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국가1급배우 김해란의 고백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15일 09시20분    조회:646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연기생활은 내 생명의 전부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2008년 음력설야회에서 청춘파인기배우 채용과 더불어 소품 《장모님의 소원》에 출연하여 시청자들의 각광을 받고 《채용의 가시어머니》로 소문놓은 김해란 ?지금까지의 30여년 연기생애에 100여부의 장막연극,단막극, 소품에 출연하면서 성격이 판이한 여러가지 인물형상들을 진실하게 부각한 그는 해당전문가들로부터 《정극분야의 상승연기자》,《정극,희극,비극에 능란한 연기자》라는 평판을 받고있다.
                
 승벽심 많았던 소녀시절

김해란은 무엇이든 남한테 뒤떨어지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성미여서 어려서부터 《악바리》와 《기습쟁이》라는 별명을 달고살았다.

알고보면 4남매중의 맏딸로 태여난 김해란은 이팔청춘에 참군하여 적진을 넘나들며 싸운적있는 부모님들이 결혼 5년만에 힘들게 얻은 귀염둥이였다. 장기간 전쟁터에서 고생하면서 몸을 차게 군탓인지 어머니는 결혼한지 2~3년이 되도록 태기가 없었다.하루라도 빨리 손군을 보고싶었던 외할머니는 그때로부터 익모초를 단으로 베다가 부지런히 환약을 만들어 딸한테 공급했다.이렇게 남비가 굽이 나가도록 익모초를 달이면서 약을 떨구지 않은 보람인지 어머니는 5년만에  해란이를 낳았고 그 아래로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더 보았다.         

해란이의 출생은 김씨가문에 전례없는 활력과 생기를 갖다주었다.자식을 자전거앞에 앉히고 다니는 친구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아버지는 해란이가100일이 차지 않았을 때부터 포대기에 꽁꽁 싸서 자전거앞에 앉히고 거리에 나서기도 했고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더구나 쥐면 부서질가 불면 날아갈가 애지중지 키웠다.

온집안의 보배둥이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란 해란이는 유치원시절부터 춤을 잘 추는데다 다른 사람의 흉내를 신통하게 내여 가는 곳마다 사랑을 독차지했다.승벽심은 또 어찌나 강한지 무엇을 하든 꼭 다른 사람을 초과해야 시름을 놓군 했다.

연길시신흥소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선전대에서 활약한 해란이는 농촌으로 하방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당시의 연길현 의란공사 구룡대대에 이사를 가서도 줄곧 학교선전대의 골간이였는데 중학교에 올라간후에는 대대선전대가 공사나 현의 문예콩클에 참가하게 될 때면 무용창작을 전담하고 제법 언니,오빠들의 무용지도가 되여주었다.랑독을 잘하는 그녀는 또 공사방송소의 의무방송원이 되여 아침과 방虛컥?시간에도 생방송으로 분주히 보냈다.

당시 해란이의 꿈은 무용가로 되는것이였다.그런데 17살때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 응시했더니 키가 더는 자라지 못할것이라는 리유로 퇴박을 맞을줄이야?! 학교에서  맨발의사강습을 받으면서도 꼭 예술쪽으로 발전하고싶었던 그는 다음해에 목표를 바꾸어 연극학부에 응시,무난히 시험에 통과되여 소원을 성취하고야말았다.

《악바리》기질이 갖다준 행운

김해란은 연변예술학교 연극학부에서 정인덕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연극예술을 전공한후 1976년에 연변연극단에 배치받았다.그런데 혁명적본보기극을 보급하던 그 년대에 키가 작은편인 해란이에겐 주요한 배역이 차례지지 않았다.고작해야 대사 몇마디밖에 없는 간단한 배역을 맡거나 《만수천산》에서처럼 대사 한마디 없는 군중배역으로 무대에 등장했으며 결혼후 어린애를 키우는 몇년간은 극단의 의료일군,출납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악바리》기질의 소유자인 김해란은 장장 10년의 무명세월을 지내면서도 연기로 성공해보겠다는 희망만은 포기하지 않았다.아마 자그마한 배역이라도 맡고 닥치는대로 연기실력을 풍부히 하면서 도약의 기회를 노렸다고 하는것이 더 적절할것이다.

그러던 1988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훈춘시 경신향양로원의 박경숙을 모델로 TV극을 제작하면서 연출을 맡은 허동활선생님이 김해란을 주역으로 점찍었다.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자녀성의 처녀시절부터 50여살까지의 인생살이를 재현해야 하는 이 배역은 나름대로 어려움이 많았다.우선 한쪽 다리에 베니야판을 처매고 쩔뚝걸음을 하는것부터가 30대의 문턱을 넘어선지 얼마 안되는 해란에게는 고역이나 다름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가지가지 난관을 용케도 이겨내면서 감동적인 연기를 펼치여 시청자들과 해당전문가들의 긍정을 받았다.

