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심양신홍목업 량비호총경리의 창업사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7월16일 16시06분    조회:760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밥상과 맺은 인연 

   전통적으로 구들문화를 고수하며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의 밥상 또한 독특한 특징이 있다. 테이블형이 아닌 구들에 앉아 식사하기 편하도록 앉은뱅이형이다. 다년간 우리 민족 전통밥상생산에 종사해오며 회사를 탄탄하게 꾸려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심양신홍목업 량비호총경리이다.

  량비호씨의 창업사는 전형적인 자수성가의 가시덤불길, 피와 땀으로 성공의 터전을 일구고 가꾸어오고있다. 흑룡강성 녕안태생인 비호(48)씨는 아버지가 3살에 사망하고 어머니가 재가해가는 바람에 할머니손에서 고생스레 잔뼈를 굳혀야 했다. 겨우 소학교 5학년을 마치고 할머니일손을 돕던 그는 철이 들며 무엇인가 배워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1981년에 자비로 연길공예미술학교 가구반에 입학해 목공기술을 익혔다. 졸업후 1983년에 고향에다 공예미술작업소를 앉히고 각종 완구를 만들어 팔았는데 편벽한 고장이다보니 매상고가 별로 오르지 않아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1985년에 연길로 자리를 옮겨보았지만 매상고는 크게 오르지 못했다. 연길에서 6년간 그는 갖은 고생을 다 해가며 돈을 벌어보겠다고 발버둥쳤다.
  장사를 하자면 그래도 큰 도시에 가야겠다고 벼르는데 심양에 사는 한 친척이 심양에 오면 저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주겠다는것이였다. 1993년 그는 만들어놓은 완구 한차를 싣고 무작정 심양으로 왔다. 함께 일하던 처남 둘과 직원 5명이 죽을 먹어도 함께 먹자며 따라나서 그의 가족까지 일행은 13명이였다.

  심양시 동릉구 마관교일대에 세집을 잡고 가져온 완구들을 처리하려고 심양오애시장에 나간 비호씨는 억이 막혔다. 이곳의 동류제품가격이 엄청나게 싸 자기제품으로는 근본 경쟁상대가 될수 없었던것이다. 제품을 헐값에 넘기고 돌아온 비호씨는 연길에서 따라온 직원들을 설복해 돌려보내고 생계를 위해 김치장사에 나섰다. 한동안 지나 자리가 잡히자 김치장사는 안해와 처남에게 맡기고 자신은 구두수선가게를 차렸다.

  어느날 비호씨는 서탑에 오게 되였는데 골목길에서 조선족밥상을 파는 안로인을 보게 되였다. 묘하게 피가 끓는 기분이였다. 안로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며 자신도 목공재간이 좀 있는데 밥상을 만들어 납품할수 없느냐고 하니 안로인이 얼마든지 가져오라는것이였다. 값은 개당 30원으로 정했다. 집에 돌아온 비호씨는 구두수선가게를 때려치우고 사방에서 낡은 목재를 구입해 이틀사이에 밥상 4개를 뚝딱 만들어 인력거에 싣고 서탑으로 갔는데 그 안로인은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값을 깎으려드는것이였다. 화김에 넘기지 않고 혼자 팔려고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웬 키가 자그만한 조선족량반이 다가와 흥정을 걸며 자기에게 개당 30원씩 넘기라는것이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기와 거래하자는것이였다. 역시 되거리장사군이였다.

