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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섭-저명한 조선족 언어학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28일 15시57분    조회:6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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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언어학자 서영섭 교수 "새 중국 창립 60년래 조선언어의 발전노정" 담론

(흑룡강신문=하얼빈) 2009년 6월 26일 중국 저명한 언어학자 서영섭 교수는 인민넷 중국공산당뉴스 프로그램을 찾아 새중국 창립 60주년 뜻깊은 해를 맞으면서 "새 중국 창립 60년래 조선언어의 발전노정"에 관련해 담론했다. 

문: 새 중국 창건 60년래 우리 민족어는 전례없이 개화발달하고 어문사업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60년래 우리 민족어문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노정을 회고해본다면…

답: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 해방과 더불어 말과 글, 심지어 이름 석자까지 빼앗겼던 우리 민족은 중국정부의 덕으로 자기 말과 글,이름을 되찾고 제 말과 글로 의사소통을 진행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기에 건국후 우리 민족은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여러 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건국후 민족어문을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과 권리를 보장받음에 따라 우리 민족은 해방과 더불어 야학 등을 꾸리고 소학으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민족어문에 의한 완벽한 교육체계를 세웠다. 이는 아마 중국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민족언어에 의한 출판,신문, 방송, 연극,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고 특히 교육면에서 전국적으로 천명당 14명 정도가 대학에 갈수 있은데 반해 우리 민족은 43명, 다시말하면 3.1배에 달하는 진학률을 보장했으며 고중진학률은 전국적으로 천명에 79명인데 반해 우리 민족은 229명으로 2.6배에 상당하다. 초중은 전국적으로 천명당 223명임에 비해 우리 민족은 337명으로 1.5배에 상당하다.

언어는 사회의 산물로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하기 마련이다. 건국 60년동안 우리 민족 언어도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고 본다.

어음이나 문법보다도 어휘구성면에서 많이 보충되고 풍부히 되였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따내기까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방직후 1957년까지 자기 민족어문을 회복 발전시킴에 있어서 좋은 성과를 이룩했지만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당시 반우파, 반우경투쟁,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등 좌적인 사회적영향, 특히 중국 제2차 소수민족어문과학토론회이후 극좌적인 사조로 인해 우리 조선어의 발전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가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조선어의 내적발달법칙에 의해 발전시키려 했지만 뒤이어 문화혁명으로 위난의 시기를 맞았다. 그후 개혁개방과 함께 조선어사용상 바른 길로 되들어섰지만 여러 원인으로 인해 재래의 규범을 쓰는가 하면 또 한국의 규범을 따르기도 하고 한 책에서까지 두루 섞어쓰는 혼란한 현상도 없지 않은것 같다.

우리는 해방직후에 '노동자'라고 써왔는데 좌적인 영향으로 '공인'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63년도에 다시 '노동자'로 바꾸었는데 문화혁명으로 또다시 '공인'으로 바꾸고 개혁개방후 다시 '노동자'로 되돌려 쓰는 곡절적인 과정을 겪었다.

문: 새 중국 창립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가? 당대의 저명한 조선어학자로 되기까지 공화국창립이 서교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답: 건국초기 중국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949년 중학교 2학년때이다. 중학교에도 가기 어려운 처지에서 아버지 몰래 시험을 쳐서 중학교에 붙었으며 졸업후 학교 교장님이 연변사범학교에 추천해 국비생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졸업후 소학교 교원으로 가야 했지만 또 대학에 추천을 받아 대학 4년간 역시 국비생으로 공부할수가 있었다. 졸업후 그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고 후에 중앙민족대학에 전근해왔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되면서 빼앗겼던 말과 글을 되찾아 배울수 있게 되었고 가르칠수 있게 되였으며 또한 교육과 연구에 미력이나마 바칠수 있게 되었다.

문: 언어학은 까다롭고 특히 고대어는 꽤 난삽한 학과라고 하는데 왜 이런 학과를 전공하게 되었고 또 은퇴후 지금까지도 장장 50여년을 드팀없이 이런 학문 전수와 연구에 정진하는가?

