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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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인간의 한계와 깨달음의 미달 댓글:  조회:1690  추천:0  2020-03-25
온역(바이러스) 재난으로 얼룩진 인류력사를 조감해보면 인간은 재난을 비현실적으로 스쳐가는 악몽 쯤으로 속단해온 한계를 보여왔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럽을 초토화시키며 2,500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페스트 (흑사병)’가 발생하여 몇세기가 흘렀으나 재난에 대한 인간들의 생각은 크게 변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공화국사상 초유의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감염경로는 17년전 사스(SARS)의 감염경로와 너무 흡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는 똑같은 성격의 피해를 반복해야 하는 인식 한계의 반성과 더불어 바이러스와의 ‘장기 공존’이라는 큰 틀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겪은 온역(바이러스) 감염의 대부분이 동물 왕국에서 발원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페스트,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 인플루엔자, 에볼라바이러스, 메르스바이러스, 그리고 사스, 코로나19는 모두 인간과 동물의 불협 화음에서 유발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촌 포유동물바이러스는 천여종을 훨씬 릉가하며 코로나19만도 백여종이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오늘 이 때까지 인간에게 감염피해를 준 바이러스는 고작 ‘빙산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이제 천여종 동물바이러스가 또 언제 어떤 형태로 인간을 괴롭힐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바이러스 감염은 국경이 없다. 어디든 맞춤한 중간숙주(宿主)만 있으면 침투 가능하다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야생동물 교역과 도륙이 절제되지 못한 지역, 비위생적인 생활공간과 생태파괴로 변질된 야생동물 서식환경 그리고 인간들의 취약한 의지와 작태는 모두 바이러스 감염의 최적 과녁이 된다는 점은 이번 코로나19와의 대결에서 통감하고 있는 바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사건은 발생하는 게 아니라 초래되는 것이다. 모두 그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될 때 자연은 수용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자연은 가차없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린다. 자연은 인간의 사유 론리에 따른 그 어떤 생태훼손과 환경오염을 좌시하고만 있지 않으며 인간의 그 어떤 합리적인 변명도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스쳐가는 악몽’이 아니라 인간과 장기 공존하는 천적임을 인식하고 장기전에 대비한 우리의 한계와 깨달음을 리성화 시각에서 보완해야 한다. “적을 모르고 나만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지며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언제나 지고 만다.” 《손자병법》의 이 말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깨달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보아내고 바이러스라는 이 ‘적’과의 장기 공존 대치 국면에서 인간의 전략을 완벽화하는 것이야말로 ‘지피지기 백전백승’의 유일한 활로이다. 이번에 무한을 살리고 중국을 지켜내며 지구촌으로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우리 나라가 ‘장사가 팔목을 자르는 (壮士断腕)’ 비장한 결단으로 내놓은 슈퍼격리전략은 ‘적’의 침투경로를 파악한 토대 우에서 기획된 ‘지피지기’의 전민전쟁이다. 960만평방키로메터 광활한 국토에서의 전방위적 예방통제를 14억이 동참한 전면 격리 대안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이 거사를 두고 세계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 거사가 보여주는바 코로나19와의 인민전쟁이 승리로 이어질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바이러스와 장기 공존하는 우리에게 코로나19와의 이번 승리는 17년전 사스와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단계적 승리이며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 나라 국토에서 벌어진 초연이 없는 전쟁에서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 대신 전대미문의 생사의 벼랑에서 우리 사회 공중도덕의 재건, 타인을 존중하는 사회적 책임감의 육성, 사회관리 통제능력과 공중생활품질의 향상에 대한 절박감을 뼈저리게 통감하였는바 이것은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의외의 ‘청정제’라고 할 수 있다. “무한 힘내라!”, “중국 힘내라!”, 중국전역에서 메아리치는 이 격려의 웨침에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힘내라는 뜻이 내포됐지만 동시에 우리의 생태의식, 도덕의식, 보건의식, 공중의식 재건에서 힘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봐야 한다.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사회는 바이러스 ‘무풍지대’가 아니다. 하늘길, 바다길, 땅길이 전방위적으로 뚫린 ‘고속시대’를 영위해가는 연변은 이제 페쇄된 변강오지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는 대외개방의 전초기지에서 바이러스와의 장기 공존에 대치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민족대류동의 거센 흐름에 로출돼있는 조선족사회는 코로나19가 노리는 주요한 과녁이 될 수 있다. 이번 코로나19 무한 상륙에 대비해 연변과 산재지역 조선족사회도 자아진맥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만약 코로나19가 예고없이 우리 고장, 우리 사회를 급습했을 때 우리는 과연 능란하게 대응할 수 있을가? 우리 조선족 민중들은 과연 성숙된 자세로 타민족과 함께 ‘도시페쇄’, ‘전면격리’의 준엄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가?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그 어떤 바이러스의 침투에도 무난하게 대처하는 관건은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적시적으로 보완하면서 바이러스와의 ‘장기 공존’에 맞물리는 리성적인 자세를 갖춰나가는 것이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거쳐 새롭게 부각될 내 고향, 우리 조선족사회의 아름다운 래일을 그려본다. 길림신문
89    한국인의 ‘조선족 재인식’, 기류를 타려나 댓글:  조회:1904  추천:2  2020-01-07
일부 한국 언론의 구태의연한 조선족 비하 추태로 쌓인 불감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끔 SNS에 뜨는 한국인의 연변(조선족) 덕담 동영상을 시큰둥하게 대해왔던 필자였다. 연변의 어느 으슥한 골목가게에서 양꼬치, 순두부, 온면 맛에 완전히 넋을 빼앗긴 한국 ‘미식가’ 백종원씨의 동영상을 봤던 적이 있다. “감동이다, 감동! 어― 좋아라”를 련발하며 연변음식에 몰입하는 백씨의 동영상에 조선족네티즌들은 의외로 민망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표적인 멋진 음식점을 놔두고 하필 초라한 골목가게를 고른 프로그람 PD의 저의를 꼬집은 것이다. 물론 프로그람 취지에 대한 해명이 뒤따랐지만 ‘초라한 골목가게’가 일부 한국 언론의 빈축거리로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불편한 심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네티즌들의 민감한 반응에 필자 또한 공감되는 바가 없지 않다. 조선족사회가 리성화돼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였다. 그런데 일전에 SNS에서 만난 ‘연변덕담타령’은 필자를 사로잡았다. 덕담내용이 날카로와서였는지 아니면 덕담을 펼치는 한국 젊은이의 느긋한 자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순수함이 몸에 배여있는 조선족에 비기면 한국인은 싸가지가 없어요!”, “한국이 좀 나은 게 뭔데. 임금 정도? 꿈 깨! 조만간 따라잡혀!”, “돈을 벌면 연변에 가 살고 싶어. 왜서? 미래가 보이니깐!” 연변에서 보고 느낀 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면서 한국 젊은이가 제시한 결론적 키워드는 ‘한국인, 연변(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이다. 말 그대로 연변(조선족)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랭철한 반성과 복합시켜 ‘충격파(波)’의 급수를 높이고 있다. 맹목적인 한국 우월주의에서 파생된 조선족 매도행위를 이제 그만하라고 촉구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국인의 ‘조선족 재인식’이 기류를 타려나. 한국의 다른 한 젊은이가 3년전 조선족 안해와 함께 연변 초행길을 다녀간 후 토로한 고백이 떠오른다. “처음 만난 연길은 충격 자체였다. 한국의 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였다. 빌딩이 숲을 이룰 만큼 도시는 너무 발전해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연변에서 느꼈던 충격과 부끄러움 만큼 연변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족 재발견’이라는 량심저술을 기획하려 작심했다.” 한국의 편파적인 조선족 비하 여론에 세뇌돼온 것을 부끄러워한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론이나 한국 우월주의 망상론에 빠져온 ‘우물 안 개구리’ 의식을 버릴 것을 촉구한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인식’론은 모두 랭전사유로 고질화된 한국사회의 삐뚠 시각에 대한 용기 있는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석자 두께의 얼음은 하루아침 추위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민족상잔의 피비린 악연과 점철된 반목의 깊은 곬, 그 속에서 파생된 무지와 편견은 반세기를 주름 잡아왔고 거기다 한국 일부 적대세력의 외곡된 언론플레이로 지금까지도 진행형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두 한국 젊은이의 연변(조선족)에 대한 반성과 각성으로 복합된 량심선언이 비정상화된 연변매도여론의 얼음층에 균렬을 가하는 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가? ‘조선족 재인식’ 기류의 도래는 언론의 건강한 리드를 포석으로 한다. 페쇄된 환경에서 세상을 보는 창(窗)은 언론 한편, 영상 화면 한순간으로 커버될 수 있다. 연변에 대해 생면부지인 한국인들에게 《황해》나 《청년경찰》 같은 외곡된 영화 한부, 뉴스 언론의 연변 비하 화면과 보도 한편은 려과없이 한국인들한테 ‘연변인상가이드’로 작용된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악성루머라도 주요 언론의 전파나 지면을 타면 얘기가 달라지는 리유이다. 지난 80년대 초반까지 연변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인간생지옥’이였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남조선’을 료해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페쇄된 그 당시 여건에서 어느 해외월간화보 안표지에 시리즈로 실리군 하던 ‘남조선’의 처참한 사진화면은 끔찍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었다. 어느 년대의 사진인지는 몰라도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인민들의 참상”은 액면 그대로 연변사람들 머리 속에 각인되였었다. 그런데 그 같은 상황이 오늘과 같은 열린 세상에 한국판으로 재연되는 게 아닌가 싶다. 랭전시대 페쇄된 적대리념공간에서 만들어진 외곡된 ‘연변(조선족)관(观)’이 중한 수교 30년을 바라보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악성바이러스로 류포되여있어 마음이 무겁다. ‘조선족 재인식’ 기류의 정착은 대승적인 혜안으로 함께 만들어가야 할 사안이다. 우선 한국사회는 ‘조선족’이라는 이 무거운 ‘방정식’을 가벼운 산수문제로 착각하지 말고 리지적이고 명석하게 풀어야 함이 요청된다. 이 방정식은 80만 재한 조선족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체를 포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한 21세기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교두보인 중국조선족공동체와 직결되여있다. 일부 언론에 의해 잘못 끼워진 방정식의 첫 단추를 ‘조선족 재인식’ 차원에서 다시 끼우는 것만이 현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다음 연변(조선족)도 ‘조선족’이라는 우리 ‘자화상’을 다시 면밀히 뜯어보고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연변은 무릉도원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동북아의 명주로 부상하고 있는 매력적인 고장이고 조선족도 ‘백의민족’의 순결함으로 국내에서 우러르는 우수한 민족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세계 속의 연변(조선족)으로 도약하는 길은 아직 멀다. 특히 오래동안 중국에서 살아온 재한 조선족 근로자들이 한국사회의 질서와 정서에 익숙하지 않아 불협화음을 초래할 수도 있고 또 극단적인 일부 조선족들의 불량한 행위가 한국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조선족 전체의 이미지를 더럽히고 있음을 좌시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조선족 스스로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조선족 재인식’을 통해 연변(조선족)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는 것은 한국사회의 몫이지만 조선족을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과 자세는 조선족이 껴안아야 할 몫이다. 우리는 자신감과 더불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시각 ‘매력 있는 중국 도시, 신선한 연변’ 방송프로그람이 CCTV-2 채널을 통해 세계로 전파를 타고 있다― 독특한 지리적 위치, 신선한 생태자원, 다양한 민족음식, 활기찬 인문세태, 신명 나는 사물놀이 가락 속에서 자치주 부주장이 춤사위를 날리며 패널과 사회자들과 어울려 만들어가는 흥겨운 향연 한마당… 이 모든 것이 결코 스크린이 아닌 오늘날 조선족 삶의 현주소임을 세상이 피부로 느낄 때 한국의 ‘조선족 재인식’ 기류는 급물살을 탈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 CCTV무대에서 전세계를 향해 선언한 연변의 ‘슈퍼 가이드’ 박학수 부주장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연변에 오지 않으면 한평생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연변에 오셨다면 한평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길림신문
88    언론 관련 세가지 화제 댓글:  조회:1725  추천:0  2019-11-21
