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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선-무용수로부터 전문예술단체 코기러기로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30일 08시58분    조회:6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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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국가문화부 신극목상을 수상한 무용 《마음의 가락(일명 〈심금〉)》을 출연하여 소문을 놓고 《장고춤》, 《선녀》 등 무용을 국내외 무대에 올리면서 우리 민족의 무용예술을 널리 자랑하던 나젊은 무용가 동옥선양이 지금은 전문예술단체인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코기러기가 되여 민족예술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 청춘의 정열을 불태우고있다.

16살에 시작한 무용인생

1966년,저명한 작곡가 동희철선생님의 3남2녀 5남매중 막둥이로 태여난 동옥선양은 당시 한사람앞에 0.5킬로그람씩밖에 공급하지 않는 입쌀을 혼자서 먹을만큼 온 가정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줄곧 아버지의 노래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동옥선양은 어려서부터 음악감각은 있었지만 선률에 맞추어 코노래를 흥얼거리기보다는 춤을 추고싶은 생각이 더 많았다고 한다. 영화구경이나 공연관람을 가서도 특제한 신을 신고 발레무를 추는 무용수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하면서 나도 저만큼은 할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을 가져본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소학교 5학년때는 용기를 내여 아버지한테 발레신을 사달라고 청을 들었다.그런데 그자리에서 선선히 대답을 주던 아버지가 며칠이 지나도록 약속을 리행해주지 않았다. 하루빨리 발레무를 춰보고싶었던 그는 어느날 쪽지를 써서 아버지가 늘 갖고다니는 책안에 슬그머니 끼워넣었다. 그런줄도 모르고 출장을 떠난 동희철선생님은 출장지에 도착해서야 막내딸의 쪽지를 발견하고 명심해서 발레신을 사왔다.이리하여 동옥선양은 공부에 싫증을 느낄 때면 휴식삼아 발레신을 신고 춤을 추면서 머리를 식히군 하였다.

과외애호로 춤추기를 좋아한 그가 무용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초중2학년때인 1980년도였다.그해 연변예술학교에서 전문 연변가무단을 위해 무용배우를 양성해주게 되였는데 학생선발때문에 연변1중에 내려온 선생님들이 체격이 미끈하고 얼굴이 이쁘장한데다 음악감각까지 있는 동옥선양을 눈독들였다.이렇게 우수한 학습성적으로 연변1중에 추천받아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에 열심하던 동옥선양은 그처럼 좋아하는 춤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예술학교를 선택하게 되였다.

무엇이든 꼭 남보다 더 잘해야 시름놓는 성격인 동옥선양은 이때로부터 모든 정력을 춤에 몰부으면서 열심히 배우고 꾸준히 련습했다. 그 보람으로 그의 무용기교는 하루가 다르게 제고되였고 얼마 안가서는 전업과성적이 제일 우수한 학생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였다.

그즈음 동옥선양을 전도유망한 무용수로 점찍고 양성할 생각을 가지고있던 저명한 무용가 리록순선생님이 당시 주당위 서기로 사업하시던 조남기동지를 모시고 연길시조선족예술단설립문제를 토론하는 전문가회의에서 동옥선양을 비롯한 여러명의 전문인재를 보내줄것을 청구하였다. 조남기동지는 행사에 참가한 동희철선생님에게 따님을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보내여 민족무용을 전공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청을 들었고 동희철선생님은 그자리에서 흔쾌히 답복을 주었다. 이리하여 그해 16살밖에 안되는 동옥선양은 전업무용수의 대오에 들어서게 되였다.

장끼를 뽐내던 시절

동옥선양이 1982년 3월에 전업무용수로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출근하게 되자 당시 부단장직을 맡고있던 리록순선생님은 동옥선양을 무용종목의 주역감으로,독무배우로 특별양성하기 시작했다. 동옥선양 역시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훈련에 땀동이를 쏟으면서 배우는 족족 소화를 잘도 했고 무대에서의 출중한 표현으로 해당 전문가들과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렇게 빠른 시간내에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기둥무용수로 자라난 동옥선양은 공연때면 군무에서의 주역으로,독무배우로 무대에 올라 장끼를 자랑했고 전국적으로 무용콩클이 있을 때면 빼여난 무용수들과 어깨겨룸을 하면서 묵직한 상들을 따내여 소문을 놓기도 했다.

1990년에 펼쳐진 전국소수민족무용콩클에서 동옥선양은 무용 《녀인》으로 표현3등상을 수상하였고 1995년에 진행된 제3차 전국독무,쌍무,3인무콩클에서는 독무 《마음의 가락》으로 민족무용조 특별제명상과 표현상을 따내였다.(이 무용은 1998년에 국가문화부에서 진행한 제8차문화상평의에서 《문화신극목상》을 수상하였음)

1996년에 있은 중국민속절행사에서 동옥선양은 독무 《방울춤》으로 중국민간무용표현상을 타고 1998년에 국가문화부의 명의로 예술의 나라 조선에 가서 제16차 《4월의 봄》국제예술축전에 참가해서는 세계 45개 나라 800여명 예술인들이 군림한 무대에서 독무 《장고춤》을 표현하여 금상을 받아안기도 했다. 

