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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민-영원한 《항일빨찌산 녀전사》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9월17일 10시03분    조회:7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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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세, 영원한 《항일빨찌산 녀전사》

흑룡강성 전임 정협부주석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민녀사 인터뷰
지난해 항일련군 복장차림으로 항일련군의 유적지를 찾은 리민녀사.

리민프로필:
1924년 11월 5일, 흑룡강성 탕원현 오동하촌에서 출생, 조선족.
흑룡강성 전 정협부주석이고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해방전쟁시기인 1948년 8월 1일, 당시 동북야전군 사령관이였던 림표로부터 《동북해방기념》 훈장 수여받음.
독일의 히틀러가 투항한 후인 1945년 7월, 쏘련지도자 쓰딸린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기념장》 수여받음.
또 쏘련지도자 쥬꼬브로부터 《반파쇼전쟁 기념》 훈장 수여받음.
1995년 쏘련 예르친대통령으로부터 《(1945-1995) 반파쇼전쟁 승리 50주년 기념》 훈장 수여받음.
2005년 로씨야정부로부터 《반파쇼전쟁 승리 60주년 기념》 훈장 수여받음.
2005년 중국 호금도주석으로부터 24K 금으로 제작한 《(1945-2005) 반파쇼전쟁 승리 60주년 기념》 훈장 수여받음.
남편인 흑룡강성 전 성장 진뢰와 함께 조선 김일성 전 주석 80주년 생신에 초청돼 조선에 가 김주석과 함께 축수상을 받음.

아직도 젊은 날의 고움과 깨끗함, 전선에서 단련된 탄탄하고 매력적인 몸매, 비록 중국어를 구사하지만 조선족으로서의 부드러움을 간직한 흑룡강성 전 정협부주석이고 전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민녀사를 찾아 기자가 해빛밝은 그녀의 저택에서 그녀와 마주앉은것은 지난 6일 아침.

항일전쟁시기 동북항일련군이 숙영지에서, 행진하면서 불렀다는 《제3로군군가》, 《홍기가》, 《숙영의 노래》,  딸이 참군하면서 불렀던 《어머니, 저 출정해요》…

그날 기자와 마주앉아 85세의 고령임에도 항일전쟁 당시의 노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렇듯 박력있고 격정적이고 애절하게 부르던 리민녀사. 그 노래를 듣는 기자의 목은 꽉 메여올랐고 눈엔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

제1부 공화국창건 의 불굴의 녀전사

◆ 항일전사로 성장

6살때부터 진보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리민은 선후하여 아동단 선전대에 가입, 각지로 다니며 항일구국을 선전했다.

1936년 겨울 일본관동군과 중국만주군의 추격, 체포로 리민은 산에 올라 항일련군에 가입한다. 동북항일련군 제6군 4사에 편입된 그녀는 산속 밀영의 복장공장에서 군복을 지었고 야전병원에서 간병원으로 근무했다.

1937년 가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한다.

1938년 군부교도대에서의 학습을 거친 후 1사에서 선전원, 전방구급원, 기관총반 전사로 되여 쌍압산 칠성봉 전투, 과회산전투, 보청전투, 부금전투, 화남, 화천, 발리 전투 등에 참가했다.

1938년 1월 중공당에 가입한다.

◆ 밀림의 이야기

눈보라가 쌩쌩 기승을 부리고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던 1938년 겨울, 일본관동군과 위만군의 토벌에 하루 종일 적들과 싸우던 항일련군은 숱한 희생을 내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해산한지 두달밖에 안되는 중공당원 김봉수(조선족)를 비롯한 4명의 녀전사들은 퇴각하다가 적들 기마병에게 포위되여 끌려갔다.

그날 녀전사들의 앞장에서 퇴각로를 열던 리민은 적들의 포위에서 벗어날수 있었고 이틀밤, 하루낮 동안 산속을 달려서 겨우 부대를 찾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1년, 쏘련 극동(하바롭쓰끼)홍기군 88특별려(항일련군)에서 위만군으로부터  투항해온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3년전 항일녀전사 4명을 체포해간 그 위군이였다.

