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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윤홍로, 『한국근대소설연구』, 일조각 1980 댓글:  조회:2754  추천:0  2009-05-16
-20년대 리얼리즘 소설의 형성을 중심으로   일제의 문화정책의 저의가 어디에 있었건, 1920년대의 한국 사회는 3·1운동의 지속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던 만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일반적 성격이 3·1운동 및 이에 따른 사회운동·문화운동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3·1운동 후 국내의 민족개혁운동은 주로 반일제·반봉건 투쟁을 지상과제로 하는 문화운동의 양상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굳이 획기적인 연대로 구분하고자 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2)1920년대의 소설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고 연구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은, 이들 소설이 현대소설사의 출발이 된다는 것 이외에도 소설의 양상 자체의 빠른 변화와 아울러 이들 소설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여러 측면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3)문예사조의 수용·영향 연구에서는 각 민족마다의 역사적·사회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그 작품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3)이 시대의 소설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가를 위해서는 개별적 작가론·작품론·사조론 등에 대한 방법론적인 세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문제는 각 작품과 전체적인 시대정신과의 관련성을 찾는 작업인 것이다. 즉 개별 작품의 의미, 작가 의식의 특질, 사조의 수용 등은 시대정신의 총체적 연계성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작가들과 개별 작품들이 이러한 총체성과 관련하여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구해야 할 것이다.(3)통합적 해석론에 의하면, 문학연구는 어디까지나 정신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는 구분되어져야 하며, 그러한 근거 위에서 인간의 내면적 정신의 흐름이나 역사적 지속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는 종래의 심리적·사회적·형태적인 방법론들 중 어느 한 측면만의 작품 접근 태도를 지양하고 총체성과 문학의 자율성을 동시에 인정하려 한 것이다. 정신사의 맥락에서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외형적인 문화와 내면적인 정신의 복합성과 함께 그 관계양상의 작용·반작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고찰해야 하며, 그 지속성을 주시해야 한다. 통합의 해석론은 종래의 제방법론에 대한 절충을 시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작품과 작품 이해의 방법론을 변증법적 원리로써 파악하여 문학현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방법이다.(4)그러므로 통합의 해석론의 기조가 되는 것은 역사주의 관점과 정신사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주의자들의 작품해석 태도는 역사의 변증법적 양상을 주시하면서, 시대의 기층구조와 개인과를 상호 유기적으로 관련시켜 작품의 위치와 작가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측정하려고 하는 것이다.(4)통합적 해석론에서는 '적합한 순간' '적합한 대상'에 대한 '적합한 방법론'의 적용이라는 과제가 중시된다. 또한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치에서 역사적 視界로 옮겨 작품세계와 자아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인식하는(4)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통합적 해석론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미시적 분석과 거시적 통합을 어떻게 일원화하고 균형·조화를 이루도록 하는가 라는 점이다.(5)통합해석론의 필요성은 사실상 예술작품 자체의 본질성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다. 예술작품이 유기적 구조성을 띤다는 것은 다양성에서 동질성을 찾아 중심적인 의미로 융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분과 전체를 동시적으로 파악하면서, 동일체로 융합시키는 통합기능의 구실을 하는 매체를 중시하게 된다. 이러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는 그것이 작중 인물이든, 작품자체이든, 장르 혹은 유형이든, 예술사조이든 간에 작가의 주관과 객관 세계,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 당위와 존재 등으로 분화된 양극적인 세계를 균형·조화를 이룩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 그 자체도 의식과 객관물 사이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통합기능의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언어나 문학의 통합적인 기능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더 확대하여 문학사·문학비평·문학이론 상호간에 존재하는 발전계기로서의 매체로도 원용할 수 있으며, 또한 장르간(이른바 '토도로프'의 '이론적 장르'와 역사적 장르 등) 혹은 문예사조(가령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혹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간 등) 등의 전이를 연속성으로 파악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5)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1920년대 소설이 리얼리즘의 방향으로 발전된 것은 저널리즘의 영향 혹은 근대소설의 양식 자체가 리얼리즘과 밀접되었다는 점 이외에, 우리의 문학전통과의 연계에서도 그 요인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실학사상·동학사상에 연원한 당대의 현실과 가치관에 대한 관심은 외래적 리얼리즘을 수용함에 있어서 그 잠재력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7)문학적 전달은 사실의 교환이라기보다는 체험의 교환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인간적 관점의 동일성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러한 동일성(10)을 이해하는 선결조건은 나타난 문화현상과 내재적인 정신의 복합성과 함께 그 작용·반작용을 유기적으로 관련시켜 고찰하는 것이며, 문학사적 사실의 시공간적 관계 설정 역시 정신사적 지속 현상을 주시하면서 진행하여야 된다는 것이다.(12)예술작품은 원래 그 구성 부분의 분리란 있을 수 없고, 모든 형식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작품의 구심점을 향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 역시 고정된 양식으로 경직된 일면성만을 강조할 수는 없으며 다양한 소재가 상상력과 정서의 작용으로 통일된 조화가 이루어질 때 성공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내포적 요소와 외연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었을 때 작품의 가치는 있게 된다.(16)1920년대 작가는 그 사회적 신분이나 연령상으로 보아 대체로 20대의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에 속한다.(21)이 시대 지식인·작가들의 고민은 직접적인 정치운동이 규제되자 작품을 통해 이 시대의 비극을 증언하려는 데 있었다.(21)이 시대에는 일제의 계획적인 식민경제정책으로 경제적 수탈을 당하여 한국의 자원은 날로 피폐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혼란의 와중에서 이기적·퇴폐적 성향과 자폭적(방화·살인·자살 등) 경향마저 드러내게 되었다.(28)3·1운동 이후 우리 문학사는 소설, 특히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은 리얼리즘을 지향해 왔다. 전대소설과 대비한 1920년대 소설의 현저한 특색은 당대의 사회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는 더 있었다. 1920년대의 소설이 리얼리즘을 지향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을 들 수 있다.첫째는, 이 시대의 신교육을 받은 작가들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식민지 체제하의 구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의 내적 의지를 가지고, 선진 시민사회의 역사 경험과 거기서 고양된 문학예술을 배우기 위해 서구의 근대 시민문학을 적극적으로 섭취하려는 데 있었다.둘째로, 3·1운동을 분계선으로 하여 전환된 문화운동과 아울러 저널리즘(36)의 확대·보급으로 독자층이 증대되었고 전문적 記事作成者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셋째는, 이조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내려온 현실주의(후에 실학사상, 동학, 천도교사상과 맥락을 가짐)와 그 잠재력 등을 들 수 있다.첫째 경우로 3·1운동 후 신문화운동의 결과 서구사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편모는 이 시대에 애독된 외국작품들을 보면 窺知하게 된다. 이 시대 지식인 작가들은 대체로 톨스토이·푸시킨·투르게네프·바이런·와일드·화이트맨·포우·위고·모파상·플로베르·졸라·베를레느·보들레르 등을 애독했으며 그 중에서도 혁명전야 러시아 작가들의 것이 많이 읽혀졌다. 그것은 제정러시아의 전제정치 아래서 신음하던 민중들의 참담한 상태가 일제 밑에서 고통을 받던 한국 사람의 불행한 생활과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南歐의 華麗純爛한 문학이 이 시대의 문학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당대의 문학은 북구문학에서 그 사상성을, 남구문학에서 세련된 기술과 예술적 미학을 수용하면서 일본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명치·대정문단의 일면적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당대에 일본 신세대 문학작품이란 세계사조를 중개하는 창구 구실밖에 못하였다.(박영희, 「현대한국문학사(2)」, 『사상계』, 제58호, 1958, 5.-인용자 재인용)(37)대체로 외국의 문예사조가 자국의 문학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자국에서 과거로부터 예술작품을 구현시켰던 내재적 가능성을 선행하여 검토하면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민족의 역사의식은 불가피하게 외래적인 요소를 굴절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우리의 현실적 의미는 언제나 과거의 잠재적 잔상이 현재의 지각과 결부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현실적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부단히 우리의 潛在像으로 누적되어 가는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사실과 결부되면서 다른 의미의 현실적 존재로 부상되는 것이다.(37)소설의 시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초월적인 反時間性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맥에서 리얼리즘 소설의 개념을 요약한다면 개개 인간들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의 전체적 생활양식의 가치를 창조하고 판단하는 종류의 소설이라 하겠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민족과 시대마다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면서 변용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의 기본개념을 常數로 한다면 민족과 상황에 따른 상이한 리얼리즘을 변수로 놓을 수 있다.(38)반영론과 목적론 사이의 논리적 갈등은 리얼리즘(38)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39)리얼리티는 상상력과 정서와 사상을 가진 작가정신이 시대상과 결부되어 하나의 모형을 창조하는데서 실현된다. 따라서 사실주의를 검증하는데 리얼리티 검증이나 유형해석은 단순히 주위 환경의 복사물의 반영이라는 의미를 거부한다. 우리는 쉽게 그림과 카메라의 비유를 들 수도 있다. 그림이란 카메라의 복사성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라 하겠다.(39)보편적으로 사실주의란 심리적인 면보다는 외부사실에 중점을 더 두고,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짧게 정의하면 사실주의란 철학에서는 이상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예술에서는 사실주의란 낭만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사실주의자 발자크에 대해 낭만주의자 조르즈 상드가 자기와의 관점의 차이를 다음처럼 규정한 것은 상당히 예리하다. "당신은 당신의 시선에 비치는 그러한 모습을 그리지만, 나는 그 사람을 내가 그렇게 보았으면 하는 그러한 모습의 그를 묘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40)사실주의 다른 변종 가운데 하나인 자연주의는 모든 인생이나 사실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주로 사실적이고 평범한 현상, 인간을 동물과 같게 하는 그런 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의 자연주의는 과학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유사해지려고 한다. 자연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주의 문학자는 예술과 학문을 동일시하며 문학과 자연과학을 동일시하려고 노력한다. 자연주의의 이론이란 자연과학의 성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자연주의 이론이란 진화의 법칙에 의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의 한 측면은 기계적이며 원칙적인 종속의 사상을 낳았다. 자연주의는 주인공의 자유를 박탈하고 주인공은 환경에 노예화된다.자연주의 작가는 사실을 대할 때, 어떠한 감정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신을 실험가로 비유한다. 따라서 연민과 분노를 느끼지 않는 자연주의자들은 선과 악을 똑같이 대한다. 우리는 졸라의 글에서 자연주의가 조야한 물질주의와 냉소주의로 변하기가 쉬우며 그 건강한 사실주의가 퇴화해 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요한 것은 자연주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자신들의 세계가 중요한 것이므로 철저한 자연주의 이론 자체만을 강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서구의 작가들 역시 그들 작품이 이론보다 뛰어났으며 무미건조한 설명이나 철저한 실험·관찰의 보고서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정신사로서의 예술성을 인정하는 이상 철저한 자연주의란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자연주의는 관찰과 실험적 방법론을 원용하여 소설의 리얼리티를 탐구하는데 공헌했다는 점은 인정된다.(41)인간의 二大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보존욕인 식욕과 자기유지욕인 성욕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부단한 공허 속으로 몰아낸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소설이 추적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세부묘사의 증대(세부묘사와 예리한 관찰) 이외에 원초적 힘(본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체라 문학에서의 자연주의적 미학은 태내에서 무덤까지 더욱 날카로운 성적 본능의 비전을 인간에게 요구하였다.(44)자연주의나 사실주의에서 묘사방법의 숙련과정은 사실적인 현장으로 접근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주의 문학은 성욕과 식욕 등 본능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였을 때나 그런 요소가 결핍되었을 때의 현장을 특별하고 구체적인 감각과 인식의 넓은 조명 가운데서 묘사하는 것이다. 위에서 밝힌 실험소설이라는 용어는 가끔 오해될 가능성이 있다. 자연주의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아주 직선적이며 우직하고 그 화법이 모두 19세기의 인습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실험성이란 말은 바로 인간을 사물과 同列에 놓고, 인간을 과학 실험관 속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험성은 주관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을 강조하면서 형식과 스타일을 무시하게 된다. 자연주의자들은 진실이 목적이었지 예술이 목적(원문은 윗점임)은 아니었다. 따라서 자연주의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단면'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구조적인 예술만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주의자들은 소설의 무정형을 택했으며 아주 융통성 있는 문학 장르를 택했다. 이러한 자연주의자들의 관점은 인간존재의 진화과정을 추적하려는 욕망과 환경과 상황의 영향을 통해 형성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45)낭만주의에 의한 인간의 이상화와는 대조적으로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을 벌거벗기면서 동물 수준으로 평가절하시켰다. '形而上學的 人間'은 '물리적 인간'으로 졸라에 의해 대체되었다. 자연주의자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을 인간이하로 평가절하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진화의 과정을 명백히(원문은 윗점임) 묘사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어떤 위기, 가령 스트레스라거나 격렬한 섹스의 역설, 혹은 알콜의 영향 아래 인간을 그 내부에 가진 원시적인 야수성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45)자연주의자들은 원시성의 심리적·신화적 유형(원문은 윗점임)을 발굴해서 새로운 진리를 얻는 동시에 유동적인 시공간성에서 영원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속의 다양한 인물 묘사로부터 한두 사람에 집중하여 그들 내면의 비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그런 경우 자연주의는 인간 내면에 숨겨 있는 육욕 등을 추적키 위해 특수한 환경의 장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46)자연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비극보다 환경사의 제시에 기울어져 있다.(46)자연주의자들은 결국 리얼리즘을 정교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근본성향을 강화시킨 셈이다. 자연주의는 리얼리즘이 아직 갈 수 없었던 새로운 지적 지평선을 확대시키면서 원초적 본능을 탐험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자연주의는 리얼리즘보다 구체적이긴 하지만, 보다 제한적이다.(47)리얼리즘은 이러한 낭만주의의 뿌리와 자연주의의 가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합적이고 변증법적인 내적 연관성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리얼리즘이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낸 것은 인생을 묘사하는 반영적인 것이기보다는 지도적 인생, 즉 고착된 사실성에만 집착되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리얼리스트들은 모든 사실을 주의 깊게 통찰하고 새로운 인간의 윤리의식에 의미를 두어야 함을 깨닫는다.(48)리얼리즘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이 추상적인 예술형식들과 같이 무절제한 관념적 유희에 빠져들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환상 속으로 비약하는 것을 지양하고, 혹은 현실의 일면적 피상적 묘사에 의해 트리비얼리즘으로 떨어지는 것을 단호히 배격한다. 말하자면 동시대의 사회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는 리얼리즘의 강령은 인생에 대한 총체적 통합정신이라는 맥락을 지니는 것이다..(49)체험과 표현의 정확한 재생력은 이중적 과제가 되어 작가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련이지만 어느 쪽도 경시할 수 없는 것이다.(49)작가들이 어느 정도 주변 현실을 직시했는가를 검증하는 것은 바로 그 시대 소설의 리얼리티를 검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50)리얼리즘 소설은 특정한 내용의 특정한 형태이다. 따라서 존재 그 자체의 문제 해명은 인간의 특수한 개성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은 개인의 고독감과도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사람이 놓여질 수 있는 특수상황이란 인격이나 사람이 사는 환경에 종속되는 것이다. 가령 근대소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톨스토이의 고독은 보편적인 인간조건에서가 아니라 특수한 사회적 숙명 앞에서 형성된 것이다. 특수한 사회적 숙명 앞에 놓인 개인의 고독이 근대의 이론과 실천의 특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하이데거가 서술한 이른바 '던져진 곳의 存在' geworfenheit in dasein 라는 의미로 더욱 생생히 일깨워질 것이다. 인간이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동안 거기에서 환기되는 특수한 양식·긴장·암시 등의 여러 가지 가능성은 물론 개인의 특징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51) 리얼리즘은 사람의 실제 생활을 潛在力 potentiality으로서 파악하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링러리즘 소설은 인식론적 본질과 외적세계의 치밀한 관찰이 통합될 때 그 속성이 드러난다. 리얼리즘 소설은 동시대의 특정사회 속에서 사람의 진실을 발견하려 하는 것이다.(52)우선 1920년대 초반 한국 작가들이 모색한 자연주의는 실험정신에 얼마나 투철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야만 한다.(56)어떤 면으로는 리얼리즘의 소설은 그것이 어떠한 인간의 삶을 그렸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중심을 둔다. 그것은 아무리 시대나 민족마다에 차이성을 인정하더라도, 그 목표와 방법의 면에서 소설에서의 리얼리즘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58)철학에서의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하여 보면 근대소설과 리얼리즘은 공통된 측면을 갖고 있다. 이 양자는 근대철학을 배경으로 하여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란 고정관념화된 보편적 지식에 대한 거부태도를 가지고 과거의 유산과 결별하면서 자유롭게 진리에 도달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58) 3. 현진건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치 못하는 것이다. ......로만티즘도 좋다. 리알리즘도 좋다. 상징주의도 나쁜 것이 아니요, 표현주의도 버릴 것 아니다.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이것이야말로 다른 아모의 것도 아닌 우리 문학의 생명이요 특색일 것이다.(빙허,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 『開闢』, 65호, 1926, 134쪽-인용자 재인용)(125)흔히 빙허의 문학관과 소설양식은 민족주의 차원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기법의 성숙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구체적인 면에서 보면 빙허는 동시대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춘원·동인·상섭 역시 빙허가 밝힌 위의 진술과 유사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빙허의 문학관이 동시대 사회적 진실을 실감 있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면, 전형적인 리얼리즘 정신과 기법에 접근된 것이다. 더욱 그의 문학적 리얼리티가 시대정신과 연결시킨 것이라면, 소설의 진실을 추적하는 전체적 연대성으로의 통합관과 더욱 가깝다. 빙허가 지·정·의의 종합적 미의 형성을 소설 미학으로 평가한 것은 우리 소설사에서 소설의 수준을 한 계단 올린 것이다.(125)문학의 연구가 거시적 視界를 통하여 총체적으로 파악될 때, 그리고 작품의 다양성과 통일된 조화(원문은 윗점임)성이 검증되었을 때 문학의 본질은 해명된다. 예술적 표현은 곧 새로운 지각과 낡은 체험(殘想)의 결합 과정에서 형성된다. 즉 체험의 잡다한 요소들이 용해되고 재결합되고 조직화되는 창조과정에서 사상은 그 본체의 형체를 잃고 새로운 예술적 형상의 근간으로 되나 문학을 독창적으로 만드는 것은 주로 정서적 기능인 것이다.(126)빙허의 評眼을 이러한 통합적 해석론의 관점으로 소박한 대로 받아들인다면 춘원의 계몽문학경향, 동인의 반춘원적 예술지상주의로의 경향 혹은 경향문학의 목적문학 편향을 그가 어떻게 극복하고 동시대이 진실을 소설에서 발전시켰는가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126)빙허가 20년대 '조선역사'를 말하는 증인의 대표자요, 당시의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대표자요, 당시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완성한 대표자로서 우리 문학사에서 귀중한 존재(김우종, 『작가론』, 동화문화사, 1973, 64쪽-인용자 재인용)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기적 배경을 밝혀보는 데서도 참고할 수 있다.(126)빙허의 작품목록을 시대순으로 배열하면, 작품동기가 일정하게 암시되어 있고, 점층적으로 강화됨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同工異曲의 主題素가 시대상과 밀착되어 극적 구성기법이나 장면 중심적인 영상수법으로 이동함으로써 더욱 작가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암시한다. 정치적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다시 말하면 국권을 박탈당한 동시대의 조선 지식인의 자기정체상실과 좌절의식을 우회적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큰 명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식민지정책에 대한 저항이며, 작가는 필연적으로 소외자의 위치에서 일제의 검열을 피하는 위장문학의 작전술을(128) 최대한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의 의도가 잠재해 있는 작품의 본 의미를 상징적 암호로 해석해 보아야 한다. 빙허 작품의 목록 작성은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며,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중심주제를 구심점으로 하여 전반적으로 관련되어 있다.(129)서구에서의 근대화라 함은 중세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트뢸치」는 다음의 3요소에서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정신적 요소로서는 자연과학·합리주의·인간중심주의, 그리고 정치적 요소로서는 합리적 국가주의·민주주의를 들고, 사회경제적 요소로서는 자본주의·시민계급을 들고 있다. 그러나 동양의 근대화 과정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성숙과정을 밟지 못하고 아직 근대적(129)인간 형성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훈련도 없었다. 이와 같이 근대화를 밟지 못한 계급층·사회층이 지배하는 사회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고취되어도 그것은 가족·종교·촌락과 같은 제1차적 사회집단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난다.(130)근대 이후의 민족주의는 근대적 인간의 고도한 자주성·주체성 위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밟지 못한 곳의 민족주의는 개인을 매몰시키는 제1차적 사회집단에 집착하게 되므로 모든 민족활동이 단일한 국가에 집결되지 않고 모래알처럼 이산한다. 민주화 국민화를 매개해야 할 통신과 인쇄의 발달은 도리어 족보의 발간·향토애·지방주의의 발휘를 조장시킨다.(130)경제적 후진성, 정치적 훈련의 부족, 사상적 빈곤 등 모든 방면에 걸친 저해의 요인이 重合되어 있는 동양의 지식인 특히 식민지 통치하의 조선 인텔리겐차의 사회문제는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자주적으로 근대사회를 형성하지 못한 사회에 있어서는 정신적 발전이 기술적 발전보다 뒤떨어지기 쉽다. 여기에 조선 인텔리켄차의 근대화 현실의 암벽은 더욱 두텁다. 이러한 논리는 빙허의 20년대 작품에 대체로 적용된다. 빙허는 동시대의 시대상에 맞는 과도기적 생활의 현장을 한 상황에 적합하게 표현하고, 점층적으로 하층민의 극한상황을 소설의 장치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문학을 계급적 편견에 의한 투쟁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아각성과 민족해방의 실현매체로 삼고 있다.(131)일본 유학생이었던 빙허는 민중과 커다란 간극을 인식하고 인텔리켄차로서의 사명감을 실현하기 어렵던 정황을 「빈처」계열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고백한다.(131)대체로 주인공들은 극적 무대 위에 놓여져 숙명적으로 미지의 세계에서 방황하지만 이미 작가와 독자는 은밀히 교신하여 멍청한 그들의 무지를 지켜보고 있다. 작가는 사실의 현장을 박진감 있게 그리다가 돌연히 어조를 바꾸어 반전의 극적 수법으로 진실을 언제나 가늠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진실의 본질을 양면적으로 조명하면서 비극적 결말 속에서 깨닫게 하여 긴장미를 갖게 하는 아이러니의 기법을 흔히 쓰고 있다.(131)「빈처」의 작중인물인 미숙한 작가는 자기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희생적이고도 봉사적인 자기 처를 동정하면서도 끝내 극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빈처」는 등장인물들이 여러 목소리가 어울려 독자의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 있다. 첫째, 주인공의 稚氣와 감상적인 미숙성이다.(132)여기 아내는 '나'의 의존 대상자이며 마치 어린애가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과 같은 구실을 하는 모성 콤플렉스적인 대상이 되는 셈이다.(133)아내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애용되는 도덕적 언사 가운데 '부덕'·'현처'·'현모양처'·'요조숙녀' 등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불리한 여자들의 지위에 대한 역설적 명칭이 따라 다닌다.(133)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한다. 「빈처」「술 권하는 사회」「타락자」의 부부관계는 도덕적 품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의 심층면도 있으나, 동시대의 지적 교신이 단절된 부부간의 비극을 간과할 수 없다. 어쨌든 일본 유학까지 한 지식청년의 사회적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과장된 무지는 독자들에게 극화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확대 해석하면 '아내'는 동시대의 대중의 무지를 상징할 수 있다. 선량한 대중의 무지와 지식인의 무력은 다른 차원에서 격차를 벌리고 조선의 장래가 암담함을 시사한다. 즉 조선사회가 지향해야 할 근대화의 제요소 특히 시민계급의 자주성, 주체성의 자각을 선도해야 할 인텔리켄차의 '옆에서의 혁명'조차 의도할 수 없는 작가는 대중의 무지를 아이러니의 수법으로 엮어보려 한다.(134)빈궁을 소재로 한 「빈처」는 감상적 요소가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134)지하게 자기자신에 대한 냉엄한 관찰과 아내의 미묘한 내면심리를 객관화시키려 한 작품이다. 비록 주인공인 나의 성격이 일관되지 않고 지나치게 단조롭고 갈등 요소가 없다거나 감상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稚氣가 있다 할 지라도 20년대 초창기에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단편소설의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소설임에 틀림없다.(135)이 소설(「운수 좋은 날」, 『개벽』, 48호, 1924. 6-인용자)의 구조는 단일한 사건과 사물, 배경으로 작가의 의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명암대조법의 틀을 가지고 있다. 오랜간만에 만난 행운의 날이 사실은 가장 운이 나쁜 날이라는 최종적 판단은 작품 플롯 진행과정에서 주기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한 진실의 현장을 더욱 점층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작자는 반전의 역설적 기법을 사용하면서 같은 의미를 반복한다. 결국 「운수 좋은 날」의 시학적 구성원리는 계층적 소외자인 도시 노동자의 숙명적 비극을 형상화하기 위해 사용된 아이러니 수법이다.(135)"겨울철 음산한 날씨에 눈은 아니 오고 비가 내린다"는 것은 벌써 이 작품이 '프라이'가 밝힌 대로 겨울의 신화쟝르에 속하는 아이러니소설 유형으로서 비극적 풍자소설에 가까움을 암시한다.(135)김첨지의 비극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한 개인의 운명적인 비극, 사회적 모순, 혹은 식민지적 부조리한 사회환경에 저항한다는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36)빙허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비극 문제나 사회적 모순을 김첨지 한 개인의 가정적 비극으로 축소시켰고, 독자에게는 위장적 수법으로 시대의 비극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의 정신에 아이러니를 조화시켰고 그러한 극적 수법으로 문학성을 고양시키고 있다.(137)빙허의 소설관은 생활과 유리된 문학을 거부하고 이 시대의 조선사회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데 있다. 따라서 「운수 좋은 날」(137)의 궁극적 주제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선사회의 경제적 빈곤 원인을 추적하는데 있다. 결국 작가는 당대의 사회적 병리요소를 한 도시 실업자와 같은 육체노동자에게 집약시키고 있음을 찾게 된다.(138)「운수 좋은 날」이 도시 노동자의 궁핍과 비극을 극대화하여 20년대의 부조리한 경제모순을 극명하게 묘사한 것이라면, 「불」(『개벽』, 55호, 1925. 1-인용자)은 농촌의 빈궁으로 고질화된 인습의 질곡을 민며느리로 간 15세 소녀의 비극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다.(139)「불」은 강열한 이미지를 함축한 제명이다. 같은 호에 게재된 基鎭의 「불이야! 불이야!」를 위시해서,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여명」창간호, 1925. 1), 최서해의 「홍염」(「조선문단」, 1927. 1), 김동인의 「광염쏘나타」(「삼천리」, 1930) 등은 원초적 불의 이미지를 작품 속에 투영시켜 의미의 해석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들 작품의 말미에 방화를 한 것은 유사한 유형을 갖게 되어 이 시대의 관습화된 장르의 문학으로 분류할 수도 있게 된다. 물론 여기서도 빙허의 불 이미지와 동인의 불 이미지는 작가의 독특한 기질과 작품미학의 상이로 차이성을 드러내겠지만 대체로 이들 작품들은 시대저건의 울분을 노(139)정한 것이다. 실제로 1925년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보도된 화염원인의 거의 30%가 방화였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말해 준다. 빙허의 「불」의 경우 민며느리의 방화로 끝을 맺게 된 것은 작품 주제동기에서부터 필연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140)빙허는 「불」의 주인공 '순이'를 등장시켜 해결할 수 없는 가난한 농민의 숙명적인 무지와 인습의 굴레를 근대화 정신의 소산인 봉건적인 인습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조명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선을 굳힌다.(140)'순이'가 특정한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자'로 주시되면서 어떻게 환경에 순응 혹은 저항하는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불은 이 시대 농촌의 폐습을 리얼하게 부각시켜 지방풍토색을 짙게 나타내고, 한 연약한 소녀가 그러한 인습 속에서 어떻게 희생되는가를 휴우머니즘적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자성시킨다.(141)'순이'가 최종적으로 인습의 질곡에서 불로 인해 해방된 것은 인습의 부당한 모순을 지양하려는데 있었고, 금기 파괴의 기쁨이기도 하다. 불에 탐닉하여 희열하며 미지의 세계로 비상하려는 '순이'의 면모는 이른바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를 나타내는 소녀의 절규다. 금단의 불에 대한 존경과 그 불을 훔쳐서 사용하는 인간의 '영리한 불복종'은 고질화된 인습의 억압이 극한적 상황에 이르렀을 때 폭발되었다.(142)「B사감과 레브레타」(「조선문단」, 1925. 2)는 「운수 좋은 날」이나 「불」의 경우처럼 노동자나 농민의 빈궁상을 소재로 삼은 비극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여학교 기숙사 사감의 위선을 폭로하고 동시대 여학교 기숙사의 시대착오적인 인권 유린을 극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또 하나의 중심사상은 인간해방과 평등정신이었으므로 남녀간의 자유연애사조는 정당하게 표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표현이요, 생활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정신의 근거를 해명하면 여학교 기숙사에서의 부당한 禁足令과 개인의 서신 검열과 같은 것은 부당한 인권 침해요 시대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자유사조를 우선 이해하(142)면 「B사감과 레브레타」의 주제 동기와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143)작가는 철저히 위장된 한 인물의 본질을 전형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를 희극적 요소로 가미시켜 극화시키고 있다. 결말 부분에서 창 틈으로 엿본 기숙사 여학생들에 의해 B사감의 본성이 폭로되는 것과 같은 극적 장면은 바로 희극적 아이러니의 수법을 의미한다. 즉 작자는 낮과 밤의 양면적인 장면 속에서 한 인간의 철저한 위장을 벗기기 위해 극적 기교로 장면구성을 하였으며, 상반된 인간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143)철저하게 애정문제를 멸시하여 지나치게 학생들의 '러브레타'를 규제했던 노처녀 B사감선생이 바로 그 빼앗은 '러브레타'를 보고 자정에 흥분하는 커다란 모순은 인간의 감추어진 본성을 찾는 리얼리즘이나 아이러니의 기법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결말 부분의 급전으로 인하여 놀라움과 긴장감과 극적 아이러니로 감추어진 인간의 본성을 갑자기 드러내는데 있다.(144)「고향」(「朝鮮의 얼굴」, 1926)은 소재가 동시대 농촌의 황폐와 궁핍상을 드러내기 위해 한 실향민의 방랑생활을 묘사한 것이지만 「운수 좋은 날」이나 「불」보다는 훨씬 넓은 시공간 속에서 시대정신과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145)「고향」의 주인공인 '나'가 만난 작중인물은 이 시대 많은 조선인이 겪는 떠돌이 방랑생활을 하는 전형적 인물이다.(145)주인공의 슬픔은 같은 조선인에게만 상통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 속에서 벗겨진다.(145)극한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았던 농민의 떠돌이 방랑생활을 하는 것을 작가가 시대의 중심문제로 삼아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고향」에 등장되는 주인공의 방랑생활과 그 비극적인 삶의 신세타령은 바로 이 시대 조선의 현실을 조명한 것이다.(147)「고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사회·역사적 맥락, 문학 관습의 전이 이외에도 주인공의 심층적인 내면심리 등을 검증하면서 작가의 표현미학과 결부시켜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이 시대의 처절한 궁핍 상황은 아내나 딸의 정조와 물질과의 교환이 생존수단이 되는 소설적 소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148)「고향」의 주인공이 체면의식의 가면을 쓰게 된 것 역시 조선의 지정학적(중국과 일본 등 강대국의 영향권에 든 한반도)인 역사 배경 하에서 자기 생존 보호책이라는 특수성이 한 조건으로 될 수 있다. 그의 고향은 동척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南鮮地方이라는 숙명적 사회배경 속에 있었으므로, 이로 인해 불가항력으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던 정체성 상실은 타인에게 附和雷同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다.(148)빙허는 반전을 통한 자각의 기법으로 술을 사용해서 분위기의 자연스러움을 훌륭히 처리한다. 가령 그의 초기작품인 「빈처」「술 권하는 사회」를 비롯해서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私立精神病院長」에서 W군 등의 본질적 내면의식은 술에서 찾아진 것이다.(149)「私立精神病院長」은 「개벽」 65호(1926. 1월호, 1925. 12. 9. 탈고)에 게재된 것이다. 同誌에는 빙허의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이라는 평문도 함께 발표되어 「私立精神病院長」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어떠한 문예사조도 수용할 수 있지만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가(149)장 중요한 생명이요 특색이라는 것이다.(150)빙허가 '조선혼과 현대정신'(빙허,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 『개벽』, 65호)의 문학관에서 '달뜬 기염에서 고지식한 개념에서 수고로운 모방에서 한 걸음 뛰어나와 차근차근하게 제 주위를 관조하고 고요하게 제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려'는데 있다고 스스로 해명한 것처럼 작품 속에는 침통한 조선의 時代苦(원문은 윗점임)가 앞선다.(150)미친 P군의 보호자였던 사람 좋은 W군이 또한 미쳐서 살인까지 하게 된 아이러니컬한 대단원은 극한상황 속에서 인간의 반응을 실험한 자연주의적 수(150)법일 것이다. 더 의미를 확대하면 W군의 참극은 W군의 성격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외부적 영향 속에서-동시대의 시대고가 경제적 무능력작인 지식인 실업자  W군에게 가장 예민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151)1920년대 초반의 문학사조는 대체로 己未 이후 자연주의·사실주의·예술지상주의·악마주의·상징주의 등 사상적 혼류에서, 1923년 이래 커다란 두 주류는 민족문학과 이른바 경향문학과의 대립에서 찾아진다. 빙허의 위치는 민족주의적 계열에 속하면서도 소시민적 자전체로서의 낭만주의 혹은 기교가로 그 뒤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작가로 전환하면서도 「운수 좋은 날」 이후 그 소재면에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빈궁문학으로 기울어진다.(151)「貞操와 藥價」(『신소설』, 1929. 12)의 소설 제목이 지나치게 노골화된 命名인데도 불구하고 그 주제는 상당히 구체적인 문체로 구성되고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의 대부분 작품 결말에서 보인 비운의 주인공과는 달리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발생적인 신경향파작가라고 불리우는 최서해의 「飢餓와 殺戮」(『조선문단』, 1925. 6)이 그 소재면(빈궁한 '경수'가 그의 아내 약값으로 1년 동안 의사집 머슴살이를 함)에서 유사하면서도 서해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결말의 공식적인 저항과 살인극에 비교하면 빙허의 미학은 새로운 인간상응ㄹ 창조하고 있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빙허의 문체부터 우선 검토함녀서 그의 문학관을 조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빙허는 후기 작품으로 올수록 참된 리얼리즘의 성숙미를 더해 가고 있다.(152) 빙허의 리얼리즘은 地圖的인 인생 혹은 고착도니 사실을 묘사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뿌리와 자연주의의 가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합적이고 변증법적인 내적 연계성 위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림이란 카메라의 複寫性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라 하겠다.(153)소설의 환경은 극한적 가난이고, 주인공은 상황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이 던지워진 숙명적 환경은 굶주림, 질병, 빼앗긴 토지, 약값으로 지불되는 정조가 상징하는 추악한 조건들이지만, 그들은 그러한 질곡에서도 줄기차게 살아가는 삶의 철학을 보이고 있다.(153)이 작품은 분명히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보존하려는 개체보존욕을 시사한 것이다. 농부의 아내 경우 세속적인 윤리관은 맞지 않는다. 즉 남편의 생명이 가장 위급할 때, 기존적 윤리의식의 터부는 파(154)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 넓은 의미로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의 탈출구가 무엇인가도 점검하게 되고 줄기찬 생명력의 고귀함을 획득하게도 된다. 「貞操와 藥價」는 그런 의미에서 새 윤리성을 제기한 작품이다.(155)빙허의 소설 역시 전체적 연대성으로 통합관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상상미학으로서의 소설의 기능은 지적인 동시에 정서적이며, 감각적인 동시에 이성적이라는 것, 즉 眞善美의 통합을 강조하고 있다.(155)빙허의 세계는 차차 내면적인 고민을 시대의 모순으로 돌리면서 인간의 가면과 본질의 낙차를 아이러니의 기법으로 성숙시켰다.(155)
114    潘星完 편역, <<발터 벤야민 문예이론>>, 민음사, 1983 댓글:  조회:2605  추천:0  2009-05-16
1. 자전적 프로필 [글을 잘 쓴다는 것]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26쪽)   [나의 서재 공개]책을 구입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자신이 직접 그 책을 쓰는 일이다.(32쪽)작가들이란, 책을 사지 못할 만큼 가난하기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 수는 있어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에 대한 불만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이다.(33쪽)   2. 문예비평 [프란츠 카프카]나는 오늘날의 유럽과 인류의 몰락에 대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 카프카와의 대화를 기억한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신의 머리에 떠오른 허무주의적 사고들이자, 자살적 사고들이야.} 이 말은 처음에 나에게 그노시스 Gnosis의 세계상, 즉 신을 사악한 조물주로 또 세계를 그 신의 타락으로 보는 신비적 세계관을 상기시켰다. {아니, 그게 아니라}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야.}-{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인 이러한 현상계 외부에는 희망이 존재하고 있을까?}-그는 미소를 지었다. {암,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이 있지.-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막스 브로트) 이러한 말들은,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장 특이한 인물들, 즉 유일하게 가정의 품을 벗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인물들로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 준다. 이 이상한 인물들은 동물들이 아니다. 더구나 반은 고양이이고 반은 양인 잡종도 하니고 오드라데크와 같은 架空의 동물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아직도 가정의 영향권 안에서 살고 있는 것들이다. 그레고르 잠자가 바로 양친의 집에서 해충으로 깨어나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상속물이 반은 양이고 반은 고양이인 괴상한 동물이며 또 오드라데크가 家長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그나름의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助手>들은 이러한 서클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들이다.(68쪽)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간다르바 Ghandarve라는 아직도 미완성 상태의 존재인 미숙한 피조물이 있다. 카프카의 조수들도 이와같은 성격을 띤 존재들이다. 그들은 다른 어느 인물군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누구한테도 낯설지 않다. 그들은 이를테면 여러 인물군들 사이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68쪽)는 使者들이다. 카프카가 말하고 있는 대로 그들은 使者인 바나바 Barnabas와 비슷하다. 그들은 아직도 자연의 모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룻바닥 한쪽 구석에 헌 여인의 스커트 두 벌을 깔고 잠자리를 마련하였다....가능한 한 공간을 적게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팔다리를 끼기도 하고 서로 쪼그리고 앉는 (물론 언제나 속삭이고 킬킬거리면서)등의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 어스름녘에는 그들이 있는 구석엔 단지 커다란 실뭉치 하나만 보였다.>바로 이와같은 사람, 즉 미숙하고 서투른 인간들을 위해 희망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69쪽)이 사자들의 활동에서 별다른 무리없이 살짝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이 전체 피조물들의 세계를 답답하고 음울하게 지배하고 있는 법칙이다. 그 어느 것도 확고한 지위나 대치될 수 없는 확고한 윤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모두 상승하거나 전락할 찰나에 있다. 또 그들은 모두 그들의 적이나 이웃과 교체될 수가 있다. 나이가 찼으면서도 그들은 모두 성숙하지 못한 채로 있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제야 비로소 오랜 존재의 출발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질서나 위계질서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이 암시해 주고 있는 신화의 세계는 신화에 의해 구원이 이미 약속되고 있는 카프카의 세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젊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카프카는 신화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판 오딧세이로서의 카프카는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의해 사이렌들의 유혹을 뿌려쳤던 것이다.(69쪽)도어벨 소리치고는 너무 큰 이 종소리가 하늘에가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카프카적인 인물들의 제스쳐는 일상적 주위세계에 대해서는 너무 강력하며 보다 넓은 어떤 세계로 뚫고 나가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대가다운 노련한 면모가 드러날수록 그만큼 그는 그러한 동작들을 일상적인 상황에 적응시키거나 아니면 그 동작들을 설명하는 일을 더 자주 피하고 있는 것이다.(73쪽)그의 단편들은 비유가 아니며 또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의 단편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인용할 수 있고 또 설명을 위해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카프카의 비유들을 해명해 주고 또 K의 제스쳐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거동을 해명해 주는 어떤 교리를 소유하고 있을까? 그러한 교리란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이 그러한 교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카프카는 그러한 것들은 저 교리를 전해주는 유물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그러한 것들은 저 교리를 준비하는 선구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삶과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카프카는 그 조직이 그에게 불투명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한층 더 끈질기게 그것에 몰두하였다.(75쪽)카프카는 평범한 사람들 측에 속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해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한발한발씩 자신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이해의 한계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때때로 그는 마치 도스토예프시키의 종교 패판장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77쪽)카프카는 자기자신을 위한 비유를 창작해 내는 보기 드물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비유들은 설명이 가능한 것에 의해서 완전히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와는 반대로 그의 작품해석에 방해가 되는,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예비조치를 강구하였다. 우리는 그의 작품의 내부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또 의심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카프카가 이미 언급한 우화를 해석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카프카 특유의 읽는 방식을 유념해야만 한다. 그의 유언은 이러한 점을 말해주는 또 다른 하나의 예이다. 자신의 유고들을 소각시켜 달라고 한 카프카의 지시는 전후사정을 두고 보더라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법 앞에 서 있는 문지기의 답변들처럼 조심스럽게 따져보아야만 한다. 매일매일의 삶이 가져다 주는 풀기 어려운 행동방식과 해명하기 힘든 발언 앞에 서 있었던 카프카는 어쩌면 죽음을 통하여 적어도 자신의 동시대인들도 그와 동일한 어려움을 맛보도록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77쪽)카프카의 세계는 세계라는 하나의 극장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대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은 누구나 오클러호머의 자연극장에로의 입단이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채용이 이루어지는가는 풀려질 수 없는 문제이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인 연극적 재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응모자에게 기대되어지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정이 절박하면 그들이 요구하는 바대로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되고 있다. 그들은 마치 피란델로의 드라마에서 6명의 단원들이 작가를 찾아나서는 것과 같이 그들의 역할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이나 피란델로의 인물들의 경우 이러한 장소는 마지막 도피처이다. 또 바로 이러한 사실이 그 장소가 구원의 장소라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구원이라는 것은 현존재에 덧붙여지는 프레미엄이 아니라 오히려 카프카가 말하고 있듯이 <그 자신의 앞이마의 뼈에 의해 길이 차단되고 있는> 어떤 한 인간의 마지막 출구인 것이다.(78쪽)카프카 역시 우화작가였다. 그러나 어떤 종교의 창시자는 아니었던 것이다.(79쪽)카프카의 단편과 장편소설에 나타나는 여러 모티브들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일보다는 그의 유고인 비망록에서 사변적인 결론을 추론해 내는 일이 더 쉽기는 하다. 그러나 작품에 나타나는 모티들만이 카프카의 창작을 지배하였던 前世的 vorweltlich 힘들을 이해하는 관건을 제공한다. 이들 前世的 힘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세속적인 힘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힘들이 카프카 자신에게 어떠한 이름을 가지고서 나타났는지를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즉 그는 그 힘들의 정체를 몰랐고 또 그러한(82쪽) 힘들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랐는 점이다. 그는 단지 前世 vorwelt가 죄라는 형태로 그에게 내미는 거울 속에서만 재판의 형태로 나타나는 미래를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일까? 재판관을 피고로 만드는 재판일가? 그 소송 자체가 형벌이 아닐까? 여기에 대해 카프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대답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였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런 대답을 미루려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이야기들 속에서 서사성이 그 의미를 다시 획득하는 것은 미래를 연기시킨다는 세헤라자데의 입을 통해서이다.(83쪽)   [프루스트의 이미지]으레 하는 얘기지만, 모든 위대한 문학적 작품들은 하나의 장르를 정립하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작품은 특수한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경우는 가장 파악하기가 힘든 경우 중의 하나이다. 허구적인 얘기와 自傳的 사실, 그리고 해설이 하나가 되어 있는 구조에서 시작해서 끝을 모르는 문장의 구문에 이르기까지(여기에 넘쳐 흐르는 말의 나일강은 점차 넓은 진실의 영역으로 나아가면서 이 지역을 비옥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규범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관찰자의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의 중요한 인식은, 문학 분야에서의 이 위대한 특수 경우가 동시에 지난 수십년 동안에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점이고, 또 이 업적이 이루어진 제반조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건강했다는 점이다. 이상스러운 병과 엄청난 부, 그리고 비정상적인 성벽이 바로 이러한 불건강한 조건들이었다. 이러한 삶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전형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징표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 뛰어난 작가적 업적이 불(102쪽)가능의 중심부에서, 또 모든 위험한 중심부-이러한 위험한 중심부는 동시에 모든 위험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하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 <필생의 업적>의 위대한 실현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하나의 마지막 실현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의 이미지는, 시와 삶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커가고 있는 간극이 획득할 수 있었던 最大의 人相學的 표현이다. 그의 이미지를 떠올리고자 하는 시도를 정당화시키는 윤리적 가치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103쪽)잘 알다시피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삶이 아니라 삶을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그 삶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삶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아직도 부정확하고 매우 엉성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여기에서 기억하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가 체험한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 다시 말해서 회상 Eingedenken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기억을 WK는 일이 아니라 망각을 짜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가 무의지적 기억 me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부르는 무의지적 회상은 흔히 기억이라고 불리워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망각에 훨씬 가까운 것이 아닐까? 기억이 씨줄이고 망각이 날줄이 되고있는 이러한 무의지적 회상이라는 작업은 회상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회상하는 일의 반대가 아닐까?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밤이 짰던 것을 낮이 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약하고 느슨한 몇몇의 조각 속에서 망각이 우리들 속에서 짰던 이미 체험한 삶의 양탄자를 갖게 된다. 그러나 낮이 시작되면 우리는 언제나 목적과 결부된 행동을 하게 되고 또 그 위에 목적에 맞게 기억을 하게 됨으로써 망각이 밤새 짰던 직물과 장식은 해체된다. 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마지막에 가서는 인공적으로 불을 밝힌 방안에서 그의 모든 시간을 아무런 방해 없이 작품을 쓰는 데 이용하였고, 또 이를 위해 시간이 만드는 정교한 상감조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낮을 밤으로 바꾸었던 것이다.(103쪽)로마인들이 텍서트 Textum라는 단어를 직물처럼 짜여진 어떤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두고 보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텍스트만큼 촘촘히 짜여진 텍스트도 없을 것이다. 그의 눈에는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의 성에 찰 만큼 촘촘하고 지속적으로 짜여져 있지 않았다.(103쪽)교정을 보는 프루스트의 습관은 문선공을 거의 절망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교정지는 언제나 여백 가득히 씌어져서 되돌아왔다. 그러나 오식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고, 활용한 수 있는 공간은 온통 새로운 텍스트로 채워졌다. 이렇게 해서 기억의 법칙성은 작품의 전체 범위 내에서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그 이유는 체험되어진 어떤 사건은 유한한 데 비해 기억되어지는 사건은 그 사건의 전과 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풀어 주는 열쇠구실을 함으로써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에 의한 사건의 짜임새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억이다. 다시 말해 텍스트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오로지 기억이라는 순수행위 actus purus 그 자체일 뿐, 작가도 아니며 또 얘기의 줄거리는 더욱 더 아닌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작가의 개입과 얘기줄거리에 의해 생겨나는 중단은 다만 기억이라는 연속성의 또 다른 면, 이를테면 양탄자 뒷면의 무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104쪽)프루스트가 그렇게 열광적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그의 끝없는 노력의 저변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무엇일까? 또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모든 삶과 작품 및 행동이란 다름아닌 현재적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진부하고 가장 덧없으며, 또 가장 감상적이고 가장 약한 시간의 일사불란한 전개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인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어느 대목에서 프루스트가 그의 이러한 가장 본래적인 시간을 묘사했을 때, 그는 우리들 누구나가 이러한 시간을 자기자신의 현재적 삶 속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묘사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본래적 시간을 하나의 일상적 시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시간은 밤과 더불어, 열려진 창문의 난간에서 불어오는 바람결과 새들의 잃어버린 지저귐과 함께 온다.(104쪽)콕토는 프루스트 독자의 최대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즉 그는 프루스트라는 인간 속에서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편집광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보았던 것이다. 행복에 대한 이러한 동경은 프루스트의 눈에서 및나고 있었으나, 그 눈은 행복한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 속에는 도박이나 사랑 속에 빠져 있을 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행복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 왜 프루스트의 작품을 관류하는, 가슴을 멎게 하고 뒤흔드는 행복의 의지가 그의 독자들 가슴 속에는 좀처럼 파고 들지 못하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여러 대목에서 프루스트 자신도 그의 독자들이 이 작품 전체를 체념과 영웅주의 및 금욕주의라는 해묵은 안이한 관점에 의해 바라보도록 하는 데에도 一助하였다. 아무튼 인생의 모범생에게는 위대한 업적이란 다름아닌 노력과 비탄, 그리고 환멸의 결과라는 사실만큼 더 분명한 사실은 없는 법이다.(105쪽)행복을 향한 의지에는 일종의 행복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적 면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頌歌적 행복의 모습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悲歌적 행복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 보지도 못하고 또 지금까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즉 열락의 절정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은 원천적인 최초의 행복을 영속적으로 복원하려는 영원히 거듭되는 새로운 반복이다. 프루스트의 경우, 현재의 삶을 기억이라는 마술의 숲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비가적 행복의 이념-우리는 이를 엘레아적 eleatisch 행복의 이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다.(105쪽)프루스트에게도 일종의 옛 이상주의의 흔적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흔적이 이 작품의 중요성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프루스트가 펼쳐 보이고 있는 영원성은 곧장 나아가는 무한한 시간으로서의 영원성이 아니라 둘둘 말린 나선형적 시간으로서의 영원성이다.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실제적인 모습을 하고 공간과 결부되어 있는 이러한 나선형적인 시간의 진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진행이 그 본연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곳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기억 속과 또 외부에서 일어나는 늙어감 속에서이다. 늙어감과 기억의 상호작용을 추적한다는 것은 프루스트 세계의 핵심부, 즉 둘둘 말려 있는 나선적 시간의 우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유사성의 상태 속에 있는 세계이고 또 이 세계 속에는 교감 Korrespondenz 의 영역이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교감을 최초로 파악한 것은 낭만주의자들이고 이러한 상호교감을 가장 깊이 파악한 사람은 보들레르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이를 밖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프루스트이다. 그것은 <무의지적 기억>의 작품, 즉 불가피하게 늙어가는 노화의 과정에 대적해서 回生하는 힘의 작품인 것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아침이슬처럼 <일순간 Nu>에 반영되는 곳에서는 回生의 고통스러운 쇼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한번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끌어모으게 되는 것이다.(113쪽)프루스트의 방법은 성찰 Reflexion이 아니라 과거의 일들을 현재 속에 생생히 떠올리는 방식 Vergegenwartigung이다. 프루스트의 전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한 드라마를 실제로 체험해 볼 시간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를 늙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지, 결코 그 밖의 사실이 아닌 것이다. 얼굴에 새겨진 작은 주름, 그것은 위대한 정열이나 악덕내지 우리들을 가끔 찾아 오는 인식의 기록부이긴 하지만 정작 주인인 우리는 주인노릇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114쪽)기억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만 취각에 의해서 보관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여기서 기억 속에 있는 냄새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냄새에 대한 프루스트의 민감성이 우연한 기회에 맡게 된 냄새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이 찾아 내는 대부분의 기억은 시각적 이미지로서 우리들에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무의지적 기억의 가장 유동적인 형태까지도 그 대부분은 유리된-그것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현재적이긴 해도-시각적 이미지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작품에 내재하는 가장 내적인 토운에 자신을 내맡기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러한 무의지적 회상이라는 하나의 심층에 자신을 침잠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때 우리들이 침잠하는 무의지적 기억의 심층에서는, 기억의 여러 계기들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개별적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마치 그물의 무게를 보고 고기가 얼마나 잡혔는가를 아는 어부처럼, 무정형적이고 이미지가 없는 상태로 또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도 무게의 어림짐작으로 떠오르는 전체적 이미지로서 부각되는 것이다. 취각이란,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내던져진 그물의 무게에 대한 감각을 뜻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의 문장은, 사유하는 육체의 전 근육에 의한 활동이고, 또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내던져진 그물을 걷어 올리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노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117쪽)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해서]엄밀한 의미의 경험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개인적인 과거의 어떤 내용들은 기억 속에서 집단적인 과거의 내용들과 결부되어 있다. 의식절차와 축제들을 동반하는 여러 儀式들은-이러한 의식들은 프루스트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이들 두가지 요소, 즉 개인적인 과거와 집단적인 과거의 내용들을 거듭해서 융화시키고 있다. 이들 儀式들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어서는 그 기억을 평생동안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의지적인 기억과 무의지적인 기억은 그 상호적인 배타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124쪽)충격적인 요인이 각각의 인상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의식이 자극의 방어를 위해 부단히 긴장하면 할수록, 그래서 이를 통해 의식이 성공을 크게 거두면 거둘수록, 그러한 인상들은 그만큼 더 적게(127쪽) 경험 Erfahrung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히려 그러한 인상들은 그럴수록 체험 Erlebnis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충격방어라는 특수한 작업은 사건의 내용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대신에 그 사건에 대해 의식 속에 하나의 분명한 時點을 지시해 주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찰의 최고업적이기도 할 것이고 또 그것은 사건을 하나의 체험으로 만들 것이다. 성찰이란 것이 없다면 원칙적으로 즐거운 공포 내지 혐오스러운 공포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충격방어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음을 뜻한다.(128쪽)소망이라는 것은 경험의 질서에 속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젊었을 때 소망했던 것을 나이가 들면 지천으로 많이 갖게 된다>고 괴테는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의 생애에서 소망을 일찍 품으면 품을수록 그만큼 소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지는 법이다. 한 소망이 오래 지속될수록 그만큼 더 그 실현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먼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러한 시간을 채우고 또 갈랐던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현된 소망은 경험에 선사된 왕관이다. 민중들이 사용하는 상징에서는 시간상의 먼 거리 대신에 공간상의 먼 거리가 등장한다. 따라서 공간의 무한한 거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유성은 어떤 실현된 소망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147쪽)보들레르가 의미했던 교감이라는 것은 위기에 아무런 영향을 받음이 없이 스스로의 위치를 굳히려고 하는 어떤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오로지 儀式的인 것의 영역 속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으로서 나타난다. 아름다움 속에는 예술의 儀式的인 가치가 드러난다.(150쪽)더 이상 아무런 경험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를 내는 일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러한 경험불능이다. 화를 내고 있는 자는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화를 내는 자의 원형인 티몬 Timon은 누구에게나 마구 대고 화를 낸다. 그는 더 이상 친구와 원수를 구별할 수 없는 입장에 있지 않다....화는 우울한 자를 내리누르고 있는 초침의 박자에 맞추어 폭발하듯 일어난다.(153쪽)우울 속에서 시간은 物化된다. 매 순간은 눈송이처럼 사람을 뒤덮는다. 이러한 시간은 무의지적 기억의 시간처럼 역사가 없다. 그렇지만 우울 속에서는 시간에 대한 지각은 초자연적으로 첨예화되어 있다. 매순간은 시간의 충격을 중도에서 가로챌 준비가 된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시간을 계산하면서 우리는 시간의 지속성보다 시간의 일사불란한 균일성을 더 우위에 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간계산 속에 비균질적인 특이한 단편적 순간들이 존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양적인 시간측정과 함께 질적인 시간을 인정해서 이 둘을 합친 것-바로 이것이 달력이라는 작품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를테면 회상의 자리를 기념축제일이라는 형태로 빈 채로 남겨 둔다. 경험을 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마치 달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듯한 기분을 갖게 된다. 대도시인은 일요일이면 이런 기분을 맛보게 된다.(154쪽)죽음이 제거된 지속은 끝이 없는 어떤 두루마리 그림의 조악한 무한성과 같다. 그러한 지속에서는 전통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지속이란 경험이라는 빌어 입은 의상을 입고서 우쭐거리며 행세하는 어떤 체험의 총괄개념이다. 이에 반해 우울은 체험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우울한 자는 지구가 적나라한 자연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을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본다. 지구의 주위에는 前史의 숨결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한 일말의 분위기 Aura도 없는 것이다.(155쪽)우리가 문위기 Aura를, 원래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대상에 있는 분위기는 실용적 대상에서 연습으로 남게 되는 경험에 해당한다. 카메라와 그 뒤에 나타난 그와 비슷한 기계적 장치에 근거하고 있는기술들은 의지적 기억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155쪽)하나의 그림은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눈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어떤 것을 재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형태의 소망을 충족시켜주는 그 무엇을 그 그림이 투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소망을 부단히 키워 나가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로써 사진을 그림과 구별시키는 것이 무엇이며 또 왜 이 두가지를 동시에 포괄하는 창작의 원리가 존재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즉 어떤 그림을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시선에 대해 사진이 갖는 관계는 배고픔에 대해 음식이 갖는 관계나 아니면 갈증에 대해 음료수가 지니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157쪽)무의지적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이미지의 특징이 이들 이미지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면, 사진은 <분위기의(157쪽) 붕괴>라는 현상에 결정적인 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158쪽)아우라의 경험이란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형식을, 무생물 내지 자연적 대상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옮겨놓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선을 주고 있는 자나 서선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자는 우리에게 시선을 되돌려 준다. 우리가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험은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일회적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자료들은 그것을 붙잡아 자기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억으로부터 빠져나간다. 따라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그 자체속에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 현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아우라의 개념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분위기의 이러한 정의는 현상이 지니는 宗敎儀式的 성격을 명백히 해주는 이점이 있다. 본질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즉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실제로 儀式적인 像의 주된 특성이다. 프루스트가 아우라의 문제에 얼마나 정통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우라를 아우라의 이론을 파악하는 개념들을 통하여 때때로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비밀을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은 사물들이 한때 그 사물 위(158쪽)에 머물렀던 어떤 시선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자위한다.>(그것은 아마 그러한 시선에 응답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기념물들이나 그림들이, 수세기에 걸친 찬미자들의 사랑과 경의가 그 주위에 짜 왔던 부드러운 베일 밑에서만 그 모습을 드려낸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는 확실한 견해를 피하면서 <이러한 기괴한 환상은, 만약 그들이 그러한 환상을 개인에게만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 즉 그 자신의 특유한 감정세계와 연관시킨다면 진실이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꿈 속에서의 지각과정을 아우라적인 지각과정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앞의 내용과 유사하면서도, 그의 규정이 객관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앞서고 있다. <내가 이러저러한 대상을 보았다고 말할 경우 이로써 나와 그 사물 사이에 어떤 동일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꿈속에서는 어떤 동일성이 존재한다.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내가 그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159쪽)어떤 시선이 극복해야 할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시선으로부터 나오기 마련인 마력은 더욱더 강하게 될 것이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눈들 속에서 그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러한 눈들이 먼 곳의 거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바라 이 때문이다.(160쪽)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둔감성이라는 것은 종종 아름다움의 한 장식물이다. 만약 두 눈이 검은 늪처럼 슬픔에 잠겨 투명해지거나 아니면 적도의 대양처럼 매끄러운 고요함에 잠기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둔감성 덕분인 것이다.> 그러한 눈들에 생기가 돈다면, 그때의 생기라는 것은 먹이를 찾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몸을 지키는 맹수들의 생기인 것이다. (행인들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경찰의 감시도 살피는 창녀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보들레르는 기이 Constantin Guys가 그린 창녀들을 주제로 한 여러 그림들 속에서 이러한 생활방식이 만들어 내는 인상학적인 유형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맹수들의 시선처럼 먼 지평선에 고정되어 있다. 그 시선은 맹수의 불안함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은 이따금 갑자기 긴장되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대도시 사람들의 눈이 방어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지나친 부담에 시달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은 눈이 담당하고 있는 보다 덜 눈에 띠는 기능에 대해 언급하였다. <들을 수 없고 보기만 하는사람은......볼 수는 없고 듣기만 하는 사람보다 더 불안하다. 여기에 대도시의 특징적인 면이 있다. 대도시 사람들의 제반 상호관계의 특징적인 점은, 시각의 활동이 청각의 활동보다 현저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의 주된 원인은 공공 교통수단에서 비롯된다. 대형버스, 지하철 및 전차 등이 19세기에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말 한마디 주고 받음이 없이 서로를 몇분 동안, 심지어 몇시간 동안이고 빤히 쳐다보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었다.>(161쪽)방어적인 시선 속에는 꿈꾸듯 먼 곳에 망연자실한 채 빠져드는 면이 없다. 방어적인 시선은 심지어 그러한 망연자실한 태도를 유린하는 데에서 쾌감같은 것을 느끼기조차 한다.(161쪽)사람들은 어쩌면 <유용한 환상>에 대해서보다는 <비극적인 간결성>에 대해 더 큰 가치를 둘지 모른다. 보들레르는 먼 곳이 지니는 마술적인 면에 집착하였다. 심지어 그는 풍경화를 장터의 판잣가게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척도로 삼아 그 가치를 측정하기까지 하였다. 마치 어떤 그림앞에 너무 가까이 접근할 때의 관찰자가 으레 체험하는 것처럼 그는 먼 곳의 마력을 꿰뚫어보고자 한 것은 아닐가?(162쪽)보들레르는 자신의 생애를 형성해 온 모든 경험들 가운데서 군중에 의해 떠밀리는 경험을 결정적이고 독특한 것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스스로 움직이고 또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며, 거리산보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군중의 광채는 보들레르에게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군중의 비열함을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그는, 거기에서는 구제불능의 여인들과 버림받은 자들조차도 어떤 정돈된 생활방식을 변호하고 방탕한 생활을 매도하여 또 돈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격하는 그러한 대낮의 세태를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의 마지막 동지들인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되자 보들레르는 군중이라는 존재와 맞서 싸우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분노는 비바람에 맞서는 사람들처럼 무력하기만 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거기에 어떤 경험과 같은 비중을 부여했던 체험의 실상이다. 그는 현대의 센세이션이 지불해야 할 대가, 즉 충격체험 속에서 아우라가 붕괴되는 현상을 단적으로 지적하였다. 이러한 아우라의 붕괴현상에 동의하기 위해 그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시의 법칙이다. 그의 시는 프랑스 제2제정의 하늘에 <아무런 분위기도 없는 하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164쪽)   [얘기꾼과 소설가]-니콜라이 레쓰코브의 작품에 관한 고찰아직도 말이 끄는 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고, 또 구름 이외어는 변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골의 맑은 하늘 아래에 서 있었던 세대들에겐, 파괴적인 분출과 폭발이 지배하는 역사 속의 구름 아래에서는 보잘 것 없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몸뚱아리밖에 남은 것이라곤 없었던 것이다.(166쪽)진정한 얘기는 드러난 형태로든 숨겨진 형태로든간에 유용한 그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이러한 유용성은 설교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실제적 충고에도 있을 수 있으며, 또 속담이나 생활의 좌우명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얘기꾼이란 얘기를 듣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조언을 해주는 일은 바야흐로 케케묵은 것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근본 이유는 경험과 의사소통의 직접성이 점차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리들 자신이나 남들에게 아무런 조언도 해줄 수 없게 되었다.(169쪽)얘기의 몰락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는 한 과정의 징후를 예고한 것은 근세가 시작되면서 대두되기 시작한 소설의 발흥이다. 소설은 얘기와, 또 보다 좁은 의미의 서사시적인 것과 구별짓게 하는 것은, 소설이 근본적으로 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보급은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구전으로 전수될 수 있는 것, 즉 서사시의 자산은 소설을 형하고 있는 내용물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소설이 여타의 산문문학, 예컨대 동화, 전설, 심지어 소품소설 Novelle 등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구전적 전통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고 또 그 속에 몰입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소설이 무엇보다도 다른 산문문학과 구별되는 것은 얘기와의 대비를 통해서이다. 얘기를 쓰는 사람은 그가 얘기하는 내용을 경험-그것이 자기 자신의 경험이든 아니면 남이 보고하는 얘기든간에-으로부터 얻고 있다. 그러고 난 후 그는 또 다시 그 내용을 그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의 경험이 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소설가는 자신을 남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 즉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남으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도 아무런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고독한 존재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른 것과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을 인간적 삶의 묘사 속에서 극단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삶의 풍부함과 또 이러한 풍부한 삶의 묘사를 통해서 살아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최초의 위대한 소설, 동키호테를 보면 우리는 금방, 가장 고귀한 사람 중의 한사람, 즉 동키호테의 정신적 위대성과 용감성 및 남을 도우려는 마음가짐이 일체의 조언을 결하고 있고 또 일말의 지혜도 내포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기가 지나면서 이따금 소설 속에 지시적 사항을 삽입하려는 시(170쪽)도-아마 이러한 시도가 가장 지속적으로 행해졌던 것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일 것이다-가 있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소설형식 자체의 변화를 가져다줄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교양소설은 소설의 기본구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사회의 발전과정을 한 인물의 발전과정 속에 동화시킴으로써 교양소설은, 그 인물의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있는 질서에 정당성-그것이 비록 부서지기 쉬운 정당성이긴 하더라도-을 부여하고 있다. 교양소설이 부여하고 있는 정당성은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다. 특히 교양소설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정당성 사이의 불협화음인 것이다.(171쪽)그리이스의 최초의 얘기꾼은 헤로도투스이다. 그의 {역사 Historien}의 3권 14장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기가 있는데, 우리는 이 얘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이 얘기는 사메니트우스에 관한 얘기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트우스가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에 패해서 붙잡혔을 때, 캄비세스는 이 포로에게 모욕을 주자고 하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사메니트우스를 세워둘 것을 명령하였다. 또 그는 계속해서, 포로로 하여금 그의 딸이 물동이를 가지고 우물로 가는 하녀의 모습을 하고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도록 하였다. 모든 이집트사람들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 울고 슬퍼하였지만 사메니트우스만은 혼자 눈을 땅 위에 떨어뜨리고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러고 난 후 곧 그의 아들이 처형을 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 함께 끌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후 그의 하인들 중의 한 사람인 늙고 불쌍한 남자가 포로행렬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 그는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온갖 표식을 보내었다.이 얘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얘기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웠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다. 그것은 오로지 그저 한 순간 속에서만 생명력을 가진다. 또 정보는 스스로를 완전히 그 순간에 내맡겨야만 하고 또 한순간의 시간도 잃음이 없이 그 순간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얘기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를 완전 소모하지 않는다. 얘기는 자신이 지닌 힘을 집중된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또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다시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몽테뉴는 이 이집트왕에 다시 언급하면서 왜 그가 하인을 보자 비로소 슬퍼하였던가를 자신에게 묻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몽테뉴는 <그가 이미 너무나 슬픔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슬픔이 조금만 더 커지더라도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또 <왕의 가족들의 운명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운명이 바로 자(173쪽)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삶에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무대 위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따라서 이 하인은 왕에게는 단지 한 사람의 배우였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니면 <커다란 슬픔은 정체되었다가 이완의 계기가 와야만 비로소 터진다. 이 하인을 보는 순간이 바로 이 이완의 순간이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도 부가하지 않았다. 그의 보고는 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보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로부터 유래하는 이 얘기는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경탄과 깊은 명상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수천년 동안 밀폐된 피라미드의 방에 놓여 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그 맹아적 힘을 보존하고 있는 한 알의 씨앗을 방불케 한다.(174쪽)하나의 얘기를 지속적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심리적 분석이 배제된 정결하며 간결하게 짜여진 집중적 문체이다. 얘기하는 사람에 의해 미묘한 여러 심리적 진행과정에 대한 묘사가 자연스럽게 포기되면 되어질수록, 그러한 심리적 진행과정이 듣는 사람의 기억에 오래 남게 될 승산은 더욱 더 커진다.(174쪽)베짜는 일의 리듬과 같은 얘기에 한번 빠져드는 사람은 그 얘기를 남에게 다시 전할 수 있는 재능이 저절로 생겨나게끔 그 얘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얘기를 하는 재능은 이처럼 베를 짜는 일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짜여진 얘기의 그물은, 그것이 수천년 전에 가장 오래된 수공업적 형태의 주위에서 한번 짜여지고 난 이후로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 마디가 하나하나씩 헤어지고 있는 것이다.(175쪽)수공업의 주위에서-그것은 처음에는 농촌적 형태이었다가 나중에는 해양적 수공업, 마지막에는 도시적 형태로 발전하였다-오랫동안 번성하였던 얘기 그 자체는 이를테면 의사소통의 수공업적 형태이다. 얘기는 정보나 보고처럼 사물의 순수한 <실체>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얘기는 보고하는 사람의 삶 속에 일단 사물을 침잠시키고 나서는, 나중에 가서 다시 그 사물을 그 사람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래서 얘기에는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옹기그릇에 도공의 손흔적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얘기꾼으로서의 소설가 Erzahler들은 자신이 나중에 체험하게 될 상황을 얘기의 맨 처음에 묘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175쪽)발레리는 그의 관찰을 <영원성이라는 생각의 소멸과 지속적인 일에 대한 기피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영원성에 대한 생각은 옛날부터 죽음에서 그 가장 강력한 원천을 찾았다. 이러한 생각이 사라지면 죽음의 모습도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변화는, 얘기의 기술이 사라지면서 경험의 직접성이 감소하는 정도에 발맞추어 일어나게 될 것이다.(177쪽)죽음은 얘기꾼이 보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인준을 뜻한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그의 권위를 빌어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의 얘기가 소급해서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自然史이다.(178쪽)사실상 <삶의 의미>는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소설이 전개되는 것도 이 중심을 둘러싸고서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곧 이러한 형상화된 삶에서 독자들 자신이 처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당혹감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엔 <삶의 의미>가, 저기엔 <이야기의 모랄>이 있다는 바로 이러한 구호를 가지고 소설과 이야기는 서로 대립되고 있으며, 또 이러한 구호에서 우리는 이들 예술형식들이 지니는 전혀 상이한 역사적 좌표를 읽을 수 있다. 소설의 최초(183쪽)의 완벽한 모범이 동키호테라면 소설의 최후의 완벽한 모범은 아마도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Education sentimentale}일 것이다.(184쪽)사실상 이야기에는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가?>하는 물음이 그 정당성을 잃게 되는 적은 한번도 없다. 그라나 소설가는 이와는 반대로 마지막 境界, 즉 그가 결말 Finis을 씀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인식하게 하는 그러한 경계를 한 발짝이라도 더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184쪽)독자들의 관심을 흥미진진하게 돋우는 것은 무미건조한 재료이다. 모리츠 하이만은 언젠가 한번 <35살에 죽는(원문은 윗점) 사람은 그의 생의 모든 점에서 35세에 죽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장처럼 애매모호한 문장도 없을 것인데, 우선 그것은 여기에서 그가 時制를 잘못 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러하다. 이 문장이 뜻하는 바의 진의는, 35세에 죽었던 사람은 회상 속에서는 언제나 35세의 나이로 죽은 사람으로 보여질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제적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문장이 기억된 삶에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의 본질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 주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삶의 <의미>는 오로지 그들의 죽음에 의해서만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독자는 실제로, 소설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찾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독자는 어떤 식으로이든 간에 미리부터 그가 소설인물의 죽음을 함께 체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소설인물들의 상징적 죽음, 즉 소설의 종말이라도 체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물론 더 좋은 것은 그들의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떻게 해서 소설인물들은 독자들에게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그것도 일정한 장소에서의 죽음)을 인지시킬 것인가?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가장 열렬하게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문인 것이다.((185쪽)소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이 이를테면 제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 주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한기에 떨고 있는 삶을, 그가 읽고 있는 죽(185쪽)음을 통해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186쪽)위대한 얘기꾼으로서의 모든 소설가는 마치 사닥다리를 아래 위로 오르내리는 것처럼 그들의 경험을 자유자재로 얘기할 수 있다. 아래로는 지구의 내부에까지 이르고 있고, 또 위로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하나의 사닥다리는 집단적 경험-이 집단적 경험에서 보면 모든 개인적 경험의 가장 깊은 쇼크, 즉 죽음까지도 아무런 자극이나 장애가 되지 못한다-을 말해 주는 이미지이다.(186쪽)동화는, 신화가 우리들 가슴에 가져다준 악몽을 떨쳐버리기 위해 인류가 마련한 가장 오래된 조치방안을 우리들에게 알려 준다. 동화는 바보의 인물을 통하여 어떻게 인류가 신화에 대해 바보처럼 행동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막내동생의 모습을 통해서는 인류가 신화의 원초적 시간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짐에 따라 어떻게 그들의 가능성이 증대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두려움을 배우기 위해 떠났던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는 우리들이 두려움을 갖는 사물들이 투시·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현명한 체하는 영리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는 신화가 제기하는 의문이 마치 스핑크스의 물음처럼 단순한 것임을 보여주며, 그리고 동화 속의 어린이를 도우는 동물의 모습을 통해서는 자연은 신화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하고도 함께 어울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현명한 조언-이러한 조언을 옛날에는 신화가 인류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가르쳐 주고 있다-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적 세계의 폭력을 간계와 무모한 용기로 대처하는 것이다. (동화가 용기 Mut를 이를테면 변증법적으로 간계 Untermut와 무모한 意氣 Ubermut로 나누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화가 소유하고 있는, 사물을 해방시키는 마법은 자연을 신화적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해방된 인간과 공모관계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숙한 인간은 이러한 공모관계를 가끔, 다시 말해 그가 행복할 때에만 느낀다. 그러나 아이는 이러한 공모관계를 동화 속에서 처음 만나게 되고, 또 이를 통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187쪽)얘기꾼이란, 의로운 자가 얘기의 인물 속에서 자신을 만나게 되는 그런 인물이다.(194쪽)   3. 문예이론 [技術複製時代의 예술작품]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언제나 복제가 가능하였다. 인간들이 한때 만들었던 것은 인간들에 의해 언제나 다시 모방되어질 수가 있었다. 이러한 모방은 예술적 수련을 위해 도제들에 의해 행해졌고, 작품의 보급을 위해 예술의 대가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마지막에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제3자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에 비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좀 새로운 현상이다. 