이러는 와중에 우수한 청춘파무용수로, 《조선족의 양려평》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그는 제4차세계부녀대회를 경축하기 위하여 조직된 중국 당대 저명한 무용가예술단의 성원으로 초청을 받고 양려평, 신려려, 주결 등 뛰여난 무용수들과 나란히 무대에 오르는 행운을 얻었다.이밖에 그는 국가문화부 소수민족예술단의 일원으로 한국, 로씨야, 독일, 프랑스, 벨지끄, 윁남, 라오스, 캄보쟈, 스리랑카, 먄마 등 세계 20여개 나라와 지구에 공연을 다녀오면서 우리 민족의 무용예술을 세계에 널리 자랑할수 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사랑을 줄수 있는 녀자로의 탈바꿈

지금까지 동옥선양은 가정에서는 손에 물 한방울 묻힐세라 귀여움만 받아오고 사회적으로는 우수한 민족무용예술가로 인정받으면서 줄곧 떠받들리기만 했다.1988년에는 《천지7선녀》중의 첫사람으로,1999년에는 연길10대최우수청년으로, 연변문련에서 처음으로 평의한  《덕예겸비우수회원》의 한사람으로 표창을 받고 연길시무용가협회 부주석,중국무용가협회 연변분회 부비서장,주청년련합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면서 사랑을 받는데 습관되여온 그가 다른 사람한테 사랑을 줄수 있는 녀자로 변신하게 된것은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 꾸리는 학원반에서 담임교원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문화예술단체의 시장진출을 목적으로 출국공연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던 그가 1999년부터 무용배우양성을 위해 꾸려오는 학원반에서 담임교원을 맡게 된것은 2004년이였다고 한다.

무용을 한답시고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15명의 초중 2학년 철부지들을 보는 순간 동옥선양은 지난날의 자기를 보는것 같아 마음이 례사롭지 않았다.

(어떡하면 저애들을 무용으로 성공할수 있는 인재로 키울수 있을가?)이런 생각에 골몰하던 그는 전업훈련에서는 엄격한 요구를 제기하고 생활면에서는 따뜻한 사랑을 몰부어주는 《대리엄마》가 되여주기로 작심했다.

이때로부터 그는 아침에 출근해서부터 저녁자습시간까지 학원생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르는것이 있으면 성의껏 가르쳐주고 곤난이 있으면 주동적으로 해결해주면서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살뜰히 보살펴주었다.간혹 앓는 학원생들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병원에 데리고가서는 점적주사를 다 맞을 때까지 지켜주고 때로는 투정도 인내성있게 들어주면서 살갑게 굴었더니 그애들은 점차 엄마처럼 동옥선양을 따르기 시작했고 그녀도 어느새 아이들에게 정이 들어 무엇이든 더 잘해주지 못해 신경을 도사리게 되였다. 

그 노력의 결실로 《연길찬가(일명 〈사계절의 노래〉)》에서 남주역을 맡고있는 최송주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학원생들은 일정한 수양을 갖춘 전문예술인으로 자라났고 동옥선양은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 누구를 이끌어갈수 있는 령도능력을 구비하게 되였다.
 
꿈을 안고 닫는 말에 채찍질을

35살에 국가1급배우직함을 따낸 뒤를 이어 무용부 부장, 예술과 과장, 단장조리, 예술총감독, 업무단장을 거쳐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집행단장, 전문예술지도소조 주임으로 부임되고 대표의 신분으로 제9차연변조선족자치주당대표대회에 참가한 동옥선양은 요즘 연길시당위와 연길시문체국에서 하달한 150회의 년간공연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있다. 

사천대지진과 북경올림픽의 영향으로 관광객들이 대폭 줄어들어 7월말까지 겨우 50회의 공연실적밖에 올리지 못한 형편에서 임무를 완수하려면 10월까지의 황금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을 조직해나가야 한다.이에 코기러기인 동옥선양은 63명 배우들을 포함한 전체 임직원들을 이끌고 저녁마다 연길시민족문화예술중심극장에서 외지관광객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치는외 중국북방관광교역회, 연변중국조선민속문화관광회 등 문예공연이 필요한 행사장이면 무조건 찾아가서 민족예술종목을 선물하고있다.

여러차례의 수정을 거쳐 제1막 《겨울의 혼》, 제2막 《봄의 사랑》, 제3막 《여름의 정》, 제4막 《가을의 열매》로 짜여진 대형가무 《연길찬가》의 기획취지에 대해 동옥선양은 《민속을 빌어 연변의 아름다운 산천과 인문경관 그리고 민족문화의 짙은 향기, 유구한 전통을 노래하며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심으며 여름을 키우고 가을을 익혀온 과정을 신비로운 음악속에 화려한 춤동작으로 펼쳐보이려는것》이였다고 터놓는다. 

이제부터라도 연변을 찾는 회의손님이거나 외지관광객이 늘어나고 시민들도 연길시민족문화예술중심극장을 찾아준다면 지난해의 137회를 초과하고 올해의 150회 임무를 꼭 완수할수 있을것이라고 확신에 차있는 동옥선양,불혹의 나이임에도 결혼 등 개인을 위한 일은 뒤전으로 하고 민족예술을 위한 사업에만 모든것을 바쳐가고있는 동옥선양이 너무너무 돋보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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