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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을 탄생시킨 작사자 허동철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8월25일 10시13분    조회:1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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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온집안에 기쁨이 넘치는 날
어머니를 높이 모신 환갑날이랍니다
아~~~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
아들며느리 차린 큰상 어서 받으세요


언제 어디서든 익숙한 멜로디ㅡ《오래오래 앉으세요》, 세상에 고고성을 울린지 근 30년이 되여오는 이 멜로디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명곡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이 노래뿐만아니라 《로년을 잘 보내시라》, 《너도 쌍쌍 나도 쌍쌍》, 《축배를 들어라》, 《명절놀이》, 《야단났구려》, 《첫날의 노래》, 《사과배동산에서》 등등, 이러한 명곡들이 세상에 태여나기까지는 무수한 사람들의 정성과 희생이 고스란히 숨어있다. 한수의 노래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까지는 그속에 담겨진 가사의 진실한 의미와 함의가 모든이들의 가슴에 와닿는 진실로 통해야만이 이루어질수 있는것이다. 여기에 이러한 진실된 감정을 위해 마음으로 가사를 쓰시는분이 있다. 바로 우에서 소개한 명곡들을 직접 작사하신 작사자 허동철선생이다.            
      
선후로 연변인민방송국 부총편집, 길림신문사 부총편집 사업을 맡아하다가 지난 2004년에 정년퇴직한 허동철선생(68세)은 30여년의 가사창작생애에서 작곡가들과 합작하여100여수의 명곡들을 창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오래오래 앉으세요》라는 노래는 근 30년의 력사가 무색할만큼 아직도 그 매력을 톡톡히 발산하고있는바 2001년 9월에는 국가문화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중국라지오영화텔레비죤총국에서 공동으로 선정한 전국“세기민족가요”로 선정되여 《경전저작》에 수록되는 영광까지 얻게 되였다.

누룽지소학생의 문학의 길

1942년 9월, 화룡현 서성향 고성촌에서 4남매중 셋째로 태여난 허동철선생은 째지게 가난한 살림에 매일 8리길을 도보로 등교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습성적이 늘 학급의 첫자리를 차지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멀었던 까닭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처 아침밥을 먹지 못하고 학교가는 날이 비일비재였던 허동철이지만 결국 배를 곯은적은 없었다. 허기진 배를 잡고 공부하는 아들이 내심 속에 걸렸던 어머니는 매일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까지 와서는 아들손에 누룽지라도 쥐여주고야 시름을 놓군 했던것이다. 다년간 고혈압으로 인한 편두통때문에 늘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고생하는 어머니였지만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말없는 헌신을 해온것이였다. 바로 그 사랑에 힘을 입어서일가, 허동철은 학교에서 각방면에 손꼽히는 모범학생이였으며 덕분에 고중과 대학교에 특별추천되여 무난히 학업을 마칠수 있었다.

학창시절에 탁구에 남다른 재질이 있었던 허동철은 일찍 고중시절에 전 주 탁구경기에서 1등의 영예를 따냈으며 이듬해인 1959년에는 전국탁구경기에도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965년, 순조롭게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한 허동철은 연변인민방송국 문예부에 배치받아 정식으로 예술세계에 입문하게 되였으며 1986년에는 길림신문사에 전근하여 맡은바 사업에 정열을 불태웠다. 길림신문사에서 사업하던 시절 해마다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발행사업이 그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였다. 가까운 지방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추운 겨울에 인가가 드문 산골마을까지 찾아가다가 차가 고장나 촌보난행으로 고생하던 일, 길바닥에 깔린 얼음때문에 모래나 흙 등을 손으로 긁어다 얼음우에 뿌려가면서 힘들게 차를 밀던 일, 지친 몸을 끌고 연길까지 돌아와서는 지척에 있는 자기집에 돌아갈 힘마저 없어 결국 근처 려관방에서 지친 몸을 달래던 일, 사업에 대한 애착과 마를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수많은 영예증서를 바꿔왔다.

