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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범송-렌즈에 담아낸 귀중한 력사의 순간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0월20일 10시22분    조회:9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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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촬영가 황범송 만나본다

황범송은 장백산에 300여차 올라 천지사진만 해도 100장 찍었다. 《장백산천지》는 국가 교육부, 수리부에서 지정한 《천지표준상》으로서 초고중 교과서에 올랐다 1959년 8월부터 연변을 시찰한 중앙지도자들을 촬영, 선후로 주은래, 주덕, 동필무, 호요방, 등소평, 강택민, 리붕, 양상곤, 만리, 팽진, 교석, 주용기 등 부총리이상 50여명 촬영하여 귀중한 력사자료를 남겼다. 외사촬영면에서도 조선 김일성주석, 캄보쟈 시하누크친황, 네팔 아지카리 공산당 총서기 등을  렌즈에 옮겼다.

황범송 프로필:
1930년 왕청현 배초구진 팔과수촌 출생
1952년 동북인민조선보 촬영기자
1955년 연변일보 촬영기자
1972년 연변박물관 촬영사
1979년 민족대단결전람 《중국조선족관》사진담당
1982년 연변인민혁명투쟁사전람 사진담당
1984년 연변주당위 촬영사
1997년 화첩《연변조선족력사》,《장백산유람》  등 6부 출간
2007년 화첩《장덕강》,《조남기》,《리덕수》,《주덕해》 등 6부 출간
현재 중국촬영가협회 회원, 연변촬영가협회 고문

주요영예
1972년 사진작품《계급교양계렬사진》 동북3성예술사진전람회 우수상
1975년 사진작품 《새싹》 동북3성촬영전시회 1등상 
1982년 사진작품《중국조선족소년아동》  일본 전시 
1986년 사진작품140점  미국, 카나다 전시회 전시    
1990년 사진작품《장백산천지》서울 천지촬영콩클 금상, 국가교육부 지정《천지표준상》, 초고중 지리교과서에 편입
1994년 사진작품 《민속》,《가을》,《구름속에서》중, 조, 한 예술촬영전시회 전시
1995년 사진작품《농악무》 중국예술계명인작품전람 우수상
1996년 사진작품《수확》,《민속춤》 제3차중국촬영예술계전람 우수상
2007년 론문작품《촬영예술에는 중국민족특색이 있어야 한다》《중화유명전문가 종신성과총서》1등상
 


1954년이래 황범송은 장백산에 300여차 올라 천지만 해도 100장 찍었다. 1959년 8월부터 연변을 시찰한 중앙지도자들을 촬영, 선후로 주은래, 주덕, 동필무, 호요방, 등소평, 강택민, 리붕, 양상곤, 만리, 팽진, 교석, 주용기 등 부총리이상을 50여명 촬영하여 보귀한 력사자료를 남겼다. 외사촬영면에서도 조선 김일성주석, 캄보쟈 시하누크친왕, 네팔 아지카리 공산당 총서기 등을 렌즈에 옮겼다.

1984년 5월 16일, 심양군구사령원 리덕생, 길림성당위서기 강효초 등이 도문역에서 김일성수상 영접.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련봉속의 천지를 폭넓게 렌즈에 담았지요》

기자: 선생님께서 찍으신《장백산천지》는 국가 교육부, 수리부에서 지정한 《천지표준상》으로서 초고중 교과서에 올랐고 1990년 《한국 장백산천지평의회》 금상도 받으셨더군요. 《장백산천지》촬영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시죠?

황범송: 50년대부터 장백산을 수백차 오르내리며 천지를 찍기는 했지만 천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찍혀나왔다고 할만한것이 없었습니다. 기술적으로 분석해보니 주요한 원인은 높은 봉에 올라서 사진기를 좀 더 앞으로 내밀면서 천지의 전경을 렌즈에 담지 못한것이였습니다. 천문봉은 해발 2670메터로서 장백산 동쪽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데 천지의 푸른 물을 둘러싼 련봉이 한눈에 안겨왔습니다. 그러나 나무 한대, 풀 한포기 없는 험한 바위우에서 몸을 앞으로 더 내밀수 없었습니다. 바줄을 허리에 둘러매고 좌우켠과 허리뒤에 당김줄을 한가닥씩 매고 뒤에서 바줄을 바싹 당기도록 했습니다. 두에 사진기를 들고 한걸을 더 나가서 바위에 엎드려 반신을 앞으로 허공에 내밀었습니다. 뒤에서 세 사람이 바줄을 당기고 두 사람이 다리를 눌렀습니다. 직선거리가 근 500메터되는 천지의 수면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였습니다. 련봉속에 고인 천지를 폭넓게 렌즈에 담아서 샤타를 연거퍼 눌렀지요. 그러니 《장백산천지》는 저를 망라한 여섯사람의 공동작품인 셈입니다. 

《등소평 신변 2메터 접근해 총서기의 거룩한 풍채를 렌즈에 옮겼지요》

1983년 8월 11일, 등소평총서기께서 장백산천지에 오르시여 연변주당위서기 조남기의 천지개황소개를 들으시는 장면.

