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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광- 연변라지오영화TV방송예술단 성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월8일 23시36분    조회:7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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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

ㅡ연변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예술단 성우 김일광의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시내가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룡정시 팔도진 쌍봉마을, 살구꽃이 만발한 동네, 화려한 꽃잎들이 싱그러운 내음을 풍기는 살구나무아래로 일곱살소년의 손을 잡고 걸으며 《고향의 봄》을 부르는 엄마가 있었다. 혁명적가요만이 불리우던 년대에 엄마가 불러주는 당시의 “독초” 《고향의 봄》, 그 노래에 도취된 소년의 모습, 말그대로 한폭의 아름다운 동화였다. 그 아름다운 동화는 두고두고 소년의 가슴에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장차 소년이 사업에서 성과를 올릴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61 2 11, 연길시에서 태여난 김일광은 당시 한어사범학교에서 음악지휘로 사업한 아버지와 홍기가유치원 교양원으로 사업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애착을 지녔다. 신흥소학교시절부터 연길시제5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줄곧 학교선전대에서 무용, 시랑송, 웅변, 악기 등으로 싹수를 보였다. 특히 음악교원 박기건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호른을 배운 그는 장차 음악인이 되려는 야무진 꿈을 키웠다.

당시는 밭에 나가 제전을 만드는 등 지금처럼 그렇게 공부를 틀어쥐지 않을 때여서 부모님들도 김일광에게 장끼대로 해볼것을 권고하였다. 연길시제5중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시비닐인쇄공장에 로동자로 취직한 그는 연변예술학원 작곡연수를 하면서 사업여가를 타 꾸준하게 음악공부를 견지했는바 특히 1981년도에는 주문련에서 조직한 작사작곡학습반에 참가하여 강장희선생이 쓴 가사 《방직공 우리 누나》에 곡을 붙여 처녀작으로 《연변문예》에 발표한것은 물론 우수작품으로 평의되는 감격을 안았다. 그의 이같은 노력을 두고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넌 그냥 로동자로 일할 사람이 아니”라며 자신의 장끼를 발휘할수 있는 무대로 나갈것을 권고했다. 하여 1983년도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 꾸린 종합예술강습반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강습을 마친 그는 1984년도에 연변인민방송국 시험을 거쳐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0여명의 합격자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연변인민방송국 연출조 성우로 입사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지금까지 장장 25년간 사업과 떨어질수 없는 인연을 맺고 황소의 부지런한 근성으로 일해 많은 성과를 올렸다.

처음 방송국 연출조 성우로 입사했을 때 김일광은 모든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라지오방송을 들어만 봤을뿐 그 방송프로그램을 어떻게 제작하는지 몹시도 궁금했던 그는 이제 자기가 직접 그 일을 하게 된것이 무척 행운스러웠다. 따라서 이 소중한 기회에 마음껏 나래를 펼 꿈을 품고 그는 고 강태억연출을 비롯해 리창균, 주춘복, 정광 등 선배들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기량을 제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바 1987년도에는 장춘영화촬영소에 가서 배음훈련과 표현학습 등 종합기량학습을 거쳐 자신을 새롭게 무장했다.

사실 성우로 사업한다는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것만은 아니였다. 1년에 100여부 작품의 배음을 맡아야 하는것은 물론 가끔 혼자서 여러가지 역을 소화해야 하는만큼 그 인물형상들을 모두 생동하게 부각하려면 자연 어려움이 많았다. 남보다 더 많이 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가져야 했기에 늦게 퇴근해야 하는것은 물론 인물들마다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머리를 많이 써야 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작품속의 인물들을 연구하면서 형상을 살리기에 애쓴 보람으로 그는 가끔 혼자서 8인역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 형상을 죄다 생동하게 부각해내여 좋은 평가를 받군 했다. 이렇게 방송국에 입사해서 첫 2년간 성우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익혔던 음악재질이 선배들에게 발굴되여 차츰 음악효과까지 맡아보게 되였다.

