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엄마로된 김춘희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17일 16시32분    조회:837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사업과 가정 두마리 토끼 다 잡아야죠》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안겨주는 아나운서 김춘희가 6월 2일 3.4킬로그람되는 딸을 보아 행복한 엄마로 되였다. 제왕절개수술로 출산후 고통이 몰려올 때마다 아기를 들여다보면 그 아픔이 가신듯 사라진다는 김춘희는 엄마로 된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어오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말해 너무 행복하다. 아직은 이른 욕심일지라도 앞으로 나의 일을 계승했으면 좋겠고 나아가서 더욱 훌륭한 아나운서로 되였으면 좋겠다.》           
 
행복한 가정 소중한 딸

2003년, 26살나던 해 김춘희는 개인사업을 하는 김호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우연히 신랑의 친구로 결혼식에 참석한 김호씨와 면목을 익히여 2년간 사랑을 키워온 김춘희는 《김호씨의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성격이 내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고향이 같은 화룡이지만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게 연분이 아닌가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갓 결혼했을 때에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하고싶은 사업을 하는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여 2세계획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일욕심이 많은 김춘희를 두고 남편 또한 아이에 대한 말을 입밖에 꺼낸적이 없었다. 그러다 재작년에 자연스럽게 임신을 하게 되여 그들 부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런데 2개월만에 검진을 받던중 태아에게 태심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실패의 고배를 맛볼수밖에 없었던 김춘희는 작년 재차 임신되였을 때에는 각별히 몸관리에 신경을 썼다. 건강뿐만아니라 음악, 독서, 산책, 십자수 등 태교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편 김호씨 또한 날마다 아침운동후이면 안해가 즐겨먹는 남새를 사다가 손수 아침상을 보아주면서 극진히 돌봐주었다. 

귀여운 딸애는 행복한 가정에 더 많은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사업때문에 늘 바삐 보내는 김호씨지만은 날마다 짬만 나면 병실에 딸애보러 달려오군 한다. 그래서 김춘희는 《딸애한테만 관심을 보이고 산모에게는 문안도 없어 한쪽으로 밀려난것 같다》며 롱담을 하고나서 《이전에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아기를 바랐는지 이제야 알것 같다. 남편의 깊은 마음이 헤아려진다》고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다.
아기한테 모유를 먹이며 엄마사랑을 다 쏟는 김춘희는 사업과 함께 가정도 중시하는 가정형이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나운서들이 사회생활이 많을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실 아나운서들은 집을 떠난 대부분 시간을 방송실, 스튜디오에서 보낸다》며 《아나운서들도 일반출근족과 마찬가지이다》고 밝혔다. 또  《주부로 되여 살림을 하는것도 신나는 일》이라면서 결혼생활의 즐거움을 내비치였다. 

어릴 때 꿈은 바이올린수

이쁜 얼굴, 화사한 웃음, 맛갈스러운 사회로 연변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안고있는 김춘희의 아나운서경력도 어언 15년이 다가온다. 천진한 고중1학년생 풋내기아나운서로부터 이젠 어엿한 인기아나운서로 훌쩍 성장해온 김춘희아나운서, 그의 동년시절 꿈은 무엇이였을가?

1978년 화룡에서 3남매중 막내둥이로 태여난 김춘희에게는 우로 각각 10년,8년 년상인 오빠와 언니가 있다.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한 응석받이 김춘희는 5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처음에는 유치원의 바이올린으로 시작했는데 소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께서 바이올린을 선물해주셨다. 당시 화룡시TV방송국 기술과에 근무중인 아버지는 한달에 50원의 로임을 받았다. 적은 로임으로 세 자녀를 키우면서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막내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고싶었던 아버지는 차비가 아까와서 자전거를 타고 화룡 투도로부터 연길에 와서 48원을 주고 바이올린을 샀다. 바이올린을 사고나니 2원이 딸랑 남은 아버지는 점심을 거른채 다시 자전거를 타고 화룡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칠대로 지쳤지만 바이올린을 안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딸애를 보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던 아버지이다.
그때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던 김춘희의 꿈은 당연히 최고의 바이올린수가 되는것이였다.

