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 10대 민요왕 변영화 석사학위 취득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7월27일 08시38분    조회:820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민족향기 풍기는 장백의 종달새

우리 민족 민요를 말할라치면 민족창법으로 주렁진 성과를 따낸 시원한 가창력으로 우리 민요를 전국 나아가서는 전세계에 알리는 중앙민족가무단의 성악가수 변영화가 떠오른다.

얼마전에 연변대학예술학부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변영화는 현재 유럽순회공연준비중이다. 이전에도 전국적으로 공연을 하는 한편 중국대표로 한국, 미국, 애급, 수단, 먄마 등 나라와 대만, 향항, 오문 등 곳에서 공연하였던 변영화는 애급공연때 노래 《진달래》(리영선 작사, 안국민 작곡)를 불렀는데 때마침 봄이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이번 유럽순회공연을 위해 노래 《고향》(김경련 작사, 류영근 작곡)을 준비한 변영화는 “고향을 멀리 떠난 중국사람과 조선족들에게 그리고 멀리서도 우리 민족 문화를 즐기는 외국사람들에게 노래 〈고향〉을 따뜻하게 불러드리려 한다”고 밝히고나서 “공연자란 사람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역할, 말랐던 마음을 촉촉하게 해주는 크림역할, 문화를 전달하는 전파자, 선도자”라며 공연열정을 내비쳤다.
                             
엄마는 생활의 인도자

변영화가 음악의 길을 선택하고 지금껏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히 걸어나갈수 있은것은 부모님들의 전면적인 인도와 갈라놓을수 없다. 어린 딸애한테서 음악재능을 보아낸 변영화의 부모는 그가 8살나던 해에 연길로 이사를 왔다.  아직 세계관이 서지는 못했지만 노래를 좋아했던 변영화는 많은 노래를 수집하고 따라불렀다. 이런 딸에게 어머니는 좋은 선생님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노래를 잘 불렀지만 집이 가난해서 음악에 대해 정규적으로 배우지 못한것이 한이였던 어머니는 딸한테 자신이 배우지 못한 몫까지 다 배워주리라 결심하였다. 그래서 매번 교수과정을 록음했다가는 집에 돌아와 다시 반복적으로 들려주면서 목청을 틔우도록 독촉하였다. 어머니와 선생님의 지도하에 변영화는12살때 무난히 연변예술학교 소학반에 입학하였다. 1994년, 그때로부터 그녀의 기나긴 예술의 길은 시작되였다.      
 
예술의 길에서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가르침은 그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 되거라,  너의 손길 필요한 곳들에 아낌없이 손내미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 등 엄마의 가르침덕분에 변영화는 다른 사람을 돕는 한편 남의 도움을 받았고 그 도움에 감동받으며 사랑이 오고가는 법을 배우게 되였다. 또 “세상이 널 외면해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다만 쉬고있을뿐이라고 생각해라”, “잡고싶었던 너의 꿈들이 멀어져갈 때도 넌 할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일어나거라”  등 어머니가 해준 많은 조언들은 지금까지 변영화가 걸어가는 음악의 길에서 등대가 되여주고있다. 그래서 변영화는 “어릴 때부터 우리는 모녀이기전에 친구였다.   무슨 일 있으면 제일 처음 찾는 사람이 엄마였고 엄마는 모든 일들을 비밀처럼 묻어두는 속깊은 사람이였다”고 입버릇처럼 외운다.   

2004년 CCTV서부민가콩클에서 아직 등수를 내지 않았을 때 변영화는 어머니와 통화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딸에게 “등수에 들지 못하더라도 무대에 올라갔을 땐 꼭 환한 미소 띠우거라”고 귀띔해주었다. 또 CCTV전국청년가수콩클에서 단체시합에서 19등을 했을 때 어머니는 개인시합에 참가하기전 딸에게 “최종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해?”하고 물었다. 그러자 변영화는 인차 “웃기, 절대 승패로 영웅을 평가하지 않기, 웃기만 하면 나는 이기는거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금싸락같은 조언으로 하여 변영화는 어떤 큰일이 있어도 무대우에서만큼은 미소로 관중들을 대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작년 3월 15일 중앙텔레비죤방송국 공개홀에서 최종련습을 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전화에서 “오늘저녁만 할아버지와 눈물을 가슴에 숨겨라, 오늘 저녁만 관람객들이 모르게 아무일도 없는척해라”고 부탁하였다.

