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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우-조상들 일군 땅 복지로 가꾸는 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2일 10시06분    조회: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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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 일군 땅 복지로 가꾸는 길
마패촌 최촌장댁 《계주봉릴레이》3부곡

프로필:
최명우(崔明宇,1954년 3월),
길림성도문시월청향 마패촌 토박이촌장
1970년대초 월청고중을 졸업하고 마을공청단서기로 활약
1983년부터 호도거리책임제 농기구전업호
1998년부터 마패촌 촌장 2003 촌장 겸 서기로 사업
2004년 연변주우성무공해농산품개발유한회사 월청분회 회장
2006년부터 련속 3년간 연변주5호당지부로 당선
2007년 길림성사회주의새농촌건설 선진개인.
2008-2009년 연변주로동모범
2009년 연변농촌실용인재선진개인으로 당선

 

조선족농민들이 땅의 주인으로 변함없이 잘살아가자면 그 길은 어디에 있을가? 해방을 맞고 토지를 분여받고 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이 나라의 떳떳한 공민으로  된 우리 조선족농민들은 대를 이어 이 땅의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주인공으로 활약하여왔다. 현시기에 이르러 조선족농민들은 시대적인 각종 모순에 모대기면서 번영과 발전의 대안을 모색해가고있다.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의 최명우서기는 토박이촌장으로서 평생동안 고향마을건설에 일체를 바쳐 사업해오면서 《현시기 우리 조선족농촌들에서 조상들이 피땀 흘려 일군 땅을 복지로 가꾸며  잘살아가려면〈토지집중+규모화영농+브랜드창출》이라는 생산모델을 선택함이 바람직하다.》고 그 견해를 피력하였다.

아버지대- 생존을 위한 토지 개간

50년대초,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에는 고작 댓쌍되는 논이 두만강가 버드나무숲속에 띄염띄염 묻혀있었고 사위는 온통 저습지로 잡초가 무성했다. 토지를 분여받고 나라의 주인된 촌민들은 생산열조를 일으켜 두만강변 습지개간에 일떠섰다. 당시 마패촌 초대간부일원이였던  최정송서기(최명우의 아버지)는 촌민들을 인솔하여 버드나무를 베여내고 나무뿌리를 뽑아내고는 깊은 수렁에 옥수수대를 묻어 습지물기를 빼고 그우에 흙을 실어날아다 펴며 밤낮없이 분전하여 두만강가에 170여헥타르의 논을 개간하였다.

그랬어도 웬지 60년대까지 촌민들은 푸대죽을 끓여먹으면서 연명들 해나갔다. 나어린 최명우는7남매 넷째로 늘 배 고픈 하루하루를 살면서 쌀밥 한끼 배불리 먹어보는것이 소망중의 소망이였다. 먼 후날에야 그때는 《대식품시대》라는 특수년대를 거쳐왔다는것을  알았지만 배고플수밖에 없는 리유나 원인에 대해 다는 알수 없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아버지는 월청농기구공장 공장장 겸 서기로 사업하였다.  농기구를 대량 생산하여 농촌에 보급하였고 농민들은 기계화작업의 효률에 엄지손을 내밀며 기뻐하는것을 그는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1973년 월총고중을 졸업하고 생산1선에 뛰여든 그는 농촌로동의 고단함을 피부로 느꼈고 도시와 농촌의 차별을 절감하면서 이 고된 일터, 가난한 고장을 떠나보려고 3년간 대학입시에도 참가했다. 하지지만 꿈은 물거품으로 사라졌고 마을공청단사업에 착수하면서 어떻게 농촌환경을 개변시킬수는 없을가 고민해봤어도 그로서는 별수가  없었다.

1983년 농촌호도거리가 시작되자 그의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영향하에 뜨락또르며 탈곡기 등 각종 농기구를 만들어 판매하고 또 기와만들기. 목재가공 운수업과 같은 다종경영도 벌리면서 농촌에서의 기업경영에 살손붙였다. 거기서 그는 농촌의 기업화생산에 희망이 있음을 보아냈다.

                           
형님대- 생산량을 위주로 한 과학영농

셋째형 최영우씨는 90년대중반 마패촌 지부서기로 사업하였다. 그는 과학영농으로 농민들을 부유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일심정력으로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다.

그는 아버지대에 일군 땅에서 보다 높은 수확고를 올리기 위해 과학영농이라는 이 과제를 둘러싸고 랭습지논에서의 《초희식재배》에 전념하였다. 《초희식재배》라는 재배법은 이미 중국과학연구분야의 성공적인 재배법으로 인정된것이지만 랭습지논에서의 성공사례는 없었다. 최영우서기는 당지의 토지실정에 알맞는 초희식재배를 거듭 실험연구하여 전 촌에 보급하였고 헥타르당 1만6000근, 최고로 1만8000~2만근까지 생산량을 올려 연변주에서 최고기록을 돌파하였다.

당시 고급농예사였던 최영우씨가 확립한 랭습지고산재배새기술은 수전분야에서의 공백을 메웠고 그는 국가농업부로부터 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최명우는 생산소대 대장으로서  형님의 지시에 따라 소대촌민들과 함께 과학영농의 효과성을 터득하였다. 그때로부터 마패촌의 벼생산은 줄곧 랭습지고산재배새기술에 의해 높은 생산량을 보장해오게 되였고 미질이나 밥맛이 긍정받아 당지는 물론 주변도시에서도 마패입쌀을 선호하게 되였다.

