뜨리는 분위기에 동조하는 이미지로 그 모습이 바뀐 듯하다. 미묘한 균형은 까마귀가 날개를 움츠리면서 그 불안감이 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안한 까마귀 역시 시인 다쓰지의 모습과는 상당부분 거리를 좁힌 듯한 인상을 준다. 이 까마귀에는 시인 다쓰지의 심경이 투영된 듯한 것으로 그 이미지가 접근되어 있다. 이 시를 그렇게 보는 것은 앞에서의 분석처럼 시어에 나타나는 이미지 때문이며, 또 하나는 『남창집』에 수록된 시가 모두 시인 다쓰지의 병상에서의 작품이라는 2차 텍스트의 기록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1차 텍스트를 벗어나 2차 자료에 의존하여 시를 재단하는 방법이 시 분석에 있어서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가 모두 사행시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 시를 썼을 때의 시인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시의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정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다쓰지가 생전에 자신의 시작(詩作)에 대해서 얼마간의 자료를 남겼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보면 그것은 분명 무게중심의 한 축이 된다. 이 시는 『측량선』의 앞의 두 편의 ‘까마귀‘ 등장 시만큼은 존재의 비극 혹은 존재의 비애의 정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생에 대한 불안감은 역시 앞의 두 작품의 이미지와 유사성을 가진다. 『남창집』에 수록된 시 「까마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생활을 해야 했던 천평칭 같이 흔들리는 다쓰지의 내재적 심리상태가 형상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다쓰지의 초기 시집인 『측량선』과 『남창집』에 나타난 까마귀의 이미지는 존재의 비극 혹은 자신의 생에 대한 불안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은 다쓰지로 하여금 주지시인의 이미지 형성에 적잖은 기여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제2장. 존재의 차별화     앞에서 인용한 두 편의 「까마귀」와 ‘까마귀’가 시어로 등장하는 「정원」등 3편의 시를 살펴보았다. 시를 통해 확인한 다쓰지의 존재에 대한 사색은 그리 밝지 못하고, 비극이나 불안정한 색채를 띄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다쓰지는 자신의 후기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에 또 한 편의 「까마귀」를 제목으로 하는 시를 수록한다. 20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변이 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먼 지방의 선착장에서 나는 5년이나 살아 왔다/나는 언제나 외톨이로 쓸쓸한 창에 멍하니 기대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아아 그 오랜 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까마귀 까마귀 까마귀 저 음침한 음울한 패거리들/오늘도 생각나는 것은 놈들에 관한 것들이다/저 걸신들린 놈들이 자나깨나 아주 외진 하늘에 흐트려져/고깃배가 뜬 바다 위까지 저 놈들이 바다를 마구 휘저었다/아침놀에도 저녁놀에도/모처럼 그림물감으로 곱게 칠한/그 근처 온갖 풍경을 엉망진창으로 하고/저 녀석들은 불난 집의 도둑처럼 이리저리 소란을 피웠다/참 얼마나 포악스럽고 천박한 놈들이냐/이른 아침의 동틀 녘부터/놈들은 부지런히 먼 곳까지 나갔다/그렇게 거기 그 모래사장에서 왠지 어수선하게 썩은 머리 같은 것을/볼이 미어지게 입에 넣기도 하고 주워 담기도 하고/하품을 하거나 싸움을 하는 거야/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그렇게 도시의 어린애들이 해 질 무렵 자전거를 밟듯이/녀석들은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이며/뒤에서 뒤에서 뒤에서 바다를 건너 돌아온 것이다/그렇지만 어떻게 될까?/앞으로 5백 만년이나 분명 녀석들은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런 쓰라린 생각에서/나는 언제나 혼자서 결국 몹시도 우울해지고 만 것이다/게다가 오늘은 도쿄 긴자(銀座)의 네거리에서/다른 사람도 아닌 나는 또 저 녀석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어쩌면 쓸쓸한 회고 일 것이다/웃어 주라!/여기에서는 멋진 핸드백이 왠지 저 녀석들 흉내를 내고/이 해질 무렵의 조금 흐릿해진 바다 위를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이기 때문일 것이다. 「까마귀」 전문     작품이 실린 시집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는 그 구성면에서 크게 3부로 구성된다. 3부중의 하나인 「수광미망(水光微茫)」에서 인용 시를 찾을 수 있다. 「수광미망」은 다쓰지가 패전 후의 도쿄로 돌아와서 쓴 작품 23편을 담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전후의 모습에 대한 화자의 분노와 풍자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시도 그러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의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이 시에서 해(年)를 표시하는 숫자로 나와 있는 “5년”과 “5백만 년”에 주목해 보자. 앞의 5년은 화자가 시의 공간적 배경에서 살아온 세월을 가리킨다. 5년 동안 화자는 까마귀로 비유되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살아왔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뒤의 “5백만 년”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아야 할 무리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나타낸 숫자다. 5년과 5백년이라는 극단의 대립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이 두 개의 숫자를 통해 부정적인 인간들에 대한 혐오를 강하게 드러냈다. “모처럼 그림물감으로 곱게 칠한”을 화자의 생활에 대한 비유라고 파악하고 보면, 그와 대립되는 존재의 행동양식은 바로 “그 근처 온갖 풍경을 엉망진창으로 하고/ 불난 집의 도둑처럼 이리저리 소란을 피우는” 존재로 묘사된다. “거기 그 모래사장에서 왠지 어수선하게 썩은 머리 같은 것을/ 볼이 미어지게 입에 넣기도 하고 주워 담기도 하고/ 하품을 하거나 싸움을 하는 거야”에 이르러서는 까마귀의 행동양식과 까마귀가 살고 있는 공간 묘사가 보다 구체성을 띤다. 까마귀들에 대한 정의는 “까마귀 까마귀 까마귀(4행)”라는 반복의 효과를 통해서도 확실해진다. “음울한 패거리” “걸신들린 놈들”“포악스럽고 천박한 놈들”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도 동일한 시각이다. 경멸의 정도를 말해준다. 그런 까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1행에서 3행까지는 화자의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 “먼 나라의 선착장에서 나는 5년이나 살아 왔다/ 언제나 외톨이로 /아아 그 오랜 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의 화자는 독백의 형태로 까마귀와 차별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독백은 화자 자신과 시인의 감정적 거리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시적 화자의 비판 대상인 까마귀가 비록 의인화되었지만 부정적인 세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불난 집의 도둑처럼 이리저리 소란을 피”(11행)우는, 패전 후 사회의 혼란에 편승한 사기꾼과 모리배들을 비유한다. 이것은 다쓰지의 시가 사회의 비판과 풍자라는 성향을 마련한 결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대상에 담긴 의미의 이중성에 착안한 세태 비판이다. 그럼, 까마귀가 날개 치는 소리를 “도시의 어린애들이 해 질 무렵 자전거를 밟”(19행)는 소리로 비유한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상식에 기대어 보면 해질 무렵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놀던 어린애들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불안한 심리 상태를, 까마귀의 날개 치는 소리로 비유했다. 시인의 기교와 동시에 까마귀의 심리상태가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그러한 기교는 시의 후반부에서 또 한번 나타난다. 일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자리 잡은 도쿄 긴자(銀座). 그곳의 네 거리에서 발견한 핸드백을 통해 화자는 까마귀의 색깔을 떠올리고 까마귀의 행동을 떠올린다. 핸드백이 까마귀 흉내를 낸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핸드백이라는 대상을 통해 패전 후 날로 변해 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대상에 담긴 의미의 이중성이 새삼 확인되는 셈이다. 즉, 까마귀 본래의 이미지는 드러내지 않고, 묘사 속에 본 뜻을 내포하는 의미의 이중성이다. 알레고리의 수법이 농후한 시다. 이 시가 수작으로 평가받게 되는 이유도 알레고리와 풍자, 해학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이 속에 담겨 있는, 시작 수법의 우수성이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집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의 「까마귀」에는 화자와 대립되는 개념의 존재로 ‘까마귀’를 설정하고, 그 까마귀를 혼란한 사회 현실을 틈타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무리들로 규정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이러한 까마귀들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입장을 그려냈다. 이 작품도 다쓰지로 하여금 주지시인으로서의 이미지 형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결론 이상으로 미요시 다쓰지의 작품에서 「까마귀」 관련 시 4편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들 시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는 크게 ‘존재의 비극’과 ‘존재의 차별’이라는 이분법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먼저 본론 1장에서 다루었던 3편의 까마귀 관련 작품인 「까마귀」 「정원」 「까마귀」에 나타난 이미지는 다쓰지가 청년시절 겪어야 했던 암울한 기억과 병으로 인한 생에 대한 불안정한 모습이 까마귀를 통해 형상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측량선』의 「까마귀」는 사람에 비겨 사람과 같이 행동하는 것으로 의인화했다는 큰 특징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까마귀 자체가 곧 시인 자신의 이미지 화였다. 또한 「정원」에 나타난 까마귀도, 시인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볼 때, 분명 자신에게 닥쳐온 존재의 비극 혹은 존재의 비애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런 슬픔의 정도가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생에 대한 불안감은『남창집』의 까마귀도 동일한 선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류에 자신의 심경을 의탁해서 표현했던 것이다. 그것은 싸늘한 공기를 동반한 존재의 비극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생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인 양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시어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긴장의 효과와 기교는 이들 시가 왜 우수한 것인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본론 2장에서 다루었던 후기에 쓰여진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에서의 「까마귀」는, 시인 자신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행동양식을 보이는, 패전 후의 사회 혼란과 무질서에 편승해 갖가지 나쁜 일을 저지르는 불건전한 무리로서의 까마귀를 표현했다. 그것은 존재의 차별이었다. 따라서 이들 4편의 작품에 나타난 까마귀는 존재의 비극과 존재의 차별이라는 상이한 함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즉, 초기 시에 나타난 까마귀는 자신의 모습이었고, 후기 시에 나타난 까마귀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대립 개념으로서의 까마귀를 그 이미지로 이끌어냈다. 따라서 이들 시편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시인 다쓰지가 갖고 있는 주지시인과 서정시인이라는 양자 공유의 이미지에서 보면 주지시인으로의 이미지 형성과 연관성을 맺는 쪽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곧『측량선』(주지시+서정시) 『남창집』(주지시)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주지시)등의 세 시집의 성격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쓰지의 시 쓰기가 자신과 같이 동물과 조류 등에 의탁해서 시를 쓴 동년배 시인이나 후배 시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앞으로 시간을 갖고 연구자들의 연구를 살펴볼 일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가 프랑스 상징시의 영향을 받아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심정을 조류를 차용해 표현하며 서정시인의 이미지 외에 주지시인의 이미지 형성을 고착화했다는 것은 근대 일본의 시문학사에서 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요소다.         ■參考文獻 金埈五 『詩論』 三知院, 1982(2002 第4版). 오석윤 「三好達治의 『낙타의 혹에 올라타고』 論」『日語日文學硏究』第46輯, 韓國日語日文學會, 2003. 安西均 編 『日本の詩 三好達治』ほるぷ 出版, 1975. 安藤靖彦 編 「三好達治․立原道造」『鑑賞日本現代文學 19』 角川書店, 1982. 伊藤信吉 外 4人 『現代の抒情 現代詩篇Ⅳ』「現代詩鑑賞講座」第10卷, 角川書店, 1969. 大塚久子 「達治 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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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ってこれらの4篇の作品に現れた鴉は存在の悲劇と存在の差別という二つの意味を持つ鳥類であった。 一方,これらの詩に現れた鴉のイメージは結果的に詩人達治が持っている主知詩人と抒情詩人という兩者共有のイメージから見たら主知詩人としてのイメージの形成と關連性を結んだ方に働いたと言える. この時期に彼がフランス象徵詩の影響をうけて冷徹な理性をもとにして,自分の心を鳥類を借りて表して主知詩人としてのイメージにも大きく寄与をしたというのは日本の詩文學史で明らかに記憶すべき一つの試みで實驗と評価しなければならない。  
1267    윤동주와 당숙 윤영선 댓글:  조회:2453  추천:0  2018-10-13
[월간중앙] 서정의 시학은 치열한 저항의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했던 한때의 흐름은 무지와 오류의 소산이었다.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초상은 일제의 취조문서, 판결문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에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왼쪽이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이다.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왼쪽이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인 윤영선이다. 오른쪽은 윤영선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통로가 있다. 한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여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법당국이 한 조선 청년에게 선고한 판결문이 있다.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유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조선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3월 31일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 돌연 이상한 열풍이 불었다. 국민시인으로 정립된 윤동주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하는 조류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즉각 대세가 된 것이다. 그즈음 한 문학잡지에서 ‘윤동주 특집’을 마련했는데, 거기 글을 쓴 당대의 내로라하는 논객 10명 중 무려 8명이 그쪽이었다. “윤동주는 평생 공부만 한 학생이었는데, 언제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가!” “재판에서 불과 ‘징역 2년형’을 받았다는데, 그가 진짜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 정도로 끝났을 건가?” 이렇게 전개된 그들의 논지를 보면서 필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독립운동사를 깊이 공부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사 관계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또 우리 집안 어른인 송몽규(宋夢奎) 선생의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남)이자 평생의 동료였고, 또 같이 유학하고 있던 교토에서 같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 받고 함께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나란히 옥사한 분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를 알려면, 반드시 송몽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송몽규의 과거 경력을 알지 못하면 윤동주의 독립운동 사실을 의심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송몽규와 윤동주는 서로 매우 밀접하게 얽힌 삶을 살았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운명적 만남 1944년 3월과 4월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송몽규는 1917년에 9월에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학교 교사이던 부친 송창희 선생이 윤동주의 고모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였던 1935년 초에 용정에 있는 4년제 미션계 중등교육기관인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남경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한인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군관학교는 항일무력투쟁을 치를 한국 독립군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최초로 공식 설립된 임정 직할 군관학교였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에 의해 중국 장개석 정부가 전적인 지원을 했는데, 체제상 중국정부가 운영하는 낙양군관학교의 ‘한인반(韓人班)’이라는 형식으로 1934년 2월에 개교했다. 그러나 한인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게 된 일본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개교한 지 1년 8개월여 만에 문을 닫았다. 당시 한인군관학교에 관한 정보가 모두 일본 정보당국에 노출된 까닭에 폐교 이후 중국 각지로 흩어진 학생들이 속속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 무참한 고통을 겪었다. 송몽규도 1936년 4월 10일에 중국 제남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 공안당국은 중국에서 체포한 학생들을 모두 조선의 본적지 경찰서로 압송하여 가둬 놓고 취조했기 때문에, 북간도 명동촌 출생인 송몽규도 그해 6월 27일에 부친의 본적지인 조선의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그해 8월에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신문 받다가 9월에 웅기경찰서로 다시 보내져서 9월 14일에 석방되었다. 중국에서 일경에 체포된 이후 만 5개월여 동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일제 공안당국에 의해서 갖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그가 그 시기에 겪었던 참혹한 고통을 알려주는 증언이 있다. 같은 집에서 살았던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 권사님의이야기다. “몽규 오빠는 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후로는 가슴이 자꾸 안으로 구부러든다면서 항상 어깨를 반듯이 하여 가슴을 펴느라 신경을 썼지요. 그래서 가슴 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잘 때 베개를 베지 않고 잤어요.” 당시 송몽규가 재판을 거쳐 감옥에 가지 않고 석방된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북간도는 만주국 영토에 속했다. 따라서 법 논리상 만주국 국민인 송몽규가 중국에 가서 군관학교를 다닌 것을 일본국 법률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된 이후 그는 즉각 일본 공안당국의 ‘요시찰인(要視察人)’ 명부에 올랐고, 늘 철저하게 감시당했다. 그 시대에 ‘요시찰인’이라 하면 “말만 들어도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악명 높았던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1938년 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이하 ‘연전’)의 입학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올라갔다. 그해 2월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용정에서 각기 5년제와 4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이 이때 나란히 중학교를 졸업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송몽규는 1935년 초에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 군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된 뒤 1936년 4월에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조선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그 해 9월에 석방되어 북간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한인군관학교사건을 통해 조선인이 독자적인 무력항쟁으로 일본을 이겨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방향을 바꿔서 대일항쟁의 수단과 방법을 문화 쪽에서 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송몽규는 본래 문화 쪽의 기질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은진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8세 때, 본국 서울에서 발간되던 의 1935년도 신춘문예의 ‘콩트’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신문사 수도 적었고 신춘문예 제도의 권위가 대단했던 때라서 당선은 매우 큰 명예였다. 그런데도 그는 당선의 영광을 초개처럼 던지고 그해 초에 중국으로 가서 임정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만나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 가 올해 개봉됐다. 윤동주로 분한 강하늘이 섬세한 감성의 시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제 문화투쟁으로 방향을 바꾼 그는 자신이 진학해야 할 상급학교로 서울의 ‘연전 문과’를 선택했다. 두뇌가 매우 뛰어났던 그는 4년제 출신이 치르는 특별입학시험을 통해서 연전 문과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2년에 걸친 학업 공백을 1년 줄일 수 있게 된다. 윤동주 역시 1938년 2월에 ‘중학교 졸업생’이 되어 그해 4월 두 사람은 나란히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연전 4년의 재학기간 동안,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우 알차고 만족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들이 연전을 졸업한 날은 1941년 12월 27일, 졸업식 석상에서 송몽규는 우등상을 탔다. 본래 학제로는 1942년 3월에 졸업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감행한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기습으로 미일전쟁(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라서 ‘전시 학제 단축’이라는 명목으로 졸업 시기가 3개월 당겨졌다. 조선 천지를 뒤흔든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이 1940년 2월부터 실시되고 있었지만,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전을 졸업할 때까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를 더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위해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창씨개명’ 신고였다. 그들이 연전에 가서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결과, 이름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와 소무라무게이(宋村夢奎)로 바뀌었다. 그 무렵 윤동주는 창씨개명계를 연전에 계출하는 데 따른 격심한 고통과 고뇌를 아프게 담은 저 유명한 시 ‘참회록’(1942. 1. 24)을 썼다. 그들이 이미 졸업한 연전에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이유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일본에 건너가는 허가장에 해당하는 ‘도항증명서’ 등의 서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압박과 압력을 못 이긴 각 가문에서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식 이름을 당국에 신고한 결과, 공문서 상에서 해당 가문에 속한 사람들 전체의 공식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연전에도 창씨개명계를 계출하여 일본식 이름으로 일치시키지 않으면, 호적등본 등의 공문서와 연전 서류상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되어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목표로 삼은 대학은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이었다. 극심한 학벌 차별 사회였던 당대의 일본에서 ‘제국대학’은 최고의 권위였고, 특히 현재 수도인 도쿄에 있는 도쿄제대(東京帝大)와 과거의 수도였던 교토에 있는 교토제대는 제국대학 중의 제국대학으로서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일본의 수재들도 그 두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7, 8년에 걸친 재수까지 불사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들은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에 해당한 ‘전문학교’라서 정규 코스 출신자들의 입시에 앞서 먼저 시행되는 특별입학시험 대상인 ‘선과(選科)’ 지망생으로 입시를 치렀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일 경우, 연전에서는 ‘별과’라는 칭호로 구분했는데, 일본의 대학들에서는 ‘선과’라는 칭호를 써서 구분했다. 현재 일부 연구자들이 그 시대에 일본의 대학들에서 사용된 ‘선과’라는 칭호는 요즘의 ‘청강생’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응시 결과 송몽규는 문학부 사학과 합격, 윤동주는 불합격이었다. 그 역시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그 시대의 일본 대학 입시제도를 잘 알고 있던 문익환 목사는 “당시 연전 출신인 송몽규가 경도제대 입시에 합격한 것은 하늘의 별 따기를 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교토제대 입시에서 실패한 윤동주는 도쿄로 가서 성공회 계열의 기독교 대학인 릿쿄대학(入敎大學) 입시에 응시하여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인 ‘연희전문학교’였기 때문에 본과보다 합격이 더 어렵고 힘든 ‘선과’ 지망생으로 응시하여 합격한 것이다. 그들이 합격한 대학에 입학한 날은 송몽규가 1942년 4월 1일이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이었다. 그러나 윤동주의 릿쿄대학 시절은 한 학기로 끝났다. 2학기에는 교토에 있는 기독교 대학인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문학부로 전학했기 때문이다.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간 윤동주, 그것은 요시찰인으로서 늘 감시되고 있던 송몽규에 대한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은 일이었다. “징병제를 민족 무력 양성에 활용하자” 이 시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던 매우 특수한 비상시였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1937년 7월에 시작한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에 시작한 미일전쟁으로 장기전을 치르면서 날이 갈수록 전쟁 수행에 힘이 부쳤다. 군수물자가 너무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전투원 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했다. 그간 일본의 전체 가정에서 병사들을 뽑아 보낸 결과 가족 중에서 해외의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자나 다친 부상자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인적 피해가 막심했다. 일본정부는 전투원 절대 부족 현상을 식민지의 조선인을 징병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그간 식민지 출신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병사로 뽑지 않았는데, 이젠 워낙 다급해서 그런 문제점조차 꺼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정부는 1942년 5월부터 ‘조선인 징병제’ 실시 추진에 관한 정책 방향과 규정들을 단계적으로 발표하며 선전하다가, 1943년 3월에 드디어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1943년 8월 10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표했다. 당시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 정책을 두고 “조선인들을 자기들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매우 분노했다. 그러나 송몽규는 전혀 달랐다. 대일무력항쟁에 투신하려고 임정 군관학교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여건 미비로 중도에 실패한 경력이 있는 그는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매우 반기고 찬양했다.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새로운 무기를 갖춘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되면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하게 될 때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조선 독립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조선 독립을 실현하는 데 일대 위력이 될 것이다”라는 논리에서였다. 송몽규는 적극적으로 그런 논리를 주변에 퍼뜨렸다. 보다 많은 조선인들이 자신과 같은 관점에서 그 제도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윤동주는 그에 적극 찬동했다. 송몽규의 그런 행위는 당연히 그를 밀착 감시하고 있던 특고경찰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당시 일본 공안당국이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조선인들이 그런 식의 대응을 하려고 들 위험성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너무도 위험하고 너무도 불온한 대응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신을 가진 자들을 사회로부터 강제 격리시키기로 결정했다. 1943년 7월 10일. 교토에서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 날짜가 공표된 1943년 3월로부터 불과 4개월이 지난 그때, 조선인 징병제 실시가 시작되는 날인 1943년 8월 10일을 불과 1개월을 앞둔 그때, 일본 특고경찰은 송몽규를 체포했다. 7월 14일에는 윤동주를 비롯한 다른 관련자들도 체포되었다. 윤동주·송몽규, 독방에서 복역하다 차례로 옥사 숭실중학교 시절의 윤동주(뒷줄 오른쪽).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윤 시인의 동창생 문익환 목사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9개월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구속된 상태로 특고경찰의 취조와 검사의 신문을 받은 끝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각기 따로 재판을 받았다. 윤동주에게는 1944년 3월 31일에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이 선고되었고, 송몽규에게는 1944년 4월 13일에 미결구류일수 산입이 전혀 없는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출옥 예상일은 ‘윤동주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 1946년 4월 12일’이었다. 그들의 출옥 예상일을 전해들은 북간도 고향에서는 ‘윤동주 징역 2년 형, 송몽규 징역 2년6개월 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되어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차례로 옥사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1945년 3월 7일에 운명했다.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는 일제 강점기의 사법체계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일제 사법당국이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사건이라 하면 덮어놓고 엄청난 중형을 가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윤동주 시인이 관련으로 을 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형량을 보니 별것 아니었겠군!”하는 반응이 큰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막상 일제 재판정에서 선고된 형량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상범죄의 선고 형량이 예상 외로 가볍다. 그러나 사상 범죄라 해도 일제 공안당국이 사건을 만들어 신문을 거쳐 투옥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거나 사망자가 나오는 일이 흔했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독립운동사 관계 판결문들을 모아 놓은 을 읽어보면 놀라게 된다.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처신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던 반면, 그보다 더 많은 판결문의 주인공들이 재판정에서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부인하거나 후회하면서 선처를 바라고 있었다. 너무도 힘들었던 그 시대의 고통과 역경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윤동주에 선고된 판결문은 어떠한가. 윤동주와 관련된 일제의 공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고경찰(특고)이 그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를 정리한 ‘취조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재판한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이다. 특고의 취조문서는 이 사건을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명명했는데, 사건 개요 설명이 “중심인물인 송몽규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읽어보면 실로 눈과 마음이 모두 시원할 정도다. 그 악명 드높았던 특고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송몽규나 윤동주 모두 의연하고 당당하기 그지없다. 특고를 상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과 소신을 가감 없이 쏟아놓았다. 취조문서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사건 관련자는 모두 7명이다. 그들 중에서 1943년 12월에 교토 검사국으로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명이었다. 그러나 특고의 수사관행으로 보아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특고에 잡혀가서 크게 고생한 뒤 석방되었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보자. 1. 윤동주가 조선 독립을 원한 까닭 “…(윤동주는)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絶滅)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일본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2. 조선 독립을 위한 방법론 “조선민족의 현재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3. 현재 일본 상황에 대한 인식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이 열세한 일본의 패전(敗戰)을 몽상(夢想)하고 그 기회를 타서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妄信)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4. 조선인 징병제 실시에 관한 생각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논단(論斷)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함에 이르게 되어 장래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찬양하고…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5.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관한 인식 “조선 내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됨을 논난하고 조선어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까닭을 강조하고” 6. 일본과 조선 사이의 차별 압박 지적 “조선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내선(內鮮) 간에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한 일이라는 뜻을 역설하고” 7. 미일전쟁(=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대응자세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찰함을 요하며, 이 호기(好機)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하며” 8.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을 궤멸시키는 것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한다고 지시하고”, “조선의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해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역설하고”, “동인(장성언)의 민족의식 강화를 돕고자 자신이 소장한 을 대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도록 종용하고” 판결문에 드러난 윤동주의 모습과 자세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판결문에는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公廷=재판정)에 있어서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供述)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그가 재판정에서 판사들을 상대로도 위와 같은 발언을 했음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의 동료 송몽규의 경우 역시 윤동주와 똑같았음이 그에 대한 판결문으로 증명된다. 취조 시 발언과 재판정에서 발언 일치 윤동주가 가졌던 미일전쟁에 관한 의식과 대응자세를 당대 조선사회의 유명한 지도층 인사였던 J박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너무도 크게 대비된다. 그들이 재판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과 하루 차이였는데, J박사는 지인에게 미일해전에서 일본이 군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자신은 이미 황국신민화, …유언비어 운운”하면서 그런 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반면, 윤동주는 일본의 특고경찰과 검사와 판사들 앞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대동아전쟁(미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문학이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빛내고 있는 존재이듯,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존재는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 말의 한국독립운동사를 밝고 환하게 빛내고 있다. 송우혜 - 1947년 12월 5일 서울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 중퇴, 한국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신춘문예에 ‘성 야곱의 싸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등단 이후 꾸준히 역사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소설집으로 (1985)을 비롯, 인간의 삶과 돈의 문제를 다룬 (1990), 병자호란 당시 사대부가문 여인의 삶을 그린 (1996) 등이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완성한 은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1266    청년문사 송몽규 다시 알아보기 댓글:  조회:3617  추천:0  2018-10-12