그날 변영화는 마음속으로 “관람객들에게 나의 제일 이쁜것만 보이고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무대가 있고 관람객이 있으면 나는 끝까지 노래부르리라”고 다짐했다.
무대우에서 하냥 미소를 지으며 환한 얼굴로 노래하는 변영화의 뒤에 어머니의 이런 고심이 담겨있었다.

자신심과 개성을 키워주신 은사님

성실하고 학습에 열중했던 변영화는 1996년도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예술학원 중등전문반에 입학하였고 그의 음악의 길에 제일 큰 영향력을 준 강신자선생님을 은사로 모시게 되였다. 

강신자선생은 긍정적인 삶을 개척하는분이였다. 수업시간마다 “잘하네! 이 소리가 좋다! 어제보다 진보한게 알리는구나…”며 자신심을 키워주었다.  그래서인지 변영화는 선생님앞에서 한번도 긴장한적이 없었다. 하여 선생님앞에서 마음껏 소리를 낼수 있었고 선생님은 이런 제자한테 잠재되여있는 찾기 힘든 그 무언가를 찾아내고 개척해주었다. 강신자선생은 변영화에게 “널 처음에 봤을 때 난 이미 너의 미래가 보였어. 무대배우보다 선생님이 되는게 너한테 맞을것 같았어. 그런데 무대에서 그렇게 자신있게 노래부르는 네가 참 보기 좋더라. 나도 기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신자선생은 또한 “예술인이 되기전에 먼저 사람이 되여야 한다.  언젠간 모든것들이 세월따라 떠나가겠지만 기억에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인품과 그 목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가”, “바다처럼 참을것, 하늘처럼 모든것을 포옹할것, 모든 사물에 감동할줄 알것, 이런 마음가짐이면 노래가 절로 나올것이다” 등 노래지도외에 예술인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강신자선생의 사심없는 지도아래 변영화의 노래수준은 눈에 띄이게 진보하였고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갖추게 되였다.  2000년 8월 17일, 변영화는  “제2기민족전통음악절 민요콩클”에서 소년부 금상을 수상하였고 그해 11월 13일에는 “한국전통 가, 무, 악 제전”에서 판소리 《심청리별가》를 불러 외국인부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01 년 8월 23일,  “제3기민족전통음악절 민요콩클”에서 전업부 금상을 수상하였다.

변영화는 “지금 무대에서의 그 모든것과 영예는 다 은사님이 주시였기에 나는 이렇게 그분하고 말하고싶다   나에게 지혜를 주신분, 내 그대보다 더 큰 세계를 개척할 자신이 있으니깐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포부를 밝혔다.

큰 변화를 가져온 대학생활 

2002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표연학부에 입학한 변영화는 자신에게 더욱 엄격히 요구하였는바 전업방면에서 남들이 아는것은 남보다 더 잘하기에 노력하고 남들이 모르는것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고 학습하였다. 표연학부의 학생으로서 전업적인것만 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그는 밤시간을 리용하여 부지런히 영어를 학습하였고 짬짬의 시간을 리용하여 피아노를 련습하고 조선족의 유명한 가야금전문가 김진선생을 찾아 가야금도 배웠다.  그는 김진선생한테서 배우는 과정에 전문가의 기교만 배운것이 아니라 그의 음악사상과 민족음악리론에 대해서도 깊은 리해를 가지게 되였다. 이는 그의 예술인지력과 예술적수양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대학 2학년때 변영화는 중앙민족가무단의 초청을 받고 가무프로공연에서 노래 《아리랑》을 불렀다. 이것을 계기로 2004년에 중앙민족가무단에서는 변영화를 독창가수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배움에 목말랐던 변영화는 과감히 사업의 유혹을 물리치고 학업을 선택했다. 그후 그는 공부하면서 중앙민족가무단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참가하였는데 해마다 30여차의 공연을 견지하였다. 아무리 공연이 많은 나날에도 변영화는 한가지 원칙을 지켰는데 그것은 바로 학생의 근본을 잊지 않고 공부를 잘하는것이였다.