우리대- 삷의 질을 위한 브랜드생산

1998년 최명우는 마패촌의 촌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의 앞엔 413가구 1107명의 인구, 170여헥타르의 논, 《초봄에 대부금 맡아 농사를 짓고 가을에  대부금을 갚고는 또 대부금 맡고…》하는 전통생산방식, 그것들이 여전 그대로 놓여있었다. 게다가 평생 농사를 지어봤자 별볼일 없는 현실에서 땅도 집도 버리고 도시로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는 촌민들이 늘어났다.

그는 가슴이 아파났다. 《조상들이 어떻게 일군 땅인데… 땅을 버리다니.》그는 촌민위원회 결정으로 공약을 체결하고 개개인이 사사로이 외지인에게 토지를 양도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우선 본촌 촌민에게 양도하도록 하였다. 개개인에게 사용권은 있지만 소유권은 없는이상 촌에서 결정권을 행사할수 있었던것이다. 촌민위원회에서는 논을 촌민들에게 집중시키고 벼농사를 주도산업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기계화경영을 념두에 두고 2003년 연변주에서 처음으로 대형수확기(새기계) 2대를 사놓고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한해 지은 알곡을 저마끔 시장에 내다팔게 되니 시장가격이 안정되지 못해 농민들 자신이 량식값을 떨구게 되고 직접 피해를 입게 되였다. 이런 현상에 직면하여 그는 2004년 상급정부의 지지로 마패촌을 중심으로 두만강가의 린근 5개 마을 450여헥타르의 국가급무공해표준화기지를 근거지로 월청진무공해벼협회를 설립하고 종자, 비료, 재배법, 가공, 판매를 통일하였으며 국가급무공해안전표준에 따라 생산을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그리고 무공해협회의 명의로 정부로부터 80만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마을에 량곡가공기지를 일떠세웠는데 농민들로부터 국가기준보다 높은 가격으로 낟알을 거둬들이고 시장수요에 따라 량질가공을 하여 량미점, 슈퍼, 식당 등 도문시 36개 지점에 직접 공급하다보니 량식가격을 농민들자신이 통제할수 있게 되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장의 진정한 수요는 명품명표라는 점을 깨닫게 된 그는  브랜드전략에 모를 박고 연변주우성무공해농산품개발유한회사에  월청분회로 가입하여 월청무공해기지에서 생산된 입쌀은 국가브랜드명표인《해란강표》로 통일하였는데 월청의 《해란강표》입쌀은 북경, 상해까지 판매되여 공급이 딸리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최명우촌장은 생산, 가공, 판매 세가지 환절 그 어느 한가지가 없어도 협회의 생존발전이 불가능하다며 생산의 표준화, 가공의 기업화, 판매의 브랜드화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농촌발전에서 조건을 창조하고 기회를 틀어쥐여 정부의 지지와 혜택을 쟁취하는것이 중요한 환절이라고 첨부하였다.

미래방향- 분업을 다그치고 농장화의 길로

주도산업에서 성공모식을 수립함으로써 촌지도부의 조직력이 과시되고 신용도가 높아져  마을건설에서도 정부와 사회각계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2006년 7월부터 마패촌은 사회주의새농촌건설의 성급시점촌으로 되자 정부 여러 분문의 협조하에 750만원을 쟁취하여 촌 산업화건설과  기초시설, 환경미화 사업을 다그쳤다.

가공기지에만도 60만원 재투자하여 2000톤가공능력을 구비하였고 200여호에 달하는 농호에 철기와를 얹어주고 2600여메터에 달하는 철바자를 세웠으며250여세대에 벽돌변소를 지어주었다. 도회지로, 외국으로 떠난 빈집까지도 빠뜨릴세라 주인측과 련계를 가지고 통일적으로 건설을 마무리지었다.

마을거리에 가로등 50개를 설치하고 7500메터에 달하는 포장도로를 수건하였다. 130만원투자로1300메터에 달하는 음료수수원 제방뚝을 쌓고 마을록화를 실현했으며 105만원투자로 200평방메터에 달하는 마을병원,  8만원투자로  3000여권의 장서를 한 촌민도서실도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마을을 떠났던 촌민 30%가 다시 비웠던 집을 재정리하고 《귀향》하고있으며 이 마을로 《이주》하려고 찾아오는 도시인들도 날로 늘어나고있다.

그는 어차피 농촌에서 땅은 기본으로서 토지를 집중하고 기술, 자금, 농기계, 로력 각자의 조건과 우세를 모아 농장화경영을 해야 하며 거기서 농민들이 정부적차원의 각종 혜택과 생산에서 오는 수익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민이 땅을 버리면 주인자격을 잃는것이다. 농민들이 자기 땅에서 근본리익을 보장받는 시스템을 수립하는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농장화의 길이다.》

그러나 농촌에서 농사만 지어서는 희망이 없다. 농업을 중심으로 각종 농산물심가공을 비롯한 분업을 일떠세우고 다종경영과 산업화를 실현해나가야 한다는것 또한 그의 견해다. 최명우촌장을 비롯한 마패촌촌민위원회에서는 지난해98%가 조선족이고 변경에 위치한 마을우세에 립각하여 관광산업차원에서 《두만강 제일불고기촌》으로 간판을 내걸고 룡두산업으로 일떠세웠는데 근 30호에 달하는 세대에서 년200만원의 수입을 올리고있다. 그외 농산물심가공을 벌려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무공해유기비료공장을 앉혀 자체로 비료를 생산함으로써 생산원가를 낮추며 농산물찌꺼기로 《인조석탄》을 생산할 계획들을 추진하고있다.

마패촌은 이미 청우농업합작사를 설립하고 농장화의 조직기초를 닦아놓았으며 기계화작업으로 규모화생산을 담보하고 일계렬의 체계적인 생산시스템을 마련하여 생산이 발전하고 생활이 부유하며 환경이 문명한 새농촌건설의 모델로 부상해가고있다.

길림신문 성송권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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