풋내기아나운서가 인기아나운서로

줄곧 하나의 꿈을 향해 달리던 김춘희한테서 아나운서꿈이 싹튼것은 바로 고중입학을 앞둔 여름방학때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초중을 졸업한 딸에게 방학간 아나운서양성학원에 다닐것을 권유했고 서방흥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면서 그녀한테는 새로운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튼 싹에 단비가 내렸다. 그해 12월 화룡TV방송국에서 아나운서공개모집을 하였고 김춘희는 온 가족의 지지하에 시험을 보았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여 아나운서삶을 시작하게 되였다.

김춘희는 《처음에는 꼭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했지만 일을 하면서 무한한 매력을 느꼈다》고 회상하였다.

1994년 12월 고중 1학년 재교생이였던 김춘희는 그토록 흠모해오던 아나운서로 되였다. 학생으로부터 직장인으로 된 그녀는 새로운 환경속에서 힘들기도 하였지만 부푸는 가슴을 안고 하늘같은 열정으로 새로운 희망을 향해 부지런히 노력의 돛대를 저었다. 

《나는 실로 행운아인것 같다. 화룡시TV방송국에 출근한지 4년만에 뜻하지 않게 연변TV방송국의 아나운서로 발탁되는 기회가 왔다.》

김춘희는 자신의 타고난 재질과 피타는 노력의 성과로 의례히 이루어진 사업전근을 겸손하게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1998년에 연변TV방송국으로 전근하여 김춘희는 청소년제작부에서 선후로  《우리네 동산》, 《황금렬차》프로그램의 사회에 이어  《청춘스타트》프로그램사회를 맡았다. 보다 많은 시청자들을 대상하는 넓은 무대로 옮긴만큼 곤난도 많았다. 화룡TV방송국에 있을 때에는 자신한테 신심도 많고 만족도 되였지만 연변TV방송국에 와서야 자신이 청소년부의 기대치에 전혀 도달하지 못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자기절로 보아도 남들한테 한창 뒤진 느낌이여서 눈물을 흘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더구나 처음으로 집을 떠난 그녀는 아무도 의지할데 없다는 생각에 설음이 북받치군 하였다. 그러나 아나운서사업을 천직으로 간주하고 사랑한 김춘희는 난관을 하나하나 이겨나가면서 허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뛰였고 여가시간에는 독서에 몰두하면서 자기를 충실히 하였다. 1999년도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5년이란 본과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차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수 있었고 프로사회현장의 분위기도 조화롭게 조절할수 있었다. 

김춘희는 선후로 북경방송학원, 한국KBS방송국에 가서 연수도 하고 대학본과 과정까지 마치면서 부단히 자신을 가꾸어온 보람으로 《청춘스타트》프로그램사회에 이어 뉴스, 《종합문예》, 《문예광장》, 연변위성방송의 《세상은 요지경》, 《사랑으로 가는 길》  등 여러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으며 당당한 인기스타로 부상하였다.

기억에 남는 방송뒤이야기

그동안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중 청소년 법제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만났던 연길로동교양소의 한 청소년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방송을 계기로 알게 됐지만 오래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덕분에 그가 모범수로 수감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니 무척 보람있는 일이였다.》

또 8년째 진행하고있는 《사랑으로 가는 길》때문에 많이 울기도 했다. 그녀는 〈사랑으로 가는 길〉은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인데 가슴아픈 사연이 많아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고 털어놓고나서 《그러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당당히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서 첫 로임을 〈사랑으로 가는 길〉제작진에 부쳐와 감사함을 전달하고 불우학생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때면 일한 보람이 느껴진다》며 자랑스레 말하였다.

그렇다. 거의 해마다 성 아나운서, 사회자 프로평의에서 1등상을 받은것은 물론 전주10대아나운서 사회자, 전주최우수사회자 등 크고작은 영예를 수없이 받았지만 영예보다는 자신이 진행한 프로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거나 시청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때 더 큰 보람을 느낀다는 김춘희는 《일하면 일할수록 부족점이 더 느껴지기에 보다 발전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과 성실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춘희는 《15년간 프로진행을 해왔기에 시청자들은 내가 해온 프로가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더없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지금 해온것보다 앞으로 해야 할 프로가 참 많다. 뉴스는 물론 토크쇼)같은 프로도 진행하고싶다》며 앞으로의 타산을 밝혔다.

