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 한식점 세 개를 세운 김경사장
[길림신문 2011-07-14 김성걸 전춘봉 기자]
인도양의 섬나라 싱가포르에 조선족이 경영하는 음식점이 있다는 소식은 마음의 고삐를 끈질기게 잡아끌었다. 고향이 길림인 김경사장은 어떻게 되여 수천만리 떨어진 이 낯선 고장에 정착했을가?
그 궁금중을 풀고저 북경에서 려객기에 올라 꼬박 6시간만에 싱가포르에 도착, 공항에 마중나온 김경사장은 9척 키에 둥글넙적한 얼굴의 미남. 혼다 승용차로 또 30분 달려 호텔 부근의 스낵점에 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실패자의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기 싫었다
그의 이야기는 1990년도에 흑룡강민족경제개발공사의 파견으로 싱가포르에 오게 된 사연부터 시작되였다.
《당시 이곳에는 민족경제개발회사의 소속인 3개 계렬사 즉 무역회사, 선박회사, 투자회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한계단 리사로 있다가 3년후에는 대표리사로 임명되여 3개 회사의 운영을 도맡게 되었지요. 한때 한국의 럭키금성, SK, LG 등 회사들과 거래하면서 경기가 좋았습니다. 화물선만도 5척이나 움직였지요. 그러던중 1997년 IMF가 터지면서 회사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몇 달 사이에 파산되는 운명을 면치못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갑자기 들이닥친 금융위기로 회사가 부도나면서 그 뒤수습을 하느라고 고생하던 한단락의 경력을 가슴아프게 회고했다. 경제장부를 정리하고 거래처와의 일부 업무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거의 2년이란 시간을 끌었는데 그 과정에 탈세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구속되고 나아가서 법원의 직결심판을 받는 액운도 면치못했다.
게다가 회사가 파탄되면서 남긴 빚 2000만 딸라(싱가포르 화페)를 짊어지게 되여 경제적 및 정신적부담이 더욱 가중해졌다.조속히 빚을 물라는 성화에 못이겨 채무자들과 협상도 해보고 잠시 피신도 하면서 달래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모든걸 팽개치고 싱가포르를 떠나려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실패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는 싫었다. 가혹한 현실앞에서 그는 한동안 어쩔바를 몰라 망설이였다.
시 중심가에 자리잡은 첫 한식점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생각한게 바로 한식점이였다. 허나 초기에는 자금이 부족해 가게도 얻지못한 상태에서 한국식만두를 제조해 판매하기로 하고 먼저 장모와 안해를 두어달동안 한국음식점에 보내 배우게 했다.
운수가 따라서인지는 모르나 안해가 아껴 쓰며 모아두었던 적은 밑천으로 만두를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하였는데 주문량이 꽤 많았다. 초기에는 주로 당지에 와 있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했으나 차차 싱가포르인들에게 먹혀 들어가게 되면서 밤새도록 빚어도 공급이 딸리는 상황이였다. 세 식구의 부지런한 손으로 빚어진 만두는 이렇게 수없이 팔려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싱가포르에 정착한 이 조선족가정을 알게 되였다. 김경사장은 장사도 장사겠지만 우리의 음식 하나를 싱가포르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데서 더욱 기뻤다고 말했다.
자금이 얼마간 축적되자 김경은 1995년 시 중심가에 있는 중앙광장에 첫 한식점을 오픈, 조선족으로서는 첫 사례였다. 메뉴에 랭면, 장국, 비빔밥 등 전통 한국음식 25종류를 올려 판매하기 시작, 그런데 생각밖으로 장사가 별로였다. 하루 영업을 결속짓고 보니 장국 주문량이 한그릇밖에 안되였다. 랭면이나 비빔밥같은것도 몇그릇 안되여 실망 끝에 한숨만 나갔다.
《알고보니 이곳 사람들은 한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시장에 한식점이 들어선것도 처음이라 우리의 음식에 대한 료해도 없었구요. 온 하루동안 장국 한그릇밖에 팔지못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였지요.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습니다. 허나 그만둘수는 없었지요. 투자가 많이 들어간것도 있겠지만 이곳에 정말 한식이 안될가 믿기지가 않았기때문이였습니다.》
몇 달동안 적자만 계속되여 안타까운 마음 어쩔수없었지만 물러설수는 없었다. 김경은 거듭되는 사고를 거쳐 과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우리의 음식은 어떤 사람이든 반드시 접수할 수 있고 맛을 들일수있을것이라 판정, 내심하게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항상 직원들과 음식점 정황을 료해한다
한식의 매력을 충분히 과시 매상고 최고기록 돌파
《혹시 한식이 당지 사람들의 식성에 맞지 않는 음식이 아닐가 의심스러워 장국을 먹어본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그게 아니였습니다. 그외 랭면, 비빔밥, 떡볶이 등 음식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니 역시 먹을만하다고 하겠지요.》
음식이 팔리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 달래며 시장 조사하던중 그는 한식에 대한 홍보가 중요하다는걸 거듭 인식했다. 매일 직접 음식점 앞에 나서서 류창한 영어로 한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문을 선동했다. 음식에 대한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손님이 식사를 마친 순간에 금방 다가가 물어보고 한국식 례절로 깎듯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는 행동에 앞서 빠른 눈치로 장사에 림하라고 교육했다.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먼저 눈치채고 손님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또 무엇에 불만족해 하는가를 먼저 눈치채라는것이다. 다음 즉각 행동에 옮겨 세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처리할것을 요구했다. 한계단 끈질긴 노력 끝에 외면당하던 한식점이 차차 손님을 끌게 되어 음식이 제법 잘 팔려나갔다.