답: 사실 나는 자원해서 전공한 것이 아니다. 소학교에 입학할 때는 우리 글을 배웠는데 입학하고 보니 집에서 '가, 갸'를 다 배웠고 천자문을 배웠기에 나로는 배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곧 학교에서 월반을 시켜 2학년생이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제국주의의 민족어말살정책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일본어로 교육하는 다른 학교에 가 다시 1학년부터 공부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학생이 학교에서 만약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로 목에 패쪽을 걸어야 하고 변소청소를 해야 했다.

이런 인격적인 모욕으로 자기 민족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왜놈의 언어를 쓰도록 강요당했고 자기 목에 걸었던 패쪽을 다른학생에게 넘기려고 학생지간에도 서로 감시하고 신고하는 노화교육을 받으며 수모를 당했다.

해방후 다시 제 말과 글로 교육을 받게 되고 나중에 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게 되였으며 학교에서 언어학교수임무를 맡기니 자연히 언어학을 전공하게 되고 그걸 가르치고 연구하는 과정에 우리 말의 우수성도 알게 되고 우리 말과 글이 좋다는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처럼 흥취도 있고 학교의 수요에 따라 전공하기도 했다.

문: 흔히 언어학은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고 하는데 서교수는 어떻게 하여 강의를 그같이 재미있고 재치있게 잘하는 스승으로 평가됐는가?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답: 재미있게 강의했다기보다 학생들이 재미있게 들어줬다고 하는것이 타당할것이다. 난삽한 학문이기에 우선 자기가 가르쳐야 할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했다. 나는 가진것은 없어도 언어학에 관한 책들은 남못지 않게 있었고 꾸준히 학습하고 또한 제자들이 아주 착해 잘 들어주고 재밌게 들어주었기에 재미있는 강의라고 하는것 같다. 이렇게 할수 있은것은 자기 전공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있기 때문아라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이론과 실천을 결부시켜 실제문제, 특히 연구에서 제기되는 문제, 실제 사용에서 제기되는 문제, 난점, 중점, 체계를 분명히 가르치려고 했다. 그외 글만 가르친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인격수양에 대해서도 주의해 강의했기에 좋은 평가도 있는가 본다.

나는 남달리 7년이나 사범교육을 받았으므로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한채 교단에 오른 자들보다 다른 점이 없지 않을줄 안다. 비결이라고 굳이 말한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기 위한 성직에 남못지 않은 열성과 노력을 다해온것이라 하겠다.

문: 지금 중국에서의 조선어 사용상 문제점들이 적지 않은같은데 서교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어떻게 발전시키겠는가?

답: 아주 좋은 물음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중국정부의 덕으로 민족어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와 권리를 법적으로 담보받는 정황에서 조선어사용상 많은 성과를 이룩했지만 자화자찬할 처지는 못된다.

지금 존재하는 문제라고 생각되는것은 첫째, 늘 한어로부터 받아들여 쓰는 비규범적 현상이다. 예를 들면 우리 말엔 '심리적상태'를 줄여서 '심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용중에서 자구만 한어로부터 '심태'를 받아들여 쓰는 현상이 보편적이다. 그리고 우리 말에 있는 '유년'을 '동년'으로 쓰고 심지어 사전에까지 올려 합당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한 '과학자'를 '과학가'라 하는 현상도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치명적인 결함이라 아니 할수 없다.

둘째,억지로 만들어서 쓰는 폐단이다. 즉 한어에서 축구용어로 '前腰'를 우리 말에서 '앞허리께'라 하고 '음으로 양으로'대신 '암으로 양으로'라고 쓰는 등 현상이다.

셋째, 적중하지 못한 표현이라 하겠다. 조선어를 한다지만 한어의 뜻에서 하는 예하면 '간섭'에서 '작가들은 생활을 대담하게 간섭해야 한다'에서 우리 말로는 '간섭'이라는 것은 조금도 참견해서는 안되는 일을 뜻하는데 한어에서 그대로 가져오면 적중하지 못하다. 이때엔 '간섭'대신 '관계'를 써야 할것이다.

또한 신문에서는 '...고기개 생산 예비발굴...' 즉 '고기개를 생산한다'고 말하고있다. 사실 '개는 생산'하는것이 아니라 '사육 혹은 사양'한다고 해야 적중한 말이 될것이다. 신문에 '2000쌍 집체결혼'이라고 했는데 사실상 집체로 결혼한게 아니라 함께 결혼식을 하였을테니 말이다.