김해란이 연극배우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게 된것은 1990년에 소품 《노랑각시》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당시 연변연극단에서 배우들의 자질을 점검해볼 목적으로 작품 몇개를 내놓았는데 소품 《노랑각시》의 연출을 맡은 리영근선생님이 주역의 한사람으로 김해란을 선택했다.이것은 도약을 꿈꾸는 김해란으로 놓고말하면 희망의 징검다리였다.이 기회에 자기의 숨은 재질을 남김없이 자랑하고싶었던 그는 혼신의 정열을 다 쏟아부으며 련습에 몰두했다.

요구가 남달리 높은 리영근선생님의 마음에 들게끔 연기를 한다는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무대등장자세부터 련속 10여차씩 반복시키면서 닦아세우는데 때로는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그러나 이것이 성공하는데서 꼭 넘어야 할 아리랑고개라고 생각하니 사소한 동작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련습을 견지해나갈수 있었다.

그번에 김해란이 창조한 농촌새각시의 형상은 어찌나 생동한지 극단의 책임자들은 물론 동료들까지도 탄복을 했다.후에 그 작품이 《심각한 검토서》로 제목이 바뀌여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음력설야회에 등장하고 성급콩클에 참가하여 특등상을 타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김해란은 뒤늦게나마 여러가지 연극,소품들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재질을 뽐낼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도약의 실현

1990년대부터가 김해란의 연극인생에서 제일 화려했던 전성기였다. 그 시기 그녀는 《음식타발》,《가짜로임봉투》,《취한 밤의 가라오케》,《털없는 개》,《사랑의 품》,《사랑의 샘》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배우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김해란이 주역을 맡고 인기상승을 안아온 작품으로는 리광수 극본,방미선 연출로 된 장막연극 《사랑의 품》을 손꼽을수 있다.외팔남편과 함께 자그마한 식당을 경영하면서 세식구의 살림을 힘들게 영위해나가는 처지에서도 아빠엄마의 품을 떠난 불쌍한 백설이를 친자식처럼 키워주는 란이의 형상은 연변 각지와 동북3성 나아가 북경무대에서도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공연이 끝나도 돌아갈념을 하지 않고 오래도록 박수갈채를 보내주는 관중들,무대우에까지 올라와 포옹해주며 축하의 인사를 보내주는 관중들을 대하면서 그녀는 연극배우의 자호감을 진정으로 체감하였다.

그때로부터 김해란은 모든 빛과 열을 관중을 위한 사업에 몰무으면서 불철주야 뛰여다녔는데 어느 한해인가는 1년 365일중 228일간 외지에 있으면서 순회공연에 참가하여 특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김해란이 창조한 예술형상으로는 연극 《송순녀》에서의 주인공처럼 대중들의 존경을 받는 긍정인물들로부터 연극 《하얀 눈》에서의 《대포쑤시개》 농촌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인물이 다 있다.이런 인물들은 모두 진실하고 분장 역시 각기 특색이 있어서 겉모양만 보고서는 연기자가 누구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그래서 한번씩 새로운 작품에 출연하고나면 《가두배추(다두배채)》,《말괄량이》 등 별명을 달아주는 관중들이 있는가 하면 돈까지 걸며 내기를 하는 관중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장막연극, 단막극, 소품, TV극, 방송극 등 100여부의 작품에 출연,부동한 년령단계의 판이한 인물형상들을 출중하게 부각해내여 여러 급별의 콩클에서 수차 영예를 따낼수 있은 비결을 김해란은 허동활, 리영근, 방미선 등 선배님들의 가르침과 풍부한 생활실천에 귀결시킨다.선배님들의 엄격한 요구와 옳바른 지도가 있고 몇년간의 농촌생활을 포함해서 장기간의 생활실천에서 보고들은  많은것들이 밑거름이 되여주었기에 연기생활의 전성기를 맞아올수 있었다는것이다.

모든것은 연기를 위해

최근년에 들어와 《시대련애》,《장모님의 소원》 등 소품들에 출연하면서 공연에도 수없이 참가하고 텔레비죤화면에도 자주 등장하는 김해란은 《꿩대신 닭》이라고 무용을 전공하지 못해 할수없이 선택한 연극인생이 이렇게 의의있을줄은 천만뜻밖이라고 속심을 터놓는다.

여러해동안 가지가지 풍파를 다 겪으면서도 버텨낼수 있은것은 무대에서의 성과로 생활의 빈구석들을 메울수 있었기때문이라는 말이 되겠다.김해란은 현실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것들을 생활축적의 세절로 간주하면서 시장에 나가거나 텔레비죤을 시청해도 연기활동에 도움을 줄수 있는 영양분을 발굴하고 연기실천에 광범위하게 응용하기에 최선을 다한다.그 보람으로 연기실천에서 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여러차나 주직속문화계통의 선진사업일군,우수공산당원으로 평의되고 2006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9차당대표대회에 참가하는 영예를 안아오게 된것이 아닐가?!
혈액형이 A형이여서인지 김해란은 정이 많아 후배들을 비롯한 주위사람들을 배려함에 있어서 린색할 때가 거의 없다.누구든 곤난이 있으면 선뜻이 도와주고 자신이 장악하고있는 지식들을 아낌없이 전수해주면서…

몇년간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온 아들 준일이를 외지로 떠나보낸 최근에는 직장에서의 련습과 공연,퇴근후의 제2직업에 묻혀있고보면 한밤중에 집에 들어와도 외롭고 적적한 감이 크지 않다고 한다.하물며 24시간 친구로,선생님으로 되여줄수 있는 텔레비죤프로가 있음에야!

