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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예술의 새로운 창을 열어갈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1월15일 08시54분    조회:9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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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젊은 성악배우 황매화의 당찬 야심

연변가요계는 기존의 원로가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생력량들이 새록새록 우리의 안방을 노크하고있다. 일반인들은 소화하기 힘들다는 “벨칸토”창법으로 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마음으로 노래하는 나젊은 성악가가 있다는 소문에 기자는 일전 그녀를 찾았다. 28살의 어린 나이에 성악의 매력에 심취해 주위사람들로부터 “성악계의 꽃”이라 불리우는 황매화, 연변의 저명한 성악가 림성호선생님의 수제자로 알려져 더욱 큰 기대를 한몸에 받고있는 황매화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음악에 매료된 동년 꿈을 향한 첫걸음

1983년 훈춘시 반석향 맹령촌에서 태여난 매화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장끼를 자랑했다. 철철 넘쳐나는 자신의 끼를 자제하지 못한채 매화는 늘 집에서 록음기를 틀어놓고 흥얼대는가 하면 나풀나풀 춤을 추기도 하면서 장난감은 뒤전인채 온종일 음악과 씨름했다. 5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찾은 유치원, 자아소개를 한답시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매화의 야무진 모습에 아버지는 물론 선생님들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하지도 않은 노래와 춤을 자진해서 표현하는 모습에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했고 매화는 일약 꼬마“스타”로 되였다.                                      
                                          
소학교에 입학한 뒤 학급 문오위원직을 담당했던 매화는 교내 꼬마가수 겸 각종 예술활동의 사회자로 활약하면서 예술을 향한 자신의 꿈을 야무지게 키워갔다. 12살 되던 해에 훈춘시제5소학교의 추천으로 매화는 전주“음력설맞이 어린이 노래구연콩클”에 참가했다. 그번 콩클에서 매화는 독특한 가창력으로 당시 저명한 가수였던 장귀순의 딸 권명(최우수상)에 이어 우수상을 받아안았다. 따라서 그번 콩클이 매화에게는 또다른 시작과 함께 음악생애에 돛을 달아주는 은사님을 만날수 있는 계기로 되여주었다. 텔레비죤화면을 통해 평소 존경하고 선망해왔던 연변의 저명한 성악가 림성호선생님이 무대우에서의 매화의 거침없는 가창력과 표현력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직접 매화를 양성해보고싶다는 제안을 보내왔던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매화와 아버지는 한달음에 연길에 달려가 림성호선생님과 첫 만남을 가졌다. 화면에서 늘 엄숙하고 근엄한 모습만 보여줬던 림선생님이였지만 정작 만나보니 친숙하고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림성호선생님과의 인연을 계기로 매화는 정식으로 성악을 향한 자신의 힘찬 도약을 시작했다.

끈질긴 도전

남들보다 뛰여나다는 우월감에 심취되였던 매화는 벨칸토라는 낯선 창법을 마주하면서부터 많은 좌절과 아픔을 겪게 되였다. 벨칸토창법은 이딸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을 지니고있다. 따라서 단순 성대에 의한 발성이 아닌 흉곽, 더 나아가 몸의 전체의 공명을 이끌어내는 복식호흡이 위주이기에 난이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는 발성으로부터 시작해 성악의 기초를 새롭게 차근차근 쌓아갔다. 하지만 필경 남성과 녀성의 발성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는만큼 림선생님의 발성에 매화가 공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러한 문제점이 발생될 때마다 또 한명의 스승이 혜성처럼 등장하군 했다. 바로 림성호선생님의 딸 림경진가수였다. 림경진가수는 류달리 음악에 집착하는 매화의 끈질긴 의지에 감복되여 달갑게 매화의 스승이 되여주었다. 매화 또한 그런 림경진을 스스럼없이 이모라 부르며 각별히 따랐다. 림성호선생님과의 발성차이로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기 어려워할 때면 림경진이모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시범을 보임으로써 흔들리는 음을 바로잡아주었고 그럴 때마다 매화는 경진이모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이로써 매화는 더 쉽고 빠르게 자신만의 음색을 찾아낼수 있었다. 하지만 또다른 고험이 매화를 덮쳤는데 이는 림선생님을 곤혹스럽게 했다. 