첫번째 화제다. 지난달 한국에 잠간 체류하면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다. 서울 어느 구청 관할 공원 속에 자그마한 도서관을 지었는데 워낙 공원안에 그 어떤 건물도 못 짓게 한 시청의 규제에 어긋나 당장 헐리우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런데 ‘공원 속의 작은 도서관’을 격찬한 미국언론지의 기사 한편이 나가면서 반전상황이 벌어진다. 서울시청의 태도가 바뀌더니 원래의 규제를 뒤집고 한술 더 떠 서울시 모든 공원 안에 도서관을 짓게 했다는 것이다. 서방의 언론기사 한편에 주권국가의 도시건설법규가 뒤집혔다는 말을 들으면서 물론 언론의 힘에 수긍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 국내 언론이 이런 기사를 냈을 때 서방언론처럼 깍듯한 존대를 받을 수 있었을가? 그리고 서방언론지가 ‘공원 속의 작은 도서관’을 생태훼손구조물로 타매했더라면 또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가? 서방언론은 무조건 정확하다? 문득 김학철 선생의 라는 잡문 제목이 떠오르면서 씁슬한 마음이였다. 두번째 화제다. 우리 나라 향항 폭력시위가 여섯달을 지속하면서 향항경제는 엄중한 파괴를 입고 있다. 제3분기 향항GDP는 동시기에 비해 2.9% 하락되였고 관광수입은 34.2%나 줄어들었으며 향항의 금융중심과 상업무역 시스템은 마비상태에 놓였다. ‘한나라, 두 제도’에 도전하고 향항을 다시 서방세력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려는 시도하에 폭력시위대가 서방세력과 결탁하여 만들어낸 향항의 현주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향항 폭력시위가 서방 일부 나라에서 ‘향항경험’으로 추앙되면서 자기 나라의 반정부 폭력사태로 격화되자 지금껏 향항경찰과 향항정부 나아가서 중앙정부 비난으로 일관해왔던 서방언론들이 비난수위를 낮추면서 시위대와 경찰이 모두 자제하라는 애매모호한 쪽으로 가닥을 잡는 촌극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화소신(引火烧身)의 따끔한 덴맛을 자초한 셈이다. 그런데 서방언론과 줄곧 호흡을 같이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언론의 향항사태에 대한 편파적이고 외곡된 보도는 그 수위를 계속 이어가 눈살을 찌프리게 한다. 한국언론의 눈에는 중앙정부기구와 신화통신언론 기구를 습격하고 공공시설을 무차별 파괴하고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활을 쏘아대고 무고한 시민을 집단구타하는 복면폭력분자들의 횡포는 ‘아름다운 풍경선’이고 폭력행위를 제지하고저 피를 흘리는 향항경찰의 집법노력은 정당방위를 벗어난 ‘폭력진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언론의 행위가 우려스럽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나라에서 경찰들이  당지의 폭력시위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너무나 잘 아는 한국언론이 제발 남의 나라 도심에서 이중자대의 씨나리오로 초라한 연극을 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번째 화제다. 일전에 언론사의 한 리더로부터 글로벌시대의 중국조선족사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가기 위해 조선족언론인단체 같은 공동체를 결성하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연변을 주요 집거지로한 동북3성 조선족전통 거주구도는 오늘날 한국, 일본을 비롯한 해외와 국내 여러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파급된 세계화 거주구도로 변화하고 있다. 중국조선족 180여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해외와 국내 여러 곳에 정착하고 있는 현실에서 조선족사회는 서서히 이에 걸맞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중국조선족기업인협회의 발족으로 전국 여러 지역 조선족기업인협회를 포섭한 조선족기업인 공동체가 구성되여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 영향력과 구심점을 살려나가 주목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밖에 조선족의 국제화 거주구도를 겨냥한 연변작가협회가 조선족작가협회 공동체기능을 살려 청도, 장춘 등 조선족산재지역에 작가협회 지역분과위원회를 건립한 데 이어 재한 조선족문인협회와 손잡고 재한 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를 오픈한 것이다.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조선족사회는 현재 연변을 중심으로 동북3성에 구전한 다매체 조선족언론공동체를 보유하고 있지만 변화하고 있는 조선족 거주구도에 령활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있다. 올여름 한 재한녀성의 막말망언을 미끼로 한국 일부 언론이 벌린 조선족 매도하기 촌극이 한국사회를 시끄럽게 했을 때 중국조선족언론인협회가 있었더라면 보다 성숙되고 대승적인 차원의 조직체계에 기댄 언론의 목소리를 주도할 수 있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별단체가 아닌 굳건하게 다져진 언론인련맹의 힘이 요청될 때이다. 조선족사회가 계속 변화의 바람받이에 로출돼있는 오늘날 우리 조선족사회를 지켜내고 결집시키며 우리 민족 언론인들의 력사적 사명감과 소임을 확실시하는 일은 당연히 명실상부하게 그 구실을 해야 할 조선족언론인 공동체의 몫이 될 것이다. 이 또한 우리 나라 민족정책의 포용으로 만들어져야 할 글로벌시대 중국조선족의 멋진 도약을 위한 대안이 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연변일보 
87    애국과 점철된 민족정감 댓글:  조회:1912  추천:2  2019-09-27
일전에 리덕수 전임 로주당위 서기를 모신 자리에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 국가지도자 한분이 타성으로 사업시찰차 연길에 잠간 들려 리덕수 서기와 독대하여 면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동북국 서기로 몸담고 계셨던 분이라 동북지역 특히 연변조선족의 혁명투쟁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기에 연변조선족은 혁명렬사가 많고 참군인수가 많으며 당원인수가 많고 혁명간부가 많다는 등 조선족에 대한 리덕수 서기의 소개에 깊이 공감하면서 리덕수 서기의 손을 잡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결국 5분으로 제한됐던 두분의 면담이 1시간을 훌쩍 넘긴 그 자리에서 리덕수 서기는 오랜 기간 그릇된 사건으로 조작되여 조선족의 이미지에 오점을 남겼던 ‘민생단사건’에 대해 국가차원에서 바로잡아줄 것을  간곡히 바랐다고 한다. 이 면담을 계기로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사건에 대한 중앙의 시정결책이 해볕을 보게 된 것이다. 1930년대초에 동만지역 중국공산당조직과 혁명대오내에서 벌린 그릇된 ‘반민생단 투쟁’에서 ‘민생단분자’로 몰려 사형당한 조선족 항일투사는 500여명이나 되며 그 가운데 현급, 퇀급 이상의 간부가 40여명이나 된다. 조사결과 이들 가운데 실제 증거가 있는 ‘민생단분자’는 단 한사람도 없고 이들 대부분은 항일투쟁의 골간들이였다고 《항일련군 제1로군 략사》는 밝히고 있다. 이 사건은 오래동안 제1대 조선족혁명가와 ‘민생단’ 문제로 박해를 받아온 조선족간부와 그 가족들의 마음속에 맺힌 한이였다. 여러가지 민감한 여건이 얽혀져있어 자칫하면 ‘민족주의’ 혐의를 받을수 있는 반세기 전의 억울한 정치적 비극이 한 조선족지도자의 결백한 정치적 안목과 실사구시의 용기에 토대한 민족정감의 힘으로 려명을 맞은 것이다. 모든 것은 시기가 있다. 만약 그때 이 사건을 바로잡지 못했다면 어느 때까지 력사의 뒤안길에서 안타까운 ‘20세기 30년대 사건’으로 잠자고 있을지, 또 저세상으로 간  500여명 항일투사, 련루된 모든 이들, 그 가족들의 한을 풀어드리지 못한 그 무거운 숙제를 언제까지 짊어지고 가게 되는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많은 사건들은 흔히 고립적이 아니고 다른 엄청난 큰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련계되여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필자는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사건을 바로잡은 의의는 1931년  ‘9.18’사변 이후 중국조선족이 기타 민족과 어깨겯고 일제와의 피어린 항쟁을 벌려온 동북항일무장투쟁의 불멸의 업적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전기로 된다고 생각한다. 이 전기가 생기면서 또 다른 획기적인 사변이 이어진 것이 아닐가? 로홍군, 로항일련군의 ‘영원한 조선족 녀전사’ 리민이 “항일련군의 력사를 후대들에게 전승하는 것을 후반생 최대의 꿈으로 간주”하며 눈을 감는 그날까지 항일련군과 동북항일무장투쟁사의 살아있는 전설로 의무전파자로서의 멋진 활약을 보여주면서 이룩해낸 장거는 우리 나라가 재래의 8년 항전을 14년 항전으로 바로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였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중국의 항일전쟁 서막은 1937년 7월 7일 북경 ‘로구교사변’이 아니라 1931년 ‘9.18’ 사변 후의 동북항일무장투쟁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자기 민족혁명력사를 망각하는 것은 선렬들에 대한 불충이며 공화국에 대한 불충이다. 그런데 요란한 호소나 따분한 설교가 아니라 자신의 선행으로 뭇사람들에게 주는 차분한 감동이 가장 좋은 해설자로 되고 있음을 실생활에서 많이 느끼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민족의 자랑찬 혁명력사를 대대손손 전승하고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공화국 충신들이 많다. 이번에 공화국 창건 70돐에 즈음하여 당중앙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 영예칭호를 수여받은 왕청현 일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이 바로 이 같은 인물이다. 필자는 김춘섭에 대한 중앙의 평가 글에서 핵심 포인트가 ‘항일련군’임을 주의 깊게 보았다. 오랜 세월을 하루와 같이 ‘항일련군 영웅선렬들의 업적 발굴에 집착하고 항일련군 력사유적지 재현에 몰두하며 항일련군의 위대한 정신 전파에 혼신을 불살라’온 김춘섭, 그는 로홍군, 로항일련군 조선족  녀전사 리민이 생전에 말한 “항일련군의 력사를 후대에게 전승하는 것을 후반생 최대의 꿈으로 간주”하련다는 그뜻을 이어가고 있는 많고많은 인물중의 한사람이다. 하나의 선행은 다른 선행을 부른다는 도리를 실감케 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선행의 사례 또한 그 부름을 계속하는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필자는 경건한 마음으로지켜 보고 있다. 그중 한사람, 필자는 본인이 이름을 감추고 실천하는 이 선행의 진가를 지켜주고저 이름을 묻으려 한다. 일찍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조선족문학의 거장인 김학철옹이 평전을 비롯하여 그 많은 저서중 단 한권의 한어문도서도 출간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직접 나서서 출판비용을 마련해 김학철옹의 첫 한어문도서 《철 협장으로 찍어낸 발자취(铁拐下的足迹)》를 출간한 데 뒤이어 일전에는 역시 본인이 출판비용을 구하여 ‘항일련군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김춘섭의 업적을 다룬 실화문학집 《동만항전 발자취를 추적하는 로병(一个追寻东满抗战足迹的老兵)》을 한어문으로 출간해냈다. 조선족의 항일투사들은 물론 조선족사회가 알아야 하지만 중국 주류사회가 알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조선족을 타민족에게 알리기’ 선행을 조용히 벌려가게 한것 이다. 참으로 이름을 감춘 착한 사람이 해놓은 일은 땅속에 숨어 흐르며 남몰래 땅을 푸르게 해주는 수맥과도 같다고 한 어느 명인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전임 주당위 서기 리덕수, 로항일련군 전사 리민,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 김춘섭, 그리고 선행으로 감동을 주는 ‘무명’ 씨는 물론 그 신분과 경력은 다르지만 모두 따뜻한 민족정감과 드팀없는 애국주의 신념이 확실하게 점철된 공화국 충신들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지 않을가 느끼는 바이다. 이런 이들이 있어 조선족사회는 아름답고 중화 대가정에서의 매력도 돋보이리라 생각한다. 연변일보 
86    민족언어문자생태와 조선족의 의무 댓글:  조회:1991  추천:0  2019-08-02
7월도 다 가는 어느 날 저녁, 연길의 한 음식점. “지금부터 한어를 섞어 말하는 분에게는 벌주 한잔씩 안기는 게 어떻습니까?” “?!” 유명한 조선족 공군장교 리광남씨가 자기를 위해 마련한 저녁식사장에서 난삽한 조선말사용 행태를 보다 못해 내놓은 건의에 필자와 그 자리에 동참했던 이들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상이 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시중의 화제로 돼있는 조선말간판과 관련해 모두들 잔뜩 격앙된 표정으로 우리말 오염, 유린 실태를 고발하는 것까지는 근사했는데 정작 고발자들이 구사하는 용어는 정제되지 못한 불결한 언어였기 때문이였다. 말마디 사이에 한어가 섞여 언어오염과 언어유린을 질타하는 우리 자신이 언어오염을 자행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야말로 감염환자의 오염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칼이 전혀 소독이 안된 병균투성의 수술칼이여서 문제의 감염부위는 도려냈지만 더 한심한 새로운 바이러스를 심어놓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자리는 흥겨운 식사장이 아니라 우리 말 사용실태를 점검하는 준엄한 시험장 그 자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언어 사용이 기본테마로 되였고 그 ‘시험관’은 리광남씨였다. 직업군인이 민족언어사용점검 “시험관”이라니? 하지만 그는 자격을 갖춘 분이였다. 우선 그날 저녁 언어사용 ‘벌주’에 걸리지 않고 무사통과한 유일한 ‘순결파’였다. 그리고 그가 북경정치협상회의를 비롯하여 많은 공식석상에서 중앙과 지방 지도자들과 나눈 담화를 전해들으면서 필자는 그가 군부대가 아니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대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 그의 스마트폰에는 그가 연변 거리 곳곳에서 촬영한 오역되였거나 엉망이 된 조선문간판과 도로표시판 영상화면이 가득 소장되여있어 수시로 관계자들에게 꺼내보이며 책임을 호소하는 소재로 쓰이고 있었다. 그는 정부관계부문 책임자를 무색케 하는 ‘감독관’ 같았다. 식사장에서 평상복 차림의 리광남씨가 필자에게 준 인상은 우리 나라 유명한 공군장교이기에 앞서 사명감높은 민족간부였다. 민족자치주의 민족언어생태는 민족자치주 생존발전의 청우계라 할 수 있다. 량호한  민족언어생태의 보호는 두가지 함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권리이다. 모든 조선족구성원들이 자기 민족언어 사용을 의무화하며 적어도 연변경내에서만은  조선족이 제 민족 언어를 써야 하고 쓸 수밖에 없으며 쓰지 않으면 안되는 ‘철 같은 규제’에 의한 민족언어 사용의 긍정적인 풍토가 정착하게 하는 것이다. 의무의 리행이 없으면 성장이 있을수 없다. 의무리행의 주체는 조선족민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필자가 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족끼리의 술자리에서 한어를 섞어 말하면 ‘벌주’하는 식의 견제가 물론 방법상 틀린지는 몰라도 우리 언어사용의 불결한 관행을 수습하고 우리의 그 어떤 의무감을 심어주는 강심제로 될 수만 있다면 나쁠 것도 없지 않을가?  어른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조선족구성원 모두가 우리 말 사용을 의무화하는 그날이자 우리 민족언어생태의 순결함이 현실화되는 날이다. 소수민족의 자기 민족 언어사용은 우리 나라 헌법이 소수민족에게 부여한 권리이다. 자기민족 언어문자를 쓰는데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조선글 현판 정리정돈이 우리주에서 급물살을 탈 때 관내의 일부 타민족 네티즌들의 망언, 그리고 이른바 꽤 많은 ‘팬’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유명학자’가 조선족의 민족언어문자 사용을 두고 내놓고 사이트에 조선족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이 같은 괴상한 유론을 발설한 인간이 어떻게 ‘유명’계관을 썼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이 같은 자들이 헌법을 짓밟고 내뿜는 독소에 우리 조선족들이 주눅이 들어 나라가 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너무 넌센스하다. 권리를 용감하게 주장하는 자가 권리를 갖는다. 물론 훌륭하게 리행된 의무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리는 가질 가치가 없다. 일전에 연변지역 여러 곳의 도로표시판 조선글들이 엉망으로 표기되여 국내외 손님들에게 연변의 망신스런 언어 코미디 풍경을 선보인 적이 있다. 대단히 한심스런 부정적 사건임은 분명했지만 그 대신 광범한 조선족 민중의 질타가 인터넷을 도배하면서 사회의 긍정적 반발을 불러오는 기꺼운 양상이 펼쳐져 정부 관계부문을 촉구하는 사태로 이어진 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수확이라 하겠다. 결국 정부 관계부문이 도로표시판을 교체하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일단 상황 수습은 됐지만 그 련동효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번 일로 주조선어문사업판공실 사이트는 1만여편의 조선어 틀린 간판제보 댓글이 문전성세를 이루었고 올해 년초부터 조선언어문화진흥회가 벌린 ‘불합격간판 촬영제보상 응모’ 활동은 요즘 들어 제보자들의 응모작품이 진흥회 게시판을 쇄도하고 있다. 며칠전에는 조선언어문자 시중용어물 중점피해지역인 연길시가 드디여 동원대회를 가지고 자치주 수부도시 시중 조선언어문자간판 ‘소버짐’ 척결의지를 보여주어 우리 모두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하고 있다. 필자는 조선언어문자 순결성을 지키려는 우리 사회 조선족시민 의식이 아직 퍼렇게 살아있음을 실감하면서 흐뭇한 마음을 삭일 수 없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형성된 기꺼운 국면은 이에 힘입은 자치주정부의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주문하고 있다. 주안의 몇몇 도로표시판은 로출이 뚜렷하기에 보아내고 인차 교체할 수 있지만 잠복돼있는 용어물, 그리고 별도의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제작된 조선언어문자 오염 대상물은 물리적인 치료와 더불어 정신적인 치료가 병행돼야 하는 줄 안다. 꽤 오래 지연돼온 조선언어문자 생태의 부끄러운 감염부위를 아프더라도 예리한 수술칼로 대담히 들어내야 한다. 특히 우리의 조선족 지도간부들이 리광남 공군장교처럼 민족언어문자를 지켜나가는 굳은 사명감과 실천력을 보여줄 때 우리 고장은 부끄러운 민족언어 생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매력적인 중국조선족언어문자의 미래를 위한 건설에서 커다란 탄력을 입으리라 생각해본다. 연변일보 
85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을 두고 댓글:  조회:2247  추천:2  2019-04-22
