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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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짜와 가짜 댓글:  조회:336  추천:0  2022-03-18
  진짜와 가짜   김훈 / 칼럼     들어가면서   두 녀인이 한 아기를 가지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다툼을 하다가 왕을 찾아간다. 왕 앞에서도 두 녀인이 또다시 다투기 시작한다. 두 녀인의 다툼을 조용히 듣고 있던 왕이 판결을 내린다. “둘이 서로 제 아기라고 우기니 할 수 없다. 아기를 둘로 잘라 반씩 나누도록 하라.”   이에 한 녀인이 흔쾌히 판결에 따르겠다고 한다. 자신의 아기가 아니기에 그 아기가 죽든 말든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엄마는 차마 아이를 죽일 수 없기에 차라리 가짜엄마에게 아기를 주라고 간청한다. 이 장면에서 왕이 진짜엄마를 가려낸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인 솔로몬 왕이 진짜엄마를 가려낸 이야기다.   ‘진짜와 가짜’라는 명제로 글 한편 써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이 이야기다. 진짜와 가짜를 경우에 따라 진실과 거짓이라고도 한다. 가짜는 지금 류행어에까지 오른 짝퉁과 맥을 같이한다. 사전엔 짝퉁이란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올라있다. 상품세계에서 흔한 짝퉁이 인간세계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진짜엄마와 가짜엄마’를 가려낸 이야기다. 내가 직접 당한 ‘짝퉁김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图片   ‘또 하나의 나’   80년대 중반 내가 한창 문단에서 활약상을 보일 때 ‘가짜김훈’이 출몰했다. 나는 그 가짜를 ‘또 하나의 나’라고 별칭했다. ‘또 하나의 나’는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대상을 받은 나의 단편소설 명인데 그 소설명을 빌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나’가 첫 모습을 드러낸 곳은 연길현 동불사 공소합작사였다. 당시 공소합작사는 농촌신용사 역할도 했는데 ‘또 하나의 나’는 공소합작사 책임자를 찾아 급히 생활체험을 나오다 나니 현금을 적게 가지고 나왔다면서 돈을 선대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발표한 작품을 스크랩해서 모은 두툼한 서류철을 증거로 내놓았다.   공소사의 책임자는 내가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동불향 문화소 소장인 허흥식시인의 친구였다. 그도 내가 허흥식시인과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던 차라 ‘또 하나의 나’를 확인도 할 겸 문화소 소장을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그러자 ‘또 하나의 나’는 잠간 가볼 데가 있다고 핑게를 대고 줄행랑을 놓았다.   ‘또 하나의 나’가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도문시였다. 대학 동창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첫마디에 도문에 왔으면 왜 련락도 하지 않는가고 볼 부은 소리다. 간 적이 없다고 하니 내가 도문시 빈 호텔에서 영화배우 모집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나’의 작간이다.   공안국 국장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잡아놓으라고 부탁을 했는데 한발 늦어 놓치고 말았다. 그자는 20분 전에 호텔을 떠나 종적을 감췄다. 호텔 측의 말로는 영화배우를 모집한다고 하니 숱한 예쁜 처녀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나’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흑룡강성에 있는 윤림호소설가의 집이다. 윤림호소설가와는 작품을 통해 서로 아는 사이였지만 대면은 한번도 못했다. 언젠가 윤림호소설가가 전화로 흑룡강성에 오면 자기가 사는 고장에 꼭 들려달라고 했다. 나는 가겠다는 약속만 해놓고는 일정을 잡지 못했다.   이번에도 흑룡강성 해림에 있는 대학 동창생이 왜서 윤림호소설가를 만나러 가면서 자기한테는 들리지 않았냐고 전화가 와서야 ‘또 하나의 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알게 되였다. 그자는 윤림호소설가의 집에서 백숙까지 대접받았다나. 윤림호소설가는 그자의 얼굴 모습은 책과 신문에서 본 나의 모습과 비슷했고 나이 역시 비슷하다고 했다.   그 후로 ‘또 하나의 나’는 종적을 감추었다. 혹 그자가 사기행각을 계속 벌이고 있는데도 내가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참, 담도 크고 신출귀몰하는 자다. 분석을 해본다면 이자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나의 작품을 죄다 수집하는 치밀성을 보였고 나의 꿈이 조선족과 관련된 영화를 찍는 것임도 알고 있었다. 윤림호소설가와 독대할 정도면 조선족 문단이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알고 있는 자이다.    지능범죄자임이 틀림없다. 암만 생각해도 누군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하여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 글을 통해 ‘또 하나의 나’에게 한마디 부연할 수 밖에 없어 고른 말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사기군은 죽어서 지옥 가면 혀가 뽑히는 형벌을 받는다”이다.   图片   가짜작가로 오해받은 굴욕    ‘가짜김훈’이 ‘진짜작가’ 행세를 하고 사기행각을 벌인 데 대해 분을 참을 수 없는데 황당하게 ‘진짜김훈’이 ‘가짜작가’로 오해받는 굴욕을 맛보는 상상 밖의 일을 당한 적이 있다.   세계 명작 중 널리 알려진 장편소설 《양철북》이 있다. 이 소설은 귄터 그라스의 대표작이다. 나치의 통치하에 있던 독일의 력사와 사회상을 그린 장편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이 글에서 작품이나 작가를 론하려는 것이 아니고 작품명 때문에 하마트면 ‘가짜작가’로 오해를 받을 번한 일이 있어 《양철북》을 거든다. 어느 해 여름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행사가 있었다. 마침 내가 미국에 체류중이여서 문우의 소개로 행사에 참석하게 되였다.   시인인 문우가 행사에서 나를 거창하게 소개했는데 점심식사 때 한국에서 초청강사로 왔다는 녀성 수필가가 내 곁에 앉게 되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수필가가 갑자기 영화를 화제에 올리면서 《양철북》 얘기를 꺼냈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라고 했다. 양철북? 생소한 영화제명이다.   《양철북》이 중국어 제명으로 《铁皮鼓》인데 그 자리에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본 세계명작 반렬에 오른 영화는 제명이 거의 모두가 중국어로 되여있다. 영화명 번역이 나라마다 달라서 잠간 기억을 들추어내서 《양철북》과 근사한 영화제명을 고르는 사이 우리 둘의 대화는 끊어졌다.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행사가 끝나고 문우와 술 한잔 하는 자리에서 문우가 갑자기 “영화공부를 했다는 량반이 오스카상을 받은 《양철북》을 보지 못할 수는 없는데.” 한다. 그 영화 줄거리가 어떤 거냐고 물어서야 나는 《铁皮鼓》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근데 왜 《양철북》 얘기를 꺼내지? 문우의 말로는 내 곁에 앉았던 그 수필가가 문우에게 유명 작가라는 사람이 《양철북》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내가 ‘가짜작가’가 된 것이다.   영화제명 번역이 다른 탓에 내가 굴욕을 당한 것이다. 작가도 때론 엉뚱하게 수모나 굴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받아안았다. 영화제명이 다른 것으로 해서 하마트면 망신을 당할 번한 일이 또 한번 있었다.   1989년 처음 한국에 갔을 때 서울예대에서 교수로 있는 지인이 중국 영화에 관해 강의해달라고 했다. 그때 마침 북경영화학원 석사연구생반을 다닐 때라 모든 사유가 영화에 몰려있었기에 중국 영화 얘기는 편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중국 영화에 대해 소개를 마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한 수강생이 일본 영화와 중국 영화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물었다. 나름 대로 내 견해를 피력했는데 그 수강생이 일본 영화 한편을 거들었다. 여기서 또 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였다. 영화제명이 내 귀에 익숙한 제명이 아니다.   수강자가 거든 영화제명이 《라쇼몽》이다. 들어보지도 못한 영화제명이다. 몇십명 되는 수강생들 앞에서 질문한 학생에게 영화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어보지도 못한 영화라고 할 수도 없다. 중국의 최고 영화대학에서 석사공부를 하고 씨나리오도 썼다는 사람이 일본 명작을 모른다면 필경 또 작가행세나 하고 다니며 강의료나 챙기는 ‘가짜교수’로 락인 찍일 것이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일본 영화라고 했으니 필경은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다. “라쇼몽, 라쇼몽.” 입속으로 중얼대다가 저도 모르게 내 입에서 터져나온 말이 중국어다. “罗生门!” 중국어로 영화제명을 말하니 수강생이 고개를 갸웃한다. 해서 흑판에 영화제명을 중국어로 쓰니 바로 그 영화라고 한다. 순간 속으로 맙소사를 부르짖었다. 1950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고 세계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BBC 선정 력대 최고의 외국 영화에서 《라쇼몽》은 4위를 차지했다.   지금은 인터넷이 있어 작품명이나 작가명을 입력하면 곧바로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나와서 아주 편리해졌다. 이제 다시는 작품명이나 작가명 번역이 달라서 구설수에 오르거나 수모나 망신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图片   진짜와 가짜를 가려 못 낸 일화   작가가 글을 쓰려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설정해야 하는데 그런 작중인물들은 작가의 생활체험에서 온다. 글을 쓰느라고 이런저런 생활체험을 많이 했는데 가장 인상 깊은 생활체험이 하나 있다. 작중인물로 쓸 원형을 미리 정하고 생활체험을 할 때도 있고 정한 원형이 없이 그냥 삶의 현장에서 작중인물을 고를 경우도 있다. 현장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 못한 경우가 한번 있었다.   80년대 중반에 중편소설 를 쓰기에 앞서 생활체험 차 정신병원을 찾았다. 지인인 병원 원장이 직접 안내를 맡았다. 정신병 환자들의 생활공간까지 들어가보았다. 그날 환자들이 군데군데 모여앉아 트럼프, 화투를 치고 있었다.   원장하고 환자들과 대화를 나눠도 괜찮은가고 물으니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정서가 이미 안정상태인 환자들이니 얘기를 나누어도 된다고 했다. 해서 나는 나에게 자주 눈길을 주는 환자에게 “놀음이 재미있나? 놀음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나?” 등등 아주 편한 질문을 했다. 나의 물음에 대답을 잘하니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더니 그 환자가 아주 짜증 난 기색을 보이면서 하는 말이 귀를 의심할 정도다. “전 환자가 아닙니다.”   환자가 아니면 왜 환자복을 입고 환자들 속에 끼여 트럼프를 치는 ‘쇼’를 벌이고 있냐고 묻기도 전에 원장이 웃음을 지으면서 해석을 한다.   “놀이판을 조직하고 환자들을 곁에서 관리하라고 한 놀음판에 의료일군 한명씩 끼워넣었네. 듣자니 작가들의 눈은 예리하다더군. 뭐 매 같은 눈이라던가. 난 자네가 가짜환자와 진짜환자를 가려내는 안목을 가진 줄로 알았는데. 허허허…”   원장의 말에 환자들이 벌린 놀음판에 의료일군을 몇을 끼워넣었는지 확인해보려고 매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눈길을 낱낱이 뜯어봤지만 누가 환자고 누가 의사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정상인이라고 보면 다 정상인 같아보이고 환자라고 보면 다 환자같이 보인다. 정상인이 ‘진짜’이고 정신병 환자가 ‘가짜’라고 설정한다면 진짜와 가짜를 작가의 안목으로도 가려낼 수 없다.   정신병원 방문을 마치고 원장과 단둘이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내가 물었다.   “정신병 환자와 정상인의 차이가 뭔가?”   “겉보기엔 정신이 멀쩡한 정상인이라도 다 이런저런 정신질환을 갖고 있네. 정신질환이란 사람의 사고, 행동, 감정 같은 것에 영향을 미치는 병적인 정신상태인데 쉽게 해석하면 받는 스트레스도 정신질환에 속하네. 점점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고 있는 세태에서 과욕, 말하자면 권세욕, 금전욕 등등 여러가지 욕구로 야기되는 욕구팽창, 욕구불만도 정신질환이네. 정신적인 질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정신병 환자와 정상인은 별 차이가 없네. 단 하나, 정상인이 환자와 다른 차이는 스스로의 통제력이 있는 것이네. 통제력을 잃으면 정신병 환자나 다름이 없네.”   원장의 말에 계시를 받아 쓴 것이 중편소설 이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과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과 사회에 가져다준 피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호소한 작품이다. 《장백산》2022년 제2호(계정)
[김훈 한복론난 말한다1] 조선족이 한복을 입었는데 웬 시비질이냐? ►(조글로계정)원문 및 댓글보기(조회수 1만3천) [김훈 한복론난 말한다2] 한복을 보는 시각과 사유의 차이 ►(조글로계정) 원문 및 댓글보기(조회수 9199)
14    청춘 만세! 댓글:  조회:379  추천:0  2021-06-03
작가에 대한 별칭이 몇 개 있다. 청년작가, 중견작가, 원로 작가 등등. 지금까지 글을 써오면서 나한테 가장 많이 차려진 별칭이 청년작가이다. 그 시절 글도 많이 썼고 상도 많이 탔다. 청년작가 생애에서 벅찼던 날은 제3차 전국청년작가대표대회에 참석한 날이였고청년작가 생애는 1994년 북경에 전근하면서 마무리됐다.       지난달 29일에 있은 북경 청년작가 모임에서 청년작가시절의 감각을 되살렸다. 청년작가들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나의 작가 생애에서 그래도 청춘시절이 태여난 보람을 자랑한 시절이였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청년작가가 되기도 쉽지 않거니와 중견작가로 자리매김을 하기란 더욱 쉽지 않다. 청년작가시절을 마무리하고 한동안 필을 놓다가 다시 녹 쓴 필을 갈 때 문학을 다시 시작하는 고초도 겪었다.     청년작가시절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던 문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청년작가로 등단했다가 이런저런 리유로 필을 놓은 문우들이 꽤나 있다. 소설가로 등단했다가 학자로 변신을 한 문우들이 있는 가 하면 문학지 편집으로 정년을 맞은 문우들도 있고 유명을 달리한 문우들도 있다.     세미나에서 발언하는 청년작가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의 바람은 딱 하나다. 청년작가시절을 빛내면서 제발 "중도하차"하지 말고 계속 중견작가, 나중엔 원로작가의 별칭까지 받기를 기원했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 앞자리 가운데에 앉힐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벌써 이런 자리에 앉게 되였나? 고향에 있을 때 행사 때마다 선배작가, 원로작가 분들의 좌석배치까지 신경을 써왔던 시절이 별로 어제 같은데 오늘은 내가 그 자리에 앉으니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다.        어제 읽은 기사로 세월의 무정함을 다소 달랠 수 있었다. 년세가 106세인 할머니가 지금도 무용수로 여생을 빛내간다는 기사다. 그 분이 기자의 취재를 받으면서 기자를 꾸짖은 말씀이다.       "나는 늙었다(old)와 '나이(ag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늙었을 때 느끼는 기분을 나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 지금도 내 상태는 어렸을 때와 같다. 나는 늙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 조금 더 오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를 배웠을 뿐."     최고령 무용수로 지금도 무대에 서고 있고 안무도 하시는 분의 존함은 호주의 아일린 크레이머 할머니이다. "늙었다"와 "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분을 내가 할머니라고 했으니 그 분의 꾸지람을 받을 것 같다. 그냥 현역 무용수라고 하면 그 분의 칭찬을 받을 것 같다.     "좋은 장소에 가면 좋은 기를 받는다" 말이 있다. 청춘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청춘들의 기를 듬뿍 받아 활력을 찾은 기분 좋은 하루였다. 현역 무용수의 말씀대로 내 사전에서 "늙었다"와 "나이"라는 단어는 삭제해야겠다. 대신 "청춘 만세!"라는 단어를 추가해야겠다.   
13    격려 한마디 댓글:  조회:1123  추천:0  2013-02-19
 격려 한마디 김훈 그때 그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 한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마디의 격려가 아닐까. 어릴 적 부모님의 따스한 한마디, 선생님의 신뢰어린 격려 한마디로 인생의 좌표를 굳게 설정한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비록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작은 물결이 모여 큰 물결이 되고, 그 힘은 일찍이 꿈꾸지도 못했던 거대한 제방을 허물어뜨린다.
12    거미이야기(2) 댓글:  조회:1372  추천:0  2013-02-18
  거미이야기(2) 김훈 "어휴…" 그제야 엄마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땅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습니다. 저녁에 아버지한테 엄마가 뱀 말을 하니 아버지는 하품 문 소리로"새끼가진 놈 쉽게 안 당해"라고 말하곤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 녀인의 집에 갔다온 이튿날 아침, 나는 학교정문앞에서 어김없이 그 녀인을 만났습니다. 그 날따라 녀인은 차에서 내려 나한테 다가왔습니다. "그날 죄송해요" "간다는 말 한마디없이 나온 제가 오히려 죄송해요." "어디가서 잠간 이야기나 나눌까요?" "그러지요." "저의 차안으로 가시죠." "할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여기서 하시죠. 바깥 공기가 훨씬 좋은데요." 돈을 주면서 앉으라해도 그 녀인의 차엔 앉을수 없다는게 그때 나의 오기였습니다. "청들 일이 하나 있는데 자주 우리 집에 와줄수 없겠나요?" 천만에 말씀. 모르고 한번이지 난 다시는 안가요! "청소부로 와달라는게 아니얘요." 청소부가 아니면 뭐로? 보모로? 아니면… "그저 같은 학부모신분으로 자주 놀러오면 고맙겠어요." 같은 학부모? "다른 뜻은 아니구요. 북경에서 같은 조선족 학부모를 만난다는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요." 난 그런 반갑다는 마음을 가져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얘요. "사실 애 공부 때문에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는 북경에서 홀로 보낸다는게 얼마나 외로운지 모르겠어요." 외롭다?! 하긴 그렇겠지. 허구헌날 하는 일없이 궁궐같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느라면 외롭기도 하겠지. 그러나 난 외로울새도 없는 사람이지. 하긴 가끔 남편의 품이 생각날 때도 있지만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그리움이야. "그저 자주 놀러와서 말동무를 해주면 파출부로 일하면서 받는 보수보다 더 드리겠어요." 술을 마시면서 말로 안주한다는 말이 있다더니 나보고 외로움을 달래는 말동무가 돼달라구? 웃기네 정말. 이봐요, 아무리 돈 있고 잘산다고 해서 사람 그렇게 보면 못써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세상 비웃어도 가난만은 비웃지 말라고. "저의 말을 혹시 다른 뜻으로 오해하고 계신지…" 나는 녀인의 말을 가차없이 잘라버렸습니다. "말동무를 찾으시려면 구연단에나 가보세요. 구연단 배우들은 말이 변설이니까요." 그러곤 나는 자리를 떴습니다. 자전거를 타고가다가 나는 내 두빰으로 뜨거운것이 흘러내리고 있는것을 뒤늦게야 감촉했습니다. 나는 울고 있었던것입니다. 그 뒤로도 그 녀인은 학교정문앞에서 나를 만나면 그냥 예전과 다름없이 목례를 보냈습니다. 나도 그저 목례로 답례했습니다. 어느덧 락엽이 지는 마가을이 왔습니다. 북경에서 두번째 맞는 마가을입니다. 올해 북경의 마가을엔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의 청승맞은 울음소리를 시 중심에서도 자주 들을수 있습니다. 북경석간에는 실린 글은 북경에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나타난것은 북경의 쓰레기 처리장에 처리되지 못한 쓰레기들이 그냥 로천에 방치되여 있기때문이라고 해석하고있습니다. 까마귀는 썩은것을 먹기 좋아하기에 조류중에서 "청소부"로 불리우는 익조라고 하지만 도심에서 까마귀소리를 듣는다는것이 희한스러우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께름직합니다. 섬찍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날 아침 아이를 자전거뒤에 앉히고 거리로 나오니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길가던 한 늙은이가 그 소리를 듣더니 침을 역정스레 세번 내뱉으며 뭐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저 할아버지가 왜 저래요?" 아이가 물었습니다. "까마귀소리를 듣고 기분 나쁘다고 그러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침을 아무데나 뱉으면 돼요?" "글쎄 말이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는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맘때면 남편은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전화를 두번 쳤지만 신호음만 갈뿐 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녀동생 집으로 전화를 하니 마침 동생이 받았습니다. "나 언니다…" "언니 막 전화를 하려던 참이얘요. 언니 빨리 집에 와야겠어요." 녀동생의 다급한 소리에 몸이 오싹해났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니?" "아저씨가 뇌익혈로 쓰러졌어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나는 무작정 그 길로 역전에 가서 그날 연길행 기차표를 끊었습니다. 기차표를 끊고나니 아들이 걱정되였습니다. 늙은 량주만 사는 주인집에 맡길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부하는 애를 데리고 갈수도 없었습니다. 막상 급한 목을 당하니 그래도 먼저 떠오르는것이 그 녀인이였습니다. 지난번에 자주 놀러오라고 하는 그 녀인의 청을 몰인정하게 거절해버린것이 못내 후회되였습니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고려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내가 체면불구하고 그 녀인의 집으로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하자 그 녀인은 두말없이 내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허리를 여러번 꺽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곱씹었습니다. 정말 고맙게만 느껴지는 녀인이였습니다. 남편은 조용히 병상에 누워있었습니다. 말을 할수 없었고 두눈도 뜰수 없었습니다. 곁에서 하는 말은 알아듣는지 가끔씩 고개를 약간씩 움직였습니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일 정도로 여윈 남편의 몸을 만지며 나는 울고울었습니다. 남편은 낮에는 출근하고 밤이면 아이의 학비를 버느라고 가정교사로 나갔습니다. 쉬는 날이 따로 없었습니다. 집에 가 보니 랭장고에는 먹다남은 김치와 고추장밖에 없었고 방한구석엔 빈 라면상자들이 쌓여있었습니다. 혼자 살면서 때시걱을 그냥 라면으로 에때운 모양입니다. 남편은 자식의 출세를 위해 혼신을 다 바쳤습니다. 남편은 조용히 병상에 며칠 누워있다가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이는 세상을 떠나면서 입가에 애써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습니다. 그 미소는 아들이 떠올리게 한것입니다. 그날 나는 녀동생의 휴대폰으로 북경에 있는 그 녀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 애가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습니다. 나는 아들보고 지금 곧 전화에 대고 피아노를 쳐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래요?" 아들이 물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운명직전이라는 말을 아들에게 할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먼곳으로 출장 가시게 됐는데 네가 치는 피아노소리를 록음해 가지고 가려고 그런다." "아버지 곁에 있나요?" "출장준비를 하느라고 잠간 어딜 나가셨다. 어서 네가 가장 잘 치는 곡을 몇곡 치거라." "어머니, 아버지보고 출장갔다 돌아오실 때 북경에 꼭 들르라고 전해주세요. 아버지 보고싶어요." 아들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남편의 귀전에 바싹 가져다 댔습니다. 남편의 얼굴표정은 변함없이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 남편의 눈귀가 촉촉이 젖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남편은 아들이 치는 피아노소리를 듣고있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의 입가에는 알릴락말릴락하게 흐뭇한 미소가 실렸습니다. 남편은 그 미소를 지닌채 떠나갔습니다. 남편은 조명이 황홀한 무대에 피아노연주가로 당당하게 나선 어엿한 아들의 모습을 두눈에 담은채 떠나갔을것입니다.
11    《거미이야기》(1) 댓글:  조회:1518  추천:0  2013-02-18
단편소설 《거미이야기》(1) 김훈 밤알만큼 큰 거미가 처마밑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줄을 나는 엄마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때 나는 엄마 배속에 있었습니다. "징그럽게도 큰 거미네." 엄마 말을 알아들었는지 거미가 거미줄을 치던것을 그만두고 처마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엄마가 거미줄을 거둬내려고 비자루를 찾아쥐니 마루에 앉아 잎담배를 썰던 아버지가 칼에 묻은 잎담배진을 긁어내며 말했습니다. "관둬. 새끼가진 거미야." "가뜩이나 궁상맞은 집에 거미줄까지 있으면 보기 좋겠나요?" "그것두 새끼밴 녀자가 있는 집이라고 일부러 찾아와서 새끼 나을 자리를 만드는게야." 그 말에 엄마는 비자루를 내려놓았습니다. 그 녀인을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납니다. 북경의 서쪽 제2순환도로변에는 중국에서 최고음악학부인 중앙음악대학이 있습니다. 내가 매일 아침 중앙음악대학 소학교반에서 통학생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아들을 학교문까지 데려다주고 저녁에 마중할 때면 그 녀인은 마치도 약속이나 한듯 그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내가 아무데나 내버려도 주어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녹쓴 자전거에 아들을 싣고 학교 정문에 도착하면 같은 시간에 맞은편에서 색갈이 노란 고급승용차 한 대가 소리없이 미끌어져 와서는 정문앞에 멈추어 섭니다. 바로 그 녀인의 자가용입니다. 차문이 열리면 귀공주차림을 한 녀자애가 튕기듯 나옵니다. 그 녀인의 딸인데 우리애와 한반에서 피아노를 배웁니다. 그 녀인은 운전석에 앉은 그 자세로 자기 딸한테 눈이 시도록 하얀 장갑이 끼워진 손을 정답게 들어주고는 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보냅니다. 고운 입 가장자리를 약간 끌어올리면서 웃는듯마는듯한 미소를 살짝 달면서 아미를 숙이는 그 순간 내 허리가 어쩔수 없이 굽혀집니다. 그 녀인처럼 가볍게 목례로 답례하려고 몇십번이고 별렀지만 정작 그 녀인의 목례를 받는 순간 왜서 내 쪽이 웃어른이나 선생을 대하듯 어쩔수없이 허리가 굽혀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학부모 처지에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조선족인데 그 녀인이 몰고다니는 고급승용차나 그 녀인의 화려한 옷차림에 질려서인지 아니면 범접할수 없는 그 도고한 모습에 주눅이 들었는지… 그 녀인은 같은 녀자가 보기에도 곱구나 하고 다시 한번 뒤돌아 볼 정도로 미인입니다. 고운 입, 고운 눈, 고운 코, 고운 얼굴형, 그것도 고운 모든것이 맞춤하게 자리를 잡은 그런 미인입니다. 구태여 묘사할것 없이 그 녀인은 북경의 호화스런 백화점에서 가끔 볼수 있는 그런 귀부인형입니다. 아이를 봐선 나와 비슷한 30대 초반이겠지만 얼굴이나 옷차림새를 봐선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녀인의 딸이 친딸이 아니라 남편의 전처 소생이 아니면 혹시 양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 녀인은 젊고도 화사합니다. 딸애를 내려놓은 그 녀인의 자가용이 가볍게 미끄러지듯 떠나갈 때면 낡은 자전거손잡이를 쥔채 그 녀인의 차를 눈바램하는 내가 한결 초라해 보입니다. 세상 팔자 다 나름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내 팔자가 앞으로 넘어져도 코 깰 그런 팔자가 아니지만 그 녀인은 팔자 좋기로 뒤로 넘어져도 떡함지에 넘어질 그럴 팔자인가 봅니다. 녀자 팔자는 어떤 남편을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북경에는 자식공부 시발을 하려고 직장을 버리고 남편곁을 떠나 온 녀인들이 수천명 된다고 합니다. 내 경우처럼 대개 어릴적부터 전공해야 할 예술, 체육분야를 지망한 어린 학생들의 부모들입니다. 해마다 음악계의 유능한 인재들을 배출하는 중국음악대학은 음악에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선망하는 곳입니다. 음악은 아마 천부적인것을 떠날수 없는 예술이여서 그런지 이 대학에는 소학교반부터 중학교반, 고중반, 본과전업반에 이르기까지 구전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소학교반에 들어가려고 해도 전국의 수십만에 이르는 지망자들과 경쟁을 해야 합니다. 소학교반에 들어가는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비유할만치 경쟁이 치렬합니다. 소학교반에 들어가서 다시 중학교반으로 그다음에 고중반, 본과전업반까지 올라가려면 역시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본과전업반까지 내처 올라간 사람은 그야말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승천하여 별처럼 빛나는 사람은 몇이 안됩니다. 중도에 별찌처럼 빛 한번 발산해 보지도 못하고 어둠속에 영영 자취를 감춘 음악지망생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속담을 빈다면 이런 지망생들은 "십년공부 나미아미타불"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십년 공부 나미아미타불"이란 속담보다도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면서"개천에 룡이 난다"는 속담을 희망사항으로 삼습니다. 하여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개천에서 난 룡"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저없이 모든것을 바칩니다. 돈도 가정도 지어는 자기의 삶까지도… 공부하는 자식을 동반한 부모들 중에 조선족들도 꽤나 된다고 합니다. 이들 대부분이 학교와 가까운 곳에 집을 세맡고있습니다. 대체로 집에서 부쳐오는 돈으로 아이 공부에 드는 비용과 북경에서의 생활비를 해결하는 녀인들이 대부분인데 이런 부류는 대개 사업을 하거나 돈 만들줄 아는 말하자면 시체말로 잘 나가는 남편을 가진 녀성들이지만 나처럼 그런 남편을 가지지 못한 녀인들은 북경에 와서 이런 일 저런 일 닥치는대로 하면서 아이공부에 드는 비용을 해결합니다. 나의 남편은 연길 시교의 자그마한 소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칩니다. 몇푼 안되는 남편의 로임에 매달려 사는 내 경우에는 애초부터 자식을 피아노공부를 시킬 엄두마저도 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자리를 보고 발을 펴라는 말이 있지만 저의 남편은 무작정 오기를 부렸습니다. 그 오기가 뭔지 압니까? 남편은 우리 애가 태여나자마자 이런 맹세를 했습니다. "장차 우리 애한테 피아노공부를 시켜 꼭 유명한 피아노연주가가 되게 하겠소." 소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그저 발풍금이나 손풍금만 만지는 남편이 어릴적에 가진 꿈이 바로 피아노연주가가 되는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 꿈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집안의 경제사정도 경제사정이지만 그럴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던것입니다. 자식을 피아노연주가로 키우자면 우선 피아노가 있어야 합니다. 만원에 가까운 피아노를 장만하기 위해 우리 내외는 1년동안 한국의 막로동판에서 피땀을 흘렸습니다. 우리 내외의 꿈이 자식을 피아노공부시키는것이라고 하니 한국의 한 친척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때 한국에 이런 말이 류행이였어요. '빨리 후닥닥 망하려면 국회의원에 립후보하고 서서히 망하려면 자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라'. 이 말이 무슨 뜻인줄 모르시겠죠. 뜻인즉 국회의원 선거를 몇번 치르고 나면 립후보자의 가산이 거들이 나고 자식에게 피아노공부를 시키면 피아노를 장만하는 비용에다 수업비용에 가정교사비용, 거기에 가끔씩은 찔러주어야 하는 뒷돈에 이르기까지 한도 끝도없이 드는 비용에 가산이 날려간다는 거예요. 가산을 날리는게 피아노공부얘요." 그러나 친척의 충고는 자식에게 꼭 피아노공부를 시키겠다는 남편의 꿈을 깨지 못했습니다. 지난밤에 심하게 바람이 불어쳤습니다. 처마밑에 늘여져있던 거미줄이 바람에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애써 쳐놓은건데 하루밤사이에 흔적마저 없어졌군요. 거미마저 날려간게 아닐까요?" 인젠 엄마는 거미의 운명에 대해 각별히 관심을 가집니다. "새끼가진 놈은 쉽게 자리를 뜨지않아. 이제 해가 나면 어디선가 기여나와 또 줄을 칠거야." 아버지가 무심하게 내뱉는 말입니다. 아버지 예견이 맞았습니다. 저녁무렵 일밭에서 돌아온 엄마는 처마밑에 다시 쳐진 거미줄을 보고 탄성을 뽑았습니다. "어머머, 거미가 또 줄을 쳤네. 이악스럽기두 해라." "새끼가진 놈은 다 저렇게 이악스러운거야." 아버지는 언제보나 명언같은 말만 합니다. 자식가진 사람은 다 이악스럽게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 내외는 1년동안 한국에서 뼈빠지게 고생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선 집 장만을 하고 피아노를 샀습니다. 남은 돈 3만원은 한푼도 쓰지 않고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로 저금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만해도 한해에 2만원을 웃도는줄 우리는 타산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남편은 과외시간에 손풍금을 배우려는 애들의 가정교사로 나섰고 나는 나대로 북경에서 시간제 파출부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이제와서야 가산을 날리는게 피아노공부라고 한국의 친척이 한 그 말이 실감이 갑니다. 북경에서 살아가는 생활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아이를 학교문까지 데려다주고는 시간제 파출부 일을 시작합니다. 주로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인데 한시간에 5원입니다. 한집에 가서 청소하고 빨래하는데 평균 2시간정도 걸리는데 하루 바삐 돌아쳐도 네집 정도밖에 못합니다. 다른 파출부에 비해 나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고정된 주인집을 가지고있습니다. 한것은 한족 파출부들은 대체로 신을 신은채 긴 장대걸레로 바닥을 닦아내지만 나는 자기집 구들을 닦듯이 바닥에서 벌벌 기여다니며 손걸레로 깨끗이 청소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허리가 끊어질듯이 아프고 손이 퉁퉁 붓지만 나는 제집처럼 간주하고 깨끗하게 청소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다른 파출부한테 밀려나게 됩니다. 파출부 일도 경쟁이 심한 업종입니다. 외지에서 온 처녀애들도 많은데다가 더군다나 요즘 정리해고자들까지 파출부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혼신을 다 몰붓는다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내가 고정적으로 가서 청소하는 집들은 대체로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사는 집입니다. 하나는 늙은 량주나 로인 한분이 사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수입이 넉넉한 사람들이 사는 집입니다. 로인들은 집안청소하기에 힘이 부쳐서 파출부를 부르고 수입이 넉넉한 사람들은 집안청소를 할 짬이 없어서 파출부를 수요합니다. 하루종일 이집저집 돌면서 닦고 빨고 하고나면 퉁퉁 부은 손으로 자전거 손잡이를 잡기도 힘듭니다. 부은 손을 내려다보면 신혼의 화촉을 밝히던 첫날밤 남편이 내 손을 어루만지며 한 말이 서글퍼진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폅니다. "손가락이 남보다 유별나게 길구만.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은 피아노치기가 제격이라더군. 내가 이런 손을 가졌더면 꼭 피아노공부를 택했을거요. 나는 한뉘 땅만 허비던 농군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손이 몽톡하게 닳아버린 몽당 비자루같지 않소. 훗후후…" 그러면서 남편은 훗날 태여날 우리 2세가 내 손을 닮으면 꼭 피아노공부를 시키겠다고 하면서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차례로 뜨거운 입술을 가져다 댔습니다. 남편의 말대로 피아노를 칠 손을 가진 나였지만 피아노는 한번도 쳐보지 못하고 그 손으로 저금소에서 주판알만 튕기다가 결국에는 자식의 피아노공부 때문에 주판마저 버리고 걸레를 쥔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지만 걸레를 쥐든 쓰레기를 줏던간에 그것이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달갑게 받아들여지는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돈 있는 부모나 없는 부모나 자식 생각하는 마음이야 같겠지만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그 녀인 정도면 부모구실을 해도 얼마나 편하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쑥 치밀면서 그 녀인의 팔자가 부러워납니다. 부러움은 질투를 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질투할 자격도 못되는 신세면 욕이라도 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합니다. 내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자가용을 몰고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녀인을 "팔자좋은 년"이라고 혼자말로 꺼리낌없이 말합니다. 늦봄에 이어 여름이 꼬리를 물던 계절입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습니다. 파출부에게는 일요일이 따로 없습니다. 오히려 일요일은 벌이가 가장 좋은 날입니다. 나는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시간제 청소부로 일할 한 별장을 찾아갔습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않는 곳에 자리잡은 별장구역이였는데 별장은 유럽풍으로 지은 차고가 달린 2층 양옥이였습니다. 어림짐작으로도 인민페로 2백만원을 웃도는 호화형 별장이였습니다. 직업소개소에서 알려준 주소대로 한 별장의 초인종을 누르니 한어로 누군가고 묻는 말이 문옆에 달린 인터폰으로 울려나왔습니다. 파출부라고 하니 문이 열렸습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20대 처녀애였습니다. 처녀애는 자기는 집주인의 딸에게 피아노를 배워주는 가정교사라고 했습니다. 그는 집주인이 지금 병원으로 갔다고 하면서 먼저 청소를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집안은 호텔에 들어선 착각을 줄 정도로 호화스러웠습니다. 어디라할것없이 알른알른하게 윤기도는것이 어디서부터 청소를 시작해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처녀애가 화장실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화장실만도 웃층과 아래층에 각기 하나씩 있다고 했습니다. 처녀애가 웃층으로 올라가서 얼마안되여 웃층에서 피아노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우리 애가 요즘 자주 치는 곡이였습니다. 불쑥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아들은 지금쯤 웃통을 벗어버린채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을것입니다. 우리가 세맡은 집은 집주인이 창고삼아 쓰려고 집곁에 붙여 지은 무허가 집입니다. 단칸방에 침대 하나와 가지고 온 피아노를 놓으면 돌아서기도 불편한 정도로 비좁은 집입니다. 벽돌 한장 두께로 된 집이여서 겨울에는 솜옷을 그냥 입어야 할 정도이고 여름에는 시루속처럼 숨막히게 덥습니다. 북경의 겨울은 그리 춥지않아 그런대로 지낼수 있는데 여름은 찌는듯한 더위에 꼼짝않고 앉아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그런 집이지만 방세가 한달에 3백원입니다. 북경의 세집값은 연길에 비하면 살인가격입니다. 층집인 경우 2순환도로 주변이면 주방과 화장실이 달린 단칸방도 한달에 방세가 적어도 천원입니다. 나의 경우엔 그런 집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여름이 오기전에 나는 고물장수한테서 20원을 주고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자그마한 선풍기 하나를 샀습니다. 우리가 세맡은 집은 다른 집보다 여름의 더위가 먼저 옵니다. 그래서 선풍기도 다른 집보다 한달 먼저 돌립니다. 지금쯤 아들애는 선풍기를 켜놓고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있을것입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별장에서 들려오는 피아노소리를 듣노라니 마치도 웃층에서 피아노를 치는것이 아들인것같은 착각이 옵니다. 순간의 그 착각이 깨지면서 부지중 입에서 나오는것은 한숨과 함께 사람구실 부모구실은 돈이 시킨다는 선인들의 말을 떠오릅니다. 아, 돈이 뭐길래… 내가 아래층의 화장실 청소를 끝냈을 때 집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인사 하려고 거실에 나온 나는 거실 쏘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커피를 마시는 집주인을 보고는 두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바로 그 녀인이였습니다. 그 녀인도 나를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나는 저도모르게 학교정문에서 그 녀인을 만날 때처럼 또 허리를 굽혔습니다. 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목례로 답례했습니다. 잠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내가 먼저 침묵을 깼습니다. "이 집이…" "그래요. 저의 집이예요. 그런데 이렇게 만날줄은…" 나는 손에 쥔 걸레를 만지면서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앉으시죠." "괜찮아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일은 나중에 하시고 잠간 앉아 얘기나 나누자요." 나는 쏘파모서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쪽으로 편히 앉으세요." "괜찮아요. 집이 참 좋군요." "빛갈뿐이예요. 커피 드시겠어요?" "아니…" "그럼 콜라 드시겠어요?" "괜찮아요." 나는 송구스러워서 그저 괜찮아요만을 곱씹었다. 녀인은 랭장고에서 콜라 한병을 꺼내 병마개를 따서 나의 앞에 놓아주었습니다. "파출부로 일한지 오래됐나요?" "북경에 와서부터 했으니 인젠 해수로도 2년이 돼요." "그럼 파출부로 일하면서 아이를 피아노공부 시키고 있다는 얘긴가요? 피아노공부에 드는 돈이 엄청나겠는데…" "집에서 애아버지가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는 보내오고 저는 생활비와 세집값을 해결하는 셈이지요." "그 돈만해도 꽤나 들겠는데 파출부 일을 해서 그 돈이 마련되나요?" "한시간에 5원씩이니까 하루에 여러집을 다니며 10시간정도 하면 세집값과 생활비 정도는 나오죠." "힘드시겠는데요?" "힘들어도 할수 없지요." "애아버지는 무슨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가요?" "음악선생이얘요." "로임만 가지고는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를 대기 힘드실텐데요." "그런대로 두루두루 맞춰가고 있어요." 이때 웃층에서 그 녀인의 딸애가 내려왔습니다. 이미 나하고 면목이 있어 그 애가 먼저 인사했습니다. 그러곤 녀인보고 물었습니다. "왔다는 청소부는 어느 방에 있나요?" 이말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그 애 몰래 쏘파밑에 밀어넣었습니다. 아들과 한반인 녀인의 딸앞에서 청소부신분으로 나설수 없었습니다. 눈썰미 빠른 녀인이 내 마음을 인차 짚어냈습니다. "아직 안 온 모양이다." "피아노선생이 아까 문을 열어주었는데요." "아마 볼 일이 있어 잠간 밖에 나간 모양이구나." 녀인이 내 사정을 봐주느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 순간 내 자존심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곤혹한 당근질을 당하는 느낌이였습니다. "청소부는 왜 찾느냐?" 녀인이 딸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조심하지 않아 꽃병의 물을 쏟쳤는데 바닥을 닦아야겠어요." "그만한 일은 너 절로 하려무나." "피아노치던 손으로 걸레를 쥐겠나요?" "지금 애들은 다 저래요." 녀인은 몸둘바를 모르는 나에게 어이없는 웃음을 적당히 지어보이고는 딸과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더는 그 자리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하여 조용히 문을 열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피아노치던 손으로 걸레를 쥘수 없다던 그 녀인의 딸이 한 말이 가슴을 아프게 자극해 왔습니다. 나의 아들도 피아노를 치지만 그러나 그 애는 짬만 나면 날 도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방 청소도 하고 설걷이도 합니다. 양말이나 속옷같은건 자기 절로 씻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손도 살아가는 사정에 따라 귀천이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걸레 한번 쥐어서는 안되는 손이 귀한 손이라면 우리 애처럼 걸레나 행주를 쥐는 손은 천한 손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애 손도 세상 귀한 손입니다. 귀한 자식 귀하게 키우라는 말처럼 귀하게 키우지는 못해도 우리 애는 지금 귀염성있게 자라고있습니다. 북경으로 떠나 오던 날 남편은 역에서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넌 이 손을 그저 손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베토벤의 손이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휘여잡은 운명교향악을 울리게 했다면 너의 이 손은 장차 네 인생의 새로운 악장을 울릴 손이다." 인생의 새로운 악장을 울릴 손, 내 아들의 손은 바로 그런 손입니다. "어머머머, 저걸 어쩌나…" 엄마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뽑았습니다. 엄마는 지붕에서 내려온 뱀 한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거미를 노리고 있는것을 보았던것입니다. "우쉬우쉬…" 엄마는 두 팔을 내저으면서 밭에서 새를 쫓을 때 내던 소리를 냈습니다. 새를 쫓는 소리로 뱀을 쫓자니 참으로 코막고 답답합니다.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열심히 새를 쫓는 소리를 질러대니 거미를 노리던 뱀이 스르르 지붕너머로 사라졌습니다.