  판로를 확보한 비호씨는 밥상을 판돈으로 목재를 구입해 두번째로는 밥상 6개를 만들어 그 사나이에게 개당 40원씩 넘겼다. 두차례에 밥상 10개를 넘기며 비호씨는 밥상의 시장전망을 강하게 느낄수 있었다. 그는 처남 둘과 목공소를 차리고 안해도 김치장사를 걷어치우고 서탑골목에 밥상가게를 차리게 하였다. 세번째로 밥상 25개를 생산해 시장에 내놓았는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에 신심을 가진 그는 목공공장을 본격적으로 차리기로 하고 마관교부근에서 터가 넓은 단층집을 구입해 마당에 담장을 치고 간이건물을 지어 공장을 가동, 처남 둘에 고향에서 목공재주가 있는 일군 4명을 불러다 밥상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월생산량이 300-500개에 달하게 되였다. 서탑가게에서 판매하는외 인력거에 싣고 심양부근 조선족마을들을 돌며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3년간 분투하니 점차 기반이 잡히고 소문이 나 그들의 밥상을 도매하러 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1997년 그는 동릉구 장백향부근에 진출한 한국밥상공장을 처음으로 견학하게 되였는데 눈이 번쩍 띄였다. 순 목재로 생산하는 그들의 밥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목재로 생산하는 전통밥상은 우선 무겁고 이은 자리가 잘 갈라져 보기에도 초라한데 복합재료로 생산하는 한국밥상은 웃면이 통면이고 가볍고 견고했다. 한국에서 수입한 합성옻칠재료를 사용해 보기에도 산뜻하고 칠도 오래갔다.

  비호씨가 한국식밥상공장으로 거듭나야 하겠다고 고민하고있는데 장백향의 그 한국사장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공장을 경영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설비와 원자재들을 인수해줄것을 요청하였다. 교역은 쉽게 성사돼 비호씨는 한국식밥상공장을 꾸릴수 있는 조건을 구비, 복합재료를 사용하고 수입제옻칠을 하는 한국식밥상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월생산량이 3,000개에 달해도 시장수요를 만족시킬수 없었다. 심양지역외 북경, 상해, 청도, 위해, 장춘, 할빈, 연길, 광주 등 조선족이 진출한 지역에는 모두 주문이 들어왔다. 전국적으로 170개의 거래처를 확보할수 있게 되였는데 제일 많이 주문이 들어오는 지역은 연길시(월 평균 1,000개)요, 제일 먼 곳의 거래처는 신강 우룸치시이다.

  2002년 비호씨는 신민시 호대진 신홍촌의 학교건물을 구매해 공장을 이전, 터가 넓어 설비들도 많이 늘일수 있어 생산능력이 크게 올라 년간생산량이 3-4만개에 달했다. 규모화생산이 이루어지며 품질도 갈수록 좋아져 2002년부터 한국오다를 받기 시작, 월평균 5개 컨터이너, 1만2,000개씩 수출해오고있다. 신민공장으로는 생산수요를 만족시킬수 없어 비호씨는 지난해 동릉구 왕가향의 “신발성”안에서 3,000평방메터짜리 건물을 임대해 350여만원의 설비투자로 신공장을 설립, 주로 한국수출품을 생산하고있다. 국내판매용제품을 생산하는 신민공장의 월생산량이 3,000-4,000개, 왕가신공장의 월 생산량이 1만5,000개에 달한다. 상종류도 교자상, 6인상, 4인상, 3인상, 커피상, 차상, 둘레상, 막상 등 45가지에 달하고 디자인 및 색상이 70여종에 달한다.

  공장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기술력이 제고되며 비호씨 마음속에는 한가지 강력한 욕망이 꿈틀대고있는데 그것은 한국 본토에 조립공장을 설립하는것이다. 제품브랜드를 “메딩차이나”로 하니 한국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고있는 실정, 한국 본토에 조립공장을 세워 반제품을 가져다 조립해 “메딩코리아”브랜드화를 실현하면 값을 적어도 20%이상 더 받을수 있다는게 비호씨의 설명이다. 하물며 현재 한국에서 불경기임에도 월평균 각종 상을 1만5,000개씩 수출하는 상황에서 금후 한국경제가 호전되면 수출물량은 엄청나게 늘어날수 있는 전망이다.

  그간 창업에 몸을 담고 설비개조와 생산, 판매에 전력하다보니 사회활동과 담을 쌓고 지냈다는 량비호씨, 지난해부터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에 가입해 부회장직을 담임하고 월드 옥타 심양지회에 가입해 조선족사회활동에 참석하며 시야가 넓어졌다고 하였다. 그간 공장소재지인 신홍촌로인협회활동을 후원해오고 홍가포조선족소학교도 많이 도와왔지만 “협회”에 가입한후 조선족사회활동후원에 동참하며 보람을 느끼게 되였다고 하였다.  
    