“지난 8월 처음으로 연길에 가게 되였다. 솔직히 어린 딸애를 데리고 떠날 때까지 엄청 무서웠다. 연길은 영화 ‘황해’의 한 장면처럼 시장바닥에 개를 끌고다니는 락후한 모습에 인신매매에 걸려 장기라도 적출당할거 같은 범죄천국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처음 만난 연길은 충격자체였다. 한국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였다. 빌딩이 숲을 이룰만큼 도시는 너무 발전해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조선족안해를 둔 한국 젊은이가 연길초행길을 두고 언론에 터놓은 솔직한 마음의 고백이다. “연변에서 느꼈던 충격과 부끄러움만큼… 연변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족 재발견”이라는 “량심저술”을 기획하기에 이른 한국 젊은이한테서 필자는 신선한 감흥을 느꼈다. 연변을 다녀온적 없는 대부분 한국인들이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리해는 백지화수준이라 할수 있다. 민족상잔의 피비린 악연과 점철된 반목의 깊은 곬, 그속에서 파생된 무지와 편견은 반세기를 주름잡으며 지금까지도 진행 형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고있다. 연길에서 10여년 살아온 “연변통” 한국기업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한국친구를 연변으로 초청했는데 처자식은 물론 한국의 대부분 사람들이 “연변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가느냐”며 극구 말리더라면서 “연변에 한국인을 전문 납치하여 눈, 간, 심장 등 장기들을 적출해 팔아먹는 범죄집단이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말에 너무 기가 차서 까무러칠뻔 했다고 한다. 더 한심한 것은 이같은 악성 루머를 영상화하여 연변과 조선족을 매도하는 여론의 앞장에 서서 한국사회의 삐뚠 시각을 가시화 하는 한국 일부 언론의 저의가 의심스러울수 밖에 없다. 연변에 지점장으로 부임된 한국인 한분은 연변을 공포지역으로 알고 발령 받는 순간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했는데 와서 지내며 보니 여기처럼 안전하고 살기좋은 곳이 없다고, 오히려 한국보다 더 안전하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들며 왜 연변이 무시무시한 고장으로 소문났는지 모르겠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2년 전 필자도 오랜 고민끝에 연변행을 작심하고 떠나온 처가편 한국 친척분들과 함께 할수 있는 기회를 가진적이 있었다. 며칠간의 연길체류에서 보여준 한국친척분들의 충격적인 반응과 믿기지 않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들이 얼마나 한국사회의 조작되고 왜곡되고 부풀어진 여론에 세뇌되여 왔는지를 알것 같았다. 페쇄된 환경에서 세상을 보는 창은 언론 한편, 영상화면 한순간으로 커버될수 있다. 연변에 대해 생면부지인 한국인들에게 주류매체가 만들어 내는 영화 “황해”나 “아수라”, 드라마 “신세계”, 뉴스언론에서의 연변비하 화면과 보도는 려과없이 한국인들에게는 연변인상 가이드로 작용된다. “국민의 알권리”를 그처럼 강경하게 표방하는 한국 일부언론이 랭전시대의 진영론 사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연변과 조선족을 제멋대로 우롱하고 릉멸하는 추태에 마음이 무겁다. 지난세기 80년대 초반까지 연변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인간 생 지옥”이였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 당시 “남조선”을 료해할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조선의 간행물과 영화가 전부였다. 어느 월간 화보에 실리군 하던 남조선의 처참한 사진화면은 끔찍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었다…. 가물로 쩍쩍 갈라터진 논밭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초췌한 모습의 농부, 깡통을 차고 거리를 류랑걸식하는 소년거지, 허름한 판자집으로 덮힌 빈민 굴동네…, 어느 년대의 사진인지는 몰라도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 인민들의 참상'은 액면 그대로 우리 머리속에 각인되였었다. “국민의 알권리”가 철저히 유린되였던 세월의 징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같은 상황이 오늘날 한국판으로 재연되는게 아닌가 싶다. 랭전 시대 페쇄된 적대리념공간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연변관(观)이 중한수교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악성바이러스로 류포되면서 “범죄천국” 으로 요괴화되고있음을 한국젊은이의 고백이 실증하고있어 가슴 아프다. “연변의 모습은 한국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였다”고 까밝힌 한국젊은이의 말은 한국국민을 바보취급하는 한국 일부언론에 날린 경고메 세지라고 생각한다. 연변은 무릉도원이 아니다. 하지만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동북아의 명주로 부상하고있는 매력적인 고장이라는 점은 객관적 사실로 세인들 앞에  드러나있다. 일부 한국언론이 연변을 “인신매매”와 “장기적출”이 성행 하는 “범죄천국”이라고 릉멸하는 무모함에서 그들이 표방하는 “국민의 알권리”가 얼마나 허황하고 창백한가를 보여줄뿐이다.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이 더많은 한국인들의 연변행에 긍정적 에너지로 되면서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오해가 깨끗히 세척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흑룡강신문
84    봄바람이 불어오면 또다시 되살아나리라 댓글:  조회:2117  추천:0  2019-03-14
전례없는 최악의 ‘들불’이 생기로 넘치던 연변프로축구 동네를 강타하였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재앙에 연변, 나아가 조선족의 ‘제1효자’ 연변축구팀이 처참하게 해체되면서 연변과 조선족사회는 억울함과 비통함으로 통곡하고 국내 축구계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 ‘들불’이 자연발생적이 아니고 인위적인 요소로 야기된 것이여서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재앙은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것 같지만 기실 인간 자신이 심어놓은 재앙의 불씨가 예고된 참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고금중외의 정설이다. 프로축구 26년, 연변축구팀의 영욕으로 얼룩진 그 려정의 발자취를 조감해보면서 필자는 이번 일이 지난 동안 우리가 무심히 대해왔던 강등, 매각과 같은 불미스러운 악성 ‘사고’덩이가 반죽, 응고되면서 초래된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이번 사태 저변에는 분명히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대한 자신의 치명적인 틀린 인식에서 배태된 위험징후가 ‘재앙의 불씨’로 잠복해있었다. 중국프로축구가 출범했던 1992년 갑B에서 갑A 그룹으로 승격한 연변축구팀의 스타트는 누가 봐도 산뜻했다. 하지만 연변은 미지의 프로축구에 대비한 전략적 안목과 나타나게 될 위험에 대한 사전준비가 되여있지 않았다. 그 위험은 90년대말 서서히 표면화돼가고 있었다. 프로축구 초창기를 주름잡으며 화려한 전력을 자랑하던 연변축구팀이 2000년에 들어서면서 삐꺽거리는가 쉽더니 갑A 에서 갑B로 강등된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이건만 기다렸다는 듯 이 구단을 매각해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축구고향’에서 어이없이 벌어진다. 연변팀을 할수없이 남방 ‘부자집’에 ‘입양’보낸 당시 이 일은 구단을 천금 같은 자식이 아니라 서커스단의 재간둥이 정도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이 깔려있었음이 드러난다. 연변축구 사상 처음으로 빚어진 구단 “매각”사건은 아무 때 건 “잘 나가면 내 자식이고 못 나가면 버릴 수 있다.”는 의식이 ‘재앙의 불씨’를 키우게 한 초유의 위험징후라 할 수 있었다. 그 징후의 연장선에서 2018년의 사태가 터졌다고 생각한다. 2년간 버티여온 슈퍼리그에서 강등되여 갑급리그로 추락하고 합작파트너와의 불협화음이 지속되면서 구단은 최악의 참사 초읽기에 들어간다 ㅡㅡ 2017년부터 부덕그룹은 연변팀에 자금투입을 할 수 없게 됐고 그 후 련속 2년간 연변은 주력선수 매각, 중국축구협회의 배당금, 입장표 수입과 성, 주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을 유지해 왔다. 한심한 ‘합작’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2017년부터 부덕그룹은 연변측에 쌍방의 합작을 중지하며 “더 이상 구단에 자금투입을 할 수가 없고 모든 채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 후 연변은 수차례 “부덕측이 부분적 세금미납금액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축구구락부의 경영관리권을 연변에 위탁관리”하게 해달라는 방안마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부덕에 보기 좋게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이다. 심수부덕과의 합작에서 결별까지는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년 반 합작, 1년 반 결별분쟁) 동기와 내막은 어떠하든지간에 연변이 부덕과의 합작은 실패 그 자체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부덕은 웃으면서 연변에 접근하여 작정하고 ‘법적합리화’로 실리를 챙기면서 구단을 해체에까지 몰고갔다는 게 필자의 소견이다. 6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연변축구팀은 그 어려운 여건에서도 오뚜기처럼 완강히 살아버티면서 중국축구의 전설로 존재해왔는데 부덕과의 합작에 결국 구단 해체를 맞게 된다. 부덕과의 합작은 예고된 불행이였다. 이번 사태의 책임소재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적어도 부덕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전국 유일 소수민족구단을 해체시킨 장본인으로서 그 륜리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연변도 ‘축구팀 해체’라는 재앙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부덕과의 계약시말, 세금체납내역, 구락부 부실 경영 등 구단해체와 관련된 모든 책임들은 낱낱이 드러나야 연변프로축구 재기의 가능성이 열린다. 연변팀의 해체가 부덕과의 비틀린 합작에서 비롯됐고 세금체납 2.4억원이 연변팀 해체와 점철됐어도 결정적요인은 구단의 존재 가치에 대한 우리 연변 ‘모성애’의 증발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2018년 ‘구단해체’는 2000년 ‘구단매각’의 전철을 밟고 태여난 복사판으로서 그 사상적 토대는 “잘하면 내 자식이요 못하면 버린다.”는 ‘포기론’에 있다. 천금 주고도 못 바꾸는 내 자식이라면 억울하더라도 2.4억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액수여도 일단은 위험에 로출된 자식을 구해놓고 볼 일이지 ‘해체’까지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64년 경력을 자랑하던 연변프로축구팀은 이미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연변축구는 한겨울의 된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연변부덕팀의 해체로 연변축구의 산맥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프로축구 26년 만에 벌어진 연변축구의 일대 사태가  전반 우리 주와 전국의  축구팬들에게는 값비싼 ‘수험료’가 되여 우리 자신을 랭철히 점검해보고 우리의 기존의 고루한 사고 방식을 바로잡는 계기로 된다면 연변프로축구팀의 재건과 연변축구 새 전설의 탄생은 시간 문제일 뿐일 것이다. 부덕축구팀은 해체됐어도 전국 일류의 축구 생태, 인문 환경, 전국 일류의 천부적인 축구민족의 건재, 전국 일류의 사랑스러운 축구팬 군단을 갖춘 축구고향 연변은 퍼렇게 살아있다. 우리에게는 프로축구 26년 중국축구무대를 풍미하며 위용을 떨쳤던 ‘동북호랑이’의 ‘신뢰축구’, ‘투혼 3력’, ‘강호킬러’로 특징지어진 비대칭 전법의 정신유산이 광채를 빛내고 있다. “휘몰아치는 들불에 죄다 죽을 리 없거니 봄바람 불어오면 또다시 되살아나리라.” 연변축구는 지금 분명히 차거운 한겨울의 추위에 로출돼있다. 하지만 겨울이 왔는데 봄이 멀겠는가? 이제 차거운 한파로 억울하고 비통했던 울화를 식히고 리성을 되찾으면서 밑바닥 부터 차분히 점검하여 차곡차곡 쌓아나간다면 화창한 봄이 우리를 맞을 날은 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부터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는 산적해있다. 우선은 자치주 고차원의 연변축구 재기를 위한 진지한 토론의 한마당으로 연변축구 재기 장, 중, 단기 목표를 제정하고 구체적인 시행 대안을 출범시켜야 한다. 자치주정부의 통 큰 축구 부축 정책의 발족과 중앙, 성의 소수민족축구 발전을 위한 우대정책 쟁취, 유능한 구락부 경영인재의 발굴과 능률적인 축구발전 전문가 시스템의 가동, 신뢰있는 합작 파트너의 선택과 다각적인 축구 발전기금 유치, 프로축구의 맥락을 항구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한 인프라 건설과 청소년 후비력량 양성 체계의 완벽화…, 이 모든 프로젝트의 완성은 결국 자치주의 지도 계층과 관련 행정 부문 그리고 축구 전문가들의 인식에서 매듭짓게 될 것이다. 이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들불이 휩쓸고 지나간 연변프로축구 터전에 완강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새로운 ‘연변 프로축구’의 싹이 되살아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연변일보
83    중국축구의 전설로 댓글:  조회:2817  추천:1  2019-02-15
     연변축구는 지금 원정의 길에 있다. 이 길에는 영광과 더불어 부진, 추락, 강등의 시련이 가로놓여있다. 중국축구의 전설로 반세기를 엮어온 연변축구는 죽지 않고 특이한 생명력을 만천하에 과시할것이다.   일전에 아시안컵 대 이란전에서 중국이 이란에 0:3으로 참패당한후 주장 정지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됐다고 느끼면서도 한편 으로는 그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가 궁금했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나 팬이 쏟아내는 눈물은 각이한 색갈의 의미를 도출한다. 통한의 눈물, 환희의 눈물, 분노의 눈물, 속죄의 눈물…   정지의 눈물을 보면서 필자는 2014년 10월 11일 광동황포경기장에서 연변팀의 강등을 통탄하며 경기장이 떠나가라 대성통곡하던 나젊은 조선족 축구팬을 떠올려본다. 남몰래 질질짜는 눈물이 아니라 보란듯이 남자의 울음을 한바탕 터뜨려 연변축구의 동산재기(东山再起) 의지를 확인시켜준 그 울음이 하늘을 감동시켜였을가? 3부리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줄 알 았던 연변팀이 기적처럼 살아나 권토중래(卷土重来)를 연출하고 하루 아침사이에 2부리그를 호령하는역전의 “호랑이”로 돌변하더니 갑급리그 챔피언을 거쳐 슈퍼리그에 상륙하는 기막힌 반전드라마가 탄생되지 않았 던가? 정지의 눈물이부진의 징크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국가팀에 환생의 기운을 불어넣는 청량제가 됐으면 좋으련만.   이번 아시안컵 경기는 지난 2018년 로씨야월드컵아시아 최종예선 경기와 더불어 우리 나라의 프로축구 실태를 검증받은 무자비한 시험대라 할 수 있다. 세계에서 둘도없는 금원투입으로 포장되고 선발된 어마어마 한 몸값의 기형적인 “스타”선수와 초특가 양감독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국가팀이 실패작임이 이번 검증에서 드러났다.   이 시각 지난 60년대 부진에서 헤여나오지 못하는 국가팀 대신 길림 축구팀(지금의 연변팀)을 수도로 불러들여 유럽강호와 대결하도록 한 하룡 원수의 “비상대책”용단이 필자의 머리를 스친다. 그번 국제경기에서 무승부 결과를 이룩해낸 연변팀을 세계는 경이로운 눈으로 주목하였었다. 오늘 날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만약 국내 프로축구제후(诸侯)팀들에 산재해있는 조선족 스타선수들을 전부 불러모아 “중국조선족대표팀”을 묶어 국제강호와 대결시킨다면 결코 만만찮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며 이런 경기가 현유 국가팀에게는 충격적인 “교학용 경기”가 될수 있지 않을가?   50년대부터 지금까지 연변축구와 함께 해온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연변축구가 우리 나라에서 어떠한 존재인가를 잘 알고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한다.   이 땅에 정착하여 150년 세월 중화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은 렬악한 환경에서개척의 력사, 항쟁의 력사, 건설의 력사를 엮어오면서 부지런하고 슬기로운 민족으로, 용감하고도 불요불굴한민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연변축구에는 조선족의 이같은 민족적성격이 농축되여있다. 따라서 이같은성격이 연변축구가 아무리 어려운 생태에서도 오뚝이처럼 살아남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지난 60년대 전국갑급련맹전 우승 보좌에 오른 후 2015년 갑급련맹전우승으로 복귀하기 까지 계획경제시대에서 시장경제시대를 관통한 50년 세월, 연변은 중국축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주역으로 진한 생명력을 과시하면서 연변만의장쾌한 축구드라마를 엮어냈다. 연변이 있어 중국축구는 황홀하고 매력이 있는 게 아닐가?   우리 나라 개혁개방 40년은 축구무대에서 프로축구의 27년으로 반영된다고생각한다. 시장경제체제가 축구와 가장 끈끈하게 엮어진 년대이기 때문이다. 프로축구 27년은 또한 연변축구가 준엄한 시련으로 진통을 겪은 년대로 기록된다. 27년 사이 축구무대를 좀먹게 하는 비리, 금원으로 변질된 비정으로 연변을 슬프게 하는 상황이 수차 발생했으며 민족구단의 눈물을 믿지 않는 잔혹한 시장체제생태에서 부진, 추락, 매각 등 통한의 상황에 눈물을 삼킬수 밖에 없었지만 연변축구팀은 완강하게 버티면서 중국축구 전설로 이 땅에 그 존재감을 심어놓았다.   27년, 중국축구의 전설로서연변의 이미지를 필자는 아래와 같은 세가지로 귀납해본다.   중국축구에 활력을부어넣은 연변: 1993년, 연변축구팀의 전국 제5차운동회 축구 5위 영예는 우리나라 프로축구의 시작과 함께 연변팀 이 전국축구무대에서 처음 선보인 “전면 공방”의 참신한 전법으로 일궈낸 성적이여서 축구계를 놀래우는 이슈로 되였고 우리 나라 축구발전에 중대한리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프로축구의 금원경쟁이 브레이크 없이 가동되던 년대에 소수민족 서민 구단인 연변팀은 변색하는 금원축구비정상 사태에 휘말리지 않고 우리 식 축구리념과 경기풍격으로 2015년 갑급리그의 정상에 서면서 슈퍼리그 그라운드를 주름잡는 새로운 신화를 썼다. 