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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치환-첫 조선족 세계우승 기록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9월10일 08시37분    조회:8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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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의 첫 세계우승 
세계동계스포츠 새 중국의 첫 금메달수상자 라치환선생 만나본다

● 세계빙속대회 동양인 첫 우승!
● 세계빙속대회 중국인 첫 우승!
● 세계동계운동종목 중국조선족 첫 우승!
● 새 중국 성립이래 중국인 세계동계운동종목 첫 우승!
● 《공화국 성립 35주년 이래 가장 걸출한 운동원》에 선정

동양인이 세계스포츠계 벽을 넘은 순간



1963년 일본 제56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시상대에 오른 라치환

1963년 2월 24일 일본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輕井澤) 고산경기장.

20일부터 5일간 열린 제56회세계속도스케트(氷速)선수권대회 마지막 날.

《땅!》

대회 하이라이트인 남자속도스케트 1500메터 결승이 드디여 막을 열었다. 

당시 동양인들에게 있어선 감히 넘을수 없는 벽으로 아득하기만 했던 속도스케트, 과연 이변이 생길건가! 숨막히는 침묵과 함께 긴장으로 떨리는 뭇시선들이 하나같이 스타트선을 찍어보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아니, 전대미문이라고 지칭할 대사건이 터졌다!!

동양인이, 그것도 못사는 나라라 업신여김을 당하던 중국인이 더우기는 중국 조선족이 우승을 따낸것!!!

《2분 9초 02! 세계신기록 탄생! 라치환(羅致煥) 경신!》
… …

당년 구쏘련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쟁쟁한 유럽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의 월계관을 따낸 우리 민족의 스포츠명장 라치환선생을 만난것은 지난 9월 4일 그의 자택에서였다.

《허허, 뭘 취재할게 있다구요. 다 지나간 일인데…》

화려한 스포츠인생을 장식한 체육인답게 키꼴이 훤칠한 선생은 겸손의 표정으로 반갑게 기자를 맞이했다.

소박하게 장식된 응접실 벽면을 가득 채운 상장과 상패 그리고 고색이 짙은 사진들이 누리에 빛나던 그의 과거를 말해주고있었다.

할빈 제24회 세계대학생동계운동회 성화봉송 첫 주자로 나섰다.

마의 장벽을 넘어 0의 돌파로

1941년 흑룡강성 해륜시 조가툰에서 부친 라원섭, 모친 박원도의 자식 5남매 중 둘째로 태여난 라치환(63세)선생은 1956년 수화시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속도스케트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계몽스승인 장봉룡(연변대학 체육계 졸업)선생의 체계적인 지도아래 중학 2학년에 다니던 1958년, 교내는 물론 시급, 성급 그리고 전국대회에까지 출전하여 1등의 월계관을 싹쓸이해버리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치치할시체육학원에서 그를 교내빙속팀의 기둥선수로《앗아》갔고 그것도 잠간, 얼마 안지나 흑룡강성 빙속팀에서 재차 그를 기둥선수로 《앗아》갔다. 또한 당시 국가전문팀이 없는 상황에서 선생에게는 수시로 나라를 대표해 국제경기에 참가하는 임무가 부여되기도 했다.

1960년부터 1962년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제54회, 제55회, 제56회 세계속도스케트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 경험을 루적했고 중국인, 나아가서 동양인들에게 마의 장벽으로 기시와 조롱의 표적이 됐던 속도스케트 우승의 월계관을 위해 절치부심했다.

드디여 대망의 제57회에 선생은 동양인들은 근본 넘을수 없다던 벽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장거를 이룩했다.

《하긴 일등을 따냈으니 망정이지 그렇잖았더면 큰 조롱거리가 될번 했어요.》

선생은 그번 대회의 어려웠던 사정을 감회깊게 토로했다.

그 무렵 일본으로 가려면 향항을 거쳐야만 했는데 일본대사관에서 일본발 비행기 리륙 2시간 전까지만 해도 중국대표팀에 탑승수속을 밟아주지 않았던것이다.

