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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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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금전만능, 향락주의, 참 사랑 댓글:  조회:1639  추천:0  2009-05-16
-단편소설<<나쁜녀자>>를 읽고 로.윌크쎈은 스코틀랜드의 작가이며 방송원이며 연설가이다. 그의 저작은 많은 나라들에서 발표되였다. 지금 그의 단편소설은 영국, 미국, 화란, 벨지끄, 프랑스, 독일 및 기타 일부 나라들의 잡지에 실리고있다. 그의 단편소설 <<나쁜녀자>>는 안해와 남편의 정부, 남편과 정부와의 대화로 엮어진 소설이다. 편폭이 크지 않고 사건교대가 대화에 기대고있지만 인물의 모순갈등이 고조에 이르러 피할길없이 부딪치게 된 설전(언쟁)을 펴보임으로써 인물들의 성격, 수양, 도덕풍모 등을 생동하고도 함축성있게 보여주고있다. 세상만사가 돈에 복종하는 금전만능의 사회에서 돈의 힘에 의하여 비탈려진 애정, 사내대장부의 위세나 풍모도 돈의 유혹에 기운을 잃고마는 현실, 비천한 출신속에 감겨있는 참사랑, 이것이 우리의 청각에 울려오는 이 소설의 메아리이다. 노르마와 라리프의 결합은 그 애초부터가 애정의 열매가 아니였다. 노르마의 경우에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금전만능의 신념으로 제보다 젊고 유능한 사나이를 고른데 불과하고 라리프의 경우는 향락적인 생활에 인생을 절이려는 자기의 향락주의를 성공한데 불과하였다. 하기에 그들 부부간의 관계는 사랑에 대한 충성으로 매여져있는것이 아니라 부자가 빈자를 지배하는 다시말하면 경제적폭리에 따른 인격에 대한 돈의 지배로 유지되고있었다. 그러나 정부인 메라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비천한 출신속에 깊고 숭고한 사랑을 담고있는 그는 아무런 외적요소의 보탬도 없는 순수한 사랑 그 자체에 충성한다. 오히려 자기의 참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사랑에 붙어오는 외적부담(<<사랑하기만 한다면...외팔이 누이동생, 혹은 위궤양, 혹은 가짜이발, 무엇이든 좋아요.>>하고 메라는 말했다)도 달갑게 받아안으려 한다. 바로 그러했기에 그녀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충성을 리용하여 그녀의 사랑을 편취하고 그녀를 노리개로, 갱년기가 지난 안해에게서 받을수 없는 본능적만족을 충족시킬수 있는 성도구로 간주해온 정부 라리프를 결코 용서할수 없었던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사기군은 라리프이다. 그는 향락적생활을 위하여 노르마한테 장가들었으나 그녀가 자기보다 나이 많기에 일찍 본능억제란 부부생활의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그래서 그가 선택한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 본능억제를 풀어줄수 있는 <<성도구>>였다. 갱년기에 이른 노르마로선 이것쯤은 허용할수 있었던 모양이다. 젊고 유능한 남편이 본능억제에서 해탈되는것은 되려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훌륭한 보양제였기때문이다. 물질욕이 강한 남편이 자기의 금전유혹을 벗어날수 없음을 확인한 까닭에 이런 엉뚱한 자비를 베푼것이다. 그래서 메라의 방세까지 대주었다. 그러나 <<방탕녀>>로 안 메라가 숭고한 애정과 사랑에 대한 충성으로 그들의 부부관계를 위협하자 그녀는 또 자기의 신념인 금전만능으로 메라를 위협한다. 그녀의 목적은 메라를 자기가 죽을 때까지 남편의 정부로 되게 하고 그래서 젊고 유능한 남편을 영원히 자기의 사랑의 <<노예>>, 아니 사실은 금전의 노예로 되게 하려는것이였다. 금전과 사랑의 충돌, 이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현실적의의이다. 특히 소설이 세 인물의 대화로써 이같은 거창한 주제를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는데 그 예술적매력이 짙게 담겨져있다.
8    전통의식, 당대의식 및 민족의식의 관계 댓글:  조회:1669  추천:0  2009-05-16
자기가 발딛고 선 사회와 문화의 성격을 올바르게 리해하고 접수하여 후세에 력사로 기증할 현재를 사회발전의 흐름에 맞게 꾸미려는것은 모든 학문, 적어도 사회과학의 거창한 주제이며 기본과제이다. 그만큼 지금 전 사회적으로 온양되고 다듬어지고있는 관념갱신과 당대의식의 탐구도 무게있는 력사적 의의와 현실적 의의를 담고있다. 과연 이런 사명감을 념두에 둘 때 우리 문단의 모지름도 만삭의 임신부가 겪지 않으면 안될 산전진통임이 틀림없다. 비록 한족문단에 비하여 지루한 침묵의 연장선을 그어왔었지만 오히려 그로 하여 엄숙성과 과학성에 담보를 얻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담보가 차라리 남의 흉내만 내지 말고 한족문단에 대해 찬히 살펴보고 제나름의 사변적 연구를 할 때에만 가능할텐데 우리 문단의 현실태를 두루 살펴보면 남이 부른 구호를 뒤늦게나마 따라 부르는 페단이 퍽 활기를 띠고있는것이 민망스럽다. 자기의 두뇌를 움직일새도 없이 남의 뒤를 따라 덩달아 웨치는 그런 <<구호웨침식>>으로는 도저히 우리 문단의 미래를 불밝힐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족문단의 지나간 페지를 다시 번져보면 민족의 렬근성을 찾던 나머지 민족의식으로는 안된다느니, 서방으로부터 당대의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느니 하는식의 주장들이 적지 않은 페지를 차지하였었다. 또 지금도 민족의식과 당대의식을 병렬 혹은 대립시키면서 민족의식이냐 아니면 당대의식이냐 하는 극단적인 선택에 네니 내니 하고 얼굴을 붉히고있다. 유감스러운것은 오랜 침묵을 지키던 우리 문단도 대개는 이러루한 주장들로 은근히 끓고있는 그것이다. 풀어말하면 이런 주장들과 견해들의 그 제기법에 한해서는 전혀 아무런 의심도 던짐이 없이 다만 어느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질문에 전투적태세를 취하고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어느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질문에 앞서 이런 제기법부터 과학적이 되느냐 하는데 질문을 던져야 할것이다. 첫째, 만약 민족의식과 당대의식을 병렬 혹은 대립의 위치에 갈라세운다면 벌써 민족의식은 당대의식이 아니라는 상식적인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당대의식이란 그 정의를 내리기에 앞서 벌써 현대인의 사고범주에서 산생되는 의식을 말함은 지극히 자명한 일인데 이에 따르면 우리의 민족의식은 현대인의 사고범주밖에 놓여야 한다는 황당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둘째, 민족의식에는 조상세대가 유구한 력사의 흐름속에서 다듬어놓은 전통의식과 현대인인 우리가 다듬고있는 의식이 포함됨도 의심할바 없는것인데 전통의식과 구별되여야 할 후자를 구경 무슨 의식이라고 하는가 하는 웃음거리 비슷한 질문도 필요하게 된다. 셋째, 전통의식이나 당대의식이나 모두 시간적차원이라는 동질적근원을 갖고있다. 그런데 그들이 전통의식을 포섭한 민족의식을 당대의식과 병렬 내지 대립시킴으로 하여 전통의식과 당대의식은 각기 다른 두개의 의식에 주소를 붙이게 된다. 그렇다면 전통의식은 민족의식을 시간적차원에서 쪼갠 종개념이라 할 때 당대의식은 어떤 의식을 시간적차원에서 쪼갠 종개념인가 하는 질문이 던져짐을 막을수 없다. 네째, 민족의식이란 결국 민족의 미래를 도안하는 주체의식이다. 어떤 민족이든지간에 오직 민족의 미래를 도안하면서 끈질기게 민족의 자활력을 키우는데 은근한 야심을 품고있다면 그 민족에겐 틀림없이 유일 체계적인 민족중심의 자주의식이 기본 물줄기를 이룰것이다. 이런 민족은 외래의 의식도 그대로 받아넘기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체의식을 튼튼히 굳힌 배경하에서 가치판단에 의한 취사선택을 하여 주체적으로 리용하는것이다. 이것은 결코 이질적인 마구바꿈이 아니라 역시 자기 전통에 대한 발전적이고 계승적인 개편 또는 재편이며 현대적 민족의식의 창조인것이다. 사실 매개 민족의식은 그 사회적배경에서부터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워낙 동근일원(同根一元)적인 것이 아닌데 어떻게 외래의것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 민족이 자기 민족의식의 체계밖에 이른바 없어선 안된다는 다른 의식의 체계를 세워 병진시킨다는것은 더구나 상상할수 없는 일이다. 민족의 확대된 시점에서 세계를 정시할 때 전통에 대한 검토이든 새 질서에 의한 창조이든 외래요소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든 모두 결국은 성장을 기탁한 민족의 미래에 선물할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는것이다. 즉 당대의식이란 결국 민족의식의 현대적표현이며 미래의 전통이라는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것 같다. 사실 우리가 관념을 갱신한다느니 당대의식을 키운다느니 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현실사회를 대변하고 삶의 현실에 대응되는 의식체계를 세우려는것이다. 역시 민족의식의 현대적주소를 찾으려는것이다. 때문에 당대의식을 키우고 관념을 갱신한다는것은 개척을 모르는 고루한 사고방식이나 진부한 관념을 개변하는것이지 결코 전통을 외면하는것이 아니며 민족의식과는 더구나 저촉될수 없는것이다. 만약 당대의식이 민족의식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제기법이 그런대로 성립된다면 현대적 민족의식으로서의 당대의식은 곧 미래의 전통이 아닐수 없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삶의 내용을 담은 당대의식을 키우려면 모름지기 민족전통에 발을 붙이고 조상세대와 피줄을 끊지 말아야 한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자기의 정신적 기틀로 되는 문화전통이 없다면 그 민족은 벌써 령혼을 잃은 육체나 다름없이 분해되고말 운명일것이며 자기의 얼굴을 가지지 못하고 외래의 유혹에 저마끔 열사람이 열한개의 반응을 보여주는 민족은 사실 벌써 민족으로서의 참된 함의를 잃고만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식이 력사의 범주에 속하는것이지 결코 력사가 의식의 범주에 속하는것이 아니다. 풀어말하면 력사의 흐름에 따라 의식은 부단한 선택과 다듬음이 있게 되는것이다. 바로 우리의 전통이 유구한 력사의 흐름에도 흩어지지 않고 우리 세대까지 전해질수 있은것은 시대에 따르는 갱신과 변질이 끊임없이 시도되여 왔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에 들어와서 많은 전통들이 시대의 요청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조상세대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따르는 갱신과 변질을 꾀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세대의 잘못인것이다. 오늘을 예견못한 조상세대에 죄를 씌운다는것은 과분한 처사이다. 오히려 우리가 조상들이 용케 물려준 전통을 미래에 전해지도록 현대적주소를 찾아주고 잘 가꾸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벗기 어려운 죄가 아닐수 없다. 확실히 우리는 흔히 전통을 다만 발생시간적차원에서 대상하였기에 미래지향적인 안목에서 전통에 대한 재창조를 기도하는것이 아니라 회고적인 자세로 마치 썩은 감자와 성한 감자를 고르듯이 기성되 형태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에 그만 주저앉고있다. 이런 틀린 자세는 전통연구를 골동품을 만지는것과 같은 취미에 빠지게 하는바 미래를 위하여 과거의 맥박을 찾는것이 아니라 단순한 말타고 꽃구경식의 감상에 머무르게 한다. 우리의 문단을 살펴보면 이는 아주 뚜렷한 흠집으로 나타나고있다. 이른바 민족특성을 나타낸다는것이 현대성을 몰린대로 <<전통적>>인 복장, 풍속, 성격, 기질, 륜리도덕 등만을 민족적인것으로 잘못 확신하면서 조금이라도 옛날의 것과 어긋나는것이면 곧 민족특성에 맞지 않는다고 도장찍는다. 즉 삶의 내용은 새로운 광장에서 변했음에도 여전히 조상세대의 전통을 물려받은 그대로 주장하는것이다. 이것이 의식면에서는 민족의식을 다만 전통의식으로만 생각하게 하는 페단을 초래하였다. 하기에 이른바 당대의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루한 전통을 배격하는것과 민족의식을 비난하는것을 혼동시하고있는것이다. 이 모든것은 그네들이 전통문화의 본질적특성에 대한 몰리해에서 기인된것이다. 전통문화의 본질적특성은 바로 부단한 발전연변성 또는 계승성과 상대적인 응고성 또는 력사적관성이다. 이는 문화는 인류로동의 창조물이라는것과 근원적인 인과관계를 맺고있다. 즉 문화는 인류의 로동성장의 반영물로서 거기엔 어차피 부단히 자기를 확장시키고 완성시켜 최종적으로 자연상태에서 완전히 탈피하려는 인류의 향상심과 함께 또 자기가 마련한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면서 자기가 발딛고 선 자연환경, 사회환경의 현실상황에 미덥게 적응되려는 점착력이 두개의 힘이 되여 모순운동을 형성하고있다. 바로 이와 같은 공제성과 가변성으로 하여 전통문화의 공제계통은 자아공제계통과 자아조절계통으로 이루어진다. 하여 전통문화는 력사의 흐름속에서 결코 무작정 본원적 혹은 발생적인 형태 그대로 후새대에 강요되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광장에서 여로모로 자활능력과 존재적가치를 검험받게 된다. 이때 전통문화는 자아공제계통을 통하여 극력 이미 굳혀온 생활방식, 법률, 도덕규범 등으로 사람들을 단속하는 한편 자아조절계통을 통하여 새로운 력사시대의 요구에 만족을 주기 위하여 내적인 조절과 변질을 꾀한다. 그런데 인류문화가 저급단계에서 고급단계에로 발전함에 따라 특히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세계가 좁아지면서 전 지구촌을 단위로 하는 현대화 문화의 가능성이 날로 현실화됨에 따라 민족의 전통문화는 자기의 자아공제계통을 엄격히 단속하고 약화시키는 한편 자아조절계통을 훨씬 강화함으로써 수용, 융합, 다듬기 등 창조적기능을 활발히 키워 민족의 확대된 시점에서 외래의 선진적문화도 적극 섭취하면서 기성된것에 부단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현대적주소를 찾아주는것이다. 현대적주소를 찾았다는것은 론의할나위조차 없이 그것이 새로운 내용으로 현대사회를 대변하며 삶의 현실에 대응된다는것을 뜻하는것이다. 또 인간의 삶의 흐름을 봐도 그럴수밖에 없다. 인간력사는 결코 이어달리기처럼 한세대 한세대의 계선이 선명한 련계로 되여있는것이 아니라 3대 혹은 4대가 일정한 자연환경과 시대배경하에서 함께 삶을 엮어간다. 하기에 자신은 그 시대에 살지 않았더라도 그 시대를 넘어와서 그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전세대가 혈연의 끈이 되여 결코 그더러 과거로부터 완전히는 독립해서 존재하게 하지 않는것이다. 이렇게 후세대는 어차피 전세대에 의하여 마련된 환경, 즉 전통의 제약속에서 살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삶의 공간이 달라졌음에도 삶의 내용은 여전히 그대로라면 거기에 벌써 동시대로부터의 락후가 찾아드는것이다. 하기에 시대적요청으로부터 후세대는 어차피 전통의 변질을 꾀하게 되며 전세대도 시간적, 공간적 이질감으로부터 결국 전통을 반성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이로부터 전통에 대한 현대적의미매김이 가능하게 된다. 이때 도저히 현대적주소를 찾아줄수 없는것은 자연도태될수밖에 없는것이고 새롭게 창조된것, 외래적인것 등이 그 공간을 보충해주면서 미래에 새로운 환경을 마련한다. 력사는 이렇게 세대세대로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흐른다. 보다싶이 민족의식은 전통보다 훨씬 넓은 의미에서 설명되여야 하며 민족의 미래를 도안하는 의식의 총체로 확인되여야 한다. 풀어말하면 민족의식이란것도 결코 최종적으로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생활원리에 대한 발견과 실천을 통하여 사회의 본질적파악에 병행되는 의식의 부단한 창조과정인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이 현대적 삶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산생되는것이 바로 당대의식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당대의식을 민족의식과 병렬 혹은 대립시키고있기때문에 흔히는 전통에 없거나 때지난것을 민족의식에 없는것으로 잘못 인정하여 그것을 이른바 민족의식의 밖에서 찾고있는것이다. 이처럼 전통을 민족의식으로 확대하여 리해하는것은 기실 민족의식은 조상세대들이 창조하여 물려준것이 전부이고 우리는 그것을 보충, 창조할 가능성이 없다는것으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전통도 력사의 흐름에 띄워놓고 살펴보면 결코 한날한시에 창조된것이 아니고 전세대의 전통에 후세대의 창조와 다듬음이 끊임없는 가운데서 가지를 쳐왔다는것을 당연하게 발견할수 있으며 그로부터 우리도 전통에 대한 보충과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것은 물론 력사가 벌써 그만한 한토막을 다름아닌 우리한테 부탁하고있다는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이와같이 민족의식의 내용의 전부가 전통뿐이 아니라고 할 때 오늘 우리가 처한 시대에서의 민족의식은 구경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민족의식의 현대성을 빼놓고는 전혀 대답이 완전할리 만무하다. 또 민족의식의 현대성을 말하자면 당대의식을 몰리고는 도저히 설명이 되여지지 않는다. 즉 우리가 발딛고 선 삶의 마당을 참으로 미더웁게 꾸며가자면 반드시 그 삶의 내용을 대변하는 당대의식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쉽게 풀어말한다면 내가 사는데는 에누리없이 내 나름의 사고방식이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조상의것도 내것으로 만들고 남(외래)의것도 내것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 사실 당대의식이란 개념이 언제부터 제기되였느냐 하는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한다면 시대적요구로서의 관념갱신, 당대의식의 정립은 인류문명사를 발전시켜온 원동력임을 승인하지 않을수 없다. 어느 민족의 어느 시대의 문화적발전이든지 모두 자기의 원래의것을 반성하고 외래의것을 수용하며 새로운것을 창조하는 이 세가지 경로를 밟지 않은것이 없음을 력사는 증명하고있다. 이는 문화발전의 필연적인 객관법칙이기도 하다. 