목차 접기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윤동주와 친구들 앞줄 중앙 송몽규, 뒷줄 오른쪽 윤동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가족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는 지난한 인생살이에 기쁨과 위안을 주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 윤동주에게는 가족이자 친구로서 평생을 동행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이다. 고종사촌 사이였던 송몽규와 윤동주는 석 달 간격으로 한 집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같이 보냈고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유학 생활하던 도중 독립운동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한 달 간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윤동주는 오늘날 민족시인으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지만 그와 함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그 동안 까맣게 잊혀져 있다가 2016년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계기로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송몽규(宋夢奎)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있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한범(韓範)이다. 아버지는 교육자였던 송창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큰고모 윤신영이다. 그의 가족은 본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구한말 간도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자 할아버지 송시억이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가다가 길목에 있던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에 눌러앉아 터전을 잡았다. 연변 명동촌 송몽규의 집 그의 집안은 전래 초기였던 기독교와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몹시 진취적인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송시억은 웅상동에 북일학교를 세웠으며, 송창의의 육촌동생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미국에 유학하여 193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목사로 활동했다.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송창의는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고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강습을 받았다. 1916년 그는 주시경의 《우리말본》의 서문을 쓴 박태환을 따라 명동촌에 가서 민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약연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 김약연의 딸이자 윤동주의 어머니였던 김용 여사의 눈에 들어 윤신영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때부터 송창의는 처가에 살면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봉직했고, 일제에 의해 명동중학교가 폐교되자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1917년 9월 송몽규가 태어나고 석 달이 지난 12월 30일 윤신영의 동생 윤영석이 맏아들 윤동주를 얻었다. 그리하여 윤동주와 송몽규의 평생에 걸친 인연이 시작되었다. 송몽규는 8세 때인 1925년 4월 4일 윤동주, 문익환, 윤영선,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부터 송몽규는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등사판으로 《새명동》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엄하고 코가 커서 명동학교 생도들은 송호랑이, 콧대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윤동주,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다니다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활발하고 리더십이 뛰어나서 늘 앞장서서 친구들을 이끌었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창작 활동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고,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새긴 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은진중학 3학년 때인 1934년 12월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송몽규는 교사로 봉직하던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독립의식에 크게 감화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던 명희조 선생은 그 무렵 춘원 이광수의 계몽문학이 제시하는 사이비 이상주의에 도취된 제자들에게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역사를 보는 바른 시각과 대의를 일깨워주었다. 재기발랄했던 송몽규는 명희조 선생의 강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감에 젖었다. 그리하여 19세 때인 1935년 3월, 명희조 선생으로부터 남경에 있는 낙양군관학교에서 2기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혈혈단신 남경에 다다른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을 만나 백범 김구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30여 명의 생도들과 함께 남경의 동관두 32호에 있는 민가에서 합숙하면서 군사훈련과 중국어 등을 공부했다. 교관은 엄항섭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으로 독일 베를린대학 출신의 안공근이었다. 김구는 종종 찾아와 이들의 교육상황을 점검했다. 생도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식비 9원, 용돈 3원, 도합 12원을 지급받아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개월여 뒤 생도들은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에 있는 불교사찰 용지사로 이동하여 10월 초까지 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엄항섭이 총책임자였고, 김구의 장남으로 낙양군관학교 1기생이었던 김인이 교관으로 나섰다. 고된 훈련의 와중에도 송몽규는 생도들에게 원고를 받아 등사판으로 《신민(新民)》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제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깔려있었으므로 그는 다른 생도들처럼 왕위지, 송한범, 고문해라는 세 가지 가명으로 활동했다. 송몽규는 정열적으로 훈련에 임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함께 피땀 흘리며 훈련하던 생도들이 독립운동의 방법적 문제 때문에 점차 김구파, 김원봉파, 이청천파 등 세 갈래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분열상이 드러났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던 국민당 정부의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낙양군관학교에 대한 지원이 끊어졌다. 그 때문에 1935년 10월 초 낙양군관학교 생도들은 해산하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송몽규는 용지산에서 내려온 뒤 산동성 성도인 제남(?南)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 이웅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936년 4월 10일 제남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6월 27일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고, 8월 29일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6일 동안 구금되었다. 하지만 혐의가 중하지 않았던지 9월 14일 웅기경찰서로 복귀한 뒤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송몽규는 경찰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간도의 집으로 돌아가 그 동안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이듬해인 1937년 4월 그는 은진중학교로 복학하려 했지만 학교당국에서는 문제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복학을 불허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 집에 기숙하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때부터 와신상담,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송몽규는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했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1938년 초봄,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동반 합격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주한 그는 윤동주, 원산 출신의 수재 강처중과 함께 3층 꼭대기에 있는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에는 그들이 머물던 기숙사 창문으로 내려다본 가을날 달밤의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 소리가 날 듯하다.’ 엄혹한 일제 치하였지만 연전은 기독교계 학교였으므로 송몽규는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이미 문단에 데뷔한 바 있던 송몽규는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밤(夜)〉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는 참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휘파람 분다. 1941년 4학년이 된 송몽규는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잡지 《문우》의 편집을 맡았다. 당시 회장은 기숙사 동기였던 강처중이었다. 그해 6월 발행한 《문우》에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란 시를 게재했다. 윤동주는 여기에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했다. 《문우》는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언론사 폐간 등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 따라 본문이 일본어로 제한되었지만 시(詩)는 언어표현의 특성상 조선어 표기가 용인되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일제의 강요로 문우회가 해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처럼 부산한 시기에 《문우》가 최후의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뒤편에 실려 있는 발행 후기에는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의 고충을 설명하는 송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여름방학을 맞아 윤동주와 함께 용정 집에 들른 송몽규는 집안 어른들의 고답적 의식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졸업을 앞둔 두 사람이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 번듯한 직장을 잡고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고단한 삶에 부대끼고 있던 그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송몽규는 내심 반발했지만 곁에 있던 윤동주의 만류로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식혔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태평양전쟁의 개전으로 인해 이듬해 3월에 거행되어야 할 일정이 앞당겨진 것이다. 연전의 명예교장이었던 원한경 박사와 원일한 교수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12월 8일 하오에 체포되어 폐교가 된 감리교 신학대학에 연금되었고, 친일파인 윤치호가 교장으로 부임하여 의식을 주관했다. 졸업생은 문과 21명, 상과 50명, 이과 18명이었는데 송몽규는 졸업성적이 전체 2등이었으므로 우등상을 탔다. 한데 윤치호 교장이 부상으로 준 보따리를 펼쳐보니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자 일색이었다. 분개한 송몽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성을 내며 책을 땅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그처럼 반일의식에 투철한 송몽규였지만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이라는 난관을 만나 초지를 꺾는 아픔을 겪는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자칫 전선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집안의 설득을 받아들여 소오우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다. 그때 윤동주 역시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가 된다. 당시 두 사람은 도항증명서를 받기 위해 직접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생 명부에 수록된 이름을 새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고쳐야 했다. 윤동주는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그렇게 치욕을 감내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서양사학과에 들어갔고, 함께 응시했다가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교토에 도착한 송몽규는 명문으로 알려진 제3고등학교 재학생 고희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방학에 윤동주는 고향 용정으로 갔지만 그는 따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윤동주가 릿교대학을 나와 교토의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그렇게 해서 송몽규는 윤동주와 또 다시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면 그것은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고희욱, 윤동주, 백인준 등과 자주 만나 조선의 앞날에 대하여 토론했다. 일본경찰은 오래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 송몽규의 하숙집을 수시로 감시하면서 그와 고희욱, 윤동주와 나눈 대화내용을 엿들었고, 그들이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는 사실에 대하여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7월 10일, 일본경찰은 송몽규와 고희욱을 급거 체포하여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했다. 이어서 7월14일 하숙집에서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까지 체포했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갑작스런 조치는 그해 7월 24일로 예정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의 간도 시찰을 염두에 둔 예비검속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송몽규는 면회 온 가족들에게 곧 석방될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경찰과 검찰의 지루한 심문이 이어지면서 구금 기간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이듬해인 1944년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2월 22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심문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혐의의 대강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9년 1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가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체포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을 통해 송몽규와 윤동주의 체포와 재판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이 판결문에 씌어있는 송몽규의 혐의 내용을 살펴보면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그 시기에 당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재일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이전의 조선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라 확고한 이론 없이 감정적 폭동이라 실패한 것이라 하며, 우리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독립의식을 앙양했다. 둘째,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최근 조선에서 총독부의 압박으로 소학생, 중등학생이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어와 조선문이 멸망해가고 있으며, 만주국에서는 조선인들이 식량배급에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최근의 징병제도는 훗날 조선독립을 실현할 때 일면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송몽규는 하숙집에서 윤동준, 백인준에게 징병제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 징병제도 때문에 조선인이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까지 얻으면 장차 일본이 패전할 무렵 우수한 지도자를 앞세워 무력봉기를 결행하여 독립을 실행할 수 있으며, 독립 초기에는 군 출신의 인사를 내세워 강력한 독재를 취해야 하고, 그 시기가 올 때까지 함께 실력을 양성하자며 독립 의식의 강화를 꾀했다. 넷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태평양전쟁은 강화조약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큰데, 그 과정에서 버마, 필리핀이 독립국으로 참가할 것이니, 우리도 그때 조선독립 여론을 환기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단숨에 바라는 바 목적을 이룩해야 한다며 민족의식을 유발했다. 다섯째, 송몽규는 6월경 윤동주에게 찬드라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아직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우리도 그런 지도자를 얻기는 힘들지만 민족의식은 왕성하므로 훗날 일본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면 위대한 인물이 출현할 테니 그를 도와 궐기하자며 서로 격려했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1944년 4월 1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송몽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윤동주는 이보다 앞선 3월 13일에 역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북서쪽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고달픈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해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었던 용정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데 그 다음날인 3월 7일에 송몽규마저 만27세의 창창한 나이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친척들과 면회한 자리에서 자신이 투옥 이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는 증언을 남김으로써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당시 조카에 이어 아들의 부음까지 들은 어머니 윤신영은 주먹으로 가슴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두드리며 통곡했다. 하지만 아버지 송창의의 처신은 더욱 비장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송창의는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타고 남은 뼈를 빻는 자리에서 뼛가루가 주위에 튀자 주변의 흙을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몽규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기겠느냐.”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1945년 5월 20일 언 땅이 녹자 아버지는 애달픈 심정으로 그의 무덤 앞에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훗날 유족들은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와 학계 공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재일유학생에 대한 일제 탄압의 일환으로 검거되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송몽규와 윤동주의 죽음에 관련된 진실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송몽규의 삶은 일면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윤동주의 순수한 문학에 가려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독립에 대한 열정은 해맑은 윤동주의 시어와 함께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1265    윤동주가 떠난지 한세기가 지났음에도... 댓글:  조회:2674  추천:0  2018-10-12
1945년 2월 16일, 윤동주(尹東柱)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한 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내년 12월 30일이면 그가 지린성 명동촌(明洞村)에서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된다. 그러나 시인이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윤동주의 〈서시〉는 한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꼽히고, 저예산 영화 〈동주〉는 적은 상영관에도 불구하고 1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은 대형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4월 7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윤동주의 장조카인 윤인석(尹仁石·60)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를 만났다. 윤 교수는 아버지 윤일주 교수의 뒤를 이어 성균관대에서 2대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재분과 위원장인 윤 교수는 근대문화재의 문화재 심의가 늘어나면서 수원에서 서울로 자주 온다고 했다.      “시인 집안에서 건축학과 교수가 웬 말이냐”고 하자 “19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한 아버지가 시로 생계를 이을 수 있었겠느냐”며 “결국 아버지도 생존을 위해 건축학과(서울대)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했다.         유족의 책무    2005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 서거 60주기를 추념하는 행사가 연세대에서 열렸다. 맨 오른쪽이 윤인석 교수, 그 옆이 정창영 당시 연세대 총장. 사진=조선일보   — 영화 〈동주〉를 보니 엔딩 크레디트에 교수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더군요?      “육필원고 파일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이준익(李濬益) 감독이 저예산으로 여러 시도를 하며 시사회를 7회나 여는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유족 입장에선 시인의 명예만 먹칠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되더라도 관계없다고 생각해요. 《윤동주 평전》을 썼던 송우혜(宋友惠) 선생이 시나리오 작가가 일본어 시집을 낸다고 설정하자 펄펄 뛰는 바람에 시를 영국에서 보내 영역시집으로 내는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윤 교수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윤동주와의 관계를 물을 때,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라고 윤동주(강하늘)가 말하자, 누워 있던 아우 중에 ‘사람이 되지’라고 한 아이(윤일주)가 나의 아버지라고 말한다”라며 웃었다.      1917년 12월 윤동주는 지린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1895~1962)과 모친 김용(金龍·1891~1948) 사이의 3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 아래로 누이동생 윤혜원(尹惠媛·1924~2011), 남동생 윤일주(尹一柱·1927~1985), 윤광주(尹光柱·1933~1962)가 있다.      윤동주 시인 3형제는 모두 시인이었다. 윤동주는 이역만리에서 요절했고, 윤일주 시인은 동주 형이 못내 안타까워 시작(詩作) 활동에만 전념했다. 형과 열 살 터울인 윤일주 교수는 1955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시집 출간을 끝내 하지 않다가 아들 윤인석 교수가 부친 사후 1987년 동시집 《민들레 피리》(정음사)만 출간했다.      윤 교수는 “아버지가 김정(金正) 숭의여전 교수에게 삽화까지 부탁하는 등 시집을 완성해 놓으셨으나, ‘윤동주 동생’이란 부담으로 원고를 쥐고 계시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막내 윤광주가 시인이란 사실을 알린 사람은 그의 매형 오형범(吳瀅範·1922~2015)씨다. 윤광주가 사망한 지 40년 만에 옌지에서 《옌볜일보》와 문학지 《천지》 등에 실린 그의 시 24편을 발굴한 것이다. 윤광주는 해방정국에서 월남하지 못하고 중국 공산치하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다 31세에 요절했다. 윤 교수는 3형제의 시를 한데 모아 시집을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다.      2011년 12월 10일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가 호주 시드니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윤동주의 형제는 모두 저세상으로 갔다. 1948년 결혼한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그해 12월 월남하면서 룽징 고향집의 윤동주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철, 사진 등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 작품 대부분을 위험을 무릅쓰고 갖고 나왔다.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만 실렸으나,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숫자가 3배나 늘어 93편이 됐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으로 크게 늘었다. 이 증보판과 1999년 《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오형범 부부 덕분이다.      윤혜원 여사는 생전에 “아버지가 갖고 나가라던 오빠의 대학노트 3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했다. 윤 여사는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고 했다. 이 부부는 2003년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1917~1945)의 묘를 보수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후원하는 등 윤동주 추모사업에 생을 바쳤다.      윤인석 교수는 “고모와 고모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흠이 될까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썼다”며 “그분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결국 그런 뜻을 실천한 것”이라고 했다.         연전 후배 정병욱, 동주 아우에게 누이동생 소개    윤인석 교수가 연세대에 기증한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와 관련 자료들. 미공개 시 8편을 포함, 윤동주의 체취가 담긴 모든 육필원고가 공개됐다. 오른쪽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간행한 첫 유고시집이고, 그 옆 큰 사이즈의 시집이 1955년판 증보판이다. 사진=조선일보   — 사람들이 교수님을 통해 윤동주의 모습을 연상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고모가 생전에 ‘4형제 중 제일 못난 것 둘이 넘어왔다’고 농담을 가끔 하시면서 사회적으로 활동을 활발히 하면 큰아버지의 이미지에 누(陋)가 될 것 같다고 했어요. 저도 사진 찍히는 걸 꺼리는 것을 보니 고모와 똑같은 콤플렉스가 생겼나 봅니다.”      큰아버지 세대가 모두 작고한 지금, 윤인석 교수는 유족대표 역할을 맡고 있다. 윤 교수는 “최근 큰아버지에 대한 문학 세계와 생애 연구가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어, 유족들이 오히려 연구자분들에게 배우는 실정”이라고 했다.      — 윤동주의 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정병욱(鄭炳昱·1922~1982) 전 서울대 교수의 헌신적 노력으로 알려졌지요?      “그분은 큰아버지가 다녔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두 해 후배입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만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며 교류했어요. 기숙사를 퇴사한 후에도 두 분은 하숙을 같이 구하고 졸업할 때까지 늘 함께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시집 발간을 계획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3권을 묶어, 은사 이양하(李敭河) 선생, 룸메이트 정병욱에게 한 권씩 증정하고 한 권은 자신이 가졌다. 이양하 선생에게 증정한 것과 자신이 가졌던 것의 행방은 알 길이 없으나, 정병욱에게 증정한 것이 온전히 보관되어 오늘날 윤동주 시집의 근간이 되었다. 윤인석 교수의 말이다.      “정병욱 선생은 1943년 학병으로 끌려나가면서 윤동주 육필 자선 시집을 자신의 고향집(전남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부친의 사업차 경남 하동에서 일가가 옮겨와 생활함)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루 널을 뜯어 그 아래에 원고를 넣은 항아리를 묻고 지푸라기로 건조상태가 유지되도록 보관했습니다. 광복 후 귀국한 정병욱 선생은 이 원고를 다시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 후 1947년 2월 16일 서울 소공동 ‘플라워 회관’에서 윤동주와 한 달 후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송몽규, 두 사람을 기리는 추도회가 열렸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유고시집을 간행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유고 31편을 추려 이듬해 1월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그 후, 일반에게 조금씩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기 시작할 때 정병욱 선생은 대학입시에서 국어과목 문제 중 일부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에서 출제함으로써 대중에 윤동주의 시를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70년대에는 이 시가 드디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까지 실렸다.      — 그 후 윤동주와 정병욱은 사돈지간이 됐다지요?      “1955년 2월 증보판을 간행한 후 정병욱 선생은 외동누이(정덕희 여사)와 시인의 동생(윤일주 교수)이 혼인하도록 다리를 놓았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부부를 불러 자신이 간직하던 자선시집을 아버지께 되돌려주셨지요. 이로 인해 큰아버지가 도일 전 ‘정병욱 형에게’라고 증정사를 쓴 자선시집 원본이 유족 품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제 형제들은 이 동생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고, 저는 정병욱 선생을 큰외삼촌이라 부릅니다.”         강처중, 일본유학 시절의 詩 보관      정병욱 선생이 시집 출판 준비에 한창일 때, 윤동주의 자선시집에 실렸던 19편 외에 초판 시집에 같이 실린 12편의 시 원고를 가지고 있었던 강처중(姜處重)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강처중은 낱장의 종이에 윤동주가 도일 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팔복〉 〈위로〉 〈병원〉 〈못 자는 밤〉 〈돌아와 보는 밤〉 〈간〉 〈참회록〉과 동경의 릿쿄대학 용지에 쓴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쓰여진 시〉 〈봄〉이라는 작품을 윤일주 교수에게 전달했다.      함경도 원산의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강처중은 연희전문학교 문과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을 지냈고,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다. 그는 1947년 2월 13일자 신문에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정지용(鄭芝溶)의 작가 소개와 함께 게재함으로써 윤동주를 세상에 알렸다.      윤인석 교수는 “강처중 선생은 큰아버지의 도일 후 관련 물건들을 빠짐없이 챙겨두셨던 분”이라며 “큰아버지가 보셨던 40여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 같은 것을 갖고 계시다가 1946년 월남한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고 했다.      — 1948년에 출판된 시집에는 강처중이 발문을, 정지용은 서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1955년 증보판에는 이분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뭡니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지용은 월북하고 강처중도 《경향신문》 기자로 좌익 활동하다 처형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버지와 정병욱 선생은 1955년의 증보판 시집에서 이분들의 글을 고민 끝에 삭제하셨던 것 같습니다. 남북의 이념대립 속에서 생겨난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의 노력    여동생 윤혜원이 오형범과 결혼 직후인 1948년 윤동주 묘소를 찾은 모습. 왼쪽부터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 막냇동생 윤광주, 여동생 윤혜원, 당숙 윤영춘의 동생 윤영선, 6촌동생 윤갑주.   — 중국 룽징 본가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유품과 유고는 가져왔습니까.      “1946년 19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한 아버지는 이후 형님의 유품과 유고 수습에 몰두했습니다. 아버지는 시집 발간을 위해 고향에 남아 있는 원고 노트를 인편으로 가지고 나올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마침 갓 결혼한 고모(윤혜원)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고, 고모 내외는 기독교 탄압도 피할 겸 월남하기로 하고 봇짐 속에 원고와 사진첩을 숨겨 1947년 12월 룽징을 떠났습니다. 북한 청진과 원산에서 1년간 월남할 기회를 엿보다 1948년 12월 말에 경기도 연천을 통과해 서울로 왔습니다.”      윤혜원 내외는 북한 공안원의 단속을 피하려고 부피가 작은 원고 노트만 봇짐 속에 챙겨 넣고 부피가 큰 사진첩은 룽징으로 되돌아가는 이웃 사람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기차가 두만강을 도강하기 직전 남양 근처 산중에서 공안원의 승객 짐 검사가 벌어졌다. 놀란 이웃 사람은 화장실로 몸을 피했고, 안타깝게도 앨범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윤동주의 사진이 유독 적은 것은 앨범의 유실 때문이다.      — 윤동주의 장례는 1945년 3월 6일 룽징 중앙장로교회 문재린(文在麟) 목사의 주관으로 치러집니다. 문재린 목사는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부친이지요?      “큰아버지와 문익환 목사는 어릴 적 친구로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동창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평소 큰아버지의 편모(片貌)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덕순(張德順) 선생, 김정우 선생, 강원룡(姜元龍) 목사도 큰아버지와 동창이시고요. 유영(柳玲) 선생은 큰아버지의 연희전문 시절에 대해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동경 생활은 당시에 동경에서 유학하던 큰아버지의 당숙 윤영춘(尹永春) 선생께서 추억을 기록해 놓으신 것이 있고요.”      윤인석 교수는 “윤영춘 선생은 큰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할아버지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해 고향으로 모시고 왔다”며 “영화 〈동주〉 말미에 등장하는 것처럼, 생존해 있던 송몽규 아저씨를 만나 감옥 안에서 이름 모를 약물주사를 매일 맞고 있다는 증언을 듣고, 전쟁의 와중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자들에게 생체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고 전했다.         평전 출간 노력      윤동주의 생전 모습, 작품에 관한 기록, 재판에 관한 언급은 대체적으로 유고시집 1955년판 부록에 기록된 것과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정음사 내에 설치해 운영하던 ‘외솔회’의 계간지 《나라사랑》 1976년 6월호에 실린 글들이 있다. 재판에 관련된 자료들은 1977년·1979년·1980년에 발견됐고 그 내용이 《문학사상》 1982년 10월호에 번역 게재됐다.      — 시집 발간과 더불어 윤동주 평전 작업도 진행했나요?      “아버지는 자료와 기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군데 흩어져 있어 이들을 한데 묶고, 생전의 모습은 보충해 전기를 내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1970년대 말 《이상평전》을 엮어 내셨던 고은(高銀) 선생과 자료를 놓고 상의하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거든요.”      — 그런데 전기 작업은 왜 고은 선생께서 맡지 않으셨나요?      “아버지께서 직접 집필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셨어요. 사랑하는 형님의 일생을 다루는 일을 타인에게 맡기느니 당신 손수 챙겨서 생생하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1980년대에 들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시면서 이 일을 문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둘째아들(윤인하)에게 맡길까도 생각하셨습니다.”      윤인석 교수는 “이러던 차에 송몽규 아저씨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 선생이 평전 집필 의향을 밝혀오셨고 아버지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넘기시고 증언을 하셨다”고 했다.      — 윤일주 교수는 1985년 11월 28일에 돌아가셨고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은 1988년 10월에 나왔네요?      “생생하게 증언해 줄 분들 대부분이 세상을 뜬 가운데 이 책마저 없었다면 큰아버지에 대해 종합적으로 알아볼 자료를 찾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송우혜 선생은 간도 역사를 깊게 연구하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여서 조각처럼 흩어진 것들을 한데 묶어 방대한 작업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직원, 우지고 쓰요시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와 정병욱(오른쪽). 두 사람의 인연 덕에 오늘날 윤동주의 육필원고들이 살아남아 ‘사진판 전집’ 출간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일본의 윤동주 재판 관련 기록 발굴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1970년대 후반, 윤동주를 알고 있던 일본인이 서울 출장길에 윤일주 교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윤일주 교수는 종로 YMCA 호텔에서 그 일본인을 만났다. 우지고 쓰요시(宇治鄕毅)라는 일본 국회 도서관 직원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교류차 출장 중이었다.      공무를 마친 후, 국립중앙도서관 정병완(鄭炳浣) 열람과장에게 “시인 윤동주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개인적인 부탁을 했고, 정병완 선생(정병욱 선생의 동생)은 “내 매제가 시인의 동생이니 만나보라”고 주선했다. 우지고 선생은 당시에 한국어를 배우면서 윤동주 시를 알게 됐고,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겪다가 옥사한 것, 시인이 자신의 모교인 도시샤 대학 학생이었다는 것이 동기가 되어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호텔 방에서 우지고 선생을 만난 윤일주 교수는 ‘원수의 땅’ 일본에서 그의 시를 알고 찾아온 일본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윤일주 교수는 우지고 선생에게 일본에 있을 법한 윤동주의 유고, 유품, 관련 자료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우지고는 자료 전문가답게 윤동주와 송몽규 관련 자료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윤인석 교수의 말이다.      “그분이 틈나는 대로 관련 자료들을 수소문해 《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발행), 《사상월보》(사법성 형사국 발행) 같은 비밀문서에 수록되어 있던 큰아버지와 송몽규 아저씨 관련 재판기록을 보내주면서 사건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목 또한 ‘독립운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죠(윤동주는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에 국내에서 이러한 자료를 구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우지고 선생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묘소 찾기 작업에 나선 오무라 교수      — 1990년 한중수교가 이뤄지기 전까지 룽징의 윤동주 묘소는 방치된 겁니까.      “사실상 그렇지요. 아버지는 고향 떠나오신 후 매일 밤 고향집 뒷동산에서 뛰노는 꿈을 꾸셨다고 해요. 형님의 산소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해하셨습니다. 1984년 한 해 동안 연구차 일본 동경에 머물면서 와세다대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가 중국의 옌볜 대학에서 1년간 체재할 계획이란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버지는 간단한 약도를 그려주면서 큰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분은 옌볜 지역의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어 한국어 공부를 하셨던 분입니다.”      1985년 4월 중국의 옌볜 대학에 간 오무라 교수는 중국 내의 조선족 문학연구를 시작하면서 현지인들에게 위치를 설명하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묘소가 있는 룽징은 외국인들에게 개방된 곳이 아니었고 날씨까지 추워 추위가 누그러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윤인석 교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무덤을 찾아달라 하니, 찾으러 나선 분들도 처음엔 뜨악했던 것 같다”며 “지성으로 부탁하는 뜻을 알아차린 분들이 몇 주를 고생해 드디어 1985년 5월 14일에 온전하게 버티고 서 있는 묘비석을 발견했다”고 했다. 윤 교수는 당시 묘비석이 쓰러져 있었다는 설에 대해 “우거진 풀만 제거했을 뿐 비석은 온전히 서 있었고 오무라 선생은 그 앞에서 간단한 과일과 술로 제사를 지내고 묘지 단장을 같이 했다”고 했다.      — 윤동주 시집의 해외 번역 작업도 활발합니까.      “이부키 고(伊吹鄕) 선생의 일역 시집 《天と風と星と詩》(1984년)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됐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수필가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선생이 큰아버지의 시를 설명하는 글 속에 이부키 고 선생의 번역시 일부를 인용해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시비도 명소가 됐습니다.      “도시샤 대학 측이 캠퍼스 내에 시비를 건립할 수 있게 해줘 남북한 학생들이 결성한 ‘코리아 클럽’에서 작은 시비를 건립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고베 한신 대지진 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박희균 선생, 박세용 선생, 이우경 선생, 한석희 선생 등 시비 건립 사연을 듣고 아낌없이 지원을 해줘 기적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도 큰아버지의 묘를 찾는 것을 일본인(오무라 교수)에게 선수를 빼앗겨서 애석하다고 말씀하신 흥남철수의 영웅 고 현봉학(玄鳳學) 선생 등 많은 분께서 큰아버지의 작품세계와 유업을 기리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고오로기 형사, “기억할 수 없다”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8월 4일 잠시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앞줄 왼쪽부터 윤영선(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 송몽규(윤동주의 사촌), 김추형(윤영선의 조카사위), 뒷줄 왼쪽이 윤길현(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 윤동주의 삭발한 모습은 일본이 그해 4월 ‘학부 단발령’을 내린 결과다.   — 윤동주의 작품세계와 유업을 기리는 사업도 중요합니다만, 70년 전 이름 모를 주사로 생때같은 젊은이가 뼛가루가 돼 고향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정부가 신원(伸冤) 차원에서 의혹규명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름 모를 주사는 아직 문서로 증명되지 못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가 면회를 간 윤영춘 당숙에게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는 말로 미뤄 예방접종이 아니라 당시 규슈제대에서 전시에 필요한 ‘혈장대용 생리식염수’를 죄수들에게 주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이지요.”      — 영화 〈동주〉에는 시종일관 윤동주를 취조하는 형사 고오로기 사다오(興梠定)의 취조장면이 나옵니다. 당숙 윤영춘이 교토의 시모가모(下鴨) 경찰서로 달려가니 취조실에서 윤동주가 형사 앞에 앉아 조선말 시와 산문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원고 뭉치는 부피가 상당했다고 했는데, 고오로기 형사가 취조를 마치고 일건 서류와 함께 검찰청으로 넘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약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큰아버지는 유학 떠날 때 정병욱 선생에게 맡겼던 것과 같은 원고를 갖고 다녔던 것은 아닐까요? 강처중 선생에게 보낸 시를 필사해 놓았다거나 추가로 쓴 것이 있다면 발굴해 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는 조사 자료 전부를 후쿠오카 형무소로 보냈을 겁니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제가 1988년 유학시절 현장에 가보니 형무소는 벌써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 있던 구치소는 홀랑 불타버렸어요. 큰아버지를 화장했던 자리도 바다를 매립해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김수복(金秀福·62) 단국대 문창과 교수는 그의 책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평민사)에서 고오로기 형사를 만났던 유일한 인물 김찬정(金贊汀)씨를 소개하고 있다. 김찬정씨는 1982년 7월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경도부경찰부직원록(京都府警察部職員錄)〉을 통해 경찰부 특고과 내선계 순사부장 고오로기 사다오(당시 86세)란 이름을 확인한다. 그는 전화번호부 책을 통해 고오로기 형사의 자택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가메오카시(龜岡市) 자택으로 찾아갔다. 당시 상황을 인용한다.      〈낡은 경도 이조역(二條驛)에서 복지산선(福知山線)을 타고 오후 1시경 구강시에 도착했다. 도로에 면한 잡화점이 고오로기 사다오 순사부장의 집이었다. 큰소리로 부르니 도데라(실내복)를 입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 고오로기 씨입니까.      “그렇습니다만.”      — 실은 고오로기 씨가 경찰에 계셨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방문했습니다(한순간 노인의 빛 잃은 눈이 동요하는 듯했다).      “아, 옛날 일은 모두 잊어버려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 그렇습니까(과자꾸러미를 선물로 내밀었다).      “싫소, 싫소, 갖고 돌아가시오.”      —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취조한 학생 중에 조선인 학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 나… 생각할 수 없소.”      — 압수한 서류나 증거물은 패전 때 모두 태워버렸습니까.      “내가 구강경찰서에 있을 때 종전이 돼, 부(府)의 특고과에서 관계서류는 전부 태워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소. 구강경찰서 특고관계 서류는 내 스스로 처분해 버렸소. 그 뒤에 서류는 태우지 말라는 통고가 왔지만 이미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소.”      — 조선 학생으로부터 압수한 시나 산문을 번역시킨 듯한 기억은 없습니까.      “생각할 수 없소.”      고오로기는 조선인 학생 이야기만 나오면 “알지 못한다”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답변을 끝내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고오로기 씨의 등 뒤로 “실례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소”라는 언어의 공허함이 분노가 되어 중얼중얼 토해지고 있었다. 윤동주의 유고를 찾아내 한국 근대문학사에 찬연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려는 장대한 시도는 멋지게 헛일로 끝났다.〉         서울역의 윤동주 시(詩) 점자블록    2008년 서울 중구 초동교회 인근에서 만난 윤혜원 여사와 오형범씨 부부. 사진 왼쪽부터 윤인석 교수, 윤혜원 여사의 막내딸 오인경씨, 윤동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다고 기치로 전 NHK 프로듀서, 기자, 오형범 장로, 윤혜원 여사. 윤혜원 여사는 기자의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무엇이 됐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늘 무슨 생각에 골똘한 사람이었으니,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고 했다.   수원행 전철을 타려는 윤인석 교수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으로 향하던 그가 기자를 서울역 옛 청사 옆 골목으로 이끌었다. 롯데아울렛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자, 서울역 신청사 사이 골목이 눈 아래 드러났다. 하얀 보도블록과 검은 보도블록으로 장식된 보도를 가리키며 윤 교수가 “윤동주의 시가 점자로 새겨져 있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한화가 당시 갤러리아 콩코스 서울역점(현 롯데아울렛)을 개발하면서 윤동주의 여행 관련 시로 시각장애인용 모자이크 점자블록을 설치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 내게 사용 승낙을 받은 적이 있다”며 “지금은 입구에 안내표지도 없고, 점자 보도블록도 군데군데 깨져나갔지만 새겨진 시는 아마도 〈사랑스런 추억〉 등 3편의 시일 것 같다”고 했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히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264    청년문사 송몽규 알아보기 댓글:  조회:3524  추천:0  2018-10-12
        1. 소개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 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조선족 자치구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운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진다는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편집 2. 생애      편집 2.1. 출생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기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석 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다섯 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편집 2.2. 학업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목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1929년 봄, 그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썻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편집 2.3. 독립군 투신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 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제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북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경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경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편집 2.4. 학업 재개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교에 들어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2]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 출처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에서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 까지, 도지샤 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편집 2.5. 체포와 사망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의문사에는 생체실험 의혹이 강하게 재기되고 있다.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썻다.   편집 3. 사후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편집 4. 송몽규 전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에 문우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3]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편집 5. 대중문화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윤동주를 주제로한 59편의 시를 엮어 '윤동주의 빛'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 내에 송몽규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송몽규 이 탄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1]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서, 민족주의자였다. [2]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 [3] 아내      
1263    학생 윤동주와 유명 시인 정지용 댓글:  조회:2886  추천:0  2018-10-12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해방 후 윤동주 유고 시집의 서문을 쓴 사람은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청년 윤동주는 그를 동경했고, 죽어서는 그의 찬사를 받았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다룬 시민 아카데미 3회차 강의가 8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세종포스트빌딩 5층 청암아트홀에서 열렸다.   강연 주제는 ‘윤동주와 정지용’이다. 강연자는 이숭원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 교수는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지용 시인을 다룬 논문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6개의 상을 수상했다. 충남대, 한림대를 거쳐 서울여대까지 37년째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습작기 작품을 보면 정지용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며 “실제 윤동주 시인의 창작 노트를 통해서도 정 시인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쉽게 씌여진 시’는 정지용 시인이 경향일보 주필로 재직할 때 세상에 공개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잘 나가던 유명 시인과 학생 윤동주 시인 정지용의 모습. 윤동주 시인은 발간 이듬해인 1936년 3월 시집을 소장했다. 유품으로 남은 시집에는 정독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 등이 그대로 기록돼있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1917년 출생한 윤동주 시인과는 15년 차이다. 둘은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정 시인은 22살이었던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수학했다. 윤 시인은 도쿄의 릿쿄대에 입학해 한 학기가 지난 1942년 10월 도시샤대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했다. 지금도 도시샤대학교에는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정지용 시집은 한국 문단계의 큰 주목을 큰 받았다. 하지만 곧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시체제에 접어들었고, 조선 신문·잡지도 차례대로 폐간됐다. 정 시인은 1941년 두 번째 시집 을 출간했지만 좌익 문학인으로 찍혀 경향신문 주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경기도 녹번리에서 은거하던 정 시인은 한국전쟁 이후 1950년 9월 행방불명됐다. 한동안 월북 문인으로 규정돼 작품조차 공개되지 못했다. 이 교수는 “당대 한국 최고의 시인이 사망 원인과 시점도 모른 채 사라지게 된 것은 민족사의 비극”이라고 평했다. 유품으로 남은 윤동주 시인의 장서에도 정지용 시집이 포함돼있다. 책에는 1936년 3월 19일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친필로 쓰여있다. 윤 시인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시집 발간 이듬해가 돼서야 정 시인의 책을 샀다”며 “경제 사정도 넉넉지 못했을 것이고, 당시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한 학생들이 동맹휴업과 동맹자퇴를 하던 시기였다. 3월 말 자퇴 직전 시집을 구입해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품이었던 정지용 시집을 보관한 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 벗 강처중이다. 시집에는 밑줄, 단어 해석 등 윤 시인의 메모가 그대로 기록돼있는데, 그가 얼마나 시집을 정독했는지 알 수 있다. 당대 최고 시인과 윤동주의 만남   윤동주 시인의 유품 목록 중 하나인 정지용 시인의 시집. 종이에 친필로 날짜와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통해 생전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만남이 알려졌다. 1939년 윤동주는 북아현동에서 하숙을 했는데, 라사행 목사는 그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자택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만남의 시점과 동행인 등 약간의 픽션이 가미돼있다. 이 교수는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소설가가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정지용 자택을 생전 윤동주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당시 정 시인의 집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했다”고 했다.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 유고 시집  서문을 썼다. 1947년 12월 28일자 글이다. 당시 정 시인은 경향신문 주필, 윤 시인의 친구 강처중은 기자로 재직했다. 서문에는 윤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를 향한 찬사가 함께 드러나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일제 강점기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 습작기 작품에서 보이는 정지용의 영향     윤동주 시인은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19편의 시를 묶어  3권을 제작했다. 한 권은 자기가 소장하고, 한 권은 연희전문 스승 이양하 선생, 마지막 한 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선물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윤동주 시인의 시는 습작기인 1938년까지, 본격적인 자각을 갖고 쓴 1939년부터의 시로 나뉜다. 습작기 작품에는 정지용 시인의 영향, 본격적인 창작기 작품들은 독자적 사유에 바탕을 둔 성숙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습작 시절 정지용 시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긴 하지만 두 시인의 시상이나 주제는 확연하게 다르다”며 “정 시인이 감각적인 언어 표현에 중점을 뒀다면 윤 시인은 내적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 다수”라고 설명했다. 습작기 정 시인의 영향이 나타난 작품은 ‘모란봉에서’, ‘산림’, ‘압천’, ‘비로봉’, ‘사랑의 전당’ 등이다. 주로 시어나 표현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윤 시인은 1년이 넘는 절필기를 두 어 번 거친 뒤 1939년부터 자기만의 글쓰기에 집중했다. 첫 시집에 냈던 19편의 시가 그 때 나온 작품들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노트에 습작하면서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그대로 기록했다”며 “당시 젊은 시인들이 정 시인을 답습하는 경향을 많이 보였는데, 윤 시인은 그만큼 순정하고 정직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126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사랑스런 추억 댓글:  조회:4432  추천:0  2018-10-11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기차를 기다리는 화자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좀처럼 오지 않는 기차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화자와 대조되는 비둘기의 모습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과거의 기억에 잠기는 화자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화자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의미 있는 삶에의 갈망       ▰ 시구 풀이 ▪ 정차장 :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의 공간 ▪ 기차 :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     ▪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 기차를 기다리는 구체적 행위가 희망과 사랑이라는 추상적 세계로 나타냄 ▪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 고달프고 힘든 화자의 현재의 삶 ▪ 담배를 피웠다. : 고뇌에 찬 화자 ▪ 비둘기 : 나와 대비되는 대상으로 화자로 하여금 자아를 성찰하게 하는 대상 ▪ 옛 거리에 남은 나 : 화자가 동경하며 그리워하는 대상 (현재보다 의미 있게 지내던 과거 자신의 모습) ▪ 정차장 가차운 언덕 :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그리움이 담긴 공간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과거 자신이 변함없이 지속되기를 갈망하는 화자     ◘ 핵심정리 ▮성격 : 과거 지향적, 애상적 ▮제재 : 기차 ▮주제    ①영원한 안식처를 추구하며 기다리는 마음   ②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 이해와 감상 1   윤동주의 시에는 철저하리만큼 순수함이 묻어져 나온다. 이 시 또한 윤동주의 순수함이 여지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현재 자신의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에 회의를 느끼고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과거 회상에 잠긴다. 회상을 통해 화자는 과거 동경 유학 시절 꿈 많고 의미 있게 지내던 자신의 삶을 그려 보면서 행복해 한다. 그러나 곧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과거 자신의 모습만이라도 늘 변함없이 남아 현재 힘든 자신의 모습을 달래 주기를 갈망하며 시를 끝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순수하게, 더 의미 있게, 더 맑게 삶을 살고자 했던 시인의 삶의 태도가 또 한 번 확인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작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의 사용이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상황, 미래에 대한 예상이라는 시간성이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화자(시인)는 지금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간신한 그림자’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현재의 삶은 무의미하고 이 무의미한 삶은 미래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서성거릴’ 미래의 자화상만 예기될 뿐이다. 이런 내적 갈등 때문에 오는 ‘옛거리에 남은 나’를 자기동일성으로 그리워하는 과거지향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자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고 절규한다. 이런 자기 동일성이 ‘나다움’ 곧 화자의 개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자기 인생의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해와 감상 2   윤동주는 1942년 도일하여 동경의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그는 시적 편력 가운데에서 현실적 상황과 자아의 실상을 가장 객관적으로 파악해 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시인 윤동주의 자아에 대한 인식 과정은 그가 초인간적인 것에 의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종교적 영역으로 끝내 몰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시가 바로 '사랑스런 추억'이다.   서울의 어느 조그만 정거장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이 담긴 공간이며. 정거장 차가운 언덕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그리움이 담긴 공간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적 화자의 행위는 구체적, 개인적 세계를 추상적, 보편적 세계로 변화시켰다. 즉 기차를 기다리는 개인적 행위가 희망과 사랑이라는 추상적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   사랑스런 추억(追憶)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停車場)에서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기차(汽車)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汽車)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교외(東京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下宿房)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汽車)는 몇 번이나 무의미(無意味)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停車場)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윤동주/ 1942.5.13.     해설 : 이 시는 시인의 자아에 대한 인식 과정이 종교적 영역으로 몰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울의 어느 조그만 정거장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이 담긴 공간이며. 정거장 차가운 언덕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그리움이 담긴 공간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적 화자의 행위는 구체적, 개인적 세계를 추상적, 보편적 세계로 변화시켰다. 즉 기차를 기다리는 개인적 행위가 희망과 사랑이라는 추상적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 연의 ‘거기’는 희망과 사랑이 있는 미래로 데려가는 곳이며, 과거의 추억을 데려오는 곳인 정거장을 말한다. 미래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젊음이므로 젊음이 거기 있어야 하며, 추억을 오래 기억할 것이므로 오래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으리라. 시상의 전개 : 유추를 통한 전개(정거장→미래로 데려가고 과거를 데려오는 장소) 구성 : 1,2연- 조그만 정거장에서 기차(희망과 사랑)를 기다림          3,4연- 새롭지 않은 기차(희과 사랑이 없는)를 타고난 후 옛날을 추억함          5,6연- 무의미한 기차가 지나가는 정거장 주변에서 서성거림          7연- 오래 기다리며 남아 있을 나 주제 : 과거를 추억하며 사랑과 희망의 미래를 기다림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 새로운 삶의 희망과 의지 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봄이 오는 아침, '서울의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립니다. 여기에서 '정거장'은 새로운 삶을 꿈꾸는 공간으로서, 여기에서 '기다리는' 행위는 '희망과 사랑'의 삶을 추구하는 화자의 삶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프랫폼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 봅니다. 그림자는 '간신(艱辛)'한 모습, 즉 힘들고 고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비친 시적 화자의 그림자에서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날아갑니다. 그림자가 담배 연기를 날리듯. 때맞춰 한 떼의 비둘기가 햇빛 속을 눈부시게 날아갑니다. 비둘기들은 시적 화자가 느끼는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둘기'는 시적 화자의 현실적 삶에 대한 반성적 계기, 부끄러움을 자극하는 매개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현실에서의 고통스런 삶 속에서 어쩌면 '비둘기' 같은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회상합니다. 고향을 떠나 '동경 교외' 등의 객지를 전전하면서 살아온 지난 날의 삶을 추억합니다. 한때 시적 화자가 서 있던 '옛거리'에는 추억과 그리움, 사랑과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화자는 '옛거리에 남은 나'를 그리워합니다. 그 '옛 거리'에는 '젊음'의 순수와 희망, 열정,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 자아성찰과 부끄러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       ◈ 해석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과거의 시간     (정거장 : 희망과 기다림의 공간)                 과거의 공간(서울은 동경과 대비되는 곳으로 동경이                 타향이라면 고향으로 볼 수 있다.)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기차를 타고 가게 될 동경은 화자가 소망한 공간이었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힘겨운 화자의 삶의 모습 담배를 피웠다. 시름, 내적 갈등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비둘기는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에서 화자와 대조되는 존재로 화자는 자신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공간의 이동, 변화) (시간의 흐름)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현재시간      현재 화자의 공간-동경의 하숙방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과거의 ‘나’의 모습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고통스런, 힘겨운 ‘나’와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나’다. 현재 화자가 그리워하는 과거의 ‘나’란 결국 후자의 나를 가리킨다.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그리움의 공간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희망을 품고 있던 과거 정거장의 나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체 해설(고쌤 생각) : 위 작품에서 과거 화자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새로운 공간(여기서는 동경)을 향한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막상 그곳에서의 생활은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는다.(구체화되어 있진 않음) 결국 화자의 과거 공간과 과거 자신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보통 이 작품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하지만, 나는 그 보다 과거 꿈과 희망을 품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이 더 타당하리라 본다. 즉 작품의 제목인 사랑스런 추억에 해당하는 대상은 과거 정거장과 꿈과 희망(젊음)을 갖고 있던 ‘과거의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       1942년 5월 13일에 쓴 시다.  시인이 일본 도쿄의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한 게  그해 4월, 낯선 외지에서 학업을 시작하랴 방 구하랴 정신없었을 테다.  그렇게 ‘봄은 다 가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비로소 향수가 밀려왔을 테다.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 멀지 않은 곳에 기찻길이 있을 테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시인이 온종일 하숙방에 있었을  아마 일요일. 다다미 위에는 유리창으로 들어온 저녁 햇살이 아른거리고,  어쩌면 시인은 그 위에 잠시 누워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문득 고국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꿈 같기만 할 테다.  바로 얼마 전까지 살았던 서울이 가슴 저리게 그립다.  마침 또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실어다주는 시인의 ‘사랑스런 추억’….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은 시인이 그 전해 12월에 졸업한  연희전문(현 연세대) 근처의 신촌역일 듯하다.  시인은 곧잘 그 정거장에 가곤 했나 보다.    기다릴 누군가가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막연히 상상 속 여인을 그리는 가벼운 춘정(春情)의 발로일 수도 있다.  청춘 아닌가! 어쨌든 시인은 기차역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기차는 어쩐지 ‘희망과 사랑’을 싣고 올 것 같은 것이다.  기차는 번번이 ‘아무 새로운 소식 없이’ 지나가고, 시인을 멀리 실어다 주었단다.  이 먼 데서 시인은 그 부질없는 기다림을 아름다이 추억한다.  청춘이어서 막막한 기다림에 안절부절 목매었기에.  노동운동가 황광우의 회고록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따온 제목이다. 순탄했건 순탄치 않았건,  후회 없는 젊음을 보낸 사람들만이 이리 노래할 수 있을 테다.  12월 30일은 윤동주가 태어난 날이다.   /글 황인숙 시인         
1261    윤동주와 정병욱의 老母 댓글:  조회:3641  추천:0  2018-10-10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오롯이 품었던 곳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의 정병욱 생가. 일제강점기와 광복으로 이어진 혼란기에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이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2년 선배인 윤동주에게 받은 원고를 이 고향집에 맡겼다.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왼쪽)와 권영민 교수. 광양=황인찬 기자      《 매년 봄이 되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 일대. 남해와 맞닿은 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엔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인연이 깃든 정병욱의 생가가 남아 있다. 윤동주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비밀을 품은 집이다. 시간을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으로 돌려본다. 》  1940년 봄. 열여덟의 정병욱이 연희전문(현 연세대) 문과에 입학한 뒤 가장 먼저 친해진 선배가 윤동주였다. 신문 학생란에 실린 정병욱의 글을 보고 윤동주가 먼저 정병욱을 찾았다. 윤동주는 정병욱의 학교 2년 선배였다. 멀리 북간도 용정 땅에서 온 윤동주와 전남 광양에서 온 정병욱, 두 문청(文靑)은 글을 통해 가까워졌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기숙사 생활부터 학교 공부까지 윤동주의 도움을 받아 낯선 서울 생활에 적응했다.  이듬해 봄 둘은 기숙사를 나와 종로 누상동에 하숙을 정했다. 광복 직후 활동했던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이었다. 두 사람은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는 늘 자신이 쓴 시의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 ‘간(肝)’ 같은 시들이 하숙방에서 탄생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윤동주가 2년 선배였지만 둘은 하숙방을 함께 쓰며 문학에 대해 고민하던 절친한 문우였다. 광양=황인찬 기자    두 사람의 대화는 문학과 예술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를 따라 정병욱도 일요일이면 교회당을 찾았다. 충무로 책방거리도 함께 거닐었고, 음악다방에 들렀다가 영화관을 찾기도 했다.   당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자신이 평소에 써두었던 시들을 정리해 시집을 펴낼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제강점기 상황에서의 시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우리말로 된 책자 발간이 금지됐다. 윤동주는 1941년 모두 열아홉 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해 놓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원고를 손수 제본해 총 세 권을 만든다. 이 시집의 서문을 시로 적은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서시(序詩)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입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거러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는 그중 한 권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썼다. 육필로 만든 단 세 권의 시집 가운데 하나를 아끼는 동생에게 준 것. 다른 한 권은 연희전문 문과 교수였던 이양하 선생께 드리면서 시집 출간을 상의했지만 무산됐다. 결국 윤동주는 남은 한 권을 지닌 채 1942년 일본으로 떠났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뒤 정병욱도 모교를 떠나야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학병에 징발되었기 때문이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자신의 책과 노트, 그리고 윤동주의 자필 시집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셔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도 곁들였다. 정병욱은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부상으로 후송돼 목숨을 건졌다.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정병욱은 경성대학(현 서울대) 국어국문과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하던 중에 끊겼던 윤동주의 소식을 들었다. 북간도 용정에서 광복과 함께 귀국한 윤동주의 가족을 통해서였다. 충격적이고 가슴 아린 소식이었다. 윤동주가 1943년 7월 교토의 도시샤대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결국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악형(惡刑)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 정병욱은 윤동주가 생전에 건네주었던 시집 원고를 떠올렸다.   정병욱은 고향 집을 찾았다. 광복 후 어수선한 서울을 떠나 오랜만에 찾은 귀향길이었다. 고향집은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에 있는 점포형 주택. 그의 부친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향리의 청년 교육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정병욱은 집에 들어서자 바로 어머니에게 전에 맡겼던 책과 노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었다. “잘 간수했으니 걱정 마라”고 말한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싸 놓은 책과 노트를 꺼내왔다. 보자기를 푼 정병욱은 자신의 책과 노트 사이에 있는 윤동주의 시 원고를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는 혹 남들 눈에 띌까, 이들 자료를 양조장 큰 독 안에 감추었다가 지금껏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해 왔다고 전했다.  정병욱은 서울로 올라오자 곧바로 시집 원고를 윤동주의 가족에게 보였고, 이 원고와 함께 윤동주의 시 작품들을 조사하여 시집 발간 작업을 서둘렀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마침내 나오게 된다.  도시샤대 영문과 선배였던 시인 정지용은 이 시집에 이런 글을 붙였다. ‘청년 윤동주는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지난달 말 망덕포구에 있는 정병욱의 생가(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23)를 찾았다. 1925년 건축된 일본식 목조건물인 이 집은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기려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집은 원래 건평만 264m²(약 80평)였지만 지금은 반파돼 105m²(약 32평·방 5칸)의 한 건물만 남았다. 생가 옆에서 횟집을 하는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57)가 현재 소유주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을까. 날 좋은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단다. 다만 이들을 맞을 안내자도, 변변한 공중화장실조차 없다는 게 아쉽다고 박 씨는 전했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 표지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드림)’이라고 적었다. 권영민 교수 제공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정신과 그 맑은 영혼을 가슴 깊이 간직하기 위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를 한자로 바꾼 ‘백영(白影)’을 아호로 삼았다. 두 사람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말을 듣고 원고를 고이고이 간직했던 노모(老母)의 자상함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눈을 돌려 바라본 섬진강의 물결은 이날도 말없이 평안하고 푸르렀다.   ==========================///
1260    윤동주 더 다시 알아보기... 댓글:  조회:3615  추천:0  2018-10-10