관계부문을 거쳐 겨우 수속을 밟고 일본에 도착했는데 또 대회조직측에서 중국팀에 훈련장소를 제공해주지 않았고 주숙환경도 더없이 렬악했다. 선수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물론 안전도 보장이 없었다. 그만큼 외국인들은 중국인을 무시했고 더우기는 중국의 빙상운동을 무시하고있었다.

《일등을 따낸 뒤엔 또 어쨌는지 알아요?  허허…》

뜻밖에도 중국대표팀이 1500메터 빙속에서 우승을 따내자 대회조직측은 한동안 술렁거렸는데 격분한것은 기타 유럽의 선수들과 달리 그에게 사진액자를 부상으로 내린것이였다. 이에 중국대표단을 비롯한 각 나라 대표단에서 질의를 제기했고 결국 이튿날 대회조직측에서는 당시로는 최고급격인 후지다사진기를 그에게 다시 부상으로 내렸다.

한편 선생이 우승을 따내자 일본에서 차별대우를 받던 화인화교들과 재일동포들이 분분히 중국대표팀을 찾아와 꽃묶음이랑 사과상자를 안기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언론지인 《아사히신붕》은 《조선인 중국사람 1500메터 빙속 우승》이란 이색적인 제목으로 선생의 장거를 톱으로 장식하기까지 했다.

《동양인 첫 세계빙속대회 우승!》

《중국인 첫 세계빙속대회 우승!》

《중국 조선족 첫 세계동계운동종목 우승!》

《새 중국 성립이래 중국인 세계동계운동종목 첫 우승!》

이렇듯 선생의 우승은 수많은 《0의 돌파》로 중국스포츠력사와 우리민족의 스포츠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했다.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영광의 기록

새 중국, 새 중국인들의 새로운 기상을 만방에 알린 그번 선생의 장거는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높은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을 겸하고있던 국무원 부총리 하룡원수는 나라를 위해 영예를 떨치고 귀국한 대표단을 위해 친히 만찬을 베풀었고 선생을 자신의 곁에 불러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욱 많은 영예를 떨치라》고  격려까지  해주셨다.

하지만 눈섭에서 화가 떨어진다고 《문화대혁명》이란  세계에 류례 없던 십년동란의 광풍은 조국을 위해 영예를 떨친 이 스포츠명장마저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룡, 용국단(탁구선수. 중국 첫 세계스포츠챔피언)을  우두머리로 한 체육계 반혁명분자로 몰리웠어요. 나라를 대표해 외국에 자주 시합을 나간게 죄라면 죄였지요.》

핀란드 세계대회에서 한때 같은 대표팀에서 활동하다 조선대표로 출전한 과거의 동료선수를 접촉했다는 리유로 《조선특무》로  몰리기까지 했다. 모든 스포츠활동을 접은채 검토신을 써야 했고 리유없이 투쟁맞아야 했다. 그 억울함과 이루 형언할수 없었던 고초는 개혁개방이란 새로운 봄날을 맞이해서야 해빙될수 있었다.

흑룡강성스케트팀 코치로 다시 회복했고 1980년에는 중국스케트협회 부주석으로 당선됐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을 맞아 가장 걸출한 운동원으로 선정됐고 1988년에는 신중국체육개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994년에는 건국 45주년을 맞아 체육계 45명의 영웅으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에는 심근경색으로 사경에 처했고 막대한 치료비 때문에 당년의 빙속대회 우승메달까지 팔려는 생각까지 가졌다.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과거 동료와 체육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998년 35년만에 다시 일본 나가노현을 방문, 동계올림픽 성화주자로 참가했고 10년 뒤인 2008년에는 북경올림픽 할빈경내 성화주자로 참가했다. 그리고 올 2월 18일 할빈에서 펼쳐진 제24회 세계대학생동계운동회 개막식에는 성화봉송 첫 주자로 나서는 영광을 누렸다.

