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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간부 고 조병철동지를 추모하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월30일 16시18분    조회: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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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간부 고 조병철동지를 추모하여

윤수범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비서장 조병철동지가 서거한 소식(2010년 1월 24일 4시 44분 별세)을 접한 이 시각, 나는 이것이 정녕 사실임을 인정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어안이 벙벙하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닷새전(1월 17일)만 해도 길림성 제11기 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가 열린 첫날, 대회의 집행주석중의 한분으로 주석대에 오르신 조병철비서장이 아니였던가! 이번 중대한 회의의 주비사업을 위하여 제일 구체적이고 중요한 사업임무를 떠메고 북경에까지 비행기로 다녀오며 분주히 서둘던 조병철비서장이 아니였던가!

아, 우리는 몰랐다. 회의전에 몸이 불편하여 부인께서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회의준비가 급하고 중요한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투박을 주더란다. 회의 개막식에도 밀차에 밀려 회의에 참가하셨단다. 그날 오후부터 병원으로 다니며 검사하여 보니 간암 말기, 상해병원에까지 갔어도 아무 치료법이 없다는 결론을 받고 돌아왔다. 

그후 며칠간 대부분의 시간은 심한 동통을 참으며 혼미상태에 처하였기에 친인과도 그렇다 할 말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채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그와 년령 차이는 많아도 장기간 한 정법계통에서 동사자와 지우로 지내던 나에게 한해서는 그의 급격한 별세가 가슴을 무등 쓰리게 한다.

1982년 조병철동지가 길림대학 법률학부를 졸업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법위원회에 배치되여 왔을 때이다. 정법위원회 주비사업을 책임졌던 로선배 김하련과 리원일 동지께서 그를 만나보시고 아주 기뻐하시며 전도유망한 젊은이라고 치하하셨다.

조병철은 문화대혁명후 처음으로 대학입시에 참가하고 4년제 본과학업을 끝마치고 나온 대학졸업생이였다. 그는 대학을 다니기 전 하향지식청년으로서 농촌생활체험도 해보았고 부대에서 단련한 력사도 있었다. 대학시절에 그는 이미 중국공산당 당원이였고 《3호학생》이였다. 그는 또 자기 고향 연변에서 수요한다는 소식을 듣고  졸업배치에 선뜻 호응하여 나섰던것이다. 이런 청년을 어찌 환영하지 않겠는가.

그후 조병철동지는 자치주인민검찰원에 조동되여 열심히 사업하면서 30세에 벌써 자치주 부검찰장을 담임하였다. 근 20년간의 검찰사업을 하면서 자기가 배운 법률지식에 기초하여 부단히 지식경신을 하면서 집법에 엄숙하고 공정하였으며 점차 훌륭한 검찰원의 지도자로 양성되였다.

1996년 1월에 조병철동지는 연변주 검찰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지도부내부에서는 단결의 핵심으로,  전 검찰원에서는 검찰관들의 모범으로 사업하면서 뛰여난 재능과 추진력을 과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본건설에도 알심을 들였다. 

지금의 주검찰원 청사는 조병철동지의 심혈이 포근히 깃든 건물이다. 나는 이 건물의 기초를 팔 때부터 그의 안내로 건설현장을 구경하며 그의 결사적이고 끈질긴 사업열정과 통이 크게 달려드는 대담성에 탄복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조병철동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규률검사위원회 서기, 자치주당위 부서기의 중임을 떠메게 되면서 한층 더 조직의 신임과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 기간 간부사업과 정법사업을 책임지고 민족자치주의 간부양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조병철동지는 언제 어디서나 꾸준하고 실사구시적이고 성실하고 허심하고 틀거지가 없어 그와 접촉하여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믿음성이 있고 인간성이 있고 책임성이 있는 간부로 치하하였다.

2007년 12월 조병철동지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겸 종교국 국장으로 전근되여 1년 남짓한 기간 사업하였고 2008년 1월부터 2년간 성인대 상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사업하던 기간에 우리는 장춘에서 함께 살면서 이전보다 자주 만나게 되였다.  나는 성인대 퇴직휴양간부이기에 그를 만나 보기 더우기 편리했다.  

성인대에서 비서장은 가장 다망한 지도자의 직무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사업에 영향을 줄가봐 여간한 일에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래도 조병철동지는 주동적으로 가끔씩 나에게 전화를 걸어 문안을 하였다. 지난 12월 15일에는 어디서 내가 입원치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병실까지 찾아와 방문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우리지간의 마지막 대화일줄을 어찌 알았으랴!

그의 림종시에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병원에 가 본 나는 이미 정신을 잃고 새파란 얼굴이 되여 심한 신음소리만 내는 비서장을 보았을뿐이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병실을 떠나 휴식실에 나와 거기에 급급히 당도한 성인대 동지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동지들, 특히 연변주검찰원 지도부 전체 동지들, 그의 절친한 친구들을 만나 당돌하고 아쉬운 이야기를 나누었고 조병철비서장의 가족과 친척들을 위안하였을뿐이다.

조병철동지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훌륭한 소수민족 간부이다. 작년 그는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위원회의 요청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력사를 소개하는 강좌를 하려고 풍부한 자료를 수집하여 1만여자나 되는 원고를 작성하였다. 신종플루의 확산때문에 대회를 소집할수 없는 상황하에서 그의 원고를 《길림신문》에 간략하여 발표하였는데 독자들의 중시와 환영을 받았다.

장춘의 조선족사회단체들에서 어떤 구체적곤난을 그에게 제기하면 그분께서는 자기가 노력하여 해결할수 있는 문제면 어디까지나 해결하려고 나섰고 또한 적지 않은 문제를 이미 해결해주었다.

내가 아는 사실만 해도 2007년에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에 경비난이 있다는 반영을 듣고 《로인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하여도 과하지 않다》면서 조비서장은 관계단위를 동원하여 의연금을 모아 2만원을 해결하여 주었다.

인민해방전쟁가운데서 연변의 선렬 654명이 안장된 길림시 창읍구 화피창렬사릉묘를 수건하여 달라는 인민대표의 건의안이 성인대 대회에 올라간 후 조병철비서장은 대회토론석상에서 이 건의안의 중요성을 대표들에게 전문 선전하였으며 대회후에도 성인대 상무위원회 관계부문에 이 건의안을 중요시할것을 강조하였으며 2009년에는 성인대 10대 건의안에 넣고 검사독촉함으로써 릉묘수건의 진척을 다그쳤다.

조병철동지는 우리 민족의 모임에 참가하여 능란한 조선어로 열정적이고 알맹이 있는 연설로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고 설명절이면 술좌석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군중속에 휩쓸려 허물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조병철비서장은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훌륭한 소수민족간부임에 손색이 없다. 그는 성급 기관에 온지 3년 남짓한 사이에 중국공산당 제17차 대표대회 대표, 중화인민공화국  제11기 전국 인대대표로도 당선되였다.

54세의 아까운 나이에 탄탄대로를 앞에 두고 떠나가는 조병철비서장의 서거는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이 아닐수 없다.

당신을 앞세우는 늙은 나의 가슴도 슬픔이 뼈를 에이는듯 하다. 그러나 당신의 영상과 당신의 정신은 우리 로일대와 후대들에게 영생하리라.

고 조병철비서장이시여, 고이 잠드시라!

2010년 1월 26일

(필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검찰원 전임 검찰장이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인민법원 전임 원장이며 길림성인대 내무사법위원회 전임 부주임, 순시원이였음.)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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