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작가 김례호씨의 "외도"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6월2일 09시29분    조회:757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김례호씨의 본직이 작가가 아니고 보면 작가로 되기까지 그가 외도했음이 분명하다. 외도로 작가의 신분을 얻은 그가 또 어떤 외도를 했을가? 이에 대한 답을 풀기전에 김례호씨의 외도에 한해서 화제가 다양함을 밝혀둔다.

   김례호씨는 끼가 많은 사람으로 그가 있는 곳에는 웃음소리가 그칠새 없다. 그가 하는 익살과 모델쇼에 빠져 배를 그러안고 웃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느끼지 못하고 이튿날까지 배근육이 저려나는 정도다. 술상에서 김례호씨가 제일 사랑하는 “애인”은 춘향인데 이때 혼쭐나는 년은 향단이밖에 없다. 향단이가 김례호씨의 호통에 이리저리 불려다니다보면 취흥은 어느새 고조에 올라있다.

   김례호씨를 만나 함께 어울리다보면 자주 이런 저런 충동에 사로잡히군 한다. 김례호씨의 멋진 서예작품을 보면 순간 서예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고 안목이 예리하고 통쾌한 잡문을 보면 작가가 되고싶다는 생각이 갈마든다. 다재다능이란 김례호씨를 두고 하는말이 아닌가싶다.

   김례호씨는 본직이 교원이다. 1976년 교육사업에 몸담고부터 1995년까지 20년동안 철령시 요보진 우의학교에서 일반교원, 소선대보도원을 거쳐 교도처주임을 력임했다. 1996년 철령현교사진수학교에 전근되여 10년간 민족교육교연원으로 사업하다가 지금은 예체부(??꼬)주임으로 교육사업에서 고봉을 맞고있다. 30여년동안 철령시교육사업에 대한 그의 공헌은 수차에 달하는 수상경력에서 보아낼수 있다. 철령시민족교육선진개인칭호를 보유하고있는 김례호씨는 성급은 차치하고 국가급교육론문 1등상을 5차나 수상하였으며 성급이상 잡지와 신문에 23편의 교육론문을 발표하였다.
            
김례호씨의 “외도” 하나ㅡ판소리의 외길에 들어서다

   판소리는 우리 민족 음악의 한 종류로 대중음악과 류행음악의 충격속에 민족사명감을 지닌 몇몇 음악가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어렵게 전해져내려오고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말 조선민족의 판소리가 철령시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뒤를 이어 올해 료녕성무형문화재로 등록되며 김례호씨가 료녕성무형문화재 조선족판소리의 전승인으로 선정, 판소리의 외길을 이어가고있다.

   솔직히 김례호씨의 목청은 여느 가수들처럼 아름답거나 감미롭거나 또는 청중들을 잡아끄는 자성이 있는것이 아니다. 음악의 천성을 타고나지 않은 그가 판소리의 외길에 들어서게 된것은 우연이였다.

   어렸을적 김례호씨의 이웃에 김영신이란 로인이 살고있었는데 김영신로인은 늘 한편으론 새끼를 꼬면서 한편으로 판소리를 부르군 하였다. 김영신로인이 판소리를 부를 때마다 어린 김례호씨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에 빨려들어갔는데 그 판소리를 듣기 위해 김례호씨는 어른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새끼를 꼬군 하였다. 당시 김례호씨는 그것이 바로 판소리인줄 몰랐다. 기억력이 좋은 김례호씨는 8, 9세때 김영신로인을 모방하여 판소리를 불렀는데 마을사람들은 듣기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1982년, 30고개를 넘어선 김례호씨는 철령시조선족들의 모임에서 당시 철령현문화관에서 사업하던 홍화봉씨가 판소리를 부르는것을 듣고 너무 귀에 익숙하여 그를 따라 함께 불렀다. 자기를 따라 부르는 김례호씨의 판소리를 듣고 홍화봉씨는 당장에서 김례호씨의 목소리가 판소리에 아주 적합하다고 하였다. 그때는 이미 자습을 통해 판소리에 대해 일정한 료해가 있는지라 김례호씨는 즉시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홍화봉씨도 기본을 갖춘 김례호씨가 마음에 들어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때로부터 김례호씨는 매주 일요일마다 홍화봉을 스승으로 모시고 판소리를 계통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하루빨리 판소리의 기본기술과 창법을 익히기 위해 매일 퇴근후에 마을에서 3, 4리 떨어진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련습에 련습을 거듭했다. 한주일이 안되여 목이 부어나고 목소리가 쉬더니 말하기조차 어려웠다. 결국 목청이 터져 피가 나자 홍화봉씨에게 한동안 휴식할 의향을 밝혔다. 하지만 홍화봉씨는 “지금 이 시기에 쉬면 안된다. 농사일을 할 때 손에 물집이 생기면 터치고 피가 나더라도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견지해야 하듯이 목에 피가 나는것은 자연현상으로 이때 쉬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김례호씨는 처음 두달동안 목에 염증이 생기고 온몸에 열이 나서 몹시 괴로웠지만 용케도 버텨냈다.