10    《마음의 그림자》 댓글:  조회:1462  추천:2  2013-01-25
단편소설 《마음의 그림자》 자식, 잘도 뛴다. 네가 뛰면 이제 얼마나 뛰겠냐? 첫 코스에서 앞선 놈은 어디까지나 뒤따라오는 사람한테 자리를 내주기 마련인 줄 너는 모르지. 모르구 말구. 알면 첫시작부터 저렇게 뛸까? 앞선 사람은 뒤에서 따라 올까봐 숨 조절할새없이 뛰다나니 인차 맥이 진하지만 뒤에 선 사람은 앞선 사람과는 거리상으로 차이가 있지만 이제 따라잡을 기회를 여유 있게 노리며 뛰기에 숨 조절이 잘 되지. 잘 되구 말구. 자식, 그래 내가 여태껏 뛸 줄 몰라서 그냥 뒤따르는 줄 아느냐? 허, 그 자식, 그래도 생각던 바보다 잘도 뛴다. 그렇지, 저 녀석이 이번 경기에 나서자고 아침마다 줄뛰기를 했다지. 욕심 많은 자식, 해마다 보온병에 모범상장을 받쳐 타고도 성차지 않아 이번 경기에 내건 보온병까지 독차지하려구? 게걸스럽기 짝이 없군. 까짓 모범은 해마다 그럭저럭 한담 끝에 선거되는 거지만 경기에서의 승리자는 겨룸에서 이긴 자가 되는 거야. 아무렴, 승부를 냉혹하게 가르는것이 경기니까. 누가 말했더라, 신체도 혁명의 밑천이라구 했지. 암, 밑천이구 말구. 듣자니 저 녀석이 한달새에 체중이 열근이나 내렸다지. 한심해, 더 한심한건 우리 주임동지야. 뭐랬더라? 옳지. 뭐, 체중이 열근씩이나 내리는 도 아랑곳하지 않고 맡은바 연구사업을 잘해 나간다고 저 녀석을 추어올렸지. 제길, 체중이 내린것도 자랑거리야? 사람을 올리춰도 분수가 있지…… 가만, 저 녀석은 우리 단위에 올때부터 저렇게 말라있었지. 혹시 저 녀석이 내리지도 않은 체중을 내렸다고 하지 않았을까? 가능해. 워낙 겨릅대처럼 마른 놈이니 살이 붙었으면 붙었지, 내릴 살은 없지. 쳇, 뭐이 고우면 사마귀까지 곱다더니 우리 주임 눈에는 저녀석이 깡깡 말랐다는 그 자체마저도 자랑거리로 보이는 모양이지? 흥, 코웃음이나 하나 받으라구. 그렇게 코 막고 답답한 사람이니 나만 보면 왜 멋없이 몸만 내는가고 이맛살부터 찡그리지. 내가 미우면 아예 밉다고 해. 속담에 며느리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같다고 나무람 한다는데…… 오호, 저녀석이 인젠 숨찬 모양이구나. 두 어깨가 아까보다 더 세차게 오르내리는구나. 숨이 찰거다. 정 바쁘면 아예 물러서라구. 꼴보기 가긍하다구. 계속 뛰는걸 보니 물러서긴 싫은 모양이지? 그럴 거야, 원래 허영심이 많은 녀석이니까. 허영심이란 적당히 있으면 좋은 거겠지만 지나치면 그건 질곡이야. 그저껜 또 새 연구 과제를 달라고 청구서를 냈다지. 어쨌든 말 못할 녀석이야. 지금처럼 숨 조절도 없이 그저 냅다 뛰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는가? 영예도 가질 땐 좋아도 그걸 지탱해 가자면 쉽지 않아, 알겠어? 그래 내가 여태껏 영예를 가지고 싶지 않아 청구서 한장 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는 줄 아는가? 천만에, 영예를 가진 뒤 그 영예를 지탱해나갈 힘을 키우기 전엔 영예를 가질 생각조차 삼간다는 거야. 오늘 달리기 경기 역시 마찬가지야. 다음번 운동대회에서도 일등을 따낼 확신이 없으면 난 아예 이번 경기에 나서지도 않았을 거야. 한마디로 난 눈앞만 보는 사람이 아니야. 자식, 아직까진 숨을 헐떡거리며 잘은 뛰지만 이제 봐. 들숨만 마시고 날숨을 뽑지 못할 땐 누굴 원망하지 말어. 충고나 한마디 할까. 옛 명언 하나 빌지.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이긴 자라, 으흐흐…… 이제 몇고패 남았나? 맙시사. 아직 여섯고패가 있구나. 나에게도 좀 벅찬데 괜한 생각이야. 저 녀석이 헐떡이는 꼴을 좀더 보게 됐으니 여북 좋아서. 웃는 모습보다 우는 꼴을 보기 더 재미있다고 했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역시 명언이야. 아니, 이게 누구 그림자야? 내 그림자? 아닌데, 오호, 저 녀석의 그림자구나. 요것 봐라, 지금 태양을 마주 향해 뛰니 저녀석의 그림자가 바로 내 발밑에서 늘어졌구나. 마른명태같이 바싹 마른 놈이니 그림자 역시 볼품없이 여위였구나. 참 묘하다. 뛸 때마다 저 녀석의 머리그림자가 꼭꼭 내 발에 밟히는구나. 이러고 보면 내가 저 녀석의 머리를 밟으며 뛰는 셈이지. 히히히, 거 재미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뭐 셀것도 없구나. 이렇게 뛰다나면 저 녀석의 머리를 몇십번, 몇백번 밟아놓을지 모르겠다. 자식, 자기 머리가 내 발에 짓밟히는 줄도 모르고 멋스레 뛰긴 잘 뛴다. 요놈 머린즉 연구론문이 통과될 때마다 자랑스레 쳐들고 다니던 머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더 밟아볼까. 요 가슴인즉 작년에 노력모범메달이 번쩍이던 가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한 번…… 엉? 이건 또 누구의 그림자야? 아주 살진 그림잔데. 오호, 굽이를 돌아 태양을 등지고 뛰니 내 그림자가 앞에 나섰구나. 저런 괘씸한 놈 좀 봐라. 내 머리를 그 땀내 나는 더러운 운동신으로 마구 짓밟는구나. 엎음 갚음인가? 아니야, 절대 저 녀석한테 밟힐수 없어. 비록 그림자지만…… 야야야…… 이걸 어쩌나? 오른 다리에 쥐가 오르는구나. 방정맞게 아이구, 점점 더하구나. 저 녀석 다리엔 쥐가 오르지 않는지. 제발 뛰다가 넘어져, 넘어나져라. 코 깨고 이마 깨고 무릎까지 깨라. 저런, 저 자식이 점점 더 신나게 뛰는구나…… 아이구, 인젠 뛰기는 다 글렀다. 통분하구나, 통분해. 내가 그래 이렇게 지고 만단 말이냐? 이까짓 달리기경기에서까지 저 녀석한테 진다면 내 꼴이 뭐가 되느냐? 절대 질 수 없어. 그런데 뛸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쩌나? 옳지, 저 녀석을 부르자. 그거 좋은 수다. 내가 이제 다리를 안고 넘어지면 저 녀석이 꼭 몸을 돌려 뛰어올 거야. 암, 뛰어 오구 말구. 경기에 나선 몸이라 해도 자기 단위 친구가 넘어진걸 보고도 모른척 그냥 뛸 수는 없지. 그러면 누가 지고 이길것도 없지. 가장 좋기는 저 녀석이 넘어져 무릎이나 깨면 제격이겠는데, 그러면 내가 기여서라도 저 녀석 먼저 종점에 갈수 있으련만…… 저녀석 넘어지지 않고 그냥 뛰는구나. 어서 저녀석을 불러야지. 가만, 안돼. 그럴수 없어. 만약 저 녀석이 일등을 따낼 기회를 포기하고 나한테로 달려와 다리를 주물러 준다면 구경꾼들은 박수갈채를 보낼거야. 그 중에서도 우리 주임이 더 야단스레 박수를 칠거야. 그 꼴을 내가 눈이 시여 어떻게 보나? 안돼, 절대 저 녀석한테 고상한 풍격의 소유자란 칭찬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줘서는 안돼. 그냥 뛰게 하자. 고작해야 상으로 내건 보온병을 빼앗기게 되겠지. 까짓 보온병 하나쯤이야…… 야, 아무튼 통분할 일이다. 이제 어떻게 경기장에서 나온단 말이냐? 그대로 주저앉으면 꼴불견이지. 까무러친듯 뒤로 넘어진다? 그것 역시 꼴불견이지. 시시한 경기에 별로 뛸 생각도 없어 스스로 그만둔것처럼 히쭉히쭉 웃으며 걸어 나갈까? 그것 비슷하다. 까짓 거 보온병 하나를 가지고 직업선수들처럼 냉혹하게 승부를 가릴 것 없지. 우리 집에야 보온병이 셋이나 있으니까 독신으로 있는 너나 가져라. 보온병 같은 걸 탐낼 내가 아니니까. 좌우간 오늘 운수 사납구나. 젠장, 이럴 줄 미리 알기나 했으면 아까 저녀석의 머리 그림자라도 몇번 더 기운차게 밟아줬을 걸……
9    새 사이트로 이사했습니다. 댓글:  조회:1355  추천:0  2012-11-16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아래의 새주소로 이사했습니다. 놀러오세요~ 훈이의 쉼터
8    [단편] 새천년의 영웅신화 댓글:  조회:1406  추천:51  2009-05-14
이 글은《수도권의 〈촌놈〉들》로 시작한 계렬소설의 제6편이다. 우리말 속담에 하는 일없이 행운만 바라는 사람을 일컫는 속담이 많다.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를 바란다》, 《닭알가리를 쌓았다 무너뜨렸다 한다》, 《오뉴월 소불알 떨어지기만 기다린다》 등을 례들수 있다. 도저히 가망없는 일을 헛되이 탐내는 사람을 비웃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앉아서 물에 빠져 살겠다고 짚오래기라도 쥐려고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그런 《촌놈》을 그려볼까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국제방송국 조선어부는 지난해부터 수도권지역 방송인 FM방송을 개시했다. FM방송의 일요일프로는 주로 노래가 위주인데 그중 노래곡목 알아마추기와 청취자 신청곡코너가 있다. 일요일 저녁 방송이 시작되면 방송근무자는 전화기 옆을 지키고 앉아 청취자들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기에 여념이 없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은 대개 방송되고 있는 노래곡목을 맞추고 노래를 신청해오는 청취자들이다. 그날도 프로담당자를 도와 내가 전화기옆을 지키고 있는데 첫 전화가 걸려왔다. 《중국국제방송국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지금 나가고 있는 노래곡목을 맞추려고 합니다.》 젊은 목소리지만 약간 어눌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나는 필을 챙겨들었다. 《지금 나오는 노래는 한국의 가수 김종환이 작사, 작곡하고 직접 부른 노래 〈존재의 리유〉가 아닙니까?》 《네, 잘 맞추셨습니다. 성함은 어떻게 쓰십니까?》 《이 노래를 부른 가수와 이름이 같습니다.》 《아, 그럼 김종환씨. 직장은요?》 《아직 무직입니다.》 《전화번호 불러주시겠습니까?》 《호출기도 됩니까?》 《네.》 불러주는 대로 호출기번호를 적고 무슨 노래 신청하느냐고 물으니 김종환의 《존재의 리유》라고 했다. 《이 노래 신청하는 리유, 말하자면 그 누구와 함께 듣고 싶다던가 혹은 누구한테 선물한다던가…》 《아니, 그저 저 혼자 듣고싶어 그럽니다.》 《이 노래 무척 즐겨 부르시는가 보군요.》 《그저 듣기만 합니다.》 《저희 방송을 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 이시간에 신청한 노래 보내드리겠으니 청취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메모한 글을 일요일프로 담당자에게 넘겼더니 어이없는 웃음부터 지었다. 《이분이 또 이 노래를 신청했군요. 이분은 벌써 다섯번째나 이 노래를 신청해 왔어요.》 《김종환의 지독한 팬인가 싶은데.》 《글쎄요…》 다섯번이나 그것도 똑같은 곡을 신청해왔다니 김종환이 부른 노래 《존재의 리유》 가사가 궁금했다. 김종환이 대체 뭘 노래했기에 한사람이 다섯번이나 신청을 했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CD에 부착된 노래가사를 일별해봤다. 그 가사는 이러했다.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여져 있어도 네가 보고싶어도 참고 있을 뿐이지 언젠가는 다시 만날테니까 그리 오래 헤여지진 않아 너에게 나는 돌아갈거야 모든걸 포기하고 네게 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 수 없는 또다른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네가 있다는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네가 있어 나는 살수 있는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갈테니 그때까지 기다릴수 있겠니 그래 다시 시작하는거야 …… 》 노래 가사를 보면 이 노래를 다섯번이나 신청해온 그 청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힘든 인생도 달갑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모대기는 그런 사람같았다. 그후로도 그 청취자는 여러번 김종환의 《존재의 리유》를 신청해왔다. 그 노래만 여러번 내보낼 수 없어 다른 노래를 신청하라고 하니 다른 노래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몇달이 지난후 방송국에서는 FM방송개시 한돐을 맞아 청취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노래 《존재의 리유》를 여러번 신청한 김종환도 청취자 대표의 한사람으로 초청을 받았다. 김종환은 강마르나 단단하게 생긴 청년이였다. 키는 중키나 되고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얼굴은 해빛에 탔는지 아니면 원래 철색인지 가마잡잡했다. 별로 인상적으로 안겨오는 그런 얼굴은 아니였다. 그런대로 얼굴에서 인상적인 곳을 찾는다면 눈을 꼽아야 할것이다. 시원하게 생긴 눈이라던가 정기있는 눈이여서 인상적인 것이 아니라 언뜻 보면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가늘게 째진 눈이였다. 그런 눈을 초상묘사사전에서 뱁새눈이라고 했던것 같다. 자아소개를 할 때 김종환은 자기는 송화강변에서 자라다가 얼마전에 북경에 와서 잠시는 닥치는대로 막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종환은 좌담회에서 조용히 앉아 남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중에 사회자가 그에게 발언을 청하니 그는 그저 할말이 없다고 고개만 저었다. 곁에서 내가 한마디했다. 《알기로는 김종환청취자는 〈존재의 리유〉 노래를 적어도 열번은 넘게 신청해 왔는데 그 리유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김종환은 잠깐 뭔가 궁리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노래 가사에 담긴 내용처럼 그 누구에 대한 그리움에서 신청한게 아닙니다. 전 련애도 못해본 사람입니다. 그저 노래를 부른 가수가 저의 이름과 같고 노래 제목 또한 좋아서 신청한겁니다.》 김종환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좌담회가 끝날때까지 그는 다시 입을 열지않았다. 올해 초 광동성 담강시 서문현에서 16살나는 소년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다가 기진맥진해 위험에 처했을 때 4명의 경찰이 수영을 모른다는 리유로 위험에 처한 소년을 구하지 않고 그저 보고만 있은 일이 발생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이 사경에 빠진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는 사람을 경악케 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어린이가 병원으로 호송되여 응급치료를 받던중 병원의 간호원은 그 어린이 부모가 그 자리에 오지않았다고 어린이팔에 꽂았던 점적주사바늘을 빼버렸다. 실로 천인공노할 일이다. 이 일을 두고 보도매체들은 크게 대서특필했다. 방송칼럼을 맡은 나는 《황폐해지는 인간의 마음》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써서 방송했다. 그 칼럼을 요약해서 옮기면 이러하다. 《…… 맹자는 성선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이라면 인간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다 갖고 있다.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서 우물가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보았을 때 누구라도 깜짝 놀라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가바 달려갈 것이다. 인간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악을 미워하는 마음,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은 태여날때부터 인간에 대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이라면 최소한 인간에 대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인간을 어여삐 여겨야 하겠지만 사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서도 구할대신 구경만 하는 사람이나 또 목숨이 경각에 이른 사람을 치료할 대신 보증금을 물지않았다고 주사바늘을 빼버린 사람이나 다 인간으로 취급될 수 없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위대함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 그 위대함을 보여주지 않고 인간이 금수, 말하자면 짐승과 흡사한가만 보여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맹자도 인간의 본성인 착한 마음을 버리면 황폐한 산과같이 된다고 하면서 이런 례를 들었다. 〈인간이 인의의 마음을 잃게되면 산의 나무가 도끼에 의해 몽땅 잘려나가는것과 마찬가지다. 나무가 몽땅 도끼에 잘려서 숲이 무성했던 산이 그 아름다움을 잃고 벌거숭이 황폐한 산이 되듯이 인간은 인의의 마음을 잃으면 인간의 아름다움이 없어진다.〉 맹자의 이 말에 비추어보면 위험에 처한 인간을 구하지 않고 구경만 한 사람이나 치료를 거절한 사람은 황폐한 민둥산처럼 인간이 가져야할 아름다움을 죄다 잃은 사람이다. 산이 민둥산이 되어 황폐해지면 그것은 산이 아니라 대자연의 무덤이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잃으면 불모의 땅인 사막같이 황폐해진 마음은 인간성이 매장된 무덤과 다름없다. 한마디로 황폐해진 자연보다 더 무서운 것이 황폐해지는 인간의 마음이다. …… 》 이 칼럼이 방송에 나간 후 김종환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선생님의 칼럼을 잘 들었습니다. 오늘 전화한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을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요. 시간을 내줄수 있겠습니까?》 방송인에게는 청취자는 황제다. 그들의 부름엔 무조건 응해야 한다. 《만날 장소를 어디로 정하겠습니까?》 《제가 방송국근처로 가지요.》 《그럼 지난번 좌담회를 한후 저녁식사를 하던 그 식당에서 만나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지요. 시간은 선생님이 정하십시오.》 우리는 퇴근후인 저녁 6시반으로 시간을 정했다. 약속시간보다 5분전에 지정한 식당에 가니 김종환은 이미 간단한 료리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구면인지라 인사를 마치고 맥주잔을 들었다. 한컵 맥주를 굽내고는 김종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선생님의 칼럼을 들으면서 인상깊은 말이 있는데 사람은 어릴때부터 인간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맹자란 사람은 누굽니까?》 맹자도 모르는 인간이다. 어이없기도 하고 조금은 서글픈 생각까지 들었다. 《아마 중학교 교과서에서 나온 사람같은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가정사정으로 전 중학교도 바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김종환은 뒤더수기를 긁었다.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가인데 그의 철학에서 유명한 것이 〈성선설〉입니다.》 나하곤 나이차이가 많았지만 청취자이기에 나는 깍듯이 존대말을 썼다. 《선생님 말씀 낮추십시오. 그런데 〈성선설〉이 뭡니까?》 마음같아서는 야, 이놈 집에가서 교과서부터 참답게 뒤져봐라 하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었다. 구구히 설명을 해봤자 소귀에 경읽기다. 그러나 묻는 말에 대답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간단히 해석할 화제가 아닌데 간추려 말한다면 성선설이란 인간은 천성적으로 착하고 인간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학설이네.》 생각밖에도 김종환이 생각도 없이 대뜸 반기를 들고 나왔다. 《그건 내보기에도 틀린 말인것 같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착한 사람 몇이 있습니까.》 김종환이 만약 순자의 성악설에 대해 알고 있었더라면 인간의 천성은 악하다고 하면서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했으련만 다행히 그는 맹자도 모르는 사람이였으니 순자야 더 말한나위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의 성악설에 대해서는. 《선생님은 칼럼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구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가져야 할 아름다움을 죄다 잃은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그런 사람들이 많고도 많습니다. 얼마전 저도 그런 사람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북경의 옥연담공원엔 큰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워낙 이 호수는 수초가 많아 수영이 금지된 곳이지만 강이 없는 북경인데다가 호수가 시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어 여름이나 겨울이나 수영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그날 김종환은 수영하러 공원의 호수를 찾았다. 그날 호심으로 멀리 헤엄쳐 들어간 한 사람이 수초에 발이 감겨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 같이 온듯한 한 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사람 구해달라고 수영하는 사람들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물에 빠진 사람을 바라볼뿐이였다. 이때 김종환이 호수가에 나타났던것이다. 김종환은 한켠에서 조용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녀인이 이사람 저사람 돌아가며 손이야발이야 빌었지만 다들 한다는 소리가 이러했다. 《난 옅은 물에서 물장구나 치는 수준이여서…》 《난 수영배운지 며칠이 안돼서…》 더 한심한 사람이 있었다. 《이러지말고 빨리 110에 전화를 거오.》 110에 전화를 걸어 순라경찰을 불러봤댔자 경찰이 오는새면 물에 빠진 사람은 언녕 물귀신이 될것은 뻔한 일이다. 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면서 말했다. 《제발 저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해주면 돈 만원을 사례금으로 드리겠어요.》 그러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2만원을 드리겠어요》 그래도 물에 뛰여드는 사람이 없었다. 녀인이 3만원까지 불렀을 때는 김종환이 이미 옷을 다 벗고 호심을 향해 헤염쳐가고 있었다. 그날 김종환이 물에 빠진 사람을 호수가로 끌어내자 구급차가 뒤미처 도착했다. 물에 빠졌던 사내가 정신을 차리자 녀인이 김종환앞에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좋은 구경거리나 생긴듯 사람들이 몰려왔다. 《저 친구 오늘 북경석간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됐구만》 《꿩먹고 알 먹는다더니 저 친군 이름도 나고 돈도 벌게 됐구먼.》 《돈이라니?》 《저 녀인이 3만원을 내겠다고 했다니까.》 《3만원?! 저 친구 눈깜짝할새에 큰 돈 벌었구먼.》 《나도 수영재간이 있으면 한번에 큰 돈 잡을수 있었겠는데…》 《저 친구 오늘 운이 좋구먼.》 구경군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김종환은 개이치않고 그의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녀인을 부축하려고 다가가는데 갑자기 그 녀인이 발딱 일어나며 구경군들을 향해 독기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누가 3만원을 내겠다고 했어요? 주둥이들 잘 건사하세요.》 이 거동에 김종환도 저으기 놀라 엉거주춤 그 자리에 멈춰섰다. 구경군들은 더 재미나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떠들어댔다. 《이봐요. 아주머니가 3만까지 부르는걸 우린 똑똑히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아주머니가 3만원을 부르니까 저 친구가 물에 뛰여든겁니다.》 김종환은 억이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결김에 그는 가래침을 그윽 끄어올려 땅바닥에 내뱉았다. 녀인이 입에 거품까지 물면서 쌍욕을 퍼부었다. 너무나 더러운 쌍욕이여서 이 글에 도저히 옮길수 없다. 녀인이 구경군들을 상대로 광기를 부릴 때 김종환은 구경군 속을 헤치고 나와 호수가에 있는 돌우에 앉아 담배를 붙혀물었다. 윗통을 드러낸 한 청년이 그한테 다가왔다. 《이보게 친구, 저런 년한테서는 일전도 곯지말고 받아내야 하네.》 김종환은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물러가지 않고 그냥 지절댔다. 북경엔 이런 싱거운 자들이 많다. 《지금이 어느 땐가. 길가에서 돈을 주어 돈 임자한테 돌려줘도 사례금을 정정당당하게 받는 세월이라구. 신문에서 보지못했나. 돈임자가 사례금을 주겠다고 해놓고 주지않으니 법에 걸어 그 사례금을 받아냈다네. 자넨 목숨까지 구해준데다가 저 녀인이 사전에 3만원 주겠다고까지 했으니 무작정 받아내야 하네.》 김종환이 꿱 소리질렀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어?》 조선족은 급할때나 욕할때면 먼저 입에서 튀여나오는것이 조선말이다. 그 서슬에 그 청년은 뒤로 몇발자국 물러섰다. 이윽고 그 청년이 내뱉는 말이 김종환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보아하니 앉을자리 설자리도 모르는 촌놈이군. 다 차려진 것도 찾아먹지도 못하는 녀석을 세상살다 첨 본다…》 김종환은 여기까지 말하곤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그 말 듣고 가만있었소?》 내쪽에서 오히려 흥분했다. 《그저 물에 처넣어 물병아리로 만들었습니다.》 《잘했군. 나도 그런 상황이면 가만있지 않았을거야.》 《그런데 말입니다. 그날 저녁 조용히 혼자서 생각해보니 그 녀석의 말도 일리가 있는것 같습니다.》 《?》 《하긴 제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들어간것은 선생님이 쓰신 칼럼에서 나오는 그 맹자라는 사람이 말한것처럼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서 우물가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보았을 때 누구라도 깜짝 놀라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가바 달려가는〉 그런 마음에서 취한 행동이라고 보아야겠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쩍하면 돈으로 사람을 저울질하기 좋아하더군요. 그날도 많은 사람들은 제가 돈을 보고 사람을 구한것으로 여기더군요. 돈을 내걸었던 그 녀인이 일단 사람을 구해놓으니 해까닥 뒤짚어져서 그런적이 없다고 광기를 쓰는것을 보니 저는 구해낸 사람을 도로 물에 처넣고 싶은 충동까지 일더군요.》 《사례금을 받았소?》 《이튿날 그 녀인이 저의 거처로 기자 한분과 함께 맥주 한상자와 과일 한상자를 가지고 왔더군요. 전 거절했습니다.》 《잘했군. 돈이나 물건으로는 인간의 생명을 구한 대가를 치룰수 없으니까.》 《하긴 그날 그들과 함께 온 기자도 그런 말을 하면서 기사를 크게 써서 보도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야지. 나도 막 쓰고 싶다니까. 그래 그 기자가 기사를 썼소?》 《아니, 쓸수 없다고 하더군요.》 《왜?》 《제가 돈을 요구했습니다.》 《뭐 돈?!》 《딱 만원만 요구했습니다. 애초에 3만원을 부른 사람의 사정 많이 봐준 거죠.》정신문명건설의 모범으로 널리 소개될수 있는 이야기 주인공이 돈을 요구했다면 성격이 달라진다. 모범은 고사하고 보도기사로도 나가지 못한다. 사람 구하고 이름 한자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던가 혹은 인간으로서 응당 해야할 일을 했다고 하면서 사례금을 거절했다면 기사거리다. 그런데 사람 구하고 돈을 요구했다면 좋은 일하고도 도리어 질책을 받을수 있는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돈을 요구했으면 기사로 나갈수 없지…》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선생님은 제가 돈을 요구했다고 실망하는 눈친데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돈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사람들하고는 역시 돈으로 자기가 치른 대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돈을 받지 않으면 그날 절 욕한 그 녀석의 말처럼 차려진것도 찾아먹지못하는 반편같은 사람으로 취급받을게 아닙니까. 그리고 저같은 떠돌이가 신문에 덩그렇게 실려봤댔자 봐줄 사람도 없는게고 또 사실 지금 전 돈이 필요합니다.》 나는 더 할말이 없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김종환이 깰때까지 나는 말없이 창밖만 내다봤다. 《오직 사람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제가 개입된 일이 나중에 가서 돈으로 결산된것이 제탓으로만 볼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대답대신 내가 칼럼에 인용했던 맹자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인간이 인의의 마음을 잃게되면 산의 나무가 도끼에 의해 몽땅 잘려나가는것과 마찬가지다. 나무가 몽땅 도끼에 잘려서 숲이 무성했던 산이 그 아름다움을 잃고 벌거숭이 황폐한 산이 되듯이 인간은 인의의 마음을 잃으면 인간의 아름다움이 없어진다.》 6월의 첫 일요일. 나는 북경에서 가까이 보내고 있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낚시하러 옥연담 공원으로 갔다. 올해 여름더위가 일찍이 닥치어 6월의 날씨가 가장 더운 7,8월의 날씨와 비슷했다. 낚시질이 허용이 된 못가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앉아 있노라니 찌는듯한 더위에 온몸이 물참봉이 되었다. 이런 날 낚시질은 향수가 아니라 고역이다. 호수물에 시원히 몸을 담그고 싶었다. 원체 낚시광이 아닌 나는 낚시질에 여념이 없는 친구들을 떠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수영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선 갈한 목부터 축이고 싶어 호수가에서 음료수를 팔고 있는 한 젊은이한테로 다가갔다. 음료수를 파는 그 젊은이는 더워선지 몸에 수영팬티만 걸쳤다. 온몸이 볕에 타서 감실감실했다. 《음료수 한병…》 젊은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내눈을 의심했다. 김종환이였다. 《선생님…》 《여기서…》 《보다시피 음료수를 팔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한달 정도 됐습니다. 더우신데 물에 들어갑시다.》 김종환은 발가벗은 10살 되나마나한 어린이한테 음료수병을 담은 상자를 맡기고는 나와 함께 호수물에 들어섰다.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둘은 호수물에 목만 내민채 이야기를 나눴다. 《하루에 몇병정도 파나?》 《둬상자 정도나 될까요. 그저 음료수를 파는 흉내나 낼뿐입니다. 수영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수영이나 배워주고…》 《그럼 수영교련이 됐다는 얘긴데…》 《허가증도 없습니다. 이곳 자체가 수영이 금지된 곳이니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걸보니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구만.》 《있는데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올해같은 이 더위에 더워죽겠다고 아우성치며 밀려드는데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수영배우겠다는 사람이 많은가?》 《별로 없습니다.》 《그럼 수입이 시원찮겠네?》 《음료수 팔고 수영배워주는것으로 입에 풀칠은 할만합니다.》 이때 아까 김종환이 음료수상자를 맡겼던 발가벗은 어린이가 김종환을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저기 한사람이 물에 빠진것 같아요.》 아이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수심이 깊은 곳에서 한사람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김종환이 그 사람을 향해 헤염쳐갔다. 자유영이였는데 그 자세가 멋져보였고 속도 또한 빨랐다. 마치도 물우로 물매미가 미끄러져 가는것 같았다. 김종환은 물에 빠진 사람의 목을 뒤로 한팔로 감아쥐더니 힘들지않게 호수가로 헤엄쳐 나왔다. 물에 빠졌던 사람은 배가 크게 나온 중년이였다. 사람들이 몰려왔다. 중년 사나이는 별로 물을 먹지않았는지 몇번 구역질을 하더니 일어나 앉았다. 그는 한참 멍하니 앉아있다가 이윽고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었다. 옷을 다 입은 중년사나이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손에 쥐우는대로 지폐를 꺼내 김종환에게 주면서 재삼 감사하다는 말을 곱씹었다. 김종환은 마치 꿔준 돈을 받는 사람마냥 유유한 표정으로 지폐를 받아 수영팬티에 달린 호주머니에 꾸겨넣는것이였다. 구경군들중 김종환이와 구면이듯한 한 청년이 김종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오늘 마수걸이가 괜찮군그래. 저녁에 한턱 내야겠군.》 김종환은 그저 씩 웃어보였다 나는 별로 못볼것을 본듯한 느낌이였다. 김종환이 음료수 한병을 들고 나한테로 다가왔다. 《오늘 같은 일이 자주 생기나?》 《가끔씩 생깁니다.》 《그럴때마다 자넨 돈을 받나?》 《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는걸 받을뿐입니다. 때론 텔레비죤이나 사진기같은 물건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수입이 아주 짭짤할것 같은데…》 《음료수 팔기보다는 낫지요.》 《물에 빠진 사람이 많을수록 좋겠구만》 나는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김종환은 괴이치 않았다. 《사람마다 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잖습니까. 선생님은 배운 지식으로 살아가지만 저야 배운게라곤 수영밖에 없으니 그 재간으로 살아가는겁니다.》 《이제보니 자넨 물에 빠져 살겠다고 짚오래기라도 쥐려고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그런 사람이 된것같구만.》 《학수고대라는건 무슨 뜻입니까?》 학수고대란 단어의 뜻도 모르는 녀석이다. 《학처럼 목을 길게 빼들고 기다린다는 뜻이야.》 저도모르게 반말이 나갔다. 《저한테 그런 알아듣지 못할 고상한 말을 쓰지 마십시오. 먹물이 들지않는 저에겐 그런 얘기는 먹히지 않습니다. 보시다싶이 이곳은 수영장처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수상구조인원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의무구조대원인 셈이지요. 사람을 구하는 수상구조전문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겁니다. 때문에 제가 하는 일도 수상구조전문호가 벌인 일종의 사업으로 리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장경제시대에 별의별 회사며 전문호가 소털같이 많다하지만 《수상구조전문호》란 말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사업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사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금품을 노리고 하는것도 신성한 사업인가?》 《금품은 내가 생명을 구한 사례금일뿐입니다. 아니지요. 사례금인것이 아니라 저에게 주는 보수지요. 말하자면 선생님이 받는 로임과 같은겁니다.》 나는 입이 쓰거워나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김종환이 한마디 덧붙였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할수 있는 일이 따로 있고 또 할수 없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만약 지금 한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할 때 선생님께서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사람을 구하러 선뜻이 물에 뛰여들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면 저는 나름대로 저의 재간에 알맞은 일을 하면서 자기 존재를 실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 나는 김종환의 말이 채 끝나기전에 자리를 떴다. 어쩐지 삭막한 기분이였다. 이튿날 출근해서 김종환이 하고 있는 일, 말하자면 《특수한 직업》에 대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후배 기자들에게 말했더니 생각밖에도 후배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새로운 신생사물》이라고 흥분했다. 《신생사물 좋아하네. 생전 듣지못한 명칭을 내걸면 다 신생사물인가. 내보기엔 김종환이 하는 일은 인젠 인도주의적인 차원을 떠나서 영리를 목적으로한 일종의 장사거래에 불과하다고 보네.》 나의 이말은 후배기자들의 《집단폭격》을 받았다. 《선배님, 지금 선배님은 남을 위한 일, 말하자면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대공무사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시각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지금 시대에 다른 시각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시각이라니?》 《례들면 김종환에 대한 시각입니다. 하긴 그를 60년대의 뢰봉식의 영웅, 구양해식의 영웅으로 볼수는 없지만 사경에 처한 생명을 구했다는 의미에서는 그도 역시 영웅입니다.》 《영웅이란 신성한 단어는 아무렇게나 붙이는게 아니야.》 《영웅에 대한 시각도 인젠 달라져야 합니다. 영웅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남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는게 영웅이라고 봅니다.》 《금품을 받는 사람도 영웅이야?》 《생명을 구하고 받은 금품은 일종의 보수, 로임이라고 한 김종환이 말이 참 뜻있는 말입니다. 금품 자체가 나쁜것이 아닙니다. 금품은 어떤 경우엔 한사람에 대한 평가로 될수도 있습니다.》 《평가?》 《영웅으로 추대되는 사람한테 예전엔 증서나 주고 만민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로 내세웠지만 지금은 증서만 주는것이 아닙니다. 상금이라는것이 있지않습니까. 그것도 정부가 주는 상금, 그 상금도 돈입니다. 상금은 영웅에 대한 다른 한 방식의 평가라고 봐도 되지요. 그러니까 김종환이 사람을 구하고 받는 금품은 그에 대한 상금으로 봐야지요.》 《김종환처럼 스스로 취하는것도 상금인가?》 《정부가 인정해 주는것만이 상금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구했다는 점에서 그는 정신문명건설의 모범이고 그 보상으로 금품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를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합법칙성을 투철하게 터득한 사람으로 봐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보면 김종환은 정신문명건설과 물질문명건설에서 새롭게 태여난 중국특색을 가진 모범으로 봐야겠구만. 하하하…》 《저는 김종환이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분합니다. 조선족중에 김종환처럼 남다른 생존방식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는것이 마치 신기루를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후배기자들의 말에 나는 수긍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세대차를 느꼈다… 그 뒤로 사경에 처한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천인공노할 일이 련속 보도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그중 두가지 일을 이 글에 올려본다. 《세 학생이 수영을 하다가 한 학생이 강 중심에서 기진맥진해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부근엔 몇 척의 배가 떠있었다. 같이 수영하던 두 학생이 한 배사공을 찾아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달라고 하니 그 배사공은 돈 10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우선 사람을 구하고 봐야 되지않겠느냐고 하니 그 배사공의 말이 돈을 손에 쥐여야 구해주겠다고 했다. 사람을 구한다음 돈 10원을 주겠다고 하니 외상은 안된다고 하면서 현금을 요구했다. 두 학생은 다른 한 배사공을 찾아갔다. 그도 역시 현금을 요구했다. 하는수없이 두 학생이 옷을 벗어놓은 곳까지 가서 호주머니 돈을 다 털어가지고 그 배사공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물에 빠진 친구는 자취를 감춘지 오랬다…》 《6월 22일 아침 6시 30분 200여명을 실은 려객선이 장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사천성 합강현 수역에서 인위적인 책임사고로 뒤번져졌다. 200여명의 승객들이 세찬 강물속에서 생사판가리를 벌리고 있을 때 마침 한척의 배가 그 수역을 경과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했지만 배주인은 못본척 그냥 배를 몰아 지나쳐버렸다.》 이 두 기사를 보면서 어쩔수없이 이게 정말 인간이 사는 세상이냐고 나 자신에게 반문해봤다. 참담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떠올리게 된것이 김종환이였다. 만약 김종환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무작정 물에 뛰여들었을것이다. 아, 김종환, 김종환 나 너를 다시 봐야겠구나… 보름이 지난 어느날 나는 북경석간 첫면에서 놀랍게도 김종환의 이름을 발견했다. 기사제목은 《견의용위인(見義勇爲人)》이였다. 우리말로 풀면 정의에 용감한 사람, 또는 의에 용감한 사람이다.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옥연담 호수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영하고 있을 때 한 〈검은 손〉이 수영하는 사람들이 벗어놓은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 임자들은 수영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그 〈검은 손〉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호수가에서 음료수를 파는 김종환이였다. 〈검은 손〉이 돈지갑을 꺼내 가지고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김종환이 그 앞을 막아섰다. 〈검은 손〉은 소리내지 말라고 하면서 돈지갑의 돈을 반반씩 나누자고 했다. 그러나 김종환은 쓴웃음만 지었다. 〈검은 손〉은 돈지갑채로 김종환에게 주며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김종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이번에 〈검은 손〉이 꺼낸 것은 비수였다. 김종환은 또 쓴웃음을 지었다. 일장 박투가 벌어졌다. 김종환은 비수에 손목을 찍히면서도 끝내 그 〈검은 손〉을 호수물에 처넣었다. 호수물에서 허우적거리며 나오는 그 〈검은 손〉을 결박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의 등뒤로 두 놈이 달려들며 김종환의 몸에 비수를 박았다. 칼을 맞은 김종환은 앞으로 넘어지면서 〈검은 손〉을 덮쳤다. 둘은 함께 호수물에 가라앉아 버렸다. 물재간이 없는 〈검은 손〉의 짝패는 물에 들어설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사람들이 모여들자 줄행랑을 놓았다. 한참후에 물우에 떠오른것은 잔뜩 물을 먹고 지각을 잃은 〈검은 손〉이였다. 이어 떠오른 것은 등에 비수가 박힌 김종환이였다. …… 정의에 용감한 사나이 김종환은 다행히도 인차 응급치료를 받아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나는 인차 이 기사를 쓴 기자를 전화로 찾아 김종환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알아냈다. 김종환이 응급치료를 받고있는 병원은 공군총병원이였다. 그길로 병원에 찾아갔다. 그러나 한창 응급치료중이여서 외부인 접촉을 금하고 있었다. 며칠후 비로소 나는 김종환을 만날수 있었다. 하얀 벽, 하얀 커튼, 하얀 침상, 모든것이 하얀 병실에서 유독 새까만 물체는 볕에 온몸이 가맣게 탄 김종환이였다. 내가 병실에 들어서자 김종환이 조금은 쌀쌀한 어조로 물었다. 《선생님은 오늘 기자신분으로 오신겁니까? 아니면 개인적인 신분으로 오신겁니까?》 《그건 왜 묻나? 아무 신분이면 어떻나?》 《혹시 기자신분으로 오셨다면 이방에서 나가주십시오.》 《왜 그러나?》 《전 기자가 싫습니다. 아니, 역겹습니다.》 《자네와 구면인 사람이 병문안 왔다고 생각하면 안되나? 게다가 같은 조선족이…》 《그럼 거기 앉으십시오.》 《좀 어떻나?》 《상처는 별로인데 기분은 억망입니다.》 《왜?》 《다 선생님들과 같은 기자덕분이지요…》 사연은 이러했다. 북경석간에 그 기사가 나간후 북경시 해당부문의 책임자가 찾아와 김종환을 〈정의에 용감한 투사〉로 천거하겠으니 서류작성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김종환은 단마디로 거절했다. 《전 정의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저 내맘이 시키는대로 했을뿐입니다.》 그가 거절해도 그에게 〈정의에 용감한 투사〉라는 칭호를 수여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였다. 우선 그의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증인이 필요했다. 해당 일군이 당시 사건이 벌어진 옥연담공원 호수가에 가서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 증인을 서달라고 하니 다들 그날의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딴전을 부렸다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좋은일이든 궂은일이든 증인으로 나서기 싫어한다. 증인으로 나서면 번거롭기만 하다는것이다. 그곳에서 해당 일군이 얻어들은 소리라면 김종환이 아무런 허가증도 영업증도 없이 음료수를 팔고 수영을 배워주며 돈을 버는 외지인이라는것 뿐이였다. 이어 김종환이 북경시에서 외지인에게 내주는 림시거주증마저 없는 사람이란것도 밝혀졌다. 북경에서 림시거주증을 내지않은 외지인은 거주조건이 부합되지않는 사람으로 취급되여 본적지로 송환된다. 그러니 김종환은 송환될 대상이다. 그 뿐만아니였다. 본적지에 가서 조사해본 결과 김종환이 소년시절 불량배들과 휩쓸려 다니다가 소년수용소에 반년 있었던 어두운 과거도 드러났다. 〈정의에 용감한 투사〉 칭호를 주자고 시작한 작업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투사칭호를 받지못하니 치료비도 자부담해야 했다. 긁어 부스럼이라더니 김종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담배 한대 주시겠습니까?》 김종환이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여긴 금연인데…》 《속이 뒤집혀지는데 가릴게 있습니까?》 내가 권한 담배를 그는 걸탐스레 빨아댔다. 한숨을 쉬듯 후- 담배연기를 내뿜고는 허거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보니 참, 제가 미련한 놈입니다. 그날 그 놈이 나한테 내미는 돈지갑을 고스란히 받아 임자한테 돌려주면 몸에 칼자국이 날 일도 없고 또 긁어 부스럼 낼 일도 없었겠는데… 지금와서 생각하면 제가 미련해도 한심하게 미련한 놈입니다.》 《아니야, 자넨 영웅이야.》 나의 이말에 김종환은 히스테리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얼굴을 싸쥐고 황소울음을 터뜨리는것이였다. 나는 뭐라고 달랠수없어 그저 울고있는 그를 지켜만봤다. 한참후에 그는 울음을 그치고 두눈을 꼭 감은채 잠자코 있었다. 나는 가지고 온 취재용 록음기를 꺼내 록음테프를 끼워넣었다. 록음기에서 한국의 가수 김종환이 부른 《존재의 리유》가 울려나왔다. 《 …… 남자란 때로 그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때도 있는거야 너는 리해할수 리해할수 있겠지 정말 미안해 널 힘들게 해서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마 너의 곁에 항상 내가 있을테니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슬퍼도 조금만 참아줘 내가 이렇게 살아갈수 있는 리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야 널 사랑해 …… 》 며칠이 지난후 나는 김종환의 치료비를 대주려고 다시 병원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김종환은 없었다. 간호원의 말로는 수술자리를 꿰맨 실을 뺀 그날로 김종환은 치료비를 물고 떠나갔다고 한다. 병원측에서 열흘정도 더 치료받고 출원하라고 말렸으나 김종환은 그냥 떠나갔단다. 그후로 나는 혹시나 김종환을 만날가싶어 시간만 나면 옥연담공원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김종환은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날에도 행여나해서 옥연담공원을 찾아갔는데 김종환은 보지못하고 수영하다 익사한 어린이 시체만 보고 왔다. 어린이의 시체를 보면서 나는 김종환만 있어더라면 저 어린이는 익사체로 되지않았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서 돌아와 종환아…) 2천년 7월 27일 북경에서 * 본 작품은 장백산 계열소설상 수상작(2000년)이다.
