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대용-청취자들의 미더운 대변인이 되여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5월6일 09시47분    조회:823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김대용주임에 대한 이야기

연변조선족자치주총공회에서 2008년 《5.1》절을 앞두고 진행한 표창대회에서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의 김대용주임이 주급로력모범으로 메달을 수여받았다. 보도사업에 몸을 담근지 12년밖에 안되고30대중반에 금방 올라선 그가 성,주 정품프로인 《김대용열선》을 창출해내는 등 성과를 올리고 선후로 《길림성우수공청단원》,《연변10대최우수보도사업일군》,《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우수공산당원》 등 영예를 따내게 된 비결은 무엇일가?

진취심이 있는 젊은이

1997년에 공개초빙을 거쳐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한 김대용은 10여년의 사업실천가운데서 언제나  청취자들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정품프로그램을 창출하기에 최선을 다해왔다.

안도2중을 졸업한후 연변대학 관리공정학부에서 공부한 그는 처음 보도사업에 참가하여 어려움도 퍼그나 겪었다.

우선 배운 지식과는 완연히 다른 분야에서 사업을 펼쳐나가려고 하니 생소한것들이 너무 많았다.말수가 적지만 무슨 일을 하나 쉽게 포기할줄 모르는 그는 신문보도학으로부터 문법기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식들을 열심히 배우는 한편 부지런히 사업실천에 응용하면서 사업에 적응하기에 노력을 경주했다.

이렇게 연변인민방송국 보도부에서 말단기자로 뛰면서 자기를 제고한후 1998년에 사회교육부에 넘어간 김대용은 뭐든지 특색을 표현할수 있는 프로를 만들어 청취자들에게 남다른 감수를 제공하고싶었다.그래서 용감하게 맡은것이 《청취자자문봉사》 프로그램이였다.

당시 비정기적으로 방송되여오던 이 프로그램은 정책선전이나 간단하게 진행하는 일반적인 프로그램으로서 고정적인 수용자군체가 없고 형식 역시 무미건조해서 청취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한동안의 사색을 거쳐 김대용은 프로명칭을 《어려움이 있으십니까?》로 고치고 청취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난점, 열점문제를 해결해주는데 취지를 둔 특색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볼것을 지도부에 제기,실천가운데서 부단히 탐색하면서 보다 영양가가 있고 흥미를 끌어당길수 있는 프로를 만드느라 정성을 쏟았다.

사소한 문제라도 등한시하지 않고 참답게 해답해주고 아무리 시끄러운 일에 봉착해도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열성껏 해결해주었더니 편지나 전화로 문제해결을 부탁하는 청취자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이렇게 취급범위가 끊임없이 확대되면서 수용자군체가 점차 형성되고 프로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였으며 김대용 본인은 청취자들이 알아주는 명기자로 정평이 나게 되였다.

프로명칭이 《김대용열선》으로 변하고 형식이 생방송으로 바뀌면서 사회를 맡게 된 김대용은 또 서방흥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발음법을 포함한 화술지식을 끈질기게 배움과 동시에 실천가운데서 실력을 키웠다.항상 록음기를 갖고다니면서 수시로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부족점을 찾기에 신경을 도사리는가 하면 련속 수십번씩 록음하면서 가장 효과가 좋은 프로를 내놓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그 보람으로 그는 사회실력이 재빨리 제고되여 오늘날에는 프로진행임무를 능란하게 수행해나감과 더불어 청취자들이 전화로 제기한 문제에 령활하게 해답을 주는 수석사회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청취자들의 대변인

24시간내내 전화기를 켜놓고 청취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민사분규를 비롯한 허다한 문제를 최대한 해결해주는 김대용은 대중들에게서 《해결사》로 이름이 높다.하기에 휴식일이거나 한밤중에도 전화로 자문을 요청하는 청취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몇시간씩 기다리면서라도 그를 직접 만나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서야 돌아가는 청취자들도 한두사람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김대용이 접수,해결한 문제들을 보면 산골농민들의 억울함으로부터 가두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함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문제가 다 있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 모두가 어느 한사람이나 한부문을 찾아가서 단번에 해결할수 있는것들이 아니여서 원만한 해결을 도모하기가 쉽지 않았다.하지만 김대용은 시종일관 청취자들의 립장에 서서 정의를 수호하면서 모두가 만족하는 해결방안을 찾기에 진력하였다. 오죽하면 한가지 문제때문에 매일이다싶이 찾아오는 그를 두고 《당사자와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가?!  

2000년도 3월에 김대용은 룡정시 덕신향 석문촌 22호 농민들로부터 5년전의 사탕무우값 3만 5000여원을 받지 못했다는 편지를 받았다.룡정시인민정부로부터 그 돈을 지불받으라는 룡정시인민법원의 판결서를 받은지 오래지만 그때까지도 해결받지 못했다는것이였다.