그에 따르면 4명 녀전사들은 위군 주숙지에서도, 이동과정에도 항일노래를 불러 위군들의 민족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들의 영향으로 결국 위군 71명은 일본관병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켜 항일련군에 투항했다. 

거의 70년이 흐른 오늘도 그 이름, 그 얼굴 생생해 그리운 전우들, 그녀들의 생사는 지금까지 알길이 없다. 그때 그녀들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

◆ 아버지 오빠 항일렬사

그날 인터뷰에서 《중국에 친정쪽 친척분들이 계세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없어요. 조선에 친척 한분 계실뿐이예요》라고 답하는 리민녀사의 얼굴은 한없이 슬프고 쓸쓸해 보였다.

리민의 아버지는 일본침략후 지하당사업을 하다가 일위군의 토벌에 쫓겨 산에 올라 항일련군에 가입, 6군 1사 후근처 처장을 맡아 부대에 량식을 수송했고 1939년 특무의 밀고로 적에게 체포돼 맞아죽었다.

항일련군이였던 리민의 오빠는 후에 쏘련에 갔다가 1942년 쏘련홍군의 공격에 앞서 항일련군의 파견을 받고 귀국, 양복점, 판점 등을 꾸리며 일본관동군과 중국위만군에 대한 정찰활동을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비밀리에 살해되였다.

◆ 쏘련에서의 학습과 훈련

1942년 리민을 포함한 중국 북만(동북)항일련군은 쏘련 하바롭쓰끼에 야영지를 건립하고 쏘련원동홍기군 88특별려로 개편되여 그 곳에서 일본침략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태 유격전에만 익숙했던 리민은 그 곳에서 정규군의 전략전술을 배우고 현대화무기 사용법을 배우며 전부 무장한채 공정부대 건설과 공중락하훈련, 수영도강훈련, 스키훈련을 받으며 수륙공격 준비를 해나갔다.

뿐만 아니라 중공당사와 쏘공당사 등 정치리론을 배웠다.

그렇게 쏘련에서 현대군인으로 거듭난 리민은 340명의 항일련군 전사들과 함께 세번째패로 파견을 받고 쏘련홍군 제1, 제2, 제3 방면군과 함께 중국의 흑룡강, 우쑤리강, 대흥안령 등지로부터 동일시간에 진격하여 일본침략자에 대한 총 공격을 개시한다. 리민은 이때 무선전보원으로 중국에 락하한다.

제2부 두 전사의 아름답고 영원한 사랑

2002년 년초 할빈을 찾은 호금도총서기에게 흑룡강성 전임 성장이며 남편인 진뢰와 함께 동북항일련군 력사자료와 《동북항일련군가곡집》을 드리는 리민녀사.

◆ 결혼

리민이 항일련군에서 지식있고 진취적인 진뢰청년(한족)을 만난것은 1938년 봄.

몰락지주 가정에서 태여난 진뢰는 1936년 중공당원에 가입, 지하당사업을 하다가 일본관동군이 3강지역 지하당원과 항일분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면서 체포를 피해 항일부대를 찾아 입산, 6군에 가입했다.

6군 군부에서 그는 당위 총지서기, 조직부장 겸 군부 정치교도관으로 전사들에게 강의를 했고 그때 리민은 학생이였다.

그후 1941년 년초, 쏘련 극동지역 항일련군 북만야영지에서 무선전을 배우던 리민은 그 곳에서 두번째로 진뢰를 만난다. 둘은 서로 상대를 마음에 두고있었다.

 제3로군 총지휘인 리조림을 따라 스키를 타고 동북에 갔던 진뢰는 1942년 3월, 항일전선에서 적들의 사격에 손동맥이 끊어나자 피가 콸콸 쏟아지는 팔의 동맥에 나무가지로 솜을 쑤셔넣고 전투를 계속했다.

쏘련에서 간호학을 공부하면서 군부 위생소에 근무하던 리민은 중상입고 돌아온 진뢰를 치료해 주며 가슴아파 한없이 울었다.

그후 또다시 전선으로 떠나는 진뢰에게 리민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가 직접 코바늘로 떠서 쓰던 세면주머니를 선물했고 감동된 진뢰는 일본군 전리품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숙영지에서 불군 하던 자기의 귀중한 물품―하모니카를 리민에게 선물했다.