7    [단편]《노아의 방주》는 어디에? 댓글:  조회:1608  추천:35  2009-05-08
2000년 2월 14일 일기도 인젠 별로 쓸것이 없다. 그렇다고 처녀시절부터 써온 일기를 끊을수도 없고. 오늘은 련인절이다. 련인절이라고 하지만 날씨는 내 마음처럼 흐렸다. 나이 40고개를 넘긴 사람이 련인절을 실감한다는게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어느 날보다 더 서글퍼지는게 이상하다. 련인절도 모르고 흘러보낸 청춘이 서글퍼서일가 아니면 장미꽃을 들고 다니는 청춘들의 모습에 시샘이 나서일까… 집에 들어서면 오늘도 적막강산이다. 어깨가 축처진 외로운 내 그림자만 끌고 집에 들어서니 날 맞아준건 출근하면서 치우지 않은 아침상이다. 이 량반 또 점심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보나마나 로인활동실에 가서 마작을 주무르면서 빵 하나에 음료수 한병으로 점심을 에때운것 같다. 퇴직도 안한 사람이 왜 로인들 축에 끼는지… 장미꽃 한송이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내 인생 가엾기만 하다. 저녁밥 휘딱 먹고 또 어델 나가려는걸 불러세운 것이 이제보면 잘못이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14일이지.》 《14일이 무슨 날이에요?》 《누구 생일인가?》 할말이 없다. 그래도 한때는 글깨나 쓰면서 문학이 어떻고 인간이 어떻고 하던 사람이 련인절도 모르다니 사람 웃긴다. 내가 왜 오늘따라 감상적일까, 그만두자. 자학적인 기분만 드니까. 어서 삭막한 이 공간 벗어나야지. 다른 한 삶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사막의 오아시스: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방주님. 노아의 방주: 좀은 기다렸습니다. 오늘따라 사막의 오아시스: 왜죠? 노아의 방주: 오늘은 좀은 특별한 날이여서. 사막의 오아시스: 우리에게도 특별한 날인가요? 노아의 방주: 당연하죠. 오늘은 우리의 명절 밸런파인데이! 사막의 오아시스: 밸런파인데이? 노아의 방주: 련인절을 밸런파인데이라고도 합니다. 축복드리 고 싶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고마워요. 노아의 방주: 자 그럼 촛불을 켜겠습니다. 음악은 뭘로 할가 요? 외국 음악? 사막의 오아시스: 그래도 전 연변음악이 좋아요. 김지엽이 부 른 《타향의 달밤》. 노아의 방주: 하필이면 《타향의 달밤》입니까? 련인절 분위 기에 맞는 노래들이 많지 않습니까? 례하면 《오늘만 너 하고 나 둘만》이라던가 《사랑이 머무는 날》이라던가… 사막의 오아시스: 전 언제나 타향에 머물면서 고향을 그리듯 이 마냥 뭔가 그리는 기분이거든요. 노아의 방주: 그럼 《타향의 달밤》이 오늘의 분위기 음악입 니다. 음악이 울립니다. 듣고 계시죠? 사막의 오아시스: 네. 노아의 방주: 변변치 않은 선물이지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 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뭔가요? 노아의 방주: 장미꽃 한송이만 마련했습니다. 《백년해로》란 뜻에서 백송이를 선물하려다가 《백년해로》라는건 너무 많이 들어온 말이고 또 로인들이나 하는 소리같아서 그만 두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럼 한송이는요? 노아의 방주: 오직 너 하나만이! 사막의 오아시스: 고마워요… 노아의 방주: 술 한잔 붓겠습니다. 영원할 오늘을 위하여! …… …… 노아의 방주: 잔 들지않고 지금 뭘하시는겁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울고싶은 마음이얘요… 노아의 방주: 오늘은 모든 번뇌를 다 버리고 둘만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기분 내야지 않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잔을 들겠어요. 삶의 이 공간을 위하여, 그 리고 이 공간을 마련해준 방주님에게 언제나 행운만 가득 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자! 노아의 방주: 화제를 바꿔볼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그러죠. 노아의 방주: 좀은 재미나는 이야긴데 신문에서 봤습니다. 부 부로 만나 살아가면서 시기시기 상대방에 대한 평가가 다 르답니다. 례하면 처음 만났을 때의 평가가 다르고 련애 할 때가 다르고 결혼후에 다르고 또 결혼후 10년이 다 르고… 사막의 오아시스: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네요. 노아의 방주: 남자가 녀자에 대한 평갑니다. 첫 만남에서 련 애상대자에게 내린 평가는 《정말 이쁩니다. 꿀벌도 꽃인 가 착각하고 날아들겠습니다.》 련애를 시작하면 《행복의 녀신, 미의 천사여!》 이런 평가가 내려지고 결혼후 1년이 면 《뭐나 다 좋은데 가끔가다 앵돌아지는게 흠이야》, 결 혼후 5년이면 《바가지를 긁을줄밖에 모르는 녀자》, 결혼 후 10년이면 《이런 녀잘줄 내가 몰랐어. 내가 눈이 멀었 지》, 결혼후 20년이면 《성깔부려 그렇지 그래도 가정은 잘 지키는 녀자야》, 결혼 30년이면 《마누라 없인 난 못살 아》, 상처한후에는 《세상에서 둘도없는 녀자야, 나 이제 어떻게 살아》, 이렇게 탄식한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재미있는 얘긴데요. 노아의 방주: 남자에 대한 녀자들의 평가도 역시 시기시기에 다를것이라고 봅니다. 남자에 대한 평가 한 번 내려보시 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여태껏 남자 한사람밖에 모르고 살아왔으 니 평가를 내릴수 없군요. 노아의 방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라도? 사막의 오아시스: 평가하고싶은 생각 꼬물만치도 없어요. 노아의 방주: 미안합니다. 별로 아픈 상처 건드린 것 같군요. 자. 그럼 우리 자리를 옮겨볼까요? 노래방 어떨가요? 사막의 오아시스: 오늘 그 어디에 가봤댔자 죄다 젊은이들의 세상이겠으니 그냥 산책이나 하지요. 노아의 방주: 밸런파인데이 밤, 련인하고 함께 걷는 밤거리, 오늘따라 명멸하는 불빛도 축복의 꽃보라로 보이는군요. 사막의 오아시스: 오래만에 별을 보는군요. 하늘의 별을 쳐다 볼 여유도 없이 살아온 인생 비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 네요. 노아의 방주: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러니 가끔씩은 하늘을 쳐다볼 여유를 가지십시오. 그러 면 달도 따고 별도 따고, 노래마따나 뽕도 따고 님도 따 고 하하하… 사막의 오아시스: 호호호… 노아의 방주: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무슨 노래를요? 노아의 방주: 《모스크바 교외의 밤》 사막의 오아시스: 저의 18번이얘요. 노아의 방주: 그렇습니까. 역시 저의 18번입니다. 《깊이 잠든 화원은 고요해》 사막의 오아시스: 《산들바람 속삭이네》 노아의 방주: 《아름다워라 이 맘 이끄는》 사막의 오아시스: 《황홀한 이 밤이여》 노아의 방주: 별로 20년전으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저도 그래요. 그 때의 그 기분으로 그냥 살 아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노아의 방주: 그 기분을 다시 살리는겁니다. 20년전 《개구리 합창단》이 합창하는 논판에서 밝은 달이 뿌려주는 은가 루를 한몸에 받으며 걷던 논뚝길… 사막의 오아시스: 방주님도 그 때 농촌에 있었나요? 노아의 방주: 《광활한 천지엔 할 일이 많다》 사막의 오아시스: 지식청년이셨군요. 전 귀향청년이였어요. 노아의 방주: 천생배필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 노아의 방주: 점 세 개는 무슨 뜻입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아이참 것도 몰라요? 전 인젠 나갈께요. 주 말에 다시 만나요. 8282! 노아의 방주:8282! 2000년 3월 25일 주말과부라는 말이 있다. 외국에서 나온 말이다. 외국에선 대체로 주말에 볼만한 체육경기가 벌어진단다. 남자들이 체육경기를 구경하러 가고 나면 홀로 집에 남은 마누라를 주말과부라고 한다나. 주말과부란 말은 나한테는 너무나 사치스럽다. 주말이 아니라 일주일 과부, 아니 한달 과부, 그것도 아니다. 일년내내 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남은 주말에 가족동반으로 외식하고 또 어디로 구경가고 나들이가고 하는데 홀로 밥상에 마주앉아 아침에 남은 묵은밥이나 긁어먹는 신세, 사는게 다 귀찮아진다. 애가 있을 땐 그래도 말동무라도 있어 괜찮았지. 어서 방학이 됐으면 좋겠다. 애라도 오면 무덤같은 이 공간이 사람 사는 공간으로 변하겠는데… 알다 모를 일. 돈도 없는 사람 저녁마다 내내 술이다. 남의 술 얻어먹으면 드믄드믄 사는 멋도 있어야겠는데 술 산다고 나한테 돈 내라는 말은 없다. 《작은 금고》라도 있는지. 있을리 만무하지. 문화관이란 워낙 로임마저도 자주 체불하는 단위니까. 술먹을 돈을 대줄 사람은 없은것이고. 좌우간 얼굴 하나는 두껍다. 어쩌면 그렇게 매일이다시피 남의 술을 얻어먹기만 할가. 알콜중독자의 일화가 생각난다. 한 알콜중독자가 술 한잔 얻어먹으려고 점심때나 저녁때면 식당앞에서 서성거리면서 그 누굴 기다리는척 하다가 풋면목이나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척 들어앉아 술 한잔 얻어마신단다. 그 량반 그런 신세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신세가 됐으면 갈 만치 다 간 사람이지… 어쩐지 내가 오늘 술 마시고 싶다. 옛날 시인묵객들은 자기 그림자와 벗해서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시상을 무르익혔다는데 난 술 마시며 뭘 달랠가? 외로운 마음? 사막의 오아시스: 오늘 술 한잔 했어요. 노아의 방주: 즐거운 주말인것 같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울적해서 혼자 마신거얘요. 노아의 방주: 울적해서 마신 술은 몸에 해롭다고 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방주님은 술 마셔요? 노아의 방주: 가끔씩은 입에 댑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즐기는 편이세요? 노아의 방주: 술을 즐긴다기보다 그 분위기를 즐긴다고 할가 요? 사막의 오아시스: 제가 지내본 사람중 호주머니에 돈 한푼 없 어도 매일이다시피 술 마시는 사람이 있더군요. 노아의 방주: 행복한 분이군요. 사막의 오아시스: 행복하다니요? 노아의 방주: 호주머니에 돈 한푼 없어도 술좌석을 마련해 주 는 분이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남자 체면으로는 그냥 남의 술 얻어먹기가 마음 편하지 않을텐데요. 노아의 방주: 남성세계의 술문화에 대해 녀성들이 리해가 가 지않는 부문이 많을겁니다. 남자들은 남이 사는 술을 얻어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그 분위기에 어울 린다고 합니다. 돈 한푼 없어도 마냥 친구들과 술자리에 어 울린다는 그 분은 대인관계가 좋은 분인것 같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지금 세월에 대인관계란 그 어떤 목적을 념 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인간관계가 아니겠어요. 말하자면 승 진이라던가, 명이나 리를 위한것이라던가. 노아의 방주: 글쎄요. 저의 경우엔 술자리에 어울릴때는 그저 그 자리의 분위기가 좋아서 어울리는겁니다. 목적, 의도적 으로 술자리를 마련한다던가 술자리에 참석한다면 그건 진 정한 의미에서의 남자들 술자리가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럼 그저 즐긴다는거얘요? 노아의 방주: 대화하는겁니다. 지금 인간 사이에 대화할 기회 가 아주 적습니다. 술자리도 일종 대화의 장소이라고 저는 봅니다.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의 우정을 다시 확인하고 그 렇지 않으면 피곤한 세상에서 날카로워진 신경을 알콜로 잠시나마 둔화시킨다던가… 사막의 오아시스: 진짜 그런 술자리면 저도 끼우고 싶네요. 스 트레스도 풀고 겸사해서 다믄 술 마시는 그 시간이라도 현 실을 망각에 부치고… 노아의 방주: 그러나 아까 말했지만 울적해서 혼자 드는 술은 몸에 해로울 뿐만아니라 스트레스를 더 받게 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런가봐요. 노아의 방주: 좋은 주말에 왜 술이 화제가 됐습니까? 다른 화 제를 바꿔볼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좋아요. 노아의 방주: 오아시스님은 지금 현실의 모든 번뇌를 훌훌 털 고 아무곳이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어쩜 그렇게도 제 맘을… 노아의 방주: 얼굴에 씌여져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제 얼굴 보이나요? 노아의 방주: 한번 그려볼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기대되는데요. 노아의 방주: 총적으로 지적이면서도 어딘가 우수가 깔린 그 런 모습인것 같습니다. 남들처럼 미용원을 나들면서 얼굴을 만질 그런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얼굴에 꽤나 신경을 쓰시는 분, 그리고… 사막의 오아시스: 얼굴 모습만 그려보세요. 노아의 방주: 살결은 힐것으로 보입니다. 얼굴형은 약간 둥근 것 같고 둥근 얼굴에 비해 눈은 좀 가는 편인데 눈빛만은 날카로울것 같고 그 눈빛에 알맞게 코는 오뚝하게 솟은 편이고 입은 꼭 다물린 작은 입입니다. 어때요? 제가 그려 본 형상이? 사막의 오아시스: 몰라요. 노아의 방주: 어디까지나 저의 상상입니다. 상상이 빗나갔으면 사과하겠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아니얘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 해요. 저 를 좋게 상상해 주셔서… 노아의 방주: 저의 모습 한번 그려줄수 없겠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저의 언어표달 능력으로는 방주님을 그릴수 없어요. 대체적으로 받은 인상을 말한다면 방주님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세상 편하게 사시는 편한 분같아요. 어때요? 제 인상이? 노아의 방주: 너무 과찬이십니다. 하긴 저도 피곤한 세상을 그 래도 마음 편하게 살자고 노력하는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현실은 그렇게 마음대로 안됩니다. 범의 코 등의 밥알도 떼 먹는 세상이라고 합니다만 그렇다고 너무 아득바득하면 오 히려 자학적이 될수도 있지요. 그건 그렇고, 주말인데 이러 고만 있겠습니까. 남은 주말이면 어딘가 려행도 떠나고 둘 만의 세계를 마련한다는데 우리도 한번 려행 떠나볼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바라던 바예요. 어디로 갈까요? 노아의 방주: 미국이나 유럽은 너무 머니까 가까운 곳을 택하 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가급적이면 문화권이 비슷한 곳으로 택하지 요. 노아의 방주: 그럼 한 문화권이고 언어도 통하는 한국이 어떻 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좋아요. 노아의 방주: 그럼 한국에서도 관광1번지로 꼽히는 제주도로 갑시다. 어서 오세요. 대한항공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즐거운 려행이 되십시오. 호호호… 노아의 방주: 비행기로 날아오니 제주도도 정말 지척이군요. 우선 려장을 푸셔야지요. 방은 어떻게 쓰겠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아직은 각방을 쓰는게… 노아의 방주: 그럼 저는 하는수없이 초야권은 보류하겠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아이참… 노아의 방주: 먼저 어디부터 구경할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아무곳이나… 노아의 방주: 제주도가 처음이여서 어디로 안내해야 할지 갈 피를 잡을수 없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이쯤으로도 만족이얘요. 진짜 제주도로 날아 가 본 기분이얘요. 노아의 방주: 언젠가는 한번 진짜로 제주도 관광을 떠났시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날을 기대해 볼께요. 노아의 방주: 오늘의 주말 잘 보내셨는지? 사막의 오아시스: 즐거웠어요. 생각같아선 그냥 이 밤 새고싶 어요. 노아의 방주: 제주도에 가서도 각방을 썼으니까 그런대로 자 기 방으로 돌아갑시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러죠… 노아의 방주: 좋은 꿈꾸십시오. 사막의 오아시스: 자기도… 노아의 방주: … 사막의 오아시스: 세 점은 무슨 뜻이죠? 노아의 방주: 지난번에 제한테 주신 세 점의 수수께끼를 제가 고심고심끝에 종내 풀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무슨 뜻이얘요? 노아의 방주: 남자들이 가장 꺼내기 힘든 말이 하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 한마디 꺼내면 상대방을 평생 책임져야 하 니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그 말이 뭔가요? 노아의 방주: 사랑해! 사막의 오아시스: 어머머... 2000년 5월 20일 요즘은 술 사줄 친구가 없는 모양. 집에 들어오면 텔레비죤을 독차지한다. 드라마나 영화같은건 아예 보지않고 체넬이란 체넬은 죄다 돌려가며 체육경기만 찾는다. 체육경기도 가장 야만스런 경기, 례하면 프로레슬링이라던가 권투라던가 그렇지 않으면 축구. 글 쓰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걸 알기 위해서라도 뉴스같은걸 보아야 하겠지만 그건 다 판에 박은 소리라고 곁눈도 주지 않는다. 글쓰는 모습 본지 오라다. 필을 놓은지 일년은 잘 된것 같다. 언젠가 왜 글을 쓰지않는가고 물으니 뭐 사회가 문단 전체를 타락시켰다나. 그럼 자기는? 소웃다 꾸러기 터질일이다. 남은 그래도 긴 글 짧은 글 줄줄 잘도 써내던데. 그러면 하는 말이 더 기막히다. 《그건 글이 아니라 락서야.》 언제 어떤 명작을 내놓으시려고 그러는지 어쨌든 《대단하신 분》이다. 필을 놓기전 마지막으로 썼다는게 쥐와 고양이가 어떠어떠했다는 시다. 뭐 고양이와 쥐가 동거를 시작했는데 나중엔 고양이가 도리어 쥐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아양을 떨더라 그런 내용인것 같다. 예전엔 하늘이 어떻고 태양이 어떻고 대지가 어떻고 어머니가 어떻고 고향이 어떻고 나아가서는 우주가 어떻고 하던 사람이 이제와선 쥐나 고양이만 눈에 보이는 모양이다. 내가 다 억장이 막힌다. 이제는 날 정시도 못한다. 눈길이 마주치면 먼저 피해버린다. 안해를 당당하게 맞바라볼 용기마저도 없어졌으니 볼장을 다본 사람이다. 주눅이 든 사람하고 밖에 나가 바람피우는 사람이 안해의 눈길을 피한단다. 바람 피울 용기나 매너가 있는 량반이라면 그래도 남자로 봐주겠다. 누군가 사내다운 꼴기가 하나도 없고 말다툼할 용기마저 없고 《뼈》도 없고 《피》도 없고 《살》마저도 없는 그런 사람을 무지렁이라고 했다. 진짜 아주 무지렁이가 됐을가…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에 눈에 생기마저 없던 사람이 유독 가장 야만스런 권투경기를 볼때면 눈매가 사나와지고 주먹을 내두르며 흥분한다. 그때만은 사내라고 봐줄만하다. 어떤 땐 두눈에 살기가 내비친다. 그 눈을 보면 소름이 오싹 돋는다. 야망의 눈빛, 아니야.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이랄까… 노아의 방주: 오늘의 화제는 뭘로 잡겠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취미생활로 잡아볼까요? 노아의 방주: 좋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저는 별다른 취미생활이 없습니다. 오아시스님은? 사막의 오아시스: 지금까지 취미생활이란건 상상도 못해봤어 요. 정서적 공감을 얻을수 있는 컴퓨터 채팅이 지금와선 나 의 취미생활일지도 모르죠. 노아의 방주: 우리 사이의 채팅, 말하자면 우리의 대화는 이미 취미생활을 벗어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린 분명 새로운 생활공간에서 새로운 생활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혹시 운동 즐기세요? 노아의 방주: 저는 별로인데 경기는 즐겨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남자들은 다 경기를 즐기는가봐요. 노아의 방주: 남자라면 즐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왜서요? 노아의 방주: 경기 자체가 곧 치열한 경쟁입니다. 남성사회도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경쟁이 없으면 남자들의 존재가치 가 상실됩니다. 때문에 남자들은 격렬한 운동, 례하면 축구 나 권투, 레슬링같은 경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사업에 서 압력을 많이 받거나 감정세계에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 이는 남자일수록 격렬한 운동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격렬한 운동을 구경하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좋은 기 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런데 격렬한 경기를 보면서 크게 흥분하 는것이 스트레스 해소로 된다면 그 흥분이 세상을 의욕적 으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마음가짐에 충전이 되어야 할게 아니겠어요? 노아의 방주: 그렇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런데 그 때의 흥분으로 그냥 끝나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노아의 방주: 글쎄요. 그러나 흥분할수 있다는 자체가 아직도 경쟁사회에서 경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표시로 된다고 저 는 생각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남자들은 별종인가봐요… 노아의 방주: 무슨 뜻인지… 사막의 오아시스: 아뇨. 그냥 해보는 말이얘요. 노아의 방주: 사실 남자들은 별종입니다. 남자는 일생에서 4가 지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권력, 지위, 재부, 성애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성공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런데 남성의 비극은 바로 이 네가지 추구를 완성하는 남 자가 아주 드물다는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더 큰 비 극은 이 네가지 추구를 완성할수 없는것을 번연히 알면서 도 열심히 추구하는 흉내라도 내야 하는것입니다. 이거 뭐 별로 제가 강의하는 것 같습니다. 따분한 얘기죠? 다른 화 제로 바꿔볼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오늘 별로 몸이 피곤하군요. 노아의 방주: 오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그런건 아니고… 노아의 방주: 까닭없이 기분이 언짢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럴땐 기분전환을 해야 합니다. 제가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 요? 사막의 오아시스: 경청하고 있어요. 노아의 방주: 쥐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세 마리 쥐는 서로 뒤 질세라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이 런 자랑 저런 자랑 늘어놓다가 한 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무서운 고양이 있잖아, 난 방금 그 녀석 앞에 있는 고 기를 보란듯이 집어먹고 오는 길이야.》 그러니 다른 한 쥐 가 말했습니다. 《그 고양인 어제 나보고 데이트 한번 하자 고 청을 들었어.》 이말에 또 다른 한 쥐는 길게 하품을 하 면서 말했습니다. 《어, 졸려. 난 어제밤 그 녀석과 온밤을 샜어. 나 지금 또 그 녀석한테 가야해. 그 녀석 덜 만족됐 나봐.》 그러니 다른 쥐들은 입만 딱 벌리더랍니다. 하하 하… 어때요? 재미있죠? 사막의 오아시스: 쥐와 고양이 말만 나오면 저는 역겹기만 해 요. 노아의 방주: ? 사막의 오아시스: 전 그만 나갈께요.안녕!2000년 6월 10일 녀자 나이 사십이면 보석에 눈을 뜬다는 말이 있다. 금, 은, 보석으로된 장신구에 무척 신경을 쓸 나이라는 뜻이다. 결혼할 그때는 결혼반지 교환을 모르는 세월이였으니 세월을 탓할만도 하지만 지금까지 반지 하나 없이 살아왔다면 누구나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그게 언제던가, 보석반지 갖출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세지만 구경이야 못하랴 싶어 보석 장신구를 진렬한 매대앞에서 서성거리는데 한다는 소리. 《뭘 볼게 있어. 여긴 경박한 허영 부리는 아낙네들이나 오는 곳이야.》 마누라 손에 금반지 하나 끼워주지 못할망정 뭐 경박한 허영? 어휴… 할 말 다 했어? 입 쓰겁지 않아? 지난해 내 생일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고작 데리고 갔다는 것이 랭면집. 랭면 두 그릇에 맥주 한병 시켜놓고 한다는 소리가 생일에 면을 먹으면 장수한다나. 그 뒤의 말이 화가 뒤짚어질 소리. 《모자라면 한 그릇 더 먹어. 오랜만에 30원 땄어.》 50전 내기 마작판에서 30원을 땄으면 그 수준에 하루 꼬박 앉아 놀았다는 얘기다. 퇴직도 안한 사람이 하는 일없이 로인활동실에 죽치고 앉아 마작쪽만 만지는것도 꼴불견인데 그런 판에서 요행 딴 돈으로 내 생일 축하로 몇원밖에 안되는 랭면을 샀다니 분김에 랭면 그릇 엎어놓고 나와버렸다. 래일은 내 생일. 생일 오는 것이 이젠 무섭다. 또 화가 뒤집혀질가바. 지금은 소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생일날이면 식당에서 상을 차려 제 또래 친구들을 청한다는데. 차려진 명이라고 그런대로 살아왔는데 왜 요즘 자꾸 비참한 생각만 드는걸가… 노아의 방주: 생일 미리 축하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 노아의 방주: 제 기억이 틀리진 않겠는데 래일이 생일이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아니 어떻게 저의 생일을… 노아의 방주: 잊으셨습니까? 언젠가 한번 우리가 생년월일을 따져 운세를 본적이 있지 않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기억도 좋으셔라. 노아의 방주: 생일선물 드려도 괜찮겠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선물까지… 노아의 방주: 며칠전 꽃가게에 들를 일이 있었습니다. 생일선 물로 꽃사러 한 사람이 왔는데 2만원짜리 꽃다발을 주문 하더군요. 2만원짜리 꽃다발이 대체 어떤 꽃들로 묶어질까 싶어 한참 서서 구경했는데 꽃이 전부다 외국산이였습니 다. 외국산 장미 한송이가 500원이더군요. 제가 그 꽃다발 을 주문한 사람이 누군가고 꽃가게 주인한테 물었더니 회 사 사장이라더군요. 그럼 그 비싼 꽃다발을 받을 분은 또 누군가고 했더니 요즘 데뷔한 노래가수라나요. 돈 많은 사 람은 나름대로 그런 값진 선물을 마련하겠지만 저는 또 나름대로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돈 한푼 들이지않은 선물 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수 없는것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사막의 오아시스: 뭔데요? 노아의 방주: 육안으로 볼수없는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 노아의 방주: 저의 마음입니다. 영원한 선물로 드립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고마워요… 노아의 방주: 다이야몬드반지나 목걸이, 값비싼 의상 뭐 그런 선물들이 많지만 제가 드리고싶은것은 마음뿐입니다. 워낙 가진게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저의 생일날을 기억해 주신것만으로도 감개 무량한데 돈 주고도 못사는 영원한 선물까지 주시니 무어 라고 지금의 심정 표달하기 어렵군요. 뭘로 보답할까요? 노아의 방주: 사랑하는 사이엔 보답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서 로 그냥 주는거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저도 저의 모든것 그냥 드리겠습니다. 노아의 방주: … 사막의 오아시스: … 노아의 방주: 춤이나 출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네. 노아의 방주: 좋아하시는 춤곡은 어떤 곡입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무도장에 가본적이 없어서… 노아의 방주: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춤을 청하니까 춤을 아주 즐기는줄 알았어 요. 노아의 방주: 사실 기분 좋으니 해본 말입니다. 전 무도장 출 입도 못해보고 춤곡이 어떤 곡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지금 세월에 무도장 출입을 못해보고 춤곡 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 몇이 있겠어요. 언젠가 저의 친구에 게 무도장 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니까 그 친구가 하 는 말이 세상 헛살았다고 하더군요. 정말 세상 헛산걸까요? 노아의 방주: 그게 아니지요. 하긴 남들이 해보는것을 다 해보 고 향수할것을 다 향수하면서 사는 삶이 어찌보면 충족한 삶이겠지만 향수는 누리지 못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자세 만 가지면 그 삶 역시 충족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저의 경우를 보면 저는 나 자신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남편의 삶과 자식의 삶을 살아주고 있는것같 아요. 노아의 방주: 누군가 이런 말을 한것 같습니다. 《녀인은 남 편을 내조해서 세계와 대화하고 자식을 키우며 미래를 설 계 한다.》 사막의 오아시스: 녀인의 삶은 오로지 남편과 자식을 위한 얽 매인 삶이라는 뜻인가요? 노아의 방주: 딱 그런 뜻은 아니고 녀인의 인생가치를 념두에 두고 한 말인것 같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녀성의 인생가치, 듣기엔 좋은 말인데 저의 경우엔 그것은 어떤 굴레같아요. 말하자면 녀성에게 강요된 그 어떤 의무같은것이라고 할까요. 노아의 방주: 이런 인생상담 자주 하시는 편입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방주님 내놓고는 대화할 상대가 없어요. 방 주님은요? 노아의 방주: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가정에서도요? 노아의 방주: 물론이죠. 지금 《랭전》 상태입니다. 《랭전》 상태에서는 대화가 안 먹힙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랭전은 전쟁을 유발한다더군요. 노아의 방주: 근대 국제관계사를 보니 랭전이 이전처럼 전쟁 을 부르는것이 아니라 화해로 이어지더군요. 타협과 리해, 양보와 신뢰가 랭전을 종식시키는 관건으로 되고 있더군요. 오늘 우리가 너무 거창한 화제를 다룬게 아닙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글쎄요… 노아의 방주: 재미있는 화제로 바꿀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그러죠. 노아의 방주: 하루는 부부사이에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내대 장부는 어디에 내놓으나 당당한 영웅이야.》 그러니 녀자가 받는 말이 《당신이 영웅이라면 나는 미인이야. 똑똑히 알 아둬. 영웅도 미인관만은 넘지못해.》 그래서 남자가 《남 자는 강철이야》… 사막의 오아시스: 《녀자는 용광로. 강철을 녹이는 용광로. 》 노아의 방주: 이 이야길 들으셨군요. 사막의 오아시스: 듣진 못했는데 뻔한 리치가 아니얘요. 노아의 방주: 그럼 제가 남자의 말을 대신하겠습니다. 《남자 는 만리장성이야.》 사막의 오아시스: 《녀자는 맹강녀야. 만리장성도 맹강녀가 한 번 우니 무너졌어.》 노아의 방주: 《남자는 장강이야.》 사막의 오아시스: 《녀자는 바다야. 장강이 제멋대로 어딜 에 돌든간에 나중엔 꼭 내 품으로 흘러들게 돼있어.》 노아의 방주: 《나는 너!》 사막의 오아시스: 《너는 나!》 노아의 방주: 두손 들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많이 듣던 얘기얘요. 노아의 방주: 마지막 말은 제가 만들어낸겁니다. 《나는 너!》 사막의 오아시스: 마찬가지얘요. 저도 나름대로 응한거예요. 《너는 나!》 노아의 방주: 축배 한잔 들가요? 사막의 오아시스: 뭘 위해서? 노아의 방주: 《나는 너》를 위해! 사막의 오아시스: 좋아요. 《나도 너》를 위해! 2000년 8월 12일 춥다. 열이 난다. 갑갑하다. 귀찮다. 짜증난다. 허무하다. 서럽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갱년기 증세란다. 녀자답게 살아본 기억도 없는데 벌써 볼장 다 봤는가… 갱년기에 들어선 녀자를 한족들은 《두부찌끼》라고 한다나. 남자들이 내린 너무나 잔혹한 평가다. 《당신 이제부터 주의해. 나 갈건 가고 올건 왔으니까 의사말대로 잘 협조해야 한다니까. 내가 신경질 써도 무조건 다 받아줘야 하고 내 기분도 맞춰줘야 하고.》 내 친구가 남편한테 이렇게 으름장을 놓으니 이튿날부터 아주 곱상이더란다. 친구처럼 그러고 싶지않다. 내가 더 비참해지니까. 요즘은 조끔 달라진 점이 있다. 귀가시간이 빨라졌고 드믄드믄 집안청소도 한다. 평소 가무일에 손 하나 대지않던 사람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찾아서 할 때면 꼭 엉큼한 궁리가 있다. 아니나 다를가 어제밤 내 이불속으로 들어왔다. 구렁이가 기여들어오는것과 같은 기분이다. 부부관곌 한지 언제였던지 기억도 나지않는다. 이불을 몸에 감고 등을 돌릴가 하다가 그냥 몸을 맡겨버렸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일방적일수 밖에 없다. 일을 끝내고 말없이 방을 나가는 뒤모습을 보면서 손에 잡히는대로 뭔가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눌렀다. 일년전부터 각방을 쓰게 된 리유도 일방적으로 일을 끝낸 뒤 내뱉은 말 때문이다. 지금도 그 말을 생각하면 악이 받친다. 그날도 제기분에 들떠 한참 씨근덕거리다가 떨어져 나갔다. 담배 한 대 피워물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싸늘한게 어디 산 사람이야? 송장이지.》 《그래 난 송장이다. 송장하고 그 짓거리한건 법에 걸려!》 그러곤 이불을 안고 아들이 대학가기전에 쓰던 방으로 건너갔다. 《노아의 방주》가 한 말처럼 남자는 일생에서 권력, 지위, 재부, 성애를 추구해야 한다는데 성애에서도 빵점만 맞는 락제생이다. 어휴, 내 신세… 사막의 오아시스: 보고싶어요. 노아의 방주: 저도. 사막의 오아시스: 방주님의 얼굴을 지금의 가상세계에서가 아 니라 현실에서 보고싶어요. 만나자요. 지금이라도. 노아의 방주: 만나면 우선 실망이 가고… 사막의 오아시스: 욕된 말이지만 혹시 방주님이 장애자라도 저는 실망하지 않을거얘요. 노아의 방주: 그 마음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만 현실에서의 만 남은 포기하시는게 좋을겁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왜서요? 노아의 방주: 만남으로해서 우리는 여태껏 함께 영위해온 생 활의 공간을 잃게 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이 공간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공간이 아니 얘요. 이제와선 전 이 가상의 공간이 싫어졌어요. 현실적이 고 싶어요. 노아의 방주: 아닙니다. 한사람이 세상 살아가면서 두 개의 생 활공간을 가진다는게 얼마나 쉽지 않다는점 리해하셔야 하 고 또 어렵게 구축한 생활공간을 버린다는게 얼마나 고통 스럽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저는 가상의 공간을 포기할 각오가 돼있어 요. 노아의 방주: 우선 고정하십시오. 누군가 인간은 두 개의 얼굴 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진실한 모습, 다른 하 나는 가면으로 가리운 모습. 사막의 오아시스: 지금 가상의 공간에서 채팅하고 있는 우리 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진실한 모습, 아니면 가면으로 가리운 모습? 노아의 방주: 딱 찍어 말하기 힘듭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저는 어디까지나 진실한 모습이예요. 노아의 방주: 현실이 오히려 더 진실할것 같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아니얘요. 강요된 삶을 사는 저의 경우엔 현실은 탈바가지를 쓰고 가면극을 노는 그런 놀음판이라고 생각해요.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남들한테 행복한듯한 모습 을 애써 보여주어야 하고 지어 잠자리에서도 상대방의 기 분을 의식해서 억지로라도 즐거웠다는 표정을 지어주어야 하고. 제가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요? 방주님은 저의 진솔 한 마음을 아직도 리해하지 못하고 있나요? 노아의 방주: 아닙니다. 충분히 리해합니다. 충분히 리해하기 때문에 이 공간을 버리고 싶지않습니다. 바로 이 공간이 있 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 생활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가리 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인간대 인간으로 허심탄회하게 인생상담도 나눌수 있었고 인간의 진실에 접근할수 있었습 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지금의 저의 마음 리해하시겠죠? 노아의 방주: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리해한다고. 사막의 오아시스: 그럼 제가 솔직한 고백을 할께요. 제가 왜서 저의 이름을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달았는지 아세요? 오아시스는 사막의 생명이고 꿈이고 리상의 세계얘요. 사막 에서 목말라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 듯이 현실 생활에서 모진 갈증을 느끼면서 사막같이 황페 한 불모의 땅에서 참된 삶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맨 사람이 바로 저예요. 그래서 삶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맨다는 뜻으 로 이름을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달았어요. 방주님은 제 가 찾은 오아시스얘요. 메마른 내 삶에 다시금 생기와 활력 을 안겨주고 누구한테 강요된 삶이 아닌 떳떳한 내 삶을 살도록 이끌어줄 분이 바로 방주님이얘요. 사랑해요… 노아의 방주: 그 사랑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우리 사랑합시다. 그리고 행복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봅시다. 사막의 오아시스: … 노아의 방주: … 사막의 오아시스: 그럼 인젠 우리 이 공간에서 나가요. 노아의 방주: 아닙니다. 우린 영원히 이 공간에 있어야 합니 다. 사막의 오아시스: 왜서 이 가상의 공간에 남아있으려고 해요? 노아의 방주: 바로 이 공간에서만 우리의 사랑이 가능하기 때 문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무슨 뜻이죠? 노아의 방주: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련인이 되기 도 하고 지어는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면서 부부생활까지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현실로 돌아가면 그것은 불륜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저의 경우엔 불륜이 아니얘요. 사랑이얘요. 꼭 만나요. 만나지 않으면 전 미칠것만 같아요. 노아의 방주: 그냥 이렇게 나오시면 스스로 이 공간에 무덤을 하나 만들게 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무덤이라니요? 노아의 방주: 사랑의 무덤. 사막의 오아시스: 무슨 뜻인가요? 노아의 방주: 현실은 무자비하면서도 또한 확실합니다. 우린 현실에서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기어코 만나시겠다면 저는 이 공간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상의 공간에 사랑 의 무덤 하나 만들어놓고… 사막의 오아시스: 그래요. 우리 함께 이 공간에서 사라지자요. 우리에겐 가상의 공간이 인젠 그 의미를 잃었어요. 좀 더 실제적이 되자요. 두손 모아 빌어요. 현실공간에서 만나요 네? 무작정 방주님의 뜻에 따르겠으니 꼭 만나요. 노아의 방주: 미숙아 꿈깨! 사막의 오아시스: 아니,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너 대체 누구 야? 노아의 방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널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야. 한마디 충고할게. 가상은 어디까지나 가상이고 현실은 어디 까지나 현실이야. 그걸 착각하지도 말고 두 공간을 애써 접 목하려고도 하지마. 가상공간에선 스트레스를 풀 정도면 돼. 우직하게 상아탑을 쌓을 궁리를 하지말고… 사막의 오아시스: 너, 너 대체 누구야? 노아의 방주: 내 말 끊지마. 례모없이. 미숙아 잘 들어둬. 녀자 가 성숙된 표징은 자기를 잘 아는것이야. 넌 지금 자기를 잘 몰라. 우선 자기를 잘 알아야 남을 리해할수 있어. 자꾸 번뇌나 고독, 삶의 고통을 하소연 하지말고 차분한 마음으 로 한번 자기 자신을 들여다 봐. 그러면 남도 리해해줄수 있고 살아온 삶이 비록 구질구질하다해도 쑥대밭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거야. 사람 사는게 다 그래. 욕망 대로 되는 일 별로 없어. 너무 기대도 하지말고. 기대가 크 면 실망만 클뿐이고 자학에 빠질뿐이야. 어서 이 공간에서 나가 남편 잠자리나 펴. 그게 현실이야. 사막의 오아시스: 당신…   ※ 부언: 《코리아 야후》 공개대화방에 들어가면 지금도 이런 글이 그냥 떠오른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노아의 방주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주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2001년 2월 20일 북경에서 완고
6    [단편] 마지막 한수 댓글:  조회:1432  추천:38  2009-04-25
병아리가 죽었다. 징후적인것이였다. 그가 죽기를 각오한 날에 병아리가 죽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예고같았다. 두다리를 쭉 뻗고 굳어진 병아리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자기의 죽은 모습도 이런 꼴이겠다고 생각을 해봤다. 처참하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허거픈 웃음이 나갔다. 병아리는 아이것이였다. 봄철이면 병아리를 파는 사람들이 북경의 거리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사람들은 생명체인 병아리를 아이들 장난감으로 팔고 산다. 병아리들은 애들 손에서 장난감으로 몇일 주물리다가 나중에는 죽어간다. 며칠전 그도 아이한테 병아리 한 마리를 사주었다. 다섯 살난 아이는 잘 때면 꼭 병아리를 넣은 자그마한 함을 베개머리에 놓고서야 잠에 들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텔레비죤수상기앞에 붙어앉아 시간을 보낸다. 병아리를 사준후로는 아이는 텔레비죤수상기앞을 떠나 병아리와 무슨 말을 쉴새없이 조잘거리며 놀았다. 아이는 병아리한테 리나라는 이름까지 달아주었다. 언젠가 아이는 에미한테 녀동생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에미는 아이가 소학교에 가면 녀동생 하나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때 아이는 동생이 만들어지면 이름을 리나라고 지어야 한다고 했다. 에미가 가출해버리자 아이는 녀동생을 만들 수 없다고 며칠 울었다. 녀동생이 생기면 지어줄 이름을 아이는 병아리한테 지어주었다. 그러고보면 병아리는 아이한테는 녀동생 맞잡이였다. 그런 병아리가 죽었다. 병아리의 죽음을 아이한테 보일수 없었다. 아이가 깨나기전에 그는 병아리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곤 담판석상에 나설 때 입던 멋진 명표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그는 죽음도 일종 인생의 마지막 담판이라고 생각했다. 1915년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한 루지테이니어호와 함께 수장된 미국의 연극 감독인 프로우먼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할 것 없다. 죽음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모험이다.》 그는 프로우먼의 그 말에서 죽음을 택할 용기를 얻었고 또 그 말로 자기의 죽음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하긴 《자살은 참회의 기회를 남겨놓지 않기 때문에 살인의 최악의 행태》라고 영국의 시인 콜린즈가 말했지만 그러나 독일의 철학가이며 시인인 니체는 《자살하려는 생각은 커다란 위안으로서 자살로하여 사람은 수많은 괴로운 밤을 성공적으로 지낸다》라고 했다. 또한 무덤은 망각의 대안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에 대한 망각을 위해 그는 망각의 그 대안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모험이라는 죽음을 맞이할 곳을 그는 북경 석가장간 고속도로우로 세워진 인도교로 택했다. 한것은 그로하여금 망각의 대안으로 가는 길을 택하게 한 빌딩이 바로 그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변에 8층으로 된 빌딩은 그가 자금을 모아 짓다가 만것이다. 인민페로 거의 4천여만원이 들어갔다. 채 완공되지 못하고 콩크리트구조물만 엉성하니 솟아 창문구멍들만 훵하게 보이는 것이 어찌보면 마치도 구멍이 숭숭 뚫린 벌집같아 보였다. 인도교아래로 지나간 고속도로에는 차량들이 시속 백키로 속도로 오가고 있다. 이제 그가 인도교우에서 몸을 날리면 차에 치인 그의 몸뚱이가 날아오를 것이다. 언젠가 그는 텔레비죤에서 사람이 차에 치여 죽는 장면을 보았다. 교통규칙을 어기고 차도를 횡단하던 사람이 시속 백키로의 속도로 달려오는 차와 충돌하는 순간 사람 몸체가 신기하게도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그 사람이 생의 모든 번뇌를 잊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매캐한 매연을 내뿜으며 흐르는 차량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약간은 후회했다. 가급적이면 생을 마감할 장소를 경관이 좋고 조용한 곳으로 택했더라면 더 좋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쩔수없이 한 장소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 곳은 기암과 운해로 소문난 황산이였다. 6년전 신혼려행때 그는 안해와 함께 황산에 갔었다. 운해와 일출이 장관인 황산에서 잊혀지지 않는 곳이 한 곳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련심쇄(連心鎖)》라고 이름지어진 곳이다. 주변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가에 유람객들의 안전을 위해 쇠사슬을 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쇠사슬에 는 각양각색의 자물쇠가 빈틈없이 매달려 있었다. 근처엔 자물쇠만 파는 사람까지 있었다. 영문을 물으니 그 대답이 이러하다. 옛날 옛적, 서로 사랑하는 처녀, 총각이 이승에서는 결합할수 없어 저승에 가서라도 영원히 함께 살자고 둘의 마음을 련결한다는 뜻에서 《련심쇄》를 절벽가에 걸어놓고는 함께 절벽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친 두 련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또 변치않는 사랑을 다짐하는 뜻에서 지금도 황산을 찾은 부부들이나 련인들은 꼭 이곳을 찾아와 자물쇠를 사서는 쇠사슬에 달아놓는다고 한다. 그날 그도 안해와 함께 자물쇠 하나를 사서 쇠사슬에 달아놓았다. 《사랑을 위하여 절벽아래로 뛰여내릴 용기가 있나요?》 안해가 묻는 말에 그는 가슴을 치며 대답했다. 《암, 절벽이 아니라 칼산 불바다라도 서슴치 않지.》 그날 안해는 장담하는 그의 가슴에 행복에 겨운 얼굴을 묻었다. 그 뒤로 4년이 지나서 안해는 가출하면서 그에게 쌀쌀하게 이런 말을 남겼다. 《언젠가 당신은 사랑을 위해선 칼산 불바다라도 서슴치않고 뛰여들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사랑의 무덤을 판 당신에게는 그럴 기회마저 없어졌어요. 돈이라면 덫에라도 스스로 몸을 내던질 당신이 이제 뛰여들 곳이란 비렬한 배신으로 파놓은 함정밖에 없어요. 비록 당신 손을 거쳐간 녀자들이 많지만 그러나 당신하고 함께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에 뛰여들 녀자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둬요.》 그는 후- 한숨을 내쉬고는 담배 한 대 꺼내 물었다. 마지막으로 피우는 담배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걸탐스레 담배를 빨아댔다. 내뿜은 담배연기가 흩어지지않고 얼굴에 덮씌운다. 매운 담배연기에 쐬인 눈에서 찔끔 눈물이 났다. 이제 담배를 다 태운후 가야할 마지막 길을 혼자 간다는게 외로웠다. 그의 손을 거쳐간 녀자들이 적어도 한 개 소대 인원수만큼은 되지만 안해의 말대로 그와 함께 마지막 길을 가려는 녀자는 하나도 없다. 그녀들이 그 무슨 변신을 위한 사랑이요, 극치의 사랑이요, 신세대 감각의 사랑이요 뭐요를 운운하면서 그와 사랑유희를 벌렸지만 결국 그녀들의 탐낸 것은 돈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3천궁녀가 꽃다운 젊음을 락화처럼 내던진 한국의 락화암을 떠올렸다. 몇해전 사업고찰차로 한국에 갔을 때 그는 부여에 가서 락화암을 구경했다. 락화암은 옛도읍지인 부여의 북쪽을 에워싼 부소산 북쪽 낭떠러지에 있었는데 그 아래로 백마강이 흐르고 있었다. 7백년 백제왕조가 무너지던 날 3천궁녀가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몸을 던졌다는 락화암에서 그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3천 궁녀의 충절에 머리가 깊이 숙여졌다. 락화암을 다녀와서 그는 회사 직원들에게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백제의 3천 궁녀들처럼 회사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회사 사무실마다에 3천 궁녀들을 련상케하는 락화암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걸도록 했다. 락화암에서 배운 《꿈꾸는 백마강》 노래는 당연히 그의 18번이 되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락화암 그늘아래 울어나보자 ……》 력사의 흥망성쇄와 더불어 락화처럼 떨어져 강물에 실려간 3천궁녀의 넋을 기리는 이 노래를 그는 평소에는 깊은 사색에 잠긴듯한 표정을 지은채 진지하게 불렀다. 그 모습을 보면 력사에 조예가 깊고 또 애잔한 정서를 가진 학자를 방불케했다. 그러나 회사가 파산을 선고하던 날 그는 홀로 사무실에 남아서 술병나발을 불면서 장밤 이 노래를 미친듯이 불렀다. 그 때의 모습은 단발마적인 괴성을 지르는 짐승같은 몰골이였다.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던 직원들은 자기가 챙길 것은 다 챙겨가지고 죄다 떠나갔다. 그의 손을 거쳐간 녀자들중 그래도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게 했던 비서실장 최양도 허리를 깊이 굽혀 작별인사를 드리고는 말없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마저 떠나가자 그는 사무실의 컴퓨터며 전화며 팩스 등 사무용품들을 죄다 방바닥에 메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뽑았다. 《백제의 의자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못하고 욕되게 포로가 되었지만 그를 모시던 3천 궁녀들은 그래도 충절을 지켜 백마강에 락엽처럼 떨어졌다. 언젠가는 회사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던 너들이 아니냐. 기른 개보다도 못한 년놈들아!》 그와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처절한 고독과 외로움을 씹으면서 그는 생의 허무와 인간의 잔인함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락화암이 력사의 흥망성쇄와 3천 궁녀들의 충절의 상징으로 솟아있다면 이제 그가 생을 마감하게 될 고속도로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장에 어떤 종지부로 남을까? 파산으로 이미 예고된 죽음, 아니면 스스로 무덤을 판 자의 종말, 그렇지 않으면 일루의 희망마저 포기한 비겁한 자의 최후? 죽어도 훌륭히 죽어야 하지만 그런 죽음을 가질수 없는 것이 그의 마지막 한이였다. 이딸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는《훌륭한 죽음은 전 생애의 명예가 된다》고 했다. 전 생애의 명예가 될만한 훌륭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세상에 수없이 많고 많지만 그는 그래도 그중에서 론개의 죽음을 첫손에 꼽았다. 락화암에서 몸을 던진 3천 궁녀의 충절을 위한 죽음보다 자기 나라를 침략한 원쑤인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함께 깊은 물에 떨어진 론개의 죽음은 더 비장하고 장렬한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국에 갔을 때 그는 진주에도 들렸었다. 진주의 옛성인 진주성을 감돌아 흐르는 남강에 촉석루가 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의(豊臣秀吉) 조선반도 침공 1592년. 삼대 격전지의 하나인 진주성 공략에 위훈을 떨친 왜장 게다니 무라 (毛谷村)의 승전을 축하하는 주연이 남강가의 촉석루에서 벌어졌는데 주연이 무르익어 가자 기생인 론개가 촉석루밑 남강가에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우로 게다니 무라를 유인해 가서 목을 끌어안고 깊은 강물에 떨어졌다. 한낱 기생인 론개의 놀라운 소행에 일본 군사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한다. 천추에 길이 전해질 론개의 훌륭한 죽음을 떠올리고 나니 자기가 택한 죽음은 사람들에게 비겁한 자살로 인정받을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비참해졌다. 혼자 비겁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였다. 사실 그와 함께 죽어야 할 사람이 하나 있었다. 북경 모 은행의 지점장으로 있던 자인데 그의 회사를 파산으로 몰고간 장본인이다. 빌딩을 짓는데 드는 자금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그자한테 뭐나 다 해줬다. 돈은 물론 녀자까지. 물욕과 색욕이 강한 그자의 욕심을 채워주려고 저금구자를 따로 앉히고 돈을 수없어 부어넣었고 여러개 호텔에 호화스런 방을 몇 개 맡아두고 열심히 녀자들을 알선해 주었다. 그 자가 한족 녀자는 신물이 났다고 해서 주로 조선족 녀자들을 알선해 주었는데 그 중에는 유흥업소에 나가는 아가씨들도 있었고 조금은 알려진 연예인도 있었다. 나중엔 신선한 감각을 주는 녀대생을 요구하자 거금을 써가며 녀대생을 설득시켜 그자의 방에 밀어넣기도 했다. 말하자면 사업에 필요한 돈을 얻어쓰기 위하여 비루하기 짝이 없는 《뚜쟁이》노릇까지 한셈이다. 안해의 말대로 그는 돈이라면 덫에라고 몸을 던질 사람이였다. 그 대가로 얻어낸 대부금으로 빌딩을 짓기 시작했는데 빌딩 벽체가 거의 다 올라갈 무렵 생각밖에도 그자가 공금횡령, 수뢰죄로 법망에 걸려들었다. 그자의 손을 통해 나간 은행 돈을 회수하기 위하여 채 짓지못한 빌딩은 경매에 부쳐졌고 그 바람에 몇해동안 무역업과 음식업을 하면서 축적한 자금과 빌려쓴 사채까지 도합 천여만원이 그냥 날아나버렸다. 빌딩이 완공되고 운행에 들어갈 때까지 사정봐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죽어야만 했다. 생각같아서는 그자의 목을 끌어안고 함께 고속도로에 뛰여내리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었다. 한것은 그자가 이미 철장에 갇힌 몸이였으니까. 그자는 가야할 길을 이미 갔다.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어처구니없는 생각만 떠올리면서 시간 끌것 없다. 그는 인도교 란간곁으로 다가갔다. 고속도로로 차량들이 아까보다는 좀 뜸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는 뼈도 추스리지 못하게 깔아뭉갤 육중한 트럭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트럭이 나타나지않고 승용차들만 시야에 들어왔다. 승용차에 치였다가 죽지않고 병신만 되면 그는 이중 지옥에 떨어진거나 다를바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트럭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고속도로로 달려오던 자그마한 트럭에서 직경에 한메터가량되는 둥근모양의 광주리 하나가 떨어졌다. 도로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던 광주리가 뚜껑이 열리더니 그안에서 노란 물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첫눈에 무슨 과일인가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노란 물체들은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병아리였다. 달려오던 차들이 끼익하고 귀청을 아프게 긁는 소리를 내면서 급정거했다. 노란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질러대면서 고속도로에서 이리 몰렸다가 저리 몰리면서 우왕좌왕한다. 순식간에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길게 늘어섰다. 멈추어선 차들은 경적을 울려댔다. 그러나 병아리떼는 자리를 내주지 않고 한곳에 몰려서 삐약삐약 소리만 질러댄다. 참으로 재미나는 광경이다. 병아리마저 몸보신에 좋다고 고아먹던 인간들이 살아 움직이는 병아리앞에서는 어쩌지 못하고 제발 길을 내달라고 경적만 울려대는 것이 희한했다. 인간이 병아리앞에서 그렇게 약할줄은 몰랐다. 병아리지만 그것이 엄연한 생명체이기에 인간은 차마 그것을 깔아뭉갤 수 없었던 것이다. 병아리와 인간이 대치하고 있는 희한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는 대학시절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 독일군 탱크가 굴러온다. 수류탄을 안고 탱크로 돌진하다가 쓰러지는 군인, 탱크는 쓰러진 군인을 깔아뭉개면서 그냥 오만하게 굴러온다. 무적의 거물앞에 마음의 방선까지 무너져내린 군인들이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친다. 탱크는 도망가는 군인들을 화력으로 쏘아눕히지 않고 뒤쫓아가면서 한사람 한사람씩 깔아뭉갠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군인들. 한 녀위생병이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해 가면서 남자군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나 남자군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다. 탱크가 부상병을 부축해 가는 녀위생병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돌려 천천히 굴러온다. 공포에 질린 녀위생병의 두눈이 클로즈업된다. 도망갈데 없는 쥐를 놓고 양공질을 하는 고양이처럼 탱크는 이리저리 피하는 녀위생병을 희롱하듯 녀위생병의 앞길을 막다가도 길을 내주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속력을 내여 녀위생병의 등뒤까지 와서는 멈춰섰다가 천천히 뒤를 따라간다. 깔아뭉개기보다는 혼비백산한 녀위생병의 혼을 완전히 빼는 것이 더 재미나는 모양이다. 나중에 녀위생병은 끝내 쓰러진다. 뒤를 따라오던 탱크가 멈춰선다. 뛰는 사냥물을 잡는 것이 사냥군에게는 더 자극적이고 운치있듯이 탱크는 녀위생병이 다시 일어나 뛰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녀위생병은 부축해온 부상병의 입가에 자기의 입술을 가져대 대고는 간신히 일어나 탱크를 향해 마주선다. 한참이나 탱크를 노려보던 녀위생병은 입가에 경멸에 찬 웃음을 지으면서 웃옷을 벗는다. 그는 웃옷을 벗어서는 부상병의 몸우에 덮어준다. 그러곤 내의까지 벗어버린다. 다치면 터질듯한 녀인의 젖가슴이 드러난다. 젖가슴을 드러낸 녀인과 탱크가 한참 대치하고 있다가 나중에 머리를 돌린 것이 탱크였다. 탱크는 녀인이 서 있는 반대 방향으로 휘청대듯이 굴러간다. 멀어져가는 탱크를 지켜보던 녀인이 젖가슴을 싸쥐며 오열을 터뜨린다… 그 때 영화감상이 끝난후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왜서 남자군인들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개던 탱크가 젖가슴을 드러낸 녀인앞에서는 머리를 돌렸는가가 화제로 올랐다. 적이지만 이성앞에서는 남성이 약하다는 설이 나왔고 또 전쟁은 남성들 사이의 자존심과 용기의 결투이기에 결투장에서 녀인은 상대가 되지않기 때문이라는 설도 나왔다. 이밖에도 녀위생병과 부상병은 련인같은데 사랑의 힘앞에서 악마가자리를 피했다는 견해도 나왔다. 나중에 그가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내 생각엔 탱크의 머리를 돌리게 한 것은 이성이나 사랑의 힘이 아니고 녀위생병 자체가 생명체이고 더욱이는 생명을 낳아 키우는 모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의 견해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을 표시했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차량들과 대치하고 있는 병아리를 향해 박수를 쳤다. 생명의 존엄, 생명의 경외감, 생명의 의미 등 엄숙한 화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이 병아리였기 때문이다. 교통경찰까지 출동해서야 병아리와 차량들과의 대치가 막을 내렸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 그것을 일별했다. 《내 시신을 거두어주는 분에게; 일가친척 하나도 없는 혈혈단신인 몸이니 거적에 싸서 조용히 화장터로 직행하면 됩니다. 화장비용은 양복 안주머니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막힌 웃음이 나왔다. 그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고속도로에 던졌다. 고속도로에 눈꽃마냥 내려앉는 종이쪼각을 차량들이 깔아뭉개며 지나간다. 그는 그 종이쪼각들이 분해된 자기의 령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인도교에는 령혼이 떠나버린 인간의 허울만 남아 있다. 이제 그 허울속에 새로운 령혼이 깃들기를 그는 두손 모아 빌었다. 인도교에서 내려온 그는 길 옆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두 늙은이곁에 가서 걸음을 멈췄다. 장훈을 받은 뚱뚱한 늙은이가 한수 물려달라고 사정하고 있었고 장훈을 부른 버쩍 마른 늙은이가 배포유한 자세로 앉아 장기수를 물려줄수 없다고 고개만 가로젓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노라니 유태인들속에서 전해내려오는 《마지막 한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가 이러하다. 한 박물관에 사람과 악마가 장기를 두고 있는 그림이 붙어있었는데 악마가 인간에게 마지막 한수를 걸고 있는 그 그림의 제목이 《마지막 한수》였다. 그 그림을 보던 장기 고수가 크게 고함질렀다. 《악마가 인간에게 마지막 한수를 걸고 있다니 이럴수가 있나 말이야. 악마에게만 마지막 한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있단말이야. 악마를 이길수 있는 마지막 한수는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속한것이야.》 역경속에서도 항상 최후의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적인 뜻이 담긴 이야기다. 《로인님 한수 물려달라고 사정하지 말고 마지막 한수를 잘 써보십시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그는 장훈을 받은 늙은이에게 이렇게 권고하고는 자리를 떴다. 사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였다. 한 것은 죽음을 포기한 그에게도 마지막 한수를 쓸 기회가 아직 남아있으니까.   2000년 구정 북경에서 완고 * 본 단편소설은 장백산 계열소설상 수상작(2000년) 입니다.-조글로문학 편자주
