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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가무단 국가1급배우 장경옥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월18일 08시28분    조회: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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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녀가수의 예술사랑 가족사랑

지난세기 80년대~90년대 연변가요계에서 자신의 립지를 굳게 다지고 조선족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안았던 청년가수 장경옥, 이쁜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그 목청도 좋았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늘 조용하게 웃는 미소는 상냥한 이미지를 부여해 과연 “최진사네 셋째딸”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주변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다.

1961년 1월 2일에 연길시의 한 간부가정에서 4남매중 셋째딸(우로 언니 둘, 아래로 남동생 하나)로 태여난 장경옥은 당시 연길시 각종 문예콩클에서 노래를 부르며 남달리 예술을 즐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질을 보여주었다.

어릴적 즉 연길시 중앙소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장경옥은 발랄하고 똑똑한 성격으로 선생님들의 호감을 사 당시 유일한 녀반장으로 활약했는데 스스로도 자신이 전교에서 유일한 녀반장이라는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어느날엔가 담임선생님에게 의문을 제기했더니 선생님이 “네가 하도 똑똑하니깐 반장을 시켰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그 발랄한 성격에 그림자가 드리운것은 장경옥이 9살나던 해 어머니가 의료사고로 사망되면서부터였다. 여느집이나 마찬가지로 어린애들에게는 어머니의 품이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였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나니 당시 장경옥의 마음에는 그 타격이 무엇보다 컸다. 슬픈 마음과 함께 그냥 수그러드는 머리를 좀처럼 쳐들수도 없었다. 또한 올망졸망한 4남매의 공부뒤바라지까지 할라니 아버지 혼자서 받는 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등으로 가세도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같은 상황에서 결국 그때 16살밖에 안된 큰언니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어려운 집안살림을 떠메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였다. 그때 어린 장경옥의 눈에는 어머니가 세상뜬후 집살림을 떠멘 큰언니가 정말이지 너무너무 커보였다. 먹을것도 풍족하지 못한 상황에서 큰언니는 자신이 굶더라도 어린 동생들만은 절대로 굶기는 일이 없었다.                                                                  

바로 어머니가 사망된 이듬해인 1970년도에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하방바람에 의해 장경옥이네 가정도 명신3대로 하방(下放)하게 되면서 장경옥이 또한 명신소학교에 전학하여 공부하게 되였다. 당시 갓 중학교를 졸업한 큰언니는 궁핍한 살림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곧바로 농촌에 나와 일하게 되였는데 무슨 일이든지 1등을 못하면 안되는 성격이라서 어찌나 걸싸게 해제꼈던지 마을사람들치고 탄복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언젠가 장경옥은 편도선을 앓은적이 있었다. 그때 민간비방으로 뱀껍질이 좋다는 말을 들은 큰언니는 곧바로 산에 가서 남자들도 갑자기 만나면 머리칼이 쭈뼛 일어서는 뱀을 잡아 껍질을 발라가지고 왔는데 과연 그 뱀껍질이 효험을 보았는지 그후 장경옥의 편도선은 씻은듯이 나아졌다. 뿐만아니라 추운 한겨울에도 강가에 나가 빨래를 하고 빨갛게 언 손을 호호 불며 돌아오던 큰언니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장경옥, 하지만 그때는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그는 그저 큰언니니깐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줄로만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 엄마같은 큰언니가 누구보다 고맙다며 장경옥은 그 큰언니에게 평생 빚지고 사는 마음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처럼 훌륭한 큰언니가 있었기에 장경옥은 공부에 열중해 소학시절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급에서 반장으로 활약할수 있었고 학교선전대에서 노래도 부를수 있었다. 장경옥이 학교선전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것은 명신소학교에 가서부터였다. 그때 역시 하방차로 명신소학교에 왔던 음악교원이 남달리 목청이 좋은 장경옥을 발견하고 학교선전대에 참가시켰는데 그렇게 선전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장경옥에게 12살때 하마트면 인생의 전환점이 될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올번했다. 당시 학교선전대와 명신대대선전대에서 함께 부대위문공연을 갔었다. 그때 부대문공단에서는 목청이 뛰여난 장경옥을 무척 마음들어했는데 나이가 12살밖에 안된다는 말을 듣고는 그만 아쉽게 머리를 가로 흔드는것이였다. 사실 그때 장경옥은 15살만 되였어도 부대문공단에 갈수 있었다.