그 성공비결을사람들은 비대칭 전략에 의한 투혼 3력 –- 집중력, 정신력, 결속력으로 정리한다. 국가팀에 선발된 수많은 연변적 선수들의 공통된 특점 또한 투혼으로 설명된다. 투혼, 이는 연변팀이 우리 나라 프로축구 27년에 남겨놓은 값진 정신 유산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프로축구의 진수를보여준 연변: 2017년 11월 4일, 이날은 연변팀이 2년간 버텨온 슈퍼리그 그라운드를 떠나는 아픔을 삼켰던 날이다. 이날 경기는강등의 운명을 개변할수 없는 “작별 경기”였지만 “경기과정에 보여준 연변팀의 강인한 정신력은 올 시즌 이미 강급이 확정된 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울 정도였다”고 언론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이날의 연변팀 경기자세는우연하지 않다. 기술 통계를 보면 연변 팀은 2017년 슈퍼리그참전팀에서 순 경기시간이 제일 긴 팀이였다. 경기 시간은 국제수준에 이르렀고 경기당 순 경기시간과 경기과정 이동거리도 슈퍼리그 1위를 차지하고유일하게 레드카드 한장 없고 “침대축구” 같은 비신사적인 게임을 하지 않은 매너 있는 축구팀으로 평가 받았다. 만약 슈퍼리그게임성적표를 득점과 실점만으로 하지 말고 경기자세도 망라시킨다면 연변팀의 성적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솔직히 오늘날 중국 프로축구팀들의 경기자세가 중국축구발전의 걸림돌이 되고있 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프로축구 그라운드에서 연변은 강호킬러로 명성이 높다. 갑급리그와 슈퍼리그각축장에서 기죽지 않는 도전으로 강호킬러의 본색을 진하게 드러내는 연변축구팀의 경기자세는 축구계의 귀감으로 되고있다.   중국축구의 관전문화를업그레드시킨 연변: 우리 연변에는 세상이 알아주는 기막힌 관전문화전통이 있다. 지난 세기 80~90년대 연변 홈경기 때 마다 연길경기장을 꽉 메우며 도미노식 응원열기로 뜨겁던 그 추억들, 입장권을 구할수 없어 경기장 외곽의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관람쇼를 펼치던 극성팬들, 경기결속후 온 시가지가 맥주쇼로 시끌벅적하던 그 풍경들은 국내언론들의 뉴스감이였다.   프로축구 27년, 연변의 축구관전문화는 “금원으로 무장한 토호구단”과 “가난한 자치주서민구단”의 대결구도에서 새롭게 업그레드 된다. 그라운 드에서뛰는 11명 선수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제12인자”로 “자아책봉”한 이 멋진 호칭에는 축구단 선수들과 동고동락, 혼연일체를 이룬다는연변사람들의 심오한 축구문화자각이 슴배여있다. 연변팀 원정과 홈장경기에서 연변축구팬들이 보여준 멋진 존재감은 시공간을 날아넘는 굉장한 파워, 이색적인 관전응원이벤트의 유감없는 출시로 생생하게 부각되였고 이 과정에서 연변의 성숙된 축구팬의식의 진수를 세상사람들 에게 남김없이 선보였다고생각한다.   필자는 지금도 2017년 11월 4일 초겨울 한파와는 무관하게 연변팀 슈퍼리그 작별 경기장을 뜨겁게 달구던 “아리랑”의 열기를 기억하고있다. 경기장 밤하늘에 메아리치는 “아리랑”선률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연변팀 선수와 관람석 팬들 사이를 “연변의 존엄을지키자”는 무언의 다짐으로 끈끈하게 이어주는 이심전심의 동아줄이였다. 경기 종료후에도 숙연하게 자리에 서서 눈물을 머금고 연변팀 재기를 기원하며 열창하는 축구팬들의 비장한 모습은 “연변축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는 대형 프랑카드와 더불어 연변축구팬들의 새로운 각오와 집념을 확인시켜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연변축구는 지금 원정의 길에 있다. 이 길에는 영광과 더불어 부진, 추락, 강등의 시련이 가로놓여있다. 눈물 없이는 불가능한 비장한 행보가 이어는 가운데 중국축구의 전설로 반세기를 엮어온 연변축구는 죽지 않고 특이한 생명력을 만천하에 과시할것이다. 흑룡강신문
82    혼례식의 변천사 댓글:  조회:2243  추천:0  2019-01-21
결혼은 자손만대의 시작이라고 했다. 인간에게 웨딩처럼 성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나 지금이나 뭇사람들을 불러모은 가운데 혼인신고식을 올리고 축복을 받고저 하는 인간의 신조는 변함없는 것 같다. 다시말해 무상한 세월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웨딩은 자체의 룰 대로 인간사회의 그림자처럼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웨딩변천사처럼 우리 삶의 변화를 정확하게 체크할 수 있는 거울은 없다고 생각한다. 1978년 10월의 어느 날, 연길시 어느 골목의 나지막한 다세대 단층주택은 하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의 집체호 동창생 결혼잔치가 한창이였다. 10여명 동창생들은 결혼축하선물로 바게쯔 두개, 법랑대야 두개, 밥상 하나, 큰 거울 하나를 장만하였다. 한달 로임이 겨우 3, 40원 정도되는 각박한 살림이라 돈보다 적당한 가격대의 생필품을 사서 선물하던 세월이였다. 동창생 집 자그마한 뜨락에는 림시로 부뚜막 두개를 만들어놓고 갖가지 잔치음식을 분주히 부치고 볶아내고 있었다. 결혼잔치를 위해 이웃 다섯가구가 모두 자기 집 방을 비워주었다. 그 당시 이웃들의 따뜻한 인심을 보여주는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신랑과 가장 절친하다는 리유로 우리 동창생들은 신랑집 본채에 들어가 앉게 되였다. 비좁은 신방에는 남색 중산복을 입은 신랑과 너울을 쓴 신부가 다소곳이 앉아 큰 상을 받고 있었다. 신방 한쪽켠에 놓여있는 새 이불장안에는 모본단 이불 세채가 차곡차곡 얹어져있었고 그 옆에는 새 재봉침 한대가 놓여져있었다. 신부 쪽에서 장만해온 혼수품들이였다. 시민들의 주택난이 심각하던 세월이라 동창생도 결혼했으나 분가할 수 없어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녀동생들과 함께 15평방 정도의 방에서 신혼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시민들의 보편화된 거주환경이였으니 그렇다고 결혼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날 그 비좁은 방에서 우리는 하객들과 더불어 잔치술을 밤늦게까지 마시고 오락판까지 벌리며 동창생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15평방이 되나 마나 한 코구멍 같은 이웃집 다섯가구를 합쳐야 70여평 방밖에 안되는 공간에서 어떻게 그 많은 하객들을 일사불란하게 접관하여 일생일대의 결혼잔치를 치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 년대 우리 세대의 결혼잔치는 이렇게 치를 수밖에 다른 방책은 전혀 없었다. 페쇄된 환경에서 바깥세상에 깜깜부지인 우리 세대는 이 같은 삶에 오래동안 무감각해있었다. 1988년 겨울 가까운 친척집 아들의 혼례식에 갔었다. 10년 전 동창생 결혼잔치 때보다 세월이 좋아져 도시에 식당잔치가 흥행하기 시작했다. 웨딩홀은 아직 없던 시절이다 보니 식당 한쪽 켠을 비워 자체로 신랑신부가 받을 큰상을 만들고 잔치의 사회는 신랑직장 쪽에서 한분이 나와 맡아하는 정도였지만 동네 이웃집들을 빌려 하객을 받는 민페를 더는 끼치는 일이 없게 되면서 서로가 편안해했다. 그날 친척집 식당잔치에는 15상이 차려졌다. 비좁은 민가에 오구작작 모여서 치르는 잔치보다 여러모로 훌륭했다. 특히 온 하루 비지땀을 흘리며 주방에서 음식장만에 눈코뜰새 없이 보내야 했던 녀성 친척분들이 편안하게 앉아서 하객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이때쯤하여 살림형편이 펴이면서 많지는 않아도 물건보다 돈으로 부조하는 풍조가 웨딩하례의 주축을 이루게 되였다. 친척분은 자식이 결혼 후 분가시키기로 하고 이미 세집 한채를 마련하 였었다. 량가 부모들이 의논하여 함께 장만해준 혼수품은 근사했다. 그 가운 데는 ‘봉황표’ 자전거, 랭장고, 세탁기, 단색 TV수상기 등이 들어있었다. 신랑의 혼례복은 중산복이 아닌 양복차림으로 바뀌고 신부도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세월의 변화가 느껴졌다. 2018년 9월의 어느 날, 필자의 후배로부터 아들 웨딩초청장을 받았다. 스마트폰 위챗으로 전송해온 초청장은 우아한 웨딩축하음악과 신랑신부가 등장한 화려한 동영상으로 합성제작된 멋진 예술품이였다. 국경절 결혼식 당날 연길에서 가장 큰 웨딩홀에 들어서자 악사들이 무대에서 첼로와 바이올린으로 클래식음악을 연주하면서 하객들을 반기고 있었고 입장하는 하객들에게는 신랑신부 량가에서 준비한 답례선물이 전해지고 있었다. 결혼식은 그야말로 21세기의 시대적변화를 느낄 수 있는 완벽함 자체였다. 전통적 민족정서와 현대적 서양문명이 복합된 신선함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특히 은은한 첼로연주를 반주로 신랑신부가 사전에 머리를 맞대고 고안했다는 혼인서약은 유머와 재치로 하여 무시로 하객들의 즐거운 웃음을 유발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대형 LED전광판에서는 예비신랑이 예비신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사랑고백을 하며 반지를 끼워주는 동영상이 펼쳐지면서 혼인서약을 하는 신랑신부와 어울려 시공간을 넘는 한폭의 아름다운 화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날 신랑측에서는 10대의 호화승용차를 세내여 신부와 신부의 부모 그리고 친척들을 웨딩홀로 모셔왔다고 한다. 돈만 내면 모든 걸 부럽지 않게 할 수 있다. 량가부모들은 자식들의 혼사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신랑부모는 90평방메터짜리 아빠트 한채를, 신부 부모는 외제승용차 한대를 장만해주었다. 그 승용차를 몰고 신랑신부는 이제 해남도로 신혼려행을 간다고 한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웨딩이고 혼수품이라 하겠다. 모든 새로운 것은 과거의 잔존물(残存物)에서 성장발전한다. 그것이 변화의 룰이다. 웨딩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집체호 동창생, 친척집 자식, 후배의 아들 혼례식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40년의 웨딩변천사에는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눈부신 저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개혁개방 40년 발전궤도에서 웨딩변천사 만큼 우리 나라 국민들 생활향상의 참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가? 향후 10년, 20년 후 우리의 웨딩이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궁금하다. 혹시 달나라가 신혼려행의 목적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연변일보
81    나의 문화소비 기억 댓글:  조회:1974  추천:0  2019-01-03
일전에 안해와 함께 국자교 남쪽에 위치한 4D영화관으로 영화관람을 갔던 적이 있다. 오랜만에 부부동반으로 가보는 영화관 행차가 아닌가 싶다. 인터넷으로 사전에 예매한 영화표를 영화관 안의 셀프서비스기기를 통해 손에 넣은 후 매대에서 팝콘 한봉지를 사들고 영화관 관람석에 입석했다. 푸근한 안락의자에 앉아 영화에 푹 빠져보는 짜릿한 흥분과 더불어 필자는 저도 모르게 고급스런 실내분위기에 사로잡혔다. 이런 영화관이 시안 여러 곳에 있다는 직원의 소개를 들으며 현대적인 문화소비공간과 등지고 살아온 자신이 못내 민망스러웠다. 필자의 영화관 기억은 쓰딸린극장(후에 인민영화관으로 개칭)이 그 전부다. 로동자문화궁을 비롯하여 또 몇곳 영화관이 있었으나 조선말 배음을 전담한 지정영화관은 단연 인민영화관 뿐이였던 탓이다. 지난 세기 50년대 영화관 시설은 더없이 초라했다. 관람석의 걸상은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장의자였고 환풍시설이 락후하여 찌는 듯한 여름철이면 영화관 안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구하기 힘든 입장료를 구입한 것만도 감사할 따름이였고 영화관에 입장하여 장의자 좌석번호까지 확인하고 착석했을 때는 그야말로 붕 뜨는 기분이였던 같았다. 영화관이 유일한 문화소비공간이였고 영화도 지금처럼 마음껏 선택해서 볼 수 없었던 시절이라 영화입장권 구입은 굉장히 힘들었다. 새로 개봉된 영화 상영날이면 영화관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손이 나들만한 작은 매표창구 우에는 쩍하면 “오늘 영화 만원(满员)”이라는 분필글씨 게시판이 내걸려 사람들을 실망시키곤 했다. 무작정 인파 속을 비집고다니며 “영화표 없슴둥?”을 애타게 련발하다가 요행 입장권을 손에 넣기라도 하면 그 기쁨은 이를 데 없었다. 크지 않은 영화관 실내공간은 늘 관람객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관람석 사이사이의 통로는 물론 사람이 비집고 들어설 공간이라도 보이면 관객들이 진을 치고 앉았으며 무대 우 영사막 주변에까지 몰리여 직원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60년대 초반에 와서 인민영화관의 장의자가 철거되고 대신 일인일석의 고정된 등받이의자로 교체되면서 영화관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계급투쟁이 강조되던 시절이라 영화관은 사회주의, 애국주의 일원화 교양의 중요한 장소로 되여있었다. 영화관을 대신하여 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었다. 영화종결벨이 울리고 문이 열리며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슴벅이며 쏟아져나오던 관람객들의 웃음기 없는 진지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양의의가 상당한 영화가 만들어내군 하던 인간풍경이였다. 영화관의 이 같은 기능은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왔다. 개혁개방은 국민의 문화소비담체를 새롭게 갱신확장시킨 원동력이였다. TV가 출현함에 따라 영화관으로만 몰리던 문화소비인파가 점차 분해되여 가정안방의  TV스크린 앞에 모이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TV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TV 화면이 14인치 크기로부터 18인치, 24인치, 32인치 크기로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하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서 비디오의 안방 진입이 급물살을 타면서 영화와 드라마를 비디오테이프로 마음대로 볼수 있게 되였다. 시중에는 비디오방, 비디오 대여점이 하나둘 생기고 대신 영화관은 한파를 맞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컴퓨터의 등장이 가시화되면서 재래의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전환되는 기술혁명의 시대가도래한다. 비디오테이프는 음반으로 바뀌고 가정에서의 비디오는 DVD로 교체된다. 이 모든 변화는 불과 10여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필자도 얼마전 이미 도태돼버린 몇대의 비디오와 몇 박스 되는 영화 비디오테입을 무자비하게 처분해버린 적이 있다. 지금 리용하고 있는 DVD기기도 사실 수년 전에 구입한 기종으로서 언녕 ‘박물관’에 가야 할 로후품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영화관이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그 빈자리를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4D영화관이 멋지게 메우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가정 안방에서 TV스크린을 통해 시청하는 영화의 느낌과 4D 영화관에서 고화질 대형 영상화면을 고성능 음향과 복합시켜 관람하는 영화의 느낌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시대가 바뀌여도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는 리유이다. 거기에 관람석을 비롯하여 실내 분위기를 가정안방처럼 최상의 서비스로 편안하고 아늑하게 꾸며놓는다면 시민들이 멀리할 리유가 없는 것이다. 그날 4D영화관에서 느낀 감수이다. 시청각을 즐겁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 또 다른 인간의 문화향수란 없을 것이다. 시각으로 즐기는 영화와 더불어 청각으로 즐기는 음악은 아무리 세월이 변하고 기술수단이 갱신되여도 시민문화소비주역으로서의 지위는 요지부동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레포츠가 국민 삶의 중요한 내용으로 급부상하면서 음악이 시민문화소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록음기, 음향기기의 수요가 급증하고 그 성능에 대한 요구가 점점 높아진다. 인터넷 디지털시대의 도래는 하나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접속 등 데이터 통신기능에다 TV와 라지오 시청취방송서비스와 MP3, 카메라를 포함한 다방면의 문화기능을 일체화시킨 고차원의 문화소비의 즐거움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게 한다. 눈부신 문화소비의 발전변화 템포는 너무 빨라 적응하기가 숨가쁘다. 필자의 장속에도 새것과 다름없지만 언녕 도태신세에 있는 각종 류형의 카세트 더블록음기와 디지털 미형 록음기들이 몇 박스 잘되는 클래식 음악테이프와 더불어 짧은 수명을 아쉬워하며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에는 135형 필림을 장착하여 촬영을 즐겼던 필림카메라들도 눈에 띄인다. 8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 사이 20년 세월 필자의 문화소비 기억을 담은 유물들을 보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오늘도 필자는 얼마 전 도태시킨 MP3플레이어 대신 아들이 선물한 고성능 이어폰을 착용하고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면서 모아산 등산길에 오른다. 연변일보 2019.1.3
80    ‘8전짜리 우표’ 헤프닝과 스마트폰시대 댓글:  조회:1973  추천:0  2018-11-26