5    [단편] 거미이야기 댓글:  조회:1626  추천:35  2009-04-18
밤알만큼 큰 거미가 처마밑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줄을 나는 엄마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 때 나는 엄마 배속에 있었습니다. 《징그럽게도 큰 거미네.》 엄마 말을 알아들었는지 거미가 거미줄을 치던 것을 그만두고 처마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엄마가 거미줄을 거둬내려고 비자루를 찾아쥐니 마루에 앉아 잎담배를 썰던 아버지가 칼에 묻은 잎담배진을 긁어내며 말했습니다. 《관둬. 새끼가진 거미야.》 《가뜩이나 궁상맞은 집에 거미줄까지 있으면 보기 좋겠나요?》 《그것두 새끼밴 녀자가 있는 집이라고 일부러 찾아와서 새끼 나을 자리를 만드는게야.》 그 말에 엄마는 비자루를 내려놓았습니다. 그 녀인을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납니다. 북경의 서쪽 제2순환도로변에는 중국에서 최고음악학부인 중앙음악대학이 있습니다. 내가 매일 아침 중앙음악대학 소학교반에서 통학생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아들을 학교문까지 데려다주고 저녁에 마중할 때면 그 녀인은 마치도 약속이나 한 듯 그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내가 아무데나 내버려도 주어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녹슨 자전거에 아들을 싣고 학교 정문에 도착하면 같은 시간에 맞은편에서 색갈이 노란 고급승용차 한 대가 소리없이 미끌어져 와서는 정문앞에 멈추어 섭니다. 바로 그 녀인의 자가용입니다. 차문이 열리면 귀공주차림을 한 녀자애가 튕기듯 나옵니다. 그 녀인의 딸인데 우리애와 한반에서 피아노를 배웁니다. 그 녀인은 운전석에 앉은 그 자세로 자기 딸한테 눈이 시도록 하얀 장갑이 끼워진 손을 정답게 들어주고는 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보냅니다. 고운 입 가장자리를 약간 끌어올리면서 웃는듯마는듯한 미소를 살짝 달면서 아미를 숙이는 그 순간 내 허리가 어쩔수 없이 굽혀집니다. 그 녀인처럼 가볍게 목례로 답례하려고 몇십번이고 별렀지만 정작 그 녀인의 목례를 받는 순간 왜서 내 쪽이 웃어른이나 선생을 대하듯 어쩔수 없이 허리가 굽혀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학부모 처지에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조선족인데 그 녀인이 몰고 다니는 고급승용차나 그 녀인의 화려한 옷차림에 질려서인지 아니면 범접할수 없는 그 도고한 모습에 주눅이 들었는지… 그 녀인은 같은 녀자가 보기에도 곱구나 하고 다시 한 번 뒤돌아 볼 정도로 미인입니다. 고운 입, 고운 눈, 고운 코, 고운 얼굴형, 그것도 고운 모든것이 맞춤하게 자리를 잡은 그런 미인입니다. 구태여 묘사할 것 없이 그 녀인은 북경의 호화스런 백화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그런 귀부인형입니다. 아이를 봐선 나와 비슷한 30대 초반이겠지만 얼굴이나 옷차림새를 봐선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녀인의 딸이 친딸이 아니라 남편의 전처 소생이 아니면 혹시 양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녀인은 젊고도 화사합니다. 딸애를 내려놓은 그 녀인의 자가용이 가볍게 미끄러지듯 떠나갈 때면 낡은 자전거 손잡이를 쥔채 그 녀인의 차를 눈바램하는 내가 한결 초라해 보입니다. 세상 팔자 다 나름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내 팔자가 앞으로 넘어져도 코 깰 그런 팔자가 아니지만 그 녀인은 팔자 좋기로 뒤로 넘어져도 떡함지에 넘어질 그럴 팔자인가 봅니다. 녀자 팔자는 어떤 남편을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북경에는 자식공부 시발을 하려고 직장을 버리고 남편곁을 떠나 온 녀인들이 수천명 된다고 합니다. 내 경우처럼 대개 어릴적부터 전공해야 할 예술, 체육분야를 지망한 어린 학생들의 부모들입니다. 해마다 음악계의 유능한 인재들을 배출하는 중국음악대학은 음악에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선망하는 곳입니다. 음악은 아마 천부적인 것을 떠날 수 없는 예술이여서 그런지 이 대학에는 소학교반부터 중학교반, 고중반, 본과전업반에 이르기까지 구전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소학교반에 들어가려고 해도 전국의 수십만에 이르는 지망자들과 경쟁을 해야 합니다. 소학교반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비유할만치 경쟁이 치렬합니다. 소학교반에 들어가서 다시 중학교반으로 그다음에 고중반, 본과전업반까지 올라가려면 역시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본과전업반까지 내처 올라간 사람은 그야말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승천하여 별처럼 빛나는 사람은 몇이 안됩니다. 중도에 별찌처럼 빛 한 번 발산해 보지도 못하고 어둠속에 영영 자취를 감춘 음악지망생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속담을 빈다면 이런 지망생들은 《십년공부 나미아미타불》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십년 공부 나미아미타불》이란 속담보다도 《공 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면서《개천에 룡이 난다》는 속담을 희망사항으로 삼습니다. 하여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개천에서 난 룡》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저없이 모든 것을 바칩니다. 돈도 가정도 지어는 자기의 삶까지도… 공부하는 자식을 동반한 부모들 중 조선족들도 꽤나 된다고 합니다. 이들 대부분이 학교와 가까운 곳에 집을 세맡고 있습니다. 대체로 집에서 부쳐오는 돈으로 아이 공부에 드는 비용과 북경에서의 생활비를 해결하는 녀인들이 대부분인데 이런 부류는 대개 사업을 하거나 돈 만들줄 아는 말하자면 시체말로 잘 나가는 남편을 가진 녀성들이지만 나처럼 그런 남편을 가지지 못한 녀인들은 북경에 와서 이런 일 저런 일 닥치는대로 하면서 아이공부에 드는 비용을 해결합니다. 나의 남편은 연길 시교의 자그마한 소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칩니다. 몇푼 안되는 남편의 로임에 매달려 사는 내 경우에는 애초부터 자식을 피아노공부를 시킬 엄두마저도 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자리를 보고 발을 펴라는 말이 있지만 저의 남편은 무작정 오기를 부렸습니다. 그 오기가 뭔지 압니까? 남편은 우리 애가 태여나자마자 이런 맹세를 했습니다. 《장차 우리 애한테 피아노공부를 시켜 꼭 유명한 피아노연주가가 되게 하겠소.》 소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그저 발풍금이나 손풍금만 만지는 남편이 어릴적에 가진 꿈이 바로 피아노연주가가 되는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 꿈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집안의 경제사정도 경제사정이지만 그럴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식을 피아노연주가로 키우자면 우선 피아노가 있어야 합니다. 만원에 가까운 피아노를 장만하기 위해 우리 내외는 1년동안 한국의 막노동판에서 피땀을 흘렸습니다. 우리 내외의 꿈이 자식을 피아노공부시키는것이라고 하니 한국의 한 친척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때 한국에 이런 말이 류행이였어요. 〈빨리 후닥닥 망하려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고 서서히 망하려면 자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라〉. 이 말이 무슨 뜻인줄 모르시겠죠. ?인즉 국회의원 선거를 몇번 치르고 나면 입후보자의 가산이 거들이 나고 자식에게 피아노공부를 시키면 피아노를 장만하는 비용에다 수업비용에 가정교사비용, 거기에 가끔씩은 찔러주어야 하는 뒷돈에 이르기까지 한도 끝도없이 드는 비용에 가산이 날려간다는 거예요. 가산을 날리는게 피아노공부얘요.》 그러나 친척의 충고는 자식에게 꼭 피아노공부를 시키겠다는 남편의 꿈을 깨지 못했습니다. 지난밤에 심하게 바람이 불어쳤습니다. 처마밑에 늘여져있던 거미줄이 바람에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애써 쳐놓은건데 하루밤 사이에 흔적마저 없어졌군요. 거미마저 날려간게 아닐까요?》 인젠 엄마는 거미의 운명에 대해 각별히 관심을 가집니다. 《새끼가진 놈은 쉽게 자리를 뜨지않아. 이제 해가 나면 어디선가 기여나와 또 줄을 칠거야.》 아버지가 무심하게 내뱉는 말입니다. 아버지 예견이 맞았습니다. 저녁무렵 일밭에서 돌아온 엄마는 처마밑에 다시 쳐진 거미줄을 보고 탄성을 뽑았습니다. 《어머머, 거미가 또 줄을 쳤네. 이악스럽기두 해라.》 《새끼가진 놈은 다 저렇게 이악스러운거야.》 아버지는 언제보나 명언같은 말만 합니다. 자식가진 사람은 다 이악스럽게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 내외는 1년동안 한국에서 뼈빠지게 고생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선 집 장만을 하고 피아노를 샀습니다. 남은 돈 3만원은 한푼도 쓰지않고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로 저금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만해도 한해에 2만원을 웃도는줄 우리는 타산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남편은 과외시간에 손풍금을 배우려는 애들의 가정교사로 나섰고 나는 나대로 북경에서 시간제 파출부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이제와서야 가산을 날리는게 피아노공부라고 한국의 친척이 한 그 말이 실감이 갑니다. 북경에서 살아가는 생활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아이를 학교문까지 데려다주고는 시간제 파출부 일을 시작합니다. 주로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인데 한시간에 5원입니다. 한집에 가서 청소하고 빨래하는데 평균 2시간정도 걸리는데 하루 바삐 돌아쳐도 네집 정도밖에 못합니다. 다른 파출부에 비해 나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고정된 주인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것은 한족 파출부들은 대체로 신을 신은채 긴 장대걸레로 바닥을 닦아내지만 나는 자기집 구들을 닦듯이 바닥에서 벌벌 기여다니며 손걸레로 깨끗이 청소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허리가 끊어질듯이 아프고 손이 퉁퉁 붓지만 나는 제집처럼 간주하고 깨끗하게 청소를 합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나는 다른 파출부한테 밀려나게 됩니다. 파출부 일도 경쟁이 심한 업종입니다. 외지에서 온 처녀애들도 많은데다가 더군다나 요즘 정리해고자들까지 파출부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혼신을 다 몰붓는다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내가 고정적으로 가서 청소하는 집들은 대체로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사는 집입니다. 하나는 늙은 량주나 로인 한분이 사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수입이 넉넉한 사람들이 사는 집입니다. 로인들은 집안청소하기에 힘이 부쳐서 파출부를 부르고 수입이 넉넉한 사람들은 집안청소를 할 짬이 없어서 파출부를 수요합니다. 하루 종일 이집저집 돌면서 닦고 빨고 하고나면 퉁퉁 부은 손으로 자전거 손잡이를 잡기도 힘듭니다. 부은 손을 내려다보면 신혼의 화촉을 밝히던 첫날밤 남편이 내 손을 어루만지며 한 말이 서글퍼진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폅니다. 《손가락이 남보다 유별나게 길구만.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은 피아노치기가 제격이라더군. 내가 이런 손을 가졌더면 꼭 피아노공부를 택했을거요. 나는 한뉘 땅만 허비던 농군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손이 몽톡하게 닳아버린 몽당 비자루같지 않소. 훗후후…》 그러면서 남편은 훗날 태여날 우리 2세가 내 손을 닮으면 꼭 피아노공부를 시키겠다고 하면서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차례로 뜨거운 입술을 가져다 댔습니다. 남편의 말대로 피아노를 칠 손을 가진 나였지만 피아노는 한 번도 쳐보지 못하고 그 손으로 저금소에서 주판알만 튕기다가 결국에는 자식의 피아노공부 때문에 주판마저 버리고 걸레를 쥔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지만 걸레를 쥐든 쓰레기를 줏던간에 그것이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달갑게 받아들여지는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돈 있는 부모나 없는 부모나 자식 생각하는 마음이야 같겠지만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그 녀인 정도면 부모구실을 해도 얼마나 편하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쑥 치밀면서 그 녀인의 팔자가 부러워납니다. 부러움은 질투를 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질투할 자격도 못되는 신세면 욕이라도 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합니다. 내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자가용을 몰고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녀인을 《팔자좋은 년》이라고 혼자말로 꺼리낌없이 말합니다. 늦봄에 이어 여름이 꼬리를 물던 계절입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습니다. 파출부에게는 일요일이 따로 없습니다. 오히려 일요일은 벌이가 가장 좋은 날입니다. 나는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시간제 청소부로 일할 한 별장을 찾아갔습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않는 곳에 자리잡은 별장구역이였는데 별장은 유럽풍으로 지은 차고가 달린 2층 양옥이였습니다. 어림짐작으로도 인민페로 2백만원을 웃도는 호화형 별장이였습니다. 직업소개소에서 알려준 주소대로 한 별장의 초인종을 누르니 한어로 누군가고 묻는 말이 문옆에 달린 인터폰으로 울려나왔습니다. 파출부라고 하니 문이 열렸습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20대 처녀애였습니다. 처녀애는 자기는 집주인의 딸에게 피아노를 배워주는 가정교사라고 했습니다. 그는 집주인이 지금 병원으로 갔다고 하면서 먼저 청소를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집안은 호텔에 들어선 착각을 줄 정도로 호화스러웠습니다. 어디라할것없이 알른알른하게 윤기도는 것이 어디서부터 청소를 시작해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처녀애가 화장실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화장실만도 웃층과 아래층에 각기 하나씩 있다고 했습니다. 처녀애가 웃층으로 올라가서 얼마안되여 웃층에서 피아노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우리 애가 요즘 자주 치는 곡이였습니다. 불쑥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아들은 지금쯤 웃통을 벗어버린채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을것입니다. 우리가 세맡은 집은 집주인이 창고삼아 쓰려고 집곁에 붙여 지은 무허가 집입니다. 단칸방에 침대 하나와 가지고 온 피아노를 놓으면 돌아서기도 불편한 정도로 비좁은 집입니다. 벽돌 한 장 두께로 된 집이여서 겨울에는 솜옷을 그냥 입어야 할 정도이고 여름에는 시루속처럼 숨막히게 덥습니다. 북경의 겨울은 그리 춥지않아 그런대로 지낼수 있는데 여름은 찌는듯한 더위에 꼼짝않고 앉아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그런 집이지만 방세가 한달에 3백원입니다. 북경의 세집값은 연길에 비하면 살인가격입니다. 층집인 경우 2순환도로 주변이면 주방과 화장실이 달린 단칸방도 한달에 방세가 적어도 천원입니다. 나의 경우엔 그런 집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여름이 오기전에 나는 고물장수한테서 20원을 주고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자그마한 선풍기 하나를 샀습니다. 우리가 세맡은 집은 다른 집보다 여름의 더위가 먼저 옵니다. 그래서 선풍기도 다른 집보다 한달 먼저 돌립니다. 지금쯤 아들애는 선풍기를 켜놓고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을 것입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별장에서 들려오는 피아노소리를 듣노라니 마치도 웃층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들인것같은 착각이 옵니다. 순간의 그 착각이 깨지면서 부지중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과 함께 사람구실 부모구실은 돈이 시킨다는 선인들의 말을 떠오릅니다. 아, 돈이 뭐길래… 내가 아래층의 화장실 청소를 끝냈을 때 집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인사 하려고 거실에 나온 나는 거실 쏘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커피를 마시는 집주인을 보고는 두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바로 그 녀인이였습니다. 그 녀인도 나를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나는 저도모르게 학교정문에서 그 녀인을 만날 때처럼 또 허리를 굽혔습니다. 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목례로 답례했습니다. 잠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내가 먼저 침묵을 깼습니다.《이 집이…》 《그래요. 저의 집이예요. 그런데 이렇게 만날줄은…》 나는 손에 쥔 걸레를 만지면서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앉으시죠.》 《괜찮아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일은 나중에 하시고 잠간 앉아 얘기나 나누자요.》 나는 쏘파모서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쪽으로 편히 앉으세요.》 《괜찮아요. 집이 참 좋군요.》 《빛갈뿐이예요. 커피 드시겠어요?》 《아니…》 《그럼 콜라 드시겠어요?》 《괜찮아요.》 나는 송구스러워서 그저 괜찮아요만을 곱씹었다. 녀인은 랭장고에서 콜라 한병을 꺼내 병마개를 따서 나의 앞에 놓아주었습니다. 《파출부로 일한지 오래됐나요?》 《북경에 와서부터 했으니 인젠 해수로도 2년이 돼요.》 《그럼 파출부로 일하면서 아이를 피아노공부 시키고 있다는 얘긴가요? 피아노공부에 드는 돈이 엄청나겠는데…》 《집에서 애아버지가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는 보내오고 저는 생활비와 세집값을 해결하는 셈이지요.》 《그 돈만해도 꽤나 들겠는데 파출부 일을 해서 그 돈이 마련되나요?》 《한시간에 5원씩이니까 하루에 여러집을 다니며 10시간정도 하면 세집값과 생활비 정도는 나오죠.》 《힘드시겠는데요?》 《힘들어도 할수 없지요.》 《애아버지는 무슨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가요?》 《음악선생이얘요.》 《로임만 가지고는 피아노공부에 드는 학비를 대기 힘드실텐데요.》 《그런대로 두루두루 맞춰가고 있어요.》 이때 웃층에서 그 녀인의 딸애가 내려왔습니다. 이미 나하고 면목이 있어 그 애가 먼저 인사했습니다. 그러곤 녀인보고 물었습니다. 《왔다는 청소부는 어느 방에 있나요?》 이말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그 애 몰래 쏘파밑에 밀어넣었습니다. 아들과 한반인 녀인의 딸앞에서 청소부신분으로 나설수 없었습니다. 눈썰미 빠른 녀인이 내 마음을 인차 짚어냈습니다. 《아직 안 온 모양이다.》 《피아노선생이 아까 문을 열어주었는데요.》 《아마 볼 일이 있어 잠간 밖에 나간 모양이구나.》 녀인이 내 사정을 봐주느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 순간 내 자존심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곤혹한 당근질을 당하는 느낌이였습니다. 《청소부는 왜 찾느냐?》 녀인이 딸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조심하지않아 꽃병의 물을 쏟쳤는데 바닥을 닦아야겠어요.》 《그만한 일은 너 절로 하려무나.》 《피아노치던 손으로 걸레를 쥐겠나요?》 《지금 애들은 다 저래요.》 녀인은 몸둘바를 모르는 나에게 어이없는 웃음을 적당히 지어보이고는 딸과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더는 그 자리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하여 조용히 문을 열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피아노치던 손으로 걸레를 쥘수 없다던 그 녀인의 딸이 한 말이 가슴을 아프게 자극해 왔습니다. 나의 아들도 피아노를 치지만 그러나 그 애는 짬만 나면 날 도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방 청소도 하고 설걷이도 합니다. 양말이나 속옷같은건 자기 절로 씻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손도 살아가는 사정에 따라 귀천이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걸레 한 번 쥐어서는 안되는 손이 귀한 손이라면 우리 애처럼 걸레나 행주를 쥐는 손은 천한 손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애 손도 세상 귀한 손입니다. 귀한 자식 귀하게 키우라는 말처럼 귀하게 키우지는 못해도 우리 애는 지금 귀염성있게 자라고 있습니다. 북경으로 떠나 오던 날 남편은 역에서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넌 이 손을 그저 손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베토벤의 손이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휘여잡은 운명교향악을 울리게 했다면 너의 이 손은 장차 네 인생의 새로운 악장을 울릴 손이다.》 인생의 새로운 악장을 울릴 손, 내 아들의 손은 바로 그런 손입니다. 《어머머머, 저걸 어쩌나…》 엄마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뽑았습니다. 엄마는 지붕에서 내려온 뱀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거미를 노리고 있는 것을 보았던것입니다. 《우쉬우쉬…》 엄마는 두 팔을 내저으면서 밭에서 새를 쫓을 때 내던 소리를 냈습니다. 새를 쫓는 소리로 뱀을 쫓자니 참으로 코막고 답답합니다.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열심히 새를 쫓는 소리를 질러대니 거미를 노리던 뱀이 스르르 지붕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어휴…》 그제야 엄마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땅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습니다. 저녁에 아버지한테 엄마가 뱀 말을 하니 아버지는 하품 문 소리로《새끼가진 놈 쉽게 안 당해》라고 말하곤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 녀인의 집에 갔다온 이튿날 아침, 나는 학교정문앞에서 어김없이 그 녀인을 만났습니다. 그 날따라 녀인은 차에서 내려 나한테 다가왔습니다. 《그날 죄송해요》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온 제가 오히려 죄송해요.》 《어디가서 잠간 이야기나 나눌까요?》 《그러지요.》 《저의 차안으로 가시죠.》 《할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여기서 하시죠. 바깥 공기가 훨씬 좋은데요.》 돈을 주면서 앉으라해도 그 녀인의 차엔 앉을수 없다는게 그 때 나의 오기였습니다. 《청들 일이 하나 있는데 자주 우리 집에 와줄수 없겠나요?》 천만에 말씀. 모르고 한 번이지 난 다시는 안가요! 《청소부로 와달라는게 아니얘요.》 청소부가 아니면 뭐로? 보모로? 아니면… 《그저 같은 학부모신분으로 자주 놀러오면 고맙겠어요.》 같은 학부모? 《다른 뜻은 아니구요. 북경에서 같은 조선족 학부모를 만난다는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요.》 난 그런 반갑다는 마음을 가져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얘요. 《사실 애 공부 때문에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는 북경에서 홀로 보낸다는게 얼마나 외로운지 모르겠어요.》 외롭다?! 하긴 그렇겠지. 허구헌날 하는 일없이 궁궐같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느라면 외롭기도 하겠지. 그러나 난 외로울새도 없는 사람이지. 하긴 가끔 남편의 품이 생각날 때도 있지만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그리움이야. 《그저 자주 놀러와서 말동무를 해주면 파출부로 일하면서 받는 보수보다 더 드리겠어요.》 술을 마시면서 말로 안주한다는 말이 있다더니 나보고 외로움을 달래는 말동무가 돼달라구? 웃기네 정말. 이봐요, 아무리 돈 있고 잘산다고 해서 사람 그렇게 보면 못써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세상 비웃어도 가난만은 비웃지 말라고. 《저의 말을 혹시 다른 뜻으로 오해하고 계신지…》 나는 녀인의 말을 가차없이 잘라버렸습니다. 《말동무를 찾으시려면 구연단에나 가보세요. 구연단 배우들은 말이 변설이니까요.》 그러곤 나는 자리를 떴습니다. 자전거를 타고가다가 나는 내 두빰으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뒤늦게야 감촉했습니다. 나는 울고 있었던것입니다. 그 뒤로도 그 녀인은 학교정문앞에서 나를 만나면 그냥 예전과 다름없이 목례를 보냈습니다. 나도 그저 목례로 답례했습니다. 어느덧 락엽이 지는 마가을이 왔습니다. 북경에서 두 번째 맞는 마가을입니다. 올해 북경의 마가을엔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의 청승맞은 울음소리를 시 중심에서도 자주 들을수 있습니다. 북경석간에는 실린 글은 북경에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나타난 것은 북경의 쓰레기 처리장에 처리되지 못한 쓰레기들이 그냥 로천에 방치되여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까마귀는 썩은 것을 먹기좋아하기에 조류중에서 《청소부》로 불리우는 익조라고 하지만 도심에서 까마귀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희한스러우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께름직합니다. 섬찍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날 아침 아이를 자전거뒤에 앉히고 거리로 나오니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길가던 한 늙은이가 그 소리를 듣더니 침을 역정스레 세 번 내뱉으며 뭐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저 할아버지가 왜 저래요?》 아이가 물었습니다. 《까마귀소리를 듣고 기분 나쁘다고 그러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침을 아무데나 뱉으면 돼요?》 《글쎄 말이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는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맘때면 남편은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전화를 두 번 쳤지만 신호음만 갈뿐 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녀동생 집으로 전화를 하니 마침 동생이 받았습니다. 《나 언니다…》 《언니 막 전화를 하려던 참이얘요. 언니 빨리 집에 와야겠어요.》 녀동생의 다급한 소리에 몸이 오싹해났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니?》   《아저씨가 뇌익혈로 쓰러졌어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나는 무작정 그 길로 역전에 가서 그날 연길행 기차표를 끊었습니다. 기차표를 끊고나니 아들이 걱정되였습니다. 늙은 량주만 사는 주인집에 맡길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부하는 애를 데리고 갈수도 없었습니다. 막상 급한 목을 당하니 그래도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녀인이였습니다. 지난번에 자주 놀러오라고 하는 그 녀인의 청을 몰인정하게 거절해버린 것이 못내 후회되였습니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고려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내가 체면불구하고 그 녀인의 집으로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하자 그 녀인은 두말없이 내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허리를 여러번 꺽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곱씹었습니다. 정말 고맙게만 느껴지는 녀인이였습니다. 남편은 조용히 병상에 누워있었습니다. 말을 할수 없었고 두눈도 뜰수 없었습니다. 곁에서 하는 말은 알아듣는지 가끔씩 고개를 약간씩 움직였습니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일 정도로 여윈 남편의 몸을 만지며 나는 울고 울었습니다. 남편은 낮에는 출근하고 밤이면 아이의 학비를 버느라고 가정교사로 나갔습니다. 쉬는 날이 따로 없었습니다. 집에 가 보니 랭장고에는 먹다남은 김치와 고추장밖에 없었고 방한구석엔 빈 라면상자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혼자 살면서 때시걱을 그냥 라면으로 에때운 모양입니다. 남편은 자식의 출세를 위해 혼신을 다 바쳤습니다. 남편은 조용히 병상에 며칠 누워있다가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이는 세상을 떠나면서 입가에 애써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습니다. 그 미소는 아들이 떠올리게 한것입니다. 그날 나는 녀동생의 휴대폰으로 북경에 있는 그 녀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 애가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습니다. 나는 아들보고 지금 곧 전화에 대고 피아노를 쳐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래요?》 아들이 물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운명직전이라는 말을 아들에게 할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먼곳으로 출장 가시게 됐는데 네가 치는 피아노소리를 록음해 가지고 가려고 그런다.》 《아버지 곁에 있나요?》 《출장준비를 하느라고 잠간 어딜 나가셨다. 어서 네가 가장 잘 치는 곡을 몇곡 치거라.》 《어머니, 아버지보고 출장갔다 돌아오실 때 북경에 꼭 들르라고 전해주세요. 아버지 보고싶어요.》 아들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남편의 귀전에 바싹 가져다 댔습니다. 남편의 얼굴표정은 변함없이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 남편의 눈귀가 촉촉이 젖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남편은 아들이 치는 피아노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의 입가에는 알릴락말릴락하게 흐뭇한 미소가 실렸습니다. 남편은 그 미소를 지닌채 떠나갔습니다. 남편은 조명이 황홀한 무대에 피아노연주가로 당당하게 나선 어엿한 아들의 모습을 두눈에 담은채 떠나갔을것입니다.《여보!》 엄마가 새된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간 떨어지겠다. 왜 그래?》 《저기 저…》 엄마는 말을 이어대지 못하고 그저 손으로 지붕우를 가리켰습니다. 지붕우로 뱀이 기여오르고 있었습니다. 《저 뱀이 어쨌다는거야?》 《저 뱀이 거미를…》 엄마의 말에 아버지는 제꺽 사다리를 가져다 놓고 지붕우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막 지붕뒤로 넘어가려는 뱀의 꼬리를 잡아쥐더니 몇번 휘둘러대다가 지붕우에 얹어놓은 나무토막에다 뱀대가리를 내리 깠습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뱀 껍질을 발가내고는 뱀의 밸을 쭉 ?어냈습니다. 《거미가 살아있나요?》 엄마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아버지가 엄마앞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 손에는 거미 크기만한 시커먼 것이 놓여있었습니다. 《이게 거미얘요?》 《잘봐, 이게 뭔가?》 《거미가 아니군요. 대체 뭐얘요?》 《담배진이야. 내가 잎담배를 썰면서 칼에 붙은 담배진을 긁어낸 것을 거미가 죄다 모아가지고 거미줄에 달아맨 모양이야. 그것을 뱀이 거민가 하고 덮친거지. 내가 뱀을 잡지 않아도 담배진을 삼킨 뱀은 꼭 죽게돼 있어. 그러고 보면 거민 참 영특한 놈이야.》 《거민 어디 갔을가요?》 《어디 숨어있겠지. 래일이면 또 줄을 칠거야.》 남편장례를 치르고 나는 집을 팔았습니다. 남편잃고 집까지 판 나에게는 이제는 아들밖에 없습니다. 아들을 피아노연주가로 키우는 것이 바로 남편의 생전 소원을 풀어드리는 길이고 내 생애의 유일한 희망사항입니다. 북경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나는 그 녀인의 집을 찾아가 인사드렸습니다. 《그동안 우리 애를 보살피느라고 얼마나 고생 많았겠어요.》 《무슨 말씀 이렇게 하세요. 오히려 우리가 덕을 받는데요.》 《덕이라니요?》 《애가 어찌나 어른스러운지 어른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지경이얘요. 자기 옷을 절로 씻는 것은 둘째치고 설걷이까지 어쩌면 그렇게 잘해요. 우리 애도 인젠 그 본을 받아 자기 옷은 자기가 씻고 방 청소도 절로 해요. 부러워요. 부모교양 잘 시켰더군요.》 녀인은 내 아들의 자랑을 잔뜩 늘여놓더니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 아이를 그냥 자기 집에 맡기라고 했습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애가 곁에 없으면 마음이 더 괴로울 것 같아요.》 《그러시다면 아예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게 어때요?》 《네?!》 너무나 생각밖이였습니다.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 저나 우리 애나 다 외로운 몸이얘요. 저라는게 아래층에서 밤낮 텔레비죤앞에 붙어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애는 애대로 웃층에서 피아노만 치다나니 집안 분위기라는게 말이 아니얘요. 너무 침침하다 할까요. 그런데 그 집 아드님이 와 있으면서부터 우리 애 얼굴이 밝아지고 집안 분위기도 명랑해졌어요. 저들끼리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걸 보니 우리 애가 동심을 도로 찾은 것 같아요. 저도 가정같은 분위기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돼요.》 그러면 녀인은 우리 애가 오기전에는 그런 가정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긴 옛날부터 집안 화기는 돈이나 재산에는 관계없이 사람나름에 간다고 했습니다. 나의 할머니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고대광실에 사는 놀부네 집은 하루종일 가도 웃음소리를 들을수 없지만 째지게 가난한 흥부네 집은 종일 웃고 울고 떠드는 소리가 그칠새 없었단다. 그러니까 흥부네 집이 진짜 사람 살아가는 집이지.》 우리 집은 화기애애한 집이였습니다. 그러나 인젠 가정의 기둥이였던 남편을 잃고 화기가 돌던 집마저 없어진 지금에와서 내앞에서 외로움을 하소연하면서 가정분위기를 운운하는 녀인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사실 가정얘기는 꺼내지 말아야 하는데…》 녀인도 굳어져가는 내 얼굴표정에서 뭔가 읽었는 모양입니다. 《다른 뜻은 아니구요, 편히 여기서 며칠 있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한 말이얘요.》 《고마워요.》 그동안 내 아들을 보살펴준 녀인의 성의를 뿌리칠수 없어 나는 그날 녀인의 집에 묵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녀자와 녀자가 서로 만나면 그것도 다 같이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면 인차 허물없는 사이가 돼버립니다. 내가 여태껏 궁금하던 것을 녀인에게 물었습니다. 《애 아버지는 뭘 하시는 분이얘요?》 녀인은 내가 묻는 말에 인차 대답을 하지않고 입가에 허거픈 웃음을 떠올렸습니다. 《혹시 묻지 말아야 할걸 물은게 아니얘요?》 《아니얘요. 뭐 비밀도 아닌 일인데. 애 아버지는 홍콩에 있는데 사업하는 분이얘요.》 《그럼 자주 못오시겠네요.》 《일년에 네댓번은 와요.》 《홍콩엔 자주 가나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갈 생각도 없구요.》 그러곤 녀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습니다. 녀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감각으로 나는 그 가벼운 한숨에 그 어떤 말못할 사연이 실려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술 한잔 할까요?》 《전 술을 전혀 몰라요.》 《오늘 한잔 마셔보세요. 약한 술이니까요.》 녀인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병 하나와 잔 두 개를 가져왔습니다. 《오래된 포도주인데 맛이 괜찮을거얘요.》 녀인이 잔에다 술을 따르고는 나한테 한잔 권했습니다. 《자주 술을 하나요?》 술잔을 받으며 내가 물었습니다. 《가끔씩은 해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을 때면 혼자서 둬잔 정도는 해요.》 술맛은 달콤하면서도 약간 시큼한 맛이 있었습니다. 녀인은 단숨에 한잔을 굽냈습니다. 이번엔 내가 녀인의 잔에 술을 따랐습니다. 《오늘은 함께 술을 마시는 분이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잠이 오지않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면 별로 제가 이 세상에서 따돌림당한 사람같이 여겨져요. 밤하늘을 쳐다보면 숱한 별들이 깜박이면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유독 나만이 별들한테까지도 외면당한것같이 보여져요.》 《언제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자식을 위해 뭐나 다 포기한뒤로부터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데 저한텐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그 말이 실감적으로 안겨오지 않는데요.》 그러면서 나는 호화스럽게 장식된 방안을 쭉 둘러봤습니다. 《그 말뜻을 알만해요. 이런 주택에서 돈 걱정없이 사는 제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니 곧이 들리지 않는단 말씀이지요. 어느 영화에선가 황제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돼요. 〈임금의 자리는 사실 외로운 자리〉라고요. 호화로운 이 주택도 자식을 위해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의 하나이지요. 말하자면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로 외로운 공간을 마련한셈이죠.》 사람은 만족을 모른다고 합니다. 나처럼 단간방 세집에 있는 사람에게 궁궐같은 별장을 한낱 외로운 공간이라고 말하는 녀인은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 사람인가 봅니다. 돈 잘 버는 사업가인 남편에 호화스런 주택, 그리고 귀여운 딸을 가진 녀인이 뭐가 부족해서 외롭다고 하는지 또 자식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나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 직장을 버렸고 나중엔 남편을 잃었고 집마저 팔았습니다. 대체 자식을 위해 녀인이 포기한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비참한 내 처지에 비하면 녀인의 하소연은 어디까지나 배부른 흥타령에 불과합니다. 마치도 굶주려 뼈만 앙상한 사람앞에서 비대한 몸을 드러내보이며 살까기를 하지 못해 근심하는 그런 식입니다. 하긴 가진 자는 가진 자로서의 번뇌가 있고 없는 자는 없는 자로서의 고통이 있다하지만 가진 자의 번뇌는 없는 자의 고통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사치스러운것입니다. 례하면 외롭다는 것은 나의 경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운것입니다. 세상 아득바득 살아가느라면 외로움을 느낄 겨를도 없습니다. 외롭다는 것은 세상 살아가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사치병일 뿐입니다. 누군가 부자들은 가난까지도 탐낸다고 했습니다. 녀인이 돈을 줄테니까 말동무만 해달라고 청을 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돈으로 사치스런 그 하소연을 고스란히 들어주고 스트레스를 풀 상대를 사는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녀인의 집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이튿날 나는 아들의 데리고 그 녀인의 집을 나왔습니다. 하루라도 더 있다간 내가 되려 그 사치스런 병에 옮을가봐 겁났습니다. 엄마는 가끔 파리나 모기를 잡아선 거미줄에 걸어놓았습니다. 거미의 먹이로 말입니다. 그걸 보고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부질없는 짓 하지마. 거민 죽은걸 안 먹어. 더군다나 새끼가진 놈은 말이야. 거미란 놈은 사냥물을 잡아먹어도 즐기면서 먹는 놈이야. 날아다니던 파리가 거미줄에 걸리면 거미란 놈은 먼저 그 주변을 슬슬 돌다가 먼저 거미줄로 파리의 날개를 묶어놓지. 파리가 벗어나려고 날개를 파닥거리면 거미는 서두르지않고 거미줄로 한겹 두겹 파리를 옥매지. 나중에 파리가 옴짝달싹 못하게 될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파리를 천천히 요기 하는거야.》 《악착하기 그지없군요.》 《새끼가진 놈치고 악착하지 않은 놈 봤어?》 아이의 학비를 대기 위해 나는 집 판 돈으로 자그마한 간이 음식점을 인수해 가지고 양고기 산적점을 차렸습니다. 북경사람들은 특히는 젊은층들은 퇴근하거나 혹은 나들이 가다가도 길가에서 양고기뀀을 둬어개씩 선자리에서 먹고 갑니다. 소수민족의 음식중 그래도 조선족의 랭면과 위글족의 양고기뀀, 만족과 몽고족의 양고기신선로가 북경에서 인기가 있습니다. 양고기뀀과 랭면을 주메뉴로 했는데 예상밖으로 경기가 좋았습니다. 하루 순수입이 적어서 3백원을 오르내렸습니다. 그 녀인도 딸과 함께 가끔 찾아왔습니다. 자그마한 양고기산적점앞에 녀인이 몰고온 고급승용차가 주차하니 주변의 음식점 주인들은 사뭇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녀인의 딸은 양고기뀀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녀인은 양고기가 비만을 초래한다고 하면서 랭면만 청했습니다. 《무척 힘들지요?》 올 때마다 녀인은 나한테 인사말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도 파출부로 일하기 보다는 기분이 나요. 남의 집 일을 해주는게 아니고 내 가게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일이 고달파도 마음만은 편해요.》 《가게가 작아도 손님이 끓는 것을 보니 나도 가게 하나 차려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세상 못할것이 음식장사라는 말이 있잖아요. 하도 막부득한 경우니 하는거지요. 그집같은 경우야 가게보다는 큰 사업을 벌려야지요.》 《저의 뜻은 그런 뜻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기에도 좋고 부럽기도 해요. 나 절로 한 번 뭔가 해볼 욕심도 생기고요.》 부자들의 눈에는 생존을 위해 아글타글 살아가는 궁한 모습도 부럽고 탐나는 모양입니다. 《벌어다 준 돈을 쓰기보다 자기가 번 돈을 쓰기가 더 기분날 것 같아요.》 또 배부른 흥타령입니다. 《언젠가 이런 꿈을 꾼적이 있어요. 제가 고무풍선을 쥐고 훨훨 날아다니며 황홀하기 그지없는 별천지를 유람하는데 갑자기 고무풍선의 김이 빠지면서 내가 천길 벼랑아래로 곤두박히는게 아니겠어요. 천당에서 갑자기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런 기분이였어요. 하긴 천당에나 지옥에 가본적은 없지만 어쨌든 말로 형용못할 그런 무서움과 절망감을 감수했어요. 깨고보니 꿈인게 얼마나 다행이였는지 몰라요. 그 꿈을 꾼뒤론 남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훨훨 날아다니기보다는 그래도 편하게 자기 발로 땅을 밟으며 걸어가는 것이 더 안정감이 들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진 사람은 꿈을 꾸어도 별천지우로 훨훨 날아 다니는 꿈만 꾸는 모양입니다. 하루 일에 지치고 나면 잠자리에 들기바쁘게 곯아떨어지는 나에겐 별로 꿈이 없습니다. 간혹 가다 저 세상에 간 남편이 보이는 꿈을 꿀 뿐입니다. 꿈에 본 남편은 언제나 웃는 모습입니다. 꿈에 웃는 남편을 보고는 나는 꿈을 깨고는 웁니다. 꿈에 웃고 현실에 우는 것이 나의 서러움입니다. 그러나 울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인젠 나도 울음을 속으로 삼킬줄 압니다. 울고만 있어서는 밥이 차례지지 않고 아이 공부에 드는 학비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합니다. 악착스럽다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 녀인이 자주 찾아와 배부른 흥타령을 해도 인젠 기분이 나쁘거나 그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마 내 삶이 고달파서 그런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사람 살아가는것도 사람 나름에 달렸기에 굳이 내가 사는 세계로 남이 사는 세계를 저울질하지 말고 또 넘보지도 말자고 이미 마음가짐새를 가진 탓인지도 모릅니다. 남이 사는 세계에 신경을 쓰면 자연히 부러워나고 질투가 나고 그럴수록 자신이 초라해 보입니다. 하필이면 남이 사는 세계 때문에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와서 나는 녀인의 말을 나하고는 별개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언어로 담담하게 받아들일수 있습니다. 그저 그 녀인이 자주 찾아오는 것이 반가울 뿐입니다. 가게를 차린후 한해 겨울을 보내고 나는 아들이 편하게 피아노공부를 하라고 작은 방 두 개가 달린 세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한달에 집세값이 1500원이지만 가게에서 나오는 돈으로 피아노공부에 드는 비용과 집세값을 감당할수 있었습니다. 꽃샘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 왔습니다. 그날 밤 11시가 다 되여 내가 가게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그 녀인의 딸이 눈물범벅인 얼굴을 해가지고 나타났습니다. 《어서 가서 우리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냐?》 《차사고 났어요…》 그 애는 무작정 내 손을 끌었습니다. 그 애를 따라 간 곳은 3순환도로 북쪽에 있는 자그마한 병원이였습니다. 녀인은 의식을 잃은채 응급실 병상에 누워있었습니다. 담당의사가 나를 보고 친척인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친구라고 대답했습니다. 담당의사가 나를 데리고 의사사무실로 갔습니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차사고로 받은 상처는 그리 중하지 않습니다. 손목이 부러지고 이마가 터졌습니다. 그런데 차사고로 류산이 되어 출혈이 심합니다.》 《류산?!》 《임신 3개월이더군요. 환자의 남편한테 인차 련락을 취해주기 바랍니다.》 《홍콩에 있다던데…》 《그럼 전화로 먼저 련락부터 해주십시오.》 《전화번호를 모르는데요…》 《이거 야단났는데. 환자의 딸도 아버지 전화번호를 모르더군요. 친한 친굽니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았습니다. 《먼저 가서 보증금을 무십시오.》 내가 수금하는 창구에 가서 담당의사가 써준 것을 내미니 우선 보증금으로 만원을 내라고 했습니다. 밤중에 저금소가 문을 닫았으니 이튿날 내면 안되는가 하니 절대 안된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먼저 환자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 이미 환자는 살려놨으니 방법을 대서 보증금을 얻어오라는것이였습니다. 돈이 없으면 병치료도 받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현금은 턱도없이 모자랐습니다. 하는수없어 나는 가게 주변에 있는 음식점 주인들한테서 돈을 변통해 가지고 병원에 가서 보증금을 물었습니다. 그러곤 울고있는 그 녀인의 딸을 겨우 달래가지고 나의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녀인의 딸을 잠재운후 나는 다시 병원으로 가서 녀인의 곁을 지켰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녀인은 의식을 차렸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사고를 당했나요?》 《전 지금 살고싶은 마음이 아니얘요…》 녀인은 눈물을 짰습니다. 《마음을 진정하셔야 치료를 잘 받을수 있어요. 애는 우리집에 데려 갔으니 시름을 놓으세요.》 나는 아침저녁으로 애들한테 밥을 지어 먹이고 학교로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오는 외에 밤낮으로 녀인의 병시중을 들었습니다. 가게 일은 복무원 아가씨한테 맡겨버렸습니다. 며칠 치료를 받은 후 녀인은 응급실에서 골과병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녀인이 만약 인적이 드믄 곳에서 사고를 당했더라면 류산으로 인한 대출혈로 생명을 잃을번 했답니다. 시내안에서 사고를 당했고 또 인차 병원으로 호송된 것이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돌던 날 나는 녀인을 부축하여 병원 뜰로 나왔습니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기분좋게 얼굴에 맞혀왔습니다. 《벌써 완연한 봄이군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녀인은 한숨을 달면서 말을 받았습니다. 《전 오래전부터 봄을 의식하지 못한채 살아왔어요. 인생의 봄은 둘째치고 계절의 봄마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비참하기 짝이 없지요.》 그날 녀인은 나한테 그늘에 가리운 생애의 구석진 곳을 남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녀인은 원래 현급 가무단의 무용배우였었습니다. 원 남편은 국영기업소 보위과에서 근무했는데 의처증이 심한 사람이였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나의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깁니다. 의처증이 심한 한 사람이 나젊은 색시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갈 때마다 마당에 아주 보드라운 모래를 한벌 쭉 깔아놓고 가는 비로 쓸어놓았답니다. 색시가 나가거나 혹은 누가 들어오면 발자국이 찍히라고 말입니다. 녀인의 원 남편은 마당에 모래를 펴놓는 사람보다 더 의처증이 심한 사람이였답니다. 사람을 시켜 녀인의 뒤를 따르게 한다던가 녀인이 집에 있는 날이면 출근했다가도 느닷없어 집에 뛰여들어 온다던가 하는 것은 보통 일이고 부부합방시에도 기분을 내면 누굴 상상하면서 기분을 내는가 하고 윽박지르고 마지못해 응하면 이게 어디 사람이냐 시체냐 하면서 쥐여팼답니다. 《이런저런 수모는 그런대로 체념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권총 총신을 내 입안에 마구 쑤셔넣고는 눈이 맞은 남자를 대지 않으면 쏜다고 할 땐 정말 환장할 지경이였어요. 한번은 장밤 저를 개처럼 두들겨 패고는 그것도 성차지 않아 사형수를 사형하듯이 저를 꿇어 앉히고는 권총을 내 뒤통수에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니겠어요. 다섯까지 세기전에 이실직고 하지않으면 방아쇠를 당긴다고 하면서 안전장치까지 푸는게 아니겠어요. 전 그 때 제정신이 아니였어요. 실신하기 직전이였지요. 다섯까지 셀 때까지 제가 말이 없으니 정말 쏜다고 하면서 방아쇠를 당기는게 아니겠어요. 장탄하지 않은 총에서 격침소리가 찰깍하고 울리는 순간 저는 총에 맞은 사형수처럼 앞으로 꼬꾸라졌어요. 사실 전 그 때 영영 그 사람곁에서 떠나갔어요.》 그 일이 있은후 녀인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답니다. 원 남편이 울고불고 치고박고 얼리고 닥치고 했지만 녀인은 강경하게 리혼을 주장해 마침내 자유로운 몸이 되었답니다. 홍콩에서 사업한다는 남편은 그 후에 만난 사람이랍니다.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북경에 들어와 한 나이트클럽에서 전속 무용수로 있을 때 사귄 사람인데 나이는 50살을 넘긴 홍콩인이얘요. 원 부인과는 리혼했다고 했어요. 자식은 딸 둘밖에 없는데 원 부인이 맡아 기르고 그 분은 부양비만 댄다고 했어요. 저와 결합할 때 그 사람의 요구는 단 한가지밖에 없었어요. 그 요구가 바로 아들 하나 낳아달라는것이였어요. 말하자면 제가 씨받이가 된셈이지요. 그러나 전 딸의 장래를 위해 달갑게 받아들였어요. 자식을 위해선 전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했던거얘요. 그 분도 저와 딸한테는 잘해주었어요. 제가 아들을 낳으면 홍콩의 재산을 정리해가지고 북경에 와서 살겠다던 그 분이 얼마전에 회사가 부도난 충격을 못이겨 심장마비로 돌아갈줄이야…》 녀인은 땅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참 멀거니 먼곳을 응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별장도 그 분의 이름으로 되어있었는데 며칠전 경매에 부쳐졌어요. 제가 몰고 다니던 승용차까지도요. 전 인젠 중 잃고 절까지 빼앗긴 신세가 돼버렸어요. 너무나 기막혀서 술을 마신후 마지막으로 차를 몰아본다고 차를 가지고 나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거얘요. 언젠가 제가 고무풍선을 쥐고 날아다니다가 천길벼랑에 떨어진 꿈을 꾼 얘기를 한적이 있지요. 이제와서 보면 그 꿈이 내 운명에 대한 징후적인것이였어요. 그 꿈대로 전 천길나락에 떨어졌어요.》 녀인의 신세에 한껏 동정이 갔습니다. 남편잃고 집까지 팔아버린 내 신세와 비슷했습니다. 다름 점이라면 지금의 상태에서 녀인에게는 나처럼 역경을 헤치고 나갈 용기가 없는 그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잖아요.》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도 않고 설사 그 구멍을 발견했다고 해도 솟아날 용기가 없어요.》 《그 용기는 모성애가 줄거얘요.》 《그럴까요…》 새끼거미들이 어미거미 몸에 까맣게 달라붙어 어미거미의 살을 뜯어먹고 있습니다. 어미거미는 미동도 하지않고 달갑게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에그 쯧쯧쯧…》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엄마는 연신 혀를 찼습니다. 《부모신세도 저 거미와 다를게 없어.》 저으기 감개에 젖은 아버지의 목소립니다. 그 말에 엄마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녀인은 당분간 자기 딸을 맡아달라고 나한테 부탁하고는 어디론가 떠나갔습니다. 둬달 소식마저 없다가 하루는 녀인이 역시 화사한 모습으로 내앞에 나타났습니다. 옷차림새도 종전과같이 귀부인차림입니다. 녀인은 내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한테 큰절을 올리겠다는 것을 내가 굳이 말렸습니다. 《여러모로 고맙구요, 그보다도 저한테 좋은 조언해주신 그 은혜 평생 잊지않을거얘요.》 내가 해준 조언이 뭔지 나로선 기억마저 없습니다. 《세상 모질게 살아갈 용기를 모성애가 줄것이라는 그 말뜻을 제가 뒤늦게나마 터득했어요. 감사해요. 모성애앞에서는 범도 자리를 피한다는 조상들의 말을 내 경우에 비추어 다시 풀이한다면 모성애만 가지면 뭐든지 달갑게 받아들일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해낼수 있어요.》 녀인은 그 사이 심수에 새집을 장만했다고 하면서 그날로 딸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심수에 외국인이 꾸리는 피아노학원이 있다고 합니다. 교학수준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녀인은 무슨 일자리를 찾았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옷차림을 보아선 상당히 수입이 높은 직업같습니다. 그 직업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내 삶이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구질구질한 삶이 될지라도 아이만은 꼭 피아노연주가로 키우겠어요.》 아이를 꼭 피아노연주가로 키우겠다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어쩔수없이 저 세상에 가 있는 남편을 떠올렸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웃는 모습이였습니다. 어미거미의 살을 다 파먹은 새끼거미들이 어디로 제마끔 흩어져 가버렸는지 거미줄엔 빈 깝대기만 남은 어미거미만 매달려서 바람부는대로 거미줄과 함께 흔들립니다. 엄만 빈 깝대기만 남은 어미거미를 거미줄에서 떼여내서앞마당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밤새껏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면서 모지름을 쓰다가 나를 낳았습니다. 그러곤 대출혈로 20리 떨어진 공사병원으로 소수레에 실려가던중 숨을 거뒀습니다. 그 뒤로 아버진 거미줄만 보면 죄다 거둬냈습니다. 남의 집에 쳐진 거미줄까지도 말입니다. 하여 아버진《거미줄》이란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간혹가다 아버지의 친한 친구들이 《거미줄》이라고 아버지 별명을 부르면 아버진 꼭 이렇게 규정해줍니다. 《이봐, 거미줄이 아니고 거미야.》 지금도 나는 거미줄에 데룽데룽 달린 빈 깝대기만 남은 어미거미를 그려보면서 아버지한테서 들은 거미이야기에 담긴 그 뜻을 다시다시 음미해봅니다. 언젠가는 내 아들한테도 거미이야기를 해줄 생각입니다. 어미거미는 영특하고 이악스럽고 악착한 미물이지만 그 최후만은 아주 처절하고도 장렬하다고 말입니다.
