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엄마로된 김춘희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17일 16시32분    조회:842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사업과 가정 두마리 토끼 다 잡아야죠》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안겨주는 아나운서 김춘희가 6월 2일 3.4킬로그람되는 딸을 보아 행복한 엄마로 되였다. 제왕절개수술로 출산후 고통이 몰려올 때마다 아기를 들여다보면 그 아픔이 가신듯 사라진다는 김춘희는 엄마로 된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어오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말해 너무 행복하다. 아직은 이른 욕심일지라도 앞으로 나의 일을 계승했으면 좋겠고 나아가서 더욱 훌륭한 아나운서로 되였으면 좋겠다.》           
 
행복한 가정 소중한 딸

2003년, 26살나던 해 김춘희는 개인사업을 하는 김호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우연히 신랑의 친구로 결혼식에 참석한 김호씨와 면목을 익히여 2년간 사랑을 키워온 김춘희는 《김호씨의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성격이 내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고향이 같은 화룡이지만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게 연분이 아닌가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갓 결혼했을 때에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하고싶은 사업을 하는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여 2세계획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일욕심이 많은 김춘희를 두고 남편 또한 아이에 대한 말을 입밖에 꺼낸적이 없었다. 그러다 재작년에 자연스럽게 임신을 하게 되여 그들 부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런데 2개월만에 검진을 받던중 태아에게 태심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실패의 고배를 맛볼수밖에 없었던 김춘희는 작년 재차 임신되였을 때에는 각별히 몸관리에 신경을 썼다. 건강뿐만아니라 음악, 독서, 산책, 십자수 등 태교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편 김호씨 또한 날마다 아침운동후이면 안해가 즐겨먹는 남새를 사다가 손수 아침상을 보아주면서 극진히 돌봐주었다. 

귀여운 딸애는 행복한 가정에 더 많은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사업때문에 늘 바삐 보내는 김호씨지만은 날마다 짬만 나면 병실에 딸애보러 달려오군 한다. 그래서 김춘희는 《딸애한테만 관심을 보이고 산모에게는 문안도 없어 한쪽으로 밀려난것 같다》며 롱담을 하고나서 《이전에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아기를 바랐는지 이제야 알것 같다. 남편의 깊은 마음이 헤아려진다》고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다.
아기한테 모유를 먹이며 엄마사랑을 다 쏟는 김춘희는 사업과 함께 가정도 중시하는 가정형이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나운서들이 사회생활이 많을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실 아나운서들은 집을 떠난 대부분 시간을 방송실, 스튜디오에서 보낸다》며 《아나운서들도 일반출근족과 마찬가지이다》고 밝혔다. 또  《주부로 되여 살림을 하는것도 신나는 일》이라면서 결혼생활의 즐거움을 내비치였다. 

어릴 때 꿈은 바이올린수

이쁜 얼굴, 화사한 웃음, 맛갈스러운 사회로 연변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안고있는 김춘희의 아나운서경력도 어언 15년이 다가온다. 천진한 고중1학년생 풋내기아나운서로부터 이젠 어엿한 인기아나운서로 훌쩍 성장해온 김춘희아나운서, 그의 동년시절 꿈은 무엇이였을가?

1978년 화룡에서 3남매중 막내둥이로 태여난 김춘희에게는 우로 각각 10년,8년 년상인 오빠와 언니가 있다.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한 응석받이 김춘희는 5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처음에는 유치원의 바이올린으로 시작했는데 소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께서 바이올린을 선물해주셨다. 당시 화룡시TV방송국 기술과에 근무중인 아버지는 한달에 50원의 로임을 받았다. 적은 로임으로 세 자녀를 키우면서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막내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고싶었던 아버지는 차비가 아까와서 자전거를 타고 화룡 투도로부터 연길에 와서 48원을 주고 바이올린을 샀다. 바이올린을 사고나니 2원이 딸랑 남은 아버지는 점심을 거른채 다시 자전거를 타고 화룡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칠대로 지쳤지만 바이올린을 안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딸애를 보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던 아버지이다.
그때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던 김춘희의 꿈은 당연히 최고의 바이올린수가 되는것이였다.