우리의 전통도 이런 경로를 거쳐왔음이 틀림없고 거기엔 결코 고유한것만이 아닌 외래적요소가 포함되여 있음도 확연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의 민족적전통으로 확고히 굳혀질수 있었음은 바로 어떤 경로를 통하여 어떤 변화나 변질을 겪었든지간에 그것이 하나의 핵, 즉 민족의 주체성에 의해 유기적으로 통일되였기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당대의식을 민족의식과 병렬 혹은 대립시킨 나머지 당대의식을 단면적으로 서양의식의 탈바꿈으로 잘못 알고있다. 민족의식의 밖에서만 찾자고 하니 그럴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이런 착오를 진리로 알고있는 사람들은 서양의 철학, 서양의 사상, 서양의 그 무엇에 그대로 당대성의 탈을 씌워가지고는 이를 수용하는것이 곧 당대의식이요, 관념갱신이라고 우겨대고있다. 그들한테서는 당대의식과 서양의식이 동의어로 되고있다. 하여 그들은 당대의식을 수립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표준을 서양의식을 접수하는가 안하는가 하는것으로 삼고있다. 우리 문단을 살펴보아도 작가들이 관념을 갱신했는가, 당대의식을 수립했는가를 진단할 때 흔히는 모더니즘문학을 대표로 하는 서양의것을 접수하는가 안하는가, 지어는 한 작가의 <<의식의 흐름>>소설이 서양의 <<의식의 흐름>>소설파의것과 일맥상통한가 안한가 하는것을 놓고 아니어니하고 시비할 정도의 페단까지 나타나고있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짜라고 비난하고 이른바 서양의것을 접수하지 않고 사실주의문학을 견지하면 보수적이요, 시대의 락오자요 하는 질책까지 들이댄다. 왜서 이처럼 극단적인 주장들이 문단에서 춤을 출수 있는가. 여기엔 얼핏 보기에 그럴만한 리유가 주어지는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 국정으로부터 살펴보면 자연과학의 새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고속도의 세계적절주와 발걸음을 함께 하려면 도저히 서양을 외면할수 없으며 서양에 수용적 자세를 취하지 않을수 없음은 너무나도 자명한 현상태이기때문이다. 서양이 현대적물질문명의 창조와 함께 그 근거로 되는 동등수준의 관념을 세운데 반하여 우리는 물질문명의 근대적 행군과 함께 어느정도로는 그 원인으로 되는 의식의 세기적변질에 모대기고있는것이다. 그만큼 서양의 충격은 세계의 접근에 따르는 충격으로서 결코 일시적인것이 아니라 지속적인것이며 요청적인것이 아니라 강압적인것이며 우연적것이 아니라 필연적인것이다. 허약한 경제를 살찌우려면 무엇보다도 정신적성숙이 앞서 요청되는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간에 수용이란것은 결코 서양의식을 그대로 당대의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과 맞물림을 이루지 않는다. 오늘 서양의 발전과 우리의 락후라는 이 특정된 현상태에서 당대의식을 세우려면 틀림없이 문화발전의 세개의 도경-반성, 수용, 창조가운데서 수용이 뚜렷한 요청으로 나서고있을뿐이지 결코 이것으로 민족적인것을 대체할수는 없는것이다. 그것이 어느만큼 중요성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비중을 점하든지간에 에누리없이 우리를 위해 다듬어진다는데 목적성이 있는것이다. 가령 우리가 전통의 내용과 특점을 분석함도 없이 죄다 고루한것으로 도장찍어 내동댕이친다면 또 서양의식에 대해 근본적의미조직에 대한 깊은 리해와 파악도 없이 그 허울도 벗기지 않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특히는 새로운 문화의 형성을 우리 민족의 주체적발전이란 시각에서 파악하고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변화의 물결에 자기의 운명을 내맡기고 밖에서 밀려오는 도전에 스스로의 힘을 분산한다면 우리는 긍정코 얻은것이 잃은것을 보상할수 없는 비극을 표현하게 될것이다. 맹목적인 수용태세 자체가 벌써 문화의 창조를 저애한다. 맹목적인 수용은 옮겨옴이지 창조가 아닌것이다. 자기의 몸에 맞게 치장할줄 모르고 남의 흉내에만 바쁜 인간, 그와같이 정신적기틀을 뿌리뽑힌 사람의 삶의 비극이 너무나도 처참하다면 민족성을 상실한 민족의 운명은 또 어떨가?!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지한다고 한다. 특히 변혁의 기운이 세차게 감도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명석한 두뇌를 가져야 한다. 인젠 근본적생각을 정리하고 정처없는 방황을 결산할 때다. 적어도 우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높이 웨치듯이 문화의 발전과 창조에서의 민족의 주체성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오늘에 들어와서도 세계사라는것이 틀림없이 각기 다른 민족들에 의해 그 페지를 적어가고있다는것을 념두에 두고보면 민족문화의 문제는 바로 세계사의 문제외의 다른것이 아니기때문이다. 비록 세계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축소되고 민족들지간의 동질성이 뚜렷이 성장되고 지어는 융합의 대문에 들어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매개 민족의 필연적인 성장의 결과로 되자면 틀림없이 매개 민족의 주체적인 노력을 전제로 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전통의 계승, 발전문제는 여전히 우리가 지향하고있는 현대화작업의 구심점 내지 정신적기반임이 틀림없는것이다. 그런데 계승은 반성을 전제로 할 때 바람직한것이고 발전은 창조를 외면할 때 앞길이 막힌다. 이때 반성과 창조의 요청을 받는것이 곧 수용이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 떳떳이 서서 부단히 확대재생산되는 문화의 원동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흐트림없는 자세로 자기식의 길을 개척하여야 한다. 오직 우리의 문화적특질을 현대적의미에서 재확인하고 부단히 새로운 시대의 감각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에 외래의것을 리해, 평가하고 수용함으로써만 비로소 민족의 밝은 미래가 미덥게 기탁되는것이다.
7    인간의 본능과 인간성 댓글:  조회:1590  추천:0  2009-05-16
-단편소설 <<새벽새는 울고있다>>에서 본다 <<새벽새는 울고있다>>. 그것은 이 새벽에 목을 매달고 지옥의 대문안으로 성큼 들어가버린 궁재씨를 슬퍼하여 우는것일가. 물론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죽음이란것이 언제나 소름이 끼치는것이고 어두운 색갈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다니엘 띄포가 <<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로 되던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파멸의 원인으로 될수 있다>>고 했듯이 죽음이란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과 불행일수 있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과 해탈일수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궁재씨의 죽음은 어떤 색갈의 것일가. 그것을 알기 위해 궁재씨의 생활종적을 추적해본다. 우선 궁재씨는 련속 두 안해를 잃은 외토리이다. 사랑하는 짝을 잃는것이 죽음 다음으로 가는 고통이라고 하는데 특히 남성에게 있어서는 사랑을 잃는것이 생명을 동시에 쫓아내는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하물며 궁재씨는 련속 두 안해를 잃었음에랴. 어찌보면 이것이 가난과 함께 궁재씨를 타락의 심연에 떠밀어 넣은 원인일수 있는것이다. 중년상처에 대들보가 휜다고 하지 않는가! 밤늦게 돌아가도 <<몸열기로 이불속을 따뜻이 덥혀놓고 기다려줄 녀편녀도 없는>> 너무나 차가운 기운에 묻혀있는 오두막집에 꽉 들어찬것은 가난이란 재산뿐이여서 <<내집이구나 하는 따뜻함과 위안>>이란 도저히 가질수가 없다. 녀자의 손길이 닿지 못한 집에 생기가 돌수 없었고 모든 생활이 계산적일수 없었다. 다음 궁재씨는 너무도 가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두 안해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숱해 걸머진 빚때문에 너무 주눅이 들고 가난구덩이에 빠진>>것이다. 옷은 입은지 몇십년이나 되는지 <<제법 이를 기르기가 맞춤하>>였고 해마다 쌀돈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치솔질도 소금물로 하는 형편이다. 남들은 화학비료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 그는 남의 흉내를 내기도 힘든 처지였고 자기에게 소없고 수레없어 남의걸 삯내여 쓰는 형편이였다. 큰아들은 그 또래에서 혼자 <<왕바신>>을 신는 신세였고 고중진학시험에서 성적은 괜찮았으나 뒤를 대줄 돈이 없어 학교를 못갔다. 외손자마저 에미한테 업혀 외할아버지집에 설쇠러 왔다가 급성페염에 걸렸으나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고만다. 모든것이 가난때문이다. 실로 가난이 죄였다. 게다가 그한테는 서로 위안하고 의지할 안해마저 없다. 궁재씨는 이런 가난과 고통과 불행에서 해탈되고 잊어버리는 처방을 술에서 찾으려 했다. 코를 찌르는 싱긋한 술냄새에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느끼며 괴로운 세월을 죽였다. 인젠 <<밥 안먹고는 살아도 술 안먹고는 못살>>지경이다. 그만큼 그는 일년내내 외상술을 마시지만 그 외상술값만은 달마다 어김없이 물군하는것이였다. 하루에 적어서 한근, 한달이면 30원의 돈이였다. 쌀돈에 망하는걸 모르는바 아니지만 오히려 인젠 술없인 못사는 형편이 되고만것이다. 궁재씨가 그 지루한 세월을 죽여주는 다른 한 처방은 화투놀이다. 일년에 할수 없어 짓는 농사외엔 하는 일 없이 화투판에 붙박힌다. 점심을 넘겨도 배고픈줄 모를 정도로 화투귀신이 돼버렸다. 물론 꿈속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명월이년>>과 즐기는 장면도 구을려본다. 정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 궁재씨의 비극은 이로써 시작된다. 최종적으로 술과 놀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멋없이 자기의 일생을 무덤을 파는 과정으로 만드는 자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흐트러지고 게으름병이 생기게 되기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환경을 이길수 없는 운명이 주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운명이란것이 과연 있는것이라고 해도 한 인간의 운명의 극치는 의지와 리성의 노력에 의해 밝혀진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리성은 이른바 어쩔수 없다는 역경도 물리치는 수가 있는데 운명이란 전혀 돌려세울수 없는것이기때문이다. 객관적 필연성만 탓하면서 불행속에서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대신 자기 육체를 멋없이 소비하고 자기 정신을 의의없이 마취시켜버리는것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숙명론이 아닐수 없다. 때론 큰 재난이 사나운 짐승처럼 물어뜯으려고 무섭게 달려들어도 삶의 의욕으로 완강하게 맞선다면 혹 기가 죽어 달아나버리는 수도 있지만 때론 타락과 게으름으로 하여 사소한 일이 어쩔수 없는 큰 재난을 가져올수도 있는것이다. 이런 도리가 어리무던한 궁재씨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고차원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문제는 작품에서 궁재씨의 비극적 결말이 두 세대의 대항적 충돌로써 초래되였다는데서 그런대로 제기할 수밖에 없다. 시대적 인식을 위한 현실적 비판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궁재씨의 경우 삶의 의의보다는 삶의 의미, 즉 인간본능으로서의 생존욕구가 더 강하게 내비친다면 영호나 영철의 경우에는 삶의 의미보다는 삶의 의의, 즉 인간성으로서의 가치추구가 더 짙게 내비치는것이기때문이다. <<자기생활에서 장래와 현재에 아무런 의의를 찾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인간성을 상실한것이 아니고 무엇이랴>>(리기영) 궁재씨의 타락은 그만의 파멸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후세대까지를 재난에 빠뜨릴수 있는것이다. 라태는 원래 7대악의 하나로서 자기의 일생뿐만아니라 후대까지 재난에 빠뜨리게 되는 생활의 가장 큰 죄악이다. 그는 노력과 분발, 지어는 발악적으로 가난을 털어버리려고 한것이 아니라 새 빚으로 낡은 빚을 메꾸어버리는것으로 세월을 멋없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둘째는 돈이 없어 학교에 못가고 큰아들은 <<왕바신>>신세를 벗지 못했지만 일년내내 술값만 떨구지 않는다. 그래서 두 아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아버지와 대항해 나섰다. 한창 젊음이 파랗게 자라나는 나이인데다 문명의 세례를 보다 생활적으로 접수한 그들이 도저히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아버지의 삶을 본뜰수는 없는것이였다. 그런데 아직 학생이고 공부에 포부를 기탁하고있는 둘째는 단연히 집을 뛰쳐나가지만 이미 농촌일에 몸을 잠근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제나름의 방식으로 대항해나선다. 바로 자기 삼촌한테 억지당한적 있고 또 <<본가집에 왔다가 아이를 죽인 죄로 시집에서 쫓기워 와있는>> 이붓 동갑누이를 억지 강요하여 데리고 살려하는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창졸하게 사회관념도덕을 전달하는데 그치거나 극단적인 흑백론리로 영호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재단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영호의 행위는 결코 그 행위자체에 의미가 매겨지는것이 아니라 바로 강한 삶의 욕구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그 시점의 상태를 확대시키고있다는데 자리매김을 주고있기때문이다. 일찍 가난은 영호를 실련의 <<선수권소유자>>로 되게 하였다. <<왕바신 신세>>, <<시계 한번 못차보구...>>. 워낙 자부심이나 자존심이란것이 다만 정신적인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외형적인것 이를테면 먹고입는것이나 기타의 물질적인 것과도 관계된다. 바로 영호의 자존심은 가난때문에 여지없이 꺾이웠던것이였다. 그 많은 꿈이 좌절되고 수정되여버리는 사이에 영호도 관념도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찢어지는 마음의 쪼각들을 인내와 침묵으로 주어맞추면서 도덕의 가죽으로 만든 방패로 자기의 들뛰는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남과 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생의 욕망과 최저한의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마저 실현할수 없다는 현실앞에서 도저히 참을수 없어 발악적인 비명을 지르고야 만것이다. 단순히 가난때문만이 아니다. 아들한테 신 한컬레, 아니 치솔약 한통도 안사주면서 일년에 삼백륙십여원이란 술값만은 눅거리 쌀돈을 가져와서라도 물어대는 아버지 궁재씨의 타락때문이였다. 정에도 한도가 있는것이고 례에도 한도가 있는것이다. 현실성을 배제한 마음만의 정이나 례는 가식밖에 남을것이 없다. 영호와 궁재씨의 관계는 인젠 다만 가부장제적 봉건례의도덕의 사슬에 매여 유지되고있을뿐 전혀 화해의 접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마저 궁재씨가 자기의 인생은 마비되여가지고도 도덕적방패를 들고 그를 죽음에로 협박(피를 보면서도 부삽을 들고 그한테 달려든다)할 때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되였다. 이제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의지대로 하지 다른건 전혀 돌보지 않는다. <<니 능력있어 다른 놈들은 다 련애하는데 나는 못한다. 니는 <보토리>질해라. 나는 안한다. 내하구 살자는 녀자가 없으니까 봉녀하구 잔다. 어째? 니덕에 우리 둘다 거지다. 거지끼리 사는데 어째?...>> 이것이 영호가 궁재씨를 구박하면서 악에 받쳐 웨쳐댄 말이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도 자기의 리익에 복종시킨다. 어찌보면 실련의 <<선수권소유자>>인 영호와 한번 당한적 있고 또 시집에서 쫓기워 온 봉녀가 결합되는것이 훨씬 계산적이고 경제적이며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일의 해결에서 언제나 그 리해관계를 같이 하는 자가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일것은 당연한 리치이기때문이다. 다리부러진 노루 한굴에 모인다고나 할지, 혹은 영호의 말대로 <<거지끼리 산다>>고 할지. 하여간 둘다 자기의 처지에 맞는다는 리해를 가질수 있는 경우인것이다. 사실 궁재씨의 경우에도 그처럼 길길이 뛴것이 자기 동생이 조카딸을 강간하던 때와는 다른 뜻에서일것이다. 즉 그것은 강간으로 인정되여서보다 어쨌든 이붓 오랍누이로 한집에서 함께 자란 사이라는데서 충격받는 전통적인 륜리관념의 관성때문이였을것이다. 하기에 영호가 결코 일시적인 본능욕구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의 욕구내지 생육을 목적으로 하는 결혼까지를 추구한다는 사실의 힘에 눌려 자기의 도덕적 방패를 던져버리고 만것이다. 그는 아들의 행위를 리해하고 량해하고있는것이다. 그는 자기의 허무한 삶에 대한 뼈저린 참회와 함께 그들 둘의 장래를 기도한다. 비록 그의 생명으로 보면 그의 참회는 때늦은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어느때나 참회가 있는 죽음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홀대했던 삶의 참뜻이라던가 철저한 인생반성을 흔히는 그런 죽음의 마당에서 깨닫는수가 있기때문이다. 잃은 물건은 되찾을수 있어도 잃은 시간은 되돌아올수 없는바 이미 허무한 세월속에서 인생의 진이 다 빠지고 삶의 터전을 놓쳐버린 궁재씨는 이 시각 죽음의 수단으로써 자식들한테 속죄하는 충실감을 맛보고있는것이다. 영호의 지나친 행위에 도덕의 말매를 안겨야 할지는 모르나 그러나 궁재씨 자신으로 말하면 문명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졌던 릉욕의 한 세대를 조용히 잠재우는 비장한 행위를 한것인지도 모른다. 아, 그래서 <<새벽새는 울고있다>>!