일손이 딸릴 때는 사장이 따로없다
손님 유치를 위한 노력도 중요했겠지만 한류(韓流)의 힘을 입은것도 시인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김경사장은 긍정적으로 말했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장편 드라마《대장금》이 방송되면서 바야흐로 한류의 물결이 일었다. 이 드라마를 통해 당지인들은 한국문화에 대해 보다 광범하게 리해하게 되었는데 경제, 상업 등 분야에서 새로운 기상이 나타났다. 한국의 상품이 대거 싱가포르에 흘러들었고 한식점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장국이 어떤 음식인지 모르던 사람들이 한류의 영향으로 비로소 한국의 음식문화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한 1년 지났을가, 음식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매상고도 엄청 뛰여올랐지요. 하루 장국 주문량이 두어그릇으로부터 150그릇에 육박하는 기록을 창조하였으며 랭면의 판매량은 더 기적적이여서 거의 200그릇에 달하였지요.》
한식점을 오픈하여 1년여시간만에 호황기를 맞은 김경은 이때라 하고 분점 두곳을 더 증가했다.역시 대박이였다. 15명이나 되는 중국인 일군을 추가로 모집해 배치하고 메뉴에도 음식종류를 더 추가했다.
특히 중앙시장내에는 중국, 한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등 10여개 나라의 음식점이 자리를 잡고있어 사실상 날마다 나라지간의 음식경쟁이 벌어지고있는 상태였다. 어찌보면 이곳은 또 다국가, 다민족의 음식문화가 집결된 곳으로 국제적인 교류와 래왕이 빈번한 장소이기도 했다. 시간적으로 좀 늦게 오픈한 김경의 한식점은 초기에는 전혀 경쟁력이 없는 약자로 렬세에 처했지만 2년 후에는 한달 매상고 10만딸러 올려 중앙시장내에서 최고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룩, 하여 여러 나라 음식전문가들과 음식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하루에 랭면 5그릇도 팔지 못해 한산했던 한식점에 어느사이에 찾아드는 손님들로 빌새없자 한식이 이처럼 매력이 있는줄 몰랐다며 탄복했다. 2008년에 김경사장은 싱가포르명상식품기업을 정식으로 동록, 이 기업의 대표리사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는 우리의 음식을 판매한다는 의미에서보다는 우리의 음식문화를 이곳에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경사장님이 경영하는 한 음식점 일각
이역땅에서 20여년 허나 고향을 잊지 못하는 마음은 여전해
1977년 할빈과기대학 기계전문학부를 나온 김경사장은 젊었을때 소원이 기업가와 기자였다.그 꿈을 이루고저 선후하여 할빈시 대외무역공사기계수출입부, 흑룡강성민족경제개발총공사 수출입부, 싱가포르다이선박회사 등 부문에서 요직을 담임, 창조적인 기질이 있고 사업성과가 돌출해 회사의 신임을 얻었다. 국제무역이 흥성할 때는 세계 50여개 나라를 누비며 활약했고 이름있는 국제적인 비즈니스맨으로 소문났었다.
그의 영어수준은 프로급이였다.국제무역을 하면서 통역을 두었으나 불편한점도 많고 어떤 중요한 일들은 직접 통화해야하기에 통역에만 의거할 수 없어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사무실이든 집이든 지어 출장길 어느 호텔에서든 짬만 있으면 록음기를 틀어놓고 듣고 외웠다. 한밤중에도 국제방송을 들으면서 단 한 개의 단어라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2년 사이에 그의 영어주순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와 통역없이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국제적인 비즈니스에서 영어는 공통어나 다름없기에 비즈니스종사자로서 영어는 기본이여야한다고 귀뜸했다.
책보기 좋아하고 글쓰기에도 남다른 흥취를 가진 그는 한때 북경에서 길림신문특약기자로도 있었으며 월간《좋은 아침》특별기고인으로 되어 적지 않는 글을 발표했다. 여직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이맹희(삼성 이건희 회장 동생)의 《다하지 못한 이야기》라고 했다.
싱가포르경찰학교에서 아들(김효성)의 졸업식때 남긴 가족사진
그의 소개에 의하면 현재 싱가포르에 70명에 달하는 조선족이 있으며 그중 본인은 첫 영주권 취득자라고 했다. 고향의 소식이 궁금해 매일 인터넷을 통해 길림신문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족일간지의 뉴스를 빠짐없이 읽는다고 했다. 머나먼 섬나라 싱가포르에서도 조선족사회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고 있는 그였다.
어느덧 고향을 떠나 수륙만리 이역 땅에서 남다른 삶을 영위하여 20여년, 허나 고향을 잊지못해하는 김경사장의 마음은 여전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