드디여 하방생활을 마치고 1972년에 연길로 돌아온후 장경옥은 다시 중앙소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갓 지난 뒤 연변인민방송국에서 개설한 소년아동프로에 첫패로 뽑혀 독창으로 《꼬마운전수》와 《작은 나사못》을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집이 텔레비가 없고 라지오만 있던 세월이라 방송전파를 타고 울리는 장경옥의 노래는 많은 청취자들의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후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선전대활동에 적극 참가했던 장경옥은 연길시 중학교문예콩클때 음악극 《반짝이는 붉은별》에서 반동자역을 맡아 평심원선생님들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음악에 싹수가 있었음에도 그때까지 장경옥의 꿈은 가수가 되는것이 아니라 장차 의학을 전공하는것이였다. 그런 장경옥이 계속 음악을 하도록 부추긴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류달리 셋째딸을 귀여워했던 아버지는 장차 장경옥이 예술인으로 성장하는데 크나큰 희망을 품고있었다. 그런 셋째딸이 예술을 버리고 의학을 하겠다고 하자 너무나도 상심했던 아버지는 당시 연변대학 교수로 사업하던 친구집에 찾아가 “기대가 무너졌다”며 락루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그 교수의 아들이 연변가무단의 유명한 지휘가 박우선생의 친구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우고있는 상황이였다. 결국 아버지의 그 교수친구가 나서서 장경옥을 “내 친척이니 잘 부탁한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박우선생의 부인 백운옥선생한테 소개하여 장경옥은 행운스럽게 백운옥선생의 과외교수를 받으며 예술지망의 꿈을 다시 무르익히게 되였다.

그렇게 1979년도에 고중까지 졸업한 장경옥은 그때 조선어문교원으로 학교선전대를 책임지고있던 최상해선생의 소개로 훈춘문공단시험을 보았는데 무난하게 합격되여 대번에 독창가수로 활약하며 정식 예술인생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예술인생이라고 해서 생각처럼 그렇게 랑만적인것만은 아니였다. 처음에는 모든것이 황홀하게 생각되였지만 정작 훈춘문공단에 발을 들여놓고 외지공연을 다녀보니 그때까지만 해도 배우들이 각자 자기의 이불짐을 메고 다닐 때라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게다가 장경옥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반해 농촌공연때면 접대측에서 귀한 손님들이라고 료리마다 고기를 넣는 바람에 워낙 내성적인 장경옥은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맨 간장에다 밥먹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나중에 공연조의 생활위원이 장경옥의 그런 사정을 알고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음식을 다르게 배치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번다한 외지공연에서 병이라도 날번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고생도 무대에 올라 관중들의 갈채를 받을 때면 달갑게 여겨지군 했다.

1980년도에 전국소수민족문예콩클을 벌리게 되였는데 연변에서도 전 주적으로 콩클에 참가할 배우들을 모집하게 되였다. 그때 훈춘문공단에서 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지만 한번쯤 전국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고싶었던 장경옥은 결연히 10개월간 몸담고있던 직장을 떠나 콩클에 참가할 배우모집에 응했다. 헌데 일이 안될라니 그들이 련습을 다 해놓고 콩클에 참가할 준비를 마쳤을 때 갑자기 과외팀은 콩클에 참가할수 없다는 통지가 올줄이야. 결국 콩클에 참가하려던 공연팀은 해체되였고 그와 함께 장경옥도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고말았다.