    윤동주 시인 생몰 1917년 12월 30일 (중국 만저우리) ~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 가족 동생 윤혜원, 동생 윤일주 학력 연희전문학교 데뷔 1936년 가톨릭소년지 동시 '병아리' 발표 수상 1990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외 1건                    尹東柱 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後記                                                   정병욱鄭炳昱(1922~?) 국문학자. 수필가                                                                   경남 하동 출생. 연희전문을 거쳐 서울대 국문과 졸업    東柱 兄이 악착스러운 원수의 형벌에 못 견디어 차디찬 돌마루 바닥에서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숨을 거둔 지 벌써 10년이 된다. 이 10년 동안 우리의 뼈를 저리게 하는 그의 詩는 조국의 문학사를 고치게 하였고, 조국의 문학을 세계적인 물줄기 속으로 이끌어 넣는 데 자랑스러운 힘이 되었다. 독재와 억압의 도가니 속에서 가냘픈 육신에 의지한 항거의 정신 아니, 인간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의 권리이며 재산인 자유를 지키고자 죽음을 걸고 싸운 레지스탕스의 문학이 어찌 유럽의 지성인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일 수 있었으랴.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숨 막히는 현실 가운데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東柱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詩人이었기에 ‘詩人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지어야’ 했다. 아니, ‘한 줄 시를 적는다’기보다 뼈를 꺾어 골수에서 솟아나는 수장髓漿으로 눈물 없는 통곡을 종이에 올린 그의 시는 진정 ‘슬픈 족속族屬’의 혈서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동주의 시혼은 ‘파아란 하늘’에서 독재와 억압의 거센 ‘바람에 스치우’며 조국과 자유를 밤새워 지키는 ‘별’을 노래하였다. ‘어느 욕된 왕조의 유물’인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으면서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기다리던 그는 드디어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뒤를 따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ʻ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스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ʼ기를 각오한 그는 ʻ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ʼ의 날에 ʻ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ʼ를 남기고 ‘진정한 고향’을 찾아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생존ʼ하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저주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밤’과 ‘어둠’과 ‘타협ʼ과 ‘굴복’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또한 그가 그렇게 기다리고 꼭 오리라고 굳게 믿던 ‘아침’과 ‘봄’을 소경처럼 덮어놓고 믿는 범용한 시인은 아니었다. 동주의 민첩한 감각과 투명한 예지는 우리로 하여금 일찍이 우리 겨레가 가져보지 못했던 놀라운 靈感의 시인을 얻게 하였다. 보라, 다음에 드는 이 무서운 예언을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내몰아 동켠으로 훤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 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 길에서 주저하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이냐. 天性을 시인으로 태어난 그는 ‘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느님의 말씀’을 정녕 들을 수 있었던가 보다.  다가오는 새 시대를 믿고 앞날의 역사를 내다보는 靈感의 詩人 尹東柱, 모든 시인들이 붓을 꺾고 문학을 포기하며 현실과 담을 쌓아 헛된 한숨만 뿜고 있을 때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오직 혼자서 꾸준히 ‘주어진 길을 걸어 온ʼ 외로웠던 시인 윤동주, 조국을 팔아 영예와 지위를 사고, 자유를 바꾸어 굴욕과 비굴을 얻어 날뛰는 반역자들이 구더기처럼 들끓는 시궁창 속에 오직 한 마리 빛나는 은어인 양 청신하였던 시인 윤동주, 급기야는 조국과 자유와 문학을 위하여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며 원수의 땅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殉節의 시인 윤동주. 이리하여 그는 드디어 원수의 발굽에 짓밟혔던 일제 말기의 조국의 문학사를 빛나게 하는 역사적 시인으로서 움직이지 못할 자리를 잡게 되었고 독재와 억압의 횡포한 폭력에 끝까지 항거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운 온 세계의 레지스탕스의 대열 가운데에 조국의 문학을 어엿이 끼울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였다.   슬프오이다. 尹東柱 兄. 형의 노래 마디마디 즐겨 외우던 ‘새로운 아침’은 형이 그 쑥스러운 세상을 등지고 떠난 지 반년 뒤에 찾아 왔고, 형의 ‘별’에 봄은 열 번이나 바뀌어졌건만, 슬픈 조국의 현실은 형의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게 하였을 뿐, ‘새로운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자’던 친구들을 뿔뿔이 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형의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는 자랑처럼 풀이 무성’하였고, 형의 노래는 이 겨레의 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 바 되었습니다. 조국과 자유를 죽음으로 지키던 형의 숭고한 정신은 겨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뼈에 깊이 사무쳤삽고 조국과 자유와 문학의 이름으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빛나오리니 바라옵기는 東柱 兄, 길이 명복하소서. 분향焚香.                        1955년 2월 15일 正音社에서 발행한 시집 말미에 게재됨.    尹東柱(1917~1945) 시인. 아명兒名 해환海煥  북간도北間島 출생. 연희 전문 졸업(1941) 및 일본 도오지샤 同志社대학 영문과 수학(1943). 중학 재학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少年≫에 동시 등을 발표했으나 정식으로 문단활동을 한 적은 없다. 1944년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옥사하였다. 그 뒤 곧 고종 사촌인 宋夢奎도 옥사했다. 1946년 유고시遺稿詩인 가 경향신문에 처음 발표되었고,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간행되었다.  그의 작품 경향은 고도의 메타포(은유)와 시적 기교로 내면적 인간의 자아성찰과 시대와의 비극적 대결을 통한 비극적 인식 속에서의 자아 윤리적 완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등을 들 수 있다.       ⌜시 감상평⌟ 2014년 9월 25일 목요일     ‘영원히 불리어질 별의 노래...’ - 윤동주 시집 을 읽고   이수진     영혼이 맑아 그 맑음이 겉으로 배어나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시인 윤동주. 윤동주는 연희 전문 졸업을 앞두고 졸업 기념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내기 위해 그 동안 쓴 19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해 세 부를 시집으로 만들었다. 1부는 자기가 갖고, 1부는 연희전문 이양하 선생님께, 그리고 1부는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이것이 민족 시인 윤동주가 살아생전 가져 본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다. 이양하 선생님과 자신이 가졌던 시집은 없어지고 후배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 다행히 남아 1948년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출판되었다. 원래는 시집 제목을 일제 치하의 아픈 우리 민족을 어루만져 주면 좋겠다는 뜻에서 ‘병원’이라고 지으려 했다가 고통 받는 우리 민족을 병원에 가두는 것보다 우리 땅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보며 아픈 마음을 달래고 위로받는 게 좋을 것 같아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런 그의 염원이 담겨서 일까...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가슴이 답답하거나 먹먹할 때 나의 앞날이 어둡게 느껴질 때 그의 시집을 펼친다. 그의 시는 하늘처럼 푸르고 바람처럼 우리 마음을 스치며 별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그가 하늘과 바람과 별을 이토록 아름답게 노래했기에 우리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지만 더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시에 붙들어 둘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 하지는 못할 것이므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아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전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략)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일부   그는 이미 자신의 슬픈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문학의 길, 문학을 통해 싹튼 민족의식, 창씨개명을 해서라도 배워서 민족을 구할 힘을 기르고자 했던 그는 이렇게 먼저 그리운 이름들을 별 하나 하나에 그려보며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도 별처럼 반짝이게 되기를, 풀처럼 무성해지기를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흙으로 덮어버린 이름 무덤은 그의 뼈가 묻힌 무덤이 되고 그 이름은 ‘시인’으로 되살아나 무성하게 불리워지고 있다. 그의 동시를 비롯한 여러 시들이 동요로 가요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와 후손들의 복이라 하겠다.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 건조한 학과로/ 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부르고 싶다. - 전문   윤동주는 신사 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 교장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자퇴를 한다. 하지만 자퇴 후 고향 용정에 돌아온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친일 학교인 광명학원에 다시 편입을 한다. 신사 참배에 항의하며 자퇴를 했는데 다시 친일 학교에 편입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순’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모순’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해서인가. 알고도 무시하는 썩은 양심 때문인가. 뿐만 아니라 그의 시 , ,  등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시들이다. 옮기고 싶은 시가 너무나 많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윤동주 시집의 제목이 될 뻔 했던 ‘병원’이라는 시와 내가 닮고 싶은 시‘위로’를 적어 본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전문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 //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느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전문     ****************************************************************************       **********************************************************************                   시인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삶과 문학적 공로                                   -육필원고 가져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申  吉  雨               1. 윤동주 육필시와 윤혜원 부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2012년 봄에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와 장남 철주 등 2남 2녀를 두었다. 윤 동주의 형  제자매로 유일한 혈육이 떠난 것이다.                  가장 선호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     윤동주 유고를 가져온 윤혜원과 오형범 여동생 부부.     우리는 이들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들이 친남매라서가 아니다. 100여 편이나 되는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고, 그 다량의 원본 원고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동생 부부의 노력과 활동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가 만주 용정(龍井)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오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가지고 월남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육필원고 영인본과 시집 증보판도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여동생 부부로서보다도 90평생을 오로지 윤동주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두 분의 한결같은 삶과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도 오늘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에는 모두 31편의 시가 실렸을 뿐이다.  친구였던 정병욱 교수가 보관한 유고 19편에 강처중 등에게 보내서 보관된 12편을 골라 도합 31편을 묶어서,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발행한 시집에는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포함하여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의 3판에는 다시 23편을 추가하여 모두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들과 1999년에 민음사에서 발간한《윤동주 자필시고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월남하면서 서울로 가지고 온 자료들 덕택이었다.     따라서, 윤동주는 위대한 시인으로, 여동생 부부는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사람으로 각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1999년에 을 제정하여, 2000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연변에서 발행되고 있는 초중용과 고중용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 윤동주를 기리기보다 윤동주 같은 훌륭한 문인들을 일찍 발굴하여 육성하자는 뜻이 더 많은 강하게 실린 사업이다.     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학교가 해마다 수상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 정도로 국내 문화관광과 교육 활동을 맡아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나아가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되었다.     그리고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이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박사가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했다.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2003년 봄에 80세 노인으로 2개월여에 걸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개수했다. 사방 4m 위치에다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우고, 그 안을 잔디로 심어 네모진 봉분 모습으로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그대로 세웠다. 상석은 새로 오석 하나로 만들어 설치했다. 묘의 왼쪽 앞에다 따로 개수비를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의 묘소도 윤동주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했다. 묘비와 상석은 예전 그대로 설치했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윤혜원은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8년에 오형범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함께 북한을 거쳐 서울로 월남했다. 1948년은 조부가 9월 4일에 작고하고, 모친도 9월 26일에 별세한 해였다. 이때 부부는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등을 가지고 왔다. 윤혜원 부부는 1970년 10월 15일 윤동주 25주기를 맞아, 고인의 친필 유고와 유품 전시회를 국립도서관에서 1주일 동안 개최한 바도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삶을 산 윤혜원이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이에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하여 그들의 문학사적 사회적 기여와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2. 윤혜원의 가족과 생애       윤혜원(尹惠媛)은 파평 윤씨로 1923년 0월 0일에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증조부 윤재옥(尹在玉)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종성(鐘城)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86년에 4남1녀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 자동(子洞,紫洞)으로 이주해왔고,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들 일가는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소지주로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과 일본에 잠시 유학했던 지식인으로 명동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광명중학의 윤동주 학적부 아버지의 직업란에는 ‘상업(포목상)’이라 되어 있다. 어머니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규암(圭岩) 김약연(金躍淵)의 누이동생이다. 형제자매는 3남1녀인데, 윤혜원 여사는 외동딸이었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6살 위인 오빠이고, 남동생으로 윤일주(尹一柱, 1927~1985)와 윤광주(尹光柱, 1933~1962)가 있다.    윤일주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냈는데, 젊어서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하여 발표를 않았는데, 간경화증으로 작고한 뒤에 아들 윤인석(尹仁錫, 성균관대) 교수가《민들레 피리》로 묶어 1987년 5월 30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를 설계했다.     윤광주는 신체가 허약했으나 30세에 폐결핵으로 용정에서 작고하였는데, 시인으로 활동하여 시 3편(「다시 만나자 고향아」「고원의 새봄」「아침 합창단」)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30주년기념 시선집(1969)에 수록되었다. 발표된 24편의 시를 수집하여 연변일보 등에 게재되기도 했는데, 시인 심연수(沈連洙)의 남동생과 문학친구로 지냈다.     출생지 명동촌은 윤동주의 큰외숙인 김약연(1868~1942) 목사가 1899년에 종성에서 가솔을 이끌고 이주해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한 곳이다. 그는 1901년 4월에 명동에 서당 규암재(圭岩齋)를 차리고, 뒤에 명동서숙(明東書塾), 명동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교장을 지냈고,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윤혜원은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는데,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했다.  오형범은 윤동주와는 면식도 없었고, 사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을 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알려진 뒤에야 알았다고 하였다.     부부는 1948년 함경북도 성진을 거쳐 함경남도 원산으로 왔다가, 12월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가져왔다. 대부분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그때, 사진 봉투는 원산에서 월남하고자 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용정으로 되돌아가는 친척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가 열차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사진들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요한 사진 몇 장은 지니고 월남할 것을… 하며 필자에게도 몇 번이나 아쉬워함을 말했었다. 윤동주의 사진들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 뒤에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에는 필리핀으로 가서 목재 사업을 하였다.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다가, 윤 여사는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3. 윤동주 묘소의 개수와 관리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그 주변 묘들도 배려하고, 가까이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도 똑같이 보살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까 감옥에서 죽었다. 만 27년 1개월 16일의 삶이다. 묘소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용정시의 동북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설치되었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세로 검정 글씨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화강암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세웠다.                                                               2003년 6월 28일 필자가 용정의 숙소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몇 가지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 내용들은 그 뒤 이들의 부탁을 받고,〈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로, 2004년 12월 1일에 발간한 윤동주 60주년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 서울 문학의집에서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주최로 연 행사에서 발표했다. 그 중에 묘비에 관련된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윤동주의 묘비 전면 표제는 “詩人尹東柱之墓”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詩人”이라 했을까? 사실 묘비를 세운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창작일자로 가장 빠른 시는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 제15호에 게재된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11월호에 발표되고, 이어서「빗자루」(12월),「오줌싸개지도」(1937.1.),「무얼 먹고 사나」(37.3.), 「거짓부리」(37.10.)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리고, 이어서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같은 난에 게재되었다. 동시「산울림」은 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 발행의 6월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실리고, 「자화상」도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3월 13일에는 「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에 「소년」이 실렸다.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정지용이 게재한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묘비에 “시인 윤동주”라 한 것은 의문이다.     그런데, “詩人”이라고 붙인 사람은 조부와 부친이었다고 여동생 부부이 증언했다. 그 근거는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3벌을 만든 육필원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스승인 이양하 교수가 출판은 아직 때가 아니라 했던 그 시집이다. 출판은 되지 않았으나 시집은 이미 완성한 것이었고, 그 육필시집을 보았기 때문에 ‘시인’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가족이 세운 묘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물론 윤동주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한 첫 유고시집부터이다.     또 하나, 묘비에는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나온다. 어째서 연호가 아닌 서기를 썼을까? 윤동주는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다들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비문은 은사인 김석관 선생이 지어서 썼고, 묘비는 가족들이 세웠다. 그러므로, 연호 대신 서기를 쓴 것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인데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는가? 그래서 서양에서 두루 쓰고 있는 서기를 쓴 것이다.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도, 윤동주의 스승으로서도 그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만주국)의 연호는 쓰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윤동주의 가족은 일찍부터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서기가 어렵지 않게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묘소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하였다.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현봉학은 1984년 봄 재미동포인 신태민(전 경향신문 부사장) 댁에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그해 여름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 연변을 방문하여, 여러 유지와 주정부에게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며 그 묘소와 유적들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윤동주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내년 재방문 때에는 꼭 묘소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다음해 7월에 두 번째로 방문하여, 용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이사장, 용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연변대학 농학원 김동식 교수 등으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안내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폭우로 버스는 동산 묘지 언덕의 진흙땅에 빠지고, 걸어서 올라갈 수도 없어서 단념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윤동주 묘는 1985년 5월 14일에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찾아냈다.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윤일주 교수가 다음해에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된 오무라 교수를 만나 윤동주 묘소 사진을 주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오무라 교수가 1985년 4월 12일에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연변대학의 권철, 이산해 교수와 용정중학교의 한생철 선생의 도움으로 동산에 있는 묘지를 찾아냈다. 묘는 사진으로 찾아냈고, 묘비의 비문으로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그 뒤 용정중학에서 학적부을 발견하고, 송몽규 무덤, 윤동주 생가터, 영동교회터 등을 더 찾아냈다.       윤동주 묘소의 2차 개수는 윤혜원 부부가 2개월 정도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작업하여 2003년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웠다. 그리고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네모진 모습으로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세웠다. 전의 오  석판 상석을 치우고, 새로 오석 하나로 된 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크기이다. 묘의 왼쪽 앞에 따로 가로 60㎝, 높이 40㎝의 개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의 묘소도 윤동주의 묘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해 놓았다. 다만 개수비가 없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강덕(康德) 12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운 묘비와 1991년 7월에 용정중학동창회에서 수선했다고 새긴 상석도 그대로이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소 앞에는,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대리석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르고 그 안에다 잔디를 심어 참배하기에 좋게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2003년 6월 6일 연길 문인들과 함께 묘소를 방문했을 때 노부부가 인부들을 데리고 개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뜻밖의 만남을 반기고, 우리가 비탈진 자리에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느껴서 계획에도 없는 계절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웃으면서, “보태 드린 것 없이 한 몫 했네요”라고 하자, 오형범 장로가 “윤동주는 29살 젊은이로 죽었는데 환갑을 지낸 분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니 민망했었지요” 하고 답변했다. 참배자를 위한 배려겠지만, 내 손을 꼬옥 잡아주던 부부의 손이 그냥 따스하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80세 늙은 동생이 오빠에게 마지막 정성을 드리는 거지요”라며 웃던 그때의 노부부의 순수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 윤동주 문학상 시행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을 발굴하여 격려 육성하고, 윤동주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와 목표로 만든 것이다.     제1회 윤동주 문학상은 2000년 2월 16일에 연변에서 시상을 했다. 이 문학상은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윤동주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감동하고, 1984년 봄에 맨 먼저 윤동주 묘를 찾으러 나섰던 열정이 만든 것이다.     심사대상 작품은 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하는 초중과 고중용 월간지에 1년 동안 실린 중국 조선족 중고등학교 학생작품들로, 거의 1,000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심사위원은 연변대학 교수 2명과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각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되었었다.              2003년 연변대학 수필창작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도 그 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5월 13일 연변대학의 최상철 교수, 허춘희(연변인민출판사), 김흠(연변교육출판사), 한석윤(연변작가협회)과 함께 5명이 심사했는데, 고중조와 초중조 각에 1등 1명, 2등 3명, 3등 6명씩 선정하고, 전체 대상 1명을 따로 선발했다. 시상식은 5월에 해왔는데, 조류독감으로 7월 18일 연길빈관에서 윤혜원 부부와 현봉학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윤동주 문학상은 연변인민출판사가 주관을 하는데, 시상식에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 오형법 부부는 해마다 참석해 왔고, 연변의 문인들과 각급 학교 교사, 언론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문학상은 그 후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고 있고, 수상자들을 해마다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과 문화 관광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문학상 수상자들의 초청과 국내 체재 및 안내를 맡아왔는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을 인문학부에 합격시킨 바 있다.     문학상을 창립부터 후원했던 미국의 현봉학 박사도 작고하고, 윤동주 친여동생인 윤혜원 여사도 작년 연말에 별세하였다. 형제자매로 유일한 오형범 장로도 90세를 맞는 고령이다. 그러나 윤동주 문학상은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계속될 것이며, 유능한 문인들의 배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삶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해방되기 꼭 6개월 전에 그는 만 27년 1개월 16일을 살고 갔다.     윤혜원은 1923년 출생이니 6살 아래다. 오형범은 윤동주와 면식도 없었고, 1948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에 알았단다.     그런 그가 윤동주의 자필원고와 시작 노트 등을 가지고 와서 윤동주 시집의 증보판과 육필원고본을 펴내게 하였고, 90평생을 처남 윤동주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오래 전부터 오빠 윤동주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월남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이었다. 남들을 만나도 늘 조심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하며 항상 봉사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다. 필자가 윤혜원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6월 6일 윤동주 묘소에서였다. 연변의 문인 몇몇과 용정의 윤동주 묘소에 갔다가 개수 작업을 하고 있던 두 분을 뜻밖에 만난 것이다.     이 개수가 평생에 다시는 할 수 없을 줄로 여기고 마지막 정성을 쏟는다는 말처럼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후에 연길 숙소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은 적이 있는데, 평생에 80노인이 손수 마련한 식사는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셋이 반주로 먹었던 포도주 맛은 지금도 생각나게 한다.     두 분의 요청으로 상지대 서시작품비 사진을 용정중학교 윤동주 전시실에 게시했고, 완공된 윤동주 묘소를 촬영한 사진들도 갖다 드렸다. 윤혜원 여사는 묘소 사진들을 보며 “내 남편한테 절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친오빠 윤동주를 위해 산 남편이고,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그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지원할 때 집안의 기둥으로서 의과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밥도 안 먹고 고민했는데, 결국 할아버지가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문과로 진학한 것과, 일본 동지사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할 때 이를 계기로 만나지도 않던 민단과 조총련 인사들이 화합하고, 또 동지사대학 동포동문 모임인 코리아 클럽(Kore Clup)이 창설된 것을 감격해 하며 들려주었다.     또 서시의 일본어 번역이 잘못된 소견과, 윤동주의 스크랩북 원본을 심연수의 형인 심연호 씨가 소장한 경위와, 윤동주가 사귄 여성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아리랑’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자주 불렀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나는 부부의 부탁으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몇 가지를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가 발간한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에 서울 문학의집에서 개최한 한일세미나에서 발표한 바 있다. 이 기간에 문학의집에 을 마련하여 2주 동안 전시했었다. 2005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 감옥 마당에 가서 를 갖고 세미나도 개최하였다.     에 감동을 받고, 2000년 7월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앞장서서 용정의 동산공원 묘소를 찾아내어 참배했던 윤동주, 그리고 묘소 개수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윤혜원 여동생 부부, 나와는 인연이 참 많다. 그래선지 윤혜원 여사는 마치 나의 누님 같은 느낌과 생각이 드는 분이다. 삼가 다시 명복을 빈다.     ******************************************************   서시는 따로 발표한것이 아니라 1948년 유고시집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대략적인 년도는 1938~1941사이입니다.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1259    윤동주 다시 알아보기 댓글:  조회:4248  추천:0  2018-10-10
