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최명룡-조직에서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민족간부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19일 13시28분    조회:767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 길림성민족간부학교 최명룡교장 만나본다

최명룡 프로필:

1951년 12월 영길현 출생
1968년 3월 입대
1985년 중앙민족대학 학습
1987년 영길현 토성자만족 조선족향 부향장
1989년 영길현민위 부주임, 주임
1995년 성민위 문교처조리 연구원, 종교처 부처장, 기관당위서기
2002년 민족연구소 소장
2007년 길림성민족간부학교  교장
선후하여 현로동모범,  성우수 림업사업자
2009년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 당선

올해 국경 60주년 천안문광장 열병식은 전 세계를 감복시켰다.  금년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의 일원으로 웅위로운 천안문관람대에 올라 국경60주년 열병식을 현장에서 보는 영광을 지녔고 또 제5차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표창대회에서 대표들을 접견하러 온  호금도주석과도 악수를 할 때의 정경을 회고하면서 길림성민족간부학교 최명룡교장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시 두가지 감회가 떠올랐다. 하나는 몇십년간  한마음으로 민족사업에 열심해온 보람이 정말 있구나 하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이후에  당과 인민 그리고 민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였다》  간단명료하나  한 평범한 민족간부의 진솔한 마음이였다.

최명룡은 1985년도에 조직의 추천으로 민족대학에 가 학습하면서부터 민족사업과 인연을 맺게 되였으며 그때로부터 장장 25년동안이나 이 사업에 몸을 담궈 손색없는 민족간부로 성장하였다.

소수민족 군중들의 급시우 되여

길림성 영길현은 민족촌이 많기로 전 성에 이름나있다. 당시에 현적으로 5개의 민족향에 48개의 민족촌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족촌만 38개, 조선족중소학교는 42개에 달했다. 영길현은 연변지역외 산재지구 현급에서 조선족인구가 제일 많고 조선족촌이 제일 많은 지역이였다.  따라서 영길현의 민족사업은 재래로 간거하고 힘든 사업이였다. 1989 년 7월, 토성자만족조선족향 부향장으로 있던 최명룡은 조직의 수요에 따라 영길현민위에 전근, 전반 영길현의 민족사업을 책임지게 되였다.

현적으로 소수민족 인구가 많고 또 그 단위도 많은 상황에서 존재하는 문제도 적지 않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았다. 우선 소수민족 문화교육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 수두룩했는데 영길조1중 학교건물을 짓는 문제가 제일 돌출하였다. 전 성의 유명한 모범학교였으나 학교건물공사는 자금이 부족하여  8년동안이나 마무리를 못하게  되였다. 교실마다 난로를 피우며 렬악한 상태에서 공부하고있었다. 최명룡은  수십차나 해당 부문에 제기하고 길림시에로, 성에까지 찾아다녔다. 결과  당시 길림성 부성장으로 있던 리덕수가 현장사무를 보게 되고 해당 부문들에서 힘을 모아  100만원이라는 자금을 해결하게 되여  《8년 항전》만에 완정한 모습을 갖출수 있었다.

그는 민족교육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달려가 해결하는 급시우였다. 당시 영길현조4중 교원들의 주택문제가 반영되였다.  교원들이 비좁은 단칸방에서 지내지 않으면 세집을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다. 최명룡은 해당 부문에로  뛰여다니고 인맥까지 동원하여 10만원이란 자금을 해결,  9호의 교원주택을 해결하고 전화까지 놓아주었다. 또 민족학교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한 친구로부터 심양주재 일본 총령사관에 주재국에 대한 협조기금 항목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차 령사관을 찾아가 협상, 마침내 32000딸라에 달하는 지원금을 쟁취하였는데 이 자금으로 영길조1중, 토성자소학교 등 민족학교들에 전자교수설비들을 갖추어주었다.