넷째, 외래어 남용이다. 외래어를 필요이상 사용하는 현상들이 아주 많다. 외래어란 필요에 의해 써야지 자신의 인격을 높이기 위해, 유식함을 자랑하기 위해 쓴다면 백성들에게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연변의 한 농민은 신문을 읽다가 외래어를 보면 밥을 먹다가 돌을 씹는 격이라고까지 했다. '머리맵시'나 '머리모양새"라 해도 될걸 왜 '헤어스타일'이라고 합니까? '자동차를 타고 거닐다'를 의미하는 '드라이브'를 '자전거를 타고 드라이브하다'로 오용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이렇게 뜻도 모르고 외래어를 사용하는 폐단까지 나타날 정도로 외래어를 남용하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다섯째, 사투리, 속어사용이다. 문체론적효과를 위한 사용외엔 표준어, 문화적인 표현을 쓰는것이 문화적인 민족이라 생각한다.'왜'가 표준어임에도 불구하고 '왜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흔한가 본다.

여섯째, 문법적인 오유이다. 예를 들면 '새로운 정책을 출범하고', '출범하다'는 자동사인데 타동사로 쓰고있다. 문법적으로 '하다'를 마음대로 붙여서 '규범하고','미신하고','바탕하고'... 그외 토를 잘못 쓰거나 어울림이 맞지 않거나 하는 등 현상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데 그 문제가 심각하다. 더 엄중한 문제는 이런 결함을 결함으로 알고 있지 못하는것이고 결함을 모르는 그 결함,결함을 고치지 않는 그 결함이 더 큰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언어를 쓰는 목적은 자기 유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 특히 인민대중이 알기 쉽게 자기 말을 이해하도록 하자는것이고 그러는게 유식한 표현인데 군중들이 알든말든 한어거나 외래어에서 받아들여 쓰는것을 상수로 여기는 버릇부터 고치지 않고서는 언어사용상의 허물을 고쳐나가기 어려울것이다.이런 허물을 스스로 깨닫고 이미 정한 규범에 좇아 본이 있게 말을 하고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다시한번 강조하고싶다. 

문: 서교수는 늘 우리 말은 아름답고 우리 글은 훌륭한 글이라고 강조하는 알고있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답: 우리 말과 글은 민족유산가운데 아주 전형적인 우수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언어가 아름답다는것은 그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가 좋다는 뜻인데 어음, 어휘, 문법에서 볼 때 어음상에서 모음이 21개, 자음이 19개이다. 다시 말하면 악음이 52.5%, 소음이 47.5%, 그 소음가운데서도 'ㄴ, ㅁ, ㄹ, ㅇ' 네개 유향음을 모음에 합하면 52.5%로부터 62.5%가 악음이 된다.

악음은 음악상으로도 아주 듣기 좋고 절주있는 소리이다. 어음자체가 구성이 이럴뿐만아니라 자음과 모음이 자유롭게 구성되여 많은 음절을 구성하고 소리가 '음감'를 나타내고 예를 들면 모음 “ㅏ, ㅑ, ㅗ, ㅛ”는 양성모음으로서 작고 밝고 가볍고... 음성모음 “ㅓ, ㅕ, ㅜ, ㅠ”는 크고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준다.

어음의 활발한 가동성으로 개음절이 많고 페음절이 적어 듣기에 유화롭다. 악센트와 억양이 있기에 절주감이 있고 어음이 합법적변화가 있기에 발음하기도 듣기도 좋다. 어휘가 풍부한데 특히 상징사가 풍부한다. 언덕에서 구울러내리는 솔방울을 '때굴 때굴, 땍때굴 땍때굴, 땍땍땍,땍때굴 땍대굴, 땍때 땍때구르르'하면 솔방울이 구울러내리는 모양을 눈앞에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문법구조도 아주 치밀하게 째여있다. 어떤이는 토가 많다고 나무람하고있지만 사실 우점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란 단어 하나에 토를 달리 붙임에에 따라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되는걸로 보아도 알수 있다고 본다.