4    [단편] 미향이 댓글:  조회:1521  추천:50  2009-04-18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 나와 그녀의 첫만남을 기억에 떠올려보면 그 어느 첩보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련상시켜 지금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5년전, 몽골로부터 갑자기 들이닥친 한류가 앙상한 가로수 나무가지에 처절하게 매달린 몇 안되는 말라버린 나뭇잎의 림종을 재촉하던 그런 계절의 어느날이였다. 그날 나는 서재에 죽치고 앉아 우리 민족녀성운명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 전날까지만해도 나는 한 잡지사의 청탁으로 쓰게 될 정기칼럼을 구상했다. 처음에 난 칼럼이 뭔지도 몰랐다. 그게 뭔가고 잡지사의 친구한테 물으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칼럼이란 신문, 잡지에서 시사문제, 사회와 풍속, 인생 등 문제를 다룬 글을 전문 기재하는 특별란인데 칼럼을 다루는 사람을 칼럼니스트라고 한다면서 나보고 한번 잘 해보라고 했다. 혼탁한 세상에서 자기 인생도 설계할줄 모르는 사람이 일약 세상은 어떻고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거창하게 운운하는 지성인으로 일약 변신한 셈이다. 세상과 인생을 운운하자면 우선 선인들의 명언록이나 잠언록 같은걸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계격언록을 뒤적이다가 눈에 쑥 들어오는 글 한줄을 발견했다.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 가석한 것은 이말을 대체 누가 했는지 책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는 이 말의 뜻을 되새기노라니 언젠가 보았던 한 소설이 떠올랐다. 조선조시대 씨받이운명을 그린 소설이였는데 그 소설의 주인공인 씨받이처녀는 씨를 받기위해 처음으로 사내를 받아들인 그날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나의 운명은 바로 그날밤에 결정지어졌다.》 말하자면 씨받이로서의 그 후 비참한 운명이 바로 첫 사내를 대하던 그날 밤에 결정지어졌다는 얘기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그 녀인의 수난사는 바로 그날밤부터 시작되였다는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쳤다. 가난으로 씨받이 신세가 되던 증조할머니 세대의 녀성들의 수난사,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 세대의 녀성들의 수난사, 《정치몽둥이》가 날아다니던 그 시절 우상정치, 《무산계급독재정치》의 순장품으로 된 어머니 세대 녀성들의 수난사, 격변하는 시대에 가치관념의 혼란으로 방황하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지금 세대 녀성들의 수난사 이런식으로 쭉 선을 그어내려 가노라면 녀인의 수난사로 민족의 비극을 재조명할수 있지않을가. 기발한 생각같아서 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바로 그거다. 녀자의 수난사가 시작된다는 밤을 재조명하자. 그 밤이 숙명적인 밤이던 치욕적인 밤이던 녀자로 다시 태여나는 성스런 밤이던간 그 밤을 그리면 녀성의 수난사가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내가 제풀에 흥분해가지고 해당 자료들을 열독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니 가녀리지만 약간은 귀맛좋게 들리는 젊은 녀성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안녕하세요? 송철선생님 계십니까?》 《네. 바로 접니다. 누구신지?》 《외람된 물음이지만 글 쓰는 송철선생님 맞죠?》 《글 쓴다기보다 글장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뉘신지?》 《저의 이름을 대도 선생님께선 모르실거얘요. 그저 선생님을 숭배하는 팬이라고 생각해주시고 저의 청을 들어주시면 고맙겠어요.》 《청이라니?》 《언제부터 선생님을 한번 찾아 뵙고 싶었어요. 귀한 시간이지만 한번 짬을 내서 저를 만나주시면 큰 영광으로 간주하겠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팬의 목소리다. 한번 만나만 줘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이런 말을 상급지도자에게 한다면 아첨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라 하겠지만 문학팬들에게 있어서는 아첨이라고 하기보다 경모의 마음이 다분히 깔린 소리라고 표현해야 한다. 한것은 팬들의 말은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니까. 10년전만해도 이런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그때 나의 팬들은 내 작품이 나가기만 하면 전화를 걸어왔고 편지를 보내왔으며 어떤 극성팬은 사랑을 고백해 오기도 하였다. 지어 한 극성팬은 울면서 내가 비록 처자식을 둔 사람이지만 영원히 문학의 우상, 사랑의 백마왕자로 마음에 모시고 일생을 나만 지켜보고 살겠다고 했다. 그 때는 찬사를 보내주고 열광하는 팬들이 귀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의 60년대 후반기처럼 인간령혼을 정화시키는 작가가 《피고름 짜는 의사》나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졸부보다 못한 그런 세월이 오면서 글쟁이들이 머리를 잡아뜯으며 쓴 글을 내주는 이가 없어 자기 호주머니의 돈을 털어 출간하고 또 그 책을 보아주는 이가 없어 창고에 묵여두는 그런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다. 누군가 이런 현상을 두고 작가의 타락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작가의 타락이 아니라 문명의 타락이라고 했다. 진짜 누가 타락하고 또 누가 누구를 타락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문분출하고 글을 쓰는 글쟁이들이 12억 인구 모두 돈을 벌라는 세상에서는 어딘가 정신상태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문학팬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듣기에도 성대에 이상이 생겨 병원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같아 보이는 사람이 목갈린 소리로 내지르는 단발마적인 괴성도 열광하는 가수팬들의 눈물, 코물, 오줌까지 짜내게 하는 세월에 내가 한 번 만나주면 큰 영광으로 간주하겠다는 팬이 나타났으니 반갑다기보다도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말씀 고맙습니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신기루같이 나타난 팬을 깍듯이 대했다. 《용건이라기 보다도 선생님께서 시간을 짜내 저의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얘요.》 《무슨 얘기신데?》 《저의 얘긴 선생님한텐 좋은 글감이 되실거예요. 정말이예요. 흑…》 나의 팬은 말을 맺지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송수화기로 울려나오는 녀자의 흐느낌소리를 들으니 내가 별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울지마시고 차근차근 얘기하십시오.》 한참만에 나의 팬은 오열을 그치고 울음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전화로는 도저히 얘기가 될것 같지 않아요.》 글감이 된다는 나의 팬의 이야기, 더군다나 오열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그 이야기가 무척 궁금스러웠다. 《지금 어디서 전화를 거십니까?》 내 말에 팬은 대뜸 반색한다. 《여긴 공중전화인데 선생님 지금 나와주실래요?》 《그러지요. 그런데 만날 장소를 어디로 정하면 좋겠습니까?》 《전 어제 북경에 오다나니 지리를 잘 몰라요. 제가 안다는 것은 천안문밖에 없어요.》 《천안문앞엔 관광객이 많아 만남의 장소로 정하기는…》 《그러시면 천안문광장 중심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앞에서 만나는게 어떨까요?》 《그런데 어떻게 서로 알아볼수 있겠는지…》 《제가요 아래우를 까만색으로 정장을 했는데 손에 〈연변녀성〉 잡지를 들고 있을께요. 시간을 몇시로 정할까요?》 《오전 11시로 하지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에 이르니 5분전 11시였다. 어떻게 생긴 녀성인지 또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금은 궁금한 마음으로 기념비 주변을 눈빗질했다. 까만색 정장을 하고 손에는 《연변녀성》잡지를 쥔 녀인을 찾아 기념비 주변을 돌았다. 그러나 그런 녀인은 없었다. 담배 한 대 붙여 입에 무는데 한 녀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까만색 정장을 하고 손에 잡지를 말아쥔 한 녀인이 기념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봐서 나이가 40대 초반에 가까운 녀인이였다. 전화로 들은 젊은 목소리에 비해 조금은 상상이 빗나갔음을 느끼면서 나는 그 녀인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전화로 약속한 내 팬이라면 적어도 주변을 두리번 거리겠건만 그 녀인은 고개를 약간 숙인채 내처 걸어왔다. 나는 그 녀인의 곁을 지나치면서 그 녀인이 손에 말아쥔 잡지에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그 녀인이 잡지를 너무 돌돌 말아쥐였기에 그것이 무슨 잡지인지 알수 없었다. 《저 미안하지만…》 내가 우리말로 그 녀인을 향해 말을 건넸지만 그 녀인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가버렸다. 그 어느 첩보영화에서 보았던 접선에 실패한 한 장면이 떠올라 절로 멋적은 웃음이 힉 나갔다. 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피웠을 때 인민대회당쪽에서 바삐 뛰여오는 까만색 정장을 한 녀성이 눈에 잡혔다. 갸날프리만치 쪽 빠진 몸매를 봐선 처녀로밖에 볼수없었다. 그러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또 실망했다. 그런데 나와 가까운 거리까지 달려온 그 녀성이 멈춰서더니 어깨에 멘 가방에서 잡지 한책을 꺼내는것이였다. 제발 그 잡지가 《연변녀성》이기를… 기대와 맞아떨어졌다. 그 녀성이 가슴앞에 펴든 잡지표지엔 전통 한복을 입은 조선족녀성의 사진이 찍혀져 있었다. 접선 성공이다. 내가 희미한 미소를 입에 단채 그녀한테 다가가자 그녀도 대충은 짐작이 가는지 마주 다가왔다. 내가 그녀가 쥐고있는 잡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어보이자 그녀는 인차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래 기다렸죠? 차가 밀려서…》 그녀는 흘러내려 눈을 가리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렸다. 조금은 넓은 하얀 이마와 쌍거풀이 질가말가한 반짝이는 두눈이 드러났다. 작은 눈이였지만 새물새물 웃는듯한 그런 눈이였다. 《나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아직은 식사전이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식사나 합시다.》 우리는 천안문광장 남쪽켠에 있는 맥드날도로 가서 빈자리가 많이 남은 구석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 화제에 들어가기전에 나로선 우선 그녀가 나의 전화를 어떻게 알았는가가 궁금했다.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그녀의 대답이 기막혔다. 북경역 지하철입구에 있는 쓰레기통곁에서 나의 명함을 주었다는것이였다. 필경 언젠가 나의 명함을 받은 어느 녀석이 북경을 떠나면서 버린 모양이였다. 그저 간단히《자유기고가》라고만 달랑 밝힌 나의 명함이 그 무슨 사장이요 리사장이요 주석이요 하는 사람들의 명함처럼 정히 명함첩에 모셔질 명함은 아니지만 믿기어려울 정도로 쓰레기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억장이 막히는 일이였다. 하긴 돈이나 권세를 가진 사람에 비해 별볼일이 없는 글쟁이의 명함이니 그런 《대접》을 받을만도 하다. 스스로 마음이 비참해지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내 명함을 발견하는 순간 얼마나 행운스러웠는지 몰랐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소 위안을 느낄수 있었다. 그녀가 주은 것이 명함장이 아니라 뭇사람들에게 짓밟힐번한 나의 자손심이였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돌리던 휴대폰전화번호와 팩스번호까지 밝힌 명함장을 그녀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우리는 인차 본 화제로 들어갔다. 《하실 얘기가 뭔데 지금 들어볼까요?》 《선생님 말씀 낮추세요. 선생님께서 말씀을 낮추시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지고 죄송스러워요.》 《미안하지만 성함은?》 《아이참. 여직 제가 선생님한테 제 이름마저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죄송해요. 저의 이름은 최미향, 올해 나이는 26살, 취미는 독서, 특기사항은 리혼녀입니다.》 초면에 나이뿐만아니라 리혼녀라는것까지도 당당하게 밝히는 그녀의 솔직함이 아주 인상적이였다. 그녀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도 없고 별로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없는 북경에 오고보니 마치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프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허두를 떼고는 본론에 들어갔다. 《선생님을 찾은건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의 글을 통해 저의 기구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데 있었어요. 여느 소녀들처럼 꿈많고 웃음이 많던 저는 하루밤사이에 꿈을 잃고 웃음을 잃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밤이 바로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 된셈이지요.》 그러고보면 녀인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는 격언이 아주 적중한가보다. 미향은 아래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달래면 달랠수록 더 울어버리는 것이 녀자와 어린애들이다. 녀자나 어린애들이 울때면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상책이다. 나의 안해도 이러저런 일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설음을 받을 때는 곧잘 울어버린다. 그럴 때 달래면 안된다. 달래면 더 울어버리다가 나중엔 나를 상대로 스트레스를 푼다. 한 번은 친구의 아들 돌생일에 우리 내외는 단돈 백원만 가지고 갔다. 아이의 돌상에 사업을 하거나 과장이나 처장같은 장자나 가진 다른 친구들이 몇백원씩 척척 꺼내놓는 것을 보고 안해는 가지고 간 백원을 꺼내놓지 못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안해는 울었다. 곁에서 내가 달래니 안해는 그 설음을 나한테 쏟아부었다. 《맨날 그런식으로 살고 있으니 마누라 체면 하나 세워주지 못하지요. 글 만들어내는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뭔들 못하겠어요.》 그러면 나는 말없이 서재로 들어간다. 더 곁에 있었다간 좋은 일이 없다. 살아오면서 설음받던 일들이 다 쏟아져나오고 나중엔 아예 나를 바보로 만든다. 글과 씨름하면서 애들과 대화할줄도 모르는 아버지, 안해에게 미용원에 가서 얼굴 한 번 만지라고 몇십원도 쥐워주지 못하는 남편, 남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마저 없는 사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술로 화풀이 하는 어리석은 사람, 하여간 나는 지구라는 이 땅덩어리우에 발붙일 자리가 없는 사람으로 되어버린다.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두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서재에 앉아있으면 조금후 안해는 언제 투정을 부렸는가 싶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커피 한잔을 놔준다. 그러면 나는 씩 웃으며 안해의 엉덩이를 툭 친다. 안해도 웃어버리면서 내 코를 한 번 비틀어놓고는 나가버린다. 안해생각을 하고 나니 오열하는 미향의 어깨라도 한 번 다독여주고 싶다. 40대 남자가 울고 있는 20대 녀자와 마주앉아 있는것이 볼거리나 된 듯 주변의 시선들이 따갑게 맞쳐온다. 나젊은 정부의 고운 투정을 받아주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미향은 울음을 그치고는 잠간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그 사이 나는 울지않고서는 꺼낼수 없는 미향의 기구한 인생이야기가 시작되였다는 그 밤이 대체 어떤밤이였을가에 대해 추측해 봤다. 폭력에 의한 굴욕의 밤? 아니면 그 어떤 비루한 거래로 이루어진 계약적인 밤? 혹시 그 어떤 피치못할 사정으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친 밤? 언제 울었나 싶게 새로 화장을 하고 다시 내앞에 앉은 미향이는 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미향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라는 그 밤은 시인들의 말을 빈다면 천지간의 화합과 령혼과 령혼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황홀한 밤이였다. 한마디로 미향이가 녀자로 새롭게 태여나는 밤이였다. 미향의 기구한 생을 미향이가 말한대로 대충 적으면 이러하다. 평소에 백마왕자로 흠모하던 학교의 체육선생과 그 학교 고중졸업생인 미향은 소낙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에 학교 체조련습실에서 육체와 령혼의 향연을 가진다. 그것을 계기로 둘은 나중에 부부가 된다. 미향은 고향마을에서 유치원선생으로 일하고 남편은 체육학원으로 연수를 간다. 그 사이 사랑엔 금이 실리고 미향은 그 금을 메우려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는 포기해 버리고 만다. 배속에 커가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던 미향의 일루의 희망마저도 남편의 잔혹한 발길질에 꺼져버린다. 희망의 잿더미속에서 단 하나의 불찌라도 찾으려고 미향은 무작정 고향을 떠나 북경으로 온다. 어디서 많이 들었고 또 녀성잡지에서 많이 보아온 이야기다. 별로 감흥이 가지않았다. 그렇다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수없어 미향앞에서 진지하게 듣는 모습을 꾸미느라고 애썼다. 가끔 하품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고 곤경을 치뤘다. 미향이가 이야기를 마치자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해서 녀성잡지에 보내보라고 했다. 《녀성잡지에 나오는 글은 너무 짧고 깊이가 없어요. 선생님께서 저의 이야기로 장편소설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그 반응이 대단할거얘요.》 단편소설감으로도 안되는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만들라니 어이없었다. 그러나 글감이 안된다고 말할수 없었다. 《오늘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서는 감이 잘 서지않는데 이러면 어떻소? 미향이가 오늘 할 말을 채 못한 것 같은데…》 미향이가 내말을 잘랐다. 《맞아요. 저의 이야기는 며칠을 새면서 말해도 다 하지 못할거얘요.》 《그러니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오. 록음기가 있소?》 《없어요.》 나는 호주머니에서 취재용으로 쓰던 자그마한 록음기를 꺼내놓다. 《미향이가 겪은 일과 하고싶은 말을 이 록음기에 록음해주오. 며칠이든 한달이든 천천히 생각나는대로 록음해주오. 할 이야기를 다 했다고 생각되면 그 때 나한테 다시 련락을 주오.》 《녀자는 돈에 웃고 돈에 운다》 그날 그렇게 헤여진후 미향이는 가끔씩 전화가 왔다. 그저 인사차로 걸어오는 전화였다. 할 이야기를 다 록음했는가고 물으면 미향은 번마다 기구한 자기 생에 대해 이야기 하자니 자꾸 설음이 북받치고 눈물이 앞서 도저히 록음을 할수 없다고 했다. 마음이 안정될 때 록음을 하라고 하면 마음이 도저히 안정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럼 우선 일자리나 찾아 일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면 다소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을수 있을거라고 하니 자기도 지금 그럴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평소에 그리 친하지도 않은 친구집에서 눈치밥을 먹자니 살점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후로 한 반달동안 미향한테서 전화가 오지않았다. 아마 일자리를 얻어 바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북경도서관에 가서 창작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신지?》 아주 딱딱하고 거친 한어말이 고막을 찔렀다. 《당신이 송철인가?》 《그런데…》 《지금 빨리 동향촌파출소로 오시오.》 아주 명령조였다. 죄지은 일 없어도 파출소로 출두하라면 가슴이 뜨끔해진다. 우선 불길한 생각부터 앞세우게 된다. 고중에 다니는 아들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아니면 어느 친척이 범법했나… 북경의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동향촌파출소를 길을 물어가며 찾아가다나니 택시로 한시간 남짓이 걸렸다. 파출소에 들어가니 몸매가 거쿨진 젊은 경찰이 나를 차갑게 맞았다. 그 녀석은 나한테 자리를 권하지도 않은채 심문조로 물어왔다. 《이름?》 《송철.》 《나이?》 《48살.》 《직업?》 《자유기고가.》 《자유기고가가 뭡니까?》 《글쓰는 사람. 잠간만 당신 지금 날 심문하는거요?》 《난 지금 공무를 집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손님한테 먼저 자리라도 권해야 할게 아니오?》 《거기 걸상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의자에 앉아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그러자 그 젊은 녀석이 고개도 들지않고 말했다. 《여기선 금연입니다.》 《책상우에 재떨이가 있는데…》 《담배 태우라고 놔둔게 아닙니다.》 나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그냥 재떨이에 던져버렸다. 《신분증.》 나는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젊은 녀석앞에 던져주었다. 신분증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젊은 녀석이 신분증을 내앞으로 던져주며 물었다. 《가라오케에 자주 다닙니까?》 한때는 가라오케에 자주 나들기도 했다. 지방에서 친구가 오거나 북경에 있는 친구들끼리 파티가 있으면 2차로 이어지는게 가라오케였다. 다른 친구들은 카라오케아가씨들과 잘 어울려 기분을 냈지만 나는 내가 부를 노래 몇곡만 부르고는 술만 마시다가 꼬꾸라진다. 한두번도 아니고 번마다 그 꼴이니 언젠가 한 친구가 아들둔건 봐선 고자가 아닌데 혹시 벌써 고개숙인 남자가 돼버렸나 하고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가라오케에 가봤댔자 별 재미가 없고 술에 몸만 상하는데다가 오가는 택시료금도 문제가 되어 발길을 끊은지도 오래됐다. 《방금 묻지 않았습니까? 가라오케에 자주 다니는가고.》 나는 대답대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녀석은 서랍에서 명함 장 한 장을 꺼내 내 눈앞에 내댔다. 분명 휴대폰전화번호와 팩스번호까지 찍힌 나의 명함장이였다..... 《그 명함은 어디서 난거요?》 《바로 그게 문제가 된겁니다. 이 명함장이 몸 파는 아가씨한테서 나왔단 말입니다.》 《뭐?!》 《미선이라는 조선족아가씨를 잘 알고 계실텐데.》 《뭐 미선?!》 《상습적으로 몸 파는 아가씬데 오늘 새벽에 잡혔습니다.》 생각밖으로 화제가 엉뚱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첨 듣는 이름인데.》 《같은 조선족이니까 알만도 하지 않습니까.》 이말에 참다못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버럭 소리질렀다. 《이봐 조선족 팔지마. 이 북경판에 조선족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그 말해? 무려 7만이야 7만!》 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그 녀석도 저으기 놀라는 눈치다. 《조용조용.》 《내가 어떻게 조용조용 말할수 있나 말이야. 자네 지금 날 오입한 줄로 알고 있는데 사람 함부로 점 찍지마. 당장 잡아가둔 그 녀자 여기로 데려와!》 이젠 내쪽에서 호령조로 나왔다. 녀석은 한참 말없이 흥분한 나를 차분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훌쩍 일어나 나가버렸다. 분통이 터진김에 나는 담배 한 대 붙여 물었다. 담배를 거의 한 대 다 태울쯤해서 녀석이 들어왔다. 그 뒤로 한 아가씨가 고개를 푹 떨구고 들어왔다. 녀석이 아가씨한테 호령했다. 《고개들어!》 그말에 아가씨가 고개를 들었다. 화장기 하나도 없고 온 얼굴이 눈물투성이였다. 꽤나 곱상하게 생긴 아가씨였다. 녀석이 나를 가리키며 아가씨에게 물었다. 《이 사람을 아냐?》 아가씨는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쩐지 안도의 숨이 나간다. 《그런데 이 명함을 어디서 났어?》 《친구 핸드백을 빌렸는데 그 안에 명함장이 있는줄 몰랐어요…》 《친구 이름이 뭐야?》 《미향…》 (뭐 미향?!)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디에 있어?》 《저의 세집에 있어요.》 《너 같은 애냐?》 《금방 온 애니 그런 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녀석이 나한테 고개를 돌리면서 아까보다는 굳어진 얼굴을 풀며 물었다. 《미향이란 애한테 명함을 준적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글 써달라고 해서 한 번 만나고 그 뒤로 전화로 통화만 몇번 했지요.》 《그럼 이젠 가봐도 됩니다. 훗일 명함장 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웃기는 놈, 형상관리를 잘하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명함장관리를 잘하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저 아가씨하고 몇마디 말을 해도 됩니까?》 내가 녀석에게 청을 들었다. 《무슨 말을?》 《같은 조선족이니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그러나 제가 알아듣게 한어로 하십시오. 자 한 대 태우시죠.》 녀석이 이젠 제쪽에서 먼저 담배를 권한다. 담배를 붙이고나서 나는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아가씨한테 물었다. 《너 몇살이니?》 《스물다섯…》 《시집갔냐?》 《아직은…》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냐?》 내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마음 같아서는 즉신나게 패주고 싶었다. 나는 저으기 흥분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고개를 푹 떨구고 대답을 않자 녀석이 꽥 소리질렀다. 《어서 대답해 봐!》 아가씨의 고개가 더 떨어졌다. 비록 내가 던진 물음이지만 녀석까지 심문하는식으로 합세하니 조선족으로서 별로 망신스런 생각이 들어 아가씨의 대답을 더는 듣고 싶지않았다. 대답이 나와봤댔자 돈 때문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던가 《돈에 속고 돈에 울고》 이런식의 탄식조는 30년대 기생출신인 가수들이 부른 류행가에서 많이 나왔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 당시 일제가 실행한 우리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중 그 하나가 매독정책과 유곽발전정책이다. 일제는 우리민족의 청장년들을 타락으로 유인하여 민족의 정기를 빼앗고 나아가서는 우리민족을 쇠망케 하기 위하여 각 도시마다 유곽이라는 인육시장을 대규모로 설치해 놓고 먼저 일본 기생들을 끌어들이고 후에 와서는 조선녀성을 창녀로 인육시장에 내몰았다. 하여 한 때는 서울장안만해도 2천여명의 조선인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돈에 속고 돈에 울고》는 그 시절 이런저런 사정으로 첩살이하거나 기생으로 된 녀자들의 신세타령이였다. 기생출신인 리화자가 부른 《화류춘몽》2절 가사를 적으면 이러하다. 《술취한 사람에게 주정도 받았으며 돈많은 사람에게 괄세도 받았다오 밤늦은 자동차에 지친몸 담아싣고 뜨거운 두뺨위에 흘린 눈물 진한 것이 기생이냐 》 이 노래를 부른 리화자도 나중에는 술에 젖고 아편에 중독되여 비극의 생을 마감했다. 그 시절 기생들이 돈에 속고 돈에 운 사람이라면 바로 내앞에 머리를 떨구고 서있는 90년대 아가씨는 대체 무슨 사람이냐. 역시 돈에 속고 돈에 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돈에 웃고 돈에 우는 사람인가… 어쩐지 내 마음이 서글퍼졌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내가 걸상에서 일어나자 불시에 아가씨가 내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애걸했다. 《선생님 제발 절 도와주세요. 제가 그 짓을 하고 싶어한게 아니예요.》 이때 녀석이 또 꽥 소리질렀다. 《한어로 해!》 나도 녀석을 향해 우리말로 꽥 소리질렀다. 《야 임마, 조선말 하는것도 이땅에서는 자유야!》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때 무슨 기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녀석은 두눈이 호동그래졌다. 《방금 무슨 말을 했습니까?》 《너 입다물라고 했다.》 나는 역시 우리말로 말하고는 아가씨한테 말했다. 《그 어떤 피치못할 사정이래도 몸건사만은 잘해. 우리민족을 팔지말고. 잘 기억해둬. 자기구제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하는거야.》 그러곤 나는 힝하니 나와버렸다. 《녀자는 새롭게 태여나기를 원한다.》 며칠후 미향한테서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명함장을 잘 건사하지 못해서…》 《알고 있었소?》 《네. 경찰이 왔다갔어요. 죄송해요.》 《죄송할것없고, 그런데 미향인 그 아가씨와 친구요?》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자랐는데…》 《그런 친구들과는 거리를 멀리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명심하겠어요. 마땅한 거처가 없어 잠시 그 애 신세를 진건데 그애가 그런 앤줄 몰랐어요. 고향에 함께 있을 때엔 참 착한 애였는데. 인차 자리를 옮기겠어요. 선생님 지금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용건은?》 《용서도 빌겸 부탁할 일도 있고 해서…》 《용서빌것은 없고 부탁할 일이 있으면 지금 말해보오.》 《새로 나온 〈중화인민공화국 심계법〉 있잖아요. 그걸 우리 글로 번역해 줄수없나요? 번역료는 충분히 드리겠어요.》 《누구의 청탁인데?》 《누구의 청탁이 아니고 제가 한국회사에 들어갈려고 그러는데 〈심계법>에 대해 공부 좀 할려고 그래요. 그런데 전 한어에 약하니까요.》 나의 팬이 공부하겠다는데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말이지 난 지금도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 지어는 아무책이든 읽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한창 책을 읽을 청춘시절을 헛되게 보냈기 때문이다.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은 우리 세대를 보고 타락한 세대라고 했다. 타락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런저런 근거중 그 하나가 우리 세대가 책을 읽지 않았고 또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아버지세대 사람들은 공부를 못한 사람이라도 뿌슈낀이나 조기천의 시는 한 두수쯤은 외울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 세대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창 책을 읽을 나이에 《홍위병》완장을 두루고 《반란에 도리가 있다》고 설치고 다니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답시고 농촌에 가서 호미로 땅을 긁으면서도 제딴에는 지구를 다스린다고 호기를 뽑았고 그러다가 이런저런 기회를 타서 겨우 시내로 들어와 가정을 이루고 보니 청춘시절이 말마따나 속절없이 가버렸으니까. 북경에는 사업하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 사업에 성공한 친구들은 많지만 책을 읽는 친구는 드물다. 한 번은 식당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친구집에 가보니 5성급 호텔방보다 더 화려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죄다 외제였다. 그런데 유독 책장 하나만은 없었다. 책이라곤 쏘파우에 나뒹구는 저질 잡지뿐이였다. 또 한 번은 무역업을 하는 친구집에 가보니 한벽을 전부 차지한 책장에는 사회, 과학, 문학서적은 물론 지어 취미생활에 관한 도서까지도 꽂혀있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몇만원을 주고 한꺼번에 사온 장식용에 불과했다는 것이 내 마음을 쓰리게 했다.   아버지 세대의 눈에 우리 세대가 타락한 세대로 비쳤다면 우리 아래 세대는 어떤 모습일가. 언젠가 북경시교에 있는 식당에 들린적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웃통을 벗어제치고 술을 마시는 20대 초반의 연변에서 온조선족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돈 벌러 무작정 북경으로 온 청년들이였다. 북경에서 그것도 시교에서 동족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이다. 자연스레 우리는 합석했다. 통성명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년들의 나서자란 곳이 룡정이라 하니 나는 더욱 반가웠다. 한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생활을 시작한 곳이 바로 룡정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반가워 내가 술잔을 들며 건배를 제의했다. 《윤동주 넋이 깃든 룡정을 위하여 건배!》 술잔을 통쾌하게 비운것까지만은 좋았는데 그 뒤에 저들끼리 하는 말이 기막히다. 《야, 윤동주가 누구야?》 《글쎄…》 《어디서 듣던 이름인데…》 《죽은 사람이 아니야?》 너무 기가막혀 내가 물었다. 《너들 학교 다녔냐?》 대답인즉 고중을 나왔다고 한다. 《고중을 나왔다는 녀석들이 윤동주도 몰라?》 나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나왔다. 《어서 옷을 입어!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조선족은 공공장 소에서 웃통을 벗는 일이 없어.》 녀석들은 어정쩡해서 나의 눈치를 보면서 옷을 주어입었다. 《그렇게 머리가 비여가지고 북경에 와서 돈을 벌어보겠다구 천만에. 우선 어디가서 그 빈 머리를 먹물로 채워라.》 녀석들이 잠자코 있다가 내가 식당문을 나설 때 나를 바래는 인사가 《보다보다 별 웃기는 사람 다 보네》였다. 그래 내가 웃기는 사람이라면 너들은 남을 웃길 자격도 없는 녀석들이야. 이렇게 나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했다. 미향은 우편으로《중화인민공화국 심계법》을 보내왔다. 나는 번역할 시간이 없어 출판사에 다니는 안해가 번역을 도맡았다. 번역료가 충분히 지불될것이라고 하니 안해는 신이나서 밤을 패며 번역했다. 번역이 끝난후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미향을 만났다. 그날 미향은 내 록음기를 가지고 왔다. 《죄송하지만 전 록음을 하지못했어요. 여러번 시도를 해보았는데 눈물만 나왔지 말이 안나와요. 다시 생각해보니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둘추어봤댔자 채 아물지않은 상처를 아프게 허빌뿐 앞으로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될것같지 않아 전 포기하기로 했어요.》 하긴 그렇다. 집요하게 자신의 과거에 묻혀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과거라는 그늘속에서 시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포기해도 과거 전체는 포기할 수 없는것이다. 그것이 슬픈 과거였던 기분나는 과거였던간 에 과거는 엄연하게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누군가 슬픈 과거가 시궁창이 될 수도 있고 또한 벅찬 현실과 희망찬 래일의 밑거름으로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과거의 그늘에서 나와 새롭게 자기 인생을 설계해 보겠다는 미향에게 조언으로 한마디 했다. 《미향이 이런 말이 있어. 녀자는 언제나 새롭게 태여나기를 원한다. 새롭다는 그 말 다 좋게 리해하면 안돼. 새롭게 태여난다는것은 새로운 변신, 말하자면 탈바꿈이라는 말로도 통하는데 그 새로운 변신이 새로운 타락의 탈바꿈이 되겠는지 아니면 새로운 비약으로 되는 탈바꿈이겠는지는 자신에게 달렸지.》 《선생님 말씀 명심하겠어요. 선생님한테 미리 량해를 구할게 있어요. 번역료를 미처 마련하지 않아 오늘 드릴수 없군요. 죄송해요.》 《거기엔 너무 신경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나 하라구.》 내가 번역료는 별로 개이치않는다는식으로 나왔지만 사실 그날 안해는 내가 번역료를 가지고 들어오는가 해서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손을 내밀었다. 《뭘 내라는거요?》 나는 짐짓 딴전을 부렸다. 《번역료.》 《번역료는 훗일 주겠다더군.》 《지금 세월에 어디 외상이 있어요. 당신 당해보지 않아 빈손으로 왔어요?》 《믿을 만한 사람이야.》 《또 그 말, 지금 믿을만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범의 코 등의 밥알이라도 뜯어먹는 세상이예요.》 안해가 이런 말을 할만도 하다. 한해전 북경에서 평소 면목이 있는 한 사람이 《중국의 투자환경》이라는 두툼한 책 한권을 가지고 와서 번역해 달라고 했다.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그 사람의 말을 곧이듣고 나와 나의 안해는 근 반달동안 거의 밤을 새워가면서 그 책을 번역했다. 번역원고를 넘기고 반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후에 물어보니 그 출판사가 부도가 나서 없어졌다고 했다. 우리한테 책을 맡긴 그 사람에게 수고비로 얼마간 보상이라도 해야 한다고 안해가 말하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도 그 책의 출간을 위해 접대비를 포함해 만원가량 날려보냈다고 했다. 더 어데가서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원고라도 돌려달라고 하니 부도난 출판사의 사장이 한창 도피중이여서 찾을 길 없다고 했다. 그 때 안해는 화병으로 몇일 누워앓았다. 《이번 번역은 누가 시킨거예요.》 《한국회사에서 근무하는 내 후배야.》 이런식으로 둘러댈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미향은 투자의향서, 제품소개, 회사소개같은 짧은 서류들을 번역해 달라고 팩스를 보내왔다. 그런 격식의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는가를 배우겠다는것이였다. 배우겠다는 사람의 요구를 거절할수 없었다. 다른 때같으면 안해에게 그냥 넘겨 번역하라고 했겠지만 또 번역료 말을 꺼낼가바 그냥 내가 번역해서 팩스로 보내주었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미향이가 북경에 진출한 한 한국무역회사에 입사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당연히 축하할만한 일이였다. 내가 축하할겸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니 미향은 첫 로임을 탄후에 자기가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미향은 한국회사에 입사한 후에도 자기가 아직도 번역에 서툴다고 하면서 가끔 회사관련 서류의 번역을 의뢰해왔다. 번역을 의뢰해온 서류를 보니 미향이가 몸담은 회사는 무역중개업을 하는 작은 회사같았다. 하루는 내가 서재에서 컴퓨터로 미향이가 보낸 서류를 번역하고 있는데 안해가 들어왔다. 컴퓨터 형광막에 나타난 글을 보고 안해는 자못 놀란 기색이였다. 《소설 쓰는가 했더니 딴 판이네.》 《짧은 글이니 당신 손 빌것도 없고 해서…》 《당신 이런 번역은 다시는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번역료는 있어요?》 《친구청탁인데 술 한잔 사겠지.》 《그저 술, 술, 술, 이젠 술소리만 들어도 지겨워나요. 참 그런데 지난번에 번역한건 어떻게 됐어요?》 《뭘 말이오?》 《〈심계법〉말이예요.》 《주겠지.》 《그냥 주겠지 하고 기다리지 말고 재촉하세요. 당신 시간이 없으면 내가 찾아갈테니 주소만 알려주세요.》 《기다린바하곤 좀 더 기다리라구.》 《그러다가 또 전번 꼴이 되면 어쩔라구요. 대체 누구 청탁인가요?》 《내 후배라고 했잖소.》 《대학후배예요?》 《말해도 당신 모르오.》 《후배라고 너무 믿지 말고 재촉할건 미리 재촉하세요.》 《알았다니까.》 《그런데 당신 나하고 역정낼건 뭐예요?》 