   몇달후 홍화봉선생은 옛날 판소리민간예인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폭포수밑에 가서 련습하는것을 필수관문으로 여겼는바 귀에 자신의 목소리만 들려야지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진정한 판소리예인으로 승인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례호씨는 고민끝에 련습장소를 기차길옆에 정했다. 기차가 지나가며 고동을 울릴 때를 맞추어 큰소리로 판소리를 부르며 기차의 고동소리로 폭포소리를 대신했다.

   판소리는 악보가 없이 전적으로 스승의 전수에 의해 전해지는 특수음악이다. 김례호씨의 소개에 따르면 스승마다 자신의 기억에 근거하여 구두로 전수하기에 자연적으로 미세한 변의현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노래과정에서의 변의현상은 같은 판소리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다를수 있으며 한 사람에게서도 장소와 정서에 따라 불가피하게 생겨난다. 악보가 없어 음절의 변화를 장악하기 매우 어려운바 김례호씨는 단 5분간의 노래분량을 한주일내지 두달동안 반복적으로 련습해서야 장악할수 있었다. “틀렸다!”는 말이 스승의 입버릇이 됐을 정도다. 김례호씨가 판소리에 혼신을 다하는것을 보며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한 홍화봉스승은 한글자 한글자, 한구절 한구절씩 정성을 대해 가르쳤다.

   하지만 판소리에 미쳐있는 그를 두고 가정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가정일에 손 하나 대지 않고 매주일마다 철령시로 오가는 차비도 적지 않게 들어 할아버지는 판소리를 해서 밥이 나오냐며 호통이셨다. 마누라도 지금 사람들 모두 류행가를 듣기 좋아하지 판소리를 듣는 사람도 없어 앞으로 판소리를 아무리 잘 불러도 무대가 없으니 포기하라고 간청하였다. 결국 그는 가정의 의사에 따르기로 하였다.

   “당시 제가 판소리를 그만둘 의사를 스승님에게 말했을 때 선생님은 몇분간 말없이 있다가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점심을 같이 하자는것이였어요. 만약 당시 선생님이 저를 만류했다면 저는 긍정코 포기했을거예요. 당시 나는 밖에 나가 산보할 심정은 없고 머리속에 온통 어떻게 선생님의 만류를 거절할가 하는 생각뿐이였어요.”

김례호씨의 회억에 따르면 그날 점심식사를 할 때 홍화봉씨는 판소리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고 술만 자꾸 권하다가 불현듯 “내 앞에서 사라져라!”고 했단다. 김례호씨는 처음으로 선생님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도 생각밖이여서 선생님에게 원인을 물었더니 선생님은 “네가 나한테서 판소리를 배우는것에 대해 나는 시종 감사하게 생각하고있다. 요즘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는 민족음악을 배우려는 사람이 별로 없고 많은 노래가사들도 상실되여가고있다. 나는 나에게서 판소리가 사라질가 근심하던중 너를 만나 행운이라 생각했었는데 네가 그만둔다니∼”하며 말끝을 흐리였다. 그날 김례호씨는 몹시 슬퍼하는 선생님한테서 큰 감촉을 받았다. 그는 판소리를 포기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끝까지 견지하려고 굳게 다짐했다.