기자: 60년대 초부터 중앙고위급지도자분들이 연변시찰을 오실 때마다 연변주당위의《전직촬영사》나 다름없는 선생님께서는1983년도에 등소평께서 천지에 오르시여 당시 중공연변주당위서기인 조남기의 천지개황소개를 들으시는 장면의 사진을   찍으셨는데 여기엔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요?

황범송: 1983년 8월 11일 아침, 우리 나라 최고지도자분의 장백산등산을 찍으러 갈 만단한 준비를 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짐작이 간 저는 해발 2600메터의 산정에서 대기했습니다. 9시가 좀 지나자 100여메터되는 곳에 승용차들이 정거하더니 등소평동지가 차에서 내리시는 순간 마음이 흥분되고 신경이 긴장해지더군요. 새하얀 와이셔츠에 군복바지를 입은 등소평동지는 조남기의 안내하에 온건한 걸음으로 올라오시고있었습니다. 저는 등소평동지 신변 2메터거리에 접근해 천지를 배경으로 그의 거룩한 풍채를 렌즈에 옮겼지요. 등소평동지가 장백산에 오르시여 연변을 대표해나선 조남기동지와 함께하는 력사적의의가 심원한 장면을 노렸지요. 한시간나마 시종 그런 장면이 나타나주지 않았지요. 얼마나 애탔는지 몰랐지요. 촬영사는 연출이 아니니깐요. 등소평동지는 천지를 굽어보시고 내림길에 들어섰어요. 저는 조남기동지의 옆구리를 손으로 가볍게 다쳤지요. 촬영사의 심정을 모르는바는 아니였겠지만 수령님앞에서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있었습니다. 저는 옆으로 빠져서 등소평동지의 앞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등소평동지의 뒤를 따르던 조남기동지가 등소평동지의 신변에 접근하여 장백산개황을 소개해드리고있었습니다. 저는 그 감격적인 장면을 얼른 렌즈에 옮겼습니다. 이 예술사진은 전국20여개의 간행물에 발표되였고 후에는《등소평선문집》에 수록되였습니다. 

《장덕강서기가 두둔해주시면서 강택민총서기촬영에 푸른등을 켜줬지요.》

1991년 1월 8일, 강택민총서기께서 룡정시 동성용진 룡산촌 박만수농민가정 방문.

기자: 90년대 초에 강택민총서기께서 연변시찰을 오셨을 때에도 중공연변주당위서기였던 장덕강동지를 따라 연길비행장에 나가 강택민총서기께서 비행기에서 내리시는 장면, 연변가무단위문공연을 보시고 배우들을 접견하시는 장면을 찍으셨고 조선족농민가정방문사진도 찍으셨지요?

황범송: 예, 강택민총서기께서는1991년 1월, 연변시찰을 오신 이튿날 훈춘에 다녀오시는 걸음에 룡정 동성용 룡산촌 조선족농민가정을 방문하셨습니다. 강택민총서기께서 박만수농민네 집으로 들어가실 때 경위원들이 이 집은 신화사기자만 들어가기로 돼있다면서 지방기자들을 단속하였습니다. 저는 총서기께서 연변의 보통농가를 찾아 농민들과 무릎을 마주한 장면을 놓칠가봐 너무도 안타까와 안절부절 진정하지 못했습니다. 옆에 서있던 장덕강서기는 어깨가 축 처져있는 저의 마음을 헤아리고 《황동무, 앞질러 찍어야 할 강택민총서기의 장면은 앞질러 찍으시오!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두둔해주시는 말씀에 사기가 높아진 저는 경위원의 말을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강택민총서기께서 조선족농민 박만수네 집에 들어가 신을 벗고 조선족구들에 앉으신 장면, 농민들과 친절하게 담화하시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연거퍼 샤타를 눌렀습니다. 그때 만약 강택민총서기를 앞질러 찍으라고 장덕강서기가 두둔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방기자의 체면을 차려야 한다고 했던 경위원들의 단속에 억눌리워 연변력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찍을수 없었을것입니다. 강택민총서기께서 조선족농민가정을 방문하시는 이 사진은 지방의 여러 신문잡지에 실렸고 중앙당간행물에 실리여 국가급2등상까지 받는 영예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연변인민들이 주보중장군을 항시 잊지 않고있다니 더없이 감사합니다》

기자: 황선생님께서는 《력사사진창고》라고  불릴만큼 5만장을 웃도는 사진자료를 소장하고있는데 동북항일련군사진같은 보귀한 력사자료를 어떻게 수집하셨는지요?

