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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많은 동심을 선률에 담아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2월2일 09시32분    조회: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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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대학부속중학교 고급교사이며 과외작곡가인 최나의 이야기

    6월 12일, 연길시록원호텔에서 연변음악가협회, 연변아동음악학회에서 주최한 최나소년아동가요집 《아빠 고향》 및 CD음향제품 《아빠 고향》 발행식이 열렸다.

일찍 1989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졸업하고 연변대학부속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최나는 20여년을 하루같이 교원사업에 몸을 담그고 오로지 음악교수를 위해 꾸준히 달려오면서도 작곡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지금까지 무려 300여수의 가요를 창작하였다. 그중 많은 작품들이 여러 급별의 상을 타면서 작곡실력을 인정받아 최나는 우수한 과외작곡가의 일원으로 자랑을 떨치게 되였다. 

최나가 음악을 사랑하고 즐긴것은 아주 어릴적부터였지만 전업적으로 음악을 배운것은 남들보다 조금 늦었다.

1962년 12월 12일, 연길시에서 태여난 최나는 5남매중 넷째였다. 부모가 노래를 즐기고 잘 불러서인지 그들 5남매는 다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최나보다 13살이상인 큰언니 최순자는 6살때부터 크고작은 공연에 참가하기도 하고 방송국에 가서 노래록음도 하는 음악신동이였는데 연변예술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후 연변가무단의 성악배우로 배치받았고 후에는 심양조선족문화관에 전근하였다. 이런 큰언니때문에 최나는 노래실력이 괜찮았지만 집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고 가정형편때문에 노래를 배우고싶은 욕망이 굴뚝같았지만 결국은 소원성취하지 못하게 되였다. 

소학교에 다닐 때 최나의 제일 큰 꿈은 음악교원이 되는것이였다. 손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배워주는 음악교원이 세상에서 제일 멋져보여서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것은 큰언니한테서 간단한 음악리론이나 노래를 배우고 간간히 피아노연주법도 익힐수 있은것이였다.              

연길시2중에서 초중과 고중을 다닌 최나는 승벽심이 아주 강했다. 줄곧 부반장, 단지부서기로 활약했던 그는 고중2학년에 다닐 때 중국어를 배운다면서 심양에 있는 큰언니네 집에서 한족고중을 다니게 되였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한족고중의 어문에서 어려움을 느낀 최나는 대학시험을 조선어로 치면 우세라고 생각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선족학교에서 한족학교로,  다시 조선족학교로 전학하면서 성적이 뒤떨어진 최나는 결국 1점차이로 락방의 고배를 맛보게 되였다.

고민하는 동생이 안타까왔던 큰언니는 “이제부터라도 예술면으로 발전해보는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였고 최나는 흔쾌히 대답하였다. 이렇게 되여 그는 심양에 가서 큰언니로부터 노래, 화술 등 여러가지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을 충전하는 시간을 가졌고 1986년 대학입시에 재도전하여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사범자격반에 입학하였다. 

