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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혜선 - 중국작가협회 조선족 전국위원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3월16일 13시52분    조회:6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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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녀류작가의 희로애락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리혜선에 대한 이야기

련속 두기나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고있는 리혜선씨 1980년대 중반에 단편소설 《눈내리는 새벽길》을 《연변문예》에 발표한것을 계기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지난 25년간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으면서 볼거리가 있는 작품을 많이 내놓은 그녀는 최근에도 어린이소설 《자유찾아 만리길 김학철이야기》를 출간하여 유능한 녀류작가로서의 재질을 또 한번 과시하였다. 

독서에 매료되여있던 시절

1956년, 한산리씨가문의 둘째딸로 태여난 혜선이는 대를 이을 손자를 손꼽아 기다리던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출생신고도 제때에 하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녔다. 그후 가두주임이 수양딸로 삼겠다며 “혜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뒤늦게라도 출생신고를 했지만 “옥”자돌림 가문의 4자매중 유일하게 “구슬 옥”자를 가지지 못한탓으로 “다리밑에서 주어왔다”는 롱담을 귀아프게 들으며 자랐다.  녀동생 옥이는 할아버지가  또 이름을 안 지어줄수 없어서 그냥 돌림자를 따주었고 옥화는 할아버지가 세상뜬후에 태여나서 돌림을 따를수 있었지만 그 내막을 알길이 없는 혜선이는 “주어온 자식”일수도 있다는 우려때문에 외로울 때가 많았고 어쩐지 엄마가 서먹서먹해서 좀처럼 가까이 다가갈수 없었다.                   

어린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혜선에게 밤이나 낮이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수 있는 “친구”가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책이였다. 당시 공부는 크게 하지 못해도 독서를 퍼그나 즐긴 아버지는 어려운 생활형편에서 마냥 새책을 살수는 없게 되자 이따금 페물수매소에 가서 낡은 책들을 한아름씩 사다가 읽군 했는데 나어린 혜선이도 두살이상인 언니를 따라 그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차츰 독서에 취미를 가지게 되면서 아버지가 가져온 낡은 책만으로는 갈증을 해소할수 없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두 자매는 친구들한테서 소설책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는데 동생인 혜선이는 언니가 책을 다 읽기를 기다리느라 날밤을 샌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때 장밤 전등을 켜서 전기료금이 올라가는건 물론 다른 식구들의 수면에도 영향을 준다고 엄마한테서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또 꾸지람을 듣고 제꺽 전등을 끈 혜선이는 글줄이 눈에 밟혀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었다. 계속해서 책을 읽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게 된 혜선이는 살금살금 일어나 베개 두개를 쌓아놓고 그우에 전등을 올려놓은후 빨간치마와 검은치마로 불빛을 가리우고 밤을 패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사진을 찍을 때 붉은색과 검은색 천으로 가리우고 작업하는것을 모방한 덕분에 소원대로 날이 밝을 때까지 책을 읽기는 했지만 사후에는 혹시 화재라도 일어나면 어찌할번했는가 하는 생각에 겁이 더럭 나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고전명작 《서유기》, 《홍루몽》, 《수호전》, 《삼국연의》로부터 조선의 《림꺽정》, 쏘련의 《봇나무》 등 많은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수양을 쌓은 혜선이는 작문을 유난히 잘 써서 칭찬을 자주 받았다.  소학교 5학년때에 작문 《5?절》을 쓴후에는 글이 흑판보에 오르고 선생님에 의해 동학들의 본보기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 시절 혜선이는 랑독도 제법 잘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랑독수준을 제고할 타산에서 과문을 랑독하다가 한곳만 틀리게 읽으면 다른 학생이 계속해서 읽도록 했는데 혜선이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번도 틀리지 않고 랑독한 학생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또 한번 흑판보에 “리혜선을 따라배우자”라는 글을 써놓았고…


극작가의 꿈을 키워가던 나날

1974년, 고중을 졸업하고 지식청년으로 룡정과수농장 제2생산대에 내려간 혜선이는 대학에 추천받는것을 목표로 만 25살까지의 7년계획을 작성한후 매일 은어로 일기를 쓰면서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아글타글했다.