풋내기아나운서가 인기아나운서로

줄곧 하나의 꿈을 향해 달리던 김춘희한테서 아나운서꿈이 싹튼것은 바로 고중입학을 앞둔 여름방학때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초중을 졸업한 딸에게 방학간 아나운서양성학원에 다닐것을 권유했고 서방흥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면서 그녀한테는 새로운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튼 싹에 단비가 내렸다. 그해 12월 화룡TV방송국에서 아나운서공개모집을 하였고 김춘희는 온 가족의 지지하에 시험을 보았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여 아나운서삶을 시작하게 되였다.

김춘희는 《처음에는 꼭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했지만 일을 하면서 무한한 매력을 느꼈다》고 회상하였다.

1994년 12월 고중 1학년 재교생이였던 김춘희는 그토록 흠모해오던 아나운서로 되였다. 학생으로부터 직장인으로 된 그녀는 새로운 환경속에서 힘들기도 하였지만 부푸는 가슴을 안고 하늘같은 열정으로 새로운 희망을 향해 부지런히 노력의 돛대를 저었다. 

《나는 실로 행운아인것 같다. 화룡시TV방송국에 출근한지 4년만에 뜻하지 않게 연변TV방송국의 아나운서로 발탁되는 기회가 왔다.》

김춘희는 자신의 타고난 재질과 피타는 노력의 성과로 의례히 이루어진 사업전근을 겸손하게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1998년에 연변TV방송국으로 전근하여 김춘희는 청소년제작부에서 선후로  《우리네 동산》, 《황금렬차》프로그램의 사회에 이어  《청춘스타트》프로그램사회를 맡았다. 보다 많은 시청자들을 대상하는 넓은 무대로 옮긴만큼 곤난도 많았다. 화룡TV방송국에 있을 때에는 자신한테 신심도 많고 만족도 되였지만 연변TV방송국에 와서야 자신이 청소년부의 기대치에 전혀 도달하지 못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자기절로 보아도 남들한테 한창 뒤진 느낌이여서 눈물을 흘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더구나 처음으로 집을 떠난 그녀는 아무도 의지할데 없다는 생각에 설음이 북받치군 하였다. 그러나 아나운서사업을 천직으로 간주하고 사랑한 김춘희는 난관을 하나하나 이겨나가면서 허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뛰였고 여가시간에는 독서에 몰두하면서 자기를 충실히 하였다. 1999년도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5년이란 본과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차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수 있었고 프로사회현장의 분위기도 조화롭게 조절할수 있었다. 

김춘희는 선후로 북경방송학원, 한국KBS방송국에 가서 연수도 하고 대학본과 과정까지 마치면서 부단히 자신을 가꾸어온 보람으로 《청춘스타트》프로그램사회에 이어 뉴스, 《종합문예》, 《문예광장》, 연변위성방송의 《세상은 요지경》, 《사랑으로 가는 길》  등 여러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으며 당당한 인기스타로 부상하였다.

기억에 남는 방송뒤이야기

그동안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중 청소년 법제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만났던 연길로동교양소의 한 청소년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방송을 계기로 알게 됐지만 오래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덕분에 그가 모범수로 수감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니 무척 보람있는 일이였다.》

또 8년째 진행하고있는 《사랑으로 가는 길》때문에 많이 울기도 했다. 그녀는 〈사랑으로 가는 길〉은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인데 가슴아픈 사연이 많아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고 털어놓고나서 《그러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당당히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서 첫 로임을 〈사랑으로 가는 길〉제작진에 부쳐와 감사함을 전달하고 불우학생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때면 일한 보람이 느껴진다》며 자랑스레 말하였다.

그렇다. 거의 해마다 성 아나운서, 사회자 프로평의에서 1등상을 받은것은 물론 전주10대아나운서 사회자, 전주최우수사회자 등 크고작은 영예를 수없이 받았지만 영예보다는 자신이 진행한 프로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거나 시청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때 더 큰 보람을 느낀다는 김춘희는 《일하면 일할수록 부족점이 더 느껴지기에 보다 발전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과 성실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춘희는 《15년간 프로진행을 해왔기에 시청자들은 내가 해온 프로가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더없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지금 해온것보다 앞으로 해야 할 프로가 참 많다. 뉴스는 물론 토크쇼)같은 프로도 진행하고싶다》며 앞으로의 타산을 밝혔다.