발랄하고 경쾌한 통속가요와 달리 벨칸토창법은 마음속 깊은 정감을 모조리 소리에 담아 표현해야 했다. 하지만 매화의 노래는 감정표현이 없이 맹맹하기만 했다. 결국 림선생님은 피아노뚜껑을 닫아버린채 매화를 앉혀놓고 멜로디에 내포된 시대적배경과 주인공들의 심리적갈등에 대해 이야기주머니를 풀기 시작했다. 어느덧 자아를 상실하고 스승님의 이야기속에 매료된채 마치 자신이 이야기속의 주인공이라도 된듯 매화는 가슴속 깊은곳으로부터 진한 감동과 전률을 느꼈다.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감정에 사로잡혀있을 때 느닷없이 반주곡이 힘차게 울러퍼졌다. 매화의 얼굴에 나타난 미묘한 감정변화에 이때다 싶었던 림선생님이 지체없이 피아노건반을 눌렀던것이다. 미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매화는 눈물을 머금은채 선생님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감정의 파도가 매화의 가슴을 허벼왔고 당금이라도 가슴이 터져버릴것만 같은 감정의 물결이 매화를 휩쓸었다. 매화는 몸속에서 일어나고있는 모든 감동과 희열을 목소리에 담아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그 순간, 매화도 선생님도 동시에 터질듯한 희열을 만끽하게 되였다. 이렇게 매화는 “맹맹한” 이미지에서 탈피해 내면세계에 잠재되여있는 자신의 감수성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듯이 성악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갔다. 매번 열창할 때마다 그는 늘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될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림선생님은 늘 매화에게 “예술은 기교가 3분이고 격정이 7분이다. 오직 격정이 앞장서야만이 진정한 음악의 경지를 느낄수 있을것이고 진정한 음악의 경지에 오른자만이 성악의 진정한 주인이 될수 있단다.”고 가르쳤다.

스승님의 은혜

림선생님같은 쟁쟁한 스승을 모시려면 집 한채는 팔아야 할 정도로 엄청난 투자가 필요했던 시기였지만 돈보다는 연변의 예술발전에 진정한 인재를 양성하고싶다는 절절한 마음 하나로 림성호선생님은 10여년간 매화에게 무보수로 배워주었다. 덕분에 한낱 시골뜨기였던 매화는 막대한 경제부담을 던채 성악공부에 더욱 전념할수 있었다.
림선생님의 뜻에 따라 매화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당시 23명 신입생가운데 막내였고 성적 또한 꼴찌였다. 하지만 악착같은 의지 하나만으로 매화는 첫번째 시험에서 일약 3등으로 껑충 뛰여올라 선생님과 친구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사랑유희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3년간의 성악공부를 마치고 더 큰 꿈을 키우기 위해 매화는 또다시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진학했다.

대학 4년간 그는 줄곧 학급에서 1등의 성적을 고수했으며 선후로 “길림성대학생노래콩클” 2등상, “전국 조선족노래콩클” 성악조 2등상, “길림성백세콜라컵대학생노래콩클” 2등상을 받아안았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매화는 자신만의 독창음악회를 개최했다. 음악가협회 박장수주석과 림성호선생님, 그리고 학교 령도선생님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음악회는 매화의 노래와 더불어 절정을 치달았다. 음악회의 마지막 곡은 림성호선생님이 직접 작곡한 “하고싶은 말”이였다. 매화는 절절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승과 제자로 보낸 10여년동안 늘 자신에게 힘과 용기를 안겨주셨던 스승님의 은정에 목이 멘 매화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말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어가는 그의 노래소리는 관중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던 매화는 무대아래로 내려가 림성호선생님께 가장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꽃다발을 안겨드렸다. 스승과 제자를 뛰여넘어 가요계의 선후배사이로 등장하게 될 두 사람은 함께 “하고싶은 말”을 열창하며 음악회의 분위기를 고조에로 끌어올렸다.