《당신 오늘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어디 말 안하게 됐나요? 지난번처럼 그저 두눈 펀히 뜨고 당할가봐 그래요.》 미향이가 첫 로임을 타는 날 우리는 미향이가 정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미향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선생님, 번역료는 어떻게 계산하는가요?》 보매 미향이가 번역료를 챙겨가지고 왔는 모양이다. 《번역원고에 따라 다른데 준확한 표준에 대해선 딱히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일반 번역원고는 번역된 자수로 천자에 적어도 30원은 하지.》 이말에 미향은 두눈이 호동그래졌다. 그는 한참이나 아무말없이 앉아있었다. 《뭘 생각하나?》 《아니요.》 《그 얼굴에 씌여져 있는데.》 《사실 전 번역료가 그렇게 될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미향은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 꺼내 내앞으로 밀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전 3백원이면 충분할줄로 알고…》 돈 수자에 기막힌 웃음이 나갔지만 미향의 천진스러움과 그 솔직함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미향이가 북경에 와서 인생의 새출발을 했으니 그 돈은 내 축하선물이더럼 치고 도로 넣소.》 이말을 하면서 나는 어쩔수없이 안해를 떠올렸다. 두 번 다시 당하는 꼴 다시 볼수없다던 안해에게 뭐라고 말할가. 에라, 또 당했다고 하지. 후배녀석이 회사공금을 가지고 실종됐다고 할 판이지. 지금 세월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그러나 밤을 패며 원고를 번역한 안해에게 또 실망을 안겨줄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난들 어쩌나… 《선생님…》 미향이가 말을 잇지못하고 어깨를 들먹였다. 녀자들의 울음끝에는 꼭 할 말이 있다. 이윽고 미향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사실 전 선생님을 속였어요. 바른대로 말씀드린다면 전 배우겠다고 〈심계법〉 번역을 선생님한테 의뢰한 것이 아니얘요. 제가 한국회사에 입사하려고 찾아가니 회사 사장님이 저보고 〈심계법〉을 번역해 보라는게 아니겠어요. 저의 문자수준을 보려는것이였어요. 사실 전 한어 나 조선어나 다 약해요. 그러나 전 그 기회를 놓칠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전 선생님에게 번역을 의뢰했던거얘요. 회사 사장님은 선생님이 번역한 〈심계법〉을 보더니 대뜸 오케를 부르는게 아니겠어요. 그 후에 선생님께서 번역해준 회사서류도 전부 제가 번역한걸로 되었어요. 죄송해요…》 《미향의 그 솔직함이 내 마음에 들어. 됐어, 그만 울라구. 미향이, 거짓말도 때론 아름다운 거짓말이 될 수도 있고 기특한 거짓말이 되는 경우도 있지. 이런 이야기가 있어. 한 군인이 군사훈련중 전우를 구하다가 희생되였는데 그 비보를 홀로 있는 어머니한테 전할수 없었지. 왜냐하면 희생된 군인은 외독자였고 그 어머니는 시한부생명을 사는 로인이였으니까. 그래서 희생된 군인한테서 구원을 받은 전우가 매달 아들의 이름으로 편지를 띄우고 그 어머니에게 약과 돈을 부쳐주었지. 시한부생명을 살던 로인은 결국은 아들의 장래가 창창하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지. 이런 경우의 거짓말은 아름다운 거짓말이고 미향의 경우는 기특하게 받아들일수 있는 거짓말에 속하지. 그러나 그런 기특한 거짓말도 자주 하면 못써.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솔직한게 좋아.》 말을 해놓고보니 내가 집에 돌아가 안해한테 해야 할 거짓말은 안해에게는 기특한 거짓말이 되기는 고사하고 배신감을 주는 거짓말이 될 것이다. 방금 미향에게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솔직한게 좋다고 말했지만 나는 안해에게 솔직할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사내는 속임과 허위의 가증스런 탈바가지라고 했나보다. 그러나 안해도 고생스레 번역한 원고가 한 인간이 새생활에로의 출발에 도움이 되었다는것을 알면 내 거짓말을 용서할 것이다...... 《녀자는 변신을 거듭한다》 그 후로 오래동안 미향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둬달 취재차로 외지에 갔다 돌아오니 안해가 기쁜 얼굴로 내 앞에 송금표를 내보이면서 오늘 온것이라고 했다. 3천원 송금표에는 그저 간단히 번역료라고 적혀있었다. 송금인은 최미향이였다. 《실종됐다는 사람이 그래도 신용 하나만은 지켰군요.》 나는 안해에게 번역을 의뢰한 후배가 실종됐다고 거짓말했었다. 《최미향이란 이 녀자가 당신의 후밴가요?》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내가 미향이가 적어준 전화번호에 전화를 거니 그 전화는 취소된 전화라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아마 회사를 옮긴 모양이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미 수집한 일제시대 종군위안부에 대한 자료정리에 들어갔다. 자료를 정리하다가 나는 당시 일제 법제국의 한 참사관이 쓴 글 한편 발견했다. 그자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가장 어려운 과제의 하나가 우리민족의 녀성층을 감화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양 등 선진제국은 식민정책, 또는 선교를 위해서 먼저 부인층을 감화시키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 녀자가 감화를 하면 남자는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제도 우리민족 녀성의 순결성과 고귀성은 민족성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큰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아냈고 아울러 다른 식민지통지자들보다 한술 더 떠서 감화정책보다도 그 순결성과 고귀성을 무참히 짓밟는 것을 우리민족의 민족성을 쇠퇴시키는 중요한 일환으로 보았기에 우리민족의 녀성들을 성의 노예인 위안부로 전쟁판에 내몰았다. 《광사원(廣辭苑)》이란 사전에는 종군위안부란 《일제 때 장병들을 수행해서 위안해 준 녀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실체는 종군위안부란 세계 군대와 전쟁사상 전례가 없었던 군인들의 성욕처리를 위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섹스 처리용 녀자들이다. 일제시기에 종군위안부가 있었다면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된후에는 현지처라는 것이 생겨났다. 사전엔 현지처란 외지에 나가 있는 남자가 현지에서 있을 동안 데리고 사는 녀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말을 바꾸어 말하면 현지에서 구한 섹스처리용 녀자다. 섹스처리용 녀자라는 점에선 위안부나 다름이 없다. 일제시기엔 일제가 총칼로 우리 민족 녀성들을 종군위안부로 전쟁터에 내몰았다면 경제대국이 된후에는 그 족속들이 돈다발을 들고 가서는 우리 민족 녀성들을 현지처로 들여 앉혔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 아니다. 우리를 더욱 경악케 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그 못된 본을 받아 중국에 사업차로 드나드는 일부 한국인들도 조선족 녀성들을 현지처로 들여 앉혔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현지처, 그들은 과연 어떤 녀성들일가? 듣는 소문엔 아세아촌 부근에 한국인 현지처들이 많다고 했다. 어느 하루 나는 그 실태를 알아보려고 아세아촌으로 갔다. 나는 먼저 비싼 외제 화장품만 파는 상점에 들어가 상점주인과 얘기를 나눴다. 외제 화장품중 한국산이 특히 많았다. 상점주인은 30대 중국녀성이였다. 《이 비싼 화장품을 사가는 분이 있습니까?》 《공급은 수요에 따른다는 법칙을 모르시는가 보군요.》 《하긴 그렇습니다. 사는 사람이 없으면 여기다 가게를 차릴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이 비싼 화장품을 애용하는 분들은 대체로 어떤 부류의 녀성들입니까?》 《시장조사를 나왔나요?》 《그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대체로 외국회사에 근무하는 아가씨들이 아니면 장기주재하거나 자주 중국을 나드는 외국인들의 〈작은댁〉들이지요.》 한어로 《작은댁》이라면 첩살림하는 사람, 시체말로 《현지처》다. 《그런 〈작은댁〉들이 많습니까?》 《많다고 할수는 없는데 그러나 적지는 않아요.》 《어떻게 〈작은댁〉인줄 보아냅니까?》 《어떤 기준이 있는것도 아니고 또 그런 녀자들이 그 어떤 표식을 달고 다니는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보면 알려요. 녀자의 눈은 못 속이니까요.》 《그런 녀자들은 별장에 있나요?》 《별장을 갖고 있는 녀자들도 더러 있겠지만 이 근처의 녀자들은 대체로 사무실겸 주택으로 쓰는 그런 집에 있어요.》 말하자면 오피스텔이다. 《드믄드믄 주문배달을 가보면 대부분 무슨 회사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달려있는데 들어가보면 대체로 아가씨 혼자 있지 않으면 같이 사는 남자하고 둘 뿐이예요. 그런데 그런 녀자들이 후에도 주문배달 해달라고 내미는 명함을 보면 대개 무슨무슨 회사의 부장이 아니면 경리라고 찍혀있어요. 말하자면 밖에 나가선 회사 직원이고 방에 들어와선 〈작은댁〉노릇을 하는셈이지요. 말하자면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격〉이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창밖으로 미니스커트 차림의 한 젊은 녀성이 50대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상점쪽으로 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저런 녀자가 바로 한국인의 〈작은댁〉이얘요.》 상점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녀자를 보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랬다. 미향이였다. 나는 내눈을 의심했다. 머리모양이나 옷차림이 판판 달라졌지만 분명 미향이다. 미향이를 한팔로 감싸안고 걸어오는 사내는 꽤나 왜소한 몸집에 키가 훌렁 크고 얼굴은 희여멀건 사람이였다. 《저 녀잔 이곳에 온지 서너달 되었는데 우리 집의 단골이예요.》 둘은 상점안으로 들어왔다. 상점주인이 깍듯이 인사하며 그들을 맞아들였다. 미향은 나를 보는 순간 놀라는 기색이더니 인차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여기서 만날줄을…》 《나 역시 미향일 여기서 만난줄은 생각지 못했소.》 미향의 곁에 선 사내가 나와 미향일 번갈아 보다가 미향에게 묻는듯한 시선을 보냈다. 《참, 소개 드릴게요. 이분은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시고 이분은 저의 회사 박사장님이세요.》 우리는 서로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눴다. 박사장이라는 사내가 실례한다면서 인차 자리를 떴다. 사내는 나가면서 미향에게 말했다. 《미스 최, 10시에 약속이 있으니 시간 장악하라구.》 《네. 시간맞춰 올라갈게요.》 미향의 말은 억양마저도 서울말씨를 닮았다. 《선생님 커피 한잔 할까요? 이 부근에 커피 잘하는 집이 있어요.》 《그러지.》 별로 기분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부근에 있는 자그마한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미향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제가 많이 달라졌지요?》 《글쎄, 겉모양이나 억양은 그 사이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젊은 녀성인 경우에 아무리 시골티가 푹배인 녀자라도 대도시에서 한달만 지내면 시골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모한다. 미향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반년 사이에 미향은 옷차림에서부터 몸가짐새, 지어는 억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직업녀성을 뺨칠 정도로 닮았다. 한국말을 빈다면 아주 세련되였다고 할가. 《회사를 옮긴 모양이던데.》 《처음에 몸담았던 그 회사는 서울의 본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옮겨 앉은 것이 지금의 회사인데 역시 무역업이예요.》 《회사직원이 얼마나 되오?》 《지금 한창 불경기여서 사장님외에 저밖에 없어요.》 둘밖에 없는 회사, 상점주인의 말대로라면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그런 회사다. 《미향인 회사에서 무슨 일을 보고 있소?》 《참, 저의 명함 드리지 않았군요.》 미향이가 꺼내주는 명함을 받아보니 거기엔 《경영경리》라고 찍혀있었다. 《어허, 경리로 승진했군그래.》 《아직은 명색뿐이죠.》 그래 맞다. 명색뿐이지. 경영경리이라 해놓곤 사장의 생활이나 보살피는 그런 《생활비서》 노릇이나 하겠지. 거친말로 표현한다면 사장의 잠자리 시중까지 들어주는 《작은댁》 노릇! 마음이 별로 씁스름해났다. 유치할 정도로 천진스럽고 솔직하던 미향이가 어쩌면 반년사이에 이렇게 완판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을가가 믿어지지 않는다. 녀자는 변신을 거듭한다지만 그 변신이 너무도 돌연적이고 빨랐다. 변신이라고 하기보다 다시 태여났다고 해야 적절할 것 같다. 녀자는 변신을 거듭한다는 말을 녀자는 태여나기를 거듭한다고 고쳐 말해야 할것같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눈을 내리깔고 커피를 홀짝이던 미향이가 고개를 들면서 침묵을 깼다. 《혹시 선생님께서 저를 〈현지처〉로 보는게 아니예요?》 내가 할 말을 미향이가 먼저 꺼내니 내 쪽이 오히려 당황해났다. 《뭘…》 《아까 우리 사장님을 보는 눈길이 다르던데요.》 녀자들의 눈치 하나만은 알아줘야 하겠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 부근엔 〈현지처〉 노릇을 하는 애들이 많아요. 그애들마저도 저를 자기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요.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얘요. 우린 결혼할 사이예요.》 미향은 잠시 말을 끊고 호 하고 한숨을 내쉰다. 나는 나대로 잠자코 담배를 피우면서 그 아래 말을 기다렸다. 미향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사장님은 제가 처음 입사한 회사 사장님이 소개해주었어요. 안해와 사별한지 5년이나 되는 고독한 분이신데 자식 둘은 미국에서 영주권을 가지고 따로 살고 있대요. 비록 나한테는 삼촌벌이 될 분이지만 전 그 분의 몸에서 묻어나는 고독하고도 우울한 분위기에 마음이 끌렸어요. 그 분도 내 몸에서 풍기는 슬픔에 가까운 그 우울함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요. 말하자면 동병상련이라 할가…》 그래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정심이고 사랑은 아니잖아. 이런 말이 있어. 동정 때문에 결혼한다는 것은 신화에 불구하다. 대부분은 안정감을 바라는 마음에서 또는 공허감을 채우자는 마음에서 그것이 아니면 그 어떤 실리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랑을 거드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결혼까지 가야할 사랑이 아니야. 지친 새는 아무데나 앉는다는 말이 있어. 삶에 지친 몸이라고 주저없이 아무데나 기댔다가는 다시 춰설수 없게 영영 지쳐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나의 입으로 나온 말은 엉뚱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는거니까. 그 선택이 좋은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오.》 《고마워요…》 이때 커피숍의 복무원아가씨가 미향한테로 다가왔다. 《손님 한분이 찾아요.》 《누군데?》 《지난번에 왔던 그 사람.》 이말에 미향의 얼굴엔 삽시에 짜증기가 내비쳤다. 그는 지갑에서 백원짜리 한 장을 꺼내 복무원에게 주며 말했다.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하세요. 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세요.》 복무원아가씨가 돈을 받아쥐고는 밖으로 나갔다. 바깥쪽을 보니 창밖에 키가 훤칠한 한 사내가 때국에 절은 양복을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누군데?》 《거지신세가 된 그런 사람이 있어요.》 우린 한참 더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못했구만. 보내준 번역료를 잘 받았소. 집사람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라더구만.》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훗일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련락주세요.》 전에는 말끝마다 도와달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도움받을 일이 있으면 련락하라고 한다. 나는 주객이 전도된다는 그 말을 실감했다. 그날 내가 미향이와 헤여져 공공뻐스 정류소로 가는데 등뒤에서 우리말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잠간만.》 뒤를 돌아보니 아까 커피숍밖에 서있던 사내였다. 아마 사내는 내 뒤를 따랐는 모양이다. 《절 불렀습니까?》 《네. 미안하지만 저하고 잠간 이야기를 나눌수 없겠습니까?》 《뉘신지?》 《미향의 남편되는 사람입니다.》 《네?!》 《어디 가서 잠간 앉으시지요.》 나는 그 사내를 따라 부근에 있는 간의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음식점엔 손님이 없었다. 사내가 절인 락화생에 북경 이과주 한병을 불렀다. 나는 잠자코 사내만 지켜봤다. 사내는  술이 오기 바쁘게 내 앞의 잔에 술을 부었다. 술 붓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자기 앞잔에다 술을 붓더니 마시자는 말도 없이 먼저 한잔 술을 단숨에 비웠다. 영락없는 알콜중독자였다.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쓱 훔치고는 사내는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보다싶이 알콜중독자입니다. 술 한잔 먹어야 마음이 진정되고 말도 제대로 나갑니다. 량해해 주십시오.》 방금 마신 술이 인차 사내얼굴에 오르고 있었다. 먼저 코등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내는 지절지절 말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난 미향이한테 할짓 못할짓 다 한 놈입니다. 내 얘기 미향이한테서 들으셨습니까?》 나는 그저 고개만 가로저어보였다. 《난 말입니다. 한때는 미향이의 백마왕자였습니다. 지금 이런 모습이지만 그땐 처녀들의 시선을 모을수 있는 츨츨한 모습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꼴이 됐습니다. 모두가 다 내 탓입니다.》 사내는 술 한잔을 벌컥 마셔버렸다. 《다 이 술과 계집 때문입니다. 거 있잖습니까 남자는 주색에 망한다는 말. 내가 바로 그렇게 망한 놈입니다…》 사내는 눈물까지 찔끔찔끔 짰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봐줄 꼴불견이 둘 있는데 하나는 녀자가 하품을 짝짝 해대는 꼴이고 다른 하나는 사내가 눈물을 찔찔 짜는 꼬락서니다. 《난 미향이 없인 못삽니다. 절 도와주십시오. 아까보니 미향이와 가까운 사이같은데 곁에서 말 좀 해주십시오. 내가 무릎꿇고 지난 잘못을 빌고 앞으로 미향이를 황후같이 모실테니까 다시 가정을 회복하라고 설복해 주십시오.》 《그건 당사자끼리 나눌 얘긴데…》 《내 말은 미향의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자식아 그 꼴 해가지고 천하에 좋다는 말 다 긁어모아 해도 들어줄 사람 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난 결심했습니다. 미향이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미향이와 함께 죽고 말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지지 않지요. 자 보십시오.》 사내는 털내의를 훌쩍 들어보였다. 바지 앞섶밑으로 쑥 찔러넣은 남포약 두 개가 보였다. 나는 벌어진 입을 한참이나 다물지 못했다. 사내가 털내의를 내리고는 또 술 한잔을 단숨에 굽냈다. 《이건 위협이나 공갈이 아닙니다. 이제 날 구제해 줄 사람은 미향뿐입니다. 지금도 난 미향의 신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술 살 돈도 미향이가 준겁니다.》 사내는 또 술 한잔을 털어넣었다. 그 꼴 보기싫고 또 말같지도 않은 말 듣기도 싫어 내가 한마디 했다. 《자네 자폭할 용기가 있나?》 《네?》 사내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자살할 용기가 있나 말이야!》 내가 술상을 내리쳤다. 술잔이 튀여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있나 말이야?》 《전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좋아.》 내가 라이타불을 켜들었다. 《털내의를 올리게.》 《네?》 《내가 그 남포약에 불을 달아 줄테니까.》 이말에 사내는 몸을 뒤로 젖히다가 걸상과 함께 벌렁 뒤로 나가 넘어졌다. 나는 라이타불을 켠채로 얼음판에 넘어진 황소처럼 눈만 꺼벅이고 있는 사내한테로 다가가 라이타불을 사내의 코앞에 대며 말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아예 이 자리에서 자폭하고 말아. 너 같은 인간은 언녕 죽은 목숨이야. 두 번 다시 죽겠다면 내가 불을 달아주지.》 사내는 후-하고 입김을 내불어 라이타불을 꺼버렸다. 《보아하니 죽을 용기는 없구만그래. 일어나!》 사내는 고스란히 일어나 앉았다. 《죽을 용기가 없으면 살 의욕이라도 가져. 조선족 사내라면 단 하루라도 사내답게 살아.》 말을 마치고 나는 음식점을 나왔다. 등뒤로 사내가 광기를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자식아 넌 대체 누구냐? 년놈들 다 죽이고 말겠다. 죽이고 말겠어…》 음식점에서 나오니 기동순찰차 한 대가 비상경보음을 울리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동순찰자는 간의음식점앞에 와서 급정거했다. 아마 간의음식점주인이 그 사내가 내보인 남포약을 보고 《110》에 신고했는 모양이다. 사내가 폭발물을 지녔으니 영락없이 잡혀갈 신세다.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130조에는 총기, 탄약, 또는 관제 도검 또는 폭발성, 가연성, 유독성, 부식성 물품을 비법적으로 휴대하고 공중장소 또는 공공교통수단에 들어가 공공안전에 위험을 미쳤고 그 정상이 엄중한 자는 3년 이하의 유기징역, 구역, 또는 관제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형법조항에 따르면 사내는 적어도 구역형은 면치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내의 몸에서 나온 것은 남포약이 아니라 남포약 겉종이로 씌운 나무토막이였다. 경찰도 너무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경찰이 나한테 물었다. 《이 사람과 어떻게 되는 사입니까?》 《그저 우연하게 만난 사람입니다.》 《함께 술을 마셨다더군요.》 《술은 저사람이 혼자 마셨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여길 들어오게 된겁니다.》 《이 사람 정신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알콜중독자는 분명한데…》 《심한 알콜중독자는 정신병환자에 속하지요.》 하긴 그랬다. 알콜중독도 정신질환에 속하니까. 《이런 사람한테는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데…》 경찰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 사내에게 일가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북경에 있는가고 물었다. 사내가 틀림없이 미향의 이름을 대려니 했는데 예상밖에도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래도 미향의 이름만은 팔고 싶지않았던 모양이다. 누굴 위협하고 공갈치려고 가짜 남포약을 가지고 다녔는가고 물으니 사내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녔다고 했다. 이 말에 경찰은 또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웃음거리가 된 사내를 같은 민족으로서 지켜본다는 것이 망신스러웠고 고역스러웠다. 같은 민족이라도 이런 구제불능 사내의 보호자로 나설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사내는 가짜 폭발물로 공중질서를 파괴한 죄로 구역당한 것이 아니라 보호자가 없는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실려갔다. 그래도 어쩐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내가 공중전화로 미향한테 자초지종을 알렸더니 미향은 칼로 자르듯이 말했다. 《그 사람은 절로 제 무덤을 파는 송장이 다 된 사람이얘요.》 혹독한 말이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서로 살을 섞으며 지냈던 사람인데… 문뜩 한 스님의 법음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녀자가 남자에게 원하는 것은…》 미향은 한국으로 시집갔다. 그가 시집가기전 나는 한국령사관앞에서 그를 만났다. 그날 나는 서울에서 열리게 되는 《문인대회》에 참가하려고 비자받으러 한국령사관을 찾아갔다. 령사관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으로 시집가려고 수속밟으러 온 녀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한 5백여명은 될 것 같았다. 나젊은 애숭이 처녀도 있었고 30대, 40대로 보이는 녀성들도 있었다. 시골티가 폭 배인 녀자도 있었고 아주 시체멋을 낸 녀자도 있었다. 대부분 결혼상대인 한국남자를 동반했다. 한국 남자들 거개 모두가 얼굴이 볕에 타서 검실검실하고 주름투성인 40대 시골 사람들이였다. 한국 남자들 대부분이 무표정한채로 서있는 반면에 녀자들의 표정은 밝았다. 껌을 짝짝 씹으며 뭔가 쉴새없이 지껄여대고 있는 30대 녀성들이 모여선 곳으로 나는 다가갔다. 대체 그들이 뭘 그렇게 신이나서 지껄여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야, 니건 어느게야?》 《저기 있잖니. 노란 잠바를 입은 사람. 저 머저리같은게 글쎄 어제 밤 내 방에 들어오겠다는걸 겨우 물리쳤다. 글쎄 아무리 위장 결혼이라도 한 번은 같이 자야 한다는게 아니겠니.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 서울 가서 보자고 윽윽 벼르드라.》 《서울 가면 넌 영낙없이 먹혔다.》 《먹히긴, 도착하자마자 내빼면 되지. 그런데 니꺼는 어느게야?》 《저기 서 있는 꺽다리다.》 《생긴것부터 싱겁구나.》 《그래도 아주 다정다감하더라. 애 아버지 아니면 한 번 살아도 괜찮을 남자더라.》 《네 남편 왔니?》 《꺽다리곁에 서있지 않니.》 《제 녀편네 내놓으면서 뭐가 저리 신나서 저러니?》 《둘이 형님 동생하는 처지다.》 《야, 넌 진짜 결혼하는거지.》 《그래.》 《어느게야?》 《저기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이다.》 《야 너무 늙었다. 완전히 할아버지구나.》 《그래도 제 나이는 45살이라더라.》 《볼바엔 제 구실도 못하겠구나.》 《말도 말라. 묵을 대로 묵은 총각이여서 그런지 매일 밤을 샐 지경이다.》 《너 복 만났구나.》 낄낄대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속이 울컥 뒤짚혀질 지경이였다. 기관총이라도 있으면 한배찜 내갈기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여기선 조선족 남자의 체면은 구겨진 감투신세인 것이 아니라 시궁창에 처박힌 신세였다. 처녀가 없어 장가를 못간다는 시골총각들의 딱한 사정을 나는 많이 들어왔다. 어떤 마을에서는 시집, 장가가는 처녀 총각이 없어 몇해째 잔치떡 구경도 못했다고 한다. 또 어떤 마을엔 처녀라곤 정신병에 걸린 처녀 한명밖에 없다고 했다. 도시와 한국에로 녀자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힘이 없는 무력하고도 무능한 조선족 남자들이 불쌍했다. 한국령사관앞에 펼쳐진 이 진풍경을 조선족 총각들이 보면 어떤 느낌을 받을가가 궁금스러워진다. 자책? 한탄? 아니면 격분? 살의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을 죽이고 싶다는 살의를 가지기에 앞서 자기가 죽고 싶을 정도로 자책부터 느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왔는지 미향이가 내앞에 나타났다. 미향이도 수속하러 왔다고 했다. 《한국 사람 그렇게 좋아?》 갑자기 내던지는 반감이 깔린 내 물음에 미향은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물음을 던지고나니 나도 하필이면 왜 그런 물음을 던졌는가고 후회했다. 미향이로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였다. 그런데 미향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좋아요.》 《뭐가?》 《다른건 몰라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 남자들보다 하루를 살아도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고 그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이 좋아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녀자가 남자에게 원하는 것은 돈이나 재물보다도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 강한 삶의 의욕이얘요. 나의 전 남편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어요. 내가 접촉면이 좁아서 그런진 모르지만 후에도 난 조선족 남자들속에서 내가 원하는걸 줄수 있는 그런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나는 조선족 남자로서의 비애를 느꼈다. 하는 일없이 놀음이나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 하늘에서 돈비가 내리려 니해서 헛된 공상에 젖어 사는 사람, 벼락맞은 소고기를 노리듯 공것만 탐내는 사람, 사내대장부라고 큰소리나 떵떵 치면서 남자구실이라곤 밤의 그 노릇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다른 민족한테는 비굴하다가도 동족은 악착스레 긁어대는 사람, 평생을 비굴하게 아첨이나 하면서 눈치밥이나 얻어먹는 사람, 지어 녀편네까지 위장결혼의 제물로 내놓는 사람, 이런 류형의 사내들이 녀자들의 눈에 비쳤다면 녀자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을가. 《한국에 시집가려고 하는 녀자들을 무턱대고 탓할게 아니얘요. 비록 각자가 목적이 다르고 혹은 수단이 비루하다 하더라도 한가지만은 명확해요. 그녀들은 지금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있으며 그 만족감을 얻으려고 탈출하는거얘요. 말하자면 만족감을 주지못하는 생활의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거얘요. 일종 욕구불만의 해소라고 생각해도 돼요.》 미향의 말에 최서해의 《탈출기》가 생각났다. 도시와 한국에로의 녀성들의 탈출, 그것은 말그대로 현대의 탈출기다. 미향은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나를 찾았다. 그는 돈 3만원을 나한테 맡기면서 정신료양원에 수용되여 있는 전 남편의 뒷바라지를 부탁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한 때는 사랑하며 함께 살아온 사람이니 그냥 모른척하고 갈수 없군요. 그 사람 월병을 좋아해요…》 미향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헤여지면서 미향은 또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미향이가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없이 미향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미향을 태운 택시가 떠나갔다. 차창을 내리고 나를 향해 손을 젓던 미향이가 소리높혀 말했다. 《선생님 사랑해요…》 그래 고맙다 미향아, 그래도 넌 나를 사랑스런 사람으로 봐주었으니… 《녀자는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빚어졌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하는 여유가 있어야 사랑을 베풀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누군가 했던 이 말로 미향에게 주는 축복을 대신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본 작품은 장백산 계열소설상 수상작(2000년)입니다.
3    [단편]《 나 + 너 =?》 댓글:  조회:1327  추천:20  2009-04-18
작가 리광수씨의 연극작품에서 한때 성황리에 공연되고 큼직한 상까지 탄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연극명이 《도시+농민=?》이다. 지난해에 있은 대학교 동창모임에서 동창생부인이 《나+너=?》란 알아맞히기 문제를 내놓았을 때 어쩔수없이 떠올린것이 리광수씨의 연극 《도시+농민=?》였다. 도시에 진출한 농민들의 희로애락을 그린 리광수씨의 연극을 보면 연극명 《도시+농민=?》의 정답이 나온다. 그 정답이 바로 《도시농민》이다. 그럼 《나+너=?》의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 지난해 가을, 대학교 동창모임이 있었다. 졸업후 15년만에 처음으로 가지는 동창모임이였다. 학교를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동창생들이 D시로 모여들었다. D시를 택한것은 최근년간에 D시에 볼만한 관광지가 많이 개발된데도 있겠지만 동창생중 가장 출세를 한 D시 부시장 한철이가 동창모임에 드는 비용을 전담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동창모임이란 대체로 첫날엔 1차부터 4차, 5차로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잔을 들며 회포를 나누고 이튿날에는 관광겸 들놀이겸 야외로 가서 개나 양을 잡아놓고 또 술을 마시고 그렇게 날마다 술에 곤죽이 되고 나면 작별의 인사를 나눌 《최후의 만찬》이 막을 올릴 때가 된다. 사흘동안 D시에서 괜찮다는 식당과 노래방, 다방, 사우나를 전전했는데 한철이는 첫날부터 동창모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말로는 갑자기 긴급회의가 있어서 성 소재지로 갔다고 했다. 하여 동창생도 아닌 한철의 부인이 남편을 대신하여 우리들과 줄곧 어울려 다녔다. 사실 어울려 다녔다기보다 열심히 안내를 맡았다는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것 같다. 수수한 용모에 성격이 활달한 한철의 부인은 시 계획위원회 과장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저녁 우리는 한철이네 집에서 개를 잡아놓고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다른 날과 달리 《최후의 만찬》에는 개개인한테 선물꾸러미가 차려졌다. 선물은 그 지방 특산물인 값비싼 송이버섯이였다. 한철의 부인은 선물을 나눠주기에 앞서 이런 말을 꺼냈다. 《방금 애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동창모임에 참가하지 못해 아주 유감스럽다고 하면서 약소한 선물이지만 달게 받아주시면 고맙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4년간 고락을 같이 하고 또 15년간 헤어져 서로 만나지 못한 동창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알아맞히기 문제 하나에 담는다고 하셨습니다.》 《알아맞히기 문제?》 동창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집약해서 담았다는 알아맞히기 문제가 대체 뭔지 모두 귀를 앙구었다. 《아주 간단한 문젭니다. 나와 너를 합치면 뭐가 됩니까? 말하자면〈나+너=?〉》 어쩐지 다시 소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글 첫머리에 밝혔듯이 나는 알아맞히기 문제를 듣는 순간 어쩔수없이 작가 리광수씨의 연극작품 《도시+농민=?》을 떠올렸다. 《잠깐만, 나와 너는 특정된 대상, 말하자면 남자와 녀자라던가 아니면 남자와 남자, 녀자와 녀자, 이런 식으로 무슨 규정이 따로 없습니까?》 누군가 이렇게 묻자 한철의 부인이 말을 받았다. 《따로 없습니다. 나와 너에는 남녀로소가 다 포함될수 있습니다. 나가 녀자이면 너는 남자가 될수도 있고…》 《알만합니다.》 누군가 한철 부인의 말을 잘랐다. 《나와 너가 합치면 남녀의 경우엔 부부가 됩니다. 남자와 남자, 혹은 녀자와 녀자 경우엔 친구가 되고 친구가 아니면 동성련이 됩니다.》 그 말에 집안은 웃음마당이 됐다. 반장이였던 남씨가 웃음마당을 수습하고 말을 꺼냈다. 《이봐, 그런 식으로 풀면 남과 녀의 경우엔 부부만 되는게 아니지. 어떤 경우엔 남과 녀가 합치면 정부가 될수도 있고 또 정사라는 답도 나오지. 이건 다 우스갯소린데 한부시장이…》 《반장님, 한부시장, 한부시장 하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구. 말끝마다 한부시장하니 회의에 참가한 기분이라니까…》 《그럼 이름을 부르지. 한철이가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알아맞히기 문제에 담았다고 하니 꼭 뜻이 있다고 보오. 내 가 보기엔 이 문제의 정답은 동창생. 동창생인 나와 너가 합치면 어디까지나 동창생이 아니겠소.》 《비슷한데…》 《정답이군 그래.》 남씨가 한철 부인한테 물었다. 《정답이지요?》 《비슷하긴 한데 정답은 아닙니다. 정답은 우립니다.》 《〈우리〉?!》 《네, 애아버지는 정답은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이께서는 지금 세상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살아가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되여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거창한 말이다.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대목이다. 맞다. 어느 책이였던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혁명가의 일생을 다룬 글인데 그 혁명가가 선각자로 되여 대중들에게 무산자들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가 나로만, 너가 너로만 있으면 힘이 안됩니다. 나와 너가 뭉치여 우리가 되면 그 힘은 막강합니다.》 이 뜻을 조선의 혁명가극 《피바다》에서는 《싸리나무 한가지는 꺽기 쉽지만 아름드리 나무는 꺽지 못하리》라고 비유했다. 《〈우리>, 그래, 우리가 정답이지.》 남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부시장, 아니 한철의 뜻을 알겠소. 우리 비록 산지사방에 흩어져 살아가는 몸이지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지 말고 언제나 더불어 함께 살아가자는 얘기군. 자 그럼 한철의 말을 이번 동창모임의 결속어로 말하자면 페막사로 삼겠습니다. 자, 우리를 위하여!》 모두들 잔을 높이 들고 《위하여》를 합창했다. 그날 《최후의 만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철 부인은 진짜《최후의 만찬》은 다른 곳에 마련되였다고 하면서 우리를 D시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호텔의 노래방으로 안내했다. 초호화판이라도 과언이 아닐상싶은 큰 홀이 《최후의 만찬》장이였다. 으리으리하다고 할가 황홀하다고 할가 북경에 살면서 노래방을 여러 곳 다녀봤어도 그처럼 잘 꾸며진 홀은 보지 못했다. 잘 꾸려진 노래방답게 이름도 《황제노래방》이였다. 한철 부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우리는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역시 벼슬은 해야 겠다.》 《이번 행사에 꽤나 돈을 쓴것 같은데.》 《시장한테 그까짓게 다 돈이야. 듣는 말에 의하면 연해지방의 자그마한 향의 향장도 하루 저녁 초대비를 몇 만원씩은 쓴다더군.》 《설마 한철이가 공금을 썼겠나.》 《이봐, 자그마한 도시의 부시장 로임이 얼마나된다고 동창모임에 몇 만원씩 척척 내놓겠나. 보나마나 시정부의 접대비를 허물었겠지.》 《공금을 쓰던 무슨 돈을 쓰던 무슨 상관인가. 우리 대접만 잘 받으면 되는거지.》 노래방에서 모두 좌석을 정하자 한철 부인이 키가 훤칠하게 큰 한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두 눈이 이상하게 크고 튀어나온 사내, 눈에 익은 모습이였다. 한철 부인은 그 사내를 우리들에게 소개했다. 《이 분은 일송정그룹의 강덕만회장입니다.》 강덕만, 그래 듣던 이름이다. 맞아, 《개구리》다. 《개구리》는 강덕만의 어릴 때 별명이다. 강덕만은 나와 한마을에서 자랐고 소학교도 함께 다녔다. 눈이 하도 크고 개구리 눈처럼 툭 튀어나온 상이여서 별명은 《개구리》였다. 중학교로 진학할 때 부모를 따라 시내로 자리를 옮긴 뒤로 나는 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몇 해전 들리는 소문엔 강덕만이가 도토리를 외국에 수출해서 짭짤한 재미를 본다고 했다. 도토리장사군이 인제는 그룹의 회장으로 되였다고 하니 어쩐지 상전벽해를 실감하는 듯한 기분이였다. 그 뿐이 아니였다. 《강덕만회장을 간단히 소개해 드린다면 강회장은 D시 기업인협회 회장이며 정치협상회의 위원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린다면 이번 동창모임에 든 경비는 강회장이 전담한것입니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강덕만회장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형님의 동창생이면 저의 형님들이고 누님들이기에 한번 모시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철이가 강덕만의 형님이란 뜻인데 강덕만은 나와 동갑이고 한철은 나보다 두살 아래다. 