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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복-두발로 뛰는 《실천하는 학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9월21일 09시34분    조회:6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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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로 뛰는 《실천하는 학자》
중앙민족대학 황유복교수 만나본다

황유복 프로필:
1943년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출생
1961-1966년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에서 민족사 전공
1966년 7월-현재 중앙민족대학 교수, 박사생도사
1972년 중앙민족대학 한조번역학과 (조선어문학과 전신) 창설
1987-1989년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소장
1989년 북경조선어학교 창설, 교장
1994년-현재 《조선족사회발전을 위한 심포지엄》 조직
2006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경제사회발전고문으로 초빙
중국조선사연구회 상무부회장, 중국조선족사학회 부리사장, 조선족발전연구회 부회장, 중국민족학회 리사, 중국도시인류학회 리사, 《중국민족》잡지사 고문, 《도라지》잡지사 고문, 중앙인민방송국 고문 등 력임.
주요저서: 《중국조선족연구》, 《중국조선족사회문화의 연구》, 《중국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재조명》, 《봉사도(한문)》 등 34권. 이외 론문 170여편 발표.

《먼 후날 조선족사회에서 〈그때 황교수가 이런 노력을 했기 때문에 우리한테 도움이 됐다〉라고 말해준다면 만족》이라며 황유복교수는 기자에게 말한다.

《조용히 책 보는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황유복교수지만 밤낮이나 휴일이 따로없이 그야말로 《동분서주》하는 사람이다. 집의 서재나 사무실에서는 만나기 바쁜 사람으로 많이 알려진 학자다.

《민족교육의 발전과 민족사회의 진흥을 위해서 학자는 사무실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실천해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말한다.

국내외 대학과 연구소 요청으로 특강을 하고 받은 강의료는 모두 학교운영과 심포지엄에 넣는 그는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중국조선족 력사 문화연구의 길

1943년,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에서 태여난 황유복(黃有福), 소학교 입학시 선생님이 축복받은 생명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 그러나 실제로 그는 유복(有福)이 아닌 유복자로 태여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 그가 태여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돈을 지원하다가 일본군에게 발각되여 살해되였던것이다. 그러다 두살때 어머니까지 여의고 할머니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럼에도 그를 꼭 축복받은 생명이라 함은 자랑스런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것과 악렬한 환경속에서도 얼의 교육으로 가난을 이기고 견강한 의지, 높은 인격을 갖추게끔 성장시켜준 할머님의 사랑을 선사받은것때문일것이다.

1961년, 북경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에 입학한 황유복은  북경시 우수대학생본보기로 당선되였고 1966년 모교에 남아 사업하게 된다.  1971년 하반년 황유복은 최재우선생과 함께 학교측에 조선어학과를 설치할것을 건의, 이듬해에 한조번역학과(조선어학과의 전신)가 정식 설립되였다. 조선어학과 설치후 그는 1기생들을 받아 조선문학사를 가르쳤다. 후에 민족연구소로 옮겨 조선민족의 력사와 문화 연구에 몰두해왔으며 중앙민족대학 민족학부 교수로 교편을 잡아왔다. 황교수는 지금까지 《중국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연구》, 《중국고대북방민족문화사(한문, 공저)》를 포함한 34권의 저서를 출판, 170여편의 론문을 발표했는데 1996년 한국 《조선일보》에서  《조선족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사재로 조선어학교 설립해 민족어교육을

황교수는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섰다. 1984년 200만딸라의 외자를 인입해 연변대학에 공학학부청사를 짓게 주선한것, 할빈조선족병원에 현대의료기를, 길림시조선족중학교와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에 정밀선반기를 기증... 그러나 그후 그는 《이런 물질적지원이 근본적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보아내면서 조선족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민족의식 강화가 급선무라는것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1987년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환교수로 있는 2년동안 중국과 미국에 거주하고있는 조선민족사회를 비교, 연구하게 되면서 중국의 80%이상의 조선족청년들이 조선어를 잊어가고있는 준엄한 현실을 상기하게 되였다. 《한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민족의 언어가 살아있어야 한다.》며 귀국후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모은 돈 만딸라(당시 대학교수 월급이 약 400원, 16년이상 모아야 만질수 있는 돈)를 선뜻 내놓으며 북경조선어학교(1993년 북경한국어배훈학교로 개칭)를 설립했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지금까지 20년동안 북경조선어학교에서 무료로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면서 민족자긍심과 민족정서를 키워주고있다. 지금까지 북경한국어배훈학교는 근 3000여명을 교육했으며 졸업생중 350여명을 미국, 일본, 한국으로 류학보냈는데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까지 해결해주었다. 현재 북경뿐 아니라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할빈, 목단강, 훅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전국 10개 도시에 분교를 설립하였다. 그동안 국내외 대학들에서 받은 강의료는 모두 학교설립, 심포지엄 등에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족사회문제 해결―교육이 열쇠》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황교수는 《조선족사회에 나타나는 오늘의 문제도 교육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민초기 정치계, 의료계, 과학원 등 중국 주류사회에 진출한 조선족들이 많으면서 유능한 민족으로 자리잡았는데 이러한 성과는 우선 교육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족들의 80년대 대도시이동, 90년대 해외진출 등으로 성공적으로 구축됐던 민족교육체계가 무너지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고 한다. 그러면서  《민족 문화와 정신을 계속 유지,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주변문화보다 더 발달된 민족문화󰡑와 구심점역할을 할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해야 한다. 이러려면 민족교육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어 그는 《현재 각지에서 사재를 털어 조선족사립학교를 꾸리거나 각종 단체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진로를 탐구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야 한다.》며 《민족의 미래는 저절로 주어지는것이 절대 아니다. 바람직한 미래는 우리 민족 모두의 엄청난 노력과 지혜를 통하여 만들어지는것이다.》라고 한다.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과 워크숍》 총 13회