6    변질된 밥사발의 질서 댓글:  조회:1581  추천:0  2009-05-16
--<<혼사날의 별곡>>에서 본다 원래 가정에서의 밥사발의 질서는 너무나 단순하고도 엄격하였다. 할아버지까지 함께 있다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 안해, 아이 하는 순서로 배렬하면 되는것이다. 그것은 그때는 밥사발의 질서를 세우는데 오직 혈연적인 세대관계란 조건 하나밖에 없었기때문이다. 그만큼 어린아이들까지도 그 순서를 알수 있는 가장 <<천진>>한 륜리적 질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어쩐지 사회에서뿐만아니라 가정에서까지도 그 밥사발의 질서가 깨여지고 새로이 복잡하고 미묘하며 황당하기 짝없는 밥사발의 질서가 원래의 자리순서를 망그러뜨리고 인간가치를 변질시키고있다. 그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날로 팽창되고있는 상품시대와 함께 밥사발의 질서를 제약하는 조건이 상업인간이란 새로운 개념의 뚜렷한 확립과 함께 변질되고있는것이다. 상업인간을 우리 나름대로 통속하게 인생이나 인간관계를 상업화하는 인간이라고 리해한다면 그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권력과 돈일것이다. 권력의 위력이란 대단한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천만사람을 지배할수 있는 힘이다. 그만큼 그것은 사회의 허위와 아첨을 낳는다. 푸짐한 술상에서 권력의 대소와는 상관없이 륜리적인 년령순서대로 술을 부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조차 도리여 얼마나 권력의 중압에 지긋하게 눌리웠으면 그렇게 평범한 행동을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했겠는가 하는 련민이 앞서는것도 이때문일것이다. 혼사날에 촌뜨기 친가편보다 뜨르르한 시내간부인 외가편을 상빈으로 보내는것이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것을 그 집의 가풍이 더럽다고만 보기에는 이 사회가 벌써 그만큼 비뚤어져있다. 돈의 위력도 대단하다. 비렁뱅이가 가난뱅이를 구제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 사회에는 억만이 아니라 단 몇장의 지페때문에 자그마한 꿈마저 산산히 깨여지고 사회적 인간가치가 여지없이 떨어져버리는 수가 푸술하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를 모시는 전제조건을 신체가 튼튼하고 상당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금전주의로 내세우는 경우도 억이 막히는대로 현실에서 식은죽 먹듯 찾아볼수 있다. 그러고보면 삼촌되는 사나이가 조카딸의 혼사날에마저 가문의 좌상대우는 커녕 상빈으로도 가지 못하는 홀대를 받는것이 그 가문의 가풍탓이라기에 앞서 그 자신이 가난한 탓이라고 하는것이 퍽 당연해보인다. 가치표준이 변질된 <<진실>>이다. 그런데 이제 <<정채>>롭고 볼만한것이 밥사발의 륜리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가치표준을 변질시키는 쌍둥이-권력과 돈의 맞겨룸이다. 두 힘의 맞겨룸, 그것은 마치 범과 사자의 대결처럼 생사판가리이다. 그러면 구경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일가? 얼핏보면 <<돈>>이 승자이다. 가난때문에 좌상대우도 못받고 그래서 분김에 잔치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던 사나이가 조카의 잔치에 석탄 한 자동차와 고급세탁기를 잔치<<부조>>로 내치자 온집의 사람들은 혼이 다 날아날 지경으로 경탄을 금치못했고 <<대통령>>이란 최고권력도 <<손쉽게>> 획득한다. 과연 돈이 날개다. 그 돈이 <<대통령>>이란 권력까지 사버렸으니 그가 승자임은 당연한것이다. 하긴 어떤 물건이나 다 살수 있는것이 돈이고 상급에겐 비굴한 아첨을 보내고 하급에겐 상대방의 인격이나 재능보다는 안면과 지갑의 크기에 더 관심하는 즉 위세나 풍모가 더 큰 권력이나 돈앞에서 기운을 잃고마는것이 권력이고 보면 그 승패는 벌써 결정된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만 않다. 그들은 둘다 패자였다. 남몰래 슬그머니 잔치집에서 사라져버린 두 사나이-권력의 덕택으로 외가편이지만 언제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여 최혜를 받던 자기가 그 권력이 돈앞에서 기운을 잃어 한낱 <<검둥이>>의 홀대까지 받게 되였음을 통탄하며 뻐스에 오르는 <<공회주석>>, 돈으로 마침내는 권세부리던 자를 내리누르고 <<대통령>>의 보좌에까지 올라앉았으나 돌아갈 차비마저 없어 걸어가면서 허무와 비통에 눈물뿌리는 <<사나이>>, 그들은 왜 패자였을가? 그것은 영원히 령혼하고는 같이 살아있을 인간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변질된 가치, 풀어말하면 벽의 그림자처럼 있다가는 없고 하는 권력이나 돈과 같은 외부적 힘에 의해 자기를 실현하려 했기때문이다. 일단 그 외부적 힘이 눈석임같이 녹아버리자 기탁점을 잃은 그들의 정신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만것이다. 실로 불쌍하고 의미짙은 배우들이다. 하긴 우리 모두가 사회란 무대우에 나선 배우들인것 같다. 그래선지 그들한테서 어쩌면 자기의 그림자도 찾아본듯싶어 가슴이 알짝지근해난다. 허욕을 허위로 웃고 허위로 우는 배우, 아, 그것이 진정 인간의 참모습은 아닐텐데...
5    문학정신과 문화반성 댓글:  조회:1645  추천:0  2009-05-16
1. 력사적착오, 문화적반성-<<<볼쉐위크>의 이미지>> 문학이 인간경험을 다룬다고 하는데 인간경험에서 력사적 경험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삶의 현장과 멀어진 과거형으로서 일종 전통성 내지 습관성을 강하게 나타낸다. 그런데 그것은 또 그런 전통성 내지 습관성에 힘입어 과거의 현재적 존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것이며 그만큼 력사의 질곡조차도 아직 력사와 현재가 반성적 의미에서의 구조적 단절을 철저히 하지 않았을 경우 현실의 련쇄반응을 통해 새로운 력사의 질곡을 만들어낼 수 있는것이다. 력사의 체험적 아픔을 문명의 발전적 차원에서 재인식하는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정세봉은 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장백산>> 1991년 2호)에서 력사의 한 세대를 오늘의 의식의 현장에 옮겨놓고 한 참다운 인간이 어떻게 외곡된 력사에 조종되여 자아가 변형되고 지어는 거세되여버렸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체험적 인생의 재조명과 반성을 꾀하고 있으며 력사의 질곡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묻고있다. 주인공 윤태철은 이데올로기에 투철하고자 몸부림쳤던 그 시대 인간들의 상징으로 되고있을뿐더러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려고 무작정한 순응주의적반응을 보인 과거형 인간의 상징으로도 되고있다. 일상성의 생활조차 정치적 오염으로 하여 숨막혔던 그 당시의 력사적 상처 내지 비극은 우선 개인적 차실이기전에 벌써 사회적, 집단적 차실이였다. 다시말하면 차실자체가 객관적으로 불가항력적일 때 리성은 오히려 한 개인만이 아닌 그 시대자체가 상실하고 있다는 비평이 성립되는것이다. 적대적 투쟁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나 아직 적대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특히 신생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진영의 겹겹한 포위속에 있다는 현실적 의식과 판단은 우리 당으로 하여금 계급투쟁확대화를 범하게 하였다. 타도된 적대세력이 저들의 세계적 세력에 힘입어 잃어버린 <<천당>>을 되찾으려 한다는것은 리치에 맞는 판단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판단은 쉽게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는 과잉판단을 인출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사회의 련좌법이 꺼리낌없이 살판쳐 일상성의 생활조차 인정이 메마르고 지어는 피로 얼룩지고말았다. 이에 순응적으로 착취와 피착취, 압박과 피압박, 통치와 피통치의 체험적 인간인 윤태철이가 인식적, 행위적으로 이런 계급투쟁확대화를 긍정, 채납할수 있고 인정에 매이지 않고 기치선명하게 투쟁의 선두에 설 수 있으며 지어는 생명이 다 하도록 이데올로기에 충성, 복종할 수 있는 것은 그런대로 그의 인생의 목적에 의하여 당위성까지를 확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윤태철의 인생의 목적에 대한 정리를 잘 한다면 쉽게 그의 비극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것이다. 첫째, 윤태철은 지주의 압박과 착취를 받은 계급대항의 사회에서 생활하였다. 그만큼 그가 혁명에 참가한 초기의 목적은 바로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분배받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였다. 그것은 계급적 대항, 즉 직접 지주계급과 맞겨룸하는 혁명이였던만큼 지주계급은 그의 직접적인 적이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는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하던 세월에 지주, 부농분자와 가장 철저하게 맞서서 <<독재>>를 진행할 수 있었을뿐더러 지어는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고 그들의 자식과도 철저히 <<계급계선>>을 나누어야 철저한 <<혁명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믿어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력사에 투철한 현실인식은 천륜의 문제에조차 철저한 <<혁명성>>을 강요함으로써 아들 윤준호와 순정이의 애정비극을 초래하는 것이다. 천륜의 문제는 분명 정치이전의 문제, 사상이전의 문제이다. 더우기 윤준호와 순정이 사이에는 윤태철과 허수빈 사이와 같은 그런 직접적인, 체험적인 계급갈등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한고향에서 오손도손 함께 자란 향토적 정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극단으로 대결했던 아버지세대에 비해 자식의 세대는 이미 그 대결의식이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는 착취와 피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계급적 존재와 갈등이 객관적으로 해제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사이에는 사랑까지도 스스럼없이 묵인 내지 추구할 수 있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윤태철한테는 접수될 수가 없었다. 반동의 자식과 혁명자의 자식이 결합된다는 것은 철저한 <<혁명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의 본적지를 념두에 두면 이것은 그 당위성이 승인되는 력사적 인식이다. 어찌보면 부자와 빈자라는 력사적 문벌의식이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시대에 정치적 계급의식으로 자리바꿈한 것이리라. 여기에서 윤태철은 기성된 력사인식에 집착하는 과거형인간이라면 윤준호는 싹트는 현실의식에 눈뜨는 미래형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준호를 구태여 현재형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미래형인간이라고 하게 되는 것은 그의 반역정신이 과연 론리사유적인 현실의식에 립각한 것이 아니라 기성된 력사세대와 체험론적으로 력사적 인식차이를 갖고있는 세대의 현실감각적인 감정발로에 다름아니기때문이다. 이것이 오히려 시대적 합리성을 보여주는 인물형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실인식은 체험론적으로 력사적 인식차이를 갖고 있는 두세대사이에서 틈서리가 생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론리체계적인 충돌로 인발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일상성에서 현실감각적으로 생성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윤준호의 형상은 새로운 력사적 인식을 가진 인간의 생성을 암시하고 있을따름이다. 그만큼 사회는 아직 완숙한 현재형인간을 배출하기에는 시기상조한 것이였다. 둘째, 윤태철의 소박한 혁명성과 력사적 인식과 함께 그의 락후한 농민출신의 신분적 제한성이 인과적으로 금그어준 현실파악과 문화적 자아실현의 한계성을 홀시할 수 없는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그의 삶의 인격을 정립시켜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으로 될 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은 그를 경험-유전형의 인간으로 키워왔기에 론리-사유형의 인간과는 너무나 아름찬 거리를 두고있다. 이것은 필연코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기 자세에 대한 조절 내지 규범에서 모호성과 전통성 및 의뢰성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특히 이런 비자각적인 문화바탕으로서는 우리 당의 사상리론체계에 대해 령혼적으로 올바르게 해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기에 그는 다만 우리 당은 인민을 이끌어 통치계급을 뒤엎고 인민을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한 위대한 당이라는 극히 소박하고 거의 상식에 가까운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상급의 말만 들으면 틀림없다는 심리적 자세를 갖춘것이다. 하기에 사실상 그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그 자신의 자치적 노력보다는 관념적인 것을 모방하고 색맹이 되도록 정치에 훈련된 의뢰적인 것이였으며 그의 인생적 자세조차 적극적이고 자각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다만 시키니 한다는 심리로 삶을 조직한 순응주의적인 것이였다. 이처럼 그의 력사적인 현실참여가 표면적으로는 희극적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벌써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이란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에도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의 구축을 위해 혁명한다는 균형잃은 자세가 허영 내지 맹종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허영과 맹종이 개인적인 충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시대의 력사적 면모의 한 양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데 사회력사적 문제성은 심각히 제기되는 것이다. 우리는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린 벽두에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다시 자기의 생활능력을 실험코자 애쓰는 윤태철의 창백한 모지름에서 사회와 인간의 균형잃은 갈등을 재확인하게 된다. 비록 시대가 어느정도로 력사의 한 물결에 휩쓸렸던 개인들에게 심각한 사고와 자아발견적인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음에도 윤태철은 우리 당이 자기의 오유를 철저히 반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자 도리여 자기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산당하고 만다. 다만 <<<볼쉐위크>적 오기>>로써 <<자신에 대한 력사의 희롱을 달갑게 받아안으리라 했고 아들놈 앞에서 주저치 않고 <두뇌없는 순복도구>질 하리라 했다.>> 그렇게 가냘프던 정신조차 허물어져버린 윤태철에게 남은 것은 행위 외엔 아무것도 없다. 행위자 목적이요, 행위자 동기요, 행위자 인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다만 <<흘러간 력사에 대한 울분>>과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쉐위크>적 오기>>때문에 허수빈네를 도와주는 것을 <<삶의 내용>>으로까지 여겨 <<그가 새롭게 걸아나갈 인생의 길인것처럼>> 느끼는 것이였다. 인젠 자기 몸을 주체하기도 바쁜 로인이면서도 그 육체를 허물어서라도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기어코 훌륭한 배역을 담당해보려는 거기에 정신적 공허와 창백함이 드러나고 있으며 자아희생적으로 자기의 약점을 표현하는 비극성이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풀어말하면 생리적 년령은 이미 인생의 황혼빛을 띄고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정신적 공간때문에 쇠약한 육체만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기에 그의 인과적인 희생이 확정되여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와 사회구성원간의 균형잃은 갈등이라는 시점에서 소설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으며 또 이런 주제적 포착은 문화반성적 의미에서 시사해주는바가 많은 것이다. 2. 