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내 꿈은《북경사람들 모두 한복을 입는것》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2월28일 08시45분    조회:2524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길림신문 2011-02-25 유경봉 박광익 특약기자]

딸의 독일류학꿈을 이뤄주기 위해 상경

《독일에 류학가고싶다》는 8살 어린 딸의 말 한마디에 연길에서 공직을 사퇴하고 북경에 진출한지 11년, 그동안 딸의 꿈을 이뤄주고 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조선족사회의 《스타부부》가 있다.

그들이 바로 망경 박태국제(博泰国际) A구 1511실에 위치한 북경민족한복판매쎈터의 사장인 유성만(俞成万 46), 김복란(金福兰 46) 부부이다.

2000년, 연길시공안국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유성만과 소영신용사 신대과 회계로 있던 김복란 부부는 소학교 3학년에 다니는 8살난 어린 딸 유송희가 우연히 던진 말 《나도 유매언니(사촌), 유해오빠(사촌)처럼 독일에 류학가서 박사가 되고싶어요》라는 한마디에 무작정 북경에 진출했다.

연길시공안국 진학파출소, 간수소, 호정과, 연집파출소 등 단위에서 근무하며 《연길시 10대우수경찰》, 시공안국의 《10대우수당원》의 영예까지 따내며 평범하지만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던 유성만은 당시 아이에게 독일어를 가르칠만한 우수한 교원은 북경과 상해에만 있었기에 우수한 교육환경을 마련해주려고 북경에 진출하게 됐다고 한다.

유성만(뒤줄 오른쪽), 김복란(뒤줄 왼쪽)부부가 리덕수 등 지도자들을 모시고

상경 11년만에 북경 한복업종의 《맏형》으로

2000년, 친구의 소개로 북경 조양구의 녀인거리에 5평방메터의 가게를 3만원에 사서 《복란한복점》을 차린 유성만은 11년이 지난 지금 북경의 한복업종의 《맏형》으로 공인받고있다. 70여세되는 한복점 사장도 46세의 유성만에게 허리 굽혀 《선배님》이라고 공손히 부른다.

하지만 창업초기, 이들 부부 역시 여느 창업주들에 못지 않게 갖은 고생을 겪었다.

창업 1년반만에 25평방메터의 한복집을 오픈, 2년반후에 20평방짜리 추가하여 한복과 이불을 팔기 위해 유성만은 매일 키가 넘는 이불짐을 메고 공공뻐스를 타고 다니며 북경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몇년동안 한어가 능숙하지 못해 한족들에게 괄시당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며 유성만은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창업초기까지만 해도 북경에는 한복가게가 없었는데 유성만이 한복가게를 차리며 북경에서 한복시장을 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 한복장사가 불경기에 처하여 유성만부부는 한국대사관부근에 두칸짜리 68평방메터 주택을 세맡아 민박집을 시작, 대사관에 비자받으러 오는 로무일군과 류학 지망생들에게 매인당 매일 50원씩 받으며 성별을 나누어 두방을 내주고 세식구는 비좁은 주방 바닥에 이불을 펴놓고 잤다.

《민상궁》과 유성만가족.

《대장금》의 《민상궁》이 한복집을 노크, 매출이 두배로

그렇게 5년동안 밑지면서도 항상 베풀기만 하며 큰 곡절없이 장사를 하던 유성만의 문전을 《대박》의 기회가 노크했다.

2005년의 어느날, 유성만의 가게에 한 한국녀성이 찾아와서 한복 세탁을 맡겼다. 유성만은 다른 고객들에게도 하냥 그러했듯이 전문세탁집에 가져다가 세탁해온 한복을 주름 한곳 없이 깔끔히 다림질까지 해줬다. 몇번 유성만의 가게를 찾으며 번마다 그의 정성에 감동받은 이 한국녀성이 어느날 갑자기 한류스타 한명을 데리고 유성만의 가게를 찾았다.

그 한류스타가 바로 2003년-2004년사이 아세아에 히트쳤던 한국 대하드라마 《대장금》에서 《가늘고 길게 살자》 한마디를 관중들사이에 류행어로 만들며 인기를 누볐던 《민상궁》-탤런트 김소이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김소이를 데려온 그 한국녀성은 중국에서의 한복과 한식 보급정황을 취재하러 북경에 파견된 한국 KBS 북경주재 기자였다.