연기하는 한편 연출기량도 련마해내여 선후로 《부부》,《타향의 가을》 등  TV소품에서 연출을 맡은적 있는 김해란은 요즘에 와서 한국 제26회전국연극제에 참가하고저 련습에 분망하다.이번에 인기배우 한석봉과 함께 연극 《도시농민》에서 주역을 맡고 《늘그막사랑》을 펼쳐가는 그녀가 실생활에서도 변모를 가져올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길 도심에 자리잡은 '무궁화소프트웨어 사무실'에 가면 판에 박은 듯이 컴퓨터 앞에 꼼짝 않고 앉아있는 한 중년을 볼 수 있다. 그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괴짜' 최룡철 씨이다. "대학에서 화공이 전공인 난 워낙 lT산업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90년대 모 보험회사에서...
  • 2007-04-09
  •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운전대를 부여잡은채 장춘시내를 씽씽 달리고 있는 조선족로인이 있어 화제다. 그가 바로 지난 음력설전야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 선발한 “2006년 풍채로인상” 획득자(도합 3명)이자 장춘시조선족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창옥씨이다. 현재 길림성공상...
  • 2007-04-07
  • 《어떠한 사업을 하든지 신용이 관건이다. 인품이 바르고 부지런히 해나간다면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좋은 기회도 생기게 될것이며 성공도 자연히 당신켠에 서게 될것이다.》 장춘시 음향업계에서 든든한 자리를 확보하고있는 윤한민총경리의 사업경험담이다. 신용으로 절반 성공 윤한민이 《금영전자》 장춘 대리점 총경...
  • 2007-04-06
  • 《연변천재바둑도장》 주인 한국인 김서방중한 수교 15주년이 되는 오늘 우리는 중국 전역에서 거의 한국인들을 어렵잖게 만나볼수 있으며 기회의 이 땅에서 금노다지를 캐는 한국 사업가들을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일년에 6만원씩 달갑게 적자를 보면서 바둑도장을 꾸려나가는 외국사업가는 아마 《연변천재바둑도장》의 ...
  • 2007-04-06
  • 연변 최고의 가수들의 콘서트---<<림정 김영철콘서트>>가 중국의 "골든홀"---북경음악홀에서 울려퍼지게 된다.4월2일 콘서트 준비차 연변을 방문한 림정은 연변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과  감정을 표달했다. 림정은 우리나라 저명한 소프라노 가수이며 중국 조선족음악연구회 부회장, 길림성 문련...
  • 2007-04-04
  •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오더니꽃가루 날렸느냐 마을에 눈 내리네” 청아한 노래 소리가 얼마 전 미국 뉴욕 플러싱 코리아 빌리지 열린공간에서 울려 퍼졌다. 조선말로 된 노래소리는 이국 타향에서 삶에 부대끼다 오랜만에 운집한 동포들의 마음 한 자락을 습윤하게 적셨다. 조선족 동포 400여명이 공연장을 가득...
  • 2007-04-03
  • “예술촬영이 사치한 노동이라고 간주하면 틀린 생각이다. 한폭의 가치 있는 예술사진을 찍자면 무거운 기재를 짊어지고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정신상, 체력상의 고생을 감당해야 하는 건 물론 심산속에서 홀로 무시무시한 밤을 지새울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근 30년간의 예술촬영 생애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
  • 2007-03-31
  • 불의의 사고로 양팔목을 잃은 조선족 여학생의 홀로서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길림(吉林)성 연길(延吉)시 제2고급중학교에 재학중인 김련화 학생. 그는 뭉툭한 양팔로 붓을 잡고 붓글씨를 쓰는가 하면 전자오르간 연주도 할 정도로 장애를 이겨냈다고 한다.SCK미디어[www.ckywf.com]
  • 2007-03-30
  • 한평생 안중근 의사 연구에 몸 바친 조선족 서명훈(76·사진) 씨. 고령의 나이에 중국 할빈(哈爾濱)에서 23일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조선족의 권리, 복지를 위해 힘쓰는 ‘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이다. 지난해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의 열하루’라는 책을 한국어와 중국어로...
  • 2007-03-28
  • 조문영씨,"향후 조선족 문제도 관심 가질 것"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헤이룽(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에서 중국의 도시빈곤과 실업, 농민문제를 연구하는 한국인이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현재 하얼빈공대 사회학과에 방문학자 자격으로 체류중인 조문영(32.여)씨. 그는 23일 동포신문 흑룡강 신문에 ...
  • 2007-03-2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