기술적 복제라는 이 새로운 현상은 역사적으로 긴 간격을 두고, 그러나 점점 더 강도를 더해 가면서 관철되었다. 그리스인은 예술작품을 기술적으로 재생산하는 두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鑄造와 刻印이었다.(199쪽)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역사에 종속되기 마련인데, 예술작품의 이러한 역사성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위에 말한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이다.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에 함께 포함되는 것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예술작품이 겪게 되는 물리적 구조의(200쪽) 변화와 소유관계의 변화이다. 물리적 변화의 흔적은 오로지 화학적·물리적 분석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데, 이러한 분석은 복제품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소유관계의 변화의 흔적은 어떤 전통에 속하는 문제로서, 이 문제의 추적 또한 모름지기 원작의 상황을 그 출발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201쪽)원작 Original의 시간적·공간적 현존성은 원작의 진품성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룬다.(201쪽)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까지를 포함하고 또 그 사물의 원천으로부터 전수되어질 수 있는 사물의 핵심을 뜻한다.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후자가 사라지게 되면 전자, 다시 말해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 또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이렇게 해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202쪽)복제에서 빠져 있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우리는 분위기 Aura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Aura이다.(202쪽)역사의 거대한 여러 시대들 내부에서는 인간집단의 모든 존재방식과 더불어 인간의 지각의 종류와 방식도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인간의 지각이 조직화되는 종류와 방법, 지각이 이루어지는 매체는 자연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 성격이 규정된다.(203쪽)예술작품의 유일무이성은 그것이 전통의 상관관계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통 자체는 물론 무엇인가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하고 또 무엇인가 변화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의 비너스상을 예로 들어 보더라도 그리이스인들은 전혀 다른 전통의 상관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중세의 승려들이 불길한 우상으로 보았던 비너스상을 그리이스인들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마주 대하였던 것은 그 비너스상의 유일무이성, 달리 말해 그것의 분위기였다. 전통의 상관관계 속에 깊숙이 들어가 그 일부가 되고 있는 예술작품의 본래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宗敎儀式 속에서이다. 주지하다시피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은 처음에는 마술적 의식, 다음으로는 종교적 의식에 봉사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실은, 예술작품의 이러한 분위기적 존재방식이 한번도 儀式的인 기능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그것에 제일 먼저 본래적 사용가치가 주어졌던 종교적 의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진짜>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제아무리 간접적으로 매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세속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의 여러 형태에서까지도 세속화된 儀式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205쪽)예술적 생산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形像物로부터 시작되었(207쪽)다.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이들 형상물에서는 그것들이 보여진다는 사실보다는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더 중요하였다. 석기시대의 인간이 동굴의 벽에 그린 사슴은 일종의 마법적 도구였다. 그 사슴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려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령들을 위해 바쳐졌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교의식적 가치는 예술작품이 숨겨진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어떤 神像들은 밀실에서 승려들에게만 그 접근이 허용되고 있고, 어떤 마돈나상은 거의 일년내내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또 중세사원의 어떤 조각들은 지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여러 예술활동이 제각기 종교의식의 모태에서 해방됨에 따라 예술활동의 생산품이 전시되어질 기회는 날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208쪽)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의 예술성 여부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많은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전체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210쪽)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224쪽)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위기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224쪽) 무리 없이 생겨날 수가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따라서 위기의 시기, 특기 이른바 퇴폐기에 생겨나는 예술의 괴상하고 조야한 형식들은 실제로는 이러한 시기의 가장 풍부한 역사적 에너지의 중심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그러한 야만적인 에너지로 충만한 예술운도을 볼 수 잇게 된 것은 다다이즘에서이다. 다다이즘이 지니는 충둥의 전모를 알게 된 것은 최근에 와서이다. 다시 말해 다다이즘은, 오늘날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을 통하여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225쪽)다다이스트들은 그들 작품의 상품적 가치보다는 관조적 침잠의 대상으로서의 작품의 무가치성을 보다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소재를 근본적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이러한 무가치성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시는 외설스러운 문구나 말의 쓰레기를 합쳐 놓은 <말의 샐러드>이다. 단추나 승차권 등을 몽타주하여 불여 놓은 그림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수단을 통하여 이들 그림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분위기를 가차없이 파괴해 버리는 일이었고, 또 생산의 수단을 빌어 그들의 작품에다 복제의 낙인을 찍는 일이었다.(225쪽)예술작품은 다다이스트들에 이르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각적 환영이나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청각적 구조이기를 그치고 일종의 폭탄이 되었다. 이 폭탄은 보는 사람의 눈과 귀에 와 닿는다. 그것은 촉각적 성질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그것은 영화에 대한 수요를 촉진시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영화의 정신분산적·기분전환적 요소는 무엇보다도 우선 촉각적인 것이고, 또 그것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단속적으로 들어오는 영화장면과 관점의 변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펼쳐지는 영사막과 그림이 놓여있는 캔버스를 한번 비교해 보자. 캔버스는 보는 사람을 관조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는 그 앞에서 자신을 연상의 흐름에 내맡길 수가 있다. 그러나 영사막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것은 고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실제로 이러한 영상을 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끊임없이 영상의 변화로 인하여 곧 중단되어 버린다. 영화의 충격효과는 바로 이러한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또 이러한 충격효과는 다른 충격효과가 모두 그러한 것처럼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만 어느 정도 완화되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다이즘이 아직도 정신적 충격 속에 포장해서 감싸고 있는 물리적 충격을 영화는 그의 기술적 구조의 힘을 빌어 그 포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226쪽)예로부터 건축은 오락적·집단적 방식으로 그 수용이 이루어지는 예술작품의 원형이었다. 건축의 수용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원리를 보면 우리는 이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227쪽)건축술의 역사는 그 어떤 다른 예술의 역사보다도 장구하다. 그리고 건축술이 미친 영향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본다는 것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대중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알아 보려는 모든 시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건축물의 수용은 두가지 측면, 즉 사용과 지각, 더 정확히 말하면 촉각과 시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수용방식은 이를테면 관광객이 어떤 유명한 건물 앞에서 주의력을 집중하여 그 건물을 수용하는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각적인 면이 갖는 관조에 해당하는 것이 촉각적인 면에는 없기 때문이다. 촉각적 수용은 주의력의 집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익숙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건축의 경우 그러한 촉각적 수용은 상당할 정도로 시각적 수용까지도 경정하게 된다. 또 이러한 촉각적 수용은 본래 한 번의 긴장된 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어떤 대상을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건축물을 통해 형성되는 수용방법은 경우에 따라서는 규범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인간의 지각구조에 부과된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고, 또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주도하의 익숙함을 통해 점차적으로 해결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228쪽)   [사진의 작은 역사]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카메라에는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대신에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드어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대강 어떻다고 흔히 말을 하지만 <걸어서 나아가는> 순간 순간의 자세가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은 고속도 촬영기나 확대기와 같은 보조수단을 통하여 이러한 것을 밝혀낼 수 있다. 마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를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사진술을 통하여 이와 같은 시각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이난 의학이 밝혀내려고 하는 세포의 구조나 조직과 같은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풍경화나 아니면 영혼이 담겨 있는 초상화보다는 근본적으로 카메라에 더 가까운 것이다.(237쪽)   [수집가와 역사가로서의 푹스]엥겔스의 명제들을 잘 생각해 보면 볼수록 그만큼 더 명확해지는 것은,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서술하는 일은 역사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관조적 성격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기 않으면 안된다. 역사는 그에게 있어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되는데, 그 구성의 장소를 형성하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삶 그리고 특정한 작품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으로부터 폭파시켜 그 시대로부터 무엇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로부터 삶을, 그리고 그 생애로부터 한 작품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성과는 바로 작품 속에 생애가, 생애 속에 그 시대가, 그리고 시대 속에 역사의 진행과정이 보존되어 있고 또 지양되고 있다는 점이다.(275쪽)역사주의가 과거의 영원한 상을 제시하고 있다면 사적 유물론은 일회적인 과거의 경험을 각각 제시해 준다. 구성적 요인을 통하여 서사적 요인을 해방하는 일이 이러한 경험의 조건임이 드러난다. 역사주의의(275쪽) <한때......이 있었다>라는 이야기 속에 묶여 있었던 강력한 힘들이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해방된다. 모든 현재에 대해 어떤 근원적인 경험이 되는 그러한 역사와의 경험을 실천에 옮기는 일, 바로 이것이 사적 유물론의 과제이다. 사적 유물론은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하는 현재의 어떤 의식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276쪽)사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인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맥박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느낄 수 있는 어떤 이해되어진 것을 追체험하는 것을 뜻한다.(276쪽)우리는, 어떤 예술작품의(276쪽) 역사적 내용을, 그것이 예술작품으로서 우리에게 보다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파악하는 일이 단지 개별적인 경우에만 성공하고 있다는 점을 가차없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파악하려는 모든 노력은, 그 작품의 냉철한 역사적인 내용이 변증법적인 인식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한 공허할 수밖에 없다.(277쪽)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야만의 흔적이 없는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 지금까지 어떤 문화사도 이러한 사실이 지니는 근본적 의미에 공정치 못했으며 앞으로도 좀처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283쪽)개개인이 속하고 있는 계급이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무의식적인 계급적 행동방식보다는 개개인의 의식적인 이해관계에 더 주목하는 관찰방식은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형성에 있어서 의식적인 요인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301쪽)경제생활에서 권력을 쥔자와 피착취자 사이에는 사법관료와 행정관료라는 한 장치가 끼어들게 되는데 이 장치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충분히 책임있는 도덕적 주체로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들의 <책임의식>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그러한 양심적 불구의 무의식적 표현인 것이다.(301쪽)   4. 언어철학과 역사철학 [언어의 모방적 성격]언어형성에 있어서의 모방적 행동은 擬聲語라는 이름하에서 인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언어가 일종의 합의된 상징의 체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다시 의성적 해명방식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등장하는 생각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317쪽)<모든 말 그리고 모든 언어는 의성어적이다>라고 레온하르트는 주장한 바 있다. 이 문장 속에 담겨 있음직한 프로그램의 구체적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를 정확히 가늠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비감각적 유사성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의 길잡이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동일한 것을 뜻하는 여러 상이한 언어의 단어들을, 이 단어(사물)들의 의미를 중심으로 해서 모아 놓으면, 우리는 이들 단어들이 모두-비록 그것들이 상호 아무런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지라도-어떤 방식으로 그 의미에 대해 그 중심부에서 상호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한번 연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유사성은 상이한 여러 언어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들의 상호관련성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다시 말해 우리의 고찰은 입으로 말하는 언어에만 한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입으로 말하는 언어 못지 않게 씌어지는 언어와도 관계를 맺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씌어지는 말은-많은 경우 입으로 말해지는 말보다 더 명확하게-그것의 문자가 그것의 의미하는 바에 대해 갖는 관계를 통해 비감각적 유사성의 본질을 밝힐 수가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말해진 것과 의미되는 것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씌어진 것과 의미되어진 것, 그리고 말해진 것과 씌어진 것 사이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은 비감각적 유사성인 것이다.(317쪽)필적 해독법은 필적으로부터 필자의 무의식적 세계에 숨겨져 있는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처럼 쓰는 사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모방적 과정은, 문자가 생겨나던 매우 오래된 옛날에는, 쓴다는 행위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문자는 언어와 더불어 비감각적 유사성 내지 비감각적 교감(교응)의 기록부가 된 것이다.(317쪽)그러나 언어와 문자의 이러한 면은 언어의 다른 면인 기호학적인 면과 동떨어져서 발전하지 않는다. 언어의 모든 모방적 요소는 오히려 불꽃과 비슷하게 일종의 운반자 Trager에 의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 운반자가 곧 언어의 기호학적 요소이다. 그러니깐 단어나 문장이 갖는 의미의 상관관계가 바로 운반자인 셈인데, 이것을 통해 유사성은 비로소 일종의 섬광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318쪽)   [번역가의 과제]어떤 예술작품이나 예술형식을 인식하는 데 있어 수용자를 고려하는 일은 결코 생산적이 되지 못한다. 비단 어떤 특정한 수용자층이나 아니면 그들의 대표자를 고려하는 일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상적> 수용자라는 개념까지도 모든 예술이론적 논의에서 방해요소가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논의들은 단지 인간의 현존재와 본질만을 그 전제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예술 역시 이와 같은 식으로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제의 예술작품에서는 인간의 반응은 별로 문제시되고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 어떤 시도 독자들을, 그 어떤 그림도 관람자를, 또 어떤 심포니도 청중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19쪽)궁국적으로 보면 삶의 영역은 자연이 아닌 역사에 의해 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나 영혼이나 감각과 같은 막연한 것에 의해 삶의 영역이 정해져서는 안된다. 따라서 철학자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삶의 역사를 통해 모든 자연적 삶을 파악하는 데 있다.(322쪽)한 작가가 살던 시대의 문학적 언어의 경향은 시대가 지나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며 또 잠재적 경향은 기존 형식으로부터 새로이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새롭게 보였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진부한 것이 될 수 있고 또 한때 유행했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옛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언어의 이와 같은 변화와 의미의 끊임없는 변화의 본질을 언어와 작품의 고유한 삶에서 찾지 않고 후세 사람들의 주관성(가장 조야한 심리주의까지 포함해서)에서 찾는다는 것(323쪽)은 원인과 본질을 혼동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가장 강력하고 생산적인 역사적 과정의 한 단계를 사고의 무능력으로 인해 부인하는 것을 뜻한다.(324쪽)   [역사철학테제]이러한 슬픔(멜랑콜리)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역사주의의 신봉자들은(346쪽) 도대체 누구의 마음이 되어 보려고 감정이입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 대답은 두말할 나위없이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마다의 새로운 지배자는 그들 이전에 승리했었던 모든 자들의 상속자이다. 따라서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본다는 것은 항상 그때마다의 지배자에게 유리하게 됨을 뜻한다. 이로써도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승리를 거듭해 온 사람은,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짓밟고 넘어가는 오늘날의 지배자의 개선행렬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전리품이란 지금까지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이 개선행렬에 함께 따라다닌다. 우리가 문화유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전리품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저긍로 관찰하고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문화유산에서 개관하는 것은 하나같이 그에게는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원천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다.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傳承의 과정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유물론자는 가능한 한도내에서 이러한 전승으로부터 비켜난다. 그는 곁에 거슬러서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그의 과제로 삼는다.(347쪽)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사실이 명약관화해질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가 갖는 입장도 개선될 것이다.(347쪽)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의식은,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의 혁명적 계급에 고유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달력의 첫날은 역사의 低速度 촬영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기억의 날로서 국경일의 모습을 하고 언제나 다시 되돌아오는 그 날은 따지고 보면 항상 동일한 날인 것이다. 따라서 달력은 시계처럼 시간을 계산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백년이래 유럽에서는 그 가장 희미한 흔적조차도 드려내지 않았던 역사의식의 기념비이다.(353쪽)역사적 유물론자는 과도기로서의 현재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그 속에 머물러 정지상태에 이르고 있는 현재의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이와 같은 현재의 개념에 의해서만 역사를 쓰고 있는 현재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역사주의가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를 나타낸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회적인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보여준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 따위는 역사주의의 유곽에서 <옛날 옛적>이라고 불리우는 창녀에게 정력을 탕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겨 버리고, 대신 그는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역사의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남자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354쪽)<이 지구상의 유기적 생물체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호모 사피엔스(인류)의 보잘 것 없는 오천년 역사는 이를테면 하루의 24시간 중의 마지막 2초와 같은 것이고 또 이러한 기준에서 두고 보면 문명화된 인류의 역사는 기껏해야 하루의 마지막 시간의 마지막 초의 1/5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어느 현대의 생물학자는 말한 바 있다. 메시아적 현재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역사를 엄청나게 축소해서 포괄하고 있는 현재시간 Jetztzeit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만든 바로 그 형상 Figur과 정확하게 일치한다.(355쪽)역사주의는 역사의 여러 상이한 계기 사이의 인과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서 역사적 사건이 되는 법은 없다. 원인으로서의 사실은, 수천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에 역사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가는 사건들의 계기를 마치 염주를 하나하나 세듯 차례차례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어느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로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355쪽)
113    신희교, <<일제말기 소설연구>>, 국학자료원, 1996 댓글:  조회:2131  추천:0  2009-05-16
발표매체는 작품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일제말기문학작품들은 일간신문과 잡지에 발표되거나 단행본의 형태로 출판되었다. 이 시기 일간 신문을 통한 작품발표는 한국에서는 {每日新報}를 통하여, 만주에서는 {滿鮮日報}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 총톡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 매체의 성격상 어용적인 경향의 작품들을 많이 연재하였다. 특히 역사소설을 포함한 장편소설이 이 신문의 지상에 많이 발표되었는데 모두 어용적인 성향을 띠려 하였다.(34쪽)한편 기존의 한글신문인 {滿蒙日報}와 {間島日報}를 통합하여 1937년 10월 21일 {滿鮮日報}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 신문은 1945년까지 한글신문으로 존속하면서 2백만 명을 상회하는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이주민드에 대한, 국책홍보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였다. 신춘문예의 현상 모집을 하기도 한 이 신문은 그러나 관동군 기관지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였다.(채훈, {재만한국문학연구}, 깊은샘, 1990, 152면-인용자 재인용)(34쪽)문학작품의 발표매체로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잡지였다. {文章}과 {人文評論}, 그리고 {國民文學}과 {春秋}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 잡지인데 특히 {문장}은 {국민문학}이 출연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민족문학을 지킨 마지막 堡壘였다.(35쪽)창작소설의 경우, 종합잡지인 {춘추}가 {국민문학}보다 훨씬 덜 시국적이었다. 특히 한글 순수지향 소설은 1941년 2월 1일부터 1944년 10월 1일의 통권 39호까지 40편 내외가 발표되었다.{춘추}는 동아일보가 폐간된 뒤 그 기자였던 梁在廈가 중심이 되어 창간된 종합잡지였다. 초기에는 면수도 3백여 면에 읽을만한 논문도 없지 않았다. 문학란 또한 충실했다. 특히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 이여성의 [조선복색원류고]('41. 2)와 고유섭의 [약사신앙과 신라미술]('41. 4)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잡지 또한 말기에는 면수도 줄어지고 전쟁협력과 소위 內鮮一體를 위한 어용지로 화해버렸다. 이외 이 시기 문학작품이 발표된 잡지로서는 종합잡지인 {朝光}과 {新時代}, 그리고 {大東亞}, {野談}, {東洋之光}이 있었으나 모두 어용지임을 면치 못했다. 이 시기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전술한 바 어용색을 띠고 말았으나 {춘추}에 한글 순수지향 소설이 많이 게재된 것을 들 수 있다.(39쪽)일제의 언어침략은 1937년 1월 {매일신보}가 "학예기사 일부를 확장, 국어(일어-인용자)면을 창설"할 것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때 박춘식의 俳句인 [春]과 최남선의 [조선문화당면의 문제](日文)가 실렸다. 한편 사회의 각 기관으로 하여금 일어상용을 강요하던 조선총독 미나미는 이해 4월 1일 이후 각 중학교에서의 조선어교육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1938년 3월 3일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을 통해 일어교육을 더욱 강요하였다. 이 교육령 개정에 따라 종래 시간수는 적(46쪽)었으나 정식과목이었던 조선어는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행정지도 차원에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 시켰으므로 실제로는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교수용어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일어상용이 강요되는 형국이었다.(47쪽)1939년 1월에는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친일파인 朴熙道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東洋之光}이라는 일어잡지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에는 鄭人澤의 [晩年記]('42. 5), 崔秉一의 [或る晩]('43. 1), 牧羊 李石薰의 [血緣]('43. 8), 玄薰의 [山また山]('45. 1)등의 일어소설이 실리기도 하였다.(47쪽)일제의 언어침략은 1941년 1월 이후에는 출판물에 대한 각종 檢閱方針의 강화라든가 이 해 6월 1일 이후의 용지 사용에 관한 승인제 실시로도 나타났다. 즉 일어면을 첨부하지 않는 한 용지를 배급받을 수 없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즉시 검열에 걸려 발행권이 박탈되었다. 일어면 첨부와 관련, 예컨대 {三千里}의 改題誌인 {大東亞}는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여[국어사용]은 이때에 있어 우리가 가장 진심으로 밧뜨러행할 일이외다. 반도동포, 아직 국어를 모르는이는 하로바삐 습독하소서. 이뒷날 남방으로 북방으로 전세계에 웅비할시기가 올터인데말도모르고 었저자고 그러심니까어서 국어습득에 전력하셔요, 본지 [대동아]도 내일부터 誌上 [국어강좌]를 특설하겠습니다.({大東亞}, '42. 7, 편집후기-인용자 재인용)라고 하여 애교아닌 애교를 부렸던 것이다.(47쪽)'녹기연맹'의 현영섭이란 자는 1938년 7월 8일 미나미와의 면담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뇌까렸다.세계를 통일한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인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한번도 실현된 일은 없다. 이러한 세계적인 이상을 생각할 때 내선일체의 문제는 극히 적다. 그라나 조선인이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하여는 문의식적 융합인, 즉 완전한 내선일원화에서부터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종래에 체험치 않은 신도(神道)를 통하여, 또는 조선어 사용 전폐에 의하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每日新報}, 1938. 7. 9 임종국, {親日文學論}, 평화출판사, 1966, 50면-인용자 재인용)玄은 내선일체의 완전한 구현을 위해 한국어 사용의 全廢를 부르짖었다. 이에 대해 미나미는 "조선어를 배척함은 불가한 일이다. 가급적으로 국어를 보급하자는 것은 가한 일이며 이 국어보급운동도 조선어폐지운동으로 오해를 받는 일이 종종 있은즉 그것은 불가한 말이다"({每日新報}, 1938. 7. 9 임종국, {親日文學論}, 평화출판사, 1966, 51면-인용자 재인용)라고 하여 오히려 한 발 물러서는 듯한 포즈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한국어 과목이 폐지된 지 3개월 후의 일이었다. 미나미의 태도가 포오즈였음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장}, {인문평론}의 폐간으로도 나타났던 것이다. 玄의 언급을 실증이라도 하듯, {국민문학}같은 잡지는 1942년 5, 6월 합병호부터 전면 일어화시켜 버렸다. 崔載瑞에 의해 한국어는 苦悶의 種子로, 한국어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정신의 ( )인으로 오인되어졌던 것이다.(48쪽)한편 文壇의 얼어화를 촉진하고 장려하기 위한 각종 賞도 설정이 되었다. 즉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국어문예총독상'('43.1)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수여하는 '국어문예연맹상'이 그것이었다.(48쪽)한글 말살책의 일환으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朝鮮語學會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어상용이 강요되는 와중에서 한국인이 모두 일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일제가 일어 해득이 어려웠던 한국의 민중에게 국책을 선전하기 위해 한글 사용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지식인 상대의 {국민문학}과는 달리 대중상대의 일간신문과 종합잡지가 한글을 계속 사용했던 것은 대체로 그와 같은 정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한글로 표기된 순수지향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창작될 수 있었다.(38쪽)일제는 한국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整地 作業의 일환으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撫摩할 필요가 있었다. 반일 감정의 무마는 미나미 조선 총독이 주창한 '內鮮一體' 정책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정책은 한국인을 완전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 즉, 민족말살을 획책하기 위함이었다. 민족말살의 가장 강력한 수단 가운데 하는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를 섞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른바 '日鮮通婚'이라고 한다.(53쪽)이 시기 어용소설 가운데는 한국인 청소년을 일제가 벌이고 있는 전쟁의 마당으로 내몰기 위한 의도로 창작된 작품이 많다. 이는 일제가 시행한 두 가지 정책을 지지할 목적으로 창작된 것이다. 그 두 가지 정책 중 하나는, 中日戰爭이 발발된 이듬해인 1938년 2월에 공포된 志願兵制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43년 3월에 공포된 徵兵制라는 것이다. 지원병제는 징병제를 위한 준비 단계였지만, 이 시기 어용소설을 통하여 자주 선전되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강제성을 띤 채 강력히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징병제는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과 1945년에 강력히 시행되었다.(61쪽)전쟁의 완수를 위해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통제가 뒤따르고 또한 물자 생산을 위해 총력이 집중되었던 것이 이 시기의 생활양식이었다. 우선 전시하인 이 시기의 생활양식을 규정한 하나의 커다란 틀은 무엇보다도 愛國班의 활동에 있을 것이다. 애국반은 1938년 7월 7일 결성(70쪽)된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基底組織으로 그 조직은 한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엿는데 이는 모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동원하려는 지향의 표현이었다.(71쪽)중일전쟁에 이어 太平洋戰爭을 터뜨린 일제는 이후 전쟁에서 소모되는 물자를 동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제는 우선 일반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물자절약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근로를 강조하였다. 한편 모자라는 식량을 전선으로 조달하기 위해 식량의 증산을 부르짖었고 전력이나 귀금속의 생산을 장려하기도 했다. 여기서 물자의 절약이나 근로, 그리고 생산증가와 관련된 활동은 이 시기 일반인들의 생활의 변모 가운데는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었다.(71쪽)이 시기 만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작가의(83쪽) 설명을 살펴보면, 만주 건국 이전의 삶을 취택할 경우에는 이민이나 선구 개척민이라는 표현을 썼고 건국 이후의 삶을 취택할 경우에는 開拓民이라는 표현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자료를 잠깐 살펴보면, 우선 개척민 정책은 만주 건국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그 정책은 이른바 일본과 만주는 하나라는 정신에 의해 민족의 협화와 국토의 개척, 그리고 왕도낙토의 건설을 구현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京城'의 선만척식주식회사와 '新京'의 만선척식주식회사가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회사들은 첫째 한국내의 우수한 농부들을 집단적, 또는 집합적으로 이주를 시켰고 둘째 만주국 안의 기존 한국인들의, 영농을 도왔다. 한편 이 개척민정책은 對蘇兵力 배치 및 産業開發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노린 것이었고 한민족을 한국으로부터 몰아내려는 民族解消 전략과도 문관하지 않은 것이었다.(林鍾國 編, {親日論說選集}, 409면-인용자 재인용)(84쪽)[목축기]의 주인공인 찬호는 을종의 학력으로, 축산과 삼년을 마친 후 한때 사립중학의 교원을 지낸 인물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학력이 이렇게 처리된 것은 일제의 시책을 선전함에 있어 기능인력으로서의 인물이 설정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만주국의 근로교육정책에 따라 해당학교에 의해 간택된 후, 농과의 대용 교원으로 지내면서 농사일과 같은 실습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귀농을 권장해 보았지만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말재주가 없는 대신 그저 묵묵히 농사일이나 할 줄 아는 그러한 인물이었는데 건국 전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던 학생들이었던지라 그의 말은 전혀 통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만주국의 정책이 교육의 현장에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20만 동포의 8할을 점령한 농촌으로 학생들을 돌려보내려던 주인공의 의도는 전혀 빗나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이 작품은 여기서 개척지에서의 삶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하여 알려주고 있다. 즉 주인공이 부임한 지 삼 년 동안 두 명의 청년이 개척지의 교원으로 부임해 갔으나 外敵으로부터의 위협 등으로 인해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개척지라든가 개척촌은 생명을 잃을 만큼 매우 위험한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여기서 하나의 사실, 즐 교육자라서 실패했음을 자각하고 직접 개척의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85쪽)주인공은 목장을 꾸미기 위해 첫째, (감자 사료를 얻기 위해)농민을 입식시키고 둘째, "현당국"의 협조를 얻게 된다. 특히 후자는 "와우산목장"이 "목축부락"으로 인가를 받고 "목축자작농"에의 각종 편의를 받았음이 밝혀져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개척민 부락이 건설되기 위한 두 가지 필수적인 조건을 제시해 놓고 있다....이 작품의 구성은 시국과 관련되 이러한 내용을 전반에, 그리고 주인의 조력자인 양돈전문 인부에 관한 이야기를 후반에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노송이라는 인물은 돼지를 끔찍히 사랑하는 인물인데, 이러한 인물의 설정은 작품의 전반에서 주인공인 찬호가 돼지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낀 반면 인간(학생)에 대해서는 실망했다는 심리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1940년 가을, "목축지정현"인 00현의 臥牛山을 배경으로 그 해 겨울까지 있었던 일을 다루었다.(86쪽)작품의 서두와 말미에는 이러한 계절의 경과를 그려둠으로써 구성의 묘를 기해보려 하였으나 時局物로서의 성격을 탈피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이처럼 사립학교에서 농사일과 같은 실습을 맡고 있던 기능적 지식인이 학생들을 향해 만주국의 근로정책을 찬양해 보았지만 신통치 않자 그 스스로가 개척민이 되어 목축부락을 세우고 돼지목축을 해나간다는 이야기였다.(86쪽)이상 어용소설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개성의 상실과 함께 전체성을 획득한 이상의 소설들은 이미 문학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주로 시국적인 주제가 어용적 입장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소설의 양식은 파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팽팽한 대립은 찾아볼 길이 없고 작가적 개성 또한 상실한 이렇나 소설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親日的 傾向, 天皇에 대한 狂的인 忠誠心, 戰時政策에 대한(90쪽) 무조건적인 복종, 주체성의 살실 등이다. 이는 [아자미의 장]과 [뒤돌아보지 않으리], 그리고 [봄의 노래] 및 [목축기]에서 잘 드러났다. 침략전쟁을 수해하는 것, 이 한가지 일에만 미친 듯이 매어달렸던 것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였던 듯하다. 오직 군국주의적인 파시즘만이 대두되었던 이때의 소설들 대부분에서 미적인 형상화보다는 국한된 목적의식밖에 찾을 길이 없다. 일제의 정책선전에 기여하기도 한 이러한 소설들은 주로 작가들의 창작동기라는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작가들이 획일적이고도 폐쇄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자유로운 사고를 펼치지 못했던, 어용소설들은 바로 暗黑期 소설의 한가지 뚜렷한 양상이라 할 것이다.(91쪽)이 시기 소설 중에는 일제의 국책 선전에 협력한 소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어용소설과 대립되는 순수지향 소설은 어려운 창작적 정황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발표되었다. 순수지향 소설 중에서도 특히 한글로 표기된 순수지향 소설이 여전히 발표되었다. 이는 {국민문학}지 들을 토해 일본어로 표기된 작품이 많이 발표되는 상황에서의 일인지라 우리 문학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러한 순수지향 소설의 유형은 대체로 세 가지로 갈라 볼 수 있다. 첫째는 身邊小說이다. 일제말기 신변소설은, 신변소설이라는 字義(字意?-인용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둘째는 세태·시정소설이다. 일제말기 세태·시정소설 또한 그 字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아진다. 이외 이상의 두 유형에 들지 않는 소설들이 있다. 이를 흙과 자연에의 磁性이 나타난 소설들이(91쪽)라 하여 살펴 보았다.(92쪽)어용소설과 함께 일제말기 소설사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큰 흐름은(엄밀히 말해 순수지향의 소설 중에서도) 신변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신변소설은 당시 작가들에 의해 많이 발표되었다. 신변소설은 작가가 자기의 생활 체험이나 신변의 사실만을 다루는 소설이다. 일제말기 신변소설은 작가의 신변사는 물론이지만, 특히 작가의 (전체주의적 경향에 반한) 개인의식을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일제 말기 신변소설에서 보여지는 작가의 개인의식은 무엇보다 당시의 현실과 관련되 것임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즉 이 시기 작가들은 신변소설을 통하여, 일제와의 직접적 대결이 불가능한 상황이 빚어내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즉 시대적 고민을 표출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생활의 정신화를 꾀하거나 과학적 법칙을 통하여 생활의 변모를 가져오려는 지식인 작가가 일제와의 대결이 봉쇄되었다고 하여 현실의 전면으로부터 완전히 후퇴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로부터 물러서는 듯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이 점은 자의를 그대로 나타내는 일본의 私小說과 한국의 신변소설이 결코 동일한 의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저자 주) 이 시기 신변소설을 통하여 드러나는 작가들의 시대적 고민은 이러한 각도에서 파악된다.(92쪽)세태소설이란 프로문학의 퇴조에 따라 소설계에 사상성이 현저히 후퇴한 대신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경향-즉 하나는 世態描寫(외향적)인 것과 다른 하나는 內省心理(내향적)인 것 중 하나이다. 임화에 의하면 세태소설이란 "내성의 소설"과 대척적인 소설이며, 무력한 시대의(114쪽) 소설로서 평가되고 있다.(115쪽)가족사소설에서 시간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시간은 하나의 역사적 흐름이자, 인간의식의 각성과정이기도 하다.(116쪽)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억압과 긴장의 해소를 반복함으로써 그 조절기능을 적절히 수행해 나간다.(125쪽)일제말기 소설 중에는 주제가 뚜렷하지 않은 소설이 상당히 많다. 작품의 내용이 일부는 어용적이고 일부는 비어용적인, 이러한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형상화하는 소설쟝르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이단일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소설의 경우, 어용적인 측면에 주목하여 어용소설로 분류하였다.(171쪽)본고가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소설들은 1941년부터 해방 전까지의 시기에 발표되었던 것드이다. 소설연구의 기점을 1941년으로 택하게 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즉 1941년은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비화됨에 따라 일제에 의해 민족말살정책이 더욱 강하게 추진되었으며 문학 또한 이에 따라 완전한 변모의 양상을 보였다는 것, {문장}의 폐간에서 알 수 있듯 민족문학의 발표매체가 상실되었다는 것, 한글 사용의 강제규제와 함께 일어상용이 강요되었다는 것, 문단의 어용화가 더욱 촉진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1941년 이후의 시기는 '조선문인협회'나 '조선문인보국회'와 같은 어용문인단체에 의해 작가들이 전쟁을 위한 시책에 앞장 설 것이 요구되었고 또한 일본어로만 작품을 쓰도록 요구되었다. 여기서 본고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이, 이와 같은 연유로 1941년부터라고 보아 1941년 이후의 시대 속으로 들어가서 소설계를 구명함으로써 공백기로 일컬어져온 이 시기의 문학사에 작은 디딤돌을 놓고자 하였다. 한편 문학과 관련하여 이 시기의 시대정신을 뜻하는 용어로서는 통칭 암흑기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용어는 애초 白 鐵에 의해 불리워졌던 바, 민족문학에 대한 허무주의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179쪽)1936년  8월 미나미 대장, 총독에 취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공포1937년  2월 일본어 사용을 강제1938년  2월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 창설        3월 중등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1940년  2월 창씨제도 시행        8월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폐간       10월 국민총력연맹 조직, 황국신민화운동 강행1941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 공포        8월 농산물 공출제도 강행1943년  5월 해군특별지원병제 실시        8월 징병제 실시1944년  1월 학병제 실시(李弘植, {國史大事典}, 대영출판사, 1976의 년표 참고.-저자 주)(274쪽)1941년 4월, 월간의 순문예지인 {문장}과, 역시 같은 성격이나 평론중심의 글을 싣던 {인문평론}이 폐간되었다. 그 후작가들은 {춘수}, {국민문학}, {동양지광}, {신시대}, {야담}, {조광} 같은 잡지나 {매일신보} 같은 총독부 기관지에다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리한 잡지와 신문의 지면에 친일적인 작품을 게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국민문학}은 몇 편의 한글 작품을 제외하고 일본어 작품만이 실려 있는, 일본어 일색의 잡지였다.(274쪽)[새벽]은 모두 23回가 연재되었다. 신문소설은 독자에게 계속적으로 흥미를 유발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 작품 또한 이를 고려한 때문인지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圖式的인 듯하다. 또한 신문소설은 광범위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 작품 또한 이를 고려한 때문인지 그 내용이 비교적 단순하다. 그리고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민 공동체와 같은 스케일이 큰 이야기보다는 이민일가의 삶이라는 스케일이 작은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문에 연재한다는 負擔感을 다소 덜어보려 한 것 같다. 시대적 배경이 만주건국 이전의 과거로 설정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그러나 이 작품은, 고난에 가득 찬 간도 이민의 정착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새벽]은 그 제재가 전형적이며 그 다루어진 사건 또한 蓋然性이 있다고 할 것이다. 간도 이민의 정착과정중에 있었던 빚에 얽힌 人間事, 얼되놈의 橫暴, 그리고 그 결과로 慘憺한 지경에 처하게 된 일 등을 통하여 이민의 정착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277쪽)[새벽]은 만주에서 한국인 이민들이 정착과정에서 너무나 흔하게 겪었을 법한, 결코 평범할 수만은 없는 경험적인 敍事를, 微視的 範疇인 한 이민가족을 통하여 다루어 나간 작품이다.(278쪽)[홍염]과의 간텍스트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새벽]은 간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구체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고 하겠다.(278쪽)남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의 제목에 관한 것이다. 작품의 제목인 "새벽"은 결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새벽이 의미하는 바는 희망 또는 낙관이다. 그런데 그 결말은 매우 비극적인 것이었다. "새벽"이라는 제목은, 단지 작품의 中間場面 일부와만 호응되고 있을 뿐이다. 그 중간장면에는 "장작림군벌의 사용병(私用兵)인 육군"들의 "약탈"상이 그려져 있다. 군벌로부터 물자지급을 받지 못하는 군인들은, 주인공의 집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의 횡포가 있고 난 후,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78쪽)주민들은 누구나 할것업시 평화롭고 안온한 속에서 즐겁게 농사를 지을수 잇는 세상을 갈망하엿다. 그러나 누구하나 십여년후에 이 땅에 그들이 갈망하는 세상이 웅장한 보조로 차저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햇다({싹트는 대지}, 97-98면-인용자 재인용).군벌로 인한 피해가 사라질 만주 건국이야말로 이민들의 농사를 안전하게 보장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점에서 제목인 "새벽"은 장차 도래할 만주의 건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정책에 편승하여 제목이 붙여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새벽]은 일제를 무조건 찬양한 작품은 아니다. 한 청년이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된 이 작품은, 그 소년 주인공을 등장시켜 간도 이민 일가의 수난을 집작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새벽"이라는 제목은 다만 편의상 붙여진 데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279쪽){만선일보}를 통하여 나타난 찬수의 생각과 행동은 선집·전집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단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의 세력이 사태 해결의 관건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선일보}판의 [벼]가, 간도의 조선인 이민을 통하여 그 땅과 논, 고리고 벼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그린 작품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285쪽)[원각촌]이 일제의 만주에 대한 정책적 이민인, 개척민을 권장할 의도로 마련(285쪽)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 또한 앞서의 작품들처럼 단순히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는 소설로만 보기는 어렵다.((286쪽)[원각촌]은 간도에 살고 있던 동포들의 개척담을 담았다는 점에서 경험적 서사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원각촌]은 그와 같은 경험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갈등을 그린 허구적 서사물이라는 점에서도 이채를 띤다.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리원보는 특이한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출신지가 분명치 않은 그는 아내에 대한 끔찍한 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사보다는 산판으로 전전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힘이 센 그는 외톨이로 자처했고 과묵했다. 작가가 만주의 이주농민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이처럼 의처증에, 방랑벽에, 불교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허구적 서사를 위해 架空의 인물을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처럼 한익상 또한 가공의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익상은 경험적 서사에 더욱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 관리들에게 빌붙어 동포들에게 횡포를 일삼아 온 얼되놈이다. 여기서 한익상의 제거는 동포들만으로 이루어진 원각촌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원각촌의 안정을, 민족모순 같은 구조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단순히 일개인의 제거 같은 현상적인차원에서만 다룬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 작가는 [원각촌]을 선구 개척민 생활 발굴이라는 각도에서 다루기보다는 오히려 남녀간의 애정(289쪽)갈등에다가 그 각도를 맞추었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한익상은 원각촌의 정신적 지주인 화담법사와의 긴장된 대립보다는, 오히려 금녀를 중심으로 하여 억쇠의 연적으로 기능한 몫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한익상은 이 점에서 억쇠와 금녀의 애정을 가로막는 방해인물인 것이다.한편 배경이 된 원각촌은, 동포들만이 모여사는 곳이다. 불교를 믿고 농사를 지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참으로 살기 좋은 이상촌이 건설되고 있다고 하였다. 원각촌은 그런데 실재하는 촌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촌이기도 하다. 이는 경험적 서사와 허구적 서사의 조화때문인 듯하다.(290쪽)[원각촌]은 발표기관이 {국민문학}지였다. 따라서 모종의 시국적인 색채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말에서 "명일의 평화"란 곧 만주 건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국적 발언은 작가의 설명에도 나타나 있었다. 서두에서의 작가의 설명과 결말에서의 나레이터의 발언은 일종의 외부액자를 이루고 있는데 이 외부액자에서 시국적인 발언이 행해진 것이다. 그러나 [원각촌]은 개척민의 생활묘사에 주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녀간의 삼각관계를 통한 애정을 그리는데 주력한 듯하다. 이와 같은 남녀간의 애정은 일종의 내부액자에 담겨져 있는 셈이다. 작가는 [원각촌]에서 선구 개척민 생활 발굴을 명분으로 밀고(290쪽) 나가면서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짜임새있게 전개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91쪽)만주에 대한 정책적 이민을 '개척민'이라고 불렀음에 비추어 [목축기]는 일단 일제의 이민정책에 순응하여 씌어진 작품이라 하겠다(291쪽)한편 이 작품의 후반에서 老宋이라는 인물은 찬호의-인간에 대한 嫌惡心이라는-심리를 강조해주는 역할을 맡은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찬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전반과 달리 후반은 노송이 중심인물로서 이야기의 방향이 다소 엉뚱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시국적인 이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작가의 의지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292쪽)작품의 후반은 노송을 통하여 개척생활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노송의 이야기는 인물설정이라든가 작품의 분위기가 전반과는 뚜렷하게 다르다고 보아진다.(293쪽)그가 "눌변"이라는 것은 그의 역할이 매우 고민스러운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학생들로부터 "귀농선생"이란 별명까지 얻은 그는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개척의 현장에 종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철저히 만주국의 정책에 순응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교육자로서, 목축가로서 그는 만주국의 꼭두각시역을 맡고 있는 것이다.(294쪽)이 작품의 후반에 등장한 老宋이 찬호의 심리를 강조해주고 있다함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나 전반을 다시 검토한 결과, 우리는 후반이 전반과 다르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된다. 즉 전반이 시국에 매우 민감한 인물을 형상화했다면, 후반은 시국에 전혀 鈍感한(294쪽) 인물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후반은 하나의 독립된 성격을 지닌 이야기로서 그 자체가 純粹物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작품의 전반을 통해 시국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작품의 후반을 통해서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두와 결말에서 보듯 臥牛山을 통한 계절의 경과를 그림으로써 한 편의 이야기로 완결되어졌다고 하겠다.(295쪽)간도는 식민지하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지만 또한 고난의 땅이기도 했다.(306쪽)[벼]는 조선인 이민의 논(벼)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그렸다. 특히 밥 다음으로 필요한 학교 설치-이민 2세의 교육 문제-를 다루었다.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드이 어떤 경로를 밟아 하나의 사회를 이룩해 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지도자격인 지식인 주인공의 일제 세력에 대한 傾斜는 아무런 반성을 수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포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독립심이 다소 부족한 것으로도 보였다.(306쪽)일제말기에 창작된 안수길의 소설들은, 시대와 접촉하고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세계관이 상이한 듯하다. 작품의 제목이나 외부액자는 일제의 시책에 순응하고 있지만, 작품의 내용이나 내부액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진다. 이는 특히 [새벽]과 [원각촌]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목축기] 또한 [원각촌]과 같은 성격을 지닌 일종의 액자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말기 안수길은 일제의 시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거부하면서 창작활동을 지속해 나갔던 것으로 판단된다.(1991-저자)(307쪽)
만보산사건은 일본이 만몽(滿蒙)에서 토지상조권(임차권)을 얻음으로써 만몽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지 권익을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경제외교를 이때 외교이념의 특징으로 삼았던 幣原외상은 이 권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중국측의 단호한 저항과 반대에 한때 동요되어 경찰관을 철수시켰던 장춘·길림의 영사에게 강경한 태도로 최후까지 노력하라는 전보를 여러 차례 쳤다. 중촌사건은 中村震太郞대위가 흥안령의 군사적 지형 정찰을 위하여 이 지역으로 출동하였다가 현지 주둔군에게 사살된 사건이였는데, 외무성이 파견한 현지 주재기관은 이 특무정보활동에 대하여 강변하였고, 또한 이 사건을 이용하여 만몽에서 일본의 권익을 확대시키려 하였다.외무성과 폐원외교의 이와 같은 노력은 관동군의 최고 목적-무력에 의한 만몽점령-과 다름없는 것이었는데, 관동군의 군사행동에 의한 식민지 권익의 획득과 일치되어 외교교섭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만보산의 토지상조권 문제도 만주사변에 의하여 해결되었기 때문에 만몽에서 일본제국의 국익을 확대시킨 공통성이 있다. 외무성이 주도적으로 처리한 만보산, 중촌 두 사건에 폐원외교는 [연약외교]라고 비난받았으나 외무성과 폐원외교의 두 사건에 대한 강변과 중국측에 대한 대응은 만주사변 도발의 여론을 조성하고 그 사회적 기반을 만들었다.(13쪽)그러나 외무성과 폐원외교는 만주사변을 위하여 열강의 양해를 얻는다던지, 혹은 특정한 열강과 도맹관계를 체결한다던지, 혹은 외교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등 외교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또한 만주사변으로 태어난 [만주국]이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하였(13쪽)던 외교적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4쪽)일본은 사변에 대한 제3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교섭을 주장하였으나, 중국은 일본 침략을 국제연맹과 열강에 호소하여 그 힘을 빌려 일본을 제제하고 사변을 해결하려 하였다.(14쪽)국제연맹은 세계의 대소 50여개국으로 성립된 국제적인 기구였으며 주로 큰 나라 열강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구라고 말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제연맹과의 관계는 주로 열강과의 관계나 다름이 없었다. 열강과 일본은 모두 제국주의 국가로서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에서의 식민지적 권익을 보호, 확대하려는 공통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를 위하여 상호간에 도정 협력하여 서(14쪽)로 얻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에 지지하는 일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일본과 열강은 중국침략에서 각자의 권익과 세력범위를 확대시키기 위하여 서로를 배척하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러한 쟁탈을 위하여 때로는 상대국의 침략을 반대하고 제한을 가하는 일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 양면적 관계가 열강과 일본과의 이중 관계였다.(15쪽)폐원외교에는 이중성이 있었다. 폐원외교는 대내적으로 불확대의 방침을 주장하여 관동군의 군사적 확대를 견제하고 제한하면서,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을 대표하는 외교로서 관동군의 모략적 군사행동에 관하여 전면적으로 강변하여 그 군사적인 행동에 외교적 국제적 보장을 부여하기 위하여 시종일관 노력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폐원외교에 대한 연구와 평가에 있어서는 주로 사변초기의 대내적 견제 역할을 중요시, 폐원외교가 국제연맹·열강과 중국에 대한 외교에서 보여준 역할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16쪽)상해사변시기 芳澤외교는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처음부터 군부와 일치 협력하여 외무성과 군부는 하나가 되어 행동하였다. 방택외상은 육군대신과 함께 上海出兵을 결정하고 열강의 개입과 협력을 주동적으로 요구하였다. 군부도 열강의 개입에 같은 요구를 하였다. 이것은 상해사변시기의 방택외교가 만주사변시기 폐원외교가 열강의 개입을 반대하였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상해사변의 특이성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상해사변은 [만주국]의 수립부터 열강의 눈을 돌리고 만주국의 성립에 열강이 간섭하는 것을 견제하려는데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열강의 식민지 권익이 집중되고 있는 상해로 집중시키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상해사변에서는 두가지 상호 모순되는 정책을 취하였다. 하나는 사변을 도발하여 일본과 열강과의 모순을 격화시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열강을 사변에 끌어들여 여기에 협조하거나 또는 타협하는 것이다. 전자는 군부가 취한 정책이고 후자는 외무성이 주로 취한 정책이다. 이 두 정책은 방법 수단으로서 상호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열강의 눈을 돌리는 목적에서는 일치되는 것이다.열강은 일본의 계획에 따라 상해사변에 끌려들어가 일시 만주국의 수립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못하게 되었고, [만주국]은 열강의 특별한 저항없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상해사변은 일본과 열강과의 모순을 격화시(19쪽)키고 [만주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는데 역작용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0쪽)[만주국]은 일본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국가주권이 없는 식민지로서 외교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만주국]은 식민지이면서 또한 독립국가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주국]을 둘러싼 외교문제가 제기되게 되었다.(20쪽)사변후에 대[만주국]외교는 하나는 식민지 체제의 확립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만주국]승인과 국제연맹 열강의 이에 대한 승인의 획득문제였다. 이 외교는 먼저 內田외상시대부터 시작되어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변후의 외교가 이처럼 오랜기간 계속되게 된 것은 일본의 전쟁사와 또한 외교사에 있어서도 유일한 현상이었다.사변후 만주에 대한 외교 특징의 하나는 바로 그 양면성에 있다. 이면적으로는 외무성이 군부와 함께 그들의 식민지체제 확립 조정에 모든 힘을 경주함에서도 표면적으로는 역으로 그들의 식민지적 괴로정권을 세워 이른바 [독립성]을 장식하기 위하여 필사적이었다. 이 양면성의 정책을 拓務省은 [양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라고 빈정댔다.(20쪽)[만주국]이 국제적인 승인을 얻는 일은 독립국가로서의 승인을 받는 것에도 있었지만 오히려 일본의 만주침략과 일본의 식민지로서의 [만주국]이 열강에 의하여 승인을 얻는 것에 있었다. 이것은 일본과 열강이 만몽을 다투기 위하여 제기된 현상이기도 하였다.(21쪽)일본외교에 있어서 [만주국]문제는 국제정세와 戰局의 변화에 따라서 그 위치가 바뀌었다. 중일전쟁에서 첫 번째 자리를 잡고 있던 [만주문제]가 일본과 미국교섭에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순위는 여덟 번째가 되었으며, 1944년 태평양전쟁의 후반기에는 어떻게 현상을 유지하느냐로 바뀌었으며, 1945년의 여름에는 종전외교의 하나로서 [만주국 문제]가 이용되어 대미국 대소련 외교의 [토산물]로서, [만주국]의 국제관리, 중립화 혹은 북만철도와 旅順을 소련에 양도하는 등으로 변화, 전국의 변화에 따라 [만주국]의 위치도 바뀌었다.(21쪽)남경정부는 이와 같은 판단에 근거하여 만주사변에 저항도 간섭도 하지 않았으나 상해사변에서는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한편으로는 교섭하였으며, 열하작전에서는 저항 불교섭(최후에는 교섭)의 방침으로 대응하였다.(26쪽0남경정부의 만주사변에 대한 외교의 특징은 국제연맹이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關東軍을 만철 부속지에서 철수시키고, 국제연맹 총회의 최종보고에 의하여 일본을 제재하면서 괴뢰 마주국을 해산시키려는 것이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남경정부는 국제연맹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고, 미국에 기대를 갖게 되어, 9개국 조약에 의하여 만주사변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 기대에 따르는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았다.(26쪽)남경정부는 [만주국 문제]가 단기간 안에 해결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장기적인 외교정책에 의하여, 또는 일본 국내의 정치세력의 변화에 의하여, 또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 이면에는 [패배론]이 있었다. 남경정부는 군사적으로 일본에 대항하면 반드시 진다고 판단하여, 저항은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능한 한 자신의 군사적 세력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장학량·장개석이 모두 그러했다. 특히 장학량이 그러하였다. 이것이 [패배론]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이 [패배론]과 자기세력의 보존에는 역사적으로 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911년 辛亥革命에서 청조가 붕괴된 다음에 특히 1916년 袁世凱가 사망한 다음에, 중국 국내에는 군벌이 난립하여 軍閥混戰時代로 들어갔다. 1926·7년의 북벌에 의하여, 신흥군벌이 된 장개석은 형식적으로 한때 이 군벌세력을 통일하였으나 군벌 내부의 대립가 혼전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군벌은 반봉건적인 군벌로서 지방할거 세력이었다. 그들은 각자 분할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자신의 군사적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숫자적으로 일본군보다 수십배나 되는 중국측 군대는 대외 침략자에 대결하려 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세력지반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장학량·장개석도 모든 힘을 다하여 일본과 대결하여 결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결전에서 패배하면 스스로의 지배지역이 모두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사변에서 남경정부의 부저항 혹은 소극적인 저항에는 이와 같은 반봉건적 군벌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27쪽)다음으로 현실적인 문제로는 공산당의 혁명근거지와 工農紅軍에 대한 [圍剿]작전이 있었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쿠테타로 공산당을 탄압하여 제1차 국공합작을 파괴하였다. 그후 國共양당은 대립적인 국내전쟁으로 들어갔다. 국민당은 1930년 12월에 10만군대를 동원하여 제1차[剿共]작전을 시작하였다. 1931년 4월에는 20만 군대를 동원하여 제2차 작전을 하고, 이해 7월에는 3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3차 작전을 시작하였다. 만주사변은 바로 이시기 중간에서 일어난 것이다.(28쪽) 이를 위하여 국민당의 남경정부는 대공작전을 중요시 하고 일본에 대하여 부저항 정책을 취하였다. 상해사변때에도 약 5개 사단을 상해에, 30개사단을 대공산당포위에 배치하여 상해정전협정을 성립시키자 마자 바로 60만의 군대를 출동하여 제4차 [圍剿]작전을 시작하였다. 1933년 5월에 당고협정에 의하여 만주사변이 일단 종결되는 것처럼 보이자 10월에 바로 백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5차 공산당에 대한 [위초]작전을 시작하였다.(28쪽)만보산의 서남 10-51㎝(㎞의 오타가 아닐가-인용자)가 되는 곳에 伊通河가 있으며, 강의 서안에 三姓堡·馬家哨口·宮荒屯 등의 촌락이 있는데, 그 주변에는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수만경이나 있었다. 이 토지의 소유자는 매년 정부에 지세를 납부하였는데 그 재정적인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에 일부 한인 농민들을 고용하여 수전(논)을개발하고 있었다. 제3구의 구장 曹彦士는 1931년 3월에 현정부에 이 일을 보고하여 현정부도 이 황무지의 개발을 통감하고 그에 관한 구체적인 대책을 검토하였다.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만보산 지방에서 토지상조권을 획득하고자, 이 일대에 한인 농민을 대량으로 이주시켜 수만경의 토지, 즉 논을 개발하려고 하였다. 중국국민당 길림성 당무지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0집, pp.570-1-인용자 재인용) 일본측은 이통하 양안에 17개의 수로를 굴착하여 한 수로에 1천경의 水田(논)을 개발하도록 하여 약 2만경의 수전을 조성하고 한인 농민 2·3만명을 이곳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본은 또한 滿鐵線을 馬家哨口까지 연장하여 한인 농민의 거주를 구실로 영사관과 경찰서까지도 설치하고자 하였다. 만보산 지방에 대한 개간문제는 이 장기계획의 한 부분으로 일본이 만몽지방에서 토지상조권을 획득하고 중국측에게 인정시켜 만모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지적 권익을 신장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그러나 당시 중국측은 만몽지역에서 일본인에 대한 토지상조권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직접 중국의 지주로부터 토지를 빌리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중국인 매국노  永德을 이용하였다. 학영덕은 일본측과 공동으로 비밀리에 어용회사 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여, 이 회사의 이름으로 만보산의 지주인 張鴻賓·蕭翰林 등 12명과 4월 16일에 황무지 5백향(頃의 오타인 것 같다-인용자)의 租地契約을 체결하였다.(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0집, pp.505-7-인용자 재인용) 학영덕은 이 토지를 스스로 경영 경작하지 않고 바로 한인 토지경영자인 李昇薰 등 9명에게 轉貸하여 그들과 10년동안의 계약을 체결하였다.(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0집, pp.507-9-인용자 재인용) 이승훈(33쪽) 등은 길림성 각지로부터 한인 농민 180여명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살도록 하였다. 4월 18일부터 먼저 황무지와 이통하를 연결하는 수로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수로용지는 두가지의 계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체 길이 10㎞에 걸친 수로용지는 당지 41명의 농민 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게 되었다. 당지의 농민들은 4월말부터 한인 농민들의 굴착공사를 저지하려하였는데, 한인 농민들은 일본 관헌의 지지아래 수로굴착공사를 계속하였다. 5월 하순에 중국측 농민은 이 문제를 직접 성정부에 탄원하였다. 25일에 장춘현 공안국은 중국 경찰을 파견하여 공사중지를 권고하였으나 한인 농민들은 공사를 계속하였다. 중국 경찰은 한인 감독을 구속하였다. 6월 1일에 장춘현 정부는 직원을 파견하여 이 현의 경찰과 협력, 평화적인 수단으로 한인 농민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한인 농민은 철수하지 않았다. 중국 경찰은 그들의 우두머리 8명을 공안국으로 연행하였다. 6월 3일에 장춘현 공안국장은 기마대 50명과 경관 10명을 이끌고 이미 연행한 8명과 함께 수로 굴착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마가초구에 가서 공사중의 한인 농민을 쫓아냈다. 일본측은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일본영사관의 경찰관 10명의 지원아래 한인 농민에게 계속하여 공사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농민과 한인 농민, 중국 관헌과 일본 관헌이 대립하게 되어 7월 1일에 일본 영사관의 경찰관 발포에 의하여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34쪽)한인 농민의 만몽지방 이주는 본래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역사적 관계와 국제법이 명확하지 않아 자연적인 왕래에 속하는 것이었으나, 청일전쟁후부터 서서히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만몽침략 정책의 일환으로서 그 성격을 바꾸게 되었다. 일본은 1908년 조선에 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성립시켜 1910년까지 2년동안에 1만1천 정보의 조선 농민의 토지를 탈취하였다. 조선병합후에는 이른바 토지조사를 통하여 또한 102만 5천 정보의 토지를 탈취하였으며, 동양척식회사도 1920년에 10만 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다수의 조선인 농민들이 몰락하여 토지를 잃은 소작농이 증가하였다. 그들은 생존을위하여, 토지를 구하기 위하여, 조상의 고향을 떠나 土們江과 鴨綠江을 건너 만몽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이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의 산물이었으나 동시에 또한 일본의 만몽정책의 한 구성 부문으로서 일본에게 이용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21년 5월 봉천총영사 赤塚正助가 편찬한 <在滿朝鮮人問題>란 제목의 보고서는 [요컨데 조선인들이 중국 관민으로부터 거주의 위협을 느끼는 박해를 받지 않고 비교적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고 살도록 그들에게 평등하게 재정적인 원조를 보태주어 장래 이들의 생활이 낳아지게 되면 제국(일본)의 북만주로의 발전에 유용함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滿洲移民史硏究會 編, <<日本帝國主義下の滿洲移民>>, 龍溪書舍, 1976, p. 325-인용자 재인용)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있어서 한인의 만몽이민이 기대되어, 일본의 만몽정책의 일환으로서 추진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35쪽)일본은 만주에 있는 한인의 국적 문제에 대하여 일본에 유리한 때에는 한인이 귀화하여 중국의 국적을 취득하게 되고, 또한 한인이 이른바 [일본신민]으로서 국적이 일본에게 있을 때가 유리한 경우에는 일본 국적을 적용하였다. 이것은 한인의 이중국적이 일본의 만몽정책에 유리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중국적 문제는 일본의 만몽침략정책과 직접 관련된 문제가 되었다.중국측은 일본의 만몽정책의 일환으로서 한인의 이중국적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만몽지방에 있는 한인이 완전히 귀화한 중국국적을 취득하기를 원하였다. 7월 상순에 만보산 사건후 조선에 있는 화교배척 사건을 시찰하기 위하여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일본주재 중국공사 汪榮寶는 조선의 민족주의 단체인 新幹會 간부와 회담하였을 때 [신흥 중국이 평소부터 치욕을 감내할 수 없었다. 영사재판권과 치외법권의 철폐를 위하여 진력하고 있는 오늘날 한인이 이중국적을 갖고 있는 것은 침략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이 분쟁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중국에 귀화하게 되면 만사는 해결된다](<<朝鮮日報>>, 1931년 7월 19일-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만보산 사건과 이중국적 문제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만보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38쪽)동북당국은 일본의 만몽정책의 일환이 된 한인 농민의 이중국적 토지소유권 문제에 대하여 1928년부터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봉천성정부는 28년 3월 <日鮮人土地耕作團束에 관한 訓令>, 29년 4월에 <이주조선인 단속에 관한 훈령>, 같은 해 7월에 <조선인 토지경작 단속에 관한 훈령>을 내려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39쪽)일본측이 특히 논의 벼농사를 고집하게 된 이유는 수로용지에 대한 토지상조권을 획득하는 문제이외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삼았던 만몽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몽에는 관동군·만철직원과 그밖의 일본인이 약 23만명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쌀을 현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45쪽)주옥병처장(장춘시정주비처-인용자 주)은 수로용지는 절대적으로 점거하는 일을 허가할 수 없으며 한인 농민의 구체적인 생활 곤난상황에 따라 개간하는 논을 밭으로 바꾸고 이에 의한 손해는 학영덕이 배상하는 안을 제의하였다.(<<上海新聞報>>, 1931. 7. 9-인용자 재인용) 이것이 중·일 타협안인데 일본측은 찬성하지 않았다. 林총영사는 15일에 張作相에게 [한인들이 지주에게 공사관계로 입힌 손해를 배상하는 대신에 중국측은 이곳에서 한인들이 논농사를 하도록 인정](Microfilm, S483 reel, Sl. l. l. 0-18. p. 68-인용자 재인용)하라고 요구하였다. 奉天省 주석 臧式毅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하였다.(45쪽)봉천의 森岡영사도 이곳 영사관을 방문한 길림성 정부의 교섭서 주임 施履本에게 [중국측에서 시간을 끄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이후 이틀안에 수로공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다하고 일본측은 한인들이 이 지방에 거주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논농사를 경영하는 것 이외에 없다]고 말하였다.(Microfilm, S483 reel, Sl. l. l. 0-18. p. 86-인용자 재인용) 시이본은 논농사를 밭농사로 바꾸고 이에 의하여 발생된 손해는 중국측이 배상하는 안을 다시 제의하였으나 삼상영사는 [귀하의 제안은 절대로 승인받을 수 없다](Microfilm, S483 reel, Sl. l. l. 0-18. p. 88-인용자 재인용)고 반대하였다.(46쪽)7월 상순에 한국에서 일어난 화교배척사건의 도화선은 <<朝鮮日報>>의 호외때문이었다. 호외는 [중국관민 800여명이 200동포와 충돌 부상, 중국 주재경찰관과 교전, 급보에 의하면 장춘주재 일본 주둔군이 출동준비, 三姓堡에 풍운이 점차 급함], [대치한 일·중관헌이 한시간여 교전하여 중국 기마대 600명이 출동, 급박한 동포의 안위], [철수요구를 거절, 기관총대를 증파], [전투준비]이라고 만보산 사건을 확대하여 보도하였다.(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第一書房, 1981, p. 117-인용자 재인용) 이 보도를 본 한인들은 인천·진남포 평양 등 30여개소에서 화교를 박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화교는 사망자 121명, 부상자 300명, 실종자 77명, 재산손실 수백만원의 피해를 입었다.(羅家倫 編, <<革命文獻>>, 제33집, p. 664-인용자 재인용) 만보산 사건과 화교배척사건과의 관계를 해명하려면 이 사실을 확대 보도한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金利三과 외무성의 현지 주재기관과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天津 <<大公報>> 北京 <<晨報>> <<吉長日報>> <<益世報>>는 김이삼이 일본영사관의 사주를 받아 과장된 허위적인 떠도는 정보를 보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吉長日報>>, 1931. 7. 16-인용자 재인용) 김이삼은 早稻田大學출신으로 7월 15일의 <<조선일보>>에 <조선일보 기자의 사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는 [만보산의 한인 농민은 불합리한 투쟁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이미 현장에서 퇴거한 자가 많으며 남아있는 한인 농민도 일본 경찰의 저지에 의하여 자유롭게 퇴거할 수 없기 때문에 진퇴양난의 어려운 처지에 처하여있다.] [만보산 사건은 일본영사관(71쪽)의 사주를 받아 허위로 본국에 허위보도를 타전하고 나아가 양민족이 충돌하는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한·중 양민족에게 사죄한다]는 뜻을 표명하였다.(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第一書房, 1981, pp. 135-6-인용자 재인용) 이 사죄성명은 滿蒙에 있는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위협아래 쓰여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의 신빙성이 문제가 있을지 모르나 김이삼이 7월 15일 길림시의 遠東旅館에서 길림총영사 순보 朴昌厦에게 암살되었다는 것은 총영사관의 사주에 의하여 김이삼이 허위적인 보도를 타전하였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닌가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일세보>>는 7월 19일에 [오호 일본제국의 추행, 한인의 화교배척을 충동하고 있는 확증, 조선일보기자 일본영사의 사주받아 날조 선동. 차후 참회해서 흑막을 폭로하고 일본경찰에게 총살되다]라고 보도(72쪽)화교배척사건이 발생한 다음 중국의 각 신문은 가장 큰 문제로 이 사건을 보도하여 중국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고 광범위한 충이 참가한 반일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운동은 上海를 중심으로 일본상품의 불매운동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상해에서는 7월 13일에 시상회 노동조합·각 민중단체 등이 반일화교후원회를 성립시키고, 한국에 있는 화교를 후원하는 자금을 모금하고 동시에 일본상품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이 회는 17일에 <일본상품배척방안대강>·<일본상품저지방법대강>을 제정하였으며, 29일에는 <일본상품처리방법>을 결정하고 일본상품검사소를 설치, 실력으로 일본상품을 압수하였다.(76쪽)이와 갈이 화교배척 사건에 대한 중국인들의 투쟁방향은 만주에 있는(76쪽) 한인들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향하여 있었다. 이것은 남경정부 중국민중단체와 언론에서 화교배척 사건에 관하여 정확하게 이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국국민당 길림성당무위원회의 <만보산 화교배척 두 사건에 관하여 민중에게 고함>은 만보산·화교배척 사건의 원인은 불평등조약에 있으며 [민중은 일치 단결하여 주동적으로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우리 동포는 세계의 약소민족과 연합하여 공동분투하자]는 구호를 제창하면서 청백충실한 한인에 대하여 인식을 한층 더 분명하게 이해하여, 확실히 연합하여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영원히 우의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일치 노력하여 공동의 적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遼寧省 案館史料-인용자 재인용)고 길림성안의 중국 민중에게 호소하였다.(77쪽)이른바 만보산 사건은 한인 농민과 만보산지역의 중국 지주 농민과의 토지분쟁 형식으로 발발한 사건이었으나 실은 일본의 만몽에 대한 토지 상조권 획득과 중국정부 당지의 지주 농민이 일본의 이러한 경제침략에 반대하는 것에 의하여 일어난 충돌이었다. 그 성격은 토지상조권의 문제로서 한인 농민이 일본측에 이용되어 양측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난 사건이었다.(92쪽)상해는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는 거점이었으며 따라서 열강은 상해에 대량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당시 상해에 투입되어 있던 외국 투자는 일본-3억 8천만량, 영국-5억 3천 4백만량, 미국-1억 6천 3백만량, 프랑스-1억 3백만량이었으며 무역액(1930년 현재)은 일본-1억 7천 2백만량, 미국-2억 5천 7백만량, 영국-2억 9천 8백만량이었다. 열강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상해에 거대한 식민지 권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만주사변 이래 중국 인민의 반일, 반침략의 투쟁 가운데 열강도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공동의 운명에 처해 있었음을 말하주는(179쪽)것이라 할 수 있다. 관동군의 板垣 등이 다른 지방도 아니고 상해에서 사변을 도발한 원인도 상해 지구의 이와같은 특징을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180쪽)3월 1일의 괴뢰 만주국의 수립, 같은날 상해 파견군의 총공격과 3일의 임시총회의 개최는 거의 같은 시기에 겹쳐지고 있다. 이것은 우연한 현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1일의 괴뢰 만주국의 수립은 3일의 임시총회 개최 전에 이를 기정 사실로 만들어서 임시 총회가 개최되면 여기에 압력을 가하여 총회가 이 기정 사실을 묵인하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1일의 총공격은 3일에 개최된 임시 총회의 시선을 상해 문제로 집중시켜 괴뢰 만주국의 수립을 열강의 눈으로부터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195쪽)우선 외무성은 일본이 멋대로 세워놓은 괴뢰 정권을 동북인이 전개한 독립 운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괴뢰정권 수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1월 25일 국제연맹의 제4차 이사회가 개최되게 되었다. 이 이사회에 대한 대책으로 芳澤외상은 일본측 理事에게 만몽 독립운동은 [이른바 동북인의 동북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운동이 이번 사변 이후의 시국을 이용하여 표면에 드러난 것으로 생각되는바, 소위 독립 운운하는 일은 중국에서 흔히 있는 일로 이번 운동도 요컨데 순수한 중국측 내부의 문제로서 우리가 관여할 이유가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23-인용자 재인용)라고 변명하도록 지시하였다. 25일 재개된 이사회에서 佐藤尙武이사는 [일본군이 만주에 출병한 이후에도 중국 관민은 여전히 동지방에 안주하고 있으며 오로지 지방 정부의 교체만이 있었을 따름](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34-인용자 재인용)이라고 변명하였다.(273쪽)괴뢰 만주국을 승인할 것인가의 여부는 일본과 열강이 만몽을 쟁탈하는 투쟁이기도 하였다. 19세기말 이래 일본은 열강과 쟁탈 가운데에서 남만주에서의 식민지 권익을 획득하였으나 이제는 전 만몽에 대한 패권을 쟁탈하게 된 것이다. 열강은 남만에서 일본의 권익을 승인하였지만 일본이 전 만몽에서 패권을 확립하는 데에는 반대하여 일본과 만몽을 쟁(281쪽)탈하였다(282쪽)연맹은 2월 15일 [국제연맹 규약 제15조 제4항에 따른 국제연맹 총회 보고서]-소위 최종 보고서를 일본 대표에 넘겨주었다. 이 보고서...제4부 권고의 기술에서는 리튼보고서 제9장의 10원칙을 전면적으로 채용하여 일본군이 부속지 내로의 철병과 만주 자치 정부의 건립을 권고하는 동시에 미·소 위원을 포함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양 당사국 간의 교섭을 촉진하도록 규정하였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p. 482-7-인용자 재인용)(301쪽)총회는 연맹 보고서의 채택에 들어가 지명 투표를 시행한 결과 찬성 42, 반대 1(일본), 기권 1(태국)로 보고서는 채택되었다. 보고서의 채택은 국제연맹과 열강이 괴로 만주국을 부정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일본이 국제적 승인을 획득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3월 27일(1933년-인용자) 국제연맹의 탈퇴를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 후 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계속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302쪽)일본은 청일전쟁이후 본격적으로 만몽을 침략함으로써 열강과 만몽의 지배권을 두고 쟁탈하였다. 이 쟁탈전에서 일본은 영국의 종용하에 南滿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 후 만몽에서 일본의 세력이 확대되자 열강은 그 세력을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대전 후에 만들어진 워싱턴체제는 열강이 서로 협력하여 만몽 및 중국본토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고 만든 시스템이었다. 일본은 이 견제를 타파하려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 시스템에 도전하였다. 이 도전은 일본이 만몽을 놓고 열강과 쟁탈하는 싸움이기도 하였다.(303쪽)사변초기에 일본과 열강은 연맹의 옵서버 파견문제를 중심으로 대립하였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에 간섭하는 제1보로서 연맹의 옵서버를 만몽에 파견하여 사변발발의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대책을 강구하여 만몽에서 일본의 군사적 확대를 제한하려고 하였다. 외무성은 대외적으로 關東軍이 사변을 일으킨 사실을 은폐하고(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관동군이 柳條湖의 만철선을 폭파하고 심양(봉천)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독립 수부 보병 제2대대와 제2사단의 보병 제29연대가 북대영과 봉천성을 공격하면서 막을 열었다. 그러나 일제는 장학량의 군대가 滿鐵을 파괴하기 우해 사변을 일으킨 것 같이 세계 여론을 기만하였다.-인용자) 사변에 대한 연맹과 제3국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사변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연맹의 파견요구를 반대하고 연맹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던 것이다.(304쪽)열강은 만몽을 쟁탈하기 위해 관동군을 부속지내로 철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중국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관동군의 만주군사점령에 대해 동정하는 일면도 갖고 있었다.(307쪽)폐원외상은 [시찰원의 임무는 중국의 전반적 형세를 현지에서 보고 듣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즉 보다 상세하게 말하면 중국 각지에서 對日 불법행위 내지 일반적인 생명재산의 안전을 확보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위의 안전이 확보되고 있는지, 중국은 일본 기타 각국과의 조약을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위 조약이 이행되고 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재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만주시찰을 목적으로 하고, 특히 아군의 철군 여부와 관련하여 직접 관계있는 사항만을 조사하도록](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561-인용자 재인용) 지시하였다.(308쪽)이사회의 일본대표부는 폐원외상의 지시에 근거하여 대표부의 試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측이 제출했던 5항목 대강에 근거하여 중·일 양국이 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를 이사회가 승낙하면 연명시찰원의 파견을 고려하는 것으로 하였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570-인용자 재인용) 이것은 시찰원 파견을 중·일간 직접 교섭을 위한 교환조건으로 제출하였던 것이다.(308쪽)(폐원외상은 일본대표에게)결의문(시찰원파견에 관한 결의문) 가운데에서 [(가)중국 각지에서 排外排貨運動의 상황부터 조사를 진행하고, (나)중국은 외국인 생명재산의 안전을 확보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생명재산의 안전을 확보케 하고 있는지, (다)중국은 외국과 맺은 조약을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현재 기존의 이들 조약이 완전히 이행되고 있는지 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권위있는 위원을 임명케 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609-인용자 재인용)라는 것을 명확히 기입할 수 있도록 훈령했다.다만 폐원외상의 주관적 생각과는 반대로 열강은 의연히 만주사변에 관심을 갖고, 조사단의 조사목적·범위에 대해 폐원외상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연맹사무총장 드러몬드는 [일본측에서는 중국의 전반적인 상황 조사를 중요시 한 나머지 만주에서 일아난 이번 사건에 관한 조사 등은 비교적 경시하고 있다고 인정된다.]라고 하고, 이것에 반해 [중국측에서 만주사건에 관한 조사를 중점적으로 해야 한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쌍방간의 차이는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하면서 드러몬드는 자신의 결의시안을 제출하였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614-인용자 재인용)(309쪽)澤田이 폐원외상에게 연맹측의 결의안을 수락하도록 건의하였을 때, 연맹 수뇌는 [시찰위원안을 후퇴함으로써 이로 인해 이번 이사회의 결말을 붙이고, 이로써 연맹으로서는 일본에 대해 기한을 첨부하여 철병을 강요하는 등의 일은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1권 제3책, p. 649-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조사단의 파견을 찬성함으로써 외무성이 획득했던 외교적 [하사품]이었던 것이다.(311쪽)폐원외상 시대에 있어 전반기에는 조사단 파견에 대해 반대하였고 후반기에는 역으로 그 파견에 찬성하였다. 이것은 모순된 현상으로 보여지나 그 목적은 모두 관동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외교적으로 보장을 제공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폐원외교가 조산단에 대하여 취한 정책의 특징인 것이다.(312쪽)일본은 조사단을 받아들임으로써 대외적으로 일시 유리한 지위를 보장받았으나 한편 열강은 조사단의 파견을 직접 간섭의 제1보로 하고, 그후 조사단의 현지 보고서를 [무기]로 하여 일본과의 만몽쟁탈에서 새로운 외교태세를 갖추었다.(312쪽)리튼은 사변의 해결방법으로서 일본은 [만주국의 국제관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고 방택외상에게 물었다. 이 방법은 일본인의 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방택외상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렇다면 지방자치정부를 세우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리튼은 말하였다. 이것(314쪽)은 리튼이 만주사변 해결을 위한 초보적인 방침을 보여준 것이었다.(315쪽)조사단은 神重戶光를 거쳐 3월 14일 上海에 들어갔다. 重光葵공사는 열강 사이에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반공반소정책을 강조하여 일본의 만몽침략정책을 변호하고, 이를 통해 조사단의 양해를 구하려고 하였다. 22일 重光공사는 조사단에 대해 소련은 [중국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중국의 적화를 끝까지 수행하고 곧 이어서는 인도에도 그 마수를 뻗치자고 하며, 아시아지역에 대한 적화에 성공하는 날에는 다시 세계혁명의 길을 지향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때 [만약 중국측의 희망에 따라 일본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일본의 세력이 만몽으로부터 약화되는 순간 러시아가 곧 남만주로까지 침입할 것은 명백한 것임으로, 나는 오로지 일본의 존립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戰局의 유지라는 책임감에서도 이같은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만몽은 동아시아의 전국을 안정시키는 관건이 되며 만몽이 한번 어지러워지면 동아시아 전국은 붕괴의 속도를 더욱 가속시킬 것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만몽에 대한 행동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05-706-인용자 재인용)라고 언급하였다.(315쪽)당시 괴뢰 외교부에는 하얼빈 총영사였던 大橋忠一이 차장 겸 총무장으로서 실권을 잡고 외교정책을 좌우하고 있었다. 그가 (위원회를 돕기 위한 조사단 중국측 참여위원 전 외교부장 顧維鈞의 만주입경을-인용자) 거부하는 표면적 이유로는 [顧가 연맹위원의 공정한 조사에 대해 종종의 마수를 삽입시켜 신국가측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두렵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31-인용자 재인용)라는 것이다. 그러나 滿鐵調査課에서 작성한 <고유균의 만주국 입국거부문제의 경과조서>에는 [同조사단 참여위원으로서 중국정부가 임명한 고유균의 만주입경을 저지하여 사실상 만주국이 완전히 중국정부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조사단에 체험하도록 하고, 전세계에도 알리는 뜻에서 만주국의 위 주장을 관철토록 하는 것이 매우 뜻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866-867-인용자 재인용)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이 분석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으며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고 있었다. 대교도 4월 20일 방택외상에게 [만주국으로서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성을 강조하고, 세계로 하여금 이를 인식케 함으로써 첫째는 곧 다가올 만주문제에 관한 국제적 토의에 관해 일본의 입장을 가볍게 하고, 둘째로는 새로운 식민지 통치형식으로서 독립국가주의의 특징을 발휘토록 하는데 촉진케 할 것](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22-인용자 재인용)이라고 그 거부의 목적을 솔직히 말하였다.(316쪽)관동군 참모장 橋本虎之助는 [고유균에 대한 저지는 만주국의 자유의지가 존재해야 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41-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고, 이것은 괴뢰정권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보이려고 한 것이었다. 주북평 矢野眞참사관도 조사단에 대해 [長春정부는 반드시 일본정부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同정부가 고의 입만에 반대성명을 하는 이상 그것을 저지하기는 곤난하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43-인용자 재인용)라고 말하고, 그 독립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317쪽)조사단은 고의 입만문제에 관해 [이사회결의에 의거, 중·일 양 정부 이외와는 교섭하지 않고, 만주에서의 보호는 일본정부가 그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중국의 참여없이는 입만할 수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39-인용자 재인용)는 뜻을 주북평 시야참사관에게 전했다. 