현민위에 전근되여오자 많은 사람들한테서 민족향진이 그렇게 많은데 오래동안  문체활동이 단절되였다는 반영을 듣고  여러 경로를 통해 5만여원의 경비를 모아 민족운동대회와 소수민족문예공연을 회복하였다. 이로 하여 몇년만에 성대한 소수민족운동회가 개최되여 현내의 수만명 소수민족지간 그리고 수십개의 민족향진간에 서로 돕고 서로 믿는 조화로운 분위기가 새롭게 형성되여 영길현민족사업의 새 국면을 열어놓았다. 그때로부터 민위 임기내에 2년에 한번씩 민족운동회를 견지했다.

91년, 92년도에 민족향인 토성자향과 금가향에 우박이 내려 큰 재해를 입었다. 현민위에서는 즉각 해당 부문의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전 현 민족촌, 민족학교와 여러 민족 인민 그리고 민족기업가들을 동원하여 지원했다. 당시 조선족  중소학생들까지도 동원되여 지원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최명룡은 경상적으로 이런 기업들을 찾아가 상황을 료해하고 어려운 점을 해결해주었다. 92년도엔 고기닭공장에서 국가 대부금을 맡지 못해 거의 생산을 정지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최명룡은 직접 나서서 각계 민족인사와 기업인들을 동원하여 40여만원의 기금을 모아 공장을 도운 덕에 당시 영길현의 제일 큰 향진기업은 다시 소생하게 되였다.

《민족간부로서 군중의 공복으로 되여야 한다. 나는 이런 공복이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 가운데 보람이 있기 때문이였다.》

최명룡의 의미심장한 말이다.

《말을 잘듣는 간부》 별명에 후회가 없어

최명룡교장의 리력서를 보면 특히 길다. 68년도에 입대한 때로부터 시작하여 그후 림업계통의 간부로도 있었고 향의 부향장,  과학기술 부문의 책임자로도 있었다. 다음은 영길현민위 부주임, 주임으로도 있었고 길림성민위에 온 후에는 선후로 문교처 조리연구원, 종교처 부처장, 기관당위서기 직무를 력임했다.

또 조직의 수요로 민위소속인 길림성민족연구소 소장으로 5년간 근무하다가 또 현재는 길림성민족간부학교 교장으로 사업, 3년째가 된다. 그는 가는 곳마다에서 맡은바 부문과 단위 사업을 잘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군중위신이 있었다.

길림성민위 책임자는 최명룡을 두고 《그는 이십여년간 민족사업을 하면서 아주 많은 부문에서 사업했다. 가장 보귀한 점은 어디에서 수요하면 아무 말 없이 그 곳으로 달려가는것이다. 당과 민족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한 당원간부의 높은 정치적각오와 인격수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사적은 거창한 사업에 있는것이 아니고 이런 평범한 민족사업에 스며있다. 하기에 이번 전국민족단결선진모범으로 당선될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

최명룡은 이렇게 말한다.  《사업터를 많이 옮겨다녔고 업무적인 내용도 여러 가지다. 사실  친구들이 내 직무가 많이 바뀐데 대해 한곳에 지긋이 있으면 편하기도 하고 기관에 있으면 급도 더 출수 있지않는가고 묻기도 한다. 매번 조직에서 새로운 배치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그것을 나에 대한 믿음과 관심으로 여겼으며 새로운 사업터에 가서는 반드시 성과로써 이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조직의 배치라지만 너무 말을 잘 듣는게 아니야󰡑고 말하는데 나는  후회가 없다. 분공은 달랐지만 모두  민족사업이였기에 열심히 하였고 일마다 살손을 붙여 인차 적응할수 있었다. 》

조직의 부름은 언제나 그의 천칙이였다. 1998년도에 길림성 백성, 송원 지구에 100년동안 보기 드문 수재가 들었을 때 성민위에서는 최명룡을 대표로 파견하여 구제 사업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는 두달 동안이나 당지 군중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으면서 구제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현재 길림성민족간부학교 책임자로 있는 최명룡은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어 맞춤형 민족간부양성과 다양한 민족간부양성 모식을 연구하여 일련의 새로운 조치를 내왔다.