우리 글자에 관해 독일 가벨린치교수는 "조선문은 다른 어떤 문자보다 쉽게 빨리 배울수 있어 몇분안에 익힐수 있으며 한 민족이 소유하고있는 문자가운데서 이처럼 과학적이고 간단한 문자는 처음 본다"고 했고 미국 라이 샤워 교수는 "조선문자는 아마도 그 어떤 나라에서 쓰는 문자보다 가장 과학적인 문자체계일것"이라고 감탄했다. 휴밀러 교수는 “조선문이 기억하기 쉽고도 활용이 넓으며 또한 간편하고 그 조직의 직교가 알파벳으로는 아마 세계에서 그 짝이 없는가 본다”고 했고 화란 포스 교수도 “조선민족은 가장 좋은 알파벳을 발명했다”고 했다. 그리고 시카코대학 맥콜리 교수는 “가장 좋은 알파벳이 가치가 있으며 더 나아가 조선문은 벨의 가시기호보다 400년이나 앞선 문자임을 지적”하고있다.

모두어 말하면 우리 글자는 과학성과 평이성과 민중성으로 유명하다. 소리표현에 있어서 일본자(51)로는 300개,한자(91,251)로는 400개임에 반해 우리 글자는 40개 자모로도 8800개입니다.특히 그음가는 12768개나 되니 얼마나 홀륭한 문자인가!

몇 년전 열린 프랑스언어학자회의에서 국제음성기호로 세계언어를 적기에 부족하므로 아예 조선문자로 국제음성기호를 대체하자는 의견까지 나왔고 영국 리스대학 제프리 샘슨교수는 우리 글은 발음기관을 교묘하게 모방하여 만들어 독특할뿐더러 어음체계와 문자체계가 일치하다는것이다.

어음체계에 순한소리, 거센소리, 된소리가 있듯이 글자체계에도 그에 상응한 문자체계를 가진 문자는 조선문만일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글자의 순위에서도 조선글은 단연 1위라 했다.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는 우리 문자의 과학성과 합당성, 독창성을 고려해 역시 세계문자의 1위로 내놓았다.

세계교육과학조직기구에서는 1997년 10월 1일에 우리 문자를 기록유산으로 지정했고 세계 언어학연구거나 문맹퇴치에 공로가 있는 자에게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상을 준다. 그런가 하면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우리 문자로 자기 말을 적도록 시험하고 있고 캐나다에서는 농아자들에게 우리 글자로 글을 배워주어 효률이 아주 높다고 한다.

이런 우수한 글에 의해 우리 민족은 중국 56개 민족중 소수민족대학, 농민대학도 제일 먼저 세우고 9년제 의무교육을 가장 먼저 완성했다. 이는 첫째로 중국정부에 감사 드려야 하고 둘째는 우리 민족이 힘쓴 보람이며 셋째는 우리 말과 글의 우수성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문: 서교수는 어떻게 하여 중국 고등교육사업에 뛰여난 기여를 한 이들에게 주는 국무원 정부 특수 수당금을 향수하고 조선어의 학술적발전과 국제적보급, 민족학술의 선양에 큰 기여를 한 학자들에게만 수여하는 한국 동숭학술상이며 한글의 진흥과 발전에 공적이 큰 인사에게만 드리는 한국 문화훈장과 대통령증서까지 받게 되였는가요?

답: 일을 하다 보니까 차례졌을 뿐이지 그걸 목적으로 일한적은 없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대학 교단에 서서 현대조선어를 가르치다가 사업의 수요로 중앙민족대학에 전근했는데 와보니 조선어교원이라곤 저 하나밖에 없었다.

모를 문제가 있어도 물을 곳이 없었고 할수없이 편지로 은사님들께 혹은 국외에 문의하느라 했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혼자 애써가며 현대조선선어를 비롯하여 고대조선어,조선언어사,조선어연구사,조선어문체론...등등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였고 그래서 남들이 쉴 때도 열심히 책을 볼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의하느라니 남못지 않게 학습하지 않을수가 없었고 또 강의하자니 교과서가 필요되여 백여만자의 교과서를 써서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또한 짬짬이 시간을 이용해 졸저들을 발표, 연변에 온 한족하향청년들의 수요에 의해 '조선어자습독본'을 썼는데 7만명에 달하는 한족하향청년들에게 좋은 교과서로 되였다고 한다.