    리덕권기자

    료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쓸쓸한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려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시작은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였다. 중국 옌볜에서 양팔이 없는 지체장애인 최금호씨를 사계절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담았다. 방송은 반응이 좋았지만 김광호 감독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싶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다큐멘터리에서 ...
  • 2008-07-04
  • 창립 4주년맞은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 대표 김해성 목사 ‘크레파스와 물감에 살색을 없애야....’ - 차별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진료 제공“감사하고 또 눈물이 납니다”국내에 하나뿐인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에서 만난 중국 심양이 고향인 김혜숙(52, 여)씨.김씨는 한국에 건너와 애기를 돌...
  • 2008-07-04
  • —현장총지휘 리종환씨를 만나 온몸으로 열심히 지휘하는 리종환씨,  그의 지휘하에 1만명도 훨씬 넘는 무용배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리종환씨는 이번에 자원봉사자로 나서 현장총지휘를 맡게 되였다. 연변군중예술관 부관장으로 대형행사때마다 총연출의 중임을 떠메였던 리종환씨는 퇴직한 몸이지...
  • 2008-06-29
  • 목단강지구 문과장원 - 외교관이 되고싶어요 대학입시 시험에서 659점의 성적, 흑룡강성 문과 장원의 663점 보다 4점이 떨어지는 성적을 따낸 해림시조선족중학교 고3-2반의 남홍옥학생이 목단강지구 문과 장원석에 올랐다. 《어제 저녁 동창들로부터 저의 시험성적을 알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해 기뻐 했는데...
  • 2008-06-28
  • 환자의 아픔은 곧 의사의 아픔입니다연변대학병원 중의과 김향숙주임의 진찰권을 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 기다려야 겨우 뗄수 있다고 한다. 진찰권이 긴장하다는것은 그만큼 의술이 높아 환자량이 많음을 의미하지만 김향숙주임의사는 "환자들이 병원의 지명도를 보고 찾아온것이지 저 개인을 보고 온것이 아닙니다&q...
  • 2008-06-27
  • 《떼떼부부》가 며느리를 보게 되였다. 즉 《작은 떼떼》가 사귀는 녀자친구를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시키러 온다. 그런데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며느리감을 보고 왕청같은 말들을 늘여놓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는 며느리감을 보고 말한다는것이 로친한테 대고 말한다. 그래서 김광철은 난처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사리밝고 례...
  • 2008-06-15
  • 2년에 국가특허발명 5건 농민발명가 천해룡(53세)씨는 다년간 모색과 연구끝에 지난해와 올 상반년짧은 2년여 기간 ‘다기능 비누곽’, ‘정량분유채취기’ 등 국가발명특허를 3건 획득하고 2건은 현재 신청 출원중에 있다. 흑룡강성 오상시 광휘향의 조선족 농민 천해룡씨는 지난해 5월 ‘다기능...
  • 2008-06-14
  • 박민자 연변가정연구소 소장 통일의 밑거름으로 조선족 활용 기대  “조선족의 중국 이민정착사는 150년이다. 만주 땅을 개간하고 중국을 건설하는데 기여하여 당당한 중국국민의 위치를 확보했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산업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코리안드...
  • 2008-06-13
  • "의사는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또 배운 리론지식과 실제경험들을 관통시켜야만이 진단의 정확률을 높일수 있다"고 늘 얘기하는  연변대학병원 소화내과 주임 박희서는 시골 아저씨와도 같은 소박하고도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평소 환자를 진찰하거나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할 때도 항상 차근차...
  • 2008-06-13
  • 중국관계자 중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난 두 차례의 한중올스타전 때 중국 올스타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방복순(69) 통역이었다. 방 통역의 한국과 인연은 벌써 18년이 넘어간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는 되지 않았지만, 스포츠 교류는 있었던 90년 김학영 국제심판과 중국인 심판의 가교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
  • 2008-06-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