그러나 괴뢰정권은 계속해서 고의 입만을 거부하고 만약 고유균이 조사단과 함께 입만하면 즉시 강제하차케 한다고 경고하였다. 방택외상은 장춘정권의 양해를 얻기 위해서(317쪽)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구실로 조사단의 일부와 고는 大連을 경유하여 만주에 입경할 것을 제의하였다. 리튼과 남경정부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마지막에는 이와 타협하여 조사단의 일부와 고유균은 대련을 경유하고, 일부는 秦皇島·山海關을 경유하여 4월 21일 봉천에 이르렀다. 이것은 조사단이 일본과 괴뢰정권의 압력아래 괴뢰정권문제에 관해 일본과 타협한 제1보였던 것이다.(318쪽)조사단은 입만 전후 괴뢰정권의 존재를 무시하고 괴뢰정권과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 [만주국 정부측은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80-인용자 재인용),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조사단에게 제한을 가하였다. 이것에 대해 森島守人봉천총영사대리는 [吉田대사에게, 조사단에 대해 적당한 이해를 제공하고 권력의 존재를 인식케 함으로써 만주국측에 상당한 양해를 보이는 것이 조사단을 위해서도 또한 일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조사단이 결국 어떠한 보고를 하는가는 예측하기 어려워도 만주에는 중국본토와 관계없는 별개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승인토록 하는 것이 공정한 보고를 하도록 하는 기초조건이 되며, 이는 본대사의 굳은 신념을 보이는 것이며, 조사단도 아마 무(318쪽)언가 방법을 궁리해 낼 것으로 생각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780-781-인용자 재인용)고 방택외상에게 의견을 제시하였다.(319쪽)조사단은 5월 3일 괴뢰 외교부총장 사개석을 방문하고, 사는 [(가)만주국이 성립하였으므로 위원은 제네바 출발 당시의 만주와 현재의 사태를 충분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나)청조는 3백 년 전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한 것으로 중국은 만주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다. 후자를 전자의 일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외국인의 이익 및 외국에 대한 채무는 신국가 성립 당시의 성명과 같이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811-인용자 재인용)고 이야기 하고, 괴뢰 만주국의 승인과 괴뢰정권에 대하여 열강의 호의를 획득하려고 하였다. 4일에는 괴뢰 만주국 국무총리 鄭孝胥와 회담하고, 5일에는 執政 溥儀를 예방하였다. 그때 리튼은 [이와 같은 곤란한 시국을 만나 노고가 많으므로 특히 경의를 표합니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1책, p. 819-인용자 재인용)라고 인사하였다. 그런후 별실에서 잔을 들어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고, 기념촬영에 들어갔다....이러한 접촉을 통해 조사단도 괴뢰정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보고서를 통해 현상회복의 불가능성을 강(319쪽)조하게 된 것이다.(320쪽)조사단은 관동군사령관 本庄, 참모장 橋本, 참모 板垣征四郞, 石原莞爾, 土肥原賢二와도 회담을 가졌다. 관동군측은 萬寶山事件, 中村事件으로부터 柳條湖事件까지에 관한 설명에서 그들의 침략적 행동을 변명하고 모든 책임을 중국측에 넘겼다. 참모장 교본은 5월 5일 조사단에 대해 소련의 극동방면 병력증강상황을 설명하고 관동군의 대소전략의 의의를 인식케 하였으며, 반소라는 열강과의 공통성을 이용하여 그들의 호감을 얻고자 하였다.(320쪽)[제국정부로서는 만주국을 승인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길 밖에 없다](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제2권 제2책, p. 947-인용자 재인용)라고 내전외상은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승인할 날짜에 대해 리튼보고서 제출 전으로 해야 하는지 그 후로 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그 영향을 고려하여 결정되지 않았다.(323쪽)괴뢰 만주국을 승인하고, 기정사실로서 리튼보고서의 작성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일본정부는 8월 8일 武藤信義를 괴뢰 만주국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고 괴뢰정권에 대한 정식승인에 착수하였다. ...무등대사가 8월 20일 만주로 가서 기본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에 들어간 것...(324쪽)리튼보고서는 일본과 중국에 대한 열강의 이중성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324쪽)이것은 일본의 만몽권익을 승인하고, 만몽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아래 만몽자치정부를 내세워 그 내부질서는 헌병대를 통해 확보하고 일본군과 중국군이 함께 만몽으로부터 철수한다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일본의 권익을 승인하면서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고 괴뢰 만주국정권을 부정하였다. 다른 한편 중국에 대해서는 만몽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였지만 자치정부의 형식으로 중국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중국군의 철병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열강의 양면성에 근거하여 쌍방을 타협케 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만주사변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었다.또한 이 타협적 만몽자치안에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만몽에 침투하려는 열강의 욕망이 포하되어 있었다. 보고서는 [동삼성내에 있어 유일한 무장대인 특별헌병대를 외국인 교관의 협력아래 조직할 것을 제의](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滿洲事變>>, 別卷 p. 258-인용자 재인용)하였다. 여기서 외국인 교관이 헌병대를 통제하고, 행정기관에는 외국인 고문을 채용할 뿐만 아니라 외국인 고문으로 하여금 광범한 권능을 행사토록 하려고 하였다. 동삼성 중앙은행에는 국제결제은행 이사회가 추천한 외국인을 총고문으로 임명하려고하였다. 이 군사교관과 고문이 [만주자치정부]의 군사·정치·경제를 콘트롤하는 것을 통해 만주에서의 열강의 권익을 유지, 확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327쪽)외무성은 관동군의 모략으로 도발된 만주사변을 괴뢰 만주국의 국제적 승인으로 귀착시키고자 하였다.(329쪽)9월 22일 고유균은 미국대표 맥코이와 회담하였다. 고는 일본이 [만주국]대표의 참가를 주장하고 국제연맹 회의의 순조로운 진행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맥코이에게 질문하였다. 맥코이는 '일본이 [만주국]을 승인하게 됨으로써 국제연맹은 또 하나의 기정사실을 직면하게 되었으며 조사단의 보고서도 복잡하게 되었다. 중·일 쌍방이 [만주국]문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즉기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은 이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원하고 있지 않지만 [만주국]은 결국 중국에 반환될 것이다. 중국은 그 반환을 30년 혹은 50년까지 기다려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顧維鈞回憶錄(2)>>, 中華書局, 1983. pp. 22-25-인용자 재인용)(340쪽)1932년 9월 이후 중국 국내에서는 군벌들의 호전이 일어났다. 사천성에서는 劉湘軍과 劉文輝, 산동성에서는 韓復 와(346쪽) 劉珍年(<<上海新聞報>>, 1932年 9月 21日-인용자 재인용)티벳에서는 티벳군과 사천성군과의 충돌이 연이어 일어났다. 과거 일본은 중국 국내의 혼전을 이용하여 중국은 통일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제연맹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라든가. 또는 군벌혼적이 열강의 대 중국무역에 줄 영향을 이용하여 열강을 선동함으로써 중국에 대항하려고 하였다.(347쪽)제네바 중국대표가 일본의 열하침공(1933년 초 일본군은 산해관사건을 도발하고, 2월 하순부터 열하작전을 개시하였다-인용자)을 이용하여 국제적으로 일본을 제재하려고 한 노력은 남경정부의 불찬성과 열강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만주문제]는 국제연맹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369쪽)5월 31일(1933년-인용자) 중·일 쌍방은 <塘沽協定>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의 체결로 만주사변도 일단락되고 남경정부도 괴뢰 만주국의 불승인을 부르짖으면서도 사실상 이 협정의 체결로 [만주국]의 존재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지는 않았다. [만주국]의 승인문제는 이후 중·일 외교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초점이 되었으나 1945년 8월의 종전으로 괴뢰 만주국은 해체되고 중국은 동삼성지역의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369쪽)[만주국]에 대한 승인에는 열강의 승인과 일본의 승인이라는 두 종류의 승인이 있다. 이것은 같은 종류의 승인으로 보여지나 실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372쪽)열강의 [만주국]승인은 열강이 일본의 만몽침략을 승인하고, 그 결과 성럽한 만주국을 일본의 식민지로서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국주의시대에 있어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로부터 발생하는 현상으로 다른 열강의 승인을 획득하지 못하면 국제적으로 그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자신의 식민지를 자신이 승인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만주국]승인에서 보여지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식민지는 종주국에 부속하고 있는 것으로 독립국가는 아니다. 독립국가가 아닌 식민지를 독립적인 국가의 형식으로 세웠기 때문에 승인문제가 발생하고, 또한 승인을 통해 괴뢰정권의 소위 독립성을 겉치레할 필요성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표리불일치성에서 나온 현상인 것이다.(373쪽)1932년 1월 4일 판원참모가 상경하기 전에 관동군사령관 本庄은 三宅참모장과 松木고문 및 板垣·石原참모와 식민지체제의 정체문제를 검토하고 판원참모에게 [이 시기 중국 본토로부터 분명하게 이탈하기 위해서는 명실공히 독립국가라고 할 필요가 있다](<<現代史資料·滿洲事變>>, 第七卷, 東京, みすず書房, 1977, p. 189-인용자 재인용)라고 지시하였다.(373쪽)외무성과 육·해군성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1월 6일에 <중국문제처리방침요강>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만몽은 그것을 우선 중국본부정권으로부터 분리 독립케 하여 한 정권의 통치지배지역으로 하며, 점차 一國의 형체를 갖추도록 유도]하고, 9개국조약 등의 관계로 가능한 한 중국측의 자주적 발의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형식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現代史資料·滿洲事變>>, 第七卷, 東京, みすず書房, 1977, p. 343-인용자 재인용)라고 결정하였다.(374쪽)열강이 괴뢰 만주국을 승인한다는 것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서 만주국을 승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식민지에는 반식민지와는 달리 다른 열강의 식민지적 권익이 허락되지 않는다. 따라서 열강의 만주국 승인 자체가 스스로의 권익을 만주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열강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380쪽)6월 14일 중의원에서 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결정한 후, 이제 일본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는가만이 주된 문제로 남았다. 외무성은 <만주국 승인의 건>에서 [뒤에 기록한 여러 점을 고려하여 적당한 시기에 승인한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Microfilm, S563 reel, Sl620-1622, pp. 669-672-인용자 재인용)(가) 日·滿관계의 정비[일·만 간의 여러 관계를 충분히 정비하지 않고 조급히 승인하는 것은 승인후 만주국을 관리하기에 곤란할 우려가 있다](나) 독립국으로서의 만주의 내용충실 정도(다) 조급한 승인이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조사요원이 보고, 제출전에 우리측이 중대한 이유없이 만주국을 승인하는 것은 연맹을 앞지르는 것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9개국조약국, 특히 동조약의 옹호자로 임할 미국을 자극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라) 우리나라 내에서의 승인 촉진론(마) 승인 지연에 따른 만주국측의 불안 및 관동군 기타 在滿日人의 초조, 요약하면 이것은 일본에게 유리한 시기에 승인한다라는 것이며 또한 승인을 위한 준비를 충분히 해야 된다는 것이다.(381쪽)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통한 법적 식민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재등(외무성의 통상국장이며 滿鐵이사였던 齋藤良衛-인용자)은 일·만간에 <우리 국방과 만주국의 치안유지문제>, <적화선전 방지의 문제>, <우리 거류민의 보호, 일·만 공동이익 보호의 문제>, <교통의 실제 장악의 문제>, <일·만 경제통제문제> 등에 관한 협정과, 외교문제에서는 <일·만 양국의 협정을 요하는 외교사항의 결정>, <일본의 만주국 외교관, 영사관의 직무대행문제>, <만주국 외교부에 일본인 고문 및 보좌관 고용초빙문제> 등의 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협정은 괴뢰 만주국 승인 전후에 대체로 체결되었다. 고문협정은 형식상 체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일본은 괴뢰만주국에서 차관정치를 실시하고, 표면적으로는 만주인, 안으로는 일본인 차관 또는 총무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문과 차관은 같은 것이었다.(382쪽)재등은 괴뢰 만주국정부를 통제 지배하기 위해, 외무성에 <만주국 내외정무지도방법>안을 제출하고 [만주국정부 및 각 성정부의 정무에 관한 지도의 근본방침은 만주특파총감의 의견에 따라 제국정부가 그것을 정하고, 그 실행에 관한 세세한 결정은 특파총감에게 일임한다.], [조언의 전달, 독려 및 감시는 제국정부가 추천하는 만주국 중앙정부 및 성정부 고문으로 하여금 그것을 담당하게 한다], [만주국정부 또는 성정부가 앞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거나 또는 충실히 실해하지 않을 경우 특파총(382쪽)감은 제국정부의 지시를 받들어 필요한 조치를 집행할 것](Microfilm, S563 reel, Sl620-1622, pp. 697-702-인용자 재인용)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특파총감제는 그후에 駐滿大使制가 되고, 대사가 총감의 역할을 담당하게 도었으나 이 제안은 일본이 [만주국]을 지배할 정무의 이면을 집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383쪽)괴뢰 만주국의 승인에서 가장 큰 국제적 장애는 9개국조약의 존재였다. 괴뢰 만주국의 성립이 9개국조약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일본의 승인도 당연히 이 조약에 위반되는 것이었다. 남경정부는 1932년 3월 12일에 선언을 발표하여 이 괴뢰정권은 [반란기관]이라고 비난하고, 9개국조약에 위반된다고 엄중히 항의하였다. 열강도 9개국조약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만주국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았다.(羅家倫 편, <<革命文獻>> 第37輯, pp. 1892-1893-인용자 재인용)(383쪽)內田외상은 8월 25일 제63회 의회에서 괴뢰 만주국 승인에 관한 焦土外交의 연설을 행함으로써 세간에 파문을 일으켰다.(384쪽)일본의(384쪽) 괴뢰 만주국에 대한 단독 승인은...중국과 열강에 대한 외교적 선전포고로 그후 외무성은 중국 및 열강과 10여년간 외교전을 벌리게 되었고, 이 외교전에서 [만주국 문제]가 계속해서 하나의 초점이 되었다.(385쪽)괴뢰 만주국 성립이전 만몽은 일본과 열강의 반식민지였다. 南滿은 주로 일본의 반식민지였으며 滿鐵부속지와 관동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385쪽)삼도(三島: 봉천총영사대리-인용자)는 노골적인 식민지 지배체제가 열강에 줄 영향을 고려하여 독립적인 형식을 띤 식민지체제에 상응하는 기구를 설치하려고 한 것이었다.(387쪽)9월 15일 일본과 괴뢰 만주국은 [일·만의정서]에 조인하고, 무등(武藤信義: 관동군 사령관, 임시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장관-인용자)은 임시특명전권대사에 취임한후 전권사무소를 장춘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임시적 조치로서 10월 30일 임시특명전권대사는 정식 특명전권대사가 되었고, 전권사무소는 12월 1일에 대사관으로 승격, 무등대사는 12월 23일 집정 溥儀에게 소위 신임장을 제출하였다. 신임장은 공화국에 대한 형식으로 천황은 부의를 [짐의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 이렇게 설치된 주만일본대사관은 형식적으로 독립국가에 설치했던 대사관과 같은 것이었으나 그 중심은 고나동군을 중심으로 한 외무, 척무 등 관계성이 공동으로 만몽에 군림하는 기구였다.(390쪽)대사관 설치시 일본은 괴뢰만주국에 있어 총영사관 5개소(아얼빈, 新京, 吉林, 奉天, 間島-인용자), 영사관 10개소, 영사관 분관 10개소, 출장소 1개소를 갖고 있었다. 외무성의 이 파견기관은 전 북평공사관에 속하였으나 주만대사관의 설치로 관동군사령관인 주만대사의 지휘하에 들어가 괴뢰 만주국을 통제 지배하는 기구가 되었다.(391쪽)만주국에 대한 통제 지배기구는 삼위일체 체제로 일시 통일되었으나 이것은 [만주국]의 머리부분만 일체화했던 것에 그치고 하부와 동경의 중앙부의 지휘계통은 그 내부의 권한 쟁탈로 계속해서 분열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식민지화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하부의 통제지배체제와 중앙부의 지휘계통을 통일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 조정 통일과정에서 외무성은 관동군과 협력하는 한편 군과 통제 지배권을 다투었다.(391쪽)이 문제는 1934년 후반기에 있어 긴급히 해결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만주국의 식민지지배가 대체로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그 통제 지배체제를 현상에 적응시키기 위해 조정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391쪽)형식적으로 괴뢰 만주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군의 재만전권부, 통감부, 도독부와 같은 지배체제를 물리치고 주만대사관의 형식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 것은 역시 외무성의 공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육군측도 통감부 등의 관제를 주장하면서도 [어떤 식으로 꾸며야 독립국이라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것으로 고뇌하고 있었으나 결국 이 고뇌는 외무성이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395쪽)그후 괴뢰 만주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의 진전에 수반하여 그 지배통제체제도 나날이 완벽하게 됨으로써 외무성이 그 지배에 참여할 필요성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주만대사관은 만주지배의 최고기구로서 계속 존재하였으며 재만영사관은 그 존재 의의를 잃게 되었고 외무성 자신도 자주적으로 그것을 폐쇄할 조치를 취하였다. 1939년 1월 12일 외무성은 정보부장의 담화 형식으로 對만몽정책 수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봉천, 길림 등 10여개소의 영사관을 폐쇄하였다. 1941년에는 新京(長春),  하얼빈 총영사관과 牡丹江, 黑河, 滿洲里의 영사관만 남겼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이들 총영사관, 영사관은 만주에 대한 통제 지배보다도 주로 소련과의 영사관계를 처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395쪽)1934년에 조종되었던 對만지배체제와 통제기구는 그 후 大東亞省의 성립으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太平洋戰爭의 발발로 일본은 서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소위 大東亞共榮圈을 확립, 그 통제 지배기구로서 1942년 11월 1일 대동아성을 설치하였다. 대동아성의 설치로 척무성과 대만사무국은 폐지되고 대동아성내에 만주사무국을 신설하여 괴뢰 만주국을 통제 지배하였다.(395쪽)대동아성 성립후 주만대사관은 대동아성 관할의 현지관청이 되었고, 외무성은 괴뢰 만주국에 대한 직접 지배로부터 배제되었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식민지화가 그 최고 절정에 달했던 필연적 결과이다. 이것에 대해 당시 重慶방송이 [종래의 우리 동북지방, 즉 만주국 및 함락지구에서 속성되었던 괴뢰정부의 치하는 금후 정식을 일본의 심민지가 되었고 일본정부 직할의 통치지역이 되었다.](馬場明, <<日中關係と外政機構の硏究>>, 東京, 原書房 ,1983, p. 441-인용자 재인용)고 논평했던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396쪽)외무성은 괴뢰 만주국의 소위 완전 독립과 영토, 주권보전을 존중하(397쪽)는 것으로서, 1934년부터 37년에 결쳐 [만주]에서의 치외법권 철폐, 만철부속지에 대한 행정권이양이라는 對滿외교를 전개하여 외교적 연극을 연출하였다.(398쪽)최외법권은 일본과 열강이 반식민지 중국에서 갖는 특권으로 이 치외법권의 존재는 중국의 반식민지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완전한 식민지에서는 종주국의 법적 지배가 확립되고 자연적으로 그 법권을 갖게 되며 법률적으로 치외법권을 특별히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 까닭에 괴뢰 만주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이 진행되어 전 만주가 일본의 법적 지배하에 놓인 상황에서 종래의 치외법권은 완전한 식민지화 정책의 진행을 방해하게 되고, 그 철폐는 식민지화 정책을 진전시키는데 필수적인 일이었다.(398쪽)이 치외법권의 철폐는 또한 다른 열강의 [만주]에서의 식민지적 특권을 제한, 배제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괴뢰 만주국 성립후 열강으로부터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은 열강의 주만영사관과 그 치외법권 등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소위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유리한 일면이 있었던 것이지만 일본이 [만주]에 있어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여 그 권익을 확대하는 것에 관해서는 하나의 장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반식민지의 경우 각 열강이 하나의 국가 또는 한 지역에서의 병존은 가능하나 식민지의 경우 그 종주국이 하나의 국가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각 열강이 병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00쪽)11월 5일 이 조(400쪽)약의 체결과 동시에 괴뢰 외교부 외무국장은 일본 이외에 치외법권을 갖는 국가에 대해 [일본국과 사이에 정한 치외법권의 최종적 철폐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고, 그 결과 일본 신민은 우리 나라의 모든 법령의 제한에 복종하게 됨으로써 제국정부는 이 기회에 위 조약의 실시와 동시에 앞서 기록한 일부 외국인에 대해서도 역시 현재 은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치외법권적 취급을 폐지해야 할 것](滿洲帝國政府 編, <<滿洲建國十年史>>, 東京, 原書房, 1969, p. 90-인용자 재인용)이라고 성명하고, 12월 1일을 기해 이것을 실시하고자 하였다.(401쪽)외무성은 국제연맹에서 괴뢰 만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 획득에 실패한 후 계속해서 승인획득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것은 괴뢰 만주국의 소위 독립성에 대한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본의 만주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와 [만주]의 식민지적 지위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획득한다라는 것에 있었다.(401쪽)일본은 만몽침략과 괴뢰 만주국의 성립을 위해 국제연맹을 탈퇴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지만 1936년 이후는 역으로 만주국 승인의 획득을 매개로서 파시즘 국가와 새로운 동맹관계를 체결, [만주국]도 파시즘진영에 참가하는 것으로 파시즘 국가의 승인을 얻었다. 이것은 일본이 파시즘외교를 수행함으로써 얻은 부산물이었다.(402쪽)괴뢰 만주국은 이상과 같이 외무성의 알선으로 독일·이탈리아와 정치, 경제관계를 긴밀화하고, 양국의 지지와 승인아래 1939년 2월 24일 방공협정에 참가하였다. 또한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방공협정에 참가했던 다른 파시즘 국가의 승인을 획득하게 되었다. 1941년에는 17개국이 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였다. 그중 방공협정에 참가했던 스페인·헝가리·불가리아·텐마크·루마니아·핀란드·쿠로아치아·스로바키아 등이 있었으며, 2,30년대에 파시즘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던 리투아니아·폴란드 등도 있었다.다음으로 일본이 중일전쟁 과정에 세웠던 汪精衛정권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세웠던 동남아시아의 버마·타이 등 괴뢰정권도 [만주국]을 승인하였다. 이 승인은 괴뢰간의 승인으로 일본의 [만주]침략을 승인했다라기보다는 서로 상대의 괴뢰성을 인정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괴뢰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은 영·미 여러 나라는 일시 만주에 주재하고 있던 영사관을 유지하면서 [만주]와의 경제, 무역관계를 보존할 가능성을 모색하였다.(405쪽)외무성이 앞에서 기술한 여러나라의 재만 활동을 허가했던 것은 滿蒙 자원과 시장을 이용하여 일본의 만몽침략과 괴뢰 만주국의 식민지적 존재에 대한 열강의 승인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승인의 획득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일본은 [만주]에서의 열강의 활동과 권익을 제한하게 되고, 열강도 차차 재만 영사관을 폐쇄하여 만주로부터 손을 끊기 시작하였다.(406쪽)이후 일본은 [만주]에 있어 식민지체제를 한층 강화함과 동시에 이번에는 역으로 먼저 중국측의 승인을 획득하고 다음에 이것을 이용하여 열강의 승인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만주]는 중국의 일부분이며 중국의 승인없이 열강이 그것을 승인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409쪽)그 첫째 단계는 1933년 9월부터 1935년 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 외무성은 우선 악화됐던 중·일 관계를 [개선]하여 중국으로부터 괴뢰 만주국의 승인을 획득하려고 한 것이다....[일본이 중국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중국정부를 원조하여 중국인의 편이라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고, 동시에 만주에서는 끝까지 기정방침을 통해 만주국의 건국을 진행하여 중국에 대한 국가건설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한다면 만주 문제는 중국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국제연맹 및 열강과의 분쟁도 점차 해결할 기운이 올 것이(409쪽)라고 판단하였다].(重光葵, <<外交回想錄>>, 每日新聞社, 1978, pp 149-150-인용자 재인용)(410쪽)1935년 여름부터 [만주국]승인문제는 제2단계로 들어갔다. 외무성은 군부의 화북침입이라는 유리한 정세를 이용하여 드디어 [만주국]의 묵인 혹은 승인문제를 양국관계 개선의 전제로서 제출하였다.(410쪽)[만주국 승인문제]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제3단계에 들어갔다. 외무성과 군부도 사변 초기에는 군사적 우세를 이용하여 [만주문제]와 화북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사변 초기에 있어 외무성은 육·해군성과 함께 소위 불확대, 日·中停戰이라는 간판아래 <日·中國交全般的調整要綱案>을 작성하고, 8월 8일 남경에 있던 川越茂대사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였다. 동시에 동아국장 石射猪太郎의 알선으로 在華日本紡績同業會 이사장 船津辰一郎을 중국에 파견하여 남경정부에 대한 화평공작을 전개하였다. 이 공작에서 외무성과 군부는 우선 [중국은 만주국을 금후 문제로 삼지 않는다는 약속을 은밀히 체결할 것]을 남경정부에 요구하였다.(防衛廳硏修所戰史室, <<戰史叢書·支那事變陸軍作戰(1)>>, 朝雲新聞社, 1975, p. 249-인용자 재인용)(413쪽)일본은 왕조명의 남경 괴뢰정권을 승인하기 전에 중경의 장정권을 굴복토록 하려고 하였으나 장정권은 [만주국 문제]를 포함한 일본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전영명공작(錢永銘: 중국교통은행 이사장-인용자)]도 실패로 끝나게 됨에 따(417쪽)라 일본은 11월 30일(1940년-인용자) 왕조명정권과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그 괴뢰정권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동시에 [日·滿·華共同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두개의 괴뢰정권은 상호 상대를 승인하게 되었다.이리하여 두 괴뢰정권의 승인 처리문제가 또한 일본외교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였으며, 일·미교섭에서도 이 문제가 의논됨에 따라 태평양전쟁의 개전외교의 일부분이 되었다.(418쪽)[만주국 문제]는 중국문제의 기점이 되었고, 또한 중국문제에서의 타협이 [만주국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쳐 중국문제에서의 타협을 견제하였다. [만주]·중국문제에서 비타협은 태평양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이 원인이 태평양전쟁이 종결되는 종전외교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424쪽)1944년 7월 연합국군의 사이판섬 상륙과 東條내각의 총사직은 패평양전쟁이 그 후반기에 들어갔음을 나타내 주었으며, 일본의 패배도 시간문제가 되었고 일본의 외교도 서서히 종전외교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424쪽)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만주국 승인문제]는 1944년 후반기에 이르러 승인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현상을 유지하는가의 문제로 변화되었다. 1945년 여름 일본의 종전외교는 [만주국]을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문제가 되어 대소, 대미외교의 [선물]로서 [만주국]의 국제관리, 중립화 혹은 북만철도와 여순을 소련에게 양도하는 등으로 바뀌고, 또한 영·미 열강과 중국도 대소외교에 [만주국]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만주국] 위치에 있어 커다란 변화이며, 이 변화는 태평양전쟁과 제2차 대전의 전국 전환으로 발생하였던 현상이었다.(431쪽)
111    최경호, <<안수길 연구>>, 螢雪出版社, 1994 댓글:  조회:2097  추천:0  2009-05-16
안수길은 그의 초기소설과 후기소설을 묶어서 평가할 경우, 민족문학의 지평(15쪽)을 확대·심화시킨 작가로서 '대륙문학'이라는 특이한 세계를 통하여 위기시대의 민족문제를 형상화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 이주한인의 억압되고 분열된 '삶의 현장'을 증언하여 문학사의 단절기를 극복하려한 작가다. 그만큼 만주 <間島>는 안수길의 문학세계와 밀착되어 있으며 그의 제2고향으로서의 간도는 생존적인 개념을 넘어 창작적 原形質 plotoplasm로써 가능하는 의미로 파악된다.(16쪽)지금까지 안수길 문학은 흔히 만주 간도의 초기소설, 즉 대륙문학에 집중되는 경향에 있었으나, 안수길 문학의 중요성은 해방 후의 사회적 혼란기와 정치적 변혁기를 경험하면서 초기의 '간도 의식'이 어�게 변용되어 나타나는가를 보는 것은 중요하리라 믿는다. 안수길에게 있어 '서울'은 '간도'와는 다른 현실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16쪽)결국 안수길이란 한 개체는 한말로부터 일제식민지를 거켜 6.25 동란과 1970년대까지 한반도와 만주 간도 일원을 공간으로 하는 時·空 속에서 호흡하였던 작가라고 그 범주를 한정하여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문학은 '간도'와 '서울'이라는 두 개의 공간권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간도'는 외세의 국토강점으로 인한 실향과 망국적 恨의 근거지로써 이른바 대륙문학의 발생지를 의미하며, '서울'은 주로 이데올리기의 대립에 의한 민족내부적 갈등으로 빚어진 동족상쟁의 민족비극을 상징하는 공간이다.(16쪽)어쨌든, 안수길의 경우 그의 문학세계가 민족의 문제에 있었든 개인의 운명에 있었든 그의 관심은 부루통의 이른반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에로 경도되어 있었다. 물론, '人生'이란 존재적 물음은 '藝術'이라는 본질적 물음으로 귀납될 것이나, 안수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상위의 개념에서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하위개념에 관심을 둠으로써 그가 얼마나 만주유이민, 해방귀국인, 월남인 등 실향민의 시대적인 핍박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안수길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그의 작가적 '體質'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안수길의 이른바 체질론은 그의 문학론의 전체적 모습으로 파악될 수 있다.(17쪽)그의 문학활동 40년에서 일관하는 작풍은 '역사는 변화한다'는 의식에서,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동일한 역사적 현실로 합일시킴으로써 진정한 비극의 의미가 민족에 내재해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18쪽)안수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근대사에서 격동기 및 혼란기를 체험한 50년대 작가로서 현 시점에서 이들 50년대 작가들은 역사시대의 작가, 과거를 증언할 위치에 놓인 작가군으로 남게 된다. 이들은 그가 살았던 시·공이 작품 현실에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나는가라는 反影의 그림자를 통해 지난날의 역사현장을 인식하게 될 것은 물론이다. 이같은 인식은 이른바 문학의 사회화 또는 사회의 문학화 현상으로써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관계로 파악된다. 그러나 작가의 전기적 성과를 아무리 강조한다 하여도 그것은 작품의 고유한 수준 이상의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작품이라는 문학적 현상을 위하여 그의 전기적 탐구가 요구되는 것이며 전기적 사실이 작품을 어떤 형태로 '간섭'하는냐가 작품해석에서 요구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소설의 인물은 시대정신의 형상화일 것이나 그 인물이 작가로부터 결코 분리되어지는 것은 아니다.(18쪽)안수길의 소설세계는 '작가'와 '작품'의 두 상관성에 의해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증언되고 잇는 특징을 보임으로써 전형적인 사실주의 작가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시대적인 변화에 상응하는 인간 존재와 인간의 존재양식을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19쪽)안수길의 문학유산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작품 전체를 삼단계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즉,가. 초기문학: <<조선문단>> 당선시기부터 해방까지 재만 10년간(1935~1945)나. 중기문학: 민족해방과 6.25 및 50년대 문학(1946~1959)다. 후기문학: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의 문학(1960~1977)(20쪽)안수길의 초기소설 성격은 ① 부정적인 경향에서 ② 긍정적인 경향으로 비판되어 왔으나, 90년대 이후에는 ③ 긍정적으로 보아야할 면과 부정적으로 보아야할 면을 별개로 평가하여야 마땅하다는 타협적인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같이 안수길의 초기소설에 대한 연구가 매우 유동적이었던 것은, 선행되어야 할 과제로써, 일제식민지시기 만주사회와 재만 한국문학과의 관계 정립 및 재만한국문학의 성격이 구명되어야 할 일이었다. 문학은 본질상 사회학과 정치학의 대용물은 아니며 문학자체의 정당성과 목적을 가진다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재만문학의 경우 시대, 사회적 특수성이 문학에 끼친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며 작품의 이중성이 곧 시대증언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안수길의 초기소설 연구사가 상반된 견해를 보였던 것은 물론이다.(20쪽)이상의 기존연구를 검토한 결과, 안수길의 재만문학은 대립적 양상으로 성격화되거나 또는 절충적 입장에 놓여 있다. 그같은 분화양상은 안수길 소설이 일제의 만주국 정책을 정면으로 반영한 작품이냐의 여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재만문학을 과대평가하거나 또는 평가 절하하려는 태도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져야할 단계에 이르런 것으로 볼 것이다. 양분된 기존연구의 성과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부정적 견해)이재선, 김윤식-채훈, 이정숙-오양호, 민현기(긍정적 견해)(22쪽)한국문학사에서 일제하의 문학을 두고 문학사의 단절로 또는 절망의 문학, 암흑기의 문학 등으로 규정한 사람은 백철 장덕순으로 이어진다. 이어 암흑기 문학연구의 일환으로써 이재선, 김윤식, 오양호, 김병걸, 민현기, 김현 등에 의해 안수길의 초기문학이 조명된 바 있고, 최근에 채훈, 오양호, 이정숙에 이어 정리된 셈이다.(23쪽)안수길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에 민족문학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학계의 인식에 따라서 재만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안수길의 초기소설이 문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안수길 연구의 석사논문이 다수 배출되면서 만주 대륙문학의 양면성이 지적되었다.(23쪽)안수길 문학연구가 성립될 수 있는 사실상의 조건은 그의 후기작품인 [北間島](1967)가 존재함으로써다.(25쪽)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1973년)에서, 그의 작품의 주제는 대개 인간의 본질적인 것과 현상적인 면으로 이원화 된다고 하고 작가가 어느 것에 경사되어야 할 것인가는 작가의 '체질'에 따라 창작할 때 성공률이 높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체질이란 그의 '창작적 체질'을 가리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작가의 체질이란 크게는 창작세계, 좁게는 창작상의 일관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안수길은 인간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나. 어떻게 살 것인가. 존재적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의해 해명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전자는 후자의 현상학적 규명으로써만 밝혀진다고 할 수 있다. 전자 (가)의 '인간'의 본질은 정신일 것이며 후자 (나)는 정신에 대한 신체적 관계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은 후자 신체성에 의해 비(51쪽)롯된다. 전자를 존재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면 후자는 인가느이 삶을 대상으로 하는 현상론적 물음이다. 그런데 이 둘은 별개의 것일 수 없고 한 인간의 양면과 같아서 마치 정신과 신체 또는 생활과 예술의 의미로 유추된다고 할 수 있다.(52쪽)안수길의 인간에 관한 두 시각, (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나)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별개의 인간관이 아니라 전자에서는 본질(정신)로써의 '인간구원'의 문제를 후자에서는 현상(시체)으로써 민족의 운명을 식민지 치하의 민족문제로 확대하여 보았다고 할 수 있다.(54쪽)안수길은 장편소설이 왜 필요한가에 대하여 크게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1. 인생문제의 종합성 2. 역사의 전체성 3. 체험의 포괄성 4. 역사적인 탐구와 역사의식 5. 테마의 민족적 비극성. 그의 소설론은 기본적으로 민족이 처한 역사적 변천과 문학적 대응양식으로써 장편이 요구된 것으로 보며, 그것이 창작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57쪽) 제1기는 1860년에서 1910년까지로 잡는다. 이 시기는 청의 <봉금령>이 해제되고 변강지대에 이민정책을 실시하여 조선 북부지방민의 이주가 활발했던 기간이다. 한국인 만주 유이민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가 된다.제2기는 1910년에서 1931년으로 잡는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만주에 은밀히 침략을 기도하여 간도협약(1909)을 체결한 이후가 된다. 1919. 3. 13. 룡정에서의 독립운동, 20년 봉오동 전투, 동년 10월에 청산리 전투 등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던 시기로서, 조선족은 반일단체로서 개간민교육회, 경학회, 농무계, 부민회, 사우계를 조직 반일 활동을 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일제의 침략 이후 중국-일본, 한국 간의 대립과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인하여 1925년 이후는 이민의 제한 또는 탄압시기가 된다. 중국관헌의 탄압과 구축이 극심하여 한·중 농민의 충돌사건(1927), 만보산사건(1931)이 연이어 일어나고, 국내에서는 재만동포의 참상에 비관하여 [재만동포옹호동맹](1927)을 조직·구출코자 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제3기는 1932년부터 해방기까지다. 이 시기는 일본의 정책적 이민이 봉천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따라서 원주민의 박해와 경원이 상대적으로 노골화된 시기다. 일제는 적극적인 만주침략정책과 아울러 한국인의 만주이민정책을 강행하였고 제2차 대전의 전비 부담을 만주개발에 상당히 의조하려던 시기다. 제3기는 이주한인들이 만주정책 및 증산정책에 순응한 시기가 된다.(65쪽)'移民'이란 이민 당사자국 간의 합의에 의해 조약된 이민법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일방의 국민이 다른 국가로 주거지를 옮기기 위해 월경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한국인의 만주이민은 대개 조선 중기 철종대(1860년경)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이 시기의 한인 만주이민은 이민의 개념상으로 볼 때 자의적이며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것은 인접국 간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자의적 이주형태이며 특히 한말기 변경인들이 경제적 궁핍을 이유로 두만강을 넘어가 정착을 꾀함으로써 한국인의 만주 유이민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청에서도 이주한인에 대해 초기의 쇄국시기를 지나서 묵허기, 환영기, 배척기 등으로 대응하였던 사실에서 볼 때 일관된 이주정책을 펴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한국인의 만주 이민은 일제의 침략적 국책이민 전 단계까지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자의적인 이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만주 이민을 流移民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일제의 경제적 및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식민지 한국에서 살 수 없었던 절박한 이유에 의해 떠밀려난 이민이었다. 청인들은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생존적 요구로써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가 간단없이 추진해온 중국동북지방에의 침략적 정책과 동류로 인식했던 것이다. 예컨대, 일제는 1905년에 '만주이민론'을 제기하였고, 1915년 일본인 19호가 '愛川村'에 입촌, 1930년에 대련농사회사에서 日本農業移民 60戶를 모집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그 후 일제는 만주 개척의 필요상 집단이민, 정책이민 또는 자유이민의 이름으로 한국인을 강제이주시켰다.(66쪽)일반적으로 이주민은 정착을 전제로 한 이주농민을 일컫는 것이나 도시, 탄광, 산판의 노동자와 직업이 없는 유휴노동자들은 돈을 벌면 만주를 떠나려는 浮流層이었다. 어는 경우에나 정착에 실패할 경우 이주민에서 유랑민의 단계로 유랑민에서 다시 노숙걸식의 단계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재만 한국인이 '뱅이' 아니면 '쟁이' 중 어느 하나로 떨어지지 않으면 큰 다행이라고 하는 것은 유랑민 양산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 시기 만주 유이민들은 이주와 유랑의 계선을 넘나들며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따라서, '유이민'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불행하였던 한말로부터 식민지 기간에 이르는 재만한인들의 비극적 삶을 증언하는 역사적 어휘였음을 알 수 있다.(67쪽)대체로 지금까지 논의된 결과를 종합해 보면 안수길의 문학적 공은 인정하면서 그의 현실의식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일관된 민족의식을 투영하고 있는냐로 집약된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기존연구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1)민족정신을 구현한 망명문학이냐 (2) 만주국 산업개발정책과 맥이 닿는 입식정책의 작품이냐로 양분된 위치에 놓여 있다.(68쪽)<찬수>는 외세에 대하여 일면은 외세의존적 다른 일면은 무저항주의를 구사하였다. 중편 [벼]는 한국인 만주 이주 제1기인 환영기로부터 제2기 배척기에 해당하는 소위 만주건국 이전의 작품으로, 민국 17년(1928) 배일사상이 강한 소 현장이 매봉둔의 응봉학교 개교를 금지하고 한인들을 축출하려는 사건에서 청국과 첨예한 대립을 일으킨다. 즉 장개석의 북벌정책이 성공한 해의 10월 동삼성에도 청천백일기가 나부(68쪽)낀 지 반년에 청은 부패정치를 쇄신하고 강력한 대외정치를 펴고 있었다.(69쪽)지금까지, [벼]의 주민들에게는 나까모도를 통로로 하여 한농 부락의 문제를 해결하려던 계선과 수전 개간 초기로부터 정착때까지 통로로 삼아왔던 선주민 홍덕호, 중국인 방치원을 계선으로 하는 두 개의 통로가 있었다. 전자는 만주국 건국 전후 시기인 1929년경을 배경으로 하는 만주 이민 제2기의 후반에 해당하면, 후자는 박 첨지의 입만 시기가 1919년으로 이민 제1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소설의 전개는 제1기와 제2기가 시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소설의 무게는 제2기에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모두가 '만주 건국 2년 전 여름이엿다'고 하여 소설이 증언의 시기를 밝힘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다.(70쪽)작품 [벼]에 투영된 외세에 대한 간도 한인의 색채는 반청항일의 논리가 아니라 반청화일의 경향이었다. [벼]는 지금까지 농민문학으로서 주목되어 왔던 작품인 데 이 작품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과 청의 세력간에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고, 한인들은 살아야 한다는 생존문제로 청일의 사이를 필요에 따라 왕래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다. 작품 [벼]는 그러한 이중적인 태도 때문에 민족의 논리로써는 허약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궁핍한 시대의 탈상황의식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간도 한인의 이면의 외세의존과 일면의 무저항주의는 특히 <찬수>를 중심으로 하는 인테리들의 행동 논리였음을 주목(70쪽)할 필요가 있다.(71쪽)[벼]의 한인들은 간도에서 水田을 개간하고 정착지를 확보한 다음으로 요구되었던 2세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으나 이주민들의 뜻이 좌절되는 경우를 국가의 배경과 연결지어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북간도 이주민의 초기적 과제는 뿌리내리기로 요약될 수 있으나 뿌리내리기란 실상 경제적인 자립으로 시작되고 이세 교육에서 그것이 마무리된다는 의식이다. 작품 [벼]는 이같이 국가없던 시대 간도에서 개척민 한농의 다양한 삶의 의지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인간 문제를 민족의 에토스적인 시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작품다운 작품이 없던 시대 간도사회를 대변하는 귀중한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벼]에서 <찬수>의 반청화일의 논리를 두고 일제의 입식정책에 순응하는 작품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소설 [벼]는 1910년말과 30년대 초기에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던 국제역학 관계속에서 이주한인들이 '수전개관'과 '2세교육'을 2대 과제로 설정하여 어떻(71쪽)게 인내하고 투쟁하여 왔는가를 보여준 작품 정도로 이해할 것이 요구되는 작품이다.(72쪽)안수길의 중편소설 [벼]는 그의 초기소설 중 가장 주목된 것인 데 [벼]는 사실상 이주민의 교육문제가 중요한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부친 안용호가 북간도에서 민족계통의 학교를 경영한 바 있고 작가자신도 한 때 교직을 경험한(74쪽) 사실과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75쪽)간도 이주 한농들의 삶의 양상은 만주땅을 개간하여 거기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자하는 의지의 여러 형태였는데, 소작농으로부터 수전개간, 산판과 탄광의 노동자 또는 걸인으로 전락하는 유형이었다.(75쪽)[새벽]은 간도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이주하여 왔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선주민의 횡포와 돈값에 처녀를 인질잡히는 악습에 의해 파산되는 과정을 통해 만주 이주가 실패로 끝나는 경우를 보여주는 소설롤 이해된다.(78-79쪽)안수길의 간도소설은 시대와 사회의 환경적 요인이 작품세계로 반영되어 있어 시대의 역사성을 재구하는데 별 무리가 없는 것 같다.(79쪽)소설 [새마을]은 수전을 개간하는 예의 한농과는 달리 이주 선주민의 학대에 못이겨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여 무기력한 퇴폐적인 생활로 소일하는 인군의 이주민상을 보여주는 소설로써, 지금까지 만주의 간도문학이 이주민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였던 경향과는 달리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새마을]은 간도 이주민 또는 간도 유랑민들의 기층생활을 통하여 이시대 민족의 절실한 과제가 무엇이었나를 제시하고 있다. 간도의 한국 역사란 이같이 일각에서 말하고 있는 민족정신을 전개시킨 역사의 장으로만 인식할 수 없고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표리가 되어 나타난 우리 시대의 역사적 패배의 또 다른 형국임을 제시한다. 간도에서의 민족역사란 지도자 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빛'으로서의 역사일 수는 있어도 상대적인 기민층 중심의 역사에서 볼 때는 망각되어야 할 '오욕'의 역사로 인식되는 것이다. 안수길의 간도소설을 이해하는데는 이같이 시대적인 양면성을 주목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80쪽)[새마을]은 소설로서 크게 주목받을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새마을]의 주인공들의 중요성은 그들의 무기력한 생할양상이 다음 단계로 어떻게 전개되는냐에 있다. 소설 [새마을]은 이주한인들의 삶의 과정이 소작농에서 도시노동자로, 도시노동자에서 유랑 걸식으로 전락하여가는 과정의 중(80쪽)간단계를 보여 주는 소설이다.(81쪽)소설 [원각촌]은 산판의 노동자 <이원보>의 삶을 통하여 산판으로만 전전할 수밖에 없는 간도유랑민의 생활을 만나게 된다.(81쪽)여기서 이주한인의 정착 양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춘삼>의 경우처럼 산판의 노동자에서 다시 농민으로 돌아온 경우이고, <억쇠>처럼 산판을 계속 전전할 수밖에 없는 유랑민형이다. 물론 이주한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자폐적인 성격때문도 있지마는 정착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착취형의 존재로 하여, 간도 이주민의 정착문제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81쪽)[圓覺村'은 <억쇠>의 폐쇄적 성격과 선주민 <한익상>을 심리적으로 맞세워 억쇠가 다시 유랑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를 부각시키고 있다. [원각촌]은 산판의 노동행위와 구체적인 개척의 현장성을 소홀히 한 반면 선주민 한익상의 횡포와 억쇠의 대결을 부각시킴으로써 대륙문학의 특징적인 분위기를 설정한 소설이다.(82쪽)<억쇠>의 유랑길은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다. 그는 백원이란 큰 돈으로(82쪽) 아내를 살 여유도 있었다. 그를 만주땅에서의 정착을 불가능케 하는 것은 전혀 선주민의 횡포였다. 힘이 센 억쇠와 억쇠의 아내가 미모라는 설정은 통속적인 인물 설정이나 한익상의 존재와 더불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원각촌]은 이주민 개척 제2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주 유랑민 <억쇠>를 통하여 불안한 시대적 현상을 보여주는 소설로 파악된다.(83쪽)[원각촌]의 이원보는 사실상 산판의 노동자로서 승부를 내고자 원각촌을 찾았으나 한익상의 갖가지 위협에 의해서 파탄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83쪽)작가는 간도이주민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하고 유랑민화를 촉진케 하는 원인의 일단이 동족 선주민에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새벽]과 [원각촌]은 유이민 제1기 내지 제2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유이민의 고난스러운 정착과정을 상이한 각도에서 다루었다. 두 소설은 유이민의 뿌리내리기를 주된 호흡으로 하면서 선주민 마름의 중간착취를 허구적 사실로 한다.(85쪽)재만 농민들은 청인지주 또는 그 마름과 고용, 소작계약을 맺으면서 수전 개간, 황무지 개간 등 비교적 원시적 단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87쪽)근로봉사대란 조선에서의 빈궁층 사람들을 선발하여 만주가 살기좋다고 감언리설로 꾀어 만주의 불로지 개척에 동원된 사람들을 말한다.(89쪽)이 작품([함지쟁이 영감]-인용자 주)에서 심각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일제 침탈정책으로 인한 민족 전체의 빈곤 현상과 경제적 압박이 정신적 분열현상을 일으켰고, 일제의 문화적 식민정책이 최하층민의 언어에까지 오염되었음을 보이고 있다.(91쪽)간도이민 후반기란 일제의 괴뢰 정권이었던 만주국 건국과 일제가 한인의 집단이주를 강요 또는 장려하고 만주에 <안정농촌> 창정을 위해 금융회로 하여금 영농자금과 생활자금까지 지급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작품에서 작품의 현실을 지나치게 일제하라든가 마주가 일제의 괴뢰 정권임을 내세워 작품세계를 정치적 변혁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작품이 시대상의 반영을 넘지 못한다는 인식보다는 주인공의 소극적인 행보에 시선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94쪽)외연적으로는 [목축기]의 농민도가 [북향보] 정학도의 농민도로 연계·확대되어 간 것은 사실이나 [목축기]가 단순히 [북향보]의 농민도와 같은 개념이거나 정신일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우선 전자의 작품들은 만주국 이전 단계으 개척민족으로서 요구되(95쪽)었던 극히 농민적인 의미의 농민도, 이를테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해당될 터이고, 후자 [북향보]의 농민도는 외관상으로도 국방의 일익을 담당해야 할 국민적 의미의 농민도였다. 그것은 오족협화이든 식민지적 착취의 방식이었든 만주국 정책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한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시대적 의미는 그만큼 식민지화로 발전되어 갔음을 의미하는데, 현실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 외에 이 시대에서 달리 내놓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시대 만주국의 농업정책상 한농들이 개척에만 전념하여 미곡증산운동 등에 협조하도록 '농민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은 되나 오족협화, 王道樂土, 鼓腹擊壤 등의 만주국 포스타 외 "農民道"를 강요했는지 불확실하다.(96쪽)[목축기]에서 밝히고 있는 만주국에 대한 언급과 찬수가 와우산 목장을 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확대해석할 경우 [목축기]의 서사적 의미와 서사적 구조를 간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96쪽)소설에서 언급되어 있는 [농촌으로 돌아가라] 또는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 [만주에는 아침이 왔다]는 드러난 몇 개의 구호로써 만주국 정책에 순응한 작품으로 단정하기에 앞서 소설의 감추어진 의미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96쪽)염상섭이 농민도에 대하여 [원각촌]과 [벼]에도 일관하는 '정신'과 '사상'이라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목축기]에서 주인공이 바친 근면과 성실은 안수길의 여타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정신이며 그것이 현실로 살아갈 수 있는 길(道)임을 시사하는 것이다.여기서 [목축기]의 정신과 사상을 확인한다면 성실한 삶과 '근로정신'일 것이다. 따라서, 염상섭이 [목축기]를 두고 말한 농민도는 이주한인들이 만주를 떠나려는 의식에 대해 安定된 생활을 定着해야 한다는 포괄적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다.(98쪽)찬호가 학교를 물러나온 것은 그 자신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찬호는 만주국 교육령하에서는 그 이상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라든가 '귀농'을 권유하며 있을 필요가 없다는 저항적인 판단에서였으며, 마침 막내 동생이 교두로 부임하는 기회에 물러나온 것이다.(100쪽)다만,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는 말은 만주사회에서 일반화된 말일 것이며 작가가 '검열'의 과정을 거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토성], [북향보], [벼] 등에서도 발견되는 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찬호>는 농업학교 학생에게 <만주에는 아침이 왔다.> 또는 <백오십만 동포의 팔할을 점령한 농촌은 배운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외침에 허구성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100쪽)[목축기]의 인물 <찬호>에 대해서 과도하게 만주국 정책에 순응한 인물 쪽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편향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소설의 세계는 실제세계와는 무관할 수밖에 없고 소설 자체로써 논의되어 마땅하다는 관점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시대의 소설은 사회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면 찬호의 행위는 어두운 시대를 초극하려는 인물이란 점에서 그의 준비론적 자세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며 증언적 성격이 강한 소설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준비론적 대응논리란 일제의 정책을 수용하는 쪽이다. 그러나, 비겁한 수용이 아니라면 이 시대에서는 '살아남기'가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101쪽)소설 [土城](1941)은 만주국 성립과 아울러 재만민족이 청의 지배로부터 일제지배의 관할로 이관되면서 당시의 상황을 '새나라의 탄생' 또는 '새로운 정치'로 인식하는 단계를 중요한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토성]은 안수길의 초기 소설 중 만주국 정책을 여과함이 없이 당시의 사회와 시대상황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102쪽)[토성]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직접 반영함으로써 현재에서 과거를 재인식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한농들이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가를 조명할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인물의 저항형태가 아닌 만주국이 재만 한농들에게 베풀었던 갖가지 施惠 형태와 순응의 양상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만주국은 間島省 公署(吉林省特派駐延行政辦事處)를 통하여 '匪襲'으로 황폐화된 농촌의 갱생을 위하여 '특전과 편의'를 제공하였는데 이주민들이 그같은 특전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03쪽)일제지배기에 있어서 한인들의 문제는 자주권의 주장이 아니라 생존 문제에 한정된 의식이었다.(104쪽) 민족의 이름만 존재하는 외세의 칼날하에서 절대적인 '어떻게 살 것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대 이주한인들에게 생존문제의 해결없이 친일이냐 민족이냐를 따지는 태도는 잔인한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 시대 한농들이 만주국의 정책을 수용하면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자 하였던 존재의 양면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40년대의 재만 한국인 소설 [목축기], [토성], [북향보] 등은 이주한인들이 자기 시대를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왔는냐를 체질함이 없이 노출시킨 작품이란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106쪽)안수길의 최초 장편소설 [북향보]는 안수길의 여타 소설보다 만주국 정책이 정면에 나와 있고 일제강점기의 강요된 정책과 지시들을 내세워 경제적으로 허약한 한인드이 어떻게 대처하고 순응하였으며 그 순응의 양상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북향보]의 구조는 전자 [토성]과 같이 시대적 구호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작품으로 (1)소설 속의 일제지배의 양상 (2)인물의 행동과 성격 (3)북향도장과 북향정신, 도혼(稻魂)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 규명되어야 할 줄 믿는다.(107쪽)'와우산목장'은 만주국의 요구도 민족의 생존권도 만족시킬 수 있는 세계의 설정이었다. 소설 [북향보]의 성격은 외세와 민족이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파악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108쪽)[북향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학도가 주장한 '북향 정신'이다. 소설은 결국 북향정신이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주된 임무(108쪽)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찬구>에 의해 가시적으로 현실화되는가가 중심과제였던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정학도>가 주장하였고 그의 제자에 의해 실천되고 있는 북향정신을 해명함이 없이 논의될 수 없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정학도의 사상은 그의 '북향도장계획서'에 구체화되어 있다. 소설은 이와같이 목장의 사업계획서가 소설의 지문을 차지함으로써 소설이 홍보 목적, 독자위안, 시대증언 등을 포괄하는 기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109쪽)북향정신이란 간도에 아름다운 고향을 설정하여 살기좋은 고장을 만들자는 것이다. 일종 잘 살기 운동이다. 경제적으로 약한 한인들에게 잘 살기 운동이란 필연적인 것이며 거기에 잘못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 말한 합숙제도, 00 농민도장, 성인교육, 도장건설, 유축농업, 농민도, 농업만주건설 등은 북향 정신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또 성 당국과 일본인 사도미의 적극적인 협조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북향정신은 한민족이 요구하는 정신일 수만은 없으며 만주 신생국정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었다.'북향 정신'이 만주를 사랑하고 만주에 아름다운 고향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민족의 생존문제까지를 포괄하는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현실성 없는 농민도장을 설정하면서 북향정신, 도혼, 농민도 등 여러 겹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통일된 만주국정책이 아니라 협화회 등 친일기관의 조선인 작품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109쪽)안수길 소설은 다면적인 제재로써 현실 증언 또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증언적이며 현실제시적 기법은 人物의 갈등이나 인물의 영웅적 행위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만주국 정책 내용을 '지문' 그대로 인용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일제식민지 말기에 만주에서 창작된 우리말 소설 [북향보]는 어려운 시대 외세와 민족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과 회의를 경험하면서 창작되었고, 그 결과 [북향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로는, 어느 정도의 순응과 인내로 살아갈 수 있다면, 살아남기 그 자체가 곧 간접적인 저항의식 내지 응전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안수길 소설은 핍박한 이주 한민족을 어느 정도 위안할 수 있었다는 공리성을 제외한다면 소설을 쓰지 말았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110쪽)건국 후 入滿한 韓人을 일러 洋服鮮人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횡령, 사기, 부정, 몰의리한 사람으로 비판한다. 양복선인이란 일반적으로 만주국 건국 후 입만한 조선인을 일컫는데, 당시에는 개척시기에 입만하여 수전을 개간한 한농은 우대하고 그 외의 상인, 노동자 등을 경시하였던 풍조에서, 농업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하한 말이다.(111쪽)안수길의 [북향보]와 [목축기]는 장편·단편이란 차이가 있을 뿐 인물의 성격이나 소설의 배경, 인물들의 현실인식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115쪽)[북향보]에서 농민도라는 어휘가 염상섭의 서문에서 이미 지적되어 나왔다는 것은 그것이 만주사회에서 일반화된 용어일 것이며, 따라서 농업만주를 지향하는 당시로서는 농민도가 사회적인 요구로써 위장되었고 다시 한농들을 강제하는 사회적 운동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116쪽)또는 道는 安定에서 생긴다는 말과 같이 생활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농사든 목축이든 생산노동에 몰두할 수 박에 없는 일이다. 농민도는 만주사회에서 가난한 이주 한인에게 강요할 수 있었던 정신이며 고성회, 북향도장도 같은 맥락에서 볼 것이다. 따라서 [북향보]의 북향정신이나 농민도를 만주국의 성격과 결부하여 확대된 의미로 해석하거나 지나치게 민족문학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일은 없어야 할(116쪽) 것 같다. 다만, 안수길은 당대의 사회적 통념이나 인식, 만주국 시대에 이주한인에게 일반적으로 강요되었던 정책과 일본인 또는 청인들의 대한인관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려는 데 있었던 것 같다.(117쪽)[북향보]는 이를테면, 만주의 농촌 계몽소설에 해당한다.(119쪽)안수길은 함흥고보와 경신고 재학 시절에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두 번의 퇴교를 당한 바 있다. 작가는 이 사실을 '아이들의 주목을 끌려는 소영웅심'의 발동이라 회고한 적이 있지만, 그는 학생시절부터 외세에 저항적인 민족정신을 내면의 신념으로 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126쪽)안수길의 초기소설은 국내에서 살지 못해 만주로 유랑 또는 이주해간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다각도로 포착하여 그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그의 해방 전 작품에는 여러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교사, 수의사 같은 인텔리를 비롯하여 소작인, 노동자, 상인, 걸인, 함지쟁이, 아편밀매자, 광부, 승려, 야바위꾼 등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계층의 인물을 통하여 고난의 실상을 체험하고 민족의 문제를 증언코자 하였다. 그는 종래 식민지하의 민족의 문제가 흔히 민족독립운동 등의 다분히 상층의 귀족적인 취향에 의해 다루어짐으로써, 민족의 현실과 사회적 진실이 호도되어 왔던 사실을 배제하고 있다. 간도로 이주해간 한인들은 대부분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삶의 뿌리를 뽑히운 사람들의 행렬이다. 반도내에서는 '고향'을 설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족차별이 만주보다 극심함으로 미지의 땅 만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26쪽)안수길의 초기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그것은 일제가 실제로 만주를 지배하던 시기 즉, 만주국 건국을 전후하여 그 전의 작품과 그 후의 작품군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건국 전의 작품들은 대체로 이주 한인(127쪽)들의 정착문제와 밀착되어 있어 이 시기의 작품은 외세와 민족문제가 예각화되어 전개됨을 불 수 있다. 그러나 4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일제의 선만일체정책에 의해 순응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의 작품임을 변명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안수길을 비롯한 몇몇 재만 작가들이 갖은 수모를 겪으며 일본어(國語)가 아닌 우리말로써 소설을 발표했다는 점을 평가해야 할줄 믿는다.(128쪽)그는 민족이 외세에 짓밟히던 일제치하 간도의 한민족이 고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려한 것이다.(128쪽)일제 강점기와 같은 민족의 비극적 역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文學은 현실증언의 문학이 아닌 겅우 우리는 그 존재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 안수길이 재만시절 한국문학 정립을 위해 헌신한 공로는 물론, 그가 근대 역사적 전환기시(128쪽)대 동북아의 역학적 대립을 배경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민족의 삶을 '이정도'로 증언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129쪽)만주 유이민들은 1930년대부터 두 외세, 청과 일의 사이에서 생존적 뿌리를 내려야만 했다. 한말로부터 이어지는 청과 일의 대립된 역학구조는 민족을 포함 이른바 힘의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청·일을 양변으로 하는 그 정점에 민족이 위치한다고 볼 때, 힘의 균형이 무너질 경우 그 경사각만큼 피해의 여진은 국가 없는 한민족의 몫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한민족은 두 세력권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으며, 만주 사회에서의 중도논리란 사실상 두 힘의 균형점을 유지하려는 위치에서 모색되어지는 살기의 한 방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중간자적 성격의 인물, 나아가서 무기력한 인물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만주국에서의 이주한인이란 대개는 '실향'과 '망국'의 상황에서 생존하는 인(132쪽)물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인물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수길이 불행한 시대에서 좌우명으로 택했던 <신음하며 탐구하는 자세>라는 파스칼의 철학을 지고의 이념으로 수용한 것도 외세와 민족의 양극 사이에서 택하여진 논리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의 인물들은 계층의 고하간에 모두 양심적인 인물이다. 격변기를 살 수 있는 인물이란 양심적인인물이기보다는 시대 변화에 적을할 수 있는 형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인물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파스칼의 이른바 신음하는 영혼의 인물들이다. 이같은 유형은 초기소설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양심적 인물의 도덕적 무능성은 초기소설에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133쪽)이른바 제3의 논리란 민족의 비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북간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밝혀질 터이지만, 힘이 약한 자가 외세와의 직접적인 대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색된 살아남기의 한 방법인 것으로 이해된다. 만주이주민이 외세지배하에서 취하였던 민족의 유랑화는 그같은 비극성을 증언하는 것이다.(134쪽)재만 한민족은 의식상은 민족의 땅이면서 현실적으로는 남의 땅일 수밖에 없는 만주 간도에서 生存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 당위와 이를 용납치 않는 열강 사이에서 요구되었던 문학적 수용이 다름아닌 안수길의 중도적 인물이다. 물론 어려운 시대를 극복키 위한 중도적 입장은 정치적, 사상적 등 여러 부문에서 모색이 가능할 터이지만 식미지시대 민족이 당면한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키 위한 중도적 인물창조는 안수길의 경우, 외세의 억압과 생존적 당위로써 요구되는 제3의 인식으로써 중도적 자세가 필요했던 것 같다.(140쪽)[亡命詩人](1976)은 안수길로서는 생애 마지막 실향인 작품에 속한다....이 소설은 안수길의 전기적 사실을 서사적 배경으로 깔고 이국인 간의 애정문제를 형상적 이미지로 연결해 나가는 소설인 데, 망국시인의 비극적인 유랑화를 통해 그가 글을 쓸 수 없다거나 한국의 술집여자를 상식 이상으로 못잊어하는 등 정신적 분열상을 보이는 과정을 통하여 실향의식을 분석하고 있다.(305쪽)안수길은 한국사회의 전후 실향뿐만 아니라 [타목]의 일본 여자 <스미에>와 [羅子 머자니크]의 백로계 실향소녀 <라자·머자니크, 에스토니아의 망명시인 <바이로이다>를 통하여 국적 없는 사람들의 비극적 삶을 주목하였다. 실향인 문제는 식민지 한국인만의 문제이라기보다 20C 동북아세아의 전체가 제국주의의 야욕에 의해 뿌리가지 파산됨으로하여 고향을 지킬 수 없엇던 상황에서 중국인, 백계로인, 한국인은 물론 일부 일본인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상황이다. 일본은 침략국민으로서 당시의 인구문제와 식량문제 등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주해온 사람과 패전 후에 귀국치 못하고 잔류한 실향인도 다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크게 보면, 안수길의 '어떻게 사느냐'와 맥이 닿고 있다고 할 수 있다. [亡命詩人]을 통해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안수길은 만주 간도에서 체험한 '北間島'의 민족문제를 민족주체성에 의해 형상화함으로써 민족적 리얼리즘의 작가로서 명성을 획득한 것이다.(307쪽)사실상 문학연구는 문학의 문예미학적 요구에만 한정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따라서 식민지치하에서 창작된 근대한국문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관심속에서도, 일제치하의 민족적 치욕을 역사의 치륜에서 빼어버릴 수 없는 한 시대의 '전체'로써 파악해야할 인식 때문에 식민지문학이 당대의 민족적 질곡을 어느 정도 증언할 수 있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논의되어 왔다.(339쪽)예술은 시대를 초월하는 시대정신이 있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의 예술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 예술로서의 문학이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은 새삶스런 지적일 수만은 없다. 우리의 문학이 이데올리기의 종속적인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접근은 식민지시대 재만 한국문학으로부터 검토하는 일이다. 민족의 공동과제였던 대일민족항쟁시기의 문제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대립하게 된 主因을 찾되 이데올로기적 접근이 아니라 민족적 유산으로 접근할 경우 사상적인 거부감은 감소될 것이다. 식민지시대 재만 한국문학은, 만주 땅이 역사적으로 조선의 영토였고 만주 현지의 이주민만도 180만의 인구가 살았다는 사실과 만주 간도가 식민지시기 대일 독립항쟁의 본거지였으며 재만문학이 그같은 당대적 현실을 문학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재만 한인문학이 한국문학에 귀속될 문학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340쪽)재만 한국문학은 암흑기 한국문학을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서 현실적으로 남북 분단의 역사적 근원지가 만주 간도였고 대일 항재기인 1920년대이후부터 공산주의자가 민족 독립운동을 희석시켰던 사실을 중시, 만주의 한인 공산주의 운동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식민지시대의 만주와 오늘의 북한 사회 또는 북한문학을 재조명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식민지시대 국내문학은 친일성 문학으로 비판하면서도 한국문학일 수 있고 망명지 문학은 항일 민족문학(내용상 공산주의 작품일지라도 형식상은 민족문학이다)성격인데도 한국문학일 수 없다는 논리는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행방 전까지의 재만 한국문학을 염두에 둘 경우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341쪽)신채호가 '폭력'을 주장했던 그 시기에는 외세와의 대결이 가능한 시기였으나,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일제 괴뢰정부 수립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식민통치를 강화하여, 1933년 이후 경찰서, 영사관 분관설치, 협조회, 특별공작반, 선무반, 안전농촌, 집단부락을 만들어 식민통치를 강화한 시대로 바뀐 것이다. 만주에서도 일제는 역사를 날조하고, 오족협화 운동을 펴는 한편으로 '황민화 운동', '조선 교육령', '창씨 개명령'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근원적으로 말살하려 하였다.(345쪽)만선일보는, 식민지치하에서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만선일보 스스로는 <일본국의 완전한 국민이 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에 의해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존재의 명분을 잃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진정한(346쪽) 의미의 민족문학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부정적인 물음에도 만선일보 편집진이 학술란, 문예란을 두어 신인작가 배출에 일조하였고 재만 한국문단 형성의 구시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안수길이 용정분사장으로 있을 때 쓴 기사 "中小 商工業者에 活路를 열어주라"는, 용정의 인구 3만 5천 중 8할이 조선인이었고, 용정의 당면문제가 곧 조선인의 문제였다는 말로써 당시 만선일보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총영사관이 延吉로 옮겨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철도개통, 의대설치, 중소학교 문제, 성화학교 경영난 등을 기사화하여 학교문제의 경우 상당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가능한한 민족적 이익 챙기기에 있어 만선일보 기자들이 일조를 했다는 생각이다.(347쪽)안수길이 만선일보를 가리켜 "재만조선인의 정신적 훈련 도장이며 민족협화의 一分子로서 조선인의 문화 향상의 지도적 기관"이라고 한 것은 만선일보를 옹호는 발언이다. 그런데 만선일보가 재만조선인의 정신적 훈련도장이라는 안수길의 발언은 그가 망명문단을 운운하였던 사실과 배치되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그 자신이 만선일보 기자로 근무하였고 재만 문학의 운명이 만선일보에 있었음을 공인하는 터이므로 식민지 시대의 일반화된 구호였던 '민족협화'를 내세웠던 것으로 이해한다.(349쪽)주로 만선일보 등을 통하여 문학활동을 하였던 이들 <적 점령구내의 작가들>은 우회적인 수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현지 연구자들의 지적을 참고할 때 위장된 순응주의 또는 친일발언을 위장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들 만주국 내의 작가들은 이주민의 절대 다수가 간도에 살았으며 그들이 개척의용군으로 동원되어, 경제적·인격적 착취를 당하였던 현장을 여러 형태로 증언하여 재만 한국문학의 큰 맥을 형성해 왔다는 것은 아이러니에 속한다. 만선일보의 역할은 상처투성인 1940년대 재만 한국문학을 기형적 형태로 유인하면서도 민족의식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언론기관이다. 이 단계에서 식민지 시대의 작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면, 절대적 저항에 의한 민족 독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억압적인 반민족적 현상들을 '증언'할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350쪽)1940년대 초 만선일보 문화부의 기획기사, <조선문학 건설을 위한 新提議>나옴으로써 이 시기에 기성문인 및 신인들의 문단 형성을 위한 새로운 진통을 발견하게 된다. 1940녀대 재만한국문학은 시·소설도 활동적이었으나 평론분야에서 두드러진 면을 보였다. 그것은 두 분야로 요약되는 데, 하나는 재만한국문학 건설을 위한 原論的인 제의였고 다른 하나는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352쪽)"마주 조선문학 건설을 위한 신제의"의 필자는 10여 명으로써, 이들의(352쪽) 논지는 불모지 만주 한국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내용이지만, 문학을 말하면서 구태여 만주국 협화정신을 강조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만주국을 의식하지 않고 문학만 말한 작가도 있어 이 시기 재만 문인들의 정신적인 갈등을 엿보게 한다. 이들의 평론 중 재만 한국문학의 발전이 만주국 정신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부터 언급하려 한다. 이 시기에 재만 文化人들이 구호처럼 사용했던 오족협화나 만주국 정신은 재만 한인으로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부담없이 사용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이 시기의 재만 文化人들의 의식은 벌써 식민지 文化人으로 떨어졌거나 자기를 마멸시키고 식민지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환상에 젖었음을 알 수 있다.(353쪽)비평활동이 부진했던 만주 문단에서 金友哲의 활동은 특히 이 시기에 두드러진 바 있어 주목된다.(362쪽)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사라 할 때 그것이 민족의 비극사에 해당하느냐 또는 국가의 발전사를 가리키느냐를 나누어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 문학사 기술은 국가의 정치적 범주에 속해 왔던 이데올로기의 한계성으로 민족 단위가 아닌 국가 단위의 문학적 층위와 그 한계내에서 질적, 양적 확충을 전형으로 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문학이 분단 문학 아닌 통일 문학을 지향하거나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을 생각할 때 한반도 내 남한 문학이 "한국문학"이어야 한다는 한계 의식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식민지 시기 간도의 대륙문학은 국내 문학과 비교할 때 그 성격과 기본적 골격을 달리한다. 민족적 위기 시대에 할 수 있었던 순수문학은 식민지 시대의 불가피한 문학양식으로 수용될 수 있고 저항과 좌절로 일관하였던 만주 한인 문한은 '만주국 정책 영합'을 전제로 이면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며, 특히 타부문과는 달리 문학 쪽에서 그러한 경향이 우심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식민지치하의 민족문학은 일단 '망명지 문학이나 지하 문학이라야 민족문학으로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5)}(제2판), 지식산업사, 1990.p.24-인용자 재인용)는 쪽으로 의견을 모을 수 있다.(368쪽)안수길, 김창걸, 현경준, 강경애 등 일제식민지치하의 滿洲 鮮系文學을 논의하기 위하여서는 만주문단에서 선계의 위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만주문학>과 <선계문학>의 관계를 점검함으로써 재만한국문학의 위상이 설명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千葉豊治는 그의 논문 "滿洲 移植民論"을 말하면서 만주 이식민이 일본인과 만주인의 입장에서 중요성이 있는 것이지 만주 정책에 조선을 논할 여지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千葉豊治, "滿洲 移植民論"〔滿蒙〕12월호, 만주 문화협회, 소화 7년-인용자 재인용) 이같은 견해는 문학쪽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가령, 富田 壽의 "滿洲文學槪觀"이나 秋原勝一의 "滿洲文學의 背景"이란 논문에서도 만주문단은 일계작가, 만계작가, 백로계작가로 한정하여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심하게 마랗여, 만주사회에서 선계의 문화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상 또는 언어적 이유로 張赫宙, 今村榮治 등 일부 친일 작가를 제외하고는 만주문단이라는 우선 밑으로 모이길 꺼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만선일보, <<藝文>>, 〔滿蒙〕등에 기고한 일인 문인들은 재만한국문단이 일본어를 체득하여 만주문단 안에서 활동할 것을 촉구하는 태도를 보였다.(369쪽)1940년 당시 만주에서의 문화운동은 만일문화협회가 중심이고 문예단체로 <文話會>가 있었다. 위의 문화회는 재만문학자들의 종합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대련에 있던 본부를 신경으로 옮기고 대련, 봉천 등에 지부를 설치한 것이다. 만주문화협회 회원은 약 450명으로 일본측에서는 각 대학 교수가, 마주측에서는 각계 학자 각부 대신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의 문단에 조선작가들이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서 문단관계만 말한다면, 문화회는 매월 통신을 발행, 활동보고, 연락 등 문예적인 방송을 일본 내지, 지나와도 하고 있었다. 이들 회원은 북경, 동경까지 지부를 두고 있었으나 선계는 만주나 서울에도 없었다. 당시 기관지로서, 일계는 <<滿洲浪漫>>(4집 발행)이, 만계기관지로서는 <<藝文誌>>(1939. 6. 창간 3회 발간)가, 그리고 잡지로서, 일계의 [작문](대련), 만계의 것으로 [신청년](봉천)이 있었는데 경성시보문예란을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370쪽)그러나, 이 단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주에서는 <국민문학>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작가들은 조선 작가들이 조선어 아닌 일어로 조선생활을 그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彬村(彬村勇造-당시 조선문학과 내지문단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일본작가-인용자 주)의 말처럼 아직은 국민문학의 단계는 아니며 자국어를 사용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滿洲文話會의 선계 참여가 적었던 것은 작가들이 한글로 작품을 발표하고 번역문을 발표하지 않았는 데 있는 것 같다.(372쪽)간도에서 이무영의 희곡 [黎明前後](1940)를 각색하기도 했던 이갑기는 다시 만주문단에서의 조선작가들의 활동문제에 대하여 재차 촉구를 하였던 바 일인작가 吉野는 작품을 번역하여 만주문화회에 보내면 게재하기로 한다는 것이었고, 만계작가 爵靑도 자기 편에서도 선계작품을 만어로 번역 藝文志에 발표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만계에서는 조선문학을 알고 싶으나 말을 모르는 탓에, 만일, 일어로 역만 한다면 자기들이 만역하여 예문지에 발표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지금까지의 발언들을 종합할 때 만주국은 1940년 4월까지 5족 협화를 도모한다는 방침을 강조하면서도 문화계에 대하여 강제수단을 유보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만주국은 國兵法을 공포하여 이른바 <好人爲國當兵>을 내세우던 시기였다. 일제는 도로를 개설하고 전만 60만 조선 학도들에게 청년학교 제도를 강구 동원령을 내려 근로를 시켰으며 한편으로 개척단법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40년대 초까지 재만작가들이 일제를 비판할 여지는 없었으나 중립적인 작품은 어느 정도 가능한 시기였다. 신경일일신문 주필 大內隆雄은 만주의 조선문학을 말하며서, [각 민족의 각자 민족에 의한 자유스러운 문학발전이란 만주사회의 결정적인 요소이다. 국가가 문학에 부당한 제재를 가하는 때의 표본을 독일에서 보아왔다]고 하고, [조선에서는 조선어에 대하여 어떤 제한을 과하고 문학발전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고있는 듯 한데...나는 의견을 좀 달리하여...보담 더 개성적인 발전에의 계기 부여와 독자적인 개성의 구축이 있어야 할 줄 안다]는 의견이었다. 그는 국민문학 전단계로써 선계문학, 일계문학이 각각의 문단을 형성, 국민문학을 지향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물론 일제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일어를 국어로 작품을 써야 할 것이라는 전망은 가능한 예측임이 분명하지만, 국민문학은 각개 민족의 언어를 통한 문학의 발전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록 포장된 주장이라 하더라도 국민문학 수립을 선도하던 국내 일부인의 태도와는 다소 인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373쪽)그러나 문학의 [방향상실]이란 점에서는 만계작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만주문단을 가리켜 방향없는 방향이라고 하였을 때 그 방향이란 다름아닌 민족어냐 일본어를 국어로 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374쪽)이같이 만주 선계문학은 외세와의 역학관계라는 어름의 위치에서 시대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외관상은 마주낙토를 구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민족어에 의한 선계문학 건설을 제창해야 할 당위성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만주 선계에서는 문단형성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1940년대의 간도사회는 <八紘一宇>의 일본정ㅅ니을 강조하는 등 문학에서도 국민문학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문학이란 그 본질상 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하면서 민족적인 정서와 전통을 뿌리로할 때 가능한 예술이다. 기본적으로 이같은 조건마저 결여될 때 문학은 그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함께 비극적인 파행으로 치닫게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일제가 지배하던 시기에 민족협화, 만주낙토를 표방하면서도 이면적으로는 <<싹트는 대지>>와 같은 작품집을 냄으로써 '先住同胞의 血淚點綴한 개척사를 斷片的으로 나마 엮어 後日에 考徵삼음'을 기했던 재만 문인들을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375쪽)국내에서는 1939년 10(420쪽)월에 벌써 이광수, 김동환 등이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했고 이것이 다시 조선문인보국회로 변질되어 조선문학 30년 역사는 일본정신과 일치해야 한다는 의식과 비교할 때 만주의 간도문학이 비록 문학적인 기교에서는 국내문학에 미흡할 수 있었으나 문학인의 현실의식에는 엄청난 거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해방된 뒤에도 민족주의적인 작품이 변변히 나오지 못하였던 시기에 해방전 만주 간도에서 민족이 받은 역사적인 시련과 고통을 치밀한 시각과 일관된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 형상화하여 내놓았다는 것은 큰 수확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김창걸의 문학적인 특징은 만주 간도의 한민족이 살아온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고통의 역사, 다시 말하면 이주민이 겪어야 했던 통과제의적 성격의 고난과 억압의 현장을 독자에게 증언한 증언의 문학인 점에서 일차로 주목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작품도 1940년 일제의 파쇼정책의 영향을 받은 바 있으나 대체로 간도이주민의 생존권문제를 작품 기본항으로 하면서 그 위에 민족이 지향할 바 시대정신으로서 미족주의를 표방하거나 사회주의적인 행동양식을 현실부정의 한 양식으로써 고양시킨 셈이다.(421쪽)
110    오양호, <<日帝强占期 滿洲朝鮮人文學硏究>>, 문예출판사, 1996 댓글:  조회:2173  추천:0  2009-05-16
{滿洲詩人集}은 1942년(康德, 9년) 滿洲의 吉林에서 간행된 시집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한국어로 된 시이다. 우리는 이 시집의 이러한 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당시의 吉林은 滿洲國의 영토였고, 만주국은 日本의 조종을 받던 나라였다. 그러나 {滿洲詩人集}에는 그때의 그런 정서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우리가 우선 착목하는 점은 1942년이란 시점에서 어떻게 한국어의 內包를 손상없이 살린 이러한 작품집을 간행할 수 있었는가란 점이다.(13쪽)한글로 씌여진 시집은 한국인을 독자로 한다는 말이고, 한국인이 독자란 말은 한국인의 정서와 감정을 다룬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때 한국인의 정서란 어떤 것일까. 막연학 추측이나 몇 가지 사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면밀히 따진 후 할 말이다. 하지만 이 시집을 대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받는 언어의 성육과정(Incarnation)은 새로운 땅, 만주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국권 상실과 이주, 막연한 이상, 향수, 표박 등의 문제가 {滿洲詩人集}의 대체적인 문학성이라는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는 어떤 예속에서 벗어난 세계에 있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13쪽)1942년이라면 이미 조선도, 조선인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이다. 한반도 내에서 간행되었던 어떤 간행물에도 온전한 조선인의 이름이 존재할 수 없었던 시기가 1942년이다. 조선은 이미 오래 전에 일본에 합방되고, 그런 기정사실에 따라 조선인은 일본 신민이 되었으며,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영토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진기지로 편입되던 게 1940년대 초의 민족사이다.(14쪽)주지하듯이 만주국은 만주족, 한족, 조선족, 몽고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만주란 땅이 주로 이런 민족에 의해 지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대륙을 침범하면서 이 민족들은 피지배민족으로 밀려났다. 표면으로는 五族協和지만 그것은 실상을 호도하던 말이고, 만주족을 비롯한 세 종족은 일본의 통치를 만주국이라는 신생국을 통해 받아야 했다. 특히 조선족은 국가를 잃었다는 점에서 한족이나 몽고족과 또다른 사정에 놓인 민족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만주족처럼 문자를 잃고, 문화를 내버린 족속은 아니었다. 만주족이 자기영토에 나라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한족과 다를 바 없지만 그들의 국가가 문화적으로 한족에 예속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일본에 속박된 상태란 점에서는 우리와 달랐다. 우리 조선족은 잃어버린 국가와는 달리 고유의 문화는 유지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 우리가 대하는 이런 {滿洲詩人集}과 같은 자료이다.(15쪽)국가는 존재하지 않고 민족만 존재하던 시대, 오족협화의 시대 기운 속에 민족 자체의 운명이 소멸되어 가던 시대가 1940년대 초이다. 그런 시대의 만주 이민문학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참으로 난감한 문제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시대에 문학작품을 대입하면 문학의 의미는 가벼워지고, 문학 외적 문제만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으로 남을 수 있나. 그것 자체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시문학은 복잡한 현실로부터 떠난 문학의 갈래가 아닌가. 서정시의 본질이 예술의 낭만적 기질(Bohemian temper)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점에서 1940년대 초 만주에서 간행된 {滿洲詩人集}은 당시의 얼어붙은 현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16쪽)한국인의 정서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간도, 만주란 지리적 공간은 특이하다. 그것은 그곳이 지리적 공간이면서도,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닌 민족의 어떤 정서와 맛닿아 있고, 간도와 만주라는 장소는 기실 지리적 위치와 범위가 다른데, 문학작품에서는 동일한 의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18쪽)간도는 보통 서간도, 동간도, 북간도로 구분된다.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과의 상류 장백산 일대를 가리키며, 우리가 보통 간도라고 말하는 곳은 두만강 건너편 도간도를 지칭한다. 만주는 중국 동북부 지방, 심양, 길림, 흑룡강 삼성으로 된 면적 80만 평방 킬로미터의 대륙인데, 현재의 공식 명칭은 東北三省이다. 이렇다면 만주와 동북삼성은 같은 공간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고, 간도는 특히 두만강 건너의 땅으로 만주 대륙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런 지역들이 한국문학 속에서는 막연히 간도, 만주로 불린다.(19쪽)백두산과 중국 사이에 놓인 넓은 대지 간도가 아버지 어머니를 모셔올 만큼 좋은 곳이란 인식은 당시의 보편적 정서로 보인다.(20쪽)두만강과 압록강 건너의 땅은 한반도의 네 배나 되는 평야이다. 전 국토의 70%가 산인 한반도에 비하면 만주 천지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광야이다. 그런 광야가 無主空山이라고 믿었던 게 당시 사람들의 대체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모두 만주나 간도를 동경했다.(20쪽)간도를 살 만한 곳으로 생각하고 살 길 찾아 떠난다는 문학적 소재는 이광수의 [流浪](1927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다가 미완으로 그침-인용자 주)에서부터 나타났고, 안수길의 [북향보]에서 끝났으니 간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제강점기 전기간에 걸쳐 있던 문제였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4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첫째는 '북간도 벌판이 좋다더라'와 같은 소문을 따라 고향을 떠나는 유형, 둘째는 그렇게 떠나간 사람들이 [북국의 여인](池奉文, {조선문학}, 1937. 민현기 편, {韓國流移民小說選集}계명대학출판부, 1989-인용자 주)처럼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면서 다시 고국을 생각하는 유형, 셋째는 간도나 만주에서 새 고향을 건설하자는 유형, 넷째는 일본의 만주정책에 의해 이주하고, 그들의 보호하에 농업에 종사하는 유형이다.이 네 유형 중에서 이 항에서 문제 삼으려는 것은 물론 첫 번째 유형이다. 최서해, 강경애(두번째 유형)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이 연구되었고, 안수길(세번째 유형)에 대해서도 근래에 상당한 연구성과가 있었다.(김윤식, {안수길 연구}, 형설출판사, 1994. 오양호, [안수길론], {한국문학과 간도}, 문예출판사, 1988. 최경호, {안수길 연구}, 형설출판사, 1994-인용자 주) 네 번째는 주제의 성격상 한국 문학 연구의 과제가 될 수 없다.(21쪽)만주 이민이 소재인 작품은 모두 고난사로 나타나야 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만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새로운 출발을 보여주는 이민사는 민족 정서와 배치된다는 논리로만 당시의 현실을 인식한다면, 그것 또한 상투적인 반응이다. 만주 이주의 모든 조선인이 그런 정황이었다면 현재 연변 등지의 동포들이 영위하는 자리잡힌 삶이 차지하고 있는 뚜렷한 민족의 자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25쪽)우리민족에게 있어서 만주·간도는 정착과 풍요, 삶의 기반과 태반, 열린 신개지이다.(27쪽)滿洲移住가 모티프가 된 많은 작품들은 이와 같은 고향 회귀 의식이 바탕이 된 정서에서 출발하고 있다.이런 논거를 토대로 필자는 1920년대에서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는 '간도·만주·연변의 한국문학'을 亡命文學, 移民文學으로 양대별하자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 초기의 만주·간도의 한국문학이 시간과 공간적 배경은 동일하나 문학을 수행하는 주체에 따라 移民文學, 문학이 형성된 공간의 사정에 의해 在滿韓國文學, 間島文壇, 延邊文學 등으로 달리 불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白鐵은 {朝鮮新文學思潮史}에서 1940년대의 만주·간도문학을 공간적 기준의 시작으로 다루었고, 金炳翼은 {韓國文壇史}(일지사, 1973)에서 '간도문단'이란 말을 썼다. 오양호는 {韓國文學과 間島} 등의 저서에서 '移民文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 蔡壎은 {在滿韓國文學}(깊은샘, 1990)에서 '재만한국문학'이라 했다. '연변문학'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문학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이 책의 주 24)를 인용자 재인용)이런 현상은 이 방면의 문학 연구가 불과 몇 사람의 연구자에 의해 전담되어 오면서 빚어진 결과이다. 곧 이민문학이란 문학을 수행한 주체를 민족문학적 차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면, 재만한국문학, 연변문학은 지역(공간)이 분류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32쪽)망명문학은 국권회복을 전제로 한 문학이다. 망명이란 말이 혁명의 실패 또는 그 밖의 사정으로 제 나라에 있지 못하고 남의 나라로 몸을 피하는 것이라 할 때,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중 국외로 탈출한 사(32쪽)람의 반이 이런 인물이다. 문학의 경우 李陸史, 尹東柱, 趙抱石, 李彌勒, 韓黑鷗, 安壽吉, 姜敬愛, {在滿朝鮮詩人集} {滿洲詩人集}에 시를 발표한 시인들의 대부분이 그런 예가 되겠다. 이런 문인과 작품 중 상당수는 고향 회귀를 주제로 삼거나 고향을 상실하고 혹독한 생존 조건이 주어진 타국에서 체험한 실향의식과 유맹화 되는 현실을 문제 삼는다. 이밖에 崔曙海의 [고국], 韓雪野의 [과도기], 許俊의 [잔등], 安懷南의 [鐵鎖 끊어지다], 李箕永의 [대지의 아들] [신개지] 속에는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귀향하는 모티프 또는 에피소드가 자주 나타난다.(33쪽)인간은 자기가 태어났던 장소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애정을 느낀다. 동물들에게 나타나는 회귀본능과 같은 것이다. 이 장소애(topophilia)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실적 삶이 불행할수록 더 강하게 나타난다. 삶의 안식처가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34쪽)3·1운동은 민족독립 운동의 권화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끝나자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뿔뿔이 해외로 망명했다. 민족운동에 대한 일제의 박해가 3·1운동으로 하여 겉과 속이 다른 식민지 정책으로 나타남으로써이다. 이래서 우리 민족의 1920년대는 박해와 망명으로 시작되었다. [낙동강]은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35쪽)망명문학은 이와 같이 작품에서 그 종결이 귀국형태로 나타나거나 그와 유사한 종결구조를 지닌다.(37쪽)이민문학은 이민 간 사람들이 이민의 땅에서 생산한 문학이다. 망명문학이, 뿌리는 한반도이나 그 반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민족의 삶을 밖에서 문제 삼는다면, 이민문학은 그 뿌리를 이민 간 땅에(37쪽)서 내려 새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趙明熙의 [洛東江]은 고향 구포벌로 주인공이 돌아오는 장면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安壽吉의 {北鄕譜}(1944)나 창작집 {北原}(1943)에 수록된 거개의 소설들은 만주·간도의 개척민촌이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38쪽)滿洲·間島의 이민문학은 1930년 동인지 {北鄕}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창작집 {싹트는 대지}(1941) 합동시집 {在滿朝鮮詩人集}(1942) {滿洲詩人集}(1942) 등으로 이어지면서 문학적 위상이 잡협다.(38쪽)동인지 {北鄕}이 간행되던 간도 용정은 고국의 고향과는 수천 리 떨어진 타관이다. 고향은 이미 빼앗긴 땅이라 갈 수 없으니, 여기서 새터를 닦고 새 삶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문인은 열사도 아니고, 義士도 아니다. 열사와 의사 같은 문인도 있다. 만주와 간도란 공간을 기준으로 할 때 滄江 金澤榮, 丹齋 申采浩, 이육사, 윤동주 같은 문인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최서해는 살 길 찾아 간도까지 흘러간 유랑문인이고, 안수길 역시 아버지 따라 만주로 간 사람이다. 유치환이나 박계주도 반도보다는 '만주가 좋다'기에 가족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문인들의 이런 행동은 이 문인들의 작품 앞에 놓인다. 移民은 말 그대로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의 영토에 이주하는 일이다. 동인지 {北鄕}의 뿌리가 내리고 있는 토양이 바로 여기다. '팔에 힘을 주어 삽을 잡고 문허진 성터로 나아가지 않으려는가. 새터를 닥끄러'라고 외치고 있다. {北鄕}의 문학적 의미는 이런 반문 다음에 온다.(41쪽)사실 발해나 고구려가 자리 잡았던 대륙의 땅을 염두에 둘 때, 만주는 낯선 황야가 아니라 한때 영화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가꿔졌던 낯익은 민족 대망의 땅이다. 우리 민족의 한 기질인 상무정신과 열린 큰 배포는 그러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성격이 아닌가.(43쪽)김택영으로부터 시작되어 신채호, 김창걸, 김학철로 이어지는 문인들의 행적은 독립군의 사상적 이민과 맥을 같이 한다. 최서해, 강경애, 안수길, 박계주, 서정주, 유치환과 같은 문인의 만주행은 닫힌 사회, 막힌 현실의 탈출구로 이루어진 문학적 이민으로 그곳에서의 체험과 삶을 자기 나름으로 성육시켜 우리 문학사에 독특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지금까지의 논의를 근거로, 필자는 1940년대 초 만주·간도에서 쓰여지고, 읽혀지고, 발표된 문학 작품들을 亡命文學과 移民文學으로 양대별하고자 한다.(44쪽)1940년대의 우리 민족은 본의 아니게 전쟁 당사국이 되었고, 그 전쟁으로 우리는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44쪽)<만선일보>에 발표된 문학작품들이 오직 조선의 민족정신을 담는 것으로 일관된 투철한 것이란 말은 누구도 한 바 없다. 그러나 1940년 <만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일등으로 당선된 金鎭秀의 [移民의 아들]과 같은 소설은 비슷한 시기 태평양 전쟁의 합리화에 앞장섰던 <매일신보>류의 신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민족문제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227쪽)망명이란 말은 이념을 전제한 말이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에게는 이데올로기나 정치는 2차적인 문제이다. 그들에겐 우선 살아가는 문제가 중요하다.(228쪽)이 창작집({싹트는 대지}-인용자 주)이 가지는 문학적 의의를 인식하고 검토하는 일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반도 안에서의 민족 문학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를 생각하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국어와 창씨 개명을 거역한 행동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의미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벽] [암야] [추석] 등에 나타나는 작가 의식은 태평양 전쟁에 휘말린 본국의 문학작품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반응으로 보인다.(235쪽)1940년대의 한국 문학사는 문학작품에 대한 상대적 평가가 본의 아니게 선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불행한 시기이다. 창작집 {싹트는 대지}가 이런 처지의 맨 앞 자리에 선다. 우리는 이런 논리를 1940년대에만 용인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어느 한 시대를 이질적 문학으로 대체시키려는 논리를 펴는 문학사의 기술을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기 때문이다.(235쪽)