전에는 양성반이 단일하여 여러 계층, 부문의 인원들이 수량상으로도 제한이 많았고 또 학과목설치도 구전하지 못하여 학원생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지금은 양성반도 다양하여 자치지역 후비간부양성반, 소수민족청년간부양성반, 소수민족부녀간부양성반, 민족향진간부반, 민족계통간부양성반 등이 있어 부동한 계층, 부동한 부문의 소수민족 인원들이 수시로 양성받을수 있다.

교수에서도 원격조종시스템을 구축하여 학교에 오지 않고도 다른 지역에서 요구에 의해 양성받을수도 있게 하였다. 앞으로는 성조직부와 각지 민족사업 해당 부문의 배치에 따라 보다 계획적이고 효과적으로 소수민족양성사업들을 밀고나갈것이라고 최명룡교장은 말했다.

길림성 민족사업 각 방면의 새 기상

기층향진으로부터 민족사업을 직접 체험해온 최명룡은 길림성 민족사업의 20여년간의 발전에 대해 감회가 깊다.

성민족사무위원회는 호금도동지가 전국민족단결표창대회에서 한 연설정신을 받들고 단합되고 조화된 지도부의 정확한 지도하에 각항 민족사업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있으며 기꺼운 기상들이 나타나 민족간부로서 힘이 난다.

금방 기층조사를 하고왔다는 그는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은 현재 명년 길림성 민족사업회의를 위해 각 부문과 일일이 협상하고있으며 각 부문의 책임자들은 현재 모두 각지에 내려가 조사연구를 하고있다고 소개한다. 성민위에서는 이 몇년간 정기적으로 전 성 민족사업회의를 열어 한계단의 사업을 총화하고 존재하는 문제가 있으면 제때에 해결, 민족사업에서 훌륭한 경험들을 쌓았으며 적지 않은 경험은 전국에 소개되고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모범자치주인 연변은 전국에서 유일한 민족단결모범자치주로, 전국순회보고단 첫발언자로 선정되였으며 장백조선족자치현도 련속 4년 전국선진집단으로 되고있다.

20여년간 민족사업에 종사해오면서 최명룡은 소수민족사업에 대해 실천과 리론상에서 많은 탐구를 해왔다.

그는 특히 성민위 문교처 조리연구원으로 있을 때나 민족연구소에 있을 때나 해당 인원들을 거느리고 기층에 내려가 조사연구를 많이 하였는데 30여만자에 달하는 《중국조선족마을에 대한 조사》 그리고 《세계금융위기가 우리 성 민족지구에 미치는 영향》 등 연구론문은 국가 해당 부문의 큰 중시를 받고있다.

이러한 보고서는 현시기 민족사업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천명하였으며 소수민족사업의 발전과 번영을 위한 건의도 많이 내놓았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에 나타나는 농촌, 교육, 민족경제, 도시화 등 문제를 잘 알고있고 그 출로와 해결책에 대해 고민하고있다.

《개혁개방중에서 생긴 이런 문제들을 직시하고 개혁개방의 주동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발전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며 성과 장춘시 해당 부문과 머리를 맞대고 장춘시조선족타운 건설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며 외국에서 벌어들인 로무수입을 귀국창업에 효과적으로 리용하는 방안도 제기하고있다.

특히 민족간부를 양성하는 부문을 책임진 사람으로 어깨가 무겁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고 피력했다.

그는 조선족청년들이 경제분야나 연해도시에 진출하는것도 하나의 출로기는 하지만 우수한 조선족청년들과 대학졸업생들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하는 높은 각도에 서서 또 큰 리상과 포부를 안고 민족간부의 대오에 가입할것을 기대했다.