김소이를 취재하러 온 한국의 KBS, MBC 및 중국의 관광TV, 북경TV, 생활채널 등 여러 매체의 40여명 기자의 렌즈가 조명한 가운데 유성만의 한복가게는 북경은 물론, 중국과 한국의 방방곳곳에 알려졌으며 《민상궁》의 북경행으로 하여 더욱 많은 중국인들이 한복에 깊은 료해를 가지게 됐다.

유성만의 한복가게는 《민상궁이 다녀간 한복집》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한복장사는 극적인 반전을 가져왔다.

그후로 북경의 조선어 매체와 광고잡지들에서 여러달동안 무료로 홍보를 해주었고 하북성의 한 고급한국술 판매업체에서는 한복을 사다가 중국내 술판매시 한복을 한벌씩 선물로 주며 《민상궁한복집》을 홍보해주었다. 한국의 원단업체들에서도 전화가 걸려왔으며 중국의 유명 광고모델들도 여럿이나 와서 매인당 대여섯벌씩 사갔다.

2005년, 《민상궁》과 여러 매체들의 무료홍보의 덕을 입어 유성만의 한복가게의 매출은 전해보다 1배이상 증가했으며 최근 몇년동안 줄곧 그 호강세를 타고있다.

북경 민족사회에 50여만원 후원, 한족고객 더 많아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유성만은 민족사회를 잊지 않았다. 현재까지 북경 조선족사회에 기부, 후원했거나 한복을 할인하여 판매한 금액까지 따지면 적게 쳐서 50만원이 넘는다.

특히 북경시조선족로인협회 산하의 12개 조직과 합창단 등 조선족로인들은 명절이나 행사때만 되면 유성만을 찾아온다. 유성만은 로인들에게 공짜로 혹은 원가만 받고 이쁜 한복들을 성심성의껏 만들어 드린다. 그리고 한복배달을 갔다가 땀흘리며 연습하는 합창단의 로인들이 안쓰러워 《무더운 여름철에 음료수나 사 마시라》며 호주머니를 털어놓은적이 셀수 없이 많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한 200여명의 조선족로인들 역시 《민상궁한복집》에서 매우 싼 값으로 한복을 사다가 입었다.

몇년동안 민족사회의 여러 가지 행사에 물심량면으로 지원해준 덕분에 유성만의 한복가게는 널리 알려져 한족손님들도 찾아들기 시작, 이젠 한족손님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제 북경의 한족시민들도 《민상궁한복집》에 찾아와서 한복을 사입고 조선족 전통춤을 추며 BTV나 CCTV에 출연한다. 하여 목전 유성만의 가게는 해마다 1000여벌의 고급한복을 판매한다.

딸의 류학꿈 이뤄주고 사업도 대성공

부부가 딸의 류학꿈을 이루어주려고 상경했지만 유성만은 날마다 장사에 딸려있다보니 딸 송희에 대한 교육은 김복란이 전적으로 책임졌다.

김복란은 남편을 도와 장사를 하는 한편 매일 하학후 독일어학원에 가는 딸 유송희와 함께 학원에 가서 독일어를 배우기를 련속 몇년동안이나 견지했다. 하여 독일어로 어지간한 회화는 막힘이 없는 김복란은 독일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어린 딸을 돌보기 위해 독일에 자동차미용제품회사를 등록하여 독일의 자동차미영제품을 수입해들인다.

1년전에 독일에 류학가서 고중에 입학한 유송희(19)는 지난 학기 학년 1등과 1점차이로 총성적 2등을 하여 학교측에서는 이 중국류학생에 대해 매우 놀라와하는 눈치를 보였다.

교장은 선례를 타파하고 송희에게 단독숙사까지 배치해주고 자주 찾아와서 외국생활에 불편함이 없는가며 관심을 몰붓고있다.

유송희는 독일 대학순위 6위인 루싸일두프의 명문대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사촌언니 유매, 사촌오빠 유해처럼 우리 민족의 위상을 높이는 우수한 박사, 학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있다.

