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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화 생활고를 헤쳐온 대중가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5월22일 08시44분    조회:7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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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자의 과거가 비참할수록 행복하다.” 한국련속극에 나오는 이 대사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예술인이 있다. 가요 “모두다 갔다”, “인생살이”, “금이야”, “마음부자 제일부자” 등 노래를 불러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안은 대중가수 최승화, 신물나는 가난살이를 딛고 갖은 고생을 이겨내며 오늘날 사랑받는 가수로 성장하기까지 그의 삶에는 파란 많은 사연들이 깃들어있다.

가난살이와 싱갱질하던 학창시절

1972년 12월 27일 훈춘현 하다문향 하산촌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5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최승화는 1979년에 마천자향 고태촌에 이사해 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가난한 살림이라 학창시절 그는 한번도 새 만년필을 써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형님들에게서 물려받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다녔는데 하루건너 바퀴가 터졌을뿐만아니라 자전거가 어찌도 낡았는지 자물쇠를 잠그지 않아도 도적맞힐 념려가 없을 정도였다. 가난이 의욕을 불러일으켜서였던지 당시 학습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반장으로  활약하면서 남다른 노래기질도 드러냈다. 하지만 그때 학교에 음악교원이 없었는지라 교원들은 그를 데리고다니며 노래를 배워주군 하였다. “6.1”아동절이 되면 그가 다니는 농촌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며칠씩 방학시켰는데 그때면 그는 논밭에 가서 모내기를 하는 집식구들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아동절을 맞아 행복하게 뛰노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군 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후 부모님들은 그의 출세를 위해 훈춘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학창시절 그는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과외애호로 록음기를 틀어놓고 노래듣기를 즐겼다. 고중시절에 있은 “12.9”활동에서 그는 “교정의 종소리”를 불러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공연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자 동창생들은 모두 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때 그의 꿈은 가수로 되는것이였다.

매번 방학이 되면 그는 살림에 보탬하려고 아침 일찍 얼음과자를 도매해서 자전거뒤에 싣고 탄광마을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동네에서 유일한 고중생인 그였지만 얼음과자를 판다고 난처하거나 부끄러운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삥궐( 棍)”이라는 소리는 그렇게도 잘 나갔지만 “쒜고(雪 )”라는 소리는 목에 걸려 잘 나가주질 않았다. 가끔 살림이 곤난한 애들을 만나면 그는 자신을 생각하고 남의 일 같지 않아 얼음과자를 한두개씩 쥐여주기도 했다. 저녁녘이 되여 얼음과자를 죄다 팔게 되면 흐뭇한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렇게 한달동안 고생한 보람으로 그는 100원이란 순수입을 손에 쥐게 되였다. 그가 그 돈을 어머니에게 드리자 어머니는 “너는 여태까지 한번도 새옷을 사입어본적이 없는데 네가 번 돈으로 새옷이나 한벌 사입어라”고 했다. 그때 새옷을 사입은것이 학생시절 제일 신나는 기억으로 남게 되였다. 또 식당이라 하면 어른들만 다니는 장소로 알고있었던 그는 고중시절 동창생이 청해서 처음으로 식당에 가서 개고기국밥을 먹으면서 나이가 어려도 식당에 다닐수 있다는것을 알았다.

가수꿈을 펼치기까지

1992년에 최승화는 할빈 창녕예술단에 시험쳐 합격되였다. 그러나 훈춘에서 교원사업에 종사하는 그의 누님은 헛된 생각을 버리고 공부에 전념하라면서 통지서를 찢어버렸다.

1993년 대학시험을 앞둔 3개월전 모 사립극단에서 학교에 찾아와 노래가수를 모집할 때 최승화는 그들의 눈에 들어 다른 애들과 함께 연길에 모여 기차역에 있는 개인려관에 투숙했다. 그런데 단장이 오지 않은데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 주숙비를 갚지 못하게 되자 려관주인은 그들을 려관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여러끼니를 굶게 되자 배가죽이 뒤잔등에 붙을 지경이였다. 그때 한 친구가 가만히 빠져나가 연길에 있는 언니네 집에 가서 밥을 지어왔다. 밥반찬이 없는지라 모두들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겨우 20전밖에 안되였다. 그들은 그 돈으로 생파를 사다가 반찬으로 하면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는것이 알리지 않았다. 그래도 저녁에 먹을 밥은 남겨야 했다. 결국 과식은 불식이라고 그날 저녁 그들은 배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그가 동창생들과 만나 이 말을 할라치면 누구도 믿기 어려워한다. 후에 단장이 와서 함께 장백현으로 훈련을 떠났다.  그런데 반년후 그만 극단이 해체되는바람에 그는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고말았다.

