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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중국조선족연극인 정인덕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28일 13시56분    조회: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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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형상창조에 몰부은 심혈

제1대 중국조선족연극인의 한사람인 국가1급배우 정인덕 근 60년의 연극생애에서 어머니의 형상을 많이 창조하여 소문을 놓고 묵직한 영예도 여러차나 따낸 정인덕선생은 80고개를 바라보는 지금도 연극활동에 종사하면서 여생의 빛과 열을 우리 민족의 연극사업에 바쳐가고있다.

전문연극인으로의 변신

1931년 한국 경상북도 연일군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8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정인덕은 8살나던 해에 언니, 오빠들과 함께 부모님을 따라 흑룡강성 해림현 중흥촌에 이주해왔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퍼그나 좋아한 그녀는 소학교를 졸업한후 농사일을 하다가 1946년에 목당강시병원에 간호원으로 취직다. 그곳에서 당시 목단강시문공단에서 사업하는 김태희선생님을 만나 노래를 배울수 있는 기회를 얻은 그는 1947년 목단강지구에서 펼쳐진 노래콩클에 참가하여 2등의 영예를 따내였다.

얼마후 공부를 더 해보고싶어 녕안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할빈으로 들어간 김태희선생은 집에까지 찾아와 할빈시민족사무처산하에 문공단이 설립되니 졸업하는 즉시로 할빈으로 오라는 부탁을 남기고 돌아갔다. 이렇게 정인덕은 1948년에 할빈으로 떠났는데 민족사무처문공단에 찾아가보니 마침 단장인 김태희선생이 반겨주는것이였다.

흑룡강성을 무대로 문예선전사업을 활발하게 펼쳐나가던 할빈민족사무처문공단은 민족사무처 처장인 주덕해동지가1949년초에 연변으로 사업터를 옮기면서 동행을 했고 연변문공단(지금의 연변가무단)과 합병되여 전문예술단체로 탈바꿈하게 되였다. 따라서 금방 20살을 잡은 정인덕선생도 산설고 물선 연변땅에 뿌리를 박고 예술인으로 재능을 꽃피워가게 되였다.

사업에 참가한후 조직의 수요에 복종하는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온 정인덕선생은 전공은 노래였지만 녀성중창, 가야금병창 등 노래종목은 물론 무용, 연극을 비롯한 여러가지 종목들에 다 출연하면서 부지런히 뛰였다. 그러던 어느날 김태희선생이 그녀를 찾아와 노래보다는 연극쪽으로 발전해보는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다.  그자리에서 싫다고 딱 잡아떼던 선생은 한동안의 심사숙고를 거쳐 김태희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작심, 전문연극인으로 성장하는 길에 들어섰다.

“어머니”의 형상창조에 몰부은 심혈

처음엔 단막극들에서 군중역으로 등장하다가 《처녀의 마음》, 《렬사비앞에서》 등 연극에서 주역을 맡은 정인덕선생이 진정으로 연극재능을 인정받게 된것은 연변연극단의 설립을 위해 분주히 돌아치던 1955년이였다. 

당시 연변가무단 연극대에서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문공단과 함께 조선고전명작 《춘향전》을 무대에 올리기로 했는데 정인덕선생에게 월매의 배역이 차례졌다. 난생 처음 중요한 배역을 맡게 된 정인덕선생은 조직의 신임에 가슴이 설레이면서도 월매의 배역을 진짜 소화해낼수 있을가 하는 위구심이 들었다. 금방 결혼한 25살 새색시의 몸으로 중년녀성의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는것도 그렇지만 담배까지 피우며 기생의 형상을 진실하게 창조해야 했으니 어려움이 많았기때문이였다.

고맙게도 당시 연변가무단에 와서 민가를 가르치던 신옥화선생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신옥화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말다듬법이며 걸음걸이 등을 익히고 담배를 피우는 법까지 배워서 퇴기 월매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창조할수 있었다. 

정인덕선생이 창조한 월매의 형상은 당시 연변에서 관람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제1차전국연극콩클에 참가하던 나날에는 수도 북경의 무대에서 대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연변연극단은 그번 콩클에서 공연종합1등의 월계관을 따내였고 정인덕선생은 리몽룡의 형상을 창조한 허동활선생, 방자의 형상을 창조한 리영근선생과 어깨나란히 연기3등상을 받아안는 영광을 누렸다.

월매의 형상을 창조하면서 연기력이 부쩍 올라간 정인덕선생은 이때로부터 많은 작품들에서 어머니의 배역을 맡고 관람객들에게 웃음을 선물했다. 당시 인상을 크게 남긴 배역으로는 연극 《붉은 바위》에서의 쌍총잡이어머니, 연극 《뢰우》에서의 로시평(대해의 어머니), 조선고전명작 《심청전》에서의 녀관, 연극 《홍등기》에서의 리할머니, 연극 《두견산》에서의 가향… 등을 꼽을수 있다.  

이밖에 선생은 《혁명가정》, 《당의 딸》, 《어머니》, 《김옥희》 등 여러부의 영화에서 주역의 배음을 맡았고 1970년대중반 연변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나날에는 많은 방송극에 출연하는외 아동방송소품에서 연출을 맡기도 하고 시랑송 등으로 청취자들과 대면하기도 했다.