109    오양호, <<한국문학과 간도>>, 문예출판사, 1988 댓글:  조회:1923  추천:0  2009-05-16
한국인의 제2영토처럼 많은 유민이 살았고, 그런 이주지대에서 생성된 문학유산이 마땅히 문학사의 공백기를 논의하는 자리에 상정디어야 할 것이다. 아니 이것을 마땅히라고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렇게 디어야 한다.(20쪽)개별적인 문학 작품의 연구나 작가의 연구가 바람직한 문학사의 기술을 위한 변별자적 성격 규명이라고 한다면, 1940~1945년 사이의 기간이 시간적 무대가 된 이런 작품에 대한 평가가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문학 연구자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21쪽)더욱이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해서 기술하며, 고구려 시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땅이었던 간도에 그들의 괴뢰정부 滿洲國 건립까지 합리화시키려는 근자에 우리는 간도를 재인식하면서 묻힌 역사를 캐내어야 할 것이고, 문학 연구 또한 여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21쪽)일제의 강점기 30여년은 거의 떠남의 사회였고, 밀려남의 형세였다고 할 수 있다.(23쪽)이농형(離農型) 작품군은 어둠을 헤쳐 밝음을 지향하는 아들의 세계이고, 이 아들은 아버지로 상장되는 退孀性, 보수성, 소극성의 이미지와는 다른 진취성, 미래지향성, 적극성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농형 작품군 중 이민지 만주를 무대로 하고 거기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이농민들의 생활을 문제삼는 작품들, 이를테면 <벼>, <農軍>, <새벽> 등의 작품은 <故鄕 없는 사람들>, <農村 사람들>, <移住民 列車> 등에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에의 지향 의지와는 다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이들 작품의 등장 인물들이 앞세서 고찰한 바와 같이 중국인이나 만주 원주민들과는 적대적인 관계에서 묘사되고 있으나 일인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란 점이다. 이 점은 <벼>의 경우에서 비교적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農軍>이나 <새벽>같은 작품에서도 엿보인다.(39쪽)그런데 나까모도(<벼>-인용자 주)가 내세우는 [세계 동포애]란 사상이 당시 일제가 표방하던 四海同胞 또는 協和精神과 다를 바 없는 위장된 침략 근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만주에 이주한 한국 이민에 대한 중국인이나 원주민의 박해를 뒤에서 도와 준다는 행동과 같은 것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통치하면서 내세웠던 소위 협화 정신을 연상시키는 불유쾌한 도움이다. 그리고 매봉둔 이민촌에 [水田 開拓의 첫 괭이를 내려놓았다]는 홍덕호의 행동 역시 당시 일제의 만주와 水田 개발 정책을 연상시킨다.이런 점이 한국 이농민의 親日 의식을 노출시킨 것이라고 바로 말할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주인공이 일인의 세계 동포애의 사상에 힘입어 학교를 짓는 일에 더욱 적극성을 보이는 행동은 당시 한국인의 민족 의식의 변모의 일면을 드러내 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한국 독립 운동의 주축이 만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던 문학 외적 사실과도 대립되는 점이다. 그러니깐 <벼>의 찬수, <農軍>의 창권과 같은 인물은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 新開地를 찾아왔다는 점에서는 역경의 극복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불투명한 행동을 보여주는 면은 이들 작품이 지닌 커다란 한계점이라 하겠다.(40쪽)국문학은 문학이다. 그리고 국문학인만치 그 문자는 우리의 문자로 쓰여져야 하고, 민족적 감정이나 문제, 사상 또한 한국적인 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않은 작품은 아무리 문학적 가치를 지녔다 하더라도 국문학으로 잡을 수 없다. 만약 민족 감정을 외면하고 우리의 국가관을 망학한 문학이 있다면 그것은 매국 문학, 반역 문학이지 국문학이 아니다. 반대로 민족 정신을 지키면서 압력에 항거하는 문학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국문학, 민족 문학이 된다.(41쪽)간도를 중심으로 한 亡命地帶 在滿鮮人의 생활을 다룬 작품을 대상으로 잡을 때 문제는 달라진다. 여기서는 비옥한 토질과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새로운 민족 이민의 현장을 문제삼는다. 이것은 本國文學이 식민지 조선의 진실한 형상을 외면하고 점진적 개혁 혼을  들고나온 태도와는 판이하다. 난관을 극복하고 역사를 지배하면서 전 인류에 대한 윤리적 보편주의에 기초한 당대 한민족이 직면한 역사 조건을 인식하고, 인간의 도덕적 가치 문제를 의식하면서 우리의 존엄과 생존이란 민족 의지를 표현하려 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분명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문학의 엣센스가 될 수 있는 문학이 間島移民文學이다.(43쪽)여기서 이민 문학(exile文學, 亡命文學)이란 용어는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내용이나 소재, 표현 문자의 相異에서 오는 제재론적 命名이 아니라 地政的 차이에서 본 지방 문학, 본국 문학의 한 갈래란 입장에서 쓰여진다. 따라서 이 글은 하나의 지방 문학으로서 한 시대의 문학적 특성인 국문학의 본질을 밝혀 보려는 시도가 된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 시기에 와서 우리의 문학은 새로운 문자와 새로운 사상 감정의 표현과 더불어 창씨개명된 작가에 의해 한국과는 떠나 버렸으나, 이 망명지 간도 이민 문학은 그 표현 문자가 아직 국자·한글이고, 작품의 여러 요건이 앞시대의 한국 문학과 지속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작품에 나타나는 갈등의 양태가 1940년대의 민족적 감정과 관심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43쪽)문학 작품이 반드시 사회사의 한 단면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며, 또 사회적 징후로서 창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특정한 한 개인이 본 체험의 비전으로 개인의 사상, 자아(Identity)의 주장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작가도 고립하며 살지 못한다. 그는 독특한 개인이지만 타인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知的 배경 속에서 살고 있는 개인이다. 작가의 임무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에 완벽한 해결책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刺戟的이고 昭明的인 개인적 비전을 톻해 해결책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보면, 異民族의 통치 시대를 산 우리의 작가가 현실적 문제-민족 해방이란 문제-를 바로 비판하지 못하고 보호색을 쓰거나 새로운 주제로 눈을 돌리는 것이 일단 이해된다.(45쪽)말하자면 가장 완벽한 식민지 시대가 오면서 민족은 닫힌 사회로 빠져들고 정신적 자기 혁명은 권력지향적이고 우파적 현실 타협안으로 인해 마비되었다. 內鮮一體가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민족 의식은 본국에 잠시 머물다 移民 지대로 모여들었다. 그곳은 한반도의 안이 역사의 보편성과 국제 사회의 평화 체계나 인간 존엄의 가치가 여지없이 마멸되어 大和民族만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논리 속에 전 민족이 제국주의에 이끌려 가고 있었던 상황과는 아주 달랐다.(46쪽)우리 민족이 滿洲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지만 본격적으로 망면의 성격을 EL고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다. 그러나 在滿 移民들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와서야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1935년부터 同人인 北鄕會가 동인지를 내면서 망명 문단을 형성키 위해 李周福과 毛允淑, 安壽吉이 작품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48쪽)망명 문단이 보여주고 있는 新開地 이민의 의지나 流民의 恨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開拓民文學 내지는 농민문학의 생성은 전혀 별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이것은 리얼리즘 문학이 복사적 기능에 머문 것이 아닌, 즉 파악이 아니라 선택된 현실의 순수한 반영으로 민족이나 역사적 문제에 있어서 어떤 본질적 문제를 제공하려 ks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드러난 현상(Appearance)에 지나지 않고, 1940년대 문학의 본질은 이 망명 문학이 갖는 현실(Reality)이란 의미이다.(54쪽)그러나 1930년대에 있어 가장 사려 있는 리얼리스트였던 염상섭의 이런 협화 정신 운운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작품 <牧畜記>는 그렇게 순순히 협화 정신을 형상화하지는 않고 있다.(55쪽)그런데 이 시대의 작품에서 農民道나 농촌부흥론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연관지워 설명하려는 것은 일종의 선입관적 인상을 준다.(56쪽)1920년대의 최서해는 자신이 만주에 겪은 궁핍, 곤욕, 참상을 기록한 작품을 써서 있는 사실의 기록이란 새로운 문학 형식을 이 땅(56쪽)에서 성공시켰다. 이것은 작품보다 문학론이 우세했던 계급 문학의 이데올로기를 무색하게 했고, 방화, 살인으로 끝나는 結句 부분의 반항 양식은 음울한 분노에 적절한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던 당시 1920년대 산문 문학에 새로운 유행을 유포시켰다. 1920년대의 최학송의 이러한 작품의 특질, 특히 在滿鮮人의 궁핍과 참상, 그것의 보고문학적 성격은 1940년대의 이 在滿鮮人을 다루는 작품에도 아주 방사하다.소금 밀매로 근근히 호구해 가는 유랑 농민의 서글픈 얘기를 쓴 <새벽>에서 [피]가 보여주고 있는 충격적인 결구는 가히 이런 이민 사회의 단면을 다룬 典範이라 하겠다.(57쪽)南石 안수길의 <벼>, <새벽>, <圓覺村> 등은 1940년대 만주 이민의 고달픈 생활 현장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짐으로써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다. 이것은 1940년대의 본국 문학이 朝鮮文人報國會를 중심으로 皇道文學을 수립하려던 문학적 현실과는 너무나 상이하다. 따라서 안수길의 간도 이민 소설은 당대 한국 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의 지향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의 좋은 예가 된다.(65쪽)안수길의 작품이 1920년대 최서해 작품에 나타나던 체험적 민족 궁핍화를 고발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국문학의 지속적인 일면에 닿아 있고, 在滿鮮人의 망명 의지를 형상화하였다는데 또 다른 민족문학사적 변화가 있다. 공백기 문학 대체 논의는 이런 근거에서 출발한다.(65쪽)안수길의 농민 소설을 두고 당시 일제의 水田開墾에 따른 국책순응의 각도에서만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만주로 찾아간 사람이(65쪽) 한뙈기의 땅도 붙일 곳이 없어 살 길을 찾아 떠난 소작농이거나, 품팔이, 실업자의 무리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식 계급의 출신이 농촌의 무지한 농민을 계몽하기 위해서 농촌으로 뛰어드는 면은 1930년대 농민 계몽 소설의 한 갈래란 점에서 주목된다.(66쪽)1940년대에 있어서 朝鮮農民文學의 근본적인 과제는 작가 자신이 농촌을 알고, 농민의 유랑, 破産, 負債, 農耕, 穀分打租 등의 조선적인 제 특질을 闡明하는 것이 그 과제의 하나로 지적되었다.(印貞植, <朝鮮農民文學의 根本的 課題>, <<人文評論>>,1939. 12월호, p. 19 참조-인용자 재인용) 그리고 특히 이러한 문제는 이때 많은 한민족이 간도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됨으로써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민족의 생활사는 중요한 명일의 문학으로 제시되었으며(현경준, <문학풍토기>(간도편), <<人文評論>>, 1940. 6월호 p.84 참조-인용자 재인용) 이러한 제시는 실제 관심 있는 작가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이기영, <만주와 농민문학>, <<人文評論>>, 1939. 11월호. pp20~22.-인용자 재인용)(67쪽)특히 1940년대는 일제의 단말마적인 軍國意志가 완전히 민족적인 것을 말살하고 大東亞共榮圈 건설에 혈안이 되었던 시기다. 이로 인해 민족 의지는 완전히 폐쇄당하고 좌절과 자학적 증세, 또는 事實受理論으로 등분되던 때다.(68쪽)그러나 그 앞서부터 한국인을 排日運動의 일환으로 압박하고 있던 중국측은 설사 만주국의 건설로(1932. 3. 1) 한국인에 대한 악감이 정치적으로 완화될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원래 일제가 한국인을 중국에 귀화시켜 일제의 자금으로 토지를 매수시킴으로써 한국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따라서 재만 한인은 중국인과의 갈등으로, 정치적으로 만주국 국민이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만주 국민이 아니고 일제의 한반도 정책에 의해 쫓겨난 사람들이고 보니 皇國臣民도 아니다. 이런 풍토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도는 無人境의 처녀지에서 원시적 생활을 하거나 바보처럼 그들 친일파나 만주 원주민의 박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72쪽)준지하듯이 1940년대 이후는 파시즘의 대두와 일제의 악랄한 戰時政策으로 우리 문학은 두꺼운 벽에 부딪치면서 작가 의식의 좌절이 문학 일반의 현상으로 나타났던 시기다.(84쪽)한국의 현대문학을 재정리 재평가하는 일은 당면한 우리 문학사의 과제다. 이와 같은 문학사의 개편 복완에 있어 거의 간과했거나 경시해 온 일제 통치하의 이민 문학은 소위 암흑기로 명명되는 1940년대의 문학을 평가하는 데 새로운 좌표로 나타났다. 특히 '40년대는 이제가 우리말을 말살하고 문학 예술까지 日文에 의한 親日御用文學으로 강요함으로써 많은 작가가 변절하고 그외 남은 문인들도 일정하의 생활과 미족 의식 사이에 야기되는 갈동이 일어 이른바 인생파, 전원파 등 패배주의적 문학 행위로 돌아가거나 절필했다. 그러나 이민 문학-만주, 간도 등지의 2백만의 이주농민을 다룬 南石(安壽吉)이나 曙雲(朴啓周)의 前期 문학은 朝鮮臨時保安令(1941년)이나 出版事業令(1943년) 등과는 문관한 무학적 양상을 나타낸다.(88쪽)<<북향보>>에 비민족문학적 요소가 나타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타난다면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시대상이 이떻게 굴덜되어 있는가가 실상 더 중요한 점일 것이다. 따라서 <<북향보>>가 제기하는 문제점은첫째, 1940년대 중기에 있어서 우리의 正體와 역사 의식이 무엇이며,둘째,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 함께 보여주는 귀농의 성격,셋째, 이 소설의 주요 인물군의 우화된 행동의 의미와 1930년대 농민 소설과의 관계 등이다. 나아가 예상되는 이런 결론은 1940년에서 1945년 사이를 소위 암흑기로 규정하는 한국 현대문학사의 오류를 시정하는 또 하나의 논증이 될 것이다. 한편 이런 결과는 조선 후기 이래로 그곳으로 이민을 간(申基順, <<韓末外交史硏究>>, 一潮閣, 1967, p.15-인용자 재인용) 동족의 성격과 근대문학사에서 간도나 만주의 이민들이 남긴 문화적 업적이 우리 의식사에서 어떤 비중을 지니는가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도 되리라 본다.(116쪽)1940년대 만주 및 간도 에 있어서 한국인이 처한 입장을 보면, 우선 그들의 국적이 마주국이었다. 민족은 한민족이면서 국적은 만주국이었고, 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망국인이었기에 이주해 온 땅에서도 그들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만주국은 일본이 세운 괴뢰국가였으니 만주국의 보호란 것은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우리 민족을 흘러든 유랑 민족쯤으로 무시하고 적대시하였다. 이런 처지는 우리 이민에게는 국권 상실, 유랑, 새로운 땅에서의 또 한번의 간섭받음이란 점에서 삼중고의 어려움이 되었던 것이다.(118쪽)주지하듯이 일제 강점기에 있어서의 만주와 간도는 독립 운동의 집결지로서 독립군이 아닌 이민의 힘까지 항일 구국 운동으로 전이시킬 수 있었던 제2의 한국 영토였다. 한반도의 안이 민족 의식과 민족 의지를 집약한다기보다 오히려 반민족적 역사의 수렁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을 때도, 그와는 달리 그곳은 구국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반역사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기에 민족 의식과 역사 의식을 망각하지 않을 수 있었고, 문학 또한 그러한 민족 체험을 형상화할 수 있었다.(121쪽)<<북향보>>는 짐승처럼 고향을 쫓겨났던 이민들이 거친 이역의 땅에서 협력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민족의 문제가 작품의 소재로 채용되고 있다. 그러나 앞의 자료 검토에서 보았듯이 이 작품의 몇 부분에 나타나는 비민족적인 문맥이 민족적인 문맥으로 제작될 만큼 스토리가 확산되어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작품의 결말이 나타내는 주제이고, 등장 인물이 보여주는 마지막 의미이다. 그리고 끝까지 모국어를 사용한 깡기에서 발견되는 민(121쪽)족 의식과 역사 의식이다. 민족 의지의 좌절과 변절의 현장으로 타락한 한반도를 아리랑을 부르며 흥안령을 넘었던 민족의 수난사가 이 작품에서는 당시의 일반적 문화 풍토와는 달리 [북쪽에 새고향 건설]이란 스토리로 소설의 주제가 숨어들고 있다. 五族協和를 외치는 일반 문화 풍토가 외관(Appearance)이라면, [북쪽에 새고향 건설]이라는 숨은 의미는 그런 외관을 넘어선 내포화(Connotation)가 아닐까.(122쪽)이것이 해명되었을 때 <<북원>>(1943년), <<북향보>>(1944~45년), <<북간도>>(1957~67년)로 이어지는 안수길 문학의 미족 대서사시의 端初가 분명히 잡힐 것으로 보인다.(122쪽)교육계 출신 정학도, 농업학교 출신 오찬구, 소설가 현암, 여교사 석순임 등이 모두 이민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들의 적대 세력에 대해서는 한번도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없다.그렇다면 지식인들의 이러한 행동이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1945년 무렵 한민족의 후예로서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했던 한계점이 아닐까. 왜냐하면 1945년 그 시점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적대 세력과 맞서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삶을 유지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들 등장 인물들은 소설을 써서 선대 이주민의 고난을 후세에게 교육하려 하고, 단오에 박첨지 놀이, 사자 놀이, 동대항 추천 대회, 씨름 대회 등을 열어 우리의 전통 풍속과 민속을 지켜나가려 하며, 농악을 통해 이주민들에게 애향 사상, 애족 정신을 일깨우려 한다. 또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 수시로 나타나는 北鄕精神, 稻魂思想에 대한 지문은 이런 면을 둘러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한편, 이 소설이 신문 연재 소설이면서도 정치적 이야기나 당시의 전황 같은 것을 내비치지도 않는 것은 침묵, 그 이상의 의미를 암시하거나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무관심도 하나의 소극적 저항이 되기 때문이다. 오찬구를 위시한 이런 비판적 지식인상은 당시 몇몇(131쪽) 유수한 한국 소설에 나타나는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인간상, 즉 식민지의 궁핍화 현상을 누구보다도 뚜렷이 알면서도 무력 투쟁에 나서지는 않고 그러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희귀한 지식인의 한 유형으로 보인다. 이 무렵의 이와 유사한 인간상을 우리는 채만식의 <<濁流>>의 주인공 남승재를 통해 발견한 사례(김현, <<문학사회학>>, 민음사, 1984, p. 154-인용자 재인용)를 가지고 있다.(132쪽)만약 A,B 두 인물군을 드러난 대립으로 다루었다면 이 소설은 작가의 사상 전달에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첫째 당시의 검열로 인해 민족적인 A인물군이 비민족적인 B인물군에게 꺾여야 했을 것이고, 둘째, 당시의 실제 인간상이 미족적인 것(A)과 친일적인 것(B)으로 맞설 수 없었던 시기였으니 위험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사회 실상이 맞서 있지 않은 듯 한데 그것을 맞서 있는 것으로 드러냈으면 신문 소설로서 당장 견디어(134쪽) 낼 재간이 없었고 작가 자신도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135쪽)<아리랑>이 <간도 아리랑>으로 개조되어 불리고, 북만주 넓은 천지가 日人의 천국으로 화해간 시기에 민족 이민의 이상을 현실과 대립의 각도에서 인식하고 형상화함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명목으로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제가 우회되어 독자에게 후일담으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이 뒷맛은 A군의 되살아나는 과정과 C군의 변신과 결말의 해피엔딩 예보에서 드러난다. 모든 소설이 해피엔딩의 구조도 아니고, 또 모든 소설이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북향보>>는 민족적인 차원에서 시작된 북향 목장의 건설이 비민족적인 기회주의자 박병익에 휘말려 한때 고난에 빠지지만, 마침내 승리하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선주민 정학도의 대에서는 목장 건설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1대 주인공의 대에서는 이와 맞서는 적대 세력의 비협조와 외면을 극복하기 위해 눈물겨운 모금 운동으로 위기를 넘긴다.(135쪽)적대 세력 B군이 목장을 담보로 사업을 시작하자, A군은 그 적대 세력을 꺾으려 하지 않고 저당을 해제할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 전력을 쏟는다. 국가의 힘도 상실한 이역에서 우리 이민이 살아 남으려면 이런 수동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그 터전인 목장을 팔아 넘기려는 세력을 향해 한마디의 공격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농민들의 지도자 정학도가 이상농촌을 건설하자면서 일본이나 반대 세력을 비판하지 않았던 것과 똑 같다.(135쪽)안수길은 수세에 몰려 있으면서도 공세를(135쪽) 취할 줄 모르고 주어진 상황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듯 응집과 일체감으로 위기를 넘기려던 그 딱한 현장에서 이 작품을 쓰고, 발표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구체적인 현실 체험으로 인하여 리얼리티를 잃을 염려가 없는 작품이고 현장성이 강한 작품이다. 이런 면은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작중 인물, 농민 소설가 玄岩이 <<싹트는 대지>>를 지칭하는 듯한 <동트는 대지>의 이야기로 잘 방증된다.(136쪽)이상과 같은 성격 창조는 작가의 현실 수용 태도, 즉 선택된 현실이 아니라 현장 그 자체를 모두 수용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적인 것도 친일적인 것도 드러내 놓고 택할 수 없는 시대 사정으로 보았을 때 이런 작가의 태도는 무관심이나 阿世라기보다 현명한 방법의 선택이라 판단할 수 있다. 이 점은 또 작품이 평면적 인간군의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C군이 대단원 부분에서 전향하고 A군의 인물들이 목적을 달성하는 입체 구성을 이루면서 B군의 몰락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136쪽)지금까지 논의한 사실을 정리하면 이 소설은 현실과 理想의 거리가 떨어져 있으나, 그 거리를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대립과 꺾임으로 주제를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변모와 현장의 실상을 정공법의 논리를 통해서 좁힘으로써 주제를 다음어 낸 작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日帝와의 맞섬이 정학도와 같은 理想型의 인물로는 현실의 극복이 불가능했기에 오찬구와 같은 실천적 인물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기법은 당시의 검열 제도를 의식하고 민족 이민의 현장을 둘러 나타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러한 점은 이 소설이 클라이막스를 갈등이 아니라 스트리의 전개에 두고(136쪽) 있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137쪽)1) 1940년대 만주와 간도의 문화적 外觀은 한반도 내의 일반적 문화 상황과 다른 바가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말 <<北鄕>> 등 동인지로부터 시작된 순수 문학의 경우는 그런 문학 일반의 경향과 다른 민족 수난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北鄕譜>>의 경우도 광복 직전까지 고향을 돌아가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流謫地에서 모국어를 사용하여 [북쪽에 새 고향 건설]이란 주제를 다룸으로써 그렇나 전시대 문학과 동일한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음도 함께 밝혀졌다.2) <<북향보>>는 1930년대 민족 문학의 주류로 평가되는 <<흙>>과 소재, 구성, 인물의 성향 및 주인공의 일대기 등이 아주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1930년대 민족 문학과 동일 계열의 농민소설로서 그러한 작품군의 주제, 즉 민족의 자강사상이 1945년대에 구현된 놀라운 예가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이 신문 연재 소설로서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는 시대 상황은 이 작품의 민족문학적 주제의식을 근본적으로 뒤엎을 수는 없다.3) 이 소설은 자손 대대로 살기 좋은 새 고향을 만들자는 이상과 그러한 이상 실현을 어렵게 하는 현실이 갈등과 대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검열을 의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현실을 그렇게 다룰 수밖에 없는 상황, 즉 민족적인 것도 친일적인 것도 드러내(137쪽) 놓고 주장할 수 없는 시대 의식을 함축시키려는 확대된 리얼리즘 정신이라 하겠다. 그러나 북향 목장이 재건되고, 목장 건설의 적대 세력(B군)이 긍정 세력으로 넘어옴으로써 離農들의 뿌리내림이라는 이 소설의 주제가 효과적으로 구현되었다. 이런 인간상의 창조는 이 작품이 사건을 갈등이 아니라 스토리의 전개에 두고 있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4) 앞의 결론 1), 2), 3)을 전제할 때 본고는 한국 현대문학사가 1940년에서 1945년 사이를 [공백기, 암흑기]라고 논술하고 있는 오류를 간도문학을 통해 시정하는 또 하나의 논증이 된다.(138쪽)그러나 윤동주의 시 세계를 내정적이고 실존적인 의식에 바탕을 둔 좌절된 자아를 보는 시각은 종래의 견해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단지 추억된 고향의 감각적 대상, 혹은 고향의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것을 두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속에 고향이 놓인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147쪽) 점은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유랑의식을 해명함으로써 분명히 드러나고, 그 유랑의식이 좌절이라기보다 식민지민적 고뇌에서 비롯되는 고향은 있으되 안주할 고향이 아니라는 또 다른 고향, 또 다른 고향을 찾을 자세에서 증명된다.(148쪽)한국적인 정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되는 것이 情이고 恨이다. 한 예를 들어 우리에게 있어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한은 무엇일까. 무엇이 강점기 우리 민중의 보편적 정서가 될까. 그것은 헤어짐에 대한 그리움이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착이다. 이 점(148쪽)은 그 불행했던 시절의 정서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출하는 <아리랑>과 같은 노래에서 아주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리랑과 일제 강점기 36년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노래이고 그 노래가 주는 맛은 별리에서의 아쉬움이다.(149쪽)잮론할 여지가 없지만, 이 시대의 문학사는 <<在滿朝鮮詩人集>>, <<北原>>, <<싹트는 대지>>, <<北鄕譜>>, <<北鄕>> 동인지 등 間島 移民文學으로 대치된다.(158쪽)어느 시인에게나 초기의 시집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습작기로부터 제1시집을 내기까지, 거개의 시인이 겪는 가장 긴 고심과 모색의 기간이 이 때이며 그런 흔적이 그대로 次期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문학이 시인의 체험이나 생활과 무관하지 않고, 그 시인의 前半生의 생활에서 형성된 의식이 인식의 방향을 결정 짓는다고 볼 때,...(161쪽)柳致環은 후에 그의 만주행이 불가피했던 사실을 밝히는 글에서 당시의 현실을 질식할 [일제 질곡의 하늘 아래]란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지 그의 인생에 희망을 건다든지 설계를 세운다든지 하는 것은 적 앞에 자기를 종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아부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따라서 당시의 현실에서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라면 원수에 대한 가열한 반항의 길로 자기의 신명을 던지거나 아니면 희망도 의욕도 저버리고 그 굴욕에 젖어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165쪽)한국 시에 있어서의 [北滿體驗]은 크게 두 갈래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적인 의미이다. 전자의 경우가 陸史, 尹東柱 등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본고에서 논하려는 柳致環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166쪽)그러나 문학작품의 연구에서 역사의식을 전제할 경우, 특히 일제강점기의 작품에서 이런 태도를 적용시킬 때 연구의 대상이 되는 시인은 [민족 시인], [저항 시인], [節義 시인] 식으로 관념화 내지는 우상화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해당 작품에서 節義的인 우상화의 요소가 있으면 모르지만 이런 요소를 찾아내기 힘들 때 그 작품에 대한 의미는 부정적으로 평가되거나 이해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이제 거의 타성화된 느낌마저 갖게 하는데, 이것은 일부 한국 문학 연구가 안고 있는 하나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167쪽)북만의 시간적 체험, 곧 李陸史나 尹東柱의 경우에 있어서는 시인의 의식이 역사 속으로 잠입함으로써 이들이 살았던 시대의 현실에 참여하고 그것이 주는 의미의 해명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陸史에 있어서의 [北滿](曠野)은 현재와 천 년 뒤의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이고, 尹東柱에 있어서도 北滿은 과거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北滿]이다. 이럴 때 시인은 시간 속에서 의식활동을 전개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 수 있다. 그래서 옛날을 회상하는 抒情地帶에 머무를 수 있는가 하면 앞날을 기약하는 예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유린당하고 버려진 땅이 스스로 다스(167쪽)리는 사람들의 나라가 되리라는 민족의 기약된 미래를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북만을 작품에서 공간적 素材場으로 체험하고 있는 유치환의 경우에 있어서는 시간상으로는 현재일 뿐이고, 그 현재가 현실과 대응되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 전자가 과거, 현재, 미래와의 만남에서 시적 긴장을 이루어 낸다면, 후자는 현재와 현실이 만나는 二元對立의 세계에서 詩的 긴장을 빚어낸다. 李陸史의 <曠野>에선 가장 고달픈 현재가 찬란한 미래와 대응된 후 다시 미래 속으로 잠입함으로써 上乘指向이 가능해졌고 尹東柱의 <별헤는 밤>에서는 불행한 현실이 행복했던 과거로 回歸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형상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柳致環의 경우는 현실을 直視한다. 나와 현실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고 현실과 맞서서 卽物的인 각도에서 대상을 인식한다. 이것은 그의 시가 표현에서 기교를 부리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선 증명된다.(168쪽)외부에 나타난 역경이 아무리 황막하더라도 인간의 내면 생활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생활이 어두움으로 찰 때는 불행을 벗어날 수 없다. 이때 인간은 황막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싸워야 하고 그와 함께 자신의 내부적인 불행을 막기 위해 자신을 가로막는 어두움의 근원을 또한 없애야 한다.(173쪽)우리가 나라를 일제에 유린당하고 있는 동안은 조선 독립군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국권회복을 꾀했고, 문학의 경우 <별헤는 밤>의 민족 시인 尹東柱가 태어났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또 한편 李陸史와 같은 선이 굵은 민족적 서사 문학이 시적 체험으로 익어간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丹齋 申采浩가 <<海潮新聞>>과 같은 것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던 무대였다.(175쪽)밝음과 어둠의 대립 구조는 <<北間島>> 전체 구조의 한 축약이 된다. 그리고 그 축약은 이 소설이 민족의 수난 받은 역사를 극복의 의지로 형상화한 문제를 둘러서 보여주려는 상징 체계의 징후를 띠고 있다는 면에서 주제 발견의 출발점이 된다.(207쪽)특히 <<北原>>과 같은 창작집은 1943년이란 시기에 발행되었고, <<북향보>>는 광복 직전까지(1945.7.4) 모국어로 우리 농민의 어려운 이주사를 다루었다. 이것은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북간도>>는 안수길의 이런 문학 맥락에서 마지막 자리에 서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1870년부터 1945년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족의 갈등, 곧 한국인 대 중국인, 한국인 대 일본인, 중국인 대 일본인의 대립과 이주, 농민의 뿌리내림, 고난의 현장을 추적하고 있다.(208쪽)민족의 이런 힘든 과거사를 평범한 移農民의 가족사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이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생존 의지를 그려내고 있다는 데 우선 의의를 찾아낼 수 있다.(210쪽)이 작품은 이농민 이한복 일가의 무서운 간도 이주의 피와 땀의 역사이다. 물론 여기에는 복동예 같은 불쌍한 여인의 운명이 있고, 청산리 싸움의 대승리 같은 실재의 사건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은 험악한 역사의 변화 속에 개똥참외처럼 살아온 이름없는 韓民族의 힘든 간도에서의 생존의 역사에 바쳐지고 있다. 이 작품에는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시기의 유명한 사건이나 실존했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그러나 그러한 역사상의 사건이나 실제 인물들은 마이너 케렉터로 처리되고 평범한 농군을 통해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즉 목격자적 입장에서 진술되고 있는 역사소설이다. 이를테면 政事的 역사소설이 아니고 평범한 중도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당대 민족의 역사의식의 핵심에 접근하여 리얼리티를 획득하려는 작품이다. 이러한 점에서 <<북간도>>는민족문학의 한 고전적 면모를 보여주는 소설이라 하겠다. 이것은 [역사의식이란 현실을 역사 흐름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의식]이라고 생각했던 안수길의 역사관이 E.H. 카가 [역사란 본질상의 변화요, 운동이요, 진보]라고 했던 바로 그런 역사의식의 본질 이해에 서 있기 때문에 형상화된 결과로 보인다.(212쪽)역사소설이란 지난 날의 시대를 배경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재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이 장르는 역사상 실제의 사건이 정사의 입장에서 다뤄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곧 역사상의 위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시대와 사건을 역사적 기록에 부합되도록 재구성하는 이른바 정사적 역사소설, 실제적인 시대아 서건은 2차적인 것이 되고 작가가 창조해 낸 허구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적 경험과 소설미학이 조화된 리얼리즘으로서의 역사소설이 쓰여질 수 있다. 뒤의 경우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적인 사건이 실제 역사와 상응되면서도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되고 있다는 면에서 소설발달사에서 앞의 것보다 한 발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정사적 역사 소설이 역사상의 위인, 영웅,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되는 만큼 작가는 당시의 역사와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여 기술하는 데 지나치게 영중하기 쉽다. 이러다 보면 당해 작품은 傳記나 野談類로 흘러 敍事文學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리얼리즘적 성격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213쪽)가령 <<전쟁과 평화>>와 같은 고전적 역사소설이 인류의 큰 변동기를 작품의 배경으로 택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그 시대를 살았던 실제 인물들이다. 그렇지만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인물들은 그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창조된 가상적 인물들로 되어있다. 피에르, 나타샤, 안드레이와 같은 톨스토이가 창조한 인물들은 알렉산더 황제, 나폴레옹과 같은 역사적 실존 인물보다 더 생생히 살아 있고, 그런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그 시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 안드레이를 통해서 인간의 야심, 명예욕, 존경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영웅이란 것이 사실은 얼마나 의미없는 존재인가도 배우게 된다.(213쪽)곧 역사에 기록된 어떤 독립투쟁보다도 무지한 이들이 민족 진로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 담당(215쪽)자였고 희생자였다는 역사의식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216쪽)
108    송민호,『일제말 함흑기문학연구』, 새문사, 1991 댓글:  조회:1821  추천:0  2009-05-16
문학사적으로 우리 나라 문학을 통관해 볼 때, 전통적 생명을 거의 잃고 최악의 경우에는 질식 직전에 처했던 시대가 일제말 소위 암흑기가 아니었나 한다.(4)  戰時下의 정책적 문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한을 받았다. 첫째로는 전시의 궁핍한 물자난으로 발표지면이 제한되었고, 당시의 대표적 잡지인 《國民文學》만 하더라도 용지 기근으로 20여 종의 잡지를 통폐합해서 발간했던 것이었다. 둘째로 발표지의 통폐합은 전시의 문예활동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軍 報道部의 입장에서는 국책문학을 이끌어가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했다. 물자절약에 언론 통제까지 가능했던 잡지의 통폐합은 그들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문예작품은 통제의 방향에 따라 이끌려 갔다. 따라서 이런 御用紙의 작품내용이 당시의 시대적 특질을 대변해 주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5) 이 시기에 가장 중추적 발표기관이었던 <<國民文學>>은 주간 崔載瑞에 의하여 초기 몇 회를 제외하고는 일본어로 간행되어 우리말 말살정책의 선봉이 되었다.(5) 전시의 문학이 시국적인 국책에 순응해야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일지 모르나, 일제말기의 한국문학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여건이 가세하여 복잡했던 것이다. 전통문학을 수호해야겠다는 민족적 저항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친일 아부의 어용작가들이 독버섯처럼 돋아났다. 한편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었던 나약한 文人群들은 군 보도부의 날카로운 감시에 따라 고뇌에 찬 작품들을 써낸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위에 뜬 기름처럼 국책에 순응하려는 서술이 부분적으로 비쳐 당시의 인생과 생활을 형상화하는데 있어 부득이 시국적인 옷을 입힌 것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기 문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親日作品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친일적인 측면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여 그 농도에 따라 광적인 戰爭讚美, 鍍金된 어용, 親日文學 등 3단계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그 시대문학의 특질로서 사회적 배경의 영향, 전쟁문학으로서의 요소,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질을 들어 이 시대 문학의 양상을 정리하고자 한다.(6-7)  그러나 여기서 다룬 대체적인 시기는 친일잡지인 <<人文評論>>이 창간된 1939년경부터 일본 침략전이 거의 종말을 고하는 1944년 중반까지를 암흑기 문학의 시기로 보려 한다. 1939년 이전에도 친일문학이 없지 않았으나 암흑기의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고, 또 1945년 전반에도 망상에 사로잡힌 작가들이 더러 있었으나 군부의 문화탄압의 여력이 없어진 때라 친일문학도 斜陽의 길을 걷고 있었다. 45년 전반까지도 친일지가 간행된 것이 있으나 내용이 잡지 체재를 갖추지 못했고, 지면 역시 휴지로도 부적당한 것에 인쇄되어 나왔다. (7)일본 패망의 징후는 친일지의 쇠락에서 직감할 수 있었다.(7-8) (저자는 이 시대에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고 연령적으로도 20대 전후의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대에 있었다.)(8)  1940년부터 5년간의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어떠했는가 총체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침략전쟁이란 저항심은 다분히 마멸되고 대체적으로 시국에 순응하며 耐乏生活을 견디어갔다. 비평하거나 저항하기에는 그들의 힘, 다시 말해 軍閥의 暴惡이 너무나 거세었다. 체념하는 소극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횡포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수하는 대중이 대부분이었다. 南京이 함락하고 徐州가 함락했다고 금방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낮에는 축하행렬, 밤에는 제등행렬이 전국을 환호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전략적인 안목이 없는 국민들은 이대로 가면 일본이 승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축하행렬·신사참배 등에 별로 저항을 느끼지 않으며 참여했던 것이 당시 대다수 민중들의 의식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美國의 소리'방송을 들은 일부 계층만이 앞날의 戰局을 예상했던 것이다.(9)  건물마다 內鮮一體를 비롯한 東亞共榮圈을 주장하는 표어가 붙고, 전쟁 완수를 위한 격문이 거리마다 나부끼는 환경에서 전전긍긍 살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초비상의 공포 분위기에서 언제 벗어날 것인가를 생각할 뿐 당면한 고통을 운명처럼 체념하는 것이 당시 한국민의 공통된 의식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일본의 패망이 한국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일반 대중의식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없다.(9) 이미 식민지화한 한국은 대륙침략의 兵站基地로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지역적으로 일본과 만주의 중간도로가 된 한국은 전선에 이르는 補給확보의 요지일 뿐아니라, 人力需給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식량 및 지하자원을 전쟁에 동원하고,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후방의 단결을 위하여 한국민의 철저한 皇民化 정책이 요구되었다. 이런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쟁 발발 후 역대 총독은 우가기 잇세이(宇垣一成)서부터 1945년 終戰 당시의 아베노 부유기(阿部信行)에 이르기까지 거물급이 군림했다. 거의가 大臣을 역임한 그들이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그만큼 한국의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이란 발판이 없었다면 일본의 대륙침략은 염두에 둘 수도 없었다. 병참기지의 역할을 한 한국은 일본을 위하여 온갖 핍박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10)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의 皇民化政策은 지리적인 倂呑과 아울러 모든 한국적인 전통을 모조리 말살하며 일본화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內鮮 융화라는 온건한 말로 시작된 皇民化 운동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에 이르러 급속도로 격화하여 內鮮一體를 부르짖고 國體明徵을 강조했다. 이것은 동등한 처지에서의 一體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적인 것을 용해흡수하여 皇民化 一色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天皇은 '一視同仁'을 내세워 일본인과 같이 예우하겠다는 僞善으로 한국민을 무마하려 했다.(10) 1942년부터 2년간 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끼(小磯國昭)는 '道義朝鮮의 確立'을 기치로 내걸었다. 여기서 道義라는 것은 그 개념에 日本國體에 투철하여 皇國臣民으로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內鮮一體보다 한걸음 더나가 정신적인 同化를 말하는 것으로, 내선일체가 갖는 궁극의 도라는(10) 것이다.(10-11)  일본 國體의 본질은 1937년 일본 文部省에서 간행된 {國體의 本質}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大日本帝國은 萬世一系의 천황이 皇祖의 神勅을 받들어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萬古不易한 국체라는 것이다. 황조의 신칙이란 무엇인가. '天下를 집으로 하는 八紘一宇의 정신에 투철한 것이다.(강재언, {일제하 40년사}, 제4장-저자 각주)  이것이 일본정신의 權化요 통치이념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이 정신에 동참하라는 것으로, 과거 피상적인 內鮮一體에서 정신적인 동화를 강요했던 것이다. 즉, 이것은 한국민을 동등한 처지에서 대하려는 소위 '一視同仁'이 아니라는 증거이며, 한국인의 민족의식, 언어습관을 말살하려는 그들 계책의 시초였던 것이다. 그들이 만주를 침공하여 괴뢰정권을 세웠을 때 명분을 民族自決이라 내세웠다. 그리고는 한국에 동요가 생길까봐 그들은 당황했고, 拓植 대신을 지낸 永井 柳太郞을 비롯하여 한국 지식층에 宣撫工作을 폈다. 國體明徵을 들고 나온 것은 철저한 皇民化의 종국을 의미했다. 민족의식을 버리고 일본 정신에 투철한 인간 개조를 그들은 강력히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11)  황민화 운동의 일단으로 皇國臣民임을 맹서하는 소위 '황국신민의 서사'를 한국사람은 누구나 제창하도록 하고, 의식에나 간행물 일체에 이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것은 일반인용과 지식인용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국민학교 수준에서, 후자는 의식이나 지식계급에서 제창하도록 했다. 내용은 같으나 후자의 경우,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皇國臣民이다. 忠誠으로서 君國에 報答하리라 2. 우리들 皇國臣民은 서로 信愛協力하여 團結을 굳게 하리라 3. 우리들 皇國臣民은 忍苦鍛鍊 힘을 길러 皇道를 宣揚하리라  이런 황민으로서의 맹서는 아래로 국민학교 생도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암송하도록 했고, 심지어 보행자에게 즉석에서 제창하도록 하여 만일 못하면 非國民이라고 매도하는 수법으로 보급시켰다. 이런 일은 일본 본토에는 없었던 것으로 한국민의 皇民化 洗腦의 한 방편이었다.(11-12)  또 하나 황민화의 방편은 神社參拜의 강요였다. 일본에 고요한 神道精神을 보급하고 이것을 숭배함으로써 정신적인 황민화를 성취시키려는 것이었다. 神社는 格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南山 정상에 자리잡은 朝鮮神宮은 官幣神社라고 하여 일본에서 宗主格인 伊勢神宮과 직결되는 격조 높은 神社였다. 그리고 고을마다 마을마다 神社가 있었고, 여기 참배하는 度數에 皇民 精神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한국적인 종교는 물론 온갖 전통문화는 이 神道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신세계를 침식당한 한국민은 뜻도 모르는 '가시사마'(神樣) 앞에 합장배례를 강요당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 신자들의 반발이 컸고, 산사 참배에 불응한 장로계와 평양 숭실전문학교는 폐쇄당하는 불운을 겪었다.(12)  무엇보다도 치욕적인 일본의 行弊는 姓을 말살하려는 創氏改名制度에 있었다. 한국사람의 姓까지 없애고 '씨' 중심의 日本式 가족제도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한국은 옛부터 家系를 존중하여 族譜에 이름을 올려 조상에 이르는 뿌리를 밝히는 데 힘썼다. 그런 전통성을 말살하고 姓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니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차마 견딜 수 없는 굴욕의 극단이었다. 언어와 문자를 말살하고 생활양식까지 일본화시키려는 그들은 마침내 가족제도까지 유린하여 한국민으로서의 자취마저 없애버리려는 蠻行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12)  孝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실천도덕율에서 이 創氏만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12)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병참기지로서의 한국은 그 역할의 차원이 달라졌다. 인적 소모전에서 젊은 일본인은 거의 戰地로 끌려갔고, 이제는 한국 청년에 손대지 않을 수 없었다. 황민화 운동을 철저히 실행한 이면에는 전쟁에 인력동원을 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우선 1939년 7월부터 勞務動員이 본격화했고, 1938년 2월에는 그 악명 높은 '육군 특별지원병령'이 시행되어 군 입대를 종용했으며, 지원하는 사람을 영웅시하여 많은 젊은이가 동참할 것을 적극 권했다. 이어서 1943년 7월에는 '해군 특별지원병령'을 실시하기에 이르렀고 이렇게 일본 본토인과 같은 대접을 하는 것은 '天皇陛下의 聖恩'이라고 추켜세웠다. 그해 10월에는 '조선인 학도 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어 전문학교 대학의 재학생을 모두 戰地로 보냈다. 이름만 지원병이지 만일 응하지 않으면 노무징용으로 끌어가 더욱 위험한 일에 충당했다. 여자 정신대라 하여 부녀자를 慰安婦로 차출하여 전장으로 보낸 것도 이때에 더욱 심했다. 이런 지원병제도로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1944년 4월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각의에서 이 제도를 결정한 것은 1942년이었으나, 한국 청년 중에는 미취학자가 많아서 이들을 입영시켜 훈련하는 문제가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戰局이 파탄에 이르자, 재고할 여유도 없이 이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의 우민화정책은 여기에서 自家撞着에 빠지게 되었다. 식민지 교육정책은 공부를 시켜놓으면 마음대로 다루기 힘들고 지식인일수록 오만해서 황민화 운동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억제하고 특히 고등교육기관의 존재는 그들에게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12-13)  이런 과정에 대해서 일본인 尾崎秀樹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35년의 카프의 해산, 37년에 [皇國臣民誓詞]의 제정, 38년의 일본어 常用, 조선어교육의 폐지, 40년 창씨개명, <<每日新報>>를 除한 조선어에 의한 민간지의 폐간, 신사참배의 강제, 이런 사상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39년에는 朝鮮文人協會가 생기고 43년에는 朝鮮文人報國會가 조직되는데 그것은 조선인의 자유와 독립을 뺐고 생명까지도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종건 단계에 이르러서는 소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고 급기야 전면적인 징병제도가 되어 조선인을 전장에 몰아내게 되었다.(尾崎秀樹, {舊植民地文學노硏究} 序說-저자 각주)(13)  1944년은 패전을 눈앞에 두고 한국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군국주의의 적극적인 시책이 강화되고 있었다.(15)  당시 문학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준 문화적 배경은 특이했다. 침략전의 전초적 현상으로 모든 것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당연했다. 문화의 일반성은 희석되고 정책적 요구에 따른 특수한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즉 일반적인 문화창달은 위축되고 문인협회니 대동아문학자대회니 하는 침략전 성취에 따르는 기관들이 나타났던 것이다.(17)  조선문예회는 총독부 학무국의 주선으로 崔南善, 李光洙, 金永煥과 城大 교수 高木市之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1937년 5월 발기된 이 회는 제1부와 제2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레코오드·연극·영화·라디오 등 문예와 연예 각 방면을 교화 선도하여 비속화하는 것을 막아 사회 교화를 꾀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高木市之助를 좌장으로 하여 方應模·李相協·梁柱東·玄濟明·崔南善·金永煥·金億 등 14명과 일본인 17명이 출석하였다. 歌謠淨化운동의 일환으로 소년 소녀들을 위한 노래를 보급키로 하고 신작가요 발표회를 개최하는 등의 운동을 벌이다가, 동년 9월에는 <銃後風景歌>, <皇軍激勵歌>를 제작하여 음악회를 열기로 하고 그 수익금을 헌납한다는 결의를 하기도 하였다.(17)  조선문예회는 1938년 6월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이 발기할 때 발기한 59개 단체의 하나로 참가하였다.(18)  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은 38년 6월 민간 사회교화단체 대표자들이 총독부의 알선을 좇아 장기전에 대처한 銃後 봉사문제 등을 협의한 데서 결성된 단체였다. 여기에는 대동민우회  時中會 조선문화단체연합회 계명구락부 춘추회 등을 비롯하여 일본 적십자조선본부, 조선군사후원연맹 등 59개 단체와 尹致昊·李丙吉 등 개인 56명이 참가했으며, 이때 조선문예회도 발기 단체의 하나로 참여하였다.(18)  문인협회는 1939년 10월 21일 李光洙·金東煥·朴英熙·鄭寅燮 외 10여인의 발기인이 모여 성명서를 작성하고 회칙에 관한 토의를 거쳐 발족한 어용단체였다. 문인협회의 결성 동기는 한마디로 일본의 국책수행에 기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시하 점차 긴박해지는 시국을 맞이하여 문인들이 걸머지고 있는 책임이 크다는 관점에서 문인 각자의 개인적 행동을 제한하고 무장을 통하여 시국에 공헌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문인 전체의 대동단결이 필요하고 조직을 통하여 통제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문화정책을 받들어 친일작가인 이광수·김동환이 주동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 문인협회였다. 친일적인 문인단체가 구체적으로 결성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문인들의 조직화는 일단 이루어졌다. 그후 이 문인협회를 통하여 친일문학은 본궤도를 찾아 선봉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고, 사실상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문인협회의 성립은 내용적으로는 당국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이광수 외 십여 인의 발기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19)  문인협회의 목적...한마디로 요약해서 '皇軍的 新文化 創造'라는 것이다. 즉 전쟁 목적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화창조로서 일본문화를 중추로 하는 동아문화의 결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0)  첫째로 이 협회의 특징은 일본인 조선인이 다같이 참여한다는 것과, 둘째로 이 회가 성립된 후에 다같이 국민정신 총동원 연맹에 가입하도록 되었다는 점이다. 1939년 10월 29일 결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명예총재에 당시의 학무국장인 鹽原을 추대하여 학무국 감시하의 기구임을 밝혔고, 회장에 이광수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회장이 지명하기로 되어있는 간사로는 金東煥·朱耀翰·金文輯·朴英熙·鄭寅燮과 일인 측에서는...등이 결정되었다. 그후 金文輯이 자퇴하고...상무간사는 박영희가 맡았다.(20)  그리고 문인협회에서 제정한 '懸賞小說募集規定'에 의하면 그 취지에 있어 '高度國防國家建設에 邁進해야 할 現時局'이라는 당시의 戰局을 전제로 하고 현상작품의 성격규정에서 '표면적 효과를 겨냥하기보다는 위대한 국민적 정신이 작품 전체에 徹한 순문학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21)  1939년 문인협회가 결성된 이후 문인들의 시국적 무장은 일단 이루어졌다. 이 협회의 존재는 문인들에게 많은 제한을 준 것이 사실이고 이런 공적은 문인협회의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1941년에 들어서자 침략전은 점점 치열해지고 <<人文評論>>을 비롯한 어용잡지의 편집 태도도 적극적인 시국 동참을 표방하고 나섰다. <<人文評論>> 1월호(卷頭言-저자 각주)에 의하면 '文學挺身隊'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정신대란 이제까지 한국여성들이 위안부로 전선에 나가 몸을 바친 비인도적 만행을 일컫는 것인데, 여기서 문학 정신대란 문인들로 하여금 시국을 위해 몸을 바치라는 극한적 요청인 것이었다. 이런 문예운동은 점점 극심해져 42년에는 강압적인 문예운동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21)  이런 문단 실정에서 1942년 연말에는 '大東亞文學者大會'라는 모임이 이루어졌다.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는 11월 4일~5일, 양일에 거쳐 대동아회관에서 개최했다. 문인협회의 조직을 활성화하여 문학자들의 정신적인 무장을 꾀했던 것이다. 첫째 의제는 '대동아 정신의 수립'으로 일인 소설가 菊池 寬이 의장이 되고 香山光郞(李光洙)가 주제 발표를 했다. 두 번째 의제는 '대동아전쟁의 강화보급'으로서 발언자는 兪鎭午였다.... 제2회 大東亞文學者大會는 다음해인 1943년에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五族協和(日本, 朝鮮, 滿洲, 中國, 蒙古, 大東亞共榮圈의 構成國-저자 각주)를 내세운 이 대회는 대동아공영권의 결속을 다짐하는 모임이었다. 이 회의에서 <<國民文學>>지의 주간인 崔載瑞가 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에 충성을 다하자는 내용으로 시종하였다.(22)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는 일본이 패전 전해인 1944년 11월 12일부터 3일간 중국 남경에서 열렸다.... 그리고 결의사항으로서 '中國文學協會'의 결성을 보았고, 제4회는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제3회에는 일본 대표의 일원으로 이광수가 참석했다. 3회에 걸친 대동아문학자대회의 참가 인원은 제1회가 57명 중 朝鮮 9명, 제2회 99명 중 조선 9명, 제3회 14명 중 조선 1명으로 이광수가 끝까지 동조했다.(23)  이상과 같은 친일 문화운동이 한국문학을 암흑기시대로 끌어넣은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신문을 폐간시켰다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처사였다. 이들 신문이 전부터 시국에 순응하는 기사들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제4주의 문화란만은 한국문학을 보존하는 유일한 一燈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20여년간 조선문학의 기반이 되었던 두 신문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보니 서운한 생각은 차치하고 작가들을 수용할 공간의 말살은 실로 절망적인 것이었다. 특히 장편소설의 거의 전부가 신문소설로 자라오던 것이니 한국문학 발표지의 大宗이 끊긴 셈이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每日新報>>가 있었지만, 지면이 국한되었고 작품 내용도 제한을 받았으니 작가들의 설 땅은 없어지고 말았다. 친일 잡지인 <<인도(문?-인용자)평론>> <<국민문학>>이 있었으나 투고하는 작가는 친일 어용의 무리로 국한되었고, 신시대 등 시국적인 전쟁 찬양, 친일적 주제 일색으로 진실로 암흑기에 돌입했던 것이다.(24)  국민총력조선연맹은 40년에서 45년에 이르는 사이에 걸쳐 "유례없는 거대한 조직과 강력한 실천력으로 일본의 장기전 수행에 수반하는 銃後 활동의 제반 문제를 처리해 나간 단체"(林種國, {親日文學論}, 平和出版社, 1963,110면.-저자 각주)였다. "國體의 本義에 기하여 內鮮一體의 實을 기하고 각 地域에서 滅私奉公의 誠을 奉하여 協心戮力하여 써 국방국가 체제의 완성, 동아 신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기함"(강령 全文)을 목적으로 하였다.(25)  40년 12월 문화활동에도 신체제를 갖추고 민중을 지도하고자 문화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때의 문화위원으로는 金億·金斗憲·洪蘭坡·崔南善·沈亨求·白鐵·兪鎭午·李相範·李能和 등과 일본인 47명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文化翼贊의 반도체제'를 상론하고 연락계를 설치하고, 국문 문화익찬 소설과 가곡논문을 현상 모집하고, 황군감사 연예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41년에는 읍면 연맹 이사장 등 모범인물을 선정하여 선지참배단을 구성, 내지의 각 神社를 참배케 하여 일본정신을 체득케 하였다.(25)  44년 4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와 조선미술가협회의 협찬하에 문인·화가·기자들을 독려, 광부·직공·노동자를 위문하고 그들의 생활을 작품화하였다. 이후 詩歌를 통한 국어생활 보급과 일본정신 파악을 목적으로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다. 45년 5월에는 金史良·盧天命을 在支 반도출신 학병 위문차 파견하기로 하였다. 총력연맹은 이후 조선국민의용대가 결성됨으로써 이에 합류, 해체되었다. 그 동안 국민총연맹은 전후 6년 동안 "그들이 말한 바 국민운동의 최고봉으로 군림했으며 반도 민중 이천 육백만을 애국반의 세포조직으로 하는 유례없는 유기적 조직으로 반도 황민화 운동을 위하여 거의 발악에 가까운 활동을 전개"(林種國, {親日文學論}, 平和出版社, 1963,110면.-인용자)했던 것이다.(25)   이밖에 내지의 思想犯保護觀察所를 중심으로 한 전향자들의 時局對應全朝鮮思想保國聯盟(38)이 있었고, 내선 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정신을 깨닫고 皇道를 받들자는 취지의 皇道學會(40)가 香山光郞(李光洙)이 발기인 대표가 되어 결성되었으며, 41년 8월에는 삼천리사 주최의 臨戰對策協議會가 개막되었으며, 興亞保國團準備委員會(41)와 朝鮮臨戰保國團(41)이 황국정신 앙양과 근로 보국을 취지로 각계 인사를 망라하여 결성되었다.(26)  43년 4월에는 朝鮮文人協會, 朝鮮俳句作家協會, 國民詩歌聯盟 등의 해산에 의해 발족한 조선문인보국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에 세계 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하고자"한 이 단체에 兪鎭午·李光洙·柳致眞·崔載瑞·金億·盧天命·金璟麟·方仁根·鄭人澤·李泰俊·金南天·李無影·趙容萬·鄭飛石·李軒求·林和·白鐵·安含光·洪曉民·金基鎭·李源朝·鄭芝溶·金鐘漢·朴泰遠·異河潤 등이 가담하였다. 이 保國會는 日皇이 항복 방송을 하던 그날까지 "皇道 世界觀을 顯現"하기 위해 전력하였다.(26)  1941년 말 <<국민문학>>이 간행되기 직전의 출판계는 암담했다. <<문장>>이 폐간되고 <<인문평론>>도 <<국민문학>>으로 轉身하는 과정에서 간행이 중지되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창작활동이 사적인 연계를 이어나갈 만했는데, 실질적 암흑기 단계에 돌입한 시초였다. 20여종의 잡지가 통폐합되어 오로지 <<국민문학>>으로 이어질 때까지 창작계는 적적했다.927)  1941년 일제는 총력전이란 이름아래 문화면에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해 5월 제1회 잡지통제로 <<四海公論>> 등 21종의 잡지가 폐간되고, 이것들을 통합하여 나타난 것이 <<국민문학>>이었다. 당시 용지 기근으로 부득이 했다고는 하지만, 이 조치는 당국의 정책이었고 내적으로는 잡지통제에 의해 조선문단을 장악하고 혁신의 미명 아래 시국에 동조하는 잡지를 만들어보겠다는 의도였다. <<국민문학>>의 주필 최재서를 군 보도부 손에 넣고 조종만 잘한다면 한국문예의 임전태세는 성공한다고 본 것이다.(28)  창작용어에 일본어가 침식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문학>>에서부터였다. 처음 계획은 연 4회는 소위 국어판(일본어판), 연 8회를 언문판(한글판)으로 간행할 예정이었으나, 친일적 열성을 보이기 위한 주필 최재서는 한글판은 2회에 그치고 용어도 일본어로 바꾸고 말았다. 최재서가 문화적 민족적 반역자가 된 것은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필진은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고, 3분의 1정도가 일인이었다.(28)  문학작품의 시국화는 당시 문인에게 가해진 굴레였다. 1941년경까지 순수작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발표하는 데 많은 부담이 되었고, 군의 감시를 받으며 잡지의 발행인의 고뇌는 심각한 것이었다. 편집후기의 논설문 속에는 직접적으로 고통을 호소한 것이 非一非再했다.(29)  시국적인 문화정책으로 점점 좁혀 들어가는 당시의 문화계가 이 나라 문학을 암흑기로 끌어넣은 과정이었다.(30)  한국문화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있어 그 선봉 기수의 역할을 한 것은 言論彈壓이었다. 식민지 정책의 급선무가 언론·집회·출판 등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입과 귀와 눈을 막아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31)  신문지법(1907년-인용자)과 출판법(1909년-인용자)으로 한일합방 전부터 언론·출판을 탄압해 왔던 銃監府는 합방과 더불어 언론·출판물을 모조리 폐간시키고, 그들의 기관지를 통하여 침략정책을 강행했다. 모든 출판물은 원고의 사전검열과 내납검열의 이중 관문으로 인하여 이 당시의 출판업 경영이란 일종의 문화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日帝 관헌은 민족정신의 앙양이나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불복을 탄압하기에 혈안이 되었고, 전반적인 민족문화 말살을 목표로 온 신경을 여기에 경주하였다. 간혹 검열자의 소홀로 민족적인 글이 사전 검열에서 통과되는 경우가 있어도 간행 후에 판매 금지 또는 압수 소동이 일어나 오히려 피해가 더 컸으므로 영세한 민족자본으로 근근히 이어가던 출판인에게는 막대한 손실을 주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민족적 항거가 일어나자 일제는 종래의 폭압적 무단통치로부터 문화정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아래 다소 유화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언론과 출판의 자유도 약간 허용된 듯 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발행을 보게 되었고, 신문지법에 의한 언론잡지 <<開闢>>을 비롯하여 <<東明>> <<朝鮮之光>> <<新天地>> <<新生活>> 등도 발행되었다. 그러나 문화정치란 실상 일제의 음흉한 침략전쟁이 한층 더 노골화된 것으로 한일간의 융화정책에 의한 동화공작에 착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33)  이처럼 한국인이 경영하는 모든 언론·출판사업은 온갖 압력에 시달렸는데 더욱이 한글로 발행되는 우리 민간지는 민족해방 내지 경제 혁신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사회주의의 필치로써 일제의 치안을 방해한다 하여 빈번히 발행정지 처분을 당했다.(35)  검열 악법으로 허덕이던 출판업계는 경무청의 눈치를 보며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당시 출판물 검열의 가혹상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은 이른바 '벽돌신문' 용어의 출현이다. 신문의 판을 짜 놓고 그것을 박아서 경무청의 검열을 받는 데 얼마나 많이 붉은 줄로 삭제를 하는지 그대로 판을 깎고 인쇄해 내면, 활자를 엎어놓은 모습이 마치 벽돌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서 생긴 말이다. 그뿐 아니라 총독부에 납본하는 당당한 간행물의 발행인으로 서명을 한 경우에는 2·3개월의 경찰 신세는 각오해야 출판이 가능했다.(36)  당시의 잡지 중 오랫동안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것은 <<開闢>>이었다. 이 잡지를 대상으로 잡지 탄압의 양상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색채나 독립사상의 고취 등을 무조건 단속 대상으로 삼았고, 또는 총독정치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 민족에 대한 비방 등을 단속 규준으로 하다가 1924년경부터는 사회주의 기사에 대한 단속으로 변해 탄압정책이 더욱 가중되었다.(40)  1920년 5월 20일 신문지법에 의하여 발행이 허가된 <<개벽>>은 같은 해 6월 25일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고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로 발행 정지를 당할 때까지 전후 34회의 판매금지와 정간 1회, 벌금형 1회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개벽>>은 창간호로부터 난산을 거듭했는데, 창간호가 금지 처분을 받아 號外를 발간하려 했으나 그것도 여타 부분에 또다시 삭제를 가하여 임시호로써 겨우 출간되었다.(40)  이렇게 2차의 시련을 겪고 창간호는 임시호로 겨우 햇빛을 보았다. 창간호에서 삭제 당한 金起田 작 <금싸락>과 <옥가루>를 다음에 들어본다.     금싸락北風寒雪 까마귀 집 貴한 줄 깨닫고 家屋家屋 우누나!有巢不居 저 까치 집 잃음을 부끄러 可恥可恥 짖누나!明月秋堂 귀두리 집 잃을까 젛어서 失失失失 웨놋다.    옥가루黃昏南山 부엉이 事業復興하라고 復興復興 하누나!晩山暮夜 속독새 事業督促하여서 速速速速 웨이네!驚蠻 만난 개구리 事業 저 다하겠다 皆皆皆皆 우놋다!  앞의 <금싸락>은 조국을 잃은 개탄이 동물에 의인화된 것이고, <옥가루>는 단순한 계몽 격려의 시라고 볼 수 있으나, <금싸락>과 같이 실렸기 때문에 조국광복사업을 상징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창간호의 압수 조건 중에는 표지의 호랑이도 문제되었다. 버티고 서 있는 호랑이의 雄姿는 독립사상을 나타낸 것이니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상징한 것이 아니냐고 불온시한 것이다.(41)  3·1운동 후 많은 잡지가 나왔으나 친일 어용잡지를 제외하고는 그 수난상이 거의 같았고, <<開闢>>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43)  1939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부터 한국에 대한 정책은 강경 일로는 변해, 민족사상을 말살시키고 일본정신을 주입하려는 이른바 皇民化 운동에 혈안이 된 때요, 문학은 물론 고유문화 전반에 걸쳐 위축되던 시대라 <<文章>>誌를 최후로 어용지 일색이 되었다.(43-44)  1940년에 들어서면서 문화적 각종 탄압은, ...군 보도부와 총독부 도서과에 의해 진행되었다. 직접 간접으로의 탄압은 헤아릴 수 없어 당시 문인들을 질식 직전에 몰아넣었던 것이고, 자의든 타의든 그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1940년 3월 23일 총독부 경무국장은 담화로 [風俗警察取締要項]을 발표하여 사생활까지 탄압할 구실을 만들고, 전시 국민생활체제라는 틀에 넣어 戰時的 인간형을 만들려 했다.(44)  작가의 문학관에 대한 시국적 세뇌 방법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4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종 탄압은 사실 황민화에의 세뇌 방법이었다. 당시 잡지에 수록된 좌담회 기사나 논설의 대부분이 직접 간접으로 이에 대한 방편이었다. 법에 의해 객관적으로 제도화한 이외에 잡지 기사를 통한 정신개조의 방법이 심리적 호소의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44)  그러나 한편 국어 말살정책이 치열할수록 뜻 있는 한국인들은 한글 출판물에 대해 점점 애착심이 높아갔다. 한글로 된 것은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날개가 도친 듯이 팔렸고, 서점 창고에 뒹굴던 유행가 나부랭이도 남지 않았다. 특히 역사물의 인기는 굉장하여, 崔南善의 {故事通}은 순식간에 절판이 되었고, 더욱이 만주 등의 외지에 있는 동포들은 극성스러울 정도로 사들였다. 이것은 일종의 무언의 저항이었고 애국심의 발로였다.(45)  공적인 의사소통은 완전히 일본어로 영위되었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일본어가 주된 용어로 통용되었다. 우리말을 말살하려는 여러 가지 정책을 다 枚擧하기 어려우나 공공기관의 벽에 '國語常用'이란 표어가 붙어있고, 일상생활에서까지 일본어상용을 강요하고 있었다. 필자의 경우도 1928년 당시 보통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1945년까지 23년간 일본어로 교육을 받아왔는데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내나라 말이 아닌 일본어로 되었고 생활용어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어로 된 창작품이 그렇게 심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물론 우리말이 점점 박대를 받고 사라져 가는 현상을 마음속으로 탄식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당시의 여건이었다고 체념하는 편이 많았다.(46)  말과 문자를 잃는 슬픔이 알고 보면 최대의 민족적 비극이었으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일본어를 통용어로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어로 된 창작물은 올 것이 온 것이요, 당시의 대세였다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의사전달이 일본어요, 생활용어의 구실을 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본어 창작물을 한국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46)  그러므로 일제 치하에서 일본어로 창작된 문학작품은 그것이 당대의 불가피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파생된 거의 유일한 창작수단이요, 구차하나마 명맥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히 한국문학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온당하게 자리매김되어야 한다.(46)  일본어 상용정책은 일본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근간이 되는 것으로 일본에 동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여 '국어상용'이라는 표어가 어느 기관이고 첨부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도처에서 말이나 글로 강요되었던 것이다. 필자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 생도 명단을 인쇄해 붙이고 한국말을 쓰는 학생이 있으면 그 명단 밑에 표를 하도록 해서 단속했던 기억이 있다. 방마다 기둥에 '국어상용'의 표가 없는 곳이 없었다. 여기에 아첨 동조하는 글들이 보이기도 했다.(47)  이에 발맞추어 <<국민문학>>지는 창간 초기부터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모색하였다.(47)  창작 용어로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당했을 때 작가 중에는 창작품을 낼 만한 능숙한 일본어 실력이 없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작품을 쓰지 않으려는 계책도 들어 있었다. 작가 평론가들이 대부분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작품을 써낼 때 거의 일본 작품을 써내지 않은 李無影같은 작가도 있었다. 농민소설은 농민들이 쓰는 말이 전부 일본화하지 않아서 사투리나 비어 또는 농촌에서 쓰는 특수용어들, 다양다색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가 백성들이 쓰는 말을 통일해서 일본어와 같이 만들지 않으면 농촌을 상대로 소설은 쓰기 어렵다고 한 것은 당연했다.(55) 특히 농촌소설에 있어 나라마다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 표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李無影의 항변은 사실을 뛰어넘은 저항성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56)  일제는 한국문화의 뿌리를 송두리째 거세하기 위해 그 최우선책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더욱이 개탄스러운 것은 당시의 평론계와 창작계를 각기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최재서와 이광수 등 한국의 대표적 문인들이 일본어 창작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시에 모든 창작란을 일본어로 대치할 수 없었으므로, 한글 창작을 부분적으로나마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최소한의 문학적 양심이었고, 그것이 결국 한글 창작의 명맥을 이어가는 실날같은 고리가 되었다.(56)  일제말 암흑기시대의 문학을 '국민문학'이란 문학 유형으로 규정짓고 있다. 국민문학이란 말이 이때 비로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국민문학>>지의 출현과 아울러 최재서 등이 당시의 문학을 '국민문학'이라 한 데서 일제말기의 문학을 지칭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후, 광활한 만주를 욕심 내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그들은 그 여세를 몰아 1937년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득세한 일본 군벌들은 초기의 戰果에 힘입어 그 세력은 충천했다. 살벌한 칼날 앞에 온갖 문화는 위축되었고, 더구나 식민지 한국의 문화는 風前燈火 같이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어느 시대고 전쟁 앞에 이성이나 감정은 마비되는 것이 상례지만, 오로지 전승에 혈안이 된 와중에서 문학자에게 냉정을 되찾으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전쟁의 흥분 속에 같이 휩쓸려 침략군에게 갈채를 보내는 문학자들이 많아졌다. 이런 작가래야 표본적인 戰時文學家로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광적인 침략전 찬양이 당시 작품의 표본이었다.(57)  동양을 제패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전체로 하고, 일본 정신에 의해 동양 전체의 이상을 통일시켜야겠다는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이 국민문학의 요건이 되고 있다.(59)  1939년 10월에 창간된 <<인문평론>>은 1941년 4월까지 통권 16권으로 발간되고, <<국민문학>>에서 다시 재생된 잡지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 잡지사상 특수한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환경이 침략전의 결정이었다는 면도 그렇거니와 문예정책면에서 친일문학이 발로하기 시작한 점, 또 주간이 최재서라는 비중 있는 평론가였고 한편 평론 전문지로서의 기치를 들고 나온 것도 특이한 일이었다.(65)  <<국민문학>>지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간행되어 종전 직전까지 계속한 잡지로 <<신시대>>가 있다. 민족문학이 암흑기에 접어든 1941년 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간행된 이 잡지는 발행자가 박문서관의 주인 盧益亨(瑞原益亨)이라는 출판인이기 때문에 용지 기근을 극복할 수 있었고, 침략전 찬양이라는 그 社旨 때문에 잡지 통합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1941년 9월에는 盧益亨은 사망했으나, 자제가 계승하여 자영하는 大東印刷所에서 근근히 간행을 했던 것이다. 이 <<신시대>>는 <<인문평론>>이나 <<국민문학>>같이 잡지로서의 격조가 높은 것은 아니었고, 전쟁을 찬양하고 친일을 노골화한 잡지였다. 평론가 최재서의 안목과 출판사 주인의 그것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잡지는 일본인 필자가 많이 끼어서 시국적인 논설 쪽으로 그 성격을 몰고 갔다.(70)  1930년대 말경부터 친일적인 口號나 논설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194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친일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술한 유형 분류에서 보듯이 극심한 경우 광적인 전쟁찬미로 거의 이성을 잃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한편 일부 작품들은 평온한 가운데 친일적인 작품을 발표한 것들이 있었다.(72)  전쟁 발발 시초에는 문화 정책에 끼친 영향은 별로 없었다. <<문장>>이나 <<인문평론>> 등에서 순수한 소설들을 어렵지 않게 발표하여 40년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심중에는 靜中動의  파문이 차차 일기 시작했고, 그것이 눈덩이처럼 점점 커 가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72)  당시 가장 두드러진 전쟁문학의 성격은 생사를 초월한 국가관, 즉 군국주의자들이 강요하는 자기희생을 통한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봉사였다. 그 결과 戰死만이 천황을 받들고 국가를 위하는 영광된 길이라고 생각한 군국주의 사상이 국민사상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102)  1942년경부터는 이성을 잃은 채 전쟁을 찬미하고 일본정신을 부르짖는 논설·소설·시 등이 쏟아져 나왔고, 그 정도가 광적일 정도로 격렬했다. 광적인 전쟁찬미는 당시 軍 報道部에서 제일 바람직하게 생각한 제1급의 작품에 해당한다. 이런 작품의 전형적인 것이 鄭人澤의 <돌아보지 않으리>(카에리미나세지-인용자)(<<國民文學>>, 1943, 10.-저자 각주)였다 표제부터가 출전하면 뒤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인 것이다. 당시 중견작가였던 그가 이유는 여하간에 이런 작품을 써야 했다는 사실은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103)  (일본정신, 즉 군국주의를 찬양한 표본적인 작품이었다-105)  전쟁찬미에 적극적인 소설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일본정신의 함양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선전물과 같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105)  당시는 정오의 싸이렌과 더불어 모든 활동은 정지되고 제각기 그 자리에서 默禱를 하라고 강요했다. 첫째로는 전승을 기원하는 묵도요, 둘째는 戰死將兵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였다.(110)  초기 침략전이 강세를 보인 무렵에는 지역적 戰勝을 駒歌(謳歌의 오역?-인용자)하는 시가행진이나 밤의 등불행렬이 이어졌고, 이는 마치 전쟁에 완승한 것 같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것은 약한 자의 과시이지만 한편 한국에 있어 더욱 흥행했던 것은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示威였다. 특히 학생층이 동원대상이던 이 시위를 모면할 길은 없었으니 본의든 타의든 젊은 知性은 친일의 굴레를 쓸 수밖에 없었다.(117)  일제의 이른바 聖戰論은 淸日 전쟁 때 우찌무라(內村鑑三)의 '義戰論'이 발단이 되어 나타난 침략을 미화한 논리로써, 이후의 일제의 식민지배에 따른 동양평화론과 결탁한 것이다.(125)  戰時의 문학이 시국에 순응해야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일지 모르나 40년대 한국문학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여건이 가세하여 사정이 더욱 복잡했다. 전쟁찬미의 親日御用作家가 기세등등한 때였지만, 한편 전통문학을 수호해야겠다는 민족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고,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는 나약한 文人群이 상당수 있었다고 본다. 이런 와중에서 軍 報道部의 감시는 날카로웠고, 進退兩難의 궁지에서 작품을 쓴 작가도 있었다. 당시의 잡지가 어용작가들의 발표지였던 것은 사실이나 발표된 작품을 면밀히 검토하면 성격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이 친일적 시국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억지로 강요당해 써진 듯한 작품, 또는 <<國民文學>>誌의 성격을 감안하여 시국적인 색채를 다소 가미한 작품들을 접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修辭的으로 鍍金된 御用을 찾을 수 있다.(130)  이런 시의 창작방법은 감추어진 상징성이 암흑기의 식민지적 작품으로서의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다. 이들 시들에 담겨있는 서정성이 시적 묘사를 갖추면서도 시국에 協從하는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다. 창작수법상 일종의 畸型的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면 이런 성격은 암흑기 식민지문학에서만 볼 수 있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132)  鍍金된 어용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소설작품으로서 우선 특기할 것은 일본인과의 애정을 다룬 작품이다. 전시에 애정물은 금기에 속했으나, 소위 內鮮一體 同祖同根을 구현하는 日人과의 애정일 때는 時局物로서 허용이 되었다.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작가들은 애정물을 썼던 것이다.(132)  그러나 上記作品(이효석의 <아자미의 章>, <<국민문학>>, 1941. 11과 韓雪野의 <血>, <<국민문학>>, 1942, 신년호. 여기서 <아자미의 장>은 비중있는 중견작가 이효석의 작이요, 더구나 <<국민문학>>창간호에 발표되었다는 점등은 당시 소설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인용자 주)에서 日女와의 애정을 다룬 것은 시국물인체 위장한 것에 불과할 뿐, 애초부터 내선문제를 깊이 다루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보여진다....왜냐하면 위의 작품들은 내선일체를 적극 추종한 국민문학이 아니라 작가들이 억압적 현실 속에서 작품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오히려 내선일체를 소재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작품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 성장한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의 근본적 개조를 통한 완전한 '하나 됨'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랑하는 남녀(134)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들을 다루고 있다.(134-135)  즉, 이 작품들은 진부한 애정소설 속에 일본인 여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자국인끼리의 연애보다 이색적인 소재적 신선함을 얻는 동시에 시국에 영합하는 듯한 교묘한 위장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135)  鄭人澤의 <淸?里界常>는(<<국민문학>> 1941. 11, 창간호-저자 각주) 전반부에서 전혀 시국물과 직결되지 않는 인상을 준다.... 이 작품은 기성다운 작자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묘사가 수준급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주인공 부부는 그 동네의 반장일 뿐 아니라 동네의 어려운 일을 보살피는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병을 위해 斷指한 甲乭의 집을 보살피는가 하면 피폐해 가는 人文學院을 회생시킬 계획을 꾸미고 돈을 모금하여 방공호를 건립할 상의도 한다. 이리하여 戰時下 국민으로서의 모범적인 모델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 것이다.(135)  이에 대해 유진오는 당시의 작품평(「국민문학이라는 것은」, <<국민문학>> 1942. 11-저자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작품은 愛國班의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하여 차츰 시국에 대해 눈뜨게 되는 가정부인을 그린 작품으로 솜씨 좋게 매듭지은 것은 퍽 호감이 갔지만 남편 되는 사람의 그 정체를 알 수 없고 남을 깔보는 태도가 마음에 거슬린다. 그는 마치 하나님처럼 높은 곳에서 자기 아내의 거동을 쭉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무슨 자격이 있어 그런 태도를 취하는 지 독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작가는 무슨 주제를 선택해도 파고드는 힘이 부족한 듯하다.(그러나 사실 애국반 열성분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전시 시국물의 모델을 잡은 듯이 위장하고 남편이란 정체 모를 인물을 통하여 드러나지 않은 주제를 암시한 것 같다. 그와 같은 시국물의 모델을 주재하는 남편인 까닭에-인용자)(68-69)  安壽吉의 <圓覺村>은 '滿洲 鮮系作家選'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고, 작자 자신도 일본이 만주에 괴뢰정권을 세우기 이전에 만주에서 半島人先驅開拓民의 생활을 발굴한 작품임을 밝히고 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한국인을 만주로 이민시켜 그곳을 개척하게 했고, 기후가 좋은 반도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으로 삼았다. 작품 첫머리부터 무대는 얼어붙은 만주벌판에 이주하는 白衣民族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한 떠돌이 산사람의 이주이지 만주이주가 아니다-인용자)(136)  이 작품은 만주를 배경으로 개척민의 상태를 묘사하여 <<國民文學>>에 게재될만한 요건을 갖추기는 했으나 실제 내용은 완전히 금녀를 사이에 둔 억쇠와 익상 간의 애정 다툼이라 할 수 있다.(잘 못 읽은 결론인 것 같다-인용자)(137)  農民文學은 우리 문학사상에 비중이 큰 부분으로 국민의 8할이 농민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농촌운동이 민족운동과 결부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이 특히 관심을 두는 대상이기도 했다. 농촌운동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제재를 함부로 손대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155)  친일문학의 주제를 압축하여 말한다면 소위 '皇民化'이다.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일제는 조선인의 참여를 절실히 요구하였으며, 이것이 실제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황민화이다. 이 시기의 작가들에게는 문학을 통해 효과적인 황민화를 추구하도록 강요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작품들이 황민화의 실체와 필요성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하고 있다. 그것이 명분상으로나 실리적으로 옹호되어 나타났음은 물론이다.(167)  친일문학에서는 먼저 황민화의 역사적 당위성이 역설된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갈라졌던 핏줄이 하나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내선동조론이 크게 부각된다.(167)  재미있는 것은 작가들이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연애 또는 결혼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통상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과 조선인의 반일감정이라는 부정적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고난과 역경을 거친 끝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 해결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167-168)  <<국민문학>>의 편집요강에서 첫째로 내세운 것이 '內鮮文化의 종합'이었다. 소위 '內鮮一體', 즉 일본과 한국을 결부시켜 실질적인 내용이 될 수 있는 內鮮文化의 종합을 기도했고, 이 길을 신문화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삼았으며, 한국인의 모든 知能은 이것을 구심점으로 하여 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런 내선일체의 정신을 함양하려면 우선 일본의 소위 '國體明徵'의 일본적 國體觀念을 체득해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국체에 及하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경향을 배척함은 물론이요, 일본의 국체관념을 흐리게 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은 절대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全體主義 내지 군국주의는 이런 논리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셋째로 이런 기본적 자세와 더불어 이것을 선양하기 위한 '국민 士氣의 진흥'이 뒤따라야 했다. 즉, 신체제하의 국민생활에 상응하지 않는 비애, 회의, 반항, 放蕩 등의 퇴폐적 기분은 일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적인 감성은 일절 거세당하고 오로지 신체제하의 국민정신만이 존재가치를 인정받았다. 넷째로 정신적인 무장이 성숙하면 '國策에의 協力'이 요구되었다. 종래의 불철저한 태도를 一擲하고 적극적으로 시국 극복에 挺身한다는 것이다. 점점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제시된 것이다. 특히 당국에서 수립한 문화정책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지지 협력하고 그것이 개개의 생활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168-169)  일제는 전쟁이 고비에 달하자 皇民化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인에게까지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 1938년 2월에 실시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을 필두로 지원병제가 점차 확대되더니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4월에 이르러서는 명백하게 강제적인 徵兵制로 굳어져 무고한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전쟁터로 끌어냈다.(172)  사실 戰場 현지에서 兵隊들의 머리는 단순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무엇을 찾으려는 의도는 이미 사라지고 무명의 많은 군인들이 보여주는 전투행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전장의 문학은 무의식적으로 눈에 비친 군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런 환경에서 어떤 主義에 관계없이 발로되는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개의 병사와 병사간에 싹트는 인간애는 극한상황을 목전에 둔 인간의 참모습일지 모른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전쟁문학을 통한 인간의 모습은 무한한 인간성의 원천일 수 있다. 더욱이 전쟁이란 비인도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그곳에서 참다운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귀중하고 강렬한 것일 수 있다.(177-178)  진정한 의미의 전쟁문학은 전쟁의 정세와 양상의 보고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목적, 특질, 역사적 의의를 파악해야 한다. 우선 한 사람이라도 전쟁의 의의, 목적에 대한 회의가 나타나야 한다.(178)  이 시기의 문학작품은 이미 주어진 관념적 정책적 주제에 국한된 작품들이었다. 종군작가들은 의도적인 주제를 휴대하고 전장에 나아가 종군중의 견문을 형상화했다. 그들의 머리에는 발표금지, 또는 판매금지라는 부자유한 작품활동이 항상 견제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의 전장문학에는 일정한 관념이라는 안경 너머로 인생을 비춰보는 관념 우위의 작품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게 어떤 외적 역학작용에 의해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 참다운 인간생활이 표현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때에 진정한 전쟁문학의 본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179)  40년대 초는 민족적 비운의 시기였다. 저항할 능력이 없어 忍辱을 감수해야 했던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자연 締念과 悲嘆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원망한다는 뚜렷한 대상을 내세우지 못하고 그저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침략전을 聖戰이라고 狂態를 부리는 일부 문인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凋落의 國運을 노래하는 글들이 약간 있었다. 抵抗詩를 쓸만한 용기는 없으나 북받쳐 오는 民族魂에 조용히 눈물을 흘린 구절들이었다.(184)  日帝末 暗黑期 文學은, 저자가 특히 그 개념을 정립한 바의 용어로서, 일본의 침략 전쟁이 더욱 가열되고 한국 내에서 <<인문평론>>이 창간되는 등 친일성 문학이 대두되는 1939년  경부터 일본의 침략전이 종말을 고하는 1944년 중반까지의 문학을 가리킨다.(187)  日帝末의 우리 사회는, 周知하는 바와 같이,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써, 한일 합방 이후 계속 핍박을 받아온 우리 문학 또한 전통적 고유 문학의 여맥을 이어갈 기력이 다하여 질식 직전의 암흑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우리 文學史에 가장 수난에 가득 찬 시기라 할 日帝 말기는 그러나 문학사적 계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그 정리가 절실히 요망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비록 치욕적 상흔의 유산을 남긴 시기라 하더라도, 일관성 있는 우리 문학사, 공백기 없는 사적 연계성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문학적 내용을 비롯하여, 우리 문학이 어떻게 핍박을 받고, 어떤 형태로 소멸해 갔으며, 어떤 형태로 잔존했던가를 반드시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187)  일제는 1932년 1월 괴뢰정권인 滿洲國을 건설, 대륙 침략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본은 1931년 9월 의도적인 도발로 滿洲事變을 일으킨 다음, 1937년에 일어난 中日戰爭을 전후하여 일본 軍國主義는 정치를 주도하게 되고, 마침내 1941년 太平洋戰爭을 일으켜 5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러한 전쟁을 통해 한국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兵站基地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감내하기 어려운 핍박과 착취를 당하게 된다. 이 같은 15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意識構造 또한 크게 변화한다. 1920년대의 널리 확산되어 있던 저항 의지는 점차 사그라져 일부 뜻 있는 사람들만이 체제저항의 불씨를 키워간 데 반해, 대부분의 경우 대체로 체제에 동조하고 시국에 순응하는 쪽으로 행동 방향을 정하게 된다. 거리마다 전쟁을 부추기는 격문이 나부끼는 가운데 전쟁이 가져온 참혹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이 한국인의 참모습이었다.(188)  이 기간 동안 일본인의 한국인 장악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져, 우리 민족은 주체적 인식을 갖게 되기는커녕 모든 한국적인 전통이 모두 말살 당하고 점점 일본화 되어갔다. 內鮮融和라는 온건한 말로 시작된 皇民化運動은 內鮮一體로 격화되고, 國體明徵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과 한국이 동등한 지분을 지니는 입장에서의 一體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적인 것들 용해 흡수하여 皇民化 일색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188)  皇民化의 방편은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황국신민의 서사」같은 것을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제창하게 만들었고, 의식이나 간행물 일체에 빠뜨리지 못하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일본에 고유한 신도정신을 보급하고 숭배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황민화를 성취하려는 것으로, 이른바 '神社參拜'를 들 수 있다. 또한 한국 사람의 姓까지 없애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치게 만드는 '創氏改名制度'도 이 시기 황민화운동의 구체적 방법이었다.(188-189)  또한 일본은 1943년 '지원병'제도를 실시, 우리의 젊은 청년들을 전장에 내보내기 시작했고, 1944년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더 많은 청년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전장으로 내몰았으며, 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부녀자를 차출, 전장의 위안부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처참한 현실 속에서도 친일파를 비롯하여 체제에 순응하고 동조하던 자들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굳혀갔다.(189)  당시의 문학에 영향을 준 문화적 배경은 문학 작품의 時局化로 요약된다. 당시 문인들에게 가해진, 시국화라는 이 굴레는 문화의 일반성을 희석시키고 정책적 요구에 따른 특수한 양상을 드러나게 했는데, 침략전의 전초적 현상으로서의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189)  한국문화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있어서 그 선봉 기수의 역할을 한 것은 언론 탄압이었다 .식민지 정책의 급선무가 언론, 집회, 출판 등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입과 귀와 눈을 막아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91)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우리 국민들의 비분강개하는 우국충정이 기세를 올리자 총독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907년 光武 新聞紙法을 제정한 것이 우리 민족의 언론 및 출판 탄압의 첫 조치였다. 또한 1909년에는 出版法을 제정하여 출판의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고 언론을 탄압하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이다. 新聞紙法과 出版法으로 한일합방 전부터 언론 출판을 탄압해왔던 統監府는 合倂과 더불어 언론 출판물을 모조리 廢刊시키고, 그들의 기관지를 통하여 침략정책을 감행하였다.(191)  1919년의 삼일운동으로 문화정치라는 이름의 허울좋은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던 일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긴장을 유발하고는 揭載制限令이라는 檢閱制를 철저하게 시행하여 더욱 우리의 언론 출판 문화 행위를 통제하는 한편, 항일사상과 한국민족사상에 대한 억압조치를 강화하였다.(191)  이 시기의 문화 탄압은 군 보도부와 총독부 도서과에서 주도적으로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1940년 총독부 경무국장 명의로 발표된 '風俗警察取締要綱'이라는 담화는 그 내용이 국민의 사생활까지 탄압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전시적 인간형을 만들려 한 것이다.(191)  이 시기의 가장 치명적인 문학적 탄압의 증거로는 우리말 사용의 금지에 관한 것이다. 공적인 의사소통은 완전히 日本語로 이루어졌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일본어를 통용시키는 일본어 상용정책이 수행되었다. 우리말을 말살하고 일본어를 어느 자리에서나 사용하게 하려는 정책이 바로 이것이며, '國語常用'이라는 당시 어느 공공 건물이거나 간에 벽에 붙은 표어는 단순히 요식적인 것만 아니요, 전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할 만큼 영향력이 큰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특히 암흑기 시대에 일본어로 창작된 문학작품은 그것이 당대의 불가피한 사회적 조건에서 파생된 거의 유일한 창작수단이요, 구차하나마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히 한국문학의 범위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온당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191)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일본어로 제한하는 정책은 바로 이어서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창작시키는 데로 진행되었다. 식민지의 언어정책은 문학정책과 맞물려 친일을 적극적으로 찬양 고무하는 정략적 특징을 띠고 문학창작을 이끌어 가도록 유도되었다.(192)  문학이 일정한 목적의식에 의하여 침식당할 때 문학의 예술성과 독창성이 소멸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제말 암흑기의 문학은 전쟁 완수라는 시국적 요청을 충실히 반영, 어떻게 하면 이에 공헌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았다. 이에 따라 문학은 침략전쟁의 성공적 완수라는 정책적 목적을 위해 사역 당하게 된다. 일본이 대륙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戰勝에 혈안이 된 분위기 가운데 전쟁의 흥분 속에 휩쓸려 박수갈채를 보내는 우리 문학인들이 속출하였다.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든 또는 강요된 것이든, 이 시기의 상황은 광적인 침략전을 찬양하는 작가만이 戰時文學家로 살아남을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192) 분위기였다.(192-193)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崔載瑞는 국방체제하에서의 문학은 시국에 맞는 문학관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국민문학'의 이론적 기반을 담당하였다. 그는 국민문학이 우선 일본국민의 이상으로서 동양을 지도해야 할 문학이요, 한마디로 '일본 정신에 의해 통일된 동아문화의 종합'을 주장하였다. 그는 주로 국민문학이라는 기준 아래 문학의 원론에 관한 글들을 발표, 앞장서서 친일문학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문학원론'에서 敎訓說과 快樂說을 절충한 순수문학의 이론을 내보인 바 있는 그는, <<국민문학>> 창간호(1941.11)의 「국민문학의 요건」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변신을 하나의 문학적 이념으로 교묘히 호도하고 있다. 이 글은 1) 국민문학은 특수한 문학이 되는가, 2) 작가의 국민의식, 3)주제의 문제, 4) 비평기준의 문제, 5) 국민성격의 형성력으로서의 문학 등 모두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재서는 이 글에서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비상시"의 상황에서 당대의 문학이 지향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戰時體制에서의 문학이란, 유럽의 문학적 전통에 뿌리를 박은 "근대문학의 한 延長"이 아니라,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담은 대표적인 문학이며, 따라서 군국주의의 이념을 그 전제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과거에 가치를 부여했던 '純粹意識', '個人意識', '個性', '敎養' 등이 '국민적 이상', '국민의식', 국민생활' 등으로 둔갑하는 이러한 그의 변신은 무주체적 관념적 현실 수용의 나약한 自己變身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이 시대의 암울한 정신사적 파산의 한 양상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193)  침략당한 植民地人으로서 지배자가 내세운 '국가'라는 허구 속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그 從屬論理에 따라 가치와 이념을 추구하려 한 최재서의 '국민문학' 이론은 백철·박영희 등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고, 그리하여 이른바 國策文學이 이 시대를 주도하고, 그 문학적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193)  최재서에 의해 그 서막이 열린 친일문학의 준동 양상은 '친일 잡지의 등장'과 '친일 문학의 등장'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는데,...(193)  40년에 들어오면 본격적인 친일문학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30년대 말경부터 친일적인 구호와 논설들이 등장하고, 전시하의 시국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강요하는 이른바 <<국민문학>>이 대두함에 따라 당시 우리 문인들의 심중에는 靜中動의 파문이 일기 시작했고, 태도 결정에 있어 심각한 번민과 갈등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당시 문단의 경향은 적극적으로 시국에 협력하거나, 붓을 꺾고 지조를 지키거나, 여러 가지 압력에 굴복하여 전향의 대열에 뒤따라가는 경우 등으로 나뉘지만, 그러나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또는 생존의 방편이든 出世 揚名의 수단이든, 대부분의 문인들은 친일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의 창작태도를 바꾸고 '전향'을 긍정적으로 다루거나, 침략전을 破邪顯正의 聖戰으로 미화하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195)  전쟁말기, 日帝는 생사를 초월한 국가관, 국가에 대한 자기 희생과 적극적인 봉사를 강요한다. 그 결과 戰死는 곧 천황을 받들고 국가를 위하는 영광된 길이라는, 軍國主義 사상이 국민 정신의 기조를 이루게 된다. 이에 따라 이른바 '국민문학'은 聖戰에의 참전을 부추기거나, 지원병들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또는 일본 정신을 함양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戰勝을 위한 '죽음의(198) 행진'을 미화해서 이를 강요하거나 '鬼蓄美英'을 부르짖기에 이른다.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잃은 親日群像들은 반도 출신들에게도 성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크신 天皇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一死'뿐이라는 狂氣를 드러낸다. 이 시기의 광적인 어용문학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狂的인 戰爭讚美의 문학, 다른 하나는 鍍金된 御用으로 친일을 은근히 조장하는 경향의 문학이다.(198-199)  1942년경부터 이성을 잃은 채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하고 전쟁을 찬미하는 시와 소설, 논설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는 광적인 열의로 親日이란 목적의식을 성취하려 했다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199)  鄭人澤의 <돌아보지 않으리>는 당시 軍 보도부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한 전형적인 어용 작품이다. 표제부터가 일본을 위해 出戰하면 목숨을 바치고 되돌아보지 않겠다는 맹세의 詩句이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戰士의 희생을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미화시킨 작품이다.(199)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 중에는 전시체제하의 시국적 색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광적인 전쟁 찬미'작품들과는 그 성격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작품, 다시 말해서 억지로 강요당해 써진 듯한 작품들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修辭的으로 '鍍金된 御用'으로 볼 수 있는데, 광적인 전쟁 찬미, 적극적인 친일작품은 아니지만 시국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 범주의 작품은 그래도 나름대로 서정성도 확보하고 있고, 구성이나 묘사 등 서술 기법이 수준 이상이라 할 수 있는데....(200)  <<인문평론>>과 <<국민문학>>을 무대로 전개된 일제 말기의 評論은 戰時體制의 시국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 시기의 평론은 이들 잡지의 발간 취지와 편집 방침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한다. 문학론과 시국론을 적절히 안배하여 게재한 <<인문평론>> 초기의 평론은 주로 문학의 순수성을 표방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시국적인 논설들이 대두하면서부터 그리고 <<국민문학>>에 이르러서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거나 戰時下에서의 문학의 역할을 역설한 것들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른바 '국민 문학론'이 그것이다. '국민문학론'은 '일본 정신'과 군국주의의 구현, 국가관의 확립, 同祖同根論, 銃後文學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최재서는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앞장섰다.(201)  일제말기 문학의 성격은 이른바 황민화 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국민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문학'은 식민지 지배체제라는, 그것도 戰時體制라는 특수한 정치적·사회적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일본 정신을 함양하고 군국주의를 고무 찬양하기 위해 급조된 官制 御用文學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국민문학'은 본질적으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고 기생함으로써 존재가 가능했고, 이 점에서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친일 문학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은 그 주제와 제재, 그리고 창작 동기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전반적인 성격은 '內鮮一體의 皇道文學'으로서, '문학적 이념의 파탄'을 드러내 결과적으로 '민족문화 전통의 昏迷'를 가져온 '畸形的 戰時文學'으로 규정할 수 있다.(203)  일제말기 문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황민화'의 당위성 강조에 있다. 이 시기의 친일문학은 따라서 '內鮮一體의 政策文學'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내선일체'의 문학, '國體明徵'의 일본적 국가관을 체득시키는 문학, '국민사기의 진흥'을 고무 찬양하는 문학, 그리고 '국책에 협력'하는 문학을 지향했다.(203)  지원병제·징병제를 실시, 조선인들을 전쟁에 강제 동원한 일제는 일본적 국민의식의 앙양, 지도적 문화이론의 수립, 국민문화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이른바 '국민문학'운동을 강요하고, 친일문학인들은 이 같은 시국에 편승하여 이를 광적으로 전개해 나갔다.(203)「국민문학의 요건」을 발표, 친일 어용문학의 길을 연 최재서가 그 대표적인 문인인데, 이들은 植民地人이면서도 일제가 내세운 '국가'라는 허구 속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이 종속 논리에 따라 문학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문학적 이념의 파탄을 자초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시기 문학이(으로 하여금-인용자) '國策文學' 또는 '銃後文學'의 성격을 띠게 한다.(203-204)