그녀가 앞으로도 매력적인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 편안한 방송을 전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꾸준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저에게 있어서 무자년인 2008년은 고마운 한해였습니다. 사진전과 수상 그리고 촬영가협회 사업 등 여러 면에서 모두 결실을 이루었지요.” 남개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사진작가의 외길을 걸어오면서 화려한 수상경력을 쌓았고 또 성촬영가협회 부주석의 자리에 오른 리종걸씨이지만 지난해 거둔 성과들은 의미...
  • 2009-01-22
  • 흑룡강성 (黑龙江省) 닝안(宁安) 출신으로 한국에서 12년을 생활한 박춘근 씨(57). 껑충한 키에 길쭉한 얼굴이 인상적인 그에게서는 타향살이로 지친 기색은커녕 성공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눈빛만이 반짝인다. 꿈을 가진 그는 재한 조선족들에게는 귀감이 될만한 '성공한 인물'임에 틀림없다.'외래어사전' ...
  • 2009-01-21
  • 함순녀 그녀가 선택한 무용인생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후에도 출중한 무용연기를 선보이며 인기를 독차지하던 이름난 무용배우 함순녀-연변의 첫 국가1급무용배우로 활약을 펼쳐가던 그녀는 지금 연변가무단의 단장조리로 사업하는 한편 전국인대 대표, 길림성인대 대표로 나라를 위한 사업에서 한몫을 톡톡히 담당해가고있...
  • 2009-01-21
  • 평범한 회사일군이 외화벌이 능수로●년간 수출액 600만딸라 ●550호 농가에 치부기회 제공● <<회사+기지+농호>> 경영모식 형성 불경기로 파산의 변두리에 처했던 민영기업을 왕청현에서 외화벌이 중점기업으로 부상시킨 녀강자가 있다.그녀가 바로 올해 51세에 나는 허춘희씨이다. 30년전 왕청현 토산과일회사...
  • 2009-01-19
  • 중국인민은행 연변주중심지행의 조사통계과에 근무하는 리선자씨가 중국 유수의 금융잡지 -《중국금융》2009년도 제2호 표지인물로 나왔다. 《중국금융》잡지는 1950년에 설립된 잡지로서 중국인민은행,중국은행업감독관리위원회,중국증권감독관리위원회,중국보험감독관리위원회의 관리감독하에 중국금융출판사가...
  • 2009-01-17
  • 우리 학계에서 《신문학》 하면 금방 떠오르는 한분이 계신다. 바로 연변대학의 신문학교수이며 우리 《신문학교육의 개척자》인 최상철교수(70세)이다. 청춘시절에는 작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연변대학 조문학부만을 선택해 연변에로 왔고 졸업후에는 15년간 문학교수와 창작 및 평론에 전념, 왕성기를 맞다가 돌연 신문학...
  • 2009-01-16
  • 14일,중국국가체육총국 남용을 축구운동관리센터 주임으로 정식 임명조선족 사나이 남용, 과연 중국축구를 낭떠러지에서 구해낼수 있을가?1월 14일, 중국국가축구대표팀이 2011년까타르아세아컵축구대회 예선 제1륜경기에서 D조중 가장 약팀이라 불리는 수리아에 2:3으로 무릎을 꿇어 팬들의 비난이 빛발쳤다.2009년 들...
  • 2009-01-15
  • 중국 저명한 조선족 시인이며 길림일보신문업그룹 길림조선문신문사,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총편집인 남영전씨는 줄곧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가작품창작성과로 문단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고있다. 최근년래 남영전씨는 새로운 연구와 창작성과로 갈수록 인기가 폭발하고 있다. 2008년 10월, 그의 론문 "토템문화가 현대...
  • 2009-01-15
  • 산재법 몰라 불이익 당한 재한중국동포 위한 킬러“한국에 입국하는 80%이상의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산업재해법을 몰라 불이익을 당하고 또 회사측은 형사,법률책임을 지지않기 위해 협박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더욱이는 산재로 인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동포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난해 11월달에 서울에...
  • 2009-01-15
  • 중국 길림성 도문시 출신 조선족 강 연 양학비 부족 중국 명문 연변 제1고 자퇴민족사관고 특례입학 학업의지 다져“한국에서 선진 교육을 받고 중국을 이끌어 나가는 조선족이 되고 싶습니다.”동해시와 자매 도시인 중국 길림성 도문시 출신의 조선족으로 민족사관고로 유학온 강 연(18·사진)학생. 강 양...
  • 2009-01-1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