  시인  윤동주  1917년 출생   1945년 사망      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우(親友) 정병욱(1922-1982)과 함께 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파평 윤씨. 윤동주(尹東柱)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아명 윤해환(尹海煥) 출생 1917년 12월 30일 사망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출신지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북간도 명동촌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 시) 사망지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형무소 학력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중퇴 도시샤대학 문학부 제적 가족 윤영석(父), 김용(母) 종교 개신교 (장로회)   1. 소개2. 생애 2.1. 사망과 의혹 3. 사조4. 성격과 일화5. 작품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 6. 중국의 자국 시인화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6.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 7. 기타8. 참고 항목   1. 소개[편집] 동주야.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그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습작기 작품이 된단들 그게 어떻단 말이냐 넌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의 핏줄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니까 예수보다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1987년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 한국인의 영원한 시인(詩人)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한 일제강점기의 저항(항일)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윤동주가 사망한 지 6달이 지나서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다.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윤동주의 막내 동생은 윤광주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지내다 1965년에 사망한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전설적인 문인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고작 김일성 회고록에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다' 정도로 매우 간단하게 쓰여진 게 전부이며 한국 학생들처럼 그의 시를 공부하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연구가 정체되어 있는 북한 국문학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2017년 12월 30일,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2. 생애[편집]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기독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동쪽은 조선을 의미, 즉 조선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마을의 실질적인 정신적 리더는 목사인 김약연이었는데,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외숙부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동촌 사람들은 항일 감정으로 인해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1]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2]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퇴학을 감행한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숭실학교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8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폐교한다.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기에, 윤동주의 시에는 만주, 북간도에 대한 묘사가 빈번하다. 별 헤는 밤이 대표적이다.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문과[3]로 진로를 정하고, 경성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진학을 희망한다.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문학은 민족사상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고 후배에게 이야기 할 정도. 당시에도 연희전문 문과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연희전문 문과는 일제강점기 때 국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학교이기도 했다. 이때 학과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 는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대나 법대를 원했고,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하여 매일 이 문제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와의 싸움을 말리고 고생 끝에 윤동주는 문과로 진학을 가게 된다. 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에게 동의했으나, 너무 싸움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선 모양.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에 성공, 서울에 살던 시기에 많은 명시가 쓰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 무사히 졸업하고,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흉흉해진 도쿄의 분위기로 인해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하지만 그는 함께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윤동주의 시에 담겨 있는 독립 의지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고, 여러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인이었다.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교토3고학생 고희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파악한 일본 경찰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일본 내무성 1943년 12월 특고월보, 일본 사법성 사상월보 109호, 교토지방재판소 송몽규, 윤동주 판결문에 나와 있다(번역본은 송우혜 저 '윤동주 평전'수록) 윤동주, 송몽규와 같이 투옥되었던 고희욱은 제3고등학교 재학생이었는데, 담당검사가 다름 아닌 3고의 선배. 독방에 수감되었지만 기소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 씨가 생존한 고희욱 씨를 직접 만나 관련 증언을 듣고 평전에 실었다. 수감 후 윤동주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뇌일혈로 병사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 윤동주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일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전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고 '아'라는 외마디의 소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윤동주 사후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펴낸 에 친구 강처중이 그를 생각하며 쓴 발문엔 당시 간수가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온 유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전했다고 한다. 2.1. 사망과 의혹[편집]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동주가 복역 중 생체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다. 윤동주는 실제로 복역 중에 어떠한 주사를 자주 맞았고 함께 수감된 고종사촌 형이자 친구 송몽규 또한 이 주사를 자주 맞다가 1945년 3월 7일 급사했다.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후쿠오카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어요.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여 오래 전부터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다. 그리고 1980년 5월호 현대문학지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노오 에이치씨가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 체제라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윤동주에게 주사한 물은 다름 아닌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로, 일본군이 연구하던 이런 생리식염수 연구는 이미 십 수 년 전 유럽에서 동물에게 실험하여 이미 검증이 끝난 실험이었다고... 731부대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군은 파시즘에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으므로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이 설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다.바닷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혈관으로 들어가는 점은 엄연히 다르다. 위생상 두 방법 다 안 좋긴 마찬가지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건 토하거나 나중에 배변으로 나올 수 있지만, 살균작업을 거치지 않은 무수한 세균이 득실거리는 바닷물이 영양실조 상태의 인간 혈관에 주사된다면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큐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혈장대체용 생리 식염수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수요 때문에 미국도 연구한 것인데, 다만 일본의 경우는 기술상의 문제로 해수를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다.기사 딱히 고문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유력하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당숙인 윤영춘이다.[4][5] 일각에서는 뇌일혈이라는 사인도 일제의 조작 아닌가 했지만 해수 속의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도 주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던 주사로 인해 1800여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그렇지만 윤동주가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기사 주요 골자는 생체실험에 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3. 사조[편집] 시는 15살 때부터 썼고,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를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삶에 대한 고뇌,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가 시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지만 30년대까지는 대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옛날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연희전문 시절인 1941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 서시[6], 자화상, 참회록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 더불어 그는 시를 쓴 날짜를 모두 적어둬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다.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아니고 경향일보 기자 강처중이 주도적이었다. 거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씨가 1948년 12월 고향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그 밖에도 윤동주는 2권 분량이 될 시를 남겼으나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 이걸 전해 주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분실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참조. 기사1 기사2 4. 성격과 일화[편집]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의 성격은 같은 하숙집에서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의 회고록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데, 학교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한다.   2016년 3월 6일 KBS에서 「불멸의 청년, 윤동주」가 방송되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1년 후배인 유동식 교수에 의하면 윤동주는 피부가 희고 깨끗했는데, 됨됨이 자체도 깨끗한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시도 그렇지만 윤동주 자체가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한다. 발간되자마자 직접 구입해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는 정지용 시집에는 인상 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7]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적어놓은 글귀도 있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동시를 재평가하게 되고, 자신도 동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품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보면 인상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 중간중간 자신의 감상이나 소견을 메모한 흔적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북간도에서 기독교계 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일제가 학교 담장조차 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북간도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중학생 때는 '가톨릭 소년'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는 등, 어릴 적 그가 기독교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청년기를 넘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간직했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십자가' 등 그의 시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적어도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간도에서 어릴 적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녔던 것이 추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서울 소재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에도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던 기독교계 대학이었던 릿쿄대학[8]에서 유학을 했었는데,[9]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10]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윤동주는 남이 자신의 시를 지적하는 것에 따라 고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병욱의 지적이나 조언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별 헤는 밤의 '그러나~'로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조언으로 추가된 것이다. 이 방송에서 정병욱의 회고록인 「동주 형의 기록」도 인용되는데, 그에 의하면 항상 남보다 먼저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무엇이든 예사로 넘기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길가에 난 이상한 풀에 꽃이 피어있으면 꺾어서 단춧구멍에 꽂고 다녔다고 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원고를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전했는데, 제자의 안위를 걱정해 원고 출판을 만류했다고 한다. 한글과 한국어 모두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을 사용해 한국어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윤동주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도 내포되어 있으니 스승으로서는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포기하지 못해서 용정의 아버지께 보여드렸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출판하지 못했다고. 학창시절에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돈이 많아서 유학까지 간 것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와중에도 계속 공부한 것이다.[11] 이때 윤동주는 300원(현대의 가치로 약 300만 원)이 없어 출판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동기였던 모리타 하루에 의하면 키가 크고 항상 바른 자세였으며, 자신을 '윤동주'라 소개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 동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에 의하면 동급생들에게 한국어로 아리랑을 들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윤동주에게 노래를 청하자 활짝 웃으며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약간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였는데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송몽규와 체포될 당시에는 1년 가까이 일본 경찰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년 동안 미행한 끝에 내건 죄목이 '독립운동(개정치안유지법 5조 위반)'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시는 편지와 함께 강처중에게 보내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루 밑에 묻어서 보관했고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한다. 윤동주와 그 가족들의 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헤쳐지는 바람에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5년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나선 오무라 마츠오 교수가 비석을 찾아내면서 다시 윤동주의 묘가 드러났다. 발견 당시 무덤은 봉분조차 없었고 완전히 버려져 폐허였다고 한다.   위의 방송에서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도 나왔는데,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게 될 때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야 한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한다.' 등 윤동주의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이 엿보이는 구절이 여럿 있다.   강처중에 따르면 소심하고 좀체 말이없는 성격탓에 친구가 없을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의 방엔 친구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낮이고 밤이고 친구들의 부름에, 산책권유에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도 별말없이 그저 묵묵히 걸었고 얼굴은 침울했다고 한다. 그도 가난했지만 항상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해서 항상 그의 외투와 시계는 부지런히 전당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책을 볼 때는 책에 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전시물자수탈에 의해 학교 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양과 맛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파하는 후배들에게 밥을 나눠줬다고 한다.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화 한 일이 없었다.   밤에 공부나, 시를 쓰다가 산책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후배 정병욱을 불러서 같이 산책을 갔다고. 정병욱이 5살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반말을 전혀 하지 않고 '정 형' 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자신의 친필 원고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길 때, 표지에 '정병욱 형 앞'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12]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미남이기에[13], 일본유학 당시 여러 일본 여인네들을 울렸다는 도시전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인지 백석과 임화, 황순원과 함께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자주 관심을 받는 시인이다. 윤동주를 회고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中)     5. 작품[편집]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14] 서시(序詩)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15] 참회록 간 황혼이 바다가 되어 국어영역에서 꽤 자주 나온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많고, 주제의식 또한 분명한 데다[16], 194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이육사의 시보다는 은유의 난이도가 낮고, 이상처럼 시에 어려운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기에 수험생들에게 사랑받는 작가.[17] 시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출제위원들도 잘 출제하는 듯. 다만 자주 나오는 만큼 내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지만, 친일 행적이 없는 작가이기에[18][19] 유난히 출제위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2011년 수능에서도 그의 시 이 또 출제되면서 모든 장르의 작가를 통틀어 수능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가 되었다. 또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20] 시인 백석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듯.[21]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편집] [22], 김소월의 , 필자불명의 [23] 등 특히 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 '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심지어, 잘못 알려진 시를 부산일보에서 확인도 안하고 기사에 실었다.#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바로잡는 기사도 있는데, 윤동주 作이라고 아는 시들과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일.# 6. ...(참고하기)[편집]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24] 그러다 오오무라 일본인 교수가 마침 중국에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행히 윤동주 묘소가 찍힌 사진을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동생 윤형주가 재종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25]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다.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중국의 관련 기사. 中 동북공정이 덧칠한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 대문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으로 국적 바꿔 / 대표작 '서시'도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 설치 6.1. ...(참고하기)[편집]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은 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다.[26] 재만 조선인들의 조선족이라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대장정 이전의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국, 즉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다. 따라서 윤동주는 조선 출신 재만 조선인의 후예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상단에서 서술한 중국측의 공작과 같이 중국 국적을 소유한 "조선족"이 아니다. 윤재옥은 고종 즉위 22년인 1886년 북간도로 이주했고 그의 증손 윤동주는 1917년에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했다. 윤동주는 그렇다면 한국인인가?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며.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개념 외에 국가로서의 근대 한국(韓國) 개념은 개화기인 1897년 8월 17일 광무 건원 대한제국[27] 시기부터 문헌상 실질상 양면 모두에서 존재하였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 조선인으로 윤동주 생전에 한국의 개념이 부재했기에 윤동주는 한국인이 아니고 되려 현대에 일컬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또한 현재 조선족은 남북한의 국적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시문학의 현대 연구에서 만주, 중국지역 대비 재일 조선인 측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례가 훨씬 많은 원인 중 하나다.[28] 6.2. ...(참고하기)[편집] 위와같은 기념이나 추모행태를 동북공정같은걸로 생각해서 윤동주를 중국인화하려 한다며 중국 정부를 성토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중앙정부는 위와 같은 일개 소수민족 시인에 아무 관심 없다. 이렇게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 하려는 인물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사들이다. 한국인 입장에서야 중국 조선족들이 "민족공동의 시인"으로서 접근해주길 바라겠지만, 민족주의의 확산을 강력히 우려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29] 조선족들의 입장도 사실 이해할 만한데, 20세기 초반에야 형성된 중국 조선족은 대표적인 문학이나 시인이 드물기에, 윤동주야 말로 자기 고장 출신의 거의 유일한 네임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동주를 조선족 차원이 아니라 남북한을 아우르는 전민족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의 어그로를 끌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 당국에 의해 이런 "중국조선족" 출신 민족시인로서의 추모마저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뿐. 사실 이런 문제는 천년이상 한반도에 자리잡고 단일민족으로 정체성을 확립해온 우리에겐 생소해도 유럽엔 굉장히 흔하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독일과 폴란드가 자국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쓴 유대계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 작가로 봐야하는지 체코 작가로 봐야하는지 논란이 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작가라고 꿋꿋하게 우기고 있다. 7. 기타[편집] 2010년 12월 30일, 구글에서 그의 탄생 93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구글 두들 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1980년대에 TV문학관 특선으로 저항시인 3부작이[30] 방영되었는데, 윤동주 편에서 송승환이 열연했다. 2011년 MBC스페셜에서 윤동주를 기념하는 일본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2014년 최근에는 EBS [31]에 그의 삶이 총 6부작으로 그려졌다. 이 라디오 드라마는 윤동주 역 성우의 윤동주의 실제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목소리 연기로, 윤동주의 팬들이라면 감정이입을 못하고 이따금 폭소를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마지막 6부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추가로, 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그 책을 많이 참고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ebs 라디오 인물열전 1~6부작 숭실중학 재학 시절에 찍은 사진 중에 앞에는 정일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 뒷줄의 가운데에 문익환 목사[32]가 있고, 그 오른쪽에 윤동주가 서있는 사진이 있다. 문익환의 왼쪽 사람이 장준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젊은 시절의 장준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르기에 확실히 장준하가 아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코만 봐도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의 왼쪽에 서있는 분은 코가 휘어져 있는데, 젊은 시절 장준하의 코는 휘어져 있지 않다. 의 3번째 개정판을 보면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장준하 선생은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을 뿐더러, 선생의 유족들 또한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증언하셨다고 이 책의 저자 송우혜는 말한다.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준하와 윤동주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진은 정일권 항목 참조.) 또, 송우혜의 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문익환 본인이 말하길, 숭실중학에 한 학년 아래로 진급하게 된 윤동주가 평소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도 자신의 모자와 바꿔 달라고 조르기에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호떡을 실컷 얻어먹고 모자를 바꿔 쓴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일권도 숭실중학에 다녔는가하는 점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은 윤동주와 문익환이 숭실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말이다. 고로,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정일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숭실중학의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일제가 숭실중학에 압력을 행사하자 윤동주, 문익환은 자진 퇴학[33]을 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북간도 유일의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으로 진학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중학이 일본식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익환과 정일권은 이 광명중학의 동창이다. 이 광명중학을 문익환은 5학년으로 편입했고,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으니 각기 1년, 2년을 다녔고, 이때 윤동주의 성적표를 보면 일본어 성적이 제일 나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은 것은 이 광명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전에 다녔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은 민족주의계 학교로 수업을 모두 조선어로 했으니, 전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던 광명중학의 성적은 나빴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종사촌인 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갑내기 절친한 벗이자 사촌형이다.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인들 중에서도 팬이 존재하며 연구자[34]도 있다. 시 낭송회를 열기도 하는등 여러모로 팬층이 꽤 있는편. 노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년과 청년층들도 꽤 자주 보인다.[35] 2015년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완역했으며, 이에 대한 일본인 독자들의 평가는 "서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줄 몰랐지만 이 시를 익히 알고 있었다. 작가가 윤동주였나." "윤동주의 시 몇 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천재성이 있는 작가였나." 하는 극찬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윤동주 시인의 시는 전부 작가가 어휘선택을 쉽고 간결하면서도, 영혼의 울림이 있게끔 고르고 고른 시어들로 구성된 시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임을 파악 가능한 것. 대신, 이것을 한자나 어순이 비슷한 일본어로 번역할 때에는 높은 싱크로율로 일본인들도 찬양하는 명시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기타 영어나 외국어로 번역되면 무슨 학생이 쓴 시가 되어버린다는 단점이 있다.[36] 여하튼 일본인들조차 그 재능을 인정하는 천재. 위에서 언급했듯 일부 일본 교과서에도 '서시'가 실려 있다. 의 첫 대목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는 한국인을 넘어 일본인들도 울려버린 명 구절이다.   우연히 윤동주의 사진을 본 후 "이런 미남이 무슨 시를 썼나??"하면서 찾아보다 빠져들었다는 예도 보이며,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된 후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보다 충격을 받았다는 예도 있다.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며 건축사학자이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였던 윤일주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가 일본에서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에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시비에 적혀 있는 시는 서시. 그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적혀있다.[37] 이 시비를 보기 위해 다수의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교토여행 중 도시샤대학 캠퍼스를 찾기도 한다. 시비 위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놓은 한국과 관련된 물품이 놓여져 있다. 가끔씩 소주나 담배, 동전 등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약 6개월 정도 다녔던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가 성공회 미션스쿨인 관계로 성공회대학교와 자매결연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한 다리 건너 릿쿄대학 동문 등 관계자들에게 윤동주가 알려져 윤동주 추모 감사성찬례, 시 낭송회 등을 열기도 한다. 상기한 도시샤대학 시비 말고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이 배우는 '윤동주=자아성찰'의 코드는 소설가 마광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에 의해 정립되었다. 오늘날 윤동주가 국민시인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마광수. 어째 현재의 마광수에 대한 인식은 "야설이나 쓰는 노망난 할배" 정도지만(...) 모종의 사건[38]으로 체포되기 이전에는 유망한 국문학자로 기대를 받았는데 바로 이 논문 덕이다. 논문은 1986년, 200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영화)'가 2016년 2월 17일 개봉했다. 감독은 이준익. 윤동주 역에는 영화 쎄시봉에서 6촌 동생으로 출연한 배우 강하늘이 캐스팅되었다. 흑백으로 촬영되었고, 일본 형무소에서 취조받는 씬과 과거를 번갈아 가며 스토리를 이어가는 연출. 평단의 평은 전체적으로 좋다. , 등으로 유명한 이정명 소설가의 책 중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벌인 일과 간수의 죽음,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등이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간수의 죽음을 수사하는 다른 간수가 윤동주 시인과 죽은 간수, 그리고 수감자들 사이의 비밀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서브컬처계에서는 드물게 하이큐!!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했는데 니시노야 유가 치룬 기말고사 답안지에서 윤동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의 엔딩으로 교장이 윤동주의 를 낭독한다. 자막이 별헤는밤이라고 적어놨다 무한도전에서 개코, 황광희, 오혁이 윤동주 시인을 주제로 한 "당신의 밤" 노래를 제작해 불렀고, 여러 음악 차트에서 오랜 기간동안 1위를 차지했다. 윤동주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내용의 가사로 "서시", "별헤는 밤"의 가사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이 12년간의 노력끝에 2017년에 교토 우지강변에 윤동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부터 일본, 한국의 900여명의 사람들에게 모금을 받았으며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윤동주기념비건립준비"모임에서 12년간 30번 이상 본청에 요구하였으니 정말로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8. 참고 항목[편집]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한자로 일(日)자와 왈(曰)자는 표기가 비슷하다. 왈자가 가로로 긴 모양.[2] 숭실중고등학교에서는 윤동주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며 자부심을 은근 강요한다.[3] 지금의 이과-문과의 이분법이 아닌 문학과를 의미한다.[4] 한국의 시인(1912~1978), 영문학자, 중문학자이자 윤형주의 아버지. 윤동주보다 5살 많다. 외국어에 능통해 영문학과 중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윤영춘 본인도 윤동주가 체포될 시기 비슷하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아들 윤형주에 의하면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부에 다닐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지만 본인의 수감과 5촌 조카 윤동주의 옥사를 겪는 바람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이후 일본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5] 무릎팍도사 문성근편에서 문성근이 일본군 징집문제로 장준하, 윤동주, 그리고 그의 아버지 문익환의 얘기를 했다. '문익환은 신학자로 절대로 입대할 수 없다는 의지로 신학교장과 담판을 지어 전학가게 되었고, 장준하는 입대 뒤 탈영해 독립군으로 들어가려 하였고, 윤동주는 일단 입대한 뒤 일본군이 약해질 때를 틈타 내부에서 난을 일으키자 했었으나 윤동주의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생체실험을 받다 죽었다.'라고 한다.[6] '서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정본에 따르면 제목이 없다.[7] 이 당시에는 세로쓰기였다.[8] 일본성공회 소속 미션스쿨[9] 그러나 릿쿄대학은 윤동주가 처음부터 원해서 갔다기 보다는, 교토제국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진 후, 일본에서 다닐 수 있는 다른 대학을 찾던 중 차선책으로 가게된 것이다. 기독교계 대학이라는 것이 릿쿄대학을 선택할 때 고려된 한 요소가 되었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대학을 가고싶어서 릿쿄대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10]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반전(反戰)을 주장했던 기독교계 인물로서, 특히 윤동주를 만나 사제의 연을 맺던 당시가 일본정부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철저히 감시받던 때였다. 어쩌면 윤동주가 이 때부터 일본정부의 감시 하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1]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가난의 느낌이 강하다. 일제강점기는 고사하고 60~70년대의 배움에 뜻이 있어도 형편때문에 이루지 못 했던 사람들이 주위에 널렸음을 생각해보면 유학하는 부자 아들내미들보단 가난했겠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확실히 잘사는 집안이다.[12] 조선시대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 오성과 한음에서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의 풍습을 지켜왔으면 현재처럼 존칭 때문에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13] 윤동주의 실물을 본 몇 안되는 이, 즉 친구인 문익환 목사나 육촌 동생인 윤형주 씨의 증언으로는 "확실히 그 당시 한국인들 중에서도 잘생겼다." 라고 인정한다. 윤형주 씨는 본인도 1960년대 활동 당시에 미남 취급을 받았는데 그런 본인보다 더 잘생겼다고 말하는걸 보면 확실히 미남은 미남이다.윤형주 씨가 관련된 언급을 한 것은 사실이나, 윤형주는 1947년생인데 윤동주는 1945년에 옥사하였으므로 윤동주의 실물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4] 밑의 목록은 1941년에 시집에 실으려 했던 19편의 시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15] 현대의 맞춤법에 따른 표기로는 '쉽게 쓰인 시'.[16] 어느 정도냐 하면, 윤동주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물으면 무조건 '자기반성과 성찰'을 고르면 끝이다. 물론 윤동주가 지은 '오줌싸개 지도' 같은 동시 비슷한 녀석이 출제되면 그런 거 없겠지만 수능에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주제로 한 시가 출제된다.[17] 그러나 고등학교의 문턱을 넘어서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시인이기도 하다. 사실 그저 '저항의식'이라거나 '자기반성'이라고 기계적으로 외우고 있다가 전공 강의를 듣거나 시집을 사서 제대로 읽어보면 도저히 헤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시들이다. 앞서 이육사보다 난이도가 낮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니 고등학교 때 아는 시라고 훌쩍훌쩍 넘어가지 말고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보자..[18] 굳이 친일 행적으로 트집잡을 만한 것이 있다면, 창씨개명 하나 정도. 하지만 당시에 창씨개명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윤동주도 하지 않으면 일본 유학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퇴학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히라누마 도슈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시집 원고에는 언제나 윤동주로 표기했고, 외국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윤동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게다가 창씨개명 신청서를 내기 5일 전에 벌써 참회록을 써놓고 자책과 반성을 했다.[19] 그리고 창씨개명했다는 '도슈'라는 이름은 윤동주의 동주(東柱)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일 뿐이다. 창씨개명 때 이름을 아예 일본식으로 갈아엎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생각하면...[20]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은 꽤 많다. 그들의 모임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21] 백석 시인의 시집 《사슴》은 100부 한정으로 출판되었었고,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필사한 것을 소장하였다고 한다.[22] 원작은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의 작품 인 것으로 확인되었다.[23] 필자는 알 수 없지만, 안치환의 노래 의 가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고승하도 문방구 노트 표지에 인쇄된 시와 당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자퇴하려던 학생이 편지처럼 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 것. 노래가 완성된 시기가 1984년이니 꽤 오래전부터 오해가 시작된 듯하다.[24] 집안이 개신교였던 관계로 공산화된 지역에 있을 수 없어서 대부분의 친인척들이 아예 남으로 내려왔다.[25] 윤형주보다 나이가 많은 윤동주의 친척들은 이 시기에 이미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윤형주가 대표라 북간도에 갔다고 한다.[26] 때문에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재일 조선인과 다르게 대한민국과 북한 국적을 지니지 못한 상태이고 이국 국적 취득도 중국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하다.[27] 약칭 국호로써 대한제국은 대한과 한국을 동시에 사용하였다.[28] 윤동주의 창작활동은 대부분 1942년 일본 유학 이전 조선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때 이루어졌다.[29]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국은 민주국가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30] 하나는 백윤식이 열연한 이상화 편, 다른 하나는 김흥기가 열연한 이육사 편이다. 이상화 편에서는 미니어처로 관동대지진이 재현되었다.[31] 회당 10분짜리 음성 드라마[32] 문성근의 부친으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은진중학-숭실중학-광명중학을 함께 다닌 친우다.(징집령에 대한 판단이 가른 운명).[33] 그 당시의 숭실중학에 재학하던 다수의 학생들이 이 문제로 자진 퇴학을 했다.[34] 1984년엔 의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했으며, 1995년엔 일본 NHK와 KBS가 합작으로 그의 사망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여기서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및 일본에서 그가 유학 당시 지내던 곳, 지인들 인터뷰도 나왔으며 일본인 대학 동창생도 나와서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일본인 동창생은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하며 항상 뭔가 글을 적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35] 윤동주의 시와 그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에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36] 가령 김소월의 에서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이라는 명구절조차 영어로 "쿠쿠 쿠쿠 나인 브라덜스 쿠쿠" 라는 괴이한 번역이 되기 쉬우므로.[37] 윤동주 시비 옆에는 역시 같은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시비에는 압천(鴨川)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윤동주 시인은 처음 일본에 오기 전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학을 다니다가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그가 좋아했던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대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학 역시 릿쿄대학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미션스쿨이다.[38] 소설 필화 사건. 자세한 것은 마광수 참조.