金晙, 「일제하 노동운동의 방향 전환에 관한 여구」  일제하 한국의 1920년대말~30년대초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먼저 사회·경제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에 대한 수탈 정책이 산미 증식 계획 중심의 수탈 정책에서 독점 자본의 본격적 진출과 병참 기지화를 내용으로 갖는 식민지 이식형적 공업화릎 통한 수탈 정책으로 이행하던 시기이며, 공황을 전후로 하여 일제가 농민에 대한 수탈과 노동자에 대한 식민지적 노동 조건의 강요, 그리고 민족적 중소 기업 및 토착 수공업에 대한 수탈·파괴를 한층 강화하던 시기였고, 그리하여 빈궁화하여 몰락한 농민이 도시로 나와 노동자나 도시 빈민으로 퇴적되거나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고 그도 안 되면 일본이나 만주·간도 등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는 과정이 한층 강화되고 가속화되었던 시기였다.(11)  한편 장기적으로는 일제가 1920년대의 독점의 확립과 더불어 나타난 만성적 불황과 자국내의 민중 운동의 격화,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민족 해방투쟁의 고양 등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이 위기가 1920년대의 공황을 계기로 한층 심화되자 자국내의 민중운동과 식민지의 민족 해방투쟁에 대한 파쇼적 탄압과 만주와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통해서 이 위기를 극복해보려고 광분하던 시기이다.(11-12)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식민지 한국의 민족 해방투쟁은 이 시기에 커다란 전환을 겪게 되었다. 즉 이 시기에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의 창립과 해체가 있었고,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그 재건 운동의 맹렬한 전개가 있었으며, 노동자의 파업 투쟁과 농민의 소작쟁의, 그리고 항일 학생운동이 크게 고양되었고 또한 격렬한 양상으로 발전해갔다. 또한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라는 조건하에서 합법 운동의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면서 한편으로는 일부 계층과 운동가들이 변절하거나 개량주의화되어갔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비타헙적 운동은 지하화·비합법화되어가는 분화 과정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운도의 목표와 방법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의·논쟁이 전례없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그것이 운동의 전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었다.(12)  이 시기에 노동운동 역시 이러한 상황적 조건 속에서 민족 해방운동의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서 전체 운동 및 여타 부분 운동들과 활발히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크게 고양되고 또한 커다란 전환을 겪고 있었다. 노동운동의 고양과 전환은 노동운동의 이념·이론·조직·구체적 투쟁양상 등 모든 측면에서 나타났다. 노동운동의 전환(방향전환)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 노동운동의 특징을 다소 단순화시켜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 대중적 파업투쟁의 경제투쟁·비폭력 투쟁·합법 투쟁 일변도에서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결합 및 폭력적 비합법 투쟁으로의 점차적 이행; ② 합법·공개 조직 중심의 운동에서 비합법·지하 조직 중심의 운동으로서의 전환; ③ 볼셰비키적 노동운동론(이념과 이론)과 노동운동의 결합.(12)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뉘이질 수 있는데 제1시기는 1927년(정우회 선언 직후)~1928년(12월 테제 직전)까지이며(이렇게 시기 구분을 하는 것은 본고가 방향전환론의 변화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그 자체에서는 원산 총파업이 분수령이고 보아야 할 것이다.-저자 각주) 제2기는 1929년~1931년(태로 10월 서신 직후)까지이다. 필자는 제1기를 방향 전환론의 대두기, 제2기를 본격적인 방향전환기라고 본다.(15)  노동운동에서의 방향전환론은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전환의 영향을 받아 그것과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전개되었다. 이 대두기의 방향전환론은 1920년대 전반까지의 노동운동의 발전과 한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본격적 도입, 민족협동전선 내부에서의 헤게모니 문제의 대두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전개되었다.(16)  한국의 근대적 노동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1910년대와 그 이전에도 노동자조직이 있었고 노동쟁의도 간혹 발생했지만 대부분의 쟁의는 비체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에 머물렀고 노동자조직도 대체로 상호 부조와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적·분산적·비투쟁적인 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식민지 한국 민중의 정치적 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세계적인 혁명적 신사조가 한국에도 밀려옴에 따라 노동운동 또한 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이념·조직·쟁의 등 모든 측면에서 근대적인 성격을 갖는 노동운동으로 성장하였다.(16)  1920년대에 새로운 발전 단계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당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급속히 전개되던 사상운동, 즉 사회주의 사상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 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는 그 창립 당시부터 민족주의적 이념과 함께 사회주의적 이념을 은연중 포함하고 있었으며, 특히 기관지 『공제』를 통하여 조선노동공제회의 회원 중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노선에 입각한 노동운동'을 주장하고, 사회주의를 신사상으로서 선전하였다.(16) 1922년 10월 조선노동공제회를 탈퇴하고 나온 급진적인 좌경 인테리겐차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노동연맹회는 출발 당초부터 사회 개량주의의 배격을 선명하게 내걸고 사회 혁명주의로의 전환을 표방했다. 중앙의 전국적 노동단체의 활동, 그리고 그들에 의해 야기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의 사상 투쟁 등의 영향하에서 지방의 노동운동가와 노동단체들도 개량주의·민족주의 대 사회주의의 사상 투쟁과 분열 등을 경험하면서 점차로 '상호 부조·계몽 그리고 직업소개를 목적으로 한 단체'에서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 변혁'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4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이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의 실현을 목적한다'고 선언하고 출범할 당시에 이르르면 사회주의 사상은 조선의 노동운동에 있어서 이념상 완전히 독점적인 직위를 차지하게 된다.(식민지 시대 한국의 노동운동에 사회주의적 이념 이외에 다른 조류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특징적이다. 이에 대해 김봉우(1985: 219)는 "특히 조선의 노동자 계급은 대체로 제3세계 식민지와 약소 민족이 자기의 해방을 절규하면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이자 소련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상 유파의 영향을 받을 틈도 없이 사회주의적 영향에 휩쓸렸다"고 말하고 있다.-저자 각주) 그러나 이 시기의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농민 대중과는 분리된 소부르조아적 급진 인테리겐차들의 전유물이었으며, 그것조차도 하나의 사회 사상으로서의 체계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당시의 사회주의 사상이란 아직 "그 본질적인 이론체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불충분한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뒤섞인 막연한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방향 전환기의 한국 공산주의자 중 대표적 이론가로 꼽히는 李鐵岳(한위건의 가명)은 이 시기의 이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것(초기의 조선 무산계급 운동-인용자)은 조합주의·공산주의 및 식민지 부르조아 급진주의의 일종 혼합형이었다."(이철악, 「조선 혁명의 특질과 노동 계급 전위의 당면 임무」, 『계급투쟁』, 창간호, 1929년 9월, p. 17)-저자 각주)한편 노동운동의 역사가 짧아 나름대로의 운동 경험이 정리되지 못했고 사회주의의 도입도 아직은 학설의 소개에 그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어떤 노동 운동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못했다.(16-17)  1920년대 전반의 한국 노동운동에 있어서 가장 특기할 만한 성과의 하나는 근대적 노동조합의 생성과 전국적 노동자조직의 결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노동조합·노동단체는 그것들이 대중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지 못하다는 커다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단체들은 중앙이나 지방 할 것 없이 거의 소부르조아적인 지식인 중심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노동운동의 역사가 극히 짧고 노동자 계급이 아직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던 1920년대 전반기의 조건하에서는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한 것도 사실이다. 그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 노동자 조직·단체가 대중 속에 뿌리박지 못한 사상 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노동자 대중과 직접 노동 현장에서 접촉하고 그들을 조직·지도하는 조직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러한 인적 구성은 노동자 조직·노동 운동에까지 사상 운동에서의 파벌 투쟁을 끌어 들여와 노동운동의 발전을 저해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통렬한 비판이 있다. "과거 조선의 무산계급운동은 일종의 간판의 운동이었고 광고의 운동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다만 단체를 통해서만 보았고 공장·광산 등의 일터에서 보지 못했다. 현실적 투쟁을 통하여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려 하지 않고 단체의 간부가 됨에 의하여 대중을 지휘·지령함으로써 만족하였고 회원수도 모르는 단체 간판을 모음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자랑하였다." 이철악, 앞의 글, pp. 26~27.-저자 각주) 노동자 조직·단체들의 이러한 약점은 1927년 이후의 방향전환기에 심각하게 반성되며 그러한 반성의 결과가 방향전환론 대두기의 중심적 슬로건인 "노동자 속으로! 공장으로! 광산으로!"로 나타나게 되었다.(18)  식민지 한국에서 본격적인 노동쟁의는 1910년대말부터 시작되었다(18)  특히 1919년과 1920년에는 3·1운동의 영향도 있고 하여 노동쟁의가 연간 80여 건으로 격증했다. 1921, 22년에는 전후 공황의 영향하에서 노동쟁의가 잠시 주춤했으나, 1923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히 풍미하고 주의자들이 쟁의에 관여하여 계급의식을 고취·선동시키려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각지에 주의적 색채를 띤 노동 단체가 생겨나면서 [……] 재차 증가"하였다. 1924, 25년에는 일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 및 노동운동에의 사회주의자의 개입에 대한 탄압·저지가 강화되고 노동쟁의 자체에 대한 파괴 책동도 강화된 탓으로 노동쟁의의 건수는 약간 줄어들었으나 1926년 이후에는 또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처럼 약가느이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노동쟁의는 점차 늘어갔고, 그 과정에서 차츰 노동자 계급의 조직성과 투쟁성도 커져갔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노동쟁의는...대부분 임금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발생했으며, 권리 요구 투쟁은 극히 소수였고 민족 해방 등 정치적 요구를 내건 파업 투쟁은 거의 없었다. 즉 거의 모든 파업투쟁이 경제 투쟁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시기의 파업투쟁에 있어서는 노동자측의 조직성과 준비가 크게 부족했다. 따라서 파업이 장기화되거나 일제 관헌과 자본가측의 회유나 탄압이 거세어지면 이탈자가 생겨 파업 대열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 쟁의의 발전과 한계 또한 방향 전환론 대두의 한 계기가 되었다. 즉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대중 투쟁의 증가는 이렇게 고양되어 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다 목적 의식적인 운동으로까지 발전시키려는 동기를 만들어냈고, 경제 투쟁에 한정된 노동자들의 투쟁을 정치 투쟁으로까지 고양시키려는 지향을 만들어냈으며, 그를 위하여 노동자들의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노동자들을 보다 높은 정치 의식으로 고취시키려는 지향을 만들어냈다.(19)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지향은 아무런 매개적 요인이 없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에 대한 내재적인 반성과 새로운 지향은 전체 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전환의 영향하에서, 그 자극을 받아 나타난 것이었다. 1926년 4월에 발족한 정우회는 같은 해 11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단일 정치 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사상 단체의 해체와 민족 단일당의 결성"을 주장했다. 정우회 선언의 핵심적 내용은 ① 분파투쟁의 청산과 사상 단체의 통일; ② 대중의 무지와 자연 생장성의 퇴치를 위한 조직 및 교육의 필요성; ③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전환; ④ 비타헙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 등이었다. 이러한 정우회의 방향 전환 선언은 당시 한국의 사회 운동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노동운동 또한 이러한 방향전환선언과 그에 자극받아 전개된 사회 운동의 방향 전환으로부터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특히 위에서 말한 정우회 선언의 골자 중 ②항과 ③항은 재래의 노동 운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지향에 대하여 하나의 준거들로서 작용했다.(20)  정우회 선언 이후 민족협동전선 문제를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 한국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의 시기에도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이론이 소개되기는 했었지만 그것이 학설 풀이의 수준에 그쳤던 데 비하여, 이 시기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저작의 다수가 매우 광범위하게 읽히고 토론과 논쟁의 전거로서 활용되었다. 이러한 사상적·이론적 전환은 노동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레닌의 사상 중 자연 발생성에 대한 부정과 목적 의식성에 대한 강조, 정치 투쟁과 혁명적 계급 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계급간의 제휴·동맹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성·헤게모니에 관한 이론 등은 이 시기의 노동운동론 속에 크게 반영되었던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론이 종래의 운동에 대한 비판·반성 그리고 장차의 운동에 대한 지향의 준거들이 되었다.(20-21)  양당론 논쟁이란 1927년(4월 민족주의 제휴론에 의한 신간회의 결성-인용자 주) 전진회측이 주도한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의 창립 대회석상에서 중앙협의회를 상설로 할 것인가 비상설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전진회측과 ML 당측(정우회-인용자 주)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양측 모두가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을 지지했으나 상설론자(전진회측)드이 민족단일당 밖에 따로 계급적 협의 기관을 두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비상설론자(ML 당)측은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는 민족 운동과 계급 운동을 따로 구분하지 말고 단일 정당을 만들어 힘을 집중하여 공동 투쟁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논쟁은 표결을 통하여 비상설론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논쟁을 통하여 민족단일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독자성 사이의 문제에 대한 ML 당의 이론적 불확실성이 더 뚜렷이 드러나고 말았다.(21-22) 이에 ML 당은 노정환의 「신간회와 그에 대한 우리의 임무」라는 글을 통하여 이 문제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려 하였다. 그는 신간회를 민족협동전선 혹은 민족단일당의 매개 형태로 규정하고 그 안에서 프롤렡차리아트가 헤게모니를 전취하는 것을 당면의 임무로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소위 '청산론자'들에 의하여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라는 상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 등을 논거로 계급적 표지를 철거하고 그 대신 민족적 표지를 취해야 하며(장일성), 신간회를 협동전선을 뛰어넘는 당의 형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며(김만규),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국민(민족) 운동내의 한 '경향' '세력'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홍양명) ML 파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전취론'을 격렬히 비판하였다.(22) ML 파는 이들을 '계급 표지 철거론자' '특수 조선의 신사'라고 부르며 격렬하게 논박했다. ML 파는 이들의 주장이 "무주체적 협동에 도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독립성의 포기를 주장하고 全투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러한 "오류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포기, 조선 민족 해방 운동의 현단계의 사회적 특징 및 이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위에 대한 무이해에 입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928US 3월 제4차 조선공상당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채택한 「민족 해방 운동에 관한 논강」의 제6항.-저자 각주) 제 3·4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하던 ML파는 이처럼 좌(양단론) 우(청산론) 양쪽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신간회를 민족협동전선(혹은 그 매개 형태)으로 보고 그 내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전취를 당면의 임무로 삼는 입장을 주류로서 굳혀갔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는 한층 주력하여 노동자의 스트라이크와 농민의 일상 투쟁을 전취·지도해야"(같은 논강, 제6항.-저자 각주)한다(22)고 보았다.(22-23) 이러한 입장에서 ML파와 그들이 주도하던 제 3·4차 조선공산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투쟁을 조직·지도하라고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노동 운동의 방향 전환의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계기가 되었던 것이다.(23)  방향전환론 대두의 또 하나의 계기는 지난날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 시기까지 약 7~8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그야말로 파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1925US 조선공산당이 성럽된 이후 파벌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특히 정우회 선언 이후로는 '파벌주의 박멸'의 구호가 고창되었지만, 파벌 투쟁적인 요소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커다란 약점은 대중과 분리되어 있었고, 노동자·농민적인 요소는 매우 적었다. 게다가 이들 지식인 출신의 전위들도 주로 중앙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지방의 각 단체의 임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노동자·농민 속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반성이 '공장으로' '노동자 속으로' 들여가려는 지향을 만들어냈다...(23)  ('가자! 공장으로! 광산으로! 노동자 속으로! 라는 슬로건의 등장) 이 슬로건은 1928년초에서 1929년초에 이르는 기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슬로건이었다.(25)  이러한 슬로건과 이러한 프로그램은 방향 전환에 관한 그들의 성격 규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방향 전환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과도적인 역사적 사명으로서 민족 해방 투쟁을 전체 성격으로 파악하는 과정-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 해방 운동의 주체 조건으로서의 역사적 필연성을 파악하면서 전민족적 정치투쟁의 무대로 등장하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방향 전환을 본질적으로 민족 해방 운동과 노동 운동의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진실한 프롤레타리아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공장으로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들이 '진실한 프롤레타리아성'을 획득하고, 노동자들을 '진실한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 계급 의식으로 무장시키며, 그리하여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조합주의적·고립적·국부적 투쟁 형태에서 전체적 목적 의식적 정치투쟁에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상의 핵심 고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26)  1920년대 후반기의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와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띠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사상·이론적인 측면의 변화였는데, 1926년경을 전환점으로 하여 볼셰비즘(마르크스-레닌주의)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운동 노선에 있어서도 볼셰비키적인 운동 노선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 및 이론 체계에 대한 이해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이론들은 현실 상황과 운동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이해와 구사의 수준은 그 원칙론적 명제들을 식민지 한국의 현실에 막 대입해보기 시작한 시점의 그것이었고, 따라서 체화되지 못하고 경험을 통해 변용·구체화되지 못한 것이었다.(27-28) 이러한 사상적·이론적 변화는 노동 운동에도 거의 그대로 투영되었다. 1920년대의 막연한 사회주의 대신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노동 운동의 지도 이념으로서 노동자 계급 앞에 제시되었고, 막연한 '계급 해방'이라는 목표 대신에 '민족 해방'이라는 민족적 임무와 '계급 해방'이라는 계급적 임무가 동시에, 그리고 훨씬 더 구체화된 형태로(2단계 혁명론)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 그리고 민족협동전선 내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획득, 노동동맹 등의 전략적인 개념들과 표면 조직과 이면 조직,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합법 투쟁과 비합법 투쟁의 결합 등의 전술적인 개념들도 제시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 전반기와 비교해볼 때 커다란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 발생적이고 비체계적인 노동 운동이 목적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노동 운동으로 전환될 수 있는 사상적·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에 있어서도 앞서 지적한 공산주의 운동 일반이 가졌던 한계가 그대로 나타났다. 노동 운동의 목표와 이념은 노동자 계급 자신에게 정확히 전달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였고, 노동 운동론도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명제들만이 제시되었을 뿐 어떤 구체적인 방침이나 실천 경험을 통한 예증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은 이론과 실천의 괴리, 또는 이론 부재나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내어 노동 운동의 이념과 이론이 노동 운동의 자연 발생성의 극복과 목적 의식성의 획득에 커다란 도움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28)  이 시기에 노동자 계급의 조직 운동과 조직적 역량은 크게 발전했다. 첫째로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크게 증가했다. 일제와 자본가 측의 가혹한 탄압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 100개 이상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927년 3월부터 1928년 2월까지의 1년 동안에도 60개의 노동 단체가 새로 결성되어 1928년 현재 노동 단체수가 총 350을 헤아리게 되는 등, 공장·사업장 단위의 노동조합들과 지역 단위의 조직체의 발전에 힘입어 갈수록 광범한 대중이 노동조합의 조직 속에 포괄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노동자 조직이 보다 통일적이고 계통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1925년 이래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각각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나뉘어짐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이 한 단체 속에 섞여 있던 어색함이 해소되었다. 또 각지에서 1925~1926년에 지역별로 노동 연합체들이 결성됨으로써 중앙의 총동맹-지방의 연맹(또는 연합회)-개별조합으로 이어지는 통일적이고 계통적인 체계가 만들어져 노동 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에서 통일적 계통으로서 전개도리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셋째로 인쇄·철공 등 일부 산업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전국적 산별 노조가 결성되고, 지방별로는 그 밖의 많은 산업에서도 산업별 노조가 결성되었다는 것은 '1산업 1조합'을 원칙으로 하는 산업별 노동조합주의를 향한 의미있는 전진이었다.(29)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제점들도 많이 있었다. 첫째, 조선노동총동맹이 일제의 탄압과, 합법주의에 안주하여 적극적으로 해금 투쟁을 전개하지 않은 지도부의 안이한 자세, 누차에 걸친 공산당 사건으로 인한 간부 상실 등의 이유로 말미암아 그 기능이 마비되어 기대되었던 전국적인 규모에서의 노동 운동을 통일적·계통적으로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전위 내지 활동가와 대중과의 분리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다. 노동 운동에 참가한 지식인 출신의 운동가의 대부분은 중앙이나 지역 조직의 간부·임원으로 있었을 뿐이고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 대중과 접촉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파벌 투쟁의 노동조합 내부로의 연장과 일부 노동조합 간부의 개량화의 원인이 되었으며 노동자의 조직·훈련·교육에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었다. 셋째로 조직 운동의 단순성을 지적할 수 있다. 식민지하, 게다가 가장 야만적이고 파쇼적인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던 일제의 치하에서 애당초 합법성이란 일제가 허용하는 좁디좁은 공간 속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조직의 합법적이고 표면적인 형태(즉 노동조합)만이 존재했다.(29-30)  1927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 원산 총파업에서 그 절정에 이르른 1920년대 후반의 대중적 파업 투쟁의 앙양은 그 자체로서 일제를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 해방 운동의 각 부문(특히 학생 운동과 농민 운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또한 전위의 맹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 '노동자 속으로'라는 구호가 전위들에게 커다란 설득력을 가진 슬로건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1920년대말~1930년대초의 노동운동의 방향전환에 있어서 그 내적인 추동력이 되었다.(32)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은 곧이어 일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고 그 여파는 일본의 부담 전가 정책을 통하여 한국에까지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32)...공황으로 인한 농민층의 몰락과 탈농화, 그리고 일본·간도 등으로부터의 귀환 노동자의 증가 등의 요인으로 인해 상대적 과잉인구의 풀이 팽대해지고 그것이 현역 노동자군을 압박함으로써 그나마 열악하기 그지없던 한국 노동자들의 상태는 한층 더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2-33)  이러한 공황으로 인한 노동자 계급의 상태 악화는 노동 조건을 유지·개선하기 위한 치열한 경제투쟁을 야기하였고, 이러한 파업투쟁의 앙양은 1930년대초의 방향 전환론의 본격적 전개의 한 배경적 요인이 되었다.(여기서 배경적 요인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방향 전환론을 직접적으로 결과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저자 각주) 한편 일제는 일제하 전 기간을 통하여 노동운동에 대해서 극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출판법·보안법·제령7호·치안유지법 등 갖은 악법과 집회 금지·해산 종용·집회에의 임석·검거·예비 검속·스파이 행위 등을 통하여, 그리고 때로는 경방단 등과 같은 어용 단체들과 심지어 헌병·군대까지 동원하여 노동 운동을 억압했다. 일제의 탄압은 1920년대 후반기부터 극단적으로 강화되었다. 1928년의 치안유지법 개악, 일본 田中 내각의 파쇼화, 그리고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山梨 총독의 조선에 대한 파쇼적 통치와 일제 경찰의 억압 기구 강화가 방향 전환기를 특징지워준다.(33)  이러한 악법과 억압 기구 강화를 통한 일제의 파쇼적 탄압의 격화는 합법적·표면적 운동을 크게 제약하였다. 조선노동총동맹의 무력화와 원산 노련의 강령·마크 개정 들은 그 알려진 일례에 불과하다. 출판법은 노동운동의 각종 선전·선동 문건의 제작에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했고, 보안법은 집회의 강제 해산과 금지를 위한 법적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제령7호와 치안유지법은 노동운동의 정치 투쟁화에 대한 커다란 제약 조건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주의를 내건 노동 단체가 표면에 나서서 합법적인 공간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일제와 일본인 자본가 단체·어용 단체들의 공격 아래에서는 경제 투쟁만이라도 열심히 하는 노동자 조직도 그 상태나마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합법적인 존재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 시기의 노동조합에 있어서는 개량화·노자협조주의화를 의미했다. 바로 이런 사정이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기존의 노동조합을 그러한 것으로 개조하려는 노력이 비합법·지하 적색 노조 운동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도록 한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33-34)  (12월 테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이 1928년 12월 10일 채택·발표한 이 테제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이다. 이 테제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그때가지의 약점을 지적하고 붕괴 상태에 빠진 조선 공산당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재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이 테제는 당 재건 문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 테제가 노동 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하여 미쳤던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36) 첫째로 이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을 기초로 당을 재건하라는 것을 그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지식인 서클의 조직이라는 옛 방법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특히 공장과 노동조합에서 볼셰비키 대중 작업에 착수할 경우에만 이 거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것은 "순수한 공산주의 개념과 진실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고 형태하에 행동하는 건전한 공산주의 관점을 가진 공산주의 세포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형성"의 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테제는 조선공산당의 '볼셰비키화' 즉 '볼셰비키적'인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요구했던 것이다.(이러한 지침은 코민테른이 이미 제5회 대회(1924년)에서 내걸었던 '볼셰비키화'슬로건에 따른 것이다. 이 슬로건은 코민테른 제5회 확대집행위원회 총회(프레남)에서 지노비에프가 기초한 「코민테른 제당의 볼셰비키화에 대한 테제」가 채택됨으로써 코민테른 산하 각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조직적·사상적 노선이 되었다. '볼셰비키화'의 핵심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첫째는 조직 문제로서 ① 생산점(즉 공장 경영 세포)을 기초로 하여 당을 개조하는 것(이는 활동의 중심을 공장·경영으로 옮기는 것, 당원 중 노동자의 비중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② 당 밖의 노동자 대중 조직, 특히 노동조합 내에서 당의 활동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상적인 문제로서 당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시킨다는 것이다.-저자 각주) 이러한 지침은 곧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철저히 받아듣여졌고, 그리하여 1929년 이후의 모든 공산당 재건 운동은 이러한 '볼셰비키화' 노선에 다라 추진되었다. 물론 종래의 조선공산당이 지식인 중심의 부르조아적인 정당이고 따라서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하여 당이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자기 반성은 한국의 공산주의자 대열내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또 앞에서 보았듯이 이 테제가 지시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내용의 지향이 이미 내부에서 대두했지만, 이 테제는 이러한 지향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러한 지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당을 재건한다는 '볼셰비키화' 노선은 노동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관심을 크게 환기시키고 그들에게 공장 경영을 출발점으로 해서 직접 노동자들 속에서 활동하고 그것을 기초로 당을 재건하도록 촉구함으로써 1930년대의 혁명적 노동운동의 전개에 기본적인 동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7-38) 둘째, 이 테제는 노동운동에 대한 몇가지 지침을 포함...(38)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될 것은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평가 절하이다.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평가 절하는 민족 부르조아와 그들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코민테른 당국의 평가 절하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평가 절하 자체는 "공산당과 민족 혁명 운동의 잠정적 동맹"까지도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제휴가 결코 "공산주의 운동과 부르조아 혁명 운동의 연합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하여, "혁명적 노동운동의 완전한 독자성을 엄격히 유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와 더불어 테제는 "공산주의자들은 대중 가운데서 필요한 준비 작업이 없이는 민족 기구의 장악이 그들을 대중과 접맥할 수 있게 하는 아무런 보장도 되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논리는 한때 민족유일당 또는 민족협동전선당의 매개 형태로 규정되어왔던 신간회를 잠정적 동맹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주된 노력이 기울어져야 할 곳은 민족협동전선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운동이며, 신간회가 아니라 노동조합·농민조합이라고 지적한 셈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곧바로 신간회 해소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모여있던 좌익적인 역량들을 공산당의 재건과 노동조합·농민조합의 재조직·강화를 위한 방향으로 재배치해야 한다는 논리와 실천적 노력을 낳았다.(38-39)  1927~1928년부터 국제 노동운동에 좌선회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① 국제 노동조합 운동의 통일을 위한 노력의 실패; ② 몇몇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계급투쟁의 격화; ③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파시시트들에 대한 협조와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 부르조아지·개량주의자의 제국주의에 대한 협조; ④ 이러한 정세 하에서 부르조아·사회 민주주의자·민족 개량주의자·개량주의적 노조 지도자 등이 완전히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편으로 이행했다고 본 코민테른 및 그 하부 기관들의 과도한 판단에 기초하여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계급 대 계급'의 전술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전술에 기초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서구에서는 사회 민주주의자,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민족 부르조아지들을 주요한 타격 대상으로 삼았다.(39-40)  1930년대에 들어오면 민족협동전선이라는 문제 의식이 반제통일전선이라는 문제 의식으로 바뀌고 그 계급 동맹의 내용 또한 바뀌게 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계급 동맹의 내용의 변화이다. 1920년대 후반의 '민족협동전선'론에 있어서 민족협동전선을 구성하는 계급은 부로조아지·소부르조아지·프롤레타리아트·농민이었다. 그러나 1930년 단계에서 나타난 고경흠의 '반제통일전선'론은 "노동자·농민·피압박 소시민층을 ××[혁명]의 추진력으로 하는 반제국주의 ××[혁명]의 단계"의 "광범한 반제통일전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부르조아지가 동맹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45-46)  프로핀테른(Profintern은 1921년에 창립된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러시아어 약자 표기이다.-인용자 주)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고 일본·중국 등의 노동조합과는 상당한 교류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프로핀테른과 한국의 노동조합 사이의 교류는 1928년에야 시작됐다.(이는 아마도 한국 노동 운동의 통일적 기관으로서의 조선노농총동맹이 1924년에야 창립되고, 그 후로도 일제의 탄압과 내부의 파벌 대립으로 노농총 자체가 거의 무력화되어 있던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저자 각주) 1928년 3월에 열린 프로핀테른 제4회 대회에는 한국 대표로 한해와 김경식이 참가했고, 동 대회는 「식민지·반식민지에 있어서 노동운동에 대한 테제」중에서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4개 항의 당면 임무를 제시하였다. 1928년 이후 프로핀테른과 한국 사이의 연락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프로핀테른 연락부 및 범태평양노동조합회의(이하 태로)의 지부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이미 무력화된 조선노동총연맹과 연락하기보다는 태로와의 협력하에서 직접 적색 노조를 조직·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50)  태로는 1927년 5월 20일 무한에서 결성되었다. 이 제1회 대회에는 소련·중국·일본·조선·인도네시아·영국·프랑스·미국 등 8개국의 대표가 참석... 이 대회에서 채택된 선언과 일반 강령 및 경제 강령을 통하여 태로는 태평양 지역의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획득이라는 목표와 더불어 식민지의 독립, 제국주의 전쟁 반대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표도 전면에 내 걸었다. 그리고 대회는 이 과제를 수행할 지도부로서 범태평양노동조합서기국(이하 태로 서기국)을 설치했다. 서기국은 상해에 두고 중화총공회와 전러시아노동조합평의회로부터 대표자 각 2명씩, 그리고 미·영·일·불·조선·쟈바 등으로부터는 대표자 각 1명씩을 보내어 구성하기로 하고, 서기국회의는 6개월에 1회, 대회는 2년에 1회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범태평양노동자』라는 기관지도 발행하기로 하였다.(50-51)  (9월테제-「조선에 있어서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에 대한 결의」) 1930년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프로핀테른 제5회 대회에는...한국의 문제를 의제로 삼지는 않았으나 한국의 노동조합의 조직 방침에 대한 결정을 하기로 결의했다. 대회가 끝난 후 대회의 결의에 의하여 테제 작성위원회가 구성되어 테제를 작성했고 프로핀테른 집행위원회는 이를 1930년 9월 18일 정식으로 채택·발표했다.(52)  이 테제는 공황과 일제의 탄압이 격화되고 대중의 혁명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이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의 배반과 좌익의 주체적 역량의 미비로 말미암아 그 발전을 저해당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정세 인식에 기초하여 씌어진 것이다(제1항~4항). 이러한 정세 인식은 1930년대초의 한국의 민족 해방 운동과 노동운동이 당면하고 있던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한 것임과 동시에 세계적 규모에서 혁명 운동·노동 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정세 인식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 인식은 식민지 한국에서나 세계적 규모에서나 모두 노동운동의 '좌편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작용했다.(52-53)  9월 테제는 이러한 정세 인식에 근거하여 '조선의 좌익'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조선노동총동맹내의 좌파를 결집시켜 조직하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제5항). 이것은 물론 조선노동총동맹으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을 지시한 것이 아니고 좌파의 '독자적 지도와 혁명적 본질'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테제는 또한 개량적 노조내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테제는 '이중조합주의'적인 경향이 그리 크게 나타나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53)  12월 테제와 9월 테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자가 1930년대 노동운동에 목표를 제시한 것이며, 후자는 그것에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12월 테제가 공산당의 '볼셰비키화'라는 기본 노선에 입각하여 일제의 탄압과 내적 취약성으로 인해 붕괴된 조선공산당을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한 진정한 볼셰비키적 전위당으로 재건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1930년대에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장과 농촌을 무대로 활발한 조직작업과 투쟁을 수행하도록 하는 기본적인 동인을 제공했고, 9월 테제는 12월 테제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1920~30년의 국내외적인 운동의 흐름과 그 조건의 변화를 반영하여,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그러한 노력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전략·전술, 즉 방법론을 제공해줌으로써 193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을 틀지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54)  (10월 서신-「조선에 있어서 범태평양노동조합서기국 지지자에 대한 동 서기국의 서신」) 태로의 10월 서신은 5개항에 걸쳐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정세와 임무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고 현단계에 있어서 조선 노동 계급 앞에 가로놓여 있는 중요한 제문제들에 대하여" 좌익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상세한 내용을 담고있었다. 이 테제는 그 내용으로 보아 명백히 9월 테제의 연장선상에 서 있으며, 그것의 적용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결함들을 지적하고 그것의 극복 방ㅇㄴ을 제시함과 동시에 9월 테제에서는 상세하게 규정되지 않고 원칙적인 명제로만 제시되었던 몇몇 사항들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55)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민족 개량주의에 대한 평가가 극단화되었다는 점이다. 10월 서신은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자치라는 표어 아래 점차 일본 제국주의에 접근하여 민족 해방 운동에 반역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자치 운동의 부활(1920년대초에 대두했으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맹공을 받고 좌절되었으며, 1926년에도 부활 움직임을 보였다가 좌절된 자치운동은 1930년경부터 부활했다.-저자 각주) 과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1일)을 기화로 민족 부르조아들이 일제의 기도대로 민족 감정을 부채질하여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제의 만주 침략에 은연중 호응한 점, 그리고 심지어 일부는 일제의 침략 논리인 대아시아주의에 호응한 점 등에 원인을 두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평가는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 개량주의 또는 민족 부르조아지를 완전히 동일한 부류로 보거나 후자를 전자의 '주구' 또는 '충실한 동맹자'로 보는 인식에 다름아니었다. 이러한 평가와 인식은 한국의 좌익들로 하여금 신간회를 해소한 후 1930년대 전반까지는 민족주의자들과의 어떠한 제휴도 시도하지 않고 적색 농노조 조직에만 일로 매진하게 하였다.(55-56)  두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가 한층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테제 발표 당시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한편으로는 일제의 만주 침략을 위한 음모의 하나였던 만보산 사건과 '일제의 민족간 이간질(조선·중국인간)에 의해, 그리고 이에 대한 민족 부르조아들의 의식적·무의식적 동조·선동에 의해 그 해 7월 초순 한국 각지에서 수일간 벌어진 중국인에 대한 습격과 그로 인해 조성된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한 한국 민중의 무의식적인 동조적 분위기가 감돌던 시점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인해 아시아 지역에서 세계 전쟁의 전운이 감돌고 특히 중국의 혁명 운동과 소련에 대한 일제의 전쟁 도발의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태로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저지하는 것을 가장 커다란 임무로 삼게 되었고,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그에 기초한 국제적 반제 통일 전선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더욱 강화한 것이 중국과 한국에 있어서의 부르조아 민족주의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었다. 즉 태로는 당시의 전선이 한편에는 식민지·반식민지의 노동자·농민과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 전선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반식민지의 토착 부르조아지의 동맹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고 파악하였다. 태로 10월 서신에서의 이러한 경향은 1930년대 초반의 태로 계열의 적색 노조운동뿐 아니라 적색 농노조 운동과 나머지 다른 운동(특히 학생운동)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즉, '제국주의 전쟁 반대' '중국 혁명을 사수하라! 소비에트 연방을 사수하라!' 라는 구호는 당시의 거의 모든 좌익계 유인물의 말미를 장식하고, 반전 데이(반전 데이(정식 명칭은 '제국주의 전쟁 반대 국제 투쟁'이며 일명 '적색 데이'라고도 함)는 코민테른 6회 대회의 결정에 의하여 제정되었고, 1929년 3월 유럽 14개국 공산당회의에서 매년 8월 1일 거행하기로 정해졌다.-저자 각주)는 노동·농민·학생 운동에서 중요한 기념 투쟁일의 하나가 되었다.(56-57)  셋째로는 노농동맹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9월 테제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해야 된다고 지적되었으나 이것이 한국의 좌익에 의하여 전혀 실행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 태로서기국이 '노동 단체와의 연결과 노동자·농민 투쟁의 통일 전선 편성 및 지주·자본가·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의 상호지지' 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 것이다.(57) 넷째로는 파벌주의의 해독을 또다시 강조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태로와 프로핀테른의 노선에 따라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 등의 파벌별 재건 운동이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었다.(57)  마지막으로 주목되는 것은 시기 상조적인 이중조합주의에 대하여 제동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10월 서신은 프로핀테른의 좌선회와 9월 테제의 영향하에서 한국의 좌익들이 개량주의적 노조 속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혁명적 노조를 만들어 섣불리 노동조합을 둘로 나누고 결국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프로핀테른과 태로의 진의는 개량주의적 노조 속에서의 활동을 포기하는 것이나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혁명적 노동조합을 기계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며 개량주의적 노조 속에서의 활들을 통해 하부의 대중을 장악하고 점차 아래로부터 노동조합의 기관과 투쟁 기관(예컨대 파업위원회)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것이고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공장 그룹으로부터 출발해 혁명적 노조를 건설하고 합법·비합법 투쟁을 통해 이 노조의 합법성을 전취해 나가는 것이라고 역설했다.(57)  일제하 노동 운동의 방향 전환기였던 1929~1931년은 일제하의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대중적 파업투쟁이 고양되었던 시기이다....노동쟁의는 1929년 102건, 1930년 160건, 1931년 205건으로 해마다 그 건수가 격증하여 불과 2년 사이에 2배가 많아졌고 참가 인원수도 2배 이상으로 격증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원산 총파업(1929년 1월~4월), 부산 조선방직 파업(1930년 1월), 신흥탄광 노동자의 파업과 폭동(1930년 5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1930년 8월), 함흥 평창제사공장 여성 노동자의 파업(1931년 1월), 광주 道是제사공장 파업(1931년 2월), 경성방직 영등포공장 파업(1931년 5월)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공 파업(1931년 5월~6월), 인천 力武정미소 노동자 파업(1931년 6월) 등 굵직굵직한 노동쟁의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들 쟁의는 그 완강성·준비서·전투성 들을 통해 일제와 자본가(대부분이 일본인이었던)들을 크게 당황하게 하였으며 거의 전국적으로 그 영향을 미쳐 이 파업을 지켜보는 노동자 계급과 그 밖의 식민지 민중을 크게 고무하고 격동시켰다.(58)  1929~30년 단계에서 이미 상당수의 공산주의자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선진적 노동자들의 비합법적인 서클이 노동자 대중 속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이들의 영향하에서 노동운동의 새로운 경향(개량주의의 배격, 새로운 조직 형태, 새로운 투쟁 전술)들이 점차 발전되어 있었다....(61)  1929년~1931년 단계에서의 지하 적색 노조운동은 이제 겨우 그 맹아가 보일 뿐이거나 혹은 초기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맹아와 초기적인 시도들이 발전하여 193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가장 특징적인 흐름 중 하나인 지하 적색 노조운동으로 성장해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의의를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61) (부록-프로핀테른 제4회 대회에서의 『식민지·반식민지에 있어서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테제』중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이 약한 것은 이 나라의 공업화가 미약하고 또 격심한 테러 아래서 발전하고 있는 운동 자체가 미약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한 조건은 식민지 동양 전체에 공통적인 것이다. 운동이 이렇게 약한 것은 그 밖에도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이 특수한 상황 아래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 상황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와 및 이민 정책이다. 이 정책의 결과 팽대한 수의 조선의 노동자가 이민이 되어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 숙련 노동자의 수만 해도 조선 본국에 있는 공업 노동자의 총수보다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많은 수의 일본인 노동자가 조선에 건너와 있으며, 이론의 자본가와 관리, 게다가 가장 좋은 토지에서 살고 있는 강력한 일본인 '농민'과 더불어 조선에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 본토에서는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의 노동조합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일본 자본가의 손아귀에 있으며 일본인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도구로서 역할하고 있다. 노동 운동의 건전한 발전에 대한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 것은 조선의 혁명운동의 격렬한 내부 투쟁이었다. 이들 모두는 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을 저지했다. 1927년 하반기에 비로소 조선노동총동맹이 성립되었다-이것은 조선의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의 노동조합 중앙 조직이었다. 조선의 좌익은 다음과 같은 임무에 당면해 있다.―① 개개의 조합과 개개의 단체를 조직적으로 강화하는 것, 활동가와 간부를 육성하고 교육하는 것; ②대부분은 총동맹밖에 있는 미조직 공장 노동자를 총동맹에 끌어들이는 것; ③ 광산 노동자·목재벌채 노동자·어업 노동자·농업 노동자 사이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는 것. 총동맹이 조선의 농민 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이들 부류의 노동자를 매개로 하는 경우에 가장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들 사이에서의 활동은 중요하다; ④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의 좌익(평의회)와 활동을 조정할 것. 이 양 조직은 공동의 행동강령을 작성하고 그 강령에 기초하여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와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서 광범한 계몽 활동을 개시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인 노동자 약간의 층이 감염되어 있는 인종적 편견 및 제국주의적 경향과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혹한 억압하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노동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근거 없는 불신감과 적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노동운동과 조선의 노동운동의 소원한 상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만 조선 및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 쌍방에 유해한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에 대햐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70-71) 金炅一, 「일제하 고무 노동자의 상태와 노동 운동」  이와 같이 고무 제품 중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고무신이 지니는 상품적 특수성과 아울러 일제의 규제가 적고 비교적 소규모의 자본을 요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 분야는 조선인 공업 자본이 대규모로 진출하여 일본인 공장을 압도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82) 여기서 생고무 등을 비롯한 원료 가격 시세의 불안정성 및 공황 이래의 전반적 궁핍화의 심화 혹은 농촌 진흥 운동에서의 자작자급 정책의 영향으로 인한 판로의 협소화 등의 요인이 겹쳐 자본가 입장에서의 적극적 대응책이 요구되었다. 이 경우 자본가들이 택한 가장 손쉬운 대응책의 하나가 임금의 감하를 통하여 노동자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제품 가격의 조절을 통한 대응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이 시기는 앞에서 말한 시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때문에 실효를 거두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이른바 통제라는 이름 아래 30년대 이후 전개된 이 부문에서의 독점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83)  이와 같은 원료의 독점적 공급이 식민지 지배 권력의 적극적 알선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일본인계 자본의 비중이 높은 부산에서 이러한 독점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에 따라 주로 조선인계 위주의 공장은 교대제 작업이나 조업 단축, 또는 휴업 혹은 불가피하게 대공장으로 합병되는 길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전시 체제로의 이행과 함께 독접 자본과 식민지 권력의 유착이 강화되면서 보다 심각화된다. 즉 원료수입제한령 혹은 고무배급통제규칙 등에 따른 전시 입법으로 고무 원료의 배급 통제가 강화되는 한편 원료 폭등 등의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시키는 독점 가격과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적 높은 가격에 고시된 公定價格의 성립 등으로 중소 자본의 몰락과 독접 자본으로의 집중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인계의 공장은 소수의 대규모 공장을 제외하고 일본 자본에 합병되거나 휴업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86)  1930년 이후에는 식민지에서 민족 부르조아지의 개량화·타락화와 더불어 노동조합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극단적으로 강화되어가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합법적 노동 조직이나 노동 단체가 해체 내지는 무기력화되어가는 가운데 비합법적 지하 적색 노동조합 운동이 대두하게 딘다. 이는 민족 해방 투쟁의 일환으로서 노동운동의 주체적 내재적 요구에서 비롯되어 코민테른 등의 反帝統一戰線에 의한 세계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전개되었으며, 아래로부터의, 즉 생산 현장에서의 노동자 조직을 통하여 공장 등에 튼튼한 조직적 기초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141)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대응으로서 고무 공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은 공동의 협정을 통한 임금의 인하이다. 자본가 계급의 단결에 의한 공동의 임금 인하는 우선적으로는 일정 지역 내에서 이루어졌다.(146)  고무 공업이 휴업기에서 다시 조업기로 들어가는 상반기의 4~6월, 혹은 하반기에는 추석의 번망기를 넘긴 한산기가 이러한 공동의 임금 인하를 위한 가장 좋은 시기로서 흔히 선택되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이 시기에는 임금 인하에 순종치 않는 노동자를 쉽게 해고시킬 수 있었으며 혹은 노동자들의 반발에 의해 설령 조업이 중단되더라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147)  자본가들에 의한 공동의 임금 인하가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동맹파업 등의 형태로 이에 맞서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본가들의 대응은 노동자의 해고 혹은 공장의 휴업 조치였다. 후자는 한산기일 경우 쉽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드물었다. 오히려 동맹파업의 대응책으로는 파업 노동자를 해고하고 신노동자를 모집하는 전자의 방법이 가장 빈번하게 행애졌다. 반봉건적 농업 구조와 결합된 식민지의 경제 체제에 의해 값싼 노동력을 언제든지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보다 쉽게 하였다. 물론 고무 공업에서의 작업은 어느 정도의 숙련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일정한 지역 내에 숙련의 경험을 지닌 인구의 비율이 높을수록 자본가에게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149)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무지와 무식을 이용하여 임금 내용을 복잡하게 한다든지 일본어를 사용하거나 어려운 문구를 사용한다든지 혹은 파업 과정에서 기만적 타협안을 제시하거나 구도로 해놓고 사후에 이를 다시 번복하는 등의 기만적 행위를 하였다.(150-151)  일제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표면상으로는 엄정한 중립을 내세워 공정한 태도를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통치 기구로서의 본성을 버릴 수는 없었다. 시기에 따라 다소의 변화  있지만 노동 운동에 대한 일제의 기본 방침은 식민 통치에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이라한 원칙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동맹파업이 일어나더라도 사태가 자본가에게 유리하거나 혹은 크게 불리할 것 없는 상황에서, 혹은 사태가 이미 확대되어 더 이상의 자극이 있으면 악화나 파급의 우려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일제는 대부분 불개입의 원칙을 내세우고 관망하는 태세를 쉬하였다. 마지막 경우에는 대부분 사태를 이와 같이 이끌어온 노동자들의 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되거나 파급될 때에 일제는 신속히 개입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제가 스스로 조정에 나서 기만적 타협안을 내세워 강제로 승인하도록 하는 것 등에 의하여 노동자 조직의 분열을 유도하는 형식으로 대부분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불개입이건 개입이건 간에 일제는 항상 식민 통치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맹파업 등의 계획은 사전에 탐지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파업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비밀리의 혹은 공공연한 검거와 취조가 무원칙적으로 자행되었다. 검거된 노동자들은 파업단에서 이탈하여 취업을 할 것을 강요받거나 이후로는 쟁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거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동자들의 집회나 각종 대회 혹은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사회 단체 등의 대중연설회 등도 사전에 금지되거나 현장에서 제지되었다.(152)  특히 30년대 이후에는 전시 체제로의 이행에 따라 노동 단체를 비롯한 사회 단체가 일제의 전반적인 탄압하에서 강제로 해체되거나 지하로 잠적하게 되며 이에 따라 경찰이 거의 전적으로 노동 쟁의의 조정을 담당하게 된다. ...노·자의 관계에서 유일한 중재자로서는 식민지 경찰밖에 남아있지 않은 30년대 이후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어간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노동자들은 점차로 식민지 경찰의 조정에 의존하는 빈도가 잦아지게 된다.(153-154)  고무 공업에서 이 부문이 지니는 산업적 성격과 생산 과정·노동 조직·노동 조건 등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부문에서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과 비참한 생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틀내에 편입된 식민지 공업의 발전의 미숙성이라는 조건하에서 반본건적 농업과 관련된 농촌에서의 노동력 공급은 이러한 상태를 조성하고 악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일반적 교양이나 각성 등은 자본주의 성립의 초기에 식민지화의 경험 앞에서 저해되고 지체되었다.(156)  한도현,「반제 반봉건 투쟁의 전개와 농민조합」  갑오농민전쟁에서 분명한 모습을 띠고 전개되었던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유산되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조선에다 근대적 제요소들을 도입하면서도 조선의 봉건 세력들을 재편·유지시켰다. 자신의 해방을 갈구하면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전개해왔던 조선 민중은 이제 그 봉건 세력의 옹호자·맹주인 침략 세력에 항거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 침략 후 우리 근대사의 과제는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으로 되었다. 이러한 반제 반봉건의 과제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구조로부터 도출된다.(158) 일본 제국주의는 해체되어 가고 있던 조선의 자연 경제를 더욱 급속히 해체하고 구래의 봉건 계급이 지닌 경제적 기초를 흔들어놓았다. 그래서 제국주의하의 대중의 빈곤은 종래의 봉건적 착취에 의한 가난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종래의 봉건제하의 가난과 달리 식민지 민중의 가난은 식민지 내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경제 침략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봉건적 제관계를 일거에 자본주의적 관계로 개혁시킴으로써 식민지를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내부의 모순을 통해서 착취한다. 식민지 해방을 통해 자유로운 발전을 이루려면, 이 두 가지 속박,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존 세력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 관계를 맺은 채 존재하고 있다. 즉 제국주의의 지배를 타파하지 못하면 봉건 잔존 세력을 타파할 수 없으며, 식민지 내부의 모순을 경시하여 봉건 잔존 세력의 지배를 간과한다면 대중들로 하여금 반제 투쟁의 전선에 일어서도록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식민지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을 도와 봉건적 지주 계급을 타도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의 지배 체제를 뒤엎을 수 없고, 또 봉건적 지주 계급의 주요한 지지자인 제국주의의 지배를 뒤엎지 않으면 봉건 지주 계급의 지배를 일소할 수 없다. 결국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민족 해방 투쟁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억압을 뒤집어엎는 민족 혁명이고, 대내적으로는 봉건적 지주의 억압을 뒤집어엎는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민족 혁명이다.(159-160)  농민 대중이 양적으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할 뿐 아니라 지주 계급은 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사회적 기초라는 점, 또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 나선 농민들의 세력은 폭풍처럼 세차고 맹렬하여 그 어떤 힘으로도 농민 세력의 발흥을 억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제국주의 혁명은 민족 혁명이자 농촌 혁명이기도 했다.(160)  명천 농민조합은 농촌 계급 구조를 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있다.  ① 부농: 농업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부분이 절대 다수여서 1년작 농작물로 1년간 생계를 꾸리며 고리대금업적·상업적 착취를 행하는 층. ② 중농: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자기 노동력을 쏟는 부분에서 주로 1년간 농작물을 거둬들이는데 풍년에는 약간 남고, 흉년에는 부족한 층. ③ 빈농: 자기 노동에 의해 생산한 농산물로 3~4개월 내지 6개월간 생활을 유지하지만 다른 계절 노동 또는 고리 대금 차용에 의해 겨우 생활하는 층.  이것을 보면 지주와 농업 노동자에 대해서 별로 기술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두 계급의 문제를 명약관화한 사실로 간주해버린 듯 하다. 다만 종래 운동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부농·중농·빈농 등의 구분 문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164-165)  1924년에 노농총동맹이 결성되고 다시 1927년에 노농총동맹에서 농민총동맹이 분화·독립하였다. 이 조직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농민 스스로의 전국 조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농민 운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다.(166)  농민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지주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농민 자신의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또 사회 운동의 선진인자들도 믽우 구성의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의 대중 조직 건설이 시급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물론 소작인 조합과 같은 유의 농민조합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여기에서 논의하려고 하는 농민조합은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방향 전환론과 깊이 관련된 조직이다. 다시 말하면 반제·반봉건 투쟁의 심화·발전 과정에서 발전된 농민의 대중 조직이다.(169) 20년대말부터 제기된 방향 전환론은 바로 지식인·소시민적 운동으로부터 대중을 기초로, 대중을 축으로 하는 대중 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170)  20년대 후반 대중 속에 뿌리박으려는 방침 속에서 전개된 농민조합은 종래 조합과는 달리 그 이념적 선진성, 즉 다면 혁명 성격에 대한 파악, 분명한 계급 노선, "隊內의 철과 같은 규율"등을 요구했다. 이 점이야말로 30년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농민조합의 특색이다.(172)  제국주의 세력은 반동적인 봉건적 모순을 재편·온존시켜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해왔다. 여기에다 봉건 지주 계급뿐 아니라 매판 자본가까지 가세하여 식민지 민중들을 억압하였다. 그리하여 식민지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광범한 민중과 더불어 제국주의 세력과 그 하수인들을 타도하여 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 제도를 타파하는 것이다. 이 혁명은 수많은 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그 과제들이 사회 운동의 발전에서 각기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서로 다르다. 그러한 과제들의 위상을 올바로 부여하고 마침내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사상이 담당하는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모름지기 사회 변혁 운동은 의식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또 사상적으로 각성되지 못한 민중은 사회 경제적으로 아무리 억압을 받아도 해방 운동을 추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변혁 운동은 그 담당자들의 사회 경제적 이해를 대변해주는 사상을 갖고 있으며 그 사상은 사회 변혁 운동의 전과정에 대해서 또 변혁 이후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준다.(173-174)  김현숙, 「일제하 민간 협동조합 운동에 관한 연구」  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을 완료한 日帝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미 증식 계획을 수립하여 일본 독점 자본의 조선 농업 지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일본 독점 자본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농촌을 식량 보급지, 공업 원료 획득지, 독점 상품 시장 그리고 자본 수출지로서 재편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 강행으로 인해 소작농은 물론 자소작농·자작농까지 포함한 광범한 조선의 농민이 몰락하였다. 특히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에 파급되어 일본이 농업 공황을 시발로 극심한 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든 1930년대 초반, 농산물 가격의 급격한 하락과 함께 조선 농가 경제는 풍년 중에도 파탄을 면할 수 없었으며, 도시로, 해외로 따날 수밖에 없게 된 농민들이 속출하였다.(189)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지배의 1기라 할 수 있는 1910~1919년 사이의 기간에 총독부 주도하에 그 지배를 위한 자본주의적 기초 작업으로서 철도·도로·항만·통신 등의 설비와 조선은행을 정점으로 하는 식민지적 은행 체계, 중앙 및 지방의 행정 기구 등의 각종 기구와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토지 조사 사업을 완료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물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초작업은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경제의 일환으로서, 즉 그 본원적 축적을 위한 식민지로서 편성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획기로 급성장하여 구조적 변화를 일으킨 일본 자본주의는 생산과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진행, 독점 자본간의 협정 성립, 거대 은행과 독점적 산업 기업간의 관계의 긴밀화, 자본 수출 등등의 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독점 자본주의로서 구조적 재편을 단행한 일본 자본주의는 戰後 공황에서부터 미롯된 위기 속에서 자본 축적상의 모순, 특히 만성적인 농업 공황에 직면하여 시달렸다. 일제는 이러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 값싼 식량과 원료, 방대한 상품 시장, 그리고 자본 투자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일제는 이미 식민지 지배의 기초 작업을 완료해놓은 조선을 이 요구에 부응시키기 위해 산미 증식 계획을 골자로 하는 일련의 농업 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일본 자본이 공업 부문이 아닌 농업 부문을 투자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일본 자본측의 요구뿐만 아니라, 조선 내부의 상황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 즉 전력이 부족하여 공업 부문에서의 이윤 추구가 곤란하였고 조선 내에서의 농업 투자는 일본 내에서의 농업 투자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즉 토지 개량 사업의 경우 사업비가 일본에서의 사업비의 2~4할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추정되었기 때문이다.-저자 각주) 1920년부터 시작된 농업 정책의 본질은 조선의 농업에서 생산된 잉여를 비농업 부문, 구체적으로 말해 일본 독점 자본의 자본 축적을 위해서 이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산미 증식 계획 및 기타 농정이 진행됨에 따라 농업에서 생산된 경제적 잉여가 교환 과정을 통해 직접·간접적(지주 경유)으로 자본가에게 착취됨으로써 조선 농민은 소작농은 물론, 자소작농·자작농까지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몰락했다.(194-195)  이렇게 1920년대를 거쳐 점차 그 비중이 커지고 있는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는...식산은행·東拓·금융조합 등의 기관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으며, 보다 중요한 점은 식민지 농업 정책의 기본 성격의 변화에 따라 농업 자금 대부의 주된 역할을 담당했던 금융 기관이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즉 1910년대의 토지 조사 사업은 東拓이, 1920년대의 산미 증식 계획은 식산은행이, 그리고 농촌 진흥 운동으로 대표되는 1930년대의 농업 정책에 있어서는 식산은행과 금융조합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같은 금융 기관들의 자금원은 주로 일본으로부터의 차입금, 즉 당시 금융 기관의 채권 발행을 통해 일본내의 起債市場에서 조달된 자금과 대장성 예금부에서 식산은행이나 동척에 직접 대부하는 형식으로 조달된 자금이다.. 식산은행은 이렇게 도입한 자금을 농업부문에 직접 대출하거나, 그 하위 금융 기관인 금융조합을 금융조합연합회를 통해 대출하였다. 1920년대의 산미 증식 계획의 강행을 위해 도입된 일본 자본은 주로 지주·자작농·자소작농 상층에 독점되고 있었다.(195-196)  소지주와 자작농 상층에 대한 대부는 식산은행의 하위 기관인 금융조합이 주로 담당하였다. 소위 라이화젠식 신용조합으로 자처하던 금융조합 역시 담보 대부를 원칙으로 하고 일부의 보증 대부를 지주·자작농, 이들로 구성된 단체·농회 등으로 한정시킴으로써 담보·보증을 제시할 수 없는 영세 소농들은 대부 받을 수 없었다. 실제로 저리 자금을 필요로 하던 영세 소농들은 지주 등이 이미 대출 받은 저리 자금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 재차 빌려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식산은행과 동척의 농사 개량 자금의 아자율은 담보 대부가 7푼 9리, 보증 대부가 9푼 6리였다. 보증 대부시에는 신용이 확실한 사람에 한하여 10인 이상의 연대 채무를 지우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일본보다 금융 금리가 높았던 조선에서 이것을 저리 자금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농촌의 개인 금리, 즉 고리대가 평균 35.2%였던 점과 비교하면 훨씬 대부 조건이 유리한 저리 자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방출된 저리 자금은 주로 지주에게 집중되어 점차 고리대적 성격을 띠어가게 되었다. 결국 토지 개량과 농사 개량을 목적으로 말녀되었던 저리 자금은 고리대로 변질되어 지주·자본가 계급의 농민 수탈을 지원하고 농가 경제를 몰락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금융 독점 자본이 투자를 통해 농업 부문에서 산출된 잉여를 이자의 형태로 가져가고, 그 중간에서 지주를 중심으로 한 농촌 고리대가 중간 착취를 가해 영세 소농의 부담을 가중시키던 이런 상황이 영세 소농들이 자구적인 경제 운동으로 신용조합을 조직하게 되었던 배경이 되었다. 이런 민간의 협동조합을 해체시키면서 금융조합은 1930년대 농촌 진흥 운동의 전개에 발맞추어 식산계를 조직하여 중간의 상인·고리대 자본을 배제하고 영세 소농들에게까지 직접 손을 뻗쳐 농촌 금융을 장악하여 발전해나갔다.(196-197)  일제의 침략 이후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인한 자급자족 경제의 파괴는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의 진행과 함께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요구에 따른 미곡·면화·양잠 등의 농산물의 상품화와 이출, 그리고 농업 경영에 필요한 생산 수단으로서의 비료·농기구 등과 일상 생활의 소비 자료인 의류·직물 등의 일본 독점 상품의 침투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독점 자본은 농산물 가격을 통제하면서 농·공산품간의 부등가 교환을 통해 착취해나갔다.(197-198)  일본 독점 자본의 농촌 지배로 인해 농가 경제는 지속적으로 피폐되었으며, 농가 수지의 만성적 적자 상황, 이에 따른 농가 부채의 누적과 소작농의 증가 추세, 移村 등은 1920~1930년대초의 농촌 상황을 대변하는 특징적인 현상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1930년대초에 첨예하게 드러났고 이에 따라 농민 운동의 열기가 고양되었다. 민간 협동조합 역시 이 시기에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일제는 소농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농촌을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한 국가 독점 자본주의의 지배 체제로 재편성하기 위한 농촌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다.(202)  일제는 3·1운동 이후 민족 해방 투쟁의 열기가 고양되고 반일적 실력 양성의 기운이 거세게 대두되자 '문화 정치'를 표방하고 나서서,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사이비 민족주의인 민족 개량주의를 퍼뜨리고, 실천면에서는 자치 운동을 목표로 삼은 정치 단체의 조직을 통해서 민족 운동의 격화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총독부는 1920년초부터 기만적 '문화 정치'를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 강령으로서 참정권 획득 청원, 실력 양성, 민족성 개조의 3가지를 내걸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부분이 '즉각 독립론'을 외치며 반대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2년경부터 민족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분열시키고 포섭해나가기 시작했다.(207-208)  이런 상황하에서 1922년말부터 1923년초에 걸쳐 '自作會' '조선물산장려회', 그 자매 단체인 '토산물애용부인회'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등의 실력 양성 단체가 방죽이 터지듯 일제히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이르러 반일 청년층이 민족 독립을 위해 벌이려던 민중 계몽·실력 양성의 기운은 1920년부터 총독부가 꾀해온 대로 민족 개량주의자의 주도하에 타협적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들 실력 양성을 한다는 단체들의 운동은 그것이 지닌 비현실성, 대일 타협적 성격으로 인해서 민중의 거부 반응을 만나 본격적 전개 후 고작 1년만에 사실상의 기능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209)  1920~1922년의 발생 초기에 조직된 소비조합들은 각 지역의 유지·청년들의 발기로 창립되었으며 전후 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에 대처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3·1운동 이후 많은 단체들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됨과 아울러 경제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겨 소비조합을 새로이 조직하기도 했고, 기존의 단체에서 그 부속 사업의 일환으로 조직하기도 했다.(212-213)  1920년 4월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는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 규모의 근대 노동 단체이다. 이 단체는 당시의 민족 문제와 노동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의 선진적이고 애국적인 민족주의자 지식인들 및 사회주의자 지식인들과 노동자 대표들이 합작하여 조직한 노동 단체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서울 본회 외에도 전국에 46개 支會를 설립하고 약 6만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을 회원으로 조직했으며, 노동자들을 위하여 노동 강연회·노동 야학·기관지 발행·소비조합 조직·患難相救事業·共濟事業·노동조합 조직·동맹 파업 지도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노동운동의 발전과 민족 운동의 전개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에서는 1920년 9월 1일~2일 서울 본회에서 열린 지회장 회의에서 소비조합 설립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시설부 사업으로서 1921년 7월 1일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을 창립하였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였다. 일본인 노동자의 약 50%밖에 임금을 받지 못하며 기아선상에서 시달리던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나날의 곤란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값싼 일상 생활 용품을 구입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시설부 사업으로 소비조합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216)  1920년 8월에 결성된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와 1922년말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청년연합회 등에서 시작했던 물산 장려 운동은 1923년 1월 서울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고 각 지방에 지부가 결성되면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 물산 장려 운동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서 외래품을 배척하고 토산품을 애용하여 민족 기업을 육성함으로써 민족 경제의 자립을 얻고자 했던 계몽 운동으로 강연회·전단 살포 등의 방식을 통해 전개되어 나갔다. 이 물산 장려 운동은 고조되어가던 반일적 실력 양성의 기운을 완화·조정해 나가고자 일제가 민족 개량주의자들을 내세워 '문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던 상황에서 일제의 정책적 유도에 따라 전개도니 것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가 '문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던 1923년부터 1~2년 동안 활발히 전개되다가, 그 비현실성, 대일 타협적 기만성 등으로 인해 '민립대학설립 기성회' 등의 유사한 실력 양성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곧 유명무실하여졌다. 물산 장려 운동의 주도 세력들은 예속 자본가·친일파·민족 개량주의자가 많은 '民友會'의 간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물산 장려 운동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좌익으로부터의 맹렬한 이론적 비판을 받았다. 즉 식민지하에서 민족 기업육성이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며, 만약 조선 산업이 발전하였다 해도 무산 대중이 자본가에게서 이윤을 착취당하기는 일본 자본가에게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이 운동은 인텔리겐챠가 유산 계급을 옹호하고 무산자의 혁명 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을 받게 되자 물산 장려 운동의 주도측은 이전까지의 선전 활동에서 그 방향을 전환하여 구체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기관들을 조직하고자 했다. 