바로 장경옥이 절망의 나락에서 방황하고있을 때 어느날엔가 당시 연변가무단 단장 고 김성민선생이 그를 불러 한번 연변가무단시험을 보라고 권고하는것이였다. 그 권고에 따라 시험장에 나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장경옥의 마음속에는 연변가무단이라는 자체가 너무나도 큰 무대로 느껴지던터라 자신의 실력으로 어찌 될수 있겠나싶어 별로 기대를 걸지도 않았다. 하다보니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히려 노래를 더 잘 부를수 있었다. 결국 무난히 합격되여 연변가무단에 입사한 그는 인차 가무단을 따라 료녕성 무순으로 외지공연을 가서 처음부터 독창가수로 활약하게 되였다. 

그가 맨 처음 연변가무단에 입사해 부른 노래가 바로 《내고향 오솔길》이였는데 이 노래로 그는 얼마나 많은 갈채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와 함께 자기 예술생애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제낀 그는 연변가무단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쭉 30년간 선후로 《내고향 오솔길》, 《황금나락 설레일 때 나를 찾아오세요》, 《일터에서 피여난 내사랑 꽃이여》, 《하얀 깃》 등 100여수의 노래를 불러 자신의 실력을 널리 알렸다. 또한 1987년에는 엄선을 거쳐 선발된 공연팀의 일원으로 사상 처음 조선행 출국공연에 참가하였고 1991년 5월에는 로씨야행 출국공연에도 동참했다. 뿐만아니라 1992년 6월에는 한국 MBC의 초청으로 림송철가수와 함께 한국에 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한국 《문화일보》에서는 연변의 조용필과 연변의 주현미가 왔다며 높이 평가하는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1994년 5월에 연변가무단의 대형무극 《춘향전》 공연차(당시 장경옥은 극의 쏠로를 담당)로 한국 서울, 제주도, 부산, 남원 등지를 방문하며 절찬을 받았고1999년 12월에는 오문회귀를 기념해 전국 각 지방프로를 선정하는 가운데 연변가무단의 6명 대표로 뽑혀 자신이 직접 인솔자역할을 맡고 오문에 가서 가야금병창을 표연해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았다. 이처럼 예술무대에서 자신의 발자욱을 뚜렷이 남긴 장경옥에게 영예도 주렁지게 찾아왔다. 1993년도에 그가 출연한 가극 《아리랑》은 국가문화부로부터 가극대상을 수여받았고 같은해에 그가 쏠로를 맡은 무극 《춘향전》은 국가문화부의 신극목대상을 수상하는 등 그가 받은 국가급, 성급 상만 해도 20여개에 달한다. 특히 1988년도에는 북경 북광음향출판사에 의해 록음테프 《장경옥독창전집》을 출판, 1만장 모두가 팔리는 성황을 이루었고 1997년 12월에는 연길시 제14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뽑히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물론 장경옥이 예술무대에서 진정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기까지는 집식구들 특히 남편의 사심없는 지지가 무엇보다 큰 작용을 했다. 장경옥의 남편 리경화씨는 장경옥보다 3년 년상으로 장경옥의 중학시절 한학교에서 공부한 선배일뿐만아니라 학교선전대에서 함께 활약한 동료였다. 당시 학교선전대에서 대장 겸 손풍금수로 활약했던 리경화씨와 “독창가수”였던 장경옥은 노래를 부르고 반주를 맡다보니 여느사람들보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와 함께 어린 마음에도 저도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되였다. 그때 장경옥의 눈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미남형인 리경화씨가 그처럼 멋져보일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 리경화씨의 집안을 보면 리경화씨가 두 형제중 맏이이고 부모량친은 물론 할머니까지 계시는데다가 어머니가 장기환자였지만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장경옥은 그런 집안에 들어가 시부모님들을 모신다 해도 리경화씨와만 함께 할수 있다면 무엇보다 행복할것만 같았다. 이렇듯 어린 소녀의 마음은 분명 한 남자를 사모하고있었지만 녀성특유의 부끄러움때문에 애만 태우고있는데 어느날 느닷없이 리경화씨가 장경옥을 불러 사랑을 고백하는게 아니겠는가? 오래동안 기다렸던 고백이라 장경옥의 입에서는 머뭇거릴 여유도 없이 “동의”라는 말이 주저없이 흘러나왔다. 그후 장경옥이 훈춘문공단에 가고 리경화씨 또한 군복무를 하다보니 청춘남녀의 련애는 당시 유일한 통신수단이였던 편지로 이어지게 되였는데 그렇게 3년간의 련애끝에 1981년 12월 27일에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결혼후에는 장경옥이 공연차로 1년치고 반년이상은 늘 밖에서 돌아치는 바람에 련애시절부터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부부는 결혼후에도 함께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다보니 련애시절이나 신혼생활을 하면서도 그들 부부는 늘 편지로 그리운 마음을 주고받군 했는데 늦어서 일주일에 한번이고 일반적으로 닷새에 한번씩은 편지를 쓰는것이 아예 생활화가 되고말았다.