당지에 내려가 조사를 하면서 농민들이 그 돈을 받지 못해 정상적인 농업생산에서 큰 영향을 받고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김대용은 룡정시정부 법제과,덕신향정부,개산툰진신용사 등 10여개 부문을 찾아다니며 실정을 료해,당시 사탕무우를 수매해간 길림시신중국사탕제조공장이 파산당한 현실에서도 농민들이 사탕무우값을 받게끔 해주었다.

모 시 부동산부문에서 몇십만원을 비법수금한 사건이 발생되였을 때에도 액수가 많은탓으로 곤난이 막심했지만 김대용은 물가국 등 부문을 문턱이 다슬게 찾아다니면서 당사자들이 경제손실을 미봉하도록 해주었다.  

이밖에 10여년간 물고생을 하던 도문시의 44호 주민들은 김대용의 도움으로 수도물공급을 보장받게 되였고 서시장의 수천호 개체공상호들은 보험문제를,화룡시 서성진 와룡촌 촌민들은 집문제를 해결받게 되였으며 최근년에 와서 농민들은 알곡재배보조금을 향수받고 출국희망자들은 정책자문과 해당 정보를 제공받고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김대용열선》을 통해 접수한 문제는 8000여건, 그중 많은 문제가 해결을 보았다고 한다.

언제나 사업이 첫째

사업심이 아주 강한 김대용은 언제 어디서나 사업을 첫자리에 놓고 모든 곤난을 극복하면서라도 맡겨진 취재,진행임무를 원만히 수행하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그 어떤 특수한 사연이나 건강상황과는 관계없이 매일마다 1분도 오차없이 제시간에 청취자들과 대면해야 하는 방송인으로 놓고말하면 방송시간을 확실하게 담보하는것이 우선적인 과업으로 나선다.특히 아나운서나 사회자의 경우에는 그 책임이 더욱 커서 누구나 시간준수에 각별히 신경을 도사려야 한다.김대용은 지난 10년간 사회자로 활약하면서 이 도리를 가슴깊이 터득했다고 고백한다.

연변지구에 큰눈이 내려 교통이 완전히 차단되였던 2002년 겨울의 어느날,당시 연길시 흥안향 발전촌에 세집을 맡고있던 김대용은 이튿날의 생방송때문에 걱정이 태산같았다. 아침 6시 30분의 방송시간을 맞춰 출근해야 할 일이 아득했던것이다.그러나 그것도 잠간,하늘이 무너져도 방송시간만은 절대 어길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다리에 각반까지 치고 출발했다.

인적기라곤 없는 꼭두새벽에 혼자서 무릎을 치는 눈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그는 애청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되뇌이면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그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방송국에 도착하고보니 시침은 아침 6시 10분을 가리키고있었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김대용은 미처 휴식할 시간도 없이 또 프로진행준비에 착수했다.
이밖에 육성테프를 편집하느라 몇번이나 밤을 지새웠는지는 그자신도 똑똑히 모른다. 어떤 날은 이튿날 아침 7시 20분에 방송할 테프를 초저녁부터 편집하기 시작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자꾸만 다시 하다보니 방송시간 20분전에야 작업을 끝마치기도 했다. 그길로 생방송에 들어가느라면 배가 고프고 고달프기도 했지만 기자의 노력으로 가급적인 해결책을 전파를 통해 전해줄 때면 한없는 긍지를 느끼게 되였다는 김대용이다.   

믿음직한 뒤심

《김대용열선》이 성과 주의 정품프로그램으로 부상, 전국조선말라지오텔레비죤방송우수작품평의 등 여러 급별의 활동에서 수차 상을 타고 기획인, 사회자의 의무를 출중하게 수행하여 많은 영예를 따내게 된 오늘날 김대용은 지난 10년간 여러모로 이끌어주고 배려해준 연변인민방송국 지도부,적극적으로 협력해준 동료들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후원에 정성다한 어머님 안형순이 눈물겹도록 고맙다고 속심을 터놓는다.

아들형제를 키운 어머님은 맏이인 대용에 대해 더구나 요구가 높았다.어릴 때부터 엄격한 요구로 아들을 단속하면서 보다 우수한 사람으로 양성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어머님은 지난해에 출국하기전까지 아들의 프로를 시간맞춰 청취하는것을 신성한 의무로 간주해왔다.

지난 10년간 어머님은 아들이 기획,진행하는 프로를 단 한기도 빼놓지 않고 몽땅 청취한데 만족하지 않고 매번 프로가 끝난후면 꼭 전화를 걸어와 장점과 부족점을 평가해주는것을 잊지 않았다.다음번에는 또다른 변화를 보여주는 성숙된 프로그램을 청취하는것이 어머님의 소박한 소원이였나 본다.