문화혁명후에는 조선어무용론이 가시지 않고 “조선어는 중국에서 쓸모가 없다”고 할 때였으므로 교원들이 “조선어는 쓸모가 있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참고서가 없었다. 그리하여 대학용교과서 겸 중학교 조선어문교원들이 참고용 교재로 “조선어문법”을 썼다. 개혁개방후 조선어사용상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겨 편집들이 실용적인 문법을 써줄것을 요구했다. 당시 혼자서 여러 사람몫의 강의를 담당 할 때였지만 시간을 짜내 7, 8년 동안 수집한 자료에 의해 '조선어실용문법'을 썼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글만 가르칠것이 아니라 신문, 방송, 출판 편집들에게 일깨워줄 필요성을 느껴 회의기간이거나 방학기간 동북3성을 다니면서 50여차 순회강연을 진행했다. 그후로 베이징의 우리 민족 자녀들이 민족의 말과 글, 예절을 모르는 현상을 개변하기 위해 조선어강습반을 꾸려 조선어기초, 조선어민속학 등을 가르쳐서 민족의 후대를 구원하는 일도 했다.

교육사업에서 여러 과목을 가르치고 2천7,8백명에 달하는 제자를 키워냈으며 스승은 못나도 똑똑하고 훌륭한 제자들이 저의 문하생으로 있어서 아마 소문난것 같고 또한 제가 열심히 민족어를 아끼고 교육사업을 아껴서 한 일들이 아마 성과로 되여서 국무원에서 발급하는 정부 특수수당금도 받고있고 국외에서까지 수상한것 같다.

문: 마지막으로 중국조선어의 정확한 사용과 건전한 발전을 위해 소중한 말씀 부탁한다.

답: 첫째는 민족어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로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말과 글은 훌륭한데 이것을 제쳐놓고 다른 언어를 강요하는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어나 한어에 의해 출세할 사람도 없지 않고 그건 또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 2백만 동포라는 집단이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향상하는데는 어디까지나 우리 언어와 우리 문자에 의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민족어를 학습하자는 구호를 내걸고싶다. 외국어나 한어를 학습해야 할뿐더러 본 민족어도 학습해야 한다. 사실 우리 말에 있는지 없는지 말없는 스승인 사전을 곁에 놓고서도 번져보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에 의해 듣거나 보던것에 의해 한어식대로 옮겨놓고 한국식대로 '상자'를 '박스'로 '안해'를 '와이프'로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아주 불필요한것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의 언어는 아름답고 문자는 훌륭하다. 평생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것이 제민족어일터인데 쩍하면 한어에서 받아들여 쓰고 심지어 연변의 한 축구지도를 평론할 때 '성공한 장본인'이라고 썼다. 성공한 장본인이라는 말은 없는것이다. 이것은 '장본인'의 부정적 뜻을 모르고 긍정적으로 쓴 부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주인공', '실패한 장본인'이라 해야 바른 말이 될것이다.

셋째는 독자와 청중을 생각해줬으면 하는 소망이다. 말과 글의 목적은 상대가 알아듣기 쉽게 알아보기 쉽게 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말 훌륭하고 쉬운 글자를 갖고서도 우리 말 규범에 의해 쓸 대신 비규범적으로 제 쓰고싶은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사화생활에서 공중도덕을 지켜야 하듯이 언어사용상에서도 규범을 의무적으로 자각적으로 지켜야 한다. 자기가 하는 말, 자기가 쓰는 글이지만 인민대중을 위해서 바른 말 쉬운 글을 썼으면 하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겨레들에게 말하고싶은것은 “제 말과 글을 잘못쓰는 허물을 깨치자. 허물을 모르는 허물이 가장 큰 허물이다.”라고 귀띔하고싶다. 

영상인터뷰 사이트 주소: http://tv.people.com.cn/GB/14644/9539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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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제:홍광정신 실천으로 조선족 명예 찾겠다 ]  “한국정부에 리홍광장군의 명예회복을 수차례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반응이 없다.”  지린성 반석시 홍광중 교장을 역임한 이주산(李柱山·72)선생은 오랫동안 항일운동가 리홍광장군을 연구해온 인물. 아마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그 만큼 리홍광장군에 대해 잘 알...
  • 200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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