《온 북경사람들 누구나 한복을 입는것이 소원》이라는 유성만과 김복란, 이들 부부는 오늘도 딸의 더욱 큰 성장을 위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땀동이를 쏟고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학교 도서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는 조금숙선생님   《과학자가 되든 로동자가 되든 무슨 일을 하든지 착하고 열심히 하면 모든 곤난을 이겨낼수 있고 훤한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는 심양시 소가툰구조선족중심소학교 4학년 3반 조금숙선생님의 교육리념이다. 그는《우리 학생세대들은 앞으로 리산가족이 ...
  • 2013-07-09
  •    할빈 국제무역복장성 패션 디자이너 영란씨   (흑룡강신문=하얼빈)김은희 기자=꿈은 환경을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킬수 있는 원동력이다.   꿈은 또 한 사람의 성격, 직업, 운명까지도 개변시킬수 있다. 그가 소시적에 꿔온 '소박한 꿈'이 그를 오늘날의 할빈복장계를 주름잡는 '패션 디자이너'로...
  • 2013-07-09
  •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채택룡. 지난 2004년 6월 1일 연길공원에서 《채택룡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그날 제막식에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평론가 김만석선생은 《채택룡은 우리 아동문학에서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을 제일 처음 개척한 에누리없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이며 자격이 당당한 중국조선족아...
  • 2013-07-08
  • 항일투사 조선족문학의 대부 불굴의 공산당원 태항산에 세워진 김학철항일문학비(2005년 8월, 뒤에 보이는 비석은 2012년 6월에 호가장보위전항일렬사기념비임) 김학철(1916-2001)은 조선민족의 해방사업과 중국혁명을 위해 영용하게 싸운 항일투사이고 중국조선족문학의 대산맥을 이룬 대표적인 작가이며 불의에 과감히 도...
  • 2013-07-08
  • 한국의 낚시술로 중국고기를 낚으며 돈농사와 자식농사를 함께 잘했다 고맙게도 정녕 내가 찾던 한국을 나들이 하는 조선족의 모델을 만난 것은 지난 6월 26일이다. 백운산(白雲山), 59세, 그는 하향지식청년(고졸생), 연변화룡탄광로동자, 해방군공정병(4년), 도문시운수공사, 도문시당위판공실, 도문시과학위원회 등 공, ...
  • 2013-07-04
  • 김병민교수. 지난 5월 14일, 신록을 재촉하는 잔잔한 이슬비가 아침부터 보슬거리고 있었다. 연변대학 낡은 캠퍼스에서 신축캠퍼스로 이어지는 길가에 함초롬히 젖은 연분홍 복사꽃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다가갔더니 발치에 노란 개나리가 웃고 있었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어른과 아이, 스승과 ...
  • 2013-07-04
  • 라치환선생 라치환선생은 중국조선족으로, 동양인으로 넘을수 없는 벽으로 느껴지던 속도스케이트 철막을 헤치고 새중국 창건이후 첫 세계우승을 따낸 스포츠 명장이다. 1941년 흑룡강성 해륜시 조가툰에서 태여난 라치환선생은 1956년 수화시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속도스케이트에서의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서...
  • 2013-07-03
  • 흑룡강성 전임 정협부주석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민녀사의 이야기     2008년 6월, 항일련군 복장차림으로 항일련군 유적지를 찾은 리민녀사(자료사진). 리민 프로필 1924년 11월 5일 흑룡강성 탕원현 오동하촌에서 출생, 조선족 흑룡강성 전임 정협부주석,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해방전쟁시기인 1948년 8월 1일...
  • 2013-07-03
  • -57년간 민간문예 수집정리의 외길인생 걸어온 리룡득선생 1961년 8월,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주덕해는 《소방대가 불끄러가는》그런 속도와 마음가짐으로 민간문예자료를 수집할것을 호소하였다. 민족문화를 계승, 보호, 발전시키기 위한데서 이보다 더 절박한 표현이 또 있을가?! 개혁개방이후 홍수처럼 밀려...
  • 2013-07-03
  • ㅡ서풍현 강관화현장 인상기 프로필: 1963년 길림성 반석현 출생 1988년 심양사범대학 생물학부 졸업 1988년부터 철령시대외무역경제합작국 과원, 부과장, 과장, 부국장, 국장 2004년부터 철령시과학기술국 국장 2011년부터 철령시 청하구 구장 2012년 10월 현재 서풍현 현장, 성인대 대표.   지난세기 50€?0년대에는...
  • 2013-07-0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