1972년 1월에 허동철 작사, 리성재 작곡으로 된 《우리네 조국》이라는 노래가 드디여 허동철선생의 처녀작으로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다. 자신의 노래가 전파를 타고 천가만호에 전해지는것을 느끼면서 허동철선생은 작사자로서의 뿌듯한 긍지를 느낌과 동시에 가사창작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되였다. 그러던중 문예부에서 사업하던 김태종선생의 알선으로 그는 당시에도 작곡가로 명성이 자자하던 방룡철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였다. 그번의 만남은 두 사람의 예술생애에서의 숙명으로 후날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동업자로 되게 하였으며 이들의 공동합작으로 태여난 《모란꽃 피였네》, 《우리네 자랑 꾀꼴새》, 《너도 쌍쌍 나도 쌍쌍》 등 수많은 가요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의 명곡으로 널리 불려지고있다. 그중 《형제자매 한자리에 모였네》(동희철 작곡)는 전국민족단결가요 1등상을, 《오래오래 앉으세요》는 3등상을, 《꽃밭을 가꾸네》는 전국환경보호가요응모에서 격려상을 받아안았다.

《오래오래 앉으세요》가 만들어지기까지

자신이 성가해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미처 보여드리기도전에 서둘러 하늘나라로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때문에 늘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그리움만 안고 살던 허동철은 그러한 그리운 마음을 장모님한테 깡그리 쏟아부었다. 일찍 허동철의 고중시절 학교식당에서 료리사로 일하던 장모님과는 인연의 련속이였을가, 자신을 늘 친자식처럼 아껴주는 장모님의 환갑잔치가 가까와지자 그 누구보다도 값진 선물을 안겨드리고싶었던 허동철은 결국 장모님만을 위한 노래창작에 달라붙었다.

그 누구보다도 정결한 성품으로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했던 장모님은 늘 하얀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다니다보니 늘 “깨끗한 아줌마, 이쁜 아줌마”로 칭송받군 했다.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로 남은 장모님은 아녀자 혼자몸으로 애면글면3남매를 키우며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원망 한마디 없없다. 가슴에 슬픔을 묻고 언제나 하얀 한복차림을 한 장모님은 누가 봐도 명실상부한 우리 민족 어머니들의 축소판으로 대표적인 조선족어머님형상이였다.

결국 허동철선생은 장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효도를 한자한자 가사에 적어내려갔고 허동철선생의 제의에 따라 허동철선생의 장모님댁을 직접 찾아뵌 방룡철선생의 진심어린 마음 역시 고스란이 멜로디에 담겨지며 드디여 우리 민족의 영원한 명곡 《오래오래 앉으세요》가 탄생되였다.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으로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했던 시기에 때맞춰 울려퍼진 이 경쾌한 노래는 처음 세상에 공개되여서부터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도 잠시였다. 가사내용에 “아들며느리 차린 큰상”중에 “큰상”은 다분한 랑비현상이 반영되였고 “어머님을 높이 모신”중에 “높이 모신”이라는 글귀는 국가 수령님에 대한 도발적인 의미가 부각되였다는 리유로 한동안 방송정지라는 난관에 맞닥뜨리게 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무수한 군중들의 비난을 자아냈으며 방송국에 눈꽃처럼 날아드는 노래요청편지들은 미처 확인하기도 버거울 지경이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방송국의 부총편집이였던 리창원선생이 직접 조사단을 무어가지고 료녕, 흑룡강 등지의 퇀급이상 조선족간부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결국 이 노래로 인해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정서적으로 격앙되고 모든이들의 마음속에서 “효도가”로 자리매김하고있다는 한결같은 호평으로 인해 드디여 암담했던 난관을 딛고 다시금 중국대륙의 전역에 《오래오래 앉으세요》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사실 《오래오래 앉으세요》는 장모님의 환갑날에 첫선을 보이려고 별렀던 노래였지만 방송국령도들의 한결같은 요청으로 결국 “3.8절”특집방송으로 미리 전파를 타게 되였다. 당시 명실상부하게 “효도가”로 급부상한 이 노래는 우리 나라뿐만아니라 타국에서도 널리 보급되고 소개됐다. 1989년, 조선국가주석 김일성이 독일을 방문할 당시 조선TV에 그 장엄한 력사적화면과 함께 이 노래가 은은히 울려퍼졌으며 한국 KBS방송에서는 전문적으로 이 노래 가사의 함의에 대한 분석과 함께 노래를 전문방송하기도 하였으며 서안교통대학에서 선정한 《교정의 노래》에서 역시 독보적우세로 이 노래가 선정되였다. 뿐만아니라 제 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회의장에서도 《오래오래 앉으세요》가 장내에 또 한번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밖에 한국의《세계일보》, 《북소리》주간잡지, 카나다신문, 일본의 도꾜방송 등 국제매체에서도 다투어 이 노래를 소개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이 노래를 들을수 있었고 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곳곳마다에는 흥분과 희열의 물결이 일었다.