선생은 그 순간, 순간의 영광을 기록한 사진들을 기자에게 설명하며 《중국인들의 반세기동안의 꿈이 현실로 변했고 동계빙상종목도 세계스포츠강국과 점점 격차를 좁히고있다》며 누구보다도 감격해했다.

안타까움:  빙상계 조선족별들 대가 끊기는것

유럽선수들의 독무대였던 세계대회에서 동양인으로는,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게다가 조선족인 라선생이 우승했다는 사실은 일본인들에게도 커다란 놀라움을 안겨줬다. 지금도 가루이자와에 가면 당시 우승자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에서 선생의 이름을 쉽게 찾아볼수 있다고 한다.

선생은 오랜 기간 중국대표팀을 비롯한 아세아팀들이 속도스케트종목에서 유럽에 비해 뒤떨어진 원인을 신체조건과 기전술 등 분야로 진단, 이를 종합해 볼 때 아세아선수들의 우세는 장거리가 아니라 단거리라고 지적했다.

례를 들면 1500메터 빙속에서 아세아선수들이 6위 진입은 가능하나 5000메터와 1만메터 장거리에선 그 순위가 금방 몇십 등으로 하락하는것을 꼽았다. 그러면서 선생은 당년에 자신이 수립한 《2분 9초 02의 신기록》은 요즘 국내 녀자선수들도 쉽게 돌파한다며 체육인이라면 신체소질도 중요하지만 과학적인 연구체계과 기술에 의거해야 한다고 토파했다.

한편 선생에 따르면 지난 20세기 50년대로부터 60년대까지 중국 빙상계에 정홍도, 임세준, 박달화, 리태권, 김미옥, 최순자, 리창성 등 조선족명장들이 수없이 나왔다고 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단거리 빙속 우승자 공미옥, 전국 우승 김정수, 오광록 등 기라성들이 명맥을 잇고. 하지만 지난 세기말부터 최근년까지 동계스케트종목에 조선족선수들을 볼수가 없다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원인에 대해 선생은 오히려 기자에게 반문했다.

《학생이 없어 학교가 무너지고 있는데 어디 가서 선수를 찾아 양성해요?》

지난해 봄 고향으로 갔더니 학생래원으로 조선족학교가 모두 페교했더라며 우리 민족 빙속인재를 발굴, 양성하려면 그래도 연변에 희망을 둘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변에는 우리 민족의 후대들이 많으므로 그 곳에는 그래도 민족의 빙속인재들을 양성할수 있을거라는 소박한 견해였다.

지난 2002년 명퇴이후 과외흥취로 낚시를 즐긴다는 선생은 만약 지금이라도 우리 민족 스케트 양성기지에서 불러만 준다면 서슴없이 달려가 남은 여생을 불태우겠다며 환히 미소를 짓는다.

라치환 프로필:
1941년, 흑룡강성 해룬에서 출생
1958년, 치치할 빙상 훈련반에 진입
1959년, 전국 제1회 동계운동대회에서 속도스케트(氷速)500메터, 1000메터 우승
1959년 12월, 국가팀에 입선
1959년―1966년, 국가대표팀 선수, 전국 기록과 세계 기록 돌파
1963년, 일본 제57회 세계선수권대회서 우승
1980년 중국스케트협회 부주석 당선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35주년을  맞아  국가체육위원회로부터  《공화국  성립 35주년 이래 가장 걸출한  운동원》 에 선정
1988년 《신중국체육개척자》 칭호 수여
1985년―2001년 중국 국가속도스케트 녀자팀 코치 담임
2002년 퇴직
이외 국가체육위원회로부터 《운동건장》 영예칭호와 더불어 2차에 걸쳐 국가체육운동영예상장 획득
다년간  흑룡강성  녀자대표팀과 중국녀자대표팀  감독으로 양춘원, 왕수옥  등  우수한 선수들을 양성. 그  사이  그가 양성한 제자들이 전국대회에서 무려 124차의 우승을 차지. 그중 64명 선수 《운동건장》 칭호 수여

길림신문 신철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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