1258    윤동주와 시집 제목 댓글:  조회:3286  추천:0  2018-10-10
윤동주가 처음 준비한 시집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다. 아픈 시대 상황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제목이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아홉 자의 긴 제목으로 바뀌게 됐다. 연희전문 4학년 때인 1941년, 윤동주는 19편을 묶은 시집을 내려고 했다. 먼저 필사본 3부를 만들어 한 부는 자기가 갖고, 나머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영문학, 수필가)와 가장 가까운 후배 정병욱에게 줬다.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을 계획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다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동주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병원으로 상징했다. 폐결핵 환자인 젊은 여자는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존재다. 나도 ‘아픔을 오래 참다’ 이곳에 왔지만 ‘늙은 의사’는 병명을 모른다. 그는 시대적 고통을 알지 못한다. 나는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여자와 나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면서. 절망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동일시(同一視)의 메타포다. 어떤 이는 윤동주의 ‘병원’을 토머스 브라운과 보들레르, 체호프와 릴케에 연결시킨다. 이들은 ‘세계가 병원이며 우리는 이해받지 못하는 환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으니 그럴 만하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도 근대도시는 병원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그래도 동주의 병원은 건강하게 읽힌다. 환자가 젊은 여성인 데다 젊은 ‘나’ 역시 ‘우리’가 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집은 출간되지 못했다. 이양하 교수가 출판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이 일제의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더러 동주의 신변에 위협이 따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출판을 단념한 동주는 졸업 직후 용정으로 귀향해 시집을 내려 애썼지만 그곳에서도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동생 윤혜원은 “오빠가 300원만 있으면 되는데…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훗날 말했다. 10세 아래 동생 윤일주도 “아버지께서 출판해줄 의향이 있었으나 모든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사후 3년이 지나서야 유고시집이 나왔다.  /칼럼니스트 고두현 시인
1257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바람이 불어 댓글:  조회:4027  추천:0  2018-10-09
  바람이 불어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1948)        ■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상징적. 자기 응시적 ▮제재 : 바람 ▮주제 : 자아의 번민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해석에 난점이 많다. ‘바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고, 그 ‘바람’의 의미에 따라 시상은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평자들은 ‘바람’을 부정한 세력으로 보고 그 세력에 맞서는 자아의 결의가 표명된 것으로 해석해 온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다분히 도식화된 틀에 얽매인 면이 보인다. 왜냐하면 바람이 딱히 부정한 이미지를 지닌다고 볼 근거가 문면(文面)에 드러난 그대로 해석하여 시의 흐름을 좇아갈 때 그 의미가 어느 정도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바람을 맞고 서 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몰라도 나를 스쳐 어디론가 불어 간다. 그 장면을 보고 화자의 인식은 내면으로 향한다. 바람이 저렇게 불어 오고 불어 가는데 시적 자아는 까닭 모를 슬픔에 잠겨 있다. 이 괴로움은 과연 이유가 없는 것일까? 흔히들 실연의 괴로움에 젖지만 나는 한 여자도 사랑해 본 일이 없으니 이 괴로움은 사랑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시대에서 느낀 슬픔도 아니다. 시대적 고민에 빠져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괴로움의 근거를 생각할 때 바람은 또 연이어 불어 가고, 강물도 흘러 가는데 나는 여전히 서 있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맥을 생각해 보면, 화자는 바람 때문에 괴로움의 이유를 찾는 계기를 가졌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그 바람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으로 이미 생긴 괴로움의 이유를 찾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5,6연은 같은 구조를 가지며, 의미 또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불고 강물이 흐르는데 나는 그 곁에 서 있다는 진술이니 별반 다르게 해석되지 않을 것이다. 바람과 강물이 결국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면 그 둘의 공통된 속성은 유동성이다. 불어 가고 흘러 가는 강과 바람 곁에서 흐르지 않고 부동하는 존재가 화자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품은 의문은 의문이라기보다는 관심의 표명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바람도 어딘가에서 불기 시작해 어딘가로 향해 간다. 무심히 불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향해 갈 것이다. 바람도 무엇인가를 향해 가는데 나는 까닭 모를 괴로움에만 잠겨 있다. 내 괴로움에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유를 대어 보아도 그것은 내 괴로움에 젖어 있을 때, 바람은 자꾸 불어 오고, 그에 대비되어 나는 굳건한 반석 위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모두가 변해 가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나만 정체되어 있다. 이 정체의 정도는 반석의 부동성으로 심화된다.    바람이 불 듯 강물이 흐르는데 나는 흐르지 못하고 언덕에 머물고 있다는 자기 응시가 보인다. 이처럼 바람에 의해 화자 자신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고 자신이 지닌 무력감과 괴로움의 본질을 살펴보지만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반어법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盤石)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안일한 삶에 대한 자책   ● 해제 : 윤동주의 시에서 보이는 가장 중요한 정신은 자아 성찰과 부끄러움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 역시 일제 강점기의 부당한 현실 앞에서 방관자로 남은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람은 불고 강물 역시 목표를 향해 흐르는데,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석과 언덕 위에 그대로 머문 채, 정체된 삶을 살고 있다는 자기 응시를 통한 자아 성찰이 잘 드러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괴로움의 원인은 마지막 두 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바람이 부는데도, 곧 현실이 어려운데도 반석 위에 서 있거나 언덕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반석 위에 서 있다’는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민족의 어려움 속에서 자신은 그저 편안하게 살아가면서 구경꾼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처럼 방관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 주제 : 흐르지 못하고 정체된 삶에 대한 번민 ● 구성 :   1연 어디론가 불어 가는 바람 2연 ‘나’의 괴로움 3~4연 괴로움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나’ 5~6연 흐르지 못하고 한 곳에 서 있는 ‘나’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해석에 난점이 많다. ‘바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고, 그 ‘바람’의 의미에 따라 시상은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평자들은 ‘바람’을 부정한 세력으로 보고 그 세력에 맞서는 자아의 결의가 표명된 것으로 해석해 온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다분히 도식화된 틀에 얽매인 면이 보인다. 왜냐하면 바람이 딱히 부정한 이미지를 지닌다고 볼 근거가 문면(文面)에 드러난 그대로 해석하여 시의 흐름을 좇아갈 때 그 의미가 어느 정도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바람을 맞고 서 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몰라도 나를 스쳐 어디론가 불어 간다. 그 장면을 보고 화자의 인식은 내면으로 향한다. 바람이 저렇게 불어 오고 불어 가는데 시적 자아는 까닭 모를 슬픔에 잠겨 있다. 이 괴로움은 과연 이유가 없는 것일까? 흔히들 실연의 괴로움에 젖지만 나는 한 여자도 사랑해 본 일이 없으니 이 괴로움은 사랑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시대에서 느낀 슬픔도 아니다. 시대적 고민에 빠져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괴로움의 근거를 생각할 때 바람은 또 연이어 불어 가고, 강물도 흘러 가는데 나는 여전히 서 있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맥을 생각해 보면, 화자는 바람 때문에 괴로움의 이유를 찾는 계기를 가졌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그 바람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으로 이미 생긴 괴로움의 이유를 찾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5,6연은 같은 구조를 가지며, 의미 또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불고 강물이 흐르는데 나는 그 곁에 서 있다는 진술이니 별반 다르게 해석되지 않을 것이다. 바람과 강물이 결국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면 그 둘의 공통된 속성은 유동성이다. 불어 가고 흘러 가는 강과 바람 곁에서 흐르지 않고 부동하는 존재가 화자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품은 의문은 의문이라기보다는 관심의 표명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바람도 어딘가에서 불기 시작해 어딘가로 향해 간다. 무심히 불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향해 갈 것이다. 바람도 무엇인가를 향해 가는데 나는 까닭 모를 괴로움에만 잠겨 있다. 내 괴로움에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유를 대어 보아도 그것은 내 괴로움에 젖어 있을 때, 바람은 자꾸 불어 오고, 그에 대비되어 나는 굳건한 반석 위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모두가 변해 가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나만 정체되어 있다. 이 정체의 정도는 반석의 부동성으로 심화된다. 바람이 불 듯 강물이 흐르는데 나는 흐르지 못하고 언덕에 머물고 있다는 자기 응시가 보인다. 이처럼 바람에 의해 화자 자신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고 자신이 지닌 무력감과 괴로움의 본질을 살펴보지만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     1941년 5월 무렵, 연희전문에 다니던 윤동주는 정병욱과 함께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 한다. 당시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소설가 김송의 집에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드 나들면서 서가를 확인하고 편지들을 빼앗아 갔다고 정병욱은 회고한다. 연희전문 문과 학생들에게 이 광경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삼스러운 경각심을 갖게 할 만한 것 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의 의식이 작동하기도 전에 개입된 것은 ‘나’ 의 안위와 이웃의 안위하지 못함 사이의 교착상태, 또는 개개인 모두에게 퍼져가는 불운의 과정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윤동주의 작품에 나타난 실존적 아이러니의 상황이 이를 보여준다.   알려져 있듯 이 시기 동안 창작된 윤동주의 시편들을 대표하는 특성은 ‘양심’이나 ‘부끄럼’으 로 칭해지는 섬세한 감성이다. 이는 단지 어느 내성적인 청년의 자기반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폭력 적인 현실의 고통과 실상을, 나아가 그 역사적 무게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감당하기는커녕 정확한 체 감조차 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첨탑에 걸려 멈춘 햇빛을 보며 휘파람이 나 불며 서성거리는 상황이라든가, 이틀 후에 창작된 「바람이 불어」에서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 에는 이유가 없다.”는 구절이 이를 드러낸다.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십자가」에서는 순교자 의 식을 통해 이 괴로움의 해결책 또는 일종의 승화를 갈구하지만, 「바람이 불어」에서는 괴로움과 고통 을 끝까지 응시하며 추적해 본다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데 나만은 ‘반석’ 위에 발 딛고 있으며, 강 물이 흐르는데 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 있다는, 조금쯤 옆으로 비켜나 있다는 자각은 현실의 비참 을 나란하게 겪어내지 못함에 대한 불가피하고 형이상학적인 책임감을 지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바람이 불어」는 윤동주 시세계에서 주요한 분절점이다. 「자화상」을 쓴 섬세 한 응시자로서의 윤동주가 있고, 1년 3개월여의 기간 동안 침묵한 후 「위로」, 「팔복」, 「병원」을 통해 ‘병든 세계’를 진단하고 공감한 윤동주가 있다면, 「바람이 불어」와 이후의 시편들에서는 끝까지 괴 로움의 교착상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를 멈추지 않는 윤동주를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점부터 우리는 그의 시를 두고 ‘윤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윤동주 시의 ‘내성적’인 특성을 바깥과의 대화로 확장시키거나(정명교) ‘저항시’라는 키워드를 넘어서 미학적 자질로 확대시켜 바 라보는(유성호) 연구자들의 시선이 모두 윤동주 시의 형식적·미학적 차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윤 동주 특유의 ‘내적인 고백적 발화’로 평가되는 자질이 사실상 윤리의 차원에서 논의될 필요성이 있 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 식을 찾아가는 중요한 지점에 「바람이 불어」가 있다.          /김이강  ========================///       다음 로고찾아, 항일운동을 배우다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메일   서시의 윤동주생가를 찾아, 항일운동을 배우다항일진보의 요람 - 용정중학교(옛대성중학) 김현태 기자 2018.08.01  글씨키우기 메일보내기 인쇄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뉴스프리존= 김현태 기자] 용정중학교는 일제강점기시절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에 위치한 학교로 일제의 탄압과 착취를 피해 이주해온 조선인들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투사를 육성하는데 주력해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20세기초 용정지역에는 광명∙은진∙대성∙동흥∙명신여고∙광명여고 등 민족사립학교가 연달아 세워졌고 이후 역사의 변천과 함께 6개의 중학이 합병되면서 1946년 용정중학교가 됐다. 항일민족시인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1917~1945)가 바로 용정중학의 전신인 광명중학출신이다. 윤동주시인이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대성중학이란 이름으로 당시 민족주의교육의 산실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해냈다. 학교건물은 신관과 구관이 있는데, 구관건물앞에는 윤동주의 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고 그 주변에는 시인의 일편단심을 기리는 소나무들로 교정이 꾸며져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올곧이 걸어가다 항일민족사상범 혐의로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던 시인은 이름모를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1945년 2월16일 28세의 나이로 옥사한다. 시인의 숭고한 정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체관람을 온 청소년들의 표정은 한없이 밝기만 하다. 구관건물 2층에 있는 사적전시관에는 윤동주시인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항일청년 송몽규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늦봄 문익환선생 등의 활동들이 기록돼있으며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용정과 주변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료들,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김일성주석(당시 호칭은 )의 항일무장투쟁 기록들, 연변에서 벌어졌던 3.13만세운동 등을 역사관에 있는 해설사가 친절히 설명해준다.   이곳에서 뜻깊게 기억해야 할 위인이 한분 더 있다. 바로 보재 이상설선생이다. 이상설(1871∼1917)선생은 충북 진천 사람으로 24세(1894년, 고종 31년)에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2년만에 성균관교수겸 관장을 지낼 정도로 수재였다. 선생은 1905년 의정부참찬 당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경복궁 앞에서 땅에 머리를 찧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총궐기하자고 호소했던 인물이다. 이후 일제에 의해 국권이 넘어가자 사직해 실업자가 된 선생은 이동녕 등과 함께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을 떠났다. 그가 연해주와 만주지역에 주목한 것은 그곳이 일찍부터 많은 조선인들에 의해 개간되고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만주의 용정지역은 연해주 못지않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곳이었고 조선의 영토임에도 일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1906년 여름 용정에 온 이상설은 인재양성이야 말로 국권회복의 지름길임을 알고 그해 8월 우리나라 국외민족교육의 전형이 된 서전서숙을 세우고 스스로 교장이 된다. 이후 선생의 동료였던 이회영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물론 이후 용정의 최고지도자로 부각되는 김약연선생의 명동학교, 대성중학교, 용정중학교, 동흥중학교 등 모든 학교가 서전서숙의 학교운영과 커리큘럼을 계승한다. 이 지역 민족학교들은 용정지역의 조선청년들뿐만이 아닌 경기도지역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로 찾아온 청년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키우는 항일해방운동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으며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가 교원들과 학생들사이 전해지면서 진보주의자들의 요람이 된다. 이상설선생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헤이그밀사사건이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정사에 이상설, 부사로는 법률가인 평리원검사 이준을 파견했다. 여기에 더불어 전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통역으로 합류시켰다. 이위종은 프랑스 생시르군사학교출신으로 러시아어, 영어, 불어에 능통한 인물로 언어의 귀재다. 6월25일 이들은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과 동맹국인 영국의 방해로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이위종은 회의에 참여한 나라들의 외교관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만들어 설명했고 또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문서를 번역해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이 조금씩 알려지자 서양기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언론에 보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밀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만국평화회의는 일제의 조선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분노한 이준열사는 현장에서 분사한다. 이상설의 통곡소리가 밀사들이 묵었던 숙소밖에서도 크게 들렸다고 당시 외신은 기록했다고 한다. 해방에 대한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무자비한 일제의 탄압을 뚫고 민족의식과 문화를 지켜가며 기어이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해방과 동시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에 의해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분단의 비극을 맞이하게 됐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빛을 회복하기는커녕, 1945년 8월15일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분단돼 광복70주년과 분단 70년을 함께 맞은 2015년, 이 억울하고 뒤틀린 역사를 바로 세울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할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전 일장기가 내려간 그 건물에 누구의 깃발이 올라갔는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를. 윤동주시인의 서시가 이토록 심금을 울린적이 또 있었던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를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김현태 기자  
125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눈 오는 지도 댓글:  조회:2910  추천:0  2018-10-07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세상) 위에 덮인다. → 시적 대상인 '순이'가 떠나는 상황. 배경이 제시됨. 정서(슬픈)가 직접 제시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대상의 부재로 인한 외로운 상황)(슬픔의 정서를 시각적 이미지로 )(화자의 정서가 심화)(순이)(순이와의 이별)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안타까움을 의문형으로 표현. 홀홀히 : 매우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어느’의 반복을 통한 운율감) 지붕 밑, 너는 내(화자)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순이에게 편지로 썼지만, 순이가 간 곳을 모르는안타까움) (그리움의 정서를 의문형으로 표현) (눈: 장애물역할)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그리움의 정서를 감각적, 비유적으로 형상화)    ('눈'은 그리움의 정서를 나타냄.) (늘, 계속)   [정리] 1)화자 -상황 ; 화자(나)는 순이와 이별한 상황이다. -정서․태도 : 순이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드러나 있다. 대상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과 애상적 정서가 드러나 있다.   2)시어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 그리움의 정서를 감각적(시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화자의 내면 심리가 투영된 시어 : 눈, 발자국, 꽃 -'창밖'과 '방 안'의 이미지 연결 : 두 공간 모두 눈이 내린다는 점(실제의 눈, 내면의 눈)에서 이미지가 상통하고 있다.   3)표현 -'순이'를 청자로 설정하여 말을 건네는 방식. -줄글 형식의 산문적 운율. -의문형과 영탄형으로 고조된 정서 표출.    핵심정리 * 갈래: 자유시, 서정시 * 성격: 연시적, 애상적 * 표현: 시각적 이미지, 대립 구조 * 어조: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어조 * 특징: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도치,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사용. * 제재: 눈 * 주제: 이별의 안타까움과 간절한 사랑   윤동주(尹東柱, 1917.12.30∼1945.2.16)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해설 1939년 3월 12일에 완성된 산문시. 순이에 대한 그리움을 ‘눈’, ‘발자욱’, ‘꽃’ 등의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순이의 상징이나, 떠나는 이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굳이, 홀홀이 떠나는 순이의 행위를 비유한 ‘잃어버린 역사’를 단초로 하여 순이를 ‘조국’으로 해석하는 역사주의적 관점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 역시 시 전체의 이미지가 그것을 쉽게 수용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한편, ‘잃어버린 역사처럼 (순이가) 가다’라는 표현은 윤동주 시인의 독특한 비유이다. 일반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원관념이 추상적일 경우, 구체적인 매재(보조 관념)를 빌어와 원관념을 구체화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 시인은 거꾸로 비유를 한다.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자화상)’, ‘사랑처럼 슬픈 얼굴(소년)’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함박눈이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내린다.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는, 창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을 마음속의 추상적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는 순이가 떠난 후의 ‘외로움’을 표현한 것으로, 다음에 이어지는 ‘벽과 천정이 하얗다’와 ‘방 안에까지 내리는 눈’에서, 하얀 색의 이미지를 ‘외로움(떠난 임으로 인한 슬픔과 충격-온통 하얀)’으로 인식하게 해 준다. 이렇게 마음의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고, 마음속에 순이가 떠나가는 길(지도)이 그려진다.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그 길이 분명치는 않으나 어느덧 화자는 마음 속 순이의 조그만 발자국을 따라 간다. 하지만 펑펑 쏟아지는 눈이 순이의 발자국을 덮어버리고 만다.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화자는 그리움의 길을 그만 두지 않는다. 눈이 녹으면 발자국 자리마다 그리움의 꽃을 피워 일구고 그 꽃 사이로 순이를 따라 가겠노라 말한다. 맨 마지막의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의 ‘눈’은 내면의 그리움을 표상한다. ‘창 밖’과 ‘창 안’ 그리고 ‘창 밖에 오는 눈’과 ‘창 안(마음)에 오는 눈’의 대립 구조에 의해 안타까움의 정서가 고조되고 있으며, 시각적 이미지의 효과적 배치에 의해 펑펑 쏟아지는 그리움의 눈꽃이 독자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작품이다. ========================///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재미 음악인들로 구성된 밴드 '눈 오는 지도'(www.snowingmap.com)는 오는 18일(현지시간) 뉴욕 플러싱에 있는 카페 '뉴욕의 아침'에서 윤동주(1917∼1945년)와 그를 세상에 알린 후배이자 국문학자인 정병욱(1922∼1982년) 박사를 추모하는 공연을 개최한다고 12일(2018년 2월) 밝혔다. 윤동주의 시 '눈 오는 지도'에서 이름을 따온 밴드는 리더 한은준을 비롯해 유혜림(보컬·건반)·노성종(베이스)·차승현(드럼)·정재용(기타) 등 5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공연에서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 '서시'·'자화상'·'십자가'·'새벽이 올 때까지'·'별 헤는 밤' 등을 관객에 선사한다. 밴드는 올해 윤동주 서거 73주년을 맞아 그를 세상에 알린 정병욱 박사를 특별히 기억하는 행사도 마련한다. 김수진 뉴욕교회한국학교 교장과 원혜경 뉴저지훈민학당 한국학교 교장, 최영수 변호사는 공연 중간중간에 출연해 윤동주와 정병욱에 대한 인연 등에 대해 소개한다. 정 박사는 연희전문을 함께 다니고 졸업을 앞두고 남긴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 19편이 수록된 육필원고 유일본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 있는 자택의 마루 밑에 감춰 보관했다. 그는 윤동주가 옥사한 뒤 원고를 찾아 윤동주의 동생 윤일수에게 찾아가 함께 시집을 내자고 했고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했다. 리더인 한 씨는 "1945년 2월 16일, 일본의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를 외치며 만 27세의 나이로 사라진 윤동주는 지금도 우리의 삶에 깊은 울림을 주며 살아 있다"며 "올해 공연에서는 그를 세상에 알린 정 박사의 삶도 조명하고 추모한다"고 전했다. 작곡가인 한 씨 등은 지난 2005년 '눈 오는 지도'를 결성했으며 2년 뒤부터 뉴욕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캐나다 등지에서 윤동주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불렀다. 이번 추모 공연은 11번째다.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 님의 눈 오는 지도라는 시입니다.   윤동주 님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치는듯한 느낌을 받지요.   윤동주 님의 시 속에는 순이(順伊)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눈 오는 지도 에서도 역시 순이(順伊)가 등장합니다.   순이(順伊)와의 이별을 모티브로 이별의 아침에 함박눈이 나려, 자신의 막막한 심정을 대변하듯이 함박눈이 내리고,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다고 했습니다.   순이가 떠난 후의 외로움을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라고 표현했군요.    