두살어린 한철이가 어떻게 강덕만의 형님이 됐는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즐거운 밤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가 먼저 노래 한곡 선물하겠습니다.》 강덕만이 선창으로 노래 한곡 뽑았다. 프로급은 몰라도 수준급은 될만했다. 점수가 99점이 나왔다. 《돈 먹은 소리군》 《아니지. 돈 뿌린 소리지.》 돈 뿌리며 노래방에서 다듬어진 소리라는 뜻이다. 노래를 부른 강덕만은 맥주컵을 들고 나한테로 다가왔다. 나도 엉거주춤 일어나 그를 맞았다. 강덕만이 나의 컵에다 맥주를 부으며 나직이 말했다. 《잘못보지는 않았겠는데 너 〈까마귀〉지?》 내 얼굴이 철색이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까마귀》였다. 《그럼 넌 〈개구리〉맞지?》 나와 그는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으스러지게 악수를 나눈후 우리 둘은 말없이 맥주컵을 부딪치고 단숨에 굽을 냈다. 강덕만이가 내곁에 앉으며 나직이 말했다. 《난 너를 한눈에 알아봤다.》 《나 역시. 너 그 눈 지금도 여전하구나.》 《여전하지. 너 역시 얼굴색이 그대로구나.》 《암, 그냥 〈까마귀〉지.》 우리 둘은 흔쾌하게 웃었다. 강덕만이 컵에 맥주를 따르며 물어왔다. 《지금 어디서 뭘하니?》 《북경에서 자그마한 잡지를 꾸리고 있어.》 《어떤 잡진데?》 《북경에 진출한 한국인과 조선족을 상대로 무료 배표하는 자그마한 주간지야.》 《너 어릴때부터 글쓰기 좋아하더니 글쟁이신세 면치못했구나.》 《배운 〈도적질〉이 그건데 하는수 없지.》 《언제 떠나니?》 《다른 일도 볼겸 한 이틀 더 있어야겠다.》 《그럼 오늘 긴 말 하지 않겠는데 래일 저녁 우리 만나자. 오후 5시에 차를 호텔로 보낼게.》 이튿날 오후 5시에 나는 강덕만이 보낸 벤츠 승용차에 앉아 호텔을 떠났다. 승용차는 시내를 벗어나서 개울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에 접어 들어섰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운전기사가 말했다. 《산장에 갑니다.》 《산장?》 《네. 강회장이 별장삼아 지어놓은 산장이 이 골 막바지에 있습니다.》 골짜기를 따라 포장되지 않은 길로 올라가니 숲이 우거진 곳에 층집이 나타났다. 층집 겉면은 죄다 통나무를 대서 숲이 우거진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렸다. 층집이였으니 말이지 단층집이였으면 산에서 흔히 보는 토굴막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차가 산장앞에 이르니 강덕만이 편한 운동복차림으로 나를 맞았다. 《어때 이곳이?》 《공기 좋은데.》 《너, 공기가 혼탁한 도시에서 오염에 찌든 몸이니까 산림욕이나 하라고 이곳을 정한거야.》 산장안에 들어가 보니 벽은 죄다 흙벽이였다. 토굴막에 들어선 기분이였다. 강덕만의 말로는 땅의 기를 받으며 살다가 종당에는 흙으로 돌아가는게 인간이기에 아예 흙집을 만들었다고 했다. 《흙이라는게 참 신기해. 빌딩 회의실에서 몇 사람만 담배를 피워도 그 냄새가 진동하는데 흙집에선 수십명이 담배를 피워도 냄새가 전혀 없어. 흙벽이 다 흡수해 버린다는 거야.》 산장의 벽은 흙벽으로 되였지만 내부구조는 호텔과 비슷했다. 꽤나 큰 홀이 있고 자그마한 커피숍도 있었다. 《호텔같아 보이는데?》 《그래. 실상은 호텔이지. 다만 벽이 흙벽으로 되였을 뿐이야. 나와 사업거래가 있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여길 자주 리용하지.》 산장 아래층은 크고 작은 연회장이였고 위층은 룸으로 된 노래방이였다.《산장이 아니라 완전히 유흥업소구나.》 《그래, 유흥업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런데 시내안의 그런 유흥업소와는 판판 달라.》 《첫 분위기부터 다른것 같은데.》 《분위기뿐이 아니지. 한번은 어머어마한 벼슬을 가진 사람을 여기에 모셨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뭐라고 했기에?》 《여긴 인간이 허울을 벗는 곳이라고 했어.》 《허울?》 《인간이 살아가노라면 꼭 두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남한테 보이는 모습, 다른 하나는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라나. 보이는 모습은 사회 제도적인 장치나 도덕적인 구속 등으로 어쩔수없이 허울을 쓴 모습이고 가지고 있는 모습은 가식이 없는 자연인의 모습 그대로라는 거야. 하여간 그 사람 며칠 여기서 보내면서 내가 듣기에도 모를 소리를 많이 지껄였어. 아무튼 이곳을 떠나면서 그 사람이 〈자연인이 되는 곳〉이라는 족자를 써주었어.》 《그 사람 누군데?》 《여기를 거쳐간 사람에 대해선 비밀에 부치는게 여기 계율이야.》 《비밀아지트에 온 기분이구나…》 《그래. 어찌보면 여긴 비밀아지트지. 역시 먹물 먹은 놈이 반응도 빠르고 표현력이 좋아.》 장덕만이 내 어깨를 치며 껄껄댔다. 《비밀아지트면 혹시 나 오늘 여길 들어왔다가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되는게 아니야?》 《그럴수도 있지. 여기가 맘에 들면. 하긴 내 친구 한 녀석은 아예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오늘 저녁엔 가까운 친구 몇을 청했는데 다 사업하는 친구들이야. 책만 뒤적이는 너하고는 공동언어가 없겠지만 술자리는 같이 할만한 친구들이야.》 그날 저녁 강덕만의 친구 넷이 각기 녀자 하나씩 데리고 산장에 왔다. 처음엔 부인을 데리고온 줄 알았는데 소개를 듣고 보니 그게 아니였다.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강씨가 데리고 온 녀자는 한참 잘 나가는 시 예술단의 무용배우라고 했고 부동산회사 사장이라는 허씨가 데리고 온 녀자는 어느 학원의 부교수라고 했다. 특산물회사 사장이라는 방씨가 데리고 온 녀자는 시 대외무역국의 과장이라고 했고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이 데리고 온 녀자는 가장 젊었는데 지금 한창 석사과정을 밟는 연구생이라고 했다. 강덕만이 나를 나를 간단히 소개하고는 오늘만은 나의 파트너로 되겠다고 하니 모두 버쩍 떠들어댔다. 《안돼, 동성련을 하려면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어.》 《강회장님, 오늘따라 웬일이세요? 동창생앞에서 점잔을 차리시려는 건가요? 어서 애인 부르시고 동창생에게도 파트너 하나 정해주세요.》 《이성 파트너가 없는 사람과 자리를 같이 하면 기분이 나빠. 미안합니다. 청도에서 오신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데 언제 볼라니 이성파트터가 없는 사람은 술자리에서 남한테만 신경 쓰더군요.》 《강사장님이 동창생앞에서 애인 부르기 뭣하다면 제가 대신 전화걸가요?》 《이봐요 강회장, 난 그래도 강회장을 무슨 일이나 딱 소리나게 마무리짓는 사람으로 알았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군그래. 오늘 이자리는 동창생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니오. 분위기 깨지기전에 어서 지금이라도 조처를 하시오.》 《하는수 없군. 어때 괜찮겠지?》 강덕만이 나한테 물어왔다. 그 말이 녀자 파트너 불러와도 괜찮겠냐는 말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짐짓 그 뜻을 리해못한듯이 나왔다. 《뭐가 괜찮아?》 《강회장, 그런 물음이 바로 부질없는 물음이라는거야. 이 세상에 녀자 마다할 남자 어디 있나. 중도 고기맛을, 허, 이건 적당한 비유가 아닌데. 실례했습니다.》 부동산회사 허사장이 나한테 고개를 굽석했다. 《알았어.》 강덕만은 내 잔등을 한번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술 두어순배 돌리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데 강덕만이 아가씨 하나 데리고 들어왔다. 키가 늘씬한 미모의 아가씨였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모델같은 아가씨였다. 《여기 지배인이야.》 아가씨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나한테 인사했다. 《향단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허사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춘향전에서 나오는 향단이가 방자님을 모시려고 모처럼 오셨구만. 자 어서 오늘의 방자님곁에 앉으시오. 그런데 강회장은?》 《좀 있다 오니까 자 술이나 들지.》 술이 돌고 화제도 돌고 돌아 사업얘기로 부터 시작한 화제는 시공간 제약을 받지않고 세상만사를 모두 망라시켰다. 술좌석에서 세계를 일주한다는 말이 있다. 하문특대밀수사건, 클린톤대통령 추문, 조선반도 남북 정상 상봉 등 굵직굵직한 세계적인 사건들이 거론되다가도 어느 녀배우의 사생활이 내비치기도 하고 타이슨, 로나왈드, 쵸단 등 스포츠계의 명인들을 제 조카처럼 다루다가도 어디서 얻어들은 남녀간의 정사를 다룬 싸구려 유머를 되옮기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도 했다. 장만덕이 불러온 파트너는 시 검찰원에서 사업하는 30대 초반의 녀자였는데 말수가 적은 편이였다. 내 곁에 앉은 향단이는 화제에는 끼우지 않고 부지런히 나의 잔만 쳐주었다. 술이 좀 거나해지자 내 호칭도 《북경 선생》이던것이 《북경친구》가 돼버렸다. 《북경친구, 나 하나 물어볼것이 있는데 왕보삼이 진짜 자살한거요?》 제지업을 하는 최씨가 물어왔다. 《자살했다고 자니까 자살한거겠지.》 《그런데 풍문엔 다른 말이 돌더구만.》 《난 그런 뒷골목 소식엔 흥미가 없소.》 《왕보삼, 듣던 이름인데요. 티베트에서 현위서기를 했다는 그 사람인가요?》 무역회사 강사장의 파트너인 무용수가 물었다. 《이사람아, 자넨 춤만 추다나니까 세상 돌아가는덴 아주 까막눈이군그래. 티베트에서 현위서기를 했다는 사람은 인민의 충복으로 추대받는 공번삼이고 왕보삼은 북경시 부시장을 했던 탐관이야.》 강사장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름 마지막 자가 다 삼으로 끝나니 헷갈리네요.》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의 파트너인 석사연구생이 화제에 끼여들었다. 《지금 항간에 도는 말이 하나 있는데 탐관들은 〈낮에는 공번삼을 따라 배우고 밤에는 왕보삼을 따라 배운다〉더군요.》 《이건 아주 탐관들에 대한 신랄한 풍잔데.》 《그럼 우리도 지금 이시각 왕보삼을 따라 배우는게 아닌가? 하하하…》 최사장이 파트너인 석사연구생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부동산 회사의 허사장이 그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이사람아, 우릴 왜 탐관들과 같은 위치에 놓는가 말이야. 왕보삼을 따라 배우는건 어디까지나 탐관들이고 우리는 말이야 열심히 벌어서 열심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지.》 이렇게 화제가 탐관들에 대한 얘기로 옮겨졌다. 《지난해 회뢰죄로 감옥에 간 시 공상국 국장 있잖아. 그 녀석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내가 직접 들었는데 우리 사업가들한테서 발가낸 돈을 전부 로무비라고 하더군. 나 참, 한심해서. 우리 회사 청사 착공식에 온걸 내가 만원을 찔러줬는데 그 돈을 뭐라고 했는지 아나. 착공식 테프를 끊은 로무비라고 하더군.》 특산물회사 방사장의 말이였다.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이 말을 받았다. 《나 말이야. 지난주에 광주에 갔다왔는데 지금도 거기 탐관들은 우리 사업가들을 노복으로 보고 있더구만. 광주 무역국의 과장깨나 한다는 녀석이 날 접대했는데 그 녀석과 같이 온 두 사람이 각기 〈007가방〉을 들고 서있더군. 첨엔 비서아니면 수하 직원이겠거니했는데 그게 아니더군. 알고보니 둘 다 우리같은 사영업자였어. 그날 연회비용이 5만원 나왔더군. 별로 먹은것이 없었는데. 2차로 룸살롱 같은데 갔는데 아가씨 열두명을 불러들여서 라체쇼를 벌이게 하더군. 상상 해봐.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아가씨들이 알몸으로 쇼를 벌이고 술 권하고 춤추는 그 광경을 말이야.》 《군을 뗐겠군 그래.》 《군을 뗐다는게 뭐야. 난 아주 기가 질려버렸어. 그날 팁만해도 2만원 가량 나왔는데 그날 돈을 누가 물었는지 알겠나. 〈007 가방〉을 들고 대기하던 사영업자들이 물었지. 이튿날 사업관계로 두 사영업자를 만났는데 거기선 그게 류행이래. 공직에 있는 자가 공금으로 유흥비를 물면 인차 탄로가 나기 때문에 깨끗하게 사영업자들의 등을 처먹는다는거야. 그것도 현금으로 깨끗이 결산을 끝낸다는거야. 그 녀석들의 말로는 공직에 있는 자들이 사영업자들을 좋아하는것은 사영업자들이 현금 동원력이 있어서 그런다는거야. 하긴 개체경제의 중요 특징이 현찰이니까.》 무역회사 강사장이 어이없는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면서 말했다. 《거긴 아직도 초급단계군그래. 지금 어느 때라고 사업가들을 노복으로 부려먹어. 지금은 말이야. 우리가 상전이 된 시대야.》 부동산회사 허사장이 그 말을 받았다. 《맞아. 우리도 한때는 그런 처지에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시 공안국 국장있잖아. 지금은 사석에서는 날 형님이라고 한다니까.》 그말에 강덕만이 어깨를 추스르며 한마디 껴들었다. 《부시장도 지금은 사석에서 날 형님이라고 한다니까.》 이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부시장인 나의 동창생 한철을 형님이라고 하더니 하루 사이에 그가 동생이 됐다. 《강회장, 그런데 왜 강회장은 공석에서는 부시장을 형님이라고 하나?》 허사장이 바투 들이댔다. 《그거야 체면을 살려주는거지. 진짜야. 사석에서는 날 형님이라고 한다니까. 워낙 내 나이가 두살우이니까. 지금이라도 내가 오라고 하면 30분내로 온다니까. 지금 불러볼까?》 이말에 내가 강덕만의 귓전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한철이는 회의하러 성에 갔다고 하던데.》 강덕만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이 고지식한 사람아. 한씨는 회의간게 아니라 너들 동창생들을 피한거다. 왜 피했는지 알아? 동창생들이 모이면 술을 마셔야겠고 노래방 가야겠고 하니 우정 피한거다. 이 쪼고만 시내에서 부시장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니. 한씨는 공개 영업을 하는 식당이나 노래방은 죽어도 안가. 뭐 말마따나 형상유지라나.》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이 강덕만을 꼬드겼다. 《강회장, 그럼 부시장을 한번 불러보라니까. 진짜 30분내에 오는가보자구. 우리도 강사장의 동원력을 한번 확인하고 싶어.》 《오면 어쩌겠나?》 《오늘 드는 비용 내가 전담하지.》 《오케!》 강덕만은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쳤다. 전화는 곧바로 이어졌다. 《나 덕만인데 여길 오라구. 알만한 친구들이지. 그래, 인차 와.》 나는 쇼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덕만이 좌중에 한마디 주의를 주었다. 《여럿이 모인 자리니 한씨가 오면 깍듯이 대해주길 바라네. 나도 그렇게 하겠지만.》 이 말에 사장들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진짜 30분만에 한철이가 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저으기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되여 이런 자리에 참석했느냐는 눈빛이였다. 그 눈빛을 읽고 강덕만이 나를 가리키며 한철에게 말했다. 《형님, 수길인 나와 소학교때 동창생이요.》 강덕만의 말에 나는 또 한번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동생이 됐던 사람이 또다시 형님으로 둔갑한것이다. 한철이가 술 한잔 나에게 권하며 말했다. 《동창모임에 참가못해서 미안하네. 자 술 한잔 받게.》 나는 술잔을 받으며 물었다. 《언제 왔나?》 《오늘 저녁차로 도착했네.》 그 말에 강덕만은 나한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뜻인것 같다. 한철이가 오자 술판 분위기가 아주 따분하게 바뀌였다. 한철이가 사장들에게 사업이 잘 되느냐, 무슨 애로사항이 있느냐, 앞으로의 타산은 어떤것이냐 하는 식으로 물으면 사장들은 아주 경직된 자세로 일일이 대답을 올리는것이였다. 술판이 아니라 사업회보를 받는 장소같았다. 한철이가 오기전만해도 《지금은 우리가 상전이 된 시대》라고 목에 핏줄을 세우던 무역회사 강사장은 한철이를 개여올렸다. 《저는 중국 전역을 거의 돌아다닌 사람인데 한부시장처럼 우리같은 사영업자들과 무랍없이 어울리는 령도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사영업자들을 이붓애비 자식처럼 생각하는 령도들이 많고도 많습니다. 그런 령도들은 시장경제 안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영경제도 사회주의경제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아닙니까.》 한철이도 듣기가 난감했는지 화제를 바꾸자고 했다. 그러나 술판은 한철이가 오기전처럼 떠들썩하지 못했다. 강덕만은 2층에 있는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한철은 급히 쓸 자료가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산장을 떠났다. 한철은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떠나기전에 함께 식사라도 나누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나는 건성으로 시간을 내보겠다고 했다. 한철이가 떠나가자 그자리에 있던 사장들과 함께 온 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앓던 이를 뺀것 같다고 했다. 《내가 왜 자리를 옮기자고 했는지 아나? 한씨는 노래방이라면 영 질색이야. 목을 매여 끌어도 안 가는 사람이거든.》 강덕만의 말이였다. 《음치겠군.》 《아니야. 노래를 얼마나 잘한다구. 그러나 딴 사람이 있으면 절대 노래방에 안가.》 《그럼 그것도 형상유지를 위한것이겠군.》 《그렇다고 봐야지. 그러니까 2차로 자리를 옮깁시다 하는건 한씨한테는 일종의 축객령이지. 자 분위기를 다시 살려 보자구.》 《분위긴 한번 깨지면 끝이야. 다른 분위기를 잡아봐야지.》 무역회사 강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갔나?》 강덕만이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분위기 잡을 시간이 됐구만. 그럼 각자가 알아서 분위기들 잡아보라구.》 사장들과 그들과 함께 온 녀자들은 나하고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끼리끼리 나가버렸다. 강덕만이 자기 파트너한테 귀속말로 뭐라고 몇 마디 하니 강덕만의 파트너는 나의 파트너와 함께 나가버렸다. 그들이 나가자 강덕만이 술을 부으며 말했다. 《술 한잔 더 하지.》 《인젠 그만 하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해난다.》 《그럼 그만하지. 》 《좀 있다 향단이가 널 객실로 데려갈게다.》 《나 절로 가겠으니 방 번호만 알려달라.》 《너 혼자 못가. 길을 모르니까.》 《길을 모른다는건 무슨 뜻이야?》 《이 본채에는 객실이 없어. 손님방은 이 주변에 널려있는데 첨 오는 사람은 절로 찾아가기 힘들어. 더군다나 밤에.》 잠시후 향단이가 왔다. 나는 향단을 따라 산장을 나왔다. 향단을 따라 숲속에 난 길을 따라 5분가량 걸으니 아담한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났다. 한국 민속촌에서 보았던 그런 전통적인 민가였다. 《겉모양은 전통적인 민가로 꾸렸지만 안은 호텔방과 다름이 없어요.》 향단은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에 침실이 달린 방이였다. 실내장식은 북경의 호텔수준에 준하면 3성급 호텔의 손님방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응접실 한구석에는 자그마한 찬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각가지 모양의 술병이 얹혀있었다. 대부분 양주병이였는데 값비싼것이였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전화하세요. 그럼 좋은 밤이 되십시오.》 향단이는 곱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술이 과했는지 머리가 욱신욱신했다. 목욕하려고 화장실 문을 열던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번 했다. 화장실에는 금방 샤워를 마친 미모의 아가씨가 타월만 걸친채 거울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놀란김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나에게 미모의 아가씨는 미소를 날려왔다. 《아가씨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댔다. 《연이라 해요. 강회장님이 저보고 선생님을 모시라고 했어요. 어서 목욕하세요. 제가 등을 밀어드릴게요.》 얼결에 나는 화장실 문을 닫아버렸다. 소파에 앉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타월만 걸친 아가씨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술 한잔하시겠어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가씨가 포도주 한 병과 술잔 두 개를 들고 다가온다. 아가씨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 몸에 걸친 타월이 몸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튕기면 소리라도 날 듯이 탄력있는 피부가 눈이 시도록 희다. 아가씨가 마이다 남은 포도주를 자기 가슴에 천천히 붓는다. 우뚝 솟은 내두산 사이로 깊게 패인 골짜기를 따라 분홍빛 물이 흘러내려 은밀한 숲속으로 숨어든다…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이 환각으로 잠깐 펼쳐졌다가 사라졌다. 아가씨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었다. 나무 잎새로 하늘의 별이 보였다. 나는 어떻게 방을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비로소 날숨이 시원하게 나왔다. 문득 강덕만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여긴 인간이 허울을 벗는 곳이라고 했어》 이제야 그의 말뜻을 알만했다. 그리고 여기를 다녀갔다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가진 분이 족자에 남겼다는 《자연인이 되는 곳》이란 글의 함의도 알 것 같았다. 강덕만의 말대로 여기가 인간이 허울을 벗는 곳이라면 나는 허울을 벗지 못한 사람이다. 아니, 아예 그 허울을 벗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자연인》이 되기를 거부해서일가, 아니면 내가… 《북경에서 산다는 녀석이 촌놈들보다 더 촌스럽구나. 이제보니 넌 사내가 아니야.》 방에 있던 아가씨가 전화로 알렸는지 강덕만이 와서 나한테 던진 첫마디였다. 《여길 거쳐간 사람들은 다 그런 서비스를 받니?》 《나름에 따라.》 《여긴 산장이 아니라 사창굴이구나.》 《그런 단어는 함부로 쓰는게 아니야. 말도 〈아〉하기 다르고 〈어〉하기 다르잖아. 례들면〈자연인이 되는 곳〉,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니.》 《여긴 〈자연인이 되는 곳〉인게 아니라 〈타락의 함정〉이라고 하는게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지금은 타락이라는 말을 안 써. 인간답게 산다고 해. 더 유식한 말을 쓰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고 해.》 《그건 언어도단이야.》 《그만두자. 쟁론해 봤댔자 먹물이 안든 내가 너의 상대도 안되니까. 그건 그렇고 넌 생리적으로 문제가 있는게 아니야? 말하자면 고자? 하하하…》 《웃기지 마. 부부금슬 좋기로 북경판에서 소문이 짜해.》 《소박맞아 쫓겨난 아낙네처럼 밖에서 어정거리지 말고 들어가서 술이나 먹자. 색은 싫어도 술은 마다하지 않겠지?》 《방에 아가씨가 있으면 안 들어가.》 《너 혹시 녀자공포증이라도 있는게 아니니? 아까 그 아가씨가 그러던데 너같은 손님은 처음 본다더라. 혹시 우주인이 아닌가 하더라. 하하하…》 방에 들어가니 아가씨는 어느새 자리를 피했는지 없었다. 우리 둘은 양주 한 병을 따서 마시면서 밤을 밝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강덕만에게 부시장인 한철이와의 이상한 관계에 대해 물었다 《너들은 이 좌석에서는 동생이 됐다 저 좌석에서는 형님이 됐다하는데 대체 무슨 관계니?》 《말그대로 관계지. 지금 관계라는 자체가 바로 일종의 생존수단이지. 그것도 아주 중요한 수단이지. 그것뿐이 아니야. 먹물이 든 너는 잘 알겠지만 지금 관계는 생존수단 차원을 넘어서 관계자본이 됐어.》 《관계자본? 나한테는 생소한 단언데.》 《글만 파먹고 사는 너한텐 별로겠지만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관계, 특히는 공직자들과의 관계는 필수적인 자본이지. 외국의 자본가들은 말이야. 가지고 있는 자본을 담보로 가치증식을 실현하지만 우리같은 사영업자들은 대체로 관계를 통해 그 가치증식을 실현하는게 지금 중국의 현실이야. 말하자면 중국특색이 있는 가치증식 현상이라고 할가…》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중국에서 치부한 사영업자들을 보면 대체로 빈털터리로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본이라곤 회전이 빠른 머리 하나 밖에 없다. 그래서 치부의 지름길을 찾은것이 바로 관계망 구축이였다. 관계망을 통해 대부금을 타내고 또 관계망을 통해 좋은 대상을 차지하고 관계망을 통해 탈세루세하고, 하여간 관계는 강덕만의 말마따나 가치증식을 실현하는 중국 특유의 현상이다. 《 그 뜻을 좀 알것같은데 한국의 류행어를 빈다면 한마디로 정경유착이구나.》 《그래 정경유착이지. 하긴 지금 정경유착을 권력과 돈의 공존관계, 말하자면 권력과 돈의 결탁으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아. 기실 정경유착이란 좋은 단어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말고 그 뜻을 정치는 경제를 떠날수 없고 경제는 정치를 떠날수 없다고 해석하면 좀 좋으냐.》 강덕만이가 정치와 경제의 상호 의존관계로 정경유착을 듣기좋게 풀었지만 정경유착은 어디까지나 부패현상이다. 정경유착은 어디까지나 서로 주고 받는 관계다. 누군가 정경유착은 무형자산과 유형 자산간의 교역이라고 했다. 권력자가 가지고 있는 무형자산에는 대부금 담보라던가 대상선정, 입찰 결정 권리, 전매특허권, 독점경영권 등등이 있지만 권력자가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무형자산은 국가기관의 신용과 권리이다. 그러한 무형자산을 돈을 사서 국가소유가 아닌 개인 소유의 유형자산으로 만드는것이 바로 회뢰자들이 노리는 목적이다. 《난 사업가는 아니지만 가끔 귀동냥해서 얻어들은 말인데너들 사업가들속에서 지금 이런 말이 류행이더구나. 〈국가간부는 사업가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무형자산이다〉》 《그 말 맞지. 그 말 나쁘게 해석해서는 안돼. 국가간부의 정확한 지도밑에서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한다고 해석하면 얼마나 듣기 좋니.》 《너 진짜 달변이고 궤변인걸 보니 어디서 많이 얻어들었구나.》 《나 비록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어도 사회대학은 몇십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거야. 날 우습게 보지 마. 사회생활에서 난 박사정도는 될거야. 참, 내가 너한테 명함을 주지 않았구나.》 강덕만이 넘겨준 명함장 뒷면엔 겸직한 직무명이 꽉 차있었다. 교육학원 명예학장, 체육인협회 명예회장, 장애자협회 명예회장, 문학예술련합회 고문, 사회발전기금회 명예회장, 21세기 발전전략 연구회 명예회장… 눈이 어지러워났다. 《다 돈 주고 산거겠구나.》 《돈 주고 산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에 환원한 재부에 대한 평가라고 봐야지. 그런데 너 나와같은 사영업자들을 보는 시각이 좀 이상하다. 그런 시각에서 우릴 평가하면 넌 시대의 락오자야. 우릴 무시하지 마. 어느 한 지구를 상대로 낸 통계인데 부자들중 98%가 사영업자들이야.》 《나도 신문에 실린 그 통계를 봤어. 부자들중 70%가 농민출신이고 그 중 70%가 소학교 문화정도밖에 안된다고 했더구나.》 《그건 다 예전의 낡은 관념으로 정한 문화수준이야. 지금의 시각으로 대학을 론하면 청화대학도 대학이고 사회도 대학이야.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청화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회대학을 나왔다고 봐야지.》 궤변같은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졸음이 왔다. 그런데 강덕만은 말할수록 더 신이 나는 모양이였다. 내가 련거퍼 크게 하품을 하자 강덕만은 말을 거둬들였다. 《오랜만에 정치경제학을 풀어봤구나. 어때, 이만한 리론수준이면 어느 대학의 연단에도 나설만 하지. 하하하…》 《그래, 그 수준이면 인민대회당에서 국가 지도자들에게 강연할만도 하겠다.》 《지도자들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경제에 대해서 진짜 아는 지도자가 별반 없어. 말로는 입버릇처럼 시장경제요, 경제전략이요 하며 떠벌리고 있지만 사실은 경제에 대해서 문맹과 다름없어.》 지도자들에 대한 화제가 새롭게 시작될가바 나는 이젠 좀 자야겠다고 옷을 벗었다. 《그래. 혼자 잘 자. 아가씨를 내쫓은걸 후회하지 말고 으흐흐…》 강덕만이 껄껄대며 나가버렸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텔레비죤을 켜니 D시 텔레비죤방송국의 아침뉴스가 나왔다. 시에서 렴정건설 좌담회를 열었다는 아나운서의 소개가 있은후 화면엔 회의 장면이 나왔다. 한철이가 한창 연설하고 있었다. 《…지금 일부 지도간부들 중 유행되고 있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 말인즉 이러합니다.〈권력을 행사하되 도를 넘기지 말고 선물은 받아도 뢰물은 받지말며 녀자는 좋아해도 조강지처는 버리지 말라.〉 일부 지도간부들은 이 말을 지도간부 자리를 지키는 일종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민의 충복으로 되여야 할 사람이 이런 말을 좌우명으로 삼으면 되겠습니까. 저의 좌우명은 이렇습니다. 인민이 준 권력은 인민을 위한 사업에 쓰고 돈은 로임외엔 받지 않으며 녀자는 안해외엔 왼눈도 팔지 않는다…》 듣는 사람들이 열렬히 박수치는 장면이 한참 나왔다. 옛날에도 벼슬한 자에 대해 네가지 부류로 나누었는데 첫번째 부류는 백성을 사랑하고 덕정을 베푸는 자이고 두번째 부류는 덕정을 베풀지 않아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절대 하지 않는 자이며 세번째 부류는 작은 득실은 챙기되 나쁜 짓은 하지 않는 자이고 네번째 부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리속만 챙기는 자이다. 《권력은 인민을 위한 사업에 쓰고 돈은 로임외엔 받지 않으며 녀자는 안해외엔 왼눈도 팔지 않겠다》는 한철은 첫 부류에 속한다고 봐야 할것이다. 내가 북경에 돌아온 후 강덕만이 출장길에 북경을 거쳐가면서 문안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술 한잔 사겠다고 하니 그럴 겨를이 없다면서 언젠가는 머리도 쉬울겸해서 가족동반하여 북경에 오겠으니 그 때 시간을 넉넉이 잡고 만나자고 했다. 겨울방학에 안해가 애를 데리고 목단강에 있는 친정집으로 간지 며칠 안되여 강덕만이 기별도 없이 문득 북경에 나타났다. 급히 떠나다나니 혼자 왔다고 했다. 《호텔에 들것없이 우리 집으로 가자. 나 혼자 뿐이야.》 《마침 잘 됐구나. 나도 호텔에 들 생각이 없었어. 호텔은 사람들이 북적대니까 귀찮기만 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 거처를 정한 강덕만은 일주일이 되여도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출근하면 강덕만은 혼자 집에서 텔레비죤이나 VCD를 보면서 날을 보냈다. 머리나 쉬울겸 북경에 왔다고 해서 그런가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좀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강덕만은 밖엔 전혀 나가지 않았고 집에 전화도 치지 않았다. 그를 찾는 전화는 한통도 없었다. 전화련락을 아주 끊어버린것 같았다. 저녁에 퇴근하면 강덕만이 저녁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엔 그냥 술이였다. D시에 갔을적만해도 강덕만은 여유작작한 모습으로 궤변같은 소리를 탕탕 쳐댔었는데 그런 도고한 모습을 찾아볼수 없었다. 풀이 죽은 모습이였다. 술상에서 꺼내는 화제는 거이다 시시껄렁한것이였다. 술 마시면서 가끔씩 한숨을 토해내는것이 여러번 내 눈에 잡혔다. 무슨 사연이 있는것 같아서 한번은 직방 물었다. 《너 무슨 고뇌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뭐 없어.》 강덕만은 말끝에 가벼운 한숨을 달았다. 《너 그 대답이 아주 맥빠진걸 보니 꼭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가본데.》 《하긴 사연이야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지.》 《그런데 내 느낌으로는 네가 가지고 있는 사연은 보통 사연이 아닌것 같은데. 혹시 너 머리 쉬우려 온게 아니고 피신온게 아니니?》 이 말에 강덕만이 발끈했다. 《야, 내가 뭐 죄인이라고 피신다녀? 네 눈에 내가 그렇게 밖에 안 보여?》 《너 왜 흥분하는거야? 까놓고 말하지. 너 북경에 와서 밖은 왜 안 나가는거야? 그리고 전화통화는 한번도 없고. 회장이면 하다못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라도 알아봐야 할게 아니야.》 《너 지금 나한테 축객령을 내리는거니?》 《난 그저 네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일을 알고 싶을 뿐이야.》 강덕만은 말없이 술만 연거퍼 입에 털어 넣었다. 《술 그만해라. 몸 상하겠다.》 《오늘 취하고 싶구나. 미안하지만 오늘 술동무해달라.》 술 한병 다 비운후 강덕만이 내 앞에서 실사정을 털어놓았다. 《역시 네 눈이 날카로워. 네 짐작한대로 난 지금 피해 다니는 몸이야.》 강덕만은 차 밀수에 손을 댄지 오래 됐다고 한다. 몇해전 차 밀수를 시작할 때 시 정부에서는 지방의 세금수입을 늘이기 위해 차 밀수에 푸른등을 켜주었다고 한다. 차 한대당 입경비를 만원만 내면 그냥 차 패쪽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후에 국가해관총국에서 조사조가 내려오고 성 검찰기관이 조사에 개입된후로는 차 밀수가 즘즘해졌다고 한다. 강덕만이도 한동안은 차 밀수에서 손을 뗐다가 지난해에 다시 손을 댔는데 그것이 들통났다는것이였다. 승용차 한 두대면 몰라도 건설업체에서 쓰는 대형 트럭이 십여대라고 하니 걸려도 크게 걸렸다. 밀수사건으로 판정이 나면 강덕만뿐이 아니라 거기에 개입된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정부 관련 부서와 회사측은 트럭은 밀수로 들여온것이 아니고 상대측 회사가 물어주어야 할 무역거래액을 차로 변상하여 보낸것이라고 서류를 꾸미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동안 조사를 피해 어디가서 숨어있으라는 권고가 있어 강덕만은 나의 집을 피신처로 택했다고 했다. 《너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구나. 비호죄, 은닉죄, 또 무슨 죄명이 있더라…》 《너한테 련루되게 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어. 넌 모른다고 하면 다야. 사실 너한테 비밀로 지키려고 했었는데 네가 너무 캐묻는 바람에. 오늘 내가 말 안한셈으로 치자. 너도 아무 말도 못들었고.》 그 후 며칠이 지난후 강덕만이 장거리 전화를 한통하겠다고 했다. 《너 이제보니 휴대폰도 없구나.》 《내 휴대폰 번호는 검찰기관에 체크돼서 집에 두고 나왔어.》 내가 저녁상을 차리는 사이에 강덕만은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조용조용 말하던 강덕만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나만 불구덩이에 밀어넣고 너들은 싹 빠지겠다는거야? 뭐라구? 한 사람의 작은 희생으로 여럿을 구한다? 개소리치고 있네. 너 똑똑히 알아둬. 나 혼자 무덤을 판게 아니야. 무덤은 함께 판것이니까 무덤에 들어가는것은 나뿐이 아니야. 너를 비롯해서 여럿이지. 그러니 내가 묻힐 무덤은 합장무덤이 될거다. 그래 나 지금 흥분하고 있다. 좋다, 조용히 네 말 먼저 듣겠으니 말해봐.》 강덕만은 한참이나 말없이 상대방의 말을 한참 듣기만 하다가 《그래 알았다. 내 생각해 보구.》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 생겼니?》 《나 원 기가 막혀서, 나 보고 자수하라는거다.》 《누가?》 《부시장이.》 《한철이가?》 강덕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한철이와 통화했니?》 《그래, 그 녀석이 하는 말이 대형 트럭은 상대측 회사에서 물지못한 무역거래액을 변상한것이라고 일단 일을 마무리 했는데 벤츠 승용차 네대만은 안된다는거야. 그 녀석이 하는 말이 내가 희생양으로 나서 달라는거야. 뒷일은 자기가 다 처리하겠대.》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내 입만 터지면 여럿이 함께 무덤으로 갈수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자수하면 기껏해야 유기형 1년에 집행유예 1년정도 될거니까 나보고 희생양이 돼달라는거야.》 《너들 관계는 대체 무슨 관계냐?》 《좋게 말하면 〈한 전호속의 전우〉이고 듣기싫은 말로 표현하면 〈한 도적배에 오른 해적〉이지.》 그날 밤 강덕만은 한철이를 《한 전호속의 전우》로 아니, 《한 도적배에 오른 해적》으로 만든 경과를 피력했다. 사영업자가 가장 필요한것은 돈이다.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강덕만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먼저 대부금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래서 구축한것이 관계였다. 소학교나 겨우 나온 강덕만이 부시장에게 접근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관계를 구축하는데는 상대방의 처와 자식, 친척을 통하는 지름길이 있었다. 그래서 돌파구로 잡은것이 한철의 처였다. 지금 유행어로 《일 잘하는 놈 말 잘하는 놈보다 못하고 말 잘하는 놈 불어대는 놈보다 못하고 불어대는 놈 아첨하는 놈보다 못하며 아첨하는 놈 찔러주는 놈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돈을 그냥 찔러주면 받지 않을가 싶어 강덕만은 회전이 빠른 머리를 굴렸다. 강덕만은 우선 한철의 처를 마작판으로 끝어들였다. 한철의 처는 워낙 허영심이 많고 놀음을 좋아하는 녀자라고 했다. 처음엔 놀음삼아 그냥 노는척하다가 나중에는 돈을 걸었는데 번마다 강덕만은 미리 짜고들어 그냥 져주었다. 한철의 처가 돈을 따게 되면 《재운이 트면 관운도 튼다》는 말까지 개여올리는것을 잊지 않았단다. 강덕만의 말로는 《고기는 미끼만 보지 그 속에 낚시가 든줄 모른다》는 것이다. 두번째 절차로 선물공세를 들이댔다. 선물도 그저 사 들고 가는식이 아니였다. 화초를 기르기 좋아하는 한철의 처에게 강덕만은 시가로 만원되는 군자란을 선물했다. 그리고는 이튿날 수하 직원을 한철이네 집으로 보냈다. 그 직원은 군자란 소장가로 자처하면서 세상에 보기드믄 군자란이니 한철의 처에게 군자란을 팔라고 했다. 값은 부르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한철의 처는 10만원을 받고 그 군자란을 팔았다. 실로 강덕만의 수완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받는 자도 마음 편히 받게 하는것이 지금의 회뢰기교라고 했다. 강덕만은 지금 세상엔 가능하지 못한 일이 없다고 했다. 례들면 뱀이 코끼리를 삼키는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다음 전략은 일가 친척들을 회사에 받아들이는것이였다. 적어도 부장직에 앉혀놓고 하는 일 없이 로임과 장려금을 꼬박꼬박 받게 했다. 한철의 아들이 외국류학에 드는 담보금과 학비, 그리고 생활비용을 강덕만이 전담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강덕만은 한국에 있는 한철의 삼촌이 돈을 대주는것으로 만들었다. 항일전쟁 때〈곡선구국〉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강덕만은 관계구축에서〈곡선관계〉라는 새 단어를 발명해 냈던 것이다. 조선말 속담에 〈곁을 쳐서 속을 울린다〉란 말이 있다. 강덕만이 노린 효과가 바로 그것이였다. 〈곁〉을 부지런히 쳐대니 나중에는 〈속〉이 울렸다는것이다. 한철의 말 한마디에 대부금을 쉽게 타내올수 있었고 한철이 싸인한 쪽지 한장으로 쉽게 돈을 벌고 리윤이 많은 대상을 입찰할수 있었다. 강덕만의 좌우명이 바로〈돈을 벌려면 간부를 움직여라〉이다. 《너하고만 하는 얘기니까 너 알고 나 알고 하늘이 안다고만 생각해라. 한철의 말대로 기껏해야 유기형 1년, 그것도 집행유예 1년을 마치면 다시 사업을 시작할수 있을거고 한철이와의 관계도 그냥 남아있으니 재기가 빠를거야. 한철 그 녀석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할 감이야. 그러니 한철이와의 관계에 대해선 절대 비밀에 부쳐달라. 혹시 그 녀석이 아예 발뺌을 해서 날 아주 지옥에 처넣으면 너 글로 써서 세상에 알려라. 하긴 그럴 녀석은 아니지만 정치하는 놈 량심 개 떼줬다는 말이 있지 않니. 만일을 대비해서 하는 말이다.》 아주 유언같은 말이였다. 강덕만의 치부비결을 들으니 갑자기 한철의 처가 한철을 대신해서 동창모임에서 내놓은 알아맞히기 문제가 떠올랐다. 《너+나=?》 이 문제를 강덕만과 한철의 관계에 적용한다면 어떤 답이 나올가? 그래서 이 알아맞히기 문제를 강덕만에게 냈다. 《나와 그 녀석을 합치면 뭐가 되냐 말이지. 보나마나 관계지.》 《그건 정답이 아니야.》 《그럼 한국의 유행어를 빈다면 〈정경유착〉이겠지.》 《그것도 정답이 아니야.》 《그럼 무엇이 정답이야?》 《부패야! 부패!》 강덕만은 쓰게 웃기만 했다. 한달이 지난후 강덕만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수했기에 벌금 60만원을 내고 감옥행은 면했다고 하면서 한철이가 시장으로 승진했다고 했다. 그러곤 강덕만은 이런 말을 했다. 《지난번에 너 알아맞히기 문제를 냈었지. 네가 말한 그 문제 정답이 맞지않아. 정답은 말이야. 나+너= 공존이야. 공존!》 그 말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2001년 6월 18일 북경에서 탈고*본 작품은 도라지 2001년 문학대상 수상작입니다.