열정이 만들어낸 명곡들

《오래오래 앉으세요》의 파장이 거침없이 일파만파 번져질 즈음 당시 연변인민방송국에 총편집으로 있던 리송영선생이 조용히 허동철선생을 찾았다. 당시 효자로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하던 리송영선생은 다짜고자 그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여보게, 어머니를 높이 모신 노래는 이렇게 모든이들의 가슴을 울려주었는데 왜 아버지를 높이 모신 노래는 없는건가? 홀몸으로 남으신 우리 아버지에게도 같은 감동을 드리고싶은데 자네가 아버지를 노래하는 노래 하나 지어주면 어떻겠나?”
리송영선생의 가슴따뜻한 부탁에 허동철선생은 또다시 부모님을 상기하면서 필을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로년을 잘 보내시라》였다. 이 노래가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있을것이다. 구련옥가수가 부른 《로년을 잘 보내시라》는 노래는 지금도 연변TV 《요청한마당》프로에서 자주 볼수 있을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인기가요로 자리매김하고있다.
                                                 
가사창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단지 노력만이 아니였다. 우연한 기회에 길가에서 떡장사를 하고있는 어어쁜 조선족색시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한창 어린 나이에 달덩이처럼 환한 미모의 색시가 열심히 떡을 팔고있는 모습을 이윽히 바라보던 허동철의 뇌리에는 또 하나의 령감이 떠올랐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색시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한달음에 집에 달려온 그는 정열에 넘쳐 가사를 적어가기 시작하였다.

풍산동서 시집온 샘물집의 새각시
너울벗어 사흘만에 떡장사에 나서더니
두해만에 번듯이 떡공장을 세웠소
사구려 사구려 둥글납작 증편이요
사구려 사구려 네귀번쩍 골미떡
구성진 사구려에 샘물집에 운이트오
대운이 트오

이렇게 만들어진 “샘물집에 운이 트오”라는 노래는 “역시 허동철이군”하는 대중들의 찬사로 이어졌다.

언제 어디서든지 머리속에 늘 가사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돼있던 허동철선생은 남들이 모두 명절분위기에 들떠있는 설명절에도 처가집에서 대강 식사를 마치고는 홀로 집에 돌아와 싸늘한 랭기가 흐르는 집안에서 창작에 대한 일념에 사로잡히군 했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것일가, 어느날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방룡철선생이 머리에 함박눈을 듬뿍 이고 들어섰다. 들어서자바람으로 밤새 작업하며 써온 곡을 흥분에 들떠 흥얼거리는 방룡철선생의 희열은 그대로 허동철선생의 반짝이는 령감으로 이어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곡을 들으며 즉흥적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허동철선생의 가사를 보고 방룡철선생의 얼굴에도 터질듯한 희열이 피여올랐다. 싸늘한 랭기가 흐르는 집안, 두 사람의 뜨거운 열정과 희열속에 또 한수의 명곡이 탄생되는 순간, 까만 밤은 또다시 하얀 려명을 맞이하고있었다.

치마폭을 나풀 어디로 가느냐
귀동자를 안고서 어디로 가느냐
명절이라 즐거운 날 공원놀이 떠난단다
흠~ 귀동자를 흠~ 안고서
명절이라 즐거운날 공원놀이 떠난단다

이렇게 고고성을 울린 《명절놀이》는 역시 첫 방송부터 크나큰 호응을 불러오며 또한번 대중들의 애창가요로 부상하였으며 예술에 대한 끈질긴 열정은 끈끈한 뉴대로 되여 두 사람을 더욱 단단히 이어주게 되였다. 매 하나하나의 곡이 탄생될 때마다 두 사람은 의례적으로 함께 밤을 지새우며 반복적으로 연구하고 수정하면서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물려 돌고 돌았다. 뭐든지 완벽을 고집하는 허동철선생은 맘에 꼭 드는 곡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끝없이 수정하고 의견을 제기하면서 방룡철선생을 괴롭혔지만 그러한 허동철선생의 깐깐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방룡철선생 또한 완벽한 곡을 지어내기 위해서는 불평 한마디 없이 손끝이 얼얼해지도록 피아노건반을 두드렸다.