1255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금잔화(金盞花) 댓글:  조회:3423  추천:0  2018-10-06
금잔화 하국(夏菊), 도경(盜庚), 황숙화(黃熟花)金盞花   |     학명 Calendula arvensis 분포지역 전국 각지 자생지역 관상용으로 재배 번식 실생·주 약효 부위 꽃·온포기 생약명 금잔화(金盞花) 키 30~50cm 과 국화과 생활사 한해살이풀 채취기간 7~9월(개화기) 취급요령 그늘에 말려 쓴다. 특징 따뜻하며, 짜고 맵고 쓰다. 독성여부 없다. 1회 사용량 5~6g 주의사항 치유되는 대로 중단한다. 동속약초 금불초·버들금불초·가는금불초 등의 두상화 목차 잎 꽃 열매 특징 및 사용 방법 효능 잎 어긋나는데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으로서 부드러우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으나 거의 없는 것 같고 밑 부분은 원줄기를 감싼다. 꽃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가지 끝과 줄기 끝에 붉은빛이 도는 황색의 두상화가 1개씩 달려 피는데 가장자리의 것은 혀꽃이고 안쪽의 것은 대롱꽃이다. 노란색 계통이 많으나 원예 품종에 따라 각각 빛깔이 다르다. 낮에 피었다가 밤에는 오므라든다. 열매 8~10월에 수과가 달려 익는데 겉에 가시 같은 돌기가 있다. 특징 및 사용 방법 금송화(金松花)·장춘화(長春花)라고도 한다. 뿌리가 옆으로 뻗어 번식한다. 줄기는 곧게 자라며 가지가 갈라진다. 전체에 샘털 같은 털이 있어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 한때 외상약(外傷藥)의 재료로 재배하였다. 관상용(화분)·약용으로 이용된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환제 또는 산제로 하여 사용한다. 효능 주로 소화기·호흡기 질환에 효험이 있다. 관련질병: 건위, 과식, 구토, 담, 복수, 소화불량, 심하비, 애기, 유두풍, 창종, 천식, 탄산, 해수 ====================///   금잔화 Calendula, Pot marigold, Common marigold     분류 국화과(Compositae) 원산지 유럽 남부, 이란, 지중해 연안 생산시기 4~5월(잎, 꽃) 크기 30~60cm 학명 Calendula officinalis L. 용도 관상, 요리(수프, 소스, 오믈렛, 샐러드, 빵, 로스트 치킨), 포푸리, 입욕제, 피로 회복제, 노란색 염료, 아로마세라피 이용 어린순, 잎, 꽃 개화기 3~5월 목차 접기 특성 성분 약효 재배 및 관리 ┗ 기후 환경 ┗ 토양 ┗ 번식 방법 및 시기 특성 1~2년초. 높이 30~60cm. 줄기는 곧게 위로 자라며,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잎은 긴 난형이다. 3~5월에 노란색, 오렌지색 꽃이 피며, 홑꽃과 겹꽃이 있다. 가을에 파종하여 이른 봄에 개화시켜 관상하며, 더위에 약해서 우리 나라에서는 5월 이후에 죽는다. 임산부는 복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 금잔화 겹꽃 ⓒ 교학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분 caryophyllene, kaempferol, flavonoid, lutein, lycopene, malic acid, oleanolic acid, phytofluene, quercetin, salicylic acid, saponin, carotinoid, vitamin C, E 등이 함유되어 있다. 약효 발한, 수렴, 지혈, 항균, 항염, 근육통 완화(삔 데) 효능이 있고, 소화불량,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생리불순, 상처, 화상, 피부병을 치료하며, 구충제, 흥분제, 담즙 분비 촉진제, 상처나 염증 연고제, 피부 조합제로 쓰인다. 재배 및 관리 기후 환경 추위나 더위에 약하며, 온실에서 월동한다. 토양 배수가 잘 되고, 적당한 습기가 있는 비옥한 사질 양토에서 잘 자란다. 번식 방법 및 시기 실생(4월, 9월, 직파) =======================///   개요 유럽 원산의 한해살이풀로 전국 각지에서 관상용으로 심어 기른다. 전체에 짧은 털이 난다. 줄기는 곧추서고 높이 20-50cm이며, 밑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진다. 뿌리잎은 모여 나며, 긴 난형이다. 줄기잎은 어긋나며, 넓은 피침형 또는 긴 타원형으로 아래쪽이 줄기를 조금 감싼다.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는 없다. 꽃은 6-9월에 줄기나 가지 끝에 머리모양꽃차례가 1개씩 달리며, 지름 1.5-2.0cm이다. 머리모양꽃차례의 가장자리에는 붉은빛이 도는 노란색의 혀모양꽃이 달리며, 안쪽에는 노란색의 관모양꽃이 배열한다. 열매는 겉에 가시 모양의 돌기가 난다. 식물체를 약용 또는 식용색소용으로 쓴다. 금잔화 ⓒ 국립생물자원관 생물다양성정보, 한반도 생물자원 포털(SPECIES KOREA) 형태 한해살이풀이다. 전체에 짧은 털이 난다. 줄기는 곧추서고 높이 20-50cm이며, 밑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진다. 뿌리잎은 모여 나며, 긴 난형이다. 줄기잎은 어긋나며, 넓은 피침형 또는 긴 타원형으로 아래쪽이 줄기를 조금 감싼다.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는 없다. 꽃은 줄기나 가지 끝에서 머리모양꽃차례가 1개씩 달리며, 지름 1.5-2.0cm이다. 머리모양꽃차례의 가장자리에는 붉은빛이 도는 노란 색의 혀모양꽃이 달리고, 안쪽에는 노란 색의 관모양꽃이 배열한다. 모인꽃싸개잎은 접시 모양이며, 녹색이다. 열매는 겉에 가시 모양의 돌기가 난다. 생태 꽃은 6-9월에 피고 열매는 8-10월에 익는다. 이용 관상용, 약용, 식용색소용으로 쓴다. 해설 우리말이름은 ‘금빛 술잔을 닮은 꽃’이라는 뜻의 한자이름 ‘금잔화(金盞花)’에서 유래하였다. 혀모양꽃의 길이는 모인꽃싸개조각 길이보다 항상 2배 이하이다. 금잔화 ⓒ 국립생물자원관 생물다양성정보, 한반도 생물자원 포털(SPECIES KOREA)      
125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병원 댓글:  조회:4238  추천:0  2018-10-06
병           원                                                                               -  윤동주  -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못해 처음으로 이 곳을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나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길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1948)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서경적(묘사적), 시각적, 산문적  ◆ 표현 : ① 묘사의 탁월함.                ② 현재법의 사용으로 현장감을 살림                ③ 대상의 이동(여자→나)에 따른 시상 전개                ④ 산문적 표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여자 환자 → 가슴앓이(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겪게되는 시대적 고민)를 하는 그 시대의 젊은 지성인                    으로, 그녀가 처한 상황은 지극히 우울하고 고독하고 적막하다고 할 수 있다.     * 나 → 시련과 피로가 겹겹이 쌓이는 병을 앓고 있음에도 병명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볼 때, 내가 앓고                    있는 병은 아마도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시대의 열병이거나 인간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민, 내지는 사랑의 열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금잔화 → 회복과 소생에 대한 희망 상징     *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화자와 여자의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부분.  ◆ 주제 ⇒ 고통과 고독에 대한 연민  ◆ "병원"의 의미 →고통과 부끄러움이 상존하는 밀폐된 공간으로,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상징하는 말.      [시상의 흐름]  ◆ 1연 : 외로운 여자 환자 발견(상황인식1)  ◆ 2연 : 고통과 피로를 호소하며 병원을 찾은 나(상황인식2)  ◆ 3연 : 나와 여자 환자의 건강이 회복되길 기원함(상황인식3) → 나와 여자의 동일화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라는 시집 제목 대신에, 시집 제목이 될 뻔했던 작품으로, 가슴을 앓는다는 여인(연희 전문 시절 알았던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고통을 노래한 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병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 곳에 입원한 한 여자 환자의 모습을 통해 암울하고 고독한 시대상황 속에서 치루어야 하는 시대적 고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여자 환자의 모습을 통해 화자 자신의 상태를 또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면서,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젊은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적 상황이 비록 우울하고 고통스럽지만, 여자 환자는 일광욕을 즐기고 또한 금잔화를 가슴에 꽂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긍정적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화자와 '나'가 앓고 있는 병은 '가슴앓이'라는 동일한 것으로, 육체적 질병이 아닌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화자와 여자는 동일한 시대에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서, 연대의식을 가지면서 그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병원은 '아픔과 죽음과 부끄러움과 죄악과 실존의 고통'이 있는 곳이며, 동시에 '탄생의 환희'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는 환자라는 피동적 존재를 넘어 병원의 상황을 인식하려는 의지와 신념을 표현하고, 고통을 나누려는 명징한 순교자 의식을 가진, 누구보다도 '가장 건강한 청년'인 것이다.       ==============///   병원(윤동주) - 1948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못해 처음으로 이 곳을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나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길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 시 혼자 살피기 ○제목 : 병원 → ‘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 →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에 주목해보자. ○화자 : 나 ○청자 : 없음(독백적) ○대상 : 여자(와 나의 병) ○상황 : 화자는 병원에서 가슴앓이를 하는 여자를 지켜보다가, 자신도 그녀처럼 병이 있다고 생각함. → 그녀가 있던 자리에 누워 그 여자와 나의 건강이 좋아지기를 바람. ○정서 : 연민, 안타까움, 병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주제) : 나와 그 여자의 병이 빨리 낫기를 기대하는 마음 ○어조 :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객관적) ○표현 : 묘사적, 화자와 대상 사이의 대응, 현재형   2. 작품 개관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성격 : 묘사적, 시각적, 산문적    (3) 주제 : 고통과 고독에 대한 연민       - 힘겨운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는 마음.    (4) 특징      1) 뛰어난 묘사로 인물과 상황을 표현함.      2) 현재형의 사용으로 현장감을 살림      3) 대상의 이동(여자 → 나)에 따른 시상을 전개함.      4) 산문적 표현을 사용    (5) 구성      1) 1연 : 외로운 여자 환자 발견      2) 2연 : 고통과 피로를 호소하며 병원을 찾은 나      3) 3연 : 나와 여자 환자의 건강이 회복되길 기원함    (6)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4. 이해와 감상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 제목 대신에 시집 제목이 될 뻔했던 작품으로, 가슴을 앓는다는 여인(연희 전문 시절 알았던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고통을 노래한 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병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 곳에 입원한 한 여자 환자의 모습을 통해 암울하고 고독한 시대상황 속에서 치러야 하는 시대적 고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여자 환자의 모습을 통해 화자 자신의 상태를 또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면서,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젊은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적 상황이 비록 우울하고 고통스럽지만, 여자 환자는 일광욕을 즐기고 또한 금잔화를 가슴에 꽂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이것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긍정적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화자와 '나'가 앓고 있는 병은 여자 환자의 '가슴앓이'라는 동일한 것으로, 육체적 질병이 아닌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화자와 여자는 동일한 시대에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서, 연대의식을 가지면서 그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   # 핵심 정리 갈래-자유시. 서정시 성격-서정적, 산문적, 묘사적 심상-묘사에 의한 시각적 심상(1연과 3연) 운율-산문율 표현-현재법의 사용(현장감을 살림)       -삽화적 표현       -대비적 표현(여자-나) 특징-정경의 묘사가 뛰어남(1연)         산문적 표현이 쓰임 시상 전개-대상의 이동에 따른 전개(여자-나) 제재-병원의 정경(情景) 주제-상황 극복의 기원         여자 환자에 대한 연민   # 작품의 구성 1연 : 일광욕하는 여자 환자의 소묘 2연 :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나 3연 : 자신과 여자의 건강 회복 기원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젊은 여자를 통해 화자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기원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배경인 '병원'은 밀폐된 공간으로, 고독한 밀실과 통한다. 이것은 윤동주의 다른 시에서 자주 나오는 '방'과 의미가 통하는데,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한편 '젊은 여자'는 '나'와 동일시 되는 인물로, 그녀가 '가슴을 앓는다(폐병)'는 것은 젊은 지성인이 시대 상황에 괴로워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인 '나'역시 병을 앓고 있지만 의사는 병명을 모른다. 화자가 겪고 있는 지나친 시련과 피로 역시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에 대해 화자는 자신과 여자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처한 답답하고 암울한 상황이 극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시어의 함축적 의미 파악  *가슴을 앓는다(가슴앓이) : 여자는 가슴앓이(폐병)의 질병을 앓고 있고, 나(화자)는 질병은 아니지만 고뇌로 가슴을 앓고 있다. 나는 '가슴앓이'라는 면에서 동일하기에 동병상련의 처지를 느낀다.  *금잔화 한 포기 : 현재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을 상징함.   # 화자의 정서와 태도   쓸쓸하고 고독한 화자의 내적 고뇌를 폐병을 앓고 있는 젊은 여인의 아픔으로 대신하여 보여 줌으로써 연민의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   # 시상의 전개 방식  젊은 여자 환자에 대한 관찰 → 자신의 아픔에 대한 성찰 → 동병상련      ==================///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인 1940년에 쓴 것이다. 그 당시는 일제의 탄압이 점차 가혹해지던 답답하고 암울한 때다. 지식인들은 마치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극한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애초에 시집 의 제목을 으로 붙일 예정이었을 정도로 이 작품은 윤동주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시다.  여기에 설정된 배경인 '병원'은 고독한 밀실의 심상과 통하는 것으로 당시의 암울한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등장 인물인 '여자'는 '나'와 동일시(同一視)된 인물로 현실적 상황에 견디지 못하여 지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환자다. 의사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도 병의 원인을 모른다. ▶ 성격 : 서경적(敍景的), 산문적 ▶ 심상 : 묘사에 의한 시각적 심상(1연과 3연) ▶ 운율 : 산문율 ▶ 특징 : 정경의 묘사가 뛰어남(제1연) ▶ 표현 : ① 현재법의 사용→현장감을 준다.  ..............② 삽화적(揷畵的) 표현  ..............③ 대비적(對比的) 표현('여자'↔'나') ▶ 시상 전개 : 대상의 이동에 따른 전개('여자'→'나') ▶ 구성 : ① 일광욕 하는 여자 환자의 소묘(제1연)  ............. ②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나(제2연)  ..............③ 자신과 여자의 건강 회복 기원(제3연)  ..............④ 소생과 부활의 희망(제10연) ▶ 제재 : 병원의 정경(情景) ▶ 주제 : 상황 극복의 기원 감상의 길잡이 전 3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서사적인 내용을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시 전체가 상징적으로 제시되어 암시적 효과를 기도(企圖)한 것이다. 제1연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여 사건이 시작된다. '병원'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좁고 밀페된 공간이다. 윤동주 시에 자주 나오는 '방'과 통한다. 여기에 가슴앓이(폐병)을 하는 젊은 여자가 뒤뜰에 나와 얼굴을 가리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 이 '젊은 여자'는 시대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젊은 지성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오는 이도 없고 바람도 없다. 희망도 없는 고독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존론적 고독을 보여 주고 있다. 제2연은 이런 병원에 시적 화자가 입원을 한다. 그는 오랜 아픔을 참다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늙은 의사는 병을 모를 뿐만 아니라 병이 없다고 한다. 내가 겪고 있는 시대적 괴로움을 의사는 알 리가 없다. 그러니 성을 내서도 안 된다. 여기서 '나'는 '여자'와 동일시(同一視)된다. 같은 시대에 똑같이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동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연대 의식이 나타나 있다. 제3연에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로 들어간다. 절망적 상황에서 허무 의식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갖는 장면이다. 그래서 '나'도 그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그 여자의 건강과 내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상징적 기법이 주목된다. 대개의 다른 작품에서는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상징적 의미로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 시는 배경으로 설정한 '병원', 거기에 환자로 등장하는 '여자', 일광욕을 하는 정경, 꽃을 가슴에 꽂는 장면 등 모두가 상징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 시는 그의 다른 시 과 함께 윤동주의 내면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병원으로 상징되는 밀폐된 공간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자신을 투영시켜 동일시한 수법은 단조로움을 피하고 극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       윤동주 시인이 시인으로 자리한 것은 문학에 심취해 1935년 10월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제15호에「공상(空想)」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시는 최초로 활자화 된 것으로, 황순원의 시와 양주동 박사의 글이 함께 게재돼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은사이자 멘토인 이양하 교수는 일제의 출판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했고, 출판경비를 조달하기도 만만치 않아 결국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친필로 쓴 시작 노트 세 권을 만들어 그 중 한권을 이양하 교수에게, 또 한 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본인이 소장했다. 그러나 두 권은 끝내 사라졌고, 다행히 정병욱에게 준 한 권이 남게 되었다.   고유의 명절, 설날인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의 서거 73주년이 된다. 오늘도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안고 해방을 꿈꾸며 밤하늘에 별빛 같은 삶을 산 시인 윤동주와 시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윤동주 시를 소개한 이는 정지용 시인이었다. 그것도 윤동주 생전에 가장 존경하던 시인이었던 경향신문 편집국장 정지용 주간의 해설까지 붙여서 실은 것이다. 사후 첫 활자화된 시는 그 해 3월 1일자 김용호가 발행한「문화창조(2호)」에 윤동주의 시 이 함께 발표된 것이다. 추모식용으로 벽지 표지로 만든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추모식에  10권 나옴으로써 죽었던 시인이 다시 시로 부활하게 된다.   ▲지난해 11월 전시회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집들이 전시된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이 시집과 더불어 1948년 백민문화사에서 3월 1일자 발행한「백민」잡지에 고 윤동주 라는 이름으로 이라는 시가 발표되고, 이후 1953년 9월 시와 평론집「초극」에 윤동주 시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발표된다. 이 때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이 월남할 때 가지고 온 노트에서 80편의 시를 추가하면서, 111편의 시가 수록되게 된다. 1967년에는 백철, 박주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재간행하게 된다. 그후 그동안 게재 유보되었던 시 작품 23편을 추가하여 출판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시와 죽음을 공공연히 비하하던 소리가 있어 왔으나 1977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일경의 극비문서 전문'과 '재판 판결문'등이 공개되면서 다시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별이 된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었다. 크리스천 시인이자 민족저항시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며 두 주간 동안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크리스천만이 일반인들 특히 시인, 주부, 교수, 수녀, 승려,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수천여명이 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전시회에서 참석자들은 1948년 유고시집과 1955년 발행된 초판 시집,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캘리그라피로 쓴 시 작품 등을 주목했고, 기념강연과 시낭송 시음회를 통해 시인의 정신을 되새겼다.   ▲이효상 원장이 지난해 11월 전시회에서 강연하고 있다. ⓒ연구원 제공 윤동주 시인은 사실 한국..의 보배이자, 자랑이다. 윤동주 시인은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으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뇌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맑은 영혼과 깨끗한 시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이효상 원장   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 핵심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인 1940년에 쓴 것이다. 그 당시는 일제의 탄압이 점차 가혹해지던 답답하고 암울한 때다. 지식인들은 마치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극한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애초에 시집 의 제목을 으로 붙일 예정이었을 정도로 이 작품은 윤동주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시다. 여기에 설정된 배경인 ‘병원’은 고독한 밀실의 심상과 통하는 것으로 당시의 암울한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등장 인물인 ‘여자’는 ‘나’와 동일시(同一視)된 인물로 현실적 상황에 견디지 못하여 지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환자다. 의사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도 병의 원인을 모른다. ▶ 성격 : 서경적(敍景的), 산문적 ▶ 심상 : 묘사에 의한 시각적 심상(1연과 3연) ▶ 운율 : 산문율 ▶ 특징 : 정경의 묘사가 뛰어남(제1연) ▶ 표현 : ① 현재법의 사용→현장감을 준다.            ② 삽화적(揷畵的) 표현            ③ 대비적(對比的) 표현(‘여자’↔‘나’) ▶ 시상 전개 : 대상의 이동에 따른 전개(‘여자’→‘나’) ▶ 구성 : ① 일광욕 하는 여자 환자의 소묘(제1연)            ②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나(제2연)            ③ 자신과 여자의 건강 회복 기원(제3연)            ④ 소생과 부활의 희망(제10연) ▶ 제재 : 병원의 정경(情景) ▶ 주제 : 상황 극복의 기원   ■ 연구 문제 1. 화자인 ‘나’가 작중 인물인 ‘여자’에게 취하는 심리적 태도를 4자의 한자 성어로 쓰라. ☞ 동병 상련(同病相憐)   2. 이 시에서 ㉠이 상징하는 의미를 10자 내외로 쓰라. ☞ 암울한 시대 상황   3. ㉡의 상황 묘사는 ‘여자’가 어떤 존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인지 50자 정도로 쓰라. ☞ 병 때문에 외부 세계와 단절된 상황을 극한적으로 묘사하여 여자가 고독한 존재임을 표현하였다.   4. ㉡은 작중 인물의 행위 묘사를 통하여 무엇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두 어절로 쓰라. ☞ 회복의 소망.(소생의 희망)   ■ 감상의 길잡이 1  전 3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서사적인 내용을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시 전체가 상징적으로 제시되어 암시적 효과를 기도(企圖)한 것이다.  제1연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여 사건이 시작된다. ‘병원’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좁고 밀페된 공간이다. 윤동주 시에 자주 나오는 ‘방’과 통한다. 여기에 가슴앓이(폐병)을 하는 젊은 여자가 뒤뜰에 나와 얼굴을 가리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 이 ‘젊은 여자’는 시대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젊은 지성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오는 이도 없고 바람도 없다. 희망도 없는 고독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존론적 고독을 보여 주고 있다.  제2연은 이런 병원에 시적 화자가 입원을 한다. 그는 오랜 아픔을 참다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늙은 의사는 병을 모를 뿐만 아니라 병이 없다고 한다. 내가 겪고 있는 시대적 괴로움을 의사는 알 리가 없다. 그러니 성을 내서도 안 된다. 여기서 ‘나’는 ‘여자’와 동일시(同一視)된다. 같은 시대에 똑같이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동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연대 의식이 나타나 있다.  제3연에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로 들어간다. 절망적 상황에서 허무 의식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갖는 장면이다. 그래서 ‘나’도 그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그 여자의 건강과 내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상징적 기법이 주목된다. 대개의 다른 작품에서는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상징적 의미로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 시는 배경으로 설정한 ‘병원’, 거기에 환자로 등장하는 ‘여자’, 일광욕을 하는 정경, 꽃을 가슴에 꽂는 장면 등 모두가 상징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 시는 그의 다른 시 과 함께 윤동주의 내면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병원으로 상징되는 밀폐된 공간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자신을 투영시켜 동일시한 수법은 단조로움을 피하고 극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 감상의 길잡이 2  이 시는 연희 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에 쓴 작품으로 어느 병원의 정경(情景)을 통하여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폐쇄된 공간 속에서 극한적인 삶을 살아가던 당시의 지식인들이 겪는 고뇌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병원’은 화자의 고독한 내면 세계이자, 당시의 암울한 현실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의 ‘방’과 상통하는 공간이다. 한편, 환자로 등장하고 있는 ‘젊은 여자’는 화자와 동일시된 인물로, 그녀는 고통스런 현실 때문에 가슴앓이를 앓고 있으며, 화자 역시 시대적 고뇌로 아픔을 겪고 있다.  3연의 산문시 형태로 이루어진 이 시는 대상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시키는 한편, 현장감을 주기 위해 현재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묘사에 의한 시각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1연은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병원을 제시하는 동시에 병원 뒤뜰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가슴앓이’ 여자 환자를 보여 주고 있다. 그녀가 앓고 있는 ‘가슴앓이’는 단순히 병명(病名)을 뜻한다기보다는 암담한 식민지 현실 상황에서 시대적 고뇌를 겪는 마음의 병이라 할 수 있다. 면회객은커녕 나비 한 마리 찾아 주지 않는, 고독한 그녀가 누워 있는 살구나무 아래에는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는다.  2연에서는 화자가 같은 병원을 찾는다. 현실 상황에 대한 괴로움으로 인해 오래도록 고통을 당하던 화자가 병원을 찾지만, 늙은 의사는 화자의 병명을 모를 뿐 아니라, 도리어 병이 없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현실적 ‘시련’과 ‘피로’로 말미암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는 화자로서는 ‘성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자신이 왜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르는 의사의 말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화자와 ‘여자’는 같은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로서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연대 의식이 나타나 있다.  3연에서는 화자가 자신과 여자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화단에서 금잔화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로 들어가는 여자의 모습은 1연에서 일광욕을 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보는 화자의 행위도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    시인은 지금 병원에 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자기도 모르는 아픔이라는 걸 보면 마음에 생긴 병이다. 마음병을 오래 참았으니 마음도 몸도 성할 리 없다. 하지만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쉽게 씌어진 시」에 나오는 ‘늙은 교수’처럼 늙은 의사는 젊은이가 앓고 있는 마음병에는 관심이 없다. 겉모습만 주구장창 들여다보니 마음이 보일 리 없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에라는 진술로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이 시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젊은이는 지금 가슴 속을 치밀어 오르는 마음병에 걸렸다. 크게 소리 한 번 지르고 말 일이 아니다. 소리를 지를수록 더 깊어지는 이 질병에 대해 시인은 다만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라며 끊임없이 마음을 되새길 뿐이다.  마음에 병이 들어 한층 민감해진 시인이 병원에서 젊은 여인을 본다. 그녀는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 가슴을 앓는 여자라는 걸 보니 폐에 병이 들었나 보다. 창백한 얼굴로 볕을 쬐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법인가? 마음이 아픈 시인이 가슴이 아픈 여인을 보고 있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젊은 여인을 찾아오는 이는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적막한 풍경 속에 담긴 여인을 보며 시인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떠올린다. 나비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상황이 일상처럼 반복되고 있다. 저 젊은 여인은 건강한 모습으로 병원을 나갈 수 있을까? 그래서 온갖 나비들이 찾아오는 생명의 꽃이 될 수 있을까?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민다.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서는 제 가슴에 꽂는다. 여인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고, 여인이 있던 자리는 이제 비어 있다. 의사도 알아주지 않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 시인은 어디로 가야 할까? 병이 낫지 않았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병원에도 남아 있을 수 없다. 의사가 병이 없다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시인은 가슴을 앓는 여인이 있던 뒤뜰로 간다. 나비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공간이다. 생명보다는 죽음이 더 익숙한 공간이라고나 할까? 그곳에서 시인은 여자의 건강 회복을 바라며, 또 자기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여인이 누웠던 자리에 눕고 있다. 시인의 마음병을 고칠 방법은 결국 사람밖에 없다는 것일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 속에 마음을 앓는 시인의 처지가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병원은 근대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위생학이라는 학문으로 펼쳐진 근대의학은 세균과의 싸움을 통해 인간의 순수성을 보존하려 했다. 인간중심주의에 포섭된 위생담론은 본국과 식민지를 나누는 근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를 산 윤동주가 왜 마음병에 시달렸겠는가? 늙은 의사는 당대 젊은이들이 처한 이런 상황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젊은 여인이 걸린 폐병 또한 근대적 질병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시인과 젊은 여인은 결국 같은 질병에 걸린 셈이 된다. 시대가 질병을 만든다. 시대가 변하지 않으면 질병도 낫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시인은 늙은 의사보다는 젊은 여인에게서 동지의식을 느낀다. 늙은 의사는 위생담론에 젖어 젊은이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슴이 아픈 젊은 여인이라면 이 의사와는 다르지 않을까? 질병으로 연대감을 확인하는 시인이 우리를 서글프게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그만큼 그는 질병으로라도 순수함을 확인하려는 열망이 강한 시대를 살았다는 얘기도 된다. 질병으로서 은유는 그렇게 시대를 넘어 우리네 삶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 독립운동에 연루돼 투옥됐으며 이른 나이에 죽은 사실보다 더 가슴이 아픈 건 그가 생전에‘마음이 무척 여리고 아픈 청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추측은 사실 무척 위험한 일이지만 제가 읽기에 윤동주는, 요즘 병으로 치면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 같은 걸 앓았던 것 같습니다. ‘시 = 시인의 이야기’로 시를 읽는 일은 무척 위험한 일이겠지만 시인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겠지요. 이 시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구절은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는 구절입니다. 저는 왜 이 ‘젊은이의 병’이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로 보일까요. 이를테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는 일은 뒤집어 말하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 죄책감은 시대에 대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차라리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부끄러움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시인으로서 윤동주가 뛰어난 것은 그러한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명할 수 있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집니다. 시 속의 ‘나’는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봅니다. 타인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병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겠고 타인에 대한 감각이 발달해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 아팠던 자리에 가만히 앉아 보는 일,정확히 그런 일이 시의 비유이고 삶의 비유이고 사랑의 비유겠습니다. 시를 읽는 일은 어쩌면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앓아보는 일이겠습니다.  