수년 전 세모의 어느 날 체신국에 갔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필자는 오랜만에 체신국으로 우표 몇매를 구매하러 가게 되였다.  필자의 차례가 되여 카운터에 다가서면서 별생각없이 1원짜리 한장을 내밀며 “8전짜리 우표 4매만 달라.”고 했더니 카운터의 녀직원이 눈을 올롱하게 뜨고 필자를 쳐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손님두 참, 지금 8전짜리 우표가 어딨습니까?” 카운터 녀직원이 튕겨주는 한마디에 필자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외계인을 바라보듯하는 카운터 녀직원과 고객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필자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인터넷시대에 ‘8전짜리 우표’를 구매하러 갔다가 망신스럽게 돌아서는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사실 이건 단순히 우표의 가격대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촌 어디에도 통할 수 있는 오늘날 우표의 존재는 지난 시절의 퇴색한 통신징표로 우리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전자매체에 의한 통신술의 눈부신  변화가 우리더러 고루의 삶을 바꾸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1896년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을 성공시킨 후 인류는 통신술의 위대한 변혁시대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가정용 전화통신기의 사용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우리 나라의 경우 전화기의 일반가정 정착은 개혁개방 이후로 볼 수 있다. 아주 오래동안 전화기는 서민층에게 있어서 쳐다볼 수조차 없던 사치품이였다. 일상의 모든 통신은 체신국을 거쳐야 가능했던 세월이였다.  8전짜리 우표를 편지봉투 상단에 척 붙이면 국내 어떤 지역도 편지발송이 되였으니 막부득이한 경우에만 체신국 전화 유료 서비스에 의존할 정도로 국민들 삶의 질은 형편 없었다. 현대문명과 등진 페쇄된 삶의 전형적인 형태가 아닐 수 없었다. 필자의 경우 가정에 전화기를 설치한 시간은 1990년-개혁개방 10년 후이다. 전화기의 가설과 동시에 전화번호가 체신국의 전화번호책에 공개되면서 필자는 마치도 하루밤 사이에 현대문명인이 된 듯한 그런 흥분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그로부터 불과 3~4년 후 고정전화가 서민층에 미처 보급되기도 전에 이동전화가 출현한다. 거기에 서양에서 애완견 목에다 착용한다는 무선호출기(bp机)까지 가세하면서 연변에도 무선통신시대가 본 격적으로 열리였다. 그때만 해도 2차대전 때의 휴대식 군용무전기처럼 둔중하게 생긴 이동전화를 들고 허리띠에 bp기를 착용하고나서면 그야말로 선망의 눈길을 끌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정의 고정전화 가격으로 현지 이동전화의 편리를 누릴 수 있는 시티폰(小灵通)이 시민층에 확산되는 듯싶더니 몇년사이에 음성과 문자 메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각종 류형의 깜찍한 핸드폰들이 줄줄이 선을 보인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에 미처 적응하기 바쁘게 휴대전화의 기능은 물론 팩스 송수신 및 인터넷 접속 등의 데이터통신 기능에다 TV와 라지오 시청취 등 의 방송서비스와 카메라, MP3, 무전기기능, 문서작성, 금융거래까지 가능한 “다기능 복합단말기”라고 불리우는 스마트폰시대가 다가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재래의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1년 사이에도 세상이 몇번씩 달라지는 눈부신 변화 앞에서 필자와 같은 반컴맹족들은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인류의 첨단과학기술 창의력에 따른 결정체이고 개혁개방은 낡은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체제확립을 위한 개혁 및 개방 정책으로서 서로 다른 개념임은 분명하다. 개혁개방과는 무관하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자체의 기술루트 대로 기능을 발휘한다. 문제는 인류가 창조한 과학기술첨단결정체를 국민이 마음껏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경제적 체제보장은 스마트나 컴퓨터 플랫폼이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19세기 말엽에 인류가 무선통신시대에 들어섰고 20세기 초반에 전화기가 유럽의 가정들에 들어왔지만 세계 대부분 나라의 국민들이 가정전화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우리 나라도 개혁개방 이후에야 국민들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오늘날 세계가 스마트폰시대에 들어섰지만 아프리카 일부 나라를 비롯하여 아직도 눈부신 변화의 시대와 외면하고 사는 나라들이 꽤 있다. 인류가 창조한 물질문명을 마음껏 향수하자면 정확한 사회 체제와 튼튼한 국력, 그리고 국민들의 여유 있는 삶이 동반돼야 함을 설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휴대전화만 스마트해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도 스마트해지고 있다. 남녀로소 할 것 없이 스마트폰에 빠져 스마트폰시대를 즐기고 있다. 개혁개방이 안아온 강성대국, 풍요로운 국민의 삶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개혁개방의 혜택으로 한국을 비롯하여 해외 여러 나라에 나가있는 수십만 조선족들은 오늘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영상 화면을 통해 연변의 고향집 부모혈육들과 실시간으로 서로의 그리운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향수를 달랜다. 시공간의 아무런 구애도 없이 자유자재로 영상통화를 할 수 있는 과학환상소설 같은 상황이 개혁개방 대환경이 배태한 정보화혁명이라는 위대한 변혁으로 안받침되면서 짧디짧은 시간 안에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어찌보면 스마트폰이 국민의 삶을 견인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의 팽창되는 물질향수의 욕구가 스마트폰이 이에 부응하도록 채찍질하는 게 아닌가 한다. ‘8전짜리 우표’는 지난 시절의 력사유물로 우리 삶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체신국의 개념도 달라지려 하고 있다. 스마트폰시대에 걸맞게 체신국 대청에 들어서면 즐비하게 진렬된 온갖 스마트폰 매장과 실무창구들이 전통적인 체신국의 생태를 무자비하게 위협하고 있다. 미래 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체신국의 리성적인 변화가 요청될 때이다. 개혁개방은 진행형이고 그 동력으로 계속 탈바꿈하게 될 통신기술의 발전이 기대된다. 연변일보 
79    친환경 록색발전의 ‘효자’로 댓글:  조회:2053  추천:0  2018-08-30
남의 고장이 아니라 우리 연변에 신에너지 자동차 생산라인과 공룡왕국 건설대상이 정착한다는 흥겨운 메시지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서고 있다. 전자는 당대 인간 창의적 기술력의 산물이고 후자는 1억여년 전 쥐라기와 백악기에 살았던 거대한 고대생물에 해당한다. 이 두가지 프로젝트가 우리 주 록색전환 발전의 모델로 되여 연변경제의 신성장동력이 큰 탄력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하고 있다. 20억원 투자에 힘입은 ‘연변국태 년간 만대 신에너지 자동차 건설대상’은 녕파시와 연변주의 ‘협동빈곤부축 및 합작실시 실현’의 최대산업모델로서 2019년 8월에 시험생산에 들어가 앞으로 년매출 48억원, 세금납부 4.5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다. 15억원 투자로 예상되는 ‘연길공룡왕국-금두환락원 건설대상’은 2020년 5월에 전체 공사가 완공되면서 연변의 새로운 명소로, 연변관광업의 새로운 명함장으로 부상한다는 전망이다. 상당히 고무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연길 남북의 도시량단 산간지대에 정착하게 될 이 두개 건설대상이 모두 친환경 록색발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점이 반갑다. 연길 신공항경제개발구에 안주할 “신에너지 자동차 건설대상의 성공적 실시가 연변 록색발전에로의 전환에 새로운 활력을 주입하게 될것이다.”고 한 자동차회사 상무부총경리의 선언은 ‘신에너지 자동차가 전지로 운행하는 록색자동차’여서 배기 가스로 인한 공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강점을 안받침하고 있다. 남산에 위치한 연길공룡왕국 건설대상의 정착은 ‘자원을 팔던’ 부동산개발로부터 ‘풍경을 파는’ 관광문화의 전환점으로 되여 폭넓은 연룡도 신구역 현대관광 문화단지의 격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련결고리를 제공하고있다. 거기에다 연길공원 안에 있는 ‘동물가족’들의 남산지대로의 집단이주도 물망에 오르면서 연룡도 신구역의 친환경발전이 급물살을 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도 굉장히 흐뭇한 이슈로 되고 있다. 신에너지 자동차 건설대상과 공룡왕국 건설대상을 친환경 록색발전의 세기적 프로젝트로 부상시킨다는 이 거창한 목표와 달성하게 될 사회적, 경제적 효익에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개발 생산 방식과 과정을 소화하면서 이 매력적인 목표에 접근하는가를 두고는 필자도 ‘행복한 우려’를 조심스럽게 내비춰본다. 년간 생산될 만대의 신에너지 자동차는 ‘전지로 운행하는 록색자동차’임이 분명하고 기존의 화석연료차량에 비해 배기가스가 전무하여 공해가 없다는 점 또한 수긍가지만 무엇보다 ‘록색자동차’ 제조생산과정이 ‘록색’이여야 할 텐데 하는 서뿌른 걱정이 슬그머니 갈마든다. 북쪽 산간지대에 들어서게 될 24만평방메터의 건축면적으로 신축하게 될 용접작업장, 도색작업장, 금속가공작업장, 오수처리장을 포함한 자동차 생산라인 가동 과정의 생태훼손과 환경오염 위험이 디지털화한 친환경 ‘록색’방어벽에 철저히 차단된다는 유력한 담보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로 가능한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시장에 출시하는 신에너지 ‘록색’자동차가 우리 고장의 청산록수를 훼손하고 오염시킨 대가로 생산될 때 그야말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챙기는’ 우스운 결과로 번질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우려가 부질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나라가 자국의 생태를 훼손하고 오염시키며 생산한 8억벌의 적삼이 고작 공중객차 1대를 바꿔온 오래전의 교훈을 들먹여보면서 재에는 마음이 없고 재밥에만 눈이 가는 행태가 재연되지 말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이다. 착공식에서 “최상의 정책, 최상의 서비스,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겠다.”고 한 연길시 지도자의 화끈한 담보와 “연변이란 이 비옥한 땅에서 쾌속적으로 시장을 개척하고 강건한 발전을 거듭했으면 한다.”고 한 녕파시 지도자의 간절한 바람이 ‘연변 록색발전전환’이라는 공동된 추구선상에서 환상적인 궁합을 이뤘으면 좋겠다. 외상 단독투자에 의한 연길공룡왕국 건설대상은 “3년 안에 이름을 알리고 6년 안에 모양을 갖추고 10년 안에 성세를 이룬다.”는 계획하에 총 113억의 투자로 ‘국가급 고대생물화석 중점보호집산지’와 맞먹는 ‘국제급 공룡테마파크’를 세운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그 제1기 공사가 착공식을 가졌다. 이제 모아산국가삼림공원을 비롯한 40헥타르의 남산 광활한 산간지대와 현유 조선족민속원이 해당 대상 부지면적에 포함되면서 생태 및 민속 환경보전에 고심할 수밖에 없는 갑측과 아무래도 경제리윤창출에 관심이 더 쏠릴 수밖에 없는 투자측의 동상이몽(同床异梦) 신경전이 우려의 소지로 되지 않을가 싶다. 투자측의 투자적극성과 경제리윤추구가 연룡도 신구역이 담고저 하는 친환경 인문정신의 주체성, 문화의 독특성, 내용의 민족성, 가치의 독점성과 맥락을 함께 하면서 명실상부한 ‘두만강지역 나아가 동북아지역의 가장 흡인력 있는 공룡문화목적지’로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더 부언하지만 남산 백악기 고대생물화석과 더불어 그 동쪽켠에 위치한 남산 청동기시대 고대인간거주지 출토문물도 같은 연장선에서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백악기와 2, 3천년 전 연길분지 원조모습과 생태환경 변천사, 고대생물과 인간의 관계 탐구의 견증물로 되게 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룡산 한곳에만 현혹되지 말고 전반 남산과 연길 주변 지형이 완벽하게 포섭된 유감없는 프로젝트로 됐으면 좋겠다. 북산에 정착한 친환경 신에너지 자동차 건설대상과 남산에 진을 친 친환경 연길공룡왕국 건설대상이 연변 록색전환 발전의 ‘효자’로 되여 서로 마주보며 호응하면서 21세기 연변경제 를 견인하는 신성장동력으로 되기를 기대해본다. 연변일보 2018.8.29
78    애심련동협주곡 댓글:  조회:2013  추천:1  2018-08-16
인간(人间)이란 낱말을 구조적으로 해체해보면 ‘사람과의 사이’,  즉 상대적인 관계에서의 인간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사람과의 사이가 도의적인 사이로 유지될 때 인간일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할 때 비인간이 된다. 천재(天灾)에 의해 인간의 생태환경이 쑥대밭으로 변하고 사람들의 정상적인 생활절주가 뒤죽박죽이 된 비상사태가 들이 닥쳤을 때 사람과의 사이가 도의적인 사이로 유지될 수 있는가에서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변 사상 류례없던 올여름 지속적인 폭염은 연변사회 재난 대처능력과 더불어 연변사람들의 가치관, 륜리관이 시험대에 오르게 하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도시 전체를 하나의 화독으로 가열시켜 사람들의 숨통을 콱콱 막히게 하는 렬악한 상황에서도 도시교통 질서와 환경정리, 시민생활봉사 등 도시기능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자기 직분에 충실한 교통경찰, 도시 청소공, 택배 우체원, 도시기초시설 정비공, 포장음식 배달원들 … 이들에게 감사하며 배려와 사랑의 손길을 뻗치는 시민사회의 자각이 올여름 연변의 ‘재난은 무정, 인간은 유정’이라는 테마의 아름다운 인간애심련동협주곡으로 잔잔한 흐름을 이루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룡정 한 시민의 ‘애심 랭장고’ 발상에서 비롯된 연변판 애심련동협주곡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도시 곳곳에 애심 무인 릴레이 랭장고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랭장고마다에 음료수와 수박 채워넣기 시민운동이 급물살을 타는가 싶더니 거기에 멈추지 않고 환경청결공들에게 ‘애심 랭면 대접하기’ 이벤트와 같은 집단별 초청 깜짝쇼까지 가세하여 독주(独奏)가 아닌  전사회의 협주곡이 연변사회를 풍미하며 민족지역의 인간매력지수를 한껏 높이였다. ‘애심랭장고’는 시혜(施惠)가 아니라 감사한 마음의 사절이다. 대다수 국민의 행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의 징표이다. 그래서 필자는 ‘애심랭장고’를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인간소통의 따뜻한 안방으로 부르고 싶다. 일전에 본보 1면 톱에서 인제 갓 걸음마를 타는 아기가 젊은 엄마와 함께 애심랭장고에 음료수를 넣는 진지한 모습의 사진 화면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 이 사진은 연변의 애심 릴레이가 한해 한 계절에 국한된 어른들 만의 애심쇼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퇴색하지 않는 영원한 애심협주곡으로 우리 후대들의 마음속에 안주시킨다는 련동의미까지 담고 있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더 맑게 해주었다. ‘감사할줄 알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애심의 깊은 뜻이 어려서부터 반듯한 인간적 도의로 움틀수 있게 리드하는 것, 당연히 부모 ‘공부방’의 몫임을 시사한 사진 보도가 아니였나 생각한다. 행복은 서로 사랑하고 돕는 곳에 있다. 따라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생활속에서 반짝인다. 인간애심협주곡이 이런 악장으로 엮어질 때 아름다운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올여름 애심협주곡이 몇몇 고마운 분의 소행으로 끝났더라면 좀 아쉬웠을 것인데 폭넓은 시민사회 공감대로 되여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들까지 동참시킨 미래지향적인 애심 련동협주곡으로 격상됐다는 점은 더없이 감격스럽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가뭄과 침수피해를 동반한 천재의 위협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전망이지만 정부의 재난 대처 시스템의 완벽화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애심자각 릴레이가 시민 모두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릴 때 연변성채는 끄떡 없을 것이다. 올여름 우리 연변이 만들어낸 애심련동협주곡이 ‘사람마다 조금만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면 이 세계는 아름다운 인간세상으로 변하리라’는 유명한 사랑멜로디와 멋진 화음을 이루면서 연변이 찬란한 인간애심의 향토로 가는 길을 밝혀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변일보 2018.8.15