그녀가 앞으로도 매력적인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 편안한 방송을 전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꾸준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집안시 관광산업발전의 일등공신 집안시점일관광제품개발유한회사 리점일리사장집안시에 관광산업발전의 1등공신으로 불리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집안시점일관광제품개발유한회사의 리사장으로 있는 리점일씨다. 1967년 6월 집안의 한 교육자가문에서 태여난 리점일은 부모들의 영향으로 문화예술과 각별한 인연을 ...
  • 2010-05-25
  • 전국로력모범-김룡수일전에 수도 북경에서 거행된 2010년전국로력모범 및 선진사업일군표창대회에 룡정시에서 2명의 농민모범이 참가하여 호금도 등 당과 국가지도일군들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이번에 표창받은 전국로력모범은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 당지부서기 촌주임 김룡수와 선후로 2차나 전국로력모범칭호를 수여...
  • 2010-05-24
  •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선미 기자 = 동북림업대학 림학원의 한휘림(35세, 부연구원, 연변 왕청현 출신)박사는 어릴 때 벌레를 잡는것이 가장 큰 흥취였는데 지금은 연구사업으로 매일 곤충과 '교류'하며 곤충분류 연구에 전력하고 있다.   한국 강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국립수목원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친 ...
  • 2010-05-24
  • 16년 동안 법률보급에 몸 바쳐 온 최룡섭 가야하강반에 자리잡은 왕청현소재지에서 의무법제선전원 최룡섭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16년래 그는 왕청현의 학교, 향진, 가두, 기업,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선후로 800여차의 법률지식강좌를 조직하여 연인수로 10여만명이 법률교육을 받게 했다. 올해 76세 나는 최룡섭은...
  • 2010-05-24
  • "조선족장기 위해 최선 다한다"—연길시 조선족장기협회 홍성빈회장“중국 조선족장기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련다.” 18일, 연길시 조선족장기협회 제2기 회장단 선출대회서 재차 회장으로 선거된 홍성빈회장은 조선족장기라면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분이다.“지난 5년간 연길시 조...
  • 2010-05-20
  • 신의로 불리우는 조선족여의사-심영자씨  (흑룡강신문=하얼빈)목단강시 시민들은 의술로 소문난 ‘목단강시로과학자협회 중서의결합병원’를 두고 ‘화타(?顧)병윈’이라고 친절히 부르고 있다. 많은 의난병 환자들과 사선에서 헤매던 중환자들이 이 병원을 찾아가 두번째 생명을 얻었기때문이다. 목...
  • 2010-05-19
  • 조선족기업인 최룡길이 이끄는 우쑤리스크공업단지 로씨야 신 10컬레 중 1컬레 생산, 공업단지 총판매량 우쑤리스크시서 1위 흑룡강성 동녕통상무역구에서 동쪽으로 약 50킬로미터 가게 되면 로씨야 연해주에서 가장 큰 철도역이 있으며 중국,윁남,일본 등 외국 장사군들이 운집한 우쑤리스크시가 위치해 있다. 거기에...
  • 2010-05-18
  • 흑룡강성 할빈공업대학 토목학원 최창우교수(박사, 47세, 룡정시 출신)는 1986년 절강대학 토목공정학과를 졸업하고 연변과 대련 등지의 건축설계원에서 사업, 2002년 일본 나고야대학 토목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졸업후 약 4년간 일본의 한 건축설계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2006년 11월, 할빈공업대학에 정착했다. 현...
  • 2010-05-18
  • 무대에 서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시원한 고음으로 관중들을 매료시키는 젊은 조선족성악가 안홍화. 7일, 모교 요청으로 길림예술학원 음악홀에서 독창회를 열게 된 그는 성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밑바탕으로 쌓아온 실력을 남김없이 뽐냈다. 4가지 언어는 기본, 꿈을 향한 열정 안홍화는 조선어, 중국어외 영어, 이딸리...
  • 2010-05-16
  • 먹거리 안전 연구서 큰 몫 담당 (흑룡강신문=하얼빈)김련옥 기자 = "우리의 먹을거리 안전한가" 이와 같은 물음표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식품안전 분야에서 묵묵히 연구를 해온 치치할대학 식품과학-생물공정학원 배세춘 교수(44세, 박사,길림 통화출신)는 안전한 먹을거리 확보와 식품안전 신속검측기술 분야에서...
  • 2010-05-1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