변영화는 자신의 피타는 노력으로 각 방면에서 큰 진보를 가져왔다. 그는 2002년 8월, 제1기전국조선족성악콩클 민족창법시합에서 특별상과 3등상을 수상하였고 9월에는 중국국가민족위원회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조직한 “중국조선족가수콩클”에서 민족창법 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10월에는 한국 “세계한민족문화전통예술콩클”에서 은상을 수상하였고 연변대학으로부터 특수공헌상이란 영예를 받아안았다. 

2003년 10월, 남녕에서 열린 국제민요절 제2기중화민요콩클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2004년 1월에는 CCTV서부민요TV콩클에서 독창조 금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7월 CCTV에서 주최한 CCTV전국청년가수콩클에서 민요 은상을 수상한 변영화는  “중국 10대 원생태(原生 )가수왕”으로 불리우며 중국민요계에서 조선족의 영예를 떨쳤다. 당시 평심위원들은 우리 민족복장을 입고 노래를 부른 변영화를 두고 “한국련속극에서 금방이라도 내려온듯한 변영화가수의 〈아리랑〉은 관람객과 평심위원들의 눈과 귀를 번쩍 트이게 하였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변영화에게 마음껏 나래칠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선후로CCTV의 《민요, 중국》프로그램, 《동락5주》프로그램에 출연하였고 《등소평탄신100돐》,《세계민족박람음악회》  등 많은 대형무대에서 공연을 펼쳤으며 2007년에는 CCTV음력설야회에서 《축배가》를 불렀다.  CCTV의 많은 프로에 참가하면서 그는 “엄마가 볼수 있구나”,  “고향분들이 볼수 있구나”하고 자랑을 느꼈고 “조선족이 혼자여서 조금은 외롭더라도 잘해야지”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새로운 무대와 연구생도전

2006년에 대학을 졸업한 변영화는 중앙민족가무단의 독창가수로 배치받았고 9월에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공연연기 연구생으로 추천되였다.

변영화는 한맘한뜻으로 학업에 충실히했던 시절을 마치고 사업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조금은 서툴게 어정어정 걸었지만 모든 일들을 차곡차곡 침착하게 해나가면서 인생을 절로 만들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지금은 엄마와 선생님이 옆에 없어도 절로 결정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가고 해결할수 있게 되였으며 지도부로부터 침착하고 마음놓을수 있는 배우로 인정받고 동료들에게 조선족민요를 서슴없이 배워주는 “꼬마선생님”으로 사랑받고있다.