우물안의 개구리, 닫힌 공간-<<새벽새는 울고있다>>, <<어제도 오늘, 오늘도 래일>> 오직 주어진 울타리안에서 자급자족에 만족하거나 지어는 초근목피로 육체적인 생명만을 연장하는 원시적인 삶에 불편함이 없이 안주할 때 가엾게나마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이 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옹근 지구덩이가 인젠 인류에게 주어진 울타리로, 지구촌으로 좁혀진에 따라 그런 닫힌 공간과 원시적인 삶은 우승렬패의 치명적인 충격에 존재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였으며 상승적 경쟁력이 외면된 원시적인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은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승화를 저애하는 게으름과 무지에 동조하게 되였다. 조광명의 소설 <<새벽새는 울고있다>>(<<문학과 예술>> 1991년 3호) 에서의 궁재씨의 죽음은 바로 상술한 바와 같은 의미확대를 훌륭히 형상하였다는데서 문화적 반성의 무게를 크게 한다. 궁재씨는 가난과 고통과 불행에 너무도 어색해진 인간이다. 그런데 그는 노력과 분발 아니면 발악적으로라도 가난을 털어버리려고 한것이 아니라 새빚으로 낡은 빚을 메꾸어버리면서 술과 화투로 세월을 멋없이 죽여준다. 둘째는 돈이 없어 학교에 못하고 큰아들은 아직 <<왕바신>>신세도 벗지 못했지만 일년내내 술값만은 떨구지 않는다. 한창 젊음이 파랗게 자라는 나이인데다가 문명의 세례를 생활적으로 접수한 그들이 도저히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아버지의 중독된 삶을 본뜰수는 없는것이였다. 둘째는 집을 뛰쳐나가고 큰아들 영호는 마침내 아버지와 대항해 나선다. 일찍 가난은 영호를 실련의 <<선수권소유자>>로 되게 하였다. <<왕바신신세>> <<시계한번 못차보구...>>, 워낙 자부심이나 자존심이란것이 다만 정신적인것만이 아니다. 바로 영호의 자존심은 가난때문에 여지없이 꺾이웠던것이였다. 단순히 가난때문만이 아니다. 아들한테 신 한컬레, 아니 치솔약 한통도 안사주면서 일년에 360여원이란 술값만은 눅거리 쌀돈을 가져와서라도 물어대는 아버지 궁재씨의 타락때문이였다. 그 많은 꿈이 좌절되고 수정되여버리는 사이에 영호도 관념도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찢어진 마음의 쪼각들을 인내와 침묵으로 주어맞추면서 도덕의 방패로 자기의 들뛰는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남과 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생의 욕망과 최저한의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마저 실현할수 없다는 현실앞에서 도저히 참을수 없어 비명을 지르고야 만것이다. 정에도 한이 있는것이고 례에도 한이 있는것이다. 현실성을 배제한 마음만의 저이나 례는 가식밖에 남을것이 없다. 이제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의지대로 할뿐이다. 바로 자기 삼촌한테 억지당한적 있고 또 <<본가집에 왔다가 아이를 죽인죄로 시집에서 쫓기워와 있는>> 죽은 계모의 딸을 억지강요하여 데리고 살려하는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궁재씨가 자기의 인생은 마비되여가지고도 도덕적 방패를 들어 막으려하고 지어는 죽음에로 협박할 때 화해의 접점이란 전혀 존재할수 없게 된다. <<니 능력있어 다른 놈들은 다 련애하는데 나는 못한다. 니는 <보토리>질해라. 나는 않한다. 내하구 살자는 녀자가 없으니까 봉녀하고 잔다. 어째? 니덕에 우리 둘다 거지다. 거지끼리 사는데 에째?...>> 이것이 영호가 궁재씨를 구박하면서 악에 받쳐 외쳐댄 말이다. 인간은 동물적본능도 자기의 리익에 복종시킨다. 어찌보면 실련의 <<선구권소유자>>인 연호가 한번 당한적이 이써고 또 시집에서 쫓겨난 봉녀와 결합하는 것이 훨씬 계산적이고 경재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행각했음직한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창졸하게 사회관념도덕을 전달하는데 그치거나 극단적인 흑백론리로 영호의 행위만 뽑아 도덕적재단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영호의 행위는 결코 그 행위자체에 의미가 매겨지는것이 아니라 바로 강한 삶의 욕구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그 지점의 상태를 확대시키고있다는데 자리매김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행위의 의식심층에는 억압당한 삶에의 갈구가 눈물져있다. 성은 륜리이고 더덕이기 전에 생명이라는 원색적인 인간선언이라 할수 있는것이아. 하기에 궁재씨는 영호가 결코 일시적인 본능욕구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의 욕구내지 종족보존의 생육을 목적으로 하는 결혼까지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눌려 자기의 도덕적방패를 던져버리고만것이다. 그는 자기의 허무한 삶에 대한 ㅃ저린 참회와 함깨 그들 둘의 장래를 기도한다. 찌들어버린 육체, 창백한 령혼, 술에 절은 인생, 이 모든것이 그한테 필연적인 죽음의 가능서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의 현장에서 부활의 의미를 읽에 된다. 말하자면 종족보존의 체계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연장이므로 아버지의 무의미한 소비인생의 종말은 곧 아들의 강렬한 창조적인생의 모지름을 통해 새롭게 바람직하게 부활하리란는것을 묵시하는것이다. 이처럼 그의 죽음이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력사적교체라는 의미매김에 감동된다. 궁재씨는 문명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졌던 릉욕의 인생을 조용히 잠재우는 비장한 행위를 한것이다. 그이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의 좌표와 현주소가 확인되고있다. 장혜영의 소설 <<어제도 오늘, 오늘도 래일>>(<<흑룡강신문>>1992년 4월 25일)은 황페하지 않은 농촌에서 황페화의 길을 걷는 농민들의 현실을 해부하고있다. 민수는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고정불변적인 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미래가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소비적인생에 지치고 변질해가고있다. 도거리농사가 농민들에게 아름차게 한가한 시간을 가져다주었지만 민수랑한테는 그 한가한 시간을 죽여주는 일이 훨씬 지겨운것이였다. 농사지어 밥먹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였고 1년 365일에서 절반도 넘는 시간을 타산없고 할일없어 쩔쩔매였다. 너무도 단순하고 쉽게 사는 인생이였다. 기실 쉽게 산다는것이 허무한 삶을 의미한것이다. 자기를 승화시키고 참된 인생을 고양시키는 정신적독방이 없고 따라서 조금의 문화적투자도 없이 단지 생명연장의 생물과정내지 자연과정으로만 머물러있을 때 얼마만큼이나 인간성의 참된 모습을 찾아볼수 있겠는가. 더우기 현사회는 그 문명발전의 주기성으로 하여 개체의 사회화를 일생의 과업으로 제기하고있으므로 우리는 자기의 인생에 대한 문화적인 신변정리에 게으를수 없게 되였다. 생산성문화의 퇴화내지 답고, 생활문화의 고갈내지 빈혈증으로 질병을 앓고있는 민수의 형상은 교체시대의 시자로에서 갈팡질팡하는 사회구성원의 앓는 모습이기도 하다는것으로 주제적확장은 가능한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예술적측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새벽새는 울고있다>>가 비극적인 모순갈등으로 주제를 날카롭게 날세우고있는데 반하여 이 소설은 아무런 자극적인 사건이나 비극적인 결말도 없이 퍽 시시껄렁해보일 정도의 일상성의 생활로 꾸며지고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 일상성의 생활현장에서조차 문화반성적의미를 조명해낼수 있다는 작가적안목에 힘입어 그 심미적가치가 그런대로 무겁다. 이처럼 예술성보다 생활현장감을 강조하는 형식의 거칠음에는 모름지기 생활에 더 살바투 접근하려는 의도적추구가 안받침되여있을것이다. 그만큼 반성문학은 인간을 그린다는 인식보다는 인간을 해보한다는 휴머니즘에 더 집착하는것 같기도 하다. 3. 산업시대의 뿌리뽑힌 인간들-<<빈곤>> 격변기에 있어서 문제의식을 사회의 기본적인 사유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사회의 돌변적인 변화, 발전은 기성인들의 체험론적인 경혐내지 전통적인 사유형식의 준확성이나 지어는 존재적가치를 여지없이 충격하였다. 매기 사회성원마다가 전통적인 기성인식과 존재적인 현실인식, 그리고 리상적인 미래인식 사이에서 선택의 아픔에 모지름쓰며 신음하고있다. 긺일의 소설 <<빈곤>>(<<장백산>> 1992년 2호)은 바로 이처럼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사회로 과도하는 격변기에 기성가치규준의 변질과 함께 뿌리뽑힌 인간들이 허물어지든가 변질해가는 비평적인 형상을 통하여 변종하는 사회에서의 인간상실의식을 꼬집어 일깨우고있다. 돈있는자의 정신적빈곤, 글읽는자의 물질적빈곤, 극덧이 사회객관내지 일반으로 설명되여야 할 경우 치원이나 김일의 형상은 자기의 <<비극적운명>>으로 그런 사회적빈곤을 폭로하고 호소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냘프고 자살적인것이다. 틀림없이 비극이란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한 미의 훼손이다. 그런데 치원이의 경우 그는 그런 불가항력적힘의 강타를 받기에 앞서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 빈곤으로 하여 스스로 정신질환을 앓고만다. <<상점에서 나와 가게방뒤벽에 대고 오줌을 쏴쐬 내갈기>>고 <<한달 로임을 봉투채 밀어넣는>> 행위는 결코 <<금전만능의 인격론>>이란 현대문명과는 전혀 무관환 미개병이다. 사실 그의 모대김과 신음소리는 사회적빈곤에 해한 대항적인 비명인것이 아니라 물가의 모래탑처럼 너무너무 쉽게 씻겨져내리는 그 자신의 허탈한 령혼을 두고 부르는 영탄곡이다. 김일의 경우 얼핏보면 그는 글읽는자로서 물질적빈곤에 모대기고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준 단색테레비죤까지 팔아먹고>> <<그 돈으로 사흘마작>>을 논 김일, <<그제 하두 심심하니 친구들끼리 좀 놀구 또 뚜드려먹구 소일하>>는 김일의 형상은 물지적빈곤내지 사회적빈곤을 호소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정신이 먼저 시들어버린것이다. 그러고보면 돈있는자 치원이의 정신적빈곤, 글읽는자 김일의 물질적빈곤이란것은 일종의 가면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두 정신질환자가 같지 않은 가면을 쓰고 같은 극을 표현한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것이다. 물론 그들이 고통내지 넉두리의 근원은 그런대로 사회에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사회학적 진단을 하면 경제발전기에 과연 여러가지 페단과 부식작용이 훨씬 맹렬한것이다. 이것은 계절이 바뀔 때의 발병률이 많은것과 같은 도리일것이다. 특히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사회로 넘어들어오면서 사회에는 인격론에에서조차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절대적인 긍정을 보내는 현대문명병이 류행성감기처럼 성행하고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매개 사람들의 신체소질과 항역능력을 간과할수 없다. 특히 특정한 환경이 아니라 일반적인 환경에서 누구나 다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고험을 통해 승패의 두 부류가 있을 때 우리의 가치판단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것인가. 사회적빈곤 즉 돈있는자의 정신적빈곤과 글읽는자의 물질적빈곤은 류행성감기균으로서 수시로 사람들을 질병에로 몰아가고있다. 이는 객간적현실이다. 그다음 제기되는것이 개체의 <<철학적빈곤>>이다. <<철학적빈곤자>>는 오뉴월 고뿔도 쉽게 걸리고마는것이다. 불가항력적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겨나갈수 있는 충격앞에서 그 자체의 취약성때문에 허리꺾고말 때 우리는 거기에서 얼마만큼의 비극성을 눈물머금고 읽을 수 있을까. 자기의 라태, 무지, 무능을 덮어놓고 일방적으로 억울한체, 슬픈체, 고독한체, 지어는 인류의 위기감같은것까지도 느낀체 하는 어리광대같은 연기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하는 사회의 모진 진통을 절감할수 있는것이다. 4. 사치한 도덕과 계산적인 리기주의-<<슬픈계률>> 도덕과 질서가 필요한가 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은 해답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기성된 도덕과 질서가 게속 사회구축의 구조적 요소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계산적인 리기주의의 사치한 도독적 방패로 변질하고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현실적을 던져진 부진이냐 발전이냐 하는 선택의 질문이다. 례컨대 부담거리로 여겨 홀로난 부모를 시집 혹은 장가를 보내거나 반대로 재산을 넘겨보고 극력 시집 혹은 장가를 가지 못하게 하는 계산적인 리기주의앞에서 기성도덕은 과연 어느만큼의 치유력을 갖고있는것인가 등등>> 허련순의 소설 <<슬픈 계률>>(<<천지>> 1992년 4호)은 이른바 자기는 사회의 <<정신당원>>이고 정상인이라는 월등감을 스스로 가지고 자기보다 약하거나 어딘가 좀 부속품이 모자란 사람을 악마처럼 억지로 인간대렬에서 밀어내려하는 김씨댁 등의 형상을 통하여 자기들은 오장륙부가 하나도 세탁되지 않아가지고 남을 험담하는데는 열을 올리는 인간추악상과 계산적인 리기주의에 복무하며 인간성을 외면하고있는 기존도덕적인 성륜리의 허위성을 고발하고있다. <<그녀>>로 등장하는 녀주인공은 <<처녀때 너무 못생겨서 청혼하는 남자가 없었다.>>고 한다. 서른살에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한 홀애비와 결혼했으나 아들 하나 남기고 죽어버리는 결핵병환자였었다. 후에 남의 소개로 아이 셋짜리 남자한테 시집갔으나 남편아이들이 어찌나 이악스럽게 나오는지 자기 자식이 주눅이 들어 기를 못펴는것이 가슴에 걸려 일년만에 리혼을 하고 나와버렸다. 그뒤 떠돌이 세방살이로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신계촌에 홀로 사는 홀애비가 좀 부실하기는 하나 일은 제대로 하고 집 하나를 쓰고 산다는 말을 듣고 자처하여 김부실댁으로 들어왔다. <<남자에 대해선 애초부터 큰 기대같은걸 픔어보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사랑이고 뭐고 단지 피곤한 몸을 담을수 있는 처지면 된다고 생각했고 아들애 하나만 눈치밥 안먹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생존본능의 가장 원색적인 추구인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원색적인 추구마저 이른바 주위의 <<정상인>>들에 의해 여지엾이 허물어진다. 부실이한테 시집온 근거로 같은 부실이 취급을 당하고 정상적인 성의 욕구마저 망측한것으로 비난받으며 지어는 <<온갖 랭대와 멸시도 넉넉하게 받아당하는것>>마저 <<그녀>>가 <<부실하기때문에 치욕을 못느끼는거야>>라고 놀림을 받는다. 그야말로 살아도 밉고 죽어도 밉다는식의 철저한 버림을 당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버림은 첫째, 자기 몸에도 그냥 더러운 똥집을 달고있으면서 남이 똥누는건 흉보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몰렴치하고 루추한 심태에서 조성되고 둘째, 김씨댁과 같이 리해관계를 같이 하는 인간들의 너무도 계산적인 리기주의에서 조성되는것이다.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시동생을 하루새에 <<그녀>>한테 빼았겼다는것이 김씨댁의 분노를 불러일으킨것이다. 그들이 새살림을 꾸렸음에도 김씨댁은 아에 두 사람 다 손아귀에 넣고 부려먹으려 한다. <<그래서 머리쓴것이 경제권을 틀어쥐는 방법이였다. 농사수입이고 남새판 돈이고 모두 바쳐야 하고 돈을 쓸 때는 맡아내가고 밥쌀을 한주일에 한번씩 내가야 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못난것, 부실한것이라는 근거로 생활자립권마저 박탈하고 그들을 노예내지 지어는 말할줄 아는 로동도구로 취급해버리는것이였다. 김씨댁이 자기의 이런 행위를 정당하게 위장하는 수단이 바로 자기몸에도 그냥 더러운 똥집을 달고있으면서 남이 똥누는건 흉보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몰렴치하고 루추한 심태를 리용하여 <<그녀>>와 시동생을 아주 자립할수 없는 천치로 확인시켜버리는것이였다. 인간의 상정으로 말하면 시동생이고 동서이기에 김씨댁은 그들을 몰렴치한 인간들의 비난과 타격에서 구해내고 감싸주어야 할 가장 자격적인 보호자인것이다. 