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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희-중국 우주공간 광학계의 《왕별》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3일 09시17분    조회: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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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공간 광학계의 《왕별》
중국과학원 장춘광학정밀기계및물리연구소 우병희연구원 만나본다

국내 각 언론보도들에서는 《우병희, 그는 우주공간광학분야를 비롯하여 중국의 원자탄, 수소탄, 미사일, 인공위성, 유인우주선 발사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한 중국 우주공간 광학계의 〈왕별〉》이라고 극찬, 1992년과 2000년 선후하여 두차례 연구소를 찾은 강택민 국가주석은  우병희 수석연구원을 만나보고 그의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우병희 프로필:

1938년 료녕성 신빈현 출생, 조선족.
1957년 길림성 통화조선족중학교 졸업, 길림대학 물리학부 입학.
1962년 대학 졸업후 대학교 교원으로 교단에 오름.
1963년 중국 유일의 광학기계연구소인 장춘광학정밀기계및물리연구소에서 연구원, 연구실장, 박사생도사로 근무.

수여받은 상과 영예칭호:

선후하여 중국과학원 과학기술진보 특등상, 1등상, 중국과학원 과학기술진보 2등상(제1공헌자), 중국인민해방군 과학기술진보 2등상(제1공헌자), 3등상과 국가과학진보 3등상 등 수여받음.
1992년 국무원으로부터 정부특수수당 획득자로 선정됨.
1994년 국가 국방과학사업위원회로부터 국가첨단기술연구 《863》계획 우주항공령역 연구 선진개인으로 표창받음.
2001년 국가과학기술부와 해방군총장비부로부터 《863》계획 15주년 선진개인으로 표창받음.
2000년 전국로력모범 칭호 수여받음.
2004년 중국과학원으로부터 《유인우주선 프로젝트 돌출기여자》 영예칭호 수여받음.
 


초겨울의 맵짠 바람이 불던 며칠전, 기자는 인터뷰요청을 극구 사절하시는 우병희교수님댁을 찾아 해빛 잘 드는 거실에서 교수님과 마주앉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인자함이 넘치는 로과학자, 인터뷰에서 교수님은 첨단과학에 대해 이야길하며 되도록 기자가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시느라 배려함에도 어떤 과학용어들은 우리 말로 번역할수 없어 안타까워 하다가 영어, 일어가 불쑥불쑥 튀여나오군 했다.

그런 교수님을 보며 기자는 그 세대의 조선족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영어, 일어 등 외국어들을 류창하게 구사하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국민 환호속의 희열

2003년 10월 15일, 온 나라가 환호속에 잠겼고 세계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중국이 로씨야, 미국에 이어 세번째로  《유인우주선》을 연구제작해 우주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우주공간 과학연구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 첨단과학기술을 전 세계에 과시한것이다.

그 시각, 텔레비 형광막을 통해 《유인우주선》 운행상황을 지켜보는 우병희교수님은 희열과 흥분을 금할수가 없었다. 우리 나라 《유인우주선》의 성공은 수많은 과학자와 연구원, 해방군장병들의 주야로 노력한 피땀의 결정으로 그속에 자신도 하나의 나사못으로 되였다는데서 오는 긍지와 자호감을 어쩔수 없었다.

《651》 위성발사 프로젝트와 소형 지대공미사일 연구항목에 참가

우병희가 대학교 강사로부터 장춘광학정밀기계및물리연구소(이하 《장춘광학연구소》로 략칭)에 전근되여 와 처음 종사했던 연구분야는 적외선기술이였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우병희는 국가 첨단과학연구항목인 《651》위성발사 프로젝트에 참가, 주로 위성발사 환경실험설비 연구제작에 착수했다.

이런 연구를 시작하면 보통 20~3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헌데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연구소가 아수라장이 되는 통에 우병희는 기계를 짊어지고 북경에 가서 몇달간 연구했다.

하지만  《문혁》은  정치투쟁과는 담을 쌓고 실험실에서 머리를 틀어박고 연구에만 몰두하고있는 젊은 조선족과학자를 가만놔두지 않았다. 우병희는 《조선간첩》이라는 억울한  혐의를 받고 4년간 종사했던 국가급 비밀연구항목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병희는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소형 지대공(地뚤空)미사일 연구항목-《541》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미사일연구는 중국과학원에서 여러 분야가 합작해 하는데 우병희는 미사일 앞에 장착하는 목표비행기 추종기의 적외선기술 연구를 맡아하면서 호남비행장에 가 각종 비행기의 적외선을 측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6년 《문혁》의 폭발과 함께 우리 나라는 이 연구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국산 칼라텔레비 연구에 한몫

1975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는 칼라텔레비를 전부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들였다. 이때부터 우리 나라는 자체로 칼라텔레비를 연구제작하기 시작했다. 우병희를 비롯한 장춘광학연구소 연구원 4명과 전국 기타지역의 40~50명 과학자들이 이 연구에 참가했다.