김일광이 처음으로 음악효과를 맡은 작품이 바로 련속방송극 《소교의 비극》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현대음악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음악, 지방음악으로 방송극의 음악효과를 처리했던 까닭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었다. 하여 김일광은 자신이 처음 음악효과를 맡은 《소교의 비극》에서 애정장면에 대담하게 현대음악을 도입, 디스코절주를 주입했는데 처음에는 주변에서 “너무 한다”, “삼가하라”는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취자들이 즐기는 등 성공을 안아오자 그런 말들이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게 컴퓨터화가 되여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때는 음악효과를 하는것마저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건너칸에서 성우들이 배음을 하고 이쪽칸에서 음악효과를 책임지는데 순간순간 음악을 맞추기 위해서는 록음기를 켜놓은 상황에서 잠시 돌아가지 못하게 단추를 붙잡고있다가 음악이 필요한 순간이면 단추를 놓아서 음악이 흐르게 하군 했다. 특히 김일광은 음악효과에 배음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여서 록음기단추를 붙잡고있다가는 자신의 차례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록음기를 맡기고 부라부랴 건너칸으로 달려가 배음을 해야 했는데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다보면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또한 방송극에 필요한 음악들을 모두 김일광이 직접 선택해야 했는데 방송극의 절주와 맞게 고르느라 정말 남들처럼 편히 휴식할 여가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연변TV의 음악효과까지 도와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부터는 그에게 휴식날이라는것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사업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는 해마다 120여편의 프로를 완성하면서 매 작품에서 청취자들과 시청자들의 현대 미적요구에 응하여 지방특색과 민족색채, 현대절주를 잘 활용함으로써 창조적돌파를 가져왔다.

1986년도에 연변TV특집프로 《오늘의 연길》과 《북경의 조선족》을 제작할 때였다. 음악효과를 맡은 김일광은 어떤 음악을 도입할가 궁리를 거듭하던 끝에 홀연 어린 시절 외가집이 있는 팔도진 쌍봉의 살구나무밑에서 어머니가 불러주던 《고향의 봄》이 생각났다. 연길시가두문예콩클때면 언제나 신흥가두팀의 가수로 나서서 노래를 불렀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가장 즐기던 노래 《고향의 봄》은 늘 김일광의 마음속에 메아리로 울리고있는것이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고향의 봄》은 널리 불려지지 못했다. 문화대혁명때는 “독초”로 지목되여 못불리웠고 그후에는 그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불려지지 못했던것이다. 동년시절 꿈을 묻은 고향애의 간절한 마음으로 김일광은 《고향의 봄》을 특집프로에 도입하고저 령도께 청시했는데 당시 연변TV 김희관국장은 이미 미국 등 선진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던 터라 “당신 생각이 맞다. 당장 도입하라”고 적극 지지해나섰다. 하여 김일광은 《고향의 봄》 악보를 기보해서 당시 방송예술단에서 사업하던 허춘화선생에게 맡겨 연주를 부탁했고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선률은 다시 전파를 타게 되면서 모든 조선족의 가슴속에 울려퍼지게 되였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 김일광은 단지 남들이 만들어놓은것을 다시 씹는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특히 음악효과를 하면서 그는 새로운것을 모색해내기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주춘복연출로 된 대형련속방송극 《조남기장군》을 제작할 때였다. 어떤 음악을 도입할것이가를 고심하던 그는 상상의 나래를 자신의 어린시절로 몰아갔다.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치던 어느 엄동의 겨울밤, 열쇠를 목에 걸고 2전짜리 말린 간두부쪼각을 손에 쥐고 밖에 나서서 부들부들 떨며 공장에 출근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는데 문득 그의 귀전에 《석유공의 노래》라는 우렁찬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는 연길시내라고 해도 연변병원부근에는 연변병원앞 한곳에만 가로등이 외롭게 서있었다. 기승스런 눈보라에 가로등이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그 바람에 가리워 확성기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소리도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는가 하면 가끔씩 툭 끊기기도 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기발한 착상을 떠올린 그는 《조남기장군》을 제작할 때 음향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눈보라에 확성기의 노래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소리를 모방하여 훨씬 좋은 효과를 보았다.