집에 돌아오니 대학시험은 이미 지났는지라 앞길이 막막해 고민이 태산같았다. 그러던차 1994년에 친구가 찾아와 연길로 가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했다. 최승화는 사돈한테서 돈 50원을 꾸어가지고 무작정 친구와 함께 연길로 떠났다. 그렇게 찾은 곳이 남자복무원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내붙인 “아왕노래방”이였다. 지배인이 무슨 특장이 있는가고 물어서 노래를 부를줄 안다고 했더니 지배인은 그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고난 최승화는 10원씩 하는 려관방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1원짜리 떡을 사들고 강뚝에서 먹으면서 지배인과 약속한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되여 지배인을 찾아갔더니 당장 출근하라는것이였다. 이렇게 노래방에 출근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층집문에 발을 들여놓아본 최승화, 그무렵 그는 24살나이에 처음으로 연길에서 랭면을 먹어보았다.

최승화는 복무원일을 하는 한편 손님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고 근무시간외에는 노래방의 기계를 리용하여 노래련습을 했다. 착한 마음씨로 해서 노래방에 드나드는 깡패들도 무리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주먹을 날렸지만 최승화만은 때리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서로 보호해주었다. 노래방의 엄경리도 중국음악학원에서 연길에 학원모집을 왔을 때 농망기에 있는 최승화의 부모님들이 학부형회의에 참석할 겨를이 없자 자기가 대신 참석했다. 역시 사람이 착하면 그만큼 보답이 있는가보다.

얼마후 최승화는 대련청사무도청에 가서 본격적으로 노래가수로 등장했고 3개월후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후 라지오노래자랑에 참가했다가 그곳에서 황상룡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는데 그 만남을 인연으로 간주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스승으로 모시고 노래를 배웠다.

1995년쯤부터 나이트클럽들이 하나둘 도태되자 최승화는 자비로 재정학교를 다니면서 과외시간이면 혼례청에 가서 노래를 부른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그후 생활의 핍박을 느낀 최승화는 북경에서 명태장사가 잘된다는 말을 듣고 마른 명태를 한주머니 지니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트럭으로 명태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는 명태를 팔기 힘들었다. 그가 투숙했던 려관의 지배인은 명태가 냄새를 풍긴다면서 그를 내쫓다싶이했다. 별수없이 그는 얼마전에 면목을 익힌, 북경에서 기업을 운영하고있는 한 동북사람을 찾아가 명태를 그 사람의 창고에 보관하고 자기는 그 사람의 자전거를 빌려타고 다니면서 명태를 팔았다.  하지만 절반도 팔지 못한데다 또 적잖게 도적맞히다보니 겨우 돌아올 차비밖에 되지 않았다. 첫장사에서 실패한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길에 돌아온 최승화는 저녁에는 호텔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튿날 아침에는 다시 그 호텔로 육포를 팔러 다녔다. 그때 그는 길옆에 붙여지은, 한사람이 누우면 다른 사람이 앉을 자리조차 없는 80원짜리 자그마한 세집에서 생활하면서도 동네애들이 돈이 없어 들놀이를 가지 못하는것을 보면 어렵게 자라온 자신을 생각하고 호주머니를 털어 그애들한테 간식을 듬뿍 사주어 들놀이를 가게 했다.

재정학교에서 2년 학습을 마친 1998년에 인품좋은 동창생과 담임교원이 주동적으로 돈을 꾸어주겠으니 영업을 시작하라고 하자 그는 너무도 고마와 가슴이 찡해냈다.  최승화는 그들의 도움으로 연길시 하남시장 뒤골목에 음향판매점을 꾸렸는데 아무런 난방시설도 없는 집인지라 장인이 가설해준 난로에 불을 지펴놓고 담요를 뒤집어쓴채 추위에 떨면서 힘들게 겨울을 지내야 했다.