125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소년 댓글:  조회:4872  추천:0  2018-09-21
  윤동주 /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은 어린다.     이 시는 가을 단풍잎이 떨어지는 가을날에 사랑하는 순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 날 여기저기서 단풍잎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에 필 잎눈을 이 마련되어 있다. 나무가지 위에는 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면 눈섶에 파란 하늘 빛이 물드는 것 같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쓰다듬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나는 것 같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손바닥에 있는 손금이 하늘 빛을 받아 맑은 강물이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강물 속에는 사랑하는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순이 얼굴을 떠올리고 소년은 황홀해져서 눈을 감어 본다. 눈을 감아도 사랑하는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보인다. 순이 얼굴은 슬픈 얼굴이다. 내가 순이가 없어서 슬프듯이 순이도 내가 없어서 슬픈 얼굴이다. 나는 순이가 없어서 슬프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는 ‘슬픈 가을에 여기저기서 단풍잎이 뚝뚝 떨어진다’는 문장을 변형한 것이다. 이를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라 하여 직유로 표현하여 낯선 느낌을 준다. 논리적으로는 의미가 성립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낯선 느낌을 시적인 표현이라 한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이라는 애매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가을에 여기저기서 단풍잎이 뚝뚝 떨어진다’와 ‘떨어지는 단풍잎이 순이와 헤어지는 순간 같이 보이니 슬픈 가을이다.’를 합친 문장으로 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의미가 성립 되지 않는 문장은 두 문장 또는 여러 문장을 합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더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제목 에서 ‘소년’은 순수함을 간직한 존재이고 미래를 책임질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사랑하는 소녀인 ‘순이’를 향한 순수한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있다.’는 부분도 문장이 합치고 상징을 사용하여 생성된 문장이다. ‘나무는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에 필 잎눈 또는 꽃눈을 마련해 놓았다’와 ‘그리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를 합친 말이다. ‘잎눈 또는 꽃눈’이 봄에 피므로 ‘봄’을 ‘잎눈 또는 꽃눈’의 상징으로 표현한 뒤에 주어를 생략하고 두 문장을 합친 것이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는 화자가 하늘에 몰입한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슬픈 가을이므로 하늘도 슬픈 하늘인 것이다. 그러므로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는 슬픔에 푹 잠겨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는 눈섶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로 슬픔이 확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파란 물감’은 하늘 빛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에서 ‘다시’ 보는 행위는 ‘파란 물감’의 근원을 탐구하는 행동이다. 화자는 단순하게 슬퍼하지 않고 그 슬픔의 근원을 알려고 다시 들여다 보는 것이다. ‘눈썹’과 ‘볼’을 화자가 거울이 없는 한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눈썹’과 ‘볼’에 물든 파란 물감이 옮겨진 손바닥을 보는 것이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이 어린다.’는 파란 물감의 근원이 순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즉 슬픔의 근본적인 원인이 순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는 푸른 물감과 손금에서 흐르는 강물을 연상한 것이다. ‘맑은 강물’이기에 강물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강물은 슬픔으로 형성된 것이다. 강물은 화자가 사랑하는 순이와 헤어지면서 생긴 슬픔의 양을 의미한다. 또한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를 두 번 연속 사용하여 그 슬픔이 계속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처럼 슬픈얼골’에서 ‘처럼’은 ‘거의 비슷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슬픈얼골’이고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이다. 이를 정리하면 화자는 아름다운 순이를 사랑하고 순이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으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순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황홀’해진 것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사랑하는 순이의 얼굴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은 어린다.’는 눈을 감아도 맑은 강물처럼 큰 슬픔 속에서도 지금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 사랑하는 순이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다.     이 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순이를 잃어버린 역사로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관습적 상징으로 ‘강물’은 역사의 흐름을 의미하고 윤동주의 를 보면 ‘순이’를 ‘잃어버린 역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 윤동주가 이 시처럼 깊이 사랑한 여인을 윤동주 삶에서 찾을 수가 없기에 실제의 여인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시를 보면 전체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가을이 되어 단풍잎이 여기저기서 뚝뚝 떨어진다. 나무와 잎이 헤어지는 것을 보니 슬픈 가을이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를 보면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잎눈과 꽃눈이 마련되 있다. 슬퍼서 나무가지 위에 펼쳐진 하늘을 본다. 소년의 꿈 또는 이상인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면 눈썹과 볼에 희망이 스며든다. 희망 속에서 역사를 살펴 본다. 잃어버린 역사가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역사이다. 지금은 조국을 잃어버려 슬픈 역사이다. 그러나 황홀하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눈을 감아도 아름다우나 슬픈 역사, 내가 사랑하는 역사가 보인다.   앞의 해석과는 다르게 해석한 부분은 ‘하늘’을 관습적 상징인 ‘희망, 꿈, 이상’으로 풀었고, ‘강물’을 ‘역사의 흐름’으로, ‘순이’를 ‘잃어버린 역사’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제목인 과 관련시키면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소년이 잃어버려 슬픈 역사를 사랑하고 이를 회복시킬 것이다라는 것이 이 시가 지닌 의미이다.   필자는 윤동주가 표현하고자 한 이 시의 진정한 의미는 소년이 잃어버려 슬픈 역사를 사랑하고 이를 회복시킬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전한성 ==================================={참고} [윤동주] 눈 오는 지도[地圖]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 처럼 窓밖에 아득히 깔린 地圖위에 덮인다. 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것도 없다 . 壁과 天井이 하얗다. 房안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前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혀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1年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                                   소년 / 윤  동  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윤동주(尹東柱, 1917.12.30∼1945.2.16)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참고   부끄러움의 미학 실상 윤동주의 시에는 많은 부끄러움의 증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대부분 '욕됨/미움/괴로움'등의 정감과 공유적 정서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끄러움의 결벽증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반성,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기 혐오와 연민의 순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산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로 시작되는 "자화상"에서 보여 주는 '미움/가엾음/그리움'의 변증법적 자기 인식과 사랑은 윤동주의 순결벽이 빚어낸, 청순한 젊음의 고뇌와 생래적 부끄러움의 변용적 실체인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는 실향 의식과 상실감에서 모티브가 비롯되며, 존재론적 자기 인식과 정서에서의 변증법적 고뇌가 순결벽과 충돌하는 데서 부끄러움이라는 시적 정서의 실체를 획득하게 된다.     ===========================/// 동주와 "순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소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윤동주, 「소년」       단풍잎이 진다. 가을이다. 시인은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을 노래한다. 단풍이 뚝뚝 떨어지는 건 자연(自然)이다. 자연은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그저 시간을 따라 흐른다. 가을이 오면 단풍잎은 떨어진다. 단풍잎이 떨어져야 겨울이 온다. 단풍잎이 떨어지지 않는 가을도 있을까? “슬픈 가을”은 그러므로 시인이 자기 마음속에서 펼쳐낸 가을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보는 가을이 있다. ‘소년’이라는 시 제목을 보면, 시인은 지금 소년이 지닌 감수성으로 세상을 본다. 소년은 뚝뚝 떨어지는 단풍잎에서 슬픔을 느낀다. 가을이면 단풍잎은 당연히 떨어지는 거라고 소년에게 말할 수 있을까?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라는 진술에 나타나듯, 소년이 된 시인은 가을이 가고, 겨울까지 가면 봄이 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안다. 나뭇가지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 있다. 가을 하늘이다. 봄은 저 멀리에 있고, 지금은 단풍잎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소년은 하늘을 들여다본다.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나는 것 같아 소년은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본다.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소년은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파란 하늘이 손바닥에 들어온다. 손금이 보인다. 살짝 파인 손금 사이로 맑은 강물이 흐른다. 파란 하늘은 어느새 강물이 되어 손금을 넘어 손바닥으로 흐르고, 손바닥을 넘어 어깨로 얼굴로 흐른다. 온통 맑은 강물이 된 소년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시인은 “사랑처럼 슬픈 얼굴”을 이야기한다. 소년은 파란 강물 속에서 슬픈 얼굴 하나를 떠올린다. “사랑처럼”이라는 시구가 붙은 걸 보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사람인가 보다. 소년의 마음에 새겨진 슬픈 얼굴이라? 어린 시절에 겪은 추억만큼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게 있을까? 파란 강물에 빠진 소년은 마음속을 떠다니는 얼굴 하나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상태이다.  시인은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을 불러낸다. 기억은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시인이 기억하는 순이는 어느 한 순간에 고정된 이미지로 떠오른다. 시간이 사라진 공간에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사라진 그 시점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은 순이는 시인이 소년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른을 고집하면 시인은 순이를 만날 수 없다. 시인은 순이를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순이는 밀려나와 시인을 소년 시절로 이끌고 간다. 파란 하늘을 들여다보는 소년은 어느덧 맑은 강물이 되어 순이를 만난다. 아름다운 순이는 하늘이고 강물이고, 또 다른 무엇이다. 소년이 된 시인이 상상하는 세계에 순이는 있다. 순이는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상상이 미치는 자리마다 아름다운 순이가 깃든다. 시인이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어김없이 순이가 존재한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는 진술로 시인은 소년의 마음을 표현한다. 소년은 왜 눈을 감은 것일까? 파란 강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다. 마음속 곳곳에 자리한 순이를 불러내기 위해 소년은 눈을 감고 제 마음에 집중한다. “황홀히”라는 시어가 암시하는바, 시인=소년은 바다처럼 드넓은 마음속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던 순이와 만난다. 소년 화자가 되어 갈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소년은 순이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 펼쳐진 수많은 경계들을 허문다. 파란 하늘을 보면 소년은 파랗게 물들고, 맑은 강물을 보면 소년은 맑게 물든다. 하늘을 보면 하늘이 되고 강물을 보면 강물이 된다. 순이를 보면 소년은 어떻게 될까? 순이는 소년의 마음속에서 자란 또 다른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소년이 됨으로써 자기 마음 깊숙이 숨은 ‘순이’를 시 세계로 길어올린다.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로 시인은 자신이 가고 싶은 어떤 세계를 표현한다. 그곳에는 파란 하늘이 있고, 맑은 강물이 있다. 「우물」에 나오는 우물 속 세계와 유사한 이곳에서 시인은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온갖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자아와 만나려고 한다. 새로운 자아는 아름다운 순이를 상상하는 소년으로 이어진다. 소년은 단풍잎이 떨어지는 일상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의 모습이 소년 화자에게는 그대로 나타난다. 아름다운 순이는 이리 보면 바람에 이는 잎새일 수도 있다. 타자들이 내보이는 아주 작은 상처에도 온몸을 떨며 우는 이 마음이 바로 시심(詩心)이 아닐까? 시인은 아름다운 순이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소년이 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려고 한 윤동주 시인의 품격은 어찌 보면 이런 소년 이미지에서 뻗어 나오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한없이 맑다. 마음속에 그 소년을 품은 시인 또한 한없이 맑다.     =====================///   순수한 사랑을 꿈꾸다     이 시를 읽으면 윤동주가 얼마나 해맑은 감성을 지닌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저항 시인이라는 선입견에 가려 보지 못했던 윤동주의 온화한 내면과 유연한 감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맑은 마음과 순정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어두운 현실에 그토록 괴로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했음을, 그리고 결국 시대의 질곡 속에서 죽음의 길로 떠날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순수한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순결한 자아의 존재가 지속될 수 있겠는가.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다. 제목인 "소년"은 순정한 마음을 지닌 화자의 나이를 가르킨다. 마치 이런 순정한 마음은 소년 시절에만 유지된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의 삶을 타락한 세계에 점점 길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소년은 단풍잎이 떨어지는 가을날 자기가 좋아하는 순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호소한다. 가을의 계절감은 소년의 사랑의 감정을 영롱하게 채색해 준다.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을 '단풍잎같은 슬픈 가을이 떨어진다'고 표현한 데는 소년의 사춘기적 애상의 감정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풍부한 정감도 반영되어 있다.   단풍잎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시간은 흐르고 이 아름다운 가을도 아쉬움만 남긴체 지나가고 말 것이라는 허전한 심사가 이 시행에 응결되어 있다.   단풍잎 떨어진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았다고 한 것은 연희 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청년 윤동주의 긍정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이것은 소년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단풍잎이 떨어진 자리에 봄이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뭇 가지위에 파란 하늘이 펼쳐저 있다. 윤동주는 이렇게 섬세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있다.   소년의 천진한 생각은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붉은 단풍잎과 푸른 하늘의 시각적 대조를 넘어 이룩되는 푸른 물감의 환상이다. 가을 하늘이 너무도 파랗기 때문에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나고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 난다고 했다.   여기서 시인은 '따뜻한 볼'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기서도 청년 윤동주의 온화한 심성이 드러난다. 눈썹과 두볼, 손바닥 까지 파랗게 물들자 이제 손바닥에는 맑은 강물이 흐른다. 이 상상력의 변화 과정은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볼 만 하다.   푸른 하늘이 푸른 눈썹으로, 푸른 눈썹이 다시 푸른 손바닥으로, 그것이 다시 푸른 강물로 바뀌는 전환의 심상은 그 이전에 우리 시사에서 접한바가 없다. 이렇게 신선한 시적 감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학습이나 수련해서 온 것이 아니라 윤동주의 맑은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리라.   윤동주의 상상의 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손바닥에 떠오른 푸른 강물의 심상은 사랑하는 순이의 얼굴로 전환된다. '사랑처럼 슬픈 얼굴'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절묘한가. 진정한 사랑은 슬플 수 밖에 없는 것, 사랑은 그안에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임을 스물두 살의 청년 시인 윤동주는 이미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무능하고 무력한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당신을 재대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떠오를때 정직한 사람은 슬퍼진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고 했다. 혹시 황홀히 눈을 감아본 기억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주체할 길 없는 격정에 두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던 기억.   윤동주는 순정한 감성으로 이러한 체험을 상상 적으로 구성하여 시로 표현 하였다. 이 구절을 쓴 윤동주야 말로 진정한 사랑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존엄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진정한 사랑이 가능 했을리 없다. 거짓된 시대에 어떻게 참된 사랑이 실현되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화자는 "사랑처럼 스픈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계속 강물에 비친다고 했다. 이것 자체가 시대의 모순이며 시인 자신의 내면의 모순이었다.   윤동주는 순수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는 시대에 수수한 사랑을 꿈꾼 것인데 그의식 자체에 이미 비극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125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산골물 댓글:  조회:4051  추천:0  2018-09-19
산 골 물     윤동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 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룰 수 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1939.9(추정).        ...당시의 애환이 담긴 시 한 편을 읽고 싶었다.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분류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들자면, 조국을 잃은 그 내면의 아픔을 시로 가장 솔직히 표현해 놓았다는 점과 시를 읽는 이들의 영혼이 조국의 독립에 가 닿게 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단단히 얼어붙은 산골물이 녹아서 마르거나 막힘 없이 깊은 계곡으로의 퇴로를 열고 흐르듯, 조극의 운명 역시 그렇게 흘러야 한다는 염원(독립, 해방)의 간절함이 깊게 베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시절 '사랑'과 '일'에 집착할 수 없는 젊은 시인의 삶을 역사의 흐름에 맡기고, 서로가 품어 온 독립의 열정으로 바다(독립된 조국)로 가자는 가장 강력한 서정적 시를 동포들에게 조용히 읽힘으로써 조국의 염원을 이루자며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어느 시인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저항시인 특유의 정신인 것이다. 오늘날의 요란한 정치꾼들의 스피커를 통한 아우성이나, 메스컴상의 변증이나 폭력보다도 윤동주 시인의 이 한편의 시가 더 깊은 울림이 되는 까닭을 되새겨 본다. 비록 말은 없으나 그 가슴 깊이 돌돌 샘솟는 샘물을 품은 괴로운 사내를 그리워하면서, 겸허하고도 진실된 마음으로 나라와 이웃 사랑을 위해서 한편의 시를 쓰고 읽는 일상에 취하여 참된 행복을 경험하며, 바다(조국의 통일)와 같은 넓고 깊은 생애를 소망해 본다.      이충재(시인, 시평론가)  ===============///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물결 속에서도  가슴속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밤을 더부러 말할이 업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를수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안저스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맥기고  가마니 가마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1939.9(추정). -  위에서 "가마니 가마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에서 보듯이, 이 작품에서 화자는 현실에서의 '괴로움'을 잊을 길을 바다에서 찾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로 가는 길은 물리적 공간으로서 물이 흐르는 길의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마음의 길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속 깊은 곳"의 물이 바다로 향할 때 바다는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곳이면서 산골의 이미지와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암울한 현실은 산골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갖혀있습니다. 그것이 바다에 이르게 되면, 바다는 사방이 트인 자유의 공간이 됩니다. 산골이라는 수직의 공간은 바다에 이르면 수평의 축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다는 수평의 축이 된다는 점에서 억압의 기재가 해소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뜻하게 됩니다. 여기서 확보되는 자유의 이미지는 바다라는 수평의 공간에서 확대 재생산된다. 그래서 마음 속의 억압은 바다로 흐르는 길을 거치면서 자유를 확보하게 됩니다.  -가만히 가자 바다로 바다로.... 자유의 세계로, 희망과 가능성의 세계로~~~  ====================/// @@ 이 시는 언젠가는 돌아갈 고국과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워하면서 고독과 고통을 견뎌내며 상념의 한복판에서 문득 그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1251    윤동주와 "사랑시" 댓글:  조회:3499  추천:0  2018-09-17
윤동주의 사랑시   ▲ 시인의 연희전문 졸업사진     ◇ 성서반의 그녀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2년 후배인 정병욱과 깊은 교분을 나누게 된다. 그때로부터 졸업하기까지 두 사람은 기숙사 생활과 하숙 생활을 줄곧 함께 한다. 시인이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인 1941년 9월, 그들은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기게 되는데, 이를 두고 정병욱은 「잊지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실은 이 북아현동에는 동주형의 아버님 친구로서 전에 교사를 하다가 전직을 하여 실업계에 투신하고 있는 지사 한 분이 살고 계셨다. 동주 형은 그분을 매우 존경했고 가끔 그분 댁을 찾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분의 따님이 이화여전 문과의 같은 졸업반이었고, 줄곧 협성 교회와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는 바이블 클라스(성서반)에도 같이 참석하고 있었다.”   ▲ 연희전문학교 졸업반 시절, 후배 정병욱과 함께   이 협성교회는 주일마다 그들이 다니던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말한다. 이들은 이화여전 음악관에 있는 소강당을 교회당으로 쓰고 있었고, 예배가 끝나면 곧 이어서 케이블 목사의 부인이 지도하는 영어 성서반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동주 형은 물론 나이 어린 나에게 그 여자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중략] 매일 같이 기차역에서 차를 기다리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며, 교회와 바이블 클라스에서 서로 건너다보는 정도에서 그쳤지마는 오가는 눈길에서 서로 마음만을 주고 받았는지 모를 일이라 하겠다.”   ▲ 누가 그녀일까? 연희전문, 이화여전 성서연구반(뒷줄 우측 첫 번째가 윤동주)   협성교회와 성서반을 함께 다니고, 그녀를 위해 하숙을 옮긴 만큼 ‘성서반의 그녀’는 아마 1939년경 만남이 이루어지고 1941년 말까지 인연이 이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 「사랑의 전당(1938. 6. 19)」, 「코스모스(1938. 9. 20)」, 「소년(1939)」 등에서 보이던 “한낱 벙어리”와도 같았던 풋풋한 첫 사랑, “옛 소녀”인 ‘순이’와는 별도의 인물인 셈이다.   이 시대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시인의 수줍은 성격 탓도 있겠지만, 눈길을 주고 받는 정도가 기록할 만한 사랑이 되는 이유는, 이는 그 시대 교양 있는 청춘 남녀의 일반적인 사랑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연희전문의 경우에조차 광복 후인 1946년 “연희대학교”로 개칭,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비로소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하게 된다. 학생의 신분으로서 이성과의 깊이 있는 만남과 교제가 거의 불가능하였던 그 시대에 함께 차를 기다리고 탄다는 것은 조련치 않은 기연(奇緣)과도 같은 것이었고, 눈길이 마주쳤다 하면 오늘날의 하룻밤 정사보다도 불꽃 튀는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 「달같이」 커 가는 욕망   시인이 정병욱과 함께 이화여전 구내 협성교회에 다니며 영어 성서반에 참석한 것은 1939년 3월 이후의 일이다. 그에 앞서 일찍 시인은 “귀또리 울음에도 수집어지는”, 언제 그녀가 내 마음에 들어왔는지조차 모르는 “고풍(古風) 한 풍습이 어린” 사랑을 한 바가 있다. 그러한 사랑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득하고, 소년처럼 순수하며, 눈 내리는 정물(靜物)과도 같이 플라토닉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색다른 사랑을 경험한다.   달같이 윤동주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 나간다. (1939.9)     남녀의 연정은 그것이 아무리 멋진 낭만과 순수함으로 포장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예의범절과 혼인이라는 복잡한 수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이성과 육체라는 지향점을 향해 내달리는 법이다. 이는 인간은 지능체(智能體)에 앞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과 지성을 지닌 영적인 존재이지만, 결국 ‘몸’이라는 유기적인 물체를 숙주(宿主)로 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몸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인간의 몸은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 봄이 오면 움이 트고 꽃이 피며, 수술과 암술의 화분이 옮겨지면서 가을에는 열매를 맺듯이 육체의 욕망과 그 흐름은 인간의 의지로서는 거역하기 힘든 자연의 기운이요, 힘이다. 또한, 인간의 몸은 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쉽게 마사지고 쇠락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번식을 통해서만이 종(種)의 보존과 영속(永續)이 가능해진다.   그러면서도 인간만큼 지능체로서의 ‘자유 의지’를 내세우고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외적인 법칙에 도전하는 존재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과 지어 ‘신’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절대자 앞에서도 굴복할 줄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성의 몸을 갈망하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동물적 본능에서도 자유롭고자 한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사랑’이라는 정신적 가치이며, ‘혼인’이라는 사회적 장치이다. 동물적 본능을 절제하고 은폐하면서 만들어진 문명적 장치인 셈이다. 그래서 남녀의 연정은 문명적 가치 체계와 사회적 질서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몸을 향해 나아가기까지, 문명적 존재로서의 남녀는 가슴 가득히 숨가쁜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장전시켜야만 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정신력을 대표하는 ‘머리’와 인간의 본능과 자연 속성을 대표하는 ‘몸’ 사이에는 완충지대인 정감의 세계 즉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여 줄 때, 머리는 몸의 행위를 동물적 충동이 아닌 정감의 연장선으로 보고, 인간 문명의 규범에 알맞은 것으로 정당시하기 때문이다.   ▲ 시인의 자필 서명   그런 의미에서, 1939년 23세의 나젊은 시인 동주는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는 비유 자체가 참신하다. 달이 초생달에서 반월을 거쳐 만월로 커 가는 과정이 연륜을 그리는 것과도 같다니. 연륜이란, 말 그대로 나무 줄기가 해마다 하나의 동심원을 그리는 것으로서, 그 해 모든 계절의 바람과 온도와 습도를 기록한다.   오고간 모든 빗방울과 눈송이의 무게, 스쳐 지난 햇볕과 별빛, 새들의 우짖음과 들짐승들의 나지막한 탄식 그리고 숲의 소란스러움들이 고스란히 기록된 세월의 흔적인 것이다. 연륜처럼 피어나는 사랑 또한, 젊은 날의 모든 고민과 즐거움, 애틋함과 처절함, 그녀의 눈빛 하나와 미소 한 점, 떨리는 눈초리와 조신한 손놀림, 잠 못 이루던 밤의 그리움과 대낮의 울렁거림 그 모든 것의 기록인 셈이다.   이제 그러한 것들이 시인의 가슴 속에서 뻐근히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시인의 마음이, 가슴이, 사랑이 구체적인 형체를 얻고 있다. 못 견디게 숨막히는 정감이 몸의 내부에서 육체처럼, 욕망처럼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랑은 달같이 외로운 것이다. 가득 차올랐으나 그 넘치는 에너지와 빛을 해소할 길이 없는 외로움인 것이다.   모든 외로움은 단절에서 온다. 흘러 넘쳐 상대에게 다가가고자 하나, 상대와 하나가 되고자 하나, 그 갈구와 욕망이 차단될 때 외로움은 우리를 엄습한다. 이제 시인의 사랑은 몸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 「태초의 아침」과 꽃   시인은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은 모태 신앙의 소유자이다. 그가 다닌 용정의 은진중학교, 평양의 숭실중학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등은 모두 기독계 계열의 학교들이었고, 광명중학 시절에는 주일학교의 교회 반사(班師)를 맡는 등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나 동생 윤일주의 회억(「윤동주의 생애」)에 의하면 시인은 “연희전문 1,2학년 때까지 여름방학에 하기 성경학교 등을 돕기도 하였으나, 3학년 때부터는 교회에 대한 관심이 덜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가 그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신앙의 회의가 들었던 때인지 모른다”고 한다.   ▲ 연희전문 1학년 여름방학 “하기 아동성경학교” 선생 시절   무엇이 시인의 신앙을 흔든 것이었을까? 그것은 몸이었고 욕망의 깨어남이었으리라. 많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그 교리에 있어서 금욕주의적인 면이 있다. 쉬운 예의 하나로, 『성경』 신약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상상적 욕망마저도 금기시되고 있는 것이다. 몸이 한없이 부푸는 젊은 날, 이 얼마나 가혹한 시련이었을까?   태초의 아침 윤동주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1940년 5월)   이 시는 해석하기가 조금은 조심스럽다. ‘꽃’과 ‘뱀’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사람마다의 이해가 다를 것이고, 자칫 시인의 본뜻과도 어긋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는 『성경』 구약 「창세기」의 내용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우주를 창조하던 태초(太初), 그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다. 땅의 티끌을 모아 형체를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든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고 그가 잠든 사이 갈빗대 하나를 뽑아 만든 인간이 최초의 여자인 이브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갖가지 아름다운 나무가 자라 맛있는 과일이 맺히는 에덴 동쪽의 동산에 두어 그 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 동산의 중앙에는 그 과일을 먹으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것을 먹으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아담에게 엄포를 놓는다. 헌데 하나님이 창조한 동물 중 가장 교활한 뱀이 이브를 꼬셨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염려하여 만들어낸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우며 탐스러운지라, 이브는 곧 그 선악과를 따서 먹고 아담에게도 준다. 그 과일을 먹기 전 아담과 이브는 다 같이 벌거벗고 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나,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들은 심봉사 심청을 재회하듯이 눈이 번쩍 밝아져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 급기야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운 곳을 가리게 된다. 빗나간 얘기지만, 그렇게 보면 옷은 온전히 인간의 창조물인 셈이다.   ▲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혹과 타락」(1808년)   뒤늦게 이를 발견한 하나님은 뱀은 평생을 배로 기어다니도록 벌 하고, 아담과 이브는 모든 것이 스스로 무르익는 풍요로운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다. 그로부터 남자는 땀 흘려 경작하여야만 먹고 살수 있게 되었고 여자는 잉태의 고생을 더하게 된다.   인간은 태초부터 죄를 짓고 비로소 인류로 태어났다는 이러한 “원죄의식(原罪意識)”은 오랫동안 기독교적 가치관이 되었고, 그 죄를 참회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도리요, 그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었다고 하겠다.   다시 이 시를 살펴본다면, 왜서 꽃은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피어난 것일까? 뜻인즉 그것은 아직 계절이 시작되기 이전인, 그보다는 인류 문명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인 태초의 아침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태생적으로 꽃은 이미 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음이다.   문학적으로 꽃은 여성을 상징하며, 초경이나 초야(初夜)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인 유추에 의하면 ‘꽃’은 여성 성기를, ‘뱀’은 남성 성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이미 이 “모든 것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몸과 몸의 만남으로 결합될 수 밖에 없는, 결합되어 인류라는 ‘종’을 보존하고 번식하며 엮일 수밖에 없는 ‘죄업’은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것인 셈이다.   ▲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미완성작 「아담과 이브」(1917-1918년)   동물은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다시 어류와 양서류, 파충류를 거쳐 포유류, 영장류 등 여러 종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복잡하고 ‘고급’스러우며 정치(精緻)한 존재인 인간은 진화의 단계를 보여 준다 하기보다는 무(無)에서 유(有)로, 단순함에서 다양함으로 나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대변할 뿐이다. 그리고 풍요로움과 생명에 대한 지향은 자연과 우주 운행의 미덕인 셈이다.   문제는 번식과 성장을 통한 모든 생명의 존재와 발전은 욕망을 그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움직이는 힘, 그리고 그 기운의 바탕에는 욕망이 동반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뱀과 함께”하고 있다. 뱀이라는 욕망의 부추김과 꼬심이 없이는 끊임없이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창세기」에서처럼, 욕망을 상징하는 뱀의 꼬심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간은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동물적 존재에 그쳤을 것이고, 생식을 위한 동물적 본능 외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선악에 눈을 떴다는 것은 스스로 욕망을 자각하였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자신 내부의 욕망을 깨닫고 그로부터 수치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하여 한철뿐인 번식만을 위한 동물의 사랑 방식과 ‘시도 때도 없는’ 인간의 치정 행각은 욕망을 자각하고 하지 않음의 차이라 하겠다.   마찬가지로 요염스럽게도 “빨--간 꽃”, 그에는 욕망이라는 ‘독’이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다. 욕망은 그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온갖 죄악으로 세상을 오염시킬 위험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내재된 그 욕망의 죄를 읽고, 수치심으로 시인은 그처럼 괴로워했던 것이 아닐까? 다행히도 그로부터 일년 뒤인 1941년 5월 31일, 시인은 「또 태초(太初)의 아침」에서, 성장통을 멈추고 한걸음 나아간다.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밝아// 이브가 해산 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이는 앞의 시와 같은 맥락의 시로서, 몸의 욕망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부끄러움을 깨닫는 죄를 짓고, 의연히 세상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그 부끄러움을 감내하여야만이 인간은 사랑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에 이르러 시인은 이미 남녀의 사랑만이 아닌, 식민지 시대에 적응하며 사는 지성으로서의 부끄러움과 부끄러운 채로 자신의 창작과 삶을 통해 세상에 항거하겠다는 사회적 의지로 넘어서고 있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라는 숨막히는 욕망의 변증법은 젊은 날 모든 이의 삶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명제이기도 한 것이다.     ◇ 에필로그, ‘동주 형님’과 ‘동주 오빠’     ...그때 함께 산책을 하던 친구들은 시인을 ‘윤동주 시인’도, ‘윤동주 선생’도 아닌 ‘동주 형님’이라 부르곤 하였다. 그만큼 시인은 젊어서 세상을 하직하였고, 우리 또한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연변과는 너무나도 가까운 시인이었다.   ▲ 시인의 시작 노트: 『나의 습작기의 詩 아닌 詩』, 『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그 분이 지난 번 「윤동주의 사랑시」 2탄의 교정을 보고 나서 이런 메일을 보내 주었다. “동주 오빠가 고백을 그때그때 못 한 덕분에 시를 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ㅋㅋ” ...부족한 나의 글이 시인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에 욕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연재를 마친다.     ◇ 시인   ▲ 용정시 인근 동산에 자리한 윤동주 묘소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이민 4세로 중국 용정시 명동촌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1935.9.1-1936.2),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1936.3-1938.2.17),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1938.4.9-1941.12.27)를 거쳐 일본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1942.4-6),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 선과(1942.10.1-1943.7)를 다녔다.   은진중학 당시인 1937년 8월에는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 백석 시집 『사슴』을 필사하여 소장하고, 9월에는 『영랑시집』을 정독한다. 1939년 연희전문 당시에는 릴케, 발레리, 지드 등의 작품을 탐독하며, 프랑스어를 독습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서정주의 『화사집』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38년 4월 9일, 시인은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운다. 1939년 3월에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정병욱과 알게 되어 친해지며, 함께 이화여전 구내 협성교회에 다니며 영어 성서반에 참석한다.   1941년 5월,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에서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기 시작하고, 9월에는 요시찰인 김송에 대한 일본 경찰의 주목이 심해지자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들어간다.   시인은 1941년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한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출간하려 했으나, 한글 발표가 금지되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한 주변의 만류로 자필본만 남긴다.   1943년 7월 14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 재학 중 귀향을 앞두고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 받는다. 그 후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 중 의문의 주사를 자주 맞고, 1945년 2월 16일에 2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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