바로 결혼 4년차인 1985년 엄동의 겨울이였다. 장경옥이 공연차로 도문에 갔었는데 그만 공연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원래 9시 30분전으로 집에 돌아온다고 집식구들과 말했지만 결국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게 되였다. 바로 장경옥이 집이 있는 하남백화앞에까지 이르렀을 때 한겨울 눈보라속에서 남편 리경화씨가 그때까지 덜덜 떨며 기다리고있을줄이야. 순간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 목이 멘 장경옥의 가슴속에선 뜨거운 난류가 굽이쳤다.

이처럼 안해의 사업을 적극 지지해온 리경화씨는 그후에도 안해의 사업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의 직장을 원래의 편직물공장에서 연길시예술단으로 옮기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으며 시어머니 또한 늘 밖에 나가있는 며느리를 대신해 어린애를 거의 도맡아 키우다싶이했다.

장경옥과 리경화씨의 사랑의 결정체인 아들 리주일은 현재 27살로 장춘대학을 졸업한 뒤 대련에 있는 한국기업에서 질검사원으로 일하고있다. 갓 돌이 지났을 때 전 주 제1차 건강미콩클에서 1등을 한 리주일은 유치원때부터 전 주 지력콩클에서 여러번 1등을 따내는 등으로 공부를 뛰여나게 잘해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줄곧 학급의 반장 겸 대대위원으로 활약해왔다. 또한 인물체격도 부모의 고운 점만 쏙쏙 빼닮아서 학교때부터 따르는 녀자애들이 얼마였는지 모른다고 한다. 장경옥은 “현재 아들이 착한 처녀와 련애중인것으로 알고있는데 명년쯤이면 결혼식을 올려줄 예정”이라면서 “지금까지 내가 며느리노릇하며 시부모를 모셔왔지만 이제 오래잖아 나도 시어머니가 된다”며 흐뭇한 마음을 드러냈다.

1989년부터 연변가무단의 가야금책임자로, 2006년부터는 가무단의 가야금교원으로 활약하며 현재 가끔 자신이 가르치고있는 배우들을 데리고 함께 공연무대에 나서기도 한다는 장경옥은 “가야금교원직을 맡은만큼 앞으로 가야금에 신경을 많이 써 좋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표시했다.
이미 퇴직하고 작곡에 정진하고있다는 남편 리경화씨 역시 “지금까지 안해가 부르는 노래를 한번도 작곡한게 없어 유감”이라며 앞으로 꼭 안해가 부를 노래를 직접 작곡해 안해에게 선물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있다. 과연 리경화씨가 어떤 노래를 지어서 안해에게 선물할것인지, 장경옥가수 또한 그 노래를 어떻게 부를것이며 어떤 인기를 끌것인지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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