조선족교육에서뿐 아니라 조선족인구 감소, 농촌조선족학교 페교현상, 조선족농촌토지 류실 등등 격변하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실태와 문제점을 보며 우려하던  황유복교수는 1994년부터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과 워크숍》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서재에 앉아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조선족사회의  지성인들과 각 계층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의 현실을 랭정하게 분석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진지하게 연구하는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으면서 조선족사회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한편 학구적인 차원을 넘어 그 해결책을 실천적으로 탐구해나가야겠다고 결심하였던것이다.

경비해결에 큰 어려움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총 13회 조직된 심포지엄은 민족언어교육문제, 조선족집중촌건설문제, 기술교육문제, 조선족의 정체성문제, 농촌경제 발전문제 등 주제를 둘러싸고 진행해왔는바 현재 이는 조선족사회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는 하나의 장으로, 조선족사회발전을 연구하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되고있다.

학술연구를 실천에 옮기는 작업

조선족이민사 력사를 200년 앞당기게 된 박씨집성촌발굴은 1982년 황유복교수에 의해 시작되였다. 이는 황교수가 하북성 청룡현 박씨마을에서 현장소라를 하면서 남긴 기념사진이다.

황교수는 《첫 3회는 조선족자녀들이 우리 말, 글을 잊어가는 현실에 비추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북경조선어학교를 설립, 그후 인구감소, 농촌토지 류실 등이 문제로 나서자 제4회부터 이를 둘러싸고 토론, 해결책을 모색했다. 당시 장춘에서 동북3성 근 100여명 조선족촌 촌간부들을 모여놓고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조선족집중촌건설, 이를 주제로 유기농법 등 록색농업, 록색경제를 일으켜세우는 폭을 넓혀갔다》고 소개한다.

한편 고신기술에 관해 학술회의도 가졌다. 중국 명문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조선족대학생들이 창업보다는 외국 IT회사에 가서 높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는것을 선택, 우리는 그들한테 직접 IT회사를 만들어 창업할것을 인도, 현재 많은 조선족젊은이들이 창업에 투신하는데 기여했다.

제10회부터는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 사회와 경제 지속발전을 위한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 구축과 상응한 시스템 도입으로 조선족사회의 민족문화와 경제발전에 촉매작용을 하고 나라건설에 기여하도록 노력했다.

황교수는 《지금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조선족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땅에 다시 돌아오고 또한 자신이 개척한 땅에서 외국에서 버는 돈만큼한 리익을 창출할수 있는가?》이며 《농민들은 농촌에서 도무지 외국에서 버는만큼 못버니 떠나는것이다. 때문에 이것만 해결해주면 다시 고향에 돌아올것이고 잇따른 문제들도 해결될것》이라며 타향과 이국에서 고생하는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농장주, 관리자로 되는 그날을 그려본다고 한다.

《중국에 깊이 뿌리 내릴 결심 확고히 가져라》

황교수는 공화국 창건 60년이래의 조선족사회를 3단계로 나누어 고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1949년 9월 조선민족이 처음으로 대표를 공화국설립을 위한 회의에 참가시켜 소수민족으로서의 당당한 일원이 되면서 3년후인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되였다. 이를 정착기라고 한다면 문화대혁명을 순환기로 볼수 있는데 그 당시는 민족문화가 고난을 겪는 시기였다. 그 다음은 재도약기이다. 개혁개방, 중한수교후 자유롭게 이동할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민족이동이라는 진통을 겪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얻은것도 많지만 잃은것 또한 너무 많다.》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서 무엇보다도 중국에 깊이 뿌리내리겠다는 결심부터 해야 한다.》며 황교수는 젊은 세대들에게 특별히 조언한다.  중한수교후 한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민족의 문화 동질성 등으로 일부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이 또한 조선족젊은이들이 주류사회 진입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원인중 하나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계속 발전하려면 긴 안목을 갖고 두가지 문화를 공유하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중국에 뿌리내리겠다는 결심을 내려야 한다.》 

길림신문 최화, 인민넷 청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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