77    로씨야월드컵이 주는 계시 댓글:  조회:2200  추천:0  2018-07-19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지구촌 최고의 축구축제 월드컵이 막을 내렸다. 32개국 대표팀이 로씨야에서 32일간 64껨의 치렬한 격돌을 거쳐 16강, 8강, 4강, 챔피언을 가려내고 새로운 세계축구렬강의 구도를 재편성하였다. 월드컵 초연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남긴 계시는 심각하다.   ◆관객   중국이 불참한 세계축구 축제를 지켜보는 우리 나라 축구팬들의 시선은 통한, 비애, 울분으로 반죽된 착잡함 그 자체였다.   들리는 바로는 월드컵이 ‘참전국’비례를 늘인다고 한다. 아세아권에서도 다섯개 팀으로부터 여덟개 팀이 본선에 진출한단다. 일부에서는 중국이 드디여 월드컵 본선 진출을 바라볼수 있게 됐다고 들떠있다. 하지만 피 파랭킹 75위의 중국이 과연 아세아 8위권에 들어갈 수 있을가? 솔직히 지금의 국가팀 행실이나 우리 나라 축구생태를 조명해보면 비례를 늘여도 월드컵 본선으로 가는 길은 더없이 험난하리라는 느낌이다. 다음의 월드컵에서도 우리가 싫은 대로 계속 ‘멋적은 관객’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억울함을 감수해야 할지 모를 일이라는 말이다.   ◆33만과 13억   세상의 많은 일은 그 존재자체로 문제가 설명된다. 연길 인구보다 더 적은 북유럽 33만 인구의 섬나라 아슬란드가 그렇다. 거기에다 세계강호 아르헨띠나와 1:1의 멋진 무승부를 펼치는 결과를 연출하자 우리 나라 축구팬들의 아슬란드국가팀에 대한 공경은 드디여 중국국가팀에 대한 조롱으로 승화된다. ‘주방장’, ‘운전수’, ‘목수’, ‘건축로동자’, ‘연출’, ‘치과의사’로 무어진 아슬란드 ‘아마츄어축구팀’ 일화가 한때 인터넷게시판을 도배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아슬란드팀에는 기실 아마츄어선수가 없다.”는 신화사의 정정보도까지 겹치게 하는 생각 밖의 시너지효과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기실 아슬란드팀의 직업화 수준은 상당히 높다. 국내 70여명의 선수들이 유럽의 큰 련맹경기에서 뛰고 있다. 33만 인구에서 축구적령인구가 5만에 불과하지만 해마다 다섯개 급별의 프로련맹경기를 소화하고 있으며 유럽련맹이 발급한 A급 및 B급 증서를 가지고 있는 감독이 700여명이나 있다고 한다. 이 미니국가에 표준축구경기장이 179개가 있어 평균 1800명 주민이 정규화 축구장 하나를 갖추고 있는 셈이며 이 수치가 세계 평균수준을 훨씬 릉가한다고 하니 그들이 피파랭킹 131위에서 6년 사이에 22위로 승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다. 아슬란드정부측 통계에 따르면 아슬란드팀과 아르헨띠나팀 전 경기 생방송 국내 시청률은 99.6%, 0.4%는 로씨야현지에서 관전했다고하니 사실 100% 국민이 경기응원에 나섰다는 말이 된다.   나라 인구가 아니라 나라 축구인구의 규모가 판단기준이 돼야 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며 축구문화 보편화, 대중화의 높은 수준에서만이 수준급 스타를 배출할 수 있다는 유력한 반증으로 된다.   오늘날 우리 나라 직업축구는 대중화가 되지 않은 황페한 축구토양에서 자체의 조혈기능보다 외부의 보혈기능에만 집착하고 있는 영양실조 체질로서 겉보기에는 허우대가 큰 슈퍼맨 같지만 내실이 다져지지 않은 허약한 존재라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시장화로 꾸며진 직업축구는 경제발달 지역을 전제로, 대중화 축구보다 구락부축구를 근본으로, 본토화 선수 양성보다 용병인입을 앞자리에 놓는데 박차를 가하다보니 중국 프로축구 그라운드는 사실상 외국용병들이 묘기를 뽐내는 무대로 되여 본토화 축구의 설자리를 잠식당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 미발달 대부분 지역이 직업축구 시장과는 담을 쌓고 있으며 13억 대국의 축구시장이 아니라 부분적 도시의 구락부 축구시장으로 되여있다. 금원으로 퇴색되는 직업축구 토양에서는 대중화 축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연변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프로축구 그라운드에서 활약하는 소수민족자치주 구단이다. 어려운 경제여건에서 오랜 세월 축구 전통과 투혼에 힘입어 금원으로 무장한 국내 부호구단과 당당하게 대치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연변팀은 우리 나라 축구계의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연변이 양성해낸 십여명의 토종선수들이 국가팀과 국내 여러 프로축구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이 같은 연변의 치적은 우리 나라 축구발전에서 빛나는 한획을 그은 것으로서 나라의 특별한 포상을 받아야 할 줄 안다.   ◆선택과 결과   모든 결과는 선택의 산물이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는 법이다. 로씨야월드컵에서 아세아를 대표하여 출전한 다섯개 팀은 세계를 놀래우는 이변을 연출하여 아세아축구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일본은 ‘아세아팀이 남미팀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징크스를 깨고 남미강호 꼴롬비아팀을 제패한데 이어 세네갈팀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월드컵 우승후보로 쟁쟁한 벨지끄와 2:3의 경전급 경기를 펼쳐 아세아의 자존심을 지켰다. 일본의 이 같은 경기력을 지켜보는 우리 나라 축구팬들의 표정에서는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섬뜩함이 교차되면서 ‘일본이 어느 때부터 중국을 추월해버렸지?’라는 궁금증까지 발동된다.   그렇다. 오래동안 중국축구는 일본보다 한수 우였다. 중국과 일본의 축구대항전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17년 제3회 원동운동회 때 중국은 5:0으로 일본을 꺾고 중일축구대항사의 멋진 출발을 하면서 1934년 제10회 원동운동회까지 여덟차의 대항경기를 7승1무의 절대적인 우승으로 장식한다. 그 후 중일축구사이의 교류는 40여년의 공백기를 거친다. 1975년 아세아컵 예선경기에서 다시 중국과 만난 일본은 여전히 1:2로 중국에 패하는 난국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1993년 일본은 제1회 프로축구련맹경기를, 중국도 그 이듬해 프로축구 갑급련맹경기를 벌리면서 두 나라는 다시 같은 출발선에 서는 듯했지만 결과는 판이했다. 1997년 일본이 이란을 꺾고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입장권을 쟁취한 후 줄곧 월드컵본선의 ‘단골’이 되였지만 중국은 2002년 어렵사리 단 한번 월드컵 본선에 비집고들어간 뒤 오랜 세월을 월드컵 ‘관객’으로 추락되는 운명을 뒤집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아래의 상황대비에서 정답을 류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 로씨야월드컵에 출전한 일본팀 23명 선수 가운데 12명이 독일,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프로축구련맹전에서 뛰고 있는 ‘해외파’들이다. 해외단련을 거친 토종선수로 무어진 일본팀이 남미나 유럽팀에 밀리지 않는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중국선수들은 이 몇년간 유럽 프로련맹전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개인능력의 미달도 있지만 우리 나라 프로축구의 금원경쟁에 따른 높은 로임과 뽀나스의 유혹으로 유럽행을 포기하는 선수들이 적잖다고 한다. 유럽에서 낮은 몸값으로 고생스럽게 뛰여야 하는 ‘억울함’보다 국내 구락부의 안일한 ‘온실’에서 ‘스타’대접을 받으며 금원의 노예가 되는 쪽이 월등 낫다는 계산에서이다. 외국용병을 대거 유치해 치르는 구락부축구는 두차례나 아세아 챔피언컵을 안아올 수 있지만 토종으로 무어진 국가팀으로 돌아오면 동아세아벽은커녕 동남아 약소국과도 땀을 빼며 아세아 2류 구단으로 추락하는 중국국가팀이다.   일본의 축구생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만명당 200개의 축구운동장이 있다. 중국은 고작 만명당 7개이고 그 대부분이 학교운동장이라는 통계가 있다. 중국의 도시 부동산가격이 계속 상승세를 타는 현실에서 도시안에 축구장과 같은 시설을 구축한다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축구운 동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개변시키지 않는다면 축구문화의 대중화, 보편화는 공담에 그치고 중국축구의 아세아 탈출은 그림 속의 떡으로 될수밖에 없다.   일본축구의 청소년양성은 줄곧 아세아에서 선두를 달려왔 다. 일본축구의 청소년양성체계는 ‘3위1체+풀뿌리 축구’의 리념을 시행하고 있으며 그 구조는 ‘전국차원의 국가양성쎈터 ㅡ 9개 지구의 양성쎈터 ㅡ 47개 도, 부, 현의 양성쎈터 ㅡ 시, 구, 정, 촌의 양성쎈터’로 짜여있다고 한다. 양성받은 청소년축구운동선수들은 U17, U20, U23 및 성인국가팀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국제축구련맹(피파) 경기에도 출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다수의 슈퍼축구구락부는 U19 한가지 편대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우리의 개인실력과 팀 전체의 실력은 아세아 1류 수준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 거리를 좁히려면 우선 청소년 양성 체계를 바꿔야 한다. 청소년 양성체계 건설을 멀리하는 중국축구는 전도가 없을 것이다.” 중국축구협회 당조서기의 말이다.   10여년간 일본이 선택한 축구발전모식은 그에 맞먹는 긍정적인 결과를 안아왔다. 랭철한 자성에 의한 과학적인 선택, 뼈를 깎는 실질적인 노력으로  아세아 1류 축구문화와의 거리감을 좁히면서 다시한번 아세아 축구강국으로 도약하는 우리 나라 축구의 새봄을 떠올려본다. 그 과정에 축구의 고향 연변이 할 일은 참 많을 것이다. 연변일보 2018.7.19
76    장군의 민족정신 댓글:  조회:2157  추천:0  2018-07-05
조선족의 장군별이 졌다. 별이 지고 나서야 그 빈자리가 얼마나 엄청난 것임을 통감하게 된다.   당중앙이 조남기 장군의 서거를 두고 표출한 정중하고 높은 례우는 조선족 장군에 대한 당과 국가의 두터운 신임을 단적으로 보여주어 더더구나 장군에 대한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장군생애에 내린 당중앙의 빛나는 평가에서 필자의 눈을 끈 문구는 ‘걸출한 민족사업 지도자’였다. 아마도 필자의 머리속에 가장 뚜렷하게 각인됐던 장군의 이미지 때문이 아니였을가?   ‘걸출한 민족사업 지도자’ 평가를 안받침한 장군의 사상적 근간은 투철하고 확실한 민족관으로 정립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민족을 사랑할 수 없으며 민족의 리더로 된다는 것은 더구나 불가능하다는 게 고금중외의 정설이다. 장군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여러 민족 지도자들이 장군에 대한 한결같은 평가가 “민족에 대한 깊은 감정, 민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다.   장군의 민족감정, 민족사랑이 협애한 민족주의와 엄연히 담을 쌓고 있다는 점을 5년간 장군의 비서로 임직해온 전임 연변 주정협 황삭 주석이 반증한 말로 대신한다 ㅡ   “조선족 지도자로서 그이는 자기 민족의 발전을 지극히 관심하여왔습니다. 늘 자기 민족 간부와 군중의 소원과 애로사항을 있는 그대로 상부에 보고하여 해결을 보군 하였지요. 그이는 늘 이런 말씀을 하군 했답니다. ‘연변은 중국조선족이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 고장이기에 조선족의 제반 사업을 중시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 점에 대해 한족동지들은 납득해야 합니다. 하지만 연변은 여러 민족이 공생하는 지역이고 한족 또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도 고루 돌봐야 합니다.’”   투철하고 확실한 민족관을 지녔기에 장군이 조선족의 발전과 관련되는 모든 일에서의 관심과 배려는 정당하였으며 내린 결책은 설득력이 있었고 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연변일보》는 조선문판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리유에 대해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ㅡ 한족간부와 한족군중들은 그래도 《연변일보》한문판 말고도 한문으로 된 여러가지 신문간행물을 볼 수 있지만 조선족은 《연변일보》조선문판이 그들의 유일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조선문판을 위주로 한다는 것은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 연변에서 응당 자치민족의 문자로 된 신문을 앞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며 문화대혁명시기와 그 후의 상당한 시기에 조선문판이 한문판의 번역판으로 된 상황을 개변시키자는 것이다.   장군의 《연변일보》조선문판 위주설은 또 인원편제와 운영자금 면에서 우선 조선문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전제하에 조한문을 고루 돌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민족자치를 실시하는 연변에서 조선족의 발전을 우선시하면서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을 고루 돌본다는 장군의 일관된 ‘조선족 우선’ 당위성과 그 맥락을 함께 하고있다.   오늘날 조선족이 교육, 문화, 라지오TV, 신문출판 등 민족문화 많은 분야에서 국가로부터 받고 있는 우대정책 대부분이 장군의 민족사랑으로 이뤄낸 것이다. 오래동안 장군과 좋은 뉴대관계를 맺고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북경의 한 조선족 유명 학자의 말이다 ㅡ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높은 직위에 올라온 후에는 자기 민족과 접촉하면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조남기 부주석은 그런 개념이 전혀 없는 분이셨다.”   사실 그랬다. 공직에 계실 때나 퇴임하신 후에도 수도나 지방이나 고향마을 조선족들의 그 어떤 주문도  무릇 조선족 발전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내색도 내지 않으며 발벗고 나선 장군이셨다. 투철하고 확실한 민족관을 지닌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계산된 꼼수에 전전긍긍하면서 자기 민족의 리익과 발전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자기 민족 문화와 관련된 여건은 수수방관하며 선대들이 구축한 민족문화에 팔짱끼고 강건너 불보듯 하는 일부 조선족간부들의 행태를 우리는 가끔 봐왔다. 남의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으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민족발전에 등을 돌린 개별적인 간부의 행실도 좌시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장군의 민족관에 비춰볼 때 너무나 거리가 멀다. 따져보면 이 같은 행태는 자기 민족에 대한 불충이면서 동시에 당의 민족정책에 대한 불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족에 대한 장군의 깊은 감정과 따뜻한 사랑에는 조선족의 빛나는 혁명투쟁력사에 대한 자부감, 조선족의 혁명유산을 대대손손 전승해야 한다는 절절함이 스며있다.   장군은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 인문경지를 조선족 로세대들이 목숨으로 바꿔온 홍색유전인자로, 중국조선족의 영원한 대물림 긍정적 에너지로 마음에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미디어 영상물로 재연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세우고 계셨다.   1946년부터 1948년 3년간 연변에서 해방군에 참군한 인수는 5만 1000여명, 그 중 조선족이 85%를 차지하며 전쟁터에서 희생된 연변의 혁명렬사는 3000여명으로 조선족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3년 해방전쟁은 중국조선족이 중국인민의 해방위업을 위해 지불한 희생이 가장 많고 지불한 대가가 가장 큰 시기로 되고 있다. 이 불멸의 조선족력사는 줄곧 장군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1993년, 장군은 연변TV방송국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력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조선족이 해방전쟁에서 보여준 비장한 혁명영웅들의 형상을 영상화할 데 대해 지시하면서 저세상으로 간 해방전쟁시기 조선족 혁명렬사와 렬사가족, 해방전쟁에 참가한 모든 로병들 그리고 연변 여러 민족들에게 값진 ‘선물’을 드리자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면서 몸소 영상물의 기획과 설계에 구체적인 지도를 주고 자금마련에도 나섰다. 12집 련속 드라마 《초연 속의 수리개》는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그 당시 TV방송국 책임자로 있던 필자에게 있어서 이 드라마의 기획, 설계, 촬영, 제작 전반 과정은 장군의 우리 민족 혁명투쟁력사에 대한 진지한 감정, 희생된 선렬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지척에서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선족에 대한 장군의 깊은 감정과 따뜻한 사랑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였다. 제작이 완료된 후 미숙한 드라마 견본을 자세히 봐주시고 그처럼 기뻐하시며 구체적인 수정의견을 제시해주시던 장군의 23년 전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군은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조선족 불세출 장군이 생애 전반에서 보여준 민족에 대한 깊은 감정과 따뜻한 사랑은 불멸의 정신금자탑으로 되여 우리의 민족관을 쉼없이 정화시켜주리라 믿는다. 장군의 민족정신 영원하리라! 연변일보 2018.7.4
75    새로운 대외개방의 호재와 우리의 자세 댓글:  조회:1938  추천:0  2018-06-07