2    [단편] 또 하나의 나 댓글:  조회:2058  추천:36  2009-04-18
나는 가끔 《또 하나의 나》를 들여다 봅니다. 《또 하나의 나》는 팔자가 한껏 늘어진 놈입니다. 이놈은 어항의 맑은 물 가운데 비죽이 솟아오른 조그마한 섬우에 웅크리고 앉아 물속에서 노닐고 있는 열대어를 멀거니 들여다 보면서 나처럼 그 어떤 명상을 떠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 곁에는 새파란 껍대기를 등에 인 애기손만큼한 자라가 그 뭣과 근사하게 생겼다는 대가리를 자랑차게 빼들고 이리기웃 저리기웃 하고 있습니다. 자라는 안해가 아침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에서 사다가 넣은것입니다. 《여보, 자라는 왜 사왔소?》 《당신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동무하라고.》 안해는 어항안에 있는 옛날 동전잎만큼한 풀개구리가 나 같다고 합니다. … 그녀는 무릎우에 뛰여오른 파란 풀개구리를 손바닥우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날은 무척이나 더운 날이였습니다. 한낮의 땡볕은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동네집 개들의 혀를 한발이나 뽑아냈습니다. 그녀는 두발을 논도랑물에 잠그고 앉은채 손바닥우에 놓인 풀개구리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곁에 앉은 나에게 엉뚱한 소리를 내뱉았습니다. 《 야, 이게 너 같다.》 그 땐 우린 서로 반말을 썼습니다. 《왜?》 《우리 집체호에 올 때 준 너의 첫 인상이 바로 이렇게 파랬다. 파란바지에 파란 웃옷, 거기다가 모자까지 파란모자를 쓰고. 그 땐 네 얼굴도 파리하다 못해 파란색이 돌더라.》 《그 땐 국방색과 파란색이 류행이였으니까.》 《같은 옷을 입어도 너는 남보다 더 파랗게 보이더구나. 얼굴이 하얘선지.》 우리 둘은 한동안 말없이 먼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깼습니다. 《야, 이 개구리가 암만 봐도 너 같다. 이것봐라. 시골을 떠나기 싫어하는 너처럼 이 손바닥에 보금자린가 하고 뛰여 달아날 궁리마저 안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풀개구리 궁둥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다칩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풀개구리는 까딱 움직일념을 하지 않습니다. 한낮 더위에 질렸으면 시원한 도랑물에라도 뛰어 들련만… 《난들 시내로 가고 싶지 않아서 안가는줄 아니. 남들처럼 그런 운이 없어 그렇지.》 다른 애들은 추천받아 대학가고 공장에 들어가고 그런 행운이 차려지지 않은 애들은 하다못해 가짜 병 진단을 떼고 시내로 들어갔지만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세였습니다. 《정 방법이 없으면 그 누구처럼 간질병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앞에서 거품물고 자주 넘어져보렴. 호호호…》 《야, 너나 한 번 그래봐라. 꼴 좋겠다. 평생 시집가긴 다 틀렸지.》 《시집 못가면 이렇게 풀개구리랑 동무하며 같이 살면 되지.》 그 때 그녀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였지만 그녀가 날 풀개구리같다고 한 이상 나로서는 그 말을 거저 흘려보낼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우리 둘은 짬만 나면 풀개구리를 잡아서 가지고 놀았습니다. 풀개구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입을 풀개구리 궁둥이쪽에 바싹 가져다대고 입으로 딱! 하고 소리를 내면 풀개구리가 손바닥에서 폴짝 뛰여나갑니다. 우린 누구의 개구리가 더 멀리 뛰여나가는가에 따라 누가 먼저 시골을 떠나게 되는가를 내기했는데 그 날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사람, 당연하게 풀개구리가 더 멀리 뛰여나간 풀개구리 임자가 시골을 떠나간다는 뜻에서 리별의 파티를 마련합니다. 그 때 유일하게 팔리고 있던 《손가락과자》를 한근을 사면 가상적인 리별파티는 시작됩니다. 그 당시 술이 귀해서 맹물로 술을 대신합니다. 창고처럼 휑뎅그렁한 집체호에서 둘만 남은 우리는 맹물에 《손가락과자》를 먹으면서 시골을 벗어나는 사람의 희열과 계속 시골에 남아있게 되는 사람의 비애를 맛봅니다. 비록 가상적인 분위기에 제멋에 놀고 있지만 그런대로 희열과 비애를 뒤섞느라면 언젠가는 시골을 떠날 수 있다는 기대가 그것도 막연한 기대지만 마음에 위안이 돼줍니다. 솔직한 토로지만 그 때 그녀의 모습 - 손바닥우에 놓인 풀개구리 궁둥이에 입을 바싹 가져다대고 딱! 하고 소리내는 그 모습이 얼마나 황홀한 모습이였던지 지금도 적당하게 표현할 말을 찾을수 없습니다. 사실 그녀는 밉지도 곱지도 않은 얼굴형이지만 누구말마따나 산속에서 녀자를 보면 다 예뻐보이는격이여선지 아니면 내 눈이 눈이 아니고 쯤이여서인지… 나의 안해가 된 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닙니다. 어항안의 풀개구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도 그 때 시각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외로운 섬에 웅크리고 앉아 눈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자니 오죽 외롭겠어요.》 안해의 말속에 가시가 들어 있는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못냅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러합니다. 《그런데 이봐. 하필이면 왜 파란 자라를 사왔어?》 그래도 사내의 체면을 지키느라고 반말을 내뱉을 용기만은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거무죽죽한것보다 파란색이 곱지 않아요?》 《아무색이든 자라는 기분 나빠.》 《왜요?》 《자라는 말이야. 한족들의 욕말에는 제 계집 남에게 떼운 얼간이 사내를 뜻한다니까. 더군다나 파란색 자라라 하면 한족들은 〈푸른 모자를 쓴 사내〉를 떠올리기 십상이지.》 《푸른 모자를 쓴 사내? 건 무슨 뜻이죠?》 《역시 제 계집 하나 건사못하는 바보를 일컫는 말이지.》 《그런데 이 자라를 녀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잘 사가던데요.》 《그건 말이야, 그런 사내꼴이 되지 말자고 미리 징계하는 뜻으로 사갈지도 모르지. 어쨌든 자라는 기분 나쁜 련상만 준다니까.》 《당신 분석대로 그런 뜻에서 남자들이 푸른 자라를 사간다고 하면 제가 이 자라를 사오길 잘했네요.》 《뭐?》 안해는 말속에 숨긴 가시를 약간 내비칩니다. 그 가시가 퍼렇게 독을 쓰며 그 형체를 완연하게 들어내기전에 나는 놀란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고 맙니다. 한해전만해도 나는 안해가 이런식으로 말속에 가시를 내비치기만 하면 지붕이 낮다하고 길길이 뛰였습니다. 《어따대고 하는 말버릇이야? 내가 요즘 집에서 잠간 쉬고 있는 것이 그렇게 원쑤같아 보여? 돼먹지못한 녀편네 허벅지 긁고 바가지 긁을줄밖에 모른다더니 …》 이런식으로 나오면 안해는 사흘이고 나흘이고 입에 자물쇠를 겁니다. 그러던 안해가 이제 와서는 박박 악을 씁니다. 《당신 지금 집에서 잠간 쉬고 있어요 아니면 곰처럼 동면하고 있어요? 동면이라도 했으면 잠에서 깨여날 봄철이나 있잖겠어요. 허구헌날 저 개구리처럼 웅크리고 앉아 당신 무슨 궁리를 하고 있어요? 정 할 일 없으면 거리에 나가서 구두라도 닦으세요. 남자라면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모습이라도 좀 보여달란 말이예요.》 《그만해둬. 나 이래도 언젠가는 솟는다니까 솟아.》 《당신에겐 지금 솟을 하늘이 없어요. 하늘만 쳐다보지말고 제발 땅에서 착실하게 기기라도 하세요.》 그러면 나는 목을 움츠린채 슬며시 자리를 뜹니다. 갈곳은 없지만 나는 집을 나섭니다. 이렇게 고약한 기분으로 문밖에 나오면 꼭 어김없이 떠올리게 되는 노래가락이 귀신경을 긁어댑니다. 가사가 아주 엉망인 노랩니다. 《청량리로 갈까요 홍도한테 갈까요 아니면 북망산으로 갈까요…》 언젠가 한국에 가서 돈깨나 벌어온 사촌동생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내뱉던 노랩니다. 그날 그 녀석은 그 녀석의 말마따나 서울의 사창가인 《588》과 거의 근사하다는 곳에서 폼 한 번 잡았더랬습니다. 《야, 양주 한병 더 가져와.》 《어느 양주로 드릴까요?》 《거 있지. 〈섹스 오케!〉》 그 녀석은 XO양주를 〈섹스 오케〉라고 했습니다. 《녀자는 반죽이 잘돼야 나중에 복에 겨운 소리가 거창하게 나오는 법이예요》 독한 술이 창자를 비틀어 짤때까지 곁에 붙어앉은 계집을 아주 주물럭반죽을 만들어놓고는 걸레짝처럼 늘어질 밀실로 자리를 옮기는게 바로 그 녀석의 주벽입니다. 《형님도 오늘 밤 멋진 사내 한 번 돼 보소. 그럼 이따 만나요.》 그녀석이 계집과 함께 밀실에 들어간뒤 나는 내곁에 앉은 계집애가 따라주는 술만 훌훌 입에 털어넣었습니다. 이자 갓 스믈이 됐을가말가한 가녀린 계집애가 새침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주다가 나중에 한다는 말이 기막힙니다. 《사장님은 녀자 좋아 안하세요?》 이때면 나는 사장이 됩니다. 《뭐 녀자?》 《나 안 이뻐요?》 술기운이 오른 내눈엔 계집애의 얼굴이 륜곽밖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래봬도 전 여기선 잘 나가는데요.》 잘 나가는 년인데 왜 날름 잡숫지 않고 있나 하는건데 내 지금 기분이 얼마나 엉망이라고, 그러나 말만은 여유작작하게 나옵니다. 《나 그런 짓에 명 재촉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곤 빈 술잔을 내밉니다. 《아이참 긴긴 밤 술시중이나 들다 말겠네. 인젠 그만 하세요. 기실 명 채촉하는건 술이얘요.》 《뭐야?》 빈 술잔이 술상우에 튀여오릅니다. 《술주는 세상에 술마시지 않고 뭘하라는거야? 어서 붓기나 해!》 계집애는 하는수없이 술을 따릅니다. 그러면 나도 내 체신을 찾습니다. 《너 한테 큰소리해서 안됐다. 자 너도 한잔해라. 너한테 솔직히 말해주는데 난 말이다 술마시고 그 짓은 둘째치고 니나노장단도 못치는 놈이야. 그건 그렇고 나 지금 기분이 말이 아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오늘 밤 취토록 마시자요.》 계집애는 절로 맥주컵에 양주를 가득 채우더니 건배를 해왔습니다. 《방금 사장님은 술주는 세상이니 술 마시자고 했죠. 좋아요. 술 마시지 않고는 못사는 세상, 자, 마이자요. 사장님도 기분 푸세요.》 쨍그랑! 오케! 《섹스오케》 또 한병! 《인생은 나그네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 《꽃순이를 아시나요 어여쁜 꽃순이…》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눈물을 보였나요 내가 울고 말았나요…》 《학창에서 공부하고 농촌에 돌아와 부지런히 일하여 첫수확을 거두었네…》 《그대의 옷자락에 매달려 눈물을 흘려야 했나요…》 술 한잔 노래 한곡, 네 술 한잔에 내 술 한잔, 가고 오는 술에 주고받는 노래, 이렇게 얼마나 노래를 불렀는지 모릅니다. 계집애는 주로 사랑의 리별이라든가 그리움이라던가 아픔이라던가 하는 노래만 주어 부르면서 눈물을 찔끔거렸고 나는 나대로 기억에 떠오르는 노래면 죄다 뽑아버렸습니다. 《술 마이니 기분 고약하네요. 나 이래도 슬픈 녀자얘요 아저씨…》 계집애가 혀가 꼬부니 난 사장님에서 아저씨로 내려앉았습니다. 《나 역시 구질구질하게 살아온 놈이야…》 이렇게 신세타령이 시작되였습니다. 《저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엔 내 신세 조져놓고는 훌쩍 밀항선을 탔어요…》 들어보나 마나 역시 구질구질한 사랑과 배신에 관한 넋두립니다. 그런 넋두린 보통 그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소연이 그 넋두리의 말허리를 썩둑 자릅니다. 《너 내 신상서 한 번 보겠냐?》 《뭐요. 신상서?》 《그것도 몰라? 너 중학교나 나왔냐?》 《중퇴하고 말았죠.》 《그럼 글은 뜯어 볼 수 있겠구나.》 나는 호주머니를 뒤적여 자그마한 종이 한 장 꺼내 주었습니다. 《자 이걸 읽어봐.》 계집애는 그걸 받아 혀꼬부라진 소리로 읽어내려갑니다. 《 〈이력서: 동년시절 영향실조에 걸린 구루병환자 소년시절 반란에는 무조건 도리가 있다던 홍위병 청년시절 광활한 천지에서 지구를 다스리던 지식청년 중년시절 부모처자를 가진 정리해고자〉아니 이게 뭐예요?》 《내 력사이고 명함이다.》 재취직하러 이곳저곳 다니자니 명함이나 리력서같은 것이 필요해서 글깨나 쓴다는 동창생한테 부탁해서 만든 내 이력섭니다. 별로 적어넣을것이 없는 생이니만큼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좋다는게 동창생의 주장이였습니다. 사실 적어 넣을것이 없는 것이 내 리력입니다. 한창 먹고 자랄 나이에 3년 자연재해를 만나 영양실조로 가슴이 새가슴처럼 쏙 튀여나온 구루병체질이 됐고 공부에 열중해야 할 소년시절에는 문화대혁명이 터져 《홍위병완장》을 낀 손에 몽둥이나 들고 다녔는가 하면 아침 아홉시 태양과도 같다는 청년시절에는 손에 쥔 호미로 밭이랑을 허비면서도 지구를 다스린다고 허풍이나 떨었습니다. 그 때 말을 빌면 청년시절은 《밭이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던》 시절입니다. 운수가 사나웠던지 남들처럼 대학이나 군대에는 못가고 겨우 농촌을 벗어나 부모대신 뒤늦게야 공장에 들어가 시키는 일이나 해오면서 두루두루 세월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중년시절에 들어섰습니다. 별다른 의욕이 없이 정착된 생활을 누리려고 하니 정리해고바람이 터져 한달에 기본생활비만 타는 실직자가 돼버렸습니다. 생각하면 구질구질하기 짝이없는 삶입니다. 《이건 보고도 모를 글이구만요.》 계집애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맞아, 너들 세대야 돈바람이 터진 세상에 나서 돈맛만 알고 커왔으니까 보고도 모를 글이지. 말해봤댔자 소귀에 경 읽는거고. 술이나 먹자.》 나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싶어 제풀에 멋적어져 술잔만 홀짝이면서 그녀석이 나오기만 기다립니다. 생각같아서는 집에 가서 노그라지고 싶지만 술값, 팁값 결산 할 놈이 나와주지 않으면 인질이 된 비참한 기분으로 죽치고 앉아 기다려야 하는 신세입니다. 계집애는 하품을 짝짝 해대며 시계만 들여다 봅니다. 잠이 무겁게 내 눈두덩에도 실립니다. 《어허. 아가씨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우리 형님이 아주 녹초가 됐군그래.》 잠결에 아스라이 들리는 그 녀석의 목소립니다. 《제풀에 녹초가 된거죠. 전 지금까지 독수공방하는 신세예요. 이 아저씨 혹시 고자가 아니예요?》 이가 부득부득 갈릴 그 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파고들어도 두 눈이 떠지질 않습니다. (개쌍년…) 《문제가 심각한데. 그럼 이제라도 내가 형님대신 아가씨 신세 고쳐줄가?》 (개수작말아!) 《그럴 재간있어요?》 (정말 개같이 노네) 《하 이거 오늘 진짜 2차 하게 됐네. 1차에 기절직전까지 몰아갔으니 2차에는 초죽음을 만들어야겠군 하하하…》 (개새끼, 물개같은 새끼…) 그녀석이 계집애를 데리고 나가자 나는 채 못한 욕을 입가에 문채로 굳잠에 빠져버렸습니다. 어쩌다 술이 생겨 폭음만 하면 나는 하루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합니다. 화장실 세면대에 얼굴을 처박고 눈물콧물 찔끔찔끔 짜면서 창자를 올리훑고 내리훑으며 창자를 청소합니다. 창자청소를 끝내고 얼굴을 들 때면 딩딩 부은 눈두덩이가 눈동자 절반을 덮어버린 핏기어린 두 눈이 나를 멍청한 눈빛으로 지켜봅니다. 눈을 비비고 대방을 찬찬히 뜯어보면 참으로 한심한 얼굴을 가진 녀석입니다. 손이 간적이 없는듯한 머리는 갈대처럼 선건 섰고 강풍이 쓸고 간 논밭의 벼처럼 이리저리 쓸어진건 쓸어진대로 있습니다. 부석부석하고 탄력을 잃은 얼굴은 땀구멍이 늘어날대로 늘어나 알곰알곰 얽은 곰보가 되기 직전입니다. 더 가관은 이발입니다. 담배연기에 얼마나 그슬렸는지 누렇다 못해 벌그스름한 색갈까지 내비칩니다. 얼굴을 얼기설기 지나간 주름선은 한창 주름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라잖으면 만고풍상을 겪어온 그런 얼굴로 변해버릴 것 같은 얼굴이 잔뜩 찌그러듭니다. 이렇게 나는 한참이나 나를 뜯어봅니다. 그럴 때면 덧없는 세월의 무정함보다 이름못할 인생의 허무가 찡하니 온몸을 엄습합니다. 누군가 지금의 중년시절은 자사자리한 청춘시절이나 새롭게 발기가 가능한 로년시절에 비해 가장 탐욕스런 시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중년으로서의 탐욕의 빛이 번뜩이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체념한듯한 멍청한 얼굴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얼마라도 자기를 추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내 생을 멋지게 설계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자기를 추잡하게 만들려는 생각따윈 전혀 가져본적이 없습니다. 그저 운명에 이몸을 맡겼을 따름입니다. 거창하게 운명이라고 이름짓기보다 살아가는 그 생리에 따르느라고 헐떡거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의 얼굴은 아주 추잡하게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중년답지 않은 초로의 로인상입니다. 그것도 신수 훤한 로인상이 아닌 찌든 상입니다. 《이 아저씨 혹시 고자 아니얘요?》 삭막한 기분에 어쩌다 떠올리게 되는것이 뭇사내들의 하수도가 돼버린 걸레같은 계집애가 냉갈령하게 악매하던 말입니다. 비위가 아주 뒤집혀져 버립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마음도 구겨진는것 같더니 그것도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것도 사실입니다. 나중엔 시체말대로 고개숙인 남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래도 할일없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던 초반에는 종일 먹고 자고 자고 일어나서는 또 먹고 이렇게 《돼지료법》을 했더니 그 놈만은 왕성하게 고개를 추켜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김치를 파느라고 파김치가 되여 돌아온 안해에게 나는 밤마다 열심히 왕성한 힘을 과시했습니다. 사내는 녀자에게 있어서는 《밤의 권력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밤마다 안해앞에서《밤의 권력자》로 군림합니다. 첨엔 안해는 놀랍다는 기색으로 받아들이더니 날이 감에 따라 점차 시들해 지고 나중에 가서는 아예 《노!》를 불렀습니다. 《당신 지금와서 열심히 하는건 그짓밖에 없어요.》 안해는 부부가 합환하는 신성한 사랑행위를 인제는 그 짓이라고 꺼리낌없이 매도합니다. 《그렇게 매도하면 벌받아.》 《아예 석녀가 되게 벌이라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싫어?》 《진저리날 지경이예요.》 《당신 갱년기 오는게 아니오?》 안해는 발딱 일어나더니 이불을 걷어안고 아이방으로 건너갔습니다. 그후론 다시는 내곁에 오지 않았습니다. 각방쓰고 사는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밤의 권력자》는 그 권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무 재간도 없는 권력자가 일단 그 권력을 상실하면 뭐가 남는지 아십니까? 《똥무지 큰것밖에 없어.》 이말은 정부기관에서 사무원으로 있던 중학교 동창생이 한 말입니다. 그 친구가 일보는 부서에는 아무 재간도 없이 다만 상급에 대한 아첨으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책임자가 있었는데 정부기구 인원간소화 여론조사에는 재간없는 그 책임자가 당연히 조정대상으로 점찍혀지고 내 친구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적임자로 평판이 났답니다. 그런데 조정대상 이름을 공포할 때 어이없게도 내 친구가 찍혔답니다. 역시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막강합니다. 내 친구는 부서에서 연 송별파티에서 술을 권하는 그 책임자한테 조언 한마디 했답니다. 그 조언이 바로 똥무지 조언입니다. 《재간없는 당신이 일단 손에 쥔 권력만 내놓으면 남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뭔데?》 《당신이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으니 똥무지 더 큰것밖에 없습니다.》 그날 나는 친구한테서 이말을 들으면서 쾌감까지 느꼈습니다. 기업소를 말아먹고 로동자들을 하루아침에 정리해고자로 추락시키고는 유유히 공문가방을 챙겨들고 다른 기업소의 책임자로 전근되여 간 우리 기업소 책임자도 언젠가는 큰 똥무지밖에 남지않은 페인으로 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한바탕 화풀이를 한 기분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친구의 말이 별로 나까지 념두에 두고 한 말같이 느껴지는걸 어쩔수 없습니다. 권력도 별별 권력이 다 있듯이 내가 가지고 있던 《밤의 권력》도 권력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원초적인 힘, 본능의 힘, 생명의 힘, 이런 시각에서는 《밤의 권력》은 그 어느 권력에 비해 막강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 막강한 권력을 나는 잃었습니다. 어항안의 《또 하나의 나》는 요즈음에 와서는 아예 두눈을 감아버린채 하루 종일 웅크린 그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예전엔 그래도 툭 튀여나온 눈을 디룩디룩 굴리면서 여기저기를 휘둘러보다가도 물속에 뛰여들어 열대어들과 장난도 치고 자라등에 폴깡 뛰여올라 짓궂은 장난질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고독을 즐기는 그런 모습입니다. 사실 녀석은 어디 갈 곳도 없고 또 갈래야 갈수 없는 놈입니다. 그 면에선 내 신세와 꼭 같습니다. 자라도 잘 내휘두르던 그 뭣과 같게 생겼다는 대가리를 깊숙히 껍질안으로 잔뜩 움츠러리고는 조용히 엎드려 있습니다. 그놈도 아마 점점 내 꼴이 되여가는가 봅니다. 《밤의 권력》까지 상실한 나는 더 비참한 인간이 되였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종일 트럼프나 화투장으로 운수패를 널기도 했고 나 같은 신세가 된 사람들이 벌인 트럼프판이나 마작판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한테는 내가 정리해고자가 되였다는것을 비밀로 부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출근하는 아버지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언젠가 아이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정리해고자란게 직업을 잃은 사람이란 말이죠. 말하자면 실업자란 거죠.》 《거이 비슷하다.》 《오늘 선생님이 부모들중 한분이라도 정리해고자가 된 학생은 손들어보라고 하니까 놀랍게도 거의 반수가 되는 애들이 손을 들지 않겠습니까. 기분없이 손을 드는 애들을 보니 난 그래도 열심히 직장 나가는 부모를 두어 행운이다는 생각이 들지않겠어요.》 아이의 이말에 나는 숨이 칵 막혔습니다. 이때 안해가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래서 애들 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하는거얘요. 애들 볼 면목마저 없으면 그 사람 인생 다 끝난거얘요.》 안해의 말쐐기는 내 가슴을 가차없이 헤집고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날 나는 나 같은 신세가 된 직장의 동료한테 찾아가 술나발을 불면서 기염을 토했습니다. 《나라의 국록을 타먹는것도 모자라서 공장까지 다 말아먹는 놈, 그런 놈이 바로 탐관오리야. 로동자들이 피땀으로 벌어놓은 돈으로 웃놈에게 아첨하고 자기 배를 기껏 불리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가버리니 죽어나는건 우리뿐이지. 》 《그런 탐관오리는 옛날에도 효시감이야. 탐관오리를 보면 춘향전에 나오는 암행어사 리도령이 변학도 생일날에 쓴 시가 생각난다. 내 한 번 읊어볼가.》 내 동료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읊어내려 갔습니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요는 만성고라 촉루락시에 민루락이요 가성고초에 원성고라〉》 《지금 우리 쓰는 말로 풀어서 읽어라.》 《〈금동이의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눈물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 《지금의 탐관오리들한테 그 시를 선물하면 좋겠구나.》 《암, 이 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지.》 《금동이의 향기로운 술은 우리들의 피요…》 《자 한잔!》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는 우리들이 고기다…》 《그런 의미에서 한잔!》 《촛불눈물 떨어질 때 우리처자 울고있고…》 짤그랑! 《노래소리 높은 곳에 이 가는 소리 높더라…》 짤그랑 와장창 … 그날 술잔이 박살나고 술상이 뒤집혀졌고 사람은 인사불성이 돼버렸습니다. 술로 하는 화풀이는 그것으로 끝납니다. 술이 깨면 참담한 현실입니다. 나는 종일 집에서 놀다가 아이가 집에 올 시간이 되면 출근차림으로 밖에 나가 발길 가는대로 이곳저곳 돌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길인 듯 집에 들어섭니다. 그러면 아이가 밥곽이 든 내 가방을 받으면서 반깁니다. 《피곤하시죠?》 고중에 다니는 사내애가 녀자애들 못지않게 정나미 나게 놉니다. 《어, 오늘은 좀 피곤하다.》 《어서 발 씻고 어머니 올 때까지 누워서 쉬세요.》 아이는 발씻을 물을 대야에 떠옵니다. 짐짓 피곤한 표정을 꾸미며 두발을 물에 담그면서 나는 아이 얼굴을 외면합니다. 아이를 바라볼 용기가 없습니다. 그 때가 내가 가장 초라해질 때입니다. 사람구실, 부모구실 돈이 시킨다는 말이 있지만 자식앞에서 내 체면유지는 뭐가 시키는지… 초라해질대로 초라해진 내 마음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얘야, 너와 이 애비는 피는 통하지만 앞으로 네 삶만은 이 애비와 같아서는 안돼. 아니야 절대 같을수 없어! 아이가 방학이 되면 나는 출근길에 나서는것처럼 밥곽을 챙겨들고 문을 나섭니다. 창고에서 숨겨두었던 낚시대를 들고 시교근처에 있는 양어장으로 찾아갑니다. 거리상 차비를 팔것도 없고 주변에 버드나무가 둘러서 있어 공원의 호수가같은 분위기를 내는 곳이여서 내가 가기에는 적합한 곳입니다. 시인이나 철학가들이 즐겨 찾는 명상의 공간으로도 안성맞춤한 곳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곳을 자주 찾는 것은 다른 낚시터에 비해 우선 출입료금를 받지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시간이나 보낼 심산으로 양어장을 찾았지만 문제는 낚시를 던지기 바쁘게 고기가 물려 나오는것입니다. 낚은 고기는 시장가격보다 더 비싸게 돈을 물어야 합니다. 낚시꾼들더러 고기를 많이 낚게하기 위해 양어장주인은 고기에게 먹이를 적게 줍니다. 비싼 값으로 고기를 많이 팔아먹자는 양어장주인의 알량한 속셈이 들여다 보입니다. 낚시만 넣으면 고기가 덥석 물려나오는데 그런대로 그냥 고기를 낚아올리면 둬시간이면 몇십마리는 문제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척척 돈을 물고 개선장군이나 된 듯이 가슴을 내밀고 양어장을 떠나지만 난 그럴수 없습니다. 나에겐 매일 고기값을 물어줄 돈도 없거니와 남들처럼 료리용으로나 선물용으로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저 시간만 보내면 됩니다. 그래서 고안해낸것이 《강태공낚시질》입니다. 미끼를 끼지않은 낚시를 물에 던져넣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강태공은 낚시마저 없는 낚시줄만 물에 드리우고 나라의 흥망성쇄를 가늠해 보았다지만 사색마저도 고갈된 내 머리속에는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초침소리만 째깍째깍 울리고 있습니다. 매일 양어장에 죽치고 앉아 고기를 한마리도 낚아 올리지 않으니 하루는 양어장주인이 내곁으로 왔습니다. 《아저씬 무슨 미끼를 쓰길래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못합니까?》 그러면서 양어장주인은 내 낚시를 물에서 건져올립니다. 《어허. 미끼를 떼운걸 몰랐군.》 나는 짐짓 허거픈 웃음을 입가에 물면서 미끼통을 꺼냅니다. 《아저씬 무슨 미끼를 씁니까? 어디 좀 봅시다.》 미끼통에는 바짝 말라붙은 밥알밖에 없습니다. 《이런 미끼를 쓰니 고기가 물리겠습니까.》 《모르고 하는 소리. 큰고기를 낚는덴 밥알이 가장 좋은 미끼지.》 이럴 땐 나는 낚시에 이력이 튼 낚시광인것처럼 나옵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걸 미끼로 씁니까. 지금 고기들은 밥알을 먹지않습니다. 더군다나 큰고기를 낚으려면 미끼를 좋은걸로 써야 합니다. 좋기는 수입제가 좋지요.》 달도 외국의 달이 더 둥글어보인다더니 미끼도 수입제가 더 좋을 수밖에 없겠지요. 고기도 인젠 밥알을 먹지않는다니 맥드날도나 쏘세지를 먹겠지요. 그런걸 먹고 자란 고기를 수입제 미끼로 낚아서 맛나게 드시는 사람은 머리나 눈도 양코배기들처럼 노랗거나 파랗게 변해가겠지요. 그런 사람들이 혹시 물에 빠지면 고기들은 수입제가 왔다고 구름같이 몰려오겠지요. 언제 한 번 저 먼바다에 가서 그런 사람들을 낚시미끼로 큰 바다상어를 낚아봤으면 여한이 없을것 같기도 하고… 《시간많은 량반이시네…》 양어장주인이 남기고 간 비꼬는 말이 내가 요행 얻은 상상의 날개를 꺽어버립니다. 《그래 맞다, 나 시간이 많다. 나도 언젠가는 큰고기를 낚을수있을거야. 암 낚고말고.》 비록 광적인 상상에 가깝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상상을 어쩌다 얻은 것으로해서 만족해합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그런 상상을 가질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놀랍게 발견합니다. 진짜 큰고기를 낚을 기회가 왔습니다. 그날은 양어장에서 낚시대회가 있었습니다. 《21세기를 대비하는 낚시대회》라고 거창하게 쓴 현수막이 크게 걸리고 숱한 유지인사들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모여들었습니다. 상품도 큼직한 것을 내걸었습니다. 가장 큰고기를 낚은 월척상엔 최신형 컴퓨터 내걸었고 등수에 들지 못한 사람은 고기를 얼마나 낚던간에 무료로 가져갈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나대로 《강태공낚시》를 물에 던져 넣고 낚시대회를 구경했습니다. 낚시꾼속에는 온 가족을 데리고 온 정부관원들도 있었고 미모의 녀비서와 동행한 사장님들도 있었습니다. 큰 회의가 있을 때마다 심심찮게 텔레비죤 화면에 가끔 얼굴을 내비치는 70고령의 어르신네가 비서를 데리고 나왔는데 낚시하는 그 모습이 가관입니다. 그 어르신네는 눈이 어두워서 미끼도 비서가 꿰주고 고기 물린것도 비서가 알려주고 낚시대도 비서가 거들어 들어주는데 비서만 곁에 없다면 손발을 후들후들 떨며 낚시대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어르신네의 모습은 사람이 고기를 낚는지 아니면 고기가 사람을 낚는지 도무지 분간이 안갈 진풍경일것입니다. 내가 이리저리 눈을 널고 있는데 깔끔하게 양복차림을 한 50대 초반의 남자가 젊은 아가씨와 함께 나한테로 왔습니다. 《실례가 되겠는지 모르겠지만 저의 낚시대를 좀 봐줄수 없을까요? 전 사업이 바쁜 사람인데 저의 낚시대로 고기를 낚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낚은 고기는 고기회를 뜰 몇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가져도 됩니다.》 청탁도 아주 기분이 나는 청탁입니다. 나는 선선히 그 청탁을 받아들였습니다. 《낚시대도 수입제고 미끼도 수입제입니다. 고기가 잘 물릴것입니다.》 그러곤 사업이 바쁘다는 그 사람은 미모의 아가씨와 함께 버들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푸른 잔디가 깔리고 버들숲이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주는 아늑한 곳에서 미모의 아가씨와 벌이는 사업이 대체 무슨 사업일지 꽤나 궁금합니다. 들을라니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산해진미를 먹어도 사업이고 산천경개를 구경해도 사업이고 유흥가에서 놀아나도 사업이라더군요. 나도 한 번 그런 사업가가 되여봤으면 평생 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두꺼비 고니먹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 그만 하시고 고기나 낚아요 풀개구리같은 사람아… 나는 수입제 낚시대에 수입제 미끼로 밥알을 먹지않는다는 고기를 낚아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낚시대회를 위해 고기를 얼마나 굶겼는지 미처 미끼를 갈아댈새가 없습니다. 잠간새 고기구럭에 십여마리 잉어가 들어갔습니다. 더 낚을 재미가 없어 《강태공낚시》나 하려던차 낚시대가 휘청했습니다. 낚시대 끝이 꺽어질 듯이 후러든 것을 봐서는 큰놈입니다. 물밑에서 요동치는 고기를 따라 낚시줄을 당겼다 늦췄다 하면서 좋이 반시간을 허비하니 맥이 진한 고기가 허연 배를 드러내며 물우에 떠올랐습니다. 《저놈은 분명 월척입니다. 이 양어장엔 저만큼한 고기가 없습니다. 형씨는 월척상을 타게 됐습니다.》 나와 안면이 있는 낚시꾼이 부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월척상이면 최신형 컴퓨터입니다. 그러나 나는 낚시대회 참가자가 아니니 그건 내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월척을 낚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버렸습니다. 숱한 낚시대회 참가자들이 몰려왔습니다. 버들숲으로 사업하러 들어갔던 낚시대 임자도 뛰여왔습니다. 낚시대 임자는 월척을 낚아준 나에게 감사의 뜻으로 수입제 낚시대를 주었고 낚은 고기도 다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난 꿩 먹고 알 먹게 되였습니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 바쁘게 그 자리에서 월척에 대한 경매가 붙었습니다. 최신형 컴퓨터 한대 값이니 적어도 시세로는 만원을 웃돕니다. 낚시대 주인은 자기 회사에 컴퓨터가 있으니 컴퓨터가 수요되는 사람은 돈 5천원만 내고 월척을 사가라고 했습니다. 5천원으로 시작된 경매는 컴퓨터 값과 거의 가까운 9천원까지 치달아 올랐습니다. 나중에 한사람이 만원을 불러 월척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별로 요지경을 보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더 요지경은 그뒤에 있었습니다. 낚시대회 시상식에서 월척상을 받는 사람은 월척을 만원에 사간 사람이 아니라 고기를 낚는지 고기가 사람을 낚는지 분간이 안가게 하던 고령의 그 어르신네였던것입니다. 월척을 고가로 사간 사람이 월척을 그 어르신네가 낚은 것으로 만들었던것입니다. 소웃다 영각할 일입니다. 뒤에서 쉬쉬하는 소리에는 그 사람은 낚시대회를 협찬한 컴퓨터회사 사장이랍니다. 그러니까 어르신네한테 컴퓨터를 그냥 주면 뢰물로 되니까 자연스럽게 낚시대회 상으로 드리면 명분도 서고 쌍방이 다 편안하다는거겠지요. 한마디로 돈이 권력에 아부했다고 할까요, 아니면 돈과 권력 사이에 벌어진 유희라고 할까요. … 하여튼 있는 자들의 세계는 요지경입니다. 월척을 경매에 부친 사람이나 그것을 고가로 사서 진상한 사람이나 또 그것을 자기가 낚은것처럼 뻔뻔스럽게 시상식에 나선 어르신네나 다 권력이던 돈이던 뭐든 있어야 하는 세상에서는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날 저녁 나는 물고기와 선물받은 수입제 낚시대를 시장에 가서 헐값으로 넘기고 받은 돈 3백원으로 아이가 그렇게 사고 싶어했던 영어학습용 록음기를 샀습니다. 그 월척이 내 소유가 되여 상으로 받은 컴퓨터를 아이한테 선물했으면 애비로서의 체면이 얼마나 섰겠습니까. 그런대로 나는 그날 가장 떳떳하게 집에 들어설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난 돈이냐고 안해가 추궁했지만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그 돈의 래력을 알면 안해앞에서 내가 또 한번 왜소해 질가바 두려웠던것입니다. 한국의 어느 류행가에 이런 구절이 있는걸로 기억됩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지금의 내 처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안해를 마주 대하면 우선 나는 못할짓이나 하다 선생한테 들킨 애들처럼 움츠러들면서 눈치만 슬슬 살핍니다. 그러곤 인차 왜소해져가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남자는 젊은 시절에 안해앞에서 내노라고 범처럼 으르렁대다가도 기력이 빠지고 늙어가면 주인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 개처럼 안해의 눈치만 슬슬 살핀다는 유머입니다. 기실 이건 유머가 아닙니다. 유머란 그 어떤 명분에 가려진 실제를 살짝 들어낼때 생기는 익살스러운 롱담이나 해학인데 이건 아주 남자들에 대한 가혹한 매도이고 중상입니다. 적나라한 매도와 중상은 유머가 될 수 없습니다. 주인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 개같다는 비유는 쓰고 싶지 않지만 내가 안해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것만은 사실입니다. 안해에게 못할 짓을 해서 그러는것도 아니고 또 안해의 가슴에 못을 박을 죄되는 일을 저질러서 그러는것도 아닙니다. 내가 안해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은 내가 안해의 존재를 그것도 나의 존재보다 더 위엄이 있는 그런 존재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되여 안해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돈 때문일가? 그건 아닙니다. 안해는 로임에만 매달려 사는 나를 남들처럼 큰 돈 한 번 잡아보라고 닥달한적이 없습니다. 몇해전 나는 남들처럼 버젓이 살아보자고 안해와 상의도 없이 아글타글 모은 돈 만원에 친척들의 돈 만원을 보태여 한국행 초청장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출국의 꿈은 꿈으로 깨지고 돈만 날리고 말았습니다. 집에 들어갈 면목이 없어진 나는 비수 한자루를 품고 사기친 놈을 정처없이 찾아다녔습니다. 그 때 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것은 안해였습니다. 《개도 안먹는 돈 때문에 괜히 당신 명 줄이겠어요 . 남의 돈 떼먹은 놈은 꼭 제명대로 못사니까 그만 찾아다녀요.》 《당신 볼 면목이 없구만. 그 돈을 어떻게 모은 돈인데…》 《돈이야 다시 벌면 되잖아요.》 《당신 지금 속으론 날 원망하고 있지?》 《아니요. 원망하기보다도 전 당신을 다시 보게돼요. 비록 돈은 날렸지만 고지식한 당신에게도 남들처럼 잘 살아보겠다는 그런 의욕이 있었다는게 놀랍고 또 남자답게 그 큰돈을 자기가 목적했던 일에 선뜻 내놓을 담량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신기할 지경이얘요.》 이런 안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습니다. 경외감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해는 어디까지나 녀자입니다. 장을 보다가 돈 10원을 도적맞혀도 며칠 속을 꿍꿍 앓는 그런 녀자입니다. 돈 날린 내앞에서 그렇게 대범하게 나왔지만 속은 나보다도 더 재가 된게 안해입니다. 돈을 날린뒤로 안해는 밤마다 잠꼬대를 했습니다. 중얼중얼 하는 그런 잠꼬대가 아니라 악을 박박 쓰는 고함이였습니다. 《벼락맞아 죽을 새끼야. 죽더라고 내 돈 내놓고 가라.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천벌을 맞을 뒈질 놈아 네가 내 돈 가지고 가면 어디 가겠냐. 지옥에 가도 내 꼭 따라가서 너를 기름가마에 넣어 튀기고 볶고 지지겠다…》 누구나 이런 잠꼬대를 들으면 묘골이 송연해 질것이지만 나는 안해가 잠꼬대를 할 때마다 안해의 손을 꼭 감싸쥐고 속으로 미안 미안을 거듭 했습니다. 안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경외감까지 가졌지만 그 때 난 지금처럼 안해의 눈치를 슬슬 살피지는 않았습니다. 어항안의 《또 하나의 나》가 너무도 미동하지 않아 나는 그 녀석을 어항안에서 꺼내 손바닥우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도 녀석은 내리감은 눈을 뜨지 않습니다. 녀석의 궁둥이에 바싹 입을 가져다 대고 딱! 하고 소리를 냈더니 녀석은 눈까풀만 한 번 슬쩍 올렸다가는 도로 내려버립니다. 모든 것을 초탈한 모습이라기 보다 바로 운명을 앞둔 몰골입니다. 화김에 나는 녀석을 열대어가 헤염치는 물속에 처넣어버립니다. 녀석은 네각을 뻗은채 한참이나 시체처럼 물우에 둥둥 떠있습니다. 영 죽어버린게 아닌가 싶어 손을 가져가니 녀석은 그제야 맥없이 헤염쳐 섬으로 갑니다. 그 꼴을 자라가 대가리를 길게 빼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보긴 뭘 봐?》 공연히 나는 자라에게 적의를 가집니다. 자라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이 대가리를 움츠립니다. 누군가 안해의 사랑과 헌신만 요구하는 무기력한 남편은 안해를 외롭게 하고 밖으로 내몬다고 했습니다. 요즘와서 안해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차수가 잦아졌습니다. 김치를 파는 녀자가 파티에 초청받아 갔었을수는 없고 동창회같은 모임도 자주 열리는게 아니니 안해가 대체 어디서 누구하고 무슨 일로 만나기에 귀가가 늦어지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어떤 날은 술을 한잔했는지 량볼이 발가우리해가지고 들어옵니다. 녀자가 술을 입에 대기시작하면 가문이 망할 징조라고 조상들이 조언해 왔습니다만 현대 생활에서 녀자들도 가끔 술좌석에 얼굴을 보이는것이 아주 자연스런 일로 돼버린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이지만 설명절에도 술을 전혀 입에 대지않던 안해가 지금와서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온다는 것은 그대로 지나쳐 버릴수 없는 일입니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 맥주 한잔정도로 마셨겠지 하고 의혹을 삭여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이런 의혹은 삭여보려고 하면 오히려 눈덩이를 굴리듯이 더 커만갑니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조용한 다방입니다. 안해는 양복을 입은 한 사내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내는 얼핏봐서도 삶의 여유를 넉넉하게 가진 자입니다. 그 사내가 무시로 휴대폰으로 누구와 통화하는 모습을 안해는 조용히 그러나 부러운 눈길로 지켜봅니다. 그러다가도 사내가 무슨 말인가 하고 껄껄대면 안해는 약간 수줍음을 타면서 할기죽 눈을 흘깁니다. 그런 눈흘김을 소설에서는 눈을 곱게 흘긴다고 묘사합니다. 안해의 그런 눈흘김을 나는 오래만에 다시 봅니다. 생활에 찌들어서 그런 눈흘김을 나눌 여유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제는 내가 그런 애교를 받을 대상이 아니여선지 안해는 최근년간 나한테 곱게 눈을 흘겨본적이 없습니다. 그 사내는 누런 금반지가 번쩍거리는 손으로 안해의 김치팔던 손을 덥석 쥐고는 손금을 봐줍니다. 안해는 손을 사내에게 맡기고는 사내의 말을 경청합니다. 사랑선에 잔금이 많은걸 보니 정이 많은 녀자군요. 그 정은 지금 제곬을 찾지못해 방황하고 있는데 언젠가 제곬을 찾게되면 걷잡을수 없이 흘러가게 되지요. 그 정곬을 찾아줄 사람은 멀다면 먼곳에 있고 가깝다면 지척에 있지요. 사내는 아마 이따위 소리를 떠벌리고 있겠지요. 그러나 안해는 귀가 솔깃해가지고 진지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사내는 더 대담하게 안해의 손을 더 가까이 끌어와서는 이리 쓸고 저리 쓸며 마음껏 주물러대고 있습니다. 안해는 그런대로 손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정말 더는 못봐줄 진풍경입니다. 《이놈 그 손 못놓을가?》 그 고함소리에 놀랜 것은 사내가 아니고 나 자신입니다. 제 방귀에 놀랜 격으로 나는 제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여납니다. 기분이 아주 엉망입니다. 나는 어쩔수없이 자라를 떠올립니다. 《자라는 말이야. 중국 사람들의 욕말에는 제 계집 남에게 떼운 얼간이 사내를 뜻한다니까. 더군다나 파란색 자라라 하면 중국인들은 〈푸른 모자를 쓴 사내〉를 떠올리기 십상이지.》 《푸른 모자를 쓴 사내? 건 무슨 뜻이죠?》 《역시 제 계집 하나 건사못하는 바보를 일컫는 말이지.》 《그런데 이 자라를 녀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잘 사가던데요.》 《그건 말이야, 그런 사내꼴이 되지 말자고 미리 징계하는 뜻으로 사갈지도 모르지. 어쨌든 자라는 기분나쁜 련상만 준다니까.》 《당신 분석대로 그런 뜻에서 남자들이 푸른 자라를 사간다고 하면 제가 이 자라를 사오길 잘했네요.》 그 땐 그저 무심히 흘려보냈던 말인데 지금와선 그 말뜻을 기분나쁘게 음미해 보게됩니다. 특히 《제가 자라를 사오길 잘했네요》란 안해의 마지막 말이 그 어떤 징후적인 것을 암시하는 말로 가슴을 파고듭니다. 남자로 생겨 특히나 불혹의 나이를 넘긴 남자가 자기 안해한테 삭일 수 없는 의혹을 가진다는 그 자체가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요절난 비극의 시작이라고 할가요. 나는 안해한테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안해가 없는 새에 안해의 가방을 뒤져보기도 했고 지어는 안해의 화장품까지도 눈여겨봅니다. 그럴수록 안해의 얼굴화장이 점점 더 짙어간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안해의 전화번호책에 새로운 전화번호가 적혀있으면 그 전화번호에 전화도 걸어봅니다. 《여보세요.》 상대방이 녀자이면 나는 전화를 그냥 놓아버립니다. 남자목소리가 나오면 나는 연극을 놉니다. 《여긴 꽃가게인데 누가 꽃배달을 부탁했는데…》 《꽃배달?》 《한 녀자가 꽃배달을 부탁했는데…》 《이봐요. 전화 잘못걸었수다. 여긴 녀자한테 꽃을 선물받을 사람이 없수다.》 《미안하지만 거기가 어디지요?》 《여긴 고추파는 가겝니다.》 상대방이 전화를 끊어버리면 나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맙니다. 어이없는 짓거리를 한 나자신이 초라하다못해 가련해 보입니다. 《사내라면 사내답게 당당한 가짐을 가져. 치사하게 녀편네 뒤나 캐고 다니지 말고. 우리 나이에 의처증을 가진다는건 구제불능의 사내가 된다는걸 의미해.》 이말은 언젠가 내가 나같이 정리해고자 신세가 된 친구한테 한 말입니다. 그 친구는 안해를 한국으로 돈벌러 보내기 위해 가짜리혼까지 해준 바보입니다. 《가짜 리혼까지 해줄 정도로 안해를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줘야지》 《아니야. 가짜가 진짜로 될것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야.》 《그런 예감마저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신세에 가짜 리혼은 왜 해줘?》 《무능한 놈 나중엔 녀편네까지 팔아먹는다더니 내가 아마 인젠 네 말대로 진짜 구제불능이 됐는가 봐.…》 구제불능, 나도 인젠 그 꼴이 돼가고 있지 않는가 싶어집니다. 어느 월간지에 이런 글이 실린적이 있습니다. 《지금 조선족 녀성들이 방황하고 있다. 남자들의 무능이 녀자들을 방황하게 한다. 사실 방황해야 할 사람은 남자들이다. 인생로정에서의 방황은 때로는 값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남자들은 방황할 용기라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의심될 지경이다.》 사내가 구제불능이 되면 녀자는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이 짙어가면 녀자는 방황합니다. 남자의 방황보다 더 무서운 것이 녀자의 방황이라고 합니다. 나의 할머니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사내란 기력이 있을 땐 처자식 다 버리고 제멋에 좋아 별별 짓 다하며 돌아다니다가 기력이 빠지면 제발 날 죽여줍쇼하고 처자식곁으로 기신기신 찾아들지만 계집은 안 그래. 한 번 마음 독하게 먹으면 다신 제자리에 돌아오지 않는 법이야.》 나는 지금 인적이 끊어진 강뚝아래에 홀로 드러누워 가을 하늘의 별을 헤고 있습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너와 나 둘…) 집체호를 떠나 시내로 올라오기 전날밤 나와 지금의 안해는 이렇게 하늘의 별을 ?습니다. 그날밤은 내 일생에서 가장 황홀한 밤이였습니다. 나는 남자로 안해는 녀자로 다시 태여난 밤이였습니다. 《이제부터 넌 내꺼야.》 《너도 내꺼야.》 《저 별도 우리꺼야.》 《저 하늘도 다 우리꺼야.》 《이 땅도 다 우리꺼야.》 그러나 지금와선 그 어느것도 내것이 아닙니다. 별도 싸늘하게 내려다보다가 구름속에 숨어버립니다. 하늘도 얼굴을 가려버립니다. 땅도 선뜩한 랭기로 내 잔 등을 올리밉니다. 모든 것이 날 외면하는 이 밤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적막한 밤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별무리가 다시 차가운 빛을 내리드리우기 시작할 무렵 나는 가까운 곳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낍니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신음에 가까운 생경한 교성… 누군가 황홀한 밤의 교성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 교성곡은 유연한 벌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르다가 급한 여울목을 만나 룡트림하며 내달리는 성깔 사나운 흐름으로 변해버립니다. 나중에 그 흐름은 쾅쾅 사정없이 바위를 두들기며 천길 낭떠러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돼버립니다. 하여튼 젊음은 기운찹니다. 젊음의 폭포가가 어찌나 기운차게 두드려대는지 《어마나 어마나》 하던 소리가 《엄마 엄마》로 변해버립니다. . 기막힌 황홀경을 맛보도록 낳아 길러준 어머니가 고맙다고 꺼이꺼이 소리를 내뱉는지 아니면 도로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가고 싶도록 못견디겠다고 소리소리 질러대는건지… (싸가지없는 년…) 공연히 욕이 나갑니다. 조용한 나의 명상의 공간을 교성곡으로 뒤죽박죽 휘저어 놓은 것이 괘씸하기도 합니다. 엄마 찾던 소리가 뚝 끊어지더니 한참후에 흐느낌 소리가 이어집니다. 녀자들은 너무 황홀해도 눈물이 나오는가 봅니다. 《왜 울어?》 생각밖에도 나이가 꽤나 들었음직한 석쉼한 목소립니다. 《나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목소리 임자도 교성을 내지를 때와는 달리 생경한 처녀애 목소리가 아닙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되려 마음이 편해.》 《내 운명 비참하지요?》 교성곡에 이어 운명곡이 시작됩니다. 《아니야. 기실 스스로 비참한 운명을 마련한것은 그 사람이야.》 《내가 별로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그 사람한테 죄스럽다는 생각이 드나?》 《글쎄요…》 《그런 생각 가질 필요가 없어. 당신 그 사람한테 여태껏 뭐가 돼왔는가 생각해봐. 술주정 부릴 땐 매를 맞아주는 주정받이가 돼주고 마작놀겠다고 돈 내놓으라 하면 피를 팔아서라도 돈을 만들어주고…》 《그만하세요. 내 명이 기구해서 그렇죠…》 《명탓만 해서는 안돼. 이제라도 새로운 생을 시작해야지.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그 사람의 무능이 당신으로 하여금 생을 바꾸게 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거요.》 남자의 무능이 녀자의 생을 바꾸어 놓는다는 얘깁니다. 《생을 바꾼다구요?》 《암. 우린 오늘 이미 새로운 생을 시작하지 않았소. 난 지금와서 가출해버린 그 녀자를 원망하고 싶지 않소.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요. 그 녀자의 가출로해서 난 나자신이 녀자하나 건사못하는 무능한 인간임을 알게 되였고 내 나름대로의 새 생을 시작해야겠다는 의욕을 가지게 된게 아니오. 그러니 당신도 그런 의미에서는 그 사람한테 감사를 드려야 하지.] 《이제와서 다시 생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까요?》 《암. 난 오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요.》 《어마나 또요…》 거창한 교성곡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 교성곡을 더는 숨죽이고 듣고만 있을수 없어 도둑 고양이마냥 자취소리를 내지않고 자리를 뜹니다. 새 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허청이며 강뚝길을 걸어가는 내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습니다… 어항 속의 《또 하나의 나》는 종내 생을 마감했습니다. 꼴불견으로 네각을 뻗지않고 웅크린채로 조용히 숨을 거둔 녀석은 쪼고만 삶의 공간에서 질식사 한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자연의 품에서 태여났다가 지독한 인간들의 만들어준 적막한 삶의 공간에서 관상용으로 되어오던 녀석은 가엷게도 죽음의 대가로 자기의 귀소인 자연의 품을 도로 찾았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질식할것만같은 숨막히는 삶의 공간에서 언녕 뛰쳐나와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대자연의 혜택을 누려야 했을 녀석이지만 녀석은 인간들에 의해 강요된 삶앞에서 모든 것을 체념해버리고 허무와 고독만 즐기다가 요절되였습니다. 청년시절 안해의 동정과 사랑을 얻어낸 나의 상징물, 중년시절 별볼일없는 나의 형상물로 돼왔던 [또 하나의 나]를 나는 시교에 있는 논밭머리에 묻어주었습니다. 녀석을 묻으면서 나는 어이없게도 별로 나를 묻어버리는것 같은 기막힌 환각에 순간을 사로잡혔습니다. 《으흐흐, 아하하하…》 나는 앙천대소로 그 환각을 떨쳐버렸습니다. 하늘은 무심하게 나를 내려다 보고 있지만 나는 유심하게 하늘을 쳐다봅니다. 언제보나 그 하늘이지만 오늘따라 그 하늘이 높아보입니다. 나는 언제나 기분나쁜 련상만주는 자라를 돌맹이 내던지듯 늪속에 던져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나》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별로 무덤속에서 나오는 기분이였습니다… 1999년 2월 7일 북경에서 탈고 * 본 작품은 2000년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작품입니다.
1    김훈 프로필 댓글:  조회:1709  추천:31  2009-04-18
김 훈1955년 5월 18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1976년, 1991년 선후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와 북경영화학원 시나리오학부 졸업.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예 창작실 전직 작가, 주임, 연변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 길림성연극가협회 부주석, 연변연극가협회 부주석, 연변청년연합회 부주석, 연변방송텔레비죤방송사업국 부총편집,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부국장 역임. 길림성 로력모범칭호, 전국 우수 청년작가 칭호, 미국 솔로몬대학 명예 문학박사 칭호 수여 받음.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작가자격심사위원, 중국연극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연국가학회 이사, 중국영화문학학회 이사. 소설집《청춘의 활무대》,《어머니의 비밀》, 《수도권의 촌놈들》, 연극집《김훈연극집》, 텔레비전 드라마《민들레꽃》,대형연극《시름거리웃음거리》,《망각된 인간들》, 대형무용극《천지의 선녀》, 특집방송프로 《추석의 보름달》등 작품으로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중국연극진흥상, 중국소수민족텔레비전문학상, 전국무용극창작상, 민족문학상, 중국방송대상 《무지개상》 등 전국상 수상. 현재 중국국제방송국 칼럼리스트, 국가1급 작가로 활약. 《김훈문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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