황범송: 자료수집은 촬영보다 겉으로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고 때로는 헛물을 켜기도 했지만 여러 모로 끈질기게 파고들었지요. 1977년, 동북항일련군 사진자료를 수집할 때에는 30년전 기억을 더듬어 북경에 있는 주보중장군의 부인 왕일지녀사를 찾아갔지요. 왕일녀사가 연변에 와서 사업하던 때인 1947년, 한번은 제가 촬영사로 있던 금강사진관에 와 동북항일련군의 30여장 사진을 저의 손을 거쳐 복제해갔지요. 그후 저는 주보중장군의 생전에 그들 부부에게 가족사진을 찍어드렸구요. 그때에 복제해간 사진들을 찾아보려고 북경에 있는 왕일지녀사 저택을 찾아갔는데 보초병이 《이 집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하면서 대문안에 들여놓지 않았지요. 《연변에서 온 촬영기자 황범송이라고 하면 저를 알겁니다.》는 저의 말에 전화로 사실을 확인한 보초병은 어서 들어가라고 하였지요. 왕일지녀사는 저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동북항일력사사진전람을 꾸리고있는 연변에서  주보중장군을 항시 잊지 않고있다니 더없이 감사합니다만 중앙의 결정에 의해 주보중장군의 사진들을 여기서도 볼수 없는것은 물론이고 한장도 밖으로 내가지 못합니다.》고  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은 저는 련속 3일동안 주보중장군의 연변항일력사에 관련되는 사진자료 251장을 복제해가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모주석께서 두루마기를 받아입으신 사진을 동무에게 주겠으니 잘 보관하오!》

기자: 모주석께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주년 기념행사때 연변가무단의 공연을 관람하신 후 조선족전통민족복장인 두루마기를 받아입으셨는데 황선생께서는 그 장면의 귀중한 원판사진을 어떻게 얻으셨는지요?

황범송: 그 사진을 얻고저 저는 1977년, 우리 나라 저명한 촬영기자 정경강을 방문하러 갔지요. 1904년생인 정경강은 1939년 4월, 중경에서 공산당과 련계를 맺고 1940년 12월에 주은래, 엽검영 두 지도자의 소개로 팔로군 총정치부 촬영기자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1944년 모주석의 첫 표준상을 찍었고 지금 천안문성루에 건 모주석의 표준상도 그가 1964년도 찍은것입니다. 그의 성함을 처음 알게 된것은 1950년 10월 5일 《인민일보》에 모주석께서 10월 3일 저녁 7시, 회인당에서 국경1주년에 참가한 동북조선인민대표단이 선물로 드린 두루마기를 받아입으신 웅장하고 름름한 풍채를 찍은 사진이 보도된것을 보면서부터였습니다. 저는 그 원판사진을 찾아 선후로 신화사문헌보관관, 중공중앙선전부 신문처를 찾아 보관서류를 샅샅이 뒤지던 끝에 정경강을 찾기는 했지만 헛탕을 쳤지요. 세번째로 저는 병환에 계시는 정경강에게 인삼 한뿌리를 갖고 가 《이 인삼은 연변특산입니다. 복용하시면 원기를 돋굴수 있겠는가 해서요.》라고 하니《이러잖아도 황동무를 한번 만났으면 하던중이요. 난 황동무처럼 사진자료를 소중히 여기며 널리 수집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소. 모주석께서 두루마기를 받아입으신 장면의 사진을 내가 죽기 전에 동무에게 넘겨주겠소. 연변에 가져다 잘 보관하오!》 이러면서 제가 오래동안 그리던 사진을 넘겨주었습니다. 정경강은 이듬해에 작고했는데 그때 수집해오지 않았더라면 모주석께서 조선족두루마기를 받아입으신 장면의 사진이 연변인민들앞에 재현되기 어려웠을것입니다.

《북데기속에서 너른 마당 쓸기보다는 정품을 뽑아내는 실무를 련마해야 합니다》

황범송의 대표작품 《장백산천지》

기자: 60여년간의 풍부한 촬영경험을 쌓으신 선생님께서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씀은요? 앞으로 사진자료를 어떻게 보관관리하여 사회에 귀중한 력사자료로 남길 타산인지요?

황범송: 사진촬영도 여느 사업과 마찬가지로 달인이 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디지털사진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촬영장면을 포착하기에 앞서 한개 장면을 무더기로 뽑아내 고작 한두장을 고르는데 이렇게 북데기속에서 너른 마당을 쓰는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단 한번의 《찰칵》으로  정품을 뽑아내는 실무를 련마해야 한다고 봅니다. 연변박물관에서 사업하던 10년간 제가 찍었거나 수집복제한 사진자료 3만여장을 력사자료로 보관해두었고 1983년부터 1997년까지 연변주당위 촬영기자로 사업하면서 2만여장의 사진자료를 만들었는데 자택 《사진창고》에서 불과 몇십초사이에 수요되는 사진을 제꺽 찾을수 있으리만큼 5만장을 웃도는 사진들이 질서정연하게 보관되고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통신망이 발달한 전자시대이기 때문에 이제 《사진창고》관리를 컴퓨터화해야 하는것은 번연한 리치입니다. 모택동주석이 두루마기를 받아입으신 장면의 원판사진을 비롯한 중앙수뇌자들과의 조선민족관련 사진은 물론30년대에 레닌이 조선민족독립운동가들을 만나준 귀중한 력사사진 원판을 망라하여 제가 소장하고있는 전부의 력사적 가치가 있는 사진자료는 조선족사회가 저에게 베풀어준 문화적재부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60여년 촬영수집복제한 사진자료를 어느 믿음직한 인터넷신문사 같은 사이트회사에 관리를 맡길 타산도 굴려보군 합니다. 

길림신문 류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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