갓 입학하여 원족을 간 최나는 장기자랑에서 노래를 불렀다. 춤까지 추면서 흥이 나서 노래를 부른 그는 자신의 장기표현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후에 공부하면서 보니 동학들중에는 전직가수 못지 않게 노래를 잘 부르는 실력이 만만치 않은 애들이 많았다. 그제야 깜짝 놀란 최나는 “웬간히 해서는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을 바싹 차리고 학업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음악사범자격반은 음악교원양성반이여서 배우는 과목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다른 동학들보다 음악을 늦게 시작하였기에 기초가 차했던 최나는 남한테 뒤지기 싫어서 죽기내기로 공부하고싶었지만 신체가 따라주지 않았다. 당시 160센치메터의 키에 체중이 겨우 42킬로그람밖에 안된 최나는 신체가 허약해서 열심히 공부하려고 들면 병부터 났다
. 그래도 최나는 부모의 지극정성, 선생님들의 관심, 형제들의 도움과 그녀만의 특유의 악바리근성으로 이악스레 공부하여 마침내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89년, 연변대학부속중학교의 음악교원으로 배치받은 최나는 인차 동북사범대학 길림성교육학원에서 조직한 교육관리전업에 입학하여 3년간의 본과학업을 시작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뜨거운 열정을 쏟았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을 양성하여 예술대학에 수송하였다. 고중음악은 음악감상과로서 보통대학입시성적에 음악성적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를 감안한 최나는 음악시간을 통해 대학입시때문에 긴장한 학생들의 정서를 풀어주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음악에 소질이 있는 애들을 제때에 발견하고 인도하여 음악전업대학에 붙을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지금 85%에 달하는 애들이 결손가정이여서 애들이 음악적재질이 있지만 부모가 곁에 없기에 발견하지 못하고 묻히는 현상이 많이 존재하였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최나는 교내에 “푸름 꿈”이란 음악사단을 꾸려 음악에 소질이 있는 애들에게 나래를 펼칠 기회를 마련해주고 또 그에 따른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리강(가명)이라는 학생이 시간에 노래소리가 옆에서도 들릴 정도로 이어폰(耳机)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교단에서 여러번 강조하였지만 교원을 째려보면서 대항하는것이였다. 수업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조용히 불러서 개별담화를 나누어보니 음악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였다. 최나는 수차에 거쳐 “넌 인격도 괜찮고 착한데 부모가 곁에 없어서 관리가 따라가지 못해 공부성적이 조금 차하구나. 리과는 그렇다치고 문과성적은 외우는대로 올릴수도 있는것이다. 만약 대학에서 음악전업을 선택한다면 무난히 입학할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함께 노력해보자” 등 내용의 대화를 나누며 설득하였다. 최나의 진심어린 관심에 리강은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 후에 리강은 자각적으로 선생님을 찾아 음악에 대해 개벽적지도를 해줄것을 요구하면서 학교의 “푸름 꿈”사단에 가입하여 독창, 사회를 하면서 새로운 꿈을 키우게 되였다. 후에 어엿한 대학생이 된 리강은 최나의 손을 꼭 잡고 “선생님이 아니였더라면 제가 어떻게 되였겠습니까? 선생님은 정말로 어머니와 꼭 같습니다”며 감격에 겨워 말하였다. 지금도 3.8절이나 교원절이면 어김없이 축하를 보내는 마음 따뜻한 리강를 보면서 최나는 사업에서의 보람을 느끼였다.

사업에 참가해서부터 지금까지 최나는 해마다 상해음악학원, 동북사범대학, 심양음악학원, 연변대학 예술학원 등 예술대학에 학생들을 수송했는데 1995년도에는 12명 학생을 예술대학에 보내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금년에만도 이미 전업과에 통과한 학생이 7명이 되는데 지금 문학과성적을 기다리고있다. 최나는 기로에서 헤매던 학생들이 바른 길을 찾아가는것을 보면 자기일처럼 신나고 교원사업의 위대함을 심심히 느꼈다. 

사실 전업과는 학교수업시간외의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얼마씩 짜내여 지도해야 하였기에 애로점이 많았다. 그래도 김문성교장선생님께서 지지하고 조건을 마련해주어서 교원사업을 보다 순조롭게 해나갈수 있었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수 있었다.

교원사업에 애착심이 강한 최나는 선후로 《음악교수는 반드시 학생들의 심리특점에 맞아야 한다》, 《어떻게 음악교수를 통하여 학생들의 소질교육을 진행할것인가》, 《새 과정 표준은 음악교원의 높은 소질을 요구한다》 등 30여편의 론문은 발표하여 국가, 성, 주, 시로부터 1등상, 2등상의 영예를 받았으며 여러가지 교수경연, 교수설계경연에서 국가, 성, 주, 시의 1등상, 2등상, 우수상의 영예를 빛냈다. 1994년에 그의 학생 7명은 전국음악지식경연에 참가하여 1등상을 수상하고 그 자신은 원예사상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의 전국청소년성악콩클에서 그가 지도한 학생은 2등상을 수상하고 그 자신은 최우수지도상을 수상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전국교육학과연구선진”, “성최우수지도상”, “주무용골간상”, “주음악학과선두인”, “주골간교원”, “우수교원”, “백화상” 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2007년에는 우리 주를 대표하여 전국명교사대강당에서 발언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최나동요작곡집 및 CD음향제품 발행식에서 연변대학 부속중학교 김문성교장선생은 “오늘 최나선생님은 자신이 작곡한 작품중에서 100여수를 골라 《아빠 고향》이란 제목으로 소년아동가요집을 펴냈다. 이는 참으로 우리 연변대학 부속중학교의 자랑과 긍지가 아닐수 없다. 항상 가르침에 준비되여있는 최나선생님, 항상 후계자양성사업에 온갖 정열을 쏟는 최나선생님, 항상 과외창작에 혼신을 바치는 최나선생님의 작곡집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더 큰 발전과 성취가 있기를 기원한다”고 최나에 대한 긍정적평가와 함께 축하의 인사도 전했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추구가 있는 최나는 교원사업에 바삐 보내면서도 게으름없이 작곡하여 지금까지 성인가요와 아동가요를 무려300여수 작곡하였다. 특히 아동가요작곡으로 많은 호평을 받은 최나의 동요는 우리 전통민족음악의 아름다운 선률을 기본바탕으로 하여 아이들의 순수한 생각과 느낌을 담아 그 선률이 발랄하고 아름다운것이 특징이다.