   판소리를 위해 근 20년동안 피워온 담배까지 끊으며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은데서 김례호씨는 현재 국내에 류전되여 내려오는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등을 류창하게 부를수 있으며 올해 료녕성무형문화재 조선족판소리 제4대전승인으로 등록되는 영예를 받아안았다.

   김례호씨의 “외도” 둘ㅡ작가의 유혹에 빠지다

   작가 김례호씨는 료녕문단에서만큼은 유명짜한 인물이다. 1987년에 설립된 심양시조선족문학회의 초대회원인 동시에 다산은 아니지만 그의 “외도” 기질에 어울리게 소설, 수필, 잡문, 평론에 이르기까지 문학재능을 과시해오며 지금까지 139편의 부동한 장르의 문학작품을 발표하고 “압록강문학상”을 4차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있다.

   김례호씨는 자신이 작가의 길에 들어선데는 같은 철령시에 살고있는 강재희소설가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1980년초의 어느날, 강재희란 이름 석자가 박힌 소설을 료녕조선문보에서 읽게 되였는데 그 소설을 읽으며 자신도 그런 소설을 쓸수 있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리곤 그길로 작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 마침내 1982년 자신의 이름 석자를 활자화했다.

   최근 김례호씨는 잡문창작을 위주로 하며 저명한 시인이며 평론가였던 박화선생이 떠나간후 료녕문단에 평론가가 없는 공백을 메울 일념으로 문학작품평론에 심혈을 몰붓고있다.


    김례호씨의 “외도” 셋ㅡ서예의 매력에 취하다

   1991년 작가 김례호씨는 서예의 매력에 취해 서예공부를 시작한다. 여유시간을 리용하여 남의 필체를 모방하면서 글씨련습을 하는 한편 조선족들의 환갑잔치나 각종 회의에 사용되는 현수막을 무료로 써주었다.

   김례호씨는 단천 김호근의 우리 말 서예작품에서 계발을 받고 자기만의 독특한 필체를 형성하려 고심, 2000년부터 드디여 자신의 필체가 형성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필체는 주로 서체로 필법이 자유분방하고 획과 획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교묘하게 조합되는것이 특징이다.

   1994년 철령시조선족민속절에 내놓은 서예작품이 1등상을 받은 뒤를 이어 국가급 1등상 3차 수상하였으며 각종 신문과 잡지에 서예작품 수십점을 발표하였다.

   “서예는 판소리나 작가의 길에 정신적인 자양분을 제공하고있다. 판소리를 하다가 목이 아플 때나 글을 쓰던중 머리가 아플 때 붓만 들면 향기로운 묵향과 함께 심신이 맑아진다. 붓끝에 정신을 집중하다보면 어느덧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게 되는데 마지막 획을 긋고나서 붓을 내려놓는 순간 마음이 그처럼 개운할수가 없다.”

과연 서예의 진수를 터득한 고수다운 말이다.