즉 기관지를 발행하고, 헌칙에도 규정되어 있는 소비조합과 생산 기관을 설치하고자 했으며 조선물산진열관 설치 및 조선물산품평회의 개최를 계획하였다.(217-218)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지 1~2년만에 유명무실해지면서 소비조합을 설치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물산 장려 운동이 그렇게 된 데에는 그 자체의 한계와 문제점, 그리고 좌익의 비판뿐만 아니라 일제 당국의 관권에 의한 탄압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일제는 그들이 유도하고 조정하던 실력 양성 운동이라 하더라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동요를 줄 위험이 있는 방향으로 나가면 즉각 막고자 했다. 즉 일제는 물산 장려 운동이 그 목적을 일본 상품·일인 상인 배격으로 연결시키자 즉시 탄압을 했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점에다 간부들의 무성의로 인해 1~2년 동안 활발히 전개되다가 그 이후에는 유명무실해졌다.(219)  소비조합을 조선물산장려회의 중앙 조직 산하에 설립하려는 노력은 실패했으나 각 지방에서 이 물산 장려 운동의 취지에 호응하여 조선 물산 장려에 관한 선전과 소비 절약 등을 위해 소비조합을 조직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들 소비조합들 중 몇몇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점차 의류 등의 필수품 생산에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히고자 노력했었다.(219)  전후 공황의 파급 효과로 인한 경제적 파탄과 3·1운동 이후 이뤄진 민족적 각성으로 고조되던 '반일적 실력 양성 운동'의 기운은 뜻있는 많은 인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과 유도, 그 자체가 지녔던 오류와 한계 등으로 인해 개량적인 운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민족 해방 운동을 위해 지속적인 힘이 될 수 있는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1920년대 초반, 발생기의 소비조합 운동 역시 이런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다고 하겠다. 소비조합은 일본 독점 자본의 침투로 인해 자급자족 경제가 파괴되고 중간의 상인·고리대자본이 유통을 장악하게 되어 수탈이 가중되던 상황에서 전후 공황의 여파가 밀어닥치자 일반 소비자로서의 공동 이해를 기반으로 해서 조직되었던 것이었다. 소비조합은 3·1운동 이후의 사회 운동, 즉 노동 운동·농민 운동·물산 장려 운동 등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나갔다. 이 시기의 협동조합은 그 종류상 주로 소비조합이었으며 1,2년 내에 곧 해체된 원인은 이론적 미숙, 경험 부족 등의 문제와 아울러 소비조합의 조직의 비민주성, 계급간의 이해 상충 등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소비조합 운동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문제점들로 인해 올바른 민족 운동 속에서 그 위치를 제대로 정립할 수 없었던 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221-222)  협동조합 운동의 본격적인 대두는 광범위한 反帝民族統一戰線의 결성이 요청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민족주의 양 계열에서 민족 해방 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조직되고 운동 역량이 성숙되는 가운데 1924년경부터 민족통일전선론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송진우·이광수·최린 등의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민족적 대동단결'의 스로건하에서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제휴(타협적 자치 운동)를 선전하고, 이에 대해 사회주의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제휴에 의한 통일전선을 주장하였다. 당시 외적으로는 코민테른에서 식민지·종속국에서의 반제통일전선 문제가 제기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이러한 외적 상황의 영향과 이보다 더욱 중요한 내적 요인인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는 정치적·사회적 운동 역량의 성숙을 바탕으로 반제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추진되었다. 김성수·송진우·최린 등 '자치 운동파'의 활동에 대응키 위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신간회가 1927년 1월 조직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다시 대두하였다. 조선의 민족 운동이 협동조합이라는 경제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치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26년 5월 재일 동경 유학생들이 동경에서 조직한 협동조합 운동사가 적극적으로 선전과 조직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기독교 청년회(YMCA)의 농촌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협동조합 운동도 1928년부터 그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신파의 전위 행동대인 천도교 청년당이 주도하던 조선농민사 역시 1926년부터 비상설적이나마 알선부를 설치하고 알선 사업을 펴나갔다.(222-223)  이미 상품 화폐 경제에 편입되어 생산과 소비의 상당 부분이 시장에 종속되게 된 조선 농민들은 1920년대초부터 적극적으로 시행이 된 일제의 농정으로 경제적 몰락이 가중되던 상황에서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 풍년 기근을 거쳐 1931년 농산물 가격이 최저로 폭락하자 경제적 파탄을 면치 못했다. 소작농뿐만 아니라 자소작농·자작농까지 모두 몰락의 위기에 처했으며, 도시에서는 노동자는 물론 봉급 생활자들도 생활의 곤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공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들은 상업 자본의 중간 착취라도 배제하여 수지 작자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커졌으며, 이에 협동조합 운동은 활발한 선전과 조직 활동을 통해 급속히 확대되었다. 협동조합 운동은 1930년을 획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아 1931년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수많은 협동조합들이 조직되었다.(223)  민간 협동조합은 그 발전과 아울러 일인 상인, 관제 협동조합인 산업조합·금융조합 등과 경쟁하게 되고 마찰을 일으켰으며, 노동 운동 조직·농민 운동 조직에 부속되어 그 보조를 맞추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또한 협동조합 운동의 주도 인물들이 사상 불온 등의 이유로 검거되는 사태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제 관헌이 이 운동을 위험시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1928년 원산 노동 쟁의가 일어났을 때 勞聯消費組合이 쟁의의 자금 공급소로서 큰 역할을 수해하자 탄압이 일층 격해졌다. 또한 1920년대말 대두하기 시작한 좌익 농민조합에서 관제 협동조합의 배격·철폐를 주장함과 아울러 소비조합 운동을 계급 해방 운동의 한 부분으로 위치지워 활동하다가 1931년 이후 본격적인 좌익 농조 탄압이 시작되자 폐쇄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은 1931년 5월의 신간회 해소 명령과 아울러 대대적으로 가해졌다.(224)  1931년 5월의 신간회 해소와 더불어 사회 운동은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재조직된 좌익 노동조합·좌익 농민조합 등의 제국주의·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적극적 운동과 이들에 대립해서 대중을 그 영향에서 단절시키려는 우경화된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나뉘어졌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일제 관헌 당국은 "이들이 각 농민 획득 경쟁을 벌였으며, 협동조합 운동 역시 민족적으로 또는 계급적으로 경제 운동에 이용하려 하였다"고 파악했다. 신간회 초창기에는 그 지도와 지지를 받던 협동조합 운동이 신간회의 해소 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민족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개량적 경제 운동으로 흐르는 경향이 한편으로 나타나자 일부에서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간회 해소기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기독교청년회, 천도교 조선농민사의 협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하에서 사회주의들의 운동에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던 것이다.(224-225)  극심한 공황의 타개책으로 일제는 만주 침략을 감행하면서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사회 경제적 체제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로서 활용하기 위해 조선에 군수 공업을 육성하였으며, 극심한 농업 공황으로 혁명적 농민 운동이 한층 격해진 농촌을 농촌 진흥 운동으로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자작 농창제를 적극 추진해나가며 1920년대의 지주를 통한 지배 체제로부터 분해되어 몰락해 가는 소농들을 유지·온존시키면서 전시 대비 국가 독점 자본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체제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이러한 지배 체제에로 소농을 연결시키는 일선 기구로서의 금융조합의 활동이 확대되었던 것은 이 시기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소위 라이화젠식 농촌 신용조합이라고 자칭하던 금융조합은 행정 당국의 비호하에 소농들을 금융 독점 자본 체제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하며 더욱 더 발전하였다. 조선농회·금융조합·산업조합 등의 일선 기구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된 농촌 진흥 운동과 함께 민간 협동조합들은 해체되어 나갔다. 연합체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자생적·분산적으로 경영되던 많은 조합들이 경영난에 시달려 파산하거나, 빈농 층과 중 소농 층 사이의 내분으로 해체되기도 하고 산업조합에 편입·흡수되어 버리기도 했다. 또한 1932년 가을이래 강화된 탄압 속에 사상 불온 혐의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거나, 간부가 검거되어 중심 인물을 잃고 와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1933년 5월에는 조선 최대의 협동조합인 평안협동조합의 신용 사업이 은행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기초되었다. 산업조합과의 경쟁에서 나아가 금융조합과 경쟁하게 되자 이를 법적 조치로 금지시킨 이 사건은 협동조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그 발전을 저지하였다.(225-226)  1920년대 중반에 들어 일본에는 유학생을 비롯한 재일 한국인 수가 더욱 증가했다. 이에 따라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재 동경조선청년동맹 등의 재일 한국인들의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다.(231-232) 협동조합운동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5월 24일 창립되었다. 협동조합운동사는 동경의 대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인 조선유학생 14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단체였다.(232)  이들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들 중 다수가 1927년 5월에 창립된 신간회 동경지회의 간부로 활약을 함으로써 협동조합운동사는 신간회와 연관을 맺게 되었다. 신간회 동경지회에서는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협동조합운동사·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신흥과학연구회 등의 각 단체의 지도자들이 그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창립 당시 선출된 신간회 도경지회의 간부 22명 중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는 6명이나 되었다.(232)...1928년 본부를 동경에서 서울로 이전하기 전까지 협동조합운동사는 신간회 동경지회와 일정한 연관 관계를 맺으며 활동했다.(232-233)  협동조합운동사의 사상적 경향에 대하여 「일제하 조선의 치안 상황」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한 줄기임을 선명히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水野直樹는 「신간회 동경지회의 활동에 대하여」에서 협동조합운동사를 민족주의계의 가장 강한 비타협파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1927년 11월부터 전개된 조선공산당계 사회주의자와 서울파 사회주의자 사이의 신간회―'민족협동전선당'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와 입장에 관한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게 조급한 좌익 소아병이고, 어디까지나 소부로조아를 포함한 전민족적인 단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서울파에 입장과 행동을 같이했다. 또한 협동조합운동사의 위원장이던 전진한이 1928년 7월 서울파의 '비이론파 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신의주에서 검거되는 등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들은 서울파의 사회주의자들과 일련의 유대가 있었다고 보여진다.(233)  동경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던 초기의 협동조합운동사의 활동은 1926년부터 동경에서 기관지 『朝鮮經濟』를 월간지로 발행했던 것과 1926년, 1927년 두 해 동안 여름 방학을 이용한 귀국 강연회였다. 1926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간부 전진한 등이 귀국하여 경상남북도를 순회하면서 각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협동조합을 선전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다 경상북도 咸昌(1927.2)·尙州(1927.4)·中牟(1927.4)·豊山(1927.5)·靑里(1927.8 이전) 등의 지역에 협동조합이 조직되어 소농들의 생산품 공동 판매와 소비품 공동 구입, 기타 공동 이익을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 조합들에서는 一人一口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利用高에 의한 배당을 실시하는 등 협동조합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수행하여 그 취지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다음해인 1927년 여름에는 그 취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협동조합운동사 사원 5,6인이 3대로 나누어 전 조선을 4, 50소, 남쪽의 경상도·전라도로부터 충청도·황해도를 거쳐 북쪽의 평남·평북에 이르기까지 약 40일간 500여 리를 여행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233-234)  동경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던 협동조합운동사는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1928년 4월 본부를 경성(광화문 121번지)으로 옮겼다. 동경에서 신간회 동경지회와 맺고있던 관계는 경성으로 이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즉 그 전해인 1927년 12월 지회 100개소 돌파 기념식을 열고 1928년 봄에는 실제 운동의 당면 과제 6개 항목을 제시했던 신간회는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했었다. 신간회가 제시한 6개 항목의 행동강령 중 제5항이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하고 지도한다"였다. 본부를 이전한 협동조합운동사는 이전의 선전에 주력하던 데에서 방침을 전환하여 본격적으로 조합을 조직하면서 각지의 조합들을 연결시켜 연합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236-237)   협동조합운동사의 해체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자료가 없어서 잘 알 수는 없으나 해체 시기는 신간회 해소기(1931.5)와 거의 비슷한 때였다고 추정된다. 협동조합운동사의 간부들 중 일부는 해체된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신문·잡지 등을 통한 선전 활동을 계속했다. 협동조합운동사가 앞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협동조합에 대한 주체적 입장(소농민)과 객관적 조건인 독점 자본 사이에 모순·대립이 존재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인 반독점·반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인식과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수 없으나 그 운동의 기반을 1920년대 초반의 조합들과는 달리 보다 대중적으로 확대하려 했었다는 점에서 볼 때 1920년대초의 발생 초기의 협동조합 운동보다는 일보 전진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40-241)  3·1운동 당시 대중 결집의 매개체로서 큰 역할을 수행했던 기독교는 19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 등으로 교회내의 변화가 불가피하였으며 사회 참여가 요청되었다.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과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해방의 과제를 안고 노동자·농민에의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데 기독교를 하나의 표적으로 삼아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반기독교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청년 지식층의 단체가 그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은 반기독교 운동의 이유로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도구이며 일제의 협조자이고, 망국민의 현실 도피처이며 과학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사상적·종교적 위기에 봉착하게 된 기독교는 경제적 몰락이 가속화되어가던 농촌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는 데 대한 대응책의 일환으로서 농촌 사업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청년회가 주관했던 협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농촌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은 1925년 2월의 기구 개편으로 농촌부가 신설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240)  농촌 사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청년회는 우선 1925년 2월을 기하여 기구 개편을 단행하였다...이로 인해 평양과 원산을 제외한 중앙(경성)·선천·신의주·함흥·대구·광주 등 6개 도시 기독교청년회가 일제히 농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농촌 사업의 내용은 선교 활동·농촌 계몽 및 문맹 퇴치 운동·농촌 지도자 양성 교육·보건 교육·농사 개량 지도(종자 개량·비료 사용법·원예·양잠·과수 재배·임업·농기구 사용 관리), 그리고 협동조합 운동이었다.(241)  협동조합 운동은 1928년 예루살렘대회에 참석했던 신흥우·홍병선·김활란·정인과 4사람이 덴마크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241)...데마크 농촌을 연구·시찰하고 1928년 6월 귀국한 이후 전국 순회 간사로 홍병선이 총책임을 지고 협동조합 운동을 주관하였다. 기독교청년회의 간부들은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조선 농촌의 피폐 원인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① 도시에서 생산하는 공업 생산품은 고가이요, 농촌에서 생산하는 농산품은 저가이므로 농촌은 자기 물건을 염가로 팔아서 고가 물건을 사서 쓰게 된 금일 문명 생활이 근본적으로 농촌을 피폐케 한 것이다. 원래 농촌의 생명은 자작 자급을 하여 유지하는 것인데 자작 자급을 떠나기 시작할 때부터 피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② 공산품은 가격이 한번 올라가면 별로 저락하지 아니하나 농산품은 전쟁시나 그외에 특별한 경우에 일시 올라갔다가 1, 2년 후에 곧 저락이 되는 것이다. 일시 곡가가 올라갈 때는 지가까지 올라가서 지세도 같이 올라갔지만 곡가는 덜어져도 지세는 그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농촌 피폐의 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③ 농촌에서는 생산품을 갖다가 파는데 크게 밑지고 판다. 그 利는 중간 상인들이 먹게 되는 것이다. 도 비료나 기타 공산품마저도 중간 상인의 큰 이익을 주고야 사서 쓰게 되는 것도 농촌 피폐의 한 원인이 된다. ④ 농촌에서는 금전을 융통하는데 고리를 쓰게 되어서 농사하여서는 이익의 대부분을 고리에 빼앗기게 되는 것이 농촌 피폐의 한 원인이다.[………]  ⑧ 농촌에서 자작농도 견딜 수 없어서 자기 소유지를 팔게 되는데 하물며 소작농이란 더 말할 필요가 없이 死地에 서고 있는 것이다. 소작농이 많은 것도 농촌 피폐의 원인이다.(홍병선, 「朝鮮의 農村現象에 對하야」,『衆明』, 1933.7. 1卷 2號, pp51~52.-저자 각주)(242-243) 농촌 피폐의 원인으로 현하 자본주의 경제 제도 제도 속에서의 농공간의 부등가 교환, 교환 과정에 매개한 상업 이윤의 착취, 고리대 자본의 착취, 소작농의 소작료로 인한 이중 부담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에 대한 계몽을 하면서 조합 조직의 전제 조건인 협동과 신용만 있으면 농촌은 소생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하였다. 농촌 피폐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제도, 즉 일제에 의해 일본 자본주의 경제권에 편입된 데에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어떠한 반제·반독점 투쟁으로서의 발전도 모색치 않고 단지 협동과 신용으로써 산업신용조합을 건립하면, 농촌 사업이 성공하면, 농촌이 소생될 수 있으리라는 논지는 체제내적·개량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소극적인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이 1932년 7월부터 실시된 官製主導의 소위 농촌 진흥 운동으로 별다른 무리 없이 포섭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 하겠다.(243)  이렇게 공황기에 계속 확대·발전하던 기독교청년회의 협동조합 운동은 1932년 7월부터 실시된 농촌 진흥 운동의 전개에 따라 점차 관제 농민 운동으로 포섭되어 버렸다.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 내용이 자력 갱생 운동과 유사하여 총독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농촌 진흥 운동이 농촌 부락으로 조직됨에 따라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 조직을 일제는 부락진흥회에 강제로 합쳐버렸다. 협동조합은 부락진흥회에 흡수되거나 해체되어 1935년경에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으며, 1937년에는 중앙의 협동조합연합회도 해체되고 말았다. 1938년에 들어가서는 아예 기독교청년회의 농촌부가 폐지되어 버렸다.(245)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농민에게 접근해가면서 反기독교  운동을 벌이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으로서 일본 독점 자본의 농촌 지배롤 나날이 몰락해가던 농촌 계몽 및 문맹 퇴치 운동, 농사 개량 지도, 그리고 협동조합 운동 등으로 접근해갔다. 그러나 이 농촌 사업은 보다 적극적인 반제·반독점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체제내적 개량주의 운동의 한계내에 머물게 됨으로써 결국 일제의 농촌 진흥 운동에 흡수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기독교청년회의 농촌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협동조합 운동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245-246)  조선농민사는 1925년 10월 천도교 청년당의 주요 인물들을 주축으로 해서 사회의 각계 인사들이 직접·간접으로 참여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비록 천도교 청년당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조선농민사는 崔麟이 이끌던 천도교 신파(총독부는 3·1운동 이후 여전히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던 종교 단체들을 갈라놓고 재편성을 통해서 어용화를 꾀하면서 민족주의자를 몰아내는 방법을 썼다. 이것은 특히 천도교에 대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천도교를 1920년 재정난 타개책으로서의 인원 정리와 '敎憲改革'을 둘러싼 의견 대립을 이용해서 분열을 빚게 하고는 마침내 천도교를 新·舊 兩派로 갈라 놓았다. 그후에도 신구 양파에 더하여  '聯合會派' '六任派'의 사파로 분열시키고, 新派의 두목격인 崔麟을 밀어 주도권을 휘어잡도록 획책했다. 천도교청년당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최린 등 천도교 신파 집단이 조직한 파벌이었다.-저자 각주)의 전위 조직인 천도교 청년당의 주도에 의하여 창립된 단체로서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농촌 계몽 운동 단체였다. 조선농민사는 3·1운동 이후 대두한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층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저의에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의 농민 운동은 조선노농총동맹 대 조선농민사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조선농민사는 처음에는 조선 농민의 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월간 잡지 『조선농민』을 발간하는 일개 잡지사로 출발했으나 점차 그 기반을 닦아 본격적인 농민 운동 단체로 성장해 나갔다. 조선농민사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천도교 청년당의 영향력이 강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1930년 4월 전국대표대회에서 ''법적 관계 3개조안'의 통과를 통해 조선농민사를 천도교 청년당의 직권하에 두게 되었다.(처음부터 천도교 청년당 산하의 단체로 조직하지 않고 개별적 참여의 형식을 빌어 조선농민사를 조직했던 것은 각계각층의 비천도교인을 망라해서 다양한 세력을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저자 각주) 이성환을 중심으로 한 非청년당계는 이를 거부하고 분리하여 全朝鮮農民社를 조직했다. 조선농민사 활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협동조합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변화하고 확대되었다.(246-247)  조선농민사는 1926년 들어 각지에 『조선농민』의 구독을 매개로 한 이른바 社友會와 天道敎 靑年黨 地方黨部 산하의 농민 조직이 확대 발전되면서부터 서서히 하부 조직을 갖춘 본격적인 운동 단체로서 면모를 갖추어가지 시작했다. 이와 함께 알선부 사업이 시작되었다. 즉 1926년 4월에 설치 계획을 발표하고, 10월에는 『조선농민』10월호에 알선부 신설 기사와 함께 전 17조로 이뤄진 '조선농민사 알선부 부칙(안)'을 발표하면서 알선부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조선농민』지를 통해 소비조합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해 왔었다. 1926년 1,2월호에서는 농민들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불균형, 즉 농가 수지의 적자 문제를 논하면서 종래의 계 조직을 시대에 맞게 조정하여 協力社라는 소비·신용조합을 조직하여 관제 곰융조합·산업조합을 이용하지 말고 경제적 능력을 기르자는 주장을 하였고, 매월 연재되는 농민독본에서도 공동 정신을 발휘하여 공동 경작, 농사에 관계된 각종 조합, 또 상공업자의 착취를 막을 수 있는 소비·판매조합 등을 조직하여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협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계몽적 선전에 따라 지방 지부로부터의 공동 구매 알선에 대한 요청이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조선농민사는 알선부를 신설하게 되었던 것이다.(247-248)  조선농민사는 1928년 1월 14일 제11회 중앙이사회에서 社友制를 社員制로 하고 사원의 권리·의무를 명백히 확립하여 일층 유기적 조직체로 변경키로 결의하고, 1928년 2월 14일에 社制 변경을 단행하였다. 조선농민사의 조직이 유기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중앙 집권제가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이뤄진 이 社制 변경으로 인해 지방의 社友會 혹은 조선농민사 지사가 郡 농민사로 확대·발전되었고, 이전까지는 조선농민사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던 천도교청년당 지방당 산하의 농민 조직들이 조선농민사의 하부 조직으로 전격 개체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농민계몽 단체에서 농민 운동 단체로 그 단체 성격을 바꾼 것이라 할수 있다. 이렇게 지방 조직을 일원화시켜 조직을 강화하고 단체 성격을 전환시킨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농민 획득 운동에 대해 민족개량주의자 집단인 천도교 신파가 취한 대응 조치의 일환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소작인조합을 자소작농·자작농까지 포함한 농민조합으로 개편하고 이의 중앙적 지도 기관으로서 1927년 9월 농민총동맹을 창립하여 적극적으로 농민 운동을 전개해 나가자, 최린을 위시한 민족 개량주의자들은 전위 행동대인 청년당으로 하여금 조선농민사 조직을 매개로 하여 농촌 내부의 자기 지지 기반을 확립하며, 농민총동맹과 대결하고자 하였다.(251)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이뤄진 1928년의 社制改定으로 조선농민사는 중앙 집권적 조직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천도교 청년당의 영향력이 중앙에서부터 지방으로 보다 강력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변경된 조직 체계는 里 농민사를 기본 조직으로 면·군·전조선농민사의 4층 체계로 되어 있으며, 각 단위 조직 내에 이사회를 설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중앙이사회와 군 이사회에는 사무부·경리부·교양부·알선부·선전조직부를 두며, 중앙이사회에는 앞의 5부 이외에 조사출판부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알선부는 조선농민사내의 6부의 하나로 위치지워지게 되었다.(251)  1930년 4월 천도교 청년당이 '법적 관계 3개조'를 강제로 통과시켜 조선농민사를 장악한 이후에 알선부는 확대·강화되어 공생조합으로 발전했다. 그 후 계속되는 정관 개정 등의 과정을 통해 조선농민사는 공생조합을 강력한 중앙 통제적 조합으로 만들어 나갔다.(253)  1931년 4월 6일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종래의 알선부를 경제부로 개칭하고, 중앙이사회에서 제안한 경제 사업, 즉 공생조합의 설치를 만장 일치로 가결하였다. 이 공생조합은 종래의 알선부를 확대·개편한 것으로서 조선농민사의 경제 운동 단체였다.(255)  이처럼 중앙의 통제를 받는 중앙집권적 조직일 경우 그 중앙에서 조선농민사를 움직이는 천도교청년당의 성격, 구체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천도교 신판의 영수였던 최린은 이른바 '당면 이익' '자치론'을 내걸고 식민지 통치 권력에 적극 협력했으며, 1930년대에 들어서는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그 전까지의 민족 개량주의자의 가면마저도 벗어던지고 공공연히 친일파를 자처하게 되었다.(258-259)  1920년대말 1930년대초의 극심한 공황기에 소비조합 운동이 상당히 문제시되고, 신간회·근우회에서 소비조합의 조직 문제를 토의하게 되자 좌익의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에 대한 검토를 하였다.  좌익 농민조합은 1920년대말부터 결성되기 시작했는데 그 결성의 계기는 첫째, 1928년 12월의 코민테른 12월 테제였고, 둘째,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비합법 운동으로의 이행이었다. 적농의 결성 방법에는 공산주의자가 새롭게 조직한 것(수원·평택·나주·봉화·영주·김천·고원·문천·북청·풍산 등)과 이미 조직된 농민 단체에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가면서 적색농민조합화한 것(정평·흥원·단천·영흥·북청·성진 등)이 있다.(266)  민간 협동조합 운동은 일본 독점 자본의 침투로 인한 중간 유통 과정에서의 상업 자본의 확대와 이에 대한 독점 자본의 상업 이윤 배제 요구라는 상호 모순을 그 객관적 조건으로 하고, 몰락의 위기에서 중간 상업 이윤이라도 우선 절감하고자 했던 소농민들의 지구적인 노력을 주체적 조건으로 하여 발전했었다. 독점 자본은 지배력이 강화됨에 따라서 농촌을 직접 장악하고자 하는 요구가 켜지게 되자, 중간 상업 자본을 배제하고 장악해나가는 수단으로서 협동조합을 이용한다. 따라서 협동조합에 대한 소농민과 독점 자본의 이해 상충이 격화되므로 협동조합은 그것이 보다 적극적인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반독점·반제 투쟁과 연결되어 그 일 부문 운동으로, 경제 투쟁의 일환으로서 전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독점 자본의 농업 지배를 더욱 합리적으로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뿐이다. 협동조합이 보다 적극적인 반제 투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의 계급적 기반, 조직의 성격, (중앙의)주도 단체의 사회적·정치적 입장 등이 중요한 변수였다.(267-268)  협동조합은 전후 공황과 3·1운동 이후의 사회 운동의 영향 속에서 발생·변화되었다. 초기의 협동조합은 독점 자본의 침투에 대한 농촌의 모든 계급의 대응으로서, 지주·유지의 주도하에 조직되었었다. 그러나 다액 출자자 중심의 비민주적인 성격으로 인해 계급간의 이해가 상충되었으며, 이론적 미숙, 경험 부족 등으로 조직된지 1,2년 사이에 해체되고 말아 신용조합·생산조합으로서의 발전이 불가능했다. 이 시기에는 각 지방의 분산적 조합들 이에도 조선노동공제회·물산 장려 운동 등의 사회 운동 단체에서도 협동조합을 조직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조선노동공제회의 소비조합 운동은 비록 단기간 동안 전개되었을 뿐이지만, 노동자들을 위한 최초의 소비조합이었다는 점과 전체 노동운동의 일 부문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산 장려 운동의 전개에 따라 이에 호응흔 소비조합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어 선전·구매·판매 활동을 벌였으나, 물산 장려 운동 자체가 지닌 계급적 한계(민족 자본 형성을 위한 운동으로서)와 일제의 정책 유도에 따른 개량적 전개로 인해 물산 장려 운동이 1,2년 사이에 유명무실해지면서 그 소비조합들 역시 발전을 하지 못했다. (268)대체로 발생기의 협동조합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민족 해방 운동에 있어 올바른 위치를 정립하지 못하고 말았다.(268-269)  민간 협동조합 운동은 1920년대 후반의 반제 민족 통일 전선의 결성과 대공황이라는 사회 경제적 배경 속에서 당시의 사회 운동·농민 운동이 일환으로서 전개되었다. 반제 민족 통일 전선인 신간회는 행동 강령의 하나로서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하였으며 당시의 농민 운동 단체들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269)  협동조합운동사는 신간회와 일정한 연관 관계를 맺으며, 그 지지를 받아 운동을 전개했으나, 탄압과 내부 역량의 부족으로 신간회 해소기에 즈음해서 중앙 집권적 연합체 조직을 결성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기독교 청년회의 협동조합 운동과 조선농민사의 공생조합 운동은 신간회·협동조합운동사가 해체된 이후인 1932년에 더욱 조직을 확충, 중앙연합체를 결성했다. 이들 단체는 협동조합을 발전시켜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반독점·반제 운동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협동조합만으로 이상촌을 건설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체제내적 개량주의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269) 따라서 반제 투쟁에 기여할 수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독점 자본의 농촌 지배 강화를 위해 중간의 유통 과정을 합리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했으며, 1932년 7월부터 전개된 일제의 관제 농촌 진흥 운동에 점차 포섭되고 말았다. 좌익 농민조합의 협동조합 운동은 좌익농조의 일 부문 운동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전체 운동의 부문 운동으로서의 협동조합에 대한 좌익의 입장은 관제 산업조합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중소농을 빈농 쪽으로 유도함으로써 조직 기반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구이며, 운동의 자금 조달을 가능하게 해주고, 미조직 농민들에게 교육과 선전을 행할 수 있는 기관인 동시에 중간 이익을 배제하여 자본가 기업에 대한 간접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것이었다. 협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청년회나 조선농민사가 협동조합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반제 운동으로서 발전시키지 못한 채 그 테두리 내에 머물게 했던 데 비해서, 협동조합을 전체 운동 속에서 올바르게 위치 정립시켜 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협동조합 잧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반독점·반제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게 연결지워준 것이라 하겠다.(270)
106    방민호,『채만식과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 소명출판, 2001 댓글:  조회:1539  추천:0  2009-05-16
일제 하 조선의 문학인들에 있어 식민지적 현실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문학적으로 의식되고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였다. 조선에서 근대문학이 식민지화 과정과 더불어 배태되어 형성·발전했다는 사실은 당대문학인들의 근원적인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조선 근대문학의 이식성이라 이름지을 만한 이같은 현상 앞에서 당대의 문학인들은 그 근대문학의 독자적 발전이라는 명제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작가와 시인, 비평가들에게 서 그 궤적을 발견하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11)  채만식 문학이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양상 가운데 하나로서 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지적할 수 있다.(15)  본 연구는 채만식의 문학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상호텍스트성, 특히 패로디 경향을 조선족인 근대문학의 수립이라는 문제의식의 발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의 자전적 소설에 대한분석이 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작가적 수리 및 그 대응 과정을 보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문학의 패로디적 성격에 대한 분석은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조선 근대문학의 정체성 추구의 양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16)  상호텍스트성, 좁게 말해서 패로디가 채만식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형상화 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이에 독자적인 조선 근대문학의 수립이라는 그의 문제의식이 집중되어 있다...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내는 여러 기법들 가운데 패로디는 특히 선행텍스트와의 차이를 추구하는 의식적인 모방이다. 모방이되 차이를 통한 독자적인 주제의 추구라는 점에서 패로디는 근대문학의 서구적 모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패로디는 서구와는 다른 근대문학을 수립해가지 않을 수 없는 식민지·탈식민지 문학에서 독자성을 추구하는 매우 중요한 기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패로디는 전유를 통한 새로운 정체성의 수립이라는 탈식민화 기획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식민화 과정은 불가피하게 문화(문학)의 이식 또는 혼합을 초래한다. 이같은 자기 위기 없이 근대적 행정에 들어설 수 없음은 식민지 문화(문학)의 운명이다. 문제는 이 운명을 거절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운명을 어떻게 처리함으로써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확보해 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묻고 답해져야 할 문제이다. 이때 모방하되 모방하지 않는 의식적인 모방으로서 패로디의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22-23)  사회적으로 규정된 '나'라는 존재에의 의식이, 사회라는 것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그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것에 대한 탐구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상황, 이것은 당대 조선의 문학인들이 처한 공통적인 현실이었다. '나'라는 존재에의 몰입이 자기를 제국(帝國)의 심연으로 이끌어 가버릴 수도 있으리라는 불안은 일제 하 문학인들의 정신에 한결같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61)  여성의 해방이 없이는 자아의 해방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72)  부성(父性)의 상실이 조선에 있어서는 식민지화를 상징함은 상식...(83)  그 역사적 보존의 가치가 결여된, 또는 더 이상 그 본질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할 수 없는 정신이 그 무용성에도 불구하고 실재로서 존재할 때 그것은 풍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85)  『태평천하(太平天下)』의 세계는 속죄의 세계가 아니라 죄 그 자체의 세계이다. 어둠의 심연에 빠진 『태평천하(太平天下)』의 인물들은 서로를 얽어맨 관계의 사슬을 끊지 못한 채 끊임없는 싸움으로 날을 지샌다.(86)  본래 주관적 세계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소설'이라 해서 외부적 현실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이는 객관적 현실의 묘사를 지향하는 소설이라 해서 자전적 요소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진실이다. 자기 외부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 내부에 그 그늘을 드리우지 않을 수 없고, 작가는 그가 원치 않는다 해도 그 외부세계를 향한 자기의 태도와 판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102)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상호텍스트성이란 하나의 텍스트를 그 외의 여러 텍스트와의 연관 속에서 분석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요소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패로디, 패스티쉬, 인유, 모방 등 서로 다른 텍스트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의 변증법을 추구하는 모든 기법이 포함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 개념을 주체의 부재성을 드러내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나, 그렇게만 보지 않는 전통적인 이론 또한 무시할 수 없다.(Joseph Childers, Gary Hentzi, 황종연 역, 『현대문학비평용어사전』, 문학동네, 1999, 246면 참조.-저자 각주)](135)  고전의 역할은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따르지 않을 것인가를 규정하는 규범을 제공하는 데 있다.(151)  [패로디는 문학전통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거리와 차이의 기법이다. 패로디스트는 패스티쉬를 구사하는 작가와는 달리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고자 하는 의식이 투철한 존재이다. 자기만의 개성적 스타일을 창조하는 일이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다소 무분별하게 모방하는 경향을 보이는 패스티쉬와는 다릴 패로디스트는 선행텍스트를 보방하되 그와는 다른 별종의 세계를 창조한다. 따라서, 모방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계기일 뿐이다.-저자 각주](152)  대부분의 패로디 작품이 제1기에 집중되어 있음은 패로디 실험이 식민지적 현실에의 대응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152-153)  프롤레타리아문학은 과거의 문학전통을 계승함에 있어 항상적인 장애을 겪을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은 사상의 힘으로 그가 계승해야 할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선별한다. 그런데 그 사상이란 언제나 문학적 이념 이전에 정치적 이념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대의 문학은 그 계승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배제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되기 쉽다. 세련되고 정치한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이라면 이 위험을 어느 정도까지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의 근본적 한계에 속한다.(157)  이처럼, 문학적 가치평가의 척도를 계급성 유무로 평가하는 것은 당파성 또는 당성을 중시하는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당이라는 것이 계급적 의지의 총화라면, 문학적 가치평가는 그 의지의 물질적 실체인 당의 이름으로 평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당파성이 중요한 미학적 범주로 작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의 권리는 국제주의의 원리를 따라 다시 한 번 외부로 위임된다. 문학적 가치 판단의 최종의 주재자는 한 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며 이는 그 문학의 주체성 결핍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은 모더니스트와 문제를 공유한다.(모더니스트가 현대성이라는 척도로 주체성과 전통의 문제를 간과 또는 폐기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 척도가 되는 것은 계급성 또는 당파성이다.-저자 각주)(158)  작가는 여성의 해방이라는 문제가 가정으로부터의 탈출로 완결될 수 없음을, 여성들은 사회적 지배와 억압의 체계를 깨닫고 이에 저항함으로써 비로소 해방의 도정에 들어설 수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166)  서구 근대문학의 유산이 가치로울 수는 있으되 무분별한 수용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채만식은 발자크를 '통한' 주체 재건 대신 발자크를 의식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시공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조선의 근대문학이라는 문제를 자기 문제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KAPF와 방법적으로 단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한편으로는 조선주의(朝鮮主義)의 회고 취미와도 거리를 둘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방적인 서구 편향도, 조선주의도 모두 타당한 것만은 아니라면 남은 것은 양자를 지양하는 제3의 방법밖에 없다.(170)  신화에 대해 신화로서 대응하는 탈식민주의 기획의 현실적 힘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 비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자민족의 전통에 귀의하여 그 속에서 역사적 난국에 대처할 정신적 지주를 발견하고자 하는 경향은 제국주의에 대한 응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232)  본 논문에서 '세대' 모티프라 함은 사회 및 시대 변화의 매개로 나타나는 세대교체의 의미에 대한 관념적 탐색, 신구세대의 등장과 퇴장·상승과 몰락·갈등과 상충의 묘사, 세대적 절망과 희망에 대한 평가 등이 작품의 전개에서 중요한 기능을 할 때 이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넓게 사용하고자 한다. 이로써, '세대' 모티프의 전체적 면모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239)  장편소설 가운데 『태평천하(太平天下)』는 몰락을 목전에 둔 구세대의 퇴폐와 타락을 그린 작품이다.(240)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채만식의 문학활동 과정을 통해 '세대' 모티프 작품은 매우 빈번하고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고리고 이는 당대의 어는 작가와도 구별되는 채만식 문학만의 특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염상섭의 몇몇 작품만이 이에 비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채만식 문학의 고유성을 ld해하기 위한 매개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세대를 문제삼음이 역사적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241)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고 이 인간들이 세대를 누적해 간다. "어떤 주어진 시대에 동일 혈족으로서 3세대 이상이 공존하기는 매우 힘들다."(Edward Shils, 김병서·신현순 역, 『傳統』, 민음사, 1992, 51면.-저자 각주) 이 한정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 문제를 물려받고 해결하며 살아간다. 어떤 문제는 한 세대 안에서 해결되는 것도 있으나, 또 어떤 문제는 그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적 문제인 한에서 더욱 그렇다. 역사는 특정한 세대에게는 언제나 한정된 가능성만을 제공한다. 인간 주체의 역사적 문제의 해결 능력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역사적 상황하에서는 이상선(理想善)을 향한 진보의 가능성이 전무한 지점도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영도의 좌표'라든가 '영점의 시간'이라든가 하는 말은 바로 그 같은 상황을 표현한다. 따라서 역사적 가능성이 소진된다거나 증진된다거나 하는 말이 가능하다.(241-242)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채만식의 문학에 나타나는 '세대' 모티프의 존재는 당대 조선의 역사적 가능성을 묻는 문학적 방식이었음이 드러난다.(242)  채만식 문학의 '세대' 모티프에 어떤 질서를 부여할 수는 없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질서는 채만식의 의식의 질서, 역사 감각의 질서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여기서는 채만식의 다양한 변주를 보이는 '세대' 모티프 작품을 ① 구세대의 몰락에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 ② 신·구 세대교체를 통한 역사적 구원에의 기대를 드러낸 작품 ③ 세 세대 이상의 누적을 통해 역사를 초월한 전망에 접근하고 있는 작품 등으로 분류해 보고자 한다.(242)  전위적 의식은 그 시발점에서부터 이미 과거의 그림자에 침윤되어 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볍고 명랑하게 전진해 가기에는 전시대의 유습이 작가 자신을 너무 깊게 제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근대화과정이 곧 식민지화과정이기도 했던, 아이러니컬한 조선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지배와 수탈의 의도에서 필요한 부분에 한해서만 식민지의 선택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편의주의에 따라, 조선의 근대화는 사회 각 부문의 봉건성이 철폐되지 않고 온존되거나 부분적으로는 강화되기까지 하는 기형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근대화의 과정은 전근대적 요소의 지속과 함께, 그것을 통하여 진행되었다.(244-245)  구세대와 새로운 세대라 해도 자기를 전세대(前世代)로부터 구별지어 의식하지 못하는 이들은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병적이고 퇴폐적이다. 이들은 새로운 세계 앞에서 살아갈 방도를 알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단지 자신의 물리적인 생명을 연장해 가고있을 뿐이다.(247)  『태평천하(太平天下)』는 이와 함께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 사라지지 않을 때 지속되는 퇴폐적이고 병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태평천하(太平天下)』는 윤직원 일가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 조락해 가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의 여분으로, 혹은 잉여물로 유지되고 있음을 여러 장에 걸쳐 드러내고 있으나, 이는 특히 윤직원 영감의 치부 수단이 전(前)자본주의적인 고리대금업이라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254)  윤직원 영감은...전형적인 수전노 타입의 인물이다.(254)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고리대금업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산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255)  윤직원 영감 역시 법으로 금지된 고리대금업에 의존해 부를 유지해 가고 있으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그의 재산형성 방법은 그의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더 큰 원리에 의해 농락 당하고 있다. 언제 어느 때인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그의 파탄은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예정된 파탄이 연기되는 상황은 병적이고 퇴폐적이다. 역사과정에서 생산적인 기능을 상실한 세대와 계급이 자기 존재를 유지해갈 때, 병적이고 퇴폐적인 미는 그 불가결한 구성요소를 이룬다....윤직원 영감에게도 미는 완롱의 대상일 뿐이다....그에게 남도소리로 대변되는 미의 세계는 춘심이 등으로 대변되는 여색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한갓 유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259)  이념이 강할수록 이상주의적인 전망은 강화된다. E라서 사회주의 이념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265)  당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세대 교체는 그 주기가 서구사회의 그것보다 짧았다(270)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물구나무를 서 있는 현실은 정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비정상적인 인물로 간주되도록 할 뿐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정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의 의식마저도 비정상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285-286)  역사를 실재하는 존재들만의 역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고는 '근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탈역사적' 사고는 '탈근대적'이다. 협소한 역사 자체의 맥락을 넘어서 인간 삶의 존재적 조건을 보다 우주적인 시야에서, 또는 보다 초월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때 근대가 낳은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는 해소되지 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310)  종래 조선민족은 자아(自我)·가족(家族)·일가 족속의 본위로만 살아왔으되 이제는 국가·민족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바...(316)  맑시즘과 관련된 이론에서 식민성(coloniality)은 서구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결부된 것으로, 주로 정치·경제적인 차원에서 검토되곤 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내에서 활발하게 조명되기 시작한 탈식민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식민성은 무엇보다 마음, 즉 정신의 문제이다. 일례로 난디(Nandy)는 "정신상태로서의 식민주의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시작된 식민지의 토착과정의 한 과정이었으며 그 근원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정신 속 깊은 곳에 자리하였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시작된 것은 어쩌면 인간의 정신 속에서 끝나야 할 것이다."(Ashis. Nandy, 이옥순 역, 『친밀한 적』, 신구문화사, 1993, 31면-저자 각주)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식민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 그 해결점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일찍이 사이드(Said)에 의해 조명되었듯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타자에 관한 관념의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 문제라면, 식민주의의 극복을 지향하는 담론이 문학을 그 특수영역으로 삼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야말로 억압적인 담론과 전복적인 담론이 서로를 대면하는 가장 적나라하고 예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Leela. Gandhi, 이영욱 역, 『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Postcolonal Tbeory)』, 현실문화연구, 2000, 173~174면 참조.-저자 각주) 특히 문학과 관련된 시점에서 식민주의적 지배와 피지배라는 문제를 검토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텍스트를 통한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텍스트는 다른 어떤 문화·정치적 산물에 앞서 식민권력과 포스트식민적 저항의 가장 중요한 장이다. 제국주의는 지배를 행하는 첫 단계에서, 그리고 지속적인 지배를 위한 근본적 조건으로서 직접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곤 하지만, 이같은 폭력은 텍스트적인 담론의 원조가 없이는 관철되지 못한다. 텍스트를 통한 지배의 정당화야말로 이같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피식민 상태에 놓인 이들은 식민적 지배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담론의 원조 없이는 효과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저항을 수행할 수 없다. 반복하건대, 피식민상태란 정치·경제적인 식민상태 이상으로 정신의 식민상태를 의미한다. 이같은 식민상태의 극복 없이는 비록 정치적인 해방이 달성된다고 해도 식민적 상황은 불충분하게 잠정적으로만 극복된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이론적인 전제이자 주장이다.(325-326)  주제를 관념화할 위험성, 그리고 문학성의 문제를 정치성의 문제로 치환할 위험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관점은 식민지 사회의 문학, 또는 식민지를 경유한 사회의 문학을 이해함에 있어 매력적인 방법으로 간주될 수 있을 듯하다. 그같은 사회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정신의 정체성(Identity)을 확보할 것인가이다. 영상매체가 출현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문학은 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고 보존케 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였음을 상기하면, 식민지·탈식민지 문학인의 고민의 중심점에, 자신이 무엇을 거억·보존해야 하며 무엇을 창조해야 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놓여 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곧 어떤 문학을 할 것인가의 문제로 통한다.(326-327)  식민지 상황에 놓인 사회 또는 식민지적 경험을 경유한 사회의 문학은 어떤 방법으로 자기를 구축할 수 있는가. 이는 지배자의 압도적인 근대성에 노출된 식민지·탈식민지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본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이론은 식민지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모국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의 자기확인이라는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발전해 온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포tm트콜로니얼한 상황에 처한 문학이 자기를 확인하고 수립하는 방법으로 제출되는 것으로는 폐기(Abrogation)와 전유(Appropriation)의 두 가지가 있다. 이들은 애쉬크로프트(B. Ashcroft) 등의 최근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과정의 상호 긴밀히 결합된 두 측면으로 간주될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한 상호 대립적인 두 방법이다. 이때 폐기란 제국의 문화와 미학 및 그것의 적용을 부정하는 것이며 전유는 모국어가 아닌 타자의 언어로 모국어의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폐기의 전략은 포스트콜로니얼한 영어를 통해서는 진정한 자아의 구축을 이룰 수 없으므로 이를 폐기함과 동시에 모국어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화적 본질주의의 입장에서 배태된다. 자기를 찾음은 지배 이전의 언어, 자유로웠던 과거의 언어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전유의 전략은 본질주의적 태도의 이데올로기적인 위험성을 지적한다. 지배 민족이 자국의 언어와 문학을 특권화시킨 것이 잘못된 일이듯이 피지배 민족 역시 자민족의 언어와 문학을 부당하게 특권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 따르면 포스트콜로니얼한 영어의 존재를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되 그것을 그 현실에 처한 이들의 자아 수립을 위한 적극적 수단으로 전화시키는 길이 남아 있다. 이는 혼합주의(syncretic vision)라 불리는 것으로 본질주의와는 다른 탈식민문학의 방법론이다. 제국주의가 자신의 언어 및 문화를 특권화시켰다면 지배에 저항하는 방법론 역시 그와 이형동질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들 수 있다.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의 신화를 경계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로의 낭만적 회귀가 아니라 현실을 수리함과 동시에 비판해 가는 현실주의적 태도이다.(331-333)  물론 일제하의 조선문학은 여러 구속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를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유비는 가능하다. 1920~30년대의 조선문단에서 프로문학과 함께 조선문학을 양분하다시피 한 민족주의 문학은 이른바 조선주의(朝鮮主義)라는 지극히 심정적이고 생리적인 이념에 바탕한 것으로 이는 1930년대 중·후반의 고전부흥론 및 상고주의로 이어진다. 이 일련의 경향은 비유하여 폐기 또느 문화적 본질주의의 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패로디를 중심으로 한 채만식의 조선적인 근대문학 수립론은 전유 또는 혼합주의적 기획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제국의 언어(고전)를 모방하기만 한다면 주체성이란 획득될 수 없다. 그러나 자국의 전통을 강조한다고 해서 곧 진정한 근대적 자아가 수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발 근대화의 길을 걷는 식민지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조선주의나 상고주의는 근대성을 선취한 문학의 경험과 자산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약점을 드러낼 수 있다. 그 왜곡된 경로에도 불구하고 조선문학 앞에는 근대문학을 수립하고 이를 성숙시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놓여 있지 않다면 조선문학은 자국의 전통에서 뿐 아니라 서구 및 일본의 문학으로부터도 더 많은 것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일명 이식문학론적 사유, 즉 서구 및 일본문학의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조선문학의 전통을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한편에 나르시시즘의 위험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자기 몰각의 위험이 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문학은 이 두 위험한 태도 사이에 놓인 좁은 경로를 따라 자기를 수립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상대화함과 동시에 타자 역시 상대화함으로써 새로운 자기, 조선적인 근대문학을 수립하는 길이다.(333-334)  '세대' 모티프의 문제는 역사철학의 문제이다. 즉 채만식의 '세대' 모티프에는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한 행정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당대 조선이 과연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334)  특징적인 것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채만식의 작품에 등장하거나 포괄되는 세대의 수가 점차 확장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식민지 근대라는 질곡적 상황에서 단기간에 헤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므로 채만식의 의식의 저층에 허무주의가 가로놓여 있다고 '전통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자명하지만은 않다.(335)  어느 특정한 시공간에서 이간이 무엇을 어디까지 가능케 할 수 있는가는 구조에 의해 제약된다. 특정한 구조는 무엇을 가능케 할 수도 있고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개인 또는 집단이 무엇을 염원하여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구조가 그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주체의 의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견해를 반박하는 것이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A가 아니라 B를 선택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칫 주체에 신화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적 구조하에서는 A가 아니라 B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존재치 못하거나 또는 A대신에 B를 선택한다 해도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게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역사적 구조하에서 인간 주체에 부여된 자율성은 그다지 많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조금 더 진전시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가능하다. 즉 역사에는 이상선(理想善)의 가능성이 전무한 시점이 있을 수 있다. 최선은 물론 차선조차 불가능한 지점이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영도의 좌표라든가 영점의 시간이라든가 하는 말은 바로 그같은, 가능성 무(無)의 지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시공간 속에서는 사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같은 상황하에서는 다� 역량을 조금씩 비축해 가면서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꿀 시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현실성 있는 유일한 방략이 된다. 이처럼 주체의 의지에 절대적인 권능을 부여하는 '주체의 신화'를 부정하게 되면 개화기에서 일제 시대를 거쳐 해방정국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근대사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논자로서는 그같은 역사적 행정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당대의 세계사적 현실은 한반도에 귀속된 사람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역할만을 할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독립들 상실하고 타력에 의해 해방을 얻고 다시 분단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당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구조적 힘을 능가할 만한 주체적 역량이란 존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필연적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주체들의 서로 다른 행위가 빚어낼 수 있는 결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특정한 구조적 조건하에서는 주체가 비록 의지와 열정을 지니고 성실한 태도를 견지한다고 해도 그 바라는 바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고, 때문에 역사적으로 비극이 실재한다. 구조는 주체의 행동 및 그 목적의 실현 여부를 제약하고 한계 지운다. 그러나 역사에 내재한 이같은 숙명은 빈번하게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사고에 의해 무시되고는 한다. 객관적 현실은 의지나 주장에 의해 쉽사리 변경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상주의자나 교조주의자는 더 바르고 더 선명한 이념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권력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매번 폭력적인 독재를 행사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335-337)
105    김홍기,『채만식 연구』, 국학자료원, 200. 6 댓글:  조회:1738  추천:0  2009-05-16
예술작품의 명백한 원인은 그 창작자인 작가 자신이라는 것, 문학작품은 작가의 관념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 그 관념은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시대의 결과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작품이 반드시 작가 자신의 표현은 아니라 하더라도 작가의 체험이 기반이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의 이해에는 작가의 전기에 대한 고찰은 필연이다. 곧 작가의 생애와 성격 세계관 등에 관한 고찰은 필수적이라 본다.(49-50)  ...현실의 인식과 문학적 실천의 방법으로의 리얼리즘의 조류는 1920년대 말에 논리성을 갖추게 되고, 30년대 전반의 변증법적 리얼리즘, 중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후반의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변전하면서 논의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당대의 어두운 현실극복이라는 대전제와 관련하여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50)  리얼리즘은 현실의 일상적인 문제들의 복사 내지 모사가 아니라,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찾아 이를 '미적 형식으로 반영'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본질이란, 객관적 현실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역사적 환경요소들에 대하여 깊고 넓은 이해와 전망을 드러내야 한다는, 이른바 루카치가 말하는 총체성의 논리에 착안하는 것을 말한다.(51) 크로포트킨(1842~1921)...그는 사회주의 일파 중에서 무정부주의운동 곧 아나키즘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고드윈, 브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으로 이어지는 아나키즘의 근본사상은 '사회적 부의 공동소유'에 목표를 두고 있다. 경제적 공동소유와 사회주의 국가건설이라는 최종 목표에 있어 이들은 다른 유파와 견해를 같이하지만, 폭력적인 수단을 거부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는 만큼, 권력탈취를 수단으로 삼는 조직이나 정당에 의해서 평등사회가 도래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계급투쟁을 앞세우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마르크스 쪽에서 볼 때 분명 이상주의 쪽에 서게 된다. 또 이들은 피동적 혹은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의 양심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들이다. 하여 이런 독립적인 인격체들의 집합체를 민중이라 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주의적 인간관은 중앙집권적 교조주의를 고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격대상이었던 것이다.(79)  무지하고 순박한 농민, 노동자, 소시민의 본성은 천편일률적인 혁명논리에 따를 수 없다. 이들의 미래관은 투쟁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에 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일한 대가에 따른 삶에 자족한다.(88)  사실 1936년부터 38년 말까지의 3년 동안은, 채만식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맹렬한 활동기였다. 이 시기에 가해진 일제의 탄압은, 프로문예 작가들에게는 이데올로기의 탈피를 서두로게 하였고, 대부분의 작가들로 하여금 작품의 관심을 도시와 문명 또는 농촌과 자연으로 확대시켜 삶의 양상을 다양하게 제시하도록 하였다. '묘사론'의 대두, <<구인회>>를 통한 순수문학활동, 심리주의소설의 등장도 그러한 예였다.(109-110)  1939년 초에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되면서 작가들이 군국주의에 동조하는가 하면 그에 다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일제는 급기야 언어를 말살하는 경지에 이르자 채만식의 문학에도 일관성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사건들이 1936년부터 줄을 잇는다. 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이 날로 심해지고, 베를린올림픽대회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신문이 정간되었다. 이어,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암시시켰고, 신사를 참배하게 하였다. 일본어를 국어라 바꾸어 전용하게 하자 민족의 언어가 말살되었다. 지원병제도를 실시하여 전쟁에 참가시켰고,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다. 이어 <대동아신질서운동>을 전개하여 한국민족의 역사는 완전히 단절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어간에 일부의 지식인들은 <조선문예회>(1937.4)로부터 <황도학회>(1940.12)를 결성하여 문인으로서 일본화의 선도역할을 맡게 된다.(110)  한편, 프로문학 퇴조 이후의 비평계와 창작계의 관심은 리얼리즘에 집약되었다. 카프의 두 차례에 걸친 검거가 겉으로 이데올로기문학의 퇴조를 보인 듯 하였지만 내용에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을 통하여 창작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안막, 안함광, 김두용, 한효 등에 의한 논의가 여전히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110)  금광은 1930년대 '조선의 사대광'(잡지 금광 미두 만주를 이름. 우석, 「현대조선의 4대광」,『제일선』, 1932. 9, 82쪽.-저자 각주)의 하나이기도 했다.(111)  절대 권력 아래에는 절대복종만이 있게 마련이다. 즉 권력을 지향하는 가해자들, 그 아래에 굴종으로 일관하는 무리들, 이렇게 양 집단을 이루게 마련이다. 권력 주변의 존재들은, 항상 권력의 중심권에 들기 위하여 위로는 비굴한 굴종자가 되어 아부를 일삼고, 아래로는 잔혹한 학대자가 되어 남을 굴종시키기에 혈안이 된다. 이에 굴종자들은 오직 인내로써 온갖 학대를 감내하는 무한경쟁의 체제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권력 주변에는 기생하는 아류들이 다투어 그 핵심 가운데 부상하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반면, 여기 참여하지 못하는 소외자들은 막강한 권력 앞에 온갖 학대를 감내하므로 삶을 유지하려 드는 것이다. 이로써, 양자는 서로 공생관계가 형성되고 이런 관계는 점차 열도가 심화되어 정신병적인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폭군이나 독재자의 시대가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120-121)  ...왕성한 식욕을 쫓아 대상을 하나 하나 정복해 나가는 마신(魔神)에게 인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이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 나가는 도구이자 소유물일 뿐이다. (123) 리얼리즘의 본령이, 현실의 핵심적 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그에 따르는 여러 문제들을 극복할 인물창조에 있음은 주지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리얼리즘소설의 주인공들은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존재들인 것이다.(134)  어떻든 작가의 이런 매도는, 시대와 민족을 외면한 이기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한 공격이었다. 수난의 현실에서 이탈한 삶에 대한 혐오이다. 곧 수용과 거부의 어정쩡한 '중간적 자세'가 아닌 공격인 것이다.(148)  한편, 「천하태평춘」의 탁월한 성과는 많은 지적대로 그 특유한 서술기법에 있다. 이미 당시의 김남천과 안함광이 지적한 요설체는 이를 말한다....창극의 공연장은 양반계층에 대한 서민들의 통매의 장이었다. 종횡무진 퍼붓는 요설(饒說)은 시공을 초월하여 수난 받은 국민의 감정을 표출하는 통매장으로 연창자나 관객 모두가 대리만족을 얻어왔음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여기 작가는 판소리 연창자로서 직접 그리고 때로는 관찰자로서 대상을 독자 앞에 드러내어 끝없는 타매로써 추락시키고 끝에 이르러 자살하는 "사형집행인"의 특권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결국 권선징악이라는 필연적 결과는, 문학이 일반 독자 대중의 이해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는 그의 문학관과도 일치하기 때문이었다.(149-150)  이렇게 볼 때, 채만식의 풍자소설은,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설화문학의 특징"을 십분 발휘하여 다양한 효과를 거둬들인 장점을 지니고 있다. 곧, 누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고지(告知)의 경로를 통하여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설화문학의 효과는 새롭게 발휘된다. 위 작품에서 극화된 화자는 우둔한 대상을 독자 앞에 내세워 대화에 직접 참여케 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의 우행을 바라보는 기쁨을 만끽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양자 사이에 끼어 든 화자는, 때로 일방적인 요약이나 술회로써 우행을 축소 혹은 확대시키면서 자신의 가치관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설화문학의 특질을 채만식은 이미 30년대에 되살려 자신의 세계관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채만식 소설미학의 하나로 자리잡게 도니 것이라 하겠다.(151)  문인들의 언어를 빼앗는 일은 죽음에 대신하는 형벌이기도 하다. 달리는 문인 모두를 외국에 추방하는 일, 이런 가혹한 형벌을 일제는 한국의 작가들에 가했던 것이다. 1938년 2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칙령으로 발표하여 17세 이상의 남자들을 현역병으로 차출할 길을 터놓은 일제는, 동년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 공포하여 조선의 교육제도를 일본의 교육제도와 일치시켰다. 이로써 중등학교에서 한국어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라 불러 교육하게 하므로 민족의 언어를 말살시켰다. 이어 7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을 전개하면서 1939년 초부터는 전국 각 기관과 부락의 가가호호에 단위별 애국반을 조직하여, '성전(聖戰)'이란 미명하에 국민 모두를 대륙침략에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가혹한 정책의  대리자인 미나미총독은, 1939년 5월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란 임원회를 창설하는 회의석상에서 소위 '내선일체'를 주창하였다. 이른바 '내선일체는 반도통치에 있어 최고의 지도목표로서 양국의 형태는 물론 마음도 피도 육체도 모두 일체가 되는 것이라"(기미지마 가즈히고[君島和彦], 「조선에 있어서 전쟁동원체제의 전개과정」,『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청아출판사, 1988, 165~178쪽 참조.-저자 각주)는 선언으로,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말살하는 가공한 포고였던 것이다. 이런 선언이 있던 동년 10월 29일에는, 이광수, 김동환, 사도우 기요시[佐藤淸] 등이 문인들의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춘원은 이 자리에서 "황국적 신문화창조를 위해서 용왕매진할 것을 선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스스로 '내선일체'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어 1940년 2월에 <창씨개명>이 시행되면서 문인들이 하나 둘 이름을 바꾸었고, 8월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었다. 이로써 '황국식민'이 된 작가들은, 하나 둘 일본어로 쓴 작품을 『매일신보』나 『인문평론』에 게재하여 소위 '황도문학'을 실천하고 있었다.(155-156)  이러한 상황에서도 현실을 거부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맞섰던 작가들이 적지 않았다.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김광섭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적지 않은 작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 혹은 우회로써 비끼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현진건의 「무영탑」(1939)이나 「원효대사」(1940), 김동인의 「대수양」(1941) 등은 역사의 세계로 회귀하거나, 최명익, 안회남, 허준 등의 심리소설은 자기만의 협소한 내면세계로 빠져드는 것들이었다. 계용묵, 김동리, 주요섭, 황순원, 안수길, 최태응, 최인욱 등 신진작가들은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인간성을 존중하거나 무속이나 주술적인 세계에 빠져 삶의 신비와 원형을 찾아 나서는 것들이었다.(157)...한국문단에서의 심리소설은, 30년대 중반 문단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책으로 등장하되 풍자문학과 함께였다.(158)  여기서 말하는 심리소설이란, ...개인적인 면에서 고립되고 유폐되어 무력한 주인공의 심리적 현상, 곧 감각, 기억, 감상, 환상, 통찰력 등의 다양한 정신적 요소를 표출해 내는 소설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법에서,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자아의 내심에 대한 관찰과 비판 그리고 조소는 물론하고 나아가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사용한 소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버트 험프리가 말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정신적 실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언표(言表)이전 수준의 의식상태를 탐색해 내는 소설"(로버트 험프리 저, 천승걸 역, 『현대소설과 '의식의 흐름'』, 삼성문화문고(187), 1984, 15쪽.-저자 각주)인 것이다. 또한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에는 작가가 이야기 가운데 개입하는 '간접독백'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직접독백'이라는 두 가지 경우를 포함한다. 이 두 경우는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가 각기 달리 애용한 수법이기도 하다.(158-159)  한편, 고난에 처한 문학이 사회적 관심에서 벗어나 순수의 세계로 지향하는 일은 흔히 있어왔다. 적자생존의 숨가쁜 현장으로부터 후퇴하여 사생활의 협소한 공간으로 움츠러들거나 내심의 세계로 침잠이었다. 30년 초반의 순수시나 중반의 순수문학도 그러했다. 때로는 표현기교에 치중하거나 도시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복귀도 하였다. 병적이고 퇴폐적인 심리소설의 침잠도 그의 하나였던 것이다.(162)  지식인의 진로가 자의적인 것이 아닐 때, 바꿔 말해서 순응만이 유일한 삶의 길이라 한다면, 때로는 순응 아닌 의미 없는 행동의 반추가 주체적 생존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30년대 말의 지식인으로서 순응을 거부하고 끝없는 사고의 반추를 계속하는 일이야말로, 두텁고 투명한 얼음 속에서 마음과 눈알을 굴림으로 자의식의 존재를 상대에게 확인시키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168)  당시의 문인들이 주동이 되어 활동한 공식적인 단체로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황도학회>, <조선문인보국회>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채만식은 <조선문인협회>와 <조선문인보국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위의 후자는 전자가 확대된 단체였던바,...(187)  문인들이 대일협력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은, 1937년 4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문예회>가 조직되면서부터였다. 최남선, 이광수, 김영환과 일본인 고다이 이노쓰게[高大市之助]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이 단체는, 문예와 연예활동의 정화와 선도 그리고 그 자체적인 통제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이 선도를 구실 삼아 문화계를 통제하고 총독정책을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사실을 문인들은 직감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채만식의 경우에도 이 단체의 결성에 대하여 분명한 거부의 입장이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의 이상>에 반대하면서 '통제'를 거부한 글(「한 개의 사상(事象)으로 봅니다」, 백광, 1937.6.-저자 각주)이 이를 대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무렵에 「탁류」의 연재를 계획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187-188)  1939년 10월 29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문인협회>는, 춘원을 회장으로,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등을 간사로 선임한 친일 단체였다. 이 협회의 결성에 앞서 춘원은 여러 문인들 앞으로 결성 취지서를 전달하였고, ...(188)  40년 후반은 언어가 말살되고 창씨가 개명되던 시기였다.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의 낭독을 강요받던 시기였다. 작가로서 황도정신을 실천해야만 하였던 시기였다. 이듬해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되 <매일신보>만이 간행되고 있었다. <조선문인협회>회원 중에는 창씨를 개명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춘원이 선서한 대로 "황국적 신문화 창조를 위해 용왕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189)  여기서 '사소설'이란, 작가 자신의 신변잡사에서 전기적 세목은 물론 의식과 감정 지각 등에 이르는 내심가지를 드러내는 소설을 말한다. 또한 사소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만큼 화자인 '나'는 1인칭 소설과도 공통점을 갖지만, 1인칭소설의 주인공이 허구의 '나'일 수도 있음을 감안하면 사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또한 화자는, 작가 자신의 체험과 사고의 범위 안에서만 이야기를 전함으로 개인의 좁은 세계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반면, 자신의 모습을 독자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문제에 성실한 해답을 주는 장점을 갖는다고 이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문제란 작가 개인을 넘어서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나아가서 민족 전체의 삶과 원리에 직결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203-204)  1935년 1월 『조선』·『조선중앙』·『동아』의 삼대 일간지가 일제히 취급한 고전문학에 관한 논의는, 우리의 문학유산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학을 건설하자는 데 뜻이 있었다. 이 논의가 점차 학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후반기에는 민속학에서도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어 1938년 6월, 『조선일보』의 「고전부흥의 현대적 의의」는, 민족말살의 현장에서 사라져 가는 자신을 수호하려는 지식인의 내면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가령 역사소설의 유행도 그 하나의 예로 보겠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히 고전에 국한되거나 복고주의 혹은 상고주의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문화의 보전과 발전이라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특히 문단의 거대한 관심사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215)  고래로 민족의 명절 추석은 삶을 정화하는 계기였다. 풍족한 음식과 즐거운 놀이로 삶의 자유와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는 계기였다. 안으로 가족과 친척, 밖으로 이웃과 민족 전체가 동질성을 회복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였던 것이다.(217)   비극의 어원은 희랍어의 Tragodia 곧 '산양(山羊)의 노래'라는 합성어에서 왔다고 한다. 즉 제물로 바쳐지던 양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말이다. 즉, 인간에게 희생당하는 순진한 양의 처절하고도 비통한 절규인 것이다. 신에 바치는 제사를 위해서 무리 가운데 선발된 양은 주인에 이끌려 의기양양하게 따라간다. 그러나 불과 얼마 후 제단 앞에 이르러 죽음을 감지한 양은, 처절하게 울어대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순종이 체질화된 양은 주인의 행위에 배신감을 울음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무기력한 자의 저항은 엄두를 낼 수도 없다. 비통한 울음의 호소만이 유일한 길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죽음 앞에서 절규도 무위일 뿐이다.(322)  문학에 관하여 자기 나름의 인식 없이 출발한 작가란 있을 수 없다.(342)  현재의 사실이나 생활의 단면을 열심히 추상하여 이를 '여실히' 묘사해 내는 데 작가의 소임이 있다고 본 것은 프로베르로 대변되는 자연주의의 작가들의 미의식이기도 했다. 이들은 미의식을 대상의 발견과 묘사에서 두고 있었다. 묘사에 있어 이들은, 대상의 움직임에 따른 성격의 해부나 심리의 묘사라던지 현실 폭로의 비애나 환멸의 비애 등의 묘사를 큰 덕목으로 삼았던 것이다.(343)  젓의 약탈. 세상의 허구 만흔 약탈 가운데도 가장 잔인스러운 약탈일 것이다. 인간에 나온 지 한달 된 놈이 약탈을 당하고 가튼 두 달 된 놈이 약탈을 하는데 거기에 어미가 가세를 해서 저도 한 목슬 따먹고(「문학인의 촉감」(채만식-인용자 주),『조선일보』, 1936.6.6~7.-저자 각주)  제 젖을 빼앗기고 죽은 어린 것, 이 비극의 주저옫'인공에게서 작가는 민족의 현실을 인식한다. (365)  ...그 열정을 기법으로 위장하여 강화된 논리를 피해나가려 한 것이 풍자였던 것이다. 이는 창작불능의 '위기'를 타개하고, 아울러 자신의 파멸과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믿은 것이다. 이는 시대에 대한 '정공법'이 못되어 '문학의 정도'는 아니지만, 부득이 이런 방법이나마 쓰고자 하였던 것이다.(370) 채만식은 당시의 '농민소설'과 '세태소설'에 대하여도 특이한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농민소설은, 소재와 무대가 반드시 농촌이어야 함은 물론 그 생산과정을 취급하되 농민의 절실한 생활감정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작가의 소시민적 연민에서 만들어진 농촌소설이란 영원히 닫혀진 철비(鐵扉)를 여는 일에 비유하였다.(371)  여러 각도에서 보는 그의 풍자문학은, 요컨대 죽음의 현실 앞에서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 역설이 다름 아닌 방법이요 기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비극의 현실을 사욕과 안위를 도모하는 일에 이용하는 내적 존재들에 대해서였다. 여기 그 구체적인 세목을 대로내지 못한 점은 작가와 더불어 시대적 한계라 말할 수 있다.(371)  사실, 자연의 미를 보편적인 가치기준으로 논할 수는 없다. 자연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을 주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때로는 한없이 냉정하고 비정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자연의 미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요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라 말할 수 있다.(397)
104    문학과사상연구회,『채만식문학의 재인식』, 소명출판, 1999 댓글:  조회:2152  추천:0  2009-05-16