연구생공부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일은 론문을 쓰는것이였다. 변영화는 “론문의 최고경지는 가장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듣게 쓰는것이 우수한 론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연변대학예술학원 남희철교수가 3년간 기울였던 심혈과 지혜를 론문에 담아보려고 련속 며칠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그의 졸업론문은 마침내 통과되였고 그는 석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예술학교 소학반에 입학하여서부터 금년 석사과정까지 변영화는 장장 15년동안 배우고 또 배웠다. 자신이 걸어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그는 “예술의 길이 참 이렇게 힘겨운줄 생각지 못했다. 시작이 단맛이라면 과정은 쓴맛? 그 과정을 뒤돌아볼 땐 시쿤맛이라 할가? 그러나 선생님들이 앞깊을 비춰주었기에 예술탐구의 길은 외롭기보다 희열을 느낄수 있었다. 무대아래에서 10년 넘게 공부한것이 무대우에서 반짝이는건 단 몇분간이다. 곤난을 뚫고 희열을 보는 느낌 이것이 예술인생이 아니겠는가”고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또 “앞으로 긴장속에 흐트러지지 않고 화려한 꽃무대에 진정한 나를, 진정한 조선족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에 대한 애착감과 진정함을 탐색하는 동시에 용감히 권위에로 도전”하겠다면서 “그 어떤 곤난과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행복하게 삶을 개척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쾌락을 가져다주는 그런 삶을 살고싶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미소가 아름다운 변영화가 시원한 가창력으로 우리 민족 민요를 전지구촌에 자랑하고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리라 기대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룡정시문화관 관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리광평씨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민사 연구에 떨쳐나섰습니다. 그는 자비로 오토바이, 사진기,비디오 등을 갖추었습니다. 회갑나이를 넘긴 그가 수십킬로그람 되는 사진기재 들을 지니고 수만킬로메터를 달린다는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매년 ...
  • 2006-03-02
  • [한겨레] 재일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권투영웅’ 홍창수(31) 선수가 27일 세계 챔피언의 영광과 짐을 스스로 벗어던졌다. 홍 선수는 이날 세계복싱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도전자인 동급 1위 호세 나바로(24·미국)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꺾은 뒤, 타이틀 반납을 선언했다. 그는 “...
  • 2006-03-01
  • [img count='1' width='400' img] 28일 2005전국10대법관으로 당선된 연길시 인민법원집행국부국장 비운룡이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 2006-03-01
  •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 단주앙번 일가견 기자는 25일 오후,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이며 현재 북경민족대학박사생 도사, 2년간 운남성 성장조리직을 맡았던 단주앙번(장족)을 만날수 있게 되였다. 3년전 처음 연변을 다녀온적이 있는 그는 먼저 연변조선족의 미풍량속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특히 《...
  • 2006-02-28
  • 26일, 최고인민법원, 인민일보, 중앙텔레비죤, 법제일보에서 련합으로 주최한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평의활동이 북경에서 있었다. 연길시인민법원 형사재판정 부정장 비운룡이 2005년 길림성10대 우수법관에 이어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으로 평의되여 최고인민법원 원장 소양으로부터 《금법추상》(金法槌奖)을...
  • 2006-02-28
  • [한국일보 2006.02.26 18:19:24] “그는 한 많은 이국 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2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젠덴쓰(全電通)노동회관에서 지난해 12월 28일 타계한 재일동포 고 김경득(金敬得)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한국인과 일본인, 민단과 조총련을 가리지 않고 회장...
  • 2006-02-27
  • [원제: '신선족'으로 중국서 떳떳이 살고싶다] -흑룡강지역 첫 한국류학생 김재윤씨 최근년간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 많아지면서 '신선족'이라는 신조어가 동포사회에서 류행되고있다. 한국 웹사이트인 네이버 오픈사전에 따르면 신선족을 "류 학, 현지 근무 등의 명목으로 중국으로 건너왔다가 아예 중국땅에 눌러앉아 살...
  • 2006-02-27
  • 국내 최장기 연재 집필 이규태 떠나다 [조선일보 2006-02-25 22:03]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73) 전 논설고문이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본지에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
  • 2006-02-26
  • 얼마전에 연변의 한 문학지가 마련한 모임에서 성보호텔 정영채회장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여러 말이 오간 가운데 연변은 일본, 한국과의 물류관문으로서 장차 동북아물류중심이 될 복된 고장이라는 얘기와 더불어 지금은 문화인들이 어렵지만 이렇게 어려움속에서 성취를 해야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정회장의 말씀이 인상...
  • 2006-02-24
  • 민족력사에 혼 앗긴 리광인씨 《잠적》 10년동안에도 수백만자 력사서 써내 력사학자 리광인씨한테서 도합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한국학술정보[주])를 받아든 기자는 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느낄수 없었다. 《남성편》(1, 2권), 《녀성편》, 《소년아동편》으로 묶어진 책은 총 125만자, 140편의 전기가 수...
  • 2006-02-2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