 이제 퇴직을 3년 앞둔 김례호씨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가슴속의 소망 하나를 털어놓았다. 퇴직하는 즉시 우리 민족 판소리를 판소리전승인답게 “외도”의 길이 아닌 본직으로 하고싶다고. 판소리의 진수를 후세에 남겨주기 위해 조건이 된다면 한국에 나가 판소리를 계통적으로 배우고싶다고. 필자는 그의 소망이 머지 않아 현실로 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인터넷료녕신문 김창영 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 매편의 기사 모두 작품처럼] 《훌륭한 기자, 편집이 되려면 우선 신문사업이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사업이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문화대혁명》이전부터 신문 기자, 편집 사업을 해온 김경석선생은 신문사업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기자, 편집을 하기 어렵다고 력설한다. 김경석선생은 1960년 연변대학 조선언어문...
  • 2005-11-09
  • 중앙 1호문건이 시달되자 농민들의 농사열정이 크게 제고되여 왕년에 버려져있던 묶은 경작지마저 다시 부치고있다. 그런데 경작지 면적에 비해 농촌의 로력이 딸리여 농망철이 되면 모두가 인력난으로 쩔쩔매고있다. 이를 감안한 화룡시 투도진 룡원촌 제2조의 황명선 촌민은 대담하게 7만 5000원의 돈을 들여 종합수확기 ...
  • 2005-11-08
  • [원제: 중국 진출 선진기술 앞세워라] 중국 진출 4년만에 발을 붙였다는 소문을 듣고 방문을 갔더니 대화 첫 머리부터 “중국은 시장이 큰만큼 기회도 많지만 그래도 진출시에는 반드시 선진기술을 앞세우고 들어 와야 한다”며 총화발언을 하는 김인규사장, 그는 건축도료 전문회사인 장춘(주)코미톤건자재유한회사의 주인...
  • 2005-11-08
  • [원제: 인생은 끝없이 일하면 사는것]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큰 사업이 아니더라도 창업이란 얼마나 신고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있다. 그리고 우리는 쉽사리 창업의 마음을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넉넉한 퇴직금에 자식들마저 잘 되고있어 아무런 뒤근심이 없다 할수 있는 퇴직자가 창업에 뛰여든다면 리해를 하지...
  • 2005-11-08
  • 상해 미술 전문학교 우등졸업 한낙연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당시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이란 큰 목표 아래 국공합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한낙연에게 상부로부터 특별한 임무가 부여됐다. 그것은 국민당에 위장 입당해 대외적으로는 국민당으로 활동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중국공산당당적은 비...
  • 2005-11-07
  • 10월 21일 오전, 도문시 량수진 량수촌 21촌민소조의 조장 문영금씨로부터 시동생 최동원일가에 대한 소개를 듣고 그들을 찾았다. 《정말 그들처럼 착실하게 살면 외국에 돈벌러 가려고 아득바득 할 필요가 없습니다.》 량수촌권복순서기도 문영금조장의 말에 동을 달았다. 《부부가 손잡고 올해 논과 밭을 5헥트를 다루고있...
  • 2005-11-07
  • [원제:12살 연변소년 리소명 하버드대학생으로]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 꿈, 올 대학입시서 660점 6월에 있은 전국고등학교입학통일시험에서 12살밖에 안되는 연변조선족소년 리소명이 66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따낸 뒤 7월 그리고 8월에 있은 2차례의 하버드대학 중국류학생선정시험에서까지 계속 우수한 성적을 확보해...
  • 2005-11-07
  • [원제:비룡실업의 진로밑에 깔린 《문화감각》] 박성룡총경리의 남다른 속궁리를 적어본다 1997 년 3 월18 일에 중국광전부의 허가를 받고 길림성광전청에서 전문 국내외 위성설비판매설계설치허가증을 취득하여 설립된 길림성비룡실업유한회사(간칭)는 현재 중국내에서 유일하게 국내외위성방송설비 판매, 설계,설치, 권한...
  • 2005-11-05
  • [원제:력사를 알아야 자존심 지킨다] [img count='1' img] 20여년간 조선인혁명가들을 조사연구해온 최룡수교수를 만나 9월중순, 길림대학 조봉빈교수로부터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가 쓴 글을 받았는데 그것은 혁명과 예술을 결합시킨 한락연의 사적을 담은 글이였다. 그 글에서 우리 민족혁명가들의 사적을 발굴하기 위해 ...
  • 2005-11-05
  • [원제: 79세로인 웅변대회에 참가해] 발표시간: 2005-11-03 오후 3:33:10 주당위 선전부 문명판공실에서 주최한 전주 선진사적 웅변대회가 어제(2일),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있었습니다. 이는 올해 67세에 나는 훈춘시교육국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인 량조희가 전주 선진사적 웅변대회>에서 한 말입니다. 전...
  • 2005-11-0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