지금까지 《소교의 비극》, 《오신》, 《갈망》, 《뉴욕에서의 북경사람》 등 1500여부의 작품에서 음악효과를 책임지고 배음도 맡아온 그는 10여편의 소품에도 출연하여 소품배우의 이미지로도 관중들에게 알려져있다. 그가 맨처음 출연한 소품은 1986년 연변TV음력설야회에서 오학철, 김정자와 함께 연기한 《돼지약》이였다. 당시 이 소품을 가지고 공연도 다녔는데 가끔 함께 연기하는 오학철이 무대에서 대사를 잊어버려 진퇴량난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유가 민첩한 김일광은 그때마다 상대방의 대사를 기다리지 않고 재치있게 넘겨주어 궁한 처지를 벗어나군 했는데 매번 공연이 끝난후에는 둘이 배를 끌어안고 웃기도 하였다.

성우, 음악효과, 소품배우까지 하느라니 자연 김일광에게는 휴식일이 없었고 제시간에 퇴근해 집에 돌아가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소처럼 부지런한 근성으로 사업에 정력을 몰붓는 그였지만 결국 그때문에 쓰러진적도 있었다. 2006년도 연변TV음력설야회를 준비할 때였다. 소품련습을 하다가 웬지 몸이 너무 힘들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생명이 위험한 중병으로 진단이 나왔다. 당장 입원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였지만 김일광에게는 그보다도 맡은바 사업이 급선무였다. 자신때문에 모든 일에 차질이 생기게 할수는 없었다. 하여 그는 의사의 권고도 뿌리치고 점적주사를 맞으면서 련습을 견지하여 마침내 음력설야회의 마무리촬영까지 마치고나서야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수술을 받고 한달만에 얼마간 몸이 회복되자 그는 적어도 1년간 휴양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도 마다하고 또다시 출근을 강행, 생명처럼 소중한 사업에 적극 투신했다.

이처럼 사업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은 김일광에게는 묵직한 영예도 많이 찾아왔다. 그가 음악효과를 담당한 대형TV특집프로 《중국조선족민속》과 《북경의 조선족》은 “서울프라이즈”한국KBS텔레비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TV특집프로 《오늘의 연길》은 전국도시텔레비죤특집프로 1등상을 수상했으며 그가 주요배역과 음악효과를 담당한 방송극 《환상의 늪》과 《천당의 메아리》, 《정》, 《락엽이 떨어질 때》는 전국방송극 평의 1등상을 획득했고 역시 그가 주요배역과 음악효과를 담당한 방송극 《자정의 전화벨소리》, 《송순녀》는 전국조선어라지오TV우수프로상을 받아안았다. 이밖에도 1991년부터 련속 6년간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는 등 사업에 참가해서 지금까지 그가 받아안은 상장만도 무려 60여개에 달한다.

얻는것이 있으면 잃는것도 있기 마련이다. 김일광도 례외는 아니였다. 사업에 억척스레 투신하여 수많은 영예를 획득한 대신 그의 혼인은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 연길시제2중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18살아들 김강과 단둘이 생활하고있는 김일광은 이미 10년 세월을 독신으로 살아온 고독한 사나이였다. 다행한것은 아들 김강이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서인지 영화나 련속극에 취미를 가지고 앞으로 영화감독이 되려는 야무진 꿈을 품고있어 더없는 위안이라고 한다. 정말 아들이 꿈대로 성장하길 바라는 김일광은 종래로 아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협박하지 않고 매번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아들로 하여금 매사에 스스로 알아서 하게끔 하고있다. 부자간에 단둘이 생활하려니 자연 자질구레한 집안일들까지 힘들기도 하지만 사업때문에 늘 저녁늦게 퇴근하는 상황에서 아침 한끼나마 아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김일광은 장차 아들이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류학보내는 쪽으로 생각하고있다고 밝혔다. 또 자신도 이제는 새로 가정을 이뤄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고싶다며 현재 만나는 녀성이 있는데 용모도 단아하고 사리밝아서 마음에 든다고 밝혔다.

김일광은 “지금까지 살아온데 후회는 없다.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은 적지만 나로서는 내가 직업을 아주 잘 선택했다고 본다. 가슴아픈 사연도 겪어보고 재난도 겪어보고 실패도 겪어보았지만 조직이라는 명칭에서는 떠날수 없었다. 사업에 열정을 몰붓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지난일들을 총화하면서 “직장에서 동료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가 가장 기분좋다. 앞으로도 계속 사업에 열심하는 한편 선배님들을 존중하고 후배들을 잘 이끌어줌으로써 견고한 받침돌이 되고싶다”고 밝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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