지금도 시간날 때면 자주 림선생님을 찾아뵙는다는 매화는 이제는 엄한 스승님이 아닌 푸근한 아버지와도 같은 림선생님이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안좋아지는것을 지켜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절망과 좌절 그리고 다시찾은 희망

졸업후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은 매화는 본격적으로 성악가의 꿈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2005년 “길림성 청년배우평의”에서 성악배우 황매화는 평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1등상을, 2006년에는 “장백산천연약수” 추진대사로 선정, 2009년에는 “길림성소수민족신곡콩클”에서 림성호선생님이 직접 작곡하신 노래 “해란강 여울소리”를 불러 2등상을, 2009년 국경 60주년 행사때에는 길림성대표들과 함께 북경에서 “장백산 아리랑”무대를 선보여 조선족의 위상을  널리 떨치기도 했다. 

사업에 참가한후 연길에 30평방짜리 작은 아빠트를 분할지불로 구입한 매화는 매달 900원의 로임에서 600원을 집값으로 물어야 했다. 심한 경제부담에 시달리던 매화는 고민끝에 나이트클럽에서 밤무대가수로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맘껏 부르고 돈도 많이 벌수 있다는 욕심에 자신을 혹사시키며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매화는 결국 체력이 많이 소모되였고 가수로서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성대에 엄중한 변성이 생겼다.

생명줄이고 희망이였던 성대의 변성은 매화에게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다시는 노래할수 없다는 공포감이 그를 엄습해왔고 그는 그 두려움때문에 사회를 향한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버렸다. 사람들을 외면하고 음악을 외면한채 그는 자신을 철저히 어둠속에 가둬버렸다. 생애에 가장 힘든 고비에서 홀로 허덕이고있을 때 한줄기 사랑의 빛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다름아닌 매화가 밤무대가수로 뛰였던 나이트클럽의 총각사장 최룡이였다. 최룡은 그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녀의 눈물을 쓸어주면서 서서히 그녀의 손을 이끌고 다시 사회를 향해 조심스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매화는 자신에게 사심없는 사랑을 베풀어주는 최룡사장의 도움과 한순간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가무단 령도들과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가장 암담했던 한단락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 설수 있게 되였다. 그렇게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은 2년간의 꿀같은 련애끝에 2008년 드디여 결혼에 골인해 인생의 동반자로 되였다.

사랑의 련속

가수에게 있어 무대의상은 필수이다. 매화는 자신을 가장 화려하고 독특하게 단장할수 있는 무대의상을 자신의 개성에 맞게 직접 설계해서 입는다. 이렇게 매화의 설계에 의해 제작된 무대의상만 해도 20여벌이나 된다. 황매화는 또한 기부천사로 소문이 있다. 2007년,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그램을 통해 훈춘시 영안진 빈곤가정의 문송이가 집안형편때문에 대학진학에 어려움을 겪고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매화는 문송이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자진해나섰다. 이렇게 매화의 도움으로 현재 항주법률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문송이는 매달 매화가 보내준 돈 800원을 생명줄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고있다.
 
새로운 도약을 향한 힘찬 발걸음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수 있는 민요나 통속가요를 제쳐두고 그다지 호감을 못느끼는 벨칸토창법을 전공한것에 대해 후회한적이 없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매화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로 답했다. 자신만의 성악세계에서 자신이 최고라 자부한다는 매화는 참신한 매력으로 성악계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싶다는 아름찬 야심을 살짝 내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예술을 향한 끈끈한 애정을 발판으로 연변의 성악발전을 위해 더이상의 포기와 좌절은 용납할수 없다고 하는 황매화, 자신의 성공된 모습을 꼭 지켜봐달라는 자신감넘치는 모습, 이제 아픔과 좌절을 딛고 새롭게 우뚝 선 가수 황매화의 힘찬 도약을 내심 기원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박홍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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