10여년전에 이미 간경화복수로 고인이 된 방룡철선생에 대한 그리움과 고락을 같이하던 그때의 추억에 젖어있던 허동철선생은 취재중에 끝끝내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고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기원하며 《오래오래 앉으세요》라는 노래를 만드시더니 자신은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너무 일찍 대중들을 떠나고말았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라도 이 노래를 들으시면서 건강하고 편히 지내시길…” 장례식장에서 고인에게 남긴 허동철선생의 페부속 깊은 곳의 이 말은 결국 장내에 있던 모든이들로 하여금 비통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허동철선생님의 눈물속에는 고인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간절한 그리움이 방울져있었다.

든든한 가족사랑

허동철선생의 창작생애는 영광과 희열이 어우러진 성공된 인생이라 할지라도 한 가정의 세대주로서 그의 지난날은 결국 그러하지 못했다.

지인의 소개로 당시 도금공장에서 화험원사업을 하던 지금의 안해 한경자녀사를 만난것은 그가 29세되던 해였다. 당시 자신보다 3살 년하인 한경자처녀를 보는 순간 처녀의 빼여난 미모에 첫눈에 반해버렸고 적극적인 구애끝에 1년만에 결혼에 골인하였다.

결혼생활후 두 아이의 아빠가 되였지만 가사창작이랍시고 매일 필과 씨름하는 허동철때문에 안해의 고생은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집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안해의 두손으로 이겨나가야 했다.

가정의 생계를 위해 안해는 직접 집안에서 토종닭을 기르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네식구가 살기에도 버거운 세방에서 안해는 친자식을 돌보듯 정성들여 닭들을 키웠다. 휴식일이면 그렇게 모아진 닭알을 머리에 이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팔아서는 살림에 보태군 하였다. 사업때문에 집안일에 손댈 시간이 없는 남편에게 야속한 마음이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묵묵히 남편의 사업을 지지해주면서 작은 두어깨에 가정의 모든 짐을 떠메고 살았다.

미안한건 안해뿐만이 아니였다. 창작에만 몰두하다보니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이들한테도 늘 빚진 마음이다. 미처 아이에게 눈길이 미치지 못해 아이가 머리를 땅에 찧으며 상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지만 그런 아이들도 결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미 어엿하게 성인으로 자라준 자식들을 보면서 자신의 무관심이 안해에게 얼마나 큰 상처이고 짐이 되였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낀 허동철이지만 다시 되돌릴수 없는 지난날때문에 이제 남은 하루하루를 안해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각오로 집안의 모든 일에 발벗고 나선단다.

“매일 안해를 도와 구들닦는 일은 이미 나의 일상이 되였수다!”라고 하면서 호탕하게 웃는 허동철선생은 내면세계의 따스함과 소탈함을 꾸밈없이 보여주었다.

서예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청소년서예콩클에서 큰상까지 받은적 있는 큰딸 허월미(38세)씨는 연변주당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북경에서 개인회사를 경영하며 본인만의 색갈있는 인생을 구축해가고있다.

올해 32세의 작은아들 허원문씨는 한국 진주국제대학 류학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한국에 체류중이다. 아버지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문학방면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오던 아들이 비록 아버지의 희망인 문학예술과는 전혀 무관한 사업을 하고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보람찬 삶을 위해 땀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이 마냥 대견하다고 한다.

방룡철선생이 사망된후 마땅한 합작자를 찾지 못해 그동안 창작에 뜸했지만 언젠가는 꼭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자신을 아껴주던 대중들앞에 나설것이라는 허동철선생은 자신의 예술생애에서 물심량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리송영선생과 동희철선생, 김태종선생에게도 항상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이라고 재삼 되뇌이였다.

허동철선생은 또한 문학에 꿈을 실은 후배들에게 지나친 과욕보다는 예술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후천적인 노력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발전의 장래를 책임지는 현명한 자세임을 호소하고싶다고 밝혔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명곡을 탄생시킨 작사자라는 영예를 안고 오늘도 지칠줄 모르는 창작열정과 샘솟는 아이디어로 로익장을 과시하고있는 허동철선생, 자신의 노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대중들의 사랑이 있기에 마음은 늘 부자로 산다는 허동철선생의 새로운 명곡을 위한 힘찬 도약을 내심 기약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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