최나가 작곡에 재미를 붙인것은 졸업을 앞두고 있은 작품발표회에서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창작과를 배우고 선생님은 매학생에게 성인곡, 아동곡을 3곡 창작하여 발표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때 최나는 자신이 창작한 3곡중 서향화가 부른 아동곡 《나비》를 들으면서 가슴이 부풀어오르는감을 느꼈다. 

졸업한 이듬해인 1990년에 그는 《졸업기념수첩》(강길 작사, 유춘금 노래)을 작곡하여 연변인민방송국에 보냈는데 우수작품으로 선정되고 매주일가로 방송되였으며 《연변음악》잡지에 발표되였다. 자신이 발표한 처녀작이 생각밖에 이토록 환영을 받게 되자 최나는 작곡에 각별한 흥취가 생기면서 하고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여 인차 두번째 곡 《내 고향 제일 좋아요》를 창작하여 연변인민방송국에 보냈는데 황영애가수가 불러 방송전파를 타게 되였다.

후에 최나는 연변라지오방송국과 연변TV방송국의 창작동요제에 적극 참가하면서 음악분야의 선배작곡가와 음악편집선생님들의 지도와 도움으로 부단히 자신의 작곡수준을 제고하여 수백수에 달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전문가들로부터 긍정과 호평을 받았고 어린이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중에서 《우리는 연변의 어린이》, 《꽃과 나비》, 《아빠고향》 등은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연변음악가협회, 연변주교육국에서 주최한 창작동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내 고향 풍경화》, 《보슬비》 등 20여수의 작품은 국가급상을 수상하였다. 또 작품 《백가원의 노래》, 《봄은 춤추며 찾아와요》 등 30여수의 작품들은 선후하여 성, 주, 시에서 표창을 받았으며 《중국조선족창작동요선집》, 《예술세계》, 《연변음악》, 《별나라》, 《중국조선족소년보》, 《중국조선족가요200수》에 입선되였고 20여수의 작품이 연변TV방송국과 연변인민방송국의 매주일가, 청춘스타트, 소년아동음력설프로에 방송되였으며 작품 《교정의 코스모스》는 한국 “어린이절”프로에 방송되였고 동요 《아빠 고향》은 한국 《애창동요집》, 《중한동요집》에 수록되였고 중한창작동요로 발표되였다.

최나가 이번에 발행한 동요집 《아빠 고향》에는 근 100수에 달하는 동요가 수록됐고 CD음향제품 《아빠 고향》에는 32수의 노래가 수록되였는데 그의 동요들은 우리 전통민족음악의 아름다운 선률을 기본바탕으로 어린이들의 순수한 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살렸기에  선률이 발랄하고 아름다운것이 특징이다.

최나는 “새처럼 날고 내물처럼 쉬임없이 달려가는 아이들을 위해 과외작곡가로서 나 자신이 할수 있는 작은 일 하나가 바로 아이들에게 좋은 노래를 통해 맑고 명랑한 심리를 심어주는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후계자양성사업에 몸을 담그고 열심히 사업하면서 어린이들이 사랑하고 애창하는 동요, 어린이들의 풍부한 동심세계를 생동하고 형상적으로 부각해낸 동심에 맞고 률동성이 강하며 음악성이 풍부하고 선률흐름이 정서적이며 어린이들의 입에 잘 오를수 있는 동요를 많이 창작하겠다”고 당차게 말했다.

최나가 교육사업에서 보다 큰 성과를 거두는 동시에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창작할것을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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