길림신문   전춘봉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중국농산물 온라인시장의 통솔자를 꿈꾸는 농민 CIO 중국농촌중개인사이트 CEO  조동철 만나본다 조동철 프로필:조동철,  조선족 , 1977년 출생 중국농촌중개인사이트 CEO, 심양시 소가툰구농민경제인협회 부회장. 2004년―현재 심양시 소가툰구농민중개인협회 부회장. 2004년―현재 중국농촌중개인사이트―국제련...
  • 2009-08-02
  • CJ그룹 중국본사 박근태 사장 인터뷰   ▲ 박근태 사장님은 20여 년 전부터 중국에서 사업해 오신 걸로 알고 있다, 당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84년 대우실업 철강 1본부에 근무하다 그 해 홍콩지사 철강부로 발령을 받았다. 홍콩에서 5년 정도 근무를 하면서 홍콩 거래처 외 중국 거래처 및 중국 비즈니스...
  • 2009-08-02
  •       흑룡강성조선족상공회 권태금씨,     평안보험총공사 서비스스타상 수상        (흑룡강신문=하얼빈) 김철진 기자 = 불혹의 나이를 넘어 뒤늦게 보험업에 투신해 성공신화를 일궈낸 권태금(조선족, 녀, 50세)주임이 2만여명이...
  • 2009-07-31
  • 고운 마음 독특한개성 추구하는 음악인—가요 《물소리 새소리》의 작곡가 김창호씨가요 “물소리 새소리”는 고향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가사와 맑고도 절절한 선률의 흐름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흐르는 세월속에 잊혀지지 않는 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자리를 잡았다. 문창남 작사...
  • 2009-07-30
  • 내가 만난 한성호박사 3년전 필자는 장편실화소설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를 읽고 한성호박사님을 꼭 만나보겠다고 작심하고 김수영(작자)선생님한테서 련계주소를 알고 한박사님께 나의 절절한 마음을 전했더니 동의한다는 기별이 왔다. 한박사는 한국 박정희대통령때부터 청와대 《어의》며 호금도, 리붕,...
  • 2009-07-29
  •  민족향기 풍기는 장백의 종달새우리 민족 민요를 말할라치면 민족창법으로 주렁진 성과를 따낸 시원한 가창력으로 우리 민요를 전국 나아가서는 전세계에 알리는 중앙민족가무단의 성악가수 변영화가 떠오른다.얼마전에 연변대학예술학부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변영화는 현재 유럽순회공연준비중이다. 이전에도 전국적...
  • 2009-07-27
  • 원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주임 성기화의 실적연변음악을 흥기시킬 꿈을 안고 《만천성》, 《해바라기》, 《웃는 얼굴》 등 대중들이 즐기는 노래 100여수를 작곡해 중국조선족음악에 자신의 이미지를 심은 작곡가 성기화는 비단 우수한 한명의 작곡가일뿐만아니라 음악편집으로서 직책을 다하는 등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무...
  • 2009-07-24
  • 중국에서 가장 큰 기업가 단체 중국기업연합회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경제학박사 리명성(조선족, 44)씨. 그는 개혁개방 이후 중앙정부에 진출한 전문가 출신 간부 중 한 사람이다. 중앙정부에 진출한 조선족 동포가 많지 않은 실정에서 리명성 씨는 많은 조선족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며 귀감이 되고 있다. 리명성 박사는...
  • 2009-07-24
  • 조선족촌 간부고령화 몸살 ... 로인촌장 최순영씨의 감동사연매하구시 행령향 행산촌의 현재 촌장은 매하구시에서 생활하던 68세의 최순영로인이다. 촌의 회계는 올해 70세나는 로인이 담당하고있으며 촌당지부서기는 올해 55세나는 마을의 한족농민 요춘귀가 담당하고있다. 조선족촌 간부로령화의 전형이라 하겠다. 조선족...
  • 2009-07-23
  • 조선족 대표 브랜드, 북경 한나산 장문덕 이사장조선족 요식업계 대표 브랜드가 되기까지 여행사 직원이었던 평범한 20대 남성이 30대 중반이 된 지금 억대 매출을 기록하는 요식업체의 오너가 되었다. 바로 조선족 젊은 리더이자 조선족 요식업계의 1인자, ‘한나산찬음유한공사(汉拿山餐饮有限公司, 이하...
  • 2009-07-2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