그런데 공짜로 부려먹을수 있다는 계산적인 리기주의는 그녀로 하여금 악의 수단마저 서슴치 않게 하였던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계산적인 리기주의앞에서 기성도덕은 또 과연 어는만큼의 치유력을 갖는것일가. 외적으로 못생긴 <<그녀>>와 내적으로 좀 부실한 김부실의 본능에의 추구와 그것을 비난하고 헐뜯고 제약하고 압제하는 김씨댁을 비롯한 주변인간들의 소행은 실상 생활의 바탕과 인간성을 멀리 떠나버린 관념도덕의 허위적인 위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벗겨버리고있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내지 인간성까지를 위협하는 사실에 천착하는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일것이다. 그만큼 휴머니즘에 철저한 문학일수록 인간경험에 해한 반성적의미가 깊을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여기서 라도향의 <<벙어리 삼룡>>에서의 천치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녀>>나 <<김부실>>은 결코 바보와 무지의 개념으로서의 일상적, 상식적 차원에서의 천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성실로서의 환상적차원에서의 천치이다. 이때의 천치는 인간을 타락과 허위에서 구제하는 천사의 얼굴 바로 그것이다. 약자에의 학대, 형식으로만 제약된 도덕이 그앞에서 여지없이 몰골을 드러내고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인간의 버림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아온것은 아들을 위해서였다는 여기에서 우리는 본능에 다름 아닌 가장 원색적인 모성애를 눈물겹게 확인하는것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 되여가지고 잡초처럼 살아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여기에 어머니로서 인간버림을 자기만의 수단으로 한정시키기 위해 절망적인 치욕의 목숨이나마 이어간다는 론리가 성립되는것이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진지한 인간탐구이다. 말하자면 소설 <<슬픈 계률>>을 과념적인 도덕이나 륜리 이전에 인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인간선언이라 할수 있다. 이상에서 문화반성적의미라는 좁혀진 구역에 립각하여 문학정신의 한 기질적측면인 비평정신을 진단확인해보았다. <<문학은 인간탐구이다>>라는 명제에 의하여 인간의 본질과 인간성의 밝힘은 문학의 첫째가는 작업으로 되는것이다. 그만큼 문학가의 선도적역할과 희생적모험은 불가피면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문학은 구체적으로 인간경험을 다루는것이고 인간경험은 거듭나는 침적을 통하여 거의 구조적내지 제도적으로 규제력을 갖고있으므로 거기에 반성적의미까지를 매길 때 자칫하면 사회반역의 십자가조차 멜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만큼 문학가는 인생투자에 바람직한 정보내지 가치판단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있다. 문학이 인간경험을 다루는것은 바로 인간을 원색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4    인간성의 고발 댓글:  조회:1427  추천:0  2009-05-16
-허봉남의 중편소설<<피와 불>>에서 본다 소설이란 허구를 리용하는것이고 그래서 소설창작에서 인물, 사건, 환경에 대한 합리한 허구가 시도됨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허구로 읽은 소설이 현실감각이 짙게 느껴질 때 우리는 소설의 작품적성공을 긍정함과 동시에 예술적진실과 사회적현실사이에서 필연적인 련계를 찾고 사회현실에 대한 반성에 은근히 신경을 모으게 된다. 허봉남의 중편소설 <<피와 불>>(<<아리랑>> 제38기)은 바로 현실감갈이 짙은 에술적진실로 우리로 하여금 사색적으로 사회현실과 인간자신을 반성하게 하고있다. <<피와 불>>은 인간의 본성을 캐고 인간성의 본질을 찾는 인간탐구의 문학정신에 철저히 립각하여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속성 즉 감성, 오성(기쁨, 노여움, 욕심, 두려움, 근심) 및 리성에 대한 적라라한 해부와 시대적투시를 주저없이 들이대고 인간의 정신적생태평형의 파괴를 사회적, 시대적 및 문화력사적으로 고발하고있다. 이 소설의 실험목적이 인간성의 본래의 모양을 밝히고 그 인간성이 어떻게 사회 혹은 시대적 제약과 염색을 받고있는가를 돌출히 하는데 있다는것을 확인하면서 작자가 그 실험을 가장 악렬한 환경에서 진행하고있는데 퍽 주목이 돌려진다. 바꿔말하면 작자는 인간성이 (최대가능성으로 사회제약에서 탈피하여) 그 본래의 모양을 드러낼수 있는 전형환경을 실험공간으로 설정하고 와중에 삶에 대한 갈구를 공동한 욕망으로 삼고 자연과의 박투속에서 죽음에 반항하는 세 인물을 실험대상으로 등장시킨것이다. 세 인물은 신분이 각기 다르고 산속에 들어온 동기도 서로 다르다. 림장기술원 심대식은 육모지를 돌아보던중 수림언저리에 피여오르는 불길을 발견하고 달려온것이고 림장사무원 현우현은 자기의 안해를 가로챈 <<원쑤>> 심대식을 불길속에 처박아넣으려고 달려온것이며 림장 제3작업소 소장 정만룡은 남에게 알릴수 없는 일로 산불에 갇히게 된것이다. 동기가 어떻든 그들 셋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는 산불에 갇혀 죽음의 신한테서 벗어나려 판가리하는 똑같은 처지였다. 인생의 쪽배가 침몰의 위기에 처한 이 시각, 그들은 <<그 어떤 개인의 타산이나 원도 없이 공동한 욕망 즉 삶에 대한 갈구>>로 환난지기가 되지 않을수 없었다. 짐승들조차 서로 다른 존재에 관심을 돌릴 여가가 없는 순간이였었다. 불만 피하면 된다는 한가지 본능에 지배되여 사람곁을 스쳐지나는 한무리의 쥐, 사람이 있는 곳이 안전하다고 여긴듯 그들곁에 와서 멈춰선 몇마리 재빛토끼, 지어는 새끼를 죽인 보복으로 사납게 달려들던 승냥이마저 흘끔거리면서 그들쪽에서 멀지않은 곳에 멈춰섰다. 자연의 도전에 모든 생령들이 <<피해의식>>을 절감한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연의 평화가 다시 찾아들면 승냥이는 역시 사나와질것이고 쥐는 역시 도적질에 나설것이며 토끼는 역시 두려움을 안고 피해다녀야 할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바로 여기에 작자의 <<엉큼한 시도>>가 있는것이다. 토끼와 같은 심대식, 승냥이나 쥐와 같은 현우현, 정만룡 어쩔수 없이 이런 대비판단이 뇌리를 친다. 사실 인간은 자연의 도전앞에서도 일단 잠시적이나마 평화가 찾아들기만 하면 원래의 심리공간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사유>>를 계속 굴리게 된다. 보복의식에 떠밀리워 산불을 보고도 도리여 불속에 찾아든 현우현은 때때로 심대식에 대한 보복으로 치를 떨고 출세욕을 버리지 않고 재화속에서도 정만룡소장한테 아첨하기를 잊지 않는다. 제집을 살려내고 퀴퀴한 뒤를 덮어버리려고 불속에 든 정만룡은 심대식이나 현우현을 자기가 살아나가기 위한 도구나 노예로 간주할뿐이다. 이런 인간들과 함께 있는 심대식이기에 <<자기 처지가 세사람중에서도 제일 고단한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의 머리속의 현우현은 <<정만룡의 앞에서는 도시 등심뼈가 있는것 같지 않으나 말랑한 안해나 아래사람에게는 도리보다 우격다짐을 앞세우는>> 사람이였으며 정만룡은 <<뜨락또르를 동원하여 제집을 구하는데 쓰>>고 <<떠벌려 공금을 탕진하>>며 <<권세를 부릴줄 아는 사나이>>였다. 그러고보면 자연의 도전앞에서 짐승은 제 본성을 잃었지만 인간은 도히려 순수한 인간성을 발로한셈이다. 바꿔말하면 재난에서 벗어나면 짐승은 제 본성을 되찾을것이나 인간은 순수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것이다. 이것이 사회를 사는 인간의 비극이다. 워낙 정만룡이나 현우현은 렬화속에서 정신적인 구원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살아나가려는 그 자체가 그들한테 권세에 대한 미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확언하면 사회적인 권세욕이 이미 그들의 인간성을 제약하고 염색해버렸던것이다. 사실은 과연 그러하다. 재난에서 벗어난 현우현은 <<정만룡을 여론계에 소개하는데 큰 힘을 들>>였고 정만룡은 제집을 림시로 림장사무실로 내놓아 대번에 실화문학의 주인공으로 된다. 그러나 <<자기들은 살기 위해서 버둥질쳤노라>>고 실속대로 말한 심대식은 <<작풍이 나쁜데다 다른 사람을 헐뜯기까지 한다는 평판을 듣>>고 <<직함평의에서까지 밀려>>났다. 정만룡과 현우현의 합심무함에 든셈이다. 자연의 평화는 비탈린 현실을 재현시킨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와 같이 <<대식이는 문득 자기가 지금도 불길속을 걷고있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불길속을 헤쳐나가는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다. 상업적인 관심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속에서 인간성이란 전혀 존재할수 없는것이며 이러 인간들이 인간성을 지켜사는 사람들 주위에 재난의 불길을 지펴놓고있는것이다. <<피와 불>>에 등장하는 앞의 세 인물외에 도선향도 얼비친다. 도선향은 직접 작품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원쑤>>치부하는 심대식과 현우현의 사유공간을 빌어 간접적으로 비치는 영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것은 작품의 도선향은 정정당당하게 재가하는 과부도 아니고 매매혼인이나 소개혼인으로 하여 감정마비증에 걸린 녀인도 아닌 그 자신이 빚은 자작극에 사랑의 고배를 마시는 녀인이라는것이다. 과부재가도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많은데 그 자신이 두 남자한테 추파를 던져 비극을 초래한것이니 관념적인 평가는 당연히 도선향을 더러운년, 심대식은 량심없는자, 현우현은 괄시당한 사내일것이다. 이것이 야단이다. 사회상 정치적으로는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된다지만 도덕적으로 허물이 나면 영원히 지울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문화행위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향수할수 있지만 녀성들은 대부분 문화행위에서 향유자도 주체자도 아닌 언제나 소비적인 희생물로 전락된다. 실로 형식적인 도덕주의가 끼치는 해를 입는것은 보통 녀성이다. 왜냐하면 문화력사에서 륜리도덕적으로 유독 녀성들에게만 정조라는 <<월계관>>을 씌워주었기때문이다. 물론 작풍이 문란한 경우를 대변하려는것은 아니지만. 이성간의 사랑은 사회에 대한 리해, 감정세계의 미성숙 등등으로 착오적 선택이 있을수 있고 또 사회현실로부터 볼 때 문화력사적인 관성과 사회 제관계의 제약으로 인한 착오적(노예적, 수동적) 선택도 있을수 있다. 그런데 문화력사적인 도덕관념에서 유독 녀성만은 그 어떤 착오적선택도 영구히 지켜나가야 고상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행실로 인정된다. 이는 남성사회가 녀성들에게 강요한 <<진리>>이다. 바로 이와같이 남성사회의 삐여진 도덕관념과 도선향의 연약한 감정을 리용하여 현우현은 가장 비루한 수단인 처녀성을 돌파하는것으로 그녀를 손아귀에 잡아넣었던것이다. 현우현에게 있어서 도선향에 대한 추구는 미모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점유인바 그것은 사욕과 성욕이지 결코 순결한 애정은 아니다. 명예가 더럽혀질가봐 착오적인 선택을 눈물로 고집하면서 싫은 음식 삼키듯이 병적인 가정을 그런대로 영위해나가던 그녀가 즉시적반항을 보여주지 못했던 과거를 저주하면서 뒤늦게나마 관념도덕의 노예적멍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질치게 된것은 바로 가치균등의 순결한 애정에 동화하려는 심리적지향때문이였다. 관념도덕의 노예로 그냥 착오적인 한점 공간을 차지한다는것은 자아갱신의 흐르는 삶이 아니라 송장을 붙안고 통곡하는 굳어버린 삶이 된다는것을 깨달은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인과 노예라는 억울한 차이를 무너뜨리고 애정의 새로운 가치질서를 세우려는 애모쁜 반항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이름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차례지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삶이 희미하게나마 약속되자 마음의 재더미에서 다시 켜졌던 희망의 등불을 꺼버리고 가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비극 하나를 미연에 해소시킨셈이다. 왜냐하면 외곡되고 비틀린 현실은 그녀를 심대식이와 함께 문화력사의 관성으로 관념도덕의 <<단두대>>에 올려세우는것이기때문이다. 인간성은 여기 성애의 화원에서도 소외되고있다. 이와같이 <<피와 불>>은 자연의 도전앞에서의 인간들의 조화, 생령들의 조화, 자연의 평화속에서의 인간들의 불합을 통하여 사회적인 제약과 염색으로 퇴화되고 매몰된 참된 인간성에 대해 안타깝게 부르짖고있으며 인간들의 비리적인 반목과 투기적인 생활태도를 질타하고있다. 소설을 덮으면서 작자의 예술적성공을 다시 긍정하게 됨과 동시에 인물의 내심세계에 대한 적중한 색출이 잘 되지 못하고 도선향의 심리적성격에 대한 함축의 론리적타당성이 결핍하며 언어 특히 대화가 작자자신의 유모아적기질에 대비해서도 벌써 너무나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매개 인물의 개성적특성이 잘 나타나지 않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3    력사적 착오 문화적 반성 댓글:  조회:1776  추천:0  2009-05-16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대한 평론 몇편과 함께 오랜 침묵속에 얼굴을 파묻고있던 작가 정세봉이 갑자기 큼직한 <<돌멩이>>를 호수에 던져 끝없는 파문을 일으켜놓았다. 무려 팔구만자에 달하는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 문단에 커다란 충격파를 주었던것이다. 뒤골목에서 시야비야하거나 현대화도구에 목소리를 담는것도 인간이란 원래부터 새로운것에 대해 명확한 태도보다 먼저 수군수군 의론하기를 즐긴다는 전제하에서는 나쁠것이 없지만 그래도 사명이니 임무이니 의무이니 하는 책임감을 지니고 간행물을 통해 력사니 현실이니 인생이니 미적감수니 이미지니 하고 얼굴을 붉히며 <<티각태각>>하는이들이 퍽 대견스럽고 보배롭다. <<배우>>는 <<관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관중>>이 없는 <<배우>>란 연기의 영원한 실패자이다. <<이미지>>가 발표된지 인제 4개월밖에 안되는 사이에 5편의 무게있는 평론들이 여러 간물을 통해 발표되였다. 그중 <<문학과 예술>>지에 발표된 두편은 대담히 쟁명에 응하여 나선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대범함에 힘입어 주제넘게 바로 그들의 평론을 상대로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고 시비를 걸고든다. 이 두 평론은 아주 공교롭게도 하나는 절대격, 또 하나는 토를 달았다는 부동한 형식의 동일한 제목으로 되여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서로 아주 접근된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 아주 현격한 이질성도 있다. 평론 <<력사 현실 인생>>의 경우 평론가는 전반 글에 거쳐 <<당원으로서, 인간으로서, 강자로서 자기의 량심과 직분을 잊지 않았으며 자기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힘차게 연소시키려고 노력>>한 <<한 숨쉬는 인간의 진실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분석하고있으면서도 나중엔 <<이미지>>는 력사의 반성과 현실의 파악을 시도한 작품이란 <<어떤 사람들>>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실리주의적인 관점으로 분석해보면 쌍디아고나 윤태철의 거동은 아무런 실제적인 가치도 없는것이다. 오직 미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야만이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낼수 있는것이다>>라고 결론짓고있다. 분석과 결론의 이률배반에 빠진것 같다. 사실 평론가 자신이 글의 서두를 <<인간들의 정신활동은 이미 력사로 되여버린 어제날의 매듭에서 언제나 떠날수 없다>>고 떼고있을뿐만아니라 계속하여 <<력사는 가능하게 생활의 표면현상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현실생활의 밑바닥에서는 계속 암류로 흐르고있다. 때문에 많은 문학작품들에서는 현실생활에서의 모순을 제출하면서도 거기에다가 력사의 종적인 궤적을 립체적으로 교차시킨다. 이리하여 력사와 현실의 모순충돌속에서의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발로를 묘사한다.>>고 쓰고있다. 평론가 자신이 력사란 골동품이 아니며 력사란 오직 문화창조에 노력하는 인간에게만 유의미한것이며 문학은 바로 그러한 창조적인 문화행위라는것을 밝히고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차피 창조적문화행위란 각도에서 문학작품의 창작, 교환, 분배, 소비와 관계해서 그 문화적가치를 계산해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이것은 문학작품이 그 한 공간에서 력사의 모든것, 사회의 모든것 또는 인간 모두를 등장시킬수 없는것만큼 선택적으로 취사함으로써 일반성에로의 확대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는 특성으로 보아도 성립될수 있는것이다. 