정치를 앞세우는 그 년대에는 무엇무엇해도 일축을 잘내야 했다. 그런데 일솜씨가 날래지 못한 혜선이는 기음, 배따기, 겨울전지… 그 어느 일에서도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한번이라도 남들을 앞서고싶어서 휴식시간에 도적처럼 살금살금 작업장으로 가서 먼저 기음을 매기도 했지만 한번도 앞서보지 못한 그였다. 매일 《밭머리 로선분석회의》에서 꼴찌로 된것을 반성하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꼴찌로 되면서…

배따기도 노래에 나오는것처럼 가볍고 즐거운 로동은 아니였다. 어느날 꼭두새벽에 배따러 나간 혜선이는 점심때가 되자 기운이 없고 졸음이 쏟아져 밥도 먹지 못하고 나무밑에 드러누웠다. 남들이 점심을 먹는 시간에 잠을 자두고싶었던것이다. 그런데 금방 잠이 들었는데 당서기가 찾아와 호되게 비판했다. 대회에서도 “소자산계급아가씨다”, “로동계급에 대해 깊은 감정이 없다”, “곤난앞에서 의지가 약하다” 등 어구를 써가며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는데 난생 처음 비판대상이 된 그녀는 너무 억울해서 눈물만 쏟았다.

그러나 《홍루몽》속의 림대옥처럼 꽃잎이 떨어지는것이 슬퍼서 울고 바람소리가 불안해서 울고 까마귀울음소리가 불길해서 우는 그녀에게도 손을 펴볼만한 활동공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과외문예활동이였다. 당시 룡정과수농장에서는 생산대, 공장을 단위로 문예선전대를 꾸리고 정기적으로 문예회보공연활동을 조직했다. 그때 생산대의 선전대에 들어간 혜선이는 어벌통이 크게도 가극 《사과배 두알》  을 써서 소문을 놓았다. 그후 농장문예선전대의 창작원으로 된 그녀는 당돌하게 연변조선족자치주 창작조에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하면서 장막극 《한류가 불어올 때》를 완성하였고 그외에도 가사, 대창, 재담, 극본 등 닥치는대로 썼다. 장막극 《한류가 불어올 때》는 어느 희곡집에 수록되여 출판에 교부됐다가 정치기후의 변화로 무산되였다.)

이렇게 낮이면 로동에 참가하고 밤이면 창작으로 분주히 보내면서 극작가의 꿈을 키우는 혜선에게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것은 그 자신이 세운 행동준칙이였다. “길가의 갈림길에 휴식터 마련하지 말고/ 귀뚜라미의 노래소리에 귀기울이지 말고/ 하늘하늘 춤추는 나비에게 눈길 팔지 말고/ 정답게 지저귀는 까치에게 유혹당하지 말자!…” 모든 표현이 상징과 은어로 된 여기에서  《갈림길》이란 타협의 유혹을, 《귀뚜라미》란 눈앞의 안위의 유혹을, 《나비》란 사랑의 유혹을, 《까치》란 요행의 유혹을 뜻했다. 

문학창작의 첫발자국

1977년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후 혜선이는 룡정과수농장 600여명 응시자가운데서 2명 행운아중의 한사람으로 본과인 연변대학 한어학부에 진학하였다.

오랜 숙원을 실현한 그녀는 배움의 전당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지식을 탐구하면서 부지런히 자기를 갈고 닦았다. 그리고 완성품은 하나도 내놓지 못했지만 시간만 있으면 무엇이든 써보느라 머리를 쥐여짜기도 했다.

이렇게 대학시절에 습작에 퍼그나 품을 넣은 그녀가 처녀작을 발표한것은 결혼후 아기엄마가 되기 직전인 1984년이였다.

1981년 12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을 졸업한후 연변일보사 시사부에서 번역편집으로 근무하게 된 혜선이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면서 사업과 가정과의 관계처리문제를 두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것을 어찌하는수 없었다. 미구에 그런 사색들을 정리하면서 단편소설 《눈내리는 새벽길》을 써냈지만 정작 초고를 완성하고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통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임신한 몸으로 힘들게 쓴 원고를 집구석에 처박아두기도 아까와서 어느날인가 용기를 내여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인 시아버님께 원고를 보여드렸다.

그자리에서 원고를 읽고난 시아버님은 글이 괜찮게 된것 같다고 하면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봐야겠다는것이였다. 이렇게 연변인민출판사의 선생님 몇분이 그 원고를 보았는데 시편집이였던 김성휘선생님은 연필로 《好》라는 글자를 공백에 큼직하게 써놓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큰 힘을 얻은 혜선이는 만삭이 된 몸으로 글을 열심히 수개해서 시아버님께 맡겼고 시아버님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연변문예》잡지에 투고해주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그 작품이 문학상을 타게 될줄이야?!