하정일, 「채민식 문학과 사회주의」  따라서 이념을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는 것은 자칫 단순화의 우를 범하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필자는 논의의 편의상 일단 이념이 '세계에 대한 상상적 관계의 표상'(루이 알뛰세, 김동수 역,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 107~10면-저자 각주)이라는 알뛰세의 정의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념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세 가지 정도의 유용성을 갖는다. 첫째는 이 정의가 이념이 세계에 대해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와 중요한 관련을 갖는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념은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거기에는 세계에 대한 관계가 각인되어 있어서 관계의 방식에 따라 다종다양한 이념들이 산출된다. 이를테면 부르좌의 이념과 노동자계급의 이념이 다른 것은 양자가 세계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관계 개념이 없다면 두 계급이 서로 다른 이념을 선택할 객관적 근거가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둘째는 알뛰세의 정의가 이념의 '상상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상상적'이란 말은 이념이 현실과 다른 환상인 동시에 현실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이념은 환상을 통해 현실의 어떤 본질-곧 세계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는 이념은 결국 상상적인 것이라는 알뛰세의 정의가 문학과 이념의 친연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문학은 상상적 허구라는 점에서 이념과 통한다. 문학적 현실 반영이 기계적 반영과 다른 이유 중의 하나도 문학이 이념을 매개로 현실을 재구성해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알뛰세의 정의는 문학적 현실 반영의 특수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80-81)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에서 이념비판은 가능하다. 인간의 정신적 산물들이 이데올로기를 넘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하지만 문학에서 이념 비판의 가능성이 보다 극대화되는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면서 거부"하는 문학 특유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이렇게 문학과 이념의 이중적 관계를 설정하고 보면, 문학에서 이념이 행하는 미학적 역할이 무엇인지가 좀더 선명해진다. 문학은 맨몸으로 현실과 만나지 않는다. 문학과 현실의 만남은 언제나 이념을 매개로 한다. 요컨대 문학은 현실을 사진처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란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새로이 재구성한다. 그러나 문학은 동시에 이념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병행한다. 그럼으로써 이념의 자기 모순을 폭로하고 이념 특유의 허위의식을 넘어서게 된다. 문학이 현실의 재구성이면서도 현실의 진실한 재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문학에 고유한 이념 비판적 능력 덕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자기 성찰적 이념의 형식인 것이다.(83)  문학이 자기 성찰적 이념의 형식이란 사실은 이념의 미학적 역할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념의 이중성으로 인해 완전무결한 이념이란 존재 할 수 없으므로, 이념을 매개로 한 현실의 예술적 재구성이 현실의 진실한 재현으로 이어지려면 이념에 대한 성찰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 된다. 그런데 이때의 두 과정-현실의 재구성과 이념 비판-은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있는 일종의 원환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념을 매개로 한 현실의 재구성 자체가 현실의 예술적 재현의 한 과정이며, 그 재구성은 이념 비판을 통해 또 다시 재구성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재구성도 재현의 또 다른 한 과정이니, 이념에 바탕한 현실의 재구성과 이념 비판을 통한 현실 재현은 작품 속에서 사실상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두 과정을 통합시켜 주는 구심점이 바로 자기 성찰적 이념이다. 다시 말해 작품에 개입하는 이념이 본래부터 자기 성찰적 이념이기 때문에 이념을 매개를 한 현실의 재구성이 곧 이념 비판일 수 있는 것이다. 날 이념의 직접적 침투가 항상 문학의 파탄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83-84)  그러면 성찰된 이념이 문학에 개입하는 구체적 방식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으로 두 가지 정도를 거론할 수 있겠다. 하나는 선택 원리이다. 이념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별하고 선택하는 준거로 적용한다. 이러한 구별과 선택을 통해 작품 내부의 위계가 잡히며 그럼으로써 서사적 통일성이 성취된다. 루카치가 '전망'이라고 부른 것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판단 원리이다. 말하자면 인물과 사건에 대한 태도 표명인데, 이때 태도 표명이란 작품 내부의 세계에 대해 일정한 태도-비판적이냐 긍정적이냐 등등의-를 취한다. 이 태도에서 독자는 작가가 작품 내부의 세계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즉 작품의 이념을 유추할 수 있다.(배제 또한 선택과 판단의 한 방법이다.그런 점에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역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재현의 부재(不在)가 재현이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저자 각주)가령 노동자의 파업이라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작가 혹은 작품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이념은 사회주의가 될 수도 있고 자본주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84)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항은 선택 원리로건 판단 원리로건 이념의 작품 개입은 인지적·논리적 형태만 취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인지적·논리적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일반적인 형태는 월리엄즈가 '정서의 구조'라고 부른 것과 비슷한 모습을 띤다. 명시적이고 정형적인 이념 체계와 달리 문학은 세계에 대해 '정서적으로' 대응한다. 이때 정서란 윌리엄즈의 설명을 빌리면 '느껴진 사고', 다시 말해 사고와 감정의 통일체인데, 윌리엄즈는 이러한 정서가 "상호 관련적이면서도 긴장 관계에 있는 특정한 내적 연관을 지닌 하나의 세트"로 '구조화'된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규정한다.(에이먼드 윌리엄즈, 이일환 역, 『이념과 문학』, 문학과지성사, 1982. 166면-저자 각주) 문학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이념은 작품 속에서 정서로 용해되면서 비로소 미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념의 미학적 역할을 규명할 때 이념이 '정서의 구조'와 맺고 있는 관련상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체로 이념의 미학적 수준은 이념 자체의 내용적 질보다 이념과 '정서의 구조'의 융합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84-85)  윤직원에게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현실은 '태평천하'인 반면 사회주의는 "세상 망쳐놀 부랑당패"이다. 이 선명한 대비를 통해 독자들은 진실은 반대임을 느끼게 되는데, 왜냐하면 식민지 자본주의가 얼마나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인지는 누구보다도 독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식민지 자본주의=태평천하라는 윤직원의 인식은 자기 풍자를 통해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  기능을 하는 것이다.(95)  사회주의 문제가 결말부에서야 등장하는 점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윤종학을 맨끝에야 등장시킨 것은 사회주의 문제를 작품의 마지막 부분으로 돌리기 위해서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작가의 전략은 이념의 역할을 간접화하기 위해서인데, 그 미학적 효과는 참으로 적절하다. 독자들은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식민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가의 숨겨진 준거가 사회주의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독자들이 마지막에야 비로소 사회주의가 식민지 자본주의에 대한 선택과 판단의 원리로서 매개적으로 기능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념의 직접적 작품 개입이 최대한 억제되면서 이념에 내재하는 허위의식이 현실을 왜곡할 위험성을 최소화시켜 준다. 따지고 보면, 독자들은 사회주의와 상관없이 윤직원의 부정적 형태를 지켜봐 왔다. 결말부에서 사회주의가 윤직원을 풍자하는 숨은 준거로 작용했음을 알게 되지만, 그것이 그 이전까지의 서사 구조를 훼손하거나 하는 바는 전혀 없다. 다만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나아가 작품이 식민지 자본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상상저거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좀더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단서를 제공할 따름이다. 요컨대 『태평천하』의 결말부는 사회주의의 절대화를 피하면서 식민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되새겨 보도록 하는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95-96)  『태평천하』는 거대한 풍자의 그물망을 이루게 되는데, 이 거대한 풍자의 그물망이야말로 『태평천하』 특유의 '정서의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풍자의 그물망은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거시 '구조'에 대한 '구조적'인 정서적 태도 표명, 즉 식민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거부감을 극대화하는 미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태평천하』의 풍자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다양한 요소들이 체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사회적 구조이다. 이러한 거시적 구조에 대한 대응이 단편적이거나 산발적일 경우 그것이 창출하는 예술적 호소력은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태평천하』는 풍자의 그물망을 통해 식민지 자본주의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을 '구조화'한다. 『태평천하』의 식민지 자본주의 비판이 강력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은 이로부터 기인한다.(97-98)  미학적 조종중심의 부재는 제재들에 대한 선택과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선택과 판단이 없는 한 부분들의 유기적 통일은 기대하기 어려워지기...(100-101)  본고가 이념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념이 전형적인 근대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라서 근대문학은 좋든 싫든 이념과 일정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특히 한국 근대문학의 경우 이념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해명은 한국문학의 근대성의 한 본질적 국면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다.(101)   양문규, 「1930년대 후반 채만식 소설의 리얼리즘 문제」  『태평천하』(1938)는...구한말에 요호부민층으로 출발하여 한일합방 이후에는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로서 사업자본을 축적한 윤직원과 그에 기생하는 윤씨 일가족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퇴폐성과 그들의 필연적 파멸을 그리고 있다. 특히 윤직원 같은 상업 고리대 자본가들이 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사실을 객관적 현실 위에서 반영했다는 점에서 그 리얼리즘적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104)  1930년대 후반 채만식 소설의 온전한 리얼리즘적 성취는 거의 유일하게 『태평천하』 정도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30년대 후반 소설중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작가의 역사적 전망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에서만큼은 적어도 작가가 중일전쟁을 전후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통해, 사회주의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반파시즘 인민전선 및 일본의 군사적 모험에 다른 제국주의의 위기 가능성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사적 전망을 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전망을 바탕으로 했을 때,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에 기대고 있는 윤직원 같은 식민지 부르좌의 반역사성을 현실의 본질에 비추어 풍자할 수 있었다.(121) 한수영, 「비판적 리얼리즘의 성과와 1930년대 후반 채만식의 소설미학」  역사 이해의 프리즘에서는 이민족의 침략과 억압,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제도로서의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일과, 일체의 봉건적인 구습으로부터 탈피하는 과제가 3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면, 소설사 전개의 이해를 위한 프리즘은 역사의 그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훨씬 좁고 구체적으로 변용된다. 이를테면 소설사에서 30년대 후반이 가장 문제되는 것은 '장편소설'의 성격과 발전에 관한 논의일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리얼리즘의 진정한 모색과도 맞물린다. 30년대 문학사에 놓은 과제가 크게 '진정한 리얼리즘의 모색'이라면 소설사에서는 '장편소설'의 문제로 구체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문학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장편소설에 대한 가장 진지하고 본격적인 탐구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이 무렵이었고, 동시에 문예학과 미학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모색했던 때가 30년대 후반이라고 할 수 있다.(125)  어떤 소설이 하나의 생산양식을 부정하고 그 생산양식의 극복을 모색하고자 할 때, 그 소설이 부정하고자하는 그 생산양식의 극복의 필연성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 줄 수 있는가, 혹은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내적 동의(內的 同意: 그람시의 표현을 빌어)의 견고함은 대체 어디서 미롯되고 있는가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126)   최현식, 「문학가의 이상과 생활인의 비애」  그는(채만식-인용자 주) 근대 이전의 지식인의 사회적 운명은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된다...이는 조선시대를 상기해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전근대 사회에서는 계급에 따라 권력과 지식의 소유 여부와 그 정도가 결정된다. 이처럼 계급과 권력과 지식이 일치하는 사회에서 지식인은 전인적(全人的) '교양'의 습득과 우민(愚民)의 교화라는 임무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자본이 곧 권력인 시대, 그리고 자본의 논리가 지식의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시대인 근대는,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지식의 천대(賤待)의 시대"이다.(189)  일정비율의 산업예비군의 지속적 창출이 자본주의를 지탱해 가는 힘이라는 정치경제학의 논리...이 논리의 핵심은 자본주의에서 일정한 실업률의 창출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효율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한 교묘한 전략이라는데 있다.(190)  이 논리를 수긍할 수 있다면, 채만식의 '문화예비군'의 논리는 식민지 자본이 수행하는 그런 경제논리 이상의 어떤 것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일제는 '식민지 자본'의 요청에  충실하기 위해 특히 각급 학교(공교육)의 제도화를 통한 '식민지 근대적 인간형의 형성' 에 주력하였다. 철저히 체제 순응적인 기능인의 양성("면서기를 공급하고 순사를 공급하고 간이 농업학교 출신의 농사 개량기수를 공급하였다",「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전집』7권, 53면-저자 주)은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이를 통해 식민지 수탈의 효율성을 제고함은 물론 잠재적 저항세력의 성장과 출현을 저지하는 이중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190-191)  인텔리의 몰락은 그들이 생산의 직접적인 담당자가 아닌 일종의 기생적 존재라는 점과, 그럼에도 '광명의 보지자(保持者) 인류문화의 건설자'라는 소시민적 허위의식을 폐기처분하지 못하는 '부동하는 무리'라는 점에서 필연적이다.(193)  콜린 윌슨에 의하면, '아웃사이더'는 자신이 속한 세계가 무가치한 세계임을 알면서도 거기서 어떤 목적과 방향을 찾는, 그리하여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진리(혹은 삶의 진실)는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끝내 옹호하는 자이다.(콜린 윌슨, 이성규 역, 『아웃사이더』, 범우사, 1994, 18~19면-저자 각주) 여기서의 '진리'는 '확실성'과 그리 다른 것이 아니다. 사실 채만식은 늘 자신이 목적하는 '진리'가 현실에서 좀처럼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냉혹한 현실과 자신의 삶에 메스를 들이댐으로써 누구보다 강렬하게 새로운 인생을 건축하기를 꿈꾸었다.(195)  ...파시즘은 반외세와 반봉건이란 착종된 과제의 완수를 통해 '완미한 근대'의 성취는 물론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의 극복을 꿈꾸었던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역사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는 야만적 사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 앞에서 리얼리스트건 모더니스트건 할 것 없이 당대의 무인들은 진리 기준으로서의 역사적 합법칙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 까닭에 미래에 대한 어떠한 전망과 기획도 불가능하다는 불확실성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196-197)  이 같은 역사적 방향성의 상실이 1930년대 후반 우리 문단에 주체의 위기와 더불어 소설의 존립 근거인 '생활', 곧 '현실성'의 실종을 불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197)  잘 알다시피, 당대의 문인들은 파시즘에 포위된 현실을 지성(합리적 이성)으로 파악 불가능한 '사실의 세기'로 규정하면서도, 아이러니칼하게도 그것의 승인을 통한 '새로운 문화정신의 발견'을 그런 현실의 돌파구로 상정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 대다수는 일제가 대동아공영이란 미명하에 제시한 '신체제' 논리를 '새로운 문화정신'으로 추수하고야 마는 경정적인 오판을 저지르게 된다. '신체제'논리는 무엇보다 '근대의 초극', 즉 동야적 휴머니즘과 생산의 국유화-공정한 분배에 바탕한 전체주의의 극복을 목표로 했다. 내선(內鮮)이 하나가 되어 몰락한 서구를 대신하여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논리, 당시에 생산된 여러 작품과 평론들을 참조해 보건대, 이것이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그 본질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사이비 확실성'으로 작동했음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198)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이들의 논쟁은 이미 프로문학 운동이 불가능해진 1937년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벌어진 이 논쟁의 중심에는 당대 현실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창작방법의 문제가 늘 자리잡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프로문학 진영이 작가란 모름지기 선명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정당한 발전을 위해 투쟁해야 된다는 문예운동의 논리를 주로 내세운 데 반해, 채만식은 생활현실의 밀착적 취재와 그 표현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201)  주지하다시피, 이 논쟁은 "카프작가가 아니면서도 카프의 예술적 강령에 추종하려는 경향을 가진 작가", 다시 말해 "카프의 수반자(동반자-인용자 주)로 인정되던 작가들을 어떻게 계도하고 획득할 것인가 하는 카프내부의 관심으로부터 촉발되었다. 이 논쟁은 처음에는 카프진영 내부의 논쟁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진오, 이효석 등과 함께 '동반자 작가'로 인정받고 있던 채만식이 그의 작품들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작품과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작품'이니 '민족주의 문학'이니 하고 혹평했던 함일돈, 이갑기(필명: 현인) 등의 프로 비평가들에게 반론을 제기하면서 급격히 확전된다. 이들에 대한 채만식의 반론은 그 나름의 올바른 프로문학의 위상을 바탕으로 당시 카프의 문학 행위 전반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작(自作)에 대한 단순한 옹호를 훨씬 넘어선다. 그는 이 논쟁들을 통해 작품의 성공과 실패, 의미와 가치의 유무 등을 계급성의 여부로만 판단하는 카프의 공식주의와 도식주의에 항(抗)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당시 정세에서 카프가 과연 올바른 계급문학 운동조직일 수 있겠는가 하는 카프 정체서엥 대한 회의까지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201-202)  프로작가의 기교의 미숙성을 문제삼고 있는 주관적 조건에 대한 비판은 익히 보아온 장면이다. 그러나 '계급적 예술진영'의 불충분한 형성이 계급문학의 성립을 가로막았다는 객관적 정세에 대한 비판은 그의 프로문예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은 물론 작가적 세계관과 관련하여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채만식은 이 글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이 당시 현실을 프로문예운동이 제대로 수행될 수 없는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이 당시 조선은 급속히 군국주의화한 일제의 정책에 따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전락해갔으며, 사상운동에서도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일정한 계급적 기도 하에서 구체적으로 진전시킨 조직적 작품행동"을 진전시키려던 카프의 문예운동 역시 상당부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채만식이 이러한 현실을 염두에 두기는 했겠지만, 그러나 그의 카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다음과 같은 소극적인 현실관에서 기인한 면이 크다고 생각된다. (프로문학 작품은) "그러할 때가 와야만 그러하게 되는 것이지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역사를 앞당겨 쓰지는 못하는 것"이라는 언급에서 보듯이, 그는 사회 역사적 조건이 충분히 숙성된 연후에야 프로문학 작품의 성립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발언은 분명 현실을 도외시한 채 이미 완성해놓은 낭만적 관념에 봉사하는 카프의 '반(反)리얼리즘'적 태도를 공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점은 카프가 근로대중과의 유기적 관계맺음이라는 운동목표에 현저히 미달하고 있다는 비판하는 이 글의 후반부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용 논쟁을 조선의 현실을 무시한 채 "해외에서 논의되는 문예이론을 생겨나는 대로 집어다가 조선문단에 인식하려"(「문예비평론」,『조선일보』, 1934. 2. 15~16; Ⅱ, 52면)는 무모한 시도로 강하게 비판하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205-206)  임화는 「세태소설론」(1938. 4)에서 세태소설의 대표적 예로 박태원의 『천변풍경』, 채만식의 『탁류』 등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묘사를 전부 세부묘사에 국핞고, 소설을 '시츄에이션'의 집하불로 짜개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세태소설의 묘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함을 목적으로 하는 진정한 묘사의 기술"(리얼리즘의 세부묘사의 진실성)과는 거리가 먼 자연주의적 묘사 방법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음을 비판한 것이다. 임화는 그 한계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가정신의 분열을 든다. 그에 의하면, 이른바 '말하려는 것과 그리려는 것'의 분열로 명제화되었던 그 분열은 시대적 이상(理想)과 현실의 극단적인 부조화를 통해 그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나아가 그 관계를 역전시키려는 노력을 마다한 채, "묘사되는 현실의 양(量)의 풍다(豊多)함에 가치"를 두는 안이한 작가정신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207)  ...임화는 '작자의 적극적인 의지'가 만들어내는 낙관적 전망의 부재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함", 즉 '전체성' 통찰의 결여를 세태소설의 근본적인 취약점으로 보고 있기...(208)  말의 바른 의미에서, 1930년대 문학사에서 채만식은 염상섭과 더불어 임화가 말한 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 가장 특출난 재능을 발휘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바 현실의 실감에 바탕한 '생활표현'의 문학은 말 그대로의 '주어진 현실'의 관찰과 묘사에서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한 한계 역시 노정하고 있다. 채만식 문학 전반에는 현실의 전체적 연관이나 그것의 변화를 추동하는 어떤 역동적인 힘보다는 이미 '주어진 현실'의 부정성이 압도적으로 포착되고 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이 무엇보다 채만식의 현실에 대한 패배주의적 시각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에 대한 니힐리즘적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카프에 대한 부정의 논리에서 보듯이, 그는 현실의 '객관적 정세', 혹은 '사실'로서의 현실논리에 지나치게 압도되어 있었다. 세계가 어떤 합법칙성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현실감각은 현실의 폭력성에 대한 두려움과 아울러 그 현실에 대한 불신을 끊임없이 증폭시키게 마련이다. 그로부터 현실(세계)은 근본적으로 변화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니힐리즘적 사유가 생겨나고 심화된다. 이러한 사정은 당연히 그가 세계의 부정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그 부정적 시선은 그의 말마따나 "부정면을 통하여 기실 긍정면을 주장하기 위해서의 부정면"(「자작안내」Ⅰ, 520면-저자 주)에 대한 관심이랄 수도 있겠다. 반복되는 지적이지만, 실제로 그는 이 주장에 합당하게 많은 작품에서 당시 현실의 부정적 세태를 절묘한 비꼬기(푸자, 아이러니)의 언어로 해부해낸 바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예각화된 부정적 현실은 그것의 개선이 절실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비꼬기가 만성적 환멸의 상태에서 행해지고, 그래서 부정면이 지나치게 전경화(前景化)되어버린 나머지 그 안에 담긴 어떤 '발전적인 활력', 이를테면 식민지 현실과 타락한 근대의 극의지 같은 '미래의 기획'마저도 상당히 잠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부정적 대상(현실)에 대한 개선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독려하는 비꼬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흐릿해짐은 물론이고, 그 현실에 대한 분노 역시 상당부분 비생산적인 감정의 소비로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소망했던 진정한 리얼리즘에서 점차 미끄러지는 작품현실과 등가관계를 이루는 사태이기도 했다.(208-209)  그는(채만식-인용자 주) 여기서 '인간성의 무시와 현실에 맹목인 것'을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선배작가들은 프로문학을 "이데올로기를 강제 주입했고", "인간성을 전연 무시하였고", "현실을 극단으로 왜곡시켜 가지고, 거세된 문학인 선전비라"를 제작했다고 비난했지만, 그들 역시 이를테면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역사소설, 여전히 문명개화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선전하는 농촌계몽소설 등과 같은 내용(이데올로기)만 거꾸로 선 프로문학의 생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211)  루카치는 모더니즘 예술이 인간존재의 변증법적인 총체성을 추구하는 대신 파편화된 근대사회에서 인간들이 경험하는 불안과 공포를 병적으로 과장함으로써 현실을 왜곡함은 물론 퇴폐주의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고도의 미학적 자의식에 바탕한 모더니즘 역시 리얼리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훼손하고 사물화시키는 근대사회의 폭압성에 저항하려는 미적 형식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213)  '유일성'의 관점은 대개 그것을 기준 삼아 자기 삶을 향상시키고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취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현실을 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거절하게 만들며, 그것의 대상이 된 가치들을 이데올로기화시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맹목적인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가치들의 실현이 자꾸 유예되거나 그것들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이 닥칠 경우, 주체가 정신적 공황(恐慌)의 상태로 빠져들 가능성이 훨씬 커지게 된다는 점이다.(214)  문학이 곧 생활인 것이 작가적 삶의 본질이라...(216)   자기 보존이나 실현을 위한 출구가 모두 막혀버린 상황에서 주체가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하나가 삶의 무의미성이 강요하는 니힐리즘과 환멸의 영원한 노예가 되는 것이라면, 도 다른 하나는 그 '신념'을 대신할 어떤 '모조품'을 들어 앉힘으로써 '행복의 약속' 혹은 '확실성'의 의지를 다시 가다듬는 것이다.(217)  모조품은 본질이야 어쨌든 겉보기에 진품과 엇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질적 수준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야 그 효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조품을 대속물(代贖物)로 삼는 주체의 변신을 제대로 설득하고 합리화할 수 없다. 이 당시 '신체제론'은, 내용의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논리만 놓고 보자면, '사회주의'(진품)가 제시한 것 이상의 완벽한 세계상을 보여주고 있어 '모조품'으로서의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채만식의 다음 글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 새로운 시대의 창조 즉 세계 신질서 건설을 누구보다도 먼저 시초(始初)를 낸 것이 일본제국이니 저 소화(昭和)유신이 바로 그것이다. 명치(明治)유신이 낡은 봉건주의의 자유주의적이요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에의 지양이었다고 하면, 오늘의 소화유신은 이미 발전의 극에 도달한 자본주의를 다시 '신질서'에로 지양함일 것이다. ......가령 파시스트 이태리의 조합주의랄지 나찌스 독일의 전체주의랄지 소비에트 노서아의 국가사회주의랄지처럼(무슨 주의 운운의 명칭상 규정이 생길지는 모르나-인용자), 그러나 제국의 그것은 상게한 제 외국의 그것과 우선 파계가 다를뿐만 아니라 아직껏은 '신체제'란 이름 밑에서 실질적으로 운동만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참이다.아무튼 그리하여 우리는 방금 자유주의 등의 낡은 시대를 벗어나 그 낡은 시대와 확연히 구별이 지어지는 한 새로운 싣o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뚜렷한 사실인데, 한편으로 이미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가 서식하는 시대적 사회적 현실을 떠나서는 감히 존재할 수 없는 생리인 이상 그는 반드시 이 새로운 시대에 순응을 하게 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시대를 배경하는 문학」(『매일신보』, 1941. 1. 5, 10, 13~15;;Ⅱ, 235면)  이 글은 당시 '신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제출된 일본 쪽이나 우리 쪽의 여러 글들, 그리고 앞서 씌어진 그 자신의 「문학과 신체제-우선 신체제 공부를」(『삼천리』, 1941. 8)과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국책선전을 위해 강요된 글이란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체제론이 자본주의 극복에 대한 그의 신념을 포괄하고도 남을 만큼 논리 정연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곧 그의 신체제 수용이 어느 정도는 자발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당시 신체제론의 핵심적인 모토는 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동시적 지양, 곧 '근대(서구)'의 초극, ② 동아시아 통일을 통한 '근대'를 대치할 새로운 문명(동아문명)의 건설이었다. 그리고 신체제론의 주창자들은 그것을 뒷받침할 사상적 길잡이로 공동사회(Gemeinschaft)를 인륜관계를 핵심으로 하  동양적 휴머니즘을 내세웠다. 이런 내용은 동양변방의 피식민지 민족의 일원으로서 근대(서양) 따라잡기와 그것의 극복이라는 모순적 과제와 싸워왔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충분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신체제론의 미학적 번역물인) 친일문학의 본질에 대해 가장 정교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 한 연구자의 견해를 빌리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명분으로 한 신체제론은 친일 지식인들에게 일본과 동일한 위치, 즉 '성양의 타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확립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에 따른 심리적 기대치는 근대의 초극은 물론이고 '일본의 타자'로서의 피식민지적 위치 역시 초극할 수 있으리란 것이었다. 그 다음 이유로 신체제론이 논리상으로나마 그것의 진보성을 확실하게 제시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체제론은 서구의 계몽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전근대적인 '동양적인 것'을 그것에 바탕한 새로운 세계사의 전개라는 또 다른 시간성의 모습으로 지양해냄으로써 일거에 미래 역사적 방향성과 현대성을 획득했던 것이다.(218-220)  신체제론은 동양문화의 서양 문화에 대한 변증법적인 지양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그러나 거기서 동서양의 문화(사상)는 서로 '교통'하는 대신 그저 공간적으로 병렬된 '잡거(雜居)'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신체제론이 새로운 문화의 건설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실천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전혀 없이 이상적 관념만을 편의적으로 조합한 허구적이고도 자의적인 체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 한계 때문에 신체제론은 역사가 증명하듯이 새로운 문명건설의 논리보다는 단지 서양문화를 배척하고 공격하는 배제의 논리로 기능했을 따름이다. (221)  하지만 '지성'의 포기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불러들이는데, 이것이야말로 신체제에 맹목이었던 친일 지식인들이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최후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 주체의 한계와 관련된 것인데, 그들은 식민지의 백성인 까닭에 결코 '근대의 초극'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진정한 과제는 '근대의 초극'이 아니라, 특히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근대의 획득'에 있었다 하겠다. 이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근대의 초극'을 논하면 논할수록 그들은 오히려 "피식민지 민족이라는 바로 그(미달된-인용자) '근대'에 발목을 잡"히게 될 뿐이었다. 그럴 때 그들의 "'근대의 초극' 논의는 오히려 한국과 일본, 또는 세계사 사이에 놓인 진정한 근대의 문제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계속 엇나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이 인용들은 이경훈, 「『근대의 초극』론-친일문학의 한 시각」,『한국문학의 연구5-다시 읽는 역사문학』(한국문학연구회 편), 평민사, 1995, 313면에서 가져온 것임-저자 각주)(221-222)
103    김윤식 편, 작가론총서(12),『채만식』, 문학과지성사, 1984 댓글:  조회:1589  추천:0  2009-05-16
김윤식, 「채만식의 문학 세계」  채만식의 여러 작품들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의 아이러니는 그의 작품을 이루는 문장 하나하나와 그 문장 사이의 행간,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 그가 즐겨 등장시키는 인물들에게서 다 같이 드러난다. (19)  그의 소설의 아이러니는 그가 언제나 부정적 인물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우고 긍정적 인물을 후면에 내세우거나, 희화하는 데서 얻어진다. 부정적인 인물들은 긍정적 인물보다도 각별한 작자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긍정적인 인물들은 언제나 부정적 인물들의 조롱의 대상이 된다.(190  그의 문장의 아이러니는 그가 부정적인 인간을 역설적으로 긍정적으로 보여 주려고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생겨난다. 작가 자신은 엄격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척하면서, 부정적 인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능청스럽고 의뭉스럽다.(20)  그의 아이러니는 그러나 강력한 비판 정신의 소산이다. 일제의 잔인한 검열 제도를 피하여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역설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21)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그것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사고인(思考人)을 만드는 댓니에 식민지 교육은 생각하지 않고 실기에만 전념하는 기능인들만을 만들어낸다. 그 기능인들은 외계의 변화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할 뿐, 거기에 아무런 회의감도 내 보지 않는다....실제로 『태편천하』에는 그런 교양인이 등장한다.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목적이 출세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 윤직원 영감이 그렇다.(21-22)  근 식민지 치하를 오히려 신분 이동의 호시기라고 판단하고 그의 자식들을 일제 식민지 당국에 알맞는 인물로 키우려고 애를 쓴다.(22)  수형 할인과 미두에 대해서 채만식이 대단히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식민지 궁핍화 현상의 한 첨예한 예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는...소액의 민족 자본이 일본인의 대자본 밑에 어떻게 형체도 없이 녹아 가는가를 미두를 통해 여실하게 보여 주며, 수형 할인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상을 빗대어 보여 준다. 특히 수형 할인은 법의 용인을 받은 도적질이라고까지 극언한다.(23)  작가의식이란 현실의 겉구조와 속구조를 함께 파악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41)  『태편천하』는 미두 대신 수형(어음) 할인을 통해 벌어지는 식민지 생활상의 일면을 보여 주지만, 중인 계층 의식과 진보주의 측에 서는 인물(종학) 설정으로 역사의 방향성을 파악하려는 단서를 어느 정도 보이고 있다. 굳이 여기서 방향성의 단서라고 한 것은 이 작품이 풍자로 일관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분적 풍자, 즉 수법으로서의 풍자의 차원이 아니고 요설적인 차원의 풍자성일 때, 작품에서의 긍정적인 측면은 가려지거나 미약해져 드러나지 않는다. 풍자 정신이 강할수록 그것은 역비례 관계에 놓인다. 이를 두고 풍자성이 억압 모티프로 되었고, 그 억압 모티프가 후퇴적 모티프를 너무나 압도해 버린 형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편천하』를 읽고 나면 쓰다 만 듯한 느낌을 받거나 한바탕의 입담을 들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의 정석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62-63)  『탁류』에는 그래도 상당한 소설적 구성 요인으로서의 일상성(전체성을 위한)이 담겨 있지만, 『태편천하』는 요설적 풍자에 함몰되어 허무주의적인 것이 점점 강하게 자리를 잡는다. 고골리적 방법 정신이 아닌 요설적 풍자는 모든 것을 입심으로 처리하여 현실을 가려 버릴 따름이다. 그것은 주관성·추상성이기에 현실의 본질에 이르는 길을 오히려 차단한다. 남는 것은 허무주의적인 것뿐이다.(63)  소설에서의 대상은 주인공과 환경의 유기적 관계에서 역사의 방향성을 묘사해야 하고, 그럴 적에 대상의 전체성이라 한다. 우 중 주인공 쪽의 비중은 극에서보다는 훨씬 약할 수밖에 없다. 극의 주인공으로서의 문제적 인물이 소설에서 부주인공에 맞먹는다고 말해짐은 이 때문이다. 시대적 일상적 삶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못지 않게 중요하다. 채만식 소설은 주인공의 개성에는 극히 불투명하고, 그 대신 시대적 일상적 삶으로서의 디테일의 우위를 적절한 한계 이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인물과 시대적 삶으로서의 환경 세계와의 유기적 결합, 소위 구조화의 틀을 통일해 보이지는 못한다. 이처럼 주인공의 강렬한 방향성의 인식이 없고, 일상적 삶의 반영만이 일방적으로 무성하면, 그 소설은 한갓 풍속소설에 멈추고 만다.(73)  대상의 전체성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만을 제시해 놓았다면 그것은 소설의 참된 반열에 들 수 없다. 이와 같이 소설은 올바른 역사의 방향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인물과 환경 세계 속에 유기적으로 통일해서 제시하지 못하면 전혀 쓸 수 없는 문학 양식인 것이다. 소설을 두고 <필요한 시대 착오>의 폭이 극히 좁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이라 하며, 리얼리즘은 그러기에 사조상의 명칭이라든가 단순한 분류 개념적 단위가 아니다. 그것이 창작 방법일 때 가장 선명해지는 것이다.(77) 이주형,「'태평천하'의 풍자적 성격」 『태평천하』에서 채만식은 비판 정신의 확립과 비판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보여 준다. 그는 이 시대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며 무엇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그는 여러 유형의 인물들을 풍자한다. 풍자의 대상이 된 작중 인물들의 공통점은 민족적 이상에 역행하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민족적·반사회적 행동으로 일관하는 지주 겸 고리대금업자, 목적 없이 살아가는 타락한 부유층의 자제,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르고 동물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채만식은 한 세대 속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무려 다섯 세대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는 여러 세대의 가치관을 동시에 대비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차이와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105-106)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요 작중 인물들의 언행과 사고는 개인적인 범위에서 문제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혹은 민족적 차원에서 문제거리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작자는 이들을 당대 사회와 단절시킨 상태에서 한 보편적 인간 유형으로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식민지적 전형으로 다루려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작자가 직접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문제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개인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변모시킬 수 있는가, 이 시대에 있어서 척결되어야 할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주제나 인물은 시사성을 지니며, 현실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106-107)  1910년대에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한 일제는 조선시대의 토지의 세습적 보유자이며 경작자이던 농민들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빼앗고 봉건 지주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자본주의적 사유권으로 인정함으로써 봉건 지주들이 일제하에서도 지주로 남아 있도록 하는 법적 보장 조치를 취했다.(107-108)  일제 치하에서 일부 변형된 봉건적 요소인 전 자본주의적 토지 사유권은 자본주의적 사유권으로 법인되고, 경제 외적 강제는 법률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으로는 소작 계약, 소작권 이동 등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살아 있었다. 따라서 일제하의 지주 제도는 해체되지 않은 이러한 봉건적 요소 때문에 <반봉건적 지주제도>에 머물러 있었다.(108)  이 작품에서 반어, 과장, 자기 폭로, 비유, 희화화는 서로 뒤섞여서 시종일관 웃음과 혐오감, 경멸감을 유발시키고 있다. 작자는 이러한 수법을 동원하면서 여러 인물과 사건에 대해 즉각적인 평가를 내리고, 그것을 경어체를 써서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해 준다. 따라서 독자가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면서, 사태를 즉석에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독자를 작자 편으로 끌어들인다.(116)  즉각적 평가와 연극적 장면화는 곧 문제의 현장감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문제가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것이며, 그것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곰곰히 생각해서 판단, 평가할 것이 아니라 연극 관람자처럼 시간의 지체 없이 보는 자리에서 바로 평가하고 대응책을 떠올려야 할 것이라고 믿게 한다.(117) 『태편천하』의 기법적 특색은 판소리를 발전적으로 계승·변형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 『태편천하』는 판소리 사설의 풍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표현 수법뿐만 아니라 판소리가 가진 장르적 성격까지도 이용하고 있다. 작자는 구술 논평자로서의 판소리 창자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으며, 때때로 서술 내용을 극의 장면과 같이 만들고 있다.(119) 정현기, 「'濁流'와 '太平天下'의 인물」  『삼대』가 연재되던(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215회)시기와  『탁류』가 연재되던 시기(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7일까지 198회 연재)의 시간적 차이는 6us이라는 긴 세월이다. 이 시기는 1934년 2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제2차로 사상범 검거를 비롯, 이른바 좌익 운동자들이나 민족 운동자들은 외부적인 압력과 함께 자체의 내분에 의해 스스로 분해하여 그 모둔 단체가 해체되었거나 또는 국외로 탈출했거나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고 일제가 가장 악랄하게 한국민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추구했던 제7대 미나미 지로오(南次郞: 1936년 8월경 취임) 총독 시대다. 이 당시 한국에 있어서의 이상적인 꿈을 한국민으로서 내 보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다.(121)
"타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전통-인용자)를 상실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나(전통-인용자)의 가장 참된 존재방식인 것"(김상봉, 『나르시스의 꿈-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 한길사, 2002, 309면)이 식민지 시대 작가 채만식이 맞은 이중적 역설의 운명이자 자의식의 내용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채만식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풍자 양식은 '근대(성)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유력한 공격 수단임과 동시에 자기 부정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었다.(64)  채만식 풍자문학의 이와 같은 강한 자기 부정성으로 말미암아, 그의 풍자문학은 풍자의 커다란 두 유형 즉 낙관주의적 풍자와 비관주의적 풍자 가운데 후자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고대 로마 풍자문학의 두 유형을 대표하는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가 각각 낙관주의적 풍자와 비관주의적 풍자문학 작품을 쓴 이래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서구 풍자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두 흐름을 형성해 왔다.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맹목성을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으로서 치유 가능한 것으로 보는가 또는 치유 불가능한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질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보는가에 의해 대별되는 것들이다. 이는 곧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신뢰여부와 연관된 문제로서 풍자 작가 자신의 인간관 및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 등이 반영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채만식의 풍자문학에 나타난 그의 관점은 비관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채만식 자신의 기질에도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내적인 긍정적 보편성을 찾아내기 힘든 시대로서의 식민지 체제의 억압적 현실 속에서 현실 부정의 수단으로서의 풍자문학을 자신의 주된 창작 방법으로 채택한 채만식의 작가적 운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64-65)  ...채만식의 풍자문학은 그 주제적 갈래 면에서, 크게 지식인의 자기 풍자 및 현실 풍자, 주로 여성이 겪는 질곡의 형상화를 중심으로 한 민중 현실에 대한 풍자, 그리고 이 양자의 문제를 과거 전통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통해 접근하는 것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또, 이 주제들과 그것을 다루는 작가의 의식 및 태도에 조응하여 여러 풍자의 양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채만식 풍자문학의 이와 같은 다양한 갈래의 주제와 양식들은 무엇보다도 『天下太平春』이라는 작품 속에서 집약적으로 총괄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작품에 여러 주제적 요소와 풍자 양식이 단지 모두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제적 요소와 풍자 양식의 결합이 유효 적절하게 유기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채만식 문학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225)  이 작품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인물 구성 면에서 독특한 점을 보이는데, 『濁流』와 대비할 경우는 물론 유례없이 부정적인 인물들로만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종학 역시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저자 각주) (226)  이 부정적 인물들의 중심에 윤장의가 놓여 있는데, 이 인물에 대한 풍자의 의미는 우선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윤장의라는 인물 형상은 무엇보다도, 이전 작품들에서 줄기차게 문제 제기된 바 있는 퇴락한 전통이 이제는 그 일말의 긍정성을 상실한 것은 물론, 그 허위의식마저 완전히 내팽개쳐진 채 희화적으로 타락해버린 상황을 상징화한 것이다....이제 윤장의는 더 이상 퇴락한 전통에 대한 일말의 자의식도 지니지 않은 채 그것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서 까지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습이 희화적 아이러니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그 외양의 당당함과 동시에 속물적 물욕을 아무 거리낌없이 드러내 보이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에 나서기 때문이다. 둘째, 윤장의의 그와 같은 치부는-제4장 '우리만 빼놓고 어서 亡합사......'의 치부 과정에서 요약적으로 나타나듯-반민중적이고 반민족적인, 그리고 극단적으로 이기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서, 이에 대한 풍자는 이러한 치부를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존시키는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부패에 대한 반어적 공격이 된다. 셋째, 돈으로 양반 족보를 만든다든지 향교의 장의(또는 직원) 직함을 사는 행위의 형상화에서 나타나는 바 윤장의에 대한 풍자는 타락한 '전근대적' 전통을 온존시키는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반어적 공격의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속에는 타락한 전통에 대한 자기 풍자 또한 포함된다. 또한 이 타락한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예의 전통적인 가부장중심주의이다.(227)  만일 윤장의가 보이는 속물적 물욕의 본질을 파악함에 있어서 그의 '계급적' 성격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이와 같은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왜곡된 전통과 현실에서의 속물성을 동시에 포착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놓치게 되고 만다.(229)  "채만식의 소설들이 이러한 암흑기를 배경으로 한 것들로서 대부분 두 개의 서로 상반된 계층이나 사상의 대립 갈등에 의한 역설이지만「태평천하」는 하나의 인물을 시대적 상황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자기 모순의 풍자를 노린 점에서 독특하다"(송하춘, 『채만식-역사적 성찰과 현실풍자』,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4, 53면-저자 각주)는 평가도 이런 맥락의 의미로 이해도리 수 있다. 이미 자동적으로 몰락할 운명에 있는 계급으로 그려지고 있"(신두원, 「풍자와 니힐리즘적 부정정신의 안과 밖-채만식론」, 『한국문학작가론4-근대의 작가』(황패강 외 공편), 집문당, 2000, 283면.-저자 각주)다는 판단 역시 부적절한 것이다. 작품 결말에서의 종학의 피검이 반드시 윤장의 자신의 몰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없다. 윤장의 일가의 가족 관계는 이미 파탄을 넘어 해체의 지경에 놓여 있는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격적 본질에 비춰 볼 때 윤장의 자신은 그 나름대로 얼마든지 자기 앞길을 열어 나가리라는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다.(229-230)  여기서 주목할 것이, 이와 같은 그의 현실 적응력이 타락한 전통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 삼음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서 타락한 사회 현실에 대한 민활한 적응력은 곧 타락한 전통에 자기 존재의 근거를 둠으로써 가능해 진다...다시 말해, 타락한 전통의 '보수성'을 현실 속에서 자기 이해 관철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능력을가진 윤장의라는 인물은, 타락과 질곡이 지배하는 현실이 지속되는 전제하에서는 자기 전통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만이 입신 출세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입증한다.(231)  그런데 특히 이 알레고리적 요소가 아이러니적 풍자의 효과를 오히려 뒷받침하고 있다는 데에 이 작품의 특징이 있기도 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시공간 배경에서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공간 배경이 윤장의의 집 울타리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으며-벗어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정도이며-더더욱 시간 배경은 하룻동안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시간 배경 설정은 다분히 알레고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 배경 설정상의 이와 같은 알레고리적 성격이 이 작품에서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의 문제적인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아이러니적 풍자에 기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작품의 시간 배경인 "정축년(丁丑年) 구월 열xx날인 오늘 하루"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시점에 대한 알레고리적 표현물이다. 즉 1937년 9월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제가 같은 해 중일전쟁을 일으켜(7월 7일) 중국 수도인 베이징을 함락(7월 28일)한 이후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중국이 중·소 불가침조약을 맺고(8월 21일) 제2차 국공합작(9월 22일)을 하는 등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급박한 시기였다. 바로 작중시간 배경으로 설정되고 있는 이 '하루' 동안의 윤장의 집안에서의 일련의 소동은 이와 같은 역사적 위기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적 표현인 것이다.(237)  채만식 문학의 핵심적 특질을 이루는 바 그 풍자 정신의 요체는, 바람직한 의미에서의 삶의 질서의 연속성으로서의 전통이 해체되고 있으나 새로운 삶의 질서는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의 발현이다. 그런데 이렇나 전통(의 해체)에 대한 문제 의식은 자기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시각과 태도가 전제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극단적으로 열악한 시대 상황에 의해 내몰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서 '사소설'은 부정적이고도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풍자 정신의 와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작가 스스로가 현실 부정과 비판을 넘어 새로운 역사적 전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낸다는 점에 서 '역사소설'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풍자 정신의 해소의 표현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244)  1930년대 후반은 채만식 문학에 있어서, 전통 해체기의 부정적 현실에 대한 공격적 비판으로서의 풍자문학 작품의 창작이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시기....(258)
101    최혜실, <<한국모더니즘소설연구>>, 민지사 1992 댓글:  조회:1963  추천:0  2009-05-16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개별 시인과 작가들에 대한 여구 이외에 첫째 주로 비교문학적 측면에서 외국의 문예이론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롤 고찰하는 방법, 둘째 문학사, 정신사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방법, 셋째 근대성과 모더니즘을 연결시킴으로써 30년대 모더니즘의 사회적 생산조건을 고찰하는 방법 등을 통해 연구되어 왔다.(13) -한국 모더니즘이 영.미 이미지즘과 서구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학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그것의 원천이 되는 문예사조를 중심으로 영향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이해에 선행되어야 할 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비교문학적 고찰은 작품의 원천을 중요시한 나머지 한국문학이 얼마나 정확하게 외국 문예사조를 수용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둠으로써 그 변용과 굴절을 폄하해 왔다. 주로 이론상의 허점이 보인다거나 서구문명의 피상적 노래, 시적 깊이의 결여, 경박성 등이 그 부정적 평가의 내용이다. 외국의 문학은 한국의 사회, 문학적 특징에 의해 굴절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미시적 비교로는 그 굴절의 원인과 타당성을 밝힐 수 없기에 모더니즘의 문학사적 위치는 부정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13-14) -일제 강점기의 문학은 국가 상실시대의 문학으로서 이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에로틱한 것에 대한 병적 열망에 기울고 그 결과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의식의 진공상태에 이르고 만다. 이상 등의 문학에 나타나는 권태는 바로 모더니즘의 이러한 한계를 노출한 것이다.(14-15) -...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은 시나 소설에서 기법상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건설된 도시인 경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성에 의하여 생산된 문학으로 규정된다. 서구 모더니즘을 배태시킨 파리, 런던, 베를린 등 도시화의 상황과는 다른 특수한 타율적 도시화의 상황이었기에 당시 한국의 모더니즘문학은 서구와 다른 면모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상시에 나타나는 자아는 민족적 주체가 붕괴된 상황에서  근대적 자아의 절망적 모습을 표상한다거나 박태원, 이상, 최명익 소설은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자의식 과잉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상이 앓았던 결핵은 전기 자본주의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모성 질환이며 그의 작품이 근대 식민지 건축 교육의 제도적 장치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적 가공기술의 혁신과 언어의 세련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더니즘 문학에 당대 사회를 대비시킬 경우 리얼리즘 문학에 비해 현실반영의 문제에서 열등감을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모더니즘 문학은 기껏해야 개인과 집단 사이의 분열을 묘사한 것이거나 소시민적 지식인의 자의식문학으로 낙착될 뿐이다. 더구나 근대 산업사회의 융성기에 생산되는 것이 모더니즘 문학인데 당시 한국의 사회상황은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근대 식민지 경제로 왜곡되어 있었다. 이런 불완전한 산업사회에서 서구에 못지 않은 문학적 성과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 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이 처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외면하고 서구문학에 탐닉해 들어간 댄디보이들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그러나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라도 모더니즘 문학이 우리 근대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양적, 질적 비중은 그것이 잘못된 문학이란 비난만으로 무시될 수 없이 큰 것이다. 따라서 이 비중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국 근대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접근법에 의해 그것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모더니즘이 과연 근대 산업사회만을 원인으로 해서 나타난 예술이론인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모더니즘은 근대를 기반으로 해서 배태된 예술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매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성으로 사물의 보편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인식론을 근간으로 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직접성의 인식론은 인간의 구상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하므로 그것에는 형식예술에 대한 친근감이 내재해 있다. 그런데 형식예술은 모방해야 할 현실의 대상들이 없음으로 해서 소재로부터 자유로이 형식 그 자체의 순수한 유희를 즐기며 설령 대상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자극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재현한다. 모더지즘 예술이 역사와 사회적 상황을 외면한다거나 내용이 없다거나 하는 오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예술 특히 사회,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약속인 언어를 질료로 하는 문학이 그 역사, 사회적 토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이 배태된 원인을 시대상황에 지나치게 기대어 찾으려는 태도는 자신의 문학이론을 어떤 부정할 수 없는 실질적인 존재, 힘있는 것에 기댐으로써 손쉽게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일 수도 있다고 본다. 한 시대를 한 문학이론이 반영한다면 여러 문학이론이 대립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당연히 그 시대에 맞지 않는 이론은 도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연히 존립하고 있는 모더니즘 미학이 갖고 있는 주관적 보편성을 산업사회의 몰락계급인 쁘띠 부르조아들이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해서 자기 내부로 침잠하는 현상으로만 설명한다면 우리는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에 의하여 예술이 지니는 다양성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직접성의 인식론은 근대 부르조안만의 세계관이 아니었다. <특수성>의 미학범주를 가진 예술과 비교해 볼 때 <주관적 보편성>의 미학범주를 가진 예술이 어떤 특성을 갖는가를 고찰하여야 비로소 한국 모더니즘 문학은 그 문학사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토대가 미약하더라도 <주관적 보편성>의 미적 범주를 가진 예술은 정도의 차이를 두고 존속해 왔기 때문에 30년대 한국의 특수상황에 의해 이런 종류의 예술이 어떻게 굴절되었는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더니즘의 범주를 너무 크게 잡은 감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는 서구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나타난 여러 문학양식들이 10여년만에 한꺼번에 이입됨으로써 생긴 한국 모더니즘의 혼재와 혼란의 와중에서 그 본질과 의의를 포착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모더니즘의 특성인 선험적 구상능력에 대한 믿음은 이상 문학을 해명하는 관건이 된다. 이상 문학에 나타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근대건축술은 근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도 하나 또다른 면에서는 선험적 구상능력을 신봉하는 모더니즘 미학에 의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 문학에 나타나는 자의식 분열, 난해함 등은 식민지 지식인이란 시대상황에서 파악되어야 함과 동시에 미학적 방법론과 병해하여 고구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문학과 사회, 역사 또는 그것을 창조한 작가의 심리 혹은 계층의 심리에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으면서도 정작 같은 범주에 드는 예술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예를 들어 1930년대 구인회는 연극, 영화에 종사하는 예술가들로 이루어졌으며 문학 동인들은 미술, 영화에 종사하는 예술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류는 사적 친밀감 정도로 문단 이면사에서 다루어지고 있을 뿐 예술 자체 내의 상관성은 심도있게 연구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확고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논쟁중심의 평론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론을 찬반의 명확한 논리로 포착할 수 있는 프로문학에 비해 모더니즘 문학은 이론화 작업이 거의 없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연구자들은 논리가 아니라 작품에서 상관성을 추출해야 하므로 선명한 논리의 연결고리들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상과 구본웅 등의 관계는 술좌석에서의 에피소드, 인척관계 등 사적 교류를 벗어날 수 없었다.(15-18) -지금까지 심리주의소설은 의식의 흐름과 자동기술법 등 기법의 측면에서는 상세히 다루어졌으나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체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심리주의 소설이 종래 모더니즘의 합리적 직접성에 반발하여 직관적 직접성을 주장하는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이론에서 나왔음을 밝혀 이미지즘, 이상의 문학, 한국 심리소설을 <주관적 보편성>의 미적 범주로 묶어 넣은 후 순수지속의 상태로서 산책과 승차의 태마를 고찰하고 모더니즘의 시간개념을 밝혔다. 이상 문학에 나타나는 4차원성은 운동감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반하여 박태원의 소설에 나타나는 시간은 심리소설의 전형적 시간관념인 <지속적 현재>임을 밝혔다.(18) -문학사를 하나의 양식사로 보려는 견해는 문학사서술의 보편적 방법중의 하나이다. <양식>의 개념은 예술사의 기초이자 핵심을 이루는데 이는 예술이 개인의 무의식적 충동의 산물이라는 사실과 대립을 이룬다. 문학의 대상은 서술수법을 통해 형상을 얻은바, 이 문학의 기술수단을 '형상(Gestalt)'이란 개념으로 묶어 의미내용(Gehalt)에 대치시킨 것이 양식이다. 따라서 양식은 구조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돌베개 1983 217) 예컨대 음악에 있어 우리에게 친숙한 멜로디는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음조로 연주가 되어도 그 멜로디를 알아듣는다. 그 이유는 실제로 귀에 들리는 음 하나하나는 모두 변했지만 음조들이 상호 관련된 모습, 음조의 구조 자체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음의 구조, 그 형태적 특성의 기본형식이 바로 그 음악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양식적 특징은 간단히 반복될 수 있는 도식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작품에서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패러다임'과 같은 것이다.(20) -그러나 예술양식이 그 자체만의 합목적성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의 개성, 민족, 풍토, 유파 등에 의하여 표현형식이 제약받은 삶의 방식이 작품 속에 나타나는 패턴이라는 것이다(조요한, <예술철학> 경문사 1980 115). 여기서 당연히 상반되는 역사적 필연성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관계는 신칸트주의 사론(史論)에 의해 해결의 모색이 시도된다. 사물에 대한 미적 인식은 취미판단에 의거한다. 하나의 사물이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우리의 판단의 근거는 우리의 감정이 대상표상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여기서 취미판단은 오성과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성은 현상적 실재에 대해서 선천적 법칙들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반면 판단력은 오성과 이성을 매개하며 인지능력과 욕구능력의 중간개념인 오성에 상관한다. 따라서 미적 판단에 대한 보편타당성은 오성만의 작용이 아니므로 쾌/불쾌를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오성과 결연된 것이 아니므로 성실한 개인적 판단력이 보편적 판단력과 일치한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술에서 참된 진술은 특수한 객관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며 판단하는 사람이 그가 항상 올바르게 판단하는 한 언제나 동일한 관념적인 대상을 염두에 두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판단력은 몇가지 점에서 오성이 갖는 선험적 타당성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이 타당성(Geltung) 개념에 의거하여 개인의 양식은 전체적 양식사 속에 합류되게 된다. 예술가의 내부에 작용하고 있는 개인적 기호나 민족적 성향은 그 시대의 보편적 표상형식(Vostellungsformen), 視形式(Sehf-ormen)을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이다(하우저, 앞의 책 135). 예술가의 표현수단은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그 색조와 선명도가 계속 변하고 있는 그리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안경을 통해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일정한 시각적 장치, 특별하게 조직된 시각성으로써 현실과 만난다. 따라서 예술사는 자연모방의 역사가 아니라 예술적 시각의 역사이다.(20-21) -뵐플린은 시형식의 기초개념 5쌍을 도출하여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예술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선험적/회화적, 평면적/심오함, 닫혀짐/열려짐, 다수적인 것/통일적인 것, 절대적 명료성/상대적 명료성의 개념은 형태의 대칭개념을 표본으로 문학에서 상이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의도이다(조요한, 앞의 책 121). 뵐플린 등에 의하여 형태의 대칭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소 변모하나 <선험적 범주>, 나아가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갖는다.(21) -현대 추상의 양적, 질적 팽창을 자본주의의 소외 등 부정적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현상 양극중 하나로서 비중을 두어 고찰할 수 있다.(23) -근본적으로 양식 심리학은 내적 타당성에 변화원리를 두고 있으며 그 변화원리는 자유스러운 형식의 유희에 입각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심리적인 경험이 보편적 만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칸트의 미에 대한 견해와 유사한테 칸트에 의하면 미적 판단은 개인의 사적 감정 속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이다. 또 그것은 무관심적 만족이다. 어떤 사물이 개인의 사용, 인식, 실용과 관계없이 단순히 고찰의 대상으로 사용될 경우 개인의 인식과정에는 개념적 판단은 없으나 오성과 구상력이 공동작업을 하여 합목적적 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미적 판단은 논리적 인식과 흡사하게 선험적(a priori) 근원을 가지며 보편적, 펼연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면 칸트의 이론은 개인의 사고가 시대정신에 필연적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행복한 일치를 논하고 있는 셈이다.(23) -모더니즘이 추상과 감정이입의 예술의 두 경향이 반복되는 가운데 전자에 해당한다는 견해에 반하여 역사가 계속 발전한다는 발전사관에 입각하여 모더니즘을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으로 보는 또다른 경향이 있다. 사회주의 문학론자들은 모더니즘의 과도기적 경향을 지극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데 예를 들어 루카치는 헤겔의 미학을 토대로 모더니즘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 미학은 "예술과 현실과의 관계의 물음"이었다. 따라서 이념적 주체가 미적 행위를 하는 보편적 토대로서 '보편적 세계상태'가 미를 창출하는 중심 과제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 세계상태는 미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들이며 더욱 상세하게 말하자면 특수한 예술형식들과 그들의 변천을 위한 특수한 조건들이다. 생동하는 주체인 미적 주체는 그들의 예술적 실현을 위한 보편적 토대로서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필요로 하며 이것은 주어진 역사시대의 상부-하부 구조의 총체성 즉 물질적 욕구체계, 권리와 법률의 세계, 가족의 생활, 신분분화, 국가의 총괄적 영역, 종교와 지식, 인식의 총체인 학문 등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헤겔은 이 보편적 세계상태를 토대로 산출된 인류의 예술형식을 상징적, 고전적, 낭만적의 세 부류로 나누고 삼자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논하고 있다. 헤겔에 의하면 예술의 발전과정은 정신이 그의 내면 속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지반에서 이루게 되는 화해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먼저 상징주의 예술형식을 보면, 동방세계는 주체가 자기 내에 인격으로서 어떤 법도 지니지 못하고 그래서 어떤 자기 근거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에 자아를 상실한 채 보편적 실체나 어떤 특수한 측면에 예속된다는 정치적 전제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방의 예술은 유한자와 무한자, 이념과 형태가 일치하지 않고 양자의 상호교체적 결합을 이룩하지 못하고 단지 양자가 의미함(Bedeutung), 지시(Verweisung)의 관계에 불과하게 되었다. 즉 의미와 형상 사이가 역동적으로 상호침투되지 못한 단순한 지시관계이며 매개되지 않은 직접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정형화된, 생명없는 예술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29-30) -낭만주의는 다시 고전주의의 자아와 세계와의 화해를 부정, 이념과 형태의 새로운 분열을 거쳐 고전시대에서 달성되는 보다 높은 통일성, 즉 예술미의 본원적 실현을 꾀하고 있다. 낭만주의의 이 분열은 ① 자기 내에서 완성된 정신적 왕국, 스스로 화해하는 감정의 세계와 ② 경험적 현실로 변한 외면성 자체의 세계로 나타난다. 낭만적 예술형식의 이러한 이중성은 정신과 자연, 이념과 감각적인 것의 새로운 분열로서 미의 과정 속에서 고전시대의 행복한 이념상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로, 앞서 상징예술 형식이 보여준 분열을 반복한다. 이 분열된 세계상을 극복하기 위한 한 시도로서 "개체적 특수성의 형식적 자립성"이 등장하는바 여기에서 실현된 사실주의는 개별적이고 특수적인 것이 이념상의 구체적 보편성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던 고전주의의 특성을 지양, 개체의 자립성을 강조한 형태이다. 그 러나 이 개별성은 단순히 개인의 주관성 속으로 함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이 개개인의 가변성, 무상함 속에서 파악됨을 의미한다(G. Lukacs-황석천 역 <현대 리얼리즘> 열음사 1986 20).(30-31) -모더니즘의 추상성이 근대사회를 기반으로 나왔다는 견해 중에서는 그것이 분열되어 버린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잘못된 예술, 죽어버린 예술'이란 폄하가 있는 반면 모더니즘이 근대 산업사회가 낳은 예술이며 기술, 기계중시의 거대한 산업구조가 갖는 모순을 비판한다는 데서 의의를 찾는 이론도 있다. 그중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것으로 지더펠트(Anton C. Zijderveld)는 모더니즘 예술이 추상적 사회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Anton C. Zijderveld-윤원일 역 <추상적 사회> 종로서적 1989 91). 현대사회라고 불리는 기술, 산업적 복합체는 점차로 거대하고 고도로 분할된 상부구조로 발전함으로써 종래 소규모 공동체에서 자신의 정체감 및 뚜렷한 경험을 갖고 살던 인간은 사회를 낯설고 이상한 현상으로 느끼게 된다(앞의 책 56). 현대인은 더이상 세계의 구성적 부분으로서 자신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자연에서 격리되어 있으며 사회를 자신에 대립되어 있는 존재로 감내하게 된다. 가족이나 종교, 교육, 정부, 군대 등 인간을 위해 존재했던 제도적 부분들이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이 이들 관할에 들어오는 한에서만 개인에게 통제를 행사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그 제도의 부분적 결속만 집착할 뿐 전체적인 정체감을 상실하는데 이 상실감과 소외감이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기계, 도구, 실험, 합리성, 비유기적 분업 등은 인간을 자동화로 만든다. 이 자동화와 단편화는 현대음악과 현대미술에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몬드리안이 일원색만을 차용하여 똑같은 기하학적 형태 속에서 단조롭게 변화시키는 수법은 내용이 형식에 의해 대체되고 재료가 방법에 의해, 본질이 기능에 의해 대체되는 세계의 최종적 결과이다.(32-33) -그러나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는 사회의 예술에 대한 단선적 주입적인 관계가 아니랄 복잡한 교호관계가 설정되어야 좀더 타당성있는 이론으로 성립될 수 있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예술이론이 그것이다. 아도르노는 우선 모더니즘의 치명적 약점으로 비판받는 기교(형식)를 옹호하여 그것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제도 속에 침잠해 있는, 그 작품에 내재한 집합체의 잠재적 현존으로 정의한다(P.Burger-김경연 역 <미학이론과 문예학 방법론> 문학과 지성사 1987 92-100). 또 내용적 측면에서는 모더니즘 예술에 드러나는 절망과 무조건적 상황비판을 자신의 부정적 변증법(Negative Dialektik)이론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헤겔이 그의 변증법에서 正-反의 조정이 合(Synthesis)에 이르고 이것이 절대정신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아도르노는 合이라는 변증법적 결과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正-反의 통합(Voreinigung)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仲裁(Vermittlung)이다. 合이라는 중간적 존재(Mittlers)는 양극의 정-반을 통해 이미 그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굳이 독립된 범주로 상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고는 주체와 객체의 일치, 즉 그 합을 부정한 부정의 변증법이란 성격을 띠고 있다. 합이란 그 자체가  결과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진정한 지양에 대한 힘을 결여하고 있고 어떤 해결을 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따라서 상황을 부분적으로 부정(bestimmte Negation)함으로써 결과의 내용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 지양 자체를 향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진실이며 올바른 인식력을 갖춘 것이다. 부분적 지양은 단지 모순적 힘일 뿐이고 굳이 합을 찾는다면 초월적이며 메시아적 미래가 그것이다. 유토피아적 미래란 합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할 수 있고 또 실현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언젠가 이루어질 역사의 차원이 아니라 불확실한 실현과 관계맺고 있다(신일철 편 <프랑크푸르트학파> 청람 1985 101-106). 이 부정적 변증법은 예술에도 적용된다. 현대의 위기는 '개인성의 종말'이다. 예술은 이 개인성의 종말을 부정함으로써 진리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예술이 후기 시민-자본주의 사회 단계에서 뚜렷해진 우중성격, 사회적이며 동시에 자율적인 생산품이 되는 이유는 예술이 사회에 반대하고 동시에 사회로부터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회에 대한 반대입장(Gegenposition)을 통해서 사회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입장은 자율적인 입장으로서만이 예술에 관련될 수 있다. 자율적인 예술이 비사회성을 띠는 것은 바로 '국부적인 부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부정으로써 현대예술은 시작되었고 그 심미적 질서를 모방(Mimesis)이라는 작업행위에서 행방시켰다(앞의 책 113).(33-34) -사회부정이 현대예술이 갖는 자율성과 통한다는 아도르노의 견해는 벤야민의 '산책자 이론'에서 구체적이고 명쾌하게 설명된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에 관한 논문에서, 비유기적인 사물과 타락한 상품들, 파리라는 도시의 떠돌아 다니는 군중에서 발견되는 덧없고, 새로우며 회의적인 도시적 경험의 낯선 충격에 도취된 상태로 굴복한 시인을 분석함으로써 그가 역설적으로 도시에서의 인간성 해체를 고발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거대한 도시의 건물, 군중, 교통기관에서 사물에 대한 총체적 지신인 인간의 경험(Erfahrung)은 해체되고 군중은 단편적인 반응에 불과한 체험(Erle-bnis)에 안주하게 된다(Walter Benjamin-이태동 역 <문예비평과 이론> 문예출판사 1987 19). 반면 시인은 통일적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즉 생존적 필요에서의 체험의 인정과 시인으로서 느끼는 외부자극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개방 경험에 대한 갈증이란 양극 사이에 놓여 있다. 결국 자아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충격을 수용하는 것이 시인의 딜레마이자 목교가 된다. 현대 익명의 도시에서의 죽음과 같은 자기상실의 감정, 현대예술은 죽은 대상들, 영혼의 사물화와 상품화를 역설적으로 이용해서, 노예화되고 노예화 시키는 대상으로서 일상적 관습적 존재로부터 그 사물들을 폭발시켜 결과적으로 사회적 변화의 용도로 그것을 해방시키려 한다(벤야민, 앞의 책 193), 결국 '산책자'는 소외자로서 사회와 격리됨으로써 오히려 상품화된 사회를 부정하는 존재로서 의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34-35) -하우저는 뵐플린의 양식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예술사회학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전자는 플로티누스의 '만물은 一者로부터 유출된다'는 형이상학적 유출사의 변종일 뿐이며 '세계정신'은 이미 역사들 안에 거주해 있으며 그것들은 이미 사전에 정립, 형성된다. 따라서 거기에 관련된 개인들은 세계정신의 대변자일 뿐이라는 주장인데 하우저는 예술에 있어 개인의 사적인 동기와 주관적인 방법은 그 개인을 넘어서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는 무엇인가를 실현시킨다는 입장에서 이를 비판한다. 예술사회적 관점도 예술의 발전사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사회변천에 맞추어 발전해온 것만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비판되고 있다(A. Hauser- 황지우 역 <예술사의 철학> 돌베개 1983 151-152). 어떤 역사적 시대도 그 시대 자체만의 예술을 새로이 시작하지 못한다. 예술과 사회의 완전한 일치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 같은 사회 내에서도 예술들 사이에 일치란 있을 수 없다는 하우저의 논리에 따르면 진정한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미리 주어진 초개인적, 초 역사적 의미란 칸트적 선험론에서 온 것으로 진리의 객관적 판단 기준은 '間人間的(zwischenmenschlich)' 성격을 지닌 것이지 '超人間的(ubermenshlich)'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유관습과 사고방식은 미리 주어진 무엇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시도의 결과이다. 특히 뵐플린의 양식주기반복설은 모순된 것이다. 우선 예술사에서 순환과 반본을 논한다는 것은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예술적 경향들은 이미 선행하는 것에 대한 발전의 결과이고 이 경향들은 언제나 이미 앞서 진행된 예술사의 성격과 또다른 독특한 상황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적 바로크가 17세기의 바로크와 같을 수 없다(하우저, 앞의 책 179-183, 203). 그러나 반대로 어떤 역사적 시대에서도 예술과 사회의 완전한 일치란 없었다. 사회적 조건이 미뉴에트의 형식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고, 한 시대의 사회적 조건을 아무리 깊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시대 성당 탑들의 선을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18세기 사회는 어떤 면에서 미뉴에트 속에 내포되어 있었지만 미뉴에트가 그 시대의 사회적 형식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예술형식이란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시대의 물적 조건에서 연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34-36) -중세말 이후 서구의 역사는 위기의 역사였다. 각 시대간의 짧은 막간은 항상 새로운 붕괴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확연치 않은 막간의 하나가 르네상스였다. 처름 르네상스에는 과도한 단순화의 도움을 빌어 고전적 형식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온한 평화, 어떠한 사건에 의해서도 흐트러지는 일이 없는 그 평정, 무감동한 객관성, 형식의 완벽한 안정과 균형을 갖고 있었으므로 붕괴의 시기가 갖는 혼란을 설명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마니에리즘의 패러독스가 탄생한다. 이 시대 예술가들은 생의 풀기 어려운 모순을 알아채고 그 모순을 더욱 강조하고 더욱 강렬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합리적 사상이 불충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이 합리적으로 종합될 수 없음을 통찰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므로 윤곽을 흐트러뜨리거나 일그러뜨림으로써, 즉 그 반대의 측면에서 진실을 찾으려 했다(앞의 책 22-24ㅋ). 마니에리즘은 르네상스 이후 진행된 소외의 극복의 한 방법이며 제도화에 대한 역설적 비판이다. 예컨대 모든 마리에리즘 양식은 자연스러움이 결여된 기계적 반응을 보이거나 독자성, 예리한 감수성, 방잣함 등을 유달리 과장된 형태로 전개함으로써 이러한 부자연성 및 기계성에 반역하려는 고툭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우저의 마니에리즘은 부정의 부정을 모더니즘의 철학으로 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는 현대예술이 한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온 불안정함 때문에 마니에리즘과 일맥상통한다고 밝힘으로써 뵐플린의 양식주기반복설을 부분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바로크기와 현대와의 차이점을 설명하여 문학과 사회와의 통신관계를 설명하고 있다.(36-37) -결국 모더니즘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문제는 미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37) -주관적 목적은 보편개념이 특수성을 통하여 개별성과 연결하는 추리(G. W. F. Hegel-임석진 역 <철학강요> 을유문화사 1983 200)라는 헤겔의 견해는 모방의 철학적 근거로서 리얼리즘 미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일상적 실천, 과학적 인식, 예술적 창조 세 경우가 다 동일한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나 특히 예술에 있어서 특수성의 개념은 중요하다. 현실에서 개별성, 특수성, 보편성의 범주는 객관적으로 끊임없이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바,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양극단의 중간항이 특수성이다. 그런데 이 툭수성은 일상생활과 과학에서는 단지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지나지 않으나 예술적 반영에서는 문자 그대로 중심(Mitte)이 되며 운동들의 포괄지점이 된다. 예술에서 특수성으로부터 개별성으로의 운동이나 특수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의 운동 중 어떠한 경우에도 특수성으로 향한 운동이 가장 결정적인 운동이 된다. 즉 현실의 예술적 형상화는 보편성과 개별성의 특수성으로의 지양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개별성은 특수한 것 속에서 지양하면서 동시에 보존되어야 한다. 루카치는 문학에서 '전형'이라는 개념으로 이 특수성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하나의 전형이지만 동시에 특정의 개별인, 다시 말해 헤겔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 사람(ein Dieser)'이고 또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예술가가 인간에 대한 개별적 지식과 세계에 대한 개별적 지식이 풍부해지면 질수록, 예술가가 여기서 특수성의 매개를 더욱 더 많이 발견하고 필요에 따라서느 최종적인 보편성에 도달하기까지의 그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이러한 지양은 더욱더 활발해진다. 그리고 예술가의 조형력, 형상화 역략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만큼 더 뚜렷하게 그는 발견된 매개들을 새로운 직접성으로 환원시키고 유기적으로 집약시킬 수 있는 것이다(G. Lukacs-여균동 역 <미와 변증법> 이론과 실천 1983 165-168). 한마디로 특수성이란 종래 보편성을 중시했던 미학관에서 개별자가 그 의의를 획득하게 하는 모방의 철학관의 핵심적인 이론이 될 수 있다. 루카치는 이 특수자 설정으로 종래 모방 개념이 플라톤에게 받았던 모욕을 설욕할 수 있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하나의 물질은 그 물질 자체의 존재나 비존재 또는 변화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론적 지위(idea)를 갖는다. 제작자는 이 이데아(idea)의 개념적 파악에 인도를 받아 현실의 물질을 제작하는 반면 화가는 그 현실의 물질을 모방하여 그림을 그린다. 다시 말해서 현실의 물질은 이상적 상(eidolon)이며 그림은 물리적 물질의 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만든 작품은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인데다, 결핍된 대상(object manque)이기까지 하다. 예컨대 그림 속의 칼은 현실의 칼이 갖고 있는 자르는 기능마저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얼리즘은 단순한 모방의 개념으로 편하되고 만다(M. C. Beardsley-이성훈 역 <미학사> 이론과 실천 1988 28-31). 그런데 헤겔, 루카치는 예술가의 작품(그림의 칼)을 특수자로 규정함으로써 껏이 개별자(현실의 칼)의 모방이 아니라 개별자와 보편자(이데아의 칼)를 이어주는 매개로 격상시켜 리얼리즘이 구체적 현실반영이 갖는 미학적 가치를 정립시켰다. 한 마디로 예술에 있어 자연모방이란 자연적인 것의 외면성을 모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중요하고 성격적인, 의의 깊은 자연형식을 취한 것이다(헤겔, 앞의 책 450). 그런데 특수성의 강조는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여 내용중심의 미학이 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에 있어 본질적으로 내용은 형식을 결여한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 속에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형식은 내용에 있어서 외면적이다. 여기서 헤겔의 유명한 "내용이란 것은 형식이 내용으로 전환한 것, 그리고 형식이란 것은 내용이 형식으로 전환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정의가 나오게 된다(헤겔 <철학강요> 156-157). 그러나 헤겔은 근본적으로는 내용의 先在性을 언급하고 있다. 즉 결과적으로는 상호관련되지만 발생론적 관점하에서는 "형식은 구체적 내용 자체에 내재하는 생성"이라고 본다(헤겔-임석진 역 <정신현상학> 지식산업사 1988 108-117). 예술 속에서 내용은 형식을 산출시키며 형식은 내용의 산출물이다. 왜냐하면 특수자 속에 보존되어 있는 개별자의 강조란 바로 현실 자체의 구체적 상황, 인물, 사물, 배경 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37-39) -진정한 미적 형식은 항상 '특정한 내용'을 지닌 형식이다. 심지어 예술의 표현 방식은 내용으로부터 도출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작가가 양식적으로 유사한 작품을 썼을 때 그 작품을 구분하는 기준은 형식이 아니라 그 조직화하는 중심에서 비롯된다. 작품의 형상화된 세계 가운데서 무엇이 강조되고 무엇이 무시되는가, 무엇이 소멸하는가를, 다시 말하면 예술적으로 반영된 현실의 어떤 특징과 어떤 계기가 작품의 구성요소로 되는가와 그것이 작품을 수록해 나갈 � 어떤 구체적 역할을 담당하는가가 작품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헤겔주의자들이 '특수자'를 설정함으로써 종래 칸트의 미학 개념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특수성'개념의 업적은 단순한 현실의 묘사로 격하되었던 미메시스 개념을 미학으로 승격시켰으며 특히 종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서사양식을 철학적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 그것이 미학의 전 범주를 포괄한다고는 볼 수 없다. 칸트의 미학은 음악, 추상미술, 디자인, 건축학 분야에서는 아직도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39-40) -칸트의 주관적 보편성(미적 보편성이라고도 한다): 즉 개인의 선험적 구상능력에 대한 믿음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성이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構想(Entwurf)'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구상은 이성의 자발적 활동이며 어떤 보편타당한 것을 그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고 바른 생각이다. 정신은 이같이 자발적으로 구상하는 능력이 있어서 저 자신에 의하여 산출한 도식적인 형식을 사물에 投射(werfen)하여, 그것에 의하여 만물 자신으로부터 정신에 대하여 있는 사물을 만든다. 정신이 대상들에 한 형식을 던져주는 한 정신은 한 구상을 행하며 대상들을 범주적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이성은 하나의 立法者이다(김용민 <칸트의 판단력 비판 연구> 예진문화사 1989). 칸트는 이성에 대한 이런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미학에 있어서 개별과 판단이 어떻게 보편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미학적 판단은 개개인으로서 각자에게(jeden als einzelnen) 타당하다. 그러므로 미학적 판단은 개별판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에 근거하지 않고 감정(Gefuhle)에 근거하기 때문이고 감정은 성질상 단일하기 때문이다. 미학적 판단은 동시에 미학적 만족 자신이 모든 개인에게 타당한 한 보편적 판단이다.(칸트에 의하면 미적 만족은 주관적, 보편적(間主觀的)이며 필연적이다. 이 말은 대상이 주어지기만 하면 누구나 펼연적으로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느끼게 됨을 의미한다.-N. Hartmann-전원배 역 <미학> 을유문화사 1983 69, 377. I. Kant-이석윤 역 <판단력 비판> 박영사 1986 70-74). 그러면 어떻게 개인의 감정이 보편적으로 假傳達的일 수 있는가? 이는 쾌의 감정이 개인의 욕구에 제약되어진 특수관심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상의 고찰에 있어서 우리의 표상력들이 활동하여 객관을 형성하면서 또 이해하면서 결합한다. 이 형성적 결합을 완성하는 것은 상상(Phantasie)이요, 이해적 결합을 완성하는 것은 오성(Verstand)이다. 상상은 표상에 직관적 통일을 주며 오성은 합법칙적 통일을 준다. 그런데 대상의 미적 고찰은 구상력과 오성이 개념이 성립할 때처럼 결합하지 않고 공동작업 속에 병립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의 산물인 개념과 미적 판단을 서로 차이를 두어 설명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양자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임을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인식이란 구상력과 오성의 결합에서 생겨나고, 미적 판단이란 양자의 병립 속에서의 협력에서 생겨난다는결론이기 때문이다.(40-41) -이는 칸트의 모든 철학적 사색이 순수수학,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에서 나온 때문이다. 칸트는 모든 개념이 궁극적으로 경험에서 도출된다는 로크(L0cke)의 이론에 반대하는 한편, 生得觀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선천적(a priori) 지식은 정신이 경험하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고 경험과 동시에 그것에 의해 촉발되는 인식능력이다(F. Copleston-임재진 역 <칸트> 중원문화사 1988 55-61). 우리의 수한 감정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것은 대상의 형상이 아니라 도식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 일반의 개념과 삼각형 하나의 형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각형 개념은 모든 개개의 삼각형을 포함시키는 범주를 갖고 있으나 개개의 삼각형은 보편적 삼각형의 한 부분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일반도식은 결코 사고 이외의 어느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없고 공간의 순수한 형체에 관하여 구상력의 종합의 한 규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순수기하에서 도출된 원리를 생활속에 접맥시킨다. 예컨대 개(犬)라는 개념은 경험이 나에게 제시하는 어떤 특수한 형체나 혹은 내가 구체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형상에 제한받지 않고, 나의 구상력이 네 다리를 가진 형체의 동물을 일반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규칙을 의미하는 것이다.(I. Kant-전원배 역 <순수이성비판> 삼성출판사 1983 170) -칸트는 순수수학에서 도출해 낸 선험적 인식론의 개념을 계속 연장시켜 예술적 심미적 이론에 있어 선험적 입장 또한 '구상'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노래를 지을 경우에 우선 작가는 어떤 멜로디를 자발적으로 착상하며 이 멜로디가 몇 개의 낱말을 리디미컬하게 결합하고 이 낱말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처음의 한 소설을 형성한다. 즉 작곡가는 자신의 예술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규칙에 구속되어 있고 이미 그 노래의 최초의 한 소절에서부터 그 규칙을 정식화하지 않아도 자발적 활동을 일관하여 구속하는 것에 의하여 자율적인 타당성을 표명하는 것이라 한다.(김용민, 앞의 책 18-19)대상을 직관함으로써 어떤 표상을 떠올리고 이 다양한 표상의 종합에서 인식이 산출되는바 이 종합의 능력이 구상과 오성이 된다는 칸트의 인식론은 과학이 '개별성'을 지닌 현실의 '보편적' 반영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칸트. <순수이성비판> 111-116) 과학적 정신은 그것이 행한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 더 보편적이고 더 포괄적일수록,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현실의 직접적인 감각적. 인간적 현상태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데 더 정열적일수록 더한층 고도의 것이 된다. 모든 과학을 수학화하려는 것은 하나의 유토피아일지 모르나 그 속에 과학적 사고의 지향이 표현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수학에는 가능한 한 많은-외견상으로는 이질적인-개별적 사례들을 포함하고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보편화하려는 노력이 있다. 과학은 개별적인 사례 속에 은닉된 본질적인 공통의 계기를 발견해냄으로써 법칙성 그 자체를 박진적으로 적합하게 표명할 수 있도록 한다. 한마디로 개별적인 자질구레함이 가장 단순하게 즉 보편적으로 표현되는 공식이야말로 과학적이다(G. Lukacs <미와 변증법> 186-187).칸트의 미학이 비록 세부적인 차이는보이나 기본적으로 순수 수학의 사고방식에서 나왔다는 점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을 엄밀히 구분하는 헤겔류의 미학과의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는 점, 동시에 칸트 미학의 요체가 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미적 판단의 요체가 '구상'의 능력이므로 당연히 순수한 미는 경험이 아니라 형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칸트에게 무수한 개별적인 대상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경험의 대상들이다. 반면 취미판단은 그 규정근거에 경험적 만족이 혼입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만 순수하다. 잔디밭의 녹색과 같은 단순한 색이나 바이올린 소리와 같은 단순한 음색은 양자가 표상의 질료에 대한 감각을 기초로 한 쾌적의 감정에 불과하므로 개인의 사견에 불과할 뿐 미의 보편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다양한 녹색들 중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규정된 녹색을 의미한다. 순수한 취미판단은 형식적이요, 경험적 취미판단은 질료적이다. 인간의 선험적 능력이 어떤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구상능력일진대 순수함이 형식적이라는 것은 칸트로 보아 당연한 논리이다(칸트 <판단력 비판> 84).그에 의하면 건축예술에서 미적인 것을 느낀다 함은 부분적인 색, 장식, 조각 들의 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도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안에 있어서 취미에 맞는 일체의 구도의 기초를 결정하는 것은 감각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기보다 그 형식에 의해서 만족을 주는 것이다. 다른 부수적 색채들은 단지 자극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형태의 유희에 있어서는 도안이요, 감각의 유희에 있어서는 작곡"이라는 그의 미에 대한 결론이 도출된다(앞의 책 85).(41-43) -...모더니즘 미학에서의 인식능력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첫째, 사물을 이성적 진리의 체계로 논증하려는, 합리적 직접성(Im-mediat rational)의 추구가 그것인데 칸트는 이성의 합리적 구성으로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또 그에 의하면 사실의 진리나 설명의 원리는 우리의 이성작용 속에서 구해지므로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이성의 합리적 구성이나 해석을 떠나서 실재에 대한 인실을 할 수 없다. 형식 예술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 예술은 대부분 이 범주와 관련된 것이다.둘째, 베르그송 등은 사물의 인식은 그것을 합리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의 직접 만남(contact immediat)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는 칸트의 비판 철학이 근본적으로 직접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칸트는 감성적으로 주어진 잡다한 오성의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오성을 매개해야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성뿐 아니라 인간 전체의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사고형식, 집단이나 시대가 갖는 편견, 개인적 성격이나 이견, 나아가서는 여전히 상대적인 것에 머무는 과학적 지식까지도 사물의 진리를 은폐시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직접적인 것은 인류가 이제까지 형성한 모든 관념이나 이론이 피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어떠한 주관적 해석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성에 기반을 둔 철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인식론적 순수성(epistemological puriy)이 요청된다.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은 순수한 것이며, 이 순수성을 지향하는 우리의 의식도 역시 순수해야 한다. 이 순수한 의식-'순수의식(con-scence pure)', '변질되지 않는 의식(conscience inulteree)'-은 직관으로 불리우며 이것은 또한 "자기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 대상을 반성하고 무한히 확대할 수 있는 무사심하게 된 본능(instinct desinteresse)"이라고 정의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직관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베르그송(Bergson)은 그 방법으로 생에 주의하고 있는 의식을 지양하하고 생활에서 벗어나 무관심의 상태에 빠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인간은 방심, 몽상, 잠, 꿈과 같은 상태에서 기억의 총량을 감지해내며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특히 직관(intuition)은 종래 지성의 공간적 사고방식을 지양한다. 지금까지의 인과율은 공간의 추상적 작용을 통해 사물이나 사실간의 관계, 법칙을 인식해 왔는데 이것은 공간과 시간을 분리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공간과 시간의 융합, 과거가 현재 속에 침투해 끊임없이 새로운 단위를 구현하는 지속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성립할 수 없다. 사물의 인식은 그 사물 속의 과거와 현재의 침투 속에서 자연으로 나타나는 그 무엇의 총량을 파악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직관은 인간의 내적 자아의 의식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의 철학을 문학화했다는 주장은 여기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요컨대 직관의 철학은 심리소설의 이론적인 모태가 된다 하겠다. (43-44)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수학이 '인간 이성의 자랑'이라는 칸트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이성을 예술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매우 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은 추상을 의미하고 언제나 현실을 빈곤하게 한다. 과학적 개념에서 기술되고 있는 바의 사물의 형태는 공식화된다. 공식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뉴턴의 인력법칙처럼 단 하나의 공식이 우리의 물질적 우주의 구조 전체를 그 속에 담고 또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칸트는 예술적 판단에 속하는 '미적 보편성'과 논리적, 과학적 판단에 속하는 '객관적 타당성' 사이에 분명한 구별을 두고 있으나 양자가 '다양성에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미가 현실의 빈곤화로 떨어질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45) -언어와 과학이 현실의 간략화라면 예술은 현실의 강렬화이다. 우리들이 어떤 주어진 대상을 과학적으로 기술할 때에는 무수한 관찰에서 시작하는데 이 관찰들은 언뜻보아 다만 분리되어 있는 사실들의 막연한 집합이다. 과학은 이것을 몇몇 중심적 특징들로 범주화시키고 다시 그 범주로 개별자들을 연역할 수 있다. 즉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에 상호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예술은 어떤 보편개념으로 개개의 사물들을 연역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술이 추구한 '다양성에의 통일'은 과학과 달리 번복될 수 없다. 순수과학의 이러한 약점을 루카치는 탈의인화라는 용어를 사용해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과학을 인간에게서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즉자태들에 대한 동질적 매개항의 연구라 보고 있다. 이러한 맥락은 유클리드 가하학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量化라는 추상작용이 수행됨으로써 전체적 인간의 일상생활 중에는 어떤 유사점을 갖지 않는 개념구성과 개념구성 결합이 생긴다. 