즉 다시말하면 우리는 도식적이거나 관념적인 류형 내지 전형을 반대하지만 개성적 인간이 어떤 시대적공간이나 문화적인 환경에서 부득불 류형적인 자아로 되여 그 시대의 한 문화류형의 상징으로 된다는것을 부인할수 없으며 그만큼 우리는 작품의 주인공에 대해서 그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는 동시에 그 주인공이 시대적으로 갖고있는 문화적의미에서도 아주 큰 흥미를 가지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력사, 현실, 인생의 시각에서 보아도 틀림없는것이다. 왜냐하면 력사의 현실을 미래지향적인 기본방향에서 재검토하는것은 인생을 련습할수 없는 우리로서는 현실을 보다 합리하게 꾸밀수 있는 바람직한 수단이기때문이다. 선인들의 경험교훈이 우리의 인생투자를 조금이라도 줄여준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할수가 있는것이며 선인들에게 감사할것이다. 과거의 상처와 오늘의 삶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력사를 다만 골동품으로만 삼을 때 우리는 자칫하면 그 틀림을 이어받을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또 과거의 현재성, 즉 력사의 계승성과 인간자체의 의식의 제한성으로 하여 사회발전의 굴절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수 없다는 상황에서 력사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문화반성은 의연히 필요한것이다. 문학은 이러한 사명을 훌륭히 완성하고있다. 문학은 직설적인 론리와 사변적인 분석으로 이런 사명을 완수하는것이 아니라 상기 평론가가 결말에서 쓴바와 같이 <<문학은 변화다단한 생활속에서 인간들의 감정이 생기게 된 가장 합리한 예술적근거를 만들어낸다. 이럼으로써 소리없이 현실생활에 의하여 단절된 거의 력사적인 련계를 잊어버린 의식심층의 심령활동을 재현하면서 과거, 현실, 미래를 의식의 심층에서 한곳에 단단히 이어놓는것이다.>> 그럼 <<이미지>>의 주인공 윤태철은 어떤 형상이며 그의 공헌과 오유는 어떤 문화적의미를 띠고있는가. 평론 <<력사 현실 인생>>이나 <<력사와 현실 그리고 인생>>에서 모두 윤태철은 <<외형상에서 강자의 기질을 가졌을뿐만아니라 정치상에서도 강자이다>>, <<쟁쟁한 쇠소리가 나는 중국공산당 당원이였으며 또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인정하고있다. 나중에 평론가 일언은 윤태철이 <<허수빈일가에 독재를 실시하고 그의 일가로 하여금 장기간 수난을 겪게 하고 아들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순정이를 죽음에로 몰아간 오유도 그렇고 더우기는 <당의 말을 앵무새처럼 받아외우고 당의 지시대로 로보트처럼 움직여온> <두뇌없는 순복도구>로 되여 구룡대대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준 오류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불가피면적인것이며 련습할수 없는 인생길에서 필연적인 오유였던것이다.>> <<윤태철의 오유는 력사적으로 빚어낸 오유이며 광범한 인민의 량해를 받을수 있는 오유이며 그가 인민을 위해 기여한 공헌과 융합된 오유이다.>>라고 결론짓고있다. 그런데 이처럼 최대의 량해를 주고서는 인차 소설의 결함을 지적할 때에는 또 <<윤태철의 반성은 정치적시각에서는 철저하지만 도덕적, 문화적, 심리적, 당성 측면에서의 반성은 아주 없거나 매우 얕다.>> 고 질책하면서 인격심리요소, 봉건적인 가장제적작풍, 사회변태적도덕 등 면으로부터 윤태철을 철저히 부정해버리고있으며 나중엔 상급의 지시를 앵무새처럼 외우고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것은 당의 실사구시라는 우량한 작풍과 언제나 실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상로선 혹은 인식로선을 떠난 결과이며 언제나 자기의 눈앞의 기성리익을 지키려는 소생산자의 편견이 장난친 결과이며 성실성의 결핍, 독립인격의 부족때문이라고 지적하고있다. 한 대상에 왜서 이토록 엄청나게 이질적인 가치판단이 내려지게 되는가? <<쟁쟁한 쇠소리가 나는 당원>>과 <<성실성이 결핍하고 독립인격이 부족한 당원>>, <<훌륭한 아버지>>와 <<봉건적인 가장제적작풍이 장난치고 사회의 변태적인 도덕이 장난치는 아버지>>, 아무리 <<공헌과 오유가 융합된 인간>>이라 해도 이와같이 불과 물처럼 전혀 상극인 이질적성격을 한몸에 지닐수야 없지 않는가! 필자는 이런 페단이 생기게 된 주되는 원인은 평론가가 주인공의 구체적인 문화심리와 그것을 토대한 인격과 가치추구에 대해 깊이 해부할 대신 급급히 력사에 대한 총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근거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론리적인 결론에 떨어졌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식의 공식을 도출해낸데 불과했던것이다. 이렇게 되면 력사는 문학소재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윤태철이든 김태철이든, 또는 그들이 공헌을 했든 오유를 범했든 죄다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에 맞춰넣으면 그만이기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문학감상을 할 때 확대된 시점-- 즉 한시대의 문화환경 내지 문화형태라는 보다 넓은 시점에서 주인공의 형상가치를 따져보아야 하지만 결코 주인공 자신의 인격적체험과 문화본위를 떠나서는 도저히 진실을 파악할수 없는것이다. 우리가 만약 윤태철에 대한 신변정리를 잘 한다면 쉽게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에 앞서 벌써 그때 그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을 도출해낼수 있는것이다. 첫째, 윤태철이 혁명에 참가한 초기의 목적은 바로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분배받아 가난에서 해방되려는것이였다. 그것은 계급적대항, 즉 직접 지주계급과 맞겨룸하는 혁명이였는바 그만큼 지주계급은 그의 직접적인 적이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림성이 평론 <<<볼쉐위크의 이미지>의 이미지>>(<<연변일보>> 1991년 7월 4일 제3면)에서 지적하다싶이 윤태철은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하던 그 세월에도 <성분유일론>이 아니고 <분자>와 자식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정책적으로 그렇듯 명확히 규정해왔건만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고 나라를 전복시킬 위험이 그래도 성분이 나쁜 그 사람들한테 있다고 여기면서 철저히 <계급계선>을 나누고 <독재>를 강화해야 철저한 <혁명성>을 지켜나갈수 있다고 생각한것이다. 둘째, 그때의 사회력사적환경 역시 윤태철의 상술한바와 같은 심리적자세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있었다. 당시에 비록 계급적대항의 제도가 뒤엎어졌지만 피통치자의 위치에 있던 계급이 통치자의 위치에 오르고 통치자의 위치에 있던 계급이 피통치자의 위치로 전락되였다는 자체, 혹은 적어도 원 통치계급의 <<분자>>와 현실적으로 만나고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적 아니면 감각, 인식적으로 계급적대항성의 마당을 형성하였을것이다. 바로 우리 당이 그 자신이 령도한 위대한 혁명의 승리로 하여 사회주의제도가 건립되고 그와 함께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계급존재의 사회적의미가 시대의 변화속에서 부정되고있음에도 계속 투쟁을 기본고리로 하여 계급투쟁확대화를 초래하게 된것도 상기한 사회력사적원인때문이였다. 더구나 직접 계급적대항의 사회를 체험해온 윤태철이고보면 특히 <<계급성분>>문제에서 그처럼 강경할수가 있는것이며 당의 계급투쟁확대화도 쉽게 옳은것으로 받아들일수가 있었던것이며 지어는 자각적으로, 철저하게 <<혁명>>할수 있었던것이다. 셋째, 윤태철의 소박한 혁명성과 사회력사적환경과 함께 그의 락후한 농민출신의 신분적제한성이 인과적으로 금 그어준 현실파악과 문화적자아실현의 한계성을 홀시할수 없는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그의 삶의 인격을 정립시켜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으로 될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은 그를 경험-유전형의 인간으로 키워왔기에 론리-사유형의 인간과는 너무나 아름찬 거리를 두고있다. 이것은 필연코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기 자세에 대한 조절 내지 규범에서 모호성과 전통성 및 의뢰성을 나타내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특히 이런 비자각적인 문화바탕으로서는 우리 당의 사상리론체계에 대해 령혼적으로 옳바르게 해득할수 없는것이다. 하기에 그는 다만 우리 당은 인민을 이끌어 계급적대항의 사회를 뒤엎고 인민을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한 위대한 당이라는 극히 소박하고 거의 상식에 가까운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상급의 말만 들으면 틀림없다는 심리적자세를 갖춘것이였다. 하기에 사실상 그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그 자신의 자치적노력보다는 관념적인것을 모방한 의뢰적인것이였으며 그의 인생적자세조차 적극적이고 자각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다만 시키니 한다는 심리로 삶을 조직한 순응주의적인것이였다. 이것은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린 벽두에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다시 자기의 생활능력을 실험코자 애쓰는 윤태철의 창백한 모지름에서 재확인하게 된다. 비록 시대가 어느 정도로 력사의 한 물결에 휩쓸렸던 개인들에게 심각한 력사적사고와 반성 및 자아발견적인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고있음에도 윤태철은 우리 당이 자기의 오유를 반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자 도리여 자기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산당하고만다. 다만 <<<볼쉐위크>적 오기>>로써 <<자신에 대한 력사의 희롱을 달갑게 받아안으리라 했고 아들놈앞에서 주저치 않고 <두뇌없는 순복도구>질 하리라 했다.>> 그렇게 가냘프던 정신조차 허물어져버린 윤태철에게 남은것은 행위외엔 아무것도 없다. 행위자 목적이요 행위자 동기요 행위자 인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다만 <<흘러간 력사에 대한 울분>>과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쉐위크>적 오기>>때문에 허수빈네를 도와주는것을 <<삶의 내용>>으로까지 여겨 <<그가 새롭게 걸어나갈 인생의 길인것처럼>> 느끼는것이였다. 인젠 자기몸을 주체하기도 바쁜 로인이면서도 그 육체를 허물어서라도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기어코 훌륭한 배역을 담당해보려는 거기에 정신적공허와 창백함이 드러나고있으며 자아희생적으로 자기의 약점을 표현하는 비극성이 조명되고있는것이다. 달리 풀어말하면 생리적년령은 이미 인생의 황혼빛을 띄고있으면서도 비여있는 정신적공간때문에 쇠약한 육체만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기에 그의 인과적인 희생이 확인되여 있는것이다. 오늘 우리 당이 경제건설을 중심위치에 놓음과 함께 당원들의 리론수양과 문화자질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고있는 자체가 이런 력사적교훈과 시대적요청을 웅변적으로 전달하고있는것이다. 필자가 <<<볼쉐위크>의 이미지>>에서 받은 계시도 바로 이런것이였다. 상술한 분석으로부터 필자는 <<윤태철의 철저한 반성>>을 강요하는 평론가 일언의 주장에 수긍되지 않는다. 사실 평론가가 지적한 결함 자체가 바로 윤태철형상의 특징으로 되고있는것이며 그것에 대한 몰자각으로 하여 그 자신이 의연히 차디찬 정신적방랑을 하고있으면서 <<무엇인가 억울한것만 같았고 그러한 평가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는데 기어이 그더러 직접 철저히 반성하라고 하는것은 생활적으로나 론리적으로나 도저히 합리성을 찾을수 없다. 그렇게 되자면 이 소설의 전반 이야기성에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그렇지 않을 경우 작가가 에누리없이 개념화, 도식화에 깊이 빠지고말것이다. 우리가 평론에서 력사의 소용돌이속에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인물을 분석, 비평하는것은 그때를 그는 그렇게 살수밖에 없었다는것을 부정하려는것이 아니라 어제의 오늘, 오늘의 력사라는 련속성에 립각하여 경험적인 삶에서 현실적인 삶을 확인하려는것이다. 즉 현재적합리성에 목적한 나무람일따름이다. 다음으로 <<정치색채가 아주 농후한 이 소설에서 윤준호의 정치태도같은것은 거의 무시되고있다>> <<그의 모든 말과 짓이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 지적에도 도저히 수긍이 가질 않는다. 우선 이 소설이 <<정치색채가 아주 농후하>>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필자도 림성의 견해와 같이 이 작품은 <<40여년에 걸친 우리의 력사에 대한 반성을 안겨주는 의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력사의 흐름속에서 우리 매개인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한 사색적제시가 다 크다고 생각>>되며 력사적착오에 대한 문화적반성에 력점이 놓이고있다고 확신하기때문이다. 윤태철의 아들 윤준호와 지주아들 허수빈의 딸 허순정의 사랑의 훼멸이 소설의 갈등과 슈제트발전의 계기로 되고있으며 윤태철 자신의 심리적모순, 정신적곤혹, 량심적회심이 전반 작품을 관통하고있다. 그다음 <<윤준호의 정치태도같은것은 거의 무시되고있다.>> <<그의 모든 말과 짓이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 견해에도 반기를 들지 않을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는 왜서 윤준호의 정치태도가 꼭 표현되여야 하는가? 왜서 그는 꼭 말과 짓에서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수 없다. 작품에서 보면 사랑의 억압과 훼멸은 윤준호로 놓고말하면 개인의 삶의 전체에 절망적인 비극의 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삶의 절망까지를 느낀 뼈에 새겨진 상처, 그 상처가 주는 참을수 없는 아픔, 되돌아가 그 아픔때문에 잊을수 없는 사랑인데 기어이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것은 인간상정에도 어긋나는것이다. 더구나 씨앗까지 뿌려 미구에 열매를 보게 되였던 황홀한 사랑이고보면 꿈에조차 잊을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윤태철과 윤준호의 갈등이 그 내용적확장이 몇십년의 력사에까지 미치든지 아니면 전반 사회에까지 관계되든지간에 우선 그것은 가정내부의 부자갈등, 지어는 어떤 사람을 <<새사람>>으로 맞아들이는가 하는 갈등의 형식으로 표현되고있는만큼 윤준호가 꼭 아버지한테 나는 력사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보오, 현실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보오 하고 태도표시해야 할 생활적흐름의 합리성을 찾아볼수 없다. 특히 그 사랑을 억압하고 훼멸시킨 장본인이 아버지일 때 가부장제적독단에 훨씬 더 분개하게 되는것이며 갈등의 초점이 그것에 모여지기 마련인것이다. 그가 당소조장을 질책한것도 진짜 충고도 있고 야유, 조소도 있지만 기실은 아버지에 대한 울분을 터뜨린것이다. <<시어머니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는 격이다. 사실 작가 자신도 결코 작품에서 정치관념상에서의 세대적갈등을 반영하려는것이 아니라 사랑마저 정치적우박의 피해를 받지 않을수 없었던 인정이 메마른 특정된 사회상을 부각하려는것이다. 인물형상분석에서 작품의 얽음새에 따르는 매개 인물의 자세로부터 그 인물의 성격을 파악해야지 저 인물의 성격에는 이런것이 있는데 이 인물의 성격에는 이런것이 없다는식으로 허물한다면 오히려 개성있는 성격을 부각할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사람은 이럴 때 이러는것이다 하는식의 주장은 도식화, 개념화로서 그렇게 되면 작가는 생활적인 인간을 부각하는것이 아니라 론리적인 인간을 제조하게 될것이다. 사실 생활현실에서 보면 이 사람은 이러해야 하는데 이렇지 못한것이 이 사람의 성격의 거치른 면이 되고 저 사람은 저러해야 하는데 저렇지 않은것이 저 사람의 성격의 개성적인 면이 되는것이다. 이상에서 나어린 글쓰기 열성자로서 두분 평론가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믿어의심치 않으면서 설익은 관점을 가지고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는 행위를 개시했다. 학술적으로 다각적풀이가 가능한 시대인만큼 개성적으로 일가지언을 주장함은 중요하지만 남을 이설이라고 억누르는것은 언어도단일것이다. 그만큼 자기의 관점만을 책임지고싶다.