이 국가급 연구항목에서 우병희는 록화렌즈설계 즉 분색렌즈설계 연구를 맡는다. 칼라텔레비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색채인바 색이 이쁘게 나오려면 들어오는 빛을 적, 록, 람 3색으로 분리하고 그 3색신호를 전자로 합쳐서 전기로 수송한다.

당시 연구에서 사용한 컴퓨터는 하나의 방 크기보다도 더 컸고 기능도 지금보다도 형편없었다. 계산기도 손으로 돌리는것이였다.

그렇게 락후된 시설을 갖고 우병희 등 우리 나라 과학자들은 끝내 1983년 자체의 기술로 칼라텔레비를 연구제작했다.

중국과학원 장춘정월담원격탐사실험소 건설 주도

1979년부터 지금가지 우병희는 원격탐사기술 연구에 혼신을 다하고있다.

원격탐사기술은 위성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이다. 우주공간에서 위성은 원격탐사의기로 지구상의 모든 상황 즉 온실탄산가스 상황, 홍수면적, 농작물 재배상황, 해양온도 변화, 해양염록소 변화, 광물탐사, 군사시설 등을 탐사하고 측정한다.

이 기술의 핵심은 각 지면물질의 광학특성을 장악하는것이다.

미국과 로씨야의 통신위성 분별기술은 10센치메터에 달하는바(지면우의 10센치메터에 달하는 물질도 분별) 모두 빛으로 분별, 낮에는 태양빛으로 분별하고 밤에는 적외선으로 분별한다.

랭전시기였던 1960년대부터 미국과 로씨야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우리 나라는 1970년대 후반부터 연구에 착수했다.

우병희는 연구소의 연구일군들과 전국의 400~500명 과학자들과 함께 이 항목을 맡아 연구하기 시작했다.

기술적, 과학적으로 점점 원격탐사연구가 깊어지면서 우병희는 장춘광학연구소와 장춘지리연구소에 원격탐사기술학과를 설치하고 젊은이들에게 원격탐사기술을 강의했다. 강의하던 그 2, 3년간 그는 원격탐사기술에 대한 연구가 더욱 깊어졌고 기술을 더욱 전문적으로 장악하게 되였다.

아울러 그는 원격탐사 실내모방실험실을 건설했고 1988년에는 중국과학원 장춘정월담원격탐사실험소를 건설했다. 장춘정월담원격탐사실험소는 중국과학원장춘광학연구소와 장춘지리연구소가 공동으로 종합성 원격탐사기술과 응용기초연구, 야외시험의 개방실험실로 지난 20여년간 적지 않은 국내전문가들과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가의 학자들이 찾아와 성과가 있는 합작연구를 진행했는바 우병희는 중국과학원 자연과학 1등상을 수여받았다.

2001년 7월 전국로력모범대표로 건당 80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하고 전국 각지에서 온 로력모범대표들과 함께 천안문성루에 오른 우병희교수님(왼쪽 첫 번째).

유인우주선 연구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

1980년대부터 시작해 10년간 우병희는 고분해률 분고촬영기 연구를 한다. 바로 미국과 유럽우주공간국에서 고분해률 분고촬영기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안돼 아직 사용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우병희가 이 기술 연구에 착수한것이다.

1986년 국가에서는 첨단기술연구항목 《863》계획을 세운다.

우병희는 《미국과 유럽우주공간국들에서 연구단계에 있는 연구를 우리도 하자》며 고분해률 분고촬영기와 태양정수측정기를 연구제작하여 우주선에 장착할것을 주장, 이듬해인 1987년 국가 《863》 첨단기술연구항목에 들어가며 우병희가 《863―2》 항목책임자로 연구를 주도한다.

우주선 연구제작에는 생물공정(유전기인), 위성공간기술, 자동화, 레이저, 신자료, 에너지 등 7가지 큰 분야가 포함된다. 우병희가 책임지고 맡아한 《863―2》 기술은 우주공간기술 가운데의 가장 중요한 연구부분으로 우주공간기술 연구경비 총 100억원중 40억원이 배당되였다.

이 기술은 4년간의 연구를 거쳐 자리가 잡힌다.

1992년 우리 나라는 유인우주선 기술연구항목 《921》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우주연구는 반드시 유인우주선이 올라야 한다. 미국은 이미 1969년에 유인우주선이 달나라로 올랐다.

《863》계획을 통해 우리 나라는 이미 유인우주선 기술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그 기초우에서 《921》 프로젝트에 착수, 1992년 음력설후 전국의 각 분야 과학자들이 모여 반년간 론증을 진행했다.