처녀작으로 상을 타고 금방 설립된 《길림신문사》 문예부에 들어가 문학작품을 전문 다루게 된 혜선이는 문학창작궤도에 들어서도록 길잡이를 해준 시아버님이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었다. 그때의 감회가 너무나 깊어서 현재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직을 맡고있는 혜선이는 초학자들이 원고를 보내올 때면 열심히 읽고 성의껏 수개의견을 제기해주며 또 자기가 손을 봐준 작품들이 상을 탔다는 소식이 전해올 때면 그 기쁨을 함께 누리면서 시아버님의 사랑을 되새겨보군 했다.

글을 쓰는 행복을 만끽하며

조용히 독서할 때가 행복하고 글을 쓸 때가 행복하다는 혜선에게 그런 행복을 만끽하며 삶을 살아갈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1986년에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청년작가대표단의 일원으로 전국청년작가대표대회에 참석하고 그 이듬해에 연변작가협회의 전직작가로 된 혜선이는 마음껏 독서하고 장끼껏 글을 쓰면서 왕성한 창작능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와서 어린시절에 보고들은 이야기들, 지식청년시절에 일기를 통해 루적해온 자료들, 대학시절에 글쓰기훈련을 하면서 채용했던 글감들, 현실생활에서의 에피소드들이 한장 또 한장의 벽돌로 되여 문학작품이라는 집을 짓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따라서  주옥같은 작품들이 《연변문예》, 《장백산》, 《연변일보》,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등 신문잡지에 륙속 실리였는데 이런 작품들이 여러 급별의 상을 타고 책자로 출판되면서 작가 리혜선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첫 장편소설 《빨간 그림자》는 열두살때 시골에 있는 외가집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에 기초한것이라고 한다. 한 산모가 산후바람때문에 열병을 앓다가 철교의 기둥을 안고 얼어죽었는데 그녀는 빨간 옷을 입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의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혜선이는 전등만 끄면 그 모습이 어른거려 눈을 뜨고 창문을 바라보며 잠을 청하는 버릇까지 생겼었고 30여년동안 늘 철교기둥을 안고 죽어간 빨간 옷 녀인의 모습에 시달리군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쓰고나서 그런 심리적갈등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흑룡강신문》에 련재되였다가 1997년에 책자로 출판된 이 소설은 후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뉴스종합채널에서 편집판공실 부주임으로 근무하고있는 막내동생 옥화의 노력으로 한어문으로 번역되여 책자로 출판되였다.

그리고 1996년에 한국에서 출간한 어린이소설 《폭죽소리》는 한국 한우리독서문학원 필독서, 한국독서교육원 필독서, 한국어린이책필독도서, 어린이도서연구회 권장도서,KBS 제81회 《가정의 달》기획 좋은 어린이책 선정위 선정, 한국독서치료학회 독서치료도서 선정 등 영예를 따내며 현재까지 29쇄 재판되였고 역시 어린이소설인 《사과배아이들》은 2006년에 출간되후 3년사이에 련속 9쇄나 재판되는 영광을 누리였다.

1989년 북경로신문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민족적인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된 혜선이는 1992년에 5명의 문인친구들과 함께 중국조선족문화연구회 일원으로 우리 민족의 이주사취재에 착수했다. 엄동설한에 도문, 훈춘, 왕청, 룡정 등지를 주름잡으며 열심히 자료들을 수집하였고 그뒤에 계속 항일투쟁, 해방전쟁, 집체화, 《항미원조》, 《문화대혁명》, 한국바람 등에 대한 취재로 이어졌다. 그 보람으로 장편실화 《두만강의 충청도아리랑》, 《코리안드림 그 방황과 희망의 보고서》, 《코리안드림 한국에 나가있는 중국조선족》 등이 책자로 출판되여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고… 

1994년 김학철선생님의 한국해외동포특별상 수상을 축하하는 좌담회가 연변작가협회에서 열리였는데 그 행사에 참가한 혜선이는 김학철선생님의 발언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력차의 정치운동에서 여러차나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평생을 항쟁에 바쳐온 김학철선생님의 인생은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의 력사적축도라는 평판을 들으면서 그녀는 또 김학철선생의 인물전기를 만들고싶어졌다. 그래서 해당 인물들을 만나고 력사자료를 뒤지는 등 간고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끝내는 집필을 완수, 지난해 12월에 마침내 《자유찾아 만리길 김학철이야기》란 책자를 출간하였다.