자연의 대상은 인간의 의식이나 그 사회적 발전에서 독립하여 즉자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의 과학적 반영이란 즉자적(ansich)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우리에 대하여 존재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문학처럼 반영을 매개로 해서 인간의 의식에 의해 세계를 지배하는 대자적 존재와 구별된다고 한다(G lukacs-木幡順三 역 <美學> 勁草書房 1968 164-218)(45) -예술에서 정신이 객관화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어떤 감성적 질료 속에 구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각종 질료들은 오직 특정 종류의 형성만을 허용하고 또 이 종류의 형성에서는 오직 특정한 내용만이 향수되고 현상한다. 즉 예술에서 질료형성 과정인 前景形成의 방식이 後景形成의 한계를 규정한다. 따라서 질료는 예술작품의 소재(주재)선택과 형성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다. 질료의 영향은 문학이 다른 예술에 비해 훨씬 이념에 가까운 이유를 설명하는 데 좋은 증거를 제시한다. 이 질료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은 벌써 객관화의 성격을 가졌고 기호체계와 대응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문에 비해 언어의 조탁이 강조되는 시조차도 비록 평소 사용하는 말보다 더 고차적인 형식으로 형상화되어 恒存과 지속성을 보유하게 되더라도 그 언어 자체가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 가지는 객관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으로서의 시는 비예술적 종류의 객관화, 다시 말하면 문학이라는 표제하에 포괄될 수 있는 광범한 정신적 창조의 영역에 밀접하게 접근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시적 작품과 시적 작품과의 사이에 명확한 한계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고대의 역사가의 설화들과 경전보고와 북구인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문학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 결과물은 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시문학은 그 주제를 직접적으로 여러 종류의 질료로 형성하여 감성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라는 우회로를 통하여 읽는 자나 듣는 자의 환상을 자아내게 한다.(46) -...문학에서는 추상적 기호만이 전경으로 나타나 독자는 이미 역사적, 사회적으로 객관화된 질료인 언어를 갖고 자신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문학에서는 미술에서처럼 평면 자체에 나타나는 감성적인 형식의 유희가 결여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문학은 기호의 단일한 층을 매개로 곧바로 이념적인 것, 후경으로 나아가 버린다. '주전자'라는 단어를 듣고 '칼'을 연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가와 독자가 평생을 두고 받은 언어에 대한 교육은 여타 예술의 질료에 비해 언어라는 질료가 갖는 자율성을 억압한다. 이미 인간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똑바로 알아차릴 규약에 익숙해진 것이다. 언어가 갖는 그 형식의 유희는 이 규약의 깨트림, 은유, 비유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은유조차도 그 효과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갖는 기본의미의 차이가 다른 데서 기인할 뿐 그것은 언어 자체가 갖는 의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언어 자체의 자유로운 전경층보다는 이념의 후경층에 집착하게 한다. 또 언어가 가진 지시적 속성-사물을 가리키는 속성-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인간의 내면이 되었건 외면이 되었건 현실의 지시-현실의 모방-가 되게 한다. 도대체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언어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현실의 모방을 미학의 근간으로 삼는 리얼리즘 미학자들은 문학을 역사발전의 최고봉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47-48) -상징적 예술형식에는 건축이, 고전적 예술형식에는 조각이, 근대예술에는 음악, 문학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된다. 특히 문학은 각 시대마다 서사시, 서정시, 드라마가 드러나는바 문학은 제반 예술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가 상이한 장르들로 분화되는 예술이다. 헤겔은 이념과 감각적인 것의 상호대립으로 미의 과정을 파악하는데 발전의 초기에는 의미와 형상간의 대립인 상징적 예술형식이 등장한다. 최초의 예술의 진료에는 이념이 침투하지 못하여 그의 형식은 외적 자연의 형상이며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정신의 쓸데없는 외적 반영만이 나타난다. 다음 단계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의 매개가 감각적인 것의 '매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각이 나타난다. 다음 단계인 낭만주의에서도 그 주관성의 반영으로 정신적 주관성이 자신 속에서 직접적인 주관적 통일 상태에 있게 되는 음악이 중요하다. 이념을 중시 여겼던 헤겔에게 가장 훌룡한 질료였던 언어는 그 밖의 질료들과 비교해서 감각성의 정도가 가장 적으며 다른 질료들과 달리 언어는 단순한 자신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 의미있게 디면서 감각적 질료의 층을 항상 정신적인 것에로 고양시킨다. 따라서 초기 서사시가 이념과 감각을 통합한 고전주의시대에 발생했고 그것이 훼손된 근대에 또다른 의미로 나타난다는 논리는 가장 친이념적인 언어질료에 대한 편애라 볼 수 있다. 결국 리얼리즘에는 현실묘사에 대한 친근감과 더불어 감각 및 이념에서 전자를 폄하하는 논리가 은밀히 스며 있는바 이는 건축, 음악 추상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과 엄밀히 대립되고 있다. 반면 모더니즘 미학인 주관적 보편성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부에 나타나는 구상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고 이는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개개의 사물들을 특수성 속에 지양과 동시에 보존함으로써 예술을이루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현실묘사를 탈각한 이론이다. 따라서 이는 작품에서 어떤 정신적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형식에 적합하다. 어떤 소재나 제재,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그 예술의 속성상 거의 무시되어 있는 순수 음악, 건축, 장식은 묘사해야 할 직접적인 현실의 대상들이 없음으로 해서 주체로부터 자유로이 형식 그 자체의 순수한 유희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이 유희의 기본방침은 순수수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음의 대위법과 리듬, 건축의 강성과 중력과의 투쟁, 장식의 대칭, 균형은 수학의 기본개념 없이는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가 수로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도 음악에서 말미암은 것이다.(48-49) -회화는 감성적이고 가시적이다. 반드시 무엇에 대한 '봄'이 필요하고 무엇에 대한 표현이므로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모방이란 용어가 회화처럼 빈번히 쓰이는 예술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추상미술은 바로 이 회화의 '무엇에 대한 모방'에 반기를 드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미술가는 대상을 출발점, 자극으로 삼아 마치 음악가가 단순한 주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일정한 법칙에 따름으로써 그의 일관된 형식의 의해 인정된 곡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수많은 변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미술가는 지성적, 객관적 수단에 의해 대상의 실재적 성격이나 눈에 보이는 장면을 재현하고자 하지 않고 다른 선험적 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49) -이제 미술은 내용을 담는 수단이 아니라 질료 자체의 자율적 의지를 표명할 수 있게 된다.(오광수 <추상미술의 이해> 일지사 1988 89) 이것은 음악의 세계와 흡사하다. 음악은 외부세계에서 받아들인 오랜 체험의 작용이 전혀 배제되지 않지만 외부세계에서 수용도니 지각을 기록하기 위해 조직되지 않는다. 음악의 기본요소인 리듬은 수학에 기초를 둔 것이며 지적 창조의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음악을 지향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모든 예술은 외부적 모방의 단계에서 벗어나 점차 순수한 창조적 열망을 지향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칸디스키가 미술에 음악의 작곡(composition)적 요소를 도입한 데는 바로 대상표현의 속박을 벗어나 창조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음악이 자연보방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한 예술이라 보았다. 형식을 적용하는 데 있어 음악은 회화가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성취할 수 있다. 음악은 원래 외향적으로 속박을 벗어난 것이어서 음악의 표현을 위해서는 아무런 외적 형식도 필요하지 않다. 외적 형태를 재현하기 위해 음악적 수단을 쓰려는 시도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하는 것은 표제음악에서 잘 드러난다. 불과 몇 세기를 제외하고 오랜 세기 동안 음악은 자연현상을 재현하지 않고 예술가의 정신을 표현하고 음의 독자적 구성을 창조하는 데 전념해 왔다(W. Kandinsky-권영필 역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열화당 1989 46-47). 음악은 내적 필연성을 적용함으로써 가장 비물질적 예술이 되고 있다. 칸딘스는 음악에 나타나는 자체 구성적 요소, 순수한 형식을 미술에 도입함으로써 작곡은 그의 미술의 대종을 이루게 된다. 그에 의하면 미술이 예술가들의 심성에 진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합목적적으로 건반을 두드려 연주하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앞의 책 55). 결국 그는 회화에서 '대위법'을 성립시키려 한 것으로 판단되단. 사실화에서는 대상적인 것이 전면에 대두되지만 추상화에서는 예술적 수단이 전면에 대두된다. 즉 사실화의 표현양식에서 예술가는 구체적인 사실적 대상을 '비예술적'으로 단순히 재현함으로써 작품의 내용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추상화는 대상적인 것을 외관상으로 완전히 배제시키고 형태와 색채를 일차적인 단순한 요소로 삼는다(Kandinsky-차봉희 역 <점.선.면> 열화당 1989 192).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현대 모더니즘 예술의 기본적 발상과 일치한다. 현대예술은 질료를 통하여 대상을 표현하는 종래의 방식을 비판하고 자체의 질서를 작품의 미적 척도로 삼는다. 예를 들어 종래에는 회화의 질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한계-평평한 표면, 캔버스의 형태, 물감의 속성 등이 어떤 환영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은 이와 같은 질료의 한계야말로 회화의 특징이라고 여긴다. 종래 화가들은 2차원의 화면을 3차원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원근법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반면 모더니스트들은 이 모순을 역전시켜 회화의 평면성을 확인, 즉 회화예술이 화면구조의 평면성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서 예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칸트의 형식 중심의 미학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편승하여 건축은 근대에 이르러 다시 예술분야로 승격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미술은 기본적으로 건축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50-51) -순수시론의 대표격인 발레리(Paul Valery)의 시론이 사실상 음악과 건축 미학에서 미롯되었음을 통해 현대예술의 기본적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 '순수문학'은 문학이 현실참여를 하지 말고 오직 예술 자체의 생의 의미만을 천착해야 한다는 식의 또다른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큰 부분에 있어서 모방예술, 표현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문학에 형식예술의 미학을 적용하려는 노력의 발로일 뿐이다. 또 그것은 대상의 잡다한 개별성에서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형식을 추출해내려는 노력에서의 '순수'일 뿐이다. 순수란 단지 형식에 집착하다보니 현실의 구체성들이 추상화되고 따라서 구 구체성들 가운데 하나인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분위기, 정취(Stimmung)를 매개로 해서 현실을 상기시키게 됨으로써 형식이 부각되고 내용이 간접화되는 상황을 내용이 없다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비난이다. 그 '순수예술'이 이루어지 이유가 근대 시민사회의 몰락이나 당시 예술가들의 기질 때문이라는 사회반영론의 입장은 상당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러한 제반 상황들이 근대예술에서 보여지는 순수로의 노력(das Strebennach Reinheit)을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다고 본다. 순수로의 노력은 지금까지 인간이 가져온 '미'의 한 속성의 표현일 수 있다. 이 표현은 물론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저마다의 변모와 특성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했던 '순수'의 정체를 텍스트 자체 내에서 세밀하게 연구하는 일이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첩경이 되리라 여겨진다.(51-52) -30년대 본격적으로 논의 된 모더니즘 소설의 이론이 작가와 세계의 분열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소설을 쓰기에 불리한 상황에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52) -모더니즘 미학은,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개개의 사물들을 특수성 속에 지양과 동시에 보존함으로써 예술을 이루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현실묘사 우위에 반하여, 인간의 내부에 나타나는 구상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 예술에서 현실 반영은 분위기, 정취를 매개로 해서 나타나는 것이며 현실의 직접적 재현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서가 <날개>를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의 면에서 평가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처한 지식인의 모랄 의식과 그에 따른 사회 반영의 욕구라고 볼 수밖에 없다.(53-54) -작가가 주장할려는 바를 표현하려면 묘사되는 세계가 그것과 부합되지 않고 묘사되는 세계를 충실하게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과 그것이 일치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현실을 있는대로 그리면 작품 가운데 선 작자가, 인생에 대하여 품고 있는 희망이란게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암담한 절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작가의 생각을 살리려면 작품의 사실성을 죽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을 버리지 아니할 수 없는 <띠렘마>에 빠지는 것이다(임화 " 태소설론"<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346-347) 이 딜레마 때문에 성격과 환경의 조화를 단념한 데서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그의 이 세태와 내성의 양분론은 루카치의 자본주의에 나타나는 예술인식론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다. 루카치에 의하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토대는-현실이 사회이든 자연이든-외부 세계의 객관성, 즉 그것이 인간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어떠한 파악도 단지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세계의 의식을 통한 반영인 것이다. 이런 인식론을 기반으로 반영이론은 의식을 통한 이론적, 실천적 현실 획득이 모든 형식에 대한 공통기반이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민 미학에서의 반영 이론은 의식과 존재와의 올바른 상호관계가 아니라 두 가지 경향의 일면적 고립적 등장으로 분열되고 만다. 그 하나가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입장에서 시작했으나 운동, 역사 등의 문제를 파악할 수 없는 기계론적 유물론, 다른 하나가 그 자체의 특수한 본질로써 보편 개념을 파악하는 조야한 관념론이다. 여기에서의 '기계론적 유물론'과 '조야한 관념론'은 각각 세태소설과 내성소설에 해당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54-55) -...그들은 모더니즘 문학이 근대의 문화, 경제의 토대 위에서 산출되었음을 역설하면서도 왜 그것이 기교의 특징밖에 갖추지 못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에 시민계급이 역사의 방향성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피상적 기교주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리얼리스트들의 견해에 반대하면서도 기교의 의의를 설명하지 못했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노선을 손쉽게 변경하고 만다.(56) -기교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 제도 속에 침잠해 있는,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집합체의 잠재적 현존이므로 모더니즘이 동시대와 유리된 기교주의란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P. Burger-김경연 역 <미학이론과 문예학방법론> 문학과 지성사 1987 78). 설사 그들 자신이 기교주의임을 시인했다 하더라도 예술 작품들은 그 시대의 자신에게조차 무의식적인 역사 서술이므로 예술가가 전적으로 예술적 재료와의 대결에 집중할 때 한 시대의 사회는 작품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T. W. Adorno, Asthetische Theorie(Surkampf, 1970) 78). 그러나 당대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했던 감각 내지 기교는 재료와의 본격적인 대결이 아니었다. 그들은 의식의 밑바닥에 자신의 기교가 영.미의 이론을 수동적으로 이입한 것인지 모른다는 것, 당대 사회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고 사소한 반박과 압력에 쉽사리 자신의 견해를 비판해 버렸는데...(56) -기교, 또는 형식은 예술 작품이 지니는 논리성이나 나아가 일관성의 계기, 전체의 총괄개념이다. 형식을 통해 모든 작품은 단순한 존재자와 구별된다. 형식은 주관적 활동의 산물인 동시에 본질적인 어떤 객관적 규정이니 앞에서 정의한 바대로 제도 속에 침잠해 있는,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집합체의 잠재적 현존이다. 오직 딜레탕트만이 주관성과 진정한 의미의 기교를 혼동한다.(57) -인간은 감각경험을 귀납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능력을 지녔다. 모든 사례들을 열거하여 진행되는 귀납을 통해 우리는 고차원의 類槪念에 도달하는데 이것은 추상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Rudolf Arnheim-김정오 편역 <시각적 사고> 이화문고 1983 25). 형체는 개념이다. 사고 없이는 볼 수 없으며 역으로 개념형성은 형체의 지각에서 비롯된다. 망막에 투사되는 상은 물리적 대상을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기록한 것인 반면, 이에 상응하는 시각표상은 그렇지 않다. 형체지각은 자료에서 발견되거나 거기에 부여된 구조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둥글다고 보는 사물들은(예: 사과) 완벽한 원이 아니라 단지 원에 근사할 뿐이다. 그럼에도 둥글다고 지각하는 것은 비교적 단순한 형체의 틀에 다양한 자극들을맞추는 구조능력, 구상능력 때문이다(앞의 책 50). 현대 추상회화에 나타나는 사물을 단순화시키는 경향은 인간이 가지는 구상능력에 입각한 것인데...현실로부터 '이탈된 관찰'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통찰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더 잘 보기 위해서 한 걸음 물러선다. 즉 우연발생적인 디테일을 떨쳐버리고 본질요소들이 더 잘 나타나 보일 만큼 충분한 거리를 취하기 위해서 한걸음 물러서서 살핀다.(84) -시에 있어서 완전히 규칙적인 운율이 견딜 수 없이 단조롭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또한 조형예술에 있어서 만물의 구조 속에 본래부터 있던 어떤 기하학적 비례는 규칙적인 척도이며 예술은 그것에서 미묘할 정도로 벗어난 것이다. 그 이탈의 정도는 시인이 리듬에 운율과 변화를 줄 때와 같이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예술가의 본능이나 감수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현대 디자인/추상이론의 근저에는 개인의 감수성이 미의 보편적 법칙(Gemeingultigkeit)인 일반법칙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깔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H. Read-윤일주 역 <예술이란 무엇인가> 을유문화사 1988 31).(85) -한 작품에서 사적 체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기본태도가 아니며 신비평에서 강조하는 "의도의 오류(intentionalfallacyd)"에 빠질 위험성을 다분히 안게 된다. 극단적으로 작품을 쓰고 있을 때 작가의 의도는 작가 자신 조차도 단언하여 말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우리 앞에 가장 확실하게 놓여져 있는 것은 텍스트뿐이며 작품 자체에서 문학연구의 출발점이 놓여야 한다고 본다.(90) -우리는 예술사에 있어서 소설의 지위부상이 미학의 특수성 개념의 부상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칸트에 의하면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의 지양이 예술이 되며 그의 미학이론은 비표현예술인 추상미술, 건축, 음악에 잘 적용된다. 예컨대 음악의 기본요소인 리듬은 수학에 기초를 둔 것이며 지적 구상능력의 산물이다. 반면 문학의 질료인 언어는 여타 예술의 질료에 비해 자율성이 결여된 존재이다.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기표(signifie) 속에는 깊은 역사적 전통과 사회적 약속이 잠재해 있다. 언어를 쓰는 그 누구라도 이 역사적, 사회적 규약을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언어 자체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들게 된다. 특히 이야기를 조상으로 탄생한 소설 장르에서 누가, 어디서(사회적), 무엇을, 어떻게 했다(사회, 역사적)는 줄거리를 사상시키는 행위는 소설 그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인데 이야기라는 것은 반드시 '특정한 내용'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모방(mimesis)일 수밖에 없다.(100-101) -문학에서 문학적 해석이 본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이다. 다시 말해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있는 경우 그 원관념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해독(decode)작업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누님 얼굴은 보름달"이라는 문장이 있을 경우 원관념인"누님얼굴"과 보조관념인 "보름달"의 의미충돌과 융합이 독서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이상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수학공식이라는 보조관념에서 독자는 어떤 원관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종내 문학가들은 그 수학적 요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저히 구명해내기에 앞서 그것의 문학적 의미를 구명하는데 급급해 사상누각의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게 된 결과를 낳아왔다.문학 텍스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상상력은 필수적이며 큰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과학의 공식처럼 논리적인 논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 해독의 비논리성 강조는 종종 작품해석을 턱없는 비약으로 이끌고 가는 예가 없지 않아 왔다.(102-103) -본질적으로 담론은 다른 담론들과의 연관성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음소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 다른 음소와의 관계하에 놓일 때 가능하듯이 텍스트 구성요소 역시 그들 사이의 관계에 의하여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더 나아가 텍스트 구조들은 내적 요소들의 관계만이 아니라 텍스트와 텍스트 외적 사항과의 관계까지도 고려하여야 비로소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같은 시인의 작품들을 상호 관련시켜 파악하는 일, 대상 텍스트를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의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 위에 놓아 보는 일, 그리고 이것을 문학외적 텍스트와 상호관계 위에 놓아 보는 일이 실현될 때 그 텍스트는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133-134) -'실재 사물'과 '거울에 비추어진 사물'은 외양은 같으나 본질은 판이하다. 전자는 실재 존재하는 사물임에 반해 후자는 눈에 비치는 하나의 가상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나' 아닌 다른 물체를 거울에 비출 때 양자의 차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실재 사물이나 반사된 가상이나 둘다 '나'에게는 나의 눈을 통하여 들어오는 가상일 뿐 '물자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재 푸름과 돌의 단단함, 눈의 흰색은 우리가 일상적 지적에서 알고 있는 푸른 것, 단단한 것, 또는 흰 것이 아니다. 물 자체의 색과 나의 지각에서 나온 색을 동일하다고 믿는 것은 소박한 실재론일 뿐이다. 따라서 거울 속에 반사된 영상과 실재 사물의 모습은 어차피 물 자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한 마찬가지의 피상적 내용이 된다. 그러나 거울에 비추인 존재가 '나'일 때 양상은 달라진다. 우리가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은 항시 대타적인 타인의 입장이 되지만 나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근원적 물음이 된다. 따라서 실재의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결코 비교될 수 있는 동격으로 놓을 수 없다. 인격과 사고를 갖춘 나에게 있어 거울 속의 '나'는 위조의 반사물일 뿐이다.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적어도 '나' 자신에 있어서 거울은 대칭축이 될 수 없다. 이런 균형감각이 깨어짐, 대칭점의 동요에서 나오는 당황감이 이상의 자신을 비추는 <거울> 계열의 시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136) -예술에서 정신이 객관화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어떤 감성적 질료 속에 구속됨으로써 가능한테 이 질료들은 특정 종류의 형성만을 허용하므로 질료는 예술작품의 소재선택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다. 그 예로 시각예술과 언어예술의 질료를 비교해 보건대 문학의 질료는 시각예술을 비롯한 다른 예술의 질료와는 전혀 다른 성질과 힘을 갖고 있다. 언어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적 약속이다. 말과 글은 이미객관화된 성격을 가졌고 기호체계와 대응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언어가 조탁되더라도 그 언어 자체가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 갖는 객관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비예술적 종류의 객관화, 즉 문학이란 표제하에 포괄될 수 있는 광범한 전신저거 영역에 밀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165) -작자가 자신의 생활을 그린다는 사소설의 내용은 一元描寫 時點이라는 독특한 문학적 형식을 낳는다. 岩野泡鳴은 일원묘사를 "작자가 먼저 중간의 한 사람의 기분이 된다. 그것을 갑이란 이름의 주인공이라 한다면 작자는 갑의 기분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태도와 심중을 관찰하는 것"으로 정의, 아래와 같이 도표화하고 있다.                                      작자                                       갑                                  병        을                                 구체적 인생(三好行雄. 竹盛天雄 編 <近代文學 10> 有斐閣雙書 1977 50-51)철저한 작자의 엘리트의식의 소산인 이 시점은 1925년 김동인에 의해 도입되어 한국에 소개된바 있다(김동인 "소설작법" <조선문단> 1925 4-7). 이로 미루어 한국근대소설의 시점은 일본의 사소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소설은 작자 내부의 고백이므로 어느 선상까지는 내성소설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그러나 고백행위를 곧바로 사회와의 단절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 小林秀雄은 이런 맥락에서 '사회화된 사'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부르조아의 난숙기에 발생한 자연주의 문학은 '나'를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 의식이 사회상과 미묘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객관성을 획들했다고 보는 것이 小林의 관점이다(三好行雄. 竹盛天雄 編 <近代文學 10> 有斐閣雙書 124).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소설을 위협하던 마르크스 주의 소설과 신감각파 소설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이 두 문학유파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사소설이 내포한 여러 결함에 반발함으로써 사설에 대해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신감각파 소설이 의도한 것은 소설의 허구성의 회복이며 마르크스주의 소설이 의도한 것은 사회성의 재건이었다.(168-169) -일본에서 프루스트, 조이스 등의 신심리주의 경향이 처음에는 큰 반향을 부러 일으켰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이유는 일본 특유의 형식인 사소설 때문이라 여겨진다. 사소설이란 초기에는 일인칭소설이란 단순한 뜻이었는데 여기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이나 주정적, 고백적인 작품이 연상되어 그 뜻에 들어가고 허구를 배척하여 진실을 묘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자연주의 문학이념이나 낭만적 이상주의에 기인한 자기중심의 自華派의 문학이념도 여기에 첨가된어(三好行雄 編 <近代文學 4> 193-204) 근대 일본의 가장 본격적 소설형식을 이룬다.(171) -원래 심리소설은 간접적으로는 프로이드의 의식과 무의식에 직접적으로는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이론에서 연원한 프루스트의 창작방법론이다. 프로이드를 위시한 융, 아들러 등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심리는 의식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이 있어 이것을 분석해야만 완전한 인간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무의식은 의식보다 깊은 심리적 영역에 있으며 인간이 갖는 원천적 욕구로 되어 있다.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이 무의식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정이며 의식적 세계는 이 근원적 욕구를 현실적으로 만족시키는 구실을 한다. 무의식 욕구는 현실의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충족되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그것은 억압되고 변장된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해하려면 억압된 욕구를 분석해야 한다(R. Osborn-유성만 역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이삭 1984 37). 이런 무의식 세계의 추구는 곧장 다다이즘에 영향을 미쳐 1924년 부르통의 '제1 선언'은 프로이드의 꿈이론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J. J. Spector-신문수 역 <프로이드 예술 미학> 풀빛 1981 203). 곧이어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을 계발하게 된다. 이 방법은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에 의하여 말하기, 쓰기, 기타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는 이성에 의한 일체의 테제를 배제한 가운데 일체의 미적. 도덕적 관심을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구술이다.이러한 받아쓰기-글쓰는 사람은 오직 '목소리(la voix)'의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니까-는 순조로운 조건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은 일체의 주위 분위기로부터 독립되어야 하고 가능한 한 외부세계 쪽으로 열린 문들을 꼭 닫고서 꿈꾸는 것과 유사한 상태 속에 잠겨 있도록 자신의 이성을 잠재우고 나서 생각의 가속적인 흐름을 따라 귀를 기울리며 글을 써야 한다(Tristan Tzara/Andre Breton-송재영 역 <다다/쉬르레알리즘 선언> 문학과 지성사 1987 246-247. Marsel Raymon-김화영 역 <프랑스 현대시사> 문학과 지성사 1986 363) 그러나 무의식은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언어로 표현된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인 것이다. 무의식은 명백히 의식 외에 존재하니까 무의식 그대로의 형태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식적 표현에 나타난 상징에서 추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열거하면 상기된 꿈, 공상, 빗나간 말, 오필 등에서이다. 즉 무의식은 어떤 대치물(의식 위에 있는 상징)을 통하여 표현된다(Leon Edel-이종호 역 <현대 심리소설연구> 형성출판사 1983 84-85).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무의식 자체에 목적을 둔다기보다는 기성의 언어적 결합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관습적이고 자의적인 비전에서 탈피하는데 의의를 찾아야만 하고 부르통이 후기 쉬르레알리즘 선언에서 그것의  파괴성을 마르크스시즘의 현실변혁과 연결시킨 것도 자동기술법이 갖는 이런 모순 때문이었다. 요컨대 순수한 쉬르레알리즘만으로는 작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극단성은 베르그송의 순수기억론에 의해 합리적으로 완화되고 있다. 인간이 행위에 밀착해 있는 현재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의 생에서 부주의할수록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의 총량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다. 즉 현실적 생에 무관심할수록 과거의 모든 기억, 참된 자아에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직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직접성을추구한 칸트의 비판철학에 부합하면서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감성적으로 주어진 잡다한 것에 오성의 형식을 부여, 오성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학적 사변에 있어 직접성(immediat)과 매개(mediation)의 대립은 고대 희랍시대부터 지속되어 온 것인데 후자는 헤겔에 의해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순수존재'의 관념은 '순수무'와 같은 것이다. 실재는 사고의 과정 속에서만 존재하고 의미가 부여된다. 이 과정 속에 나타나는 매개된 것은 직접적인 것에 대해 결코 이차적인 것이 아니다. 직접성이 관념자체가 이미 매개의 관념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가 있으며 모든 것은 의식의 반성작용 속에서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반면 전자는 테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 함으로써 확보되었다. 이 사상은 위에서 논한 것처럼 칸트에 의해서 합리적, 직접성으로 나타나며 베르그송에 의해서 직관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한 사물을 아는 것은 그것을 합리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사물의 설명의 원리와 그 근거는 사물 자체 안에 내재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불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육안을 가지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을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지성적 사고를 폐기하고 무관심(desinteressement)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성적 사고는 공간적 사고를 의미한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추상화하며 법칙을 세운다. 이런 공간표상의 사고방식에서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뿐 그것의 본질을 캐낼 수 없다. 오직 과거가 현재 속에 끊임없이 새로운 단위를 구현하는 지속의 심리상태에서만 사물의 본질이 파악된다는 것이다.(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8772-79) 여기서 우리는 심리소설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즉 작가가 소설에서 작중인물의 심리상태를 끊임없이 캐어 들어가며 세계의 사물들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얽혀 있는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인물의 의식구조에서 묘사하는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작자는 순수지속의 상태에 떠오르는 갖가지 사물들을 묘사함으로써 그 사물의 참된 의미를 표출해 내는 것이다. 이는 매개를 전제로 해서만 사물의 의미가 표출되며 매개의 묘사가 예술의 창작 방법론이라는 리얼리즘과는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며, 개인의 의식의 직접적 인식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이론에 속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견해는 이성 즉 공간표상으로는 궁극적인 사물파악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이성이 아닌 직관을 믿는다는 점에서 칸트의 구상능력과는 구별되고 있다.(172-175) -...사소설은 작자가 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눈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일원묘사라는 점에서 심리소설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형식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을 지닌 형식적 장치일 뿐이지 인간의 순수의식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케 한다는 확고한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 사소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호함을 갖고 있다.(175) -...모더니즘 소설은, 내면세계를 그린다는 소재의 측면이 내면세계의 흐름을 파악하는 형식의 측면과 대응되어 있어야 한다...(178) -...바보는 바로로, 영리한 사람은 영리한 사람으로, 신념이 있는 사람은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각자 이데올로기를 갖고 만들어지는 장소, 그것이야말로 사회이며 역사이다(小林秀雄 앞의 책 172-173)(179). -초기 일본문학이 유럽의 자연주의 문학을 수입했을 때 이 문학의 배경인 실증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일본의 근대사회는 성숙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일본은 자신의 독특한 문학전통이 오랜 세월을 두고 쌓여 있었다. 사회적, 경제적 토대가 없는 상황 속에서 문학의 상과를 기법의 편에 해소하는 일보다 즐겁고 자연스러운 일은 없었다.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들은 이 즐겁고 자연스런 일을 가장 안전하게 수행하려는 입장에 처해 있었으니 그 기형적 결과가 사소설이라고 본다(앞의 책 115-116). 이에 따라 작가들은 문학의 밖으로부터 생겨나는 사회화되고 조적화된 사상의 칼을 고려하지 않고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의 배치, 성격의 뉘앙스만을 받아들인 결과 작가들이 무엇을 묘사할 것인가를 고르지 않고 묘사할 방법을 표현할 대상으로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즉 묘사할 방법을 재료로 해서 작품을 창조하는 순서, 현실보다도 현실을 보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마지막에 제재를 공급하는 것이다.(179-180) -환경이 인간과 직접 교섭하여 그의 일상생활을 통해 흡수되어진 개인의 숙명적 진실은 '교양'이란 의미로도 해석되는데 한 개인의 이 교양은 그의 본질이므로 그가 인생을 살아나가는 변함없는 방법이 되어 인생을 결정짓는 숙명이 된다...(180) -1930년대 전향의 개념은 '국가권력의 강제에 의해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그들의 근대화 수행의 최대 난제였던 사상범들을 억압하기 위해 自力과 更生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 법체계의 전통을 근간으로 전향 제도를 만들어 낸다. 이 사상개조는 '외부로부터의 협박과 개인의 자발성'의 양 측면을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전향문제를 다룬 소설 또는 전향문제를 주요 제작 동기로 한 소설을 전향소설이라고 하는데...(김동환 <1930년대 한국전향소설연구> 서울대대학원 1987 2-3)(187) -흔히 운동는 공간의 이동이라고 하나 이는 이미 제논 등에 의해 그 문제성이 지적되었으며 운동은 주체의 의식이 과거와 현재를 보존, 연결하기 때문에 감지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이 과거의 어느 한 위치와 현재의 위치를 기억 속에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에 있어서 공간의 한 위치와 물체가 그 위치에 존재했던 시간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그 위치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의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운동을 지각하는 와중에 현재의 위치와 우리의 기억이 과거의 위치라고 부르는 것과의 사이에서 우리의 의식은 종합을 형성하고 여러 이미지들이 상호침투하고 서로 보완하여 연속되도록 만든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달리기를 하거나 말을 몰 때는 달리는 것 자체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에 중요한 '방심상태'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교통기관이 발달하면서 승객은 지극히 수동적인 상태에서 급격한 공간이동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행위에의 무관심'은 순수기억(memoire ou pure)을 유발시키는 조건이 된다는 것은 전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제 승객은 이미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차 안에서 그 목적지 도달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해방되었다. 승객은 주어진 순간에서 절박한 행위-어떤 목적을 위해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킬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끝없는 방심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주체의 자아는 정신의 팽창에 의해 분산되고 이 분산은 과거 일회적인 뉘앙스와 질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기억들의 총량에 의식을 접하게 된다. 이 의식은 과거와 현재가 논리적인 계기에 의해 연결되는 관계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공간과 현재의 공간들이 상호 교호하면서 나타나는 뒤엉킴이다. 그리고 이 뒤엉킴은 급격한 공간이동 속에서 조금전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을 연결시킴으로써 성립되는 자아의 운동감각과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풍경을 바라볼 때 인간의 회상체계가 활발히 움직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즉 운동을 느끼는 감각과 회상체계는 구조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190-191) -한성은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독립국 소도로서의 통치기능(대외연결, 변경 통제의 기능 등)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일부 지역의 관리를 맡은 지방적 수도(subnational capital)로 격하됨과 동시에 그 규모도 축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와서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었고 그 역할은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직전에 가장 활발히 수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기능 및 식민지 수도 경성의 통치와 행정기능도 늘어나는 등 점차 발전되는 경성부의 현상을 소규모의 도시계획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이 마련되었다. 이 영에 의거 조선총독이 조선의 시가지 구역내에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의 풍치지구, 미관지구, 방화지구, 풍기지구를 지정할 수 있게 되어 서울 시내 기간도로들을 따라 공간 재조직이 한국인의 이익과는 관계없이 속속 진행되었다. 특히 일본인 주거지역으로서 용산이, 일본인을 위한 편의시설, 관공서, 생필품 판매의 상가로서 황금정(을지로), 명치정(명동), 장곡천정(소공동), 본정(충무로)이 구획정리되어 경성은 외관상으로도 근대 도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京城出版社 1930)(199) -도시 산책은 인간의 순수 기억 재생의 가장 좋은 조건이 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인간의 지각과 감각은 첫째 명료하고 정확하나 비인칭적인 것, 둘째 막연하고 무한히 동적이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의 두 양상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는 대상을 명확히 지칭하는 언어들로 외면적으로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 싶으나 실제로는 대상의 본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각의 방법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감각의 불변성을 기초로 고착되는데 실제로 동일한 감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시각각으로 개인에게 다르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같은 곳에 산책한다 하여도 오늘 그 대상을 느끼는 감각과 과거에 느끼는 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대상을 느끼는 주체로서 내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섬세한 인상들 속에 공통적이고 안정된, 따라서 개성이 없는 부분만을 택하여 고착화된다. 따라서 개인의 섬세함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보다 그 언어를 매개로 의식에 투영되는 회상들을 언어화함으로써 고착화된 언어사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이 회상은 단순한 습관 기억이 아니라 순수기억(memoire-pure)이어야 한다. 순수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검열관 역할을 하는 습관기억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이 제거 방법이 현실의 생에 대한 무관심(desinteressement)이다(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8597-98). 절박한 행위는 기억의 모든 활동을 한 점에 집중시키므로 당연히 습관 기억에 치중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생활과 직접 관련된 모든 상황을 벗어나 방심상태가 되어야 순수기억을 떨올릴 수 있다. 이 방심상태의 전형적인 예로 꿈을 통하여 주체는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전체성을 지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산책도 행위의 세계에서의 분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주체로 하여금 생활에서의 직접적 반응을 차단시켜 방심, 몽상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산책'과 마찬각지로 '카페' 혹은 다방체험도 '행위에의 무관심'을 조장하는 환경조건이 된다. 잠자리에 들어있는 시간, 식사시간, 또는 산책을 할 때 우리는 해야 할 어떤 절박한 행동에 구애받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산책 때와 마찬가지로 이웃사람에 대해 간섭을 받을 필요도, 간섭할 필요도 없으므로 관찰자는 어떤 목적 중심의 행동도 불필요하다. 즉 실리적인 지성의 활동이 둔화되어 자아의 내면과 참된 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카페에 앉아서 음주, 식사, 담소, 음악감상을 하거나 대상자가 없을 경우 혼자서 관찰과 명상에 잠기는 행동은 행위에의 무관심의 요건을 종합적으로 갖춘 방심상태가 되는 것이다. (202-203) -사소설은 작자가 한 인물을 설정하여 그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야 한다는 엄정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작자 자신인 '나'일 경우 자연히 체험이 한정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고백을 듣거나 아니면 그의 편지나 일기를 공개하는 독특한 형식이 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내면구조를 단순히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사적인 언술구조인 일기와 편지, 고해성사적인 고백이야말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효과적 장치인 것이다.(205) -사소설의 소재는 병, 가족간의 애정, 돈문제 등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일상적 문제가 인생 전체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성패는 오직 작가 자신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하겠다. 실제로 사소설만큼 문사의 엘리트의식에 의지하고 있는 소설장르는 없을 것이다. 보편적인 일의 극한을 넘어서 혐오감까지 드는 비상식적인 일일지라도 그것이 문사의 생의 위기의식의 체현이므로 독자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ㅣ. 다시 말해서 비록 상식적으로는 패륜이요 신경쇠약적인 고민일지라도 문사가 그 사건에 철저히 고뇌하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 인간의 성실성을 보게 되므로 그 소설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207) -일제 강점기의 철도는 근대화와 식민통치화의 양면적 요소인바, 이곳은 물자와 문명이 들어오는 통로이자 몰락한 농민과 도시 실업잗르의 집합소라는 명암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213) -대도시에서 기술. 상업적 발전이 가져다 준 제도의 운용을 배움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누리게 된 대중인들은 이 편리성 속에 빠져 제도설립의 도덕적 지적 노력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지적. 패쇄적 메카니즘에 빠져버림으로써 서로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하는 묵계 등에 안주하게 된다.(213) -구보는 이들의 무관심에 놀라면서도 동시에 군중의 전형적 속성인 '익명성'에 파묻혀 자기 인식의 경지에 몰입한다. 구보에게 있어서 군중이란 윤리적으로 무책임한 존재이나 동시에 그로 하여금 행위의 절박함, 필연성에서(예컨대 누구와 정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든가 하는 행위) 벗어나게 하여 '생에 대한 또다른 몰두'를 하게 되는 효과적인 장치일 것이다.(213-214) -우리의 의식 속에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혼합되어 불가분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기억의 과정에는 일정한 시각과 장소는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이 파악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장소는 동시에 우리의 삶 속의 한 순간을 의미하며 또 그 장소는 그것이 어떤 시간적인 계수와 무관하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현실성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어떤 시기에 대한 기억은 특정한 장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은 운동에서 잘 나타난다.(219) -의식의 흐름이 시간과 공간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화처럼 명백히 지적해 주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영화의 이중 노출(over lap)......즉 현재의 공간과 과거의 공간이 차례차례 병치되며 앞 장면 위에 뒷 장면이 겹쳐지면서 서서히 앞 장면이 사라져 갈 것이다. 영화는 다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표현한다. 과거의 시간은 과거의 공간에 의해 표현되며 또 관객은 그 공간에 소속되어 있는 과거의 시간, 현재의 시간을 본다.(219-220) -서로 다른 공간을 잡은 시간적인 순서로 배열하며 영화에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있듯이 시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영화는 미래이든 과거든 마음대로 갈 수 있으며 분리된 사건을 함께 볼 수 있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분리해서 볼 수도 있다(R. Stephenson-송도익 역 <예술로서의 영화> 열화당 1989 146-148). 이에 따라 영화 속에서 시간은 계속성을 잃게 되며 일상생활 속에서 뒤바꿀 수 없다는 지향성을 잃게 된다.(220) -그런데 개인을 일상생활의 문제에서 탈피시키는 데 가장 유용하고도 손쉬운 방법인 산책과 카페체험은 도시와 군중의 발달이란 근대의 물적 토대와 맞물려 있다. 19세기에 발달된 자유 민주주의와 기술에 의해 역사의 표면에 부상한 대중은 지금까지 장원제도, 농경사회의 분산된 소집단의 모습에서 거대한 집단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시는 카페이건 호텔이건 극장이건 기차의 좌석이건 산책로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시설이 군중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이 군중 속에서 주체는 고독을 느끼는 동시에 군중이 주는 익명성(anonymic)을 즐기게 된다. 결국 도시 공간은 개인이 자신의 생활을 매개로 하지 않고 풍경의 관조자가 될 수 있게 하는 충분한 소인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도시공간에서 산책자(flaneur)의 의식구조는 농촌공간에서의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비교, 대조할 때 그 비생활성이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규모의 공동체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감에 뚜렷한 경험과 이해를 갖고 있었으나 대도시에서는 그 이해와 경험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물화로 변해버린다. 대인관계는 개인적인 사생활 원칙에 입각해서 소수의 친구들 사이로 국한되고 사회적 지리적 이동성 �문에 유지하기조차 힘들어진다. 대도시 군중들의 관계는 역할 수행자와 소비자의 추상적 존재일 뿐이지 전인적 관계는 아닌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존재들이 아니라 역할 분담에 의한 형식적 추상적 관계로서 존재한다. 반면 농촌에서는 도시와 같은 추상성은 있을 수 없다. 농촌에 살고 있는 자연적 개인(naturliche lndividiuem)은 도시처럼 풍경의 관조자 내지 방관자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대지는 풍경으로서 자연이 아니라 모든 생활 수단, 생활 자료 나아가서는 노동주체인 인간조차도 그 가운데 포함되는 <寶庫> 역할을 한다. 노동을 매개로 자연과 인접해 있는 농민들에 반해 도시인들은 자연에 근접할 매개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도시 속에 사록 있지 않고 불가해한 풍경에 직접 마주대하고 있는데 익숙해져 있다.(222-223) -인간의 사물을 알게 되는 것 즉 인식의 본질에 대한 태도는 사물이 의식에 직접 소여됨으로써 인식된다는 견해와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견해가 있는데 전자를 바탕으로 한 미학이 모더니즘이며 후자의 미학이 리얼리즘이다.(233) -본고에서는 리얼리즘의 미학적 범주에서 문제적 개인의 유형이 나타나듯이 모더니즘의 주관적 보편성의 미학에서 대칭, 산책, 승차의 테마가 나타남을 주시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직접성 추구의 노력은 둘로 나뉘어 지는데, 첫째 이성의 합리적 구성을 중요시하는 태도에서 대칭의 테마가 나타나고, 둘째 사물의 인식은 이성이 아닌 직관으로 사물을 직접 만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견해에서 산책과 승차의 테마가 나타난다. 첫째의 견해는 그 속성상 형식에 대한 친근감을 포함하고 있어 형식 자체의 순수 유희를 추구하는 순수음악, 건축, 추상미술에 많이 등장한다. ... 둘째, 직관에 의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견해는 문학에서 심리소설로 나타나는데 직관의 심리상태 추구는 산책과 카페체험, 승차의 테마로 드러난다. 본격적인 심리소설은 사소설과 구분되어야 하는데 사소설은 주로 작가가 한 인물의 눈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일원묘사로 되어 있으므로 한 개인의 심리를 그리는 심리소설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형식적 장치를 갖고 있으나 이 형식은 인간의 순수의식이 사물의 본을 파악한다는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233-234) -보편성이 현실의 개별자에 대한 구체적 형상화된 특수성을 통해야 하는 리얼리즘 소설에서 시간은 자연히 역사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어야 하므로 주체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시간이 나타난다. 반면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주체의 의식이 현실의 특수성에 의해 매개됨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므로 시간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지속적 현재'로 작용한다.(235) -특히 현대에는 일상성의 의미가 제도적이며 구조적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에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있다. 농경 사회의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반본 속에서 어떤 종류의 일상성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 반복성은 자연과 합일체가 되는 안정감 때문에 권태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반면 공업화와 대량생산과 대중사회로의 진입은 인간에게 조직화된 일상성을 가져다 주었다. 현대의 잘 짜여진 조직과 제도 속에서,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개인적 윤리와 창조적 능력을 존중하는 노동윤리는 점차 사라졌다. 이제 안정 내지 일상성은 제도적으로 되었다. 자연은 멀어졌고 생산적인 노동을 할 때조차도 분업, 연속동작 때문에 생산물과 접촉이 사라져버렸다. 그대신 사회 전체에 대한 고도의 조직화가 생산뿐 아니라 소비에까지 미치게 되어 소비를 통해 일상생활을 조직하고 구조화함으로써 현대인은 여기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그는 종래 자연과 일치함으로써 느꼈던 일상성을 제도로 느끼게 되었으며 그것은 종래보다 더 완강한 것이었다(Nenri refebere-박정자 역 <현대세계의 일상성> 세계일보사 1990 85). 이미 현대인은 대량생산과 대중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제도 속에서 적응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상을 지겨워하면서도 그것에 일탈할 때,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다. 이미 일상성은 현대사회의 엄연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단지 그것을 폄하하거나 무시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240) -근대에 이르러 역사주의자들은 대개 역사법칙의 한 구성요소로서 어떤 진보개념을 인정하였다. 예를 들어 역사 현상의 무한한 혼동과 연속 가운데 하나의 일관된 구조가 있고 합리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서으이 진보라는 주장이 있다. 진보는 인간이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시간이 가장 유용한 도구라는 심념을 나타낸다. 여기서 어떤 '가치'는 시간의 경과나 시간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Hans Meyerhoff-김준오 역 <문학과 시간현상학> 삼영사 1987). 그런데 이얼리즘 소설은 보편성은 현실의 개별자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화인 특수성을 통해서 재현된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연히 역사, 사회의 총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근대 역사의 시간개념에 맞닿아 있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런 근대 소설의 시간체험의 역할을 루카치는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근대에 이르러 선험적 고향(원리)이 사라진 훼손된 세계에서 소설은 본질을 찾아야 하지만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재로 삼게 됨으로써 시간은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시간은 현대적 의미에 반기를 드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저항이 된다. 소설에서 의미와 삶은 서로 분리되어 본질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으로 분리됨으로써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고 만다(G. Lukacs-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263) -모더니즘 소설은 주체 내부에 주관적인 상대성을 갖는 경험적 시간을 중시한다. 이 소설에서 주로 사용되는 의식의 흐름은 시간에 있어서 지속적 자아의 양상을 밝히는 데 유용한 기교이다. 이 기교는 개인의 백일몽과 환상 속에 부유하는 무질서한 파편들을 결합하여 어떤 종류의 통일체로 만듬으로써 시간과 자아의 내부에 있는 사호침투라는 동일성을 표현한다. 자아 속에 나타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선조적이며 인과율적인 시간으로 분열되지 않고 인간의 의식 속에서 '지속적 현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회상은 항상 현재 의식의 심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회상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의식 속에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회상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시간적 차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일어난 날짜와 관계가 없는 '영원한 정수'의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회상의 의식의 흐름을 주요 방법론으로 하는 심리소설에서 표면적 시간이 원점회귀의 순환구조에 기대고 있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탄생, 성장, 노쇠, 죽음의 순환이나 사계절, 하루의 순환은 불변적이고 영원하며 역사나 이성, 논리 밖에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무시간적이며 초시간적이다. 조이스가 <더블린 사람들>에서 표면적 시간을 하루로 잡은 것은 심리소설의 의식의 흐름이 갖는 초시간적 속성 때문이다.(264-265) -'일상성(Alltaglichkeit)'이란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을 매일매일의 테두리 속에서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Karel Kosik-박정호 역 <구체성의 변증법> 거름 1985 66). 그들의 삶의 기능의 반복 가능성이 매일매일의 반복 가능성, 매일매일의 시간배분 속에서 고정되는 것이다. 물론 일상성은 공적인 삶에 대비되는 사적 생활도, 고상한 삶에 대비되는 저속한 생활도 아니다. 일상성 속에서 활동과 생활양식은 본능적이고 잠재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생활의 메카니즘으로 전화된다. 사물들, 사람들, 운동, 일, 환경은 이미 알려진 세계의 구성물로서 모든 것이 손쉬운 것이며 개인들은 이 손쉬움 속에서 그 자신의 경험, 그 자신의 가능성, 그 자신의 활동을 기반으로 한 관계들을 발전시켜나간다. 일상성은 한 마디로 '생활의 리듬'으로 단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장 예외적며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환경 속에도 생활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집단 수용소에도 나름의 일상성이 있을 수 있다. 매일매일 일상적인 모든 나날들은 다른 대응하는 날로 대치될 수 있으며 이번주 목요일은 지난주 목요일 또는 작년 목요일과도 구별되지 않는다. 목요일은 다른 목요일과 섞여버리게 되며 단지 그 목요일에 특별하고 예외적인 어떤 것이 있을 때만 별달리 남게 되어 기억에 떠오르게 될 것이다.(266-267) -...주어진 일상성에는 어떠한 주체도 다른 주체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상성의 주체들은 상호교환적인 존재들이다....일상성은, 그 안에서 인간의 기계론적 본능에 따라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되는 규칙적 리듬의 세계이다.(267) -그런데 현실의 개별성 속에서 특수한 것, 영혼의 본질변화를 위한 특수한 체험을 도출해내야 하는 그런 시간성을 가진 소설에서는 이런 반복되는 리듬이 비본질적 존재로 간주되기 쉽고 실재로 이런 소설 분석의 관점에서 일상의 평범함을 그린 소설들이 통속소설로 폄하된 것도 사실이다. 소설가들은 설사 일상을 그리더라도 그것이 인간생활에 주는 권태와 모순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소설을 진해시켜 왔다(G. Lukacs-木幡順三 譯 <美學> 頸草書房 1968 34). 이런 사고에 의하면 일상적 사고는 현실의 객관적 반영이 될 수 없다. 현실은 일상성 속에서 직접적,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개적 국면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상성에 대한 분석은 현실을 파악하고 기술하는 데 어느 특정한 정도까지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일상성은 역사의 받침이며 원료이다. 일상성은 역사를 지탱해주고 그것에 자양분을 주지만 그 자신에게는 역사가 없다. 반면 잡다한 일상생활의 객관화 활동이 과학과 예술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현실의 과학적 반영 및 미적 반영은 역사적 발전의 도상에서 형성되어 점점 서분화되어온 반영이다. 이런 반영은 물론 그 기초와 궁극적 실현도 생활의 실현 중에서 보여진다. 이 반영은 일상생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립되었는데 그 결과 일상생활의 표현형식과 혼합됨으로써 일상생활을 한층 높여준다. 일상생활과 예술의 관계를 파악해볼 때 양자는 끊임없는 동요가 있는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다. 예술 속에 인생의 여러 문제가 특히 미적인 형식으로 개조되어 예술적으로 해결되며 현실의 미적 극복의 성과가 일상생활 속에 유입되어 객관, 주관적으로 그것을 풍부하게 한다. 예술과 일상생활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희곡과 소설은 특정의 개별적 사례의 형성 중에서 거기에 포함된 성격과 상황과 전형을 예술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앞의 책 209-210). 요약하면 예술은 일상생활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며 양자는 상호작용을 하나 그럼에도 일상성은 그 무매개성과 우연성 때문에 객관적 반영이 될 수 없고 미적 반영의 자양분 역할만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267-268) -그렇다면 일상성에서 도출되는 '생활의 리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리듬감각을 루카치는 '현실의 미적 반영의 추상적 형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추상은 탈의인화된 즉자개념인데 예술은 구체적 대상에서 발견한 것, 대자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용이 형식으로 전화됨과 동시에 형식이 내용으로 전화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외적인 자연의 리듬의 체험은 규칙있는 움직임에 대해 일종의 안정성(Sekuritat)의 감정을 느끼게 하며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화 페르세포네와 데미테르의 신화도 이 감정에서 기원을 갖는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성에서 차단되어 리듬 그 자체만을 즉자적으로 존재시키는 방식은 근대 부르조아 미학의 추상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루카치는 있어야 할 현실에 대한 미적 반영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 잡다한 일상성의 반복에 대한 반영은 지극히 탈의인화적이고 추상적인 반영이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주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그러나 루카치는 현대 산업사회의 속성이 되어버린 조직화된 일상성을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이제 일상성은 단수히 극복되어야 할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 자체의 특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일상성은 제도로 정착되었으며 이것이 부인되기에는 너무나 견고한 토대를 지니게 되었다. 도시인은 이미 의무의 시간(직업적인 일을 하는 시간), 자유시간(여가의 시간), 강제된 시간(일 이외에 잡다하게 필요한 시간: 교통, 수송 등)의 짜임 속에서 적절히 적응하게 되었다. 이 반복은 물론 농촌의 반복과도 다르다. 자연의 흐름과 합일되어 씨뿌리고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반복에서 인간은 생리적인 안정감을 느끼나 도시의 제도가 부여하는 반복은 인간에게 더 광범한 반복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일상생활은 지루한 임무, 노동계급의 삶, 짓눌려 사느 삶의 반복이란 비참함과 동시에 땅 위에 뿌리박고 영원히 지속될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양상이 되었다.(268-269) -...일상성의 이 양면성, 즉 하잘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삶의 반복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엄연히 현대 세계에 지속될 가장 확실한 일들이라는 지속성의 양면...(269) -일상성이란 생활의 리듬을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개별적 삶들의 반복가능성이 반복의 시간 배분 속에서 고정되는 것을 말한다.(273) -영화에서서 시간은 연속성과 일방통행적 성격을 잃어버린다. 클로즈 업(close up)으로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가 하면 플래시 백(flash-back)으로 거꾸로 돌릴 수 있다. 회상하는 장면에서 반복도 된다. 또는 미래의 전망을 통해 앞으로 껑충 뛰어나갈 수도 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전후해서 보여 줄 수 있는가 하면 시간적 간격을 가진 사건들이 이중 노출이나 교대적 몽타쥬를 동시에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영화의 시공성은 흔히 프루스트, 조이스, 도스, 파소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서 플롯과 장면 전개의 불연속성, 사상과 감정의 직접성, 시간 척도의 상대성과 모순성 등은 영화의 커팅과 溶明(fade-in), 화면 삽입 등과 동일한 요소로 평가되고 있다. ... 경험이나 사건을 연대적으로 정리하고 구분하려는 노력이 프루스트의 관점에서 더욱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 사람 특유의 전형적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다시 성인이 되더라도 항상 근본적으로 동일한 체험을 한다. 어떤 사건의 의미는 그 사건을 겪고 견뎌낸 여러해 후에야 비로소 머리에 떠오른다. 따라서 지나간 세월의 침전물을 현재 시간의 경험과 구별하기는 불가능하다. 프루스트가 질서정연하고 일정한 순서를 가진 시간을 해체하여 자기 마음대로 뜯어 맞추는 것은 인간의 내면성과 경험의 직접성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의 직접성을 얻기 위한 형식으로 소설에 나타나는 심적 상태의 동시성은 영화의 시공성과 일치하고 있는데 <천변풍경>에 나타나는 영화기법은 이 상관성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273-274)
100    김윤식, <<염상섭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댓글:  조회:1919  추천:0  2009-05-16
-<만세전>은 염상섭 소설의 특질을 밝힘에 주춧돌과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189) -공간적 구조란 무어서인가. 그것은 <길>이라 할 수 있다. 그 길이란 여로를 뜻하는 것이다....그런데 그 길이 철도(기선)로 되어 있다는 점이야말로 염상섭 문학의 근대적 성격을 지탱하는 척추에 해당된다.(194) -<만세전>에서 공간개념은 동경서 서울까지의 공간개념과 서울만의 공간개념으로 분절되는바, 이 두 공간개념에 대응되는 시간개념은 정반대로 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199) -아내의 죽음을 앞에 두고 주인공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당위성과 동경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두 가지 마음의 가닥 속에 놓여 있는데, 이러한 두 마음의 지향성은 실상 <만세전>을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구조이다. 그리고 그 구조에서 어느 쪽에 기울어졌느냐를 따지는 것은, 작품평가의 문제점이기보다는 작가의 <개인적 취향>의 문제에 속하는 것이다.(200) -주인공의 이러한 심리적 뒤틀림(이중성)이야말로 작가 염상섭의 성격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것은 <근대적 성격>에 해당되는 것이다. 외골수로 흐르는 심리, 선악이 분명한 것, 이성과 감성이 판연히 갈라진 자리야말로 전근대적인 세계이다. 근대적 성격이란 이와는 달리 복잡성과 갈등구조 위에 구축된다. 그것은 제도적 장치의 복잡성에서 필연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2) -동경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의 시간관념과 서울에서의 시간관념의 차이는 곧 <만세전>이 어째서 근대소설인가를 밝히는 실마리라 할 수 있다.(203) -<만세전>의 여로는...겉으로 보기엔 동경서 서울까지에 이르는 여로(길)형이지만 그 내면 구조는 동경에서 서울, 서울에서 다시 동경으로 되돌아가는 회귀형으로 되어있다. 선적 여로형과 회귀형 여로형의 차이는 아주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울(조선)을 <묘지>라고 외치며 도망치는 주인공의 의식은 동경을 <묘지>와는 정반대인 것, 이를테면 <천국>과 같은 것으로 인식함을 가리킴이다.(205) -선적 여로형은 막힌 회로인 만큼 그 여로의 끝에는 죽음이 가로놓여 있다.(205) -<만세전>의 묘지(구데기)콤플렉스는 동경서 서울까지의 여로형이 선적 여로에 해당되었음에서 말미암는다. ...그렇지만 <만세전>은 서울에서 동경으로 되돌아가는 또 하나의 여로형, 즉 회귀형을 갖고 있다. 거기는 동경이라는 곳으로 모든 것이 훤하게 열려 있는 곳이다.(206) -증기기관의 발명이야말로 근대의 합리주의사상을 낳은 모체이다. 기계의 일종인 증기기관의 구조는 원동력 장치, 그것을 변환시켜 전달하는 장치, 그리고 협의의 기계(도구) 등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증기기관이 원동력이 될 경우 모든 생산을 사람의 신체력 또는 개인적 차이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물이나 바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지역적 자연조건에서도 행방시키게 된다. 증기기관의 힘으로 말미암아 도시집중, 합리적 생산과 분배 등 자본제 생산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빈틈없는 논리체계를 이루어 합리주의적 사고를 만들어 내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다. 적어도 우리가 근대를, 그리고 근대문학을 문제삼는 한, 증기기관의 본질을 한시도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게 되어 있다. 염상섭의 문학은 근대소설을 문제삼을 때 비로소 빛나는 것이다....지금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근대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소설을 문제삼을 때 염상섭이 그 첫 자리에 오는 것이며, 그 이유를 밝히는 이유는 곧 증기기관의 본질을 떠나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만세전>은 제일 확실한 작품이다.(209) -염상섭은 증기기관이 낳은 사상이 곧 그를 식민지 백성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적어도 <만세전>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211) -증기기관의 발원지이자 그 총본산이 영국이다. 증기기관의 힘이 세계를 누비고 식민지를 경영하게끔 했고 최고의 부를 축적하게 해주었다.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가 비로소 확립될 수 있었다. 합리주의 사상이란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자아의 각성, 개성의 확립이란, 이러한 합리주의 아래서 마침내 나올 수 있는 사상이다. 인습에서의 해방, 그것이 인간성의 행방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런던이야말로 제도적 장치로서 그러한 사상이 확립된 곳이다. 근대민족국가라는 제도적 장치를 가능케 한 것도 증기기관의 힘이었다. 동양에서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이룩된 것은 상해였고, 그 다음이 동경이었다. 한국유학생들은 주로 동경에서 배웠다. 그들은 근대의 출장소, 동양의 런던이라 불린 동경에서 중등교육부터 받았다. 그것은 일본식 교육이 아니라 근대의 교육이었다.(214-215) -염상섭이 동경에서 배운 것은 이 제도적 장치로서의 근대였다. 조선유학생들이 동경에서 배운 것은 이것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자체가 보편성임을 승인하였다. 근대교육이란 일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일본을 배우는 것이 근대를 배우는 것인 만큼 거기에 잘못이 없음을 그들은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상해라는, 동경보다 일층 고도화된 근대의 존재방식을 알지 못했던 만큼 일본에 기대는 것이 근대를 배우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러한 일은 3.1운동 이래 상해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고, 유학생들이 상당수가 상해로 옮기기 전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다.(215-216) -이인화가 민족주의에로 기울어지면 그럴수록, 동경이라는 근대, 이른바 보편성(중립성)은 사라지게 된다. <만세전>은 아직 이 단계에까지 와 있지 않다. 다만 주인공 이인화가 정자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것은 조금 암시적이다.(217) -물론 근대라는 것과 마르크스주의가 함께 증기기관이 만들어 낸 쌍생아의 사상이지만, 따라서 보편성을 띤 것이지만, <만세전>은 거기에까지 미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라는 또하나의 근대(보편성)는 <삼대>(1932)에 와서야 겨우 논의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세전>은 이처럼 아직도 증기기관의 사상에 멈추어져 있다. 주인공 이인화가 아직도 학생신분이란 사실에서도 이 점이 분명해진다. 그에게 동경이나 일본이 이데올로기의 수준에 있지 않고 오직 보편성, 근대의 사실로만 일방적으로 보였다. 그러기에 그것은 낙관주의이고 낙천주의적인 것이다. ...<만세전>의 열린 시계, 원점회귀형의 정체는 여기에 있다.(217-218) -사사건건 비꼬고 풍자하고 비웃음으로써 그 대상에 대해 애착과 빛을 던지는 방식(진리를 밝히는 일)이 염상섭 소설의 최대 강점이자 <만세전>의 문학적 성과이다.(227)
99    김윤식, <<염상섭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댓글:  조회:1720  추천:0  2009-05-16
-제1장에서 작자는 중산층 출신의 부자집 손주인 덕기와, <맑스 보이>인 김병화를 보여줌으로써 30년대의 풍속도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514) -말일 <삼대>가 이광수나 이효석의 작품에서처럼 사랑이라든가 감정을 일층 우위에 두고 얘기를 전개한다면 그것은 한갓 낭만적 멜로드라마에 떨어졌을 것이다. 사랑이나 감정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근대에는 핏줄이나 재산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적 삶이란 재산에 대한 생각이 핏줄이라든가 사랑보다 훨씬 큰 비중을 가져 인간을 행동케 하는 것이다.(516) -<삼대>에는 핏줄과 재산이 유착되어 있어, 핏줄 쪽은 봉건적인 생각에, 재산 쪽은 근대적인 생각에 속하는 것이어서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삼대>는 근대적 소설이자 거기에 미흡한 것, 곧 중산층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이로써 잘 드러난다. (516) -인간적 바탕의 깨끗함에 대한 도덕적인 우월성이야말로 작품 <삼대>의 밑바탕에 깔린 힘의 일종이다. 덕기도 병화도 이러한 도덕적 정결성에 의해 서로 깊게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필순 및 필순 집안의 존재는 <삼대>의 세속적인 측면을 재는 눈금과 같은 것이다. 어떤 명작도 그것이 명작이기 위해서는 논리 밖에 놓인 어떤 정결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삼대>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522) -조성훈이 이 편지를 찾고자 안절부절 못하고 홍경애는 그 편지 쓴 여인의 정체를 몰라 몸이 달아 있는 이 장면을 국외자인 김병화가 지켜보고 있다. 부자집 아들의 오입장이 노릇하는 삶의 풍속도라 할 것이다. 홍경애가 김병화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것 역시 20년대 후반의 식민지 속의 서울의 풍속도에 속하는 것이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부자집 오입장이와 그 첩에 대한 흥미와 김병화와 피혁 등 사회주의자들의 행동 따위가 꼭같은 평면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곧 두 가지 모두가 한갓 풍속적인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대>에서 작가의 이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작품의 의미는 똑바로 파악될 수 없다.(523) -풍속을 삶의 깊은 곳에서 그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풍속이 의식주를 해결한 자리 위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중산층 이상에 연결된 삶이라면 문화적 감각으로의 오입장이적인 감각이 빠질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조아지의 일상적 삶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삼대>가 이 시대 중산층의 삶의 감각을 다룬 유일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근거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527) -...조씨가문의 분재기를 보여줌에 있어 작가 염상섭은 실로 파격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작가 염상섭이 맨얼굴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536) -작가가 자기의 목소리를 버리고 돌연 <필자>라는 한갓 기록자의 자리에로 옮아 앉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삼대> 속에서 바로 이 대목만이 소설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소설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현실적 삶에서는 사실자체를 드러내야 한다. <삼대>가 소설임엔 틀림없지만 위의 대목만은 소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현실적 세계로 옮겨가 버린 것이다. 진실과 사실이 여기서 대비되고 있는 형국이다. 어째서 분재기란 소설로 다루어지지 않는가. 왜 작가는 소설 속에 분재기만은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이질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진실과 사실 사이에 소설을 두느냐 진실 쪽으로만 치달을 것인가를 묻는 마당에까지 작가는 모르는 사이에 육박해 온 것이다. 사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소설은 소멸되고 신문기사라든가 학술논문이라든가 보고문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진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그 끝에는 사랑이라든가 미움 또는 그리움과 같은 환상(꿈)의 수준에 이르고 말 것이다. 곧 로만스에 이를 것이다... <삼대>는 이 점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았다. 사실자체의 힘을 이용하여, 진실이라는 이름 밑에 자행되는 허위성(환상적 열매, 허황한 기준)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분재기의 제시와 그 제시방법이다.(536-537) -그렇지만 <삼대>는 소설인지라, 작가는 금방 자기 목소리에로 되돌아갔다. 사실이란 한 번 얼굴을 내밀면 족한 것이다.(537) -조부의 돈의 사상을 유지하되 사당의 사상(봉건적인 것)을 버리겠다면, 그것은 어는 쪽으로도 불철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철저함이야말로 바로 <삼대>의 한계라 할 수 있다.(539) -곧 그러한 사상운동의 묘사는 범죄자(깡패)라는 감각이 아니면 결코 소설 속에서 포착될 수 없다. <삼대> 자체가 신문소설인 만큼 총독부 도서과의 검열의 직접적인 대상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정이 잘 이해될 것이다. 가치중립적인 일상적 삶의 감각 속에 신문이 놓여 있는 만큰 그 신문이 안고 있는 정치감각에 충실하는 일이야말로 근대적 삶의 기준에 제일 알맞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병화. 장훈은 깡패 또는 범죄자의 범주가 아닐 수 없다.(547) -<삼대>가 가족사적인 소설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조부. 부. 손에 걸치는 삼대의 세대적인 갈등을 그린 것이 아님도 거의 확실하다. 더구나 같은 세대의 동시대적 의식을 그린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렸는가. 성격이었다. 성격이되, 운명론적인 성격이다. 발전소설, 또는 교양소설이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교양(발전)소설 또는 성장소설에서의 성격이란,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해 가는 것이지만, 운명론적인 성격은 날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비중이 결정론적 성격에 있는 만큼, 현실개혁의 의지는 사실상 승인되지 않는다. 현상유지의 보수주의, 인간의 일상적 준거, 가치중립성에 멈추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속성이 이 보수주의와 잘 어울릴 수가 있는 것이다.(554-555)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한 것, 그 속에 덕기의 인생이 놓여 있다. 이 불확실한 마음이란 덕기가 놓인 상황과 등가이다. 이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삼대>의 참주제가 새삼 선명해진다.(561) -돈의 자율성과 개개인의 성격이라는 두 기둥 속에 놓인 조씨가문의 삼대는 각각 저마다의 <도의적 이념>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치중립적이고 현상유지의 보수주의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제 4 대인 덕기의 아들도 앞 세대가 보인 성격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음이 원칙이다. 다만 그는 그 나름의 <도의적 이념>만을 가질 따름일 것이다. 돈의 자율성을 돌파하지 않으면 이들 가문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은 이제 분명해진 것이다. 이들 가문은 그들 재산을 신성불가침으로 보호해 주는 통치부가 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구한말 통치부든 총독부든 미군정이든 자유당 통치부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에겐 역사가 없는 만큼 삶의 내재적 가치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삼대>가 안고 있는 한계가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니깐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을 이 작품만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일찍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563)
98    한국문학연구총서 현대문학편 8<<염상섭 연구>> 새문사 1982 댓글:  조회:1623  추천:0  2009-05-16
김종균 <<염상섭의 생애와 문학>> -<<삼대>>에는 조. 부. 자의 세대가 공존하면서 각기 다른 정신체계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중심세대는 할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유교사상 체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 따라서 개화. 개량주의자 아들의 세계는 빛을 못 보고 파멸에 이르는 과도기 체계 내지 역사적 공간에 끼어든 희생세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정신상태 여기서 이미 비극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15) 이주형 <<'민족주의 문학운동'과 '삼대'>> -<<삼대>>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축을 구성의 골격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세대간의 대립과 연속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횡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여러 인문들 간의 대립과 화해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축이다. 이와 같은 플롯은 <<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한 이중구성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 그리고 같은 세대의 여러 가지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창출된 것이었다고 보겠다.(43-44) -조상훈이 이 작품 속에서 보이고 있는 행위의 대부분은 매우 통속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가장 통속적인 인물로 그려 보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조상훈이라는 것이 된다. 통속적 인물이란 대다수 시정의 사람들처럼 평속한 가치관을 가진 채 감각적, 순간 향락적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45) -결국 종축과 횡축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가치관과 이념을 포용한 덕기의 현실대응 방법론은 1920년대 이후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말해 온 점진개량론, 준비론 혹은 실력양성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행방 후에 개고된 부분에서는 대일타협론까지 나타나고 있다. 개고된 부분에서 덕기는 기무라 고등과장에게 뇌물을 주면서 피검자의 석방을 '사정'하고 심지어 기무라의 도움에 대해 '감사한 안사'마저 하고 있다.(49) -<<삼대>>의 형실대응 방법론은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층민들의 운명을 통찰하고 거기에 논리적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유산층 주변의 제한된 생활체험에서 나오는 지식인(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일단 이렇게 말해둔다)의 관념을 통해서 제시된 것...(51) -또한 작중인물 덕기가 말한 대로 포용과 감화가 적극적 현실대응 방법이 될 수 있으려면 그 뒤에 오는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최종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논리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포용과 감화의 다음 단계에 대한 발전적 논리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삼대>>에는 제시되지 않으며, 이 점이 <<삼대>>의 큰 한계일 수밖에 없다. <<삼대>>이전이나 이후의 작품에서도 염상섭은 그런 발전적 논리를 제시한 적은 없다.(51) 김중하 <<염상섭 문학의 사회적 의미>> -문학이 현실과 맺고 있는 현실반영적 의미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서의 문학사회학적 의미인 상대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의 근대문학이 발전해 온 파행적 특수성과 시대상황이란 것을 감안한다면-우리의 근대문학이 일제치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여건적 특수성-문학의 절대적 평가 기준에서보다 그 상대성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 단제의 민족사관이 극단적인 것이면서도 긍정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때문에 단제의 극언인 일제치하에서의 모든 문화활동은 반민족적 또는 친일적이란 표현이 절대적 변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해석된다. 그러나 만일 단제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는 불해하게도 친일근대문학은 가질 수 있어도 민족적인 우리의 근대문학은 처음부터 가질 수 없게 된다는 비극을 만나게 된다.(79) -삼대에 걸친 인물의 연계성이 세대간의 갈등이란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돗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태도나 현실 인식의 차원은 소설의 배경적 의미 이상의 민족사적 현실에 대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소설 전체의 의미를 확대하도록 강요하게 된다.(84) 김시태 <<횡보의 비평>> -문학은 아무것에도 예속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종교나 운동에 예속된 이용물이 되고 계급의 특유물이 되거나 선전기관이 되며 玩弄物이 될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시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릇된 현상이었다. 소위 예술이니 인생을 위한 예술이니 하지만 그 어느 견지로서든지 예술의 완전한 독립성을 거부할 수 없다. 더구나 경향이라든지 주의라든지 파라는 것이 작자와 작품을 지배하는 疇型에 배겨내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작가가 어떠한 주의라든지 일정한 경향에 구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견지로서는 계급문학의 가부를 논의 할 필요가 처음부터 없지 않을까 한다.(염상섭: <<작가로서는 무의미한 말>>, <<개벽>> 56호, 52면)(36-37) -<<계급문학시비론>>에서 시작된 그의 프로문학 비판은 국민문학 논의와 함께 한층 가열되었으며, 그 후 이데올로기 문학운동이 종식된 30년대 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37)
97    김윤식 편, <<염상섭>>, 문학과 지성사 1977 댓글:  조회:1536  추천:0  2009-05-16
김윤식 <<염상섭의 소설구조>> -덕기는 그 어느 인물에서도 증오나 애정을 드런지 않는다. 이 중립성이 문체의 중립성을 가능케 한다...(59) -물론 부 상훈의 치졸한 연극, 그리고 순순히 회계하는 장면, 지주사의 배신의 동기, 병화의 새 출발, 필순에의 방황 등등이 형편없는 피상적 관찰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삼대>>의 원전 쪽이 훨씬 설득적이다. 거기에는 단행본에 있는 <<부친의 사건>>(41장), <<백방>>(42)이 없다. 실로 개악인 셈이다.(61) -과연 <<삼대>>의 주제가 중산층 안정감으로서의 재산의 윤리화로 본다면, 작가의 주제 파악의 지극한 보수주의가 옳으냐, 즉 시대의 진보성이냐 퇴보이냐의 문제가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함에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새삼 물을 것도 없다. 리얼리즘이 단순한 묘사의 정밀성에 그치는 자연주의가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이다.(61) -서울 중인 계층 출신이자 그 계층 옹호에 철저한 <<삼대>>의 조부 조의관의 이데올로기를 호의로써 바라본 작가의 분신이라 할 덕기(손자 세대)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신학문과 기독교적 이념에 놓인 아버지 조상훈에 대해서는 놀랄 만한 적의를 작가가 드러내고 있다. 실상 작품 <<삼대>>의 리얼리즘상의 취약점이 바로 이 편견에 있는 것이다.(65) -(중성적 안정감 회복이) 염상섭의 경우는 서울이라는 지역성, 그리고 궁정주변과 연결된 역사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그의 보수주의는 설명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은 중인계층의 역사성에 직결시켜 보면 한층 명백해진다.(70) 김현 <<염상섭과 발자크>> -전형으로서의 인물은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을 자신의 피 속에 육화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오히려 그 이념 자체이다. 그러나 염상섭과 발자크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형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두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보다는 전형을 만들 수 있는 정열. 수난이, 다시 말하자면 한 시대의 문제가 어떻게 모든 인물들에게 확산해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다.(100) -사회가 변하지 않고 풍속적인 면에서나, 윤리적인 면에서 굳건한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틀을 문학화하는 것이 작가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회가 변천한다면, 그 변천의 과정이 여러 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형을 창조하지 않고 <한 뭉텅이의 인물>들을 창조하려 할 때에는 (1) 평행을 이루는 여러 세팅의 복합, (2) 인물의 다양함, (3) 도덕적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것의 부정이라는  여러 측면을 종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100) -<<만세전>>에서부터 점점 극복되기 시작한 자기 정열의 과잉표출은 그러나 <<삼대>>에 이르면 완전히 제거되고, 자기 관찰의 한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행해진다...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냉정한 관찰이라는 선으로 자신을 낙찬지운다. 물론 그 관찰은 개성의 자각이라는 개인주의적 입장 위에서 이다.(112-113) -그를 통하여 소위 개화기시대의 인텔리. 부호들의 기독교와의 관계가 극명하게 들어난다. 개화기 초의 기독교가 풍속으로 뿌리박지 못하고, 새것 콤플렉스의 한 증세로서 <수입>되었다는 것을 상훈은 보여 준다.(114) -30년대의 세대를 염상섭은 덕기와 병화로 대표시키고 있는데 그 두 인물이 다같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개화기 시대의 기독교의 악질적 측면을 나타내 주는 동시에 기독교에서 분파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극화를 보여 준다.(114)
96    최 혜실, <<한국 근대문학의 몇 가지 주제>>, 소명출판 2002 댓글:  조회:1468  추천:0  2009-05-16
제 3부 근대문학과 일상성제 1 장 <<삼대>>에 나타나는 1930년대 자본가 몰락 -그러나 이 다양한 주장들의 관계를 정치하게 살펴보면 한 가지 상충되는 점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돈을  추구하는 부르조아의 가치관과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족관은 그 본질상 상당히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충되는 가치관이 드러나며 양자는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고 어떤 선상에서 타협하는지 혹은 두 가치관이 정말 상반되는 것인지 세밀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데서 리얼리즘소설로서 <<삼대>>의 문학사적 의미망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126) -대부분 한국의 소설들이 예술 특유의 돈에 대한 순결벽을 드러내는 데 반하여 염상섭의 <<삼대>>에는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인이 <<돈>>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126) -그러나 지금까지 인물들이 '돈'을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양상과 그 이기심이 가족간의 '피의 논리', 인륜이 작용하는 양상과의 교호관계는 세심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즉 기존의 연구는 합리적 논리와 가족간의 인정주의의 관계를 중산층의 보수주의란 개념하에 같이 놓고 산술적으로 결합하는데 그치고 있다. (128) -물론 우리는 1930년대 초, 경성 공간에 공존해 있는 구한말 세대, 3.1운동 세대 앞으로의 세대라는 조.부.손의 현재 모습들에서 과거 역사의 편린들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논의의 초점은 상반된 세 가치관들이 현재의 시공에서 어떤 갈등들을 빚는가에 있는 것이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변모의 과정과 필연성을 통찰하는 데 있지는 않은 것이다.(128-129) --결국 <<삼대>>의 가장 큰 주제는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물의 갈등 양상인 셈이다. 여기에는 혈육의 정이 존재하지 않는다.(1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훈이가 형사를 세워 금고를 탈취하거나 정미소를 상훈이에게 상속시킨다는 가짜 유서를 금고 속에 집어 넣는행동을 했다는 것은 신문소설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삼대>>가 현실이었다면 그것은 부자간의 소송을 의미한다. (138) -...상훈과 덕기가 대안 없는 비판자라는 점만 강조하기로 한다.(146) -조의관에게 있어 벼슬과 족보 사기는 천박한 속물주의가 아니라 자손들이 가문에 긍지를 가지게 함으로써 그것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반면 상훈이나 덕기에게는 이런 확고한 윤리관이 결여되어 있다. 상훈의 '제3제국론'이나 덕기의 동정자 성향은 현실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일 뿐 현실을 향한 가치관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결국 덕기가 <<무화과>>에서 아버지 상훈처럼 무위도식하다가 몰락하고 마는 전철은 이미 <<삼대>>에서 배태되고 있는 셈이다.(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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