유인우주선 발사에는 우주선 제조, 비행사, 장착할 기계들, 로케트, 측정계통, 발사장 건설, 착륙장 건설 등 크게 7가지 분야가 포함된다.

8월 론증이 끝나고 9월 21일 중앙정치국회의에서 통과되였다.

그때 우병희의 태양정수측정기 기술이 이 항목(921)에 들어갔고 그때로부터 10년간의 연구끝에 우병희가 주도해 연구제작한 광학장치―태양정수측정의기는 스위스에서 있은 관련장비 국제비교실험에서 그 성능이 가장 뛰여난것으로 평가받았으며 2002년 우리 나라 유인우주선 계통인 《신주3호》 우주선에 장착되여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이외에도 1990년대 우병희는 《해양 〈863〉 해수층 광학측정시스템》 등 과제연구에도 성공해 이름을 떨쳤다.

기상위성 개발에도 한몫

우병희의 태양정수측정기 기술은 후에 기상위성의 핵심기술로도 응용된다. 그가 5년간의 연구를 거쳐 태양정수측정기술을 응용해 제작한 절대복사의기는 2008년 5월 우리 나라 《풍운기상위성》에 장착되여 우주에 올랐다.

스위스에 있는 세계기상기구의 다보스세계복사센터. 절대복사기의 표준은 그 정밀도가 매우 높으며 세계적으로 통일되여 있는바 나라마다 이 표준으로 기상상황을 측정해야 한다.

2000년 9월, 우병희가 자체로 연구제작한 절대복사기를 스위스에 갖고가 비교해 보니 그 정밀도가 표준과 일치했다.

당시 다보스세계복사센터에서는 미국, 벨지크, 스위스에서 연구제작한 절대복사 표준의기 9대를 사용하고있었는데 이미 몇개가 고장났다. 센터측에서는 복잡한 검증을 거쳐 우병희가 연구제작한 절대복사의기의 정밀도가 높다며 2대를 요구해 선테에서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중국의 절대복사의기가 좋다는 소문이 나 세계 각국에서 우병희가 연구제작한 의기를 구입해가고있다.

우주공간소 건설에 들어갈 분고촬영기 개발

국가첨단기술 연구항목인 《863》계획에 들어 연구를 시작했던 고분해률 분고촬영기 기술, 유인우주선에서의 핵심기술인 이 기술은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수석과학자, 항목주임으로 임명된 우병희의 주도하에 장춘광학연구소와 국내 기타 두개 연구소의 과학자 40~50명의 5년간의 연구를 거쳐 끝내 완성, 성도에서 있은 위성모방기 장착실험에 성공했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고분해률 분고촬영기를 연구제작한 국가로 되였다.

장래의 우리 나라 우주공간기술 연구는 《천공호》와 유인우주선의 련접기술을 돌파해야 하고 더 나아가 우주공간소를 건설해야 한다. 이 모든 연구에 우병희의 기술이 들어가게 된다.

그의 기술은 현재 국민경제발전에 중요한 농업, 공업, 수문, 환경, 의학, 국가안보 등 여러 분야에서 널리 응용돼 우리 나라 현대화발전을 적극 추동하고있다.

우병희는 지금도 연구에 몰두하며 고분해률 분고촬영기 기술과 태양정수측정기 기술을 계속 발전, 개진시키고있다.

2000년 8월 26일, 중국과학원 과학기술창조프로젝트 추진상황 료해차 1992년에 이어 두번째로 장춘정월담원격탐사실험소를 찾은 강택민주석은 우병희 수석연구원이 이끄는 우주공간광학부를 시찰하고나서 그의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 금후 중국의 우주공간광학연구에 더 큰 기여를 할것을 부탁했다.

로과학자는 오늘도 청춘

위성발사 시간은 정해져 있고 연구과제는 일정한 기한내에 완성해야  한다. 우병희의 첨단기술의기들은 진공, 고온, 저온, 기계진동, 충격, 전자파 상태에서의 각종 실험을 해야 하고 또 1000분의 1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높은 정밀도를 요구하기에 실험제작에서 수십차의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다보니 일단 실험제작에 들어가면 하루에 15~16시간씩 침식을 잃고 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따라서 항목때마다 체중이 몇십근씩 줄군 했다.

우병희는 후대양성에도 심혈을 몰부어 선후하여 석사, 박사생 20~30명을 배양했는바 현재 그들은 모두 대학교 교수, 연구소 연구원으로 과학연구 분야에서 중견역할을 하고있다. 그들가운데는 조선족 1명도 들어있는데 지금 사범대학에서 교수로 활약하고있다.

그렇게 첨단과학연구와 후대양성으로 우병희교수님은 70고개를 넘었고 머리도 하얗게 셌다. 하지만 과학연구에 대한 로과학자의 열망만큼은 오늘도 청춘이다.

교수님, 내내 건강하세요. 


길림신문 김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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