 끝이 없는 취재길은 가시덤불도 많아서 《사과배아이들》을 만들 때는 연변에서 사과배를 제일 먼저 배육해낸 최창호로인의 생가에 드나들면서 력사의 발자취를 더듬기도 하고 내두산에까지 현지답사를 다녀오면서 수요되는 자료를 수집해야 했다. 그리고 《코리안드림 한국에 나가있는 중국조선족》을 집필하기 위해 한국행을 떠났을 때는 삼복철에 건축현장의 소음이 그칠줄 모르는 세집에서 글을 써서 생활비를 해결하는 한편 취재를 하고 작품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노력의 땀방울이 결실을 맺고 어거리대풍을 안아올 때면 무한한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녀였다. 

가족사랑에 받들려

지금까지 제5기, 제6기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준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제5기, 제6기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공모 《신춘문예》, 《연변문예》, 《장백산모드모아상》 등 묵직한 영예를 10여차 수상하며 글쓰는 녀자의 행복을 만끽해온 혜선이는 그동안 가족사랑의 힘이 컸다고 하면서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을 내비치였다.

수십년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사업해온 시아버님은 문화대혁명기간에 작가들이 곤혹을 치르는것을 목격하면서 자식들이 글을 쓰는것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느리가 글을 쓰고 전직작가로 되자 시아버님은 너무도 기뻐서 동네방네에 자랑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어명”을 내려 무조건 내조를 잘해줄것을 아들에게 강요(?)하다싶이 했다.

고맙게도 대학을 졸업한후 연변농업은행에서 근무하는 남편이 “어명”을 거역하지 못해서라도 자질구레한 일까지 도와주면서 후근부장의 역할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혜선이는 창작을 해도, 취재를 다녀와도, 출국방문을 떠나도 집근심을 하지 않게 되였고 모든 정력을 사업에 몰붓다보니 보다 큰 성과를 따낼수 있었다.

친정엄마는 당년에 계절로동자로 푼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며 딸애 넷을 힘들게 키우느라 새책이라곤 《헝겊동이의 이야기》  한권밖에 사주지 못했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물결속에서 장사를 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수 있게 되자 엄마는 내지로 물건구입을 갔던 걸음에 연길에서는 구경하기조하 어려운 책자인 《금병매》를 두틀씩이나 사다주면서 작가딸에 대한 기대를 표달하였다.

지난온 발자국을 뒤돌아보며 혜선이는 가족들 특히 남편과 딸애에게는 언제나 부끄러운  존재였다고 하면서 미안한 심경을 고백하였다. 남편에게는 구석구석 챙겨줄 대신 받기만 해서 너무 송구스럽고 딸애에게는 항상 옆에서 끼고 이뻐해주지 못해서, 기다림에 지치게 해서, 또 본의아니게 힘들게 해서 가슴이 아플 때가 많았다는것이였다.

현재 한국에서 대학공부를 하고있는 딸애 려나는 어린시절 몸이 허약해서 자주 앓았다. 그러나 사업이 첫째인 혜선이는 앓는 애를 옆에서 돌봐주지 못하고 어린것이 혼자서 집을 지키며 엄마가 퇴근하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게 하기가 일쑤였다. 오죽하면 철부지 소녀가 엄마 배속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을거라고 말했을가?!

언젠가 선배작가들과 더불어 돈화의 농촌마을로 생활체험을 내려갈 때는 어린 딸애를 여러날이나 남편한테 밀어맡길수 없어서 데리고 떠났는데 길에서 번갈아 아이를 업어주느라 년세있는 선배님들이 땀동이를 쏟았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또 애가 벼룩에게 뜯기워 숱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중국조선족가운데 단 2명뿐인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으로서 중국작가대표단의 성원으로 미국과 일본에도 방문을 다녀오고 여러가지 문단행사며 강의에도 참가하고 또 부단히 새로운 작품을 출산하느라 한가할 겨를이 없는 리혜선씨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2009년도 중국작가협회, 길림성 그리고 연변작가협회의 중점부축작품으로 선정된 《정률성전》의 집필임무를 맡은 그녀는 최근에는 정률성의 가족을 만나고 전임중앙문화부 부장인 주위치 등 정률성의 생전 친우, 동료들을 만나 취재하면서 작품집필에 전념하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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