그리고 연길시부동산관리국에 출근하면서 주택평가로 바삐 보내면서도 내조에 최선을 다해온 안해 황순화와 이쁘고 밝게 자라준 딸애 김미정 역시 김대용에게는 믿음직한 뒤심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뒤심이 있었기에 사업에 모든 정력을 몰부을수 있었고 또 저그마한 성적이라도 따낼수 있게 되였다고 하면서 그는 앞으로 수하일군들과 동심협력하여 부단히 완벽화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수한 프로그램으로의 도약을 위해 닫는 말에 채찍질할 의향을 내비치였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미국 뉴욕의 일원지역은 조선족의 급속한 류입으로 어디를 가나 조선족들을 쉽게 접할수 있다. 특히 조선족의 90%이상은 한국인사회에서 생활하며 한인가게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야채장사나 식당, 네일가게(손톱관리) 등 한인들이 하는 곳마다 조선족 직원이 한두명씩은 있다.대부분이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는 평을 받고있...
  • 2006-01-16
  • [원제: 녀자축구팀 로장 손문의 청혼광고] “남자가 나이 들면 장가가기 마련이고 녀자가 나이들면 시집가기 마련”이라고 올해 33살인 손문도 청혼광고를 내 사회상에서 반향들이 크다. 청혼광고의 내막을 보면 본인이 집필한것이 아니고 “상해수요일”신문사의 편집으로 있는 그의 친구가 몸소 기획하고 집필하였던 것이...
  • 2006-01-16
  • 황우석 "용서를 빈다…참담한 심정" 서울대 황우석교수가 12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론문조작에 대해 사과 하고 있다. /외신 한국 황우석교수는 12일 “서울대 조사위에서 발표한 조사결과에 대한 론문과 관련한 허위 데이터 사용은 제1저자인 제가 모두 책임질 부분으로 모두 인정하고 사...
  • 2006-01-13
  • 황우석은 1953년 12월 15일, 한국 충청남도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를 좋아했고 커서 꼭 수의사가 되고야말겠다고 작심했었다. 1972년, 그는 소망대로 서울대학 수의약학원에 입학, 1982년까지 그는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및 박사학위를 따냈다. 졸업후 그는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게 되였...
  • 2006-01-13
  • 품팔이녀자애로부터 연길시인대대표로 되기까지, 월수입 5000여원의 업주로부터 500여원의 로임을 받는 사회구역위원회서기로 되기까지 갖은 세파를 겪어온 조국영(34살)은 《사회구역사업을 하면서부터 진정으로 인생의 가치를 느끼고있다》고 말하고있다. 1986년 12월, 16살에 나는 조국영은 호북성의 한 편벽한 농촌에서...
  • 2006-01-11
  • [원제: 어머님의 손맛으로 고객 감동] 이제까지 없었던 새 업종이나 서비스를 개척해 큰 성공을 거둬보자는 블루오션전략, 가치혁신으로도 통하는 이 전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약 성공의 희열을 맛보고있다. 그제날 따뜻한 온돌방에서 온 집 식구가 단란히 모여앉아 먹던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칼국수, 생각만 해도 어...
  • 2006-01-11
  • 일전 북경에서 있은 2005년 중국기획년회 및 제2기《제갈량》기획평의활동에서 연변오늘기획연구소 소장 겸 연변오늘상무광고유한회사 리사장 박준덕이 《2005년 중국10대기획전문가》명예를 받아안았다. 소개에 따르면 박준덕사장은 길림성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영예를 받은 사람일뿐만 아니라 조선족가운데서 《기획전문가...
  • 2006-01-10
  • [원제: 전통산업에 인터넷 나래를 달아] 할빈호천과학기술개발회사 오철웅총경리 사업담 “대형국유기업에서 거들떠보지 않는 비표준장비제조의 거대한 시장잠재력을 노리고 접어들었지요." 2000년말 등록자본금 50만원으로 할빈호천과학기술개발회사를 일떠세운 오철웅(43세, 고급공정사)총경리가 밝히는 창업동기이다. 일...
  • 2006-01-10
  • "마음의 고향 한국에 와서 기쁩니다." [세계일보 2006.01.08 13:00:19]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항상 그리워하시는 제 마음의 고향 한국에 오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중앙아시아·러시아 동포청소년 연수단으로 6일 모국을 찾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거주하는 한국인 4세 라가이 베라양(17). 라가이 양은 고려인들이 한국어...
  • 2006-01-09
  • [원제: 잣왕 조이철의 삼단도약] 장백산자연부원에 의탁해 세계를 도모한다 조이철은 누구? 그의 창업은 어떻게 시작됐나? 조이철, 길림송보생물기술산업유한책임공사의 리사장. 길림성 정우현 사람.올해 47세. 1985년 장춘사범학원 력사학부 졸업. 1990년 경제관리 연수. 1996년 주식회사 길림송보공사 창설. 길림성 특색기...
  • 2006-01-0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