2    사회적 착오 자아의 탈출 댓글:  조회:1425  추천:0  2009-05-16
에텐동산을 떠나기전의 아담과 이브는 자연인으로서 거의 동물적인 생존욕구로부터 일하고 먹고자고하였다. 그러나 악마의 지배자인 사탄이 그들을 꼬드겨 지혜의 금과를 따먹게 한후로부터 인간의 원죄는 시작된다.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난 어린애는 아직 자연인으로서 동물적인 생존욕망에서 먹고자고한다. 그러난 어린애는 점차 자라는 과정에 문화인으로 성장하면서 혹은 훌륭하게 혹은 나쁘게 혹은 밝게 혹은 어둡게 인생의 일기를 적어간다. 적어도 인간의 원죄란것도 결코 생명본체에 원초적으로 내함되여있는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원죄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람을 고급동물이라고도 하고 또 사회동물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으로도 사람의 속성은 드러나는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란 바로 사회속에서만 독립할수 있는 동물이라는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사회는 일정한 형태의 사람들을 제조해내는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회로애락과 선과 악은 모두 사회적생장물이다. 리화숙의 <<인생실습>>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학적 또는 사회학적 문제를 떠올리고 <<나>>와 그 주위의 인간군에 대한 형상적묘사를 통하여 그네들이 삶을 펼쳐놓은 사회를 재조명하고있다. <<나>>는 원래 머리를 수굿이 하고 일만 하는 <<누른한 소>>였다. <<신문사에 배치받은 그날부터 국제시사부에서 번역만 하다보니 인간관계테두리가 딸년의 팔목걸이만큼도 안되였다.>> 그래도 <<나>>는 <<나>>대로 누구에게도 원망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나>>의 진실성과 솔직성이 얼마나 허망했고 또 막연하게 믿어왔던 법칙이 얼마나 령활한것이였던가를 <<내>>심장이 아프도록 절실하게 감수했다. 람용되는 권력, 미꾸라지는 살고 <<누른한 소>>가 채찍받는 불공평한 세월, <<나>>는 다년간 80여원의 로임에 네식구가 목을 달아매고있지만 배치돼온지 3년도 안되고 글재간은 손톱여물만치도 없는 관계학우등자에겐 주임자리를 주고 새 아빠트를 배당해주는 원통한 현실, <<실로 너무도 밑지는 인생이고 너무도 억울한 신세였다.>> 오직 권력과 아첨만으로 할수 있는 일을 <<나>>는 어떻게 할수 있겠는가? 죄도 바로 한가지 생각에만 골몰하는데서 일으켜지는것이다. 이와 같은 기형적인 사회현실이 청춘의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권력으로 사람을 압제하고 희롱한다면 <<나>>는 <<부정기풍사냥군>>이 되여 너의 기염을 꺾어놓아 사나운 사자를 온순한 양으로 만들고말테라는것이다. <<내>>가 처음 이런 못된짓을 시작한것은 전적으로 <<내>>가 당한 억울함과 고통에 대해 복수하고싶은데서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여 그것이 원인이 되여 3%로임조절에서 보살핌을 받고 또 신문사 보도주임의 요직에까지 바라오르게 되자 <<나>>는 <<승리의 희열>>에 도취되여 영원한 악의 미궁에 빠져들어갔다. 비밀현장을 쥐고는 농촌사람을 도시사람으로 변신시키고 앓는 놈을 군대에 내보냈고 통신원을 기자로도 만들어보았다. 그 수고비로 들어오는 돈은 슬쩍 눈감고 아닌보살했다. 하여 수입은 가관으로 불어갔고 승직도 번개식속도였다. 워낙 인간은 일단 악에 마음잡히면 야수보다 침략성이 더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성은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사회거나 사회환경이 키워준 생장물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또 모종의 생존의식 내지 생명의식의 극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남처럼 살아보겠다는것이 소박한 생존의식이라면 남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는것에는 벌써 어느정도 화약냄새조차 풍기는것이고 악마의 그림자가 비껴있는것이다. <<살아있어도 소리칠수 없는 사람>>인 <<내>>가 소리치며 살려면 <<나>>한테 소리치는 권세자를 <<소리칠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던까닭에 그처럼 교활하고도 루추한 방법을 착안해냈던것이다. 물론 목적의 정당성을 내걸고 수단의 악을 미화할수는 없는것이다. 악의 수단을 쓰게 된것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였다는 변명은 악에도 좋고나쁨이 있다는 언어도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면 악의 정체도 모호해지고마는데 바로 <<나>>와 같은 권력지향의 인간들은 그런 모호한 정체의 악을 리용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는것이다. 인간의 삶은 과정이 곧 목적이라야 한다. 풀어말하면 참된 삶은 참된 삶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룩될수 있다는것이다. 참된 삶에 악의 과정 내지 악의 수단이 필요하다는것, 그것은 도저히 맞물릴수 없는 론리이다. 그럼에도 삶의 현장에선 왜 이런 론리가 성립되는듯싶은 실례들을 찾아볼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본체의 자연적이고 본성적인 민주, 평화와 평등이 파괴되고 인권이 권력의 억압과 유린을 당하고있는 구속의 현실을 새삼스럽게 체험할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원시적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살고있는 미개한 민족들로부터 아무런 인위적인 요구나 구속이나 착취도 없이 환경의 요구에 따른 자기식의 생활을 하는 원시적인 민주와 평화 내지 생의 만족을 엿볼수 있다. 또한 력사를 뒤져보면 인류는 기원전 4천년 내지 3천년에 이르러 자신이 생리적으로 수요하는것을 훨씬 초과하는 필수품을 생산할 능력을 가지면서부터 빼앗고 훔치고 착취하는 등 후천적인 침략본성이 자라나게 되였고 원래는 그 부속물인 노예, 군대, 정부, 전쟁, 등급 등이 잇따라 산생되였던것이다. 따라서 동물적인, 자연적인 민주는 소실되고만것이다. 물론 이런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민주가 인류의 리상으로 될수는 없다. 인류의 조상이 금과를 따먹은후로 무궁무진한 지혜를 갖게 된 인간은 부단한 창조로써 하느님이 가르쳐준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것이다. 바로 인류가 풍부한 물질적토대우에서 생리적수요를 초월한 절대적인 향수를 누릴수 있는 새로운 민주와 평화를 제조하는 과정에 력사는 굴곡적인것이다. 그러나 될수 잇는한 인류는 이 과정의 곧음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시험하고 자기를 다듬어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로 진실과 순결이 <<나>>에게 참다운 삶과 그에 정비례되는 생활환경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데 비극적인 운명이 있다. 여기엔 구체적으로 말하면 권력담당세력의 청렴성이 제기되는것이지만 총괄적으로 보면 우리가 꾸며온 력사를 총결산해본 사회정치문화적의미가 담겨져있는것이다. 권력담당자에 대한 해부로부터 착수해보면 자기의 능력을 초과하는,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 상급에겐 비굴한 아첨을 보내고 하급에겐 상대방의 인격이나 재능보다는 안면과 지갑의 크기에 더 관심하는 권력람용자들, 위세나 풍모가 더 큰 권력이나 돈 앞에서 기운을 잃고마는 위선자들, 명철보신하면서 사리사욕만 채우는 무능한 권세자들을 우리의 생활권내에서도 얼마든지 볼수 있다. 권력담당자란 한사람이 만사람을 지배하는자이다. 그만큼 청렴한 몸에 지혜가 깃들면 만사람이 복을 받게 되고 추악한 몸뚱이에 놀라운 재능이 깃들면 만사람이 해를 입게 되는것이다. 이런 얼굴을 우리는 김사장의 형상에서 보고있다. 자신은 아주 청렴하고 사원들의 리익을 위해 힘다하는듯이 자처하면서 <내>>가 <<어쩌다 한번 식료품공장의 보도기사 한편을 써주고 과자상자 한개를 받은것을 갖고 뭐 위성이나 발견한것처럼 떠들어대면서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자기는 도리여 기자들한테 사진기를 사주고는 상점측으로부터 과자 한상자가 아니라 과자상자에 넣은 5천원이란 거액의 감사료를 받아먹었던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수굿하고 일만 하는 나>>에겐 그냥 손해만 주고 <<배치받은지 3년도 안되고 글재간은 손톱여물만치도 없는 관계학우등자>>에겐 주임자리를 주고 새아빠트를 배당해주었던것이다. 새로 부임된 양사장도 그랬다. 다만 김사장보다 더 교활하고 음특할뿐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는 <<손톱눈만한 부정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였다. 그래서 거의 오만할만큼 도고했다. 안해나 자식까지도 그의 사업열정과 자아의 관철에 얼마 소용되지 않는것 같았다.>> 허나 그 <<평화로움은 오히려 정상적이 아니>>였다. <<지나친 그 평화속에 부글부글하는 분렬의 암류가 잠재>>되여 있었던것이다. 굴레벗은 말처럼 날치는 <<나>>를 손아귀에 잡아쥐기 위해선 <<미인계>>조차 꺼리지 않는 위선적이고 음험한 자였다.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순결속에서 이런 권력담당자들의 인위적이고 추악한 권력중압에 지지리 눌리워 한탄과 원망과 저주와 실망의 십자가를 메고 인위적이고 불필요한 인생고행을 겪고있는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마비된 상태에서 기계사람이 돼버리고 혹자는 가망없는 소경의 헛막대질로 분노와 항의를 거듭하고 혹자는 <<나>>처럼 어둠이 깃든 자아에서의 허위적이고 절망적인 탈출을 시도하는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든지 결과는 모두 허황하고 비참한것이다. 마비된 사람은 자살적으로 리상과 전도를 동댕이친 사람이고 헛막대질하는 사람은 스스로 혹을 더 다는것뿐이며 <<나>>처럼 자아에서 탈출한 자는 사회와 도덕의 비바람을 막아낼수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진단과 처방은 어떻게 되여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꾸며온 력사를 재결산해보고 사회정치문화적의미를 다시 매겨보는것이다. 왜냐하면 복합적으로 결정되는 사회현상을 단일한 인과관계로 급급히 설명해버리는것 자체가 칼로 부추베듯 문제의 화근을 덮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뿐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와 같은 권력담당자들의 부패상은 결코 개개인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조장된 인간도덕문제인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타락의 요람을 마련해준 사회적착오의 반영인것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할순 없지만 간추려보면 그들이 타락하고 게으름을 피울수 있는 원인은 첫째로 사회발전(적어도 한 집단의 발전) 과 그들의 승강이 엄격한 련관을 갖지 않고있기때문이고 둘째로 경제적리해관계(경제적책벌도 포함)가 그들의 공과 죄와 아무런 관계도 발생하지 않고있기때문이며 셋째로 민주(선거와 해임을 포함)가 그들의 승강과 아무런 관계도 발생하지 않고있기때문이다. 든없고서는 게으름을 피울수 없다. 여기서의 <<돈>>을 <<마음의 여유>>라고 한다면 사회발전과 경제적리해관계와 민주의 중압이 가해질 때 게으름을 피울수 있겠는가?! 바로 <<나>>와 같은 진실하고 순결한 인간들이 권력담당자와의 씨름에서 도저히 이길수 없는것도 다만 그 권력때문에 아니라 그런 권력의 공고성을 담보해주는 사회적고질때문이다. 집단의식의 미명하에 명령과 복종을 원칙으로 하여 절대적인 조건반사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창조적인 인간은 비극배역을 맡을수밖에 없는것이다. 상술한 리해를 앞세우고 <<인생실습>>을 곰곰히 씹어보는것이 문학을 통해 삶과 현실을 읽어내는 옳은 방법이라고 믿어진다. 그렇지 않고 다만 김사장이나 양사장이나 <<나>>를 한꼬챙이에 꿰여가지고 비렬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사건적인 타매에 급급해한다면 그저 사회의 도덕결론을 전달하는데 그치고만다. <<나>>가 권력의 중압에 못이겨 나중엔 그처럼 비렬한 수단을 썼음에도 읽은이의 동정과 지어는 환심까지 사게 된것은 <<나>>가 복종에 중독되든 분노하고 반항하든 자아에서 허위적으로 탈출하든 모두 진정한 자아를 찾을수 없고 최종적승리를 안아올수 없으며 도덕의 질책에서 벗어날수 없다는것, 또 그만큼 <<나>>가 개인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는 도저히 이길수 없는 사회적착오와 씨름하는 필패의 씨름군 즉 절대적인 비극운명의 주인공이기때문이다. <<인생실습>>은 일인칭수법을 리용하여 <<나>>가 권력의 중압에 못이겨 자아에서의 허위적인 탈출을 시도하면서 일어난 일련의 내면갈등--긍정과 부정, 량심적질책과 사회적변호, 도덕적반성과 사회비판 등을 현실감각이 짙게 보여주고 삶의 현장감을 뚜렷이 느끼게 함으로써 읽는이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참여의식에 몸달구게 한다.
