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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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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란강변에 흐르는 역사의 향기 댓글:  조회:1044  추천:1  2012-10-03
해란강변에 피어나는 역사의 향기 김길남 ICKC 공동대표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우리민족이 한반도를 떠나 해란강변에 민족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시작 한것은 AD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이 정착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본격적으로 이주가 시작된 것은 청나라 봉금령이 해제 되기 전 1830년부터 1860년까지 집단으로 이주 하여.자연부락형 촌락형태를 이루며 중국인들의 소작농으로 살고 있었다. 1881년 청나라 봉금령이 해제되고 함경도지역의 계속된 흉년과 조선말기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피해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 이주하여 장계, 이주 등 10여개의 한인자연부락을 통합하여 “조선을 밝게 하자는 취지로 명동”이라 이름을 짓고 명동촌 을 건설한 것이 오늘 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시효(時效)라 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선조들이 대륙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던 땅에 민족문화를 계승하여 꽃피우 는 한민족 공동체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1952년에 창립되였다. 오늘, 60주년의 이념과 이디올로기를 초월하여 단절 후 40년 만에 체결한 한중수교 20주년을 경축하는 행사에 한국문화 국제교류운동본부가 참여하여 해란강 물결 따라 흘러온 우리민족의 역사를 찾아본다 간도의 명동촌 한인촌-明東村은 현재중국의 행정구역으로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지역에 속하는데 즉 용정(龍井)시 지신향(智新鄕) 명동촌(明東村)인데, 명동촌은 당시 北間島地域의 代表的韓人 마을이였다. 명동촌에서 한인들이 정착에 필요한 토지를 매입 할 때 토지의 10분의 1을 학교용 부지로 기부 하여 공동 토지를 미련하고 한민족 공동체를 기초로 하는 한인사회 명동촌이 출발했다. 이들은 공동토지에 전통적인 한국의 서원과 서당, 초기 현대학교 기능을 하는 서원들을 세우고, 1907년에는 간도교민회를 창립하여 한인들의 생활안정 계몽교육, 민족 정신고취와 권익옹호 활동으로 명동촌 최초의 한인회 기능을 하는 교민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김약연을 선출했다. 1910년에는 여러 서원 들을 연합하여 간민교육회를 창립하여 서원들의 교육효과를 높이고 다시 한인 자치기능을 발휘하던 간민회로 발전했다. 명동촌을 이끌어간 한인지도자로는 김학연 간도 교민회 회장, 이동휘,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이동녕임시정부 대통령 직무대행 이준, 이상설, 헤에그 만국평화회의 고종황제 특사 등이 있었다, 독립투사 안중근은 블라디 보스톡크 신한촌으로 떠나기 전에 명등촌 만진기 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의지를 모으고 신무기활용법을 익혔으며, 重光團.을 조직하여 활동한, 반일명장 서일은 청년들에게 독립정신 함양과 군사교육을 실시하였고, 한인자치기구인 간민회의 총무, 상해임시정부 북간도 대표를 역임한 정재민 목사는, 명동촌을 중심으로 한 한인촌에 3년 동안 70여개교회를 개척하고 한인사회지도자 김약연, 문치정, 김하규, 남위언, 마진등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항일민족운동의 정신적 지표로 삼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중국주류사회로 진입한 주덕해도 명동촌 사람으로서 연변조선족 자치주 정부 초대주장과 길림성 부 성장 그리고 전국인민대표회의 제3기 민족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하여 한인사회 대표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문화 예술분야에서는 영화인 나운규와 함북 명천에서 이주한 향토작가 김창길의 단편소설과 많은 시 그리고 수필을 남겼다. (시, 수필의 명작인명) 명동촌에서 출생한 2세로 채수향, 조충열, 윤동주, 문익환 등이 있다. 채수향은 신화적인 항일투쟁으로 화룡현위의 초대 공산당 서기로 활동하였고 조충열은 민족 계몽운동과 항일투쟁,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투쟁에 참여하여 국민당 계열의 치안 유지대를 섬멸 해산시켜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투쟁의 영웅이 되었다 민족 시인윤동주는 1942년 도꾜 입교대학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 할 때까지 주옥같은 작품-16편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고 대표작 서시도 발표했다. 문익환 목사는 시인윤동주와 초등학교와 중학에서 동문수학하고 만주의 봉천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와서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될 때까지 윤동주와 유년시절을 명동촌에서 보냈다. 간민회 활동과 조선족 연변자치주 간민회의 출범 1911년 신해혁명 이듬해에 탄생한 중화 민국은 聯省自治를 표방하여 북간도 지역 한인들이 자치단체를 창립 할 수 있는 외부상황을 조성하여 이동춘, 김약연, 김입 등이 주동이 되어 간민교육회를 토대로 조선인상호간에 친선도모와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중국의 국법준수는 물론 간도에 정착한 중화민국 공민으로써 책임과 의무를 다 할 것이라는 간민회 설립 宗旨를 내용으로 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여 길립성 都督府로 부터 간민회 설립허가를 받고 1913년 4월 28일 긴민회 창립대회를 열고 회장에 김약연 부회장에 백옥보를 선출하여 중국최초의 한인자치단체로 출마했다. 간민회 본부는 연길시내 局子街에두고 500-1000호마다 지부를 두어 자치업무를 집행하며 총무, 서기, 민적, 교육, 재정, 식산흥업, 의사과를 두어 자치 기구를 갖추었다. 간민회는 오늘날 한인회 기능과 항일독립운동 단체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며 1. 중국 시민권 신청 업무(귀화입적업무)지원 2.호구조사와 간민회비 징수 3. 토지매입 관리와 지원을 총괄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설립 1909년 간도협약이후 1914년 일제의 강압으로 중국정부에 의해 간민회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나, 간민교육연구회의 이름으로 지하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독립투사를 양성하였으며 3.1 운동과 반일무장투쟁의 선봉인사들을 양성하였다 중국정부에 의하여 간민회는 해산되었으나 연구회 이름으로 반일교육의 기지로 계속 활동 할 수 있었던 것은 간민회 주요임원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대부분 중국국적을 취득하고 있었기 때문 이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용정시에서는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한 300여명의 학생들이 충열대를 조직하여 한인 3만여 명이 참가하는 항일집회를 열고 당시 불법적인 일제침략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1945년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으나, 그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 행정 독찰 전원공서(專員公署)'를 설치하고, 1948년 3월에는 연변전구(延邊專區)를 창립했다. 그 후 1952년 9월 3일 연변전구를 철폐하고 조선족들의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기여한 공로와 항일투쟁 그리고 간민회를 통한 자치역사를 참고하여 한민족 문화를 유지 계승 할 수 있는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편(改編)하여 오늘, 자치주 설립 60주년을 맞이했다. 현재 자치주내 조선족은 81만 5,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40.7%를 차지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연길, 용정, 도문, 돈화, 화룡, 훈춘 6개시와 안도, 왕청 2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변자치주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한국어(조선어)로 교육하는 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중국의 국어한문이 아닌 한글이 자치주의 주어로 쓰고 있으며 주장, 시장 등 자치단체장은 한민족(조선족)이 담당 하도록 자치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에 또 국가적으로 우리민족의 민요 아리랑; 우리민족 악기인 가야금, 판소리, 퉁소; 민족무용, 학무, 장고춤 그리고 민속놀이인 그네뛰기, 널뛰기 등 12개 항목을 중국 조선족 전통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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