반도의 해빙무드가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평창올림픽에서 남북화해의 실질적 조짐이 보이고 남북 정상회담에 따른 판문점선언이 발족하기까지는 불과 2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론 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향해 가야 할 길은 아직 두고 봐야 하지만 휴전체제 력사의 종식을 위한 해빙 무드는 전격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제날의 대립과 반목에서 서로 평화를 지향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그 자체에 대해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언제 그랬냐듯이 반도 전반에는 난기류가 감돌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웃나라의 정세 변화가 과연 우리 고장과 어떤 관계가 있을가?   우선, 해빙배경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도해빙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물론 대화를 통한 남북반목의 해소와 화해의 공감대의 형성으로 안아온 긴장완화 국면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심층의 지각변화를 이끌어낸 결정적 변수는 서로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각자의 지향점을 조정하고 평화와 발전을 토대로 한 랭전의 력사를 종말짓겠다는 굳은 의지로 정리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벌써 인프라의 허브격인 경의선 등 고속철과 고속철화 로선 건설프로젝트가 계획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반도의 평화가 진정으로 고착이 된다면 동북아 경제흐름이 새로운 급물살을 탈 것이며 우리 나라가 그 중심에 서게 될 전망에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변은 무풍지대가 아닌 중조경제협력의 교두보로서의 력사소임을 감당하리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다음, 무관할 수 없는 것은 반도 해빙에 따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우리 연변에 엄청난 경제 특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좌시해서는 안된다. 중국 유일 조선족자치주의 인문풍토와 ‘동음일강수(同饮一江水)’의 순치관계, 거기에 사회주의 리념체제로 다져진 두 나라 친선혈맥에 힘입어 연변은 전통적으로 조선과의 변경무역, 민간래왕이 활성화되여있는 고장이다. 도문통상구를 비롯하여 주 안에는 조선과의 무역을 지탱해온 7개의 통상구가 있다. 권하통상구는 조선경제특구의 ‘시험전’인 라진선봉을 잇는 국내 유일한 륙로경제로드이다. 우리 나라의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연변은 국가의 정책지원 레이어드(叠加)효과에 힘입어 ‘정책고지(高地)’로 몸값을 올리고 있다. 동북로공업기지 진흥, 서부대개발, 장길도(长吉图)개발, 연룡도 신구역 건설 등에서 지금 향수하고 있는 우대정책은 연변이 국가 북향개방 실크로드 허브로서의 립지를 굳히게 되면서 연변이 조선의 개혁개방과 맞물림을 이룰 수 있는 천연창구로 부응한 셈이다. 어느 지역도 대신할 수 없는 연변만의 완벽한 국제무역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정세의 변화는 연변의 기회이다. 두만강개발은 변강근해주라는 연변의 지리적 특점을 겨냥하여 국가가 펼쳐낸 세기적 프로젝트이다. ‘차항출해(借港出海)’는 바다로 나갈 그 어떤 “길”도 막히고 ‘항구’도 없는 상황에서 손을 놓고 앉아 ‘망양흥탄(望洋兴叹)’만 할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거래’를 벌린다는 융통성 있는 대안이며 그 핵심요소는 ‘국제협력’으로 풀이된다. 페쇄형으로부터 개발형으로의 탈바꿈이 ‘통상구’를 통한 ‘출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조건미달의 우리에게는 ‘가까운 이웃’과 서로 의기투합하는 ‘국제협력’이 해결카드로 될 수밖에 없다.   두만강개발 20여년 사이 우리는 숱한 애로와 곡절을 겪으며 ‘국제협력’프로젝트의 정답에 접근하면서 나름 대로 조선의 라진항, 로씨야의 자르비노항 등 ‘이웃집’항구를 빌려 ‘출해’라는 탈출구를 뚫었지만 두만강개발과 ‘일대일로’ 세기적 프로젝트의 시각에서 볼 때 연변은 겨우 첫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이번에 조선의 개혁개방이 전격적으로 가동된다면 지금까지 이룩한 결실을 토대로 우리의 ‘차항출해’전략은 보다 화려하고 값진 내용물을 끊임없이 뿜어낼 것이며 연변은 명실공히 우리 나라 북향개방 실크로드 허브로서의 역할을 해낼 것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반도의 해빙으로 연변은 천재일우의 발전과 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였다. 연변은 시대와 함께 하는 정치적 혜안과 글로벌 사유, 준비된 자세와 포용력으로 주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야 한다. 대외개방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면이 상품시장과 자본시장 개방이다. 이웃나라의 경제 메카니즘이 전환되면 연변을 우리 나라 동북아시아 협력과 개발의 중요한 플랫폼, 동북아 지역의 중요한 경제성장구와 두만강지역 합작개발 교두보, 연룡도 일체화 신구역, 우리 나라 북향개방 실크로드 허브로 구축한다는 세기적 프로젝트는 지상담병(纸上谈兵)이 아닌 엄청난 실질적 탄력을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의 해빙이 우리 연변과 무관할 수 없는 리유이다. 연변일보 2018.6.6
74    민족언론부흥의 빛과 그림자 댓글:  조회:2313  추천:0  2018-04-13
연변일보는 민족언론지로서 서렬 66번째로 ‘전국 100강언론사’그룹에 들었다. 또 길림성당위 선전부로부터 유일하게 ‘전 성 매체융합발전’시행단위로 선정되였다. 이는 주로 연변일보 조선문의 지역적 한계를 딛고 세계를 향한 해외 전파력 등을 감안한 대표적인 뉴미디어 발전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허나 연변일보는 현재 선진적인 설비 투자에도 불구하고 인재수요의 ‘갈증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으며 더우기 연변일보 조문판은 비정규직 기자( 계약기자)들의 정규직 전환이 이어지지 않은 탓에 인재류실이 가시화되는 추세를 잠재울수가 없다...   2018년 4월1일은 연변일보 창사70돐이 되는 날이다. 이 땅 에 태동하여 파란만장한 70성상을 조선족민중과 함께 숨쉬며 지역의 당 기관지로, 조선족여론의 구심점으로, 조선족사회발전의 견인차로 정착해온 연변일보는 명실공히 민족언론의 홰불, 선두주자로 되기에 손색 이 없었다. 그 위대한 려정의 초창기를 연 로일대 공신들이 하 나, 둘 저 세상으로 사라지면서 후대들에 의해 전승되고있는 선 배들의 초심은 오늘도 당보의 지면에서 반짝이고있다. .4월1일 당날, 창사 70돐을 맞는 연변일보는 너무나 차분하고 평온한 분위가가 력력했다. 알싸한 마음을 달래며 펼쳐든 책이 이미 작고한 로언론인 오태호선생이 1998년에 저술한 《연변일보 50 년사》였다. 연변일보 반세기의 족적이 진실하게 기록된 이 사초(史草)는 오늘은 물론 향후 오래동안 우리 민족언론사의 근간으로, 밑거름으로 되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의 연변일보 를 영위해가고 있는 후배들에게는 초심을 잃지 않고 승승장구 하도록 편달하는 긍정적에너지로 되리라 믿는다.   《연변일보 50년사》가 필자에게 준 감명과 계시는 크게 네가지였다.   하나는 주당위기관지로서 자치지역으로서 연변에서 당의 로선 방침 정책을 조선족들에게 전파하고 정확한 여론선도 역할로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로서 지역의 진화와 타민족과의 화합을 이뤄 수차나 전국 민족단결 자치주로 선정되는 등 성과를 올리는데 일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현재 연변일보는 중국 전역에서 유일하게 8개면으로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조선문 당의 기관지자로 거듭났다.   다른 하나는, 중앙지도동지들의 지대한 관심이였다. 1962년 6월 23일 주은래 총리는 연변시찰시 >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조선문 신문을 잘 꾸릴것을 원 주당위서기 주덕해 등 주당위 지도자들에게 지시했다. 80 년대 초반 당시 주당위 제1서기였던 조남기는 연변일보는 조문 판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문판을 위주로 한다는 것은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 연변에서 마땅히 자치민족의 문자로 된 신문을 앞자리에 놓아야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원편제와 경비 예산면에서 우선 조문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전제하에 조한문 을 고루 돌봐야 한다고 밝히고있다. 세월은 흘러도 연변일보 조문판을 우선시할 데 관한 지도자들의 지시는 자치주당정 의 드팀없는 민족언론관으로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는 “자치주기관은 직무를 리행할 때 조선어와 조선문, 한어와 한문을 통용하되 조선언어문자를 위주로 한다”는 자치주 조선 언어문자사업조례와 맥락을 함께하고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연 변일보 조문판은 법적으로 건실하게 자랄수 있는 생존발전여건 을 충분히 보장받아야 한다.   또 민족언론지의 용기있는 책임적자세에 힘입은 지상토론의 활성화였다. 70년대 후반 화룡농민 오모가 500원을 주고 산 소를 6개월간 길러 1500원을 받고 팔아버린 사건을 두고 “자본주의적 소되거리”라며 당지에서 시비가 자자할 때 연변일보가 대담하게 벌린 소매매사건 지상토론, 룡정 어느 농촌에서 장려처분문제로 쟁론이 벌어졌을 때 ‘큰 솥밥’을 먹던 평균주의경향타파와 관련하여 벌린 지상토론, 80년대 중반 같은 자연조건하에서 조선족농민과 한족농민의 수입차이를 두고 조선 족농민들이 ‘큰돈’, ‘덕대돈’만 바라고 ‘티끝모아 태산’이라는 치 부의식이 부족함을 꼬집은 지상토론들은 민족언론지의 감당의식 으로 연변농촌개혁의 여론안내역할을 훌륭히 해내여 광범한 조선족농민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촉매제로 거듭나는 허다한 지 상토론사례가운데서 전형모델이라 할수 있다. 오늘날 조선족사회전반이 민족대이동의 급물살로 몸살을 앓고있으며 많은 문제점들이 불거져나오고있는 시점에서 지난세기에 연변일보가 활발히 벌려왔던 지상토론진수를 살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언론 의 우세를 부활시키고 조선족사회여론의 구심점을 형성해갈수 있는 명지한 선택이라 하겠다.   마지막 하나는, 창의력으로 만들어낸 민족언론지의 폭넓고 통큰 합동취재였다. 1996년 9월 23일 ‘연변일보’는 ‘대서 특기할 일대장거’라는 표제로 연변일보사, 연변TV방송국 ‘조국 만리변경기행’공동취재팀 출정소식을 1면 톱으로 다뤘다. ‘력사 의 한페지로 기록될 연변일보, 연변TV의 조국만리변경기행 취재팀은 훈춘경신의 방천, 동북아 중국국경선인 토자비에서 23 일 오후 3시 첫 코스로 출발하였다. 이로써 장장 7개월이 걸릴 특별취재활동이 정식으로 막을 펼쳤다. 그 당 시 연변TV방송국 책임자로서의 필자는 이 특별취재활동의 성공포인트는 ‘합동’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연변언론사상 전무후 무한 연변의 두 주류언론매체의 공감대가 일궈낸 합작품이였다. 북경에서 개최한 중국기자협회 및 수도 부분적 언론사가 참가한 ‘조국만리변경기행’취재활동 상황회보회에서 중국기자협회 서기 처서기 소동생이 ‘연변일보사와 연변TV방송국에서 련합으로 대규모취재활동을 벌린것은 우리 나라 보도계의 일대 장거’라면 서 격정 넘친 극찬을 해주던 그 장면이 지금도 필자의 눈앞에 선하다. 오늘날 전통매체와 현대매체의 융합을 주창하는 다매체 멀티미디어시대의 흐름속에서 지난세기 연변일보와 연변TV가 찰떡궁합으로 빚어낸 공동취재장거야말로 우리민족언론의 새로 운 매력으로 부활돼야 할 ‘플레이’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2005년에 진행됐던 대형 기획 취재 >는 중국내 10개 대도시의 조선족들의 생활상을 다각적인 파노라마로 펼쳐 변화의 시점에서 일등 시민들으로 거듭나는 민족의 당위성과 우수성을 진실한 르포로 보여줬다...   창사 70년을 맞는 연변일보는 새로운 변화와 부흥의 길목에 서있다. 후배들에 의해 지켜지고있는 민족언론의 위상은 여전하 다. 지난해 전국언론사 비교평가에서 연변일보는 민족언론지로서 서렬 66번째로 ‘전국 100강언론사’그룹에 들었다. 따라서 길림성당위 선전부로부터 유일하게 ‘전 성 매체융합발전’시행단위로 선정되였다. 이는 주로 연변일보 조선문의 지역적 한계를 딛고 세계를 향한 해외 전파력 등을 감안한 대표적인 뉴미디어 부흥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연변일보가 지금까지 향유하고있는 모든 우세가 잘 접속될 때 연변일보가 발산하는 ‘빛’은 더없이 찬란 하리라 사료된다.   하지만 모든 사물이 량면성을 띄듯 연변일보의 ‘빛’과 더불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그림자’가 따라붙어있음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뉴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력이 부족한 연변일보 조문판의 운영상황은 무언의 경고메세지로 ‘그림자’폭을 서서히 확대하고있어 우려스럽다. 지난세기 90년대까지만 해도 편제안의 취재편집기자가 120 여명이였으나 지금은 겨우 54명, 기타 18명은 ‘신분보장’ 이 전혀 없는 비 정규직 계약기자로서 조선족 제1언론지의 지위와 어울 리지 않는 위험수위에 로출돼있다. 연변일보는 현재 선진적인 설비 투자에도 불구하고 인재수요의 ‘갈증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으며 더우기 연변일보 조문판은 비정규직 기자( 계약기자)들의 정규직 전환이 이어지지 않은 탓에 인재류실이 가시화되는 추세를 잠재울수가 없다...   현재 연변일보는 인재수요의 ‘갈증’ 에 허덕이고 있다. 비정규직 기자들이 정식 시험을 통한 정규직 편제내로 전환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인재류실이 가시화되는 추세를 잠재울수 없는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 있다. 연변일보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남다른 애착으로 비정규직 기자(계약기자)로 몇년씩 청춘을 불태우며 근무했으나 정규입사시험이 오래동안 비여있어 결국 다른 업종으로 직장을 바뀌여야 하는 현실이 가슴아프지 않을수 없다. 이는 단순한 연변일보 민족언론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족의 운명과 직결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자치주당정의 배려, 언론사 자체의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 사회 여러분야의 성원에 힘입은 연변일보의 부흥이 절실하다.   창사 70년을 전기로 새로운 스타트선에 선 연변일보인들은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땀과 정성과 슬기로 조선족 제1언론지의 새 기원을 열어나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당과 정부의 따뜻한 독려와 지원 그리고 자체의 각고의 노력 등으로 이제 찬란한 ‘빛’이 솟구칠 순간을 기대해본다. 역시《연변일보 50년사》에서 발췌해낸 말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련다 –   ‘력사는 기백있고 용기있는 자들의 것’, ‘력사는 창의력을 앞세 운 슬기로운 자들의 것’, ‘력사는 실제적인 일을 하는 부지런한 자, 강한 의지의 소유자의 것’ 연변일보 2018.4.11
73    ‘어물전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 론 댓글:  조회:2304  추천:0  2018-03-15
일전에 인터넷에서 “중국승객 175명이 나리타공항에 내려진 가운데 일본경찰이 폭력으로 한 동포를 구금하자 현장의 중국승객들이 국가를 우렁차게 불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얼핏 보면 마치도 중국승객이 일본에서 엄청난 굴욕을 당하고 민족자존심이 여지없이 짓밟힌 것처럼 비춰진다. 하지만 이 사건은 기실 항공회사와 려객들 사이에 생긴 민사분쟁으로서 력사갈등, 국가대의, 민족감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였다고 한다. 승객들은 항공회사를 질타 또는 기소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민사분쟁선에서 끝을 봐야 할 여건이지 민족주의 문제에까지 격상시킬 일은 아니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환구시보》는 나리타공항사건을 공공연히 민족주의 높이에까지 부풀린다면 그야말로 민족주의의 반면교재로 돼야 할 것이라고 몰상식한 일부 중국승객들의 행태를 비난하였다. 어물전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공항이라는 국제적 공중장소에서 내놓고 나라망신을 시키는 못난 개별적 국민들의 추태가 한심하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 같은 황당한 일을 저지르는 ‘꼴뚜기’ 들이 자주 눈에 밟힌다. 나라국력이 강대해지고 물질생활이 좀 풍요로워지니 올챙이 때를 망각하고 안하무인 격으로 도처에서 사달을 일으키는 망발을 ‘애국주의’로 합리화시키는 개별적 국민들이야말로 ‘중국굴기(崛起)’의 위업에 먹칠을 하는 ‘꼴뚜기’가 아닐 수 없다. 올 음력설기간 타이로 가족려행을 다녀왔었다. 공항터미널, 비행기기내, 면세점, 관광명소… 어디로 가든 중국 여러 려행사들의 안내기발을 따라 인파들이 몰려다니는데 고성과 괴성, 소란과 무질서가 란무하는 곳이면 당연히 중국관광객들이 모여있는 공간이였다. 타이에 도착한 이튿날 저녁 ‘동방베니스’로 불리우는 방코크의 차오프라야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 량안의 야경을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되였다. 유람선 갑판 우에 설치된 무대 우에서는 당지 연예인들이 민족음악과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은 타이연예인들이 만들어가는 이색적인 문화 분위기에 심취되여 기분 좋게 야경을 즐기고 있었는데 돌연히 중국 남방관광객들 속에서 두억시니 같은 장신의 젊은이가 무대 우로 뛰여올라가 진행자의 마이크를 낚아채더니 자기는 중국에서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더니 듣기 구차한 괴성의 엇박자로 중국노래를 불러대는 것이였다. 타이문화 뜨거운 분위기에 빠져있던 여러 나라 관광객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일부는 량미간을 찌프리고 일부는 그 어떤 미지의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괴상한 행태를 구경하듯한 놀라운 표정이였다. 뒤이어 중국 남녀관광객 몇몇이 무대에 뛰여올라 아예 타이연예인들의 공연무대를 석권하더니 자기들 광란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무분별하고 방종한 행태에서는 ‘우리가 좋아서 맘껏 즐기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도전적인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필자는 낯이 붉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중국동포들도 ‘어물전망신은 너희 꼴뚜기들이 다 시키는구나’는 눈치였다. “강산은 바뀌기 쉬워도 타고난 사람의 본성은 바뀌기 어렵다” 는 말이 있다. 