오늘까지 지난 67년 세월동안 고이 간직해온 세면주머니와 하모니카, 그날 인터뷰를 받으며 리민녀사가 기자앞에 내놓는 세면주머니는 낡고 삭아서 일부 코가 떨어졌고 하모니카의 빛갈도 부옇게 바래져 있었다.

1943년 또다시 쏘련에 돌아온 진뢰는 88려 정치부 비서로 문서사업을 하게 됐다.

그해 11월 23일, 진뢰와 리민의 관계를 알게 된 조직에서 나무껍질로 벽을 막은 반 지하 작은 단칸방을 그들에게 내주어 신혼방으로 쓰게 했다. 리민이 녀전사들에게 등을 떠밀려 영문도 모른채 신혼방에 들어갔을 때 나무껍질 사이로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벽을 신문지로 바르고있던 진뢰가  리민을 깊이깊이 포옹해 주었다. 그때 리민의 나이 19살, 진뢰는 25살이였다.

위생소 가제를 줄줄이 바느실로 이어 창문보로 했던 그 작고 허름한 방, 그날 인터뷰에서 리민녀사는 기자에게 《내 평생에 그 같이 예쁘고 아담한 방은 없었다》며 행복에 겨워한다.

◆ 일제에 대한 반격과 후방건설

1945년 쏘련홍군 반격시 조선족은 모두 김일성을 따라 조선으로 가고 리민녀사는 무선전보원으로서 남편을 따라 제3패와 함께 동북으로 건너온다.

쏘련홍군 수화위수구 부사령원이였던 남편 진뢰는 수화지구를 점령하고 토비까지 숙청하면서 중공수화지구 지위서기로 임명되였고 리민은 선전사업을 맡아했다. 그들 부부는 기타 3명과 함께 수화지구의 건군, 건당 사업을 맡아했고 해방전쟁시기에는 생산을 발전시켜 후방근거지를 건설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속에서 그들은 감격의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맞게 된다.

후에 남편 진뢰는 중공 흑룡강성위 부서기, 흑룡강성정부 성장으로 고위공직에 오른다.

제3부 새중국건설의 우수한 민족간부

◆ 민족사업에 혼신 바쳐

건국후 리민주임은 선후하여 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성정협부주석 직을 맡았고 그 직무에 충성과 열정을 다했다.

문혁기간 진뢰성장은 물론 리민주임도 억울하게 《쏘련간첩》 모자를 쓰고 5년간 감금되여 모진 고초를 다 겪었다.

리민이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재직시기(80년대 초) 흑룡강성에는 오르쳔족, 다우르족, 허저족, 몽골족, 회족, 바이족, 조선족 등 소수민족 30여만명이 소수민족 촌, 향을 이루고 살고있었다. 특히 오르쳔족, 다우르족, 허저족 등은 문화수준이 낮고 경제가 락후하며 생산할줄도 모르고있었는바 그들은 고기잡이거나 사냥, 양, 소 사양 등으로 겨우 연명하는 상황이였다.

그들을 이러한 상황에서 해탈시키기 위해 리민주임은 전 성내 소수민족 마을마다 지어 십여호밖에 안되는 로씨야국경의 편벽한 산골짜기마을까지 찾아다녔다.

하루 빨리 그들의 문화수준을 제고시키고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리민주임은 각 소수민족촌마다에 소학교를 건설하고 향에 중학교를 세웠으며 성민위 산하에 성민족간부학원과 민족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촌의 소수민족 간부들을 양성했다.

리민주임은 고기잡이, 사냥으로 겨우 연명하며 농사지을줄 모르는 오르쳔족 등 경제가 락후한 소수민족 촌과 향의 간부들을 이끌고 타촌에 가 농사와 림지경영 등 생산활동경험을 학습하게 함과 아울러 직접 소수민족촌의 촌민들을 이끌고 대흥안령에 들어가 벌목하고 버섯 등을 따 팔아 수입하게 했다.

리민주임은 국가투자를 쟁취해 각 소수민족촌마다 새로 벽돌기와집을 짓게 했다. 당시 그 돈 마련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다.