주부연극인의 고달픈 인생살이

당년에 정인덕선생은 우로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3남매를 낳아키우면서 주부연극인으로 살아가느라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당시 연변연극단도 기타 예술단체와 마찬가지로 자주 하향공연을 나갔는데 명령만 떨어지면 이튿날로 출발해서 10일, 20일씩 나가있는것은 보통이고 때로는 2,3개월씩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식구들이며 애들과도 서먹서먹해질 때가 있었는데 정인덕선생은 또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을 겪은적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금방 결혼한후의 일이였다. 당시 정인덕선생은 결혼한지 일주일만에 공연을 나갔다가 꼬박 두달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백내장때문에 다른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하는 시어머님이 의사로 사업하는 아들한테 환자가 찾아온줄로 착각하고 “아재는 누구를 찾아왔소?”라고 물었다. 정인덕선생이 난감해서 어쩔줄을 모르고있는데 방에 있던 남편이 나와서 “아니,어머니도, 집사람이 왔는걸요.”라고 하면서 반색했다. 그제야 궁지에서 풀려난 선생은 며느리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시어머니가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지만 시댁식구들과 익숙해지기도전에 집을 떠나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어느 정도 리해가 되였다.

지금의 녀성들은 어린애만 낳으면 적어도 3,4개월씩 휴식을 하지만 그 시기의 녀성들은 56일의 산후휴가가 끝나기 바쁘게 출근을 해야 했고 특수한 사정이 있으면 앞당겨 출근해서 맡겨진 사업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정인덕선생도 1957년에 큰딸을 낳은후 45일만에 애를 업고 《심청전》공연을 나갔다. 그때 농촌에 나가면 농민들의 웃방에 하숙을 정하군 했는데 애가 추울가봐 신경을 쓰다보면 밤잠을 제대로 못자는건 둘째치고 애가 앓기라도 하면 공연도중 병원에 다니며 주사를 맞히느라 그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고 한다.

힘들던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인덕선생은 자식 셋을 키우면서도 많은 작품에 출연하여 능력을 인정받고 여러 급별의 평의에서 상을 따내며 연극인으로 성공을 안아올수 있게 된것은 시어머님의 지지와 갈라놓을수 없다고 고백했다.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시어머님은 자식 셋을 둔 며느리가 공연을 아무리 자주 나가도 언제 한번 반대하는 법이 없이 집안일이며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고 사업을 잘하라고 등을 떠밀었고 둘째인 아들을 키울 때는 젖을 먹는 손자를 업고 공연길에 따라다니면서 애를 봐주기도 했다.

로년에도 무대를 떠나지 못해

1970년대초 돈화시 흑석향에 내려가서 1년을 제외하고 줄곧 연극과 씨름해온 정인덕선생은 1986년에 리직휴양하고 사업터를 떠난후에도 계속 연극에 출연하고 후대양성에 진력하면서 우리 민족 연극예술을 위해 아글타글해왔다.

선후로 《세배》, 《가을의 속삭임》, 《진지한 사랑》 등 소품에 출연한 선생은 1998년에 최금자, 최금순, 전춘옥 등 동료들과 손을 잡고 봉사예술단의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각설이타령》, 《썩장》 등 종목에 출연하면서 봉사성공연에서 한몫을 감당하였다.

1990년대초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제작한 텔레비죤련속극(다큐먼터리) 《장백아리랑》을 계기로 형광막에 등장하기 시작한 선생은 선후로 《사랑의 품》에서의 백설의 할머니,  《초연속의 수리개》에서의 쌍총잡이어머니… 등 부동한  형상으로 시청자들과 가까와지기도 했다.

1992년부터 1996년 선생은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연극학부의 교원으로, 1998년에는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 학원반의 교원으로 초빙되여 자라나는 우리 민족 연극계의 후대들에게 보다 많은 자양분을 부어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생을 우리 민족의 연극사업에 바쳐온 선생은 2007년 길림성 《중국연극 100돐기념활동》에서 《돌출한 기여를 한 연극인》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2008년에도 우수당원으로 표창을 받았다.

손군사랑에 힘든줄 몰라

재직시절 여러가지 연극활동에 참가함과 동시에 길림성청년련합회 위원, 중국연극가협회 길림분회 회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3차당대표대회 대표, 연변조선족자치주 제5차부녀대표대회 대표 등으로 활약하면서 한가할 사이가 없이 바삐 돌아친 선생은 사업에 정력을 쏟다보니 자식들을 위해 해놓은 일이 너무 적다고 아쉬움을 내비치고있다. 

시어머니생전에는 그래도 할머니가 애들을 챙겨주었지만 1970년대중반에 시어머님과 남편이 선후로 세상을 뜨면서 혼자서 자식 셋을 키우게 된 선생은 많은 면에서 애들의 자각성에만 의뢰하면서 구석구석 보살펴주지 못했고 특히 학습면에서 제때에 틀어쥐고 인도해주는 역할을 확실하게 하지 못했다. 

“조금만 신경을 써주었더라면 막내라도 대학에 보낼수 있었으련만…”이렇게 말하는 선생은 자식들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손군들에게 쏟아붓고 그애들의 성공으로  자식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생각에서 큰딸네 내외가 상해에 진출한지 여러해가 되는 지금까지도 외손자를 맡아키우고있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난 외손자 또한 어찌나 효성이 지극한지 아들도 상해로 들어가고 막내딸까지 출국한후 둘이서 조촐하게 지낼 때가 더 많지만 외로운 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소학교시절 과외로 가야금을 배운 외손자는 예술에 대한 애호를 버리지 못해 길림대학을 자퇴하고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입학, 소원대로 가야금공부에 열심하며 예술가의 꿈을 키워가고있다.

얼마전에 혈압때문에 입원치료를 받은적 있는 선생은 인제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활동을 조금은 삼가해야겠다고 하면서도 금년까지만은 봉사예술단의 공연에도 적극 참가하고 로인대학에도 시간맞춰 나갈것이라고 말하였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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