몇천년을 아우르는 문화루적, 풍속전통, 대환경과 대기후를 거치며 형성된 중화민족의 국민성은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발전과 진보를 거듭하는 중국은 성형수술을 거친 미인으로, 그 외모는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찬란하지만 국민소질은 그렇지 못하다”고 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국민성을 신랄하게 지적하고있다. 나리타공항이나 방코크유람선에서 발생한 개별적 국민들의 추태는 우리 국민성의 현주소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개별적 ‘꼴뚜기’의 장난이래도 국제사회에서 어설픈 불협화음으로 야기되면서 ‘평화굴기’를 실천하고 있는 우리 나라 대외형상을 훼손시키는 부정적 요소로 될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국민이랄 때 자기 나라가 더 빨리, 더 좋게 발전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자신의 콤플렉스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아야 하고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는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공동체이다. 민족단결, 민족평등, 민족상호존중은 우리 당과 정부가 일관하게 강조해온 중화부흥의 기본토대이다. 하지만 일부 ‘꼴뚜기’들이 물을 흐리우고 있어 안타깝다. 지난해 조선족 산재지역에서 민족언어를 구사한 조선족 젊은이를 향해 한어로 말하라며 눈을 부라리며 횡포를 부렸던 깡패 같은 망나니는 물론 개별적이지만 얼마나 많은 조선족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혔는지 모른다. 지금도 주안의 공중기관이나 공중장소에서 한어를 몰라 조선말로 용무를 보는 조선족 어르신들이 개별적 타민족일군들의 차거운 시선과 곱지 않은 태도에 주눅이 들어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한둘의 한족이 있어도 배려차원에서 한어로 말하는 데 습관돼온 언어환경이 빚어낸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섯차례나 국가로부터 민족단결진보선진으로 추대받은 모범자치주와는 거리가 있는 살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상황이 극소수의 ‘꼴뚜기’들에 의해 벌어지면서 나라의 민족정책에 악영향을 끼치고 조선족과 기타 민족의 수십년간 이어온 공존공생의 아름다운 인문풍토를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어물전의 꼴뚜기, 좌시할 수만은 없다. 어물전을 살리고 어물전의 매력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마구 날뛰는 개별적인 꼴뚜기들을 잠재우거나 제거하여야 할 것이다. 습근평 총서기는 19차 당대회 보고에서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사회발전의 여러 면에 융합시키며 그것을 사람들의 의식공감대로, 행위습관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전 국민들 속에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이 ‘의식공감대’와 ‘행위습관’으로 자리잡았을 때 ‘꼴뚜기’들의 설자리는 없을 것이다. 연변일보 2018.3.14
72    잃은 것과 얻은 것 댓글:  조회:3581  추천:0  2018-03-01
50년이 지났다.   이른바 지식청년이라는 감투를 쓰고 상산하향 (上山 下乡) 운동의 급류에 휘말려 ‘광활한 천지’로 내몰렸던 지가 올해로 꼭 50년이 된다.   반세기가 흘러 ‘지식청년’, ‘집체호’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으로 되여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 하는데 저 산너머에 묻고온 청춘비극의 가슴 허비는 황홀한 악몽과 그리운 추억으로 점철된 그 시절의 애틋한 정감 속에 무시로 빠져버리군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그 시대를 몸으로 겪어온 수천만 ‘로싼제 (老 三届)’들의 일원으로서 쉽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할 것 같다.   문화대혁명 10년동란 속에서 정치운동으로 격상된 지식청년상산하향운동은 중국력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고 수천만 지식청년들에게 불행한 운명을 안겨준 전대미문의 력사사건이였다. 이 운동의 기원과 목적, 과정과 결과 그리고 이 운동이 구현한 정치색채, 사회충돌과 가치관념은 여하하든 지식청년세대는 공화국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군체라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고 지식청년세대의 공동한 감수이다.   제3차공업혁명의 물결이 지구촌을 휩쓸며 인류가 우주공간 정복시대에 들어서고 있을 때 중소학교 학력의 청소년들을 학교가 아닌 산간벽지로 보내여 원시로동에 매운 ‘재교육’을 받게 한 자체가 인간의 퇴화, 사회의 퇴보를 의미하는 한심한 실책일 수밖에 없었다.   고삐 풀린 말처럼 산간벽지로 몰려가던 호호탕탕한 대흐름이 결국 10년동란의 종말과 더불어 도시에 다시 목을 매는 허탈한 귀성흐름으로 반전되면서 상산하향 운동 비극의 막이 내려졌지만 지식청년 매개인들의 인생은 또 다른 고민과 시련을 마주해야 했다. 황페화된 학력구조에 의해 지식경제시대와 어울리지 못하면서 도시산업현장에서 2차 희생양으로 추락하게 될 새로운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 10년과 반죽되면서 정치운동으로 변질된 상산하향이 도시중학생들에게는 불행의 ‘예고편’이였다면 귀성 후의 도시산업 현장은 불행의 ‘련옥(炼狱)편’이였다.   “큰 슬픔은 불행한 자를 변모시키는 신성한 빛이다.” (빅또르 유고) 지식청년 상산하향 운동이 수천만 청년학생들에게는 ‘슬픔’을 안겨준 ‘불행’임이 분명하였지만 이 슬픔은 동시에 불행한 청년학생들을 ‘변모’시키는 ‘신성한 빛’으로 작용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며 자립자강하는 굴강한 의지의 소유자로 되게 한 것도 사실이다. 어린 나이에 렬악한 사회생활에 내몰리여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인생의 달고 쓴 맛을 일찌기 맛보면서 이 세대는 책임감을 키웠고 강인한 의지와 적응력을 키웠으며 열혈청소년으로부터 리성과 사고를 앞세운 젊은이로 탈바꿈할수 있었다. ‘농’자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도시청년학생들의 농촌관, 농민관 의식을 싹트게 한 점은 상산하향 운동의 목적여하를 떠나 긍정적으로 평가돼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고희년을 바라보거나 훌쩍 넘긴 당년의 지식 청년세대들은 통상적으로 중국농민의 진실한 생활상황 을 료해할 수 있었던 것이 상산하향운동에서의 한차례 중요한 공부, 유익한 경험이였으며 이 또한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의 가장 가치 있고 영향력을 내재한 면이 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런대로 상산하향의 비극에서 얻어 낸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 속담에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문화혁명세월 속의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이 지식 청년세대에게 들씌운 불행과 그 비극적성질을 긍정하는 전제하에서 이 비극이 청년학생들에게는 특이한 ‘인생 대학’으로 되여 소중한 인생단련을 체험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인생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상산하향운동의 ‘실’과 ‘득’, 그 까닭에 필자는 상산하향운동을 ‘황홀한 악몽, 그리운 추억’으로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50년이 지났다.   그 시절의 지식청년세대는 인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가고 있다. 산천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 농촌의 변혁은 심각하다. 전통농업이 현대농업으로의 전환은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 농촌은 엄청난 리념변화를 겪고 있다. 인민공사화시절의 유적들인 우사칸, 건조실, 공소사 건물들과 더불어 지식청년집체호 토벽집들은 유령처럼 잡초와 쑥대밭 속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대신 새농촌건설의 동음이 도처에서 새로운 현대화 농업의 부흥을 예고하고있다.   이제 더는 50년 전과 같은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3농(농업, 농촌, 농민)’이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무거운 화제로 되고 있는한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농촌을 알게 하고 농민의 삶을 리해하게 하며 농업의 함의를 터득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나 통로는 있어야 한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후대교육의 방향타를 설정함에있어서 인간육성이라는 핵심리념을 현실화할 대안이 허술한 오늘의 현실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중소학교의 농촌모내기, 농작물 거두어들이기 지원로동 같은 미래지향적인 실천로동의 부활이 요청될 때라고 생각한다. 농민을 알게 하고 농촌을 알게 하는 들창이 꼭 있어야 한다.   50년이 지난 오늘, 비극의 상산하향운동을 들먹이는 것은 결코 슬픔을 다시 체험해보려는 여유로운 사치가 아니라 그 비극의 부정적 성격을 재조명하고 비극희생 양들의 긍정적인 자세를 분명히 하면서 깨지고 짓밟힌 아름다움의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따라서 지식청년현상이 오늘날 우리한테 주는 계시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자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50년 세월이 지난 후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을 조감해보니 그야말로 희비가 엇갈리고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   요즘 ‘우리 이 세대’라는 노래가 지식청년로병들 속에서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노래가사에는 이같은 내용이 번뜩인다 –   “우리 이 세대 / 인내를 배워내고 후회를 삼키며 시고 달고 쓰고 매운 인생고배술 / 얼마나 삼켰더냐? 로심초사 다 겪으며 / 인생수험료 다 냈거늘 우리 이 세대 / 사람되는 리치 진정으로 깨쳤네. 그 인생에 후회 없다네.”   50년 전 지식청년 로일대 삶의 경지가 꿈틀대는 이 멋진 토로가 우리 후대들의 거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연변일보 2018.2.28
71    우리 고장의 이미지 우리 스스로 지켜야 댓글:  조회:2432  추천:0  2018-01-19
그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지역과 민족사회는 국가충성도와 정치신앙에서 무형의 검증 “문턱”을 거치기 마련이다. 특히 변강소수민족 지구일 경우 더구나 그렇지 않을가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는 연변을 포함하여 25개의 민족자치주가 변경 선에 포진되여 있으며 조선족을 망라하여 56개 민족이 중화대 가정을 이루고있다. 그렇다면 25개 민족자치주 가운데서 연변의 국가충성도 서렬을 몇번째로 매길수 있을가? 조선족은 56개 민족 가운데서 정치신앙급수가 얼마나 높을가? 그 답을 류추해 낼 시스템은 긍정적으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민족력사와의 접근법으로 풀이해보는건 무리가 없으리라는 느낌이다.   요즘 와서 필자는 은근히 이 점에 생각이 많이 미치는 것을 어쩔수 없다. 아마도 반도의 랭전기류와 연변의 지정학적 좌표 에서 오는 관심에서 기인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조선족 구성 원 모두가 심각하게 대해야 할 화제가 아닐가 생각한다.   지난 100여년의 파란만장한 세월속에 우리 선대들에 의해 구축되고 후대들에 의해 전승돼 온 연변과 조선족의 형상은 더없이 찬란하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영광스런 혁명투쟁력사를 자랑하는 로혁명근거지”,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 등 표현은 연변의 국가충성도를 단적 으로 시사하는 가장 적중한 신분부호로서 25개 민족자치주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지역이 아닐가 생각한다.   조선족의 정치신앙은 더구나 화려하다고 할수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해방전쟁기간에 연변지구에서 참군한 인수가 5만1천여명, 그 가운데 조선족이 85%를 차지하며 항일 전쟁 과 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연변지구의 렬사가 1만4천7백 여 명, 그 가운데 조선족이 97% 이상을 차지한다. 모택동주석이 공화 국의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들의 선혈이 스며있다고 한 절찬을 유력하게 받쳐주는 증거가 아닐수 없다. 조선족의 정치신앙 급수를 이보다 더 설득력있게 립증하는 사례가 또 있을가? 필자는 30여년전 로일대 조선족지도자가 “연변 로혁명근거 지 혁명유산은 선대들이 후대들에게 남겨준 가장 값진 호신부” 라고 하던 말을 기억하고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 말의 깊은 의미가 가슴속 깊이 안겨온다.   우리 민족 력사에 자호감을 가지고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 가라는 선대들의 부탁에는 선대들이 이룩해놓은 조선족이미지를 잘 지켜나가라는 깊은 뜻도 내포되여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족은 천입민족이다. 천입민족이라는 조선족의 좌표에서 우리가 리념적으로 갖춰야 할 자세가 바로 재중교포의식이 아닌 중국조선족의식의 확고한 정립이다. 남의 땅에 와 산다는 틀린 시각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이 땅을 개척하고 우리 민족이 기타 민족과 더불어 이 땅을 지켜내고 건설하여 나라의 인정을 받은 중국소수민족 일원으로서의 립지를 확실히 다지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민족 대류동이 가시화되고있는 때 이같은 의식이 함몰된 다면 조선족은 전도가 암울할 것이다.   천입민족은 토착민족과 구별되는 호칭으로서 이 말에는 가변 적인 요인이 함유되여 있다. 학계는 조선족에 대해 이렇게 평가 하고있다 – 이주(迁移)는 조선족의 특징으로서 영원히 높은 데로 류동하려한다. 나름대로 이 해석에는 조선족의 쉼없는 추구와 향상정신이 내포되여 있으나 다른 일면 한곳에 영원히 정착하려않는 가변성을 띄고있어 조선족의 긍정적 이미지를 흐리우는 역효과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해외로무송출로 특징지어지는 조선족대이동이 조선족 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글로벌화에 부응하는 조선족들의 관념 변화를 이끌어내며 자치주 외향성경제의 중요한 엔진으로 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할 바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대류동이 “조선 족 이미지를 지킨다”는 소박한 자세에서 “조선족 이미지를 쇄신 한다”는 현대적 리념에로의 전환을 부추키는 위대한 변혁의 긍정적 에너지로 된다는 점 또한 고무적이라 본다.   하지만 해외로무송출로 초래된 수십만 조선족인구의 “탈연변” 영구화 현실은 간과할 수만 없는 상황이다. 연변의 조선족 호적 인구는 79만이라지만 현재 한국으로 나간 로무자가 30만으로 집계되여있고 거기에다 국내외 기타지역에 나가있는 조선족까지 합치면 거의 절반 인구가 연변을 빠져나가있다는 말 이 된다. 조선족 산재지역과 달리 연변은 조선족자치주이다. 이같은 인구류동추세가 한계를 벗어날 때 자치주성채는 위기를 맞을 것이고 그 존재의미가 소실될 것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영광스런 혁명투쟁력사를 자랑하는 로혁명근거지”,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 연변상징아이 콘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며 조선족의 국가충성도, 정치신앙급수도 모두 백지화되면서 조선족의 “호신부”는 아리숭 한 옛말로 돼버릴 것이다. 무릇 조선족이라면 이같은 상황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나가는 우환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갖지 못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천시당하는 천덕꾸러기로 정착하게 될 것입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새중국이 탄생되기 전야 조국관과 민족정체 성으로 갈등하며 반도이동을 서둘르는 조선족동포들을 향해 터쳐낸 초대 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이 절절한 호소가 당시 광범한 조선족민중을 이 땅에 결집시킨 안정제로 되였다면 오늘날 조선족 구성원들 모두에게는 연변 이미지를 지키라는 절박한 경고메세지로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난날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며 구축한 연변의 국가충성도와 조선족의 굳센 정치신앙이 새로운 력사시기에도 끄떡없도록 지켜주는 호신부로 되리라 믿는다. 연변일보 201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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