당시 소수민족 마을마다에는 전기가 없어 해가 떨어지기만 하면 온 마을이 칠흙같이 어두었다. 그런 소수민족마을에 리민주임은 전기를 전부 들여왔다.

그녀는 전 성 20여개 조선족마을을 일일이 찾아가보았고 지어 흑하의 편벽한 산골 10여호밖에 안되는 조선족마을에도 찾아가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특히 리민주임은 흑룡강성 조선족들의 뒤심이 되여 조선족단위의 건설과 자금조달 문제들을 일일이 해결해주었다.

소수민족이 우매하고 락후한 원인은 결국 편벽한 고장에서 사는 환경탓이라 여긴 리민주임은 해마다 여름방학때면 각 소수민족촌 소학교 2학년 이상 학생들을 대도시 할빈시와 외지사람들이 많이 오는 경박호에 불러다 하령영행사를 가지고 여태 기차도 보지 못한 그애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흑룡강성 소수민족들에게 있어 그녀가 민족종교사무위원회 주임으로 부임돼 있은 기간은 실로 천지개벽의 시기였다.

◆ 청렴했던 고위관원

리민과 진뢰 부부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그들 부부가 성민위 주임 성정협 부주석, 성당위 부서기 성정부 성장이라는 고위공직자임에도 그들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공직과는 거리가 먼 일반 직장생활을 하고있고 출국해본적도 없었다.

맏이인 딸은 현재 상해 모 방직품염색공장에서 꽃천설계를 하고있다. 큰아들은 능력이 있어 성당위 조직부장 자리에 추천하는것도 그들 부부가 거절했다. 큰아들은 끝내 공직을 버리고 하해했고 현재 심수의 한 회사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고있다. 작은아들도 현재 남의 회사에서 일하고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우리들의 선택은 옳은것 같다. 특히 탐관으로 감옥에 간 자식이 없어 생활이 안정되여 만족한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리민녀사는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터놓았다.

◆ 여생을 항일정신 전수에 

2004년 10월 27일, 항일련군 후대와 선전대를 이끌고 빙탕자전역 항일유적지를 찾은 리민녀사.

67세에 리직한 리민녀사는 리직후 오늘까지 18년간, 항일전쟁 14년의 정신 전수와 고양에 열과 성을 다 하고있다.

그녀는 선후하여 항일전쟁시기 널리 불렸던 항일가곡들을 수집하고 항일련군에서 불렸던 노래, 팔로군, 신사군에서 불렸던 노래, 외국가곡 등 도합 205수를 정리하여 동북항일련군가곡집(교재)을 편찬했고 할빈시로인대학에 성악반을 꾸리고 항일가곡들을 배워주기도 한다.

2002년에는 항일가곡공연단을 설립하고 선후하여 할빈사범대학, 석유학원, 공정대학, 광대대학, 항공학원 등 5개 대학에 가 대학생들에게 항일의 노래와 춤을 공연하여 항일정신을 전파했다. 또 여러 기관과 가두에도 내려가 공연하고 성내 60개 현과 시, 대흥안령의 림산작업소와 로북국경지역에까지 찾아가 공연했다.

항일정신공연단원들을 조직하여 산속 동북항일련군 유적지들을 답사하면서 동북항일련군 14년간의 분투사를 널리 선전했다.

리민녀사는 대학교, 기관, 가두에 다니며 항일련군 분투사와 항일정신을 강의하기도 한다.

리민녀사는 흑룡강성 경박호유람지내에 있는 항일련군 유적지에 항일의 노래들을 새긴 비석 10개를 세워 항일정신이 세세대대로 전해내려가게 했다.

맺는 말

그날 아침 8시 반부터 시작한 기자와의 인터뷰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취재를 했던 그 반시간까지 합쳐 장장 다섯시간 반동안 이야기를 해준 리민녀사, 85세 고령이라 하기엔 젊은이들을 릉가할 비상한 기억력과 체력이였다.

전쟁년대에는 목숨걸고 싸워 공화국창립에 기여했고 평화시기에는 당과 정부, 인민에 충직했던 리민녀사께 기자는 깊이깊이 머리숙여 인사올리고 장춘행기차에 몸을 실었다.

녀사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흑룡강신문사 리수봉, 김해란 부장들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길림신문 김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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