이렇게 그가 음향판매점을 4개 분점까지 늘이면서 사업을 벌리던 2000년에 소품배우 리경화가 연변구연단에서 가수를 모집한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줄곧 구연단을 좋아했던 최승화는 두말없이 시험에 참가했고 또 무난히 합격되였다. 그때로부터 본격적으로 가수생애를 시작한 최승화는 선후로 “모두다 갔다”, “인생살이”, “금이야”, “마음부자 제1부자”, “내 인생 내 멋대로” 등 자기만의 독특한 풍격을 갖춘 노래 30여수를 불렀는데 모두가 대중들의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가수생애에 나래를 활짝 펼친 그는 드디여 2004년도에 자기의 첫번째 음반으로 “모두다 갔다”를 출판하고 인차 구연단을 따라 공연차로 해남도로 떠났다. 그런데 해남도에 다녀온 1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원 음반은 이미 1만장이나 팔리고 도용판( 版)음반이 얼마나 나왔는지 몰랐다. 이 음반으로 해서 많은 대중들이 그를 알게 되였다.

2008년도에 그는 자기의 두번째 음반 “금이야”를 출판했다.

화목한 가정

최승화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부를 때 역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있는 자기보다 두살 어린 예술학교 학생 방해란과 면목을 익히게 되였다. 한동안의 접촉을 거쳐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처음에는 최승화가 농촌사람이라고 반대하던 방해란의 부모는 후에 최승화의 사람됨됨이를 보아내고 그들이 사귀는데 동의했다. 최승화가 첫 명태장사에서 실패한후 방해란은 방학시간을 리용해 그를 따라 심양, 북경으로 낙지, 명태장사를 다녔는데 심지어 기차안에서까지 팔았다.  10여사람씩 드는 려관방에 혼자 들 때도 있었는데 그때 방해란은 두려움도 없지 않았으나 사랑하는이의 일을 도와나설수 있는것으로 해서 긍지감을 느꼈다.

1999년, 최승화와 방해란의 깊은 사랑을 료해한 연변TV 토요무대프로제작팀에서는 “행복한 가정” 부부노래에 참가하라고 통지를 보내왔다. 그때는 결혼전인지라 방해란은 약혼녀의 신분으로 최승화와 함께 “나란히 걸읍시다”를 불렀다.

2001년 2월 10일에 최승화는 자기의 세집에서 방해란과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들이 나서서 세집을 신혼방으로 장식해주었다. 결혼후 그는 유람안내원으로 일하는 한편 계속 노래를 불렀고 안해 방해란은 구연단에 출근했는데 1년후 자기들의 집을 마련하고 아기자기한 생활을 누리게 되였다.

부부금슬이 남달리 좋은 최승화와 방해란은 크게 얼굴을 붉혀본적은 한번도 없고 어쩌다가 말다툼을 한다 해도 5분도 안되여 서로 웃고만다. 그들이 어찌나 끔찍하게 보내는지 단위의 동사자들은 “아직도 그렇게 좋은가”고 롱담을 던지군 했다. 방해란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최승화는 재정학교를 다닐 때 방해란의 전도를 고려해 이 감정을 포기할 생각을 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와 방해란의 사랑의 결정인 최지성은 금년에 6살이다. 임신때 안해가 가야금테프를 자주 들어온것이 태교가 되였는지 최지성은 2살때부터 아버지가 부른 노래들을 부르기 좋아했다. 지금 한창 피아노학습을 하고있다는 최지성의 미래에 대해 최승화는 이후 아이의 특장에 따라 다시 결정할것이라고 밝혔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거야

최승화가 사업에서 성과를 올리자 처음에 그렇게 반대하던 부모들도 이젠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믿어줄것이라고 말하고있다. 그가 부모들이 계시는 농촌으로 가게 되면 동네사람들은 얼음과자장사군이 텔레비인기인물로 되였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든다고 한다.

최승화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는 “사랑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이미 5차나 이 프로에 참석했고 가난한 애들에게 사랑의 손길도 보내주었다.

최승화는 2009년도 음력설야회에서 독창 “내 인생 내멋대로”를 부르면서 또 한번 자기의 실력을 과시했다.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그는 가수길을 끝까지 걸을것이며 그 무슨 상을 타는것보다 대중들이 즐기는 노래를 많이 부르기에 노력하겠다고 실토했다. 자기의 실력을 더 한층 제고시키기 위해 그는 지금 문화예술쎈터에서 사업하고있는,  “바다의 노래”를 불렀던 조선의 이름있는 연예인 배윤희를 스승으로 모셨다.

최승화는 잘 살려면 체면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면서 자기는 지금도 필요하다면 그 어떤 궂은일이든지 달갑게 할 용기가 있다고 말했다.     

연변라지오TV신문  허명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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