1    [해란강아 말하라]의 역사적 진실성 댓글:  조회:1663  추천:0  2009-05-16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김학철)는 연변 연길현 해란구 버드나무골을 주요무대로 하여 연변인민들의 항일투쟁력사의 비장하고 거세찬 흐름중의 한물결, 즉 혁명의식이 싹트고 성숙되던 시기였던 1931년-1932년의 력사를 예술적으로 재현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9.18>>사변, 추수투쟁, 춘황투쟁 및 항일무장투쟁의 력사를 돌이켜보게 한다. 소설은 이런 력사사변들을 통하여 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 및 필승의 진리를 밝히고있다. 력사적진실감은 이 작품의 흡인력을 짙게 한 가장 중요한 예술적특징이다. 작자는 생활감정에 필을 푹 묻혀가지고 력사적현실을 보다 미더웁게 예술적진실과 불가분리적으로 통일시키려 애쓰면서 형식적으로만 추구되고 정형된 도식과 정치적으로만 강요되고 굳어진 관념상의 지나친 리상화에서 벗어났기에 생활정취가 짙고 력사감과 진실감이 물씬하며 당시 생활에 동반되였던 흙냄새와 초연냄새가 사실주의적으로 짙게 풍긴다. 주지하다싶이 력사사건을 제재로 한 작품에서 력사적진실감은 무엇보다 먼저 그 작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된다. 력사의 페지에 따라 고통은 고통으로, 웃음은 웃음으로 직시해야만 독자들의 력사적상상력을 촉발시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수 있는것이다. 력사적현실을 외면한채 순수 관념상에서 추구되는 리상화는 벌써 허위로 되고만다. 그러나 예술의 진실은 생활을 그대로 복사하는데서 담보되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려과시킨후의 <<현실생활>>로써만 긍정된다. 이것은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모순을 유기적인 통일로 전환시킴에 의거해야만 력사소설의 성공이 완성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럼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에서 어떻게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을 유기적으로 통일시켰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작품에서 진실성은 인물형상의 성격창조에 앞서 주제와 제재면에서 벌써 짙은 력사적진실감으로 밝게 체현되고있다. 주제면에서 보면 소설은 일련의 력사적사변들을 통하여 민주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 및 필승의 진리를 밝히고있으면서도 작자는 이런 주제의식을 이미 승리한 혁명력사에 대한 관념적리상화로써 표현한것이 아니라 작자의 기억속에 생생히 자리잡고있는 경험세계, 즉 민주혁명력사시기의 사회생활과 인민들의 피로써 얼룩진 투쟁을 력사의식의 현실적체험속에서 예술화하여 실감있게 보여주고있다. 다음 제재면에서 보면 소설은 연길현 해란구 버드나무골을 주요활무대로 하여 연변인민들의 항일투쟁력사중에서 혁명의식이 싹트고 무장투쟁의 첫 봉화가 타오르던 때인 1931년-1932년의 력사를 반영하고있다. 작자는 여기에서 지나친 랑만을 추구한것이 아니라 흘러간 력사를 제재로 한다는 특수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술적진실과 력사적현실과의 내재적통일을 완성하기에 애썼다. <<동만 전역이 그러하듯이 32년 늦은 봄에서 겨울에 걸치여 해란강일대의 농민들도 역시 암담한 검정구름의 그늘아래서 세월을 보내였다.>> 일제는 <<9.18>>사변후 저들의 식민지화음모와 파쑈적통치로 하여 야기된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일정서와 반항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인민들의 애국의식과 반항투쟁은 반동의 선불맞은 고조기를 휘몰아온것이다. 일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하루속히 실현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의 손길이 아직 인민들속에 확고한 신심과 신념을 키워주기전에 그 싹을 베여버리려 시도하였다. 1932년 한해에만도 일제는 연변에서 4천여명의 무고한 군중을 학살하였다. 1932년 부터 1933년사이에 일제는 연길현 해란구에 대하여 선후로 94차의 <<토벌>>을 발동하고 천칠백여명의 혁명자와 백성들을 살해하여 피로 물든 <<해란강대참안>>을 빚어냈다. (<<조선족간사>> 100~101페지) 작자는 소설에서 이런 력사적현실의 어려움과 참혹성을 관념속에서 분해시켜 리상화로 염색해버린것이 아니라 력사적사변을 원형 그대로 예술적진실과 유기적으로 통일시키려고 애쓰면서 사건본질속에서 비장한 주제의식을 발굴해내고있다. 작자는 이런 비장한 주제의식을 제재다룸에서 선과 악, 정의적인것과 비정의적인것에 대한 작자 자신의 선명한 인민적태도로 체현시키고있을뿐만아니라 보다 개성화된 인물성격창조에 믿음을 주어 부동한 계급성, 부동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의 부동한 인식적대화를 통하여 그것을 힘있게 완성해나가고있다. 인물형상창조에서 작자는 우선 밝은 성격의 창조와 그들의 건전한 정서적발전에 예술적공간을 넓게 주고있는바 이런 밝은 넋들의 힘찬 움직임은 작품에서 재현된 비극적인 력사사건으로 하여금 주제를 위한 로파심에 찬 과잉해석이 없이도 비극속에 새로운 전환요소를 다분히 내함하도록 함으로써 전반 작품의 정서적흐름을 비애적으로가 아니라 비장하고 전투적인 분위기로 차넘치게 하고있다. 또한 바로 이런 인물형상군들의 적극적인 투쟁자세와 질적으로 밝은 삶의 추구로 하여 비록 소설이 사건적비극으로 막을 내리우고있지만 그러나 독자들이 가슴뿌듯이 체험하게 되는것은 전혀 혁명에 대한 실패의식이나 정서적어두움인것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과 희망이며 주인공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다. 이것은 작품의 력사적진실감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주인공의식과 독자의식을 미학적인 정서흐름에서 맞물림을 이루어주었기때문이다. 소설에서 림장검의 형상은 비교적 성공적이다. 소설은 그의 성격발전에 알맞는 무대를 꾸며주고 력사적현실의 진감속에서 그의 개성적기질에 맞게 량적성장에 따르는 질적변화를 실감짙게 밝혀주고있다. 인간의 사랑을 일찍 잃은 고통우에 강한 반항의식을 키워온 그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강한 의지형의 인간이다. 무슨 일이나 마음적으로 긍정되여진 일이면 자기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가능성을 꼬물꼬물 계산함이 없이 맹호같은 폭발력으로 후닥닥 해치우고만다. 그만큼 성공에 믿음이 깊고 실패에 교훈이 크다. 때문에 매 한가지의 체험적사건에서 그의 의식은 폭발적이고 비약적인 전변을 가져온다. 그러나 아직 혁명에 대해 실천적으로 깊이 체험하지 못하고 특히 관념적사유에까진 성숙되지 못했을 때 그의 의식의 전변은 언제나 리성적이고 관념적인것이 아니라 그의 약삭빠르고 총명한 본성적성격에 토대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감성적이고 감각적인것이였다. 때문에 반항의식이 달구지사건으로 폭발점에 이르러 박승화네 집을 뛰쳐나온 그는 <<나두 사람이다>>라는 심리적반응에 흥분되고 인간가치에 대한 순박한 자각의식에 삶의 자세를 바꾸면서도 박승화와의 갈등을 다만 개인적인 모순으로만 여기고 이를 계급적의식의 이질성에서 초래되는 본질적인 대립으로는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갓 혁명에 몸잠그었을 때도 각성된 의식의 자각적인 분투보다는 의연히 자기의 신변생활에 대한 강렬한 불만정서에 사로잡혀 자각적인 의식의 락관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자발적인 본성적성격의 락관에 퍽 흥분되여있다. 혁명자들과의 접촉, 혁명에 대한 실천적체험, 일제의 <<간섭>>으로 인한 신변생활의 공간적확대, 박승화의 로골적인 반공활동, 이런것들로 하여 장검이의 환상적인 꿈은 산산히 부서지며 눈앞에서 펄럭이던 붉은기폭도 훨씬 멀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에 대한 환멸의식이 아니라 혁명의 간고성과 장기성에 대한 동통이 심한 자각증상이였으며 보다 리지적인 의식의 눈트임과 함께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면서 내면에 아프게, 그러나 미더웁게 흘러가는 심리적반응이였다. 이와같은 의식의 질적전환에 대한 내적모습의 조명은 후에 장검이가 혁명투쟁속에서 나타낸 강한 의지형의 행위에 성격발전의 론리적합리성을 안받침해준다. 또 이와 같은 불밝은 성격발전으로 하여 장검이의 죽음은 혁명의 실패감과 정서적어두움을 비껴주는것이 아니라 그가 자각한바의 혁명의 간고성 장기성을 가슴저리게 실감적으로 보여주는것이다. 이밖에 버드나무골 농협의 지부책임자 한영수, 농협위원 왕남산, 대소사불문하고 언제나 적극적인 참여의식으로 할말은 허리부러지게 하고 투쟁에서 대중일반속에 코기러기처럼 앞장서는 박화춘, 사랑을 토대로 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조와 지지로부터 점차 혁명의 도리에 대해 소박하고도 생활적인 리해를 가져오면서 개인적인 목적추구를 계급의 근원적인 목적추구와 련결시키는 허련하, 영리하고 오돌찬 한영옥, 총명하고 지혜롭고 용감한 삐오넬 성길이 등의 인물형상들을 통해 의식의 이질감, 성격의 다양성으로 저마끔의 뚜렷한 개성과 심리적반응차이 및 그에 따르는 행동적반응차이를 보이면서 또 계급의 동질성속에서 밝은 투쟁세력의 복합적형상을 창조함으로써 작품의 주체의식을 예술적으로 감각되게 하고있다. 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은 또 대상적의미에서 원쑤의 교활성, 잔인성과 강대성을 동반한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벌써 혁명의 간고성, 장기성을 부정하는것이며 선렬들의 피어린 투쟁을 부정하는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적의미에서 어느 한쪽을 과장할 때 모름지기 다른 한쪽도 과장되고말기때문이다. 이것으로써 작품에서 부정인물형상의 진실성은 긍정인물형상의 진실성과 상호경쟁적작용으로 거의 대등한 예술적가치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대체할수 있을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박승화의 형상이 퍽 성공적이다. 버드나무골의 툰장인 그는 천성적인 음험한 교활성과 유산자의 극단적인 리기주의가 골수 가득 흐르는자이다. 리기주의는 그의 인생관, 세계관이였고 교활성은 그의 생존수단이였다. 나라를 버릴지언정 내것을 잃을순 없다는 이런 인생목적은 그의 교활성에 어떤 수단으로든지 내게 유리하게만 되면 된다는 지시등을 켜주어 가장 지독한 음험성과 잔인성까지를 서슴치 않고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교활한마큼 기후에 민감한 그는 환경의 변화에 자기를 곧잘 적응되게 할수 있었다. 소작농들이 자기를 응당한 주인으로 바라보고 아직 새로운 의식과는 낯설어할 때 그는 자기를 선량한 구세주로 분장하고 너그러운 인품과 위엄있는 권력으로 그들을 얽어매고 등쳐 간빼먹는 수단으로 그들을 착취하면서도 극력 자기의 삶의 질에 도금칠을 하였다. 그러다가 소작농들의 불만의식이 쌓여 나중엔 반항의식을 두드려 깨우고 그에게 점점 깊은 적의를 품게 되자 그의 교활성은 위선적인데로부터 음험한데로 탈바꿈을 하고 마침내는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진폭이 큰 력사적사변의 강렬한 진감속에서 보다 음흉하고 잔인한것으로 로골화된다. 이처럼 그의 성격은 객관적충격앞에서 그 자신의 성격적특성에 맞게 주관적선택을 하면서 성숙된다. 이밖에 술과 녀색, 금전과 명예에 오금을 꺾어 빈고농출신을 배반하고 박승화의 충실한 졸개로 충당되여 악한짓을 락으로 삼는 승냥이마냥 잔인한 최원갑, 개를 추겨 사람을 물어뜯게 하고 독약을 풀어 혁명자의 일가를 몰살한 대지주 호가, 계림촌의 부농 리범도, 리범식형제 등의 형상들도 그 각자의 개성적특징을 나탄내면서 반동의 잔인성, 극악성을 여실히 드러내고있다. 이처럼 잔인하고 교활한 적들을 대상으로 한 혁명투쟁이였기에 막대한 피의 대가를 내지 않을수 없었고 많은 력사의 페지를 번지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해란강아 말하라>>는 이와같이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통일속에서 긍정인물의 밝은 성격 및 정서적발전과 부정인물의 잔인하고 교활한 성격 및 정서적발전의 불꽃튀는 겨룸을 통하여 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과 필승의 진리를 실감적으로 밝혀주고있다. 끝으로 의식의 대립적전환을 가져온 김달삼이의 형상과 의식의 질적전변을 보여주지 않은 정적인물인 류인호의 형상도 주제의식을 밝힘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 성격들의 력사적진실감으로써 전반 작품의 진실성을 한몫 담당하고있다는것을 홀시할수 없다. 달삼이는 워낙 버드나무골의 농협선전간사이며 사립학교 교장이였다. 비록 한영수의 영향으로 혁명에 몸담은터이지만 그의 마음 구석구석에는 소지식인의 연약성과 배부른자의 리기심이 장난치고있었다. 이것들은 가볍게나마 받아들인 혁명의식과 상호경쟁적인 힘이 되여 수시로 의식의 심리적맞겨룸을 일으켰다. 그것의 힘의 크기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오르내리였다. 아직 반동의 세력이 그닥 강하지 못할 때 그의 혁명의식은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그의 행위를 지배할수 있었다. 그러나 반동의 세력이 사나와지고 자기의 생명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자 그의 마음은 대뜸 추워났고 내몸을 위하여야 겠다는 일념이 일체를 좌우지하였다. 하여 박승화의 위협공갈과 유혹앞에서 끝내 공허한 삶의 의식에 몸부림치면서 표면적으로나마 유지해오던 옳은 가치균형을 깨여뜨리고 부정적힘에 절대적행위권을 주고만다. 마침내 그는 변절자로 되여 유격대행동계획을 밀고하며 자기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련락원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광열적인 삶의 욕망은 적의 류탄에 맞아 끊어지고만다. 소설에서 달삼이의 형상은 폭넓은 심리갈등을 통해 연약성과 리기심의 자극적인 발전을 심리본질에 맞게 펴보임으로써 비교적 완정한 성격을 완성하고있다. 소설은 이와같은 달삼이의 형상을 통해 배반행위가 혁명에 얼마나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는가를 보여주면서 다른 한 각도에서 혁명투쟁의 간고성과 장기성을 밝히고있다. 류인호의 형상은 또 다른 한 각도에서 주제의식을 실감케 한다. 소설에서 성격과 의식의 질적전환을 꼬물만치도 가져오지 못한 정적인물로 묘사된 그는 보수적이고 리기적이며 노예근성이 짙은 인간이다. 그는 대중투쟁에서 언제나 현실도피적립장을 취하고 습관된 소작농생활에 오히려 믿음을 주면서 설익은 인생을 그대로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심리본질의 부패가 아니라 굳은 의식과 새로운 의식의 모순에서 초래된 락후였다. 사실 훨씬 수량 많은 군중일반은 몇마디 선동이나 행위를 통해 비약적으로 의식의 관념적전변을 가져올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들은 순결한 가치에 동화하려는 적극적자세를 갖추고있으면서도 문화의 제한성과 관습을 굳게 지키는 맹목적인 삶의 신조가 가장 돌출한 원인이 되여 자기의 생활과 의식에 새롭게 뛰여드는 모든것에 대해 경계하면서 청각만을 믿고 쉽게 새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의식이 서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한테 퍽 효과적인 자극은 감각되는 객관적충격이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충격도 그들로 하여금 새것의 신선함을 실감케하는것일 때라야만 그것을 자기의 삶의 질적추구로 긍정하게 되는것이고 그렇지 않고 객관적충격이 그들로 하여금 새것의 가능성에 어려움이나 묘연한감을 느끼게 할 때 그들은 곧 주저하고 동요하며 그것에 한사코 몸잠그려하지 않는다. 소설은 류인호의 형상을 통하여 이런 대중적심리를 반영하면서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켜 투쟁세력을 키우는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어려운것인가를 밝히고있다. 총적으로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는 주제, 제재 및 인물형상에서 력사적현실에 퍽 접근하면서 짙은 력사감과 진실감으로 흡인력을 높이고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결함도 없지 않다. 특히 이 글에서 론의된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유기적통일을 완성하는 문제에도 뚜렷한 흠집이 웅크리고앉아 작품의 예술성에 손색을 끼치고있는것이 퍽 아쉽다. 작자는 이야기엮음에 지나치게 열중한탓이였던지 성격창조에서 인물형상에 예술적의복을 못다 입힌채로 막을 내리우고말았다. 말하자면 사건발전과 결과에 따르는 인물성격발전의 내재적완정성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소설에서 비교적 성공된 형상이라 할만한 장검이의 형상마저 정신적인 성숙보다는 행동의 용감한 반복을 굵게 보이면서 성격발전의 근원적탐색은 고작 겉을 더듬었을따름이다. 그리고 추수투쟁, 춘황투쟁에 궐기한 버드나무골사람들을 보면 마치 외부적충격력, 이를테면 <<9.18>>사변과 다른마을 사람들의 투쟁에 감염되여 순전히 자발적인 반항에 떨쳐나선듯한 인상을 준다. 이것은 한영수를 비롯한 혁명자들과 열성자들이 농민들과 직접적으로 살바투 접촉하지 못하고있기때문이다. 다같은 소작농이란 이 점에서만도 그들은 생활에서 어차피 만나지 않을수 없을텐데 혁명자들은 혁명자들끼리만 생활하고 활동하기에 군중을 상대로 격세감이 없지 않다. 야학만 보더라도 황아장수의 입을 통해 버드나무골학교가 공산당에 장악되여 있다고 밝혀지었음에도 <<겨울>>이란 옹근 한장을 통해 대중의식을 각성시키는 활약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있다. 이런것들은 작자가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유기적통일을 완성하려고 애썼지만서도 끝내 채 완성하지 못하고 예술적종합처리에서 남긴 흠집이라고 보아진다. 그러나 소설은 어쨌든 력사적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태도와 개성짙은 인물형상군의 창조로 하여 예술의 천평을 무게있게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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